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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2절 “그를 받아들이라" 삭제   빌레몬서 11–12절은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직접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장면으로, 이 편지 전체의 정서적 절정이자 핵심적 요청이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그중 12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바울이 단순히 오네시모를 돌려보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러므로 너는 그를 받아들이라(receive him)”라는 명확한 명령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받아들이라”라는 직접적 표현을 생략하고 있어, 본문의 핵심 요청이 흐려지며, 바울의 사도적 권고가 약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빌레몬서 12절(KJV): “Whom I have sent again: thou therefore receive him, that is, mine own bowels.” 흠정역: “내가 그를 다시 보내었노니 그러므로 너는 그를 받아들이라. 그는 곧 내 속 중심이니라.” 여기서 receive him – 그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명확한 실천 행동을 요청하는 본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 단순한 서신 전달이 아니라, 관계 회복, 용서, 받아들임을 요구하는 복음의 적용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NIV: “I am sending him—who is my very heart—back to you.” 여기서는 “그를 받아들이라(receive him)”라는 핵심 문장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습니다. → 그 결과, 바울의 사도적 명령이 흐려지고, 본문의 핵심 적용인 용서와 환대의 요청이 사라지는 구조가 됩니다. 2. 사본 증거 KJV와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및 비잔틴 사본)에는 헬라어 “σὺ δὲ αὐτὸν προσλαβοῦ” – “그러므로 너는 그를 받아들이라(you therefore receive him)”가 명확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일부 소수 사본들은 이 표현을 생략하거나 축약하였고, NIV, ESV, 개역성경 등 현대 역본은 이 생략된 형태를 반영하여 번역했습니다. 3. 신학적, 해석적 손상 사도 바울의 권면이 명령에서 진술로 약화됨 → KJV: “그러므로 너는 그를 받아들이라.” – 행동을 촉구하는 강한 권면 → 현대 역본: “그를 돌려보낸다” – 단순 진술로 전환 4. 용서와 환대라는 복음의 적용이 흐려짐 →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복음의 핵심 원리를 실천적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현대 역본은 이 실천적 적용을 생략함으로써 복음의 요구를 약화시킴. 5. 본문의 감정적 호소력이 줄어듬 → “그는 곧 내 속 중심이니라”라는 표현은 남았지만, 그를 받아들이라는 행동 지시가 없으므로 정서적 호소의 방향과 목적이 불명확해짐. 6. 결론 빌레몬서 12절은 단순한 회신 문장이 아니라, 오네시모를 복음의 관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실천적 명령이 담긴 핵심 구절입니다. “그를 받아들이라(receive him)”라는 말은, 용서, 환대, 복음의 적용, 실천적 신앙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의 정확한 흐름에 따라 이 명령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의 의도, 복음의 요청, 관계 회복의 핵심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의 생략을 따름으로써, 본문의 신학적 핵심과 실천적 요청을 약화시켰습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입니다.
2025-05-24 17:28:44 | 관리자
디모데후서 1장 11절 "이방인들의" 삭제   디모데후서 1장 11절은 사도 바울의 사역 정체성과 소명을 요약적으로 보여 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그는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는 선포자(preacher)나 사도(apostle)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특별히 이방인들(gentiles)을 위한 교사(teacher of the Gentiles)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과 서신서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바울의 독특한 사역 영역,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라는 점을 명백히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2 Timothy 1:11(KJV): “Whereunto I am appointed a preacher, and an apostle, and a teacher of the Gentiles.” 디모데후서 1:11(흠정역): “이 복음을 위해 내가 선포자와 사도와 이방인들의 교사로 정하여졌느니라.” 여기서 “of the Gentiles(이방인들의)”라는 표현은 단순히 교사라는 직무에 더해 그 사역의 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는 바울이 사도행전 9:15에서 주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니라.” (행 9:15, KJV)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NIV: “And of this gospel I was appointed a herald and an apostle and a teacher.” 여기서는 “of the Gentiles(이방인들의)”라는 표현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 단순히 교사로 불렸다는 진술만 남고, 그 교사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명확해집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2. 해석상 손상되는 점 바울 사역의 대상이 흐려짐 → 신약 성경 전체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위한 사도인 베드로와 달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구별됩니다(갈 2:7–8 참조). → “이방인들의 교사”라는 표현이 삭제되면, 이 결정적인 사역의 정체성이 가려집니다. 3. 사역의 독특성과 사명 의식 약화 →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교사로서의 사명을 매우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방인들의 사도인 만큼 내 직무를 존귀하게 여기나니” (롬 11:13, KJV) → 그런데 이 정체성을 생략하면, 바울 사역의 초점이 흐려지고 사도 바울이 어떤 일을 감당했는지 독자에게 혼동을 줄 수 있습니다. 4. 복음 확장의 방향성과 구속사 흐름 왜곡 →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구속사의 전환점이 바울 사역에서 핵심인데, “이방인들의 교사” 표현이 빠지면 그 역사적, 신학적 전개가 흐려집니다. 5. 사본 증거 KJV는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및 비잔틴 다수 본문)을 기반으로 하며, 헬라어 원문 “διδάσκαλος ἐθνῶν”(didaskalos ethnōn) – 이방인들의 교사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그러나 NIV, ESV, 개역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시내사본, 바티칸사본 등)에 따라 “ἐθνῶν”(of the Gentiles)를 생략하거나 축소한 본문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을 흐리게 하는 방향으로 편집된 것입니다. 6. 결론 디모데후서 1장 11절은 사도 바울의 사역 정체성과 소명을 분명히 드러내는 구절로, 그는 단순한 교사나 사도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교사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표현인 “이방인들의 교사”를 정확히 보존하여 복음의 세계 확장, 바울 사역의 독특성, 구속사의 흐름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방인들의’라는 핵심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신학적 명확성, 역사적 중요성, 사역적 특수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임을 강하게 입증하는 예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롬 1:16).
