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닷 참조.
2009-05-12 13:41:40 | 관리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갈대아말로서 바빌론 왕 벨사살이 경건치 않은 연회를 베풀 때에 손이 나타나 벽에 기록한 글이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세셔서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므로 그것을 나누신다.”는 뜻이다(단5:1-31). 점성술사들은 이것을 읽고 해석하지 못했으며 결국 다니엘이 소환되어 이 글의 무서운 의미를 왕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벨사살과 그의 무리들처럼 교만하여 경건하지 않게 행하지만 그들의 과거 역사를 기록한 손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의 운명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09-05-12 13:41:02 | 관리자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간의 침묵기
구약성경이 끝난 뒤 곧 바로 신약성경이 시작되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 기간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할 필요를 느낀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로부터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까지의 기간은 400년으로, 보통 이 기간은 '침묵기'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며 세속 역사가들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의 역사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주후 37-100년 사이에 살았던 요세프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이다. 요세프스는 유다인 역사가로 주후 66-67년 사이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며 저항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타이투스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는 로마로 끌려가 베스파시안, 타이투스, 도미티안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유명한 저술로는 마카비 시대부터 주후 73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일곱 권으로 기록된 「유다 전쟁사」(The Jewish War)와 유다인들의 기원으로부터 주후 66년의 전쟁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스무 권으로 기록된 「유다인들의 고대 역사」(Jewish Antiquities)가 있다.
I. 세계의 권력
A. 페르시아 왕국(주전 333년까지 지속됨)
1. 몇몇 외경이 기록됨.
2. 유다인들이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옴.
3.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됨.
4. 신정 정치, 제사장, 율법 체제.
B. 그리스 왕국(주전 333-167년)
1.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이김.
2. 알렉산더가 유다인들에게 자비를 베풂.
3. 유다인들이 흩어져서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임.
4.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왕국은 네 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됨.
5. 네 왕국과 그 통치자들은 다음과 같음.
a. 이집트 - 프톨레미
b. 시리아 - 셀루시드
c. 마케도니아 - 리시마쿠스
d. 소아시아 - 카산데르
*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은 서로를 대적하며 전쟁을 함.
6. 이집트와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땅을 놓고 전쟁을 벌였으며, 유다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 피난처를 찾기 시작함.
7. 소위 「70인역」이라 불리는 구약성경 역본의 전통에 따르면,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 필라데프스가 명령을 내려 70명의 유다인들에게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고 한다.
주의 사항: 사실 이 같은 전통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비의 「70인역」을 사용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현존하는 「70인역」 사본들은 한결같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다.
8. 그 당시 가장 많이 쓰인 언어는 다음과 같다.
a. 그리스어
b. 아람어(히브리 방언)
C. 마카비 시대(주전 167-63년)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주전 175-164년 사이에 시리아의 왕으로 통치함.
2. 그의 정책은 자신의 왕국 전체를 그리스화 시키는 것이었으며, 그의 정책에 반대한 유일한 그룹은 유다인들이었음.
3. 신실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형제인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유다인들을 그리스화 시키는 조건으로 자기를 대제사장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함.
4. 안티오쿠스가 칙령을 내리자 야손이 이를 유다인들에게 가져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a. 그의 왕국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같은 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함.
b. 유다인들의 축제, 안식일, 희생, 할례 등을 지키거나 행하는 것을 금함.
5. 이 같은 칙령의 위협으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 유다인들을 대적함.
6. 등록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중에는 요아립의 계통에서 나온 마타디아라는 이름의 나이 많은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와 및 그의 다섯 아들은 예루살렘 북쪽 산에 있는 자기 선조들의 영토로 들어갔음.
7. 안티오쿠스의 밀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이교도들의 제단에서 희생물을 바치라고 명령함.
a. 마타디아는 희생물을 바치려 한 배도한 제사장들을 즉각적으로 죽임.
b. 또 그는 왕의 사자들을 죽이고 가증한 제단을 무너뜨림.
8. 백성들은 마타디아의 지도를 받으며 대항하기 시작했고 반역의 세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많은 마타디아는 이 일이 있은 뒤 일년이 지나 죽었고, 그의 아들들이 그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함.
9. 그의 아들들은 마카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장남의 이름이 유다 마카비였기 때문이었음.
10. 10,000여 명의 유다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번씩이나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패주시킴; 한번은 50,000명, 또 한 번은 65,000명.
11.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5년에 다시 성전에서의 예배를 시작함.
12. 마카비들은 78년 동안 권력을 행사함.
D. 로마제국(주전63∼?)
1. 폼페이 대제가 주전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함.
2. 주전 40년에 로마인들은 헤롯 대왕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주전 37년에 유대 지방의 유일한 왕이 됨.
a. 헤롯은 에돔 사람임.
주의 사항: 에돔 족속은 페트라에서 내쫓김을 당해 남부 유대 지방에 정착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두매아(에돔)라고 불렀다. 이 에돔 족속은 그 뒤 50년이 지나 히르카누스에 의해 정복을 당해 할례를 강요받았고, 유다인들의 집회의식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다(신 23:7).
b. 창세기 27장 40절의 에언이 헤롯 대왕을 통해 이루어짐.
3. 헤롯 대왕은 주전 4∼5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남.
Ⅱ. 변화된 것과 새로 나온 것
신약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곧바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집단 등을 접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 400년의 '침묵기'에 생긴 것이다.
A. 제사장
1. 복음서에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옴.
2. 대제사장 혹은 수제사장이라는 단어가 84번 나옴.
3. 모세 당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장 직무의 기능은 종교적인 것이었음.
4.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인들의 시민권리는 제사장들의 손으로 넘어감.
B. 레위인
1. 사복음서에서 단 2번만 나옴 - 눅 10:32, 요 1:19.
C. 서기관
1.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2. 준비된 서기관은 모세 오경을 외움.
3. 아주 전통적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
4. 율법사라고도 일컬음을 받음.
D. 다스리는 자(치리자, 관원)
1. 여러 종류의 관리를 지칭함.
2. 용례 :
a. 연회장 - 요2:8,9
b. 산헤드린 공회 회원 - 요3:1
c. 주치리자 - 요12:42
d. 행정관 - 눅12:58
E. 바리새인
1. 이 명칭은 "분리된 자"라는 뜻임.
2. 기록된 율법을 옹호하며 지키는 사람들.
3. 보수적임.
4. 정통이었으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음.
F. 사두개인
1. 유다인들의 귀족으로 정치 집단임.
2. 종교적 측면에서 현대주의/자유주의자들임.
a. 영의 존재를 부인함.
b. 부활을 부인함.
c. 혼의 불멸을 부인함.
주의사항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에 생긴 그룹으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음.
G. 헤롯당원
1. 정치집단
2. 이 이름은 로마정부의 권세를 위임받은 헤롯에게서 유래됨.
3. 정치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함.
H. 갈리리 사람들
1. 이 집단은 북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나 모든 외국 세력에 대항했음.
2. 정치적으로 광적인 사람들임.
I. 사마리아 사람들
1.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다시 사람이 거하게 하도록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사이에 생긴 혼혈민족.
2. 아시리아의 에살하돈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제사장을 보내었으며 그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들은 주 하나님도 두려워 하고 동시에 자기들의 신에게도 경배를 드림.
3. 주전 535년, 두 번째 성전을 지을 때에 이들은 자기들도 이 일을 돕겠다고 했으나 유다인들이 이 같은 제안을 거부함.
4.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인 간에는 늘 적대심이 존재함.
J.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1.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번 나옴 - 요7:35 ; 약1:1 ; 벧전1:1.
2. 이 단어는 밖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포로 시절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서 돌아오지 않고 그 곳에서 남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그 규모가 작음.
K. 개종자
1. 원래는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을 뜻함.
L. 회당
1. 유다인들이 모이는 장소.
2. 이 기관의 유래는 바빌론 포로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감.
3. 성전 밖에서나 성전이 없는 경우에 유다인들은 작은 그룹으로 모였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자기들의 종교적 삶을 온전하게 유지함.
M. 「70인역」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하자.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유다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인의 유다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이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의 추측 연대는 대략 주전 250년 경인데, 이 시기는 주전 397년 구약 성경의 마감 시기와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주전 4-5년 경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간의 침묵기 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번역본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조하라는 압력이 오자 학자들은 급히 주후 200년 경 오리겐의 「육단 성경」(헥사플라, Hexapla)을 그 증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70인역」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이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두 번째 단은 오리겐 자신(결코 72인의 유다 학자의 번역이 아닌)이 그리스어로 구약을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벨과 용', '유디스서', '토비트서'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조차 포함시키고 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제5단에다 직접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려 들 것인데, 이런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인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여지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the Ryland's Papyrus, #458)인데, B.C.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제 「70인역」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2. 모든 유다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명기 17:18; 31:24,25,26과 말라기 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 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그런 금지된 계획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유다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법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언어 계승의 열심에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고자 하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이야기는 모순된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외경을 포함한 구약 성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자체에서 발견된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첫 번째 난제는,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12 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신학자들이 이같이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보고서도 이 거짓된 「70인역」을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슬프지만 아주 단순한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고,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의 공식 번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며, 단 번에 성경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킬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이다.
N. 산헤드린
1. 공회라고도 불림.
2. 공회는 모세가 구성한 70명의 상담자들에게서 유래됨.
3. 구성원은 다음과 같음 ;
a. 수제사장이나 24개 제사장 계열의 수장들.
b. 서기관이나 율법사.
c. 일반사람을 대표하는 장로들.
d. 공회에는 70명이나 72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고, 이들의 임기는 종신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됨.
2009-05-08 17:25:12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를 잘 알아야 하며, 이런 종류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3년간 사역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지역의 여러 지방, 산, 도시, 마을 등과 익숙해지는 것은 이 땅에 미친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과 그분의 사악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지리
Ⅰ. 이름
A. 그 땅 - 룻 1:1
B. 거룩한 땅 - 슥 2:12
C. 주의 땅 - 호 9:3
D. 영광스런 땅 - 단 11:16,41
E. 약속의 땅 - 히 11:9
F. 이스라엘 땅 - 삼상 13:19
G. 가나안 - 창 9:18
H. 팔레스타인 - 욜 3:4(가장 오래된 이름)
Ⅱ. 특징
A. 팔레스타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분의 사역 속에서 자신의 구속의 은혜를 계시하는 장소로 택하신 땅임.
B.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을 문자 그대로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루시며 기뻐하실 것임을 보여 줌.
Ⅲ. 크기(매우 작음)
A. 길이가 224km
B. 북쪽에서는 너비가 37km
C. 남쪽에서는 너비가 128km
D. 면적이 22,500km2
Ⅳ. 비옥함
이 땅은 그곳에 거하는 주민들의 필요를 모두 만족시키는 땅이었으며, 이처럼 비옥한 것은 강과 샘 그리고 적당한 강우 등으로 인함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또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이곳의 오렌지는 그레이프 프룻과 같으며 아주 달아서 그 껍질도 먹는다고 함.
A. 과일 : 올리브, 무화과, 오렌지, 살구, 석류, 포도
B. 나무 : 떡갈나무, 종려나무, 은매화나무, 백향목, 뽕나무, 호도나무
Ⅴ. 격리성
자연적인 장애물이 팔레스타인 땅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런 장애물은 이 땅을 격리시켜 그 주변의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이란 칭호를 부여받기도 했다. 이 땅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A. 동쪽: 사막, 요르단을 통과하는 언덕들, 요르단 계곡의 갈라진 틈
B. 서쪽: 지중해
C. 남쪽: 큰 광야
D. 북쪽: 레바논의 산들
Ⅵ. 중심성
위와 같이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위대한 민족들과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A. 남쪽의 이집트
B. 동쪽의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C. 북쪽의 그리스, 로마
Ⅶ. 지역 구분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이 다음과 같이 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
A. 북쪽의 갈릴리
B. 중앙의 사마리아
C. 남쪽의 유대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마을과 강과 산등에 대해서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이 구약시대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2009-05-08 17:24:16 | 관리자
교육에서 잃어버린 도구들
(Lost Tools of Learning)
저자 : Dorothy L. Sayers
역자 : 정동수
교육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교육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변명하기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사실 현세대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천주교 주교들이 경제학에 대해 논하거나 생물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논하며 무기화학자가 신학에 대해 논하는 등 어떤 주제에 대해 그리 관련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적인 것을 논하도록 임명을 받으며, 평범하고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엡스타인이나 피카소 등이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비판하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특히 온건한 비평과 함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활동들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너무나 전문성을 띄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된다. 따라서 진실한 아마추어가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전문교사는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다 한번씩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참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제 나는 소위 교육 혹은 가르침이라 불리는 주제에 대해 다룰 것을 제안한다. 내가 제안하는 교육개혁사항들이 앞으로 참고가 될지는 참으로 미지수이다. 부모나 교육대학이나 시험기관이나 주지사 회의나 교육부 등에서 잠시라도 이런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내용들이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육받은 사람들의 사회 곧 현대사회의 복잡한 압력 속에서도 자기들의 지적 자유를 보존하려 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진보의 수레바퀴를 400-500년 정도 뒤로 돌려 교육이 그 참된 목표를 잃어가기 시작한 시절 즉 중세암흑시대의 끝부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여러분이 반동주의자, 낭만주의자, 중세주의자 등과 같은 용어를 써 가면서 나를 흉보기 전에 나는 여러분이 내 모든 생각의 뒷면에 남아있는 한두 가지 부차적인 질문들 곧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근심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주십사고 부탁드린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질문들
튜도 왕조 때와 같이 젊은이들이 아주 어릴 때에 대학에 들어가고 그 이후로는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성숙한데도 지적으로는 어린아이나 사춘기 시대에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편안한 감을 느낄 수 하는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자꾸자꾸 뒤로 미루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학적 문제를 수반하며, 비록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어떤 흥미를 유발시킬지 모르지만, 개인이나 사회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들어가는 일을 늦추고 점점 더 교육의 기간을 늘이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된 이유는 중세에 비해 지금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현대의 소년 소녀들은 참으로 여러 과목을 배운다. 하지만 과연 이 사실이 그들이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뜻할까?
