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헤르무스 강과 트몰루스 산 사이 해발 약 450미터 고지에 위치한 요새 형 도시였다. 에게해 지도 참조(41). 이 도시는 주전 6세기경에 루디아라는 나라의 수도로 세계적인 대도시였으나 그 후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고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사금이 흐르는 팍톨루스 시내가 이 도시의 부의 원천이기도 했으나 이는 사데가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데는 또한 양탄자 생산으로 유명했고 부유했지만 지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대개 목자로서 평원에서 많은 양과 소를 길렀으며 그래서 재물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였다(계3:4).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그 교회는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어느 정도 알려진 교회였던 것으로 보인다(계3:1-6). 그러나 그 도시의 퇴폐풍조가 교회에도 숨어들어 사데 교회는 안일과 부도덕으로 타락한 교회요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보다 더 나쁜 명칭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지역 교회 회원들의 생명 여부이다. 거듭난 성도들의 특징은 생명이 있는 것인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생명력을 잃었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을 것이다.
2009-04-22 15:28:25 | 관리자
자기 형을 피해 도망하던 야곱은 하늘에서 나타난 사닥다리를 보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 사는 자신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창28:12-17; 히1:14). 이것은 또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 주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요1:51).
2009-04-22 15:27:56 | 관리자
유대 땅에 있던 두 마을의 이름(수15:34, 56).
이 두 마을 가운데 하나의 거주민들은 포로 생활 이후에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을 도왔다(느3:13; 11:30).
2009-04-22 15:27:26 | 관리자
니므롯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사냥꾼이며 특히 영혼의 사냥꾼이었다(창10:9).
이스라엘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사냥을 하지 않았으며 다만 농부나 목자가 먹을 것을 위해 사냥하곤 했다(창27:3-5; 30-31; 잠12:27). 사냥꾼들은 활(창27:3), 돌팔매 기구(삼상17:40), 그물, 올무, 구덩이 등을 사용했다.
2009-04-22 15:26:59 | 관리자
향기를 많이 내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나무(아2:3; 8:5; 욜1:12 참조). 잠25:11은 지혜로운 자들의 적절한 말이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 즉 잘 익어서 보기에 좋고 아름다운 사과와 같다고 표현한다.
2009-04-22 15:26:30 | 관리자
I. 마23:35와 눅11:51에 나오는 인물. 그는 아마도 대제사장 여호야다 혹은 바라갸의 아들인 것 같다. 그는 요아스 왕과 그의 신하들과 백성이 점점 더 부패하는 것을 보고 공중 앞에서 왕을 책망하였고 이에 왕은 그를 돌로 쳐서 죽게 하였다(대하24:20-22).
II. 아비야 계열 즉 여덟 번째 계열에 속한 제사장(대상24:1-31). 그는 엘리사벳의 남편이며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였다. 그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던 산지에 거하였으며 경건하고 깨끗한 삶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전에서 가브리엘을 보았는데 그는 늙은 나이의 사가랴에게 아들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면서 이 약속을 믿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아들을 낳았고 그에게 할례를 줄 때에 다시 말을 하게 되어 감사와 예언의 아름다운 노래를 하였다(눅1:5-25, 57-59).
2009-04-22 15:25:54 | 관리자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의 아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이 되어 6개월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백성 앞에서 죽인 뒤 그를 이어 통치하였다. 이로써 주님께서 예후에게 하신 말씀 즉 그의 씨가 4대까지 왕좌에 앉으리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14:29; 15:8-11).
2009-04-22 15:25:19 | 관리자
I. 임멜의 아들. 그는 성전의 제사장이며 우두머리 감독이었고 대언자 예레미야를 심히 대적한 뒤 그를 때리며 차꼬를 채워 옥에 넣었다가 후에 주님의 저주를 받았다(렘20:1-6).
II. 말기야의 아들. 그는 대언자 예레미야의 원수였으며 그를 옥에 넣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렘21:1; 38:1-6). 이 바스훌의 후손들은 바빌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대상9:12; 스2:38).
2009-04-22 15:24:26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의 부피 단위. 이것은 6힌이며 약 22리터이다.
2009-04-22 15:23:55 | 관리자
요르단 동쪽의 비옥한 땅(민21:33). 이곳은 북쪽의 헤르몬 산과 남쪽의 길르앗과 암몬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언덕이 많은 좋은 지역이었다. 가나안 족속들 지도 참조(52). 이곳의 토양이 부드럽고 좋아서 그 이름이 바산이 되었고 성경은 이곳의 초장에 대해 극찬한다: ‘바산의 숫양’(신32:14), ‘바산의 모든 살진 짐승 곧 숫양과 어린양과 염소와 수소’(겔39:18).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함께 언급된다(사2:13). 여호수아 시대에 이곳의 주요 지역 중 하나인 아르곱에는 60개의 성벽을 지닌 고을이 있었다(왕상4:13; 참조 신4:43; 수20:8; 21:27).
