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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약6821개
  사내아이의 포피를 베어 내는 것.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언약의 표적으로 할례를 받을 것을 명령했고 그래서 99세의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받았다(창17:10-12). 하나님은 이것을 모세에게도 명령하시고 유월절 희생에 참여하려는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야 하며 남자 아이는 난 지 여드레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출12:44; 레12:3; 요7:22). 유대인들은 이것을 즉각적으로 그대로 지켰고 이집트에서도 그대로 행했다(수5:1-9). 히브리 사람들 말고도 아브라함에게서 난 이스마엘 족속과 아라비아 족속도 이 관례를 지켰으며 그래서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은 어디서나 할례를 베푼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것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으며 그래서 자기를 가리켜 ‘무할례자’라 부르는 것을 가장 큰 불명예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들을 ‘무할례자’라 한 것은 무례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롬2:26) 단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과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교회에는 회심한 이방인들이 이 관례를 지켜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부상했다(행15:1-4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창조물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갈5:2-3; 6:15). 그러므로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며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혹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거나 수용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2009-05-03 22:44:23 | 관리자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이 말은 히브리 시편의 앞과 뒤에 종종 나온다. 유대인들은 기쁜 명절에 기쁨과 찬양을 드러내기 위해 할렐루야를 노래했고 이런 찬양은 지금도 기독교회에서 종종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말로 알렐루야(Alleluia)이며 우리말 성경에서는 히브리말을 살려 할렐루야로 번역되었다(계19:1-6).    
2009-05-03 22:43:53 | 관리자
  약2:19는 영어로 ‘There is one God’인데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가 아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떨지 않고 한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떤다(딤전2:5; 요일5:7 참조). 삼위일체 참조.    
2009-05-03 22:43:30 | 관리자
  라마다임소빔의 레위 사람 엘가나의 경건한 부인. 그녀는 사무엘의 어머니였으며 그를 얻기 위해 주님께 간절히 구하였고 자기의 서약에 따라 그를 하나님에게 거저 드렸다. 그녀는 후에 아들 셋과 딸 둘을 추가로 얻는 복을 받았다(삼상1:1-28; 2:1-21).    
2009-05-03 22:42:59 | 관리자
  열두 명의 소 대언자 중 하나. 그는 스룹바벨과 함께 바빌론에서 처음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리오 히스타스피스의 제2년에 대언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대언의 목적은 오랫동안 연기되어 오던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다리오가 이에 대하여 칙령을 내렸으므로 그는 이 일에서 성공하였다(스6:1-22). 그가 예언한 대로 둘째 성전의 뛰어난 영광은 모든 민족들의 바라는 바 곧 그리스도가 그곳에 이르고 자기 발이 닿는 곳을 영화로운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학2:7-9).    
2009-05-03 22:42:29 | 관리자
  유대인들이 오래 전부터 흔히 사용한 현악기. 이것은 히브리말로 ‘키노르’이며 작고 가벼워서 흔히 기쁨이 있는 곳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유발이 처음 발명하였고(창4:21; 31:27; 대상16:5; 25:1-5; 시81:2) 다윗은 하프를 잘 탔다(삼상16:16, 23; 18:10). 음악 참조.    
2009-05-03 22:42:00 | 관리자
  성경은 함의 후손인 하윌라와(창10:7) 셈의 후손인 하윌라(창10:29)를 말하므로 두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I. 하윌라의 위치는 에덴동산의 하윌라와 관련이 있다(창2:11). II. 또 다른 하윌라가 아라비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상15:7에는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이집트 맞은편 수르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아라비아의 북서쪽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 같다.    
2009-05-03 22:41:31 | 관리자
  원래 이곳은 다마스커스의 남쪽, 디베랴 바다의 동쪽에 있던 조그만 지역이었으나(겔47:16) 후에는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2009-05-03 22:40:50 | 관리자
  I. 북부 가나안의 주요 도시. 이곳의 왕은 야빈이었으며 그는 동맹군의 우두머리였으나 여호수아에 의해 패배를 당하였다(수11:1-13). 그 뒤 하솔은 재건되어 얼마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으나 바락에 의해 정복되고 솔로몬은 이곳을 강화하였다. 이곳은 디글랏빌레셀이 침략하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수19:36; 삿4:2; 왕상9:15; 왕하15:29). II. 아라비아의 한 지역. 느부갓네살은 이곳을 폐허로 만들었다(렘49:28-33). III. 유다와 베냐민에 있던 도시들(수15:23; 느11:33).    
2009-05-03 22:40:23 | 관리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친 곳. 이곳은 시내 산에서 닷새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고(민11:35) 그들은 여기서 한 주 혹은 그 이상을 머물렀고(민12:1-16) 여기를 떠나 가나안의 경계인 가데스바네아로 이동하였다(민12:16; 13:26; 신1:19-21). 출애굽 참조.  
2009-05-03 22:39:19 | 관리자
  시리아 왕 벤하닷의 관원. 대언자 엘리사는 그가 벤하닷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를 것을 예언하였고 그는 그 다음날 왕을 질식시켜 죽게 만들었다(왕하8:7-15). 대언자는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이미 그가 이 범죄를 계획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왕위를 찬탈한 뒤 40년 동안 치리하였으며 성공적으로 그리고 잔인하게 유다와 이스라엘을 대적함으로써 엘리사의 예언을 성취하였다(왕하8:28; 10:32; 12:17; 13:3, 7; 대하22:5).    
2009-05-03 22:38:34 | 관리자
  메대의 도시.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과 살만에셀이 이스라엘 포로 중 일부를 이곳 근처로 옮겨 놓았다(왕하17:6; 18:11).  
