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랴의 아들, 예루살렘의 총독. 느헤미야는 포로 시절에 바빌론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제사장 가문이나 유다의 왕족이라고도 한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의 잔을 드는 자였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에게 재난이 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다가 왕에게 간구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그 도시를 재건하는 일을 도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그곳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주로 도시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유다의 귀환 지도 참조(33). 그러나 예루살렘을 괴롭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적개심은 날로 증가하였고 그곳의 총독인 산발랏의 인도 하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 온갖 방해 공작을 꾸몄다. 그들은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도 공격하였고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로 하여금 손에 무기를 들고 일하게 하였다. 이 큰 일에서 그는 열정을 보였고 하나님의 도시와 백성을 향해 큰 사랑을 나타내었으며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려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신실한 친구들 특히 에스라의 도움을 크게 받았고(느8:1, 9, 13; 12:36) 여러 가지 중요한 사회 제도를 향상시켰다. 그 뒤 그는 바빌론으로 되돌아왔다가(느2:6; 5:14; 13:6) 몇 년 지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 예배, 안식일 준수,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문제 등 중요한 일을 잘 해결하였다. 그는 특히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 여인들을 버리든지 혹은 나라를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제사장 무리들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 신전을 짓고 사마리아에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추정된다. 산발랏 참조. 느헤미야기는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 자기의 일생 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에스라서의 연장이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제2 에스라서’라고 불렀다.
2009-05-04 00:29:32 | 관리자
느부갓네살 왕의 장군. 그는 예루살렘을 멸하고 노략하였다(왕하25:8-21; 렘39:9; 40:1; 52:12-30).
2009-05-04 00:29:01 | 관리자
나보폴라사르의 아들로서 주전 600년경에 그의 뒤를 이어 갈대아의 왕이 된 사람. 그는 예레미야서에서 느부갓레살로도 나온다. 그는 이집트 왕 느고로부터 갈그미스를 빼앗았으며 그 뒤 페니키아 총독과 느고에게 조공을 바친 유다의 여호야김 왕을 치고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가 후에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하에 다시 유대에 남겨 두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등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들은 대개 왕족이나 귀족이었으며 바빌론 왕은 그들에게 갈대아의 말과 학식을 가르치고 후에 그들이 궁중에서 자신을 섬기게 하였다(왕하24:1; 대하36:6; 단1:1).
나보폴라사르가 죽자 이집트 혹은 유대에 있던 느부갓네살은 급히 바빌론으로 돌아갔고 자기 장군들을 시켜 시리아와 유대와 페니키아와 이집트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갈대아로 데려오게 하였다. 그는 이 포로들을 여러 식민지에 분산시켰으며 벨루스의 신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기구들을 두었다. 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3년 동안 느부갓네살에게 충성하다가 반역을 일으켰고 그 뒤 3-4년이 지나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공중의 새의 밥이 되고 말았다(렘22:1-30).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야긴 혹은 여고니야 역시 느부갓네살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서 주요 관리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이때에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예루살렘의 주요 기술자들도 함께 끌려갔고 모르드개와 대언자 에스겔도 끌려갔다(에2:6).
느부갓네살은 솔로몬이 성전과 궁전을 위해 만든 금 그릇들을 가져가고 여고니야의 삼촌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고 시드기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시드기야는 9년 동안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그 근처의 통치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이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대로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쌌으나 이집트의 파라오호브라가 시드기야를 도우려고 나오자 그를 대면하여 그의 나라로 쫓아버렸다. 이 일을 끝낸 뒤 느부갓네살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으며 마침내 시드기야의 제11년에 그곳을 함락시켰다. 시드기야 왕은 그때에 시리아의 리블라에 있던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가서 정죄를 받았고 왕은 그의 눈앞에서 그의 자녀들을 죽이고 그의 눈을 뺀 뒤 사슬로 묶어서 그를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왕하24:1-20; 25:1-30; 대하36:1-23).
느부갓네살의 통치 때에 바빌론 도시와 바빌로니아 왕국은 영예의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는 힘을 다해 바빌론을 치장하였고 그래서 이것은 그의 자랑의 하나가 되었다.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곳이 아니냐?”(단4:30)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물리치셨고 그래서 그는 한때 다니엘의 예언에 따라 짐승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단4). 다섯 가지 세상 왕국 선도 참조(76).
2009-05-04 00:28:38 | 관리자
I. 벧엘과 아이 근처의 마을(스2:29; 느7:33).
II. 르우벤의 도시(민32:38).
이곳은 모압 족속이 점령하여 예레미야의 시대에 지배하였다(사15:2; 렘48:1).
