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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청교도들 중에는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을 떠난 후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매일 찬송하고 예배하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일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다채롭고도 복된 삶을 예고하신 성경의 말씀(고전2:9)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잘못된 신념인지 금방 알 수 있지요. 오늘날 참혹한 죄악이 증폭되어가는 세상과 극심한 배도에 찌든 교회로부터 철저한 분리를 추구하는 성경 신자들도 자칫 선명한 진리를 추구하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오묘하고 장대한 다양성과 역동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이런저런 의미에서 저는 김정훈 형제님이 게시판에서 보여주신 좌충우돌하는 듯 보이나 계산되지 않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열정에 기뻐했고 언제나 얌체공 같은 유쾌한 의외성과 저돌적 탐구정신이 충만한 김용묵 형제님의 글을 신선하게 지켜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다채롭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해 가는 아름다움을 기대합니다. 한 가지 더, 일단 사회적 현상으로만 보자면 만혼의 풍조는 이혼율의 급증만큼이나 이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중요한 표지(標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특정인에 한해서는 결혼시기를 늦추고라도 특별한 인도하심 속에 깃든 하나님의 훈련프로그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독신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좋은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한 일입니다. 깎아놓은 사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변하고 하루살이만 꼬일 뿐이죠. 결혼 적령기가 한참을 지나가도 독신의 삶이 계속되는 사람은 심신이 쇠퇴하고 여러 가지 유혹에 노출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며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상당기간 독신의 삶을 영위(?)해 오고 있는 산 경험에서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미루고 홀로 지낸다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인 손실뿐 아니라 특히 영적인 면과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손실이 막심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명배우라도 무대 위에 서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이 보지 못하는 실수와 과도함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줄 연출자가 꼭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탁월하게 수행할 자질이 넘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옆에서 조언하고 격려해 줄 합당한 조력자가(창2:18) 꼭 필요합니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독신의 삶을 상당기간 지속한 분들은 반드시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고 김용묵 형제님을 비롯해 아직 젊은 미혼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속히 좋은 짝을 찾아 진리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일구어 가시는 것이 지금 마음에 품고 있는 선한 계획들을 더욱 탁월하게 이루어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주제넘은 이야기가 늘어났습니다. 너그러이 읽어 주십시오. 솔직함과 선한 소망들로 풍성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2-05-28 13:29:53 | 김대용
하늘과 땅, 그안의 모든것을 만드신분이 준비하지 못할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다 하나님이 계획하고계신 때가 아직 차지안아 그렇겠지요. 형제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것이라 생각됩니다.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주신것도 , 어느순간에 철도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세상의 기쁨과 이치를 깨닫게하신것도, KJB를 통해 비로소 올바르게 거듭나게 하신것도 하나님의 계획의 때에 이루어진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사이트를 통해 용묵형제님을 비롯한 많은 여러형제,자매님들의 훌륭한글들을 대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2-05-27 08:41:55 | 최제식
한글을 맞춤법에 맞게 잘 쓰신 글이군요. 그래서 읽기도 편하군요. 저도 형제님처럼 한글을 맞춤법에 맞게 잘 사용했으면 하는데 말하기와 쓰기는 익혀야 하는 분야가 다른 것 같아 쉽지가 않군요. 성도가 쓴 글임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2012-05-26 21:35:07 | 길준남
재미있는 자랑거리네요. 정말 솔찍하고 재미있는 글 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다이나믹하고 기발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낌니다.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처자 만나서 결혼도 빨리 하셔야지요.
2012-05-26 17:17:06 | 허광무
