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 사람들에 관한 법이라 하는 모세의 세 번째 책: 레위기
The Third Book of Moses Called LEVITICUS
기록자: 모세, 기록 시기: 주전 1450년경, 성격: 율법, 수신자: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
이름: 유대인들은 이 책을 ‘주께서 부르셨다’(The LORD called)라고 불렀다. Leviticus는 레위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책명 ‘레위티콘’에서 나와 영어로 정착된 이름으로 ‘레위 사람들에 관한 책’을 뜻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주로 레위의 제사장 체계, 제사장들의 섬김, 희생 율법 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는 것
목적: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가르쳐 주고 구원받은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 주는 것(엡1:7; 히10:19-22)
내용: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관계는 사복음서와 서신서의 관계와 비슷하다. 출애굽기는 구속의 기록으로서 구속받은 백성이 정결하게 되어 자기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경배 드리는 것에 대한 기초를 놓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기에서 출애굽기의 기초 위에 이 일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쌓는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산에서 말씀하시지만 레위기에서는 자신이 친히 거하며 자신의 백성들이 접근할 수 있는 성막에서 말씀하신다. 레위기의 내용은 전적으로 율법적이며 이 안에는 시민법, 의식법, 윤리법, 종교법, 정결례 등에 관한 법규가 들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이 되는 것은 종교법과 의식법이다. 레위기에서 발견되는 여러 종류의 희생과 명절과 의식과 예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이다. 이런 면에서 히브리서는 성령님이 영감을 주신 레위기 주석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두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예표와 실체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레위기를 통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영적인 복을 기대할 수 있다. 레위기는 27장, 859절, 24,546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6장(속죄일), 핵심 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나 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19:2), 핵심 단어: 거룩함(152회), 핵심 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거룩할지니라.”(11:44)
레위기의 그리스도: 위대한 대제사장(히4:14), 영적 교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라.”
2009-05-07 14:28:53 | 관리자
질문 :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과 같은 24시간의 날들에 일어났습니까?
대답 :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일을 마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일을 떠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날'(day)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를 뜻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24시간의 하루이며 두 번째는 어떤 기간입니다. 후자의 경우 '노아의 날' 같은 표현은 '노아의 생애'를 뜻하며 실제적인 24시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days)이 실제적인 24시간의 날들이 아니라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기간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몇 날을 지정하는 경우는 언제든지 24시간의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신론적 진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은행에서 10,000달러를 빌린 뒤 엿새 후에 100달러 이자와 함께 원금을 갚겠다고 약속한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때 은행은 분명히 엿새 뒤에 10,100달러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자는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나는 실제적인 엿새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여섯 기간을 즉 60억 년을 말한 것이며 그때에 10,100달러를 갚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은행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보통 우리가 날이라 하면 24시간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날'을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보면 분명하게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날'은 항상 24시간의 날입니다. 겔4:6을 보면 24시간이 아닌 날의 예가 있습니다. 겔4:5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더러 390일 동안 왼쪽으로 누움으로써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거든 다시 네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사십 일 동안 유다의 집의 불법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각 날을 일 년으로 정하였느니라."(겔4:6)
이 경우 하루는 1년을 의미했고 에스겔은 430년이 아니라 430일 동안 누웠습니다.
성경은 지구가 약 6,000년 전에 생성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것이 정확한 지구의 나이입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28:04 | 관리자
질문 :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답변 :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르렀을 때에 그가 이르되, 너희가 어떻게 오늘은 이같이 빨리 돌아왔느냐? 하니"(출2:18)
"이제 모세가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지키더라. 그가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출3:1)
"이제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에서 겐 족속 헤벨이 자신을 분리하여 겐 족속을 떠나 게데스 옆의 사아나임 평야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삿4:11)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세 가지나 됩니다. 르우엘은 출2:18에 단 한 번 나오며 이드로는 총 열 번 나오고 호밥은 민10:29와 삿4:11에 두 번 나옵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를 뜻하며 모세가 그를 만났을 때 이 이름이 나옵니다(출2:18). 그 때에 그는 이미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드로는 뛰어난 사역자를 뜻하므로 이것은 이름이라기 보다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 탈출 당시 그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했으며 호밥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애칭이었던 것 같습니다. 민10:29에서 우리는 또한 호밥의 아버지의 이름이 라구엘임을 알 수 있습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27:10 | 관리자
질문 : 모세가 율법을 기록했습니까?
대답 : "또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한 자들도 이들이니 이들은 그 모세와 아론이라. 주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그 날에"(출6:27-28)
만일 모세가 출애굽기를 기록했다면 왜 이 구절에서 모세는 자기에 대해 제 3자의 관점에서 이야기할까요?
성경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시며 삼위일체의 세 분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예를 들어 시편 2편) 출6:27-28 역시 영감을 받은 사람이 기록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종종 자신에 대해 제3자의 입장에서 말씀하였음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요3:16에서 그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책이며 그분께서 이 책의 저자시라면 (딤후3:16)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의 경우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뒷부분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이 변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신명기 24장은 모세의 죽음 이후에 기록되었는데 그렇다면 누가 그 부분을 기록했을까요? 아마도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기 전에(신24:1) 앞날을 예언하며 그 부분을 기록했을 수도 있으며 여호수아가 수24:26에 기록된 것처럼 그 부분을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서 주의 성소 옆에 있던 상수리나무 밑에 세우며"(수24:26).
이 구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대화 부분 특별히 모세의 죽음 이후의 부분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경에 여감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심지어 모세를 써서 그가 죽기 전에 이 부분을 기록하게 할 수 있습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25:42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6절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개역성경이나 한글 킹제임스 성경처럼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혹은 수천 대까지) 긍휼을 베푸느니라”로 번역해야 하지 않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지금의 번역이 원문, 영문, 문맥에 맞는 번역입니다.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And shewing mercy unto thousands of them that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천 대’ 혹은 ‘수 천 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5절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5절 후반부).…visiting the iniquity of the fathers upon the children unto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 of them that hate me;즉 5절에 하나님의 징계가 삼사 대까지 간다고 했으니 6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도 수천 대까지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며 원문에도, 영어에도 6절에 ‘세대’라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수천 세대는 맞지 않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영원토록 벌하는 것이 아니라 삼사 대까지만 벌하여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6절에서처럼 아버지의 은덕으로 수천 세대까지 긍휼을 받는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조상 덕으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인데 성경은 이런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6,000년 정도이며 처음에는 사람이 근 1,000년까지 살았음을 고려할 때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세대 수는 약 200세대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수천 세대라면 앞으로도 몇 만 년이 더 지나야 할 터인데 과연 조상의 은덕이 몇 만 년까지 간단 말입니까? 이런 것은 결코 성경에 있지도 않으며 사람들이 상상해서 ‘세대’를 집어넣은 것에 불과합니다.참고로 영어에서는 ‘수천의 사람들’(thousands of them)이 많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도 럭크맨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럭크맨이 주석서에서 이 구절에 ‘세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럭크맨이든 누구든 성경에 없는 것을 넣으면 성경을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저희는 고의로 성경을 변개시키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그대로 두고 이해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여기서 다 이해가 안 되면 천국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의 철학입니다. 혹시 성경을 읽으시다가 실수나 오탈자 등을 발견하시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의문 사항도 좋습니다. 성경에 맞으면 나중에 쇄를 바꿀 때에 교정하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희가 알면서도 고의로 성경을 변개시켜 특정 교리를 세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009-05-07 14:25:11 | 관리자
탈출이라 하는 모세의 두 번째 책: 출애굽기
The Second Book of Moses Called EXODUS
기록자: 모세, 기록 시기: 주전 1450년경, 성격: 율법, 기간: 약 216년(어셔)
수신자: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집트 탈출과 시내 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선민으로 공식 출범한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성도(롬15:4; 고전10:11)
이름: Exodus는 출애굽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책명 ‘엑소더스’에서 나와 영어로 정착된 이름으로 ‘탈출’을 뜻한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을 보여 주며 영적으로는 사람이 죄의 왕국에서 탈출하는 것을 보여 준다.
