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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은 자기를 주인으로 여기고 주 하나님께 교만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근본적인 거짓으로 표현한다(사28:15). 이 경우 거짓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포함한다. 이처럼 거짓에 매여 사는 사람은 거짓으로 말미암아 잘못을 범하고(암2:4) 부어 만든 우상을 섬기며(렘10:14) 거짓 꿈을 꾼다(슥10:2). 이들은 또한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 주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말하며 두 마음을 품고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므로 성경은 그들을 거짓 대언자라 부른다(시12:2; 렘29:9).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연인은 본질상 마귀의 자녀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며 섬긴다(롬1:25). 헛된 것 참조.    
2009-06-06 03:02:55 | 관리자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과 사람들의 딸들의 불법적인 결합에 의하여 거인들이 생겼으며(창6:1-4) 홍수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있었는데(창14:5; 수17:15) 그들은 모압과 암몬 족속의 땅에 정착해서 살았다(신2:10, 11, 20). 바산 왕 옥 역시 거인 종족이었다(신3:11, 13). 사해의 서쪽 헤브론 근처에는 아낙 족속이라는 거인들이 살았으며(민13:33; 수11:21-22) 후대에는 골리앗과 그의 종족들이 여기에서 나왔다(삼상17:4; 대상20:4-8). 아낙 족속, 골리앗, 천사, 하나님의 아들들 참조.    
2009-06-06 03:01:59 | 관리자
  물건을 비치기 위한 금속.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놋, 금, 은 등을 연마해서 거울로 썼으며 이집트 탈출 때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런 거울을 가지고 나왔다. 유리 거울은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개발되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손을 씻던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들었다(출38:8). 이처럼 잘 연마된 금속 표면은 아주 좋은 거울이었으나 표면이 완전하지 않았으므로 조금은 찌그러진 상을 만들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을지 모른다(고전13:12). 욥37:18은 거울을 하늘에 비하고 있지만 금속 거울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이 뚜렷하지 않았다(약1:23).    
2009-06-06 03:01:32 | 관리자
  히브리말에서 반역 혹은 거역은 죄, 불법과 함께 세 가지 주요 사악함 가운데 하나였다(사1:2-4). 특별히 대언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거역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되고 질투하는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신다(겔2:3; 20:8).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의 예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악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2009-06-06 03:01:02 | 관리자
  욥은 사악한 자들의 소망을 연약한 거미줄에 비교하고(욥8:14) 이사야는 죄인들의 일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거미줄이라고 말한다(사59:5-6). 한편 잠30:28에는 왕궁에 거하는 거미가 지혜로운 것으로 나온다.  
2009-06-06 03:00:32 | 관리자
  고대 팔레스타인의 마을이나 도시의 거리들은 평평하지 않고 또 바퀴 달린 도구나 운송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좁았으며 대개 성문 근처의 큰 공공 부지에서 끝이 났다(느8:1). 이 같은 거리들은 대개 지금처럼 이름이 붙여져 있었고(행9:11) 같은 종류의 상점이 같은 곳에 모여 있어서 그 지역의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느3:31-32; 렘37:21). 사람들은 거리의 모퉁이나 튀어나온 곳에 카펫을 깔고 앉기를 좋아하였으며(삼상4:13; 욥29:7) 기도 시간에 거기서 기도하곤 하였다(마6:5).    
2009-06-06 02:59:56 | 관리자
  이 말은 히브리말과 그리스말 모두 ‘분리하다’를 뜻하며 그래서 대개 ‘거룩히 구별하다’로 번역되었고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는 것을 뜻한다(창2:3; 출19:23). 구약성경에서 성별은 주로 의례를 통해 사람이나 물건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것을 뜻하며 이런 차원에서 히브리 사람들은 의식과 속죄를 통하여 주님께 거룩히 구별된 언약 백성이었다(출31:13). 또한 유대인들의 성막과 제단과 제사장 등은 다 주님을 위해 특별히 구별되었다(레8:10-12). 유대인들은 주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임재 앞에 서기 위해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하였고(출19:10-11; 민11:18) 금식과 기도를 위해 한 날을 거룩히 구별하기도 하였으며(욜1:14) 안식일도 주님을 위해 거룩한 날로 구별하였다(신5:12). 모세의 정결례도 이것과 연관이 있지만(민6:11; 레22:16, 32; 히9:13) 영적인 본성의 성화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단지 유대인들에게 영적 성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우슬초로 자기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과 더불어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사 자기 속에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시51:7-10).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증언하면서 사람이 그분 앞에 설 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함을 보여 준다. 신약성경의 교리 면에서 성별은 전에 더러워졌던 것을 완전하게 깨끗하게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의롭게 된 혼을 거룩하게 만드는 은혜의 과정이다. 거룩함, 성화, 분리 참조.    
