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무신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입니다. 사실 이 이론은 최근에 새롭게 개발된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1000년경에 다윗에 의해 기록된 시편 14 편 1절은 무신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어리석은 자가 자기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최근 통계는 무신론자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전 세계적으로 약 10%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은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주장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무신론자들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신론은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논리적으로 옳을까요?
먼저 무신론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간단히 증명하지 않을까요? 보이심으로 증명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간단히 믿을 텐데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길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아주 간략하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자신을 신뢰하고 (벧후3:9) 구원을 선물로 받기 원하십니다(요3: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꼭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분은 여러 차례 구약에서 자신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창6-9장; 출14:21-22; 왕상 18:19-31).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악한 길에서 떠나 모두 하나님께 순종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자로서 믿을 수 없습니다(엡2:8-9).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을 모셔 들이라는 것이지 단순히 신을 혹은 신의 존재를 논하는 신학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신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을 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20:29).
그런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결코 비논리적인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해와 달과 별을 통해(시19:1-4), 자연을 통해(롬1:18-22)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통해(전3:11)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무신론을 믿는 데에도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명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모두 찾아보고 또 우주 속에 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을 가 보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다는 전제하에 이런 결론이 나와야 우리가 그 주장을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무신론자도 이런 가정 하에 무신론을 주장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럴 거라고 믿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가 되려면 유신론자가 될 때 필요한 믿음이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무신론도 입증될 수 없는 추측이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반드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두 개의 믿음 중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삽니다. 자, 어느 것이 더 현명한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다가 죽었는데 혹시 하나님이 있어서 당신을 지옥 불속에 넣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말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그것들의 음성도 들리지 아니하나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아가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시19:1-4).
2009-05-08 17:05:09 | 관리자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특이한 것이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고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확연히 서로 구분되는 세 인격체가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한 하나님으로서 이 세 인격체 중 하나가 없으면 한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예가 있다. 시간은 반드시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며 각각이 다 시간이고 이 셋 중 하나가 없으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공간을 차지하면서 반드시 길이(x), 너비(y), 높이(z)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 하나가 없으면 더 이상 물체가 아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며 각각의 인격체가 완전하고 동등한 분이시며 어느 인격체도 다른 인격체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성은 여럿이지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드는 근본 속성은 그분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죄를 보면 즉시 심판하는 공의의 하나님이므로 죄인은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이처럼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생물은 죄가 없으신 아들 하나님뿐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발동되어 아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족시켜 완전한 대신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공의와 거룩함이다(벧전1:15,16). 성도들이 사랑이라는 엔진이 달린 기차를 운행할 때 반드시 공의와 거룩함이라는 레일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제받지 않은 사랑으로 인해 교회와 사회에 혼란과 무질서가 생긴다. 따라서 교회에서 공의와 사랑이 갈등을 일으킬 때 공의를 택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따라야 할 근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2009-05-08 17:04:26 | 관리자
왜 하나님을 믿는가?
사람이 세상을 보고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늘을 보고서 어떻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 에이브라함 링컨
핵심내용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네 가지 타탕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정글 속의 피라미드
내가 고고학자가 되어 일단의 조수들의 데리고 과테말라의 정글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빽빽한 초목을 칼로 베어 겨우겨우 길을 열어 가면서 마야 유적이 있다고 확신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정글의 뜨거운 열기와 뱀과 모기와 온갖 벌레들이 진로를 방해한다. 눈은 따끔거리고 발바닥은 타는 듯이 뜨겁고 온몸의 근육이 쑤신다. 그래도 우리는 백 년도 더 된 덩굴을 헤치고 정글을 빠져나간다. 그렇게 어느 지점에 이르자 마치 정글 바닥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녹색 다이아몬드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처럼 열대의 덤불에 덮인 거대한 피라미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야 유적이 있을 거라고 내가 확신했던 지점이 분명하다. 우리는 즉시 캠프를 설치하고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탐사와 발굴이 진행된다. 이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마야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탐사를 시작하기 얼마 전, 나는 비행기를 타고 과테말라 정글상공을 날다가 바닥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둔덕을 발견했다. 순간 나는 어떤 지적 존재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은 바닥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둔덕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그 지점의 위도와 경도를 기록하여 탐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일까? 중앙아메리카 정글 한가운데 고대 마야 문명의 유적지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믿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목적과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이면에 ‘지적 존재’가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주는 자기 자신이 목적을 갖고 있음과 그 이면에 지적 존재가 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네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의 존재를 해명하기에 충분할 만큼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유일한 ‘원인’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했다.
“집마다 지은 자가 있으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히3:4).
우리는 중앙아메리카 정글 한가운데에 바닥이 정사각형으로 된 둔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야 한다.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주는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론은 지구의 생명체에 대해 하나님을 배제한 채 설명하지만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두 가지 입장을 선택 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거부한다. 다른 하나는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므로 ‘믿음을 요한다’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보다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것 같다.
둘째 이유: 우주의 질서와 목적은 그 이면에 지적인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우주는 분명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우주는 분명한 질서와 계획과 목적을 지닌다. 이것은 책상 위에 시계 부속이 난잡하게 어질러진 상태와 그 부속을 짜 맞추어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시계 부속들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과 어떻게 그것이 정교하고도 절묘하게 조립되어 움직이는지 설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주는 우리 눈앞에 존재할 뿐 아니라 정밀한 시계처럼 움직인다. 과테말라 정글의 정사각형 둔덕은 마야 문명을 암시한다. 우주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소리친다.
셋째 이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바울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롬2:15).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한다.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다른 짐승보다 월등하다. 인간은 다른 짐승보다 지적이다. 양심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세계를 느낀다. 역사의 모든 문명은 종교를 갖고 있다. 짐승의 세계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넷째 이유: 성경은 자연과 인간을 정확히 보여 준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밣기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진리라면 과학과 모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결코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실 현대 과학의 토대가 된 것은 성경이다. 우주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우주는 예측 가능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우주를 연구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성경은 현대의 과학자들에게 이러한 확신을 제공한다.
시편 19편 1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정교하게 설계하심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8-20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연과 우리의 내적인 직관적인 인식력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말했다. 우리의 경험이 사실을 입증한다. 밤하늘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별들을 보면 직관적인 생각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하나님이 계신 게 분명해!’
물질적인 것들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정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성경의 언급도 정확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히11:6).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 ‘믿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시험관이나 컴퓨터 자료를 조사하는 실험실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지만 자연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과 역사의 법정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 주는 증거들, 이성적인 의심을 압도할 증거들, 방자한 인간의 마음을 설득하여 이성의 의심을 떨치도록 하는 증거들이 충분히 널려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믿지 않을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만한 증거는 충분지 않다. 따라서 불신은 곧 또 하나의 믿음이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믿을 만한 근거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만한 논리적, 철학적 근거들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이 우주의 복잡함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강력한 물질적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현대의 유능한 과학자 가운데에도 진화론에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에 반해, 진화론이 우주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유일한 대안인 창조론이 자기 입에 맞지 않아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이를 믿으려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불신 과학자의 고백: “나는 불가능한 것을 믿는다!”
하버드 대학 교수로 1967년에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조지 왈드(George Wald)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생명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 가지 가능성은 자발적인 발생 곧 진화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발생론은 이미 120년 전에 파스퇴르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불신임을 받았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한 가지 논리적 귀결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로 생명이 발생했다는 결론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결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기로 했다.”(George Wald, ‘The Origin of Life’, Scientific American, May 1954)
결론
당신은 무엇을 믿든지 믿음으로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믿음으로 믿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믿음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내가 믿음을 갖고 있나,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진화론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가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의 존재에 대한, 그 정교함과 광대함과 목적과 설계에 대한, 인간의 독특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만에 꿰뚫는 기독교 진리(맥스 앤더스, 지음, 규장 출판서)에서
2009-05-08 17:03:44 | 관리자
하나님(God): 크리스천 믿음의 대상. 이 분은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영원하고 무한하며 완전한 분이시고 만물의 창조자요, 자신의 권능과 섭리로 모든 것을 지키고 다스리는 분으로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신6:4-5). 하나님은 의와 사랑이 충만하신 인격적 존재로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유일무이하게 살아 계신 신이라는 점에서 세상의 다른 신들과 현저하게 다르다(시18:46; 42:2).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 역사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역사의 주님이시며(사40:10) 자연의 신비나 공포심 등에서 발생한 자연 종교의 신이나 사람의 이성에 의해 형성되거나 이해되는 철학적인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창1:1; 사44:24) 전능한 분이시고(창17:1; 대상29:11) 온 세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행7:48) 사람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는 거룩한 분이시다(출3:5; 시47:8). 삼위일체 하나님 선도 참조(60).
영어 단어 God은 실제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잘 모르며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 불렀는데 이것은 모세가 그분의 이름을 물을 때에 그분께서 친히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일러 주신 것으로(출3:14)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과 자존(自存)하심을 잘 보여 준다. 여호와 참조. 그러나 이 이름이 너무나 두려웠으므로 그들은 성경에서 이것이 나올 때마다 발음하지 않고 대신 주를 뜻하는 아도나이(Adonai)라 읽었다고 전해지며 Adonai Jehovah 즉 Lord Jehovah가 나오면 ‘주 주’라 할 수 없으므로 Adonai Elohim 즉 ‘주 하나님’으로 읽었다. 한편 복수형의 엘로힘(Elohim)은 ‘창조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분이 여러 면에서 완전함을 뜻하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암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참조.성경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혹은 이유도 주지 않고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시작부터 확증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1:1)는 말씀은 그분의 존재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고 그분의 본성과 의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된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무신론은 존재할 수 없으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범신론도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유일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다신론도 무효하며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므로 물건이나 천체를 숭배하는 유물론도 무효하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진화론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창1:1은 창조 사역 속에 드러난 하나님 자체를 보여 주고 동시에 그분의 섭리 속에 드러난 그분의 길과 그분의 성품의 영화로움을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성경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나 세 가지 뚜렷이 다른 인격체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이 같은 세 인격체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며 동등하며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다. 삼위일체 참조.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하여 온 세상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다(신7:6-11; 사66:18-21). 하나님은 먼저 족장 아브라함을 은혜로 불러 특별한 사랑과 약속을 주셨으며 부르심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창12:1-4). 이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알려 주시고(출3:14)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출3:13-17). 이때 여호와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요 이스라엘이 순종하고 신뢰할 분으로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구출하여 자신의 은혜를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내신 분이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오직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의 뜻에 절대 복종하여 은혜에 부응하여야 했다(출20:2).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사랑하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며(시9:8)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므로(출20:5)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신에게 달려가 불의를 행할 때에는 엄히 심판하신다(신28:15-6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길을 가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70년간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거쳐 고국에 돌아와 다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으나 율법의 노예가 되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믿음이 피폐해져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대망하게 되었다(말3:16-18; 눅2:25-39). 한편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로 인한 공백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신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성품과 계획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 공의, 긍휼, 사랑, 심판, 통치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일하심을 통해 믿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자신의 아들로 삼으시며(롬4:4-8; 요1:12-13) 이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롬8:14-16). 아버지 참조.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요 소유자요 치리자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미리 아심에 근거하여 사건과 사람을 선택하고 예정하신다. 또한 그분은 영원한 재판장이시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며 그분을 고귀하게 사랑하고 신실하게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요17:4).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참조.
2009-05-08 17:02:30 | 관리자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의 양식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레이시 박사님의 책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성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미국 내 유명한 크리스천 소설가이기도 하시며 근본적 침례교인으로 복음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는 박사님의 글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하늘의 만나를 공급받았습니다. 박사님과 서신과 전화통화를 주고받고 박사님의 모든 책을 번역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는 때가 되면 반드시 다 번역하겠다고 다짐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여 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때가 온 것 같아 한 권 한 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The Blood of His Cross)에서 박사님은 추리 크리스천들이 간과하기 쉬운 기본적인 진리를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통찰력과 확고한 믿음 그리고 해박한 성경 지식 그리고 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번역을 하면서 역자 역시 많은 감명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치면서 참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완벽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피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가르쳐 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좋은 책을 출간해 주신 ‘말씀과 만남’사의 최헌근 형제님과 출간 작업을 해 준 여러 자매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寶血)의 능력과 권세가 높임을 받기 바랍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참으로 그분께서는 창세 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해 드러나셨으며 너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풀은 마르고 그것의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18-25).
2009-05-08 16:56:44 | 관리자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믿으면' 충분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함께 교제를 나누며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은 철학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이 철학은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복음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약 2000 년 전에 사도 바울은 이 문제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염려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 11:3-4)
고린도 교회는 부주의하고, 육적이며, 비성경적인 관념을 용납했다. 바울은 만약 거짓 교사들이 그들에게 와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선포할 경우, 고린도 교회가 거짓 교사들로부터 분리되는 대신 그들을 용납할 것임에 대해 염려했다.
이것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묘사한 것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중하게 시험하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복음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대신에 그들은 관용과 "다양성 내에서의 연합"을 자랑했다.
이에 관한 완전한 실례(實例)가 '예수님을 위한 행진(March for Jesus)'집회이다. 이 집회는 매년 개최되며, 신앙고백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된 증거를 보이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을 시도한다. 예수를 위한 행진의 캐나다 국제 조정자인 마티 클레인은 금년에 몰몬 교도들이 행진에 참여해도 좋다고 증거했다. 오타와의 샤프(Alan Sharpe)는 5 월 2 일 클레인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예수님을 위한 행진에 관심이 있다. 그 행진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몰몬교도들도 참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클레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누구든지 참가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이 행진이 예수님을 위한 행진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행사는 특정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오직 한 인격(예수)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조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나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샤프는 5 월 11 일에 다시 편지를 써서 몰몬교가 예수님을 위한 행진에 참가하는 것에 관해서 확정 여부를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내가 스스로 선한 몰몬교도라고 부르기를 원할 경우, 루시퍼가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수님은 일부다처주의자였으며, 그분의 아내로는 마리아, 마르다(나사로의 여동생), 막달라 마리아 등이 포함된다는 장로들의 가르침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이것이 정통 몰몬주의의 전부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믿으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찬양하기를 원하는 경건한 몰몬교도가 예수님을 위한 행진에 여전히 참가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클레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하나님과 본인 외에는 아무도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만약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만약 우리가 그분과 개인적인 만남의 교제를 가지며,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주한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다. 여하튼, 나는 다음 사항을 계속 주장하는 바다. '누구든지 참가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이 행진이 예수님을 위한 행진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행사는 특정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한 인격(예수)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조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나 다른 이들이 그들의 다양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엄청난 무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거짓 그리스도들 중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경배를 받는 성병(wafer) 예수
2. 일부다처주의자인 몰몬 예수
3. 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현대주의자(Modernist) 예수
4. 하나님이 아닌 유니테리안(Unitearian) 예수
5.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을 보편적 구제주의자(Universalist) 예수
6. 부유한 성공주의자 예수
7. 사람들의 영을 파괴하고 그들을 통제 불능 상태로 웃게 만들며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하는 웃는 예수
8. 한 번도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자아상 만을 세우려는 자존(自尊)(Self-esteem) 예수
9. 자유주의 신학의 창시자인 혁명가 예수
이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거짓 그리스도들 중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 교사들을 식별하기 거부하는 자들과 거짓 교사들과 거짓 복음들을 드러내기 거부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거짓 예수를 미워하지 않고 참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단지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선포하고 논쟁에 빠지지 말도록 자신을 부르셨다고 주장하는 자는 크게 미혹된 자이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로써 우리가 이룬 그것들을 우리가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느니라."(요이 7-9)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으로 얻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글을 쓰려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언 들어온 어떤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유3)
2009-05-08 16:56:04 | 관리자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창5:1).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마1:1).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고전15:45).