주제: 이스라엘의 속박과 해방 및 하나님께 대한 관계(6:6-8; 19:4-8; 24:1-7; 25:8)
목적: 사람의 구속의 당위성과 방법 및 결과 등을 온 인류에게 보여 주는 것(엡2:1-10)
내용: 출애굽기는 창세기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요셉과 모세 사이의 시기는 1장 6-7절로 간략히 기술되고 곧바로 이스라엘 자손의 절박한 상황을 기술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한때 파라오와 요셉의 총애를 받던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속박의 집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나타나 히브리인들을 지배하려 하지만 권능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민을 구속하기 위해 활동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를 예비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권능에 의한 이집트 탈출의 구속의 사건을 일으키신다. 이집트로부터의 구속은 단순히 노예 상태에서 해방 되는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예비하신 백성으로 삼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 외에도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의 고난, 하나님의 긍휼과 그것을 통한 해방, 광야에서의 성막 예배 규례 등이 중요한 진리로 자리 잡고 있다. 출애굽기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신자가 마귀의 왕국인 영적 이집트를 떠나 세상이라는 광야를 통과하며 승리의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과 더불어 이 여정 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을 본다. 출애굽기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직무 그리고 은혜 등을 가리키는 예표가 많이 있다. 출애굽기는 40장, 1,213절, 32,692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2장(유월절), 핵심 절: “주께서 두루 지나가시며 이집트 사람들을 치실 때에 문의 인방과 양 옆 기둥의 피를 보시면 주께서 그 문을 넘어가시고 파멸시키는 자가 너희 집에 들어가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시리라.”(12:23)
핵심 단어: 구속(대속). 출애굽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면 반드시 구속이 필요함을 보여 줌과 동시에 구속받은 자녀들도 계속해서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핵심 구: “너희를 넘어가리라.”(12:13)
출애굽기의 그리스도: 1. 하나님(3:14, 요8:58 참조), 2.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12:5, 고전5:7 참조), 3. 만나(16:14-22, 요6:35 참조), 4. 반석(17:1-7, 고전10:4 참조), 영적 교훈: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서 나오라.”
2009-05-07 14:24:34 | 관리자
이 글은 도서출판 건생에서 발간된 단행본 ‘생로병사, 그 신비를 벗긴다.’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인간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노아의 홍수가 나기 전까지 평균 9백세 가량을 영위하고 죽었다.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the book of the generations of Adam)(창 5:1)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녕 하나님의 심판으로 죄의 삯을 치르고 모두 죽어갔는데, 그들은 무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잠깐 동안 살다 죽은 것이나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장수를 누리며 살았었다.
즉, 아담에서부터 노아 때까지의 인간의 수명을 살펴보면, 아담 9백30살(창5:5), 셋 9백12살(창5:8), 에노스 9백5살(창5:11), 게난 9백10살(창5:14), 므두셀라 9백69살(창5:27), 노아 9백50살(창9:29)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아 이후로는 인간의 수명이 단계적으로 계속 줄어들어, 셈 6백세, 셀라 4백33세, 벨렉 2백39세, 아브라함 1백75세, 야곱 1백47세, 모세 1백20세,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 정도로 평균 수명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각종 문명과 의학의 혜택을 입고 있는 현대인들이 불과 1세기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데 비해 므두셀라와 같은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10세기 정도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홍수 이전에 비해 인간이 성적으로 조숙하게 되었다는 설, 식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특히 비타민 C의 섭취량 차이 등도 주요한 원인들로 알려지고 있지만 본 글에서는 홍수 자체와 관련된 환경적 요인에 국한시켜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들은 수명이 줄어들기 시작한 노아의 시대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노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타락한 인간들의 생활 형편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기까지 그래서 반신반인(半神半人, giants, demigods)이 나타날 정도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게 되었고,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창6: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시사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과 땅위의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물로 쓸어버리셨다.
므두셀라(Mutheselah, ‘심판’이라는 뜻)가 죽었던 바로 그 해에 일어난 노아의 홍수는 중동지방에 국한된 국지적 홍수가 아니라 온 세상을 뒤엎었던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홍수였다. 즉 하늘은 사십주야 동안 계속해서 비를 억수같이 쏟아 부었다(창7:12,17). 그리고 최초의 사십주야 동안과 같이 꾸준히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지는 않았을지라도 150일 동안 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내렸고 땅에서는 샘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현재의 기상조건 하에서는 이 같은 일이 불가능하다. 그와 같이 엄청난 비를 쏟아놓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은 창세기 1장 7절에 기록되어 있는 ‘궁창 위의 물’(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firmament) 인데 바로 이 궁창 위의 물로 인해 홍수 이전의 인간들은 10세기 가까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궁창 위의 물을 대기권의 한계를 넘는 에테르적인 물 또는 유리바다나 생명의 강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단순히 구름이라고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지만 여러 과학자들은 노아의 홍수 전에 궁창 위에 물층(water canopy)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히브리어를 살펴 볼 때 하늘이란 단어는 ‘샤마임’으로서 ‘샴’(저 곳)과 ‘마임’(물)의 합성어인데 히브리인들은 하늘 위에 물층이 있었으므로 하늘을 ‘저 윗물’이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궁창 위의 물은 중력을 이기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미립자 상태로 지구 전체에 걸쳐서 궁창 위에 떠 있었다.
