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원래 페니키아였는데 후에 시리아 왕국과 병합되면서 페니키아라는 이름이 추가되어 ‘시리아의 페니키아’라는 뜻의 수로보니게가 되었다. 막7:26의 가나안 여인은 페니키아 사람으로 그 당시 페니키아가 시리아의 일부였으므로 수로보니게 여인이라 불렸다. 마태는 이 여인을 간략하게 가나안 여인이라 불렀는데(마15:22) 이는 그 지역에 고대로부터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시돈은 가나안의 맏아들이었다(창10:15).
페니키아 참조.
2009-07-18 22:01:53 | 관리자
짐수레.
이것은 예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용되곤 했지만 그곳의 길이 험악해서 바퀴달린 마차 등이 지나다니기가 어려웠으므로 실제로 수레는 주로 농사짓는 일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사5:18; 28:27-28). 한편 사람이 타는 수레는 야곱을 이집트로 데리고 갈 때 사용되었다(창45:27; 민7:3-9). 보통 암송아지가 수레를 끌었으며(삼상6:7) 거기에는 나무 바퀴가 달렸다.
2009-07-18 22:01:25 | 관리자
잇사갈의 도시(수19:18).
블레셋 사람들은 수넴의 큰 평야에 진을 쳤고(삼상28:4) 사울은 길보아에 진을 쳤다. 다윗의 말년에 그를 품어 준 아비삭은 수넴 출신이었고(왕상1:3) 엘리사를 통해 자기의 죽은 아들을 돌려받은 여인도 수넴 출신이었다(왕하4:8-37).
2009-07-18 22:01:01 | 관리자
이것은 보통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난과 죽음을 뜻한다(행1:3). 또 passion은 사람의 성정을 뜻하기도 한다(행14:15; 약5:17).
2009-07-18 22:00:05 | 관리자
시삭이 유다를 침공할 때 그와 연합한 사람들(대하12:3).
2009-07-18 21:59:36 | 관리자
짐승을 상대로 성행위를 하는 것.
2009-07-18 21:59:12 | 관리자
세겜 참조.
2009-07-18 21:58:55 | 관리자
차차 줄어져 약해지다.
2009-07-18 21:58:31 | 관리자
쇠는 창조의 시작부터 알려져 왔고 널리 사용되었으며(창4:22) 모세는 종종 쇠를 언급한다.
그는 이집트의 속박을 쇠 용광로라고 불렀으며 가나안 족속의 쇠 침상 등에 대해 언급했다(신3:11; 4:20; 8:9). 고대에도 여러 가지 연장과 기구를 쇠로 만들었고 또 성전을 지을 때에도 많은 양의 쇠가 사용되었다(대상29:2, 7). 쇠는 또 노예 생활, 힘, 완고함, 고통 등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신28:48; 욥40:18; 사48:4; 렘1:18; 겔22:18, 20; 단2:33). “쇠가 쇠를 날카롭게 한다.”는 말씀(잠27:17)은 친구가 있으면 더 큰 확신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고 배반하는 자신의 백성에게 하늘을 놋으로 땅을 쇠로 만들어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곧 땅이 황폐하게 되고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을 뜻한다. 철 병거는 쇠로 된 대못과 낫이 달린 병거를 뜻한다.
병거 참조.
2009-07-18 21:57:58 | 관리자
Pot으로 번역된 히브리말과 그리스말은 종류가 많다(삿6:19; 시58:9; 전7:6; 히9:4).
이 말은 손 닦는 그릇(시60:8), 솥(왕하 4:38-41; 전7:6)으로 번역되었다. 예레미야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환상으로 북쪽에서 화가 임할 것을 뜻하는 끓는 가마솥을 보았다(렘1:13-14). 사실 그의 대언의 중심 주제는 북에서 임하는 재앙 즉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가져올 재앙이었다. 대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괜찮을 것이라고 낙관론을 펴는 예루살렘 백성의 그릇된 주장을 가마솥과 고기의 상징을 통해 경고하였다(겔11:1-12).
2009-07-18 21:57:21 | 관리자
희생물로 쓰인 정결한 짐승.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 입술의 송아지로 보답하리이다.”(호14:2)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입의 찬양과 기도를 희생물로 드리겠다는 뜻이다(히13:15). 고대 사람들은 기름진 송아지를 최고로 좋은 음식으로 여겼다(창18:7; 암6:4; 눅15:23). “그들이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갔다.”(렘34:18)는 말은 고대의 언약의 풍습을 보여 준다. 이 같은 의식을 통해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은 만일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 자기가 송아지처럼 조각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창15:9-21).
유대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사이에 아론을 부추겨서 백성의 귀고리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게 경배했으나 이런 우상숭배에는 저속하고 음란한 일이 동반되었고 그 결과 3,000명이 죽게 되었다(출32).