바산은 모세가 옥과 그의 백성을 섬멸한 후에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이곳을 넘겨주었고(수12:4) 솔로몬은 이곳에서 물품들을 가져왔다(왕상4:13). 이곳은 후에 시리아의 하사엘에게 정복되었으나 요아스가 회복했다(왕하10:33; 13:25).
2009-04-22 15:23:30 | 관리자
I. 유스도라 하는 요셉. 그는 그리스도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아마도 70명 중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룟 유다를 대체하기 위한 두 명의 후보 중 하나였다(행1:16-26).
II.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그는 대언자였고 실라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해서 안디옥으로 내려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다(행15:22-34).
2009-04-22 15:22:51 | 관리자
I.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세워진 고대의 유명한 도시.
원래 이곳은 바벨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고대의 전설은 이것을 지지한다. 한편 어떤 이들은 그 이후에 니므롯의 아내인 세미라미스가 혹은 느부갓네살이 이곳을 세웠다고 말하는데 세미라미스가 고대의 도시를 재건하고 느부갓네살이 그것을 확장하고 잘 단장했다고 하면 이런 주장들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가 비옥하게 만든 광활한 평야 위에 세워졌다. 성벽의 둘레는 100킬로미터, 높이와 너비는 각각 90미터, 22미터였다고 한다(렘51:44-58). 또한 성벽 주변에는 깊은 도랑이 돌아가며 있었고 도시의 네 면에는 25개의 놋 문이 있었으며 이렇게 정방형으로 생긴 도시 안에는 정원과 집이 매우 많았다. 느부갓네살의 궁궐은 둘레가 9킬로미터였으며 여기에 공중 정원이 있었다(단4:29-30).
느부갓네살의 통치 하에서 바빌론은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며 특히 천문학으로 유명했다. 위치적으로 바빌론은 중앙아시아와 아라비아와 이집트 사이를 오가며 무역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걷는 일을 하기에 적합했고 그래서 상인들의 도시라 불렸다(사43:14; 겔17:4). 따라서 거기로 온 세상의 좋은 것이 흘러 들어갔고 그 결과 대언자들은 그것을 ‘큰 곳’, ‘온 땅에서 칭송받는 자’, ‘갈대아 사람들의 빼어난 아름다움’, ‘왕국들의 귀부인’(사13:19; 47:5; 렘51:41; 단4:20)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으로 인하여 여기에서는 부패와 음란한 것들이 극도로 성행하게 되었고 벨, 느보, 네르갈, 메로닥, 숙곳브놋 같은 우상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더러운 종교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예언되었고 성경은 바빌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준엄함을 잘 보여 준다(사13:1-22; 14:22; 21:9; 47:1-15; 렘25:1-38; 50:1-46; 51:1-64).
바빌론은 영원히 세계의 수도로 남지 못했으며 느부갓네살의 손자 즉 벨사살이 통치하던 때에 고레스가 이곳을 점령하였고 그리스 역사가들의 진술 역시 성경과 일치한다. 그 이후부터 고레스가 수사를 자신의 왕국의 수도로 만들면서 바빌론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바빌론은 한때 다리오 왕에게 반역하였으나 다리오는 다시 바빌론을 정복한 뒤 거기의 성문을 모두 부수고 성벽의 높이를 50큐빗 미만으로 줄였다. 페르시아 사람들과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의 통치 밑에서 바빌론은 점점 더 힘을 잃게 되었고 결국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거의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말았다. 주후 4세기까지는 바빌론이 있던 곳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거기 거하였지만(벧전5:13) 그 이후부터 바빌론은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 유적이 발견된 것도 약 3세기 전의 일이다. 바벨 참조. 바빌론의 붕괴와 멸망에 대해서는 이사야 대언자의 예언을 참조하기 바란다(사13-14).또 신약성경에서 바빌론은 우상숭배, 미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채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집단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며(계14:8; 16:1-21; 17:1-18; 18:1-24) 중세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이 교황체제를 가리킨다고 확신하였다.
II. 이집트에도 온(헬리오폴리스) 근방에 바빌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었다.
2009-04-22 15:22:15 | 관리자
바빌론을 수도로 둔 지방.
이 유명한 지방은 유프라테스 강에 놓였으며 북쪽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남쪽에는 페르시아 만, 서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었다. 고대와 현대에 티그리스 강의 동쪽 지역과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지역 그리고 이 두 강이 만나는 곳의 양쪽 지역은 바빌로니아 혹은 ‘이라크 엘아랍’으로 인정되었다. 바빌론 제국 지도 참조(35).고대에 이 지역의 이름은 시날이었고(창10:10; 단1:2) 그 후에 바벨, 바빌론, 바빌로니아 등이 이 지역의 이름이 되었으며 갈대아 사람들이 이 지역의 대부분을 소유한 이후에는 갈대아로 불리기도 했다.