즉 첫째 하늘 위에 있었던 이 수분층은 지구로 침투하는 수많은 우주광선을 걸러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창조하신 우리 육체 속에 재창조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이 수분층에 의해 우주광선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을 당시에는 생명력 곧 육체적 능력과 힘이 감퇴되지 않은 채 거의 천 년을 지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세포를 파괴하고 노쇠현상을 촉진시키는 고주파 방사선과 같은 우주광선이 이 수분층에 의해 완전히 차단된 상태이므로 아무런 변이현상(mutation)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스파라가스의 화석이 무려 15 미터가 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는데 이로써 아주 이상적인 환경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이 수분층의 보호 덕분에, 즉 이 수분층이 우주광선 중 따뜻한 열선을 받아들인 후 외계로 방사되는 것을 막아 온실효과를 일으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화석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당시 지구 전 지역이 하와이 같은 환경 또는 섭씨 27도 정도의 아열대 기후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 남극대륙의 지하 60 미터에서 많은 석탄이 발견되는 것과 시베리아 지방에서도 열대식물들과 함께 맘모스가 얼음 속에 묻혀 보존되어 있는 증거들로써 당시에는 극지방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생존에 적합한 환경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남북극의 광활한 얼음지대뿐 아니라 폭풍우 같은 급격한 공기의 움직임도 홍수 이전에는 없었을 것이며 단지 온화한 바람의 순환만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상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뜨거워진 공기로 인해 생긴 진공부분에 찬 공기가 갑자기 몰아치는 현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광선에 의한 분자구조의 파괴가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의 노화나 식물의 시들어 버림도 거의 없었을 것이며 아울러 홍수 후에 산맥들이 높이 솟아올라 대륙들의 지세가 더욱 험난하게 된 것과는 반대로 대륙 전체가 얕은 구릉으로 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지구 곳곳이 하나의 아름다운 온실과 같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은 궁창 위의 물로 인해 지금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상적인 환경 가운데 살면서 므두셀라(Methuselah)처럼 평균 9백여 세를 영위할 수 있었지만 홍수라는 심판 이후 엄청나게 달라진 지구환경 하에서는 그 수명들이 계속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9-05-07 14:23:42 | 관리자
질문: 벽을 파내려 갔습니까,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습니까?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은밀한 일에 가담하지 말지며, 내 존귀야, 너는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도다”(창49:6)
많은 사람들이 킹제임스 성경의 “벽을 파내려 갔다”(digged down a wall)가 틀리고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가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개역성경 창49:6)
포인트(점)가 없는 자음 형태의 히브리말은 위의 두 가지를 다 의미하며 포인트가 있는 자음형태의 히브리말은 후자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성경기록을 살펴보면 이 구절의 그들 곧 시므온과 레위가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창34:28-29를 보면 그들은 히위 족속의 소들을 취하여 보관하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들과 그 도시 안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어린것들과 아내들을 포로로 사로잡고 심지어 집안에 있는 것을 다 노략하매”
또한 창34:27을 보면 그들이 성벽을 두른 도시를 노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을 하려면 벽을 파서 무너뜨려야만 했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은 포인트가 없었습니다. 포인트를 넣는 작업은 주후 6-7세기에 마소라들에 의해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마소라들이 넣은 포인트가 영감 받은 것으로 보지 않으며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의 역본들 역시 킹제임스 성경처럼 “그들이 성벽을 파내려 간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드라이나(de Reina, 1569), 드발레라(de Valera, 1602), 디오다티(Diodati, 1576-1649).
이런 성경들은 킹제임스 성경 이전에 혹은 같은 시대에 완성된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고 특별히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 중 하나인 마일스 스미쓰 같은 사람은 다섯 살에 포인트가 없는 히브리말을 읽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옳음을 알 수 있습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21:54 | 관리자
질문 : 이집트로 내려간 혼은 모두 몇입니까?
대답 : "야곱의 허리에서 나와 그와 함께 이집트에 이른 모든 혼 즉 야곱의 며느리들 외의 모든 혼은 예순여섯이더라.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태어난 아들들은 두 혼이니 야곱의 집의 모든 혼 곧 이집트에 이른 혼이 일흔 혼이었더라."(창46:26-27)
"이미 요셉이 이집트에 있었으므로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혼(魂)이 모두 일흔 혼이더라."(출1:5)
"이집트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칠십 명이었으나 이제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하늘의 별들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10:22)
"그때에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의 모든 친족 일흔다섯 혼(魂)을 부르니" (행7:14)
이 네 구절을 보면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집 혼들의 수가 70 같기도 하고 75 같기도 합니다. 창세기 46장에 있는 야곱의 후손들의 총계는 70명으로 출1:5와 신10:22에 있는 숫자와 동일합니다. 여기에는 레아의 둘째 딸과 아셀의 딸인 세라(창46:17)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레아의 첫째 딸인 디나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둘째 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창46:8-15를 살펴보면 레아가 낳은 아들딸들이 나오는데 이들을 다 더하면 서른 세 명(15절)이 아니라 서른 두 명이 됩니다. 이 차이는 성경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해결됩니다. 여기 있는 명단을 보면 디나라는 이름의 딸이 한 명 나오는데 15절에는 분명히 "딸들"(daughters)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영어 성경 참조).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아들들이라. 그의 딸 디나를 합하여 그의 아들딸의 모든 혼이 서른셋이더라."(창46:15)
"These be the sons of Leah, which she bare unto Jacob in Padanaram, with his daughter Dinah : all the souls of his sons and his daughters were thirty and three."
그러므로 야곱과 레아 사이에는 성경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딸이 또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가 자기 씨를 다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 딸은 아마도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기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5절의 서른 세 명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70명이 되고 75명이 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창46:26은 또한 예순 여섯 혼이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그의 아들 둘이 이미 이집트에 있었으므로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총 69명이 됩니다. 그런데 27절은 야곱 또한 총수에 포함시키고 있으므로 결국 이집트로 내려간 혼은 일흔 혼입니다.
위에서 밝힌 대로 분명히 딸들 중 하나 즉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레아의 둘째 딸은 어려서 죽었으며 그래서 이집트로 내려가지 못하고 가나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일흔 다섯 혼이라 기록된 행7:14 말씀은 창46:26에서 생략된 야곱의 며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와 그와 함께 이집트에 이른 모든 혼 즉 야곱의 며느리들 외의 모든 혼은 예순여섯이더라."