2009-06-06 02:58:55 | 관리자
  거룩함은 종종 밖으로 나타난 깨끗함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내적인 순수함과 성결함을 나타낸다. 참된 거룩함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마음의 생각과 의도에 특징을 부여한다. 거룩함은 내적인 원리이므로 단순히 정직함이나 자비 등과 같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것을 뜻하지 않고 모든 선한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무한대로 완전한 방법으로 거룩한 존재이시다(사1:4; 6:3). 메시아 역시 거룩한 분이었고(시16:10; 눅4:34; 행3:14) 물론 성령님 역시 거룩한 영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함과 무죄함과 성결함의 근원이시다.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의 타락 때에 이 모든 거룩함을 상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신자들이 자신의 거룩함에 점진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그들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성결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일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생각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 선도 참조(60).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2차적인 의미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천국과 그분의 성전과 그 안의 기구들과 그 안에서 행하는 일과 그분의 날과 그분의 사역자들과 제사장들과 대언자들과 사도들이 거룩하다. 성경은 또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거룩히 구분된 사람들이며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거룩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이 내적인 순수함과 긍휼과 깨끗함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현대 교회는 거룩함을 잃고 있고 그것을 사랑과 혼동하고 있다. ‘거룩하다’는 말은 성경에 611회 나오며 사랑은 488회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사랑보다 거룩함에 대해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근본 속성은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사랑이 아니라 거룩함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 안에서 그분께 거룩하게 경배하여야 한다(출15:11; 대하20:21; 사6:2-3; 계4:8).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시29:2).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실로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켰으며 그 결과 그분의 거룩함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사랑이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었다. 참으로 거룩함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성품을 조절하는 근본 속성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속죄는 사랑에서 왔으나 그 사랑을 요구한 것은 그분의 손상된 거룩함이었다. 모든 사랑은 기준이 있어야 바른 사랑이 될 수 있는데 그 기준이 바로 거룩함이다. 사랑이라는 엔진이 아무데나 굴러가면 무절제의 도구가 되는데 그분의 거룩함이 사랑의 엔진을 조절하여 바른 곳으로 인도하므로 그것은 사랑보다 높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어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이 만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가진 사람도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분과 같이 거룩해야 하며 성경은 분명하게 그것을 요구한다(레20:26; 벧전1:15-16).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하나님, 거룩한 아드님, 거룩한 영, 거룩한 성경을 믿으며 성도 즉 거룩한 무리라 불린다. 현대자유주의자들은 거룩함보다 사랑을 더 중요시 하며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거룩함을 찾기 어렵고 각 사람이 자기 보기에 선한 대로 하나님께 나오려 한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거룩함이라는 궤도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교회 안에 각종 어려움이 발생한다. 사랑으로 해야 한다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교회가 수용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며 그런 식의 거룩하지 못한 경배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신다(잠28:9). 그러므로 기준과 표준을 요구하지 않는 기독교는 바른 기독교가 아니다.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세상의 것을 버리고 야곱과 같이 벧엘로 올라가야 거기에 부흥이 있다(창35:1-5).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과 거룩함이 갈등을 일으킬 때 반드시 거룩함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교회가 살 수 있는 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2009-06-06 02:58:21 | 관리자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한 호칭(왕하19:22; 시71:22; 사1:4; 5:19; 60:9). 특히 대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가리켜 무려 25번이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 부르는데 아마도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 준 환상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사6:3). 따라서 이 말은 이사야서의 중심 사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이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2회 썼다(렘50:29; 51:5).  
2009-06-06 02:57:31 | 관리자
  히9:10에 나오는 구절로 9절에 있는 현재 곧 이때와 대비되는 때를 뜻한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reformation이라는 단어는 중세암흑시대를 벗어나게 해 준 종교개혁(Reformation)과 같은 단어이다.  