서구 유럽사회의 문맹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 시대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광고나 대중매체의 선전 영향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에 대하여 당신은 이상하게 느끼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혹은 신문방송 등이 보다 넓은 지역에 어떤 사실을 좀더 쉽게 선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기계적 사실로 인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현대 교육 방법에 인한 생산물 즉 현대 학생들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증명된 것과 가정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불안하게 의심하고 있는가?
당신은 혹시 어른들 혹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대부분이 질문의 요지도 파악하지 못하며 상대방의 논쟁의 요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함을 보고 초조하게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위원회 모임 등에서 참으로 별 것 아닌 문제들이 수없이 튀어나오며, 위원회 의장으로서 회의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고 또 동시에 우리의 공무의 대부분이 논의와 위원회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마음이 철렁하고 가라앉지는 않는가?
혹은 신문 등에 실린 논설에서 저자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주고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그 글에 대해 답변하면서 그 사람이 정의 내린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로 그 용어를 정의 내려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당신은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문장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가? 만일 그랬다면 당신이 괴로움을 느낀 것이 그 글이 우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글이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인가?
혹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떠나서는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것은 당연한 결과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정말로 그것에 대해 알았는지조차도 모르며 또한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푸는 것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또한 당신은 건전하고 학적이며 적절하게 문서로 입증된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분간 할 줄 모르는 수많은 남녀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도서관의 장서 목록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혹은 참고문헌을 주어도 거기에서 자기들이 찾고있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적당한 구절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또한 당신은 평생토록 어떤 과목을 그 과목 자체로만 인식한 채 다른 과목이나 주제하고는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수학의 대수와 탐정소설간의 관계나 혹은 하수처리와 연어의 가격 등의 관계,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과 경제학과의 관계나 화학과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하여 이 과목들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해 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몇 가지 예
당신은 종종 다 큰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기록한 글로 인하여 불만을 느낀 적이 없는가? 예를 들어 한 유명한 생물학자는 주간지에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사실 그는 이보다 더 강한 어조로 썼지만 불행히도 참고문헌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훨씬 약하게 그의 요점을 적은 것이다.) -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이와 똑같은 변이가 개나 고양이 등을 번식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다는 이 사실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읽고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논지는 이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논지가 증명하는 것은 이중 교배 등을 통한 염색체의 재결합 같은 어떤 물질적 원인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변종에 대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피아노의 열세개의 음반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소리나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서 아무렇게나 건반을 누를 때 내는 소리를 만드는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은 결코 베토벤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으며 증명하지 않지도 않는 것이다. 이 생물학자의 논지에 의해 증명된 것은 결국 그가 물질과 최종적인 원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문장은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임즈 문학 증보」(Times Literary Supplement)의 첫머리 기사보다 더 학적인 데서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에피나스(Alfred Epinas)는 개미나 말벌 같은 특정한 종들이 삶과 죽음의 두려움을 서로 연관 지으며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사실 그 프랑스 사람이 무어라 말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적은 영국 사람의 글을 따르자면, 그 프랑스 사람의 발언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개미에게 있어서 과연 삶이 어떤 두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도 없으며 나와 당신이 창문에서 손으로 꾹 눌러 죽이는 말벌이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지 맞이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 글의 주제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대중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의 동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주요 명제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어떤 예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 논지는 그 논지가 증명하려 한 것을 가정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이것이 좀더 형식을 갖춘 삼단논법으로 제시되었을 경우 즉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지적한 것은 많은 책을 파고드는 해악의 한 종류로서 특히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이나 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타임즈 문학 증보」의 같은 호에서 나온 다음의 예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잘 정리해 준다. 이번에는 리빙스톤경의 「교육을 위한 과제들」(Some Tasks for Education)의 논평에서 취한 것이다.
독자는 한번 이상 최소한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가치가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며 이로써 "지식의 의미"를 알게 되며 그것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정확성과 인내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해도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자기 이웃들 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괴로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지는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특히 마지막 문장 곧 저자가 "괴로운 사실"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설명을 주는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다시 말해 그 "괴로운 사실"은 우리의 교육을 통해 우리가 얻은 지적 기능 혹은 기술이 우리가 그런 기술을 습득한 그 과목 혹은 주제 이외의 다른 과목이나 주제에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가를 전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예술
오늘날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 곧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의 모든 불안한 현상을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는 문제점은, 곧 우리가 학생들에게 어떤 주제나 과목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잘하지만 그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배워도 유독 교육 혹은 학문의 예술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먹구구식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학생에게 "금발의 제니"같은 유명한 곡을 치는 것은 가르치지만 음보를 읽는 것이나 스케일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학생은 "금발의 제니"를 다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떠나서 또 다른 "스와니강"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비유를 들은 것일까? 예술이나 공예 같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학생이나 아이에게 색깔이나 붓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기술자는 결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새로운 소재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자기의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을 배웠고 올바른 목적으로 물건을 취하는 것을 배웠으므로 어떻게 하면 바른 도구를 사용할까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새로운 소재를 놓고 두들겨보며 감을 잡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세시대의 교육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즉 학교들의 교수방법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혹은 나이가 든 학생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하는 것은 당분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습득해야 하는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중세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여 올바른 교육 과정이 어떤 것인가를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중세 교육과정
중세 교육 과정은 트리비움(Trivium)과 콰드라비움(Quadravium)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콰드라비움은 여러 가지 과목으로 이루어졌고 당분간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주제이다. 우리가 흥미 있게 살펴 보려는 것은 트리비움의 구성요소인데 이 트리비움은 콰드라비움에 들어가기 전의 과정으로 콰드라비움을 택하기 위한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여기에는 문법, 변증, 수사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먼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런 과목들 가운데 최소한 두 개는 실제로 과목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문법은 실제로 말을 배우는 것이므로 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물론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말이라는 것은 생각을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트리비움은 한 마디로 학생들이 학문의 도구들을 어떤 과목에 적용하기에 앞서 그런 도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먼저 학생은 말을 배우되 외국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의 구조 혹은 말 그 자체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모으는 방법과 말이 이루어진 방법을 배웠다. 그 다음에 학생은 말을 사용하는 방법과 자기의 용어를 정의 내리는 방법과 정확하게 진술하는 방법과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과 어떤 논지의 허점을 찾아내는 방법 (학생 자신의 논지든 혹은 다른 사람의 논지든)을 배웠다. 변증학은 곧 논리와 반박을 포함했다. 세 번째로 학생은 말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결국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우아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과정이 끝난 뒤에 그는 자기 스승이나 혹은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 논문을 작성하여 교수진의 비평에 대응하여 자기를 방어하는 것을 배워야했다. 이때쯤 되면 그는 글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단에서 큰소리로 지적으로 말하며 질문 공세를 받을 때 곧장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큰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이미 혹독한 논증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강력하며 힘든 질문들을 하곤 했다.
중세 교육 전통의 일부가 아직도 우리 학교 시스템에 남아 있거나 부활되고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문법 지식이 여전히 필요하며 나는 "그것이 반드시 다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우리는 명사, 동사 등의 어형 변화를 가르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그런 단계를 거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하나씩 하나씩 알면 된다고 배웠다. 학교의 토론 단체들이 붐을 이루었고 에세이를 써야만 했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너무 그것만을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대개 주요 과목들과 분리되어 이루어졌으며, 어떤 특별한 과목에 대해서만 그것도 비둘기장의 구멍처럼 조그만 일부분으로 취급되었고 모든 과목들에 영향을 미치는 지적 훈련 과정의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체계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문법은 특히 외국어 과목에만 속하게 되었고 에세이 쓰는 것은 영어 과목에만 한정되었다. 한편 변증은 교과 과정 전체에서 삭제되어 아무런 체계도 없이 정규학교 시간 이외에 과외 활동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학문을 배우는 것과는 거의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 교육과 중세 교육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 교육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각하고 논평하고 결론을 내리는 방법 등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체득하게 하고 있다; 반면에 중세 교육은 먼저 학문의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연마하고 배우는데 강조점을 두었으며 어떤 과목을 사용해서 이를 가르치든지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학생의 제2본성이 되기까지 가르쳤다.
물론 학문에서 어떤 종류의 과목이 있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실제의 말을 배우지 않고서는 문법이론을 배울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논쟁하거나 토론할 수 없다. 중세의 토론 주제는 대개 신학이나 혹은 고대의 윤리와 역사였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이런 주제들이 너무 닳고닳아 - 특히 중세 말에는 더욱 심각했음 - 학자들의 터무니없는 논증이나 논지 등이 밀톤과 같은 사람을 부추겨서 심지어 오늘날에까지도 즐거움을 주는 글을 쓰게 했다. 이런 주제들이 현대 학생들의 에세이 쓰기 주제보다 더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휴가의 여러 날 중 하루를 지겹게 여기게 되었고 그 결과 나머지 날들도 다 지겹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상 교육의 즐거움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토론 주제의 목표와 목적을 이제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늘 위의 천사들
브레인즈 신용회사 즉 두뇌 신용회사의 입심 좋은 한 연사는 중세의 경우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장이 춤을 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사실 그것이 "믿음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토론 시합이었고 그 주제는 천사들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천사들이 사람과 같이 물질적 존재였다면 과연 그들이 어떤 공간을 차지했을까? 내가 믿기로는, 대개 사람들이 옳다고 판단한 대답은 천사들은 순수한 지적 존재로 물질적 요소는 없되 제한적이어서 공간상의 어떤 위치를 가질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이며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이 바늘 끝과 같은 어떤 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면 생각 그 자체가 거기에 있으므로 어떤 점에서 생각은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거기에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바늘구멍과 같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지의 합당한 주제는 공간상에서의 위치와 공간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피나 거리간의 구분인 것이다. 이 논지를 논하는 주제는 천사의 본질이며 (물론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사실 주제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이 논지에서 얻어내려는 실질적인 교훈은 당신이 "거기에"라는 단어를 "거기에 위치해 있냐?" 혹은 "거기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냐?" 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비과학적으로 느슨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세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려는 열정을 보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조소했다. 그러나 책이나 강단에서 애매모호하며 주제를 흐리게 만드는 함축적인 말들을 담은 논쟁거리 표현들이 뻔뻔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속에서 모든 독자나 청취자가 자기의 교육을 통해 철저히 무장되어 그들에게 "분별하라"고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무장해제
이처럼 갑옷이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전혀 무장하지 않는 채 학교 밖으로 나가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읽을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인쇄되어 나온 말들의 손아귀에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맡기고 있다. 영화와 라디오 등의 발명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들의 폭격에서 그들을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실제로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들을 물리치거나 세력을 약하게 하거나 혹은 되받아 치는 것을 알지 못한다. 1940년에 우리는 군사들에게 단지 총만을 주고 무장한 탱크들과 싸우라고 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젊은 남녀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겉핥기 식으로 가르쳐주고 세상에 나가서 대중매체의 공격에 대응하여 싸우라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 지금 모든 교실에서 모든 민족들이 웅변가의 기교에 빠져 최면에 걸렸는데도 우리는 놀랄 만큼 뻔뻔스럽다. 우리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늘 입으로만 말하고 가끔씩 돈을 기부하기도 하며 학교를 떠나는 일을 자꾸 늦추고 크고 더 좋은 학교를 지으려 하여 교사들을 학교의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에도 혹사시키고 있다. 그런데 내가 믿기로는 이런 모든 노력이 대개 다 실패로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육의 도구들을 잃어 버렸고 그 대신에 조금씩 임기웅변 식 누더기질로 교육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물론 중세로 되돌아 갈 수 없다.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우리에게 익숙한 외침이다. 과연 우리가 되돌아 갈 수 없는가? 아니면 돌아갈 수 있는가? 분별하기 바란다. 나는 위의 명제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정의 내리기 원한다. "돌아간다"는 말은 시간상으로 뒤로 간다는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수정한다는 것인가? 우선 첫 번째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두 번째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일 행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세기가 결코 14세기도 아니며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말한 "중세"가 문맥상에서 단지 어떤 교육 이론을 보여주는 구절로 이해된다면 우리가 이미 돌아갔던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며 물론 여기에도 조금 수정할 것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정할 것이 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연극들을 기록한 것 같이 그의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지, 결코 연극 진보 과정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 여겨져서 추앙을 받는 키버와 가릭의 현대판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이 일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해 보자. 또 우리가 교육 권세를 잡은 모든 단체나 인물 등을 싹 쓸어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년 소녀들을 예비하여 조그만 학교로 들이고 실험적으로 그들에게 앞으로 맞게 될 지적 갈등을 이겨 나가게 교육시켜 보자.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유순한 부모들을 허락하고, 트리비움의 목적과 교육방법들을 잘 알고 있는 교사들로 학교를 채우고, 학생들을 적당한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건물과 교사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또한 시험 위원회가 우리가 키우는 학생들을 입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자. 이처럼 예비한 후에 우리는 수정된 현대판 트리비움이라는 교과과정을 시험하고 과연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살펴 보려한다.
먼저 학생들의 연령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이들을 색다른 차원에서 교육시키려 한다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고쳐서 다시 새로이 배울 것이 없는 상태가 좋을 것이다. 또한 좋은 것은 일찍 배울수록 좋은 것이다. 트리비움은 그 성격상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교육을 위한 예비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택하되 오직 그들이 읽고, 쓰고, 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만 요구할 것이다.
세 연령층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내 견해는 정통 견해도 아니며 어떤 면에서 개화된 견해도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내 자신을 살려보건대 (사실 나야말로 내가 가장 잘 아는 아이이며 나야말로 내 속에서부터 정말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나는 아이들의 성장에 세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단계를 좀 거칠긴 하지만 앵무새, 까불이, 시인의 세 단계로 부르고자 하는데 이 시인의 단계는 대개 사춘기가 시작되는 점이라 보면 되겠다.