0. 들어가는 말   벌써 10대와 20대 나이를 넘기고 30대에 진입한 이 시점에서, 난 오랜 시간 동안 내 자신의 적성과 정체성, 진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왔다.   난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서 이리 떠돌고 저리 헤매는 타입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그것의 반대편 극단에 가 있다.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분명히 있고 인생의 목표도 너무 명확하고 분명하게 갖추고 있다.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 말고 딴 데로는 머리가 도무지 열리질 않는다.   그 성향이 너무 심하고, 그게 사회에서 아직 보편적으로 이해를 못 하는 것들이라는 것만이 문제이다. 난 아무래도 평범하게 남들처럼 취직하고 결혼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1. 어린 시절   나는 장난이 아니고 진짜로, 태어나서 또래 친구하고 어울려 놀아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어린애들의 심리를 모른다. 난 8살 이전까지는 책에만 파묻혀 지냈고, 9살과 그 이후부터는 컴퓨터에만 빠져 지냈다. 그러면서 거의 자폐아처럼 혼자 뭔가에 심취해서 공상을 즐겼다.   태생적으로 남하고 교류를 안 하고 지냈고, TV나 영화, 드라마, 스포츠, 아이돌 문화 같은 것과는 문자 그대로 담을 쌓았다. 일부러 거부한 건 아니지만, 저런 데에 사람들이 도대체 왜 열광하는지를 이해를 못 했다.그래서 난 지금까지도 화성인 바이러스 급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인간관계 쪽의 역량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어지간한 사람들하고는 공통 관심사가 없고 같이 뭔가를 즐기지를 못한다. 맨날 나 혼자 딴생각만 한다.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남의 말에서 행간을 읽는다거나 이 분위기에서 할 말과 안 할 말을 가리는 알고리즘이 내 머릿속엔 한동안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 지금은 문제의식을 느껴서 노력한 끝에 옛날보다는 그나마 굉장히 많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험 데이터가 부족한 관계로 착오를 겪는다.   난 오로지 내가 동기 부여를 받은 분야만 미치도록 몰입하지, 나머지 다른 건 거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죽어도 안 받아들이는 수준으로 고집이 강했다.   고등학교 때 뭔가 깨달은 게 있어서 가히 신들린 듯이 C/C++과 MFC, 윈도우 API 공부를 했다. 어릴 때부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직감하였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고 그 능력을 확장(amplify)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컴퓨터로 머릿속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작업과 관계가 있지 않은 일체의 학교 공부는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었다. 그냥 면역 거부 반응이 오듯이 튕겼다. 난 그때 공부를 위한 동기 부여 발동과 초기화 작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머리가 좋은 영재, 수재, 천재는 수학을 잘하고 복잡한 퍼즐을 푸는 걸 즐긴다지만, 불행히도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령, 수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거 쓸데없이 왜 해야 하냐?이 개념을 옛날 사람들은 왜 이렇게 표기했을까?동양에서 수학이 발달했다면 이걸 어떻게 표기했을까?이걸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건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하고는 큰 관계는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의 자기중심적인 주변 잡기에만 먼저 관심이 갔지, 근본적인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내 스스로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공부 자체는 싫지 않지만, 우리나라 교육제도대로 주입식으로 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그러니 내신은 당연히 개판이었다. 단체 생활, 공부와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남들을 보면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난 정말 구제불능 바보인가” 하는 생각까지 많이 했었다. 그나마 영어가 별로 공부를 할 필요가 없는 상태인 건 천만다행이었고 학업 부담을 크게 덜어 줬다. 그리고 나중에 수학만 고3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집중적인 보강을 한 덕분에 2년이 넘게 손놓고 있던 걸 그럭저럭 따라잡았다.   2.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   물론, 내가 관심이 쏠려 있던 프로그래밍 공부라는 게 기능만 익히는 게 전부였다면, 난 그저 노가다 프로그래밍 코더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도 언급했듯이 본인은 이걸 공부해서 창조하고 싶었던 나만의 세계가 따로 있었고, 그게 내 인생을 펴 줬다.   난 정보 올림피아드 공모 부문에서는 가히 살아 있는 전설이다.고등학교 1학년 때 은상을 받고, 2학년 때는 세계급 과학 전람회인 ISEF에 최초로 참가하고, 그러고도 3학년 때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또 만들어서 다시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옛날에 나의 ISEF 출전 소식을 당시 활동 중이던 PC 통신 모 동호회에 최초로 전해 주신 분이 바로 김문수 형제님이다.   정올 역사상 이런 사기에 가까운 극단적인 기록은 앞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금상/대상을 받아 버리면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는 대회에 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따라서 고등부는 그걸로 은퇴), 은상+국제 대회+대상은 진짜 이론적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뽕을 순서대로 다 뽑은 것이다. 더구나 그 입상작을 추후에도 10년이 넘게 유지· 보수하고 개선한 사례도 역사상 전무하며, 아마 후무이기도 할 것이다.   있는 실력으로 몇 시간 동안 문제만 풀면 되는 경시가 아니라, 해마다 아이디어를 짜내고 완성된 작품을 장시간 동안 개발해서 출품해야 하는 공모 부문에서 이런 미친 짓은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파탄 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아무 정보도 없이, 어디에도 도와 주는 사람이 없이(도와 줄 수도 없고)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나 혼자 고3 시절에 세벌식 글자판 관련 응용 아이디어를 신들린 듯이 생각해 내고, 그걸 초간단 에디터 형태로 혈혈단신으로 구현한 디스켓 한 장짜리 프로그램이었다. 진짜 밑바닥에서 맨주먹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다. 이것이 심사위원들을 경악시켰으며, 전국의 쟁쟁한 컴덕후들이 출품한 90여 편의 작품들을 제치고 그 누구도 의심이나 부정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대상, 1등을 차지했다.   이건 고등학교부터 대학, 대학원이나 회사 등 기존 사회 조직에 정상적으로 소속돼 있는 사람의 머리와 여건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고, 아니, 저변에 깔린 사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프로그램이다(전산학 내공이나 컴퓨터 지식과는 무관하게). 그러니 공모 부문의 병폐로 지적되는 표절이나 대리 개발 의혹 따위는 있을래야 있을 수 없었다.   대상 입상 하나로 내가 지난 3년간 고등학교에서 깽판 치고 부모님과 선생님을 걱정시키던 건 완전히 잊혀지고 용서되었다. 