2009-06-06 02:56:09 | 관리자
숫염소들인가, 마귀들인가?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레위기 17장 7절을 흠정역 성경과 개역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흠정역: 또 그들이 전에 마귀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갔으나 다시는 그 마귀들에게 희생물을 드리지 말지니 이것은 그들의 대대로 그들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하라.  개역: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흠정역은 마귀들이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은 숫염소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잘 맞을까요?   다음은 히브리어 학자인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의 글입니다.   레위기 17:7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는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 ‘숫염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쎄이림’ = ‘싸이르’의 복수형)은 문자적으로 ‘숫염소’를 뜻한다. ‘음란히 섬긴다’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묘사로서 무수히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숫염소들’을 음란히 섬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레17:7의 ‘싸이르’는 단순히 동물로서의 ‘수염소’가 아니라 우상 내지는 귀신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싸이르’ 숭배를 이집트에서부터 배워온 듯 하다. ‘싸이르’는 일반적으로 황량한 지역에서 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13:21; 34:1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거하는 동안 이미 그들은 ‘싸이르’를 섬기기 시작하였다(수24:14; 겔20:7; 23:3, 8, 19, 21, 27).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된 여로보암 역시 숫염소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대하11:15). 숫염소, 마귀 둘 다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숫염소라고 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마귀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컬트 세상에서 잘 알려진 대로 마귀들의 왕 루시퍼의 상징은 두 뿔이 달린 염소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들 역시 비슷한 상징으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2009-06-04 11:08:10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접 기도 복음이 아니다 ● 정동수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일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책자를 읽고 간단히 설명한 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은 뒤 손을 들고 나오면 목사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람 순수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지요.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무 쉽게 Easy believism에 빠져서 또 압력에 견디지 못해 영접 기도를 하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손을 들든지 안 들든지, 영접 기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이미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드러나는 외적 행동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을 들라고 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선자(혹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회나 집회에서 손든 사람의 수를 세면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한때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고 또 순순한 의도로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폴 워셔 목사의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세상에게 기독교를 받아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앞에 말할 기회가 오직 한번 뿐일 때 제가 하던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벌써 복음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사영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의 사실들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있지도 않는데도 그저 다른 사람들의 결심을 도와주는 것과 그들이 구원받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저 설교들과 신앙고백하는 법 그리고 교회성장등을 가르치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이에게 다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천국가길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그가 그렇다라고 진지하게 대답을 하며 기도하면,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 일컫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법의 전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사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정작 변하지도 않으면서, 그들 자신을 거듭난 기독교인이라 일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젠 그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간단한 결정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탄에게 물어보십시오. 사탄도 그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죄인중에 죄인으로 말이죠. 질문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가 아니라, 복음을 깊이 들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하셔서 그동안 사랑해 왔던 죄악을 이젠 진심으로 싫어하냐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천국가고 싶습니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하나님이 없길 원하죠. "당신은 천국가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복음이 당신에게 전해진 이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주권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을 통해 그동안 싫고 무시해왔던 하나님을 이젠 당신이 간절히 원하며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으로 받아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라는 기도에 대해 그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성경에선 그를 영접하라고 했는데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사영리에 나오는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그를 당신 인생의 악세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속에서 당신의 인생을 더 좋게 만드는 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이 되십니다. 그가 당신의 삶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누가 자신의 마음속에 와달라고 나에게 기도할 것인가?"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회개는 삶의 열매에 의해 증거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구원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결심을 더 의지한 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습니까?" "네" "어떻게 아시죠?" "3년전에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거든요" "정말로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했습니까? 구원의 증거, 회개의 증거, 믿음의 증거는 변화되었고 변화하고 있는 삶입니다. 예전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 이유는 오늘도 그 회개를 지속해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 믿을 수 있냐고요? 왜냐하면 오늘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통해 그는 당신의 인생을 바꾸셨을 뿐만아니라 지속해서 당신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복음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복음은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십시오. 200년 전, 또는 30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서적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스펄전이나 청교도나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된 회심인가? 어떻게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을까? 오늘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셔서, 그러한 복음에 대해 기록된 책들을 찾아보십시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어떻게하면...열가지 순서들"뿐일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모르고, 진정한 회심을 모르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것들을 예배속에서 어떠한 미디어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작된 찬양방식이나 하나님보다도 더 원하는 우리의 좋은 인생을 원하기에 우리가 듣길 원하는 설교만을 전하는 화려한 연설자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잃었기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남자, 여자 그리고 자녀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저 꾸밈없는 순전한 복음말입니다.