성경은 두 명의 상징적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인물은 아담이라 불리며 두 번째 인물은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 혹은 하늘로부터 오신 주(고전 15:47) 등으로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첫째 아담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한 책임을 지고 있다(롬5:12). 반면에 마지막 아담은 첫째 아담이 행한 것을 되돌리기 위해 즉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왔다(롬5:17; 히9:26). 구약성경은 첫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것으로 그들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창5:1-27). 구약성경에는 아벨, 에녹,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등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런 훌륭한 사람들 모두가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도시를 소망하면서 결국 죽는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의 모든 세대가 죽는다는 것이 구약성경이 보여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사람의 최대의 원수인 사망을 이기신 분, 영원한 도시를 예비하시고 성도들을 맞으러 다시 오시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한 세대 뿐이 없다(시22:30; 사53:8; 벧전2:9). 그분 안에는 단 한 세대뿐이 없으므로 그분에게서 난 자들은 과거, 현재, 미래에 상관없이 모두 형제, 자매이다. 마귀는 세상의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요일2:16)으로 첫 아담을 좌절시키고 죄를 이 땅에 가져왔으나(창3:5-6)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그것들을 다 말씀으로 물리치고(마4:1-11) 공생애를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남으로써 마귀의 최대 무기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구원 사역을 완수했다(히2:9-18). 첫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육체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분께서 육체로 부활한 것 같이 그분의 의를 힘입어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육체적으로 살 것이다(고전15:51-57; 살전4:13-17).
2009-05-08 16:54:19 | 관리자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마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거룩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완전무결한 희생물이 필요하지만 피조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으므로 아들 하나님은 스스로를 비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났다(빌2:5-7).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의해서는 필연적으로 피를 타고 죄가 들어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만 했다. 그분은 아담의 자손이면서도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피는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서 태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후에 형성되는데 산모의 자궁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에게는 모체로부터 단 한 방울의 피도 주어질 필요가 없다. 피는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서 태아가 형성된 이후에 형성된다. 산모는 자기의 자궁 내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가 몸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공급하지만 태아에게 있는 모든 피는 태아 자신에게서 생성된 것이다. 즉 수태될 때부터 태아의 출생 때까지 단 한 방울의 피도 산모로부터 태아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의해 수태된 예수님은(눅1:35) 죄인인 마리아의 피를 단 한 방울도 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담의 죄를 나누어 갖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은 그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부른다(행20:28).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솔로몬의 후손인 요셉을 양 아버지로 둠으로써 왕가의 계보를 물려받았고 역시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나단의 후손인 마리아를 어머니로 둠으로써 법적인 계보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분은 요한이 기록한 대로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중 하나인 처녀 탄생의 신비이다.
2009-05-08 16:53:21 | 관리자
그리스도(Christ, 크라이스트, 기름 부음 받은 자): 히브리말 메시아에 해당하는 그리스말. 이것은 보통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메시아, 예수 참조. 고대의 유대인들은 대언자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메시아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점차 그 개념이 희박해져서 정작 유대 땅에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에 그리스도를 향해 잘못된 개념을 가진 채 로마를 쳐부수고 자기들을 그들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이 세상의 정복자 혹은 군주를 고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구원자의 겸손한 모습과 별것 아닌 듯한 외적 모습에 분개했고 현재의 유대인들 역시 그리스도 당시의 그들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옛 조상들이 구약시대에 알고 있던 메시아와는 다른 모습의 메시아를 꿈꾸고 있다.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은 메시아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고 존귀를 받기도 하며 비천해지기도 하고 주인이며 종이고 제사장이며 희생물이고 통치자이며 종이고 죽음에 빠지지만 죽음을 이기는 승리자이고 부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며 왕이며 동시에 슬픔을 아는 자로 알고 있었다. 실로 이와 같은 모순들은 모두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공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없지만 대언자나 사도들이 말하는 기름 부음은 성령님의 내적/영적 기름 부음이다. 비록 구약시대에 제사장이나 왕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그것은 다 상징이요 비유에 지나지 않았고 실체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그리스도는 우리 구속자의 공식 호칭이며 단순히 우리 주님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을 간과하면 성경의 많은 구절이 힘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리스도 대신 유대인들이 원하는 메시아 즉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생각하면 그 의미가 확실히 살아난다. 마2:4에서 헤롯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느냐?”고 다그쳐 물었는데 실로 그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해 물은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할 때에도 그는 그분이 구약의 대언자들이 말한 그 메시아라고 말한 것이다(마16:16). 이 점에서 마귀들도 마찬가지이다(눅4:41). 신약성경의 후반부로 갈수록 예수라는 이름은 덜 쓰이고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우리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분을 깊이 살펴보고 제사장, 왕, 대언자로서의 그분의 직무와 겸손과 영광의 상태에 계신 그분을 볼 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과 함께 계시는지 볼 수 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함이 드러나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밝혀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과 언약과 규례 등과 관련된 그분의 관계와 성도들의 특권과 의무와 섬김 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감히 그분을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골3:11).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선도 참조(65).
2009-05-08 16:13:42 | 관리자
종교와 복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죄 아래 있는 인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하나님을 찾으면서 여전히 흑암 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에”(히9:26), “마지막 날들에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2). 죄들의 용서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는 복음이 “돋는 해가 되어 위로부터 인류에게 임하셨다”(눅1:77-78).
세상 끝에 주어진 복음은 인류의 마지막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고 말씀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2:13)고 말씀하신다.
복음(Gospel)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 중의 하나인 누가복음 2장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천군 천사들의 대 합창소리로 꽉 차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눅2:10). 천사가 “큰 슬픔의 종교를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이 복음을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마귀의 궤계는 늘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가라지로 심겼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헤롯에게 고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무리를 향하여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나니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언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책망하셨다.
1984년, 로마 교황의 벨기에 방문을 앞두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단넬스 추기경이 발표한 3․18선언 즉 “카톨릭 교도는 기독교인보다 더 종교적이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로마 천주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을 때 사실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없는 ‘복음’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가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잘 음미하길 바란다(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종교(Religion)란 단어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님도 종교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전 성경을 통해 단 5번 언급된 이 단어는 종교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것이 전부이다(행26:5; 갈1:13,14; 약1:26,27). 반면에 신구약 성경에 120여 번 줄기차게 언급된 복음 즉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고 말씀한다. 종교는 인간을 규율의 틀에 묶어 질식 상태에까지 끌고 가서 결국 복종하게 만든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을 종교라는 감옥에 처넣고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정신을 말살하여 자유로이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약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후3:17)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안전한 피난처를 추구하면서 신앙의 모든 결단과 모험으로부터 도망가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의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추기 위해 열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 머무실 수 없는 분이다. 종교는 전통과 제도와 의무를 분담해 줄 사제를 만들어 낸다. 사실 종교가 만든 규율 및 법전이 결단성 없는 자에게는 복음보다 더 편리하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들 때까지 변형된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라는 우상의 고향이다.
기독교인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성취되리라.”(마5:18)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터를 닦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히3:1)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길을 발견한 천국 백성이다. 이렇듯 광야의 소리, 물가의 복음은 종교와 상관없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의 종교는 염소들의 놀이터가 되어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늘 돌질로 맞이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23:37)라고 탄식하셨다.
오늘날 예루살렘 시에는 여러 종교의 견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처음부터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의 상징이던 예루살렘 시 바깥에 위치한 베들레헴의 구유 통에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 복음은 예루살렘 시 바깥에 있던 갈릴리에서 힘을 얻었다.
인간의 전통에 중독된 자들의 질문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등과 같이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규율에 매이지 아니하셨고 이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의 스캔들이 되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종교적 환경을 떠나 산꼭대기 변화산 상에서 변형된 자신을 보여 주셨다.
종교 안에서는 ‘나’를 부르짖지만 복음 안에서는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주님 제일 주의가 생긴다. 종교는 전통 자랑, 건물 자랑, 이생의 자랑으로 꽉 차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dung) 즉 똥으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주의자들은 직분을 직위와 감투로 착각하고 섬기려는 자세보다 군림하려 들며 그래서 이들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방해를 받는다. 직분을 받은 자들이 종교 안에 머물 때에는 저 옛날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토해 낸 고백 즉 ”화로다 나여…나를 떠나소서.”라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을 이해할 수 없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한 대로 말씀을 써 먹지만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창녀도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셨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가지고 종교 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분께서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 3년 반이나 물고 늘어지셨다.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 눈먼 안내자들아!…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회칠한 무덤들아…”(마23장).
그들은 육백 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 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한 가지 명령은 지키지 못했다(요13:34-35). 실로 그분은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했다. 그 결과 그들의 교만은 시기 증오로 변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분은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 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종교는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복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중에서 나온 ‘복된 소식’이다. 이 길은 ‘좁은 길’(마7:13,14)이기에 우리 주님은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눅12:32)고 위로하셨던 것이다. 외형적인 것은 점점 크고 비대해지며 목청도 높아지는데 속은 비어가고 진리의 증언은 자취를 감춘다.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가 이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준다.
외양의 크기로 성공을 과시하고 내가 헌신자라면 많은 사람과 돈이 필연적으로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외양의 크기와 영적 세력이 병행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을 가르치신다(이것은 특히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자리를 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인간은 큰 사업과 큰 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러한 강조는 육에 속한 일이다. 낡고 중생하지 못한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육에 속한 오락과 습관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낙타와 하루살이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21세기 초엽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배교(살후2:1-8)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여 사탄이 수 천 년 동안 동원한 수법 즉 “대화로 풀어 보자.”는 등의 감언이설에 속아 천주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진 자들 곧 하나님보다 더 선한 체하며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양들을 이끌고 이리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저들의 미소 뒤에 숨겨진 칼을 보지 못하는 소경 지도자들은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및 타협의 명수’로 둔갑하였고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한국 교회는 이제 로마화 즉 바빌론화 되는 재난에 처해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붕괴되는 아파트와 같을 것이다. 아파트에 가만히 들어온 침입자(사탄의 에큐메니즘 세력)에 의해 아파트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데도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있는 주민들(교단 및 개 교회)은 자기 집 하나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건물이 붕괴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결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타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 색을 검다고 힘주어 말할 때 사탄의 세력은 그를 부정적인 자, 종교적으로 완고한 자로 몰아 부친다. 그래서 때로는 검은 색을 희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자 즉 진정한 의미의 완고한 자가 논쟁에서 승리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며 그래서 비열한 인신공격은 결코 크리스천다운 행위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결코 이런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기만해 오고 있는 조직 즉 ‘한 몸에 두 흔’(종교와 정치)을 공유한 바빌론 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이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그 엄청난 가공할 교리들과 그 끔찍한 과거의 역사 앞에 어찌해서 다 벙어리가 되었는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사탄의 최대 보루인 천주교에 무지하여 하루살이 이단들은 걸러 내고 오히려 이단들의 어미요, 초대형 이단(Super Cult)이라 할 수 있는 천주교(낙타)는 삼키는 일치 운동에 깊숙이 빠져 있다. 또 마땅히 입을 열어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이 모양 저 핑계로 입을 다물고 있어 요한복음 12장 42-43절 말씀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치리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되 바리새인들로 인해 회당에서 쫓겨날까 염려하여 그분을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가 진리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지도자가 죽어도 흩어지지 않는 이단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요직을 잡고 있는 이러한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다. 지금이야말로 먼저 교회 안을 급히 돌아 볼 때가 아닌가?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가지고 단순하고도 순전한 복음을 요란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자들 즉 스스로 지혜롭다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이제는 점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없이 멀리 떠났고 그래서 이제는 바빌론 종교를 답습하여 저들의 행위와 같은 행위를 하다 보니 심지어 저들이 변한 것으로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한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이다. 천주교와 일치 운동에 빠져 있는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믿고 있는 천주교도들은 성경과 로마 카톨릭 주의 이 둘을 다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생명과 사망을 가른 것처럼 옛 대언자들의 기개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가르지 않는다면 양들은 계속해서 여전히 방황하게 될 것이다.
로마 천주교는 마귀의 최대 걸작품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바빌론 종교의 심벌인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세계 통치를 꿈꾸었던 카이사르(시이저 혹은 가이사)의 재를 담은 청동 지구본을 올려놓았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자처하며 지상의 세속 통치권을 주장해 온 로마 제국의 후예들은 그 재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세속 권세를 추구해 왔다.
천주교 사제 플레처(Philip Fletcher)는 그가 편집하는 천주교 기관지에서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면 그는 적그리스도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일명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Hon. G.A.Spencer) 경은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면 그것은 마귀의 걸작품이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1899-1981) 박사는 그의 시리즈 설교 ‘마귀의 간계’(엡6:11)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귀의 최대 걸작품이다…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로마 교회 즉 천주교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약 로마 교회가 변한다면 스스로 과거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로마 교회는 같은 모습으로 남는다…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969년 영국복음주의협회에서 선포한 메시지에서 고린도전서 14장 8절 말씀 즉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경고의 나팔을 울려야 할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예수께 나오세요.’ 혹은 ‘그리스도께 나오세요.’ 라고 설교하는 기독교는 로마 종교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복음주의 전도 캠페인을 벌리는 사람들이 ‘당신은 천주교인이세요? 그렇다면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세요.’라고 한다면 그 전도자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고전 어학자이자 영국 왕실의 헨리 8세의 주치의로서 완미한 로마 카톨릭 교도로 말년에는 로마 교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던 리나크러(Thomas Linacre 1460-1524)는 생전 처음으로 신약 성경을 읽다가 견디지 못해 그 책을 던지면서 “이 성경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첫 눈에 로마 교회의 조직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회의 개념과는 상반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로욜라 심리연구소 창설자로서 세계 천주교 심리학자 및 정신병 학자 모임의 국제 위원회 부회장이라는 요직을 겸하고 있던 전 예수회 사제 신학자 파드로사는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학 논쟁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다가 거듭난 후 로마 교회를 떠났다. 이것은 1950년대 전 유럽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후에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가 된 그는 여러 책을 집필하였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는 기독교이다. 천주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36판이나 인쇄된 장기 베스트셀러 「이단들의 왕국」을 집필한 마틴 박사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잘 내렸고 맥도웰도 이단들의 특성 11가지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내린 이단들의 특성에 완전하게 부합될 뿐 아니라 그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큰 바빌론의 신비’ 즉 천주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눈이 가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바빌론의 신비는 전 성경의 구석구석에 밝혀져 있다. 계시록에 언급된 ‘땅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저 큰 도시’(계17:18)에 대하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석가들도 별 수 없이 저들의 교부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두 번째 바빌론 로마, 서방의 바빌론 로마’로 언급하였고 제롬(Jerome, 342-420)은 “로마는 계시록에서 바빌론으로 지칭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가이자 변증학자였던 이탈리아의 바로니우스(C. Baronius, 1538-1607) 추기경은 “계시록 안에서 로마가 바빌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 프랑스 예수회 학자 벨라르민(R. Bellarmine, 1542-1621) 추기경은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빌론이라 부르고 있다.”고 썼으며 루이14세로 하여금 낭뜨 칙령을 번복하게 함으로 프랑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인 보쉬에(J. B. Bossuet, 1629-1704) 주교는 “그 특징이 너무나도 분명하여 바빌론에서 로마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모든 교부들은 계시록의 바빌론이 로마라고 가르쳤다.”고 시인하였다.
