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아시아의 국가. 이곳은 유대의 동남쪽에 있었으며 남북으로 2,300킬로미터, 동서로 1,900킬로미터로 뻗어 있었다. 이곳의 북쪽 경계는 시리아, 동쪽 경계는 페르시아 만과 유프라테스 강, 남쪽 경계는 아라비아 해, 서쪽 경계는 홍해와 팔레스타인이었다. 아라비아는 보통 아라비아 데제르타, 펠릭스, 페트라이아의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I. 아라비아 데제르타(Arabia Deserta) 광활한 모래 더미로 이루어진 지역.
이곳에는 식물이 거의 없었고 이곳의 서쪽으로는 길르앗이,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있었으며 이 사막은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내가 아라비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자기가 아라비아 데제르타의 북부 즉 다마스커스와 닿은 지역에 갔음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갈1:17).
II. 아라비아 페트라이아(Arabia Petraea) 가나안 땅 남부 지역.
이 말은 ‘돌 많은 아라비아’라는 뜻이며 이 지역의 수도는 페트라이다. 셀라 참조. 여기에는 남부 에돔 족속, 아말렉 족속, 히위 족속 등이 살았으며 현재는 여러 아랍 부족이 살고 있다. 바로 이 지역에 가데스바네아, 그랄, 브엘세바, 바란, 아랏, 드단, 시내 산 반도와 미디안 땅이 들어 있다. 이 지역은 다른 아라비아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 족장 욥 역시 이 지역과 관련이 있고 모세는 호렙에서 불타는 가시덤불을 보았으며 엘리야는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바로 이 광대하고 무서운 광야에서 히브리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였다.
III.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 고대 아라비아 남서부와 남부의 비교적 비옥한 지역.
이곳은 오늘날의 예멘에 해당하는 곳으로 불모지인 아라비아 중부와 북부를 지칭하는 아라비아 데제르타 지역 또 로마 제국에 종속되어 있던 아라비아 북서부를 가리키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지역과 대조를 이루었다. 이곳은 그리스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에 의해 아라비아 펠릭스라고 명명되었는데 그 까닭은 이 지역이 기후가 쾌적하고 농산물과 향신료가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의 동쪽에는 페르시아 만, 서쪽에는 홍해 그리고 남쪽에는 아프리카와 인도 사이의 바다가 있었다. 메카와 메디나가 이곳에 있으므로 지금은 많은 사람이 여기를 찾고 있다.
이 지역 역사가들에 의하면 아랍 사람들은 둘로 구분된다고 한다. 하나는 그 땅의 초기 거주자인 욕단 등의 후예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남부 아라비아에는 함의 자손인 구스와 그의 아들들이 거주하였으며 그들은 또한 거기와 접한 아프리카 지역에 살았고 여기에는 함의 후손 특히 욕단의 후손도 살았다(창10:25-26).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여섯 아들(창25:2; 13-15) 그리고 에서와 롯의 씨 등도 유대 근처의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4000여 년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아랍 부족들이 정확히 누구의 후손인지 분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은 단지 남부 아라비아의 도시에 거하는 부족과 사막이나 들에 거하는 유목 부족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 아랍 사람들은 우상숭배자요 별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으나 현대 아랍인들은 다 모슬렘이다. 그들은 대개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들의 고대 관습을 지켜 왔으며 그래서 그들에 관한 연구는 성경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아랍어는 히브리어에 가까우므로 구약성경 연구에 중요한 도움을 준다.
2009-04-27 00:33:47 | 관리자
아르메니아 중심부 지역의 이름(왕하19:37; 사37:38).
이것은 종종 그 나라 전체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렘51:27). 아라랏의 산들에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창8:4).
2009-04-27 00:32:56 | 관리자
성경에서 아들은 1대의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 혹은 먼 후손을 가리키기도 한다(창29:5; 삼하19:24).
또 양자도 아들이라 불리며(창48:5) 법적으로 아들이 되는 경우도 있고(룻4:17) 스승이나 교육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아들이라 하는 경우도 있으며(삼상3:6) 회심해서 아들이 되는 경우도 있다(딛1:4). 또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닮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며(삿19:22; 시89:6; 사57:3; 행13:10) 그런 차원에서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눅3:38; 롬8:14).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데 이 말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낳았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영원토록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시2:7; 단3:25; 눅1:35; 요1:18, 34). 특별히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유일하게 특별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독생자 즉 ‘유일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마4:3; 8:29; 27:54; 요3:16-18). 유대인들은 이것을 잘 이해했고 그래서 그분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였다(요5:18; 10:30-33).
한편 사람의 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취하신 겸손의 호칭으로(요1:51) 신약성경에서 80회 이상 그분을 가리킬 때 나온다. 이것은 구약의 약속에 따른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며(시80:17; 단7:13-14) 동시에 그분께서 참 사람임을 보여 준다. 사람의 아들 참조.
2009-04-27 00:32:29 | 관리자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 소멸되고 사해가 덮어 버린 싯딤 평야의 네 도시들 가운데 하나(창14:2; 19:24-25; 호11:8).