2009-06-04 10:32:22 | 관리자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 사망을 접하면서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시대 정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대언자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보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힘들게 한 주를 보냈는데 오늘 우연히 한동대학교 학생의 글을 읽고 여기에 바른 그리스도인과 애국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특히 청년들이) 곳곳에서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목사들이 바른 것을 바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라는 타이틀을 부끄럽게 만든 이 글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韓東大 총학생회 성명서   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校內 분향소 설치를 반대하는가?(한동대 홈페이지에서 퍼옴) 저는 분향소 설치를 분명히 반대합니다!  28일 한동대에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저희 총학생회는 분명히 반대 입장을 표했고 학교에서도 허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이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우선 유감을 표합니다.   저와 총학생회가 분향소 설치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와 많은 학우들은 전직 국가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국가적’ 비극으로 보고, 지난 월요일부터 3일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셋째날인 지난 수요일, 하루 이상 금식한 100여 명의 학우들이 비전광장에 함께 모여 오늘 우리 나라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애통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 뜻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학으로 자타가 말하는 한동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무엇보다 목회자의 아들로서 이 국가적 사태 앞에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매우 큰 논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악담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값진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제 부모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정직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제 신앙 양심으로써 분명히 표명하는 것은, 한동대 내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설치는 옳지 않습니다.   1.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관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대학입니다. 이곳 거룩한 하나님의 대학에서 이 사실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국민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국가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그분의 명예롭지 못한 방식의 죽음에 대해 어떤 미사여구로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2. 이념적 성향의 분향소 설치는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대통령은 아니고, 오직 노무현 대통령만은 분향소를 설치해서 추모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일정한 이념성향 때문일 것입니다. 건국의 위업을 달성한 분도 거부되고, 가난을 극복하도록 한 분도 거부되며, 그밖에 그 어떤 치적을 가진 대통령도 거부되겠지만 오직 그분만은 ‘추모하여 마땅할 만큼 위대하다’는 논리가 이념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에, 꼭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부끄러워하며 회개해야 할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어 우리 주님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아프칸에서의 의롭고 아름다운 순교는 파렴치한 기독교 신자들의 철부지짓처럼 치부되었으며,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 오판하여 끝없는 유화정책으로 김정일을 달래는 것만이 북한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알려졌습니다. 탈북자들은 유리방랑하면서 냉대를 당했고, 북한의 인권문제는 부당하게 금기시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이 현 정권의 강경한 대북 태도의 소산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주장이 아닙니까? 공중파 방송에서 무당과 귀신부름이 드라마로 오락으로 정당화되었고, 성적 타락과 높은 이혼율, 저출산과 가족의 해체, 자살율의 급증과 우울증의 확산.   오늘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이 비극은 어떤 한 자연인의 자살이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였고 대한민국의 상징이었던 분의 비극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나라의 비극입니다. 이때야 말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국가적’ 차원의 죄악을 점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겸허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보내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의 향을 올려야 할 때입니다. 겸손하게 무릎꿇고 청년, 지식인,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 새로운 축복을 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이 글에 연서하는 학우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이 나라의 슬픔을 함께 애도합니다. 주님, 오셔서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옵소서.   한동대학교 14대 총학생회장 박총명    박수근 경영경제학부 김문정 생명과학부 이미선 GEA 정서륜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남윤성 생명과학부 이태훈 GEA 박정은 국제어문학부 노민지 생명과학부 조은주 GEA 이종원 국제어문학부 오현교 생명과학부 하임숙 GEA 최다은 국제어문학부 신명환 생명과학부 윤영훈 GEA 김성아 국제어문학부 정민주 생명과학연구소 김유진 글로벌리더십(GLS) 박현성 국제어문학부 김미선 생활관 간사 김형진 GLS 성선제 국제어문학부 최은경 상담심리학부 한진식 GLS 송영호 기계제어학부 김은총 상담심리학부 황민혜 GLS 허준석 기계제어학부 김아영 전산전자공학부 김세정 GLS 최병철 법학부 주충성 전산전자공학부 이예은 GLS 송수연 산업디자인학부 신민용 글로벌에디슨(GEA) 김정훈 GLS
2009-06-03 22:33:25 | 관리자
  십일조와 그리스도인   ● 김재근(전주 소망침례교회 목사)   말라기 3장 7절부터 12절까지 보겠습니다.   7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심지어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내 규례들을 버리고 떠나 그것들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돌아가리이까? 하였도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   9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으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10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먹어 삼키는 자를 꾸짖으리니 그가 너희 땅의 열매를 멸하지 못하리라. 또 너희 포도나무가 때가 이르기 전에 자기 열매를 밭에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12 너희가 심히 기쁜 땅이 되므로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러분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까? 십일조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십일조와는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까? 십일조 때문에 늘 꺼림직 하게 살았습니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했더니, 물질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십일조뿐만 아니라 돈 문제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전통적 개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라기 3장 본문에 근거한 십일조 설교를 한두 번쯤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심지어는 근본주의 침례교회들조차도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설교하며 ‘압박’할 때면 언제나 말라기 3장을 인용합니다.   본문은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8절].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9절]. 왜?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먹어 삼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을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 십일조를 취해 가신다.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질병에 걸린다든지, 입원을 한다든지, 분실한다든지, 무슨 재난을 당한다든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그동안 배워왔고, 이렇게 알고 있으며, 이렇게 설교를 들어 왔습니다.   또 10절 말씀에 따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물질적인 축복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나를 시험해봐라.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득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안하십니까?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나를 시험해 봐라!!   그러니까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 말씀을 믿는 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다른 면에는 신앙생활은 모두 엉망인데도 십일조만 철저히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 쏟아지는 줄 알고서 그러한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러니까 물질축복 받고자하는 성도들은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먼저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 심지어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의견은 일치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르칩니다. 십일조에 대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여타 죄에 대해서는 오래참고 인내하시지만, 십일조를 안 하는 죄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징계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안했더니 우환(憂患)이 닥쳤다.’ 또 하나님께서 다른 선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지만,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크게 보상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르침에 세뇌된 교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역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더니만, 그렇게 되는구나.’ 라고 쉽게 단정 짓습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안 하더니만! 쯧쯧.’ 하며 철저하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인들은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책망합니다. (어라, 저 집사는 왜 저럴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요. (어, O 집사, 이리 와보라고. 십분의 일을 떼서 반드시 드려야 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한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철저히 십일조를 드린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소유의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하나님, 축복하실 때 좀 감안하세요!’   