뉴먼(John H. Newman, 1801-1890) 추기경은 1840년 로마 교회에 가담하기 전에 로마를 ‘심판으로 멸망하는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공포로 가득한 계시록의 궁벽한 땅 즉 매우 후미지고 으슥한 땅’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또 예수회 학자 헌터(S. J. Hunter)는 그의 저서 「교의신학개요」에서 “계시록에서 바빌론이 로마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다.
루터의 개혁 이후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로마의 특성은 바빌론으로, 교황의 권위는 적그리스도’로 평가하였다. 1970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의 추천문까지 실어 출판한 영문판 천주교 성경의 계시록 14-18장에 나오는 바빌론에 대한 관주 설명은 모두 그것이 로마임을 밝히고 있다.
이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교황권 조직이 거짓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나리니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되 곧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그자를 멸하시리라.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 모두가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8-12).
로마 교황권 제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과거 14년 동안 예수회 사제로 지낸 휀스브뢰흐(G.p. Von Hönsbröch)가 지은「사회 문명에 미친 교황권 제도」라는 책의 서문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교황권 제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제도로서 가장 치명적이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기만의 조직이다. 교황권 제도 - 저 거대한 기만의 조직…교황권 지상주의는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제도로서 오만하고 냉담하며 넓으면서도 은밀히 세워지고 고도로 마무리 된 조직이다.
또 그는 자기의 다른 저서 「교황권 지상주의 그 독과 해독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황권 지상주의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 정치 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세계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해 오고 있다…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 근거를 찾고 있는 신성한 기관이라 자칭하지만…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어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다.
영국의 사회 철학자이며 정치 경제 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그의 명저 「국부론」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교황청 세력을 두고 다음과 같이 소신을 피력하였다.
로마 교회는 국가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이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로 5권의 방대한 교황사를 펴낸 후 영국 교회 감독을 지낸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 1901)은 이보다 더 단호하다.
로마 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국가 즉 전제 독재국이다.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거의가 통치와 지배에 관한 것이고 전 신약 성경을 꿰뚫고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겸허와 봉사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18:36)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아니라 늘 로마 제국 주의의 영광인 세상 권력을 추구해 온 로마 교회를 향하여 영국의 정치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그것은 패망한 로마 제국의 유령으로 그 무덤 위에 왕관을 쓴 채로 앉아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바빌론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클리포드(W.K.Clifford, 1845-1879) 교수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천주교 사제로부터 피신시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설교의 왕자‘로 알려졌던 스펄전(C.H. Spurgeon, 1834-1892) 목사는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축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그는 또 미래의 사역자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를 약탈하고 있다.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로마 종교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이 본질이 언젠가는 선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대 바빌론의 신비에 대한 오해이다.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복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기독교회의 종교화 현상을 쳐다보는 것보다 슬픈 것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우상의 소굴처럼 둔갑한 오늘날의 교회 내의 장식과 강대상을 보라. 이것은 타락의 극치이자 최대의 위기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탄의 종교가 자기와 닳은 기독교에 침투한다. 그들은 기독교 용어를 구사하며 대화를 이끌어 간다.
오늘날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 로마 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 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 세례”, “그리스도를 영접함”, “은사 경험”, “케리그마” 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그들은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 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아 넘어간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 로마 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이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처럼 “과거 카톨릭과 현대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 제2바티칸 공회 이후 카톨릭의 신학 사상은 개방적으로 변했다.”라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바티칸 공회의 교황 요한23세, 바오로 6세의 선언이 밝힌 것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무엇이 바뀌었단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 마리아, 성자, 전통 숭배가 해제되는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탄의 세력이 “빛의 천사로 변장하고”(고후11:13-15),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자들도 속이리라.”(마24:4-28)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새 시대 (뉴에이지) 운동과 새 세계 질서
유럽공동체의 대부 노릇을 해 온 로마 교황청은 유럽 통일뿐만 아니라 세계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새 시대 운동과 새 세계 질서를 추진해 왔으며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세력의 조종 하에 있는 동일한 것이다. ‘질서’(Order)로 알려진 이 단어는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피라미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 교회의 교단들을 부를 때 사용되는 명령 용어이다. 독일 튀빙겐 대학 로마 카톨릭 신학부의 실천 신학 교수인 글라이나헤르(N. Gleinacher)는 마가복음 10장 24-44절을 인용하여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 인간 사회에 남아 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하였다.
비오 12세 이후의 모든 교황들이 새 시대 운동(NAM)과 새 세계 질서(NWO)를 지지해 왔으며, 제2 바티칸 공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의 측근으로 로마 교황청 신학교 교수였던 전 예수회 사제 마틴(M. Martin) 박사는 최근에 자신의 저서에서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것을 지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고 머지않아 로마 교황의 주도 하에 세계단일정부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였다.
예수회 창설자 로욜라는 생전에 로마와 파리를 자신의 꿈을 펴기 위한 거룩한 도시로 여겼는데 오늘날 정확하게 이 두 도시는 로욜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새로운 로마 제국’ 건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으며 한 몸에 두 얼굴을 가졌던 야누스의 후예들은 이제 이 도시들을 본거지로 삼아 종교와 정치 권력을 가지고 새 시대 운동, 새 세계 질서를 조종하고 있다.
“외적인 종교로서의 로마 천주교와 법률과 권력의 국가로서의 로마카톨릭교는 복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아니 근본적으로 복음과 모순이 된다.”는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의 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그리고는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열심히 묻고 상고해야 한다.
2009-05-08 16:12:44 | 관리자
천주교의 본질 - 마귀의 간계
● 마틴 로이드 존스
‘마귀의 간계’를 주제로 한 시리즈 설교 중 하나인 본 설교에서 20세기의 영적 거장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 카톨릭 시스템의 간교함을 조목조목 잘 보여 준다. 특별히 그는 구원에 대한 천주교 가르침이 성경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첨가시킨 것으로서 사람의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파고 들어와 파멸을 가져옴을 보여 준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성경적 천주교 분석은 과연 우리가 새로운 태도로 로마 카톨릭 주의를 포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행한 대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대적해야 하는지 잘 보여 준다.(Evangelical Press, 136 Rosendale Road, London, SE21 8LG, England)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6:11-12).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이제 크리스천 지성인들은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회의가 개최됩니다. 또 이 같은 일을 기뻐하는 자들은 이제 우리 즉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어떤 측면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크리스천 정신을 놀랍게 구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 같은 움직임 때문에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앞날을 내다볼 때 이 문제가 긴급한 문제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추세가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우리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될 일들을 예상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비 카톨릭 국가인 우리나라 - 영국 - 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다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주시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항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로마 카톨릭 주의에 항거하는 일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실질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프로테스트들의 부정적인 항거 노력은 별 효과가 없음이 기정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로마 카톨릭 주의가 확산된 원인은 자기가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무지함과 무기력함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시간을 들여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으로 인해 저는 이 문제 곧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간계’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었습니까? 먼저 저는 오늘 개개인에 관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카톨릭 신자이면서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 신자이면서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여 드리고자 하는 바는 카톨릭 교도로서 크리스천인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 때문에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체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구원받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개인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치적 측면이 매우 중요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 체제의 역사적 증거 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그 체제가 스스로를 정치 세력이라 주장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정치적 측면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일반 성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이 관여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영적인 측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며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I. 로마 카톨릭 체제
자,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로마 카톨릭 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는 기독교의 믿음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이므로 저는 주저하지 않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보통 배교를 가리켜 ‘기독교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어떤 이들은 “글쎄요, 지금 당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칭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교 체제요, 배교 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를 분명히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해서 배교 체제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에 무언가를 첨가하고 거기서 이탈하여 배교 체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마귀의 온갖 간교함이 들어오며 마귀의 간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정통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통성에는 전혀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에 앉아 계심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에 관한 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적으로 정통입니다.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이런 점에서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입장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보더라도 그들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혜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런 면에서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위와 같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아 마땅한 첨가물’ 즉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그들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는 그 체제의 거짓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교리는 그럴듯한 위조품이며 성경이 기록한 대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다름 아닌 계시록의 음녀입니다.
참으로 이 문제는 지극히 교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간교함’ 즉 마귀의 간계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간교함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 체제의 간교함은 너무나도 커서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이런 사례를 여러 번 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도가 이혼한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일부 고매한 카톨릭 교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반문하곤 합니다.
글쎄요. 사실 그들은 이런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결코 참된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해명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궤변 체계가 이러하며 고도의 논법이 이러하므로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오는 문제들을 다 대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실제로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 나라 - 영국 - 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미국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남미의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즉시 그것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비슷한 조건의 국가들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독일이나 기타 그와 비슷한 국가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곧장 그 체제가 국가마다 서로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것이 동일한 로마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모두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얼마든지 자기의 색깔과 모습과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는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장시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으며 여러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기를 변장하는 데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 - 영국 - 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주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또 비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미신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천주교가 관용을 베풀고 기꺼이 의견을 들어 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친근한 모습을 취하지만 다른 후진국에서는 아주 인내하지 못하며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체제이며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시스템이라는 저 거대한 교회와 체제는 온갖 간교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갖 불의의 속임수 가운데서 마귀의 간계를 온 천하에 드러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와 같은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즉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예언의 말씀이 이것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이것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부상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기관은 이미 세상의 권력을 장악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계시록 13장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 계시록 17장에서는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로 제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체제는 늘 이러했으며 지금도 이러하고 앞으로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실제로 이 체제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성취해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회 내로 몰래 기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회 전체를 실질적으로 독점했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이 체제가 천천히 간교하게 기독교회 속으로 기어 들어와 자기 방식대로 일하면서 기독교 세계를 장악했고 그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세상 권력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II.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대 오류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과연 어떤 일을 행했을까요? 이 문제를 적절히 다루자면 최소한 몇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설교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 저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여 주는 몇몇 중요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제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했는가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만큼 크게 정죄를 받는 행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새긴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에게 형상들에게 경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동상과 조형물과 초상화를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큰 천주교 성당에 가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사도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여러분이 그 동상의 발가락을 자세히 보면 그 발가락 중 하나가 달아서 매끈매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희생물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과 동상과 유물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과 뼛조각과 그가 사용하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특별한 장소에 두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우상숭배입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체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들 가운데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분명하게 “카톨릭 교회 밖에서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구원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 사이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스스로에게 그와 같은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 같은 주장을 찾아볼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로마 카톨릭 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자기만이 진리를 묘사하고 진리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모든 신자의 보편적 제사장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령님의 조명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들은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바르게 말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 성경의 종결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계시가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에다 그런 계시들을 첨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덧붙인 전통(전승 혹은 유전)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취해온 기만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들을 자기들의 전통에 첨가시켜 왔으며 바로 여기에 이 체제의 간교함이 놓여 있습니다.
결국 로마 카톨릭 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전체주의가 요구하는 그런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우리가 믿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교회는 자기가 우리의 영혼과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 준 대로 그리고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주의는 획일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시스템은 공산주의가 자기 백성의 혼과 자유를 유린하는 것처럼, 군국주의의 히틀러가 자신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속한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실로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전체주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권위를 가진 존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보여 주는 두 번째 증거 혹은 이 문제로 인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로마 교황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입니다. 교황은 보통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일컬어집니다. 그들은 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면서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영적 직계 후손이며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위권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 즉 성부(Holy Father)라 부르며 극도의 신성 모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아버지는 단 한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 없으므로 땅 위에 있는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말라.” 이들은 이 같은 명백한 말씀을 어기면서 교황을 ‘성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추기경 회의에서 “권위 있게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1870년에 교황 무오설을 교리로 규정하기 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법적으로 그렇게 규정되었기에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교황의 선언은 그리스도 그분처럼 절대무오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이 보다시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이 말씀하듯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 밑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바칠 수 없는 경의와 흠모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제사장 체계’ 즉 ‘만인 제사장 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즉 사제들(priest)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직 수임을 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다 제사장 왕국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제사장(사제)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교회에서 성직 수임을 받은 이 사람들만이 사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제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지닌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례 받는 물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 사제가 세례 때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제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과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종종 화체설이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제가 주는 빵이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빵의 겉모습과 색깔은 그대로지만 그 본질은 변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화체의 기적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성사(혹은 성례전)에 관한 교리로 이어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지만 저는 이 중에서 특별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두 성사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합니다. 사제가 물과 빵과 포도즙에 기적을 일으키면 그로 인해 이것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되며 이런 기적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것을 가리켜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세례 성사에 적용하자면 물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뿌리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혹은 천주교 성찬식의 경우 신도가 빵을 취하여 먹으면 - 주의 만찬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즙은 일반 성도들이 마시지 못하게 합니다 - 그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이며 간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천주교회가 첨가한 것으로서 신약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곧 신도들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사제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들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면죄를 선언하고 죄들의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자들 곧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성경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교육을 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는 서로에게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결코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로마 카톨릭 체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왔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분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가서 고백합니다.
이제 네 번째의 드러난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터무니없는 궤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의 마리아 숭배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으며 우리 모두가 일차적으로 그녀에게 찾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성당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 상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사람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가 있으시므로 너무 엄격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를 설명하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무서운 분이시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직접 다가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리아가 거기 있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며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中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성모 마리아가 우리 영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점진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무엇인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그들은 주후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정식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무염시태‘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신 것처럼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그들은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곧 마리아가 일반 사람처럼 죽어 묻힌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 예수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 주고 그녀를 부각시키며 결국 그리스도를 시야에서 가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에 이어 ‘성인’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가르침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자, 그들의 가르침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삶을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공덕’을 획득하여 쌓아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넘치도록 공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나 내가 공덕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고 간청해서 그들이 보유한 여분의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여분의 공덕을 나누는 일’이라 하는데 이것은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에게 공덕이 부족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자기들의 공덕의 여분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은 공덕이 성인들에 의해 추가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이단 교리를 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그분의 성육신, 처녀 탄생 및 기타 다른 정통 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첨가를 통해 마귀의 간계가 들어옵니다. 언뜻 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옳은 것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다 너무나도 잘못된 것들을 첨가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옳은 것 중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간계입니다.