III. 모압의 산.
여기서 모세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고 여기서 죽었다. 이곳은 아바림 산지의 정상으로 여리고 맞은편에 있었다(신32:49; 34:1-12). 팔레스타인의 산들.
IV.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우상(사46:1).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별 신화에서 느보는 수성을 나타내며 고대 아라비아 사람들도 이 신을 숭배하였다. 갈대아와 아시리아 사람들이 흔하게 이 신에게 경배했다는 것은 이 이름이 복합어로 여러 인물의 이름에 사용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느부갓네살, 느부사라단, 느부사스반(렘39:9, 13) 등을 보기 바란다.
2009-05-04 00:27:56 | 관리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의 아버지(왕상11:26; 12:2; 왕하3:3).
그는 사악한 아들로 인해 ‘느밧의 아들 여로보람’이라는 호칭으로 수치의 대상이 되었다.
2009-05-04 00:27:14 | 관리자
이스마엘의 아들(창25:13). 그의 후손은 아라비아의 초장을 차지하였으며(사60:7) 후에 에돔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세속 역사에서 나바티안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이두매아 참조.
2009-05-04 00:26:46 | 관리자
이 용어는 가장 먼저 레위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으나(민8:19) 가나안에 정착한 뒤에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섬기기 위하여 헌신한 종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가장 힘든 일 즉 나무와 물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처음에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 일을 하였고(수9:27) 후에는 스스로 항복한 가나안 사람들과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하였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처음에 다윗과 다른 통치자들에게 배정되었으나 그들은 이들을 성전에서의 봉사 일에 배정하였다(왕상9:20-21; 스2:58, 70; 8:20; 느11:3). 그들은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했을 것이다(느10:28). 이 느디님 사람들은 유다 지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그 중 많은 이들이 카스피 해 부근에서 살다가 에스라의 인도로 220명이 유다로 돌아왔다(스8:20).
2009-05-04 00:26:17 | 관리자
베들레헴 근처의 마을(삼하23:28-29; 왕하25:23; 스2:22; 느7:26).
2009-05-04 00:25:48 | 관리자
이것은 시편 5편의 타이틀에만 나오는 말이며 피리 등의 악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편은 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악장에게 주어졌다.
2009-05-04 00:25:26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의 현악기를 일컫는 말(합3:19).
특히 몇몇 시편(시4:1-8; 6:1-10; 54:1-7; 55:1-23; 76:1-12)은 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악장에게 주어졌다.
2009-05-04 00:25:01 | 관리자
라오디게아의 그리스도인. 바울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와 그에게 문안하였다(골4:15).
2009-05-04 00:24:29 | 관리자
이것은 마주 대하여 보고 있는 앞을 뜻하며 면전(面前)과 같은 말이다.
또한 영어 sight는 ‘in the sight of’라는 관용구로 쓰이면서 ‘누군가가 보는 데서’를 뜻하며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를 모두 ‘눈앞에서’ 등으로 통일했다.
2009-05-04 00:24:06 | 관리자
로마와 팔레스타인 등에서는 장례식에서 애곡하는 사람의 눈물을 단지에 담아 죽은 사람의 무덤에 두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시56:8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모든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 한편 계7:17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정도로 큰 사랑을 베푸신다. 애곡 참조.
2009-05-04 00:23:40 | 관리자
눈이 머는 것은 고대 동방에서 흔한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지역의 조건들이 결합하여 눈을 파괴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태양이 뜨겁고 공기 중에 미세한 먼지가 많으므로 이런 것이 눈에 들어가 눈을 멀게 만들었다. 한편 고대에는 미워하는 혹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눈을 빼는 관습이 있었고(삿16:21; 삼상11:2; 왕하25:7) 또 형벌로 눈머는 것이 일어나기도 했으며(창19:11; 행13:6-12)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눈머는 것이 언급되었다(신28:28-29). 유대인들은 모세의 인도주의적 율법에 따라 눈먼 자를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어야 했다(레19:14; 신27:18). 한편 눈먼 사람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레21:18).
우리 주님은 병으로 눈먼 자, 나면서부터 눈먼 자 등을 여러 차례 고치셨는데 이 경우 두 가지 기적이 동시에 일어났다. 먼저는 눈 자체가 회복되었고 그것을 사용하는 능력이 생겼으며 후자의 경우 눈이 회복되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가능하기도 하였다(막8:22-25). 눈먼 자의 눈을 만지거나 진흙을 바른 것이 어떤 치료 효과를 지닌 것은 아니다(마9:29; 요9:6). 그분은 분명히 기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하시며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확증해 주셨다.