성경에 따라서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조한다면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돈! 좋잖아요. 교회로 돈 많이 가져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십일조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정확한 진리를 제시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도움은 있을지언정 각 성도들의 영적 삶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성경 앞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믿었고, 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지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날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건 안하는 사람이건 수많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강조하건 강조하지 않건 대부분의 목사들이 차분하게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을 찾아가며 공부할만한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는 그냥 어디서 배우고 들은 대로 가르칩니다.     십일조(tithe)라는 용어와 십일조에 대한 설명 및 그 내용과 원칙은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십일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는 8번만 나옵니다. 32번은 구약에 있습니다(창14:20; 레27:30-32; 민18:24,26,28; 신12:6,11,17;14:22-23,28;26:12; 대하31:5-6,12; 느10:37-38; 12:44; 13:5,12; 암4:4; 말3:8,10).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누가복음 18:12에서 세 번 나오고, 나머지 다섯 번은 전부 히브리서 7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구절도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십일조는 교리적으로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 외의 위대한 사도들이 신약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말할 때, 왜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도들은 헌금의 의무를 설명하면서 아무도 ‘십일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한 번이라도 기록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아무 효력 없는 구약의 율법을 되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진리라고 해서 아무런 구분 없이, 시대의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그대로 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건 이단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라고해서 아무것이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바른 영적 사귐을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 교사가 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성경의 방언은 전부 외국어)을 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언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시대는 지금과 맞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왕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단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국 복음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단입니까? 지금 이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해서 적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신유(神癒)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신은 사도 직분을 계승 받았다고 한다면 우린 그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직분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됐지요? 그 사람들이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창고! ‘스토어하우스’(storehouse)입니다. 창고!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를 쌓아놓는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창고는 구약시대 성전에 딸린 건물이었습니다. 봉헌한 물건들을 성전에 딸린 창고에 쌓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8절을 보기 바랍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취할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우리 하나님의 집의 방들로 가져다가 보고 집에 둘지니.   지금은 돈을 은행에 보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행이라는 단어도 모르셔서 십일조를 창고에 두라고 하셨겠습니까? 성경에는 ‘은행’이란 단어가 분명히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성경대로 하면 십일조는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교회마다 창고를 마련해서 거기에 갖다 넣어야 합니다. 은행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창고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곡식이나 가축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말해 봅시다.   많은 부작용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의 수입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솔직하게 시인하셨습니다. ‘아! 그 사람이 십일조를 내야지 교회가 운영되는데 왜 안 낼까!’     돈 있는 교인이 십일조를 내야지만 교회가 운영될 수 있다는 단순한 계산에서 또 성경에 십일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있고, ‘복을 쏟아 부어 주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십일조를 독려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물론 교회는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운영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충족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는 교회 운영을 걱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목양하라고 사람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그 설교자에게 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라고 일꾼들을 세우시지 교회의 운영을 걱정하라고 세우시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는 반드시 잘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은 주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고 있는 성도들의 성실한 ‘헌금’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마음에는 없는데 억지로 하거나, 율법에 근거해서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지만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강조해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사람은 기뻐할지언정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목회자로서 나에게 맡겨진 사명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교회 운영이요? 이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니까, 교회 운영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좀 걱정해 주십시오. 나는 교회 운영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사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목적이 왜곡되면 신자들이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일과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는 일이 주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가 아니라 “무서움과 두려움! 또 이렇게 안하면 우환(憂患)이 닥칠 것 같은 마음! 더욱이 말라기 3장을 보니까 십일조 떼먹은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정말 무섭다. 또 십일조 해야지 물질축복을 받는다 하니까” 하는 동기에 의해서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 3장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볼 때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았을 때 당장은 이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적 삶에는 별로 유익을 끼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데 정말 기쁨과 자원함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과 이것을 안 드리면 사업이 망할 것 같고 교통사고가 날 것 같고, 병에 걸릴 것 같고, 그러한 마음에서 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엄청납니다.        십일조와 할례의 근거는 동일하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강요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든지, 유대인들의 모든 명절 즉 유월절이나 장막절을 지키라 한다든지, 아니면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든지, 부정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든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는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신약교리로 가르치는 교회나 목사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아, 이건 율법이 아니다! 물론 율법에도 있지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은혜의 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십일조를 배운 거다. 율법 시대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율법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모세의 율법과 상관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율법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만 한다.’   정말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같은 이유로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행했듯이 율법 이후 시대인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세기 17장 24절). 율법 이전에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합니다. 