그러므로 이들의 수를 포함시키면 70명과 75명의 차이는 간단히 해결됩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16:13 | 관리자
질문 : 왜 함 대신에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대답 :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던 자기의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들의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창 9:22-24)
노아가 취한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은 그의 아들 함인데 왜 그가 저주를 받지 않고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신 사람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창9:1). 분명히 노아는 가나안이 함이 지은 죄와 비슷한 죄를 지은 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가나안이 함과 함께 그 범죄에 가담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가나안의 후예인 가나안 족속이 아주 사악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가 합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13:30 | 관리자
질문: 베냐민은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밧단아람입니까, 베들레헴 근방입니까? 대답: 창세기 35장 16절을 보면 라헬은 분명히 베들레헴 근처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26절은 베냐민이 밧단아람에서 태어났다고 말할까요? 모순이 아닙니까? 그들이 벧엘에서 이동하다가 에브랏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라헬이 진통을 겪는데 산고가 매우 심하더니 그녀가 심한 산고를 겪을 때에 산파가 그녀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그대가 이 아들도 갖게 되리라, 하니라.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냐민이라 하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었고(창35:16-19).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다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태어난(born to him) 자들이더라(창35:23-26).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이야말로 풀기 어려운 난제라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태어난’으로 번역된 ‘born’이라는 단어는 18세기 중반까지 상당히 넓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bear’로 가서 43번째 용례를 보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 이후에 아주 특별한 의미로 즉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창21:7을 보시면 ‘born’이 넓은 의미로 쓰인 용례가 있으며 여기서는 분명히 임신한 전체 기간을 가리킵니다.또 이르되, 사라가 아이들에게 젖을 주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내가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창21:7).And she said, Who would have said unto Abraham, that Sarah should have given children suck? for I have born him a son in his old age.우리말로는 현재완료와 과거가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영어로는 분명히 현재완료로 즉 ‘have born’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곧 임신한 전체 기간을 가리킵니다. 참으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오묘합니다.또한 원래의 1611년 판에는 ‘born’이 아니고 ‘borne’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아기를 배어 지니고 다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경우 베냐민은 밧단아람에서 수태되었으며(born) ‘born’의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그가 거기서 수태되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밧단아람을 떠나서 얼마 후 베들레헴 근처에 이르러 그를 낳고 죽었습니다. 즉 라헬은 밧단아람에서 그를 뱃속에 지니고 다녔습니다.그러므로 수태된 때부터 생명이 태어난 것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성경의 용례가 이를 지지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bear’의 의미를 잘 생각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굳건히 앞으로 나갑시다.
2009-05-07 14:12:37 | 관리자
질문 : 아브라함의 약속의 땅
답변 :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창13:15).
"그분께서는 그 땅 안에서 그에게 발 디딜 만큼의 상속 재산도 결코 주지 아니하셨으나 그럼에도 그가 아이가 없던 때에 그와 그의 뒤를 이을 씨에게 그 땅을 소유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며"(행7:5).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묘지 외에 어떤 것도 받거나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땅에 거했지만 그가 묘지 외에 다른 곳을 구입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약속이 그의 생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 20장에 기록된 천년왕국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렘30:9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주 곧 그들의 하나님과 내가 그들을 위해 일으킬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여기 보면 다윗이 부활해서 천년왕국 시대에 다시 왕으로 통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이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20:4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11:42 | 관리자
질문 : 하나님도 피곤해 하십니까?
답변 :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을 떠나 안식(安息)하셨기 때문이더라."(창2:3)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니라, 하라."(출31:17)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존하시는 하나님, 주 곧 땅 끝들을 창조하신 이는 기진(氣盡)하지 아니하시고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찾을 길이 없도다."(사40:28)
이 문제를 풀려면 아주 주의 깊게 이 구절들을 읽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피곤해하지 않으시며 위의 구절들 역시 그분께서 피곤해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해 하시는 경우는 우리의 죄들을 보고 참아야 하는 경우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사 43:24; 말2:17). 이런 경우 그분께서 지쳤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이때는 일을 많이 해서 지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들이 그분의 본성과 너무나 반대가 되기 때문에 지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로 지치실 수는 있어도 일이 많아 피곤해 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안식'(rest)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정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기 때문에 쉬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막2:27에 나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셨으며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나니"(막2:27)
그분께서는 자신을 위해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상쾌하게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는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리며 자신의 영광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롬 9:21-23). 아버지, 아들, 성령님 이 세분은 이 모든 것을 아셨으며 따라서 그런 것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들과 긍휼의 그릇들을 창조하셨고 자신의 본성과는 정반대가 되는 죄를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지치신 것입니다.
끝으로 출31:17의 경우 히브리서 3,4장에 따라 안식을 얻지 못한 이스라엘은 1,000년 왕국에서(벧후 3:8) 1,000년 동안 일곱째 날의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10:49 | 관리자
질문 :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대답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靈)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창6:2-4)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7)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롬8:14,19)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요1:12). 그런데 이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manifest, 롬8:19).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년왕국과 그 후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시간 현재 드러나 있으며 욥38:7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영적 존재인 천사들임을 보여 줍니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한 자이므로 하나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눅3:38).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창2:7). 유6에서 우리는 이런 천사들 중 일부가 자기들의 처음 위치(신분)를 떠났음을 보게 되는데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천사가 어떻게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반대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은 낳을 수 없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반대 주장을 펴는 이들은 마22:30을 인용합니다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참조 막12:25, 눅20:33).
이 구절들은 천사들이 아이들을 낳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하늘에서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자들이 자기들의 처음 위치(신분)를 떠났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런 반역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라 불릴 수 없으며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천사라 불릴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대로 믿으면 모든 천사는 남성이며 날개 같은 것도 없고 아기 천사 같은 것은 신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에스겔서 1장의 날개 달린 피조물은 그룹으로 천사가 아니며 이사야서 6장의 날개 달린 피조물은 스랍으로 역시 천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천상의 존재들입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10:00 | 관리자
질문 : 아담은 언제 죽었습니까?
답변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아담의 전 생애는 구백삼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창5:5)
여기의 문제는 너무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아담은 그 날 죽지 않고 930년 동안이나 살았습니다. 이런 모순은 우리가 창2:17의 죽음을 육체적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창5:5는 아담의 육체적 죽음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창2:17에서 "범법과 죄들"로 인한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엡2:1,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또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 하시니라."(마8:22)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다 살아있는 사람들인데 성경은 이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다 죽은 자들이며 이들은 아담으로부터 이런 죽음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이들이 영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이유로 성경은 두 번 태어나는 것(자연적 출생과 영적 출생, 요한 복음 3장)과 두 번 죽는 것(계 2:11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분리되었다'는 의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 죽음은 사람의 영이 죽어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그분과 교제할 수 없는 것을 뜻하며 육체적 죽음은 사람의 몸이 영 및 혼과 분리된 것을 뜻합니다(창35:18). (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09:19 | 관리자
질문 : 아브라함의 나이는?
답변 :
먼저 4개 구절을 샆벼고겠습니다.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창11:26).
"데라의 생애는 이백오 년이며 데라가 하란에서 죽으니라"(창11:32).
"이처럼 아브람이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나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12:4).
"이에 그가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서 나와 하란에 거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에서 지금 너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
이 네 구절을 비교해 보면 금방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에 데라가 70세였고 그가 205세까지 살았으며, 만일 아브라함이 데라가 죽기 전까지 하란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가 하란을 떠났을 때의 나이는 창12:4에 기록된 대로 75세가 아니라 135세였을 것입니다(205-70=135).
이 문제는 창11:26에 있는 데라의 아들들이 나이 많은 자로부터 나이 어린 자의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라는 가정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보면 꼭 그렇게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꽤 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이었으나 그가 항상 먼저 나오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경우 맏아들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인물이 먼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노아의 아들들을 보도록 합시다.
"노아는 오백 세가 되어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32).