오히려 나는 학교의 명예를 크게 드높인 영웅이고 기적을 창조한 컴퓨터 천재로 완전 칭송을 받게 되었다. 사실 난 그들이 생각하는 부류의 typical한 컴퓨터 천재가 아닌데도 말이다.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도 날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뭐든지 잘 학습하고 적응하고 남보다 빨리 해치우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면, 나는 천재가 전혀 절대로 아니다. 그런 보편적인 역량은 나는 오히려 평균에 훨씬 미달이다. 나도 좀 그렇게 돼 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 부러웠는데, 난 그렇게는 안 되더라. 나는 제대로 된 수험생 생활을 해 본 적이 없고 모범생으로 살아 보질 못해서, 학교 공부만으로 일류대에 간 사람이 참 대단하고 부럽다.   3. 취업과 진학 사이에서의 고민   이런 생활이 대학 시절에서까지 이어져서 나는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전산학 전공조차도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난 그냥 비주얼 C++로 윈도우 API만 쓰면 내가 원하는 대로 컴퓨터를 마음대로 다 조작할 수 있고 내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옮기는 데 아무 지장이 없구만, 내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플랫폼이나 툴, 언어를 왜 구태여 써야 하고 이런 거 내부 원리를 왜 익혀야 하는지 거부 반응이 왔다.   내게 컴퓨터는 확실히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으며, 나는 그렇게 컴덕후나 해커 기질은 없었다. 난 딱히 IT 벤처를 차려서 떼돈을 번다거나 수학적으로 더 뛰어난 알고리즘을 개발한다기보다는, 그저 컴퓨터에서 한글 입출력의 모든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서 내 눈으로 보고 싶을 뿐이었다. 덕질치고는 너무 소박한가?   그래서 <날개셋> 한글 입력기 정도의 수준의 소프트웨어를 혼자 만들 정도로 Windows 개발 환경에 완전히 정통한 프로그래머인 것치고는 나는 윈도우 이외의 플랫폼은 정말 모른다. 모바일 쪽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난 아직 스마트폰도 안 쓴다!) 나 정도로 선택과 집중의 편차가 심한 케이스도 참 흔치 않은 것 같다.   난 주변으로부터 “지금 겨우 그 회사에서 그 연봉은 너무 아깝다”, “넌 공부 더 해야 된다. 대학원 꼭 가라. 유학 가라” 같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일면 맞는 말이다. 난 단체생활을 못 하며, 폐쇄적이고 군기 센 집단에서는 더욱 못 있는다. 말단 신입사원으로 시작해서 동료들과 잘 어울리면서 위에서 시키는 일만 성실하게 잘 하는 방식으로는 성공 못 한다.   벤처 창업이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 나 같은 사람이 학부에만 머물러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대학원에도 선뜻 갈 수가 없었다. 학부 평점이 상당히 안 좋고, 유학을 가기에는 좋아하는 분야가 너무 한국적인 소재이고, 무엇보다도 이 외곬수 기질로는 어느 대학원을 가든 지도교수와 원만한 의사소통을 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난 유명한 교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거기 일 거들면서 공부에만 매진하고 지도교수의 학풍을 물려받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 기존 연구와는 좀 동떨어진 내 연구를 완전히 독자적으로 해서 논문으로 남기는 게 주목적이다. 그래서 애초에 과도 단과가 아닌 협동과정을 선택한 것이다.   불행인지 행운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도 모자라서 또 완전히 기상천외한 걸 만들고 싶은 게 있다. 입력 쪽을 연구했기 때문에 다음으로 정복하려는 분야는 글꼴과 관련된 출력 쪽이다. 기존 학문 한 분야만 알아서는 생각할 수 없는 연구 주제이다.   지금 내가 간 대학원은 이런 게 그나마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협동과정을 택해서 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안에서도 나 같은 걸 연구하려는 사람은 주변에 당연히 있을 리 없…고 전례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건 없다. 이와 관련해서 잡음도 좀 겪었다.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와 방법론을 남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게 너무 힘들었다.   물론 그 정도 고생은 대학원에서 높은 학위를 받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경험상, 교수님들도 내가 우려하는 것만치 폐쇄적이지는 않으며 자기가 딱 전공한 세부 분야 외로는 연구를 딱 짤라서 불허한다거나 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워낙 전례가 없는 길을 만들어 가려 하고 있기 때문에, 석사 이후 앞으로의 더욱 길고 힘든 박사 과정을 이런 식으로 정말로 계속 진행 가능하겠는지에 대해서는 더 치밀한 사전 준비와 조사,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 내 인생에서 철도의 의미   어찌 보면 북한만치 폐쇄적이고 꽉 막혔고 내 관심분야밖에 모르던 시절에 나의 영적 식견은 킹 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뚫렸다. 그러나 세상적인 식견은 철도를 통해서 뚫렸다.   새마을호 객실에서 이제는 말할 수 없는 그 음악이 귓가에 울려 퍼졌을 때, 극한에 가까운 희열을 경험함과 동시에 물리를 보는 눈이 열리고 사회, 지리,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렸다. 음악 쪽도 당연히 물미가 터졌다. 눈에서 뭔가 비늘이 벗겨져서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학교 공부들이 그저 입시를 위한 죽은 지식이 아니라, 나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철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산 지식이 되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 다음으로 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철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내가 한글 공학 쪽을 먼저 파고들지 않았으면, 다음 진로를 철도를 연구하는 대학원이나 회사로 선택했을 것이다.   비록 이 때문에 나의 취향은 다른 사람들이 더욱 공감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고 외곬지수는 더욱 상승하게 됐지만… 그래도 내가 다른 진짜로 골치아프고 비성경적인 이상한 분야에 빠질 바에야 철도 정도면 정말 정말 건전하고 좋지 않은가?   다만, 최근엔 본인과 친한 모 자매님이, 평소에 내 글을 참 재미있게 잘 읽고 있는데 철도 성령이라는 표현은 교리적으로 마음에 걸린다고 지적을 했다.