2025-05-24 17:25:22 | 관리자
디모데전서 4장 12절 "영" 삭제   디모데전서 4장 12절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어진 목회적 권면으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여섯 가지 영역을 열거합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여섯 항목 중 다섯 번째 항목으로 “영(Spirit)”을 포함하고 있는데,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영”(Spirit)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이 삭제는 단순한 단어의 누락이 아니라, 신자 삶의 중심인 ‘성령의 역사와 태도’라는 중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심각한 변개이며, 사본적, 신학적 관점에서 중대한 왜곡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1 Timothy 4:12(KJV): “Let no man despise thy youth; but be thou an example of the believers, in word, in conversation, in charity, IN SPIRIT, in faith, in purity.”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 면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여기서 "영(spirit)"은 단순한 태도 이상의 의미로, 성령 충만한 마음가짐과 내적 영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 이 항목은 신자의 외적 행위뿐 아니라 내면의 성령 중심적 상태까지도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현대 역본들의 삭제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NIV: “...in speech, in conduct, in love, in faith and in purity.” 이들 번역에서는 모두 "in spirit(영)”이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 그 결과, 디모데가 보여야 할 본의 기준이 외적 영역에 국한되고, 신자의 중심 상태, 즉 영적 태도에 대한 언급이 사라집니다. 2. 사본 증거 분석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에 따라 헬라어 본문 “ἐν πνεύματι” (en pneumati) – ‘영 안에서’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 사본 계열(알렉산드리아계,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ἐν πνεύματι”(영 안에서)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현대 역본(NIV, ESV, 개역성경 등)은 이 소수 사본을 따르면서 해당 표현을 생략하였고, 이로 인해 본문의 영적 강조점이 약화되었습니다. 3. 신학적 의미 ‘영(spirit)’은 성도의 영적 태도와 내면을 의미 → 단순히 ‘믿음’이나 ‘말’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영의 상태, 성령 안에서의 동기와 자세를 말합니다. → 이는 목회자나 성도가 외면뿐 아니라 내면까지 본이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육적인 행위 중심에서 영적인 상태 중심으로 확장 → ‘말, 행실, 사랑’은 외면적이고, ‘영, 믿음, 순결’은 내면적인 요소들입니다. → 이 둘이 함께 있어야 균형 있는 신앙생활과 본이 되는 삶이 가능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생략은 교리적 손실 → ‘영’이 빠지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내적 상태의 본이 결여됩니다. 이는 목회자나 교회의 리더가 보여야 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4. 결론 디모데전서 4장 12절은 신자가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여섯 가지 영역을 열거하며, 그 중 다섯 번째 항목 “in spirit – 영 안에서”는 신자의 내면과 성령 충만한 삶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을 충실히 반영하여 이 단어를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내면의 영적 태도까지 포함하는 균형 있는 성경 해석과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영(spirit)’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내면적, 성령 중심적 본이 되는 삶의 기준을 약화시켰습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신앙은 외적인 것뿐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내면의 태도까지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2025-05-24 17:09:51 | 관리자
골로새서 2장 18절 "보지 아니한" 삭제   골로새서 2장 18절은 거짓 종교적 체험과 외형적 경건을 앞세우며 성도들을 미혹하려는 자들을 경고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거짓 겸손(humility)과 천사 숭배(worshipping of angels)를 말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자기가 보지도 않은 것들을 근거로 삼아 헛되이 우쭐대는 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 핵심 문장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합니다: 골로새서 2:18 (KJV) “Let no man beguile you of your reward in a voluntary humility and worshipping of angels, intruding into those things which he hath not seen, vainly puffed up by his fleshly mind,” 1. 한글 킹제임스 흠정역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여기서 핵심은 “he hath not seen” – ‘자기가 보지 아니한 것들’이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장은 그 거짓된 체험과 종교적 주장들이 실제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며, 이단적 체험주의, 신비주의, 천사 숭배의 허구성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2. 현대 역본(NIV, 개역, 천주교 사본)의 왜곡 개역성경: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NIV: “…such a person also goes into great detail about what they have seen…” 이 번역들은 ‘보지 아니한 것들’이라는 본래 의미와 정반대로, ‘자기가 본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실제로 본 것”에 근거해서 우쭐댄다는 뜻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 그 결과, 거짓 체험이 아니라 실제 체험에 근거한 교만으로 의미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3.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 헬라어 “ἃ μὴ ἑόρακεν” → “그가 보지 아니한 것들” 소수 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ἃ ἑόρακεν” → “그가 본 것들” 이처럼 단어 하나, “μὴ(부정어 not)”의 유무가 본문의 의미를 180도 바꾸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신학적 문제점 이단적 체험주의에 대한 경고가 사라진다 → 바울은 자기가 보지도 않은 것들을 근거로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경고했으나, 현대 역본은 이들을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는 자로 묘사하며 오히려 그 체험의 정당성을 암시하게 됩니다. 5. 성경의 교리적 일관성 훼손 → 성경은 신비주의적 체험이나 개인적 환상에 기초한 신앙을 배격합니다(신 13:1–3, 골 2:8). → 그런데 “그가 본 것에 의지한다.”라는 번역은, 그 체험이 사실임을 전제로 하여 교만만 문제 삼는 구조로 바뀝니다. 6. 문맥의 흐름이 왜곡됨 → 앞 구절(골 2:16~17)에서는 율법주의와 형식적 절기 관찰을 경고하고, 이어서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보지 못한 것들을 근거로 우쭐대는 자”라는 맥락이 명확해야 거짓 체험과 허위 종교의 본질을 폭로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7. 결론 골로새서 2:18은 신비주의, 체험주의, 천사 숭배 등 거짓 영적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 구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말하면서 헛되이 교만하게 구는 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과 다수 사본은 이 진리를 “he hath not seen(보지 아니한 것들)”이라는 결정적 문구로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이단과 체험주의의 허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라틴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부패 사본을 따라 ‘보지 않은 것들’을 ‘본 것들’로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함으로써, 이 경고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해 버렸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왜 가장 신실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지 확실히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2025-05-24 17:06:42 | 관리자
에베소서 5장 9절 "성령" 오역   에베소서 5장 9절은 성도들이 어둠이 아닌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증거를 말하면서, 무엇이 그 증거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다. 이 말씀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라고 기록하며,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맺으시는 선함, 의, 진리를 열거한다. 이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도 연결되는 성경 전체의 일관된 흐름이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빛의 열매(the fruit of the light)”라고 바꾸어 번역하며, 본문의 핵심 영적 주체인 성령(Spirit)을 제거하고, 대신 빛(light)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을 넣는다. 이는 단순한 단어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의도적 사본 변개로 인해 본문의 교리적 중심을 흐리게 하는 중대한 문제다. 킹제임스 성경(KJV) Ephesians 5:9(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1. 흠정역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느니라.)” 여기서 강조점은 분명히 “성령”이다. →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성도 안에 맺히는 도덕적 결과들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 이는 갈라디아서 5:22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라는 구절과도 직접 연결되며, 성령 중심의 성화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2. 현대 역본의 왜곡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3.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 및 다수 비잔틴 사본)에 근거하여 헬라어 “τοῦ πνεύματος” (of the Spirit) — 즉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확고히 포함하고 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서는 이 부분이 “τοῦ φωτός” (of the light) — 빛의 열매로 변경되어 있다. 현대 역본(NIV, NRSV, 개역성경 등)은 이 소수 사본의 비성경적 변경을 반영하여 “빛의 열매”로 번역했으며, 그 결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 사역이 이 본문에서 삭제되었다. 4. 신학적 문제점 이들은 모두 “빛(light)”을 주어로 삼고 있으며, 성령(Spirit)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령의 인격성과 사역이 가려진다 → “빛의 열매”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사역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성도 안에 맺히는 선한 열매가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해야 함에도, 그 영적 출처가 모호해진다. 갈라디아서 5:22와의 연결성이 단절된다 → 성령의 열매는 성도 내면에 맺히는 도덕적·영적 결과로 성화 교리의 중심 개념이다. → 이 흐름이 “빛”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으로 바뀌면, 성경 전체의 일관된 교리 구조가 약화된다. 변개 목적이 보인다 → 앞 구절(엡 5:8)에서는 성도들을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서기관들이 연속성만을 고려하여,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빛의 열매’로 임의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 이는 교리적 신중함보다 문학적 흐름에 집착한, 심각한 본문 변개의 예다. 5. 신학적 연계 갈라디아서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 열매는 빛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의 산물이다. 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이시며” — 빛은 하나님 존재의 속성이지만, 빛이 사람에게 직접 열매를 맺게 하지는 않는다. 에베소서 5:8–9의 흐름: 8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9절: “(성령의 열매)는 선함과 의와 진리…” → 성도가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구조임. 6. 결론 에베소서 5장 9절은 성도 안에 맺히는 열매의 근원이 빛이라는 추상 개념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인격적 사역자임을 선포하는 본문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본래의 성경적 교리 흐름에 충실하여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성화와 삼위일체 교리의 맥락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의 변개를 따라 “빛의 열매”로 수정함으로써, 본문의 교리적 깊이와 성령님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제거해 버렸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명백한 예이다. 빛이 아니라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2025-05-24 17:03:06 | 관리자
