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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머리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후 치러진 역대 선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승리의 열쇠는 ‘단일화’였다.  1987년 야당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여당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이 되었고 1992년에는 3당 합당으로 여권의 단일 후보가 이루어져 김영삼 후보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이어 1997년에는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으로 인해 여당의 후보 단일화가 실패함으로써 야당인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그리고 2002년, 사실상 각자 20%대의 지지율에 머물러 패색이 뚜렷하던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단일화를 하지 않고 각자 출마했으면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불가능하였다. 비록 정몽준 대표가 투표개시 약 8시간 전 지지철회라는 소위 ‘본헤드(bonehead)플레이’를 했다고는 하나 노 후보를 당선자로 만든 사람은 누가 뭐래도 정몽준 대표이며 역시 이번 대선도 ‘단일화’가 승리의 열쇠임을 입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단일화(單一化; to become one)란 정치적 코드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여론(public opinion) 지난 한 해 우리는 대선을 치르면서 소위 ‘바람(風)’과 ‘여론(與論)’이라는 국민적 조울증(躁鬱症)을 경험할 수 있었다. 민주당 국민경선 과정에서 ‘노풍(盧風)’이 불었다가 월드컵 이후 ‘정풍(鄭風)’이 불고, 이어 두 바람이 주춤했다가 후보 단일화를 계기로 다시 ‘노풍’이 불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민심이 춤추고 있어 갈피를 잡기 힘들 지경’이라고 푸념했는데 어찌되었거나 대선의 특수를 누린 곳이 여론조사 기관이었으며 이제는 어느 누구도 여론조사를 무시하고 정치를 할 수가 없는 시대가 도래된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특히 지난 해 11월24일 민주당과 국민통합21 간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노 후보가 정 대표를 눌러 양당의 단일후보로 결정된 것은 여론조사의 엄청난 위용을 보여준, 세계 정당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권을 잡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여론인데 이를 잘 활용하였던 성경 속의 인물로 압살롬을 들 수 있다. 구약에서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나타나고 있는 압살롬이 왕위 찬탈을 위해 어떻게 여론을 조성하였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압살롬이 일찍 일어나 성문길 옆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분쟁거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떤 도시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말하기를, 종은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그 일들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말을 들을 사람을 왕께서 임명하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어 청원이나 사정이 있는 사람이 다 내게로 올 때에 내가 그에게 정의를 베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어떤 사람이라도 그에게 가까이 와서 경의를 표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온 이스라엘에게 압살롬이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니라.”(삼하15:2-6, 이하 흠정역) 그리하여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계속해서 불어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을 따르게 되었으므로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왕궁을 버리고 그냥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삼하15:12-14).   그렇다. 이제 장차 적그리스도가 이 땅을 다스리게 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여론이 조성될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놀랍게 여기며 따르게 될 것이다(계13:3,4,13,14). 3. 새 질서(new order) 단일화를 위한 TV토론에서 정몽준 대표는 누가 단일 후보로 되든 상관이 없으며 단지 수구세력으로 대표되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기조발언을 하였다. 또 단일화 이후에도 노·정 두 사람은 합동 유세에서 줄기차게 ‘낡은’ 정치를 청산하여 ‘새로운’ 정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외쳐댔었다. 그리하여 네티즌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구호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 결국 끊임없는 지역갈등 외에 ‘세대간 갈등’을 낳은 최초의 선거로 16대 대선이 평가받게도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뿐 아니라 역사 속 수많은 지도자들이 ‘새 정치’ 곧 이전과 달리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되는 ‘새 질서(new order)’를 이미 주창해 왔었다. 즉 고대 로마제국에서도 그랬고 근세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등이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사용하였던 아이템이 바로 ‘새 질서’였던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질서(new order)란 개념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1:9). 그러나 이 새 질서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노 당선자에게 기대하는 바와 같이 동서 간 지역주의의 타파요, 동서뿐 아니라 남북이 하나로 되는 일이요, 더 나아가 세계화 시대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미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나 부시 전 대통령 등 20세기의 지도자들도 미·중 수교나 걸프전쟁과 같은 역사의 갈림의 현장에서 온 세계인이 하나로 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줄기차게 강조해온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 세계 질서’를 통해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세계 평화와 안전과 자유와 질서가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9. 11. 테러 사건을 당한 미국인들은 더욱 더 이러한 새 세계 질서를 갈망하고 있을 터인데 비단 미국뿐 아니라 갖가지 갈등과 분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온 세계인들이 이를 환영하며 함께 힘을 합쳐 여러 가지 건전한 정책들을 세우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새 세계 질서를 이루고자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가 한 시스템 안에서 새로운 지구촌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인데 안타깝게도 바로 그 때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온 세계는 곧장 파멸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적그리스도)가 자기의 정책(policy)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속임수가 형통하게 하고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며 평화를 빌미로 많은 사람을 멸할 것이요,"(단8:25상) "또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말할 그 때에 아이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4. 단일 경제(one economy; one monetary system) 이 번 대선에서 선거 운동 막바지에 들어 가장 논쟁이 되었던 수도 이전 공약도 그렇고 거의 대부분의 다른 공약들도 우리가 먹고 사는 것 곧 경제와 직·간접으로 연관된 것들이었다. 더욱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독재자로서 저질렀던 과(過)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功)을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평가가 바뀌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빌 클린턴의 경우에도 수많은 스캔들과 외교적 부침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무하는 동안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기 때문에 업무를 잘 수행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세계 모든 나라에서 최고 지도자들이 경제 대통령 또는 경제 수상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길 바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따라서 ‘새 세계 질서(NWO)’가 먼저 이러한 경제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추진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리라. 1967년 7월 1일 EEC(유럽 경제 공동체), ECSC(유럽 석탄·철강 공동체), Euratom(유럽 원자력 공동체) 등 3개 공동체가 평화와 경제 번영을 위한 유럽 통합을 목적으로 통합하여 설립한 EC(유럽 공동체)가 대표적인 단일 경제 체제이다. EC는 결국 1994년 1월 1일부터 그 이름도 EU(유럽 연합)로 바뀌면서 상품·사람·자본·서비스 등의 자유이동을 제한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유럽 단일시장을 탄생시켰으며 이제 21세기에 들어서는 유로화의 가치로 알 수 있듯이 너무나도 확고한 단일 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해 월드컵 공동 개최와 한·일 투자협정 체결을 계기로 한·일 양국의 기업인들은 한국과 일본이 관세가 없는 하나의 시장으로 묶인다면 인구 1억 7천만 명에 5조 달러 규모의 엄청난 시장이 탄생하여 급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생존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또한 2002년 11월 4일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싱가포르의 고촉동(吳作棟) 총리는 EC를 모델로 하여 아세안 5억 인구를 관세가 완전 제거되고 상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단일시장으로 묶는 ‘아세안 경제 공동체(AEC)’를 2020년까지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그렇다. 이제 세계 각국은 ‘새 세계 질서(NWO)’를 따라 치열한 세계 경제 전쟁에서 서로 이익을 보는 윈윈 전략으로 단일 경제 체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면 결국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권역별 단일 시장도 하나로 통합되어 ‘세계 단일 경제(One World Economy)’가 이뤄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EC(EU)와  유로(Euro)화의 관계에서 보듯이 ‘세계 단일 화폐 제도(One World Monetary System)'가 만들어져 이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고는 어떠한 거래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계13:16-18).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계13:17) 5. 단일 정부(one government) “전쟁이냐 평화냐”라고 외치던 노 후보와 그의 지지자들의 바램은 물론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통일 방법은 정치인들의 논리와는 달리 북한이 내부사정으로 붕괴되어 남한에게 전격적으로 흡수되는 평화통일일 수도 있고, 항간에서 주장(www.ddanggul.org)하는 대로 어이없게 하룻밤 사이에 적화통일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전자의 방법론이라면 내어놓고 반대할 사람은 없을 터인데 통일지상주의의 감성적 통일론자나 또는 통일에 부수되는 손실이 예상되어 통일을 원하지 않는 반통일론자 등의 극단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통일은 우리 민족이 속히 이루어야 할 지상 최대의 명제임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남북통일이 되어야 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다음의 예로써 그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남한에서 연간 음식쓰레기로 낭비되는 8조 원 중 4%만 절약해서 옥수수로 바꾸어 북한에 보내면 북한의 기아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내려진 지 오래건만 아직도 북한에서는 연간 100만 명 가까운 이들이 굶어 죽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가 있을까? 앞서 언급된 ‘단일 경제 체제’로 가면 북한의 경제가 살아나 북의 기아 문제도 해결될 수 있지만 역시 이를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두 정부가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즉 새 질서를 넓혀 나가기 위해서는 관장하는 조직 곧 정부도 단일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1993년 11월 1일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에 따라 1994년 1월 1일부터 경제 공동체인 EC가 정치적 공동체도 표방하는 EU(European Union: 유럽 연합)로 공식명칭을 바꾼 사실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아울러 작년 10월 29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EU가 2004년부터 회원국을 현행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확대하는 대변화에 맞춰 채택할 유럽 헌법 초안이 공개되었는데 여기에는 EU가 하나의 정부로 불리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25개 회원국에 인구 5억명 이상의 거대한 지역 공동체로 등장할 새로운 EU에는 현재의 유럽의회와 EU 회원국 의회를 합친 ‘유럽국민회의’ 가 창설될 예정인데 유럽국민회의의 가장 큰 역할은 2년에 한 번씩 EU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EU 공동의 외교안보 정책을 대표하기 위해 권한이 더 강화된 EU 외무장관 신설 및 EU 회원국 국민들이 자국 국적과 EU 국적을 동시에 갖는 이중 국적 제도 등 장래 EU의 기본골격은 유럽 헌법 초안으로 볼 때  ‘슈퍼스테이트(superstate)’, 즉 가맹국들을 지배하는 국제정치기구라는 것이 언론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리고 로마노 프로디 EU 집행위원장이 “10개 새 회원국 가입은 유럽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이제 앞서 설명된 ‘세계 단일 경제(One World Economy)’를 통해 세계 각국의 분열은 그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며, 바야흐로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세계 단일 정부(One World Government)'가 탄생될 것이다(계13:1-3; 17:8).  즉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무너진 바벨탑을 다시 쌓기 위해서 하나로 뭉치는 작업이며 세상의 종말을 재촉해 가는 하나님의 섭리이다(창11:1-9; 단2:24-45). 6. 단일 종교(one religion)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대표의 단일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던 지난 해 11월,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단일화를 추구하며 출간이 되었다. 곧 다일공동체 대표로 잘 알려진 최일도(崔一道) 목사와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法輪) 스님, 그리고 오순절 평화의 마을 대표인 오수영(吳壽永) 신부가 함께 펴낸 ‘함께 사랑한다는 것,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란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이 책의 출판사이기도 한 조선일보에는 이 세 사람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번에 내신 책에서 세 분은 물질과 정신, 수행과 이웃사랑, 종교간 화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최 목사는 “실제로 우리가 다른 것은 한두 가지에 불과하고 같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다일공동체의 자원봉사자들은 여러 종교·종파의 신자들로 구성돼 있지만 활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답을 하였고, 이어 다른 종교의 종교인과 함께 책을 낸 소감에 대한 물음에는 “저는 늘 여러 종교가 함께 참여하는 수행공동체를 꿈꿔 왔습니다. 이번에 맺은 인연이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엘리야가 바알 제사장들과 함께 수행을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아니면 사도 바울이 각종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들과 같이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모습을 그려보라. 상상이 가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반응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은 모든 종교인들이 함께 사랑함으로 함께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고 고백하는 최 목사와 같은 이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대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음이라.”(눅6:26)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보자. 제 14대 달라이 라마가 미국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맨 처음 그를 영접하여 잔치를 베풀어준 자는 뉴욕 지구 쎄인트 페트릭 대주교 교회였다.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다.”라고 달라이 라마가 선언했을 때 장내를 가득 채운 군중은 기립박수로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이 사건을 1979년 9월 17일자 타임지는 ‘특별한 타종교 간의 축제’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말씀한다. “이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도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그렇다. 오늘날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 전 세계의 종교를 하나로 묶는 ‘종교 간의 화해와 통합 운동(Inter Faith Movement)’이 날이 갈수록 활발해 지고 있다. 1997년 6월에는 새 세계 질서(NWO)의 일환으로 종교연합기구(UR: the United Religions Organization)에 의해 새 세계 교회(a New World Church)가 이미 시작된 상태이다. 궁극적으로 세계 단일 정부(OWG)라는 새 세계 질서(NWO)를 이루어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세계 종교 통합(One World Religion)’인데 적그리스도는 결국 이 ‘세계 단일 종교(One World Religion)’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으로 높여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경배를 받게 될 것이다(살후2:3,4; 계13:8).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3,4) 7. 마무리 촛불시위 최초 제안자인 ‘앙마’ 김기보(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씨가 촛불시위 기사를 ‘자작(自作)’한 사실에서 드러났듯이 포퓰리즘(populism)은 앞으로 전 세계 네트워크가 완벽해 지는 ‘새 세계 질서(NWO)’ 하에서 더욱 무섭고도 세련된 형태로 기승을 부리리라 전망이 된다. 특히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이 모두 연합하여 새 시대(New Age)의 도래를 추구하면서 공통적으로 내거는 “평화와 일치”란 슬로건 하에서는 더욱 포퓰리즘이 아름답게 포장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경제, 정치, 문화, 종교 등이 하나로 되어 인간들에 의한 유토피아가 건설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together, 고후6:14)로 시작하여 ‘일치’(agreement, 고후6:16)로 끝날 단일화 운동에 대하여 성경은 다섯 번이나 ‘어찌?’로 경고하고 있다(고후6:14-16). 즉 사탄은 세상을 향한 연합과 일치를 부르짖으나 세상과 분리되고 구별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고후6:14-16)
2009-05-08 15:07:23 | 관리자
1. 레프트 비하인드 며칠 전 아마존(amazon.com)으로부터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10번째 시리즈물 ‘더 렘넌트(The Remnant, 남은자들)’의 출간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대환난기에 접어든 지 한 달, 예언된 ‘영광스런 주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 도시 페트라에 모여든다. 세계정부는 지체하지 않고 폭격을 가하여 그 도시는 완전히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이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운명은…(It's one month into the Great Tribulation, and a million people gather in the ancient city of Petra to await the foretold ‘Glorious Appearing.’ The Global Community loses no time in bombing the city, which is completely engulfed in flames, guaranteeing certain doom for those assembled unless a miracle occurs…)” 지구 최후의 날을 소재로 지난 1995년부터 출간된 ‘레프트 비하인드’는 지금까지 9편의 시리즈물을 모두 합쳐 3천200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에 한동안 이 시리즈물 중 몇 권이 아마존에서 종합부문 베스트 셀러 1위 및 상위 랭킹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출간된 10번째 ‘더 렘넌트’는 초쇄 부수가 무려 300만부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출판 동향에 맞춰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최신호(7월1일자)에서 ‘성경과 요한계시록’이라는 제하의 특집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CNN과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올여름에는 종말론에 관한 서적이 최대 인기를 끌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17%가 자신이 생존하는 동안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답한 가운데 언젠가는 종말이 올 것이라는 응답도 42%를 차지하여 종말론을 신봉하는 응답비율이 과반수(59%)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타임은 “복음주의 독자들에게 있어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물은 영적인 가이드 이상의 것을 제공해 준다. 이 책들은 정치적 어젠다라고 할 수 있다”며 팀 라헤이(Tim LaHaye)와 제리 B. 젠킨스(Jerry B. Jenkins)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토대로 쓴 이 시리즈물을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2. 종말 그러면, 정말로 종말은 곧 오게 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진정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대환난이 소설 속에서처럼 이 세상에서 진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인가? 물론이다.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맞이하고(요14:3; 딤후2:19), 악을 행하는 자들을 자신의 임재 가운데서 영존하는 파멸로 징벌하며(살후1:7-9; 마13:39-43), 통치와 영광과 왕국을 받으시고 모든 백성들, 민족들 언어들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단7:13,14) 주님께서 다시 오실 터인데 우리는 바로 그 때가 임박했음을 성경에 제시된 여러 표적들(단12:4; 나2:3,4; 마24:7,12; 딤전4:1-4; 딤후3:1-5; 약5:3; 벧후3:3,4)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세태를 보며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great tribulation)이 있을 것임이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때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주께서 그 날들을 짧게 하지 아니하시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로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짧게 하시리라.”(마24:21,22, 이하 흠정역) 이 대환난과 종말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뿐 아니라 신구약 곳곳(사65장; 렘30:7; 단9,12장; 슥12장; 마24장; 막13장; 눅21장)에서 너무나도 정확하고 자세하게 언급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제한된 지면에서 다룬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겠지만 이 글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순서를 따라 아주 간략하게 대환난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함께 복을 받고자 한다(계1:3). 3. 휴거 먼저 대환난을 설명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대전제가 휴거(携擧, 공중들림, rapture, 살전4:16,17)이다. 휴거의 시점에 대해 적지 않은 신학적 이견이 있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라면 대환난 직전에 휴거되어 대환난을 겪지 않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기간을 면하게 하리니 이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기간이라.”(계3:10) 아울러 휴거에 대해 혼동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 시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이고(마24:36; 행1:7) 또 갑작스럽게 일어날 것이므로(살전5:1-3) 휴거의 시간을 명시하여 주장하는 자들은 100% 거짓말쟁이들이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마귀는 1992년과 1999년에 걸쳐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종말론 백신을 접종하여 사람들이 심판과 종말(휴거, 재림, 대환난 등)의 말씀들을 부인하도록 하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이는 그 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며 …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말이니라, 하시더라.”(막13:33,37). (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면 2000년11월호 건강과 생명에 쓴 필자의 글 ‘집단자살’ 및 도서출판 건생에서 출간된 척 스미스의 ‘대환난과 교회’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4. 대환난    1) 전쟁, 기근, 사망 적그리스도가 흰 말을 타고 구세주를 가장하여 나타나지만 그는 전세계인을 파괴하여 노예화하려고 한다(계6:2). 붉은 말이 등장하여 지상에 엄청난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어서 검은 말의 출현으로 지구상에 대기근이 오게 된다(계6:4,5). 아마도 핵전쟁의 결과로 모든 작물이 불타버려 세계적 규모의 기근이 초래될 것이다. 창백한 말이 나오면서 지상의 25%의 사람들이 전쟁, 기근, 전염병 등으로 죽게 된다(계6:8). 