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떼 혹은 양과 염소 떼?
● 정동수
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영어 flock이 111회 나옵니다. 성경에 익숙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예수님이 양떼를 언급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flock이 당연히 양 떼를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어 flock은 양, 염소, 집오리, 새 등의 떼를 가리킵니다(네이버 사전). 특히 성경에서는 flock이 양과 염소 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레위기 1장 2절 같은 경우 반드시 양과 염소 떼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If any man of you bring an offering unto the Lord, ye shall bring your offering of the cattle, even of the herd, and of the flock.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 중에 누가 {주}께 헌물을 가져오려거든 너희는 가축에서 곧 소 떼나 양과 염소 떼에서 너희 헌물을 가져올지니라.
이런 곳을 양떼라고 번역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은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가 이 문제에 대해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 המהב )과 ‘새’( ףוע )로 나뉜다. 가축 중에는 ‘소’( רקב )와 ‘양떼’( ןאצ , ‘쬰’)가 가능한데 (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 (1:3, 10). ןאצ (‘쬰’) 중에는 다시 ‘양 ( םיבשׂק )과 염소 ( םיזע )’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위기 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위기 1:2, 10; 3:6; 5:6 등의 ‘쬰’( ןאצ )은1:10; 3:7의 ‘케쎄브’ ( בשׂק )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ןא (쬰)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그 말씀」 1995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신약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 145-151 참조). 한편 השׂ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ןאצ (‘쬰’)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ןאצ 은 השׂ 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어 ‘쬰’ ( ןאצ )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역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쬰’ ( (ןאצ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 ( בשׂק )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애굽기 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השׂ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 (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השׂ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 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 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영어 flock은 히브리말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으나 우리말에서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유의하여 영어 성경을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009-06-01 16:21:35 | 관리자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을까요?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입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딸을 죽게 하면서까지 서원을 지키는 인물이 입다라고 배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사기 11장 37-39절을 봅시다.
개역: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흠정역: 또 그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한 뒤
두 달이 끝날 때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왔으므로 그가 전에 자기가 서원한 그 서원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개역성경은 히브리말에도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다가 처녀 딸을 죽여 번제 헌물로 바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뒤 문맥상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39절 끝에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는 평생 처녀로 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주대학교의 김경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 및 표준 새번역 등의 번역문은 번역과정에서 역자가 나름대로의 특정한 해석을 본문에 가미시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담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이미 「그 말씀」 1995년 7월호 (195-200쪽)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 번역본들의 부당성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사기 11:37-40에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 중에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고대 역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해석은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009-05-30 15:10:44 | 관리자
마태복음 24장의 이 세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 정동수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올리브 산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징조들과 - 즉 전 세계적인 전쟁, 기근, 질병, 지진, 그리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의 싹이 남 등 - 자신이 권능으로 영광스럽게 이 땅에 재림하기 전에 있을 사건들 즉 7년 환난기에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들을 말씀하신 뒤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약속을 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4-35).
여기 이 놀라운 예언 속에는 ‘이 세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특별한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의미하며 바로 ‘이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세대를 이스라엘의 독립과 관련된 한 세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했고 한 세대는 20-40년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앞뒤 문맥상 이 세대는 24장의 무서운 일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2009-05-30 14:51:39 | 관리자
창세기 1-11장의 난해 구절 성경의 미스테리
● 김경래
[김경래 교수는 총신대와 이스라엘 Institute of Holy Land Studies(M.A.)를 졸업하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본학으로 박사학위( Ph.D.)를 받았다. 지금은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글은 1996년 7월호 월간 그 말씀(p.190-196)에 실린 것이다. 창세기를 비유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이 교수님의 글은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특히 다음의 문제를 잘 다루셨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이들은 분명히 이것이 천사라고 믿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UFO는 있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구절: 이것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개역성경만이 범한 오역이며 킹 제임스 성경은 이를 정확하게 "살아 있는 혼"으로 번역했다. 이 구절로 인해 "영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소위 베뢰아의 거짓 교리가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빠져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노아의 대홍수: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아의 대홍수는 전세계를 덮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셈과 야벳의 나이 관계; 많은 이들이 셈을 장자라고 생각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야벳을 장자로 규정짓고 있다. 여러 가지 크리스천 소설 -진짜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이니 가짜임-을 지어 교계에서 유명하게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늘 장자 이론을 써서 글을 전개하지만, 사실 성경은 모두 두 번째 사람들에 의한 새 역사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성경의 처음부터 자세히 보기 바란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사울과 다윗, 첫째 아담과 나중 아담(예수님) 등등. 그래서 우리도 모두 두 번 태어나야만 한다. 부디 크리스천들이 소설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에 무지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소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우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현실임이 매우 안타깝다.