비록 내 개인적으로는 철도가 끼친 내 삶의 변화가 정말 성령님의 역사에 버금가는 급이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도 기쁘게 보고드릴 내역이라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분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그런 표현은 앞으로 글에서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겠다. 혹시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불편했던 분이 계시면 사과드린다.   5. 결혼 문제와 결론   일류대 졸업하고서 좋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또는 공무원에 취직한 뒤, 여자가 넘쳐나는 일반 교회에 고분고분 다니다가, 중산층 집안에서 곱게 자란 참한 자매를 금방 소개받아서 곧장 결혼하는 게 부모님께서 내게 가장 바라시는 시나리오인 것 같다.   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 살겠다.내 미래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하다고 느껴지고 나 혼자 만들고 싶은 게 머리에 아직 꽉 차서 비워지질 않았는데, 이성교제나 결혼 같은 건 도저히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 관심사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걸 포기하고 시간과 노력을 쪼개서 다른 걸 따로 해야 한다면 단언하건대 나는 이성교제 못 한다. 내 머리 구조를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라면, 난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여자에게 아무 메리트도, 매력도 없다. 만나서 같이 할 얘기가 없고, 난 그런 이성을 즐겁거나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없다.   난 앞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평범한 자매 vs 철도를 미치도록 좋아하지만 기독교 안티인 아가씨”와 같은 형태로 배우자 선택과 관련된 시험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는데 이 말을 들은 모 지인의 대답은 이랬다. “철도를 너처럼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는 절대로 없을 테니 그런 시험에 빠질 걱정은 할 필요 없다.” 헐, 이게 더 현실적인 조언인 걸까?   나는 “음주가무가 뭐예요? 먹는 거예요?” 수준인 머리 구조의 특성상, 통상적인 육체의 정욕을 좇는 죄에는 거의 자동으로 면역이 된 채 지냈다. 그 대신 나는 더 고차원적인 이상한 이단에 빠질 수 있었고, 사회 문제의 원인에 대해 잘못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정치· 종교 조직에 쏙 빠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사회 구조에 대해 비관하다가 확 자살을 할 수도 있었다. 옛날에 내가 썼던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라는 글은 오랜 묵상의 결과를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하게 글로 정리한 것이다. 나 정말 예수님 덕분에 올라간 인생 효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나의 10년 후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난 정말 모르겠다. 내 아이디어와 내 발명품은 “정말 원론적으로 옳고 명분은 좋으나, 비현실적이고 상품화는 곤란하다”는 이유로 그냥 논문만 도서관에 처박힌 채 묻혀 버릴 수도 있다. 난 IT 기술을 사람의 죄성을 자극하는 데 활용할 능력이나 의향이 없다는 특성상, 대박 내고 벼락부자 될 가능성은 일단 80% 이상 접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화성인 오덕질 기질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해서 평생 동정을 지키다가 죽거나 휴거될지도 모른다.아니면 아예 이를 초월하여, 다 훌훌 털어내 버리고 “난 주의 일만 하느라 바울과 예레미야의 길(?)을 당당히 가겠다”고 선언하게 될 수도 있다. 헐~!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경우엔, 내가 아무리 명분이 옳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이성 중에서 절대적인 네 편이 되어 줄 사람 하나 못 사귀고, 2세 하나 못 만들고 죽으면 그것도 참 유쾌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아직은 기도만 하면서 답을 구해 봐야지 뭐.   하나님께서 고분고분 사회 제도만 잘 따르는 사람만 만드신 게 아니라, 나같은 똘끼가 다분한 통계상의 outlier도 만들고 은혜를 베푸셔서 어째 KJV 골수분자로 만드셨는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좀 재미있지 않은가? 김정훈 형제님과 신촌에서 교제한 적이 있었다(예전처럼 좋은 글 가지고 어서 컴백해 주세요~). 그분도 자신이 아는 하나님은 그저 딱딱하고 까칠하고 규칙· 규율밖에 모르고 엄숙· 엄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위트와 센스도 있고 다이내믹하고 기발함과 돌발상황을 좋아하신다는 걸 과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경에 예외가 그렇게도 많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흠정역 쓰는 킹진영 안에 본인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시고, 본인의 미래와 진로에 대해 마음껏 관심을 갖고 궁금해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궁금해하지만 말고 기도로 도와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다. 내가 글은 좀 딱딱하게 쓰는 거 같아도 마음은 여전히 여리고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연약한 성도일 뿐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2:3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26 13:20:40 | 김용묵
인간죄악의 정점, 동성애맞습니다. 이것저것 다해보다가 심드렁해져서 생각해낸것이 동성애기에 그렇고, 잔혹함의 극치, 과거 멸망했던 부족들의 인신제사도 그렇습니다. 그두가지특징은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NIV성경에서는 창세기 7:2 절에서 노아의 방주에 승선시킬 짐승들을 표현할때, a male and its mate 라고 표현했습니다. 킹제임스성경처럼 확실하게 male ,female이라는 구별되는 단어를 쓰지않고 교묘히 같은 성도 포함시킬수있는 단어로 바꿨습니다. 아시다시피 mate라는 단어는 단순히 동료,친구, 그짝을 나타내기에 같은 성(性)도 당연포함시킬수있는 표현이잖아요. 킹제임스성경에 같은 구절에서는 the male and his female 이라고 하나님께서 확실히 암수를 구별해주셨습니다. 단어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있다는 킹제임스성경의 진수를 다시한번 느낄수있는 대목이 아닐수없습니다. 역시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은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말씀맞습니다.