2009-05-03 22:37:05 | 관리자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리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시51:5).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다. 그의 몸에는 첫 사람 아담의 피가 돌므로 그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즉 사람은 죄를 지으므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모태 신앙’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이고 ‘모태 죄인’이라고 해야 맞는다. 사람 안에는 본성적으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롬7:18). 성경은 본성에 속한 사람 즉 자연인을 가리켜 ‘지각이 어두워진 사람’이라고 말한다(엡4:18). 그는 하나님의 영과 그분의 일을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의 것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엡2:3) 더욱이 하나님과 원수지간이고 따라서 결코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없다(롬8:7-8). 그의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렘17:9). 그래서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다(막7:21-22). 영적으로 볼 때 그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존재이다(엡2:1).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자연인도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는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렘13:23). 이런 상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일이 구원의 첫 걸음이다.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그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그를 지으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를 변화시켜 새 생명을 줄 수 있다.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2009-05-02 17:41:07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성경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 보아라.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성경을 펼쳐보면 구약은 짐승의 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표지를 제외한 테두리에는 통상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 칠해졌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붉은 색 대신에 금색이 둘러진 성경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피보다는 영광을 뜻하는 금색이나 또는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진 색으로 성경이 치장될지라도 근본적으로 성경이 ‘피의 책’(血書)인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화려하고 멋진 옷이 아니라 단지 피에 담겨진 옷을 입고 있음을 성경 스스로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9:13). “또 그분께서는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계19:13) 아울러 성경은 피(blood)의 순환(circulation)이 계속 이뤄지고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이요, 또한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히4:12; 레17:11,14).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히4:12상, 이하 흠정역)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레17:11상) 그리고 또한 성경은 수많은 피 가운데 오직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구원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이 유일하게 흘러나오는 ‘구원의 샘’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救贖)을 받으면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게 됨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1:18,19; 요7:38; 계21:6).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救贖)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성경 전체를 통해 피의 강이 흐르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피로 연결되게 하셨는지, 그리고 피를 통해서 생명이 있도록 하셨으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 있도록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생명 먼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 그가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셨던 장면을 생각해 보자(창2:7). 과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 아담이 살아 있는 존재(living soul)가 되었던 것일까? 이미 뇌, 심장, 폐, 위장, 간, 콩팥 등등 인간의 몸은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을 텐데 무엇이 이러한 인간의 각종 장기와 조직들이 동시에 살아서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피 때문이었다. 즉 우리 몸의 여러 기관들(systems) 중 유일하게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온 몸을 다니는 혈액(blood)이 순환(circulation)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자 우리 몸의 각 장기와 조직과 세포들은 피를 통해 산소와 각종 영양소를 공급받아 활동을 시작하며 생명현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처럼 피를 통해 생명을 갖게 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930세에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창3:6; 5:5). 곧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피는 부패하기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울러 그 후 아담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된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역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된 피(SIN+)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창5:3; 롬3:23). 즉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영적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처참한 인류의 운명이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롬5:12). 다시 말해서 부패된 피(SIN+)를 무죄한 피(SIN-)로 바꾸지 못한 사람(soul)은 육체적 사망에 이어 둘째 사망 곧 지옥․불못(lake of fire)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창조세계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롬6:23상; 계21:8). 3. 복음 그러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아담과 이브가 영적 사망에서 회복될 수 있는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곧 사탄은 여자의 씨로 오실 예수님의 발꿈치를 잠깐 상하게 할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사탄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복음(protoevangelium)이 선포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SIN-)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완전히 파멸시키시리라는 복된 소식(gospel)이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마27:4; 고전15:1-4).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시면서 피흘림을 통한 죄사함의 원칙을 인류에게 제시해주셨다(창3:21; 히9:22).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져 아벨은 양떼의 첫 새끼들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피의 제사를 드렸다(창4:3-5; 히11:4). 그리고 지구 전체를 뒤엎었던 대홍수 직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도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헌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피흘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계속 확인하였다(창8:20,21; 레1:1-17). 이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헌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친히 예비하셔서 어린양의 피를 통한 대속(代贖)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그림자를 보여주셨다(창22:1-14).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가 문의 인방(引枋)과 양옆 기둥에 뿌려진 집에는 파멸시키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다(출12:1-28).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월절 사건을 통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여 주실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려주셨다. 4. 어린양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유월절을 지키며 어린양의 피를 기렸고 또 연중 끊임없이 지속된 제사들을 통해 피흘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매일 확인하였다(출12:24-27; 레1:1-18; 17:11하; 히9:22).