휴거 후 수십억의 사람들이 지상에 남겨져 대환난 시대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무려 10억 이상의 사람들이 연달아 죽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휴거된 후 지상에는 휴거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세계적 공포(panic)가 초래되며 동시에 이제껏 없었던 영적 부흥이 대규모로 일어난다. 그러나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이 중 수많은 이들이 순교하게 된다(계6:9-11).    2) 지표의 변화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자 지구가 흔들리며 지표의 변화가 일어나 섬들이 바다에 가라앉고 높은 산은 무너지며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계6:12-14). 만약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몇천 톤의 흙먼지나 티끌이 공중으로 치솟게 되면 그 순간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은 핏덩이처럼 보이게 될 것이며, 또 지축이 변화되어 산들이 무너지고 섬들도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게 되자 비도 오지 않고 따라서 대기오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며 땅은 사막과 같이 황폐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계7:1). 나팔이 불리자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 땅에 쏟아져 나무의 삼분의 일과 푸른 풀이 다 타버린다(계8:7). 이어서 바다생물과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며(계8:8,9) 또한 물도 오염되고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어두워진다(계8:12). 몇 년 전 개봉된 블록버스터 SF 영화 딥임팩트(deep impact)나 아마겟돈에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지구에 소혹성 운석이 떨어질 경우 그 피해는 전면적인 핵전쟁 이상의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지구에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소혹성의 수는 이미 이천 개 이상으로 확인이 되었고 그 중 몇 개는 지름이 무려 770km나 되기 때문이다.    3) 멈춰진 죽음과 대살육 지상 세계는 5개월 동안 메뚜기에 의해 고통 받지만 놀랍게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계9:3-6).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갈망한다 해도 죽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죽음이 멈춰진 때보다 최악의 고통의 시대가 또 있을까? 이것은 마치 죄인들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일 것이다. 다시 나팔이 울리며 대살육은 계속 진행이 된다. 2억의 군대에 의해서 살아남은 인류의 삼분의 일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계9:15-18). 오늘날 중국이 2억의 군대를 보유하였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공표된 사실이다. 그러나 2억의 모든 군사가 중국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몇 개 나라의 연합군일 가능성도 있다. 적그리스도를 지배자로 내세워 연합군이 형성되고 그들에게 거역할 때는 즉시 진압 당하게 된다.    4) 두 증인 대환난 시대가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을 위해 두 명의 증인을 보내신다(계11:3). 두 증인은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상 세계에 극심한 전염병을 가져올 수 있으며 42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계11:5,6). 이 두 증인은 예루살렘에서 1,260일간 증거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나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의해 죽게 된다(계11:7). 사흘 이상 이들의 시체는 예루살렘 거리에 팽개쳐졌지만 나흘째에 사람들이 이 두 증인의 되살아남을 목격하고서는 경악하게 된다(계11:11). 그리고 두 증인이 하늘에 오르자 예루살렘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의 십분의 일이 파괴되고 칠천 명의 사람이 죽게 된다(계11:13).    5) 적그리스도 짐승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자(살후2:4; 단9:27) 세상 사람들은 그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통일하였다고 믿기에 대부분 그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역하게 되면 무참한 박해를 받게 되는데 그 박해를 피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밖의 광야나 사해 남동쪽에 위치한 요단강 바위 계곡(Petra)으로 도망하여 3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계12:6). 치명적인 상처가 낫기도 하고 또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등의 기적을 사탄이 행하자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하게 된다(계13:3,8,12,13). 그리고는 오른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아 새로운 경제 시스템 하에 들어가게 되는데(계13:16,17)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계14:9,10).    6) 진노의 대접들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자 바다가 죽은 사람의 피같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혼이 바다에서 죽으며 강들과 물들의 근원들도 피가 되고(계16:2,3) 해는 사람들을 불사를 권능을 받아 사람들을 큰 열기로 태우게 된다(계16:8,9). 아마도 물의 오염, 산성비, 적조현상, 오존층파괴, 사막화, 온난화현상, 홍수사태 등의 자연재해와 기상이변들이 더욱 심화되고 증폭되면서 이러한 재앙이 초래될 것이다. 짐승의 왕국은 어둠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아픔으로 인해 자기 혀를 깨물고 자기의 아픔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한다(계16:10,11). 이어서 유프라테스 강이 말라서 동방의 왕들의 길이 예비되어 아마겟돈으로 세상 군대가 모이게 된다(계16:12-16). 그리고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지진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후 모든 섬이 사라지고 산들도 보이지 않게 된다(계16:18-20). 또 무게가 수십 킬로그램 되는 우박이 사람들 위에 떨어져 커다란 재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계16:21).    7) 바빌론의 붕괴 사탄은 지구 역사 가운데 악한 천재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최후의 싸움을 걸어온다. 짐승은 함께 권위를 받게 되는 열 왕과 손을 잡게 되며 음녀와도 한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다가(계17:2,12,13) 결국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한다(계17:16). 그리고 나서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었던 바빌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계18:2-24). 곧 영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킨 카톨릭과 같은 거짓된 종교제도와 그 부의 힘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여 세계 만민의 눈을 어둡게 하였던 경제 대국 바빌론은 붕괴되고 적그리스도는 최후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불못에 던져지며 사탄도 바닥없는 구덩이(무저갱)에 감금됨으로써 대환난의 시대가 마무리된다(계19:19,20; 20:1-3). 5. 대환난이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계22:20)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라고 화답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들여 자신의 모든 죄를 씻음 받아 대환난 가운데 들어가지 않는 모든 독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너희가 만일 그분을 구하면 그분을 만나려니와”(대하15: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고 하신 주님의 약속들을 기억하자.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2009-05-08 15:05:38 | 관리자
1. 들머리 사교의 집단자살 현장에서 경찰은 아직 죽지 않은 만삭의 여인을 구조하여 병원으로 옮긴다. 그러나 여인은 죽고 뱃속의 아이만이 살아 남는다. 집단자살 사건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들을 차례로 살해하던 악령은 그 아이를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부활하려 한다. 인간을 이용하여 세상을 지배하려는 악에 맞서 싸우기 위해 퇴마사는 악령과 일대접전을 벌인다. 이상의 스토리는 안성기, 신현준, 추상미 등이 주연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퇴마록'의 기본 줄거리이다. '퇴마록'에서 플롯(plot)의 구성이 가능하게 하였던 집단자살이라는 사건은 단지 영화 속의 허구는 아니다. 우리 삶에서 날로 증가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인 집단자살은 현실적으로 이에 대한 예방책이 큰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슈일 뿐 아니라 세 번째 밀레니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히 영적인 분별력이 요구되는 너무도 중요한 성경적 주제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집단자살의 유형들과 그 기전(機轉, mechanism)을 살펴보고 성경적 관점에서 집단자살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집단자살의 유형 1). 동물에서의 집단자살 스페인에서는 해마다 '고래소동'이 일어난다. 스페인 해안가에 매년 약 4백 마리의 고래들이 뭍으로 올라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일부 고래는 사람의 손에 의해 구조된 경험이 있는 고래들이기도 하다. 이 같은 현상은 스페인뿐 아니라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노르웨이에 사는 레밍 쥐(Lemmus lemmus)는 보통 쥐와는 다른 괴이한 행동을 한다. 다리가 짧고 작은 귀에 부드럽고 긴 털을 가진 설치류 레밍 쥐의 집단은 3-4년만 지나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면 봄이나 가을의 하루를 잡아 야음을 타고 여러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나중에는 대낮에도 집단으로 이동한다. 이들의 종착지는 바닷가다. 거기서 막다른 벼랑에 다다르면 처음에는 멈칫 바다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며 도망갈 곳을 찾다가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을 알아차리고는 그만 바다에 빠져버린다. '집단 자살'이 자행되는 것이다. 또 1993년 8월 중국 신장지구에서는 수만 마리의 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슬처럼 연결돼 강으로 뛰어들어 자살한 적도 있다. 1995년 중국 내몽고에서는 5백여 마리의 염소들이 목동들의 필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호수로 뛰어들어 집단 자살을 벌인 사건이 일어났다. 평소 물을 싫어하는 염소 두 마리가 깊이 1.5m의 호수로 뛰어들자 다른 염소들도 이들의 뒤를 따랐고 결국 2백여 마리의 염소가 목숨을 잃었다. 2). 비종교적 집단자살 얼마 전 중학교 여학생 4명이 20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집단 자살을 한 적이 있었다. IMF여파로 인한 가장의 자살이 잇따르던 가운데 발생한 여중생 집단자살은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이들 여중생들이 가난을 참지 못할 고통으로 생각하고 자살까지 결심했을 뿐 아니라 주저 없이 동반자살을 택했다는 점이다. 또한 1830년대 중국 광동성의 광주 지방에서도 예닐곱 명으로 추정되는 일단의 처녀들이 집단으로 강에 투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자살자들은 금란회(金蘭會)라는 일종의 비밀결사의 조직원들이었는데 금란회는 처녀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서로 자매로 지내기로 맹세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조직원 중 한 명이 어릴 때 부모님이 이미 혼사를 결정해 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됐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한밤중에 탈출에 성공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인 금란회 회원들은 회칙에 따라 함께 강물에 투신 자살을 한 것이었다. 1998년 6월 26일(금) 오전11시 합동참모본부 정영진(육군중장) 작전본부장은 국방부 기자실에서 북한잠수정 침투사건 조사결과 발표 후 기자회견을 갖고 "4명은 머리에 총상을 입었고 5명이 난사 당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11명이 모두 머리에 총상을 입고 자살한 전례가 있다. 이번에 총기로 난사한 것을 보면 공작조와 승조원들 사이에 집단자살을 놓고 의견충돌이 있었던 것 같다."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88일만에 함락하였는데 쫓겨난 열심파들은 맛사다 고지에서 끝까지 항거하다가 집단자살을 하여 결국 독립운동에 실패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마태복음 24장 2절에 나온 예수님의 예언대로 완전히 멸망하였다. AD 660년 백제의 제 31대 의자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해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소정방이 거느린 당나라 군사와 연합군을 짜서 백제를 총공격하였다. 계백 장군이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로 나아가 5만 명의 신라군과 싸웠지만 전멸하였고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무너뜨리니 의자왕은 항복하고 말았다. 이 때 백제왕의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집단자살의 또 다른 일례이다. 3). 종교적 집단자살 1>. 오대양 사건은 1백70여억 원의 사채를 빌려쓰고 행방을 감췄던 ㈜오대양 대표 박순자씨와 그 직원, 가족 등 32명이 1987년 8월29일 경기도 용인에서 집단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수사 당국은 이 사건이 소위 '집단 자살', 그러니까 전원의 자유 의사에 따라 남자 3명이 나머지 29명을 목졸라 살해하고 3명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 배후는 오대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집단 구원파(정식 명칭은 '기독교복음침례회')였는데 그 중심인물은 당시 잘 나가던 ㈜세모의 사장 유병언씨다. 이 사건은 이후에도 두 차례나 재수사 과정을 밟게 되었지만 결론은 변함없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집단자살이었다. 2>. 1999년 10월 5일 강원도 양양 남대천 둑에서 7명이 자신들이 타고 다니던 승합차에 불을 질러 집단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분신 전에 번호판까지 떼어버려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던 이들은 놀랍게도 종말론에 심취해 있던 목사와 그를 추종하던 영생교회 신도들로 밝혀졌다. 수년 전부터 가족들조차 버린 채 서울의 한 단독주택에서 극도로 폐쇄적인 집단생활을 해온 이들은 우 목사를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신격화하고, 예전부터 주위에 순교에 대한 암시를 하는 등 광적인 종교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3>. 1978년 남미 가이아나에서 벌어진 인민사원 집단학살 사건은 감리교를 비틀어 이단종교를 만든 교주 짐 존스에 의해 저질러졌다. 당시 존스는 인권유린 여부를 조사하러 온 미국 상원 조사단원 3명을 살해한 뒤 신도들을 신앙촌 광장에 모아놓고 강제로 독극물을 마시도록 해 모두 914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남미의 밀림에 신앙촌을 건설하고 이 사설 왕국의 군주로 군림한 존스는 제2의 예수, 최후의 인도주의자, 참된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지만 결과는 떼죽음이었다. 4>. 1993년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발생한 다윗파 집단자살사건은 종말론을 맹신하며 무기를  갖고 다니던 교주 데이빗 코레시와 신도들이 불법무기 수색에 나선 공권력에 맞서 51일간 저항하다 불을 질러 집단자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어린이 24명을 포함해 교주와 신도 등 86명이 숨졌다. 코레시도 심판의 날을 예비하는 예언자이자 '하나님의 어린 양'을 자처했고 신도들은 프리섹스로 그들만의 천국을 즐겼다. 5>. 태양의 사원은 재림 예수를 자청하는 벨기에인 뤽 주레가 1987년 창설, 스위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캐나다에서 신도를 늘려가다가 1994년 10월 교주와 신도들이 집단자살극을 벌임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스위스와 캐나다에서 동시에 발견된 53구의 시신은 죽음에 앞서 모종의 종교의식을 치른 듯 장미와 십자가가 그려진 예복 차림에 둥근 대열로 누워 있었다. 일부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됐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총상과 마약주사 흔적이 있어 타살가능성도 제기됐다. 알프스 산록의 농가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된 신도 중에는 소도시 시장과 기자 등 지식인도 포함돼 있었다. 이 집단 신도들은 1995년 12월 프랑스, 1997년 3월 캐나다에서도 자살극을 벌였다. 6>. 1997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 산타페에서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신도 39명이 진정제를 넣은 음식과 보드카를 먹고 집단 자살했다. 이들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천국의 문' 신도로 UFO를 타고 천국에 가 영생을 얻겠다는 신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신도들은 대부분 컴퓨터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로 교리내용을 인터넷 웹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이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진화단계를 졸업하고 천국에 있는 존재들과 함께 고차원의 생명을 얻는 것"이라며 자살 직전 즐거운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과거 동료나 목사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7>. 2000년 3월 17일 우간다에서는 '하나님의 십계명 회복 운동'이라는 사교집단의 집회소에서 집단자살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약 900 여명이 사망하였다. 우간다 남서부에서 발생한 집단자살 사망자 중 어린이 78명과 적어도 6명의 신도들은 종말론 지도자들에 의해 강제로 살해됐다는 증거 및 증언이 나왔다고 우간다 경찰이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영생교회처럼 집단생활을 하고 있는 사교집단이 전국적으로 60여 곳이 넘고, 이들 집단의 제2, 제3의 집단자살 또한 우려되고 있다. 미국의 사이비 종교 전문가 마이클 셔머에 의하면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종말론 사교 집단이 1,200여 곳에 이른다고 하는데 특히 워싱턴주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서부에는 종말론 집단 40여 곳이 무기까지 갖춘 채 산악 지역에 모여들어 있다고 한다.) 3. 집단자살의 기전 1). 동물에서의 집단자살 스페인 동물학자들은 돌고래들이 정말 '자살의지'를 가지고 이런 행위를 하는지 아니면 '식욕부진' 같은 일시적인 생리적인 현상으로 인한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래들이 밀물을 따라 해안가로 왔다가 썰물 때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가끔씩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어 그 원인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고래의 소리 체계의 이상으로 인해 방향 감각이 상실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사실 자살을 시도하는 일부 고래들에게서 방향감각 기관이 있는 귀 부근에 염증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례적으로 고래들이 끊이지 않고 자살을 하는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레밍 쥐들은 3, 4년에 한 번씩 개체군의 '폭발'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따라서 레밍 쥐들은 자신들의 생존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폭발' 현상과 함께 대이동을 시작하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쥐들이 죽거나 다치게 됨으로 자연스레 적절한 수를 유지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노르웨이 레밍 쥐들의 이동은 극적인 것이어서 무더기로 바다에 뛰어드는 투신자살을 강행한다. 확실한 원리를 밝히지는 못했지만 때가 되면 늙은 쥐들이 죽어줌으로써 집단의 밀도를 낮춰 결과적으로 종족보존에 도움을 준다는 설명이 있다. 이런 집단자살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대자연의 생태계로 따져보면 자연이 스스로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이기도 하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2). 비종교적 집단자살 집단 자살을 한 중학교 여학생들의 마음 속에 무슨 죽을 만큼 모진 일들이 있었을까? 물론 그들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이 있었겠지만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었든지, 이성문제였든지, 학업문제였든지 심지어 감상적인 충동이었든지 간에 그들에게는 세상에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고독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회심리학자들은 설명하기도 한다. "고독을 느끼지 않으면 현대인이 아니다."는 말처럼 고독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일까? 금란회와 비슷한 조직이 광동 지방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당대의 호사가들은 이 사건을 동성연애자들의 병적 행동이라고 했지만 일부에서는 중국 여성들이 받고 있는 가혹한 성차별과 억압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광동 지방은 견직물업 지역으로 여성들은 주로 제사공으로 일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노동자로서 받는 수탈에다 가정에서 남성으로부터의 수탈까지 겹쳐서는 살 수 없다는 인간 극한의 절규로 이해되고 있다. 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이나 98년 북한잠수정 침투사건 또는 백제의 낙화암 사건과 맛사다 결사항전 등은 모두 전쟁에 지면 안된다는 군인정신 내지는 집단 민족정신 또는 신앙 공동체적 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겠다. 비록 오늘날 고고학계에서 맛사다가 '정치와 고고학이 결탁해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는 데 이용됐다'는 주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기도 하지만 꺾이지 않은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이 맛사다의 외침은 60∼70년대에 주변 아랍국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 3). 종교적 집단자살 질병을 옮기는 바이러스처럼 한 사람 또는 일부 집단의 주장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마인드 바이러스(mind virus)'라고 말한다. 이 마인드 바이러스는 TV 광고, 종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제기한 '밈(meme)'이라는 용어가 마인드 바이러스의 출발점이다. 그는 주로 모방에 의해 전파되는 문화요소가 밈이며 노래, 사상, 선전문구, 패션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집단자살한 광신도 집단들을 일종의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제품의 장점 또는 기업 이미지를 은연중에 유포시키는 상업광고나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들도 마인드 바이러스를 활용하는 사례다. 특히 인터넷의 등장은 마인드 바이러스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는데 네트워크와의 접촉이 잦은 미래 인류는 마인드 바이러스에 더욱 쉽게 노출될 것으로 사회생물학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사교 집단의 위험성은 상당수가 폭동 등 사회 불안을 일으키면 종말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런 종말론 열풍을 시대 변화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사회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마크 킹웰 교수(종교학·철학)는 "미치광이 같은 종말론은 역사 전환기마다 반복을 거듭하며 나타났던 것"이라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단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기독교단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단/사이비는 무려 490종이 있고, 최근에는 사이비종교 피해사례가 하루 40여 건이 넘게 접수되고 있다고 한다. 종교 전문가들은 현재의 경제불황과 인류의 마지막 천년이라는 사회적 불안심리 등으로 반사회적, 반인륜적인 사이비종교가 앞으로도 계속 극성을 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종교연구가들은 인류의 종말 을 걱정하는 국내 종교단체가 유사종교까지 합쳐 65,000 개로 본다.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곳은 80-100여개, 신도수는 약 20만명 정도이며 적어도 수만명이 여기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측은 5-6개 단체, 경찰은 20여개 단체들이 한 번쯤 일을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 해 포항 모교회 신도들이 집단 가출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듯이 수십, 수백명씩 외딴 시골 등에서 외부접촉 없이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하고 있다. 신도들이 집단자살한 채 발견된 '천국의 문'과 같이 '미래의 한 시기에 인류보다 뛰어난 생물체가 UFO를 타고 와서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집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최근호에 따르면 현재 미국만 해도 무려 5천개의 광신집단이 있으며 최근 들어 이들 중 상당수가 UFO 신앙의 양상을 띤다고 보도했다. 이 밖에 프랑스에서는 4광년 떨어진 한 행성을 다녀온 '라엘'의 계시를 따르는 라엘리언 무브먼트가 적잖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라엘리언 무브먼트 회원들은 인간이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우주인들의 유전공학술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UFO는 지구에 낙원을 건설할 우주인이 타고 온 것이라고 한다. 회원들은 우주인을 '엘로힘'이라 부르는데 '엘로힘'은 원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 집단자살의 성경적 관점 1). 종말성 집단자살의 사건이 시한부 종말론 내지는 비성경적 종말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마24:36)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 집단에만 그리스도가 강림하시는 줄 알고 그리스도라 자처하는 그 집단의 지도자가 주장하는 종말론에 세뇌되어 기꺼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속이리라."(마24:3하-5, 이하 흠정역) 2). 진리의 변질 집단자살을 하였던 집단들이 내걸었던 타이틀의 어휘들을 살펴보면 '구원', '영생', '천국', '재림', '휴거' 등 오직 성경만이 갖고 있는 키워드(key words)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영혼 구원에 대해서 말하거나, 죽음이후 심판과 영생이 있다고 선포하거나, 최권능 목사처럼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거나,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공중들림 받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집단자살이나 하는 광신자의 영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 대신 '사랑'과 '화평'과 '복'과 '인간승리'와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 건설'과 같은 '보이는 신앙'이 우리가 지향해야 될 세련되고 고급스런 믿음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고후11:14) "저 사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함이라.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는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전 2:9-12)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말할 그 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 위에 임하리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3). 휴거 후 효과 성경에 휴거(rapture)라는 단어 자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 세상의 성도들이 공중들림 받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되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휴거가 일어난 다음 이 세상에 남아 7년 대환난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휴거 사건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극도의 혼란과 정신적 공황이 일순간 지구상의 수십억 인류에게 초래될 것인데 아마도 세계 정부나 지역 정부들은 그 때까지 날로 증가하고 있었던, 집단자살도 하며 폐쇄적인 은둔 생활을 해온 수많은 광신자 집단들의 또 다른 집단적 소동이나 치명적인 마인드 바이러스의 폭발적 감염 내지는 UFO와 연관된 사건이라는 컨센서스(consensus)를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휴거에 따른 역류작용(back flow)으로 적그리스도와 세계 단일정부는 쉽게 그 체제를 갖추고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대자연의 생태계에서 광신도들의 증발은 자연이 스스로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가이아(Gaia) 가설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참 진리이다! 세계 단일정부와 지도자 동지를 위하여, 브라보!'라고 환호하면서 말이다. 5. 마무리 지난 달 필자가 출석하는 온누리교회에서는 '디지털 세상, 불멸의 교회'란 타이틀로 창립 15주년 기념행사를 성황리에 치렀다. 아울러 같은 달 미국의 과학잡지인 디스커버리(2000년 10월호)에는 인류멸망의 가능성이 엄청나게 증가되었다고 하면서 2020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20가지 재앙이 소개되었다. 이 가운데 집단 정신착란이나 외계인 침공 및 종말론 확산 등이 인류멸망 요인 중의 하나로 제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 안팎으로 디지털(digital) 세상에 살고 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속의 형상 중 제일 마지막 단계인 발가락(digit) 시대가 바로 오늘인 것이다.(단2:41-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나 이것을 알라. 만일 집주인이 도둑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자기 집에 들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도 않은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마24:42-44)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상)"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2009-05-08 15:04:00 | 관리자