십일조도 드리면서, 율법 이전에 받은 할례도 다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안디옥 교회의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신자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사도행전 15장 10절) 그들은 자신들도 메질 못하고 조상들도 지질 못했던 멍에를 새롭게 복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부담시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행했는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하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안 해도 된다는 그러한 원칙은 누가 정한 것입니까?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도 받고 십일조도 했는데 십일조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해야 되고 할례는 하면 안 되고 그런 원칙은 도대체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습니다. 175년을 사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딱 한 번 있습니다. 175년 동안에 단 한 번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통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십일조 생활을 착실하게 했기 때문에 물질 축복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가지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강조하는 모든 목사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각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걱정하고 주님과의 올바른 사귐에 대해서 걱정하기 때문에 착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강조하는 목사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강조함으로 신자들에게 의무 조항으로 놓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성경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연구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개 그냥 들은 내용, 책에서 읽은 내용,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어떤 100m 선수가 죽을 힘을 다해 가지고 9초 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실격일 수 있습니다. 실격인 경우에는 금메달을 못 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의 트랙으로 왔다 갔다 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법일 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의 십일조 생활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십일조 생활을 했을까요? 십일조에 대한 기록 대부분은 모세의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은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한 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일조가 강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자유의사가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율법 하에서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드시!! 안 하면 큰일 납니다. 레위기 27장 30절 말씀을 보십시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의무사항으로써의 십일조는 성막을 관리하며 레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적으로 정해진 세금과 같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신정(神政)국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헌법(憲法)입니다. 모세의 율법아래에서 십일조는 오늘날 국민의 의무조항인 세금(稅金)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 십일조를 삼키는 자가 되는 것이며 저주를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한 가지 종류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십일조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매년 내는 십일조가 있고, 또 삼년마다 한 번씩 내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먼저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두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민수기 18장 24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럼 그걸 누가 갖습니까? 레위 사람들이 갖습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은 상속받은 땅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로 드린 것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당시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고 일 년에 한 번 수확을 하면 십일조는 어떻게 했을까요? 반드시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게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고 삼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신명기 14장 28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삼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자, 그러면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용도가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위한 십일조가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6장 12절을 보면 ‘the year of tithing’ 즉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정해져 있습니다. 삼년에 한 번씩.   아모스서 4장 4절에도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십일조입니다.     개역성경에서 왜곡된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를 많이 거둬드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아모스서 4장 4절에 삼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읽고는 깜짝 놀랍니다. ‘어, 십일조를 삼 년 뒤에 내라고! 이거 말도 안 돼!’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했을 까요? 성경을 뜯어 고쳤습니다. 개역성경이 뭐라고 뜯어 고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삼일마다 십일조를 내라고 성경을 뜯어고쳤습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결하게 손질을 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현금(現金)으로 드릴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출의 십일조를 드릴 때 그것은 레위 사람,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주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를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드려야할 전체 양은 대략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23%입니다(가축의 십일조, 매년 소출의 십일조,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등). 만약에 당신이 성경에서 정한 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려한다면 수입의 23%를 드려야 됩니다. 무지에 의해서든 불신에 의해서든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잘 해 주시고 물질 축복을 해 주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은 그들이 지금 십일조에 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내 수입의 철저하게 1/10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23%를 내야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입니다. 유대인들은 소산과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십일조 드릴 것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건지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 이 가축들은 십일조다.’ 이렇게 따로 분리해 놨는데 이것들을 팔게 될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 경우 십일조로 정해 놓았던 곡식이나 가축을 돈으로 바꿨더라도 당연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7장 31절을 보면 이런 경우에는 원금에다가 5분의 1을더하여 십일조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하에서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에는 10분의 1 즉 10%가 아니라 12%입니다. 왜냐하면 5분의 1을 더하도록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금으로 십일조를 드릴 때는 12%를 드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제가 오늘 정답을 드리겠습니다. 수입의 12%가 철저한 십일조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신자가 자신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물질 축복 하셨다고 한다면 성경과 어긋난 주장입니다. 철저한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12%입니다. 현금(現金)일 경우에는 12%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의식   십일조를 받는 사람도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 읽어봅시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해야 할 의무 조항으로 여긴다면 동일한 이유에서 할례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나 짐승 희생제 등도 지켜야 합니다. 또 십일조를 받은 뒤에는 의식이 뒤따라옵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거제헌물(Heave offering)이라고 해서 그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께 높이 들어 올려서 바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민수기 18장 24절). 지금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돈 밝히는 목사들이 십일조 봉투를 높이 들고서 공개적으로 이름 부르며 기도하는 의식에도 나름대로의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누구 집사님 십일조 헌물 하셨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레위 사람들이 시행했던 거제 헌물과 똑같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명히 가르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 현재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수입의 12%를 드립니까? 아니면 23%를 드립니까? 당신의 수입에서 정확하게 10%를 정말 드릴 수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의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이자가 붙었습니다. 그 이자의 십일조는 어떻게 하십니까? 