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하)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히9:22)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령님에 의해 수태되어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마1:21; 갈4: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리셨지만 마리아의 부패된 피(SIN+)를 한 방울도 받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산모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태반을 통하여 필요한 영양분만이 공급되게 하셨고 피는 단 한 방울도 넘어가지 않게 만드셨으며 오로지 태아의 피는 태아 자체의 조혈기관(fetal hematopoietic organs)에서 생성되도록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죄한 피’(SIN-)를 지니시게 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이 되셨던 것이다(요1:29,36).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다(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救贖)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5. 복(blessing) 다시 말해서 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팔려갔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다시 찾아주시는 구속(救贖, redemption)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blessing)을 얻게 된 것이다(행20:28; 엡1:3-7). 이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복이 있겠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진정한 복은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둘째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야벳(Japheth)의 후손들은 영어로 복(福)을 블레씽(blessing)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또는 bless(복주다)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 알아보면 앞서 언급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웹스터 영어 백과 사전(Webster's Encyclopedic Unabridged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996)과 노아 웹스터(Noah Webster) 초판 영어 사전(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828)을 보면 ‘bless’는 고대 영어(Old English)에서 ‘bletsian’이나 ‘bledsian’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피(blood)로써 신성하게 한다(consecrate)는 의미가 있다. 또 이보다 앞서 고대 프레즈랜드(Friesland)어(Old Frisian)나 고대 색슨어(Old Saxon)에서는 ‘blÕdisÕnian'으로 쓰였는데 여기에서 ‘blÕd'는 명백히 blood(피)라는 의미이다. 즉 피(blood)가 복(bless)이 된 것이다. 그렇다. 피흘림(bleeding)은 죄인인 우리가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blessing)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SIN-)를 우리를 위해 흘려주시게 된 것이다(마26:26-28; 27:4; 요1:29)! 6. 의(義) 그 결과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감히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롬3:10; 5:6-1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복주심(창9:27)을 좇아 중국 땅에 들어온 야벳의 후손들에게 한자라는 상형문자를 만들어준 창힐(蒼頡)이 왜 의(義)라는 한자어를 이처럼 기록하였는지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의(義) = 양 양(羊) + 손 수(手) + 창 과(戈) 의(義)란 바로 어린 양(羊)을 자신의 손(手)으로 잡고 창(戈)으로 찔렀을 때 나오는 것(寶血)을 의미한다. 즉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한 피’(SIN-)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요1:29,36; 벧전1:19; 요일1:7; 계7:14; 12:11). 또한 의(義)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도 있다. 의(義) = 양 양(羊) + 나 아(我) 이 등식은 양(羊) 아래에 내(我)가 있는 상태가 의(義)라는 것이다. 즉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Lord)이 되셔야 의로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야벳의 후손들은 ‘의롭다’를 영어로 ‘righteous’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관계성을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즉 “righteous relationship with God”을 의미한다. 한자어 의(義)의 풀이와 똑 같이 어린양(羊)이신 예수님을 내(我)가 구주로 모실 때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다는 뜻이다(롬3:25; 골1:19,20)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헌물(propitiation)로 제시하셨으니”(롬3:25상) “이는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19,20) 7. 예수님의 피흘리심 그렇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언제 어떻게 피를 흘리셨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는 예수님께서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심으로 피를 흘리셨다(눅2: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증표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 할례는 영적으로 새 창조(new creation)를 의미하는 8일에 시행되었는데 이 날은 혈액응고인자인 프로트롬빈(prothrombin) 농도가 출생 후 가장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후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피를 흘리셨다(눅22:39-46; 마26:36-46). “그분께서 고뇌(agony)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눅22:44) 이것은 의학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나 신체기관의 쇼크가 있을 때 혈액성의 땀이 분비되는 혈한증(血汗症, hemohidrosis, hematidrosis)인데 우리는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려는 그 영적 고통이 얼마나 컸던 것이지 잘 알 수 있다(요일4:10, 고후5:21, 롬5:9,10).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사실 겟세마네에서 혈한증을 보일 정도로 간절하였던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8. 십자가의 보혈 셋째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심으로 피를 흘리셨다(마27:26; 막15:15; 요19:1; 사53:3). 몇 번이나 채찍을 맞으셨는지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끝에 짐승의 뼈조각이나 납 같은 금속이 달린 채찍 때문에 근육과 뼈가 핏덩어리가 되어 다 드러날 정도로 맞으셨을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은 가시나무 관을 머리에 쓰시고 피를 흘리셨다(마27:28-31; 막15:15-20; 요19:2-16).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셨던 가시나무 관은 머리 전체를 덮었으며 각 가시의 길이는 2.5~5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학적으로 잘 알려졌듯이 머리는 혈관이 잘 분포된 부위인데 로마 군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기 때문에 이로 인해 엄청난 출혈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가시나무 관을 씌운 후 로마 군인들은 또 예수님에게 자주색 긴 옷을 입혔는데 이로써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지니신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주색(scarlet)은 죄(sin)를 상징하고, 가시(thorn)는 아담의 타락 후 저주(curse)의 결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사1:18; 창3:17,18). 다섯째로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며 피를 흘리셨다(마27:35; 막15:24,25; 눅23:33; 요19:16,17; 시22:16,17). 그 당시의 십자가형에는 길이가 17~18cm, 지름이 1cm 정도의 못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큰 못들이 요골과 척골 사이나 족관절 사이에 박히므로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는 성경기록이 성취되면서 상당한 출혈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요19:36; 출12:46; 민9:12; 시34:20). 여섯째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 로마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예수님께서 피를 물과 함께 흘리셨다(요19:28-36). 아마도 폐 속에 차 있던 물(pleural fluid)과 심장의 우심실에 있던 피(blood)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흘려진 예수님의 피로 인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완전히 피로 물든 십자가로 변해 버렸고, 대신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의 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救贖)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9. 