창9:24를 보면 함이 막내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5:32에서 그는 두 번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11:10에서 우리는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에 셈의 나이가 98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600세 때에 홍수가 일어났으므로(창7:6) 셈이 태어났을 때에 노아의 나이는 502세였습니다. 사실 야벳이 노아의 맏아들이며 그는 노아가 500세였을 때 태어났습니다(창5:32). 창10:21은 분명하게 야벳이 셈의 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요, 그 형(연장자) 야벳의 동생이라. 그에게도 자손이 태어났으니"(창10:21)
그러므로 우리는 창5:32에서 노아의 아들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12:4와 행7:4를 조화시키면 우리는 데라는 70세에 하란을 낳았고 60년이 니자 130세였을 때에 아브라함을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셈처럼 둘째 아들입니다.
2009-05-07 14:07:29 | 관리자
질문 : 무지개는 항상 보입니까?
답변 :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창9:14)
위 구절은 모든 구름 속에 무지개가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우리는 땅에 살면서 그것을 보지 못할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까?
실제로 모든 구름 속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본 사람들은 비행기 그림자가 구름에 드리워질 때 그 그림자 주변에 원형으로 무지개가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정원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면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빛이 뒤에 있을 때에 모든 구름 속에는 항상 무지개가 있습니다. 달이 없는 밤에도 세심하게 살펴보면 별에서 모든 빛이 마치 태양 빛 속에서 나타나는 무지개 같은 현상을 나타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을 덮고 있는 구름들은 다 무지개를 보여 주며 따라서 성경은 이 점에서도 진리입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06:56 | 관리자
질문: 작은 숲(grove)을 심는 것은 가증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작은 숲을 심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큰 실수를 한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시지 않았습니까?대답: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신16:21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제단을 쌓고 우상 숭배를 하면서 그 주변에 작은 숲을 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작은 숲을 심고 거기서 주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며(창21:33).너는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 가까이에 어떤 나무로든 작은 숲을 심지 말며(신16:21).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를 위한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작은 숲을 심었습니다. 성경은 작은 숲을 심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숲에게 경배를 드리거나 작은 숲 안에 제단을 세우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금합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작은 숲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작은 숲과 관련해서 한 자기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작은 숲’(grove)을 번역하지 않고 ‘에셀’(eshel, 창21:33) 혹은 ‘아세라’(asherah)로 음역 처리했습니다. 분명히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간단한 단어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를 왜 굳이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하지 않고 음역한 것일까요? 물론 뛰어난 원어 실력을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명백한 이유 중 하나는 한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가 ‘groves’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세라’를 대할 때마다 이 단어를 이방 여신으로 보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것은 1884년에 나온 영국의 개역성경(RV)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고대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수많은 신들의 이름이 알려져 왔지만 ‘아세라’라는 이름의 여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히슬롭은 「두 개의 바빌론」을 통해서 수많은 신들과 그들의 이름들을 기록을 했지만 ‘아세라’라는 여신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1800년대 이전에는 ‘아세라’가 여신의 이름이라고 알려진 적이 없었으며 공식적인 문서상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된 ‘grove’의 정의를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A small wood; a group of trees affording shade or forming avenues or walks, occurring naturally or planted for a special purpose. 작은 나무; 자연적으로 생성되거나 특별 목적으로 심겨져서 그늘을 제공하거나 가로수 길이나 산책로로 형성된 숲.Groves were commonly planted by heathen peoples in honour of deities to serve as places of worship or for the reception of images.‘groves’는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혹은 우상들을 접대하고자 경배의 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대부분 이교도들에 의해 심겨졌다.그래서 카톨릭 성당들이 많은 관목을 심어놓고 또 거기에다 우상들을 두고 있습니다. 작은 숲은 신들을 섬기는 장소로 여겨집니다. ‘groves’는 ‘아세라’라는 여신이 아니라 관목 등과 같은 작은 나무들을 아름답게 배치함으로 만들어지는 정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grove’ 혹은 ‘groves’는 항상 ‘(나무를) 심다’라는 의미를 가진 ‘plant’라는 동사와 함께 쓰입니다(창21:33, 신16:21). 또한 이 단어는 항상 ‘우상들’하고는 별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왕상14:23, 왕하17:10,16; 18:4; 23:14; 대하14:3; 24:18; 31:1; 사17:8; 27:9).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groves’ 안에 ‘우상’이 세워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왕상15:13, 대하15:16). 그러므로 ‘groves’는 우상 숭배를 위해 심겨진 ‘작은 숲’을 뜻하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은 여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자칭 최종 권위를 자랑하는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또 다시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늘 문제가 생깁니다.
2009-05-07 14:02:43 | 관리자
질문: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 간극 이론(갭 이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그리스도인이 지구를 포함한 온 우주의 생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 탐구하는 일은 참으로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대를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성경 사건들의 연대를 담고 있는 주석 성경들도 창세기의 첫 부분에서는 대개 연대를 빼고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사건부터 연대를 넣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유대/기독교계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에 근거하여 지구를 포함한 온 우주의 생성 연대가 6,000년쯤 된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까지는 불신자들조차도 흙덩어리에서 생명체가 나와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18세기 후반 들어 인본주의/이성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의 진화론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특별 창조 등은 큰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들의 조롱하는 자들은 만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계속된다는 균일론(동일과정설)을 주장하며(벧후3:3) 우주의 생성 연대를 약 6,000년에서 수십억 년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가공할 만한 진화론의 위력 앞에 기독교는 무기력하게 대항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 사람의 타락, 사람의 구속(救贖), 마귀의 진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 등과 같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간의 시작이 언제인가에 대한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보통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뜨겁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또한 우주 생성에 대하여 진화론자들의 ‘몇 십억 년 주장’과 성경의 ‘몇 천 년 주장’을 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론은 소위 ‘간극 이론’(Gap theory) 혹은 ‘창조-파멸-재창조 이론’으로 불리는 가설입니다.
이 이론은 19세기 말부터 거의 한 세기 동안 많은 보수 크리스천들이 창조론을 지지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 이론은 그 당시까지 우주의 생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보여 주는 과학적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 헨리 모리스 박사 등을 중심으로 한 창조 과학자들이 우주의 생성 연대가 수천 년밖에 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면서부터 이것은 크리스천 서클에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지금은 소수의 구세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근본주의 성경 신자들이 더 이상 ‘간극 이론’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간극 이론’을 마치 확고한 성경 교리로 가르치면서 이 이론을 믿지 않으면 성경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극단적 포교 활동을 해왔습니다. 또한 그들이 세운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창세기 1장 28의 ‘replenish’라는 단어를 ‘다시 채우다’로 번역하여 많은 혼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또한 장로 교단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정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무식한 언행을 일삼고 극단적으로 ‘간극 이론’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마치 ‘간극 이론’이 없으면 성경 해석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온 힘을 다해 이 교리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극 이론’은 영어, 교리, 과학적 데이터 등에서 수많은 허점을 갖고 있는 가정에 지나지 않으며 21세기에는 도저히 그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가설입니다.