앵무새 단계는 암기하는 것이 아주 쉬우며 대개 즐거운 단계이다. 반면에 추론하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대개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쉽게 사물의 형태나 모습을 외우고, 자동차 번호판을 암기하며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긴 단어나 리듬 등을 중얼거리고 외치며 여러 가지를 모은다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바로 그 뒤에 오는 까불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논쟁하고, 대꾸하며, 자기보다 윗사람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 하고, 수수께끼를 잘 해석하곤 한다. 또한 남에게 방해를 주는 정도가 매우 심한데 대개 이 단계는 중학교 2학년 즈음에 수그러든다. 시인의 단계는 대개 다루기 어려운 나이로 더 잘려져 있다. 이 때에 학생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나타내려 하고 남에게 오해받았다고 느끼며 불안해하며 독립하려 하고, 행운과 함께 좋은 지도가 뒷받침되면 창조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종합하려 하며 어떤 것을 알고자 노력하며 어떤 한가지를 다른 것보다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트리비움의 구성 그 자체는 이런 세 가지 나이 그룹에 그대로 적용된다: 문법은 앵무새 단계에서, 변증은 까불이 단계에서, 수사학은 시인의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제 먼저 문법부터 시작해 보자. 사실 문법은 특히 어떤 특정 언어의 문법을 의미하는데 이 언어는 굴절언어 이어야 한다. 비굴절 언어의 문법구조는 너무 분석적이어서 변증과정을 거치지 않는 학생이 다루기는 너무 어렵다. 또한 굴절 언어는 비굴절 언어를 해석할 수 있지만 비굴절 언어는 굴절 언어를 해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즉각적으로 교육을 위한 최상의 기초가 라틴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라틴어가 전통적 언어이고 중세 언어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에 대한 초보지식만 있어도 다른 어떤 과목을 배울 때 필요한 노력과 수고를 50%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라틴어는 모든 로만스 언어와 튜톤 언어의 어휘와 구조에 핵심이 되며 동시에 모든 과학 분야의 기술 어휘와 지중해 문명 문학 및 이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핵심이 된다. 살아있는 말을 공부해야 한다는 학자적 관점으로 인하여 학생들에게서 라틴어의 이런 장점들을 빼앗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러시아말을 선택해도 되는데 러시아말은 라틴어보다 더 원시적이다. 물론 러시아말은 다른 슬라브족들의 방언들과 함께 유익하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라틴어를 좋아한다. 이제 여러분 중의 고전파들을 즐겁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일반 학생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신고전주의 시대의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듯한, 아주 교묘하고 인위적인 형태의 웅변이나 구절 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 현명한 일도 아니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려 한다. 물론 이에 대해 고전파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라틴어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다시 말해 굴절 언어가 이 놀라운 세상에서 그리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하는 때 즉 "아모, 아마스, 아맛"하고 흥얼거리는 것이 "이니 미니 마이니 모"하고 흥얼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좋다는 것이다.
이런 나이에 우리는 물론 라틴 문법 이외의 다른 것들도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보고 기억하는 것이 아주 활발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현대 외국어를 배우려면 이 때 곧 얼굴과 생각의 근육이 이상한 억양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라틴어 문법과 함께 프랑스어나 독일어 회화를 함께 연습하는 것도 좋다.
기억력을 이용하라
영어의 구절과 산문은 쉽게 외울 수 있으며 학생의 기억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 즉 고대 신화, 유럽의 전설 등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간다. 나는 고전적인 이야기나 고대 문학 작품을 문법 기교를 연습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속할 필요가 없는 중세 교육의 잘못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어로 즐기고 기억하면 되고 그 후에 그들의 기원 등을 살펴보면 된다. 크게 암송하는 것은 늘 연습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나 함께 코러스로 하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변론과 수사학에 대한 기초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입문은 시간과 사건과 일화와 인물 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학생이 나중에 배울 역사 지식에 사용할 수 있는 연도 등을 쉽게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서 실로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어떤 연대나 연도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국 왕들의 연대기 등이 그 당시 의복과 건축과 기타 다른 일상용품 등과 함께 제시되고 그런 것들을 외움으로써 그 당시 연도만을 대도 그 시대를 그림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지리 역시 여러 사실과 지도와 지형적 특징과 관습, 의복, 식물, 동물 등의 자료와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몇몇 나라의 수도와 강과 산 바다 등을 외우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 또한 우표를 수집하는 것도 권장하고 싶다.
앵무새 단계에서 과학은 저절로 이루어지며 특히 무엇인가를 수집하면서 샘플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고 하는 것을 통해 쉽게 이루어진다. 대개 "자연 역사" 혹은 "자연 철학"이라는 자체가 과학인 것이다. 이 나이 또래에서는 사물의 이름과 특성 등을 아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운 것이며, 마귀의 수레를 끄는 말을 보고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비록 모습은 그래도 그 말이 침을 쏘지는 않음을 확신시켜주며, 카시오피아와 플레이아데스 별자리를 구분하며,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고 박쥐는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등이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주며, 독사와 독사가 아닌 뱀을 구분하고 독버섯과 독이 없는 버섯 등을 구분하는 것 또한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수학 입문은 구구단 표와 함께 시작되는데 사실 구구단을 이때 외우지 않으면 나중에는 즐겁게 외울 수 없다. 또한 이 때에는 기하학적 형태나 숫자를 모으는 것 등도 배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연히 간단한 덧셈에 이르게 하고 학생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면 그 때까지 성취한 모든 재주는 좋은 것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제 곧 보여 줄 이유들 때문에 이보다 더 어려운 수학 과정은 추후에 배우는 것으로 연기되어야 할 것이다.
(라틴어 공부를 빼고는) 지금까지의 교과과정이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마도 그 차이는 교사들의 태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교사들은 이 모든 것을 개별 과목으로 보지 말고 트리비움의 다음 단계를 위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재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외워서 기억에 넣어야 할 모든 것을, 그것들이 지성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바로 이 시기에 외워서 기억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판 교육의 경향은 너무 어릴 때에 아이들의 생각 속에 합리적인 설명을 집어넣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성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기들이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이런 일들이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거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거나 다어휘 소리를 내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과학: 여왕
이것은 신학 입문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이것 역시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 이유는 신학이야말로 과학의 여왕으로 이것이 없이는 전체 교육과정이 최종적인 합성 과정을 잃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학생들의 교육을 합당한 목표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는 덜 중요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교육의 도구들이 강화될 무렵에 다다르게 되면 학생이 스스로 신학을 다루게 되고 아마도 그렇게 하려고 주장하며 그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문제는 이유 있게 다루기 위하여 늘 준비된 상태로 지니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입문/문법을 배우는 나이에 학생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잘 알아야 하며 다시 말해 사람의 창조, 타락, 구속 등의 이야기를 열거한 신구약 성경과 신조, 주기도문, 십계명 등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정말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수준으로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익숙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어떤 나이에 트리비움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할 지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다. 학생이 민첩함을 보이고 계속해서 논쟁을 하고자 할 때 옮기면 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중요한 기능이 관찰과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중요한 기능이 광범위한 판단력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라틴어 문법이 기타 다른 모든 재료의 핵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단계에서는 형식적 논리가 핵심사항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트리비움 교과 과정은 현대 표준과 크게 다르다. 형식적 논리에 대한 나쁜 평판은 전적으로 옳지 않으며 사실 이것을 무시한 결과 현대 지성인에게서 늘 볼 수 있는 현상, 즉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형식적 논리를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증명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공통적인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통적인 전제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설령 공통적인 전제들이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A는 B다"라는 모든 삼단 논법이 다른 형태의 가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라는 것은 정확하게 논쟁하는 기술로 "A는 B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A의 추론적 성격에 의해 무효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 참으로 오늘날 형식적 논리의 실제적 가치는 어떤 긍정적인 결론을 확립하는데 있다기보다는 유효하지 못한 추론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알리는데 있다 할 것이다.
변증과의 관계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재료들을 신속히 점검하고 과연 이것이 변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려보아야 한다. 언어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어휘와 어형론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문장론과 분석론 즉 말할 때의 논리적 구성요소와 언어 발달 즉 우리가 사상을 전하려 할 때 어떻게 우리의 말을 정리하는가에 대한 것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낭독은 에세이와 논리와 비평 등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에서부터 시작되며 학생은 이런 종류의 것들을 쓰기 위해 손을 놀리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지 많은 수업이 변론의 형태를 띄게 될 것이며 개인적으로 혹은 그룹으로 낭송하는 일 대신에 연극을 하되 특별히 논지가 연극의 형태로 되어 있는 연극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수학 - 대수, 기하 및 좀 더 차원 높은 연산학 등이 이제 교과과정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되 개별적인 과목이 아니라 논리의 하부 과정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수학은 이것을 수나 계량등에 적용할 때에 삼단 논법 법칙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어둠에 가려진 신비나 혹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특별한 계시 등이 아닌 것으로 가르쳐야 하며 또한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주제로 가르쳐서는 결코 안 된다.
역사는 신학 입문에서 나온 간단한 윤리체계의 도움을 받아 논의에 필요한 합당한 재료를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 정치가의 행동은 옳은가? 그런 법의 제정이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런 형태의 정부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헌법역사개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 주제는 사실 나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논증하거나 변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신학 그 자체도 행동과 윤리 등에 대해 논할 재료를 제공하므로 간단한 교리 신학(즉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이성적 구조)을 통해 그 내용을 확장시켜야 하며, 교리와 윤리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윤리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 즉 결의론이라 할 수 있는 것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지리학이나 과학 등도 이와 마찬가지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무엇보다도 우리는 학생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레슬리 폴이 지은 「산울타리」라는 책에는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자기들의 도시에 내린 아주 이상한 비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여러 소년이 논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참으로 이상해서 그 도시의 주도로의 반에만 내려 그쪽만 적시고 나머지 반은 적시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이 날 비가 도시 위에 혹은 도시 너머에 혹은 도시 안에 내렸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비가 되려면 도대체 물방울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등등. 이에 대한 논쟁은 그와 비슷한 문제들, 예를 들어 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 자는 것과 걷는 것, 시간을 무한히 작게 나누는 것 등등으로 아이들은 이끌고 갔다. 그 책의 그 부분은 사람의 추리 능력을 순간적으로 개발하는 것과 용어들의 정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는 이성을 향한 당연하고도 합당한 갈증 등에 대한 아주 풍성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건이 사실상 이런 것에 대한 입맛을 충족시키는 재료가 된다.
심판의 결정: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이들은 대개 나면서부터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결의론자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천부적 경향은 계속해서 개발시키고 훈련시켜야 하며 특히 어른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지적인 관계를 갖게 해야한다. 사실 신문에는 이런 것을 위한 재료가 수없이 많다. 근본 이유가 너무 난해하지 않은 법적 결정들, 누구라도 쉽게 그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이름 있는 통신 칼럼 등 아주 많이 들어있는 잘못된 추론과 얼빠진 논쟁 등.
"까불이 나이"의 비판
어디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든지 간에 우리는 훌륭한 예나 혹은 잘 이루어진 논지의 아름다움과 질서 등에 큰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흠모할 만한 것이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판 혹은 비평은 반드시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것을 통해 교사와 학생은 동시에 잘못된 것, 바르지 못한 추론, 애매 모호한 것, 적합하지 않은 것, 중복되는 것 등을 발견할 태세를 갖추고 쥐에게 달려들 듯이 이런 결함들에게 달려들어 이것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확하게 글을 쓰는 것이 유용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에세이를 쓴 뒤에 그것을 25∼50% 줄이는 연습 등을 수행하게 된다.
까불이 나이에 속한 어린아이들에게 어른들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변증을 하라고 권면하게 되면 그 아이들이 너무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귀찮은 아이들이 될 것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 나이의 어린아이들은 그냥 두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논쟁하려 하는 것을 잘 살려 좋은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런 본능을 모래바닥에 던져버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면 집에서는 덜 눈에 거슬릴 것이다. 어쨌든지 아이들은 봐주면 되는 것이지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건전한 원리를 저버린 어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단계에서의 교육 과정 내용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과목들은 재료를 제공하지만 이것은 제분소 기계에서 처리해야 할 제분용 곡식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도서관과 참고서적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한 어떤 자료들이 권위가 있고 어떤 것을 권위가 없는가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상력
이 단계의 끝 부분에 다다르면 학생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며 자기들이 훈련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소화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까불이 나이에 잠복되어 있는 상상력은 그들을 다시 일깨워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의심해 보게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시인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제 수사학을 공부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식 창고의 문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배웠던 것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될 것이고 무미건조하게 분석한 것들을 모아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얻는 통찰력이 모든 발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들은 곧 공리가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사학 공부
수사학 공부에 대한 교과 과정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있어야만 이 일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다시 한번 감상하는 일이 파괴적인 비평을 앞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예리하게 잘 다듬어져서 깨끗하게 자르며 양을 살펴볼 수 있는 도구들과 함께 앞으로 전진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도구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바르게 제대로 익힌 학생이라면 그 도구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각각의 학생이 한 두 과목은 정말로 잘하고 다른 부수 과목을 들음으로써 마음을 넓혀서 모든 지식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여러 과목을 분리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변증에서는 모든 종류의 학문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을 가르쳤지만 이제 수사학에서 모든 지식이 결국 하나임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이것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여왕인 과학인의 역할이다. 학생이 신학을 공부했든지 공부하지 않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최소한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려는 아이들이 반드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반대로 수학이나 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임무를 수행한 라틴어 문법은 현대어를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이 듣지 않아도 된다. 또한 수학을 사용하거나 관심이 아예 없는 학생들도 이 시점에서 그만두게 해도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은 다 뒤로 물러가게 해도 되며, 훈련받은 지성을 예비시켜 학생이 트리비움을 다 마쳤을 때에 스스로 완전히 해결해야 하는 과목들을 전공하게 해야 한다. 트리비움의 최종 과정 즉 논문의 준비와 발표는 어떤 특정한 형태로 회복되어야 하며 아마도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에 치르는 최종 시험으로 대치하면 좋을 것이다.