2009-04-27 00:31:57 | 관리자
바르실래의 아들. 그는 다윗에게 주기로 한 사울의 딸 메랍과 결혼했으며(삼상18:19) 그녀를 통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결국 그들의 조상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우한 것으로 인해 그들에게 넘겨져서 주님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삼하21:8에는 그들이 곧 미갈이 아드리엘을 위해 키운 아들들로 나오며 이 경우 미갈이 자기의 죽은 언니 메랍을 대신해서 그들을 양자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 두 자매의 이름이 미갈일 수도 있다. 아비아달 참조.
2009-04-27 00:31:28 | 관리자
아드리아 바다(행27:27). 이 말은 현재 베니스 만을 가리키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전체 바다를 가리켰으며 남쪽으로 연장되어 크레테로부터 시실리까지의 해역 즉 멜리데 섬이 놓여 있는 해역도 포함했다.
2009-04-27 00:30:55 | 관리자
I.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아들(왕하19:37; 사37:38).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치다가 실패한 후에 니느웨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자기 신 니스록에게 경배하다가 자기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은 아르메니아의 산지로 도망갔다.
II.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스발와임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 가운데 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유프라테스 너머로 끌려가자 그들이 저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에 정착했으며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아이들을 불에 태워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바쳤다(왕하17:31). 어떤 이들은 아드람멜렉이 태양신이고 아남멜렉이 달 신이라고 주장한다.
2009-04-27 00:30:31 | 관리자
소아시아 지방의 해양 도시(행27:2).
2009-04-27 00:29:52 | 관리자
베냐민과 유다 사이의 경계 도시. 이곳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 길은 아둠밈 비탈이라 하는 황폐하고 돌이 많은 지역을 통해 올라갔다(수15:7; 18:17). 그래서 여기에는 강도떼가 많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실 때에 이런 곳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눅10:23-42).
2009-04-27 00:29:30 | 관리자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유다 평야의 고대 도시(창38:1; 수15:35). 여호수아는 이곳의 왕을 죽였다(수12:15). 이곳은 후에 르호보암이 재건하여 강화시킨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며(대하11:7; 미1:15)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이곳에 다시 정착했다(느11:30). 다윗은 가드의 아기스 왕으로부터 나와서 아둘람 굴에 거하였지만(삼상22:1; 삼하23:13) 이 굴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 전통은 이 굴이 베들레헴 남동쪽 10킬로미터에 위치한 것으로 가르친다.
2009-04-27 00:28:54 | 관리자
아도니람 참조.
2009-04-27 00:28:25 | 관리자
르호보암이 강화시킨 유다의 남부 성읍(대하11:9).
2009-04-27 00:28:03 | 관리자
학깃이 낳은 다윗의 넷째 아들(삼하3:4).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뒤에 그는 왕권이 자기 동생 솔로몬에게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좌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었다. 요압과 아비아달 그리고 다른 추종자들을 얻은 뒤에 그는 다윗이 생존해 있을 때에 반역을 일으키고 왕 노릇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반역 소식은 곧 왕에게 들렸고 아도니야의 친구들은 해산되었으며 그는 제단의 뿔을 잡고 피신하였다. 솔로몬은 경고와 함께 그를 집으로 보냈으나 다윗이 죽은 이후에 그는 아비삭을 줄 것을 요구하며 다시 한 번 왕좌를 찬탈할 기회를 노렸으나 오히려 그 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왕상1:1-53; 2:1-46). 아비삭 참조.
2009-04-27 00:27:32 | 관리자
다른 네 왕과 함께 여호수아를 대적한 예루살렘 왕.
이때 기브온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주님께서는 엄청난 우박과 또 낮을 연장시키는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을 도우셨다. 이 다섯 왕은 진멸 당했으며 막게다 굴에 숨었으나 여호수아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수10:1-43).
2009-04-27 00:26:59 | 관리자
세겜의 동쪽에 있던 베섹의 가나안 왕. 그는 주변에서 70명의 왕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엄지발가락과 엄지손가락을 자르고 개에게 먹이를 주듯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나 유다와 시므온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연합군을 섬멸한 뒤 그를 붙잡아 그가 다른 이들에게 행한 것처럼 그대로 행하여 복수를 하였다(삿1:4-7).
2009-04-27 00:26:26 | 관리자
아시리아 왕. 그는 살만에셀의 아들로서 주전 710년경에 통치하기 시작했다. 히스기야는 자기 아버지 아하스 시대에 디글랏빌레셀이 가져다 준 아시리아 사람들의 멍에를 치웠고 이에 산헤립은 그를 대적하며 유다의 강한 도시들을 다 취하였다. 이에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외에 남은 것이 없음을 보고 라기스를 에워싸고 전쟁을 하던 산헤립에게 사신을 보내어 굴복하기로 하였다. 산헤립은 그의 조공을 받아들였으나 떠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랍사게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치욕적인 말을 전하게 하였다. 이에 히스기야가 주님께 간구하자 주님은 아시리아 사람들을 치기 위해 죽음의 천사를 보내사 하룻밤에 185,000명을 죽였고 이에 산헤립은 사력을 다해 니느웨로 돌아가서 아시리아의 남쪽과 북쪽에 있는 민족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돌아간 지 2-3년 뒤에 그는 자기 신 니스록의 전에서 경배하다가 자기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아르메니아로 도망갔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왕하18:1-37; 19:1-37). 니느웨, 니스록, 살만에셀 참조.