친구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십일조는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이익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감히 나는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 응답을 해 주실 것이며 물질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것은 투자(投資)일 뿐입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투자했으니까 나에게 10배로 돌려 주십시오!’ -사실 이것이 순복음 교회의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므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초등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율법에게 종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가고 의무와 규범만을 남깁니다. 여러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정말 자유와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의무와 규범만 남았습니까? 십일조라는 주제가 여러분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이 명절에 대한 것이든, 유월절이든, 장막절이든, 십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든, 짐승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이든,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는 요구이든,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 시켰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많은 성도가 자기 소유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몽땅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봅시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과 영,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소유물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요구할 자격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세금을 강요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이 올바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에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십일조의 법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말라기 3장에 근거한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 신앙의 자유가 없이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십일조, 이런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야호 해방이다. 해방! 십일조 안 해도 되는구나. 속 시원하다.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십일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설교가 의미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하면서도 십일조라는 법에 얽매여서 돈 문제에서 자유로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 조문인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고 우리도 감당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멍에를 다른 성도들에게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자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얽어매는 속박의 멍에를 감히 누가 성도에게 얹어 놓는단 말입니까?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신정국가에 살던 유대인에게 정해진 세금(稅金)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 십일조란 단어가 8번 나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 레위 사람들이 받았던 십일조를 합쳐서 5번,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3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십일조는 전부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드렸던 십일조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2절 -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신약 성도의 드림은 율법에 의해 규정된 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 하면 재앙이나 우환이 닥친다.’ 이런 말은 애들 장난보다도 못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것을 떼먹고,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고도 여러분이 멀쩡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드림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드림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봅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읽읍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율법은 마지못해서라도 하게 하지만, 복음은 자진해서만 하게 합니다.   ‘나는 10분의 1로 정했어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1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저... 나는 20분의 1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3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니까요.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십일조를 안 드리면 우환이 생길 거야, 우리 애가 아플 거야.’ 이런 헌금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고귀한 사역,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돈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십일조를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자유함 속에서 자발적으로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1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2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10분의 2가 될 수도 있고, 5분의 1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믿음에 따라서 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대로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10분의 1을 최소 수준으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10분의 1을 나의 최소 수준으로 정합니다. 그건 내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나처럼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자기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10분의 1을 철저하게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더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덜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고 예는 될 수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조문에서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단 말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얼마를 드릴지는 전적으로 자신과 주님과의 문제입니다. 혹시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기도하세요. ‘주님, 나의 삶이 이렇고, 나의 수입이 이렇고, 나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만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 돈에 대해서조차도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자   바울 서신에서 성도들이 범할 많은 죄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꾸짖고 있지만 십일조 안 한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네가 십일조 떼먹었으니 너는 저주받았다!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도 네가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차원이 다릅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명령으로 가르치며 ‘반드시’라는 조항으로 가르친다면 초대교회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물질을 드림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앙의 자유 안에서 결정될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좋다. 내가 모세의 율법대로 철저하게 난 23%를 드리겠다.’ 이렇게 율법에서 규정한 대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너는 특별대우다, 너는 보너스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모세의 율법조항인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십일조라는 한 항목만 행합니까? 율법을 다 실행해야 합니다. 신자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킴으로 믿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다 인간적 수고를 더해 보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때 할례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듯이 오늘날 십일조가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마 성경을 바꿔서 기록했을 것 같습니다.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십일조를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시리라. 내가 십일조를 행하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어떻습니까? 느낌이 팍 옵니까? 초대교회 때 할례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아브라함의 할례를 예로 들어서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파들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들어서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할례가 무효화 됐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십일조가 무효된 것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또한 구약에서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은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10분의 1만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딱 떼어드리면 나머진 땡입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됩니까? 