구원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제 예수님의 피를 마음에 받아들여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하여 사탄의 권세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인 저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신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며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를 도와 주셔서 이 죄들을 미워하여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받기를 원하나 저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저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를 흘려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며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오직 보혈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저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 승리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을 신뢰하고 주위의 좋은 크리스천들에게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당신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께 당신의 새로운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분께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 당신의 삶은 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나니”(갈3:26)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죄와 마귀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같게 된 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1:7)
2009-05-02 17:40:16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들머리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인간의 존재(存在)가 시작된 후 약 40주 정도의 재태기간을 거쳐 출산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肉)적 출생에 이어서 인간이 ‘한 번 더 태어나’(born again) 얻게 되는 영(靈)적 출생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심지어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영(靈)적 출생에 대해 무지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경우를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영(靈)적 출생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영(靈)적 출생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를 하고자 한다. 먼저 인간론에 대한 몇 가지 명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봄으로써 영(靈)적 출생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이란 존재(存在)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둘째, 인간은 단지 육(肉)적인 존재인가? 셋째, 인간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2. 인간(人間)의 존재(存在)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정의를 내려오고 있지만 필자는 존재(存在)라는 한자어 자체만큼 존재(存在)에 대한 정의를 확연히 드러내 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노아의 두 번째 아들 셈(Shem)의 후손인 창힐(蒼頡)이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 때 황제의 사관으로서 만든 존재(存在)라는 한자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존(存) = 한 일(一) + 사람 인(人) + 아들 자(子), 재(在) = 한 일(一) + 사람 인(人) + 흙 토(土) 즉, 한(一) 사람(人)을 흙(土)으로 만들어 한(一) 사람(人) 남자(子)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상형문자인 ‘존재(存在)’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흙(土)으로 첫(一) 사람(人) 아담(子)을 만드신 사건이 바로 인간이 존재(存在)하게 된 이유인 것을 한자어 존재(存在)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2:7. 이하 흠정역) 그렇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우주만물의 존재(存在)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우리 인간의 존재(存在) 의의와 정체성이 확실케 되는 것이다. 3. 인간(人間)의 구성(構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육(肉)적인 존재로만 창조하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창세기 2장 7절을 다시 보도록 하자.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肉, body)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靈, spirit)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 soul)이 되니라.”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육(肉)과 영(靈)과 혼(魂)으로 이루어진 인격적인 존재(存在)로 창조가 되었다(창1:26; 살전5:23; 히4:12).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복주심(창9:27)을 좇아 중국 땅에 들어온 야벳(Japheth)의 후손들에게 한자라는 상형문자를 만들어준 창힐(蒼頡)이 왜 육(肉)과 영(靈)과 혼(魂)을 이처럼 기록하였는지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1) 육(肉) 육(肉) = 몸(冂) +〔사람 인(人)〕 + 들 입(入) + 사람 인(人) 즉, 육(肉, body)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冂)에 손을 넣으셔서(入) 한 사람(人)을 만드셨고, 이브(人)에게 아담(人)이 들어가(入) 연합(同, 冂)하여 한 몸(肉)이 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창2:21-24).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冂)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入) 그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人)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人)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 이러므로 남자(人)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人)와 연합(同)하여 한 육체(肉)가 될지니라.”(창2:21,22,24) 2) 영(靈) 영(靈) = 비 우(雨) + 입 구(口) + 입 구(口) + 입 구(口) + 지을 공(工) + 사람 인(人) + 사람 인(人) 우(雨)자는 위에 덮어씌운 괄호가 있고 그 괄호 안에 수직선 양 옆으로 짧게 둥글하게 가로 그은 선이 둘씩 있는데 그것은 물이 가득 찬 공간을 뜻한다. 그리고 그 물들을 둘러씌운 괄호는 물들의 표면 위에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구(口)자 세 개는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며 공(工)자와 인(人)자 두 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신 것을 나타내준다(창1:2,27).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靈)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따라서 영(靈, spirit)은 삼위일체(口+口+口) 하나님께서 창조의 클라이맥스로 아담(人)과 이브(人)를 만드시기(工) 위해 물들(雨)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는 창세기 1장 2절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다. 3) 혼(魂) 혼(魂) = 이를 운(云) + 삐침 별(丿) + 밭 전(田) + 사람 인(人) + 사사 사(厶) 귀(鬼) = 삐침 별(丿) + 밭 전(田) + 사람 인(人) + 사사 사(厶) 넋을 가리키는 혼(魂)은 ‘귀신 귀(鬼)’와 ‘속삭이다’를 뜻하는 ‘이를 운(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사탄 또는 마귀(魔鬼)를 나타내는 귀(鬼)자는 한 곳에서 갈라져 네(十) 개의 강이 흐르던 지역(口)인 에덴동산(田)에 사람(人)처럼 말을 하는 존재가 은밀하게(厶) 들어와 활동하는(丿)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창2:10-14; 3:1). 따라서 혼(魂)은 마귀(鬼)가 한 말(云), 곧 마귀가 이브에게 다가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속삭이는 내용을 말해준다(창3:4). 이 말대로 우리의 혼(魂, soul)은 ‘결코 죽지 않는 존재’이다. 4. 사후(死後)의 인간(人間) 인간이 살아 있을 때에는 육(肉)과 영(靈)과 혼(魂)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인간이 죽는 순간 이 셋은 명확히 구분이 되어진다. 즉 육(肉)은 죽음과 동시에 100여종의 원소로 분해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창3:19). 영(靈)은 위로 올라가게 되며(전3:21), 혼(魂)은 심판을 받아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히9:27; 눅16:19-31). 한자어 혼(魂)이 의미하는 대로 우리의 혼(魂)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인간의 혼(魂)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의(義)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罪)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렇다. 역사상 존재하였던 인간 모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義)롭지 못하며 또한 죄인(罪人)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義)와 죄(罪)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의(義) =  양 양(羊) + 손 수(手) + 창 과(戈) 의(義)란 바로 어린 양(羊)을 자신의 손(手)으로 잡고 창(戈)으로 찔렀을 때 나오는 것(寶血)을 의미한다. 즉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寶血)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요1:29,36; 벧전1:19; 요일1:7; 계7:14; 12:11). 