2012-05-24 21:55:01 | 최제식
성경은 아예 동성애 행위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심에서 우러나온 행위라고 직선적으로 딱 못박고 들어가고 있죠.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그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롬1:28) 머니머니 해도 동성애는 사람의 교만이 최막장으로 치솟을 때 발생하는 행위임이 천명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형제님 글은 볼 때마다 건전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글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5-24 16:01:37 | 소범준
제가 어릴 때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들이 이제는 사회 내에서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네요. 가끔 "동성애"를 동성간에도 사랑(이 단어에 대한 개념은 사람마다 다름)이 있을 수 있다라는 논리로 변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brotherly love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homosexuality (사랑이 아니라 성적이 측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sodomites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2-05-24 02:43:10 | 김문수
동성애에 대해서 성경이나 종교관 같은 걸 완전히 배제하고, 나 혼자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은 아주 단순하다.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예쁜 여자들을 놔두고 하필 같은 남자가 좋냐? 미친넘~” 정도가 고작이다. 난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게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인간이 그런 개념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를 못 했으며 지금도 못 한다.   그러나 그저 나 자신이 모르고 이해 못 하고 싫어한다는 상대적인 이유만 내세워 동성애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는, 동성애에 대해서 세상을 향해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 여러분 중엔 본인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그 많고 많은 유흥과 취미, 오락거리들을 놔두고 하필 철도가 뭐가 좋냐? 미친넘~”   철도를 소수 취향으로 존중해 주는 게 가능하듯이 동성애도 그렇게 취급하는 게 가능할까?   성경을 보면 딱 한 군데 삼하 1:26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워낙 우정이 두터운 친구지간이어서 그 사랑이 ‘여인들의 사랑’, 다시 말해 이성간의 사랑을 뺨칠 정도였다는 표현이 있다.이걸 보고 설마 다윗과 요나단이 게이 사이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과대망상 증세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는 과연 우정의 연장선이며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걸까?동성애자는 둘 다 동일한 동성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난 처음에 동일한 줄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더라.걔네들 사이에서도 남자 역할과 여자 역할이 나뉘어 있다. 또한, 동성끼리 말 그대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동을 한다. 이 과정이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엽기적이고 추잡하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은 평생 한 배우자(?)하고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게이 바에서 평생 몇십, 몇백 명의 파트너들을 만나서 그 짓을 한다. 한국어엔 놀랍게도 비역질과 밴대질이라고 성별까지 따로 구분하여 이를 표현하는 어휘가 존재한다..;;; 물론, 흡연자가 다 폐암 걸려 죽는 게 아니듯, 동성애를 한다고 다 에이즈에 걸리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패턴을 보아하면, 성병 발병률이 월등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이건 단순한 친구 사이와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동성애자에 대한 더러운 편견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보여야 하고 여자는 여자답게 보여야 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보고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여자는 남자를 보고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코스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한 것에서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걸 우리는 ‘변태’라고 부르며 혐오하고 멀리한다. 이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성적 수치심, 양심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넣어 주신 지극히 당연한 관념에서 비롯된 습성이다.   그런데 비록 변태같긴 해도 동성애자들이 자기네들끼리만 그렇게 즐기는 것 자체는, 무슨 살인이나 강간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니까 괜찮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다. 기독교 계열의 종교는 교리적으로 왜 그리 동성애를 싫어하는 걸까?   이것은 현행 법이 동물 학대죄를 단순한 재물 손괴죄 이상으로 엄하게 처벌하는 이유와 아쉬운 대로 비슷한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말 못 하는 미물이지만, 동물을 그 정도로 학대할 정도이면 충분히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반인륜적인 짓을 한 것이고 잠재적으로 사람에게도 잔인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동물이 불쌍해서 차원이 아니다.   그런 것처럼, 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해 놓으신 지극히 원초적이고 딱히 교육이 필요하지도 않은 본능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 법칙과 질서부터 배배 꼬고 왜곡할 정도이면, 이미 그 사람의 상태는 정상이 아닐 뿐더러 그는 더 어렵고 고차원적인 다른 법칙까지 지킬 리가 없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매우 위험하고 심각한 죄로 간주되는 것이다.   어디 한번 동성 결혼을 하고 나서 하나님 이름 팔아서 혼인 서약을 해 보아라. 마치 하나님께 “이 좋은 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앞뒤가 안 맞고 양심적으로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동성애는 태생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죄악하고 연결이 안 될 수가 없다. 이런 수읽기를 하는 영적인 안목을 인간에게 심어 줄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다고 그런다. 한편으로는 후천적인 개인 취향 운운하더니만 이제는 선천적인 이유를 꺼내 드는 게 의아하다. 그런 사람이 진짜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다 해도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하나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누구나 안 배워도 잔머리 굴릴 줄 알고 거짓말 할 줄 알고 나쁜 짓 잘 하는 것하고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동성애를 마음껏 즐기는 건 성적인 해방이 아니며 자유를 얻은 것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니까 그들이 인간성이고 뭐고 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리고, 막장의 막장까지 간 끝에 타락의 정점을 찍은 결과물이 동성애라고 로마서 1장 후반부는 말한다. 