갈라디아서 5장 21절 살인 삭제   갈라디아서 5장 21절은 육신의 행위들을 열거하면서, 그러한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매우 중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육신의 행위 목록에 **“살인(murders)”**을 분명히 포함시키고 있다. KJV – 갈 5:21: “Envyings, murders, drunkenness, revellings, and such like…”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니라.…” 하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이 “살인”이라는 중대한 단어를 완전히 생략하고, 그 결과로 본문의 도덕적 무게와 경고의 강도를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현대역본 예시 개역성경: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envy, drunkenness, orgies, and the like… those who live like thi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이처럼 **살인(murder)**이라는 가장 명백한 죄가 이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사본 증거 분석 KJV는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를 따른다. 이 사본들은 “φθόνοι, φόνοι, μέθαι, κῶμοι…” — 즉, “시기, 살인, 술 취함, 흥청댐…”이라는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φόνοι” (폰오이): “살인들”(복수형 murders) → 다수 사본에는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음. 반면, NIV, ESV, 개역성경 등은 소수 사본 계열(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을 따르는데, 이들 일부 사본에서는 “φόνοι”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이 소수 사본의 삭제는 고의적일 가능성도 있다. “살인”이라는 죄를 지나치게 노골적이거나 반복적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 혹은 필사자의 실수로 인한 생략 등이 지적된다. 본문 해석의 중요성 살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명확한 죄 중 하나 →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도덕법의 근간이다. → 이를 육신의 행위 목록에서 삭제한다는 것은, 그 죄의 심각성을 흐리는 일이다. 경고의 강도 약화 → 바울은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한다. → 이 경고는 살인 같은 명백한 죄를 포함시켜야 더욱 무게를 갖는다. 도덕 기준의 누수 → “시기 envy”나 “술 취함 drunkenness”만 열거하면, 도덕적 판단이 흐릿해지고, “최악의 죄”인 살인조차 포함되지 않는 불균형을 만들게 된다. 결론 갈라디아서 5장 21절은 신자의 삶에서 버려야 할 육신의 행위들을 열거하고, 그러한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매우 엄중한 선언을 담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여기에 “살인”을 분명히 포함시켜, 그 경고의 무게와 영적 기준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계열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름으로써 “살인”이라는 중대한 죄를 삭제하였고, 그로 인해 본문의 신학적 강도와 경고의 분명성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이 구절 역시, 왜 킹제임스 성경이 정확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고 따를 가치가 있는지를 분명히 증언해 준다.
2025-05-24 16:57:53 | 관리자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들에게 삭제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복음이 세상에서 어떻게 가려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며, **사탄(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한다는 중대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to them)” 비치지 못한다고 명확히 대상(불신자들)을 반복하여 지칭하는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이 “그들에게”라는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명료성과 논리적 구조, 그리고 영적 진단의 대상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 (KJV) 고후 4:4 (KJV): “In whom the god of this world hath blinded the minds of them which believe not, lest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should shine unto them.”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핵심은 “unto them(그들에게)”라는 말이다. → 이 표현은 복음의 빛이 누구에게 비치지 못하는지를 명확히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 이는 곧 복음의 사역 대상과 사탄의 활동 대상이 동일함을 강조하는 구조다. 현대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여기서는 “그들에게”라는 직접적 대상이 생략되어 있다. →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복음이 누구에게 비치지 못하는지 불분명해진다 → 앞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했지만, 다시 한 번 대상을 반복해 지칭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의 빛이 막힌 대상이 누구인지 강조 효과가 줄어든다. 복음의 실패가 불분명해진다 → KJV에서는 복음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한다”고 하여 영적 전쟁의 현실과 사탄의 간계가 복음 전파를 직접 방해하는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현대역본은 이 비침의 대상이 모호하게 표현되어 메시지의 날카로움이 둔해진다. 문장 구조의 논리성이 약화된다 → KJV는 “믿지 않는 자들” →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함” → “그들에게 비치지 못함”이라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대명사 연결 구조를 갖추고 있다. 현대역본은 그 중간 고리를 생략함으로써 흐름이 불분명해진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헬라어 원문 “πρὸς τοὺς ἀπίστους” → “그들(믿지 않는 자들)에게(to them who believe not)”, 그리고 **“μὴ αὐγάσαι αὐτοῖς” →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라는 구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반면, 소수 사본 계열(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후반부 “그들에게(to them, αὐτοῖς)”라는 표현이 누락되거나 축약되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이 표현을 반영하지 않았다. 결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비치지 못하는 이유를 **영적 실명(blinding)**과 사탄의 간계로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그들에게(to them)”라는 표현은 복음의 빛이 누구에게 미치지 못하는지, 즉 복음의 전달 실패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결정적 요소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표현을 명확히 보존하고, 본문의 논리 구조, 영적 교훈, 대상의 명료성을 모두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 중요한 표현을 삭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적 경고와 복음 전도의 긴박성을 약화시킨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2025-05-24 16:54:05 | 관리자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나를 위해 2번 삭제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은 신자들의 자유와 행동의 기준에 대해 바울이 교훈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다”는 일반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그 행동이 자신에게 유익한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표현인 **“나를 위해”(for me, unto me)**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여, 이 구절이 단순히 일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적용과 바울 자신의 양심의 기준에 따른 교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이 **“나를 위해”(for me)**라는 표현을 모두 생략하고, 단지 “모든 것이 가하다”는 식의 일반화된 진술로 축소함으로써 본문의 맥락과 목적을 흐리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 (KJV) 1 Corinthians 10:23 (KJV):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are not expedient: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edify not.”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하지는 아니하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세워 주지는 아니하나니” 여기서 **“for me(나를 위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바울은 개인의 자유와 행동이 단순히 객관적으로 허용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기준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구절은 단순한 일반 규범이 아니라, 신자의 양심, 자기 절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포함한 실천적 적용이다. 현대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NIV: “I have the right to do anything,” you say — but not everything is beneficial. “I have the right to do anything” — but not everything is constructive. 여기서 “나를 위해(for me)”라는 말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표현이 일반적 진술로 축소되어, 본문의 핵심인 개인적 적용과 책임 의식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적 양심의 적용이 흐려진다 → 바울은 "나에게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내게 유익하지 않으면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현대역본은 이를 객관적 진술로 돌려버림으로써, 자유의 절제와 자기훈련의 요소를 흐린다. 책임과 자기절제의 강조가 사라진다 → “나를 위해”라는 표현이 있어야, 자기 자신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할 수 있다. 이 점은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신자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본문의 반복 구조가 깨진다 → KJV에서는 “for me”가 두 번 반복되어 구조적으로도 강조되지만, 현대역본은 이 반복을 없애고 내용을 납작하게 균등화시켜 본문의 강약 조절이 사라진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본문에 다음과 같이 “μοι πάντα ἔξεστιν” – “모든 것이 내게 적법하다(for me)”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μοι”(나를 위해, for me)라는 표현이 한 번 또는 두 번 생략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해당 표현을 모두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이처럼 소수 사본을 따른 현대역본은 본문의 개인적 적용, 신학적 강조점, 구조적 리듬감을 약화시키는 번역을 한 것이다. 결론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은 신자의 자유가 무제한이 아니라, 그 자유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성경적 절제와 책임의 원리를 담은 구절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구절에서 “나를 위해”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이 구절이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개인 적용의 모델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 핵심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본문의 윤리적 긴장감과 실천적 깊이를 손상시켰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이 정확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신자의 자유는, 성령 안에서 책임 있게 사용될 때만 유익하다.