저자의 의도를 다 살리기 위해 성경 구절을 그대로 두었으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 덩어리(창2:6)
창세기 2장 6절에 "땅에서 '에드'가 올라와 온 지표면을 적셨다."는 기록이 있다. 히브리어 '에드'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두 차례 나온다(여기서와 욥기 36:27).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이를 '안개' 라고 번역한 반면에 표준새번역에서는 '물'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욥기 36장 27절의 경우, 개역은 역시 '안개'라고 번역하고 표준새번역은 이 낱말이 속한 문구를 '그것으로 빗방울을 만드시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전 3세기경에 번역된 칠십인역은 창세기 2장 6절의 '에드'를 보통 '샘'을 뜻하는 '페게'로 번역하고, 아람어 탈굼은 이를 '구름'을 뜻하는 '아네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 낱말의 해석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이를 '수증기' 내지는 '안개'로 보는가 하면, 혹자는 '샘' 또는 '우물'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대 근동 유사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지하의 물줄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창세기 2장 6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주소지인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창세기 2징은 그 초점을 인간 창조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전체 풍경을 촬영한 후 다시 줌을 이용하여 촬영자가 원하는 특정한 풍경을 보다 상세히 촬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러한 식의 대구적 묘사가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2장 4절 하반절에서 일반적으로 '히늘과 땅' 대신 순서를 바꾸어 '땅과 하늘'이라고 말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울러 창세기 2장 5-6절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말하는 바를 다른 문구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 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토후 바보후')라는 표현을 달리 또는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장 2절에서 '테홈'과 '물'('마임') 등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커다란 물의 집합체'는 2장 6절에서 우리의 관심사인 '에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 지표면('콜프네 하아다마')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에드'의 범위는 결코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만큼 땅의 일부분만 적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2장 5절에서 이미 비를 내리는 것과 식물의 생장을 연관시켜 언급하였으므로 2장 6절의 '에드'는 식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치 않은 점은, 2장 6절의 '에드'가 둘째 날 하나님이 물을 가르기 전의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물을 가르고 난 이후에 '궁창 아래의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다만 그 안의 동산만을 적실 뿐이었다(창2:10). 그러나 2장 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에드'는 '온 지표면'을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라고 불린 '물체'는 반드시 커다란 규모의 것이어야만 한다. '안개'나 '수증기', 또는 단순한 '샘' 같은 것들로는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창세기 1장 2절의 '태홈'과 관련된 '커다란 물 덩어리' 말고는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물체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개역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 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세기 1장 20∼21절, 24절, 30절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성경은 그 곳에서 '생물'이나(1:20∼21,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세기 2장 19절, 9장 10,12,15∼16절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역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우리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여타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2장7절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창6:1∼4)
창세기 6장1∼4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 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 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형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유일하게 욥기에 또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 6장 1∼4절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욥기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22:30, 막 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0장 34∼36절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 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말고도 에녹서, 요세푸스 등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세기 6장 1∼4절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떄까지 지키게 하신 일'(4절)과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5절)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의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베드로후서 2장 4절("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3장 19∼20절과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필자의 글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 전서 3:13∼22" 참조,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5월호, 12∼22쪽에 실림).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6장 3절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의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히브리어의 '레올람'은 '영원히'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수명을 누려왔었다(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할 때 더욱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의 존재에 대하여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노아 홍수 때 이미 모두 멸망하였겠고, 전자는 신약성경의 기록대로(그리고 이사야 24:21∼22 참조) 심판 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김상복 목사님의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서출판 횃불에서 간행한(1993년 초판) 그의 저술「잃어버린 왕좌」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강해집으로서, 창세기 6장 1∼7절에 대하여는 제16장에서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성경은 창세기 5장 32절을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5장 32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 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났다. 둘째,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 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났다. 셋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났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났다. 히브리어 어법 상 앞의 두 가지보다는 세 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 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세기 10장 21절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둘 다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로도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세기 10장 21절의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악히 예펫 하가돌')이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첫째, '야벳의 큰 형제', 둘째, '큰 야벳의 형제'이다.