역자 역시 1985년경에 미국에서 라킨(Clarence Larkin)의 「세대에 따른 진리」(Dispensational Truths)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며」(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s, 후자는 「성경 바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역자가 번역하여 도서출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출간했음.)라는 책을 접하고 어찌나 즐겁게 그 책들을 읽고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라킨이 ‘간극 이론’으로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창조-파멸-재창조’ 과정을 묘사하고 성경의 마귀들이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려고 하는 이유가 루시퍼 홍수 때에 지구가 파멸되면서 그들이 몸을 잃은 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때 참으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라킨을 사랑하며 ‘간극 이론’을 빼고는 그의 책만큼 성경을 잘 다룬 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럭크맨 역시 라킨에게 큰 영향을 받아서 ‘간극 이론’의 신봉자가 되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럭크맨은 천재이며 다재다능하고 성경에 박식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요소들 -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믿음과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 - 과 또 자유주의자들과 자기 맘에 안 맞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은 - 그의 책의 삼분의 일 정도는 남을 욕하는 것임 - 저도 매우 싫어하지만 그분의 성경 공부 주석이나 다른 책에는 남이 전해 주지 않는 훌륭한 요소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저는 ‘간극 이론’을 확산시킨 매개체 역할을 한 스코필드 성경도 주석 성경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코필드와 라킨과 럭크맨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여러 문헌을 보았고 영어 사전의 변천 과정을 보게 되었으며 특히 ‘간극 이론’의 폐해가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수용하기로 결심하고 그전까지 유보 상태로 지켜보던 ‘간극 이론’을 내버렸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럭크맨 세대 - 약 70세 이상 된 세대 - 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간극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미국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하므로 바른 지식이 매우 보편화되어 있으며 그래서 틀린 것은 곧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말씀보존학회의 지대한 공헌으로 말미암아 이미 미국에서 다 사라져 버린 ‘간극 이론’의 끝물을 맛보고 있는 셈입니다.
저희가 출간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판매되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구절이 바로 창세기 1장 28절이었습니다. 왜 거기 나오는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하지 않고 ‘채우다’(충만하라)로 번역했는지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하시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 동안 한영대역 성경을 내느라 여유가 없어서 답변을 못했으며 이제는 여러 질문에 대해 합당하게 답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간극 이론’과 ‘replenish’ 등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간극 이론’의 역사와 변천 과정, 신학적 폐해 등에 대해서는 저의 절친한 친구 제이 볼란(Jay Bolan)이 함께 신학을 공부하면서 변증학 과목의 ‘term paper’로 제출한 논문이 아주 좋은 자료가 되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많은 참고문헌과 함께 이 이론의 폐해 등을 잘 묘사하고 있으므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논문을 번역하면 좋겠지만 아주 쉬운 영어로 쓰여 있으므로 ‘간극 이론’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영어 본문 자체를 홈페이지에 올렸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글에서 ‘간극 이론’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 몇 가지만을 설명하겠습니다.
1. 영어 ‘replenish’에 대하여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좋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보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민중서관, 동아 출판사 등에서 나온 영한사전을 뒤적여 그 뜻을 찾고 그 구절을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도 대개 큰 문제는 없지만 성경의 중요 단어들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가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중서관의 「에센스 사전」이나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있는 영한사전에 가서 ‘replenish’의 뜻을 찾으면 첫 번째 뜻이 ‘채우다’이고 두 번째 뜻이 ‘다시 채우다’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다닐 때 ‘re’는 ‘다시’라고 배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뜻을 무시하고 두 번째 뜻이 맞겠거니 하며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하지 않고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사람들과 말씀보존학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저희가 출간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창세기 1장 28절을 대하면 거기에 ‘다시’라는 말이 없으므로 역자들이 큰 실수를 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다시’를 넣은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참으로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20세기 영어 사전을 가지고 17세기 영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loaf’하면 우리는 ‘덩어리’하고 생각하지만 17세기의 용례는 ‘loaf’가 그냥 빵입니다. 또한 ‘wheat’은 ‘밀가루’ 혹은 ‘밀’이라고 생각하지만 17세기에는 이 단어의 일차적 용례가 ‘알곡’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 12절의 경우 ‘자신의 알곡(his wheat)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로 해야 맞으며 ‘자신의 밀은 모아…’로 하면 오역이 됩니다. 필자 역시 예전에 이런 실수를 많이 범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독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7세기 영어 단어의 용례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영어 사전 중 가장 방대하고 단어의 어근과 기원을 자세히 보여 주며 시대별로 영어 단어의 변천을 잘 보여 주는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을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전은 어떤 특정한 신학/사상에 물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뜻을 적어 놓았으므로 가장 객관적으로 영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의 근원과 변천 과정, 시대별 용례를 파악하지 않고 20세기 영어 사전으로 17세기 초에 기록된 킹제임스 성경을 볼 경우 특별한 구절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큽니다.
그러면 「옥스퍼드 사전」은 ‘replenish’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옥스퍼드 사전의 ‘replenish’ 용례 I. 상태나 조건을 나타내는 용례 : In pa. pple., denoting a condition or state.
1. 물건이나 짐승이 충만히 차 있다 : Fully or abundantly stocked with things or animals(용례가 1340년부터 나옴)
2. 가득 차 있다 : Filled, fully imbued, pervaded or possessed, with some quality or condition. Obs.(용례가 1374년부터 나옴)
3. 물질적으로 사물, 사람 등이 가득 차 있다 : Physically or materially filled with some thing or things, people, etc.(용례가 1490년부터 나옴)
4. 충만한 : Full, made full, of something. Obs.(용례가 1400년부터 나옴)
II. 보통 타동사로 쓰이는 용례 : In ordinary transitive uses.
5. 가득 채우다 : To make full of, to fill, to stock or store abundantly with, persons or animals. = fill v. 5.(용례가 1386년부터 나옴)
6. 차지하다 : To occupy (a place) as inhabitants or settlers, to inhabit; to people. Obs.(용례가 1400년부터 나옴)
7. 음식 등으로 채우다 : To fill with food; to satisfy, satiate. Also transf. and fig. Obs.(용례가 1450년부터 나옴)
8. 무엇인가로 채우다 : To fill (a place or space) with something. = fill v. 1. Obs.(용례가 1477년부터 나옴)
9. 다시 채우다 : To fill up again; to restore to the former amount or condition.(용례가 1612년부터 나옴)
요약 : 「옥스퍼드 사전」은 두 가지 용례로 ‘replenish’를 설명하면서 각 용례에 대해 처음으로 문헌에 이 단어가 나타난 연도를 보여 줍니다. 어느 사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뜻이 그 단어의 근본 어의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분명하게 ‘replenish’의 근본 어의가 ‘채우다’임을 보여 주며 그 뜻을 가진 많은 용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용례는 많아서 생략했고 처음 나오는 연도만 발췌했음). 맨 마지막 뜻으로 ‘다시 채우다’가 있지만 이것이 나타나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1611년 이후이고 그 용례도 극히 적습니다.
그러면 「옥스퍼드 사전」만 그런가, 아니면 18-19세기의 다른 사전도 그런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차적 참고자료인 「옥스퍼드 사전」 다음으로 참고할 가치가 있는 사전은 미국 영어 사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웹스터 사전」입니다. 웹스터는 매우 독실한 신자였으며 그가 1828년에 출간한 영어사전 초판은 미국 영어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이후로 200년 동안 영어가 정착되면서 과연 웹스터 시대의 사람들은 ‘replenish’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웹스터 사전」 초판(1828년 출간)은 특히 단어의 뜻을 설명하면서 그 뜻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 구절을 주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참으로 매우 유용합니다.