여로보암은 자기 영토의 최북단과 최남단에 각각 금송아지 하나씩을 만들어 세우고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예루살렘으로 경배하러 가서 그곳의 유다 사람들과 동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으며(왕상12:25-30) 그 결과 백성은 자기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잊게 되었다. 그 이후에 여로보암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자’라는 불명예의 호칭을 갖게 되었다(왕하17:21). 대언자 호세아는 종종 벧엘의 금송아지와 그것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해 아시리아 사람들이 백성과 우상을 산산조각 낼 것을 언급했다.
벧엘, 벧아웬 참조.
2009-07-18 21:56:51 | 관리자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아들.
대언자 나단은 그를 여디디야 즉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불렀다(삼하12:25). 그는 약속의 자식이었으며(대상22:9-10) 18세에 자기 형 아도니야가 노리던 왕권을 받아 왕이 되었다. 성경은 그가 자기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무엇보다 지혜를 구하고 또 그것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복을 받았음을 기록한다(마6:33). 그래서 그의 지혜와 명철은 동방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는 지혜뿐만 아니라 세상의 여러 가지 복도 풍성하게 받았다. 그는 통치권을 넓게 펴서 유프라테스에까지 이르렀고 홍해의 에시온게벨도 차지하였다. 사울, 다윗, 솔로몬의 영토 지도 참조(30).
또한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의 뜻에 따라 주님을 위해 극도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외에도 여러 건물을 많이 지었으며 또 두로, 이집트, 아라비아, 인도, 바빌론 등과 무역하여 자기뿐 아니라 온 백성에게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풍족하고 명예를 많이 소유한 인물이었지만 번영과 함께 들어온 유혹에 빠져 사치하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잊었으며 그래서 각종 오락에 탐닉하고 자기 아내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며 하나님의 호의를 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서 그를 버리지 않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회복시켰으며 이것은 그가 기록한 말씀 속에 잘 드러난다.
그는 40년 동안 평화롭게 통치하다가 죽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역대기하 1-9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기록 중에서 특히 전도서는 사람의 본성의 연약함과 지혜와 학식의 무기력함, 번영을 통한 시험과 위기 그리고 이 세상의 것으로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 등을 잘 보여 준다. 솔로몬의 기록은 자연과학과 철학과 도덕을 총망라하였다(왕상4:32-33).
2009-07-18 21:56:10 | 관리자
동양 사람들은 손님 접대를 가장 큰 미덕의 하나로 간주하였으며 성경에는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손님들을 접대한 일(창18:1-33), 욥의 접대(욥31:17) 등이 이런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집에 가서 문안 인사를 한 뒤 그 집에 들어가 자기들 앞에 차려진 것을 먹고 마시라는 명령을 받았다(눅10:7). 이러한 손님 접대 관습이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야고보와 요한이 무례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눅9:52-56)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로 인한 엄격한 심판도 이해할 수 있다(삿19:1-30; 20:1-48).
또한 이러한 손님 접대에는 손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깊게 깔려 있으며 이것은 시41:9에서 시편 기자가 자기가 신뢰한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의 감정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준다. 손님 대접의 아름다운 예는 창18:1-33; 19:1-38; 출2:20; 삿13:15; 19:1-9 등에서 발견된다. 어떤 이들 가운데는 손님을 접대하다가 알지 못한 채 천사를 접대한 적도 있었다(히13:2).
초기 그리스도인들 역시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롬12:13; 딤전5:10). 왜냐하면 주님께서 “누구든지 내게 속한 자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40-42; 25:34-45).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라도 이런 의무를 이행하려 했으며 그 결과 심지어 이교도들조차도 그들을 흠모하였다. 그들은 나그네들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특별히 믿음의 집안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성도들은 추천서를 가지고 여행하였는데 여기에는 그들의 순수한 믿음이 증언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에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가 바로 칭찬과 추천의 글을 담은 그런 편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2009-07-18 21:55:06 | 관리자
손은 종종 힘과 능력을 나타냈으며 그래서 “누구의 손에 있다.”는 것은 “그의 권능 안에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손을 잡거나 손을 치는 것은 계약이나 구매에 동의한다는 것을 뜻하며 또 손을 든다는 것은 맹세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At the right hand of God, 여기서도 실제로는 hand가 쓰였다) 명예와 권능과 행복이 있다(시16:11; 45:9; 110:1; 마26:64; 골3:1). 유대인들은 대개 동쪽을 보면서 말하려 하므로 오른쪽은 남쪽이 된다. 안수하는 것은 직분을 거룩히 구분하는 것, 축복하는 것, 하늘에 속한 선물을 주는 것 등을 나타냈다(창48:14; 민8:10; 27:18; 막10:16; 행6:6; 19:6; 딤전4:14).
속죄 염소 위에 안수하는 것은 백성의 죄를 염소의 머리에 전가시키는 것을 나타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나타냈다.