죄(罪)를 뜻하는 원래의 글자는 자(自) 밑에 신(辛)이 놓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경 진시황제(秦始皇帝) 때 죄(自 + 辛)자가 임금 황(皇)자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지금의 죄(罪)자로 바꿔 쓰도록 하였다. 원래의 죄(自 + 辛)자 중 먼저 신(辛)자를 보면, 위의 하나님께(亠)(上) 죄를 지은(干) 첫째(一) 사람이 혹독한 고생(辛)을 한다는 뜻이다. 또 신(辛)자는 첫째(一) 사람 또는 한(一) 사람이 하나님의 입(口)에서 나온 말씀(言)을 떠남으로 인간에게 죽음과 같은 혹독한(辛) 고생이 시작된 것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죄(自 + 辛)자는 인간이 스스로(自) 죽음이란 혹독한(辛) 상황을 초래하게 된 사실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다시 로마서 3장 23절로 돌아가 보자. “모든 사람이 죄(罪)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렇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어느 누구도 죽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천국에 갈 수가 없다. 5. 죄(罪)의 대가(代價) 그런데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자신은 죄(罪)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속 중심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시44:21; 렘17:10; 히4:13; 계2:23).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마5:28) 또 요한일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자.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당신이 음욕을 품은 적이 있다면, 또 누구를 미워한 적이 있다면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판단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는 다 죄인인데 죄(罪)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된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罪)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罪)로 말미암아 사망(死亡)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罪)를 범하였으므로 사망(死亡)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禁)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 모두가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인데 죄(罪)의 대가는 사망(死亡)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같은 설명이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상) 그런데 죄(罪)의 대가인 사망(死亡)은 ‘육(肉)적 사망’과 ‘영(靈)적 사망’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육신적으로 죽는다면 그 사람은 불못(계20:10-15; 21:8)이라고 불리는 ‘둘째 사망’ 곧 ‘영(靈)적 사망’의 고통을 영원토록 겪어야 한다. 즉 죄인인 사람은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영존하는 불못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다. 한 번 지옥에 가면 영원토록 그곳에 머물며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눅16:19-31). 6. 영적(靈的) 출생(出生) 그런데 아주 놀랍고도 복된 소식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죄 값을 다 치르셨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다 해결하셨다(히10:10).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寶血)’를 흘려 돌아가셨다(벧전1:19).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씻어주실 수 있는 ‘무죄(無罪)한 피’를 흘리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불못의 영원한 고통을 대신 받으셨다(마27:4; 요일1:7). 따라서 이제 이 모든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6:23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니라.”(롬6:23하) 다시 말해 예수님을 자신의 인격적인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 언제 이 세상을 떠나가든지 지옥에 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마1:21; 요1:12; 3:16). 그러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born again)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이요,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요, 천국시민권자가 되는 것이요,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호적에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금 출생신고가 되는 것이다(요1:12; 3:3-7; 롬8:14-17; 고후5:17; 빌3:20; 계21:27; 22:4) 7. 마무리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구원받는 방법’(how to be saved)을 우리에게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독자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자신의 인격적인 구원자(Saviour)와 주님(Lord)으로 모셔들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다음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인 저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게 하신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며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를 도와 주셔서 이 죄들을 미워하여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받기를 원하나 저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저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며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을 신뢰하고 주위의 좋은 크리스천들에게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당신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께 당신의 새로운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분께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 당신의 삶은 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나니”(갈3:26)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2009-05-02 17:39:23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들머리   요즈음 대한민국호(號)가 엄청난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법무장관이 건국 이래 최초로 지휘권을 발동하여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한 친김(親金)주의자에 대해 불구속을 지시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제 대한민국호의 좌초는 시간문제인 것 같다. 비단 동국대 강 교수뿐이랴. 적지 않은 소위 지식인들과 종교인들과 예술인들과 시민단체들이 한 목소리로 반미, 반일, 민족, 자주, 민주, 인권, 자유, 평등, 평화, 통일 등을 합창하며 대한민국호의 파선을 재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외침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시작이 되었지만 특히 문민정부라는 이념적 과도기를 거치고난 후 이제 완전한 친김(親金)내지 종김(從金) 정부인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들어오면서 그 극(極)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05년 한해만 보더라도, 가장 흥행이 되었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그 아류(?)라 할 수도 있는 ‘천군’ 등을 통해 판타지로 포장된 폐쇄적 민족주의와 북존남비(北尊南卑)의 메시지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너무도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고, 또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과 같은 일견 과격한 액션은 그 스펙트럼을 확실히 하면서 그 동안 혼돈된 국가관과 민족관의 이슬에 젖어버린 이들에게 끝내기 수순의 퍼포먼스로 기획, 실행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대한민국호의 좌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금의 상황은 2003년 노동당에서 제작한 ‘력사적인 6. 15 북남 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대중투쟁의 조직과 지도방법’(이하 ‘노동당 문서’라 칭함)에 따른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국민도 드물지만 또 대부분의 국민이 이와 같은 김정일의 책략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일 뿐이다. 노동당 문서 중 ‘전략적 지도원칙’에 이은 ‘전략전술적 지도방법’을 보면 “우리 당의 정책적 요구를 반영하여 혁명발전의 요구와 군중의 의식수준에 맞게 제시하여야 할 것”을 가장 먼저 지적하고 있다. 이는 ‘조선노동당’을 지칭하는 ‘우리 당’의 정치적 기본구호를 군중의 요구와 정서,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구체화하여 작성해서 제시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이 노동당 문서는 “현 시기 대중투쟁에서는 ‘자주’, ‘민주’, ‘통일’을 자기 실정에 맞게 구체화한 구호를 들고 나가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2천만이 갇혀 있는 저 거대한 북녘의 수용소로부터 전달되고 있는 이러한 대중투쟁의 구호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거짓과 기만의 술수를 확인하고 아울러 이 나라를 향한 주님의 긍휼을 함께 구해보도록 하자. 2. 