한편 눈먼 것은 무지와 실수를 가리키기도 하며 특별히 영적인 것에 대한 분별이 없는 것을 가리킬 때도 있다(마15:14; 고후4:4). 하나님의 긍휼을 남용하면 이렇게 눈머는 것이 증가하므로(요12:40) 구원자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복이 있다.
2009-05-04 00:23:15 | 관리자
눈의 가장 중요한 부분.
이것은 상하기 쉬워 잘 보호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신32:10; 시17:8; 잠7:2; 슥2:8).
2009-05-04 00:22:48 | 관리자
히브리말에서 눈과 눈꺼풀은 거의 같은 말로 쓰였다(잠4:25; 6:4; 30:13).
방탕한 여인의 사람을 유혹하는 능력은 눈과 눈꺼풀에 있다(잠6:25; 사3:16). 여인들은 눈꺼풀에 화장을 하기도 하였다(왕하9:30; 렘4:30; 겔23:40).
2009-05-04 00:22:21 | 관리자
성경에는 흰 것을 지칭하기 위해 눈이 사용되었고(출4:6; 민12:10; 왕하5:27; 시51:7; 사1:18) 또 눈의 정화 작용에 대한 구절도 있다(욥9:30). 잠25:13의 ‘수확 때에 내린 차가운 눈’이라는 말은 수확하는 자들에게 찬 음료를 주기 위해 눈을 사용한 것을 뜻한다. 한편 잠26:1의 ‘여름의 눈’은 때에 맞지 않게 오는 눈을 뜻하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자가 적절치 못하게 명예를 얻는 것과 비교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고산 지대를 제외하고는 눈이 매우 조금 내리며 쌓이지 않고 곧바로 녹는다(삼하23:20). 자연의 다른 기적과 마찬가지로 눈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시147:16-17).
2009-05-04 00:21:53 | 관리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샘을 의미하기도 했다. 눈은 몸의 기관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종종 상징적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이런 경우 대개는 앞뒤 문맥을 통해 그 뜻을 알 수 있으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죄인들의 눈을 가리는 것은 지금도 동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6:10; 44:18 등은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시123:2)라는 표현은 동방의 종들이 항상 경계를 기울이며 주인과 자기 외에는 알 수 없는 손짓이나 눈짓에 의해 주인으로부터 무슨 일을 지시받도록 훈련받은 것을 이해하면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세 가지 본질 선도 참조(61).
여러 성경 구절은 눈이 사람의 혼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마음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관대한 눈’, ‘악한 눈’(잠22:9; 23:6), ‘교만한 눈’, ‘음탕한 눈’(잠6:17; 사3:16)이 이런 식의 표현이다. ‘안목의 정욕’ 즉 눈의 정욕(요일2:16)은 이 세상에서 화사하게 보이는 헛된 것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자기 아버지를 조롱하는 눈’(잠30:17)은 육식성 조류들이 살아 있는 새의 눈을 쪼아 먹는 습관에서 나온 표현이다. ‘단일한 눈’(마6:22)은 모든 것을 바로 보며 일편단심 마음이 변하지 않는 눈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이세벨처럼 눈썹에 화장을 해서 크게, 사치스럽게 보이게 한 것도 기록되어 있다(왕하9:30).
2009-05-04 00:21:28 | 관리자
성경에서 자매는 보통 누이라 표현되었으며 이 말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난 여자 형제나 같은 아버지에게서 혹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여자 형제를 뜻하였고(창12:13) 또 같은 가족에게 속한 여인이나(창24:60; 욥42:11) 같은 나라 출신의 여인을 뜻하였다(민25:18).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자 동역자(롬16:1) 혹은 여자 그리스도인을 뜻하였다(요이13).
2009-05-04 00:20:56 | 관리자
반죽을 부풀리기 위한 이스트 혹은 효모.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에 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무교절의 이레 동안 모든 곳에서 누룩을 제거했다. 이집트 탈출 때에 그들의 조상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반죽을 발효시키지 못한 채 급하게 빠져나와 누룩 없는 빵을 구웠고(출12:15, 19) 그래서 이 기간에 누룩을 철저히 제거하였다(고전5:6). 하나님은 성전에서 누룩이나 꿀을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레2:11). 누룩은 성경에서 대부분의 경우 무엇인가를 부패하게 하는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마13:33; 16:6-12; 고전5:6-8). 유월절, 주의 만찬 참조.
2009-05-04 00:20: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