2025-05-24 16:49:50 | 관리자
고린도전서 4장 6절 중요 부분 삭제   고린도전서 4장 6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교만을 경계하며, 사람을 높이거나 편당하는 태도를 버리라고 권면하는 핵심 구절이다. 이 본문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매우 중요한 교훈, 즉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not to think of men)"는 교리를 분명히 포함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분열을 막으려는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라틴 계열 등 현대역본들은 이 구절의 핵심 문장 —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표현을 통째로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있어, 본문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문맥의 논리 흐름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킹제임스 성경 (KJV) 1 Corinthians 4:6 (KJV): “…that ye might learn in us not to think of men above that which is written, that no one of you be puffed up for one against another.” “…너희가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을 우리 안에서 배우게 함으로 너희 중 아무도 한 사람 편을 들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며 우쭐대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기록된 것(성경 말씀) 이상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존경하거나 높이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 내의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등의 분열을 경고하는 것으로, 누가 더 나은 지도자인지에 대한 인간적 평가를 금지하는 것이다. 현대역본의 삭제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NIV: “…learn from us the meaning of the saying, ‘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이처럼 현대역본들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표현 전체를 생략하고, 단지 “기록된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축소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본문의 경고 대상이 사라진다 → KJV에서는 분명히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거나 우쭐대지 말라고 말하지만, 현대역본은 무엇에 대해 넘어가지 말라는 건지 불명확해진다. 교회 내 편당 문제의 핵심이 흐려진다 → 바울이 말하는 교만은 단순한 일반 교만이 아니라, 사람(지도자) 중심의 파당 형성에서 비롯된 교만이다. 그러나 현대역본은 이 부분을 명시하지 않아, 본문의 목적과 경고 대상이 모호해진다. 앞뒤 문맥의 연결성이 약화된다 → 바로 앞 장들(고전 1–3장)에서는 계속해서 **사람을 따라 나뉘는 문제(“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를 지적했는데, 이 흐름이 4장 6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 절에서 “사람을 생각하지 말라”는 표현이 빠지면, 앞의 문맥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사라지고, 주제 흐름이 끊긴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헬라어 “μὴ ὑπὲρ ἃ γέγραπται φρονεῖν ὑπὲρ τοῦ ἑνὸς” —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라는 표현을 충실히 번역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거나, 모호한 구조로 축소되어 있다. 이러한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한 NIV, 개역, NRSV 등 현대역본들은 본문의 교훈의 초점(사람 평가 금지)을 흐리게 만들었다. 결론 고린도전서 4장 6절은 고린도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람 중심의 분열과 교만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고치는 말씀이다. 그 핵심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넘어서서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우쭐대는 것을 금지하는 데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점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확히 전달하고 있으며, 본문의 앞뒤 흐름, 신학적 목적, 교회 내 문제에 대한 정확한 경고를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계열 등 현대역본은 소수 사본에 의존해 이 중요한 표현을 삭제하고, 본문을 단순한 일반 교훈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본문의 핵심 교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왜 하나님의 완전한 보존된 말씀인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2025-05-24 16:48:48 | 관리자
고린도전서 2장 4절 사람 삭제   고린도전서 2장 4절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 방식과 그 근거를 설명하면서, 복음 선포가 단순한 말재주나 철학적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과 실증에 기초했음을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복음 선포가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enticing words of man's wisdom)이 아니라고 분명히 진술한다. 즉, 그 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속한 지혜이며, 성령의 권능과 대조되는 인간적인 접근과 철학적 설득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이 표현에서 **‘사람의’(man's)**라는 중요한 한 단어를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이 삭제는 단어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문맥의 흐름과 신학적 메시지에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손상을 초래한다. 킹제임스 성경 (KJV) 고전 2:4 (KJV) “And my speech and my preaching was not with enticing words of man's wisdom, but in demonstration of the Spirit and of power:”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여기서 바울은 두 개의 지혜를 대조한다: – 하나는 사람의 지혜(man’s wisdom), – 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이다. 이 대조는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적 변증과 복음의 본질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즉, 복음은 사람의 이성이나 철학으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 깨달아지는 진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개역성경 및 현대역본의 번역 문제 개역성경: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NIV: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여기에서는 **‘사람의’(man's)**라는 수식어가 빠지고, 단지 ‘지혜의 말’, ‘설득력 있는 말’로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는다: 문맥의 대조 구조가 무너진다 → 바로 다음 구절(고전 2:5)에서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 여기서 “사람의 지혜 vs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명확한 대조 구도가 등장한다. → 그런데 2:4에서 “사람의”라는 말이 빠지면, 앞뒤 연결성과 대조 구조가 흐려지고, 본문의 논리가 약화된다. ‘지혜’ 자체가 나쁜 것처럼 보이게 한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도 성경에 분명히 존재한다(약 3:17). 따라서 지혜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가 문제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 그런데 단순히 “지혜의 말”이라고만 하면, 성경의 다른 지혜와 충돌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복음 전도의 본질이 약화된다 →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가 철학적 논증이나 웅변이 아니라, 성령의 실증과 권능에 기초했다고 강조한다. → 이것은 복음의 초자연적 본질을 드러내는 진술인데, “사람의 지혜”라는 표현이 빠지면 바울의 전도 방식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흐려진다. 사본 증거 KJV는 Textus Receptus(수용본문) 및 다수사본 계열에 따라 헬라어 원문 “σοφίας ἀνθρώπων λόγοις” — “사람의 지혜의 말들”을 정확히 번역했다. 반면, 소수 사본 계열(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ἀνθρώπων(사람의)”**라는 단어가 누락되었거나 다른 형태로 변경되어 있다. NIV, NRSV, 개역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이 소수 사본의 흐름을 따라 ‘사람의’라는 본질적인 수식어를 생략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교리적 명확성과 문맥의 논리성을 손상시킨 것이다. 결론 고린도전서 2장 4절은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권능에 의지했음을 분명히 밝히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사람의 지혜”라는 표현으로, 복음과 세상의 철학적 지혜를 명확히 구분하는 신학적 대조 구조의 중심 축을 이룬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의 오류를 따름으로써, 이 중요한 대조 구조를 흐리게 만들고, 본문의 신학적 핵심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말씀의 깊이와 정확성을 손상 없이 보존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실증으로 증언된다.