3. 이제 저는 세 번째 오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저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함과 충분함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첫 번째 예로 그들이 칭의(Justification)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칭의는 교회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시금석이며 프로테스탄트를 존재하게 만든 원인으로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칭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따금씩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곤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칭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 주의가 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로마 카톨릭 주의는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주의가 전 세계 많은 국가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죄성을 지닌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을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자신의 칭의를 위해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반면에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으며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아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 즉 똥과 같고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사람의 의에도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궁극적으로 사람이 세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고 여러분 안에 의가 주입되어 여러분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원죄가 말소되며 동시에 이 같은 긍정적인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로마 교회는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지 않고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위험한 이단 교리라고 비난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체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이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과연 이런 체제 하에서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사제가 베푸는 세례를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체제 안에서는 모든 일에서 교회와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은 그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으며 반드시 중간에 낀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중재자가 있으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이처럼 그들은 중대한 칭의 교리에서 거짓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천의 생활 문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강조하기보다 의식과 의례를 준수하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체제 속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을 강조하거나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의 규율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키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 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해야 하며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사제를 찾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미사를 통해 죄가 덮어졌고 여러분은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므로 이제 계속해서 여러분의 길을 가도 됩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 즉 아주 간단한 삶 대신에 여러분은 의식과 의례와 절기를 준수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또 다른 심각한 오류는 이들이 구원의 확신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당신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이 세상 삶에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반박하는 내용이며 이것은 어느 면에서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마귀의 것을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실 마귀 외에는 비범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 만한 존재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가 말소되고 여러분은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세례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덮어 준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사역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죄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반드시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의 종말을 맞게 되면 세례 이후에 지은 죄 문제로 인해 지옥 정죄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때 과연 그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아무 문제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만이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하면서 사제에게 특이한 고백을 하게 되고 그러면 궁극적으로 면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문제를 거의 다 풀어 주었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연옥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죄 즉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씻어 버리기 위해 우리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땅에 남아 있는 우리의 친척들이 우리를 위해 돈을 지불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온갖 면죄부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촛불과 그들이 지불한 돈을 소유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내면 낼수록 연옥에서 이러한 죄들이 더 빨리 처리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속히 옮겨갈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 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추가 계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한 마디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에 의해 그분의 공덕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배교 집단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III. 결론
이 모든 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갇혀 있으며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은 우리가 종종 ‘대륙의 일요일’이라는 생활 방식에 젖어들게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만 하면 그 날의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 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체제를 따르면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이렇게 되다 해도 그리 놀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로부터 그리하지 말라는 호소를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가 일러 준 대로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교회에게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며 궁극적으로 교회가 그들의 영혼을 돌봅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마침내 그들은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잔인한 핍박을 가해 왔으며 사실 이런 핍박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렸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기회만 주어지면 어느 곳에서나 그런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시간만 낭비했을까요? 과연 우리가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할까요? 다른 방향에서 로마 카톨릭 주의를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기뻐해야만 할까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다 같이 크리스천으로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기뻐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직면해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에 대해 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위조 지폐와 같이 기독교를 위조한 체제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바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자주색 옷을 입은 여자’이며 가장 끔찍한 속임수의 극치를 이룬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 체제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무신론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결코 편견을 지닌 열성분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해 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루터의 눈이 열렸고 칼빈의 눈이 열렸으며 낙스의 눈이 열렸고 모든 개혁자들의 눈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열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성경 속에서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이 체제를 저주하며 그것에게 경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목숨을 내걸고 일어서서 이 체제와 맞서 항거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 괴물 체제가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성경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체계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성경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진리를 위해 용감히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로 접근하려는 갖가지 시도를 기뻐한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시도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Smithfield) 근처도 가지 말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서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브래드포드와 나머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 주의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화해의 시도를 수용한다면 여러분은 이 프로테스탄트 선구자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했어. 그들은 실수를 범했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 화해론자들의 그럴듯한 논쟁에 말려들지 말기 바랍니다.
천주교 문제가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된 것은 무선 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대중 매체에 이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매우 예의가 있고 친절하며 훌륭하고 무척이나 융통성 있게 보입니다. 그들은 종종 우리 프로테스탄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렇게 천주교의 외양을 극구 칭찬하면서 금방이라도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끼를 따먹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은 과거만 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목사님은 20세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가 가장 큰 교만을 부리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거만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체제가 변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우리는 절대무오하며 교황은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결코 실수를 할 수 없다.”고 이미 굳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주의의 핵심 주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체제는 자기가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동일합니다. 혹시 변한 것이 있다면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실로 이 체제는 16세기에 자기가 가르쳤던 것들에다 교황의 절대무오성 같은 교리들을 추가시켰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위조품이요, 가짜 교회이며 가장 저질의 매춘부요, 세상에서 가장 마귀적인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거절하고 정죄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기독교뿐입니다. 듣기 좋게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기독교는 단 1초도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숫자만 불려 줄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집회를 하면서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천주교회로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위조품 교회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뿐입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 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도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신학자였으며 칼빈도 그러했고 개혁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진리의 체계를 제시하고 상세히 가르쳐 줄 때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타격을 받고 그 체제 전체가 뒤흔들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의 카톨릭/프로테스탄트 교류 및 화해 상황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법 중 이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여러분의 책임은 실로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거짓된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은 거짓 체제에 속아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러분과 저의 책임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똑바로 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으며 성령님의 복을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께서 강력한 부흥과 함께 우리에게 임하실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오직 이 같이 강력한 부흥만이 이 가증한 체제 곧 자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 부르는 저 큰 음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현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깨워 주옵소서.
2009-05-08 16:11:32 | 관리자
패션오브크라이스트
● 차한
1. 프롤로그(Prologue)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개봉이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교계의 엄청난 호응과 매스컴의 지대한 관심 속에 (4월 2일~11일) 현재 전국 극장가에서 흥행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12시간을 생생하게 그린 이 영화는 독실한 전통보수파 카톨릭 신자 멜 깁슨(Mel Gibson)에 의해 제작, 감독되었는데 그는 할리우드에서 이 영화에 대한 투자를 받는 데 실패하자 사재 약 3,000만 달러(약 350억 원)를 쏟아부어 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반(反)유대정서를 부추길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투자자를 확보할 수 없었겠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이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는 뉴욕타임스와 USA투데이 등에 의해 ‘유혈이 낭자한 난도질 무비’라고 폄하되는 등 논쟁거리가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많은 홍보효과도 얻을 수 있었기에 미국에서 개봉된 지 수주가 지난 지금도 박스오피스 1위라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무튼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리면서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멜 깁슨 필름(a Mel Gibson film)이 선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특히 국내외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종교영화로까지 평가되면서 평소 문화생활이란 것을 모르고 살던 크리스천들도 멜 깁슨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열광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진정 ‘그리스도의 수난’(행1:3)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다루고 있는 영화인지 제한된 지면을 통해서 진단해보고 아울러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이 시대의 표적을 통해 우리의 영적 좌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마16:2,3).
2. 멜 깁슨(Mel Gibson, 1956~)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멜 깁슨의 영화’(a Mel Gibson film)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떠한 철학과 세계관과 신앙관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마12:34,35).
멜 깁슨은 매드 맥스(Mad Max), 랜섬(Ransom), 러셀 웨폰(Lethal Weapon), 패트리어트(Patriot),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 등의 영화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뉴욕의 보수적인 카톨릭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14살 때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주하였고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호주에서 매드 맥스에 출연함으로써 스타덤에 오른 후 다시 미국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배우와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수퍼스타이다.
깁슨은 17살부터 약 18년 동안 방황하며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다시 카톨릭 신앙(traditionalist Catholic)을 회복하면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십여 년간 제작을 시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라틴어와 아람어로만 영화를 찍고 영어 자막도 넣지 않을 것이라는 깁슨의 고집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전통적이고 신비적인 라틴어 미사가 행해지는 경우에만 미사에 참여하는 (그리고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에큐메니즘(ecumenism)을 비롯한 제2바티칸공의회에서 새롭게 바뀐 여러 결정사항들을 거부하는) 근본주의 천주교인으로서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를 카톨릭 신앙에 봉헌(dedication)하기 위해 제작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한 인터뷰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그의 신앙고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Peter Boyer, "The Jesus War" The New Yorker, Sept. 15. 2003).
3. 앤 캐서린 에머리히(Anne Catherine Emmerich, 1774~1824)
이 영화를 사실에 가능한 한 가깝게 만들기 위해 깁슨은 오랜 시간 동안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났다고 하였지만 그가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그리고 영화의 시나리오로 사용한) 책은 바로 ‘앤 캐서린 에머리히’가 쓴 ‘우리 주 그리스도의 슬픈 수난’(‘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집사재> 간, ‘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TAN books and publishers> 간)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신비주의 작가인 앤 캐서린 에머리히가 쓴 이 책이 우연히 자신의 집 선반 위에서 떨어지자 깁슨은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이 에머리히의 책을 영화화하기 위해 십여 년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이 책은 에머리히가 본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환영(visions)을 기록한 것인데 한 네티즌이 언급한 대로 ‘신앙 이상의 것을 교화하고 고무시키기 위해 대단히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매우 놀랍고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한 내용을 담고 있고, 또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나와 있는’ 전형적인 카톨릭 교리를 담고 있는 비성경적인 신비서(神秘書)이다.
에머리히는 독일 북부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침모 겸 하녀로 일하다가 28살에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녀가 된 후 건강 악화로 인해 병상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녀의 몸에는 소위 ‘성흔(聖痕)’(예수님의 손과 옆구리 쪽의 상처)이 생겼고 예수님의 삶에 대한 환영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머리히가 죽고 난 뒤 그녀가 보았다는 환영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수난’(1833년), ‘성모 마리아의 삶’(1852년), ‘그리스도의 삶’(1858~1880년) 등 세 권의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그런데 에머리히의 환영(visions)에 따르면 기독교인들(Protestants)도 연옥에 가게 되지만 아무도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천주교인들보다 더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4. 사순절(四旬節, Lent)
카톨릭 교회로부터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 칭호를 받은 에머리히의 책을 근간으로 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인 깁슨이 제작 및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 개봉일을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맞춘 것은 충분히 예견될 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카톨릭 교회에서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야(Easter Eve)까지의 40일 간인데 깁슨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하여 카톨릭 신앙에 봉헌코자 하였던 이 영화를 탄식과 참회를 행함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사순절 시작과 더불어 개봉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후 6세기경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이 사순절 절기는 (물론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종교개혁 이후에도 기독교 내에 유입되어서 오늘날도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되새기는 기간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 사순절은 대체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랄프 우드로우(Ralph Woodrow)가 쓴 ‘바빌론 신비 종교’(Babylon Mystery Religion) 등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 전설에 따르면 태양신인 담무스(Tammuz, 겔8:14)는 살해당한 후에 지하세계로 내려갔으나 그의 어머니 ‘이슈타르’(Ishtar, Easter, 행12:4)의 통곡으로 인해 신비하게 봄에 살아났다고 한다. 이슈타르의 고통으로 인한 담무스의 부활은 매년마다 극적으로 재현되었는데 이것은 농작물의 다산과 사람들의 다산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매년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이슈타르와 함께 담무스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신(god)의 귀환을 축하했는데 이것은 그 여신(goddess Ishtar, Easter)으로부터 새로이 호의와 은덕을 얻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식물이 싹을 내며 나올 때 고대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자’가 지하세계로부터 나와서 겨울을 끝내고 봄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 믿었던 사실은 성경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대언자 에스겔이 “거기에 여자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하여 슬피 울고 있더라.”(겔8:14)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도 매년 거행되는 이교도들의 봄 축제 의식과 교리들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히슬롭(Alexander Hislop)은 이 40일(四旬日)에 대해 언급하면서 - 전설에 따르면 담무스는 40세가 되었을 때에 멧돼지에 의해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40일은 담무스가 땅에서 살았던 40년을 나타낸다. - 이 기간이 ‘담무스를 위해 우는 날’로 정해졌다고 지적한다. 즉 이교도들은 이 사순절(四旬節)을 태양신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중 대축제에 없어서는 안 될 예비 기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태양신 숭배와 관련된 이교의식이 바빌론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카톨릭에서 발견되고 또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개봉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강조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도 타당한 일이라 하겠다.
5. 성경에 첨가함(adding to the Bible)
사순절과 같은 절기뿐 아니라 앞서 언급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대본(script-x)이 된 앤 캐서린 에머리히의 책을 포함한 수많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의 공통점은 성경을 언급하면서도 결코 성경에 최종권위를 두지 않는 데 있다.
이는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관한 100가지 질문’이란 부제가 붙은 책 ‘그리스도의 수난’(톰 알렌 외 지음, <다른 우리> 간; a guide to the Passion, by Tom Allen, etc; 이하 ‘100가지 질문’이라 약함) 중 제3부 ‘계속되는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로써 잘 요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략한 글들(신약성경)은 사도들이 그분과 함께 한 삼 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전달할 의도에서 쓰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진실들 곧 입으로 전해진 말, 사례, 산 체험으로 전달된 많은 진실들은 ‘거룩한 전통’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속에 성경에 없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보다 그들이 인정하는 ‘전통’에 더 권위를 두고 있는 사실로써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비성경적인 내용들 곧 성경에 첨가된 것들이 단지 성경에 반(反)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메시지를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예수님 우편에 달린 강도의 눈을 까마귀가 쪼는 장면은 정말 관람객들에게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어찌 아무런 영향이 없겠는가. 이 장면뿐 아니라 모든 첨가된 내용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 잘못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22:18, 이하 흠정역)
6. 성경에 반(反)함(contrary to the Bible)
그러면 이제 성경과 완전히 상반되는 영화의 장면들 중 일부를 열거해 보도록 하자.
먼저 깁슨의 영화는 아람어와 라틴어로 구성이 되었지만 신약성경은 다수사본이건 소수사본이건 다 그리스어로 기록이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막달라 마리아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으로 그려졌지만 성경에 명시된 증거는 없는 내용이다(요7:53-8:11).
사탄은 남자 목소리를 하는 여자로 묘사되지만 성경에서 사탄을 포함한 영계의 모든 피조물들의 성(性)은 남성이다. 그리고 사탄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유혹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것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뿐이었다(마4:1-11; 눅4:1-13). 사탄은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때 수없이 나타나지만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지 않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대어(reclining, leaning) 있지 않고 다 앉아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13:23).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성경은 그가 예수님과 떨어져 식사했음을 기술하고 있다(요13:24,25).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목을 매고 죽는 것은 소위 ‘마귀 들린’ 어린이들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지 않다(마27:3-5).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에 여러 명의 제자들이 싸우는 장면이 있지만 성경은 오직 베드로만을 언급하고 있다(요18:10).
로마 군인들은 매우 잔인하고 고통 주는 것을 즐기는 자들로 설정되어 있지만 성경에는 (백부장을 포함하여) 긍휼이 많은 로마 군인들도 소개가 되고 있다(마8:5-8; 27:54; 행21:32; 23:10,27; 27:43; 28:16).
예수님이 시몬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성경은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마27:31,32; 눅23:2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로마 군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심한 싸움과 소요가 일어났지만 성경은 이와 관련된 어떠한 소동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슬피 울고 애통하며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짧지 않은 위로의 말씀도 하실 수 있을 정도였다(눅23:27-31).
지진이 일어나 성전의 지성소 마루가 갈라지며 성전이 손상되는 장면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지진시에 성전이 손상되지 않았으며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던 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인 것을 증언하고 있다(마27:50,51; 요19:30).
예수님의 몸이 로마 군인들과 두 마리아 및 요한 등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졌지만 성경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등이 예수님의 몸을 가져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눅24-46-53; 요19:38-40).
부활 장면에서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시기 전에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지며 태양 빛이 비췄지만 성경은 돌이 굴려진 것은 제자들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날이 밝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이전에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신 사실을 밝히고 있다(마28:1-6).
7.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을 연기한 배우는 짐 카비젤(James Caviezel)이다. 대사가 절제된 이 영화에서 그는 거의 마임에 가까운 연기로 예수님의 고통과 번민을 매우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아니라 ‘예수 역’이었지만 그도 가혹한 고난을 겪었다고 한다. 특수분장에 매일 7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로마병사 역을 맡은 배우의 잘못으로 실제 갈고리 채찍을 맞기도 했다. 심지어 영화를 촬영하다 벼락을 맞고,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어깨가 탈골되기도 했다.