민족(民族, nation, race) 민족이란 말은 다의적(多義的)이어서 그 정의를 내리기가 무척 어렵지만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유행어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민족이란 너무나도 고귀하고 또 선험적(先驗的)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인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끼리’라고 말할 때 그 ‘우리’는 누구인지 정말 우리는 냉철히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우리’ 속에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온 정치가, 법조인, 자유언론인, 국군, 기업인, 중산층 등도 들어 있어야 마땅하며 아울러 해방이후 북한 공산화 과정에서 고향의 집과 땅을 모두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140만 명의 실향민도 ‘우리’에 포함이 되어야 하고 또 지금도 끊임없이 탈북하여 중국, 몽고, 시베리아, 동남아 각지를 유랑하며 남한으로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수십만의 탈북자들도 마땅히 포함이 되어야 한다. 이뿐이랴. 소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십만의 동포들과 또 동요계층 및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갖은 박탈과 억압 속에 신음하는 약 1,500만 명 이상의 북녘동포들도 ‘우리’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또 범위를 넓혀 보면 세계 각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해외동포들은 물론 구미 선진국인 독일, 프랑스, 미국보다 한국이 좋아 한국인이 된 이한우씨나 이다도시, 로버트 할리 같은 이들도 ‘우리’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다니엘 헤이와는 반대로 최근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수많은 버림받은 코시안(Kosian)들도 ‘당신’이라며 ‘우리’ 밖으로 내몰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해는 역사 속에서 너무도 잘 가르쳐져 왔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학습능력은 실로 미천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나치의 아리안주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나 대동아공영(大東亞共營)을 부르짖으며 일본이 한반도와 아시아를 침탈했던 것도 그렇고 또 오늘날도 오대양육대주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각종 인종분규들도 다 ‘민족’이란 슬로건 하에 자행되고 있는 집단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지만 가까이는 조선시대의 사색당파(四色黨派)처럼 참여정부에 들어서까지도 더욱 불거지고 있는 지역감정 및 각종 님비현상들도 이러한 폐쇄적 민족주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보편적 인류애를 그 바탕으로 하지 않는 ‘민족’이란 구호는 단지 증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의 외침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정일의 아버지(김일성이라 하는 김성주)는 동족을 치기 위하여 스탈린과 모택동 등 외세를 불러들여 300만 명의 남북한 동포를 죽였고 또 김정일 자신은 여러 가지 구제 수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willful negligence)으로 북한동포 30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다. 그런데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100일에 즈음하여 소위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의 담화에서 “지금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하고 있다”라고 했으며 평양방송도 1995년에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이라고도 했다. 더 나아가 1996년 평양방송은 ‘김일성 민족’에 이어 다음과 같이 ‘김정일 민족’을 새롭게 소개하면서 결국 그들이 선동하는 ‘민족’이란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사는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 태양이 영원하듯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은 영원무궁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결코 ‘김일성 민족’도 ‘김정일 민족’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후손이요, 곧 하나님의 자손일 뿐이다(창1:26; 행17:26-29),. “또 그분께서 인류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작정하신 때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하심이요, 혹시라도 그분을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행17:26,27상, 이하 흠정역) 3. 자주(自主, independence, autonomy) 스스로가 주인이란 한자어 뜻풀이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자주(自主)란 북녘에서건 남녘에서건 민족(국가)이 주체가 되어 타민족(타국가)의 도움을 받지 말고 우리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보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미 전술하였듯이 김일성은 외세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6.25라고 하는 사대주의적 전쟁을 일으킨 바가 있다. 따라서 김일성에겐 애사당초 ‘자주’를 외칠 자격이 전무한 것이다. 그러기에 북한은 남한이 먼저 북침하였던 것이라고 전 인민들을 세뇌시켜온 것이며 또 최근에는 강 교수 등을 통해 ‘통일전쟁’이라는 또 다른 거짓된 내재적 접근법을 선전하도록 하여 ‘자주’에 대한 원초적 반역을 남한의 국민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외세를 등에 업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사실은 (지금도 살아 계시는 수백만의 전쟁세대들의 증언은 차치하고서라도) 중국 단동에 소재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 곧 1950년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에게 보낸 자필편지 등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입증이 된다. 또한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동양학과 아나톨리 바실레비치 토르크노프 교수가 문서 해지된 자료들을 근거로 펴낸 ‘조선전쟁의 수수께끼와 진실’이나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기자로 근무하면서 평양특파원을 지낸 바도 있는 하기와라 료(萩原 遼)가 워싱턴에서 6.25 때 미군이 북한지역에서 수거해온 160만 페이지의 방대한 자료를 모두 섭렵한 끝에 출간한 ‘조선전쟁-김일성과 맥아더의 음모’에서도 김일성의 비(非)자주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르고 난 이후엔 강대국에서일지라도 자주국방의 개념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생겨난 것이며 또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나 북중 및 북소 군사동맹도 생기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정치와 국방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경제, 과학, 문화 등 우리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자주’는 그 폐쇄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이 바로 21세기 지구촌의 모습이다. 특히나 에너지와 식량을 자기들이 원수로 여기는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오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자주’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거짓과 증오와 교만 속에 ‘자주’를 외쳐온 김씨왕조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북한이 세계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필연적 순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잠10:18; 16:18).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4. 민주(民主, popular rule, democracy) 민주주의란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어(語)의 ‘demokratia’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demo(국민)’와 ‘kratos(지배)’의 두 낱말이 합친 것으로서 ‘국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전적 정의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으로서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는 뜻이다. ‘직접민주주의’나 ‘대의(代議)민주주의’ 또는 ‘사회적 민주주의’ 등 민주주의의 해석과 실행에는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으나 기본원칙은 같은데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은 대략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민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절대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적어도 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민권(民權)을 보장하여야 하는데 이 민권에는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포함되며 적법절차 없이 국민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 넷째,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여야 한다. 정부의 관리들은 계속적으로 의회와 언론에서 반대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독립된 사법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섯째, 정권교체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거라는 형식은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오직 노동당 후보 1인이 후보로 나와 100%의 찬성으로 당선되는 기가 막힌 선거만이 있으며, 노조도 없고 노동당이 주관하지 않는 언론도 전무한 상황이다. 