수사학의 범위는 학생이 16세에 이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대학에 들어갈 것인가에 따라 따르게 된다. 대개 수사학을 14세 정도에 들어야 하므로 우수한 학생들은 9세에서 11세에 문법을 배우고 12세에서 14세까지 변증을 배우고 나머지 2년은 수사학에 전념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수사학은 전문화되고 직업화된 것으로서 학생이 곧장 실질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범주의 학생들은 예비학교에서 변증 수업을 끝내고 공립학교에서 첫 2년 동안 수사학을 택한다. 16세에 그는 대학에서 공부할 과목들을 접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그의 교육은 중세의 콰드리비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16세에 정규교육을 끝내는 학생들은 트리비움만을 택하고 학자가 되려는 학생들은 트리비움과 콰드리비움을 둘 다 택함을 의미한다.
16세에 대학을 보내도 되는가?
그렇다면 트리비움만으로도 평생 동안의 교육이 될 수 있는가?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변증 교육의 끝부분에 이르면 아이들이 어떤 특정한 과목의 상세한 지식에 관한 한 영국에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현대 방식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보다 떨어지게 보일 것이다. 그
2009-05-08 17:22:38 | 관리자
요즘 교회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록 밴드 없는 교회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과연 밴드가 예배에 필요할까요? 말씀이 없으니 이제는 교회에 워십댄스, 록 음악, 각종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옥성호 형제의 찬양에 대한 고민을 다룬 글입니다. 크리스천들이, 특히 자녀들을 둔 크리스천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른 예배가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독자와 독자의 아이들을 위해 이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찬양에 대한 고민(부흥과 개역사 사이트에서 어는 분이 보내 줌) *****
최근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회장이신 김명혁 목사님께서는 한 강연회에서 한국 교회를 좀 먹는 세 가지 병폐를 지적하시면서 그 중의 한 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먼저 김 목사는 “영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라며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는 것은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라고 꼬집었다.http://newspower.co.kr/sub_read.html?uid=11565§ion=sc4§ion2=
저는 며칠 전 갓피플에서 ‘왕의 기도’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손기철 장로님의 온누리 교회 월요 치유 집회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그 집회 내용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각설하고 그 집회에서 제가 두드러지게 느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음악을 통한 교묘한 감정적 흥분 상태의 조장이었습니다. 과거의 각종 부흥회가 보다 시끄러운 음악을 통해 참석자의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치중했다면 손 장로님의 집회는 한 마디로 ‘발라드’를 이용한 무드 조성에 힘을 쓴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그 분이 소위 말하는 “입신 또는 서 있는 사람 괜히 뒤로 넘어뜨리기....영어로는 slain by the spirit”를 할 때 자주 쓰는 구호는 “더, 더, 더, 더, 터어치~~” 입니다. 이 구호 역시 촌스러운 부흥사들이 목소리를 변조해 무식하게 고함지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부드럽고 세련되기만 합니다. 손 장로님의 이런 ‘괜히 넘어뜨리기’에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가 바로 무대에 도열해 백 뮤직을 부르는 젊은 여성분들입니다. 이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스펠 발라드를 쉬지 않고 부릅니다. 이들이 없는 집회 현장...글쎄요, 과연 몇 명이나 괜히 뒤로 넘어질지 모르겠습니다.저는 얼마 전 10여 년 동안 찬양 사역에 헌신했던 한 형제와의 교제를 통해서 ‘디사이플즈’라는 그룹과 그 그룹의 리더인 천관웅 목사님이라는 분이 얼마나 특히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 목사님은 최근 New Sound church라는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천 목사님의 ‘새로운 소리 교회’는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내용으로 채운 홈페이지를 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홈페이지에서 가장 최근 예배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약 2시간 반에 육박하는 주일 예배는 거의 대부분이 음악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의 구성은 적절한 발라드와 락이 혼재된.....한 마디로 잘 조화된 한편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천 목사님의 주장 그대로...Radical Worship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오늘날 청소년들은 음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이제 음악과 이미지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라고 말하고 진리를 ‘알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분명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힘든 가르침대신 보다 쉬운 ‘노래 운동’으로 그 방향을 하루가 다르게 더 급진적으로 전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소요되는 긴 시간을 참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래만 좀 말빨 확실한 사람 한 두 명 무대 위에 세우고 확실하게 불러 제끼면 바로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그 힘든 길을 가겠습니까? 어쩌면 예수님도 제자들 데리고 어려운 비유들 얘기하시는 대신 매일 음악 집회를 했으면 그들이 훨씬 더 빨리 변화되었을지도 모르지요.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지금 이 중고등학생들, 나아가 대학생들을 포기하는 순간....여기서 제가 말하는 ‘포기’란 말씀보다는 음악으로 그들을 감동시키는데 승부를 걸겠다는 모든 시도를 말합니다.....우리 교회의 10년 후는 더 이상 ‘의미’에 의한 메시지가 아닌 ‘멜로디’에 의한 메시지가 지배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고 깨달으라는 성경 말씀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교회들이 기독교인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화’, 교회의 ‘열린 음악회화’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호소하고 싶습니다. 제발 노래 못하고 목소리 별로 좋지 않는 목회자들이라도 함께 힘을 뭉쳐서 이 노래 운동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아니 드럼치고 난리 법석을 떨면 그 현장을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기막힌 코메디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일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주 아주 어릴 때 지금은 사라진 TBC라는 방송국에서 “쑈쑈쑈”라는 프로를 방영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처음 가수와 그 가수 뒤에 서 있는 여러 명의 백 뮤지션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가수가 빛나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받쳐주는지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웬만한 교회만 가면 이런 “쇼쇼쑈”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예배’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예배, 역동적인 예배, 영감이 넘치는 예배’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서 말입니다. 저는 전교인의 ‘노찿사화’와 전교회의 ‘열린 음악회화’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 천 목사님의 New Sound Church으 태동은 하나의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만약에 이 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급속하게 성장한다면???조만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Ultra Sound ChurchMega Sound ChurchNew Sound Community ChurchReal Sound ChurchThe Church of Beat and Sound판소리 장로 교회 등등....그리고 그 중 어떤 교회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할지도 모르지요.“우리는 찬양으로 설교하고 찬양으로 기도합니다. 찬양으로 시작해 찬양으로 끝나는 천상의 예배가 있는 곳, 내 영혼이 천상을 뛰놀도록 예배드리는 곳...당신이 꿈꿔온 바로 그 예배가 있는 곳이 바로 XXX 교회입니다.참고로, 우리 교회는 프랜차이즈로 운영될 형제 자매 교회를 모집합니다. 교회 이름을 XXX 교회로 바꾸고 가맹비와 매월 로얄티를 내시면 전문적으로 훈련된 찬양팀이 투입되어 한 달 안에 교인 수를 30% 이상 증가시켜 드립니다."2008년 5월의 한국 교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09-05-08 17:20:26 | 관리자
음악에 부쳐
글·김희섭_동국대 일산병원 소아과. 서울제일침례교회. E-mail:kimhesp@yahoo.co.kr
최근 어떤 가수가 몸매를 자랑하며 노래를 한다고 하여 선정성 논란이 있었다. 원래 음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것으로 신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지만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음악을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바하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음악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
흔히들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하 이후의 음악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데 필자는 특히 바하가 영을 움직이는 수단으로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어느 음악가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을 한다.
필자는 20년 전쯤에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샀던 적이 있었다. 파블로 카잘스는 자신이 이 곡을 악보점에서 발견한 후 수년간 연습을 하고 발표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연주는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최고의 연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음반을 산 후 며칠간 듣지 않다가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일어나 우연히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이 음악을 듣는 순간 이 우주의 신비함과 역동성에 대한 영혼의 깊은 느낌을 바하는 어쩌면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며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박봉에 오디오도 집에 없을 때) 차를 몰고 저녁 늦게 야외에 나가 별을 보며 이 무반주 조곡을 듣곤 하였다.
바하의 음악은 현대와 같이 악기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시대의 곡임에도 내적인 영혼의 표현력에서는 어느 음악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브란덴부르그 협주곡, 하프시코드 협주곡에서의 인간이 가지는 내면의 힘은 어쩌면 더 이상의 악기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이다. 실제 무반주 첼로조곡과 무반주 바이올린 곡은 한 악기로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악기 종류와 수가 많아지고 기능이 향상이 되었어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의 상태이다(잠4:23). 따라서 영에 호소하는 음악을 작곡한 바하가 아직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베토벤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한 작곡가이다. 난청과 가난 그리고 사회적 냉대를 인간의 의지로 극복한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어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운명 교향곡은 바로 그런 면을 나타내주는 베토벤의 대표적 음악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그런 반면 교향곡 6번은 인간의 내면적 평화를 찾는, 즉 괴로운 이 세상에서 안식과 평안을 구하는 음악이다. 말년의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작곡인 현악 사중주에서 그의 내적 편지를 썼고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추구하기까지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베토벤을 나타내는 결정적 음악은 9번 교향곡 합창의 3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토벤이 생각하는) 천국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다다르고 싶고, 얻고 싶은 그 어떤 곳을 나타내주고 있다. 아마도 베토벤의 말년의 모습을 여기서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4악장에서는 인류애를 표현했는데 그가 사용한 시는 인본주의 시인 쉴레의 시로서 도입부는 앞 악장들에서와 달리 좀 더 기쁨의 노래를 하자고 하면서 합창이 시작된다.
바하가 영에 호소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다면 베토벤은 인간의 혼을 울리는 곡을 만들었다. 바하의 음악은 별을 보면서 들을 수 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그러기에는 영의 깊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두 작곡가 모두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바하에게는 영의 고향, 베토벤에게는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과 평화)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요, 또 우리 모두가 바라보아야 할 본향은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신약의 예수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바라보았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히11:14).
두 위대한 작곡가는 그 본향을 바랬으나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인본주의 시각으로 접근을 하여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바하와 베토벤에게 인간의 원초적 문제를 다루는 수단은 음악이었다. 비단 이들과 같은 음악의 거성들뿐 아니라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나름대로 영적인 감흥을 얻어왔기 때문에 음악이 꾸준히 사랑을 받고 또 음악 자체가 하나의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게도 되는 것이리라.
이후 음악은 그 수준이 더 내려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락을 하고 만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의미를 붙여 낭만주의라고 부르게 된다. 슈만, 쇼팽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 상류사회의 살롱문화에 의해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도 나온다. 이때쯤 되어서는 더 이상 영과 혼에 호소하는 음악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만다.
20세기에 와서는 재즈가 나오고 급기야는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대중가수가 나오며 우리의 육에 직접 호소하는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갖가지 락 음악이 나오게 된다. 현재에는 이것에 더해 자기 몸을 사용한 음악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고 있다. 단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것이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음악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음악을 영에서 혼 그리고 육으로 끌어내려 사람이 더 이상 영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작곡가만 그러한가? 필자는 10여 년 전에 요요마가 연주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 판을 사서 연주를 들어보았다. 듣는 순간 어떻게 이 곡을 감각에만 호소하게 연주할 수 있을까 하며 너무 실망을 한 나머지 언젠가 요요마를 만나면 판을 산 돈을 물어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중에 뉴에이지 음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바로 요요마가 뉴에이지 음악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필자는 실제 그가 그렇게 불리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뉴에이져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비단 요요마뿐 아니라 현재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뉴에이져이기 때문에 필자는 1980년 전의 연주가의 음악을 주로 듣는다.
그러면 연주자만 그러한가? 필자는 약 25년 전에 선배로부터 매우 싼 가격에 구입한 오디오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앰프는 영국제 쿼드이고 스피커는 같은 영국제 탄노이다. 기본적으로 현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음질이다. 앰프가 오래되어 수리를 자주 하게 되는데 수리할 때마다 전문가에게 신형 오디오는 어떠한지 물어보면 신형은 음이 강하고 현대적이나 깊은 맛이 없고 쉽게 피곤해지니 바꾸지 말라는 권유를 받는다.
최근의 오디오는 주로 외적이고 감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음반도 LP에서 CD, 그리고 요즈음은 MP3 등 모두 디지털로 옮아간 지가 오래된다. 그러나 음반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옮아가면서 그 질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 음이 좋은 음반은 1960년대 것이 많다. 필자는 주로 LP를 듣는데 인간적인 따사로운 맛은 역시 아날로그에 있다고 느껴진다. 언젠가는 진공관 앰프를 사용하고 싶으나 시간과 자금이 지금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코앞에 둔 마지막(digital)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탄도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자마저 미혹케 하려고 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보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 혼, 육과 함께 음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한 주신 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도 함께 주셨다.