1828년 웹스터 사전 초판의 ‘replenish’ 용례 A. 타동사 : REPLENISH, v.t. [L. re and plenus, full.]
1. 채우다 : To fill; to stock with numbers or abundance. The magazines are replenished with corn. The springs are replenished with water.
용례 : 창세기 1장 28절 :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Gen. 1.
2. 끝내다 (더 이상 사용 안 함): To finish; to complete. [Not in use.]
B. 자동사 REPLENISH, v.i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다). To recover former fullness.
요약 : 「웹스터 사전」(초판)은 ‘replenish’가 창세기 1장 28절에 있는 것처럼 타동사로 쓰일 때 그 뜻이 ‘채우다’임을 분명히 보여 주며 더욱이 ‘채우다’는 뜻을 가진 이 단어의 용례를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장 28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동사로는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있지만 창세기 1장 28절은 타동사이므로 그 뜻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한 단어에 대한 사전의 정의가 항상 변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기존에 쓰던 것과 다른 의미로 한 단어를 많이 쓰기 시작하면 사전은 당연히 그 세대 사람들이 그 단어로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려고 새로운 뜻을 사전에 담기 시작합니다. ‘replenish’ 역시 이런 변천 과정을 겪었습니다. 다음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replenish’의 뜻을 보여 주자 ‘간극 이론’을 추종하는 한 분이 ‘1913년도에 나온 웹스터 사전’을 제게 보여 주면서 거기의 첫 번째 뜻이 ‘다시 채우다’(1. To fill again after having been diminished or emptied; to stock anew; hence, to fill completely; to cause to abound.)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아주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1828년에 나온 「웹스터 사전」 초판과 「옥스퍼드 사전」의 용례를 보여 주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1913년도 경에는 ‘replenish’라는 단어가 ‘다시 채우다’의 뜻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진화론과 맞서기 위해 창세기 1장 28절의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해석하기 시작했고 사회가 그와 같은 의미를 수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채우다’와 ‘다시 채우다’가 둘 다 쓰이고 있으며 우리의 영한사전들 역시 ‘채우다’를 먼저 놓고 그 뒤에 ‘다시 채우다’의 의미를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어 사전을 통해 얻은 결론은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1611년경에는 ‘replenish’가 ‘다시 채우다’로는 쓰이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채우다’로만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 사전의 용례만 이것을 뒷받침할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그 안에 ‘내장 사전’(a built-in dictionar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맥에서 쓰인 단어들을 조사하여 비교해 보면 한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게일 리플링거가 지은 「킹제임스 성경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KJB)라는 책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 22절과 28절을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날짐승은 땅에서 번성하라, 하시니라(창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창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이 두 구절은 같은 문맥에서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or replenish)…”라는 동일한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22절은 ‘fill’이니까 창조이고 28절은 ‘replenish’이니까 재창조라고 말할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똑 같은 문맥이며 심지어 히브리어도 두 구절이 동일합니다. 이 같은 성경의 ‘내장 사전’을 통해서도 우리는 28절의 ‘replenish’가 22절의 ‘fill’과 같음을 성경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만이 주는 ‘내장 사전’(Built-in dictionary)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replenish’라는 단어는 영어 사전의 용례로 보나 성경 ‘내장 사전 기능’에 의한 용례로 보나 그 뜻이 ‘채우다’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히 채우라’는 뜻이며 뒷부분을 개역성경처럼 ‘땅에 충만하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땅에서 번성하고 또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뒤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역시 창세기 9장 1절에서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셔서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 영어 ‘become’의 용례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 2절의 첫 부분 즉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에 나오는 ‘was’가 상태를 나타내는 ‘was’가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became’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가 아니라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게 되었다”로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창세기 1장 2절이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한 파멸을 나타내며 이때에 땅이 저주를 받아 형태가 없고 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최종 권위인 킹제임스 성경이 ‘was’라 말하지 ‘became’이라 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원어로 돌아가야 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래서 ‘was’에 상응하는 원어가 ‘became’으로 번역된 창세기 19장 26절을 들고 나와 창세기 1장 2절이 사실은 상태를 나타내는 ‘was’가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became’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이처럼 고무줄처럼 늘이고 싶은 대로 늘일 수 있는 그런 것일까요?
‘간극 이론’이 성립되려면 창세기 1장 2절이 주어와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동사 술어로 구성된 ‘동사구’(verbal clause)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 구절은 주어와 명사 술어로 구성된 ‘명사구’(noun clause)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런 ‘명사구’는 상태를 나타내지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명사구’는 어떤 용례로 쓰일까요?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런 ‘명사구’의 용례가 매우 많이 나오므로 그런 용례들을 찾아보면 창세기 1장 2절의 ‘명사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런 형태의 ‘명사구’는 어떤 행동이 잠시 멈추어진 것을 의미하며 보통 ‘이접적 구절’(disjunctive clause)이라 불립니다.
먼저 ‘이접적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창세기 1장의 용례를 통해 살펴보고 그 뒤 성경의 다른 용례들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2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3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세기 1장 1-3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절에서 하늘과 땅(지구)을 창조하셨으며 3절에 들어가면서 다른 일을 하시기 전에 2절에서 땅(지구)의 상태가 어떤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이접적 구절’은 성경에 매우 많습니다.
예 1: 창2:11-14
11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라. 그것은 곧 금이 있는 하윌라의 온 땅을 두른 강인데 12 그 땅의 금은 좋으며 거기에는 델리움과 줄마노가 있느니라.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그것은 곧 이디오피아 온 땅을 두르는 강이며.
11 The name of the first is Pis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여기서는 둘째 강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하윌라 땅의 금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이런 ‘이접적 구절’ 다음에 곧바로 둘째, 셋째. 넷째 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첫째 날, 둘째 날,…여섯째 날의 일을 설명하기에 앞서 단순히 1장 2절에서 지구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 2: 삼상4:14-16
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소동하는 소리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더니 그 사람이 속히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라. 15 이제 엘리는 구십팔 세더니 그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이르되, 나는 군대에서 나온 자니이다. 내가 오늘 군대에서 도망하였나이다, 하니
14 And when Eli heard the noise of the crying, he said, What meaneth the noise of this tumult? And the man came in hastily, and told Eli. 15 Now Eli was ninety and eight years old; and his eyes were dim, that he could not see. 16 And the man said unto Eli,
여기서도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기에 앞서 엘리의 상태가 어떤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예 3: 욘3:3-4
3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4 비로소 요나가 그 도시로 들어가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
So Jonah arose, and went unto Nineveh,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Now Nineveh was an exceeding great city of three days' journey. And Jonah began to enter into the city a day's journey.