지금이 말세인가? (에이즈와 성경 그리고 재림 신앙) 정동수 인류는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에이즈 백신을 만들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30개의 백신을 테스트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이제 단 한 가지만 남았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여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백신이 나온다 해도 에이즈를 다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에이즈는 워낙 변종이 많기 때문에 한 가지 백신으로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질병들이 온 세상에 만연하게 된 것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말세의 징조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어 주셨으니 이는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 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음이니라."(롬1:26-27).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에이즈 관련 기사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마지막 때에 더욱 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신앙을 철저히 점검하고 재림의 소망 속에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목사들이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연하게 '에스라 하우스'라고 장로 교회의 노○○ 목사가 운영하는 웹사이트(http://www.ezrahouse.org/)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 질문과 답변이 많이 있어서 몇 가지를 보다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 목사는 장로교 계통에서 계시록 주석으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물론 칼빈주의 해석 체계이므로 환난 통과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 한국 기독교계의 계시록의 대가라는 분이 현 시대를 보는 관점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한 분이 답답해서 그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질문: 로마서 11장 25-27절에 대해서...     목사님 안녕하세요.  성경을 읽다가 답답하여 질문하게 되군요.  이스라엘이 대거 그리스도를 믿어 회심할 때 심판날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설명을 로마서 11장 25-27절로 이야기하는데 제가 읽어 보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고 심판날은 못찾겠고 구원문제만 헷갈리게 됩니다. 심판날과 상관이 있는지요.. 그리고 로마서 11장을 읽어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주인공 같고 이방인은 말 그대로 이방인취급 하는 것같은 느낌인데...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안 믿으니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고 이스라엘을 질투하도록 하셨고 그 동안에 이방인들 중에 그리스도께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다 올 때까지 지속된다는것도 맞는지요. 하여튼 재림하고 로마서11장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노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답변: 다른 번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    문맥이나 문장이 어려울 때는 다른 번역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어 성경을 적극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이나 표준 새번역 혹은 개역 개정판을 참고하시고 그래도 어려우시면 영어 성경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어떤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틀림없이 구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시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먼저 충분히 읽어서 원만한 이해가 있어야 신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의 기사는 주님의 재림하고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영영 버리신 것은 아니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아직은 상당한 세월이 흘려야 하고 아직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쯤 되면 다시 이방인들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배반하고 반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때가 올 것으로 봅니다. 아직은 그렇게 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이방인 세계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전도가 전혀 되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답변이 과연 성도들을 세워 주는 것입니까?  지금 질문을 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이 어렵기 때문입니까?  더더욱 현대어 성경은 개역성경만도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노 목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마서 11장이 주님의 재림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어떻게 성경을 읽기에 이스라엘의 부활이 예수님의 재림하고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로마서 11장의 말씀은 답답한 심정으로 물었던 그분이 지적한 그대로입니다.  즉 그 장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12-14장을 천천히 문맥을 따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극심한 환난 이후에 살아남은 온 민족이 회개하고 메시아를 맞아들이는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노 목사는 또한 주님의 재림까지는 아직도 상당히 오랜 세월이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이 부활해서 나라를 되찾으면서 이제 말세의 말세를 맞은 것이 아닙니까!   천년 왕국을 다루는 에스겔서 40-48장 전에 3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부활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그대로 믿지 않고 영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려면 멀었다는 주장을 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이제 교회로 바뀌었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야곱의 집 등이 모두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이스라엘이고 우리 믿는 이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요,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이지만 결코 육신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지금 중동에 서 있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분명히 있으며 성경에는 말세에 이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적용 될 예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모두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적용하게 될 때 성경해석상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약속들 중 실제의 육적 이스라엘이 받게 될 것들은 신약 시대 교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을 - 특히 구약성경을 - 읽으면서 그 내용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내인 이스라엘을 직접 다루시는 역사적 사실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 나하고 상관이 있는 '영적 QT 재료'로만 사용하기에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간단한 예로 에스겔서 37장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골짜기에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을 보여 주시고 이들에게 대언하게 하시고 결국 이 뼈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37장 1-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여기까지만 읽고 영적으로 이것을 내게 적용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것은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게 이에 대한 해석을 내려 주십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 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우리로 말하건대 우리는 끊어졌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로 하여금 너희 무덤들에서 나오게 하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를 너희 무덤들에서 이끌어 올릴 때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37:11-13).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뼈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며 40장부터 나오는 천년왕국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이방인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유대인들의 부활과 상관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이해한 뒤에 영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1차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 다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자기에게로 취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왕국, 주의 날, 천년 왕국 이전에 있을 7년 환난기 등을 다 교회에게 적용하고 영적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2003년 1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복제 인간이 탄생한다고 합니다.   온 세상에 에이즈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부활해서 언제라도 성전을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교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재림의 교리를 왜곡되게 가르치며 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을 맞아 부디 눈을 하늘로 향하고 비록 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것에 애착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끔찍한 대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가 휴거된다고 말씀하는 성경의 복된 소망을 믿고 최선을 다해서 믿음의 경주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3:1-3).   유엔·세계보건기구 발표 "에이즈로 올 310만명 사망" 2020년까지 6천8백만명 희생…인도·중국 등 인구대국 가장 위험     올해 들어 전 세계에서 3백10만명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로 목숨을 잃었고 5백만명이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새로 감염돼 전 세계 HIV 감염자 및 에이즈 환자는 4천2백만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앞두고 유엔에이즈퇴치계획(UNAIDS)과 세계보건기구(WHO)가 25일 발표한 '에이즈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획기적인 예방대책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2020년까지 모두 6천8백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전망이다.  이는 1980년대 초 에이즈가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발생한 에이즈 사망자의 3배가 넘는 수준이다. 보고서는 주요 에이즈 확산지역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꼽았다. 이 지역에서만 올들어 1백만명이 HIV에 신규 감염돼 역내 에이즈 환자 수는 인도 4백여만명, 중국 1백만명, 태국 70만명 등 모두 7백20만명으로 늘었다.  UNAIDS는 특히 "인도.중국.인도네시아 등 인구 대국의 경우 당장은 감염자 비율이 낮지만 앞으로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경우 헌혈과 수혈을 통한 감염자가 많아 지난해 상반기 중 감염자 증가율이 67%에 달했고, 이 추세대로라면 2010년에는 HIV 감염자 및 에이즈 환자가 1천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국제적십자연맹(IFRC)은 24일 마닐라에서 열린 지역회의에서 아시아 지역의 에이즈 확산을 경계하며 "당장 에이즈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아시아도 아프리카처럼 '에이즈 고아' 양산과 같은 사회, 경제적 참상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에이즈 대륙'으로까지 불리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올해 3백50만명이 에이즈에 새로 감염돼 총 감염자 수가 2천9백40만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보츠와나를 비롯한 일부 국가의 경우 임산부의 감염률이 30%를 웃도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상황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면서 "그동안 에이즈 감염률이 높았던 태국과 캄보디아, 우간다, 잠비아에서 감염률이 떨어지는 등 희망적인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중앙일보(2002.11.26)        
2009-05-08 15:02:43 | 관리자
예수님은 정말 다시 오시는가? 정동수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라는 최종권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어떻게 그분께서 살아 계시며 우주를 창조하셨고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히11:3). 무엇을 보거나 만져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사도들은 신약성경 안에서만 무려 삼백 번이 넘도록 예수님께서 영광과 심판의 주님으로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 그분께서 가장 빈번히 전하신 말씀이 바로 그분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은 정말 오는가 안 오는가 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확신의 대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정해진 날짜에 오신다고 예언하는 자칭 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왔다. 1990년대 초반에 가장 두드러진 조직체는 아마 이장림씨가 조직한 다미선교회일 것이다. 이 선교회 회원들은 전철역 등의 여러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1992년 10월 28일에 재림하신다고 외쳤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분의 재림에 대한 날짜를 제시하는 곳이 없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보면 주님의 날은 마치 밤에 도둑 같이 임한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도둑이 어느 때 오는지 알면 누구나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재림의 날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날짜에 다시 온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공통적인 이야기는 그들이 이상(환상)이나 목소리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2에서는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는 성자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존되어져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성부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한 14:9). 성경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요한복음 1장 1절은 그분을 말씀이라 부르며, 요한계시록 19장 13절 또한 그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성경만이 우리 믿음의 최종 권위이므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주장이라도 그것이 성경에 위배되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단순히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날짜를 제시하지 않으므로 성경에서 벗어난 이런 계시들은 고려해볼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가짜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유혹하는가? 창조 이후로 계속해서 사탄(마귀)은 인류를 기만해 왔고, 그의 운명은 창세기와 예수님의 계시록(성경의 첫째와 마지막 책들)에 이미 멸망될 것으로 확정되어져 있다.(창3:15, 계20:7-10) 사탄은 사람들에게 창세기는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 신화에 지나지 않고, 계시록은 이 책이 읽고 듣기만 해도 축복을 받는 책임에 불구하고(계1:3)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속여 왔다. 따라서 인류 구속사의 시작과 끌이 되는 이 중요한 책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쳐 지거나 읽혀지지 않는 배경에는 마귀의 교묘한 계획이 있음을 파악해야만 한다. 특히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눌 수 있는 좋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성경적인 신학교들과 지도자들이 심히 결여되어 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수많은 신학교들이 난립되어있고, 신학교 내에도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많은 인본주의적 신학자들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몸의 부활 등과 같은 영적인 내용들을 부정하는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다는 것이다.(마22:23-33,고전15:12-58) 예수님의 계시록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한국의 교회들은 그들의 부와 교인 수를 자랑하나, 실제로는 자신들이 영적으로 가난하고 벌거벗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천주교인들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질문 없이 무조건 믿어야 할 것을 요청 받는다. 이것은 절대로 인격적인 믿음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그분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재림의 문제도 이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져 왔다. 소위 성도들이 계시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위험하다는 것이고, 그냥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순수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거나 듣는 대신에, 자신의 흑은 다른 사람의 계시들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에 사탄의 꼬임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정확한 날짜는 성경에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재림의 시기를 분별하라는 주의를 주셨다.(마태24:32-34) 그러면 성경은 그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데살로니가후서 2:3-4에는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명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보여지듯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전 세계적인 기독교의 배교 현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 모든 종교들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같은 신을 섬긴다라는 전 세계 종교일치 운동이 지난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진행되어져 왔다. 로마카톨릭, 새시대운동(New Age Movement), 불교, 힌두교, 그리고 많은 개신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전 세계 종교회의가 이미 여러 차례 열렸다. 또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 유럽공동체(EC)는 경제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고 있고, 곧 정치까지도 일원화되어 유럽합중국이 될 것이다. 이미 EC의 돈인 ECU(에큐)가 나와서 여행자수표에 사용되고 있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 ECU의 앞면에는 계시록 17장에 있는 짐승 위에 음녀가 타고 있는 그림이 인쇄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EC가 형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온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마태10:30)라고 말씀해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아시며 간섭하신다.  그렇다면 유럽공동체가 형성되고 공산주의 국가들이 와해되는 이 모든 일들이 어찌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이 없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동시에 새세계 질서를 펴기 위하여 UN의 역할이 점점 강화되어져 가고 있음도 유의해야 한다. 또 유의해야 될 사항은 적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며 자신에게 경배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15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슴하신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너희가 보거든" 이 사실들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 글자 그대로 성전이 지어져야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성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산(지금의 예루살렘)에 지어져야만 한다. 솔로몬, 스룹바벨, 헤롯왕 당시의 성전들이 모두 같은 자리에 있었다. 기원 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이 없는 상태이다. 1948년 전까지 어느 누가 이스라엘이 재생하리라고 믿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6장과 에스겔 37장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며 하루 사이에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국가를 만드셨다. 그러나 그들은 1968년 6일 전쟁이 일어나서 당시 요르단에 속해 있던 서안지역(West bank, 예루살렘이 속해있음)이 이스라엘의 국토가 되기까지는 성전을 지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모세 다얀 장군은 "첫째 우리가 할 일이 성전을 짓는 것"이라고 공포했다. 1968년 이후로 지금까지 정통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성전을 지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와 만물이 신음하는 - 오존층 붕괴, 지구의 온난화 - 세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는 복음을 우리가 먼저 믿고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과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한다.