음악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여야 할까 하는 결정도 우리 각자의 몫이다. 몸을 사용하여 노래하는 가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2009-05-08 17:19:43 | 관리자
경륜(Dispensation)
경륜(경영 체계), 청지기직 등으로 번역된 이 말은 원래 ‘무게를 달아서 나누다’란 뜻을 가지며 옥스퍼드 사전은 ‘나누어 주거나 배포하는 행위, 그리고 행정을 보거나 관리를 하며 물건들을 주거나 운영하는 체제, 신학적으로는 점진적 계시의 한 단계, 특정한 민족이나 기간의 필요에 특별히 부응하는 단계 혹은 어떤 체제가 널리 보급된 시대나 기간’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는 ‘관리하다, 집행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나왔으며 ‘사람이 사는 집의 일을 경영하다’를 뜻한다. 이와 같이 ‘경륜/세대/경영체제/청지기직’이란 단어의 중심 개념은 집안의 일을 관리하거나 집행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여러 형태로 20회에 걸쳐 나타난다. 동사 ‘오이코노메오’는 눅16:2에서 ‘청지기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1회 사용되었고 명사 ‘오이코노모스’는 ‘청지기’란 뜻으로 10회에 걸쳐 사용되었으며(눅12:42; 16:1, 3, 8; 롬16:23; 고전4:1-2; 갈4:2; 딛1:7; 벧전 4:10) 명사 ‘오이코노미아’는 청지기, 직분, 경륜, 위임, 일의 뜻으로 9회 사용되었다(눅16:2-4; 고전9:17; 엡 1:10; 3:2, 9; 골1:25; 딤전1:4).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이 단어는 두 비유에 나와 있다(눅12:42; 16:1, 3, 8). 이 두 비유는 모두 청지기가 집안을 관리하는 내용인데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비유는 청지기직 혹은 세대/경영 체제의 구성 및 배열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준다. (1) 의무를 부과하는 자와 명령을 수행할 책임을 지닌 자가 있다; (2) 청지기에게는 독특한 책임이 있고 또 회계 보고할 책임이 있다; (3) 현재의 경영 체제 하에서 신실하지 못한 요소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세 가지 세대를 언급하고 있다. 엡1:10에서 그는 ‘때가 찬 경륜/세대’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미래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엡3:2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세대/청지기직’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바울이 선포한 내용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골1:25-26에서 그는 신약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된 현재 세대(혹은 경륜)보다 앞선 또 다른 세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점진적 계시를 담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점진적 계시란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번에 주어지지 않고 일련의 연속적 행위와 다양한 배경을 지닌 많은 사람의 마음과 손을 통해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히1:1-2).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시대에 핵심이 되는 사건들이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경영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1) 사람의 타락; (2) 노아 시대의 대홍수; (3) 바벨탑 심판; (4) 아브라함을 부르심; (5) 율법 수여; (6)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7) 성령 강림; (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러한 사건들 사이의 기간을 보통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영어권에서 유대인 세대, 크리스천 세대, 복음 세대 등과 같이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각 세대는 하나님이 독특한 경영 방식과 특권을 허락하신 기간이며 그 길이는 다 다르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규정과 권리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빛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책임이 주어진다. 새로운 세대가 열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전 세대에서보다 더 많은 진리와 빛을 허락하신다.
성경에는 여러 개의 세대가 나오며 각각의 세대 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1) 각 세대의 처음에 사람의 상태; (2) 사람의 책임; (3) 사람의 실패: 각 세대마다 사람은 비참하게 실패하며 이 사실은 사람이 위대한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큰 죄인이라는 점을 거듭 거듭 상기시켜 준다; (4) 하나님의 심판: 각 세대는 사람의 실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난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면서 사람과 놀랍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고 그 길을 열어 놓으셨다. 모든 경륜/세대에 걸쳐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이사야와 바울과 우리가 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받았다(히11, 롬1:16-17; 4:6). 경륜/세대주의는 결코 시대마다 구원받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며 은혜에 행위를 더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아니다(롬11:6).
다만 세대/경영체제를 구분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에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분별할 수 없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자적’이라는 말보다 ‘정상적’ 혹은 ‘평범한’이란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해석 참조. 어쨌든 문자적 해석은 주어진 문장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체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롬11 참조).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세대 구분을 주장하지 않으며 그 결과 신구약성경의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들을 모두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지금 중동에 서 있는 이스라엘과 그로 인한 팔레스타인 분쟁, 문자적인 천년왕국 등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
(2)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중심 주제로 삼는 인간 중심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 주제로 삼는 하나님 중심의 책이다. 성경은 분명히 구원이 중요하고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을 위한 방편이라고 가르친다(엡1:6, 12, 14).
결론적으로 경륜/세대주의는 사람이 만든 신학체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면 그것을 정말로 뜻하셨다고 믿으며 그분께서는 오직 자신이 의도한 것만을 말씀하신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고 충고하였다(딤후2:15). 그러므로 누구라도 정상적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2009-05-08 17:18:46 | 관리자
어제, 오늘 일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서 이번에 살해된 4모녀 사건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습니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나옵니다. 전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저는 이명박씨가 정말로 훌륭한 대통령이라면 이런 일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국민과 함께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경제와 선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근간인 인륜이 무너져내리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의 영적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돈을 좇다 보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박혀 있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나해서 누더기를 입고 빌어 먹는 거지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 나옵니다. 홍수 이후에 사람이 사악하게 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인간 정부를 처음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내가 그것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었노라.3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4 그러나 너희는 고기를 그것의 생명과 함께 곧 그것의 피와 함께 먹지 말지니라.5 내가 반드시 너희 생명의 너희 피를 요구하리니 모든 짐승의 손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이요, 사람의 손에서 곧 각 사람의 형제의 손에서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리라.6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니라.7 너희는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에서 풍성히 내고 그 안에서 번성하라, 하시니라(창세기 9장 1-7절).
이것은 그 이후로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칙이요, 명령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인본주의를 신봉하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는 항상 이런 사악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안에 인간의 모든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 전에 재판관들의 통치를 받을 때도 이런 사악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사기 19, 20장을 보기 바랍니다. 사악한 벨리알의 아들들로 인해 자기 아내가 치욕을 당하고 죽자 그 남편이 자기 아내의 몸을 열두 조각으로 쪼개서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토막 살인이 발생한 것입니다. 토막 살인은 가장 사악한 일 중에 하나이며 여기에는 극도로 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토막 살인이 많이 생기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통회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합니다. 삿19:1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허물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허무하게 죽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슴을 찌르는 자극으로 임하고 그래서 가슴을 치며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일이 생겨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심정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05-08 17:17:39 | 관리자
지난 주에는 유난히 살인 사건이 많았습니다. 4모녀 살인, 두 여자 아이 토막 살인,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신부 살인 등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베트남 신부 이야기를 적고 싶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걸려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후안마이라는 19세 베트남 처녀가 46세의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 한 달 뒤 피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은 도망가서 없고 시체가 썩는 상태에서 발견되어 부검을 한 결과 갈빗대 16개가 부러져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판사는 겨우 12년 옥살이라는 가벼운 형을 내리고는 중형이라고 대대선전했습니다. 저는 살인도 살인이지만 후안마이가 베트남 말로 죽기 전에 기록해 놓은 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당신은 아세요? … 베트남에서는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에요. 따뜻하고 행복한 대화,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만을 희망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적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요.
너무 슬픈 일 아닙니까? 제 아내와 살아온 25년을 돌이켜보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남편이 좀 더 많이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아담이 이르되, 이것은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2-23).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여기에도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 한국람처럼 인종 차별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 사회나 교회나 마찬가지임 - 베트남, 파키스탄 등등의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히 독재 군주가 되는 이 버릇을 고쳐야지요(이 점은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함). 하나님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 사람입니다. 기억합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을. 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2009-05-08 17:16:47 | 관리자
지난 주에는 유난히 살인 사건이 많았습니다. 4모녀 살인, 두 여자 아이 토막 살인,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신부 살인 등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베트남 신부 이야기를 적고 싶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걸려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후안마이라는 19세 베트남 처녀가 46세의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 한 달 뒤 피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은 도망가서 없고 시체가 썩는 상태에서 발견되어 부검을 한 결과 갈빗대 16개가 부러져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판사는 겨우 12년 옥살이라는 가벼운 형을 내리고는 중형이라고 대대선전했습니다. 저는 살인도 살인이지만 후안마이가 베트남 말로 죽기 전에 기록해 놓은 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당신은 아세요? … 베트남에서는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에요. 따뜻하고 행복한 대화,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만을 희망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적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요.
너무 슬픈 일 아닙니까? 제 아내와 살아온 25년을 돌이켜보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남편이 좀 더 많이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아담이 이르되, 이것은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2-23).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여기에도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 한국람처럼 인종 차별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 사회나 교회나 마찬가지임 - 베트남, 파키스탄 등등의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히 독재 군주가 되는 이 버릇을 고쳐야지요(이 점은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함). 하나님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 사람입니다. 기억합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을. 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2009-05-08 17:16:07 | 관리자
불신자들은 종종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리하심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은혜로운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을 비난하면서 그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사람에게 이런 정죄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자유 의지가 없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사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분명히 우리 모두가 그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심판하시면 누구나 다 아담처럼 불순종하는 자로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지 않고 그들을 모두 로봇으로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누가 과연 아무 생각 없이 로봇처럼 살기를 원합니까?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그분께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의 상태를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공의(혹은 거룩함)가 훼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든 우리든 사탄이든 하나님의 훼손된 공의가 회복되지 않는 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남이 공평한 분이라면 이렇게 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 하나님은 묘한 방법을 써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전 인류를 정죄하심으로써 또 다른 한 사람(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을 통해 전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종적으로 모두 아담에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의 행위는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히7:9-10참조). 이와 달리 타락한 천사들은 아담과 같은 대표자가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개인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와 여러분은 아담이라는 공통 조상 안에서 죄를 지었으므로 새로운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우주 공간 안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거룩한 분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holy)고 하는 것은 그분이 그분의 창조물 혹은 창조 세계와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그분은 ‘클래스’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의 훼손된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의 훼손된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의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그분께서는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 각각에게 자신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수백 억 번 이 땅에 와서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리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혜롭게 또 은혜롭게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과 범죄 속에서 모든 사람이 육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은 것으로 간주하심으로써(영어로는 이것을 imputation이라고 함) 자신의 아들을 단 한 번 보내사 사람의 죄 문제를 단번에 영원토록 해결하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셔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벗어나 그분의 임재가 있는데서 그분과 같이 교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벧후1:4). 할레루야!
그러면 우리가 인종적으로 아담에게 연합되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롬5:12-14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점은 이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었습니다. 자, 이런 일반적인 현상에는 일반적인 이유가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아담의 불순종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뒤 곧바로 영적으로 죽었고 결국 육신적으로도 죽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아직 율법이 없는데도 모두 죽었습니다(창세기 5장). 그러면 여기서 드러나는 명백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담의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롬5:12)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육신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없는 갓난아기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롬9:11).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그들이 모두 인종적으로 한 사람 아담에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합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이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째 사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둘째 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영원히 그분의 임재 밖으로 쫓겨나서 불 호수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사망은 아담 때문에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불순종의 죄 즉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 계획을 거절함으로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의 상태를 잘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2009-05-08 17:15:36 | 관리자
지난 주 제주도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소화관운동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2박 3일간의 빡빡한 일정 속에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시쳇말로 '머리에 쥐가 나는 낮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둘째 날 저녁에는 주최측이 특별히 마련한 '난타' 공연을 잠시 본 후 동료 선후배 의사들 여러 명이 함께 중문단지를 산책하며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상쾌한 바닷바람, 만개한 벚꽃, 별로 수놓은 밤하늘, 그리고 많은 의료분야 가운데에서도 오랫동안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정다운 동료들로 인해 산책시간은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주제로 삼삼오오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제주도의 밤길을 즐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제는 전날 밤에 있었던 엘리베이터 사건과 관련된 귀신 이야기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전날 밤 학회장소인 롯데호텔의 엘리베이터를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깜박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이상하게 작동되는 바람에 아주 혼쭐이 났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한 후배가 풀이하길 서울의 롯데월드를 짓는 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제주 롯데호텔도 규모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니 분명 또 여러 사람이 공사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터인데 바로 그 혼령들이 귀신이 되어 엘리베이터에 이상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온갖 귀신 이야기가 등장하는 가운데 결국 진짜로 귀신이 있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증거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비그리스도인에 의해 인용되는 해프닝이 발생하게 되었다.
'성경이 귀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성경에 분명히 귀신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도 온갖 귀신들을 친히 내쫓지 않으셨던가. 그러니 귀신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 너무도 타당한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도 이처럼 귀신의 존재를 확실히 믿고 가르쳐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말 귀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먼저 귀신이란 무엇인지 그 정의부터 확실히 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낱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가 다르다면 결국 다른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전에서는 귀신(鬼神)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997년 1월 발행된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에는 '죽은 사람의 넋'이라 나와 있고, 어문각에서 발행한 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에도 '사람이 죽은 뒤의 넋'이라 씌어 있다. 또 '넋'은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목숨이 붙어 있게 하여 몸이 죽어도 영원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즉 귀신이란 죽은 사람의 혼(魂, soul)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인가? 사람이 죽으면 몸(body)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soul)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남아 배회하며 우리들의 삶을 간섭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렇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soul)은 바로 천국(Heaven; 낙원, 셋째 하늘) 아니면 지옥(hell)으로 가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서도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거지 나사로는 죽은 뒤 낙원에 갔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그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김 받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지만 어찌 되었든 죽은 사람의 혼(soul)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 얘기가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또 어찌된 영문인가? 이것은 우리가 흔히 접하여 읽어오고 있는 한글 개역 성경이 지니고 있는 한계이다.
최근에 번역 출간된 한글 흠정역 성경에는 귀신이란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귀신 대신에 마귀(devil)로 다 번역이 되어 있다. 성경에 나오는 마귀(a devil; devils; the Devil)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교도관으로서 청송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에서 수많은 사형수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던 박효진 장로님의 개인 간증을 발췌 요약하여 들어보자.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후에도 제사문제는 내 마음 속에 항상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제사 지내기가 그토록 싫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아련한 향수처럼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모든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난 후에도 이 갈등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기도에 깊이 몰입하려는 순간마다 마귀가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제사문제를 내 앞에 내밀었으며, 나는 그때마다 정리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수없이 주춤거려야 했다. 왜 우리 기독교는 제사문제를 그토록 극단적으로 평가하는가? 한국 전통문화로서 조상에 대한 경애와 뿌리 찾기의 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한 번 시작된 불신과 회의는 좀처럼 꺼질 줄 모르고 내 가슴 깊은 곳에 고집스러운 성(城)을 쌓아가고 있었다. 기쁨의 노래가 점점 사라지고, 목사님의 피를 토하는 설교마저 마음에 와닿는 강도가 줄어들고 있던 어느 날, 나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믿음의 동역자 한 사람과 밤늦도록 기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옹기도마 앞을 지나쳐 오는 순간에 썩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역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가봅시다." 사냥개처럼 냄새를 따라 들어가는 우리 눈앞에 이윽고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빨랫줄을 풀어 마당에 늘어놓고 젯상 중앙에는 돌아가신 내외분의 사진을 놓고 젯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서는 기상천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젯상 위는 물론이고 아래에도, 천장에도 빌로드처럼 진한 흑색의 영체(靈體)들이 온통 북적대고 있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엄청난 마귀떼들이 온 집을 누비고 있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종횡으로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사람들의 몸속에까지 들락거렸다.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놀란 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섬뜩한 마귀들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북적대고 있을 뿐 정작 제사를 받는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셨다.