2025-05-24 16:22:08 | 관리자
사도행전 25장 16절 핵심 삭제   사도행전 25장 16절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해 재판하자고 요청한 것에 대해 베스도가 로마법의 원칙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피고가 변명할 기회도 갖기 전에 그를 "넘겨주어 죽게 하는 것"(KJV)이 로마 사람들의 관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내용, 즉 “죽게 하는 것(to die)”이라는 법적·형벌적 결과를 명확히 포함시키고 있는 반면, 개역성경, NIB, NIV, 천주교 라틴벌게이트 계열 등 현대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을 생략하고 있다. KJV 원문: 죽음의 결과까지 명확히 표현 Acts 25:16 (KJV): “To whom I answered, It is not the manner of the Romans to deliver any man to die, before that he which is accused have the accusers face to face, and have licence to answer for himself concerning the crime laid against him.” “내가 그들에게 응답하되, 고소당한 어떤 자가 고소인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자기가 고소당한 범죄에 대하여 자기를 위해 답변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그 사람을 넘겨주어 죽게 하는 것은 로마 사람들의 관례가 아니라, 하였나이다.” 여기서 “to deliver any man to die”(누군가를 죽도록 넘겨주는 것)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그를 넘겨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법적 절차 없는 처형을 말하며, **로마법의 정당한 절차주의(principle of due process)**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역본의 생략 – 개역/NIV/NIB/천주교 성경 개역성경: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NIV: “I told them that it is not the Roman custom to hand over any man before he has faced his accusers and had an opportunity to defend himself.” 여기서는 “죽게 하다(to die)”, 즉 형벌의 결과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빠져 있다. →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저 일반적인 송환이나 인도 문제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으며, 본문의 긴박성과 위법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한다. 사본 증거 비교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을 따르며, 본문에 “παραδοθῆναι εἰς θάνατον”(넘겨져 죽게 하다)라는 표현이 분명히 존재한다. παραδοθῆναι = 넘겨주다 εἰς θάνατον = 죽음에 이르도록 반면, 소수 사본 계열(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 본문)에서는 “죽게 하다”라는 부분(εἰς θάνατον)이 빠져 있거나 생략되어 있다. 이에 따라, 현대역본들(NIV, NRSV, 개역 등)은 이 소수 사본을 반영하여 단지 “내주다”, “인도하다” 정도로 번역하고, 본문이 지닌 법적·도덕적 긴박성과 바울의 위기상황을 무디게 만든다. 신학적·문맥적 분석 본문의 핵심 논점은 ‘죽음’이다. → 유대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암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행 23:15, 25:3). → 따라서 베스도의 이 말은 단순한 행정적 거절이 아니라, 바울을 사형으로 몰아가려는 불법적 요청을 거절한 로마법의 원칙 선언이다. “넘겨주는 것”과 “죽게 넘겨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 생명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내주는 것은 로마법에 맞지 않는다”는 표현은 결정적인 맥락 설명이 부족하다. 로마법의 정당성 vs 유대인의 모략이 대조되는 장면이다. → 로마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재판 없는 처형을 금지했으며,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그 원칙 안에서 보호되어야 했다. 이 구절은 바로 그 정당한 법의 적용을 선언하는 절정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결과가 반드시 명시되어야만 본문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된다. 결론 사도행전 25장 16절은 로마 총독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불법적 바울 인도 요청을 거절하며, 재판 없는 사형 집행은 로마법의 관례에 맞지 않음을 강조하는 장면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넘겨주어 죽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이 어떤 위협 속에 있었는지, 그리고 로마법이 어떻게 그의 생명을 보호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사본 기반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에 따라 이 중요한 문장을 축소하거나 삭제함으로써, 본문의 법적 논리, 긴박성, 신학적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손상 없이 보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45:55 | 관리자
사도행전 24장 7절 삭제   사도행전 24장 7절은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고소당하는 재판 장면에서 등장하는 구절로, 유대인 측 고소장 내용의 핵심 흐름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이 본문은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계열 성경들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이 생략은 단순한 문장의 누락이 아니라, 본문의 논리적 흐름과 법적 정황의 설명력을 크게 훼손하는 문제를 낳는다. KJV의 본문 내용 Acts 24:7 (KJV): “But the chief captain Lysias came upon us, and with great violence took him away out of our hands,” “그러나 총대장 루시아가 우리를 기습하여 큰 폭력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빼앗아 데리고 간 뒤” 이 구절은 당시 유대인 고소자들이 자신들의 실패를 로마 총독 앞에서 정당화하기 위해 한 주장으로, 바울을 체포하고 조사하려 했던 자신들의 행위를 로마 군대의 개입으로 인해 중단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총대장 루시아(천부장)가 우리를 방해하고, 폭력적으로 바울을 빼앗아 갔다는 식의 책임 회피와 불만 제기이며, 동시에 로마 당국자에 대한 정치적 비난을 우회적으로 담고 있다. 이 내용이 포함되어야만 8절에서 벨릭스 총독에게 진상을 직접 확인하라고 하는 논리가 이어질 수 있다. 개역/NIV 등 현대역본의 누락 개역성경: 사도행전 24장 7절 자체가 없음 (6절에서 바로 8절로 넘어감) NIV 등: 동일하게 7절이 통째로 빠져 있으며, 간혹 각주로만 처리됨 이러한 누락은 본문의 흐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법정 진술의 완성도가 무너진다 → 고소 내용이 중간에서 갑자기 끊기고,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진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8절의 요청이 맥락 없이 튀어나오게 된다. 총대장 루시아의 등장이 사라진다 → 이 장면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루시아의 행동과 개입이 사라지면, 바울의 체포 경위에 대한 설명과 책임 구도가 흐려지게 된다. 로마 권력 비판의 뉘앙스가 사라진다 → 유대인 측은 루시아의 강제 개입을 ‘폭력’이라 규정하여 은근히 고소를 로마 당국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 부분이 누락되면, 고소인의 동기와 전략이 보이지 않게 된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사본(Textus Receptus) 및 비잔틴, 안티오크 계열의 그리스 사본들을 근거로 본문의 7절 전체를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사도행전 24:7의 절 전체가 생략되어 있으며, 현대역본들(NIV, ESV, 개역 등)은 이러한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해당 구절을 본문에서 삭제하거나 각주 처리하고 있다. 이는 본문의 신뢰도와 정경성 판단에서 매우 신중해야 할 부분임에도, 중대한 서술 논리의 축을 제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본문의 논리적 정합성 사도행전 24장 6–8절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연결된다 (KJV 기준): 6절: 우리가 바울을 붙잡아 율법대로 재판하려 하였으나, 7절: 그러나 루시아가 우리를 기습하여 바울을 강제로 데려갔다. 8절: 그래서 당신(벨릭스 총독)이 직접 조사해 보면 이 모든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7절이 빠진다면, 6절과 8절은 이렇게 이어지게 된다: 바울을 붙잡았고... → 벨릭스 총독이 직접 조사해 보십시오 → 중간의 사건 설명이 누락되어 논리적 비약이 발생한다. 결론 사도행전 24장 7절은 단지 하나의 설명 절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법적 문맥을 제공하는 절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사본과 정경적 일관성에 따라 총대장 루시아의 개입과 유대인들의 고소 논리를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본문의 흐름과 법정 상황을 논리적, 사실적으로 완성시킨다. 반면, 개역성경과 NIV, 천주교 계열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해당 구절을 삭제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일관성과 신학적 깊이를 축소하고, 독자에게 왜곡된 문맥과 흐름을 제공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2025-05-24 15:42:31 | 관리자
사도행전 20장 24절 중요 부분 삭제   사도행전 20장 24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하며 자신의 사역에 대한 결단과 자세를 밝히는 매우 중대한 본문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어떠한 시련이나 위협도 자신의 사명을 막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라는 선언이 있다. 그런데 이 핵심 표현은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분명히 포함되어 있으나, 개역성경, NIV, 개역개정 등 현대역본들에서는 완전히 삭제되거나 축소되어 있다. 이로 인해 바울의 의지와 결심의 맥락이 약화되고, 본문은 단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의 고백처럼 변질된다. KJV 본문: 명확한 의지와 결단의 표현 Acts 20:24 (KJV): “But none of these things move me, neither count I my life dear unto myself, so that I might finish my course with joy, and the ministry…”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내가 나의 생명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도 아니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앞서 말한 결박, 고난, 박해 등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바울이 외적 환경이나 육체적 위험에 흔들리지 않고 사명에 집중하며, 기쁨으로 자기 길을 마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현대역본의 번역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서는 KJV의 앞부분인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But none of these things move me)” 가 완전히 삭제되었다. 그 결과, 문맥상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생긴다: 바울의 고백이 내면적 결심이 아니라, 단순히 생명에 대한 체념처럼 보인다. → 즉, 사역은 중요하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소극적인 표현으로 전락한다. 위협과 사명 사이의 갈등과 결단이 표현되지 않는다. → KJV에서는 “고난이 닥치지만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선언이 명확하다. 그러나 현대역본에는 그 결단의 전제 자체가 없다. 본문 흐름이 단절된다. →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는 성령께서 각 도시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하셨다. 