2009-05-08 15:01:17 | 관리자
신랑이 오신다 (레날드 샤우어스 지음, 정동수 역) 드디어 운명의 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함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21세기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결혼 풍습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이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들어서 자신의 약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이해해야만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에서 첫 단계는 보통 정혼이라 불리며 정혼은 결혼 계약을 확립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결혼 계약은 신랑 될 사람이 주도해서 시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신랑이 될 사람은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서 신부가 될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신부의 아버지와 협상을 벌여 얼마의 지참금을 주고 신부를 살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돈을 내고 신부를 사야만 했습니다. 신랑이 동의하고 지참금을 지불하면 결혼 계약이 확립되고 이제 처녀와 총각은 아내와 남편으로 간주됩니다. 또한 그 순간부터 처녀는 자기의 남편만을 위해 구분된 존재가 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결혼 계약이 확립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신랑과 신부는 잔에 담긴 포도즙을 함께 마십니다. 이와 같이 결혼 계약이 확립되면 신랑은 신부의 집을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신부와 떨어져서 약 1년 정도를 지냅니다. 이 기간에 신부는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며 신랑은 신부를 자기 아버지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살기 위해 아버지 집에 붙여서 자기들이 거할 처소를 마련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거할 곳’으로 번역된 맨션이 바로 이런 처소입니다. 신부와 떨어져서 약 1년 정도를 보낸 뒤 드디어 신랑은 자기와 함께 살기 위해 신부를 데려와야 합니다. 대개 신부를 데려오는 일은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신랑과 신랑의 들러리와 또 다른 동행자들은 신랑의 집을 떠나 횃불을 들고 행진하며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이들은 가면서 “보라, 신랑이 임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이 소식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거리에서 거리로 신부에게 곧 전달됩니다. 신부는 자기 남편이 온다는 것을 늘 기대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언제 정확히 올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신랑이 도착하기 전에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신부는 곧바로 자기 남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자기 친구들에게도 같이 가기 위해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신랑과 그의 동행자들이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을 만난 이후에 이들은 다 같이 신랑의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거기에는 결혼식에 참석할 하객들이 이미 모여서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도착하자마자 결혼식 준비 위원들은 신부 방이라 불리는 방으로 이들을 데려갑니다. 이 방에 들어가기까지 신부는 베일로 얼굴을 가려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신랑의 친구들과 신부의 친구들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랑과 신부는 단 둘이 그 방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들은 처음으로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되면서 약 1 년 전에 결혼 계약으로 확립한 결혼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결혼이 완성된 후에 신랑은 신부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결혼식 준비 위원들에게 자기들의 결혼이 완성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러면 이들은 신랑과 신부가 드디어 한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하객들에게 알리고 이 소식을 접한 하객들은 7일 동안 연회를 베풀며 기뻐합니다. 이렇게 7일 간 연회가 열리는 동안 신부는 신부 방에 머무르며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7일이 다 끝나면 드디어 신랑이 신부 방에서 신부를 데리고 나와 그녀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겨 모든 사람이 신부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입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설명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풍습을 이해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시려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에베소서 5장에서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예수님의 신부라 부릅니다(엡5:22-33). 유대인 신랑이 결혼을 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신부의 집까지 여행을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주도적으로 약 2000년 전에 하늘에 있는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의 신부가 될 사람들이 있는 이 땅까지 내려왔습니다. 유대인 신랑이 신부의 집에 와서 결혼 계약을 확립함으로 신부를 얻은 것 같이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 와서 계약 즉 언약을 확립함으로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 얻고자 했습니다. 이 언약이 무엇입니까?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던 바로 그 밤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유월절을 바꾸어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포도즙이 담긴 잔을 집고 감사를 드리신 뒤 그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곧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자기의 신부인 교회와 새로운 결혼 언약을 세우려 하는 것을 뜻합니다. 유대인 신랑은 자기의 신부를 얻기 위해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도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해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분께서 지불하신 결혼 지참금은 자신의 생명이 담긴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 언약이 확립되면 유대인 신부가 오직 자기의 신랑만을 위해 구별되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었듯이 주님의 신부인 교회 역시 새 언약을 통해 구분되어 오직 주님만을 위한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엡5:25-27; 고전1:2; 6:11; 히10:10; 13:12). 유대인 신랑이 결혼 계약을 맺은 뒤 계약이 확립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잔을 취해 신부와 함께 포도즙을 마신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도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확립하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주의 만찬의 잔을 취해 포도즙을 마십니다. 유대인 신랑이 결혼 계약을 확립한 뒤 신부의 집을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예수님도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을 확립하시고 부활하신 뒤 신부가 사는 땅을 뒤로하고 자기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되돌아가셨습니다(요6:62; 20:17). 유대인 신랑과 신부 사이에 결혼 계약이 확립된 이후에 서로 일정 기간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도 지난 2000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지금 이 시간 이렇게 신랑과 떨어져서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 유대인 신랑이 자기의 신부를 데려다가 자기 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기 처소를 마련해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신부인 교회와 떨어져 있는 동안 하늘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신부와 함께 거할 처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요14:2). 이렇게 떨어져 사는 기간이 다 지난 뒤 유대인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려고 자기 집을 떠나 다시 신부에게 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신부인 교회와 따로 거하는 기간이 다 차게 되면 교회에게로 다시 와서 자기가 마련한 하늘의 처소로 교회를 데려갈 것입니다(요14:3). 유대인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서 신부의 집에 갈 때에 신랑과 동행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교회를 데려가기 위해 하늘에 있는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땅에 오실 때에도 천사들이 그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살전4:16). 유대인 신부가 자기 신랑이 언제 올지 몰랐던 것처럼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시는지 모릅니다. 유대인 신부에게 언제라도 신랑이 임할 수 있었듯이 우리 예수님도 언제든지 교회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생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 신랑과 함께 오는 사람들이 “보라, 신랑이 임한다.”라고 외쳤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도 “보라, 신랑이 임한다.”라는 천사장의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살전4:16). 유대인 신부가 신랑을 만난 뒤 자기 집을 떠나 신랑의 아버지 집으로 간 것처럼 교회 역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공중에서 만나기 위해 휴거를 받은 뒤 그분과 함께 그분의 아버지 집으로 갈 것입니다(살전4:17; 요14:2-3). 신랑과 신부와 그들의 일행이 신랑의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하객들이 이미 거기 모여 있었던 것 같이 그리스도와 휴거 받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면 이미 구약 시대 성도들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거기서 그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유대인 신랑과 신부가 신랑의 아버지 집에 도착해서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되어 이미 오래 전에 확립했던 결혼 계약을 완성한 것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도 신랑의 아버지 집이 있는 하늘에 도착해서 영적으로 한 몸이 되어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새 언약에 근거한 특별 관계를 완성할 것입니다. 유대인 신부가 신랑의 아버지 집에 도착한 뒤 7일 동안 신부 방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역시 신랑의 아버지 집에 도착한 뒤 7년 동안 자기 자신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7년 동안 땅에서는 창세 이후로 없었던 극심한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간에 교회는 하늘에 숨겨져 있습니다. 유대인 신랑이 7일이 지난 뒤 신부를 신부 방에서 데리고 나와 그녀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기고 모두에게 그녀를 공개한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7년 환난기가 지나면 자신의 신부를 하늘에서 데리고 나와 함께 땅에 강림해서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부를 공개할 것입니다(골3:4).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시면서 근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여기 모인 분들 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분들에게 오늘 우리가 살펴본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큰 의미를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이런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서 자신의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매번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결혼을 하자고 프로포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자신과 함께 이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복음을 통해 그것을 프로포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결혼 서약을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결혼 서약을 하고 싶어합니다. 나 예수는 죄인인 당신을 내 신부로 맞이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사랑 많고 신뢰할 수 있는 구원자와 신랑이 될 것을 서약합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부유할 때나 궁핍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영원토록 당신의 신랑이 될 것을 서약합니다. 유대인 신부가 신랑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거절할 수도 있었듯이 여러분도 예수님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그분의 프로포즈를 거부한다면 영원토록 그분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여러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유황불이 타는 지옥 불못에 들어갈 것입니다(계20:11-15).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다시 오셔서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하늘로 데려가실 때에 그분과 함께 하늘 아버지 집에 가서 영원토록 복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예수님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께서 이 땅에 와서 여러분의 죄로 인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하면 됩니다. 나 죄인은 당신 예수를 내 구원자로 맞이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사랑 많고 신뢰할 수 있는 신부가 될 것을 서약합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부유할 때나 궁핍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영원토록 당신의 신부가 될 것을 서약합니다. 둘째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오늘의 교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결혼 계약이 확립된 이후에 신랑이 자기의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올 때까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유대인 신부는 자기 자신을 다른 남자에게 내어 주고 간음을 범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신자들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에 살면서 그분을 대적하고 간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이러한 염려를 분명히 표출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켜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함이라. 그러나 뱀이 그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변질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야고보 역시 야고보서 4장 4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야고보는 영적 간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점점 세상에 동화되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보다 그분을 슬프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되면 곧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신랑 되신 예수님께 얼마나 내 자신이 신실한가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처음 구원받고 그분을 신랑으로 맞이했던 때처럼 지금 이 시간에도 그분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신 그분이 정말로 여러분 삶의 중심입니까? 여러분의 태도와 행동과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그분께 대한 충성과 헌신에서 비롯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그 안의 것들을 추구하며 영적 간음을 범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신랑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하지 못했다면 즉시 그 죄를 고백하기 바랍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이 신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 부디 이 말씀을 믿으시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여러분은 언제라도 나타나실 신랑 예수님을 고대하며 신실하게 이 땅에 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통해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하늘에서 다시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9-05-08 15:00:17 | 관리자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How We Know the End is Near?   재림의 전조들 우주가 저절로 형성되어 우연의 과정을 통해 현재처럼 복잡하게 되었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은 우주가 과거의 엄청난 세월 동안 존재해 왔으며 다가올 시대에서도 본래의 진화론적 궤도를 따라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혹시 지구에서 앞으로 이런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멀리 떨어진 별들에서라도 계속해서 진화가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실 마귀가 세운 이 같은 인본주의 체계는 인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성경적 세계관과 맞서 왔다. 이러한 끊임없는 과정들이 삶, 죽음, 그리고 윤회라는 반복되는 주기 안에서 일어난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해 왔다. 이 부류 중 어떤 이들은 또한 복잡한 생명체의 점진적 발달이 태초의 어떤 혼돈으로부터, 아마도 어떤 형태도 없는 물 덩어리 또는 에너지를 띤 분자들의 원형질로부터, 심지어는 어떤 우주론적 사고 체계로부터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진화론은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여러 형태를 취하였지만 그 형태에 상관없이 진화론 추종자들은 항상 지금까지 엄청나게 긴 세월이 흘렀다고 주장해 왔으며 또한 인격적이며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온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 왔다.   한편 성경은 우주가 진화론적 발전에 필요한 긴 세월을 거쳐 생성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으로 인한 6일간의 짧은 창조 행위의 연속 과정을 통해 신속하게 초자연적으로 생성되었음을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 준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군대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시33:6).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긴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장차 올 완전한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정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구속하실 세상을 예비하시는 데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투쟁, 고통 그리고 죽음으로 점철된 과거 속에 즉 여러 국가들이 창건되고 멸망해 온 지나간 수천 년의 세월 속에 날과 해와 세기가 역사 속으로 흘러가 잊혀지고 말았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주의 눈앞에서는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과 같을 뿐이다”(시90: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며 구원받은 우리도 다가오는 영원 속에서 이러한 시간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터 인류 역사의 끝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다. 비록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마귀의 사주를 받은 인류의 반항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획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 계획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만 했고(성육신) 이로써 우리의 창조주는 또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야만 했다. 그 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고 묻혔다가 부활하셔서 죽음 권세를 물리치셔야만 했다. 사실 그분께서는 천국에 잠시 동안 계신 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을 이루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며 그 후에 새로 창조될 땅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집이 될 것이다. 그 구원받은 인류가 새롭게 만들어진 땅에서 자기들의 위대하신 창조주/구원자를 영원토록 기쁨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가 사는 이 땅에서 그들을 예비하고 계신다(‘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그림 참조).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인 성경 안에 재림의 약속들을 기록하셨고 이 약속들과 더불어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일시적 거주지에서의 삶에 필요한 지침도 다 기록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의 짧은 기간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약 성도들이 말세가 가까이 옴을 잘 알 수 있도록 많은 지침들/표적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표적들이 매일 매일 또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세계 여러 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흥분 속에 기다리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이래로 지난 2,000년 동안 각 세대마다 많은 믿는 자들이 그분의 재림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부주의한 성경 연구자들의 그릇된 해석으로 인해 재림의 날짜를 정하는 사례들도 있었으며 결국 그렇게 정해진 날들은 그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모두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마24:44; 25:13)라고 이미 명백하게 경고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실패 사례들에 대해 결코 놀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가오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많은 표적들을 제시해 주며 사실 이러한 지침들은 우리의 이해와 인내를 위해 꼭 있어야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막13:29).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의심스러운 해석이나 ‘감정을 부추기는 일’(sensationalism)이나 ‘날짜 정하기’(date-setting)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고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큰 기쁨과 기대를 갖기만 하고 이러한 표적들을 무시하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난 수년간 재림의 표적들은 분명히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나는 나의 할머니께서 어떤 전도자가 다가와서 주의 재림의 날에 예상되는 표적들을 독재자 무솔리니의 출현과 연관시키면서 주님께서 1933년에 오실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정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분의 재림의 때가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는 확신에 차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기로 거의 결심했었다. 나는 그 후 지금까지 거의 50년 동안 내 사무실 벽에 “어쩌면 오늘”(Perhaps Today)이라고 적힌 액자를 걸어 놓고 날마다 이것을 바라보곤 했으며 50년 전에도 그렇게 명백하게 보였던 재림의 표적들이 지난 반 세기동안 더욱더 확실하게 증가하고 있음에 주목해 왔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곧 오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그분의 포도원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면서 “내가 올 때까지 관리하라”(눅19:13)고 명령하신 대로 묵묵히 순종하며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것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게 하려 함이요, 또 그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요일2:28)는 말씀 또한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우리는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실’(히9:28) 그분을 매일 바라보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관이 약속되어 있음’(딤후4:8)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장(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는 표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 안에 은혜로이 제공해 주신 많은 표적들의 중요성을 연구하고 요약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이러한 것들에 대해 친숙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독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 친숙한 독자나 그렇지 못한 독자나 -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딛2:13)을 계속해서 사모하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상쾌한 일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몇 가지 이유들이다. 세계에 편재해 있는 진화론적 인본주의 비록 성경 예언에 관한 서적들을 쓴 다른 저자들이 대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가장 주요한 표적은 아마도 진화론적 인본주의 철학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추세일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의 한 형태 또는 다른 형태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범신론적(pantheistic) 세계 종교들뿐만 아니라 고대 이교도들의 모든 종교들에게 특징을 부여해 왔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단지 한 가지 새로운 것은 전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일신론적(monotheistic) 세계관을 가졌던 민족들도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에 의해 정복을 당했다는 점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장에서 말세에는 이러한 상황이 심지어 기독교 국가라고 고백하는 나라들에서도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벧후3:3-4). 여기서 마지막 날들에 등장할 비웃는 자들이란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기 중심적인 인본주의자들임이 확실하다. 그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이거나 최소한 기독교회의 ‘하나님 아버지’와 ‘재림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기독교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자의로 거부해 왔고 지금 이 시간에는 드러내놓고 그러한 것들을 비웃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이유는 진화론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기 때문에 피조 세계는 과거를 통해 늘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계속되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창조란 하나님께서 창조의 6일 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창2:1-3) 이미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므로 “재림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면서 믿는 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비웃고 있다. “처음에 초자연적인 창조가 없었으므로 말세에도 초자연적인 멸망이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기독교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말로 거부하면서 자기들의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시키려 할 것인지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떤 신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구호는 저 악명 높은 ‘제2차 인본주의 선언’(1973)에서 인본주의자들이 채택한 발언으로 이것은 실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의 발언이었다. 사도 베드로의 예언은 19세기 중반에 다윈(C. Darwin)의 진화론적 세계관이 대두되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기 시작했고 현재 이러한 인본주의 세계관은 학교, 대학, 뉴스 미디어, 정치 체제, 오락 산업, 비즈니스 세계, 각종 직업, 법정 그리고 심지어는 소위 기독교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의 주요 교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본인의 저서 「하나님께 대한 긴 전쟁」(The Long War against God - Baker Book House, 1989)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로서 간략히 언급만 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정통파 유대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 공동체들과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정통파 모슬렘의 소수를 제외한 전 모슬렘 세계의 대부분도 이런 범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고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창조주와 그분의 구속(救贖) 약속의 관계에 대해서도 크게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도 베드로가 2,000년 전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이 오늘날 명백히 성취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최근 몇 십 년 간 여러 나라에서 진화론에 대항하는 창조주의가 되살아나고 있으나 이것은 전 세계를 삼켜 버린 - 특히 그 지도자들 사이에 밀물처럼 퍼져나가는 - 진화론적 인본주의와 비교해 볼 때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과학적/역사적 증거들이 모두 창조론을 뒷받침하고 진화론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어 「과학적 창조론」과 「창조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미국창조과학회의 책들을 참고하기 바람 -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해 버린다. 사도 베드로가 예언했던 것처럼 그들은 두 개의 초자연적이며 세계적인 역사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물이 6일만에 특별히 창조된 것과 노아의 대홍수에 의해 전 세계가 급작스럽게 멸망한 것(벧후3:5-6)에 대한 성경의 증거와 자연계의 압도적인 증거들을 제멋대로 무시해 버린다. 모든 체계의 복잡한 구조 안에 있는 증거들과 이런 증거들을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들이 하나님의 특별 창조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커다란 지질학적 구조물과 그 안의 화석 묘지들도 노아의 대홍수를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만물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진화론적 신념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날에 나타나는 비웃는 자들은 이미 예언된 것처럼 자기 멋대로 이 모든 증거들을 무시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이 땅에 다시 오심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만연되어 있는 도덕의 붕괴 하나님께서 창조에 대해 명백히 이야기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거부할진대 그들이 그분의 명령들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만약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혹은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분께서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시공간 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셔서 인류의 역사에 간섭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표준들에 의거하여 우리의 행동을 제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세계관은 현재 전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도덕 붕괴의 근본적 원인이 되어 왔다. 이것 또한 말세의 표적으로서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나니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3:1-7). 말세의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 철학을 묘사한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경고와 같이 사도 바울의 이 생생한 마지막 경고는 말세의 자기 중심적인 인본주의자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자기중심적 행동은 자기중심적 철학이 낳는 당연한 결과이다. 