2009-04-27 00:24:25 | 관리자
유대인들의 70인 회원들의 모임. 여기에는 민족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대제사장이 대개 의장으로 추가되었다. 요세푸스는 주전 69년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 때에 있던 산헤드린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둘째 성전이 지어진 이후에 대언자들의 대언이 없던 때에, 모세가 세운 70인 회의를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민11:16-24). 랍비들에 따르면 그들이 모인 장소는 둥근 원형 집으로 이곳의 반은 성전 내부에 반은 성전 외부에 있었으며 재판관들은 성전 외부 방에 앉았다고 한다. 의장인 대제사장은 방의 끝에 앉았으며 그의 양 옆에는 보좌관이 있었다. 공회의 회원들은 대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었다. 사두개인 참조.
산헤드린의 권위는 광범위하였다. 산헤드린은 하위 재판소에서 올라온 문제들을 처리하였고 왕이나 대제사장 혹은 대언자들도 여기의 결정에 순종하였다. 또 종교나 경배 등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중요 문제들이 여기에 상정되었고(막14:55; 15:1; 행4:7; 5:41; 6:12)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도 종교에 관한 한 산헤드린의 결정에 따랐다(행9:2).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얼마 전까지 산헤드린은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으나 로마 사람들은 이 권한을 박탈하였다(요18:31). 우리 주님이 말한 공회가 바로 산헤드린일 것이다(마5:22). 또한 모든 마을에는 7명으로 구성된 재판소가 있어서 조그만 문제들을 처리하였으며 마5:22의 심판은 이런 곳에서의 재판을 뜻할 것이다.
2009-04-27 00:23:39 | 관리자
모세의 율법은 가난한 사람들이 짐승 대신 산비둘기를 취해 죄 헌물과(레1:14; 5:7; 마21:12) 여러 종류의 정결례 헌물(레12:6-8; 14:22; 민6:10; 눅2:24)로 드릴 것을 명령한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은 새와 짐승들을 헌물로 드리면서 짐승들과는 달리 새들은 몸을 쪼개지 않고 전체를 드렸는데(창15:9-10)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2009-04-27 00:23:05 | 관리자
그는 모압 땅의 호르나임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유대인들의 큰 원수였다. 그는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유프라테스 서쪽의 총독들 가운데 하나로 임명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을 치리한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가 수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곳의 성벽을 재건할 때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은 그를 괴롭히고 그가 무슨 권위로 그 일을 하는지 물으며 그 일이 왕을 대적하는 것이 아닌지 따졌다(느2:10, 19).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여 성벽을 재건하였다(느2:10; 4:6). 그 뒤 느헤미야는 수산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자기 손자 므낫세 즉 요야다의 아들을 산발랏의 딸과 결혼하게 하고 산발랏의 친척인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을 주었다. 그 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도비야를 성전에서 몰아내고 대제사장의 손자 므낫세가 더 이상 도시에 거하지 못하게 하며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므낫세는 자기 장인인 산발랏에게 가서 그리심 산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였다. 그리심, 사마리아 사람 참조.
2009-04-27 00:21:39 | 관리자
고대 가나안 족속들과 다른 이교도들은 언덕과 산 혹은 인공적으로 높이 쌓은 장소에서 천체들에게 경배를 드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같은 우상숭배 장소를 멸절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신12:2) 이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이교도들을 모방하여 처음에 산당에서 주님께 경배를 드렸고(삼상9:12; 왕상3:4) 후에는 거기서 우상들을 섬겼다(왕상11:7; 왕하17:10-11). 여기에서 그들은 예배 처소 즉 ‘산당의 집’을 지었고(왕상13:32; 왕하17:29) 제사장을 두었다(왕상12:32; 왕하17:32).
그들은 여러 신을 위해 작은 숲을 여럿 심었고 그래서 산당들은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유대인들이 명절과 희생물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드릴 것을 요구하시고 이를 통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작은 숲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셨다. 대언자들은 백성이 산당에서 경배하는 것을 경고하였다. 비록 산당을 부수는 것이 유대인들의 의무였지만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 여러 통치자들조차 실제로 그 일을 하지는 않았다.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산당에서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면 그것 자체가 율법에 위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재판관들의 시대에는 여러 경우에 이런 사례가 있었고 사무엘도 하나님의 궤가 없는 여러 곳에서 희생물을 드렸다. 심지어 다윗의 시대에도 백성은 실로와 예루살렘과 기브온에서 주님께 희생물을 드렸다. 특별히 산당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많았으며 이 언덕배기 장소에서 그들은 우상을 흠모하고 수많은 가증한 것들을 만들었다. 작은 숲 참조.
2009-04-27 00:21:0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