그 말이 진짜 맞는지는 내가 보기엔 동성애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지 싶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동성애를 동성애라고 중립적으로 일컬어 주신 적이 없다. 언제나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흉한 짓을 한다”, “남자가 여자와 눕듯이 남자하고 눕는다”는 식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뉘앙스로 표현한다.   옛날에는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도 동성애는 흉하고 추악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인권 사각 지대에서 온갖 따돌림과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한 죄가 다른 종류의 죄를 약간 견제를 하는 일종의 이이제이 효과였다.   그러다가 이젠 시대가 확 바뀐 덕분에 그들은 당당히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특히 진보 성향) 그런가 보다 하고 거기에 동조해서 끌려가고 있다. 왜 있잖은가? “난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같이 싸우겠습니다”라고 멋있는 말을 하는 대인배들이 성적 소수자들의 편을 적극 들어 주고 있다.   이럴 때 내가 늘 드는 비유가 있다.공병우 한글 세벌식 글자판은 한국에서 국가 표준 글자판으로 지정된 적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벌식은 오늘날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에서 지원되고 있으며, 사용하는 데 아무 불편이나 지장이 없다.   그런 것처럼 오늘날 인권 국가에서는, 동성애자들도 아까 얘기가 나온 것처럼 남에게 티 안 내고 민폐만 안 끼치면 지금도 자기 방식대로 얼마든지 별다른 불편이나 지장이 없이 살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성애 내지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건 단순히 평범하게 사는 수준을 넘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된다면, 그들은 성병에 걸려도 이제는 당해도 싼 게 아니라 의료보험 혜택을 적극 받으며 치료 받을 수 있다(내가 낸 세금으로!!).정상적인 남녀 결혼 부부와 동일하게 동성 부부도 자녀 양육과 관련된 여러 혜택을 동일하게 받는다.공무원 채용이나 성직자 초빙에서 동성애자는 아무 차별을 받지 않으며, 차별하는 조직을 상대로는 언제든 인권 침해 고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공식 석상에서 성차별을 조장하는 어휘가 모두 사라진다. 가령, 남편과 아내가 배우자와 파트너로 바뀐다거나. 국어사전에 ‘결혼’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가 바뀔 것이며, 성경도 당연히 동성애자가 보기에 위화감이 안 느껴지는 어휘로 모두 바뀐 에디션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본문 중에 동성애를 배척하는 구절은 다 삭제되거나 수위가 완화될 것이다. 굳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원인을 죄다 동성애자들에게 돌리고 싶지는 않다. 또한 정치적으로 선동을 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정말 인간적으로 우리 후세에게 저런 상상하기도 싫은 정신나간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동성애는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고 인간에게도 실제로 매우 해로운 죄악이다. 이것은 회개의 대상일 뿐 존중이나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엉덩국 병맛 만화에 나오는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 존슨이 정말로 성 정체성을 깨달은 건지,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는 성경을 펴면 답이 곧장 나올 것이다.   그저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국에 너무 무관심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너무 미쳐 돌아간다고 스트레스 받고 피해의식에만 휩싸이지도 말자. 왜 마지막 시대에 이런 일이 만연하게 되는지 그 배후를 살펴보고 망조 드는 세상의 타락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일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여해야겠다.   NOTES:   1. 본문에 인용된 그림들의 출처는 잘 알다시피 칙 전도지(Chick Tracts)이다.   2. gay라는 단어는 원래 좋은 뜻이다가 사회적 의미가 완전히 변질되어 버린 킹 제임스 성경의 대표적인 어휘 중 하나이다.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나오며(약 2:3), 원래는 명사도 아니고 유쾌, 화려, 명랑, 발랄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우리나라에서 ‘동무’가 완전히 못 쓸 말이 되어 버렸고 ‘야동 초등학교’가 학교 이름을 바꿔야 하게 생긴 것과 비슷한 맥락의 변화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5 12:22:3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24 00:48:22 | 김용묵
참으로 사람이 있는 그 어떤 곳에서든지 자유 의지란 건 여러 모양으로, 그러나 영향을 받는 일이 있지 않는 한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념을 일순간에 깨기란 참으로 수술대에서 메쓰에 째지는 고통 그 이상으로 아프게 느껴질 때가 많지요. 그래서 깨지기가 점차 쉽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12-05-22 00:19:08 | 소범준
이거, 저도 많이 배우게 되는 글이네요. 솔직히 형제님 주변 분들이 좋은 시선이건 나쁜 시선이건 상관없이 '철도교'를 바탕으로 - 근데 철도교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까지도 흘렀네요?^^; - 도전력을 길러주는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이런 글 써주시는 게 나을 듯 싶네요^^;)
2012-05-20 20:56:28 | 소범준
난 철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지난 2004년 초, 새마을호 열차 객실과 Looking for you 음악이라는 두 조건이 동시에 만족되었을 때, 본인은 딱 왕하 3:15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철도 성령으로 거듭났다. 한국 철도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합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을 위한 육상 교통수단임을 실감하였으며, 철도를 나의 개인적인 정신 지주로 영접했다.   나는 철도 덕분에 그야말로 세상을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철도가 나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주고 감성을 키웠는지, 게다가 심지어 애국심과 국토 사랑 정신까지 고취시켜 줬는지를 나는 언제라도 얼마든지 간증할 수 있다. Looking for you를 안 들어 봤기 때문에 새마을호 여행만도 못한 별 허접하고 수준 낮은 체험을 갖고서 천국 간증이네, 은사주의네 하면서 사람들이 속는다고 난 생각한다.   본인은 지난 수 년 동안 성경을 알고 영적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들이 교정되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것이 바로잡혔으며, 모나고 괴팍하던 성격도 예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많이 부드러워졌다. 