사도 베드로의 예언은 특별히 기독교 국가들 안에 있을 인본주의 철학의 대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사도 바울의 예언은 이 같은 기독교 국가들의 인본주의적 행동의 기승 즉 도덕의 붕괴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사실 여기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자들 -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믿음을 시인하기는 하나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인본주의자들 - 의 특성 즉 자기 사랑, 교만, 신성 모독 등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바 있는 고대 이교도들의 특성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롬1:29-31). 이것이야말로 말세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국가들이 이교도들의 인본주의적 신념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까지도 받아들여 이교도 문화에 굴복 당할 것임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도덕 붕괴는 정말로 오늘날 소위 기독교 국가로 불리는 나라들 안에서 개탄할 정도로 급속도로 일어나고 일이며 이런 상황은 해가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다. 누구나 이러한 도덕 붕괴 특성들에 대한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위에 열거된 말세의 특징들에 대해 한 두 마디 정도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1. 자기를 사랑하며 - 이것은 오늘날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현상 즉 ‘자기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과 ‘자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2. 탐욕을 부리며 - 이것은 새롭게 등장한 젊은층 즉 여피(yuppie) 세대와 그들의 물질욕을 말하는 것인데 현대에는 심지어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번영과 성공의 복음’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3. 자랑하며 교만하며 - 교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탄이 지어 온 죄인데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큰 교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 신성모독하며 - 이것은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도 평범한 일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신성의 ‘비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분별하게 문학, 영화, 음악, TV 등에서 계속해서 헛되이 일컬어지고 있다. 5.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 마약과 떠들썩한 음악과 부도덕이 유행하는 오늘날의 뉴에이지 사회에서 심지어는 기독교 가정에서조차도 순종하는 십대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6. 감사하지 아니하며 - 유복한 미국 기독교인들과 다른 부유한 나라의 기독교인들조차도 자기들이 누리는 복에 대해 하나님께 거의 감사하지 아니하며 이런 복과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7. 거룩하지 아니하며 - 거룩한 생활양식보다는 하나님 없이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 국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8.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  어린이 학대와 보편적인 가족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낙태와 동성연애가 급증하고 있다. 9. 협정을 어기며 - 국가 간의 조약, 사람들 간의 계약, 일반적인 약속들이 아무 때나 깨지고 있으며 고소/고발 사례는 이제 천문학적 수치에 달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이 구절은 ‘화해하지 않으며’로 볼 수도 있다. 10. 거짓 고소하며 -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매일같이 읽고 들을 수 있는 악담 뿐 아니라 중상모략, 명예 훼손, 모욕, 허위 선전 등이 여기 속한다. 11. 절제하지 못하며 - 이 구절은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이혼율이 이교도 국가들의 이혼율보다 훨씬 더 높고 부도덕한 행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행하는 성행위, 부부 사이의 부정과 심지어는 동성연애 등의 통계 수치가 급등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또한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도 지적하고 있다. 12. 사나우며 - 그리스어에서 이 말은 물리적인 난폭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현대에 널리 파급된 죄와 폭력의 급증을 가리키며 특별히 태어나지도 않은 수 백만 명의 아이들을 낙태시키는 것도 포함한다. 13. 선한 자들을(것을) 멸시하며 - 한 때는 악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 예를 들어 동성연애, 도색문학, 포르노 영화 등 - 지금은 시민의 권리로 간주되고 있으며 반면에 전에는 좋은 도덕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성경을 낭독하고 기도하는 것 - 지금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4. 배신하며 - 이 단어는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적 배신행위에 적용될 뿐 아니라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이 자행되는 인간관계 및 종교적 믿음의 배신에도 적용된다. 15. 고집이 세며 -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권리에 대한 부주의와 성급함을 내포하며 결과에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때마다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6. 높은 마음을 품으며 - 이것은 다른 곳에서 ‘우쭐대며’로 번역되기도 했으며 개인적인 자만과 지식인들 사이에 서 찾아볼 수 있는 우월감을 말해 주고 있다. 17.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더 사랑하며 - 유럽, 호주,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통계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기독교 국가라 하는 미국에서만 보더라도 일요일에 쾌락을 위한 소풍이나 여행을 가는 사람들에 비해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수는 훨씬 적다. 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 비록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국가들의 경우에도 학교나 통신매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창조와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면을 부인해 왔다. 19.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며 - 이것은 본질상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인 진리의 존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진리를 위한 탐색’은 쉬지 않고 계속하는 현대 교육에 대한 정의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의 모든 특성들이 짝을 이루며 잘 들어맞았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이제 이러한 특성들이 이교도 국가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 국가들을 특징짓는 잣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이교도 국가들의 인본주의 문화는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롬1:25) 진화론적 철학에 기초를 두었는데 오늘날에는 심지어 기독교 국가에서도 이런 문화가 득세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해 왔기 때문에 생긴 ‘위험한 시기’ 즉 마지막 날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표적이 된다. 사회적 다윈주의, 노예화와 전쟁 위에서 언급한 도덕의 붕괴 외에도 임박한 멸망에 대한 사회 정치적 및 경제 산업적인 표적들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마지막 서신들을 살펴보았으며 이제 사도 야고보의 서신을 살펴보려 한다. 자 이제, 너희 부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너희의 비참한 일들로 인하여 슬피 울며 울부짖으라.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부식되었으니 그것들의 녹이 너희를 대적하는 증인이 되고 불과 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해 재물을 함께 모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곡식을 거둔 품꾼들의 품삯 곧 너희가 사기 쳐서 숨겨 둔 품삯이 소리를 지르며 곡식을 거둔 자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위해 인내하느니라.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약5:1-8). 위의 예언은 마지막 때의 사회적 불안 상태에 대한 것이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 주인과 노예 간의 끊임없는 갈등이 마지막 날 즉 마침내 고생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할 ‘살육하는 날’이 되면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 실제로 이 예언적 표적은 ‘산업혁명’에서부터 성취되기 시작했다. 비록 산업혁명이 대단한 기술적 진보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부자 소유주의 공장에서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층의 큰 불행도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미국의 노예농장보다 그 폐해가 더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남북 전쟁뿐만 아니라 피의 프랑스 혁명 그리고 그 후의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 다른 나라들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이런 ‘살육하는 날’이 노동자층의 운명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긴 했지만 많은 나라에서 무자비한 집권자들과 귀족층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이런 혁명들이 부르주아 계급(부유층)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저소득층) 혁명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 유럽과 미국의 국제적 은행가들과 상인들이 이런 혁명들을 부추기고 자금을 조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전쟁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살육하는 날에 자기들의 마음을 살찌웠다. 전쟁과 노예제도, 노동자 착취, 자본주의에 기초한 제국주의와 이와 비슷한 예들은 진화론  특히 산업혁명 이래로 자연 선택,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적자생존 같은 진부한 표현들에 의해 촉진된 진화론의 한 형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이를 정당화시켜 왔다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 체제는 사회적 다윈주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은 특별히 영국의 경우 스펜서, 맬더스, 다윈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독일의 경우 니체, 헤겔, 비스마르크, ‘독일 황제 빌’과 결국 히틀러에 의해서 발전되었으며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록펠러, 카네기, 그리고 또 다른 ‘약탈자 귀족들’을 통해 강성해졌다. 이들은 다 열렬한 진화론자들이었는데 비록 이들이 자기들의 방법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회의 유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얻은 결과는 대중들이 크게 착취당하는 고난을 가져왔다. 불간섭 자본주의, 공산주의, 히틀러의 나치주의, 인종차별,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의 진화론적 배경은 전에 언급한 책인 「하나님께 대한 긴 전쟁」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위의 성경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구원할 어떤 혁명이나 법령을 찾지 말고 이러한 표적들이 예고하는 ‘주의 재림’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가난한 대중들의 운명은 더욱 더 비참해지고 있으며 - 최근에 공산당의 착취로부터 도망 온 사람들과 집 없는 사람들과 미국의 빈민가 인구의 증가를 포함해서 이디오피아, 인도, 수단과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굶어 죽는 인구를 생각해 보라 - 사실 마지막 날의 이 표적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전보다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희망이 바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배교, 이성주의와 신비주의 우리는 사도 베드로, 바울, 야고보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 즉 마지막 때의 중요한 예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예언들은 한결같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말세의 종교적 배교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며 공통적으로는 말세에 전 세계에 널리 만연될 인본주의 철학, 도덕, 그리고 경제적 타락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편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서들을 기록한 두 저자들은 직접적으로 종교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마지막 날’에 대해 언급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니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함을 너희가 들은 것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으니 이로써 우리가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한편 사도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한 말들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마지막 때에는 자기들의 경건치 아니한 정욕대로 걷는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알려 주었나니니 이들은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들이며 육체적 감각대로 살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니라(유17-19).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한 명의 마지막 ‘적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으며 사도 유다는 거듭나지 못한 채 조롱만을 일삼는 이단 종파주의자들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두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말세에 이러한 자들이 신앙인으로 자처하면서 교회에 참석하여 가능하면 교회 사역을 파괴하고 훼방하며 사탄이 원하는 일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 ‘마지막 때’(the last time)로 번역된 구절은 ‘마지막 시간’(a last hour)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많은 지역 교회가 대개 거듭나지 못한 지도자들의 활동과 가르침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그것은 그 교회와 교회 사역에 대한 마지막 시간 즉 위험한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이며 이때에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다. 적그리스도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a false christ)임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처녀 탄생과 부활을 강조하는 그분의 말씀들을 삭제해 버리거나 설명에서 제외해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화시키려는 자유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 예수와 신 그리스도를 구별함으로써 - 대개는 ‘우주의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나 그와 비슷한 같은 것들을 기록된 성경 말씀에 첨부시킴으로써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려 하는 광신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일 것이다. 전자는 사람들을 이성주의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신론에 이르도록 하며, 후자는 신비종교와 이단 무속 신앙 및 다신론에 이르도록 한다. 이 두 종류의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배교, 종파 분립 개념들을 진화론의 어떤 형태 - 어떤 경우에는 진화론적 자연주의에 또 다른 경우에는 진화론적 다신론 - 에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성경의 하나님 곧 진정한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런 적그리스도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전보다 더욱 심하고 사실 이들은 사도 유다의 서신에서 ‘당을 짓는 것으로 표현된 것같이’ 실제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분쟁을 일으켜 왔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마지막 서신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계22:18-19). 현대에는 새로운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는 새로운 이단 종파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실제적으로 모든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종파들은 -  사실 이것들은 그리스도나 성경의 진리에 관한 차이로부터 생긴 것이라기보다 성경 해석의 차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성과 인성을 그리고 성경의 오류 없는 권위를 파괴시키려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큰 소동과 분열의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런 일들을 마지막 때의 표적으로 본다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표적들이 나타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사실은 확실히 이런 예언의 말씀들이 이 시대에 성취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날의 배교에 대해 경고하는 다른 성경 구절이 많이 있으며 그 중 몇 가지는 추후에 논의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거론된 성경 말씀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는 점을 알리기에 족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 구약 성경은 많은 예언서를 포함하고 있으나 신약 성경의 계시록을 제외하고 다니엘서만큼 말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책은 없다. 다니엘에게 이 모든 계시를 전해 준 권능의 천사는 이 책의 예언적 요소들의 대부분을 보여 준 후에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에서 그에게 이 모든 계시가 성취될 때를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표적을 줌으로써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러나, 오 다니엘아, 너는 끝이 임하는 때까지 그 말씀들을 닫아 두고 그 책을 봉인하라.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음질하고 지식이 증가하리라(단12:4).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의 의미가 ‘마지막 때에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성경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연구해서 마침내 다니엘의 난해한 예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리저리 달음질하고’(running to and fro)라는 표현을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지식이 증가하리라’는 것이 ‘이러한 예언서의 해석이 증가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합당하다 볼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이  예언서의 주요 의미일 리가 없다. 대신에 우리는 마지막 때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달음질(running) - 단순히 여행(traveling)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경주함을 뜻함 - 하리라고 평이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시대에 여행의 속도가 증가하리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면 예언될 수 없는 심오한 진리이다. 다니엘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뉴턴의 시대에도 사람이 가장 빨리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은 재빠른 말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부지런히 공부하고 그를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여겨질 뉴턴은 이 구절에 기초해서 사람들이 언젠가는 한 시간에 80킬로미터를 달리며 심지어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빠르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에 프랑스의 적그리스도 신봉자인 볼테르는 뉴턴의 기독교 정신이 그의 이성에 영향을 미쳐 그가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말을 비웃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뉴턴이 소개한 과학의 시대 안에서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증기기관,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지금은 놀라운 속도로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의 발명을 보아 왔다. 다니엘의 이 예언은 지금의 ‘마지막 때’에 더욱 더 명백히 성취되고 있다. 그의 예언의 나머지 반 즉 ‘지식이 증가하리라’는 ‘과학이 증가하리라’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 즉 ‘지식’과 ‘과학’은 그 의미와 어원에 있어서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라디오, TV, 거의 모든 것을 작동시키는 전기 장치, 고속도로, 핵무기, 컴퓨터, 자동화 장치, 전파 탐지기, 플라스틱, 마이크로칩, 로봇 등 지난 30년 동안에 이루어진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불과 2세기 전만 해도 세계의 모든 과학자를 한 강당에 소집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수 백 종류의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수백만의 과학자들이 있다. 지금의 과학시대의 기초를 연 사람들 즉 뉴턴, 케플러, 보일, 파스퇴르, 페러데이, 주울, 갈릴레오, 오일러, 맥스웰 등이 모두 기독교인으로 창조론을 믿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천문학, 생물학, 인류학 혹은 다른 분야에서 진화론자들이 이루어 놓은 연구는 인간의 수명, 생산과 생활수준을 진보하게 한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적 발명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 거짓 과학을 신봉하려는 과학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마지막 때의 한 표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기록한 예언서 기자들의 예언적 통찰력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성경 기자들의 예언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 (1)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이르러 교통/통신의 급속한 발전과 과학의 대진보가 있을 것임을 말했다. (2)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진화론적 인본주의인 자연주의 철학이 세계를 지배할 것을 강조했다. (3) 바울은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이 인본주의 철학으로 팽배하고 이런 인본주의의 산물로서 극심한 영적, 도덕적 타락이 있을 것임을 예언했다. (4) 야고보는 마지막 날에 큰 전쟁과 혁명을 초래할 산업 경제적 갈등을 예언했다. (5) 요한과 야고보는 모두 마지막 날에 진정한 기독교를 흐리게 할 무신론, 다신론과 더불어 기독교 내에서의 배교를 강조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끝 부분에 기록된 예언 즉 ‘올리브 산 설교’(Olivet discourse)로 잘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살펴보자. 그분께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행하신 개인적인 가르침을 제외하면 이 ‘올리브 산 설교’는 그분의 마지막 공식 메시지였는데 여기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대한 많은 표적들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큰 표적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오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마24: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여러 차례 자신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의 약속된 메시아로서 곧 로마의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에 그분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라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많은 부분들이 중복되고 있기는 하나 각 복음서 기자는 다른 두 복음서에는 없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세 답변을 동시에 연구해야만 한다. (1)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인가? (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표적은 무엇인가? (3) 세상의 끝이 언제 이를 것인가? 첫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들이 사실은 표적이 아니며 인류 역사를 통해 늘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속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 또 너희가 전쟁과 난리에 대하여 들을 때에 무서워하지 말라. 이런 일들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하되 곧 끝이 오지는 아니하느니라(눅21:8-9). 정말로 주님의 승천 이후로 수 세기 동안 많은 동요와 전쟁의 소문과 전쟁과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래서 이 특별한 예언은 명백히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나머지 예언들도 당연히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더욱 더 확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특별한 질문에 계속해서 답을 주시기 전에 잠시 이를 중단하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으며 또 하늘로부터 두려운 광경과 큰 표적들이 있으리라(눅21:10-11).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에 대한 표적은 제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여러 면을 동시에 가질 것이다. 그 첫 번째 구성 요소는 단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닌 여러 나라들 사이의 큰 전쟁일 것이다. 적어도 두 민족과 두 나라가 싸울 것이며 실제로 이런 표현은 많은 나라 특히 세계의 주요 나라들이 참전하는 전쟁을 일컫는 관용어로 쓰인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늘의 두려운 징조 뿐 아니라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을 것이다. 이 복합 표적이야말로 분명히 제자들이 요구한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서는 이 시기에 하늘의 두려운 징조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누가복음에서의 이 말은 마지막 날의 표적 중 마지막 단계에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주신 이래로 이 세상에는 지진, 기근, 역병 및 여러 종류의 재난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민족들 간의 첫 번째 큰 전쟁은 1914-1918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역사상 아마도 가장 무서운 역병이었던 1918년의 유행성 인플루엔자로 이어졌고 또 중국 및 러시아와 다른 나라에서의 심각한 기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의 대지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정말 그분의 재림에 대한 표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이것이 단지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산모가 느끼는 ‘산고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적이 완성되기 전에는 간간이 육체적 고통이 수없이 많이 있어야만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출산의 첫 진통일 뿐이었으며 이것은 곧 다른 것들로 이어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시작으로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략과 1939년 히틀러의 전격작전이 있었고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모든 나라가 미래의 전쟁을 막기를 희망하면서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을 설립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 역시 끝은 아니었다. 곧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절정을 이룬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에는 많은 나라들이 참전했다. 최근에 (1990/1991) 전 세계는 이라크에 대항한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의  전쟁을 실제로 목격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중동에는 계속해서 소동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세계 모든 민족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다민족 전쟁과 함께 첫 진통 이래로 지난 70년 동안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었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 차례의 국지전도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과 기근, 지진 등이 있을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지구 종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은 확실하다. ‘하늘로부터의 두려운 광경과 큰 표적들’은 이 시기에 있을 UFO 현상이나 하늘로 쏘아 올린 다양한 우주 비행선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세상 끝 날에 대한’ 첫 번째 큰 표적을 주신 후에 가까운 사도 시대에 있을 일반적 성격의 예언을 주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전에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그들이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너희를 핍박하고 회당과 감옥에 넘겨주며 왕들과 치리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눅21:12) 이 핍박의 최초의 물결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대인들의 분산이 이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 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4). 예수님의 이 예언 부분은 제3장에서 다시 논의 될 것이다. 이것은 로마 장군으로 후에 황제가 된 타이투스의 성전 파괴로 주후(主後) 70년에 성취되었으며 그 뒤 주후 135년에 헤드리안 군대의 예루살렘 파괴가 있었고 그 뒤 지난 1,800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로 유대인들을 떠돌게 한 강제 추방이 있었다. ‘올리브 산 설교’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한 예언 메시지에는 다른 표적들이 들어 있으나 이것들은 뒤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2009-05-08 14:59:22 | 관리자
전천년 신앙(Pre-millennialism)   이것은 계20:1-6에 기록된 ‘1000년 동안 지속되는 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교회와 왕국,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85, 94). 성경은 이 1000년의 기간을 보통 왕국이라 말하며 대언자들은 이 기간이 온 우주가 의로 치리를 받으며 온 땅이 복을 받는 때라고 묘사했다. 신약성경의 구조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이전에 재림하실 것을 요구한다. (1) 천년왕국에서는 의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국의 백성들을 통치하므로 그분께서는 그 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오셔서 의인들을 부활시켜야 한다(계20:5). (2) 천년왕국은 어느 곳에나 의가 존재하는 기간이므로 그분께서는 그 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오셔서 반드시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셔야 한다(마13:40-43). (3) 사탄은 1000년 동안 결박되어 있으므로 그분께서는 그 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오셔서 사탄을 결박하셔야 한다(계20:1-3). (4) 적그리스도는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멸망 받으므로 그분께서는 그 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오셔서 그를 멸하셔야 한다(살후2:8; 계19:20). 무천년설, 후천년설, 천년왕국 참조.
2009-05-08 14:57:51 | 관리자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또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너희에게 미리 선포된 분을 보내시리라.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자신의 모든 거룩한 대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때 곧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까지는 하늘이 반드시 그분을 받아들여야 하리라(행3:19-21). 창세기는 죄와 사람의 타락을 보여 주며 계시록은 하나님의 역사의 마지막 부분에 모든 것이 회복하는 것을 보여 준다. 위 성경 말씀대로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된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 이 땅에는 문자 그대로 1000년 왕국이 열리며 이 기간에 구약성경에 예언된 모든 말씀들(창12:2-3; 창15:18-21; 시2; 사11; 겔40-48; 슥14 등)이 성취될 것이다. 이때에 팔레스타인 땅은 지구의 중심이 되며 유대인들은 민족들의 으뜸가는 자들이 된다. 우리 주님은 이 기간을 ‘다시 나게 하는 때’(regeneration)라고 말씀하셨다(마19:28). 이 기간이 끝나 신구약의 모든 예언이 옛 땅에서 성취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며(벧후3:10-13; 계21:1)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다가오는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다.