매일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드릴 정도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카비젤은 영화를 찍을 당시 극중 예수님의 나이인 33살이었다고 하는데 이 카비젤이 열연한 예수님과 관련되어서도 반(反)성경적인 내용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은 카비젤에 의해 (그리고 에머리히에 의해) 키가 크고 핸섬한 코카서스인(전형적인 백인, 야벳의 후손)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당시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이뤄지기 전이었고 기껏해야 다른 셈족이나 함족의 피가 간혹 섞였을 정도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코카서스인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도 분명히 예수님이 셈의 후손인 유대인으로서 인간적으로 볼 때 할리우드 스타 카비젤과 같은 미남이 아니라 오히려 볼품이 없는 분으로 증언하고 있다(마1장; 사53:2).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하)
예수님은 여자와 같은 긴 머리를 하였는데 이는 주님 자신이 제정하신 남자의 표준(고전11장)과 어긋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나사르 사람’(Nazarite, 삿13:5)이 아니라 단지 나사렛 출신인 ‘나사렛 사람’(Nazareth, 마2:23; … 행26:9)이셨을 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내가 그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영화에서는 아무도 성경에 나온 대로 뒤로 물러가 쓰러지지 않았다(요18:6).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발로 밟으셨지만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가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는다(히2:14).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여섯 번이나 넘어지셨으며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던 시몬에 의해 계속 격려를 받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유약함을 증언하고 있지 않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중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50여 년이 지나 기록된 요한계시록에서 언급이 되고 있다(계:21:5).
8. 고난(Sufferings)
성경의 사복음서는 결코 독자의 연령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17세 이상 관람가인 R등급으로 제한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 불신을 떠나 이 영화의 잔인성에 대한 혹평이 많이 나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포커스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에 맞춰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몇 대인지는 모르나 오직 한 번만 채찍질 당하셨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예수님은 채찍으로 각각 39대를 두 번에 걸쳐서 맞고 난 후 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서도 계속 채찍질 당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마27:26; 막15:15; 요19:1).
깁슨은 관람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해 당한 고난을 느낄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정말 냉정하게 의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만약 예수님께서 영화 속에서와 같은 매질(trauma)을 당하셨다면 아마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고 그전에 돌아가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히4:15).
어찌되었든 이 영화의 포커스와 달리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은 그분의 ‘육체적’ 고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화해헌물’(propitiation of God's wrath) 곧 ‘우리를 위한 죄’(sin for us) 자체가 되신 사실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요일4:10, 고후5:21, 롬5:9,10).
사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육체적 고난은 그분에게 전가된 온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 이상의 육체적 고난을 당했지만 그들의 고난을 주님의 고난에 견줄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만한 ‘영적인’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의(義)를 이루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이란 개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로마 카톨릭 신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9. 미사(Mass)
천주교인들이 사용하는 십자가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이 고통 중에 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로마 카톨릭 교리로 볼 때 우리의 의(義)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수난은 아직 ‘다 이루어진 것’(요19:30)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현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뿐 아니라 모든 천주교 의식과 기도와 성물들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깁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과 미사(Mass)의 희생이 동일한 것이라는 카톨릭 교리를 철저히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하나의 ‘미사’로 봉헌한 것인데 우리는 ‘100가지 질문’에서 이를 확인해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몸이신 빵과 그분의 피의 잔인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습니다.”(‘100가지 질문’의 머리말 중)
“십자가형 중 최후의 만찬 회상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뭔가요? … 그분은 유월절 빵이 그분의 몸이며 포도주가 그분의 피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이 새로운 제사를 실행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만찬이나 카톨릭의 영성체를 통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 모두를 위해 단 한 번 십자가 위에서 그분 몸을 희생하심은 제대 위의 희생-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로 변하는-으로 이 땅 위에 명백하게 재현됩니다. (필자 주: 이것이 바로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 유월절 음식을 그 새로운 형식을 통해 먹고 마심은 생명을 여러분 안에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100가지 질문’의 83번째 질문과 답 중)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하여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음이라.”(히10:10-14)
10. 마리아 숭배(Mariolatry)
깁슨은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대속주와 중보자가 됨을 믿는다’고 하였다(David Neff, "Mel, Mary, and Mothers," Christianity Today online, Feb. 20, 2004).
그리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근간이 된 에머리히 책 ‘우리 주 그리스도의 슬픈 수난’(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의 헌사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며, 하늘과 땅의 여왕이시며, ‘매괴’(the Most Holy Rosary)의 여인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시며, 인류의 피난처이신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하신 심장에 이 책을 바칩니다.”
또한 ‘100가지 질문’의 머리말에서 톰 알렌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을 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모범이신 마리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화 안에서 그녀의 중요한 역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시종일관 마리아 숭배를 부추기고 있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100가지 질문’에서 마리아 숭배와 관련된 내용만 발췌하여 요약해보도록 하겠다.
“왜 감독은 베드로가 마리아의 발치에 쓰러져 ‘어머니! 저는 그분을 부정했나이다.’라고 울부짖도록 한 거죠? 이 장면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경하였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간구하면 받아들여진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을 묘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46번째 질문과 답)
“마리아가 어떤 곳으로 들어가서 돌바닥 위에 엎드립니다. 그 돌바닥 밑에 방이 있고, 이 돌바닥의 아래 부분은 예수님이 쇠사슬에 묶여 매달려 있는 천정이었습니다. 이 장면의 더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요? 감독이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사이에 영원한 연결을 묘사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예언의 완결자이며 구세주인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자신을 포기한 마리아는 영원히 결합되어 있습니다.”(47번째 질문과 답)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마리아가 능동적인 참여자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확대해석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48번째 질문과 답)
“예수님이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감독은 악마와 마리아가 서로 반대편에서 그분을 따라 걷는 장면을 교차 편집합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눈이 놀랍도록 조용하게 마주치는데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 갈보리 언덕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장면은 마리아와 악마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마리아를 혐오합니다. … 하나님 앞의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그녀의 완전한 신앙심 때문입니다.”(68번째 질문과 답)
“영화 후반부에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그녀의 죽은 아들을 안은 채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은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이 장면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나요? 혹자는 이 장면이 아름다움과 신랄함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필적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처 받았음에도 자애로운 마리아의 눈길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죽었고 그분의 죽음이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음을 절실히 깨닫고 느끼게 해줍니다.”(98번째 질문과 답)
11. 마리아와 예수(Maria & Jesus)
1) 마돈나와 아기(Madonna & Child)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장면이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넘어졌을 때 마리아가 껴안아주던 것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마리아의 품 안에 있는 존재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묘사가 되고 있다.
또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를 패러디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면 곧 여성인 악마(사탄)의 품에 안긴 어린 마귀의 등장은 더욱 더 마리아와 ‘아들’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강화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실 때 십자가를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가 “내 살에서 나온 아들이요, 내 영에서 나온 자”(에머리히의 책에는 "the flesh of her flesh, the bone of her bone, the heart of her heart"로 기술되어 있음)라고 한 독백은 영화 속 여러 장면들에서 나타나는 모자관계를 결론지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너무나도 반(反)성경적이며 특별한 ‘마리아와 예수’의 모자관계는 ‘마돈나와 아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게 된다.
천주교 국가로 알려진 나라에서는 한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동상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루터의 개혁(Reformation) 이전의 모든 예술 특히 건축, 음악, 미술의 중심은 이 ‘마돈나와 아기’(Madonna & Child)로 가득 차 있다. 천주교도들은 물론 기독교인들까지도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잘못 알고 있는 이 ‘마돈나와 아기’의 뿌리는 옛 바빌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이 어미(MOTHER, 계 17:5)라는 단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로마라는 종교는 늘 ‘거룩한 어머니’(어미, 聖母, Holy Mother) 교회라고 불렀다. 천주교의 수많은 노트르담(Notre Dame/Our Lady/Maria/Semiramis) 사원(寺院, 절)들은 ‘아베 마리아’(Ave Maria)로 변신한 이 바빌론의 어미를 위해 건축되고 헌당되었다. 바빌론 종교는 구약에서는 사탄이 니므롯을 통해 여호와(LORD) 신앙을 대적하여 일어난 바빌론-“바빌론은 주의 손에 있어 온 땅을 취하게 한 금잔이라. 민족들이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으므로 미쳤도다.”(렘51:7)-이며, 신약에서는 ‘신비의 큰 바빌론’(계17:5)으로 나타난다.
2) 세미라미스와 니므롯/담무스(Semiramis & Nimrod/Tammuz)
니므롯(Nimrod, 창10:8,9)은 구스(Cush, 창10:6-8)의 아들이었는데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구영재 저) 등에 의하면 니므롯의 어미 세미라미스(Semiramis)는 당대의 절세미인이면서도 가장 음란하고 사악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 니므롯이 바빌론의 군주가 되자(창10:8-14), 그와 결혼하여 바빌론 군주의 어미이자 왕후가 되었다. 그러다가 니므롯이 셈(Shem, 창10:1,21)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입지가 위태해짐을 느낀 그녀는 재빨리 자기가 낳은 니므롯의 아들 담무스(Tammuz, ‘생명의 아들’, 겔8:14)를 죽은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아들이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으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씨(seed, 구세주)라고 주장하면서 담무스를 태양신(sun-god)으로 신격화하여 ‘바알’(Baal, 주인)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신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알티’(Baalti, 여주인) 혹은 ‘레아’(Rhea, 위대한 ‘어머니’ 여신)라 하여 ‘월신’(moon-god) 곧 ‘하늘의 왕후’(queen of heaven, 렘7:18; 44:17-19,25)로 숭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미 제2장 ‘사순절’에서 언급되었지만) 그녀는 숭배자들이 죽은 니므롯(담무스)을 위해 애곡하는 것을 바빌론 비밀종교의 중요한 예배의식으로 정해 놓았다(겔8:14).
이러한 사실은 욥기 31장 26-28절에서 이미 족장 시대인 욥의 시대에 태양신과 월신 숭배가 성행했었던 기록으로써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세미라미스는 ‘이시스’(Isis)로, 니므롯은 아기 ‘호루스’(Horus)이자 어른이 된 ‘오시리스’(Osiris)로 둔갑했다. 그리고 이 바빌론의 왕후인 세미라미스는 각 민족의 역사 가운데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Ashtaroth, 삿2:13),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공인이라는 사탄의 음모가 있었을 때 이 ‘세미라미스와 니므롯(담무스)’ 곧 ‘마돈나와 아기’는 로마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재포장이 되었다. 따라서 앞 장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천주교의 예수란 거의 언제나 이 어미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로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D. 431년에 사탄은 에베소공회를 통해 피조물에 불과한 마리아에게 창조주의 어미가 되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신성모독의 칭호를 씌웠다. 아울러 오리겐 이후로 떼오토코스는 헬라의 교부들에 의해 사용되어 ‘처녀’(동정녀, the Virgin)로 불려졌다.
즉 ‘위대한 여신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에 대한 에베소 사람들의 열정과 이들에 대한 바울의 권유가 있은 지 400년이 지난 후, 에베소 공회는 마리아로 둔갑한 이 음녀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가증한 칭호를 선사하게 되었고 이후 이 칭호는 카톨릭의 핵심 교리로 자리를 잡아 2004년 최고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그 중심 메시지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12. 에필로그(Epilogue)
세실 B 드밀 감독의 흑백무성영화 ‘왕중왕’(1927년작), 니컬러스 레이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왕중왕’(1961년작),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1962년작),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위대한 생애’(1965년작), 노먼 주이슨 감독의 뮤지컬 영화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3년작),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나사렛 예수’(1977년작), ‘지저스 필름 프로젝트’의 ‘예수’(1979년작),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년작), 알렉산드로 달라트리 감독의 ‘가든 오브 에덴’(1999년작) 등 지금까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이 기존의 모든 종교영화들의 아성을 일순간 무너뜨리면서 전세계인들을 열광시키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지저스 필름 프로젝트’에 의해 수백 개의 언어로 더빙되어 수많은 천주교인들도 구원받게 한 ‘예수’(Jesus) 영화에서와 달리 (이미 살펴본 대로) 완벽한 ‘천주교 복음’(Catholic Gospel) 곧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이다(갈1:6-8).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욱 왜곡되고 에큐메니즘은 더욱 증대되는 마지막(digital) 수난의 시대를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단2:31-35,43-4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 계3:22)!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그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살후2:3)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another gospel)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는 어떤 자들이 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 하는도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any other gospel)을 선포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6:08:17 | 관리자
테레사 수녀도 ‘신의 존재’ 고뇌
“내게는… 그리스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미공개 편지서 밝혀져
“내 영혼은 지옥의 고통 한때 천국도 확신못해” , 타임誌 ‘커버스토리’로
인터넷 조선일보 2007.08.25
▲ 테레사 수녀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Teresa·1910~1997년) 수녀가 50년간 신앙의 위기를 겪었으며, 한때는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는 내용의 책이 나온다.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2003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성인의 전 단계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 시사주간지 타임(Time) 최신호(9월 3일자)는 ‘테레사 수녀: 나의 빛이 되어라(Mother Teresa : Come Be My Light)’라는 새 책을 인용해, “테레사 수녀가 콜카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며 “그는 자신이 겪은 내적 고통을 지옥에 비교했고, 한때는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책의 저자는 테레사 수녀가 창립한 ‘사랑의 선교회’ 소속 고위 성직자이자, 그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브라이언 콜로디에추크(Kolodiejchuk) 신부.
테레사 수녀는 1979년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속,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속 등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석 달 전인 그해 9월, 자신의 고해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마이클 반 데르 피트(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는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다”고 썼다.
이 책은 테레사 신부가 여러 명의 고해 신부들에게 보낸 40여 장의 미공개 서한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녀가 폐기되기를 원했던 이 편지들에는 ‘어둠’ ‘외로움’ ‘고통’이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1953년 퍼디낸드 페리에(P?rier)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선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했고, 1959년 8월 로런스 피카키(Picachy) 신부에겐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얘기해 달라”고 적었다.
이 책의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무신론에 관한 책들을 쓴 크리스토퍼 히첸스(Hitchens)는 “테레사 수녀 역시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깨달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저자인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행복뿐’이라고 기도했다”며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2009-05-08 16:07:12 | 관리자
1. 들머리
“청·황·백·적·흑 오색의 영롱한 색깔은 눈부시기만 했다. 사중득활이라 했던가. 퇴옹 성철 큰스님은 사리 수습을 통해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12일 오후 경남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는 성철 스님의 다비 결과 나온 사리가 공개됐다. 사리는 스님의 머리, 가슴, 하체 등에서 골고루 나왔으며, 특히 정골 부분에서 수습된 사리는 우윳빛의 신비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이날 오후까지 일차로 수습된 사리는 38과. 그러나 잿속에서 사리가 계속 나오는데다 뼛속에도 사리가 촘촘히 박혀 있어 쇄골이 모두 끝나면 사리 수는 적어도 1백30여과에 이를 것이라고 장의위원회측은 밝혔다. 이 추정이 맞을 경우 근세 들어 우리나라 큰스님에게서 나온 사리 중 최다를 기록하게 된다.
장의위원회는 이날 수습된 사리를 해인사 대웅전인 보경각에 안치했으며 49재인 다음달 22일까지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성철 스님의 법골에서 사리가 쏟아진 사실이 알려진 이날 오후부터 해인사에는 사리를 친견하려는 불자 1천여 명이 몰려들어 스님의 높은 법력을 기렸다.”