신약성도의 드림은 각자의 재량권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사귐 가운데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몇 퍼세트를 드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10분의 1만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드림에 동기는 사랑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제적인 법조항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 사역하면서 한 번도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모금을 해서 가난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을 봅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때문에 움직여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운영을 걱정한다는 핑계로 구약성경의 율법조문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당장은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각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사귐 속에서 건전하게 영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에 대해서, 십일조에 대해서는 율법에 끌려 다니고, 무척 부담스럽게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 율법 아래로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끌고 가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성경의 본을 따라 스스로 10분의 1을 정해서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십일조라는 그 조문, 율법조문의 오용(誤用)이 얼마나 잘못된 적용이고, 비 성경적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뭔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뭔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함에 이르렀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여러분에겐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을 봅시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사랑을 우리가 행함으로 모든 율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섬기겠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며 살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 돈에 대해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도 주께서 가르치신 본에 따라 사랑의 동기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 자유를 잃어버리고서 부담스러운 속박에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십일조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2009-06-03 20:14:38 | 관리자
사무엘은 레위 지파 사람인가요?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기상 1장 1절의 말씀을 개역성경이나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성경에 오류가 생기고 마찰이 생깁니다. 개역(개정):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표준새번역: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그 윗대는 도후이고, 그 윗대는 숩이다. 킹제임스 흠정역: 이제 에브라임 산의 라마다임소빔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엘가나더라. 그는 에브랏 사람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사대 손이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므로 반드시 레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역(개정)성경 등은 그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성경에 모순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김경래 교수(전주대학교)의 글입니다. 이분의 분석을 읽으면 킹제임스 성경은 옳고 다른 성경은 틀리다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독자는 사무엘상 1:1에 근거하여 ‘에브라임 지파’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무엘상 1:1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를 ‘에프라티’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 표준새번역은 이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으로 번역함으로써 엘가나와 사무엘 부자(父子)를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규명하고 있다.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에브라임 사람’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번역 역시 표준 새번역과 똑같은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 ‘에프라티’는 구약 성경에 모두 합하여 다섯 번 출현한다. 먼저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지파의 싸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사사기 12:5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의 집안 배경을 기술하고 있는 열왕기상11:26에서 이 낱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열 두 지파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는 의미로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조상 엘리멜렉을 소개하는 사무엘상 17:12과 룻기 1:2에서 이 동일한 히브리어 낱말은 ‘에브랏 사람’, 즉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리는 에브랏 마을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두 구절에서는 모두 보다 큰 지명 내지 지파 이름인 ‘유다’와 그리고 ‘에브랏’의 다른 이름인 ‘베들레헴’과 (창세기 35:16-19; 48:7; 룻기 4:11 참조) 더불어 ‘유다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사무엘상 1:1에서 히브리어 낱말 ‘에프라티’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는 문구와는 달리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낱말은 베들레헴의 별칭인 ‘에브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랏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참고로 사무엘의 아버지가 살았다는 ‘라마다임소빔’은 유일하게 사무엘상 1:1에만 출현한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은 사무엘상 나머지 전체에 걸쳐서 나오는 ‘라마’와 동일 명칭이다 (1:19; 2:11; 7:17; 8:4; 15:34; 16:13; 19:18, 22; 25:1; 28:3). 단순히 산봉우리와 같은 ‘높은 곳’을 가리키는 ‘라마’라는 지명은 이스라엘에 흔한 이름으로서, 구약 성경에 기록한 바에 따라 대략 다섯 곳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베냐민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8:25; 사사기 19:13; 열왕기상 15:17, 21, 22; 역대하 16:1, 5, 6; 에스라 2:26; 느헤미야 7:30; 11:33; 이사야 10:29; 예레미야 31:15; 40:1; 호세아5:8),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 (사사기 4:5), 납달리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36), 아셀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29), 길르앗의 한 성읍 (열왕기하 8:29; 역대하 22:6) 들이다. 사무엘상에 언급된 ‘라마’는 모두 위의 다섯 곳 중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을 가리킨다. 이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가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고 단정내리기 전에 사무엘의 족보를 추적하여 그의 출신 지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무엘상 1:1에서는 엘가나의 조상을 여로함, 엘리후, 도후, 숩 의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하고 있다. 역대상 6장에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또 나타난다. 역대상 1-9장은 이스라엘의 족보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6장은 레위 지파의 족보이다. 레위에게는 게르손과 그핫 (=고핫)과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역대상 6:1). 이 세 아들중 아론과 모세의 조상도 되는 (출애굽기 6:18-20 참조) 그핫의 후손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있다 (역대상 6:28, 33, 34). 역대상 6:34-38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엘, 도아, 숩, 엘가나, 마핫, 아마새, 엘가나, 요엘, 아사랴, 스바냐, 다핫, 앗실, 에비아삽, 고라, 이스할, 그핫, 레위, 이스라엘의 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되고 있다. 한편 6:25-27절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압, 나핫, 소배, 엘가나의 이름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이제 사무엘에서 숩 (또는, ‘소배’)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이 집안 계승자들의 이름을 표를 통하여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이름 표기상 비록 근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같은 집안의 족보임이 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사무엘에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이 있다는 기록에 있어서도 사무엘상 8:1-2과 역대상 6장 (28, 33절)은 서로 일치한다. 참고로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여,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까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한’ 레위 사람들 중의 하나인 헤만은 사무엘의 손자요, 요엘의 아들이었다 (역대상 6:31-34). 이상의 족보 고찰을 통하여 사무엘은 레위 지파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역대상 6:66에 의하면, 레위 지파의 한 가문으로서 사무엘이 속한 ‘그핫 자손의 몇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 중에서 성을 얻어 영지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 21:4-5, 20 참조). 이 사실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가 레위인으로서 왜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았는지 설명해 준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 (표준 새번역 참조) 이라는 뜻이 아니요, 단순히 ‘에브라임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결론을 바탕으로 필자는 사무엘상 1:1에 대하여 “에프라임 산지 라마타임 쪼핌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인데, 그는 에프라임 지역 주민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토후의 증손이요 쭈프의 현손이었다”라는 새로운 번역문을 권하고 싶다. 정직한 히브리어 학자가 권하는 번역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입니다. 정직하게 성경을 대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원문을 보존해 주시고 바르게 번역하도록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09-06-01 17:15: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