또 정부의 시책은 인민의 복리증진이 우선이 아니라 김정일을 정점으로 한 선군(先軍)정치여서 인민들은 김정일과 군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정부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나 반대의견도 결코 허락될 수 없고 입법 및 사법제도도 유명무실한 것이며 정권교체는커녕 오직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는 것이 소위 ‘조선민주주의’인 것이다. “화 있을진저, 불결하고 더러운 여자 곧 학대하는 도시여! 그녀 안에 있는 통치자들은 울부짖는 사자요, 그녀의 재판관들은 뼈를 갉아먹되 이튿날까지 기다리지 아니하는 저녁때의 이리요, 그녀의 대언자들은 경솔하고 배신하는 자들이요, 그녀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침해(侵害)한 자들이로다.”(습3:1,3,4) 5. 인권(人權, human rights, civil liberties) 1966년 제21차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인권의 국제적 보장을 위하여 채택되어 1976년에 발효된 ‘국제인권규약’(國際人權規約, International Covenants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국제인권규약은 ‘조약’(條約, treaty)으로서 체약국(締約國)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인 A규약은 이른바 생존권적 기본권을 대상으로 노동기본권·사회보장권·생활향상·교육권 등을 각 체약국이 그들의 입법조치로써 실현 달성할 것을 내용으로 하며, 이의 실시상황을 UN에 보고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인 B규약은 이른바 자유권적 기본권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체약국이 이를 존중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이것의 실시 확보를 위하여 인권심사위원회와 그리고 필요에 따라 특별조정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선택의정서 참가국에 대해서는 개인이 인권심사위원회에 직접 청원(請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러한 국제연합(UN)의 방침을 좇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중고교생 두발제한은 인권침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교육부에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등 다방면에서의 ‘인권’ 보호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북한은 어떠한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아리랑 공연을 참관하였던 이들에 의해 “어쩌면 저 많은 사람들이 하나와 같이 움직일까?”, “무슨 힘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참가시킬 수 있는가?”라며 기적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데 대하여 쏟아지는 놀라운 찬사들이 우리 언론에도 보도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공연의 꽃이라 할 2만 명 규모의 대규모 카드섹션에 참가한 학생들이 수개월간 겪어야 했던 인권침해 덕에 아리랑 공연이 뜨게 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곧 불량학생이라고 낙인찍혀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 몽둥이질을 감수하고 소변을 참아 방광염에 걸리는 등 그 어린 학생들의 인권이 처참히 짓밟힘을 당한 결과 그러한 기적 같은 공연이 가능하게 된 사실은 감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이 핵심계층인 평양의 학생들에게 뿐이랴? 수많은 탈북자들의 수기 곧 ‘수용소의 노래’,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 ‘김정일 로열 패밀리’, ‘김정일 요리사’, ‘DMZ의 봄’, ‘두만강 건너는 예수’, ‘내래 예수 믿갔시오’ 등에 나오는 도저히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보면 북한의 인권상황은 한마디로 ‘인권’이란 단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의로운 자들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기뻐하나 사악한 자들이 다스리면 백성이 애곡하느니라.”(잠29:2) 6. 자유(自由, freedom, liberties) 자유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내용을 획일적으로 정식화(定式化)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자유의 원리의 공통된 내용을 중심으로 파악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보편적 인권’의 원리로서 정신적·사회적 활동에 있어서의 각 개인의 자유와 발의권(initiative)의 원리이다. 이것은 개성과 그 활동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며, 이성적 전달(communication)을 통해서 보다 나은 것이 형성될 것을 믿는 입장이다. 따라서 개인의 정신적·사회적 활동의 자유에 대한 비인간적·강제적 구속과 획일화를 가능한 한 제거하려 한다. 예컨대 시민적 자유(civil liberties) 곧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고와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를 비롯하여 재판에서 정당한 절차(due process)를 존중하는 것 등은 이 원리의 전형적 표현이다. 둘째는 ‘보편적 시민권’의 원리로서 이 시민적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정치제도와 정책과 기관을 비판하고, 만들고, 고칠 수 있는 자유를 모든 남녀에게 인정하는 원리이다. 정치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권리로서의 참정권(參政權), 정치에 있어서의 토론과 설득과정의 중시, 정치에 대한 사고와 비판의 자유, 보도에의 권리(알 권리), 정치적 집회·결사활동의 자유, 소수자의 권리보호 등의 정치적 자유가 여기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상기한 자유의 범주 가운데 어떤 항목이 북한에서는 가능한 것일까?  신체의 자유? 죄명도 모르고 즉시 수용소행이 비일비재하다. 거주·이전의 자유? 통행증 없이는 군과 군 또는 도와 도 사이의 경계도 넘어갈 수 없다. 종교의 자유? 지금도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고 있다. 사고와 표현의 자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만이 실질적인 최고 행위규범이다. 집회․결사의 자유? 어떤 노조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이다. 직업선택의 자유? 전적으로 노동당이 결정한다. 재판에서의 정당한 절차의 존중? 남편이 자기 부인을 직접 공개처형하기도 한다. 참정권? 오직 김정일에게만 있다. 알 권리? 이것도 오직 김정일에게만 있다. 소수자의 권리보호? 평양에서조차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국대 강 교수는 북한에도 자유가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약 강 교수가 북한에 가서 그가 주장하는 대로 “6.25전쟁은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다”라고 한마디만 해보면 북한에 자유가 있는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7. 평등(平等, equality, impartiality) 평등사상은 고대 노예제시대에는 아테네의 자유민 사이에서 ‘정치적 평등’의 실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중세암흑기 이후에는 성경보급의 영향으로 ‘하나님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노제와 함께 공장제 수공업을 기초로 하는 도시가 발전하여 시민계급이 형성됨에 따라 ‘법 앞의 평등’(equality before the law)이라는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그래서 결국 평등사상은 신분제적 불평등을 바탕으로 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성장·발전함에 따라 일반화가 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도 헌법 제11조에서 다음과 같이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어떠한 형태로도 창설할 수 없으며, 훈장(勳章) 등의 영전은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따르지 않는다.” 이외에도 우리 헌법에 명시된 ‘여성근로자의 부당한 차별의 금지, 혼인과 가족생활의 양성(兩性)의 평등’(36조), ‘교육의 기회균등’(31조), ‘선거권과 투표권의 평등’(41·67조) 등은 모두 ‘법 앞의 평등’의 기본원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평등한 사회인 것일까? 일례로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약 45억 달러의 비자금을 맡겨두고 식량구입에는 한푼도 쓰지 않아 수백만의 동포들을 굶겨죽이면서도 세계 최고급 꼬냑과 곰발바닥 요리와 매일 매일 비행기로 실어 나르는 파리의 아이스크림과 수단산(産) 수박을 즐기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초근목피(草根木皮)도 못 구해 인육(人肉)을 먹기도 하는 수많은 인민들이 있는 사회가 곧 북조선 ‘김정일왕국’이다. 크게는 20%의 핵심계층, 60%의 동요계층, 20%의 적대계층으로, 작게는 51계층으로 인민들을 충성도에 따라 세세히 분류하여 모든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곳이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멸망하고 주의 원수들은 어린양의 기름같이 되리니 그들은 타 버리고 연기가 되어 사라지리로다.”(시37:20) 8. 평화(平和, peace, harmony) 굳이 네이버 국어사전의 ‘평화’에 대한 정의(① 평온하고 화목(和睦)함. ② 전쟁이 없이 세상이 평온함)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평화’의 반대 개념이 ‘전쟁’인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어찌되었든 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후보 시절 “남북관계만 잘되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좋다”내지는 거듭 “전쟁이냐 평화냐”를 외친 결과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 대통령과 온 국민의 바람대로 지금 북한은 남한과 전쟁할 준비를 포기하고 있는 중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래 전 박영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했던 ‘서울 불바다’ 발언은 사실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군사평론가 지만원 박사에 의하면 북한은 남한과 달리 전술무기 외에 전략무기도 가지고 있는데 이 전략무기들에는 ‘서울 불바다’ 무기,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장거리 유도탄 등이 있다고 한다. 