바로 그에 이어서 바울은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선언으로 대답해야 논리적이고 문맥상 일관되다. 그런데 이 핵심 문장이 빠지면, 앞뒤 흐름이 뚝 끊기고 중심이 사라진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다음과 같은 원문을 따른다: “ἀλλ᾽ οὐδενὸς λόγου ποιοῦμαι οὐδὲ ἔχω τὴν ψυχὴν τιμίαν ἐμαυτῷ…” 번역: “그러나 나는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내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 여기서 “οὐδενὸς λόγου ποιοῦμαι”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강한 부정 표현이다. 반면, 소수 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에서는 이 구절의 첫 문장 일부가 생략되었거나 압축된 형태로 등장하여, 현대역본들은 이러한 부패된 소수 사본을 따라 이 중요한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 신학적·영적 맥락의 핵심 바울의 사역 태도와 고난에 대한 자세 → KJV는 바울이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려는 결연한 자세를 강조한다. → 이는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신학적 중심(참고: 고후 4:8–11, 빌 3:8–14). 성령의 예언과 인간의 반응 → 사도행전 20:23에서 성령께서 경고하셨고, 24절에서 바울은 그에 대해 반응한다. → 현대역본에서는 그 반응(“나를 움직이지 못한다”)이 생략되어 하나님-사람 사이의 대화 구조가 파괴된다. 복음을 향한 결단의 모범 → 이 구절은 오늘날 사역자들에게 생명보다 사명이 중요하다는 바울의 모범을 보여주는 핵심 말씀이다. → 이 고백은 “죽어도 좋다”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죽음조차 나의 사명을 막지 못한다”는 능동적 결단이어야 한다. 결론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과 결박 앞에서도 사역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믿음의 고백을 드러낸다. 이 고백의 중심은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선언이며, 이는 성령의 경고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자, 복음 전파를 향한 헌신의 절정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결단의 본질을 명확히 보존하고 있는 반면,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소수 사본에 따라 이 중요한 문장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논리, 문맥, 신학, 영적 교훈을 심각하게 축소시켰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KJV만이 바울의 마음 속 깊은 결단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보존하고 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2025-05-24 15:37:15 | 관리자
사도행전 18장 17절 그리스 사람 삭제   사도행전 18장 17절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유대인들이 그를 고소하려다 실패한 후에 일어난 장면을 기록한다. 이 본문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바울을 고발한 유대인들의 시도가 실패하자,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Greeks)”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렸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인 “그리스 사람들(Greeks)”을 완전히 삭제하고, 단지 “모든 사람들이” 혹은 “그들 모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번역상의 생략은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문의 문맥, 인물 구도, 역사적 상황의 이해에 중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KJV의 정확한 번역과 문맥 “Then all the Greeks took Sosthenes, 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and beat him before the judgment seat. And Gallio cared for none of those things.” “이에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회당의 우두머리 치리자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리니라.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들 중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Greeks(그리스 사람들)”은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의 행동에 반발하여, 법정 앞에서 그들을 대표한 회당장 소스데네를 직접 응징한 인물들이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 헬라인들(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선동과 폭력을 거부하며 분노를 표출한 역사적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Gallio(갈리오)”는 당시 고린도의 총독으로서 이방 재판권자가 유대인의 종교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무관심했다는 정치적 중립성을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리스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절대 생략될 수 없는 핵심 정보다. 현대역본의 왜곡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현대역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불분명한 표현만 남기고,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혼란을 유발한다: 유대인들이 자기 회당장을 때린 것처럼 보인다. → 이는 본문 바로 앞 절(행 18:14–16)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당사자들이었음을 고려할 때, 자기들이 고소에 실패했다고 해서 자기 회당장을 구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색하다. 문맥의 흐름이 끊긴다. → KJV에서는 유대인들이 실패하고, 그리스 헬라인들이 그들의 폭력적 종교 분열에 분노하여 응징한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명확하다. 하지만 현대역본은 이 장면을 단순한 폭력 사건처럼 축소시켜, 법정 앞에서 무작위 군중이 폭동을 일으킨 것처럼 표현한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실이 가려진다. → 본문의 핵심은: 복음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실패하고, 헬라인 사회 전체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으나, 이방인 세계로 점점 확장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사본(Textus Receptus)**을 따른다. 이 사본에는 “πάντες οἱ Ἕλληνες” – “모든 그리스 사람들” 이라는 표현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반면, **소수사본(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πάντες(모든 사람들)”이라는 단어만 남아 있거나 “Ἕλληνες”(그리스인)가 누락되어 있다. 현대역본들(NIV, ESV, 개역 등)은 이러한 소수 사본에 기반하여, ‘그리스 사람들’을 삭제하거나 중립화시켜 본문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결론 사도행전 18장 17절에서 “그리스 사람들(Greeks)”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민족 정보가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과 복음을 향해 열린 이방인 헬라인 사회의 반응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신학적, 문맥적 요소이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이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독자에게 사건의 전말과 인물 구도, 복음의 전파 방향성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이방 세계로 향하는 복음의 역사가 가려지고, 본문이 말하는 핵심이 흐릿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본문의 전체 구조와 흐름, 역사성, 교리적 맥락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성경을 성경답게 이해하려면, 정확히 보존된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2025-05-24 15:32:33 | 관리자
사도행전 17장 5절 핵심 부분 삭제   사도행전 17장 5절은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발생한 사건을 다루며,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명확히 구분하여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본문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the Jews which believed not)”이라는 형용사절 구조를 통해 유대인 전체가 아니라, 믿지 않은 일부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정확하고 제한된 묘사를 한다. 하지만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등)은 “유대인들은 시기하여…”라고 단순히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복음을 반대한 것처럼 오해를 유발하고, 본문의 인물 구분과 신학적 맥락을 손상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KJV 번역과 본문의 명확성 Acts 17:5 (KJV): “But the Jews which believed not, moved with envy…”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동요되어…” 여기서 핵심은 “which believed not”이라는 형용사절이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믿음을 가지지 않은 자들만을 특정하여 행동의 주체로 명확히 지정한다. 즉,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혀 불량배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구조 덕분에 독자는 유대인들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고, 오직 불신자들만이 악한 행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현대역본의 축소된 번역 개역성경: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서는 “믿지 아니하는”이라는 중요한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고 폭력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 중대한 번역상의 오류를 낳는다. 이는 단순한 문장 간략화가 아니라, 본문의 역사적 인물 구도와 복음의 수용/거절 구분을 없애는 심각한 왜곡이다.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해당 구절에 “οἱ δὲ Ἰουδαῖοι οὐ πειθόμενοι”라는 헬라어 구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οὐ πειθόμενοι: “믿지 않은, 설득되지 않은”이라는 분사 표현으로, 형용사처럼 앞의 명사 “유대인들”을 수식하는 구조이다. → 정확히 번역하면: “믿지 않은 유대인들” 그러나 소수 사본 기반의 현대역본들(NIV, 개역 등)은 이 표현을 생략하거나 일반화하여, 본문이 가진 신학적·역사적 뉘앙스를 무너뜨리고 있다. 신학적·문맥적 중요성 복음 앞에서의 분명한 반응 구분이 사라진다 → 본문에서는 어떤 유대인들은 믿었고, 어떤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행 17:4 참조). →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빠지면, 독자는 마치 모든 유대인들이 복음을 반대하고 폭력을 일으킨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바울 사역의 성과가 희석된다 → 사도행전 17장 4절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많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유대인 중 일부가 믿었다고 말한다. →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믿지 않은 자들의 행동을 특정하지 않고 “유대인들” 전체로 일반화하면, 바울의 사역 결과가 부정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불필요한 반감이나 오해 유발 → 본문의 원래 목적은 복음에 대한 불신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지, 유대 민족 전체를 악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다. → 따라서 문맥상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필수적이다. 결론 사도행전 17장 5절은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에 따라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번역함으로써, 믿은 자들과 믿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고, 악한 행동의 주체를 명확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개역성경 및 현대역본들(NIV, NRSV 등)은 이 구절에서 형용사 수식을 생략함으로써, 전체 유대인들을 싸잡아 일반화하고 있으며, 이는 본문의 진의와 신학적 분별력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번역적 오류이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정확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29:19 | 관리자