여기서도 요나가 다음 행동을 하기에 앞서 니느웨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접적 구절’이 나옵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 2절의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와 요나서 3장 3절의 “Nineveh was an exceeding great city”를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들은 바로 전 구절에 나오는 것들 -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는 땅, 요나서에는 니느웨 - 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요나서 3장 3절의 ‘was’를 취하여 ‘became’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니느웨는…큰 도시가 되었더라.”로 되며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창세기 1장 2절을 상태로 받아들여야지 - ‘was’를 그대로 ‘was’로 - 존재하지도 않은 시간의 간극을 도입하기 위해 시간의 변화로 - ‘was’를 ‘became’으로 -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3. 영어 ‘without form and void’의 용례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without form and void)가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지구가 파멸되어 형태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이접적 구절’을 이해하면 이런 주장을 쉽게 일축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without form and void)는 아직 땅(지구)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땅(지구)에 식물, 동물, 물고기, 새, 사람 등을 채워 넣지 않았으므로 땅(지구)이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지구가 아직 육지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고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곧장 이사야서 34장 11절과 예레미야 4장 23절 등으로 달려가서 반론을 펴려고 하지만 이 두 구절은 문맥상으로 보아 분명하게 주의 날의 심판을 가리키며 그들이 원하는 것 즉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한 창세기 1장의 가상적 파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파멸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4. 간극 이론은 성경의 교리와 배치된다.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장 2절과 3절 사이에 수십억 년이 넘는 시간이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성경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시간의 간극을 도입하여 성경이 소위 과학이라 불리는 헛된 것에 맞도록 타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들은 많은 화석들이 창세기 1장 2절의 루시퍼 홍수 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곧 창세기 1장 2절 이전에 이미 식물과 동물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김기동 목사를 추종하는 베뢰아 파는 이때의 사람들은 영이 없는 존재들로 바로 이들이 네안데르탈인 등의 원시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베뢰아 파 중 많은 이들이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고 옹호합니다. 왜냐하면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그들이 주장하는 이중 아담론의 근거를 멋있게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창조의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은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해 생성된 화석 더미 위를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식물과 동물이 창세기 1장 2절 이후에 창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화석이 형성되려면 반드시 생물체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절은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이 세상에 사망이 임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전에는 결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석이 생성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 이전에 다른 종족(Pre-Adamic race)이 살았다고 말하며 이들이 루시퍼 홍수 때 다 죽어 마귀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로마서 5장 12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모든 인류의 조상은 첫 사람 아담이며 그가 죄를 지음으로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행17:26). 그런데 ‘간극 이론’은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교리를 조장하므로 매우 위험합니다.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의 책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유대인도 재창조 같은 것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책 등을 보아도 인류의 기원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 있는 대로 지금부터 6,000년 전으로 정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고대 유대인 역사’(Antiquities of the Jews)를 보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9장 6절에서부터 38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유대인들을 구원해 주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창조 같은 것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지적하려 합니다. 한국의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창세기 1장 12절에 있는 ‘was’라는 단어를 인용해서 재창조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2).
And the earth brought forth grass, and herb yielding seed after his kind, and the tree yield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hi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이들의 주장은 씨가 이미 ‘그 속에’(in itself) 있었으니 재창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문맥에서 벗어난 억지 주장입니다. 여기의 ‘in itself’는 ‘열매 속에’를 뜻하지 ‘땅 속에’를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 ‘was’가 쓰인 것은 시제를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즉 맨 앞에 ‘brought forth’가 과거로 되어 있으므로 시제를 맞춘 것이며 특히 여기의 ‘was’는 이탤릭체로 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바로 앞 구절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grass,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yielding fruit after hi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똑 같은 구절인데 여기는 시제를 맞추기 위해 ‘is’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의 ‘is’ 역시 이탤릭체입니다. 이것은 곧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말이 통하도록 ‘was’나 ‘is’를 첨가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가지고 ‘간극 이론’을 지지하려고 하면 물이 새나갑니다. 결코 물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한편 출애굽기 20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간극 이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 구절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를 가리킴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는 같은 저자인 모세가 기록한 것이며 이 두 책의 하루는 모세가 살던 시대의 하루 즉 지금의 24 시간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결코 창세기 1장 2절과 3절 사이에 엄청난 심연의 기간이 있었고 죽음이 이미 존재해서 화석이 형성되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우리 주 예수님 역시 분명하게 창조를 지지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혼하는 문제로 그분을 시험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분명하게 창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강퍅하므로 그가 너희에게 이 훈계를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7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8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예수님은 6절에서 분명하게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이것은 창1:27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간극 이론에 따르면 창1:27은 ‘재창조 이후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들 - 아담과 이브 - 를 창조한 때가 바로 ‘창조의 시작’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신학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도 거역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성경을 신뢰하면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재창조’라는 말이 나옵니까?
이 모든 것은 19세기말 진화론의 거센 물결에 대항하기 위해 좋은 의도로 근본주의 신자들이 성경을 재해석함으로써 생긴 큰 오류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결코 스코필드나 라킨이나 럭크맨 혹은 반하우스 같은 구시대 ‘간극 이론’ 지지자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국내에서 말씀보존학회를 구성한 극단주의자들의 획일적 해석으로 시퍼렇게 멍든 킹제임스 성경의 입지를 다시 세우고 성경이 잘못돼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김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스코필드나 라킨 같은 분들을 말씀보존학회 사람들 같이 쌍욕이나 하는 추잡한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들은 삶에서 선한 간증이 있었으며 거듭난 사람으로서 훌륭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럭크맨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쓸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만일 럭크맨이 말씀보존학회의 무식하고 비열한 언행을 알았더라면 그 역시 그들을 지독히 멸시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증거를 보여 주어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내 신학 즉 럭크맨 주의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신학에 앞서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 고쳐서 자기의 주장을 펴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곧장 잘못을 고치고 성경을 수용하는 것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면서 “성경을 100번 이상 읽은 럭크맨이 그렇게 믿는데 나는 10번도 못 읽었으니 그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직접 모신 사람입니다. ‘말씀’(The WORD)이신 분, 바로 그분을 따라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따른다면 말이 됩니까? 성경이 객관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보고 자기 의견을 거기에 맞추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구의 생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은 매우 많습니다. 본 사이트에 들어와서 ‘창조와 진화’난에서 ‘지구의 생성 연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형제/자매님에게 하나님의 인도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2009-05-07 14:01:32 | 관리자
질문 : 지팡이인가요, 침상 머리인가요?
대답 : "야곱이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니 그가 그에게 맹세하매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머리를 숙이니라"(창47:3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야곱은 경배를 드릴 때에 침상 머리에 기대었습니까, 지팡이에 기대었습니까? 많은 경우 관주들이 이 두 구절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지만 사실 이 두 구절은 서로 다른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창47:31은 야곱이 요셉에게 자기를 가나안에 묻을 것을 요구하고 그 약속을 맹세로 받았을 때의 사건을 기록합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지팡이에 기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창47장이 아니라 창4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48:1이 보여 주듯이 히11:21 사건은 창47:31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관주가 잘못된 것입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4:00:3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