서울 불바다 무기는 아름드리 굵기의 야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프로그 미사일, 170mm 야포, 한 번 쏘았다 하면 36발이 거의 동시에 날아가는 240mm 구경의 공포의 다연장 로켓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대구경 포들은 수도권 전역에 분당 1만발 정도의 포탄을 쏟아 부을 수 있다. 또한 북한은 사정거리 300km의 스커드B, 500km의 스커드C를 600기나 남한 공격을 위해 배치해놓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유도탄의 중량은 500kg으로 한 발을 가지고도 ‘삼풍 참사’를 재현해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유도탄이라면 한국의 어느 도시든 순식간에 초토화할 수 있으며 어느 원자력발전소를 겨냥해 수백 대를 집중 사격하면 한국이 체르노빌로 변할 수 있다. 아울러 북한은 남한 인구를 3회 이상 살상할 수 있는 엄청난 화학탄과 생물학 무기를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한 다양한 투발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 불바다’ 무기와 유도탄 공격뿐 아니라 이러한 화학무기, 생물학 무기 등에 대해서도 우리에겐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2월 북한은 이들 기존의 엄청난 무기 외에 ‘핵무기’를 갖고 있음을 온 세계에 선언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선군’(先軍)정치를 내세워 당도 인민도 모두 다 군(軍)에 귀속시킨 김정일에 의해 이처럼 ‘조선인민 공화국’은 시나브로 ‘인민군 공화국’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리게 된 것이다(미3:5). “나는 화평을 원하나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120:7) 9. 통일(統一, unification, uniformity) 황장엽씨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하여’란 제목의 글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방안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안’과 관련하여 한 김일성의 발언내용을 참고로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며 “김일성이 연방제와 관련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핵심간부들에게 강조하였다”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연방제는 통일전선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적 방안이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북과 남이 자유롭게 내왕하면서 자기 제도와 자기 사상을 선전하게 되면 공화국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된 국가이기 때문에 조금도 영향을 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남조선은 사상적으로 분열된 자유주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조선에 나가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주체사상 선전을 대대적으로 하면 적어도 남조선 주민의 절반은 쟁취할 수 있다. 지금 인구 비례로 보면 남조선은 우리의 2배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실시하여 우리가 남조선 주민의 절반을 쟁취하는 날에는 공화국의 1과 쟁취한 남조선주민의 1을 합하여 우리 편이 2가 되고 남조선이 1로 된다. 이렇게 되면 총선거를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되고 전쟁을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된다. -중략- 그러나 태권도 부대를 한 100만 명 조직하여 권총이나 한 자루씩 채워 남조선에 내보내면 같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이남 출신이고 누가 이북 출신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남침이라는 구실을 주지 않고도 능히 우리가 남조선의 친북진보세력과 힘을 합쳐 정권을 잡을 수 있다. -중략- 연방제를 실시하여도 무력에 대한 통수권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무력을 쓸 수 있다. 이번에 국방위원장이 총사령관을 겸하도록 헌법을 고친 것은 그 때문이다.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총비서이기 때문에 국가수반과는 관계가 없다.” 이 글에서 보듯 북한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이란 단지 대남적화 통일의 전술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남북관계만 잘 되면’이라는 코드의 주가가 날로 치솟고 있으며 심지어는 강 교수같이 아예 ‘통일내전(內戰)’인 6.25전쟁이 맥아더 때문에 한 달 만에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지 않은 것을 노골적으로 원통해 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즉 한반도의 무조건 통일을 그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높은 가치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날로 팽배해 지고 있는 것이다. 통일? 물론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된 민주, 인권, 자유, 평등, 평화 등 ‘추구하는 가치가 실질적으로 같아야’ 하는 것이다(고후6:14-16상; 요이1:10,11)! “누구든지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채 너희에게 나아오거든 그를 너희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축복 인사도 하지 말지니 이는 그에게 축복 인사를 하는 자가 그의 악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자이기 때문이니라.”(요이1:10,11) 10. 마무리 인질사건이 며칠씩이나 계속되면서 범인이 인질을 방패로 하고 버티게 되면 인질로 사로잡힌 사람들 간에 기묘한 감정이 생겨서 인질범을 숭배하게 된다. 이것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불리는 병적 현상이다. 실제로 1973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와 인질이 된 여성 간에 연애감정이 싹터서 사건 해결 후 그 둘이 결혼한 예가 있다.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은 범인을 미워하기는커녕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동국대 강 교수와 같은 친김(親金)내지 종김(從金) 세력들은 마치 인질이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범인에게 감화되듯이 핵을 무기로 남북한을 인질로 삼고 있는 김정일을 숭배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있다. 특별히 북녘의 저 거대한 수용소로부터 전달되는 민족, 자주, 민주, 인권, 자유, 평등, 평화, 통일 등을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합창하며 대한민국호의 침몰을 앙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수용소의 노래’는 사실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채택된 ‘고전적인 사탄의 전략’의 김정일 버전으로서 이미 이브가 넘어간 적이 있었듯이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또 당할 수 있는 것이다(창3:1-5).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상)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여!”(사5:20)
2009-05-02 17:38:29 | 관리자
영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내세 혹은 영원에 대한 의문을 품고 산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은 사람의 영원성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구원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나는 대부분의 세상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으로서 한 사람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보다 많으면 그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 선행, 고행, 예배, 문화, 희생, 자선 등을 통해 스스로의 행위를 가지고 영원하며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이런 것을 가리켜 가인의 길이요, 종교라고 부른다(유11).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에 종교를 가르치는 자들을 향해 ‘독사들의 세대’라고 꾸짖으셨다(마3:7; 23:33).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서신서에서 3회나 종교라는 말을 쓰면서 종교 체제 하에서의 부정적인 것을 기술하였다(행26:5; 갈1:13-14). 종교는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오히려 지옥 불 속으로 그를 밀어 넣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롬3:23).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서면 다 더러운 존재로 판명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람 안에 있는 의는 모두 더러운 누더기라는 데 있다(사64:6). 그러므로 피조 세계의 외부로부터 오는 의 즉 사람을 지은 창조주가 베푸는 의가 아니고는 그분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 된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사람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닿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죄 없는 그분께서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죄로 인한 형벌을 다 담당하고 피를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사 그 뒤에 부활의 소망이 되신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고전15:2-4; 20-23).
2009-05-02 17:37:3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