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마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마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세기 11장 10절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년에는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 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창 7:9∼12),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이년'(슈나타임 악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육백 세와 육백일 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 후 두 해(노아 나이 육백이 세와 육백삼 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육백사 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백 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오백사 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세기 5장 32절("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증거로서 창세기 9장24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9장20∼27절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창 15:16, 19∼21절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세기 9장 24절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개역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27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보았다. 노아의 세아들 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세기 9장 24절의 '작다'('하카탄')나 10장 21절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노아 집안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그렇게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오백 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오백사 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2009-05-30 14:26:51 | 관리자
미갈과 메랍
● 정동수
일반 성경은 삼하21:8에 메랍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는데 흠정역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어 KJB에도 미갈로 되어 있구요. 그런데 삼상18:19을 보면 사울의 큰 딸 메랍은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어졌고 삼하6:23에는 사울의 다른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하21:8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삼하21:8을 개역성경과 흠정역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흠정역: 다만 왕이 아이야의 딸 리스바의 두 아들 곧 그녀가 사울에게 낳은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의 다섯 아들 곧 그녀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을 위하여 키운 아들들을 붙잡아
개역: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KJV: But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whom she bare unto Saul, Armoni and Mephibosheth; and the five sons of Michal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brought up for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NIV: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미갈이 '낳은 아들들'이 아니라 '키운 아들들'이라고 말하며 개역성경과 NIV는 메랍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히브리 마소라 원문은 메랍이라고 할까요? 미갈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이 생전에 보시던 전통 마소라 본문은 분명히 미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역본인 NKJB조차도 미갈이라고 정직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같은 현대 역본들은 미갈은 아들들이 없으므로 히브리 기자가 메갈을 미갈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메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을 근거로 듭니다. 여기에 원어의 함정이 있습니다.
원어는 어느 단어든지 몇 개의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각 단어의 뜻(번역)은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은 대부분 '낳다'(bear, bege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그렇게 번역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 50장 23절을 봅시다.
흠정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을 삼대까지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이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랐더라.
개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여기서도 동일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흠정역이나 개역 모두 '자라다', '양육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같은 히브리말(예를 들어 스트롱 번호 3205)이라도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원문에 있는 대로 미갈을 그대로 두고 미갈이 키운 아들들이라고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NIV 등은 '낳다'는 뜻만 고집하고 그러면 앞뒤가 안 맞으므로 과감히 미갈을 메랍으로 바꾸고 서기관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주석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신학자들도 대부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독자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그 말씀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안에 확실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완전한 성경입니다. 우리말 킹제임스 성경은 그 성경을 우리말로 최대한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2009-05-30 14:08:32 | 관리자
뵈베와 여자 집사
● 정동수
다음은 뵈베와 여자 집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을 알려 주어도 이미 마음에 그렇게 믿기로 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이 성경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사람(그리스도인 포함)의 현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만 성경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나 집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 등에서도 여자 집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매들이 집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집사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신학교나 목사 혹은 집사는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를 가리킵니다.
I commend unto you Phebe our sister, which is a servant of the church which is at Cenchrea:(KJV)
I commend to you our sister Phoebe, a servant of the church in Cenchrea.(NIV)
영어 KJV, NKJB, NIV, NASB 등은 모두 뵈베를 servant 즉 종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IV와 NASB는 그 옆에 각주로 여집사(deaconess)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즉 원래는 종이 맞지만 현대의 여집사 추세를 반영하여 여집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상충되는 듯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때에 우리가 취해야 할 성경 해석 원칙은 명백한 구절을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는 개인이나 교단의 역사성 혹은 이득을 위해 명백한 것들을 흐릿한 것들 뒤로 놓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 여기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기록자는 디모데전서라는 목회 서신에서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동일한 기록자 사도 바울은 분명히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로 인해 타격을 입지만 그래도 교단이나 개인의 생각을 버릴 수 없으므로 이들은 원어 게임장으로 달려 갑니다.