요한복음 20장 29절의 도마야 삭제   요한복음 20장 29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적인 교훈 장면이며, 그 중심에는 **의심 많은 도마(Thomas)**라는 인물이 서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과 현대역본들(개역, NIV 등) 사이에 중대한 번역 차이가 있다. 특히 현대역본은 예수님이 도마를 직접 지칭하신다는 중요한 요소를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인물 중심성과 문맥 흐름, 그리고 신학적 강조점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 (John 20:29, KJV) “Jesus saith unto him, Thomas, because thou hast seen me, thou hast believed: blessed are they that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도마의 이름을 직접 부르신다: “Thomas” (도마야) 이는 단순한 언급이 아니라, 말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부각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아셨고, 도마가 자기 손으로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지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아셨다(요 20:25). 따라서 예수님은 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이름을 부르시며 정면으로 대면하신다. 현대역본의 번역 문제 (개역, NIV 등)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번역에서는 “도마야”라는 예수님의 직접 호명이 생략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문맥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 대화의 강도와 인격적 대면성은 약화된다. 독자는 이 말씀이 도마 개인에게 한 말인지, 혹은 제자들 모두에게 한 말인지 불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사본 증거 헬라어 본문에서 KJV가 따르고 있는 다수사본(Textus Receptus)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Τόμᾶ” (Thomas)**라는 호칭이 포함되어 있다. Λέγει αὐτῷ ὁ Ἰησοῦς· Θωμᾶ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도마야…” 이 구절에서 Θωμᾶ(도마)는 호격으로 쓰인 이름으로,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부르심을 나타내며, 예수님이 도마를 지목하여 책망과 동시에 사랑으로 교훈하고 계심을 드러낸다. 반면, 소수 사본(알렉산드리아 계열)에서는 이 이름이 누락되거나 일부에서 생략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한 현대역본들(NIV, 개역 등)은 이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본문의 인물성과 대화의 강렬함을 상실하게 된다. 신학적·문학적 중요성 도마의 회복 → 예수님께서 도마를 직접 부르신 것은 그를 향한 회복과 권면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단지 책망이 아니라 개별적 인격적 접근을 통해 믿음을 회복시키는 장면이다. 복음의 대상은 개인이다 → “도마야”라고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복음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교훈하신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선언은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이지만, 이 교훈은 도마라는 실존 인물을 정면으로 대하며 시작된다. 문맥적 강조의 유지 → 이름을 부름으로써 문맥의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정확히 유지되며, “보지 않고 믿는 자”와 “보고야 믿은 도마”의 대조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결론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도마야”라는 직접 호칭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의심을 아시고도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사랑과 권위의 표현이며, 그가 어떻게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성경적 드라마의 정점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요소를 다수 사본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독자들이 본문의 감정적, 신학적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반면, 개역성경과 NIV 등의 현대역본들은 이 이름을 생략함으로써, 말씀의 초점, 감정, 교훈의 깊이, 인격적 강조를 약화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마와의 직접적 대면을 통한 믿음의 회복이라는 본문 핵심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주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손상 없이 전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23:14 | 관리자
요한복음 9장 11절 실로암 못   요한복음 9장 11절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자신의 시력을 회복하게 된 과정을 간증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구절에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으며, 자신이 그 명령대로 행했을 때 시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표현인 **“실로암 못(The pool of Siloam)”**이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명확히 포함되어 있으나, 개역성경을 포함한 현대역본들(NIV, NRSV 등)에서는 단순히 “실로암”이라고만 번역하여 문맥의 명확성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희석시키는 번역 오류를 범하고 있다. KJV 본문과 의미 John 9:11 (KJV): “He answered and said, A man that is called Jesus made clay, and anointed mine eyes, and said unto me, Go to the pool of Siloam, and wash: and I went and washed, and I received sight.”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에게 이르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내가 가서 씻고 시력을 받았노라, 하니.”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은 “the pool of Siloam”, 즉 실로암 못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명확히 밝혀준다. “못(pool)”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지명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의 실제 수행 위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문의 상황 묘사, 역사성, 그리고 순종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한다. 현대역본들의 번역 문제 개역성경, 개역개정, NIV, ESV 등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축소하여 번역한다: “진흙을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여기서는 “못(pool)”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빠져 있다. 그 결과, 독자는 실로암이 어떤 곳인지, 물과 관련된 곳인지, 특정 지명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된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실로암을 동네 이름이나 막연한 지역명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적 현실성과 예수님의 기적의 구체성을 흐리는 중대한 번역 오류다. 사본 증거와 본문 일치 헬라어 원문에서도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ὕπαγε εἰς τὴν κολυμβήθραν τοῦ Σιλωάμ “Go to the pool of Siloam” — 여기서 κολυμβήθραν(kolymbēthran)은 분명히 ‘못’ 또는 ‘연못’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5장에서도 베데스다 못을 지칭할 때 사용된 동일한 단어이며, 요한복음 9장 7절에서도 다시 한 번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 자체가 “실로암이라는 이름의 연못(pool)”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음에도, 현대역본들이 이를 생략한 것은 본문 삭제 혹은 의도적 축소 번역에 해당한다. 성경적·신학적 맥락에서의 중요성 기적의 구체성 → 예수님께서 명확히 지정한 물의 장소, 즉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체로 상징성과 순종의 의미가 담긴 역사적 행위였다. 순종의 강조 → 단순히 “실로암”에 간 것이 아니라, 지정된 못에서 씻는 것이 핵심이었고, 그 결과로 시력을 얻은 것이다. 구약과의 연결 → 실로암 못은 이사야 8:6에서도 등장하며, 예루살렘 성의 생명의 근원으로 상징되는 곳으로 중요한 신학적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성경 지리와 신뢰성 → 실로암 못은 오늘날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 유적지로, 성경의 역사성과 정확성을 지지해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 “못”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그 장소성과 실제성이 사라진다. 결론 요한복음 9장 11절에서 “실로암 못(pool of Siloam)”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밝히는 본문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역본(NIV, 개역 등)은 소수 사본의 영향이나 번역 의도에 따라 “못”이라는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본문의 의미와 역사성, 신학적 깊이를 축소하고 왜곡하였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사본의 전통을 따라 **“the pool of Siloam”**이라는 표현을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성경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정확한 지리적 정보와 명확한 기적의 구조를 전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말씀의 본래 의미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17:51 | 관리자