2009-07-18 21:54:28 | 관리자
죄 헌물 참조.
2009-07-18 21:53:57 | 관리자
이것은 히브리말로 ‘아사셀’이며 속죄일에 행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레16:8, 10, 26).
속죄 염소는 희생물로 잡아서 드리지 않고 살려서 빈들로 내보냈는데 이것은 곧 그 염소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지고 그분의 임재 밖으로 떠나 그분께서 그것을 기억하지 않게 한다는 것을 뜻하였다(시103:12). 속죄 참조.
2009-07-18 21:53:34 | 관리자
속죄일은 유대인들이 매년 안식하면서 금식하는 가운데 지키는 엄숙한 날로서 7월 10일에 즉 초막절이 시작되기 5일 전에 지킨 중요한 날이었다(레25:9). 속죄일에 행하는 모든 일은 레16:1-34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날 대제사장은 홀로 지성소에 들어갔으며(히9:7) 이 날 행하는 여러 의식 때문에 몇 차례 거기에 들어가야 했다. 처음에 그는 금향로와 향을 담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갔고 그 뒤에 자기와 제사장들의 죄들로 인하여 바친 수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으며 손가락에 그것을 적셔 여덟 번 즉 한 번은 긍휼의 자리 위에 일곱 번은 긍휼의 자리 앞에 성막의 휘장을 향해 뿌렸다.
그 뒤 그는 백성의 죄 헌물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 수소의 피로 한 것 같이 뿌렸다.
한편 이 날에는 속죄 염소와 관련된 의식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두 마리 염소를 준비해서 제비를 뽑아 하나는 희생물로 주님께 드렸고 다른 하나는 속죄 염소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가게 하였다. 이 모든 의식은 완전한 희생 예물인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예표였다. 모든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이런 희생이 의미하는 영적 의미를 분별해서 알고 있었다(히9:1-28; 10:1-39; 11:1-40).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엄숙한 날이었으며 금식하고 죄를 자백하는 날이었다.
2009-07-18 21:53:03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해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것.
이 대신 속죄의 죽음으로 인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복음의 위대한 특징이며 신구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용어와 실례로 묘사되었다.
구속, 희생물 참조.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은 둘이 되어 서로 간격이 벌어진 채 분리되었는데 속죄의 목적은 이 둘을 합쳐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법을 어긴 사람이나 혹은 대리자나 보증인에게 내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법은 아무 효력도 없게 된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법이 아니라 그것의 형벌이다. 속죄란 행정부에 존재하는 예비규정으로 법률 위반에 따른 형벌로부터 범법자를 사면하기 위해 공의롭고 안전하며 받아들일 만한 근거 위에 마련한 법률 규정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법을 만드셨고 그것을 어길 경우의 형벌을 제정하셨다(창2:16-17).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금지된 열매를 먹어 그분의 법을 어기고 그로 인해 죽게 되었으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어기지 않고서는 죽음의 형벌을 철회할 수 없게 되었다. 또 그분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아담과 하와는 미래에도 계속해서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형벌은 창조물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형벌을 내려야만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마련하여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하게 만든 존재 즉 대속자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대신 속죄 선도 참조(89).
그러나 이러한 대속 사역은 즉시로 준비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실제로 받으신 것은 그로부터 약 400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 4000년 동안 수소나 염소 또는 흠 없는 어린양이 히브리 사람들의 제단 위에서 타면서 연기를 냈는데 이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들의 사면이 없음을 시청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유월절마다 어린양의 피를 뿌린 것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야 했던 분을 암시하였다(요1:29). 드디어 참된 희생물을 드릴 충만한 때가 이르자(갈4:4)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켰고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셨다(롬3:26).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특별한 희생 체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속죄를 얻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위한 유일한 죄 헌물이요,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분께서 자신의 몸을 단 한 번 영원하게 드려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했으므로 그분 이후에는 더 이상 짐승의 희생 예물이 필요 없다(요1:29; 고전5:7; 엡1:7; 히9:26).
한편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순히 대속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아들에게서 죄의 대가를 거둘 정도로 공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롬7:4).
어떤 이들은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예수님의 속죄가 적용된다는 ‘제한 속죄’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몇몇 사람만을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시지 않고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돌아가셨다. 그 죽음의 형벌로 인해 그분께서는 죄의 저주로부터 인류를 구속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에 두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요일2:2). 그러므로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제한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누구든지 그분의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선택, 예정 참조.
한편 화해라는 말은 화목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긍휼로 온 세상을 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롬5:1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골1:20).
비록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않으므로 이것은 결코 보편적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의 조건 곧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009-07-18 21:52:16 | 관리자
자유가 없게 얽맴.
2009-07-18 21:51:08 | 관리자
종이나 매인 사람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을 뜻하고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피로 대속되는 것을 말한다.
구속, 대속 참조.
2009-07-18 21:50:4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