즉 딤전 3장의 집사는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이며 신약성경에 30회 나오고 ‘minister’, ‘serve’, ‘servant’로 번역되었습니다(마20:26; 마23:11; 롬16:1 등).
또 동사 ‘디아코네오’(스트롱 번호 1247)는 신약성경에 37회(마4:11; 마20:28; 행6:2 등)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는 분명히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입니다. 그런데 ‘디아코노스’는 딤전 3장의 집사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minister, servant로만 번역되었습니다.
디아코노스의 용례를 보기 위해 16장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 15장 8절을 보겠습니다.
Now I say that Jesus Christ was a minister of the circumcision for the truth of God, to confirm the promises made unto the fathers:
이제 내가 말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확증하려 하심이요,
여기서 minister 즉 사역자로 번역된 단어는 16장 1절의 servant와 마찬가지로 '디아코노스'입니다.
원어를 주장하는 이들의 뜻대로 하자면 이것도 deacon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할례자들의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번역되면 맞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이 바로 원어 게임의 함정입니다.
그러면 왜 같은 디아코노스를 딤전 3장에서는 집사라고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거기의 집사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종으로서의 집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딤전 3장 12절을 종으로 바꾸어 봅시다.
종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집사 대신 종으로 바꾸면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므로 한 마디로 집사는 교회에서 종의 직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집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집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첨언: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혹은 성경대로 함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교회에는 여자 집사가 없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의 여자 집사들만큼 부지런히 일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들의 문제입니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랑할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이 우습게 여기는 일반 교회 성도들보다 더 사랑하고 더 뜨겁게 모이고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미지근하고 덜 모이고 덜 희생하는 게 근본주의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근본적인 교회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009-05-29 14:14:53 | 관리자
드보라와 여자 목사
● 정동수
다음은 드보라와 여자 목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제가 오늘 읽은 글을 쓴 저자는, 여대언자 드보라를 리더쉽과 연결시켜 말하면서, 교회나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리칠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속 드보라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은 드보라 시대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삿17:6, 21:25 이렇게 평가하신다. 여대언자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다른 재판관( 옷니엘, 기드온 등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대언자가 아니다, 그녀가 행동한 것은 "또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작은 숲들을 섬겼더라" 삿 3:7과 관련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을 받은 여대언자이지만, 하나님께선 그녀를 대언자로 혹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대충 이런대용이였는데요,, 이 저자가 쓴 드보라에 대한 평가가 아무래도 아닌것 같아서요.. 제 생각과 너무 많이 달라서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어떤 한 글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드보라의 시대에 재판관을 대신할 남자가 없없고, 결국 하나님은 여자 드보라를 대언자로 사용하셨다, 이것을 지금시대랑 연결시킬수 있는데, 어느 한 지방에 형제,자매 기독교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목사의 역할을 대신할 형제가 없다면, 능력부족이나, 믿음부족으로,, 그렇다면 성경믿음,지식방면으로 뛰어난 자매를 목사로 세울수 있다.
여대언자 드보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한국 교회에서는 특이하게 여자 목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고 거기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자 목사의 근거로 대는 것이 바로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여대언자 드보라입니다.
대언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대언자(Prophet)의 여성형인 여대언자(Prophetess)는 성경에 8번 나옵니다(출15:20; 삿4:4; 왕하22:14; 대하34:22; 느6:14; 사8:3; 눅2:36; 계2:2).
가장 처음 나온 사람은 미리암입니다. 그리고 드보라, 훌다 등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안나와 거짓 여대언자 이세벨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드보라를 가리켜 여대언자라고 하므로 드보라는 대언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And Deborah, a prophetess, the wife of Lapidoth, she judged Israel at that time(Judg 4:4).
그러나 여자 대언자가 구약성경에 있었다는 것과 여자 목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성경(딤전3장)은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그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목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목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2009-05-29 13:30:29 | 관리자
집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교회에 집사에 대한 동영상과 노트가 있습니다. 그곳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cbck.org/Series17/View/2JL?page=2
2009-05-29 12:28:55 | 관리자
항상 킵바이블에서 유익한 정보를 얻어가는 사람이온데 다름이 아니오라 성경에 관련한 질문이 있어서 올립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5-28 21:33:06 | 변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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