'지금 네가 보는 것이 바로 사탄의 실체이며 귀신의 실상이다. 인간의 혼은 육신을 떠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 날까지는 임의로 이 세상을 들락거릴 수 없다. 영계(靈界)에 들어간 인간의 영혼이 제삿날이라고 외출하여 제사상 앞에 찾아온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일 뿐!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윗대 조상님들도 죽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낙원과 지옥으로 구분되어 들어간다. 제삿날에 후손들이 벌여놓은 이 제사상에는 조상의 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네 눈에 보이는 저 더러운 마귀들이 대신 몰려들어 무지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외에는 그 어느 제사라도 마귀들의 놀이터요, 인간을 더럽히는 사탄의 유희임을 알라!'
짧은 시간에 내 마음이 정리되고 있었다. 성령님의 놀라운 가르치심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전율했다.>
"이방인들이 희생으로 드리는 것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흠정역)
귀신(鬼神)은 없다. 즉 사람이 죽은 뒤의 넋이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은 없다.
그러나 마귀(魔鬼)는 실제로 존재한다.
마귀(the Devil)는 속이는 자요, 용이요, 옛 뱀이요, 사탄(Satan)이다(계20:1-3). 사탄의 원래 이름은 루시퍼(Lucifer)로서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던 그룹(cherub)이었는데 교만으로 타락하여 인간을 속이는 자 곧 마귀(魔鬼)가 되어버렸다(사14:4-23; 겔28:11-19). 이 마귀(the Devil)의 꼬임에 아담이 넘어가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또 하늘의 천사들도 마귀(the Devil)에 의해 삼분의 일이 타락하여 또 다른 속이는 자인 마귀들(devils)이 된 것이다(계12:3,4).
그리하여 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은 영존하는 불(everlasting fire) 곧 불못(the lake of fire)에 들어갈 것인데(마25:41; 계20:10) 한 영혼이라도 자기들과 같이 영원토록 불못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사람들을 속이며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다(고후11:14; 계20:8).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효도사상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 '죽은 사람의 혼'인 귀신(鬼神)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단교리를 유포시키면서 마귀(魔鬼)는 우리의 혼(soul)을 도둑질하려 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a, 흠정역)
2009-05-08 17:14:42 | 관리자
1. 프롤로그
구랍 11일 개최된 제24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올드보이’는 감독상(박찬욱), 남우주연상(최민식), 여우조연상(강혜정)의 3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최다 수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세계적인 인터넷 영화사이트 ‘에인트잇쿨(aint-it-cool-news.com)’이 뽑은 ‘올해의 10대 영화’로도 선정이 되었다.
‘에인트잇쿨’의 운영자이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는 해리 놀스(Harry Knowles)는 “‘올드보이’가 당신이 앉아 있는 곳을 뒤흔들며 마음속에 깊이 남을 것”이라고 평하고 최민식에 대해서도 “올해 모든 영화의 연기 중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아울러 “굉장한 연기자와 솜씨 좋은 감독, 매력적인 촬영과 놀랄만한 각본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관객을 끌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이 ‘올드보이’는 현재까지 일본, 영국, 프랑스 등과는 총 250만 불의 수출계약을 맺기도 하였으며 또한 좀처럼 같은 목소리를 내기 힘든 수많은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동명 일본 만화의 설정을 따왔지만) 원작의 명성에 기대지 않는 창조적인 각색과 풍부한 영상적 표현으로써 우리나라 영화의 수준을 확실하게 업그레이드시켜준 놀랄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미 이 영화를 감상한 수백만의 영혼들뿐 아니라 앞으로 접하게 될 세계인들에게도 분명 놀라운 충격을 주게 될 그 창조성(?) 즉 어느 영화보다도 스포일러(spoiler: 영화 내용에 대한 과도한 정보 노출) 방지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던 반전의 내용이 담고 있는 코드에 대해 성경적 조명을 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올드보이의 시대’를 함께 진단해 보도록 하자.
2. 시놉시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기에도 힘든 인물 ‘오대수’(최민식 분)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경찰서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은 친구 ‘주한’(지대한 분)이 그를 데리러 온 날 새벽 어느 공중전화 부스 근처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정체 모를 괴한에게 납치되어 얼마나 또 왜 갇혀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 8평의 감금방에서 군만두로 연명하던 대수는 감금된 지 1년이 지나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아내가 살해되었고 자기가 가장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자서전’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납치한 그 누군가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몸을 단련하기도 하며 또 침대 밑의 벽을 숟가락으로 계속 파서 외부세계와 통하는 벽돌 한 장 크기의 구멍을 만들어 탈출을 목전에 두기까지 하였지만 갑자기 또 다시 영문을 모른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15년 만에 풀려난 오대수는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일식 조리사 미도(강혜정 분)와 함께 감금의 사연을 더듬어가기 시작한다. 유일한 단서였던 군만두에서 나온 나무젓가락 포장조각에 쓰여 있었던 중국집 이름을 근거로 동명의 중국집들을 전전하며 자신을 감금했던 사람과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결국 오대수는 우여곡절 끝에 자기를 납치하였던 주범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우진(유지태 분)이라는 청년 실업가였다. 그는 대수에게 가둔 이유를 알아내면 자신이 기꺼이 죽어주겠다며 게임을 제안한다. 대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5일. 대수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그 이유를 찾아가는데 마침내 자신이 다녔던 고향 고등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왜 자신이 15년 간 갇혀 지내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3. 우진과 수아
전학을 앞두고 학교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오대수. 그는 같은 학년의 여학생 수아(윤진서 분)를 보게 된다. 호기심에 그녀가 앉은 벤치 옆으로 다가간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녀. 스스럼없이 오대수의 땀에 젖은 머리를 살짝 만져주기도 한다. 내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학생으로 착각한 오대수. 그녀가 부탁한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여학생은 갑자기 자리를 떠나고 황망한 오대수는 그녀의 뒤를 몰래 쫓아간다. 그리고 청순해 보였던 그 여학생이 아직 짧은 머리의 남학생 곧 자기 남동생인 우진과 과학실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된다.
그렇다. 남매간의 근친상간은 오대수의 눈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로부터 확실한 금기의 대상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올드보이의 박감독은 동성동본간의 사랑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이러한 설정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진과 수아의 경우에서처럼 친남매간의 에로스와 가인이 자기 누이 중에서 아내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는 뭐가 다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창4:17).
물론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 첫 세대인 아담과 이브의 자녀들은 남매임에도 서로 결혼을 해야만 했다(창1:28). 그러나 나중 세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남매간의 결혼이란 ‘근친상간’을 철저히 금지하셨다(레18:9,29).
“너는 네 누이 곧 집에서 태어났든지 다른 곳에서 태어났든지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의 벌거벗음 곧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레18:9, 이하 흠정역)
“이는 누구든지 이런 가증한 일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는 자 곧 그것들을 행하는 혼들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임이라.”(레18:29)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 법조문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이 같은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기형아가 되거나 병약하거나 저능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확률에 대한 유전학적 근거는 이처럼 해로운 특성을 유발하는 변이 유전자를 양쪽 부모가 다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물려받은 자식들한테서 실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담과 이브의 유전 체계에는 변이된 유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인처럼 아담의 다른 아들들이 자기 누이와 결혼했다 해서 유전적인 이상이 생겨날 수는 없었다. 사실 근친간의 결혼이 유전적으로 해롭게 되어 인류의 피 속에 유전적 변이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여러 세대가 지난 후였다. 특히 노아의 홍수이후에는 궁창 위에 있던 물층(water canopy)의 소실로 말미암아 균일한 온도와 적절한 습도를 유지케 하였던 온실효과도 사라지고 유해한 우주광선에 노출됨과 동시에 각종 스트레스원이 더욱 증가하기 시작하여 활성산소가 과다 생성됨으로써 DNA 유전자 손상과 변이가 증대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게 남매간의 결혼을 금하시게 되었던 것이다.(이에 대해 좀더 알고 싶으신 분은 졸저 <성경으로 세상보기> 중 ‘성경 속 수명 이야기’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4. 대수와 주환
한창 혈기왕성한 십대의 오대수가 남매간의 근친상간 광경을 보고 외면했다면 오히려 정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삿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온 친구 ‘주환’에게 자신이 학교에서 본 그 광경을 말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자신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주환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오대수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오대수는 그 기억을 까맣게 잊는다.
그렇지만 주환의 입을 통해 수아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하게 퍼져나간다. 수아가 여러 남자들과 놀아난 결과 임신까지 하였다는 것인데 이 소문을 들은 수아는 근심하여 자신이 임신하였다고 믿어 버리고는 동생 우진한테 안녕을 고하며 우진의 손을 놓고 합천댐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다. 대수와 주환의 경우에서와 같이 혀를 잘못 놀려 말 한마디로써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약3:2-8).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말에 실족하지 아니하면 그는 곧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라.”(약3:2,8)
그런데 대수와 주환처럼 성적인 스캔들에 관해 소문을 쉽게 퍼뜨리는 인물이 성경에도 소개가 되고 있다. 즉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것을 본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이 사실을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려 나중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사건이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다.
“노아가 농부가 되어 포도원을 세우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있더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 또 이르되, 주 곧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며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만드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였더라.”(창 9:20-27)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노아가 벌거벗었다는 것으로 보아 노아에게 성적인 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적 스캔들은 성적인 관심이 많고 성적 방종을 하기 쉬운 가나안이나 함 같은 자에 의해 빨리 타인에게 전파가 될 수 있는 것도 당연하리라 생각된다.
5. 최면술사
누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은 우진에게 있어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수아는 소문처럼 남자들과 성적으로 문란했던 여자가 아니었다. 수아는 우진만을 사랑하고 있었고 우진에게만 몸을 허락한 우진의 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문을 듣고 낙심한 수아가 자살하자 우진은 누나를 자살로 몰아간 그 소문의 최초 발설자 오대수에게 복수를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진은 청년실업가로 성공하자 막강한 금력을 갖고 매우 뛰어난 능력의 최면술사를 고용해 오대수를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조치하게 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풀려난 뒤 이우진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또 이우진에 의해 로봇 내지는 인형으로 길들여진 오대수는 이우진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5년이나 감금됐던 중년의 남자 오대수와 일식집에서 보조 요리사로 일하던 소녀 미도는 (일반적으로 ‘사랑’ 같은 주제에 대한 암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또한 사회통념상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암시도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면술로 인해 특정한 멜로디에 반응하여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다. 오늘날 최면은 이우진의 선택에서 보듯 하나의 검증된 과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기술이라고 알려져 점차 별다른 저항 없이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면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커넥션이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최면술사(enchanter, charmer)는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라고 단언하신다(레19:26; 신18:10-12).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찰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enchanter)나 무당이나 마법사(charmer)나 부리는 영에게 묻는 자나 마술사나 강신술사가 너희 가운데 있지 못하게 할지니라. 아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가 다 주께 가증한 자이기 때문이니 이런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18:10-12)
6. 대수와 미도
오대수가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대수와 미도가 함께 찾아가도록 만들고, 금은방 주인으로 하여금 대수의 딸이 입양되었다고 말하도록 설정한 것 역시 이우진이 연출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우진의 의도대로 고향 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뒤지던 대수는 자신이 왜 우진에게 복수의 대상이 되었는지 비로소 감지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대수는 예전의 그 기억을 되살려내고 우진이 제시한 문제를 풀어냈다는 확신을 갖고 펜트하우스로 가 우진을 만난다.
그러나 대수는 우진이 넘겨준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결국 자기와 몸을 섞은 미도가 자신의 친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즉 남매간의 근친상간에서 출발한 사건은 부녀간의 근친상간이라는 복수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최면에 의해 대수와 미도가 부녀간의 근친상간을 행하게 된 것과 비슷한 사건이 성경에서도 잘 언급이 되고 있다. 동성애 등 성적 방종이 창궐하였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불심판에 의해 멸망당한 후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속 굴에 거하고 있었는데 그 딸들은 자기들이 결혼할 수 없으므로 대신 아버지의 씨를 보존하겠다는 미명하에 롯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 후 롯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아버지 롯과 몸을 섞어 각기 모압(Moab: from father)과 암몬(Ammon: son of my people)이라는 아들을 낳았다(창19:29-38).
그러나 이러한 부모자식간의 근친상간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근친상간들에 앞서 철저히 금지하셨다(레18:6,7,29).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레18:6,7상)
“이는 누구든지 이런 가증한 일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는 자 곧 그것들을 행하는 혼들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임이라.”(레18:29)
7. 니므롯과 그 아내
기독교 변증에 있어서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의 ‘두 개의 바빌론’(The Two Babylons)이나 잭 칙(Jack T. Chick)의 ‘사보타주’(Sabotage)를 보면 노아의 홍수이후 최초의 ‘근친상간’은 니므롯(Nimrod, 창10:8,9)과 그의 어미인 세미라미스(Semiramis)에 의해 저질러졌다.
세미라미스는 원래 구스(Cush, 창10:6-8)의 아내였는데 당대의 절세미인이면서도 가장 음란하고 사악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 니므롯이 바빌론의 군주가 되자(창10:8-14), 그와 결혼하여 바빌론 군주의 어미이자 왕후가 되었다. 그러다가 니므롯이 셈(Shem, 창10:1,21)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입지가 위태해짐을 느낀 그녀는 재빨리 자기가 낳은 니므롯의 아들 담무스(Tammuz, ‘생명의 아들’, 겔8:14)를 죽은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아들이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으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씨(seed, 구세주)라고 주장하면서 담무스를 태양신(sun-god)으로 신격화하여 ‘바알’(Baal, 주인)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신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알티’(Baalti, 여주인) 혹은 ‘레아’(Rhea, 위대한 ‘어머니’ 여신)라 하여 ‘월신’(mood-god) 곧 ‘하늘의 왕후’(queen of heaven, 렘7:18; 44:17-19,25)로 숭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숭배자들이 죽은 니므롯(담무스)을 위해 애곡하는 것을 바빌론 비밀종교의 중요한 예배의식으로 정해 놓았다(겔8:14).