죄에 대한 감각이 더욱 민감해졌고, 지금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이 더욱 빠르게 생각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철도 사랑은 변함없이,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철도는 예수님도 좋아하시거나 최소한 묵인· 용인하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철도교와 기독교는 모순이나 대립 관계가 아니다. 내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지 않는 것만큼이나 세상 그 어느 것도 새마을호 안에 있는 철도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머리 내부에 ‘연예, 오락, 스포츠, 유흥’ 분야는 오로지 철도가 100% 꽉 장악해 있어서 다른 영화, 드라마, 유행가, 스포츠 따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듯 이 글을 읽는 분들, 그리고 본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본인이 못 말리는 철도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내가 맨날 철도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내가 철도 덕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 개인 홈페이지의 방문객 중에서는 더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몇몇 지인들은 내게서 맨날 주워 들은 게 있어서 섬식 승강장, 복선, 경부선, 폐색 구간 같은 용어 정도는 구사하며, 심지어 Oh Glory Korail (한국 철도 공사 사가) 노래의 멜로디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다같이 좀 생각해 보자. 그런 것처럼,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 자신으로 인해서 복음이나 예수님, 성경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올바른 쪽으로 바뀐 게 있는가?당장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받아서 교회 출석을 시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교회 댕긴다는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은 예외적이고 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쟤 앞에서는 기독교 욕 함부로 하기가 좀 껄끄럽다. 성경에 대해서 만에 하나 궁금한 게 있으면 앞으로 저 사람에게 물어 봐야겠다” 정도의 평판이라도 있는가?   우리가 믿는 복음은 언뜻 보기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낭설 같지만 정말로 살아 있고 권능이 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옛 성현들의 듣기 좋은 격언 같은 차원이 절대로 아니다. 복음은 제일 쉬운 구원의 길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절대로 “나만 구원받고 끝”으로 혼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영원도, 구원도 없이 그저 세상적인 오덕질에 불과한 철도 복음만 해도 저 정도인데, 진짜 혼을 회심시키고 구원시키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은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으면 못 배기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를 필사적으로 막고자 마귀는 지능안티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놨다. 정상적으로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상한 위선자, 개념 없는 광신자, 나약한 루저 이미지를 예수쟁이와 딱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영적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고작 저런 위선자· 광신자 부류와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준 낮고 답답한 생각인가?   성경을 살펴보자. 출애굽기의 모세는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지던 시절에 파라오가 제안한 각종 절충안들(가긴 가되 애들은 놔두고 가라, 짐승을 일부는 남겨 놔라 등)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영적 교훈을 남겼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행위가 주변이나 후세에 끼칠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려고 나름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리오 왕 시절의 다니엘이 있다. 그때 내려진 칙령은 모든 관료들에게 일일이 청문회로 사상 검증을 실시해서 예수쟁이들을 색출해 내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한 달 동안은 혼자 골방에서 숨어서 기도를 몰래 해도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참 고지식하게도 여전히 늘 하던 대로 공개적으로 “나 하나님 믿소” 티를 다 내면서 기도를 하다가 사자굴에까지 갔다 왔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자. (단 6:7,10)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예수님 얘기가 나오는 건 철도 덕후한테서 맨날 철도 얘기와 Looking for you 얘기가 나오는 것과 같다. 더 직설적인 비유를 동원하자면 똥에서 똥 냄새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방사성 물질로부터 방사능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과도 같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로, 똥 냄새가 안 나는 똥이 똥일 수가 있을까?   “남에게 티를 내거나 강요는 절대로 하지 말고 예수는 너 혼자만 조용히 믿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온전한 신앙의 자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식으로 절뚝발이 형태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국가들 사이에도 전쟁을 하는데 룰이라는 게 존재한다. 군인과 민간인을 분명히 구분하여 민간인의 피해가 없게 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운 군인은 설령 포로로 잡히더라도 명목상으로나마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전에서 어떤 군사 집단이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라 교전권을 갖춘 정식 군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신원이 알려진 사령관에 의한 명확한 지휘 체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전투원이 통일된 고유한 복장을 갖춰서 피아 식별이 공개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무기를 겉으로 공공연히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 쪽 진영의 사령관에 대해서야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원인 우리 역시 자신의 영적 소속과 정체성에 대해서 세상을 상대로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노출시킬 생각을 해야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적진에 침투한 뒤에 주머니에서 수류탄이나 툭 던지고 도망치는 식으로 어줍잖게 싸워서는 공을 세우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러다가 나중에 적에게 잡혔다간 더욱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실수도 많이 한다. 복음을 전하는 열성이 너무 지나쳐서 너무 극성스럽게 굴 때도 있고, 낙담한 나머지 육신이 앞서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도리어 복음에 대한 간증을 잃게 만드는 행동을 종종 한다. 