바빌로니아는 언덕이나 산이 거의 없는 평지로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범람으로 인해 기름진 퇴적물이 쌓여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지역이었다. 유프라테스 강은 4월말부터 6월까지 평상시 수위보다 3.6미터 정도 높은 상태로 흘렀고 그 결과 그 주변의 초기 경작자들은 충분한 물을 이용해서 관개 시설을 개발하여 농업에 이용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바빌로니아에는 크고 작은 운하가 많았으며 아마도 이런 운하들이 시137:1에 나오는 강들일지도 모른다. 이런 운하들 외에도 이곳에는 여러 개의 큰 호수가 있었고 그래서 대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론이 많은 물들 위에 거한다고 말하였다(렘51:13).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 중 셈족에 속하고 그들의 말은 히브리말과 비슷하며 특히 갈대아말과 거의 비슷하였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주전 2000년경에 니므롯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바벨, 에렉, 악갓, 갈네 같은 도시들을 포함하였다(창10:10). 니므롯 참조. 주전 1237년경에 니누스가 니느웨를 지은 후에 이 도시는 아시리아 제국이 갈대아 사람들에게 넘어가서 바빌론이 명성에서 최고조에 이른 주전 606년경까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살았으며 복음의 초기에 그들의 후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베드로는 거기에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벧전5:13).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여러 개의 발전하는 회당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탈무드 중 하나가 여기서 작성되었다.
갈대아 사람들 참조.
바빌론의 벽돌
2009-04-22 15:21:07 | 관리자
키프러스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해양 도시. 여기에는 좋은 항구가 있었고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복음을 선포하였다(행13:6-13). 엘루마 참조.
2009-04-22 15:20:14 | 관리자
노아의 자손들이 홍수 후 120년이 지나서 니므롯을 중심으로 지은 높은 탑.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했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창10:10; 11:9). 그들이 도시와 탑을 쌓은 것은 거기에 자리를 잡고 흩어지지 않으려 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홍수 후에 땅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그들이 서로 다른 말을 쓰게 하시고 결국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하셨다(행2:1-11). 탑은 완공되지 못했지만 기초는 놓였고 거기에 남은 사람들이 바로 그 자리에 바빌론 도시를 세웠으며 결국 그 탑을 완공해서 벨루스의 탑이라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거기를 방문해서 그것이 피라미드 형태이며 그것의 기초의 둘레가 0.8킬로미터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이 탑에서 벨 숭배와 점성술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유물이 거기에 보관되었고 예루살렘에서 빼앗은 유물들도 여기에 보관되었다(대하36:7; 렘51:44).
느부갓네살 참조.
2009-04-22 15:19:43 | 관리자
그리스의 관용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아무리 학식이 있고 예의가 있어도 다 바바리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라는 표현은 결국 모든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다(롬1:14).
2009-04-22 15:19:01 | 관리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처음 선택된 일곱 사람 중 하나(행6:5).
2009-04-22 15:18:19 | 관리자
산당(겔20:29). 이것의 복수형은 바못(Bamoth)이며 바못바알은 모압의 경계 근처에 있던 히브리 사람들이 머물던 곳으로(민21:20; 22:41) 후에 르우벤 지파에게 배정되었다(수13:17). 물론 이곳에서 바알 숭배가 이루어졌고 사15:2에 나오는 산당들은 이런 곳을 의미했을 것이다. 산당 참조.
2009-04-22 14:23:35 | 관리자
유대인들의 분파의 하나.
그들은 교리나 실행의 주요 문제에서는 서로 동의하였지만 작은 문제에서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유명한 학파인 힐렐과 샤마이 파가 그러하였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분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말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그들이 지혜와 성별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음을 뜻하였다. 그들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하나의 특정한 분파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기록된 말씀이 유대교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금식, 기도, 구제, 이방인과 세리들과 접촉하는 것 등의 외적 의식에 관한 한 여러 가지 전통과 규례를 첨가하였고(마6:5; 9:11; 23:5; 막7:4; 눅18:12) 그래서 미신과 자기 의를 세우려는 형식의 틀에서 천주교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조문을 중시하였지만 자기들의 전통과 철학으로 그 안의 영적 진리를 무시하였다(마5:31, 43; 12:2; 19:3; 23:23). 그들은 겉으로 경건하게 드러났고 거룩하게 보였으므로 보통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그들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처럼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 규제되지만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믿었고 혼의 불멸과 몸의 부활을 믿었다(행23:8).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 그들의 위선과 교만과 탐욕을 책망하셨으며(마6:2, 5; 23:1-39; 눅16:14; 18:9; 요7:48-49; 8:9.) 이로 인해 그들은 처음부터 그분을 미워하고(마12:14) 그분을 죽일 방도를 구했으며 그 결과 그분의 피가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돌아갔다. 한편 그들 중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시므온처럼 진실로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다(마27:57; 눅2:25; 요3:1). 다소의 사울 역시 엄격한 바리새인이었다(행26:5; 갈1:14).
사두개인, 분파 참조.
2009-04-22 14:23:03 | 관리자
좋은 금이 많이 나는 곳(대하3:6).
2009-04-22 14:22:1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