이러한 사실은 욥기 31장 26-28절에서 이미 족장 시대인 욥의 시대에 태양신과 월신 숭배가 성행했었던 기록으로써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세미라미스는 ‘이시스’(Isis)로, 니므롯은 아기 ‘호루스’(Horus)이자 어른이 된 ‘오시리스’(Osiris)로 둔갑했다. 그리고 이 바빌론의 왕후인 세미라미스는 각 민족의 역사 가운데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Ashtaroth, 삿2:13),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8. 새 시대 운동
본래 사냥꾼(창10:9)인 니므롯이 천하를 장악한 후에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주 하나님을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보와 전략의 전문가인 가나안의 지략을 세미라미스를 통해 전달받고서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새로운 신화들을 만들어서 보급하였다. 즉 성경 전체를 대표하고 진리의 근본이 되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인 창세기 1장 1절 곧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없애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곧 성경의 뼈대인) ‘창조론’과 ‘종말론’을 없애기 위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의 신분을 그들의 조상인 노아보다 상위에 놓기 위하여 그를 홍수 이전의 인물인 가인의 환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가인을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 그 위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게 되므로 세미라미스는 이것을 왜곡하려고 창세기의 이야기에 ‘태양의 신’을 삽입하고 그 빛의 신(Lucifer)이 이브와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가인이라는 거짓말을 꾸며내었다.
아울러 그 다음 단계로 세미라미스는 ‘천지가 늘 그대로 있다’고 하는 또 다른 윤회설의 기반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바탕이 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을 만들어낸 씨앗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이 세미라미스의 거짓말에 속아서 살아간다. 세미라미스의 환생설이란 토대 위에 단일론과 범신론 등이 혼합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은 올드보이의 시종을 주관하고 있는 이우진의 세계 (곧 박찬욱 감독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진은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엎드린 상태에서 아주 유연하게 다리부터 온 몸을 들어올리는 고난도의 코브라(Cobra) 자세를 취한다. 루시 리델(Lucy Lidell)의 요가 교과서에 보면 이러한 코브라 자세를 취함으로써 뱀-여신(the serpent-goddess) 곧 쿤달리니 힘(the Kundalini force)이 약동케 되어 신(god)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곧 다름 아닌 마귀의 영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우진의 허리에는 십자가 문신이 새겨졌고 그가 소유한 자동 옷장이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지고 다시 닫히기도 하였는데 올드보이의 미술감독이었던 류성희 씨의 인터뷰를 보면 박찬욱 감독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감독은 뉴에이저들의 관점에서 이우진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더욱이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읊어주었던 잠언 6장 4절과 5절(“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네 눈꺼풀이 졸지 말게 하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새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네 자신을 건질지어다.”)의 말씀은 뉴에이저들에게는 인내천(人乃天)의 구원관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구절로 호도될 수도 있을 것이다.
9. 올드보이
사전에 나오는 ‘올드 보이’(old boy)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동창생, 교우, 졸업생(alumnus). ② 「친밀히 부르는 말」 여보게. ③ (the ∼) 책임자, 고용주, 보스; (the O- B-) 악마. ④ (an ∼) (구어) 정정한 노인, 나이 지긋한 남성.
그렇다면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과연 어떠한 번역이 정답이 될 것인가? 다 나름대로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최상의 정답은 현재 이 땅이 사탄의 다스림(satanocracy) 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요12:31; 14:30; 16:11; 고후4:4; 엡2:2)을 나타내주는 “the Old Boy(惡魔)”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정말로 ‘근친상간’의 권리(?)와 운명(?)이 예술로 승화되어 성정체성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올드보이(the Old Boy)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로서 자신을 예비하며 다시 오실 주 예수님과 만나리라는 복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요1:12; 엡5:22-33; 딛2:13; 계19:7,8; 22:20). 아울러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을 소유함으로써 더욱 성결의 삶을 살아가려고 해야 하며 가정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매순간 확인하면서 뚜렷한 성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하여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정체성을 처참히 붕괴시키는 올드보이와 같은 세속적 인본주의에 호도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며 이제 곧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너희는 우리가 이 날 여기에서 행하는 모든 것 즉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본받아 행하지 말지니라.”(신12:8)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형제들아, 너희 중에 진리를 떠나 잘못하는 자가 있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즉 그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할지니라.”(약5:19,20)
10. 에필로그
신약성경의 첫 장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금지된 성(gender & sex)의 파격적인 허용이 눈에 들어온다. 즉 구약의 족보는 창세기 5장, 10장, 11장 등에서 확인되듯이 남성의 계보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의 총수를 성인 남자로만 계수하라고 하셨다(민26:1,2).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40세대가 기록되는 가운데 남성들의 족보 사이로 다섯 명의 여성이 감히 언급이 되고 있다. 즉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6절), 그리고 마리아(16절)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를 설명하는 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 ‘근친상간’하여 쌍둥이를 낳았고(창38:12-30),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고(수2:1), 룻은 롯이 자기 맏딸과 ‘근친상간’하여 낳은 모압(창19:36,37)의 후손 곧 모압 여인인데 과부였고(룻1:4,5),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는 밧세바로서 다윗과 간통한 여인이었고(삼하11:2-5), 마리아는 처녀인데 성령님에 의해 아이를 배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다(신22: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으로(히11:31)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감히 메시아가 오시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됨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올드보이 시대 곧 혼돈된 성정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진과 수아와 대수와 미도 등에게도 소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즉 ‘예수(Jesus)’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이름(마1:21)인 것을 믿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죄를 씻음 받으면, (곧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누구든지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Jesus)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2009-05-08 17:11:18 | 관리자
(이 글은 1999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우리 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특별검사가 탄생하였다.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옷 로비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 대하여 최병모 변호사와 강원일 변호사가 변협의 추천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특별검사로 임명이 되었다. 이처럼 전국민적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데 대해 일부에서는 특별검사의 한계로 인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여야가 모두 한 목소리로 환영과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각 언론들 또한 한결같이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자 이제 금세기 안에 옷 로비 의혹이 완전히 규명되고 조폐공사 파업유도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날지는 알 수가 없지만 특별검사 탄생으로 인하여 '보통검사'로 전락(?)된 이들에 의해 범죄자로 고발당했던 피고인들이 한 번 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아니 심지어는 명백히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차이도 없고 학식과 교양의 차이도 없으며 더더구나 죄의 경중에도 차이가 없다. 단지 타인의 눈에는 자신의 어떠한 죄라도 비춰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자존감 만이 작용할 뿐이다.
그러나 죄(罪)에 대한 인간의 평가가 과연 얼마나 올바른 것일까? 특별검사에 의해서 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자기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다고 느끼면 그는 죄인이라고 불리어질 수 없는가.
성경은 말한다.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10,12,23)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롬2:11; 엡6:9; 골3:25; 약2:1,9; 벧전1:17)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어떤 죄라도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조차 하나님과 만나게 되었을 때 자기의 죄를 인식하게 되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죄가 한 점이라도 있으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고, 죄가 있어야 할 장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자신의 유일하게 나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다. 이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 구성된 '특별검사'에 의해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진 후 십자가에 못박혀 무죄한 피(the innocent blood)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는 말씀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즉시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고발하던 '특별검사'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함 받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계12:10)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2009-05-08 17:10:31 | 관리자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전쟁
(War on the Saints)
볼 만한 책이 많지 않은 시점에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참으로 좋은 책을 출간하였기에 소개한다. 제시 펜 루이스는 1861년에 영국에서 태어나 1900년대초 영국의 웨일즈 영적 대각성에 큰 영향을 미친 여성도이다. 그녀가 지은 책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전쟁」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고 있는 고전인데 이번에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미 100년 전에 루이스는 오늘날의 오순절/은사주의를 잘 간파하여 아주 상세하게 마귀의 기법을 파헤쳐 놓았다. 마귀가 성도들을 유린하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동적이 되게 하는 것인데, 힌두교의 요가, 만트라, 명상, 좌선, 단전 호흡, 오순절주의의 입신, 방언, 기괴한 웃음 현상 등이 다 사람을 수동적이 되게 하는 것으로 그 뿌리가 같은 것이다. 수동적이 되어야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거짓 부흥사들은 외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마귀의 각종 수법을 아주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필독서이니 꼭 구입하여 읽고 다른 이들에게도 권면해 주기 바란다. 잘 아시다시피 귀신은 없으므로 책을 읽으면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마귀로 생각하고 읽기 바란다. 실력 있는 분이 번역을 해서 아주 부드럽게 되어 있다. 좋은 책을 내준 기독교문서선교회에게 감사를 드린다.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의 책소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단에 대해서, 사단이 누구이며, 그의 본성과 싸움의 전략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런 다음 싸움에 임할 수 있도록 무기며 갑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사단은 흔히들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이 글의 저자인 펜 루이스 여사가 말하는 사단의 가장 큰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속이는 자이며 그가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속임수는 위조(counterfeit)이다. 위조 지폐범이 진짜 지폐와 너무나도 똑같이 위조하기 때문에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위조 지폐를 식별할 수 없다. 이처럼 위조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인 것처럼 똑같게 만들어 진짜인 것으로 통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과 환상과 은사 등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위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조들은 성도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직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단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는 자만이 이러한 위조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기 때문이다(고후 10:14). 생각해 보라. 위조가 어설프면 어떤 사람이 속아넘어가겠는가!
선하다는 것,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사단의 속임수를 방지해 주는 보증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속지 않으려면 그리고 싸워 이기려면, 먼저 사단이 어떻게 속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그물 치는 일은 허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은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들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의 서문
(멧칼프, J. C. Metcalfe)
요한 웨슬레는 지나침과 광신을 다루면서 광신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광신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의 무질서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는 무질서이다. 뿐만 아니라 광신주의는 이성을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기까지 한다. 광신주의는 오성(understanding)의 눈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닫아 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광신주의가 일종의 미친 짓으로 여겨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리석은 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미친 짓이다. 바보란 올바른 전제들로부터 잘못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자들을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미친 사람은 올바른 결론들을 끌어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전제들에서 나온 것이다. 광신주의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의 전제가 올바르다면, 그의 결론들도 필연적으로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잘못이 있다. 그의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는 자신의 본래 모습(what he is)이 아닌 거짓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므로 그는 잘못된 출발을 하고 있으며, 더 멀리 가면 갈수록 바른 길에서 더 많이 벗어나서 헤매게 된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좀더 가까이 가 보자. 내 서재에는 스트레시(Ray Strachey)가 쓴 『과거의 그룹 운동과 그 실험적 지침』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스미스(Hanna Whitall Smith)의 논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녀가 세밀하게 조사했던 19세기 중엽의 기묘한 종교 분파들에 대한 기술을 담고 있다. 두람의 주교였던 고 헨슬리 헨슨(H. Hensley Henson) 박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에는 일종의 전도된 겸손을 따르려는 미묘한 유혹이 있었다. 이것은 영적 자만을 보여 주는 가장 나쁘고 가장 위험한 형태로, 스스로 잘난 체하는 추문들 속에서 그 모습들을 드러내었다."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상생활에서의 책임을 거부했던 재림주의자들이 데살로니가에 있었다. 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종파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러한 계승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신조들과 행동들을 수행해 왔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한 바울 사도의 단호한 말씀이 이들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엄격주의자인 체하면서도 그 시대의 위험한 도덕적 방종에 빠져들었던 골로새의 금욕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계승하는 무리들이 모든 기독교 세대들마다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중세의 수도승들과 현대의 분리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들 모두는 똑같은 영적인 병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주는 것들이다. 이렇게 성령의 명령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조아리는 모습이 어쩌면 진정한 겸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한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영감이 완전한 것이라고 하는 암묵적 가정이, 도덕적으로 파괴적인 영적 오만을 드러내고 조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정(假定)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의 경험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사도들의 판결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고집스러운 경건주의의 슬픈 겉치레 그리고 이 경건주의가 그 희생자들에게 한 이색적이며 제멋대로이고, 심지어는 괴이하기까지 한 요구들을 꼬집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3).
20세기가 동틀 무렵에 일어난 웨일즈 부흥운동의 여파로 많은 수의 사이비 종파들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자주 "오순절" 운동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신앙생활"이라는 잡지의 책임자로서 웨일즈 부흥운동의 많은 것을 목격한 펜 루이스(Penn-Lewis)여사는 이러한 광신적 가르침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탁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반 로버트와 공동으로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War on the Saints)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이러한 극단적이고 도를 넘어선 신앙들과 행위들이 침략적인 악한 영들의 책동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속임수"가 이 책의 중심 단어이다. 이 용어는 요한 웨슬레와 헨슨 박사가 발견한 것들과도 정확하게 조화를 이룬다.
지금 여기에 내놓는 판은 7판까지 나온 원저를 요약한 것이다. 오버커머 출판사(The Trustees of The Overcomer Literature Trust)는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가 출판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우려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우려했던 것은 중생하고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성령 세례" 그리고 어둠의 세력들을 대항하는 공격 전쟁에 대한 이 책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둘은 부흥을 가속시키는 방법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는 방법이다.
그 '오버커머 출판사'의 편집자로서, 나는 이 책을 다시 내는 일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앞에서 말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동시에, 현대 "분파"(sects)의 극단적이며 비성경적 강조점들 밑에 깔려 있는 위험들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를 선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과제도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속이는 영들이 분파들 뒤에 숨어서 이들을 조종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와 함께 이 책을 낸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의 눈이 열려져서 극단적인 "광신주의"의 길에 가득한 중대한 위험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전능하신 구원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악과 속임수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힘이시요 피난처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다.