2009-05-08 14:56:59 | 관리자
천년왕국(Millenium): 계20:1-6에 기록된 대로 땅에서 1000년 동안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왕국. 구약의 대언자들은 줄기차게 이 기간이 온 우주가 의로 치리를 받으며 온 땅이 복을 받는 때라고 묘사했다. 어떤 이들은 1000년이 단순하게 완전한 수를 뜻하며 따라서 천년왕국이란 새 하늘과 새 땅이 거하는 영원한 왕국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져서 주님께서 친히 철장 권세로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딤후2:12; 계5:10; 사11:1-12; 25:6-9; 65:18-25; 미4:1-4; 습3:14-20; 슥8:3-8, 20-23; 14:16-21 참조). 교회와 왕국,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85, 94). 시편 2편에는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교도들을 네게 상속물로 주고 땅의 맨 끝 지역들을 네게 소유로 주리라. 네가 그들을 철장으로 부수고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산산조각 부수리라”(시2:8-9; 계12:5). 이것은 결코 영적 통치를 뜻하지 않으며 실질적으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통치를 말한다. 또 대언자 이사야는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의와 평강을 가져오는 분이라고 대언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짐승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있어서 만백성의 기(旗)로 설 것이요, 이방인들이 그에게 찾아오리니 그가 베푸는 안식이 영화로우리라”(사11:9-10). 이런 구절의 왕국은 결코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앞으로 주님의 재림 이후에 1000년 동안 문자 그대로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첫 아담은 죄를 지어 땅에 의의 왕국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나 둘째 아담 예수님은 죄를 없애고 의와 평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왕좌를 둔 채 온 땅을 통치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실 것이다(단7:14; 계19:15; 시72). 그 이후에 지금의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온 우주에 가득하게 되어 다시는 반역과 죄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된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자기 땅으로 돌아와(렘30:3; 31:8-9; 겔39:25-29; 암9:11-15) 새로 부활된 다윗의 왕국의 백성이 되고(사9:6-7; 33:17; 44:6; 렘23:5; 미4:2-3, 7) 특별한 복을 받아 민족들 중에 으뜸이 되며(민23:9; 사14:1-2; 49:22-23; 60:14-17) 또 영적으로 부흥할 것이다(렘23:3-6; 겔36:25-26; 슥13:9; 말3:2-3). 이때에는 또 경배의 장소로 천년왕국 성전이 지어지고(겔40-48) 제사장들이 실제적으로 희생 예물을 바친다. 이것은 결코 속죄를 위한 예물이 아니고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의 사역을 기념하는 것이다. 즉 천년왕국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만이 죄를 제거함을 보여 주기 위한 시청각 교육으로 희생 예물이 드려질 것이다. 이때에는 땅도 기능을 회복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사35:1-2) 산과 골짜기가 모두 평지로 변하며 온 세상의 기후 역시 온화하게 되고(사40:3-4; 슥14:4) 예루살렘에도 큰 변화가 생기며 왕의 왕좌를 둔 곳으로 모든 곳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슥14:4; 10). 또 이방인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와서 왕에게 경배하고 장막절을 지켜야 한다(슥14:16-21). 천년왕국의 성전과 도시 선도 참조(93). 천년왕국에는 부활한 몸으로 예수님과 통치하는 사람들이 있고 부활하지 않은 몸으로 거기 들어가는 사람들 즉 7년 환난기를 거쳐 살아남은 채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그리스도 이전의 이방인과 유대인들(부활한 몸); (2) 신약 교회 시대 사람들(부활한 몸); (3) 환난기에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부활한 몸); (4) 환난기를 통과하고 살아남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부활하지 않은 몸); (5) 천년왕국 기간에 태어난 사람들(부활하지 않은 몸). 7년 환난기를 통과하고 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양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왕국에 들어가고 거기서 아들딸을 낳는데 이들 역시 그 전의 다른 세대 사람들처럼 구원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철장으로 형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중 얼마는 겉으로는 충성을 다하는 체 하지만 천년왕국이 끝나면서 사탄이 풀려나는 때에 기회를 타서 자기들의 속 감정을 드러내며 반역을 일으키고 결국 사탄과 함께 멸망하게 된다(계20:7-10). 이때에는 사람의 수명이 다시 길어져서 창조의 시작 때처럼 거의 1000세까지 살며 또 죽기도 한다(사65:20). 전천년 신앙, 환난기 참조.
2009-05-08 14:56:14 | 관리자
칠십 이레(Seventy weeks): 성경의 가장 놀라운 예언 중 하나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대언자 다니엘에게 주신 ‘70이레’ 혹은 ‘70주’(seventy weeks)라 불리는 예언이다.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법을 그치고 죄들을 끝내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단9:24). 다니엘은 유다 왕국의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은 자기가 말한 것이 70년이 아니라 70년이 7개 있는 490년이며 또 하나님께서 이 기간에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최종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세고 계신다고 말했다. 칠십 이레 선도 참조(78). 이 490년의 처음 69이레 즉 483년은(69x7=483) 주전 454년경에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때(느2:1-8)와 통치자 메시아가 와서 죽은 때 즉 주후 30년까지의 기간을 나타낸다.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예는 민14:34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창29:27을 통해 이레가 7년을 뜻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면서 늘 490년이라는 주기를 이용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부터 가나안 정착까지, 여호수아부터 왕국까지, 그리고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포로까지의 기간이 모두 490년이다. 이 사실과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전 4년에 태어나셨고 주전 1년 다음이 곧바로 주후 1년이 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약속된 메시아가 오는 해는 주후 30년이 된다. 그때 예수님의 나이는 서른세 살 반이었고 바로 그 해에 그분께서는 유다의 약속된 통치자 즉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셨는데 그렇게 된 것은 기록된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단9:26). 이 주목할 만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됨으로써 다니엘이 예언한 490년의 기간 중 처음 483년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으로부터 명백하게 알 수 있듯이 그 483년 후에 남은 마지막 7년은 즉시 연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다.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6-27). 이 예언은 메시아가 끊어진 뒤 수세기가 흘러간 후인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 마지막 때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 중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해’ -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 아님 - 예비된 마지막 한 이레 즉 7년을 가리키며 이때를 보통 ‘7년 환난기’라 부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회복을 보여 주기 위한 이정표인 다니엘의 칠십 이레 중 앞부분은 이미 성취되었고 나머지 한 이레 즉 7년은 앞으로 적그리스도의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환난기 참조.
2009-05-08 14:55:34 | 관리자
우리는 히브리서 9장 12절, 10장 10절 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구약 시대의 사람들과 신약 시대의 사람들 즉 과거에 이 땅에 산 모든 사람들과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이 땅에 살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전히 영원토록 단 한 번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셨음을 믿고 있고 이에 감사를 드린다. 보통 이것은 예수님의 ‘영 단 번 속죄’라고 불린다. 그런데 문제는  ‘영원한 단 번 속죄’가 이루어졌는데 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천년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 헌물 같은 희생 예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겔43:18-27절에 보면 분명히 제사장들이 죄 헌물, 번제헌물 그리고 화평 헌물을 드린다.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기 전에 먼저 천년왕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천주교회와 및 천주교회에서 항의하고 나온 프로테스탄트(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등)의 대부분은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1000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지는 왕국이 아니고 단지 ‘영구히 지속되는 영적인 왕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믿는 분들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런 구절들을 영적으로 뭉뚱그리는 것이다. 즉 이 시대에는 실제의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으므로 이스라엘과 관련된 이런 것들은 모두 가상의 세계에서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믿음을 존중하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싶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이 이루어지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가 확고히 서고 그들은 분명히 레위인 체계와 제사장 체계를 갖는다. 에스겔서 40-48장은 분명히 천년왕국 때에 이 땅에 세워질 문자적인 성전(41-43장)과 문자적인 제사장들(42장, 44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이사야서 66장 21절도 천년왕국 때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세워짐을 보여 주고 말라기 3장 3절도 레위 사람들이 세워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외에도 크고 무서운 주의 날 이후에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문자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록들은 분명히 제사장/레위 사람 체계와 성전의 건립을 보여 준다. 이런 것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참고로 밑에 있는 인용문 (1)과 (2)의 출처는 http://blog.daum.net/11christ/10411012이고 저자는 김정우로 되어 있다. (1) 에스겔 47장: 여기에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예언되고 있다.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큰 강이 되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으로 나타난다(5절). 그리고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고 강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며 바닷물(사해)이 소성함을 얻는다고 한다(9절).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사해까지 적시며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바꾸고 고기가 살 수 있도록 할까? 이 예언의 배후에는 명백하게 에덴동산 이미지가 깔려 있음을 주목하라. 에덴동산에 흐르는 물과 모든 나무와 산의 모티프가 에스겔서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28)고 말씀하심으로 에덴동산을 성령강림으로 재해석하셨다. 요한계시록 22:1-4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나오며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개의 실과를 맺는다고 한다. 즉 에스겔의 상징적인 강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에스겔은 에덴동산의 회복을 여기에서 바라보고 있지 문자 그대로 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올 것을 내다보고 있지 않다. 구약의 성전은 그 자체가 예표적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처소를 본 딴 복사판이다(출25:40, 왕상8:29-30). 성전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로서(히8:5) 하나의 모형으로 주어졌다. 이 모형은 그림자로서 솔로몬의 돌 성전은 보다 완전한 것이 나올 때 폐기될 수 있었다(히10:9). 이 그림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실체가 나타나고(요1:14) 종말론적인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계22). 이 성경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에스겔서의 강물과 나무 이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2) 스가랴서에 나타난 예언: 메릴 엉거(Unger 1978)는 스가랴서 전체가 메시야의 강림과 천년왕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라는 관점 속에서 주석을 하고 있다. 예로서 2:1-13의 측량줄 잡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환상은 "그 도시가 미래에 천년왕국의 수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1978:43). 즉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고 교회가 될 수 없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깨끗함을 받는 환상(3:1-10)은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회개할 것을 그리고 있다(55쪽). 11장은 미래에 거짓 목자 즉 적그리스도가 올 것을 말하며, 12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을 예언한다고 말한다(206쪽). 미래의 예루살렘이 다시 이방인들에게 포위될 것이며 (12:1-9), 메시야 왕이 두 번째로 오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때 온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이다(12:1-13:9).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승리를 거둘 것이나 메시야가 감람산에 오심으로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 산이 변형되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는다(14장). 따라서 14장은 전적으로 예언적이다(wholly prophetic). 이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과거 역사에는 적용할 수가 없다(238쪽). " 스가랴 14장은 현 시대의 관점에서도 전적으로 예언적이다. 그 의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석법은 문자적인 해석이다 " (239쪽). 그리고 엉거는 파인버거(Feinberg)를 인용하고 있다: "이 장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때 스가랴가 지금까지 계시한 것과 성경전체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성에 대한 예언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 그렇다면 스가랴서에서 감람산이 나누어지고 에스겔서에서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만드는 이미지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을 알리는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엘이 말세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일하시는 시대를 예언하면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알았을까? 선지자는 신약시대의 도래에 대해 상징과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 상징과 비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선지자의 의미를 바로 캐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결정하는 것이 종말과 연관된 본문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준다. 다니엘과 사도 요한은 고난 가운데서 꿈과 환상과 상징을 통해 하나님이 이기고 있고, 역사의 마지막에 개입하시며 그의 성도들을 신원하시고 그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말하고 있다. 묵시문학은 구체적인 종말의 때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종말론적인 최후의 승리를 제시하며 고난 받는 믿음의 공동체를 위로한다. 신자들이 고난 받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상징(symbolism)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 체계와 믿음을 가진 분들 중 상당수가 진지한 크리스천임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 부분에 관한 한 그들의 진지함을 따르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믿는다. 즉 에스겔서에 기록된 대로 실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흘러 사해를 회복시키며 재림 때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오셔서 땅이 갈라지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스가랴서 14장 4절에서 우리 주님의 발이 올리브 산에 닿는 것은 곧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 승천하면서 주신 약속의 말씀 즉 올리브 산에서 승천한 그대로 올리브 산에 오신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 사람들의 문제는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고의로 무시하고 영해하여 모두 교회에 적용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천주교의 어거스틴 사상에서 나와 칼빈을 통해 장로교회에 고착된 잘못된 믿음이다. 자, 그러면 히브리서와 에스겔서의 상충되는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성경을 영해하거나 왜곡하여 우리의 주장을 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그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한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님은 왜 재림하시는가? 그분의 재림이 죄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히브리서 9장 27,2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주님의 재림은 죄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에서의 희생 제사도 죄와 상관이 없다. 히브리서 10장 16-18절에는 교회에게 또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성취될 말씀이 있다.  16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 17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8 이제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 18절은 분명히 죄로 인한 헌물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의 헌물은 죄로 인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 헌물들은 다른 목적으로 드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것들을 드리는 목적이 자기들이 죽인 메시아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함이라고 믿는다. 이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합당한 이유라고 믿는다. 즉 구약 시대에는 다가올 메시아를 기대하며 예표로 유대인들이 희생 헌물을 드렸고 천년왕국에서는 이미 모든 일을 이루신 메시아를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희생 헌물을 드릴 것이다. 또한 천년왕국 시대는 구약시대와 비슷하게 신정 정치 형태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유일하게 장막절이 지켜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장막절에 주님을 뵈러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스가랴서 14장 16-19절을 보자. 16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남은 모든 자가 심지어 해마다 올라와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며 장막절을 지키리라. 17 땅의 모든 가족들 중에서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그분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터인즉 18 만일 이집트 가족이 올라가서 거기에 이르지 아니하면 비를 받지 못하리니 곧 주께서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교도들을 칠 때에 내리실 재앙을 거기에 내리시리라. 19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민족들이 받을 벌과 이집트가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우리는 이대로 될 줄 믿는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이것만이 유일한 대답이라고 믿지 않으며 이 외에 다른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여기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이유를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믿는다. 이렇게 믿으면 세대주의자요 심지어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바른 성경 해석 방법이요 하나님이 주신 뜻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렇게 믿지 않는 분들(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의 믿음도 존중하며 특히 그들의 성화 노력을 크게 반긴다. 하지만 종말론의 이 부분에서는 그들이 틀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대중적 기독교는) 바른 것을 원치 않는다. 그냥 유명한 사람들의 해석 체계를 따르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형제들에게도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는 귀와 눈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또 바르게 본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에게는 칼빈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극도로 순수하게 살고자 노력했기에 칼빈주의자들은 영국에서 퓨리탄(Puritans)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게 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본받고 싶다(다만 종말론의 영적 해석 체계와 죽은 정통으로 정형화 된 칼빈 우상주의를 빼고).
2009-05-08 14:54:56 | 관리자
주님의 재림의 전조는 이스라엘의 부활입니다. 독자께서는 주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독자께서는 주님의 재림을 열렬히 바라고 있습니까? 세상이 너무 좋아 머리로는 믿지만 여기서 더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소망은 주님의 재림에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에 대해 스가랴서 12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이스라엘을 위한 주의 말씀의 엄중한 부담이라. 주 곧 하늘들을 펼치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 사람 속에 사람의 영을 짓는 이가 말하노라.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사방 모든 백성에게 사람을 떨게 만드는 잔이 되게 할 터인데 그때는 곧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려고 에워쌀 때니라.3 ¶ 그 날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모든 백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비록 땅의 모든 백성이 그것을 치려고 함께 모일지라도 그 돌로 짐을 진 자는 다 산산조각 끊어지리라. 스가랴서 12-14장을 잘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재림의 소망을 굳게 가집시다. 여기에 우리의 안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은 다 없어지고 맙니다. 다음은 연합뉴스의 보도입니다. 위의 성경 말씀들과 같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건국 60년, 빛과 그림자  수많은 절멸 위기 딛고 중동 최강국으로 발돋움 약자 팔레스타인 탄압 비난..아랍권과 평화공존 등 과제    이스라엘이 5월 8일(이스라엘 달력으로 5월 14일) 건국 60주년을 맞는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11월29일 총회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의 약 56%를 유대인들의 국가에 주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일부 영역을 잃게 된 아랍권이 이를 거부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로부터 5개월 보름만인 1948년 5월14일 전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건국일을 유대력에 따라 기념하고 있는데 올해는 이 날이 서양력으로 5월8일이다. 서기 7세기 이래 아랍 무슬림들이 지배력을 행사해 온 중동의 한 복판에 전혀 이질적인 국가로 태동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역내 갈등을 일으키는 씨앗이 됐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로 구성된 아랍연합군은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을 침공해 제1차 중동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의 서막을 올렸다.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권과 크고 작은 규모의 전쟁을 수없이 치렀지만 그때마다 더 강한 국가로 거듭났다. 특히 이스라엘은 1967년 선제공격으로 시작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함으로써 성서를 통해 약속받았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영역이 명실상부한 국토가 됐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근 2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이산)와 20세기의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를 겪으며 절멸의 위기로 내몰렸던 유대인들에게는 성공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 로비단체들을 앞세워 국제 정치 무대를 주도하는 미국의 정책 형성 과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의료, 제약, 전자 등 기술집약적인 산업 분야에서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한 이스라엘의 국민총생산(GNP) 규모는 연간 5천억 달러에 육박해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넘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도 덩치가 큰 아랍 국가들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불패의 역사를 써올 만큼 막강한 힘을 자랑한다. 이처럼 높아진 이스라엘의 국가적 위상은 이스라엘의 건국에 반발하며 여러 차례 전쟁을 불사했던 이집트와 요르단이 현실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1979년과 1994년 각각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유대인 국가의 동반자가 됐다. 이스라엘이 건국 후 60년 간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뤘지만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는 보통 국가가 되기 까지는 갈 길이 멀고 주변의 현실이 우울하고 답답한 게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이스라엘이 지난 60년 간 팔레스타인 땅에서 국가의 틀을 확고히 다지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 꿈이 점점 더 멀어지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전 팔레스타인 영역이 이스라엘 점령 체제에 놓이자 독립을 향한 처절한 투쟁을 본격화했다. 이 투쟁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의 시각에선 테러리즘으로 규정됐다. 1987년과 2000년 각각 시작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제1, 2차 이스라엘 점령 반대 투쟁(인티파다)은 약 6천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1천 명 이상의 이스라엘인을 희생시켰다. 이스라엘은 저항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지난 9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체결한 오슬로 평화협정을 통해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제한적 자치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1967년 전쟁 이전의 경계에 맞춰 가자지구와 동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요르단강 서안을 영토로 하는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꿈을 외면하고 있다.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의 일부 땅을 영원히 차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반발하는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내의 강경 정파들은 저항공격으로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무력에 주로 의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또 하마스 등 강경 정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정책을 펴면서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는 유대인 정착촌과 팔레스타인인 마을을 갈라놓는 약 700㎞에 이르는 보안장벽(분리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를 두고 이스라엘 비판론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제2의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다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며 땅을 절취하고 있다고 서슬이 퍼런 지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선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의 생존을 위한 것이며, 국가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며 그런 비난을 일축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내에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 타결에 무게를 두고 아랍권과의 공존을 중요시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제외하면, 주변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경우 대내 정치에선 서구 여느 나라 못지 않게 민주주의 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 확산하는 극우주의 성향은 공존을 통한 평화구현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요인이다. 마탄 빌나이 이스라엘 국방부 부장관이 최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엄청난 홀로코스트를 안겨줄 수 있다고 발언한 뒤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잇따르고 있다. 유대교 율법학자(랍비)인 이스라엘 로센은 "팔레스타인인은 남자, 여자,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죽여야 한다. 그들의 가축도 예외가 돼선 안된다"는 취지의 극단적인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사무엘 엘리야후라는 이름의 랍비는 지난 3월 예루살렘에 소재한 유대인 종교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학생 8명을 숨지게 한 팔레스타인인의 자식들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지난 60년 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해 중동 지역의 최강국으로 발돋움했고, 이에 대해 찬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는 아랍권에서 조차 이론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변에 수많은 적을 둔 태생적 환경 탓에 팔레스타인 문제 등에 대처하면서 자국의 안보 이기주의에 너무 몰입해 보편적 정의를 등지는 길을 걸어왔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신문인 알-아흐람 위클리는 "이스라엘은 60번째 생일을 맞았지만 60년 전 탄생 때처럼 여전히 피와 학살, 절취와 거짓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연합뉴스) 
2009-05-08 14:54:06 | 관리자
  휴거(Rapture):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과 마찬가지로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비밀리에 지구의 대기권 내로 들어오시는데 이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려져서 그분을 만나며 이것을 보통 휴거라 한다. 재림 참조.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살전4:16-17).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오셨을 때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휴거의 두 가지 특성에 대해 잘 알려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선도 참조(64). 사도 바울은 불멸의 부활 장에서 휴거의 급박함에 대해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게 하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고전15:51).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휴거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에 갑자기 일어난다. 그분은 마치 집에 도둑이 드는 것처럼 갑자기 오신다. 도둑은 자신이 오는 시각을 미리 알리지 않으며 특별한 목적을 갖고 들이닥친다. 도둑은 집안에 있는 것을 다 털어 가지 않으며 금은과 같은 보석과 귀중품만 훔쳐간다. 그는 결코 그 집에 머무르려고 오지 않으며 귀중한 물건만 챙기면 즉시 떠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공중 강림 하실 때에 즉 휴거 시에 자신의 보배인 성도들만 데려가신다. 믿음이 많은 자든 적은 자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받은 자는 다 휴거된다. 휴거가 일어난 뒤에 온 땅에는 7년 동안 무서운 환난이 있으며 특히 후반부 3년 반은 거의 지옥이나 다름없게 된다. 환난기 참조. 이때는 마귀가 자신의 모든 악을 퍼붓는 때며 창세 이래로 가장 두려운 때이다. 우리 주님은 믿는 신자들이 이런 환난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계3:10). 우리 주님은 여기서 ‘keep from’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환난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환난에서 떼어내어 아예 거기 들어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keep과 전치사 from이 쓰일 때는 언제나 이런 뜻으로 쓰인다. I kept him from going. 이것은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뜻이지 '가는 데서 그를 지켰다'가 아니다. 독자들은 이미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keep from, prevent from에 대해서 배웠을 터이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들은 모두 7년 환난기 전에 휴거를 받으며 이를 보통 ‘환난 전 휴거’라 부른다. 이렇게 부활한 성도들과 휴거 받은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로 하늘에서 혼인 만찬에 들어간다. 우리 주님은 결혼을 위해 신부를 데리러 환난 전에 공중 강림하시고 혼인 만찬이 끝나면 신부와 함께 땅으로 내려오신다.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 자신은 마치 자기 주인이 결혼식에서 돌아올 때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되라. 그가 와서 문을 두드리면 그들이 즉시 그에게 열어 주리라 ”(눅12:36). 우리 주님은 하늘의 결혼식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오신다. 또한 7년 환난기는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한 심판의 기간이며 이방인들이 주축인 교회와 상관이 없다. 칠십 이레, 환난기 참조. 그러므로 계시록 4장부터 19장까지 교회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교회의 성도들은 휴거되어 이 땅에 없기 때문이다. 이 환난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지만(계7:9)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환난 성도들이다. 교회의 성도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분리시킬 휴거는 이 시대에서 가장 놀랄 만한 사건이 될 것이며 그래서 믿는 신자들은 이 사건을 고대하고 사모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 신자들의 소망이 있다.