이상은 1993년 11월 13일자 한겨레신문에 김도형 기자가 성철 스님이 남긴 사리와 관련된 내용을 보도한 기사이다.
이처럼 사리(舍利)는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열광적인 숭배의 대상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지만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사리라고 하는 신비한 물질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성철 스님과 같이 높은 법력을 가졌다고 하는 이에게서 눈을 부시게 하는 오색의 영롱한 사리가 나왔다면 불교에도 무언가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지 않을까 여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사리에 대한 정의, 종류, 전래 등을 먼저 소개하고 이어서 과학적 관점과 함께 성경적 관점에서 사리를 논해보고자 한다.
2. 사리의 뜻
길상 편저 ‘불교대사전’을 보면 사리는 산스크리트어 'sarira(팔리어는 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을 말한다. 이 '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여 사리라(舍利羅)라고 하였다가 줄여서 ‘사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는 설리라(說利羅), 실리(實利), 실리(室利)라고 표기하기도 하며, 그 의미를 취하여서 신골(身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sarira는 본래 ‘몸’을 의미하며 이것이 복수형으로 되면 신골, 유골(遺骨)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리는 본래 몸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인체를 화장하고 난 뒤에 남겨진 뼈 전체 또는 가루가 된 뼛조각까지 폭넓게 뜻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리는 단순히 죽은 자의 몸을 가리키거나 또는 그 뼈를 부순 것만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부처를 향한 믿음이 충만한 불자들은 사리의 의미를 좀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서 사리를 단순히 몸 또는 뼈를 의미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보석과 같은 것으로 여겨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불교인들이 사리를 매우 소중하게 모시고 있다.
3. 사리의 종류
사리는 시신의 신체 부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 머리카락은 발사리(髮舍利), 뼈는 골사리(骨舍利), 몸은 육사리(肉舍利)라고 한다.
화장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던 인도 사회에서는 시신을 태우고 난 뒤에 남은 뼈를 부수어서 그것을 사리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시신을 온전하게 매장한 것도 사리라고 불렀는데 태우고 난 뒤에 남은 뼈를 부순 것을 쇄신(碎身)사리, 그대로 온전하게 매장한 시신 전체를 전신(全身)사리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사리의 분류법이 조금 다르다. 불교를 구성하고 있으며 불교를 상징하는 가장 소중한 세 가지 보물을 가리켜 삼보(三寶)라고 부른다. 그것은 바로 부처(佛)와 부처의 가르침(法),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승가(僧)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간행한 ‘불사리장엄(佛舍利莊嚴)’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기원전 480년경 (일설에는 386년) 2월 25일에 80세로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죽자 사람들은 석가의 사리를 ‘불사리’, 석가의 말씀을 담은 경전을 ‘법사리’, 석가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승사리’라고 불렀다.
불사리와 법사리를 안치한 것이 탑(塔)이고 승사리를 안치한 것이 바로 부도(浮屠)이다. 탑과 부도뿐만 아니라 계단(戒壇)이나 불상의 내부에 봉안되기도 하였고 또는 경전 축(軸)의 끝부분을 깊이 도려내어서 그 속에 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경전 속에 봉안된 불사리는 그 경전을 그대로 법사리로서 상징지우는 특색 있는 사리 봉안법이다.
이 가운데 불사리는 부처의 유해를 화장(다비)한 뒤 남겨진 사리를 가리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부처의 치아나 손톱, 머리카락 등도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또 다른 사리이다.
법사리의 경우 대표적인 것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화엄경(華嚴經)’, ‘연기법송(緣起法頌)’,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금강반야경’을 제외한 모든 경들에는 한결같이 사리를 안치한 탑을 공양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4. 불사리의 종류 및 전래
석가의 사리 곧 불사리는 주변의 여덟 나라에 분배되어 각각 이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인 불탑이 세워졌으며, 이 일을 '사리팔분(舍利八分)' 또는 '분사리(分舍利)'라 하고 이때 세워진 불탑을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사리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불탑의 기원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불사리는 아소카왕(A'soka, 재위 기원전 272 ~ 기원전 232년)에 의하여 8만4천 기의 탑으로 나누어져 인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고 하지만 후세에 발굴된 탑 속에는 부처의 사리뿐만 아니라 사리를 상징하는 다른 보석이나 광석이 안치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는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변신사리(變身舍利)로 나누기도 한다.
한반도에 사리가 전래된 사리장래(舍利將來)의 기록을 찾아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권4 진흥왕조(眞興王條)에 “진흥왕 십년(549년) 봄에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신라의 입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파견하는데 불사리를 보내오므로 왕은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의 앞길에 나가 이를 맞아들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유사(三國遺事)’권3에도 “정관(貞觀)17년(643년) 계묘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으로부터 불두골(佛頭骨), 불아(佛牙), 불사리 100알과 석가가 입던 비라금점(緋羅金點) 1벌을 가져왔는데 그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탑(太和塔)에 두고, 또 하나는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의 계단(戒壇)에 두었다. 나머지 다른 것들은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의 사리장래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두 나라에도 사리의 전래가 있었음이 짐작된다. 또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원홍이 돌아오면서 석가의 어금니를 가져왔었고 그 후 고려조에 들어와서 사신 정극영, 이지미 등이 송나라를 갔다 오면서 석가의 어금니를 다시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것들이 지금 어디에 봉안되어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5. 사리는 결석인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나 아내와 딸을 두고 23살에 출가하였던 성철 스님은 한 번도 눕지 않는 정좌불와 10년, 말하지 않는 묵언 10년, 생식 16년 등으로 수행자들에게 신화를 남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좌한 채 몇 년씩 움직이지 않고 수양하는 스님들에게는 담즙이나 소변의 배출이 원활치 못하므로 몸속에 결석(結石)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높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뼈를 제외하고 우리 몸에 생길 수 있는 무기물로는 콩팥의 결석과 간이나 쓸개의 담석이 대표적인데 콩팥 결석이나 담석은 모두 칼슘을 포함하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잘 생길 수 있으므로 80세가 넘어 사망한 성철 스님의 경우도 결석이 많았기에 사리도 많이 나온 것은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인하대 분석화학실 임형빈(任亨彬) 실장에 의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사리의 성분과 경도(硬度)에 대한 결과를 보면 지름 0.5센티미터 정도의 팥알 크기 사리에서 방사성 원소인 프로트악티늄(Pa)과 핵융합원료로 쓰이는 리튬(Li)을 비롯 티타늄, 나트륨, 크롬, 마그네슘, 칼슘, 칼륨, 인산, 산화알루미늄, 불소, 산화규소 등 12종이 검출되었다.
임 실장은 “사리 성분이 일반적으로 뼈 성분과 비슷했으나 프로트악티늄, 리튬, 티타늄 등이 들어 있는 점이 큰 특징이었다”며 양을 알아보는 정량 분석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사리의 굳기 즉 경도는 1만5천 파운드의 압력에서 부서져 1만2천 파운드에서 부서지는 강철보다도 훨씬 단단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결석과 비교해 볼 때 확실히 다른 것이다. 즉 결석의 주성분이 칼슘, 망간, 철, 인 등인 사실도 그렇고 결석은 고열에 불타 없어질 수 있으며 그 경도도 사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결석이 사리로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6. 사리는 고승에서만 발견되는가?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불교에서 사리를 귀히 여기면서도 수행의 정도와는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 사실이다. 즉 얼마 전 어떤 화장장에서 비불교도인을 화장하고 보니 엄청난 양의 사리가 나왔다는 보도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사리는 무종교인들의 화장시에도 종종 발견되기 때문에 수행에 따른 음식이나 환경, 생활 습관 등을 포함한 수행 자체와 관련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사리 발생의 직접적인 전단계 곧 화장과의 관계성을 살피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사리는 앞서 언급된 여러 원소들로 구성된 덩어리로서 용융점이 꽤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화장시 나는 불에서는 사리 용융점까지 도달할 수 없기에 이것은 뼈에 비해 녹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 보고에 의하면 시신을 화장할 때 온도가 섭씨 1,600도만 넘으면 사리가 나온다고 한다. 즉 사리의 생성원리는 시신의 타고 남은 뼛가루(분골)가 섭씨 1,600도 이상의 고온에서 녹았다가 서서히 식어서 결정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시신에서 온도조절과 밀폐를 잘하면 200~300cc정도까지도 사리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아울러 최근에는 뼈나 사리에 엄청난 압력을 가해서 조그마한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리는 불심과는 관계없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다만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과 불교에서 치러지는 화장에 비해 화장터에서 치러지는 화장의 불이 너무 세다는 점 때문에 불교식 화장(다비)이 아닌 일반 화장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7. 왜 불교인들은 사리를 숭배하는가?
이제 박경준의 책 ‘다비와 사리’ 속에 나오는 ‘사리, 신앙의 언덕’ 부분을 발췌 요약하여 불교인들의 사리 숭배에 관한 기전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방을 둘러보아도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 사바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위안을 받고 싶어 하며 자신의 소망을 귀담아 줄 대상을 찾는다. 또한 인간은 그런 대상을 이정표 삼아 자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생존하였을 때 그런 이정표의 역할을 해 주었다. 부처님은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사람들을 열반의 피안으로 안내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목숨까지 내맡기며 길을 따라갔다.
그런데 영원불멸할 것 같던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평소 ‘이 세상은 덧없고 텅 비었다. 참되고 영원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시던 그의 말을 믿고 따랐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을 일러 주던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부처님은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분을 주저앉아 그리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부처님을 대신할 어떤 것을 찾았다. 자신들이 부처님을 언덕 삼아 의지하여 왔듯이 이제는 그를 대신하여 의지할 만한 것을 찾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믿음의 언덕을 찾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사리였다. 땅?물?불?바람의 사대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육신은 이미 재가 되고 말았지만 다비한 그곳에는 오색영롱한 사리가 고스란히 남겨졌다. 이제 사리가 부처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8. 사리는 불교인들만의 숭배 대상인가?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2003년 10월 19일 시복(諡福)될 고(故) 테레사 수녀의 혈액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바쳐질 것이라고 한다.
테레사 수녀 시복 절차를 관장해 온 브라이언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시복식에서 교황이 테레사 수녀 후임으로 사랑의 선교회 원장을 맡고 있는 인도 니르말라 수녀로부터 성유물(聖遺物)을 받아 개인 예배실에 안치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혈액은 시복식을 위해 테레사 수녀의 시체를 발굴할 때 교회 당국의 감독 아래 의료진이 채취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의 혈액은 로마 가톨릭 교회 기준으로 ‘제1 카테고리’ 성유물에 속하는데 이 범주에는 성인(聖人)이나 복자(福者)의 유골(遺骨) 곧 ‘사리’가 들어가며 ‘제2 카테고리’에는 성인이나 복자의 물건이 해당된다.
비단 테레사 수녀뿐이랴.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의 사리(유골)가 로마 카톨릭에 의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례로 유대인을 위한 사도(갈2:8)로 부름 받아 로마에는 가보지도 못했던 베드로의 유골을 어디서 구해 왔는지 바티칸에 모셔 놓고 엄청난 성당을 그의 이름을 내걸고 건립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에게 사리숭배를 종용하여 온 것도 가장 대표적인 사리숭배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천주교인들도 사리 숭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9. 성경으로 본 사리 숭배
이는 천주교나 불교나 그 뿌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사천여 년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노아의 홍수 바로 직후 나타난 강력한 지도자 니므롯(Nimrod)(창10:8,9)은 인본주의 왕국인 바벨론 왕국을 세웠다(창10:10; 11:4). 그리고 나서 그는 태양신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아들 담무스(Tammuz)는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곧 본격적으로 바벨론 백성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며 ‘유골 숭배’와 같은 신비스러운 예배들을 거행하는 바벨론 종교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이 바벨론 종교는 사람들이 땅의 온 지면으로 흩어지면서 함께 세계 여러 나라들로 확산이 되었다(창11:9). 따라서 세계 종교들 중 유대교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 세상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가 원하는 대로 ‘사리 숭배’를 당연히 해오게 된 것이다.
구약을 대표하는 자(요1:17)이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모세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무덤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셨다(신34:6). 왜냐하면 모세의 시체 곧 전신 사리가 우상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예 이를 원천봉쇄하신 것이다. 이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하였던 사실로써도 잘 알 수 있다(유1:9).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합2:4, 롬1:17, 갈3:11, 히10:38). 그리고 이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요14:6, 행4:12) 그런데 믿음(faith)은 그 정의상 ‘보이지 않는 것’(insight)을 믿어야 믿음인 것이고(히11:1) ‘행위와 상관이 없어야'(without work) 믿음인 것이며(롬3:28) 또한 그 믿음의 주체가 예수님(Jesus)이어야 참된 믿음인 것이다(히12:2,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사탄은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불못에 자기와 함께 들어가길 원하고 있다(마24:24, 25:41). 따라서 믿음을 변질시키기 위해 ‘사탄’은 ‘보이는 것’(sight)과 ‘행위’(work)와 예수 그리스도이외의 ‘수많은 길들’(many ways)을 주장하며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다.
즉 수행(work)의 결과로 나온다는 사리(sight)를 통해 사탄은 무수한 영혼들을 믿음의 창시자(Author)요 완성자(Finisher)이시며 또한 길(Way)과 진리(Truth)와 생명(Life)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10. 마무리
우리나라에서 최다 사리 기록보유자인 성철 스님은 1987년 부처님 오신 날 법어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맞아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生平欺言狂男女群)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彌天罪業過須彌)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活陷阿鼻恨萬端)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一輪吐紅掛碧山)”
이제 성철 스님처럼 수행하여 사리를 남긴 후 사탄이 기다리는 지옥으로 가게 될 우리의 수많은 이웃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진리인지 알려주도록 하자.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고후5:7, 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차한(가천의대 교수, 월간 건강과생명 편집인)
2009-05-08 15:56:09 | 관리자
8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 신사(神社) 참배를 전격적으로 거행하였다. 패전 기념일을 피하였고 또 신도 의식을 비켜갔지만 그의 신사참배는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이후 무려 16년만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세계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유대인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사죄했던 것과 같은 모습을 일본 총리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이들은 없겠지만 적어도 소위 대동아전쟁의 전범국 총리로서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서는 모든 세계인이 한 목소리로 질타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하던 날 서울 독립문 앞에서 충우회 소속 회원들로 이루어진 구국결사대가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며 집단으로 손가락을 자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지 두 세대도 넘어선 오늘날, 왜 남의 나라 총리가 자기 나라에서 잠깐 치르는 하나의 의식에 이처럼 격렬히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일까? 이미 매스컴에서도 나름대로 충분히 논의된 내용들이지만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사참배의 맥을 짚어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녀야 될 민족관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관을 올바로 다져나갔으면 한다.
1.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서막(序幕)
일본 전역에는 8만여 개에 달하는 신사(神社)가 있다고 한다. 전설 속의 신(神)을 모시는 신사도 있고 역사상의 실존인물을 신(神)으로 모시는 신사도 있다. 그 많은 신사들 중의 신사로 불리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 중심가 황궁 옆의 99,000 m2㎢ 광대한 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도쿄 돔 야구장의 2배 크기인데 1869년 메이지 일왕의 지시로 황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국가신사로 세워졌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의 전몰자 총 246만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명치유신 이후엔 전몰장병을 모두 신(神)으로 모셨는데 야스쿠니 신사도 전몰장병을 모시는 신사이다. 물론 그곳엔 2차대전의 전범들도 신(神)으로 모셔져 있다. 총리 겸 육군대신을 지낸 도조 히데키를 비롯하여 전쟁의 핵심 책임자들 14명의 위패가 1970년대 후반 슬그머니 야스쿠니에 합사되었다. 따라서 일본에 침략을 당한 적이 있었던 아시아 국가들이나 일본과 교전하였던 미국 등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통해 전범들이 확연히 신(神)으로 추앙됨으로써 군국주의가 부활되어 다시금 커다란 전쟁의 폭풍우가 불어닥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게 되는 것이다.