2009-05-08 17:09:44 | 관리자
산타클로스에 대해 거짓말 하지 맙시다
* 이 글은 레이시 박사의 "아이들의 천국"(도서출판 말씀과 만남 출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어떤 독자께서는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을 보고 매우 기분 나빠하실 지도 모릅니다. 제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제 말을 뒤집어 엎어버리고자 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단언하건대, 만일 당신이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도록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들에 대해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해 중대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산타클로스를 살펴봅시다. 도대체 당신은 산타클로스에 대해 무어라고 가르칩니까? 저는 이것이 다음의 노래 하나로 잘 요약된다고 생각합니다. "산타클로스가 마을에 오시네"라는 노래의 가사를 살펴봅시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데.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아인지 나쁜 아인지
오늘밤에 다녀가신데.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자, 왜 아이들이 토라지거나 울어서는 안됩니까? 그 이유는 산타클로스가 자기의 사슴 썰매를 타고 기적적으로 하늘을 날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12월이 되면 산타클로스를 기다립니다.
이같은 산타클로스 신드롬에는 몇 가지 사악하고 가증한 죄악이 들어 있습니다.
a. 먼저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막 10:19)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 증거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거짓말 뒤에 누가 숨어 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매우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자기 본래의 것을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 8:44).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사악한 마귀의 일입니다. 물론 많은 부모들이 제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제가 매우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제가 아이들로부터 어린 시절의 즐거움과 낭만을 빼앗아 가려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선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세 자녀들은 산타클로스를 모른 채 자라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성탄절이 일년 중 가장 흥미진진한 때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직과 진리 안에서라면 분명히 성탄절이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우며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9:15).
"하지만...해가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한 것이 뭐 그리 나쁜 겁니까?"라고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게 그렇게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아직도 제가 너무나 편협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분은 너무나 편협하신 분이시므로 어떤 거짓말(그것이 새빨갛건 시커멓건 녹색이건 갈색이건 회색이건 횐색이건)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럽게 하는 어떤 것이든지,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그 무엇이든지 절대로 그곳에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오리라"(계 21:27).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 거짓말의 아비입니다.
b. 이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시내 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하나님보다 우선시 되거나 그분과 동등한 수준에 놓이는 것은 모두 다 우상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는 다른 신들 즉 너희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지니(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주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이라) 주 너의 하나님께서 진노를 네게 발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하실까 하노라"(신 6:14,15).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신(神)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절대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를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당신 주변에 있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그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에 대해 가르칠 때, 결코 그를 하나님보다 앞세우거나 하나님과 같은 수준에 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한 번 살펴봅시다.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아인지 나쁜 아인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이것은 바로 산타클로스의 신성(神性)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그를 전지하고 무소부재한 존재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여!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살피시느니라"(잠 15:3).
"주님의 눈은 온 땅을 이리저리 달리시며"(대하 16:9)
"그분 앞에 드러나지 않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 하시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 나느니라"(히 4:13).
당신의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도록 가르치는 것은 사악하며 공개적인 우상 숭배입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우상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살전 1:9).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아멘"(요일 5:21).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 10:14)
c.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어린 아이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성탄절에 이 선물은 누가 주었니?" 그러면 그 아이는 "산타클로스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오류를 범치 말라.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 1:16,17).
따라서 위의 성경 말씀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신성모독입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심은 고난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산타클로스는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느니라"(약 4:4).
"내가 가장 높으신 분과 같이 되리라"(사 14:14)고 외쳤던 그 날부터, 루시퍼 즉 사탄 마귀가 가장 강렬히 추구해 온 것은 경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마 4:9). 참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일 5:20)로부터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경배하게 할 때마다, 사탄 자신은 간접적으로 경배를 받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신입니다(고후 4:4). 신이란 숭배 받는 대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탄은이 세상의 신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산타클로스에게 돌리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사탄을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크리스마스는 누구에 관한 것이니?" 만일 아이가 "산타클로스요"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소위 크리스천 가정이라 불리는 집안에서 자란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이가 "산타클로스하고 예수님이요"라고 대답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신성모독입니다. 그 대답이 100%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악한 것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는다면, 그것은 마귀에 의해 이루어진 신성모독입니다. 누가복음 19:10에서 예수님은 참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말해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왜 말구유가 등장합니까?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동방의 현인들을 인도하던 별이 마구간 위에서 멈추어 섰습니까?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천사들이 떨고 있는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 구세주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이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바 되어 구세주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성탄절이 있습니까? 잃어버린 자들 때문입니다.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들어오셨다, 함이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부글부글 끓는 유황,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 검고 메스꺼운 연기로 가득한 지옥에서 죄인들을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셨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도대체 솜이 붙은 빨간 색 옷을 입은 채, 사슴을 타고 나타나는 뚱뚱이 산타클로스가 속죄의 피, 십자가, 구원, 하늘 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산타클로스는 마귀의 도구로서 우리 주님의 존귀와 영광과 경배를 가로채는 존재입니다. 자,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봅시다.
산타(Santa)라는 단어에서 중간에 있는 'n'을 떼어, 맨 뒤로 붙여 보십시오. 그러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사탄(Satan)
이쯤되면 여러분은 이 책을 덮어 버리려 할지도 모릅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계속해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십시오. 그들의 인생 여정에 걸림돌을 던져 놓으십시오. 계속해서 신성모독적인 우상 숭배를 하십시오. 언젠가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산타클로스 거짓말에 대해 물으실 때,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 당신은 제게 화를 낼 것입니다. 좋습니다. 제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저는 언젠가 당신이 주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경고로 말씀 드립니다. 당신은 당신이 자녀들에게 가르친 내용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이며, 거짓말은 죄입니다. 죄는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만드는 거침돌입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단 채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눅17:2).
2009-05-08 17:08:46 | 관리자
사탄(Satan, 쎄이턴) 대적하는 자(왕상11:14; 시109:6).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런 의미로 꾸짖으셨다(마16:23; 막8:33).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의 혼의 가장 큰 대적자 즉 마귀, 타락한 천사들의 통치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고소하는 자를 가리킨다(욥1:7, 12; 슥3:1-2; 계12:10). 그는 사람들을 유인하여 죄를 짓게 하고(대상21:1; 눅22:31) 따라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육신적 도덕적 죄의 창시자이며 특히 각종 재난 특히 죽음까지도 가져오는 악한 성향을 만드는 장본인이다(눅13:16; 히2:14).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을 부추겨 죄를 짓게 하고 또 기독교를 가로막는 모든 방해 요소의 근원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방해 요소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삶을 개혁하려는 것을 크게 저지하고 있다(마4:10; 요13:27; 롬16:20; 엡2:2). 마귀 참조.
사탄은 단순한 악의 원리가 아니라 한 인격체이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사탄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우주의 권세자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이며(엡2:2) ‘이 세상의 신’(고후4:4)이다.사탄의 기원은 다소 신비 속에 가려져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피조물이고 한때 극도로 높여진 존재라는 점이다. 타락하기 전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다. 그룹 참조. 그는 하나님의 왕좌의 근위병이었으며 창조된 날로부터 죄악이 그 안에 발견되기까지 모든 길에서 완전했다. 비록 그에게 지혜의 충만함과 완전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에 창조주와 같게 되려는 교만을 일으켰고 결국 그의 타락으로 이어졌다(사14:12-20; 딤전3:6). 그는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보석들로 덮여 있었고 금으로 짠 옷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거주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살았다(겔28:11-19). 루시퍼 참조. 사탄: 이 세상의 신 선도 참조(70).많은 사람들은 지금 사탄이 자신의 천사들과 더불어 지옥에 감금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으며 욥1:7; 2:2 등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주님께서 사탄에게 묻자 그는 “땅에서 여기 저기 다니고 또 그 안에서 위아래로 거닐다가 오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탄은 하늘에서 완전히 추방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하늘의 영역에서와 땅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벧전5:8).사탄은 왕으로서 왕국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도 “사탄이 만일 사탄을 내쫓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확증하셨다(마12:26). 이와 더불어 엡6:12는 사탄의 왕국이 정사들, 권세들, 이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 그리고 높은 곳들에 있는 악의 영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세상을 속이는 존재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사탄의 체제에 속하는 모든 사람과 사탄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요일5:19). 사탄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눈을 가림으로써 그들을 속이고 있다(고후4:3-4). 말세에 사탄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설교자들을 관장하는데(갈1:6-9) 이 복음은 마귀들의 교리이다(딤전4:1). 그는 엄청난 배도의 선동자이며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도처에서 일어날 거짓 교사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벧후2:1-2). 그들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몸의 부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 재림’을 부인한다. 사탄은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아주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고 이로써 심지어 선택 받은 자들조차 속이려 한다. 사탄은 폭력과 박해로는 교회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술을 바꾸어서 지금은 교회가 세상과 연합하도록 미혹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멸하시려고 작정하신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현재 그가 추구하는 것은 웅대한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며 교회를 미혹하여 사회의 개선을 통해 그리스도 없는 천년왕국의 도래를 믿도록 하는 것이다. 사탄은 여전히 자신의 처소를 하늘에 속한 곳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속한 곳에서 쫓겨나 땅에 거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계12:9-12). 그리고 그 이후에 사탄은 자신의 때가 단지 3년 반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의 분노로 인해 지구에는 엄청난 공포가 있을 것이며 이때에 그는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계13:2-8). 7년 환난 기간의 종말에 이르러서 그의 짐승과 거짓 대언자는 산채로 불 호수에 던져질 것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한 천사가 사탄을 사로잡아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 버릴 것이다(계20:1-3). 1000년이 다 찰 즈음에 사탄은 잠시 동안 풀려나지만 곧 그의 천사들과 함께 그를 위해 오래 전에 예비된 불 호수에 영원토록 던져질 것이다(계20:7-10; 마25:41). 이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시대가 온다.계2:9, 13의 ‘사탄의 회당’은 아마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 즉 모세의 율법을 수호한다고 하면서 복음의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박해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특히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서머나 교회에 많았다.
2009-05-08 17:08:05 | 관리자
천사(Angel): 임무를 수행하는 자. 이것은 히브리말이나 그리스말 모두 일차적으로 사자(使者)를 의미하며 그래서 그렇게 번역된 곳도 있다(마11:10; 눅7:24). 이 말은 종종 보통의 사자에게 적용되었고(욥1:14; 삼상11:3; 눅9:52), 대언자에게(사42:19; 학1:13), 제사장에게(전5:6; 말2:7) 그리고 심지어 움직이지 않는 물체에게도 적용되었다(시78:49; 104:4; 고후12:7). 한편 일반적인 의미로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었고(말3:1) 그분의 복음의 사역자들과 교회의 감독들에게도 적용되었다(계2:1, 8, 12).
2009-05-08 17:06:17 | 관리자
질문: 불가지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이것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네이버 지식 사전에서 내린 정의를 살펴봅시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초경험적(超經驗的)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상의 입장이다. 불가지론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s)나 회의론자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찾을 수도 있으나, 신의 본체는 알 수 없다는 중세의 신학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인간은 일종의 지적(知的) 직관(直觀)인 그노시스(gnosis)에 의하여 신의 본체를 직접 알 수 있다는 그노시스파(派)나 본체론자의 주장에 대하여 그노시스를 부정하는 것이 불가지론이다. 로마 가톨릭 주의는 신의 존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이성(理性)에 갖추게 되는 ‘자연의 빛’에 의하여 알게 되지만 신의 본체 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하여 그노시스를 부정하였다. 신은 현세(現世)에 사는 사람에게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뚜렷하지 않으며 신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가능하다.
불가지론은 근세에 들어서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그 지력(知力)도 한정되어 있어 세계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다고 말한 철학설에 다시 등장한다. 신, 즉 자연의 속성은 무한하지만, 그 중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연장(延長: 物體)과 사유(思惟: 精神)뿐이라고 주장하는 B. 스피노자의 설이나, 인간의 지식은 인상(印象)과 관념에 한정되어 있어 그것을 초월한 사항은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D. 흄의 주장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지론이다. 또 사물 자체는 인식하지 못하여도 주관형식인 시간 ·공간 내에 주어지는 현상만은 인식할 수 있다는 I.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생각도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1869년에 불가지론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T.H.헉슬리나 H.스펜서와 같은 실증론자는 지식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만 한정시켰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여러 문제에 관하여 분명히 불가지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경향은 현대의 논리실증주의와도 이어진다. 고대 회의론자의 시조 피론, 현상론자 W.해밀턴, F.H.브래들리, E.H.뒤부아 레몽 등도 넓은 뜻에서는 여기에 속한다.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가 주장하였다. 산자야는 내세(來世)가 존재하느냐, 선악(善惡)의 과보(果報)는 존재하느냐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하여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확정적인 대답을 피하였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판단 중지의 사상이 처음으로 표명되었다. 원시불교에서 무기사상(無記思想)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신학으로 되돌아가면 칸트나 R.H.로체의 영항을 받은 A.리츨은 인간이 아는 것은 현상뿐이나, 신은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학은 종래의 형이상학과 같이 신을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매력 있는 이상(理想)으로 다루어,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시키고 기독교는 도덕면에서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네이버 지식 사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도 없고 증명해 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gnostic의 본래 뜻은 ‘지식이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불가지론은 무신론을 지적인 차원에서의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을 할 수 있고 혹은 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불가지론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 장 6절은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신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러므로 그분은 볼 수 없고 또한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나타내지 않는 이상 인간의 시각으로는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롬1:20).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는 우주/자연 가운데서 아주 자명하며(시19:1-4) 또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고(롬1:18-22)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양심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전3:11).
불가지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 모두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이들은 회색지대를 주장합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서도 안 되고 불신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면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 자체를 위해서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분명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증거들을 생각하지 말고 유신론과 무신론/불가지론 모두 동일하게 옳은 것으로 봅시다. 그리고 죽음 후 가능한 상황들에 대해 어느 입장이 더 합리적인지 살펴봅시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두 가지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후에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무신론/불가지론자들은 죽고 나서 곧바로 누군가에게 즉 자기들이 부인한 창조주 하나님에게 답변을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입증할 수도 없고 입증 못할 수도 없다는 입장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도 있는 이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측면에서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의심을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해서 의심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도록 이미 주신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3-34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분의 방법/길들을 믿음을 가지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러길 원하십니다. 신명기 4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네가 거기서 주 네 하나님을 찾으면 곧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리라.”
2009-05-08 17:05:4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