2009-05-08 14:52:31 | 관리자
어느 자매님이 토저의 부흥과 회복을 위한 기도를 읽고 글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사이트에서 이런 글이 쉽게 올라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침에 깊바이블에 올려진 새로운 글 - 토저의 부흥과 회복을 위한 기도 - 을 읽었습니다. 요즘 기도할 제목들이 많아 기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던 터라 마음에 시원히 흐르는 물처럼 쏙쏙 스며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린 기도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점검해 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데 익숙하지요. 어떤 때 저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나의 기도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5~34절의 말씀(공중의 날짐승..)을 잊고 요한복음 14장 14절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 이 말씀만을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그 전 구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 는 말씀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나이를 들어가며 사람은 철저히 육신의 정욕에 대단한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 이 세가지 종목을 피해서 기도를 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우리마음은 그리 조급해 하거나 답답해 하지 않고 성숙한 인내심과 초연함이 발휘될 것 같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뜻가운데 사는 법에 대해 자꾸 상고하고 점검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 활발하게 이야기 되었음 좋겠습니다. 짧게 소감만 쓰려다 길어졌네요. 
2009-05-08 14:11:40 | 관리자
이번에 다시 한 번 토저의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를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진국입니다. 거기서 한 챕터가 제 맘을 크게 사로잡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과연 바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가도 깊이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이런 글을 통해 깊은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회복을 위해 간구하는 방법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18:1-2) 위에 인용한 세 구절에 주목하라. 첫 번째 구절은, 기도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기도가 이렇게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르게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구절은 약간 다르다. 이 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해야 하며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순교자이며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기도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그분을 뵙거나 그분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창조물 위로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한다.”나는 기도에 대한 이 정의에 공감하며 잠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요즘은 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복음주의 교회 안팎에서 많은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 목록을 적어 놓고 그분께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 많은 일들을 그분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기도하며 시간 빼앗기지 말고 산책을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들어달라는 압력을 받고 계시다. 내가 보기에 기도는 이미 로비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로비한다.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에까지 그분께서 복 주시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빈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기를 원하며 그러한 저급한 프로젝트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여행할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버스나 화물선이 아닌 호화 유람선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라디오나 편지로 기도를 요청하며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이 응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밤새면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분노를 발산하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했다고 착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방관하실 뿐이다. 시간을 빼앗는 기도 제목도 있다 공식적인 기도 모임에서는 절대로 기도 부탁을 해서는 안 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종류의 문제들 말이다. 이러한 기도 제목은 듣는 이들을 난처하게 하며 참석자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목회할 때 어떤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리더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아무개 자매가 기도를 부탁해 왔습니다. 그녀의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두 그녀를 위해 기도합시다.”그러자 온 회중이 엄숙하게 무릎을 끓고 눈꺼풀을 위해 기도했다. 미소를 띠거나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꺼풀을 문지르라고 권면하고 싶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리라. 문지르기만 하면 멈출 테니까.이러 사적인 문제를 기도 모임에 끌어들여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합심 기도’ 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이것은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이미 알고 있겠지만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합심기도는 영향력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 모임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반드시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단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산만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최우선순위 말씀 속에서 기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이 시간 나는 기도의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여러분 중 몇 사람은 내가 먼저 선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 제목 맨 위에 와야 할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활을 쏠 때 조준하는 과녁과 같다. 마치 기도의 불도저로 밀어붙여야 하는 산처럼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어야 한다. 감히 단언하기는 이 두 가지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이 두 가지 목표가 개인 기도든 합심 기도든 기도의 열정을 자극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구체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반복이나 갈망 또 훈련이나 자기희생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렬하게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 형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치 군대에서 전략가가 사용 가능한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첫 번째 목표,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의 회복 이 나라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지금 전달하는 메시지는 꾸며낸 말이 아니다. 건전한 신학 사상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에 점검하거나 테스트해 봐도 좋다. 다른 어떤 일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친구로 교제하다가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보잘것없고 천박하며 무능한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분은 단지 ‘위층’에 사시는 분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와서 도와주며,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시는 분이다.오늘날, 복음주의 단체에서는 박제가 된 신을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언제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신 말이다. 라디오 프로에 한 개그맨이 출연하여 “이제 다 같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익살로 말문을 열 수도 있다. 아니면 반쯤 개종한 카우보이가 얼간이 복장을 하고 나와 숫자 카드를 튕긴 후에, “이제 제가 ‘거룩한 숫자’(holy number)를 몸으로 보여 드리지요”라고 말하고는 저급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 같으면 누구나 다가갈 수 있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과거에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었던 때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의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성경에서 말하는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 나아갈 때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분이다. 테니스 복장으로 운동하다 말고 냅다 뛰어 들어가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후에 빠져나갈 수 는 없다. 시카고에 크리스천 남성 사업가들로 구성된 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위원회뿐 아니라 다른 모임도 많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여러 차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느 특별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위원회의 임원중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와 연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저는 지금 막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뉴잉글랜드에서 온 한 멋진 노신사가 일어서더니 “의장!”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의장이 그를 보며 “좋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라고 물었다. 노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이곳 시카고까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경건하게 예배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데없는 말이나 들어야 하다니요. 이 자리에 지금 방금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사람이 있다니요.”곤경에 처한 의장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신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사실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전능하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일 가까이 나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이사야 대언자는 지존하신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높여 “오 하나님, 하나님,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자 엎어져 마치 돌처럼 굳어 그분께서 일으켜 주셔야만 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엎드려져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저는 티끌이고 재입니다. 부정한 사람이며 감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습니다.”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중략... 지금 많은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값싼 하나님이다. 다양한 신학적 사상과 성가대의 노래 또 설교자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혼합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명령이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회복될 때 더 많은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켜가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그분이 받으실 영광을 사취하는 행위이며 결국 어떤 영혼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 경우는 오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상한 형태의 변절자를 양산하게 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 즉 첫 번째 공동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이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이 제일 먼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제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복음주의가 타락하여 무늬만 성경적일 뿐 인본주의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본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기독교를 원한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 다음 인간에게 관심을 돌린다. 그러나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는 인간을 먼저 찾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기독교 본래의 자리를 회복해야한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말, 인간들을 위한 행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 우선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오시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토록 압도적으로 나타나,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잘못된 것을 뒤엎으며 인간의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자만심을 사라지게 하리라. 그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짖게 되리라. 이제, 기억하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 있고, 광고업자들의 도움과 최신 기계들을 활용해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분이 제일 먼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목표,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석방되는 것 반드시, 두 번째로 기도해야 할 목표는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는 것이다. 오늘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는 총체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빠져 있다. 오순절교회, 근본주의 교회, 기독교 연합선교회 등 모든 교회가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당신이 속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뿐이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있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셔서 마침내 회복시키실 때까지,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이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조차 체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 즉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교회들 역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그들의 생활 방식과 도덕관을 배우고 익히며 점차 그들이 파놓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교회가 이 세상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영적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이 작업이 완결되어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원래 있던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신약 시대의 삶의 표준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복음주의가 아무리 진보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바벨론에서 더 많은 자녀들을 낳는 꼴밖에 안 된다. 개혁과 회복을 통해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영광이 우리 위에 다시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바벨론에서 더 많은 유대인을 생산하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셈이 된다. 기억하라! 우리가 회복되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선교 사업조차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열등한’ 기독교를 해외의 토양에 이식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선교사들이여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어떤 인물을 결코 키워낼 수 없다. 성경에서도 “각각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싸구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를 택해 선교지로 보내 보라. 그의 머리는 온통 천박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자신을 닮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것이다. 선교사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변질된 기독교를 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이리라. 선교 차원을 넘어 전 세계에서 교회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더 많은 선교사들이 양성되고 그들의 질적 수준 또한 높아져 결과적으로 ‘양질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토저 목사님,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 그리스도인이면 다 똑같지 않은가요?” 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30배, 어떤 사람은 60배, 또 어떤 사람은 100배를 거두는 법이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라. 큰 별이 있는가 하면 작은 별도 있고 또 어떤 별은 망원경으로라야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너희 중 어떤 이는 육신에 속한 자이고 어떤 이는 영적인 자이다”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히5:12)  기독교 신앙은 고급 수준에 머물 수도 있고 적당하거나 평범한 수준 또 낮은 차원에 머물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성경학교나 크리스천 대학, 기독교 잡지, 성경연구 모임, 세미나 등을 살펴보라. 거기서 주창하는 기독교 신앙은 삼류 즉 타락한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선조들이 알고 있었고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간직했던 그런 신앙이 아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체험한 고급스럽고 거룩한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신앙 말이다. 명심하라! 우리가 개혁을 완수하기 전에 양산되는 모든 책들과 잡지 또 학교들은 부패한 교회에서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독교 연합선교회에서 출간하는 ‘연합회 증언’이라는 잡지는 책을 발간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편집장과 부편집장을 비롯한 모든 편집위원들이 타락한 이류급 기독교인들이라면 그 잡지는 이류급 잡지가 될 것이 뻔하고 또 실제로 그렇다. 만약 우리 모두가 원상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스포츠, 신문 잡지, 예를 들어 ‘라이프 잡지’나 ‘타임지’와 같은 매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말씀의 정확한 의미대로 성경적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교회와 잡지, 선교사들 또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 타락한 환경 속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날 때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산소를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4.5kg의 몸무게로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울부짖으며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아무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만 하는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태어나 나기도 전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각자 필요한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노리갯감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분께서 마땅히 전능자가 되시도록,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 교회의 패턴으로 회복되도록 말이다.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목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인가. 사람의 인정인가? 사람들이 기도하는 동산 정원에는 뱀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자아’(self)라는 뱀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나무 근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독을 발하여 기도를 망쳐 놓는다. 야고보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를 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는가?가령, 내가 무릎을 꿇고 금식까지 해가며 하나님께 “오,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도하며 그분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 보았는가? 이런 식의 기도는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의 일부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그분이 받으실 영광의 일정 부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응답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는 일이 가능하다. 바알의 대언자들이 패배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엘리야가 되어 많은 무리 앞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은근히 열망하는 일이 가능하다. 잘못된 것이 개혁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루터가 되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이제 도우소서”라고 요청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위 행렬 맨 앞에 서서 행진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회가 사탄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며 정작 승리했을 때 우리가 열심히 싸운 덕분에 승리했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학교가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주일학교 교사로 인정받아 “저분이 부장이셨을 때 숫자가 25명에서 39명으로 늘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부탁하건데, 수준을 높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오,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소서. 나를 통해서든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메노파 교도’(Mennonite,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분파)를 사용해 영광을 받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우리는 마치 내가 속한 단체가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또 진지하게 기도해야만 한다.내 생각에 아마 여러분 중 몇몇 사람은 이런 관점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마비에 걸려 운동장에 나자빠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돼도 좋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만약 당신이 “오, 하나님!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차라리 ‘메리의 어린 양(Mart's little Lamb)노래의 가사를 거꾸로 부르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바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고 또 그분께서 누군가를 사용해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시면 반드시 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영성인가. 게으름인가? 여러분 중 약간 세련되었다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로 부흥의 물결이 밀려오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성도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실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영성이 부족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맞춰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들은 지난 수년 동안 최고의 예배를 구상하며 여러 가지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영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단지 게으름일 뿐이다. 누군가 예배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설교 준비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님께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 나는 북미대륙에서 큰 교회 중 한 곳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다. 교회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누가 와서 묻는다 해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추측에 맡기고 싶다. 아무튼 그 교회의 주일 아침예배가 어떠했는지 아는가? 노상 집회였다. 약 3,500명이 운집한 길거리 모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교회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와서 성경책 페이지를 홱 넘겨가면서, 그것도 차에 광택을 내거나 긴 낚시 여행을 마음껏 즐긴 후에 예배를 드린다고 나와서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것을 ‘영성’ 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이 아니다.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나태와 무례함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교파, 성공회나 루터교 성직자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은 무시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전도자가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전보가 왔다.“기쁜 소식입니다. 이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되고 있어요.”그러자 전도자는 급히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제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그 운동을 잠시 중단시키시오.”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실상 이것은 비극이다. 복음 전도자가 받을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도자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어쨌든 영혼을 구원했지 않소?”그렇다. 그 전도자는 바벨론에서 인큐베이터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필요조차 없는 몸무게 4.5kg의 건강한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은 본래 태어났어야 할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로 개종만 하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리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오, 하나님!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응답해 주소서. 우리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소서. 만약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가 더 많게 하신다 해도 저는 만족합니다. 주님, 교회를 회복시켜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축복하신다 해도 괜찮습니다.”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교회에 먼저 복을 주셔서 우리가 그 흐름에 따라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벽돌 한 장을 놓게 하소서. 저는 그 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께서 저를 도구로 쓰시면 좋고, 쓰지 않으신다 해도 주님께서 쓰시는 자를 적극 후원하겠나이다. 그를 사랑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저는 무대 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겠습니다. 비록 그 일이 무미건조한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이렇게 기도할 자신이 있는가?“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걷어차여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몇몇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몸서리칠 일이다. “오,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교회에 복을 내려 주소서.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교회 집사들이여, 진정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다, 혹시 당신이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기도에 ‘정가표’를 붙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회복시켜 사도행전에 나타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쓰신다 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몰리노스(1640-1697. 스페인의 신비주의자)가 한 말을 기억하라.“기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지 못한다. 비록 사탄과 인간의 정욕이 방해한다 해도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으며 위축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소신을 제시하였다. 나는 이렇게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연합선교회뿐 아니라 장로교회, 침례교회, 메노파교회, 독립교회 어디를 가든 감히 이렇게 외친다. 첫째,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소멸되었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싸구려 신이 되어버렸고 무릎 꿇을 만한 가치도 없는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옷자락으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계신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바르게 경배하고 예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회는 신약 시대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이 문제는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 만일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계속해서 세속적인 교회를 모방하고 복음주의 교회를 타락케 하며 청년 운동이나 주도한다면 또 이 단체가 세속적인 교회를 따라가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있어 타락한 준(準)자유주의자 계열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위임받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게 하리라.여러분에게 기탄없이 말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21세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앞으로 이 단체를 떠날 생각도 없다. 만약 떠나 있다면 결코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단체가 ‘세속적’인 도구와 방법, 철학 또 관점에 완전히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좀 더 참아야 할지 혹시 내가 너무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한다. 만약 그분께서 우리 단체가 아닌 다른 단체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하신다 해도 나는 “오 하나님! 어쨌든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 되게 해주소서!”라고 간구하리라.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성령의 불이 내려올 때 불을 받고, 복이 임할 때 복을 받고,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때 회복되며, 에스라나 느헤미야와 같은 대언자가 무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때 우리가 그 대상자 중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지 나는 모른다. 아직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이 시대의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대언자를 보내실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다. 아마 머리카락이 붉고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며 마치 택시의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큰 귀가 삐죽 튀어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상 외로 소년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이 택한 사람을 예비시켜 놓았다가 그를 일으켜 회복 운동을 일으키시리라. 수십억이 드나드는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지 않고서도 부흥과 회복을 일으키시리라. “오 하나님! 택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쓰시기로 예비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복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또 저로 하여금 그 일부분이라도 감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 혹시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 주소서. 오직 회복시켜 주소서.”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이다. 20,30대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영광을 목도한 적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하고 두렵게 나타나 참석자들이 말도 크게 못하는 그런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너무나 존귀하고 높으신 분이라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말하기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분으로 들은 적이 전혀 없다. 기독교 연합 선교회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가 뉴욕 주의 버팔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다. 이때 설교가 끝나고 모임을 마쳤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경외감을 느껴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오, 하나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2009-05-08 14:10:58 | 관리자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옥성호 형제의 글을 올립니다.   저는 이 형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분이 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건전한 크리스천이라고 확신합니다. 요즘 비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면서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부흥과 개혁사의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침례 교인이 장로 교인의 글을 읽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교단에 가입하지 않은 독립 침례교회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장로교인의 글을 읽거나 추천하면 그 일은 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고요,크리스천들이 배격해야 할 분파주의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독립침례교회 성도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고 오직 그분만을 자신의 유일하고도 완벽한 구원자로 믿으며 그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다 그분의 몸의 지체요, 그분 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어이고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은 모두 형용사입니다. 