힘 있는 자는 힘 자랑을 하고 싶어한다. 칼을 가진 자는 칼을 쓰고 싶어한다. 그것이 인간의 부패된 본성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이하 흠정역)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에 가득한 폭력으로 인해 물로 심판을 하신 후 새 출발을 하게 되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게 된다(창9:6)"고 경고하셨으며 마지막 환난기의 세대를 향해서도 "칼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칼로 죽임을 당하리라(계13:10)"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던 일본은 그 말씀(잠13:13)대로 멸망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더더욱 재물과 기술과 지식 등 유형무형의 엄청난 자산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만과 거만한 영에 사로잡혀(잠16:18) 또 다시 칼을 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마도 대환난기 중 동방의 왕들의 길이 예비될 때(계16:12)에 일본이 한 몫을 크게 담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지금까지 생명의 열매가 제대로 맺혀지지 못한 일본은 아마겟돈으로 모여 전능자의 저 큰 날에 있을 전쟁(계16:14,16)에 쉽게 참여하게 되리라. 그렇게 된다면 복음이 뿌려지고 자라기에 척박했던 땅 일본의 모든 섬은 사라지고 산들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계16:20).
2.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추구(追求)
일본의 국교(國敎)는 신도(神道)이고 그 제주(祭主)는 역대 천황이다. 또 신사는 신도의 사당이다. 신도의 기원은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가미'라는 말은 신격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본의 고유어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고대인들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인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신도이다. 명치유신을 맞아 제정일치가 부활되면서 천황은 일본의 통치자이자 '살아 있는 신'의 지위에 나섰지만 2차 대전에 패한 이후엔 신도의 제주 자리만 계속 지키고 있을 뿐 상징적 국가원수의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국민의 천황에 대한 경배심은 아직도 대단하며 신사에 참배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데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천황제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한 강력한 수단이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보수 우파의 순례성지로 변하곤 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발표하자 일본의 '신(新) 일본종교단체연합회'는 "총리의 공식참배는 헌법 제20조의 종교와 정치 분리원칙에 위배된다"는 의견서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었다. 즉 고이즈미의 신사참배의 목적 내지 결과 중의 하나가 제정일치의 추구에 있음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현 일본 헌법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민주국가법에서 제정분리는 기본이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우아하게 제정일치를 이루고 있는 바티칸(계17:4-6,9,18)도 있고 비공식적으로 아버지(마23:9), 지도자(마23:10), 주체사상(계13:11-14)의 삼위일체를 통해 제정일치를 시행하고 있는 지상낙원도 존재하고 있으며 헌법조문과 상관없이 단군상 건립을 정부가 주도하며 이웃나라를 좇아 제정일치의 해괴한 퍼포먼스를 수준 낮게 연출하고 있는 민주국가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스펙트럼 가운데 일본이 서 있는 것이다.
시민정부(civil government)는 인간 사회의 공익과 질서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출18:21-22)인데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고 정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삼하23:3, 롬13:1-7, 행23:5). 그러나 주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단3:17,18; 행4:19,20; 5:29).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친히 성도들과 함께 다스리시는 신정(theocracy) 왕국(롬8:17; 딤후2:12; 계5:10; 20:4,6)을 이루시기까지 이 땅에는 온전한 제정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이 땅의 통치권은 사탄에게로 넘어가 사탄의 다스림(satanocracy) 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요12:31; 14:30; 16:11; 고후4:4; 엡2:2). 따라서 주님의 재림 전 정치와 종교가 일치한다면 그 표방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것 곧 적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주민등록증과 천국시민권(빌3:20)이라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두 가지 신분증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
3. 역사(歷史) 속의 신사참배(神社參拜)
일본 정부는 1882년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로부터 분리시킨다고 하면서 제사와 종교의 분리조치를 취하여 교묘히 타종교를 지배, 통제하였고 또 이를 통해 침략정책을 수행하거나 식민지 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뒤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은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여 1938년 9월에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신사에 굴복케 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을 네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신앙을 지키며 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 투쟁하는 노선이며, 둘째는 신앙을 지켜야 함을 알고 있으나 용기가 약하여서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 신앙지조나 지키겠다는 노선이고, 셋째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이며, 넷째 신사참배는 국가양식이라고 하여 신앙양심의 가책없이 하나님의 명령도, 신앙정조도, 민족의 체면도 망각해 버리고 일제 앞에 아부한 지도자들의 노선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반대와 타락의 노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의 수난을 겪은 지도자가 70명이요 옥고로 순교 당한 자가 50명, 사경에서 살아 나온 자가 20여 명이다. 1945년까지 이로 인해 투옥된 자가 2,000여 명에 달하고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에 주도적인 인물들은 평북에 이기선 목사, 평남에 주기철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 전남에 손양원 목사, 만주에 한부선 선교사 등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전1:9). 신사참배는 흘러간 옛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제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오고 있는데 배교하는 일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자기를 경배하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살후2:3,4). 그럴 때 당신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참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 죽게 될 터인데(계13:15)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복된 소망(딛2:13)이 있다. 예수님의 보혈을 받아들여 이미 죄가 깨끗이 씻어졌다면(요일1:7) 예수님 재림시에 공중들림(살전4:16,17)을 받아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대환난(마24:21; 계2:22) 가운데 들어가지 않게 된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피흘리며 죽어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도 순교자적인 각오로 우리를 유혹하는 우상들을 제거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구원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빌2:12).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하루 속히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란다. 만약 영접치 아니하고 지체하다가 대환난 가운데 남게 되더라도 성경 말씀(계20:4)을 기억하고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지 말며 또 그가 준다고 하는 표를 받지 않도록 하라. 그리 하면 첫째 부활(계20:5,6)에 참여하여 뒤늦게 나마 구원을 받고 불못(계20:15; 21:8)에 던져지지 않게 될 것이다.
신사참배는 단지 전주곡일 뿐이다!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하는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전12:1)
2009-05-08 15:55:40 | 관리자
불교의 세계를 좀더 알리기 위하여 저들 스스로 본체를 밝힌 문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오니 명심 숙지하여 소경 된 지도자들의 인도 받아 종교통합의 물에 빠져 죽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에 속지 마라 - 1993년 11월 4일 처음 출가한 그 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그러나 큰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 말에 속지 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 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 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의 길에 드니, 행운유수行雲游水의 사문의 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다음 괄호안의 질문은 이해를 돕기위해 만들어 넣었음)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일생동안 무엇했는가?)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그 무엇을 어느 정도 쌓았는가?)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죽으면 소멸하여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가?죽은 다음 흙이 되어 아무것도 없지않는가?사후의 세계는 정말 존재하는가? 그 결과 어디에 떨어져 있는가?당신도 불교 믿다가 그곳에 같이 가고 싶은가? 아니면 어디에 가고 싶은가? 그러면 살아있을 때 먼저 어디에서 나와 무엇을 믿어야 되겠는가? 당신은 불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잘 믿기만 하면 된다고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위의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세계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의 말에 유의하십시오.구원의 길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까?)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그래서 지금 그곳에서의 심정은 어느 정도인가? 당신도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까?이 말은 결국 부처를 믿으면 어디에 간다는 결론인가?)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스님은 입적한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 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다비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 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불교 자체의 성철 종정 포교 기사에서 인용함)-
자신들이 스스로 밝힌 불교의 정체를 당신은 스스로 부정하려고 애쓰지 말고, 분명히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 서십시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2009-05-08 15:55:04 | 관리자
"우리 서로 부처로 섬기면 이 세상이 극락"
이 글은 1987년 4월 23일자 조선 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뉴에이지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이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성철 종정 석탄절 법어:
불교 조계종 이성철 종정은 22일 불기 2531년 부처님 오신날 법어를 발표했다. 성철 종정은 이 법어에서「중생은 모두 부처」라고 강조하고「이 같은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성철 종정은 이 법어의 서두에서「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고 상식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법문을 하고 본래의 근원에서 보면「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다」고 설파했다.
성철 종정은 또「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지적하고「모든 사람들이 서로 부처님을 알고 그렇게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이라고 강조했다.
성철종정은「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된다」면서「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 상통할 때 온 세상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성철종정의 법어는 온갖 생명 있는 무리에는 반드시 성불할 수 있는 불성이 있다는 불교의 생명 경외-평등 사상과 우주의 종국적 실재는 마음뿐이라는 유심사상을 설파한 것으로 풀이된다. 성철 종정의 사월초파일(5월5일) 법어는 다음과 같다.
<초파일 법어 전문>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의 융화 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꽂동산에 앉아서 무엇을 그다지도 슬퍼하는가.
범 나비 춤을 추니 함께 같이 노래하며 춤을 추세.
불기 2531년 4월 일
종정 성철
2009-05-08 15:54:26 | 관리자
1. 들머리
반미 시위가 극에 달해 있던 지난 연말, 한 미군 병사가 희귀혈액형을 가진 한국인 신생아의 생명을 구하였다. 2003년 1월 7일 KBS 박재홍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전주의 한 종합병원 소아과에서 RH마이너스 AB형의 혈액을 급히 수소문하자 미 군의관이 군산 미군기지 정비단 장병들을 상대로 지원자를 찾아 나섰는데 3,000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이 혈액형을 지닌 사람은 전투기 항법장치의 안전점검을 담당하던 조나단 전트 병장과 대니엘 크레인 일병뿐이었다. 신생아에 대한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뒤 헌혈에 흔쾌히 응하여 신생아에게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었던 전트 병장은 그 때의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연락받고 전주로 갔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굉장히 흥분되고 기뻤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2003년 2월 28일, 적어도 일주일 분량은 있어야 되는 혈액 재고분이 이틀 치밖에 없었는데다 대구 지하철 참사까지 겹쳐 대한적십자사는 실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낮 12시, 만성적인 혈액 부족 사태가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까지 겹쳐 더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점심도 거르고 달려온 주한미군들에 의해 올 들어 거의 텅텅 비다시피 한 헌혈의 집이 모처럼 사랑의 열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날 하루에도 백 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이 헌혈을 하러 몰려왔는데 이 중 마틴 세이온 상사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얘기하였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고생하는 분들을 헌혈로라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습니다. 헌혈을 위해 까다로운 국내 심사를 거쳐야 되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건지고 특히 한미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배고픔도 잊었습니다.”
2. 수혈 거부
이처럼 수혈과 헌혈은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소중한 행위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혈이 비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수혈은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필자도 병원생활하며 목격한 바이지만 심지어 독실한 신자들은 자기의 어린 자식이 수혈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혈을 거부한다.
"갑은 11세의 딸 을이 전격성 간염으로 인한 장내출혈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 병은 갑에게 을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혈이 불가피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갑은 자신이 믿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였다. 을도 병에게 자신을 치료하여 살려달라고 말했으나 엄마의 영향을 받아 수혈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병은 수혈이외에 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다 취했으나 갑과 을의 수혈거부 의사로 수혈을 하지 않았고, 을은 결국 장내 출혈에 따른 실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이 경우에 갑과 병의 형사책임은?” (갑은 판례에 의해 ‘유기치사죄’가 성립된다.)
위의 예는 모 법과대학의 학기말고사 기출문제이지만 이와 같은 일들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말 수혈은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대로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이며 또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지켜야 하는 것인지 한 번 판단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교리를 주장하는 것인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궁극적 의미와 실체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먼저 기술한 후 그들이 주장하는 수혈거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3.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의 교주 찰스 러셀(Charles Taze Russell)은 1852년 2월 1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알레거니 지방의 장로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기독교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는데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대한 교리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재림하신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갖게 되면서 그가 속해 있던 회중 교회(Congregationalist)에서도 이탈하였다. 여기서부터 러셀은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면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같은 이유로 안식교를 이탈한 바버(N. H. Barbour)와 연합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성경공부와 잡지와 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1884년 이 모임은 ‘시온의 파수대 전도지 협회’(Zion's Watch Tower Tract Society)라는 이름으로 펜실바니아주에 등록되었으며 후에 ‘파수대 및 전도지 협회’(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들은 아담의 둘째 아들인 아벨이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며, 그 후 이 땅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들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지옥의 실체, 죽은 후에 인간의 의식 등을 부인하면서 기성교인들은 암흑 속에 있고 자기들만이 진리 속에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은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통일교, 전도관 등 다른 이단 종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하여 많은 영혼들을 미혹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르치는 내용에는 수많은 거짓말이 들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중요한 세 가지만 반증해 보고자 한다.
4. 증인들의 거짓말 - 하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 그는 신이셨으나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여호와는 아니다.”(Let God Be True, p33,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1952)
여호와의 증인들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신격(Godhead) 안에 세 인격(Person)이 계시다는 삼위일체(Trinity, Triune)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창1:26)라고 말씀하신 창세기부터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 구절은 수없이 많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14, 이하 흠정역)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Godhead)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골2:9)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the Father)와 말씀(the Word)과 성령님(the Holy Ghost)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these three are one).”(요일5:7)
5. 증인들의 거짓말 - 둘
여호와의 증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부활하신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적 존재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피조물로 부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고 부활했다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이 몸으로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다(요2:19,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내가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 …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셨더라.”(요2:19,21)
예수님은 자신의 예언대로 몸으로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수백 명에게 자신을 보이셨다(고전15:3-6).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라.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나니 그 중의 대다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고전15:3-6)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드셨다(눅24:39-43).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과 벌집 한 조각을 그분께 드리매 그분께서 그것을 받으사 그들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39,41,42)
6. 증인들의 거짓말 - 셋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의 지옥은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가르치며 지옥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영원한 형벌과 고통과 멸망의 장소에 대해서 수없이 언급이 되고 있다. 특히 누가복음 16장은 지옥에 간 부자의 절규를 통해 지옥이 어떠한 곳인지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 …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눅16:22-24,27,28)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대해 세 번이나 연속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절뚝거리며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3-48)
7. 수혈에 대한 증인들의 주장
성경(창9:3,4; 레17:14; 행15:28,29)에서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교훈을 확대 해석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입이나 혈관을 통해서 몸에 피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법에 위배된다며 ‘수혈거부법’이란 율법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피가 없어 죽어가는 신도들에게 죽어도 다시 부활될 테니 안심하고 수혈을 거부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안타깝게도 수많은 신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한 이 수혈거부협회는 환자가 무의식 상태에서는 수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전 세계 신도들에게 ‘수혈거부카드’를 발급해 주어 대리인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항상 이 카드를 휴대할 것을 지시하면서 완전한 공개자살체제를 세워놓고 있다.
실례로 1980년 12월 21일자 주간 중앙을 보면 1977년 부산에서 김경숙 양(12세)이 피가 없어 죽어가는데 협회가 수혈거부를 요구하여 사망했고, 1980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김정심 씨(23세)가 수혈거부로 사망한 사건 외에도 한국이 낳은 원로가수 백년설 씨도 1980년 미국에서 수혈거부로 사망하는 등 협회의 광신적 교육에 수많은 신도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1990년 발간한 ‘피-어떻게 생명을 구할 수 있는가?(How can blood save your life?)’란 책자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수한 의학잡지에 실린 논문들을 인용하여 수혈의 의학적 위험성과 또 수혈을 하지 않고서도 개심술 같은 수술까지도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신도들을 호도하며 수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있다.