요한복음 6장 69절 핵심의 변개   예수님은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John 6:69 (KJV): “And we believe and are sure that thou art that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나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을 두 가지로 분명히 나타낸다. 첫째, 예수님은 “그 그리스도”, 즉 구약에서 예언된 유일한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시며, 둘째,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대리자나 선지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즉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하신 신성을 지닌 분이심을 확고히 고백한 것이다. 현대역본(개역, NIV 등):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개역 / NIV / NIB 등: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현대역본들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번역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유일성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며, 본문이 가진 교리적 강도를 약화시킨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마가복음 1:24 등에서 귀신들도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그 의미는 모호하고 제한적이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비교할 때, 이 표현은 예수님의 본질을 포괄하지 못하는 불충분하고 축소된 칭호일 뿐이다. 사본 증거: 소수 사본의 왜곡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that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이라는 표현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다. 반면, **현대역본들(NIV, 개역 등)**은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 특히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과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을 따르고 있는데, 이들 사본에서는 본문이 축소되어 “the Holy One of God”으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사본은 역사적으로 오리겐과 유세비우스 등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영향 아래에서 철학적 관념과 인간 중심 해석이 혼합된 부패 사본들로 평가되며, 복음의 신성과 절대성보다는 인간적 도덕성과 상징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신학적 차이의 핵심 (서술형 정리)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킹제임스 성경은 베드로의 고백을 마태복음 16장 16절과 동일한 구조로 유지하며, 예수님을 **예언된 메시야(그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선언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칭호를 넘어, 예수님의 신성, 유일성, 구원자로서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내며,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의 핵심을 충실히 담고 있다. 반면, 현대역본들은 이 고백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축소함으로써 예수님의 정체성을 애매한 신적인 인물 수준으로 낮춘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거룩한 선지자, 혹은 하나님의 쓰임 받은 사람 정도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복음의 핵심 교리가 흐려지게 된다. 이와 같은 번역은 신학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정체성이라는 두 핵심 교리를 동시에 침묵시키는 매우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결론 요한복음 6장 69절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한 핵심 본문이며, 이 고백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성경 전체 복음의 중심 진리를 선포하는 구절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고백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으며, 구속사적 흐름과 사도적 신앙 전통에 맞게 정확하고 강력한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개역, NIV, NIB 등의 현대역본은 소수 사본에 따라 고백의 핵심을 축소하거나 삭제하여,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을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 본문 또한, 검증되고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복음의 중심을 온전히 선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025-05-24 15:12:39 | 관리자
마태복음 19장 20절에서 핵심 삭제   젊은 청년이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는데, 내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라고 한 이 진술은 단순한 설명을 넘어, 이 청년의 마음 상태와 자기 의(義), 교만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열쇠가 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초한 **현대역본들(NIV, 개역, 개정 등)**은 이 구절의 핵심 구문인 **“어려서부터(from my youth up)”**를 삭제하거나 생략한다. KJV 번역: “from my youth up”의 중요성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The young man saith unto him, All these things have I kept from my youth up: what lack I yet?” “그 청년이 그분께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는데, 내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이 구절에서 청년은 율법을 어릴 때부터 철저히 지켜 왔다고 주장한다. 이 표현은 자기 자랑, 자기 의(義),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을 보여주는 핵심 진술이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청년의 진짜 문제는 율법적 외면이 아니라 마음 중심의 탐심임을 드러내신다. 천주교 소수 사본 기반 현대역본의 삭제 NIV, ESV, 개역개정 등은 이 구절을 단지 “이 모든 것은 내가 지켰나이다” 혹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등으로 번역한다. → **“from my youth up”**이 아예 빠져 있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 청년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율법을 지켜 왔다고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의 내면의 교만한 자세가 얼마나 깊은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본 증거 KJV는 다수사본(다수본문, Byzantine Text), 특히 **Textus Receptus(수용본문)**를 따르고 있으며, 여기에 “ἐκ νεότητός μου(from my youth up)”라는 문구가 명확히 존재한다. 반면, **천주교 사본 기반의 소수 본문(알렉산드리아 사본 계열)**에서는 이 문구가 누락되어 있거나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문장 생략이 아니라, 이 청년의 인격과 신앙의 본질을 판단할 수 있는 핵심 맥락이 제거된 것이다. 신학적·교리적 해석의 차이 KJV (올바른 번역) → 청년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율법을 지켜 왔다고 주장 → 이것은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의 증거 → 예수님은 이 청년의 외적 율법 준수 속에서도 드러나는 내적 탐심과 불신을 지적하심 현대역본 (삭제 번역) → 청년의 말이 짧고 단정하게 들리며, 마치 단순히 율법을 지켰다고 보고하는 듯한 인상 → 교만함, 자기 의에 대한 과시라는 본문의 신학적 뉘앙스를 약화시킴 결론 마태복음 19:20의 “어려서부터(from my youth up)”라는 표현은, 이 부자 청년의 신앙적 교만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핵심 문구로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외형만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반한 현대역본들은 이 핵심 구절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신학적 깊이와 도전, 경고의 힘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이 구절에서도 검증된 다수사본을 따르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 뜻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믿음을 갖되,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온전하게 보존된 성경을 붙들라.
2025-05-23 19:41:15 | 관리자
요한계시록 1장 6절 오역   요한계시록 1장 6절과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의 번역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신자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성경 전체의 일관된 신학 체계와 문맥적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중요한 본문들이다. 이 두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의 번역은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며, **현대역본들(NKJV, NIV, 개역 등)**은 의미를 흐리거나 왜곡함으로써 신학적으로 혼란을 일으킬 여지를 남기고 있다. 1. 요한계시록 1장 6절 비교 KJV: “To God and His Father” →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현대역본 (NKJV, 개역 등): “To His God and Father” → “그의 하나님 곧 아버지께” 문제점 “His God”이라는 표현은 부활 이후 예수님이 여전히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 이는 삼위일체 내 위격 관계의 존엄성을 흐릴 수 있으며, 예수님을 여전히 피조물적 위치에 둔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음. KJV의 “God and His Father”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구분하여 존중하며,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문맥적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원문 헬라어: τῷ θεῷ καὶ πατρὶ αὐτοῦ 직역: To the God and Father of Him KJV는 이 구조를 이중 지시가 아닌, 단일 소유 표현으로 정확히 옮겼음 현대역본은 이를 의역하여 신학적 모호성을 남김 2.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비교 KJV: “in the sight of God and our Father”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현대역본 (NKJV, 개역 등):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 “우리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문제점: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흔히 구약적 단일 신관으로 오해되기 쉬우며, 삼위 하나님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KJV는 “God and our Father”로 두 위격(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는 신자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를 정확히 표현한 것 헬라어: τοῦ θεοῦ καὶ πατρὸς ἡμῶν KJV는 직역: God and our Father 의미적으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우리 아버지”를 의미 → 현대역본은 이 구조를 중의적 의미로 흐리게 만들고 있음 결론 요약 요한계시록 1:6에서는 → KJV: "to God and His Father" →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위격적 구분과 복종 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 반면 현대역본은 **“His God and Father”**로 번역하여, 예수님을 여전히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처럼 오해할 소지를 만든다. 데살로니가전서 1:3에서는 → KJV: "God and our Father" → 신자와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정직하게 전달 → 현대역본은 “our God and Father”로 번역함으로써 구약적 신개념으로 혼동되거나 삼위 구분을 흐리게 만들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두 구절 역시 원어와 문맥, 그리고 성경 전체의 삼위일체 교리 및 구속 신학과의 일치를 보장하는 번역은 오직 킹제임스 성경뿐이다. 이처럼 작은 표현 차이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그리고 신자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핵심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025-05-23 08:49:0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