주어가 중요하며 형용사는 꾸며 주는 것으로서 다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립 침례교회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에 가장 가깝다고 믿고 있으며, 기회가 오면 이런 교회의 목회자로 살다가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지역 교회는 다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항상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믿는 바를 고치며 생활을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구원 받기를 선택하고 지역 교회를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지역 교회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사를 가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뒤에 어느 교회가 성경을 따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활하는지 판단하고 거기에 나가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교제하고 섬기게 됩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 혹은 성경적으로 하는 교회 - 라고 주장하면 그런 사람과 그런 교회를 주목하고 피하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제는 무익합니다. 무엇이든지 믿는 것은 자유지만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역행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십시오. 통일교를 보십시오.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기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  - 혹은 유일하게 성경적인 교회 -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상적인 교회치고 어느 교회도 자기 교회만 유일한 교회라고 믿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말씀보존학회(이송오 씨 담임)는 자기들의 교회가 한국에서 세워진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주장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주장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킹제임스 성경을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악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보수 장로교 청교도 목사들도 이런 사상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세련된 사람들이라 겉으로 이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형제 교회, 지방 교회, 구원파 교회 등도 거의 이렇게 생각하지요. 이런 데서는 대부분 자기들이 믿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지상의 교회는 모두 완벽하지 않습니다.   내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늘 살펴보고 주님의 말씀으로 귀환하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내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고치겠다는 부드러운 자세로 믿음 생활을 할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와 형제/자매님의 생활에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옥성호 형제의 글, 어느 자매가 추천하며 보내 주어서 올립니다. 원래 글은 부흥과 개혁사의 옥성호 형제 컬럼에 있다고 합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메릴 스트립에게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안긴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소피라는 여자에게 독일 장교는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녀의 아이 두 명 중 살아남을 한 명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소피는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한 명의 자녀를 선택합니다. 아마도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것이 낫겠지라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택되지 못한 아이는 엄마를 울부짖으며 독일 군인들에 의해 끌려갑니다. 엄마, 엄마를 울부짖는 그 아이의 음성에서 소피는 평생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녀는 마침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과연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소피에게 원하시는 당신의 선한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소피에게 만약 이 상황을 놓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을까요? 소피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면 무슨 뾰족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처럼 마구 남용되는 말이 없는 듯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확신으로 그토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내세울까요? 저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한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특히 수많은 목회자들에 의해 남용되는 이 말은 더 큰 위험요소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압박합니다. 왜 분명 나름의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개척된 교회들이 매년 한국에서만 수천 개씩 문을 닫습니까? 교회가 세워졌다가 망하는 것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중간에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바뀌기 때문인가요? 성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성적에 맞는 신학교를 가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신학교를 나오면 반드시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여건이 갖춰져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자금이 모이면 꼭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내가 정말로 팔복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위해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그 사랑이 있다면,,,그 목마름이 있다면 행동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기 전에 나의 결정 속에 내 욕심이 얼마나 있는지를 스스로 정직하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내가 돈을 낼까 말까를 놓고 망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으니까요. 만약 식사비가 신경 쓰인다면....그 사람은 정말로 앞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지요. 제가 앞의 어떤 글에서도 썼듯이.....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남을 이용하는 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한 결과 이 기도원을 구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 대신.... “우리 교회가 좀 더 성장하려면 기도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마침 좋은 물건이 싸게 나왔어요. 이거 정말 놓치기 아깝습니다. 이번에 삽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자매님, 기도한 결과 자매님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점잖은 말 대신.... “나 사실 너가 좀 지겨워졌어...미안하다. 그만 만나자.”라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나는 솔직하게 이것을 원한다.”라고 왜 말 못합니까? 기독교 정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글쎄요.... “교회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정치인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이거 영 열 받아서....이번에 국회의원 뽑아서 한번 확실하게 뭔가를 보여줘야지. 이주일 선생께서 타계하신 이후 이 사회 속에 진정한 ‘뭔가’를 보여주는 사람이 너무도 없어. 이번에 우리 교회가 한번 확실히 보여주겠어.”   또한 어떤 상황을 놓고 많은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좀 더 기도해 봅시다....하나님의 뜻을 찾아야지요.....” 물론 맞습니다.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에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속으로 결론은 다 내려놓고 시간을 벌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신앙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압박하려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많은 경우에 질문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각종 메커니즘 내지 방법론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냥 나를 내던질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남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정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사랑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3년 만에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실패일까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열심히 된장찌개를 끊인 신혼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된장찌개보다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된장찌개가 실패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굳이 문제라면 남편이 아직까지 아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는 점이겠지요.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너무도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말하기 전에 “잘 몰라...이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하지만 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요? 분명 자식 둘을 다 사랑했던 소피는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했을까요? 한 명을 선택했던 소피의 선택이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선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선택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한다면 같은 상황에 대한 결정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2 더하기 2는 4와 같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결정에 의해 아무리 겉으로 나타난 결과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 이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과라도 하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나는 사랑합니까? 사랑해서 내린 결정입니까?” 이것이 내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2009-05-08 14:10:17 | 관리자
"성장한다는 교회들은 많은데 왜 사회가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같이 변하고 있는가?" "바르게 하려는 교회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하며 결국 '기도의 부족' 혹은 '기도 없음'(혹은 바른 기도가 전무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느겼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레오나드 레이븐힐)를 접하고 너무나 큰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현재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말씀사에서는 품절 상태입니다. 하지만 갓피플 몰 같은 기독교 전문 서적 사이트나  교보문고 등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레이븐힐의 대부흥 시리즈 2, 3탄(무릎 부흥,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은 생명의 말씀사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규장 출판사에서 간행하였습니다. 서문만 발췌하여 올립니다. 많이 읽고 뜨겁게 바른 기도를 드립시다.   지금 부흥이 지체되고 있다... 당신 때문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1. 독일의 신학자 이자 역사가)은 기독교를 이렇게 정의(定議)했다. “기독교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주 숭고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시간 속에서 영원을 위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영원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며 살아간다면, 언제나 심판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면, 기도할 때마다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한 눈으로는 심판대를 바라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저주받은 인류를 바라보며 복음을 전한다면….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부흥이 일어나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무수한 영혼들을 죄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분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둘째,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셋째, 성경을 아는 사람이다.   소돔은 성경과 설교자, 전도 책자, 기도회 그리고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성경과 교회와 목사가 넘쳐난다. 그런데도 돼 그토록 죄악이 만연한가? 건축가들이 교회 건물을 짓지만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인쇄업자들이 성경을 인쇄하지만 그것을 읽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그분이 구주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쩌다가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가를 부르지만 그것을 곧 잊어버린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때 어떤 결과가 나아올는지 나는 심히 두렵다.   “우리의 죄와 세속성(世俗性)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거짓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처럼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 참고). 우리는 죄를 대적하지 않고 죄와 타협한다. 차갑게 식어버린, 세속적이고 비판하기 좋아하고 근심 찌든 교회는 음란하고 방종한 이 시대를 결코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 없다.   교회는 희생양을 찾아서는 안 된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은 대중문화 때문에 아니다.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도덕적 타락의 궁극적인 원인은 교회의 잘못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교회는 세상에게 가시였다. 평균 이하의 도덕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도덕적 기준을 세상에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 부흥을 가로막는 상업주의   왜 부흥이 지체되는가?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기독교가 상업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되고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호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부흥회나 전도 집회에 많은 청중을 끌어 모은다. 시장(市長)과 같이 높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순진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동기로 성의를 다해 자신의 물질을 바친다. 하지만 그들이 바친 물질은, 명성은 높지만 속이 좁은 사역자들이 대중문화의 스타처럼 호화롭게 생활하는 데 사용되어버린다.   호화저택도 있고 호숫가에 별장도 있고 은행에 거액의 예금이 있는 사역자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기 배만 불리는 불의(不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부흥의 열쇠를 맡기실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양복을 갈아입기 때문에 겉모습이 번지르르하다. 그들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전하면서 자신들은 고급 호텔을 전전한다. 그들은 설교 예화를 위해 데나리온 한 닢까지 다른 사람에게 빌려야만 했던 분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청중에게 돈을 짜낸다. 볼품없는 옷을 입었던 분을 기리기 위해 일류 스타들처럼 옷을 입는다. 광야에서 홀로 금식하신 분을 기억한다면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를 즐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거액의 사례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자기들의 은행 예금이 매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심판날’이 그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날이 될지 생각하라!  ○ 싸구려 복음과 게으른 사역자가 부흥을 가로막는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싸구려 복음’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방송에서, 기독교 음반에서,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찬송가를 ‘부기우기’ (템포가 빠른 재즈풍의 댄스 음악) 템포에 맞춰 부른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양하는 노래를 향락적 댄스 곡조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다. 교회의 설교단은 엔터테이너들의 쇼 무대가 되어버렸다. 초청을 받고 교회를 방문하여 이 일 저 일을 하는 소위 ‘사역팀’을 보고 있으면 마치 마네킹들의 행렬을 보는 것 같다.   당신은 이 시대의 프로 간증꾼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하여 청중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개구리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연주하기를 기대하라. 돈에 팔려 다니는 일부 만담꾼 부흥사들을 보라. 십자가를 걸러낸 저들의 처세술 강론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쉽게 죄를 짓고 쉽게 회개해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제달을 타락시켰다. 제단은 ‘싸구려 복음’을 거래하는 시장(市場)이 아니다. 제단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 곳이다.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단을 떠나야 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단에서 무릎 꿇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가운데 ‘영적 노숙자’가 봇물 터지듯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두려움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두려움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포용력 없는 독선적인 종교인’이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아, 슬프다! 이 말씀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편협한 독선으로 들리는가보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무능을 경멸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없는 이단들과 기타 다양한 종교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현상을 보고 어지 진노하시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누가 경고의 나팔을 불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프로테스탄트'는 본래 ‘저항하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에 저항한 ‘개신교 신자’를 가리킨다.)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누구에게 저항하는가?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神)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죽는 줄로 생각한다. 하나님 신앙은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세상의 향락적 풍조에는 발정난 망아지처럼 달려간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뜨겁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만큼만 뜨겁다면, 우리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십분의 일만큼만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물과 불의 세례뿐만 아니라 피(血)의 세례까지 받을 것이다.   영국 국교회는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영국의 열정적인 전도자로서 감리교의 창시자) 앞에서 문을 닫고 그를 배척했다. 심지어 로우랜드 힐 (Rowland Hill, 1744~1833. 영국의 대중설교가) 은 “존 웨슬리는 부랑자, 넝마주이, 마부, 굴뚝청소부 같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독초를 먹이고 있다.” 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사람이나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로서 18세기 신앙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도 몹시 조롱당했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았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악한 본성은 여전한데, 어찌하여 오늘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조롱당하지 않으며 돌에 맞지 않는가? 어찌하여 지금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가?  ○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유명한 목사가 부흥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부흥회에 임하면서 나는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나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실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 중에 손을 들고도 기도하지 않는 위선자가 없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부흥회 주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심야기도회가 열렸는데, 정작 이 목사가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이 한 말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목사! 이러고도 부흥을 기대하는가?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부흥이 왜 지체되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도라는 해산(解産)의 고통 없이 부흥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산의 고통 없이 기획과 홍보를 통해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야고보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약 5:17,1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절히 기도한즉”과 “다시 기도한즉”이다. 우리는 대개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사실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 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 피 흘리며 기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는 “피는커녕 땀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되면 되고 안 되면 말지”라는 태도로 기도한다. 기도하기 위해 다른 것을 눈곱만큼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 줄기차게 기도하지 못한다.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 책을 많이 쓰지만 기도의 싸움을 싸우지는 않는다. 기도에 관한 한, 오늘의 교회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씨름 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듯 기도의 씨름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는 영적 능력이든 일반적인 능력이든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는 데 관심이 많다.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느라 핏대를 세운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된 교리적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설교하거나 책을 쓰는 일에 아주 탁월하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사탄의 요새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사탄의 요새를 쳐부술 것인가? 누가 사탄에게 “노”(No)라고 말할 것인가? 좋은 음식, 재미있는 친구들, 꿀맛 같은 휴식을 거부하고 ‘기도’라는 고투(苦鬪)에 몰두할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귀신들을 제압하고,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며, 지옥에 떨어질 자들을 구해내고, 수많은 영혼들을 어린양의 보혈의 강(江)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마지막으로,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44).   설교단에서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지 마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지마라. ‘나의’ 교회, ‘나의’ 교인, ‘나의’ 건물, ‘나의’ 책, ‘나의’ 방송프로그램의 높여서 영광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라. 지금 많은 교회의 설교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설교단에서 사회자가 강사를 소개할 때 그의 학벌이 어떻다느니, 그가 무슨 조직의 대표라느니, 심지어 그가 구각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는 말까지 한다. 이런 거창한 소개는 결국 그 강사의 육신적인 부분을 자랑하는 것이다. 사회자의 번지르르한 소개가 끝나고 등장하는 강사도 그런 소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설교 한다. 그러나 그가 설교를 끝마쳤을 때 청중은 그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에 비해 그의 설교가 너무 빈약하다고 느낀다. 만일 사회자의 거창한 소개가 없었다면 청중은 그 강사라 그토록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거창한 소개의 뒤를 잇는 빈약한 설교!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맥 빠지게 하는지 아는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목회자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는 것이다. 교인들이 말씀으로 각성되어 있다면 목회자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이 인기나 학벌을 선호하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기호에 아부느라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풍조를 목회자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한다.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는 더럽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여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라는 무서운 말씀을 실행에 옮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오, 하나님! 썩어 문드러진 우리를 치료하소서. 완전히 잘못 된 생활방식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가 깨어지는 복을 주소서. 우리가 먼저 심판대 앞에 서게 하소서.”
2009-05-08 14:08:38 | 관리자
기도(Prayer):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혼의 소원과 감정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이것은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대화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혼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욥21:15; 시10:4).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셨다. 율법의 시작 이후로 유대인들은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경배를 멈추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헌물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기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제사장들은 개개인을 위하여 희생물과 향과 헌물과 첫 열매를 드렸으며 처음 난 자를 구속하여 오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의식을 수행하였고 한 마디로 각처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엄숙한 날 뿐만 아니라 일반 날에도 몰려와서 자기들의 서원을 실행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었다(대상23:30; 느11:17; 눅1:10). 왕상8:22와 성전 예배를 위한 다윗의 시편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고(시55:17; 단6:10) 성경의 모든 성도들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족 별로 기도하였으며 일반 업무를 하면서도 짧게 기도하였다(느2:4). 기도의 자세는 특별하게 규정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왕상8:22) 머리를 숙이거나(창24:26) 무릎을 꿇거나(눅22:41)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였다(마26:39).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열렬히,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또한 기도에는 죄의 고백과 감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가 포함된다. 우리는 바른 이성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마음으로 무신론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므로(겔36:37; 마7:7-11; 빌4:6; 딤전2:1-3; 약1:5)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을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의 뛰어난 섭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포함하며 또한 우리가 받을 응답도 포함한다. 또 어떤 이들은 기도해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므로 소용이 없고 주시려고 한 것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주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기도에 그분께서 후하게 응답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그런 복을 받을 수 없다. “네가 부르짖는 소리에 그분께서 네게 크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 소리를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9). 다윗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시34:6).거짓 종교 추종자들이나 이교도들은 헛된 반복이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은 기도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위선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위하여 반복해서 헛된 말로 기도하였다. 이에 우리 주님은 마6:5-15에서 이런 자들을 책망하면서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오해하고 기도 후에나 혹은 모임을 마칠 때에 마치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이것은 실로 주님이 기도하신 ‘주기도문’이 아니고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형식으로 기도하라고 본을 보여 주신 기도의 예이다. 따라서 그 의미를 모르고 헛되이 그 기도문 자체를 반복해서 외우는 것은 이교도들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반복 참조.엡6:18; 살전5:17; 딤전2:8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모든 곳에서 언제든지 손을 하늘로 들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쳤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라고 말하였다(고전10:31). 한 마디로 우리 주님은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신다(눅18:1; 21:36). 끝으로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잠28:9).
2009-05-08 14:07:37 | 관리자
사랑침례교회 창립, 문제는 없는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사랑침례교회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오신 여러 성도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며 함께 사랑침례교회 창립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 오늘 처음 이 사랑침례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은 ‘송내역’이라는 랜드마크를 통해 이곳에 오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제가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왜 송내역 근처에 교회가 또 세워져야 하나?”입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무려 50여 개의 교회가 이미 송내역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교회를 이곳에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2005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서울지하철 1호선 역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2위인 곳이 송내역입니다. 하루 20만 명 이상이 유입되는 곳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 그리고 종교별 인구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1.4% 감소하여 861만6천 명으로 나타난 반면, 천주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이 왕래하는 길목인 송내역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가 또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교파가 아니라 침례교회, 그것도 ‘독침’이란 약어로 회자되는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제가 지난 2월 1일 이 사랑침례교회 주일오전 예배 때 설교하면서 종교다원주의의 아이콘이 된 오바마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였습니다만, 이제는 기독교인이라 해도 성경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곧 절대진리로 믿지 않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점차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어제가 석가탄신일이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석탄일을 맞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절에 가서 108배를 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부처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는 기독교회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자 그대로 최종권위로 믿는 독립침례교회가 창립되는 것은 매우 환영받아야 할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매우 진부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까? 특히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거룩한(?) 성경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자칫 세상과의 타협을 암암리에 묵인하는 누룩과 같은 위험한 개념이 아닌가요? 물론 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611회 나오고 ‘사랑’은 488회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사랑보다는 거룩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교회 안에서 거룩함과 사랑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거룩함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마22:34-40; 롬13:8-1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금석이 사랑이기도 합니다(요13:35; 요일3:14).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소요될 수 있습니다(고전13:4-7; 벧후1:3-6). 제 좁은 소견으로는 ‘독침’의 약점이 상대적으로 사랑과 구제의 부족이지 않을까 하는데, 이처럼 과감하게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그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모쪼록 이 사랑침례교회를 통해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올바로 서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를 이뤄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벧전4:8). 감사합니다.
2009-05-08 14:06:5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