8. 수혈거부에 대한 의학적 입장
그렇다면 위 책자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삼십여 편의 의학논문들 곧 수혈은 매우 위험하며 수혈하지 않고도 수술이 가능하다는 의학적 주장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먼저 이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를 통해 성공을 경험한 후 대부분의 소아 심장 수술을 수혈 없이 실시하고 있다’고 소개한 논문(1984년 9월호 Circulation) 등은 정말로 훌륭한 내용이다. 이처럼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혈거부로 인해 무혈 수술법, 최소출혈 수술법 등 크고 작은 의학상의 여러 가지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상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수술들 중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수혈을 하여야 할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또한 수혈은 수술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예로 들었던 RH 부적합(Incompatibility) 같은 수많은 비외과적(非外科的) 질환(疾患)에서도 수혈이외의 다른 치료법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경우가 그야 말로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아울러 AIDS 같은, 복권 일등 당첨될 확률쯤 되는 수혈의 부작용이 무서워 꼭 필요한 수혈을 못해서 궁극적으로 생명을 잃는다면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증인들은 전혈(whole blood)은 물론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의 성분 수혈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똑 같은 혈액 성분인 알부민과 면역 글로불린, 혈우병 약제 등의 사용은 금하지 않고 있는바(The Watchtower 1978;99(June 15):29-31) 그렇다면 증인들이 정의하는 혈액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9. 수혈에 대한 성경의 판정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이 모든 동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하셨지만(창9:3,4) 피가 있는 그대로 먹지는 말라고 하셨다(레3:17; 7:26,27; 17:10-14; 19:26; 신12:14, 23-25; 15:23; 행15:28,29).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피가 ‘인간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으며 또 ‘피를 먹는 것과 수혈하는 것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첫째는 하나님의 선민들로 하여금 이방 종교의 나쁜 관습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다윗의 믹담이라고 불리는 시편 16편에서 다윗이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자들에 관하여 하고 있는 말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서둘러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고통이 더욱 많으리로다. 나는 그들의 헌물 곧 피의 음료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이름도 내 입술에 올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4)
즉 하나님께서는 이방 종교의 제사를 언급하면서 피를 마시거나 먹는 일을 금하셨던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기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드린 동물의 피를 취하여 마셨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자들은 이 구절을 수혈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결코 수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드린 동물의 피를 언급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피가 특별히 존중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레17:11)
즉 하나님 앞에서 흘려진 피는 제단에 뿌려져 죄를 속하는 데 사용되어야 했으므로 결코 사람들의 식탁에 올려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10. 율법이냐 은혜냐?
여호와의 증인에서 소위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선결조건인데 1983년 2월 15일자 파수대를 보면 네 가지 범주의 선행이 요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첫째로 파수대의 지도를 통하여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것, 둘째로 하나님의 법 곧 ‘수혈금지’, 생일 및 경축일 금지 등 파수대가 제정한 모든 규칙들에 순종할 것, 셋째로 하나님의 통로인 파수대 조직과 연합할 것, 넷째로 여호와의 증인의 전도 사역에 참여할 것 등이다.
그러나 ‘수혈거부’라는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문자적 의미와 끔찍한 실행의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은혜로부터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다는 ‘다른 복음(another gospel)’에 다름이 아니다(갈1:6-9).
구원은 선물이다(엡2:4-10).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것뿐이다(요3:16,17).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위해 우리가 수고를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이다. 선행으로써 은혜를 얻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헛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롬11:6;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義)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11. 왜 하필 수혈거부인가?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나자 “정녕 죽으리라”(창2:17)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담의 부패된 피를 통해 ‘죄의 유전자’가 온 인류에게 예외 없이 전달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레17;11; 행17:12; 롬3:23, 5:12). 다시 말해서 만약 ‘죄의 유전자’를 치료받지 못한다면 아무도 사망 곧 영원한 지옥형벌(계20:10-15)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이 ‘죄의 유전자’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하면 ‘건강과 생명’ 1998년 3월호에 필자가 쓴 ‘죄의 유전자’를 참조하기 바람).
그러자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the innocent blood) 곧 SIN마이너스 혈액형인 피를 흘려 그 피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
따라서 이제 죄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우리가 곧 SIN플러스 혈액형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SIN마이너스 혈액형인 예수님의 피를 수혈 받는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게 되었다(롬5:8,9; 히9:13,14; 요일1:7-9; 계12:10,11).
이것은 마치 RH 부적합(Incompatibility)으로 사경을 헤매었던 전주의 한 신생아가 RH마이너스형의 혈액을 수혈 받고 생명을 찾게 된 사실과 매우 흡사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탄은 이러한 유일한 구원의 방도요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사람들이 거부하도록 ‘수혈거부’라고 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 곧 ‘다른 복음’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12. 마무리
사탄은 매우 효과적으로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저주로 몰아넣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수많은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모두 다 행위구원이요 인내천(人乃天)을 이루고자 하는 인본주의요 또한 영원한 지옥 불 호수를 향해 가는 길일뿐이다.
그리고 조나단 전트 병장과 마틴 세이온 상사처럼 헌혈을 하며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더라도 그 행위로써는 결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다(롬3:10,12). 왜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사64:6).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흘려주신 무죄한 피로 자기 자신을 덮지 않는다면 결단코 영벌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 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1:7)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2009-05-08 15:53:53 | 관리자
"핼로우인데이"의 기원
대부분의 우리 미국 사람들은 "핼로우인데이"가 유럽에서 지킨 바 있는 "모든 성인들의 날"(All Saints Day) 곧 마녀들과 유령들이 이리 저리 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 날 저녁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옥수수 껍데기, 호박 얼굴, 사이더, 도넛, "트릭 오아 트릿"(Trick or Treat)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이 가을 축제를 아무 거리낌없이 지켜 오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축제는 켈트족의 사탄주의 드루이드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핼로우인데이"- 마귀의 생일
현재 사탄 숭배가 점점 더 공개적으로 널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 숭배의 실체를 간과하고 넘어가려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런 의식에는 실제로 마녀가 있고, 주술이 있으며, 예식이 있다. 마녀나 혹은 "핼로우인데이"의 상징이 들어 있는 카드 등을 살 때, 과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같은 마귀 숭배 의식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곧 사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핼로우인데이"에 마녀들은 집회를 열어 연례 제사를 드리며 사탄 마귀에게 피로 희생을 드린다. 연중 다른 때에는 사탄주의자들이 고양이, 개, 기타 다른 짐승의 희생을 드리지만, 이 날에는 특별히 자기 자녀들 중에서 택하여 인신 제물을 드린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사실 이 날은 사탄 마귀의 생일인 것이다! 따라서 "핼로우인데이"라 하기보다는 "헬-오-윈데이"(Hell-O-Ween-Day) 즉 "지옥을 기대하는 날"이라 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이다.
드루이드의 영향
고대 켈트족의 왕국은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에까지 뻗어나갔으며, 그 당시 드루이드들은 켈트족의 제사장이었다. 켈트족과 드루이드들은 10월 31일을 자기들의 새해 저녁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이 날을 선택하여 악한 것이나 죽은 모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삼았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그들은 자기들 지역 내의 큰 횃불 주변으로 모여 짐승이나 곡식 혹은 사람을 제물로 드렸다......로마 사람들이 켈트족을 정복한 후에도 이같은 축제는 계속되었다(주후 43년)."「월드북 백과사전」(World Book Encyclopedia)
당신은 드루이드 제사장들이 밤 12시와 낮 12시를 신성한 것으로 여긴 것에 대해 알고 있는가? 드루이드는 '드루이데스'(druides)라는 프랑스 말로서 "떡갈나무에 대해 아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드루-비데스'(dru-vides)에서 나왔다. 그들은 떡갈나무와 미쓸토 의식(mistletoe) 역시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드루이드들은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혹은 희생 짐승의 내장이나 간 등을 살펴보고 앞날을 점치곤 했다.
초기 아일랜드의 전설에 따르면, 드루이드들은 인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었다고 한다. 「미국 백과사전」(Encyclopedia Americana)에 따르면 지금도 널리 퍼져 있는 드루이드들의 주요 교리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없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탄주의 관습이다. 이 시간에도 많은 이들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다른 사람 혹은 짐승 등에게 이동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TV 인터뷰나 TV 쇼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이 전생에 다른 존재였다고 말한다(즉 그들은 사람의 윤회를 믿는 것이다.)
드루이드들의 예배와 이교도 관습의 중심에는 사탄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핼로우인데이"는 바로 이 드루이드들의 명절로서, 우리 미국인들은 사탄주의의 이교도 관습에서 이것을 받아들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주후 700년경에 로마카톨릭교회는 이 관습을 받아들여 그 안에 푹 빠져 버렸다. 그 결과 그 이름도 "모든 성인들의 날"을 의미하는 "올 핼로우즈데이"(All Hallows Day)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날은 11월 1일이었다. 따라서 "핼로우즈데이" 전날 저녁은 "핼로우즈이브"(Hallow's Eve) 즉 "핼로우이브닝" (Hallow Eveining)이 되었고, 이것을 더 줄여 "핼로우인"(Hallowe'en)이 된 것이다.
"핼로우인데이"의 큰 횃불
당신은 "큰 횃불"에 대해 의아해본 적이 있는가? 이 "큰 횃불" 역시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캠프파이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어쨌든지 이 큰 횃불은 떡갈나무 밑에서 드루이드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사실 드루이드들에게는 떡갈나무가 매우 중요한 신성의 상징이었으며, 따라서 떡갈나무와 미쓸토 등을 숭배하는 그들의 의식에서 이 나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핼로우인데이"와 사망의 주(主)
"핼로우인데이"와 관련이 있는 드루이드 제사장들의 악한 풍습 중 하나는 "삼하인"(Samhain)이라는 축제와 상관이 있다. 「월드북 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드루이드들은 여름의 끝을 기념하는 '삼하인'이라는 가을 축제를 기념했다. 이 날은 여름에 자란 모든 곡식을 먹는 날이었으며, 나뭇잎, 호박, 옥수수 껍데기 등을 '핼로우인데이'의 장식물로 사용하는 관습은 바로 이 드루이드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초기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드루이드들의 명절과 비슷한 축제를 지켰다."
"드루이드 제사장들은 '핼로우인데이'에 '사망의 주' 곧 '삼하인'이 지난 열두 달 동안에 죽은 악한 영(혼)을 모두 불러모아 짐승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교주의와 "트릭 오아 트릿"
「전설의 명절」(Holidays of Legend)을 지은 아써(Mildred Arthur)는 "크리스천도 '핼로우인데이'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트릭 오아 트릿'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판 '트릭 오아 트릿' 풍습의 기원은 수백년전으로 올라간다. 한 떼의 농부들이 '핼로우인데이' 축제 때에 마을에 필요한 음식을 구걸하러 이 집 저 집을 다녔다."(p.87)
즉 "트릭 오아 트릿" 관습은 고대 이교도들의 관습으로써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 당시 사람들은 "핼로우인데이"에 밖으로 나와서 자기들을 따라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악한 영들을 달랠 목적으로 음식을 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들에게 음식을 주면 이들이 자기들을 놀라게 하거나 무섭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핼로우인데이"와 "잭-오-랜턴"
호박으로 만든 "잭-오-랜턴"(Jack-O-Lantern)의 얼굴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미신과 관련이 있다. 「월드북 백과사전」은 "잭-오-랜턴"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것은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 없었던 잭(Jack)이라는 사람에게서 유래된 것인데, 그는 심판 날까지 랜턴을 가지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피를 흘려주신 주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맞아들이고 그분을 신뢰하면, 곧 바로 구원을 받고 영원토록 안전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심판 날까지 방황할 필요도 없고 그 날에 대해 의아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들은 육신을 좇아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걷는 자들이니라."(롬8:1)
"잭-오-랜턴"은 정죄 받은 혼을 나타내는 고대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핼로우인 계절에 다른 물건들과 더불어 이 랜턴을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핼로우인데이"와 마귀의 색깔
「오락을 잘 꾸려가게 하는 책」(The Good Housekeeping Book of Entertainment)의 168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렌지색, 검은색, 뻘간색은 마귀의 색깔로 '핼로우인데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능한 한 이렇게 칠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핼로우인데이"에 자기들의 집을 어떻게 장식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를 보여주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데, "오렌지색, 검은색, 뻘간색이 마귀의 색깔"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핼로우인데이"와 성경 말씀
에베소서 5:11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어떤 모양이든 다 멀리하라."
신명기 18:9-12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것들을 따라 행하는 것을 배우지 말지니,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측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마법사나, 부리는 영에게 묻는 자나, 박수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 있게 하지 말지니라. 무릇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주께 가증한 자들이 되나니, 이런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주변에 있는 가나안 족속의 사탄주의 관습에 절대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 역시 이같은 성경의 원칙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레위기 19:31
"부리는 영을 지닌 자들을 인정하지 말고, 마술사들을 추종하여 그들로 말미암아 더럽힘을 당하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사도행전 19:18,19
"이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백하여 자기가 행한 일들을 털어놓고, 신기한 술수를 쓰던 많은 사람들도 자기 책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값을 계산한즉 은화로 오만 개나 되더라."
결 론
참으로 거듭나서 성경을 사랑하는 크리스천들은 결코 사탄과 관련이 있는 그 어떤 사악한 일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는 "핼로우인데이"가 마귀의 생일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이 "핼로우인데이" 즉 10월 31일에 마녀들과 사탄 숭배자들은 아이를 죽여 인신 제사를 드린다. 우리는 이제 "핼로우인데이"가 마귀에게서 나온 사탄주의 풍습임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며, 바로 이 쪽지의 목적도 그런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 다음으로 연락하기 바란다.
The Bible For Today, Inc.
900 Park Avenue, Collingswood, NJ 08108
Phone:609-854-4452; FAX: 609-854-2464
E-mail: YSWaite@BibleForToday.org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다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에게도 걸림이 되지 말고, 나와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0:31-33)
2009-05-08 15:53:10 | 관리자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대체로 하나님이 한 위(位)로만 존재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의 인성(人性)에 대한 신학적 기반은 2~3세기의 단일신론과 아리우스 및 그 추종자들(아리우스파)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 후에 교회는 이 두 분파의 교리를 모두 이단으로 선언했다. 유니테리언주의의 현대적 뿌리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이며 이성주의적인 개혁자들은 플라톤이 강조했던 이성과 하나님의 단일성을 부활시켰다. 이들 사상가 중 많은 사람이 종교재판 때 이탈리아를 떠났다. 주도적인 신플라톤주의적 유니테리언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는 결국 제네바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폴란드에 은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망명자 중 주요인물인 파우스투스 소키누스는 1579년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소키누스의 신학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으며 대부분의 유니테리언주의자들과 만인구원론자들은 지금도 이 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활동한 초기의 주요인물은 페렌츠 다비드였는데, 예수는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에게 기도할 수 없다고 가르쳐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다비드는 1579년에 옥사했는데 그가 세운 교회는 현재 남아 있는 유니테리언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9-05-08 15:52:3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