본인 역시 그 누구보다도 그런 사고를 많이 쳤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철도 복음이야 안 믿었다고 지옥 갈 일도 없고, 버스와 철도가 힘을 합쳐서 모로 가든 서울만 빠르고 안전하고 편하게 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복음이니,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그냥 소꿉장난 수준밖에 안 된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복음 같은 엄청나고 극단적인 복음은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실수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예수님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성도들에게 맡기셨다!   실수했으면 하나님께는 회개하고 사람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다시 본업으로 복귀하면 된다.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안 하면 그걸로 끝이다. 마치,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성경을 아예 안 읽는 것이 잘못이듯, 미숙함을 핑계로 자신의 영적 소속을 드러내고 알리는 일을 언제까지나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될 수 없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의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 성경에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내 논리와 지식으로 완벽하게 설득하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오만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더러 그러라고 하셨던가?   잃어버려진 자들에게 그냥 내 인격을 걸고서 하나님의 의와 심판, 죄와 복음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알려 주기면 하면 된다. 단지 그 말이 정말로 듣는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랑의 호소력을 불어 넣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봐도 예수님 영접은 어렸을 때 빨리 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 세상 연륜과 성경 교리와의 충돌의 폭이 그리 크지 않으며, 사고를 친 것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작은 시행착오를 몇 번 미리 겪고 거기에 적응과 면역이 되고 나면, 장성한 뒤부터는 탄탄대로이다. 평생 흥청망청 살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만 예수 믿으면 된다고? 큰일 날 소리이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여러 신앙의 선배들이 있고 특히 순교자들이 있다.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삶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만 우리로서는 엄두도 못 낼 무슨 엄청난 초인적인 일을 해냈다는 식으로 괴리감을 두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말로 빠질 수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 악화되면 천주교 성인 제도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약 5:17 같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영웅 콤플렉스를 교정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가면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이나 중세 암흑기 시절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놀라겠지만, 그 선조들 역시 말세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교리적 배도와 총체적 혼돈,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진리를 사수해 낸 성도들의 싸움 얘기를 들으면 아마 까무러칠 것이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상당수의 옛 믿음의 선배들은 진화론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며, 영어 성경 역본이 200종이 넘어가고 이중 대부분은 변개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일례로 인간 횃불이 되고 사자에게 잡아 먹히며 순교한 옛날 사람들은, 말세엔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이 사형 제도 폐지를 반대하고 비판하게 될 거라고 꿈엔들 예상했을까?우리 같은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팀은 사육신은 못 돼도 생육신은 충분히 된다. 어깨를 펴고 살도록 하자.   도산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다.“주변에 왜 인물이 없느냐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왜 당신이 그 인물이 될 생각을 안 하십니까?”   안창호 자신이 크리스천이기도 했고, 저건 성경적으로도 굉장히 통찰력이 있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영적으로 더욱 어둡고 암울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게 된다. 환란 전 휴거라는 약속마저 없으면, 정말 꿈도 희망도 답도 없다. 재물이 없으면 시편 37편 같은 신앙밖에는 후세에 물려줄 게 없다.   정말 심각한 마음으로 구국의 일념으로 길거리에서 프리칭을 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출간하거나 출간을 후원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그저 잠자코 있기에는 너무 위급한 상황이다.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의 순교자처럼 살 수 있고, 살아야만 한다. 단지 그 삶을 실현하는 배경과 방법이 다를 뿐이고, 그 방법을 실천할 기회는 오늘날 시국이 말해 주듯 주변에 널려 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위기인 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기회”라는 사고방식으로 살면 나의 영적 본분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고 삶을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엄청난 권면을 함부로 늘어놓은 건 아닌가 싶어 글을 맺기가 부담스러우나, 그러나 본인 역시 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츰차츰 내 삶을 하나님의 방식에 맞춰 보련다. 내가 그걸 지향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철도 오덕질 그렇게 하고도 안 짤리고 보직 유지하고 버티고 있는 게 틀림없다. ㅋㅋ[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1:5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19 22:45:01 | 김용묵
‘킹제임스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해주신 순수한 말씀이라고 확신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껏 믿어왔던 것들이 뒤집혀져있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삭제되고 변개된 -성경으로는 구원문제 및 신앙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 되기가 힘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구원문제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복복복’ 하는 이유가 구원을 너무 쉽게 여겨서 그렇다하고는 그들과 무조건 반대가 되어야 구원받는다며 -마치 여당이 썩었으니 무조건 야당이 옳다는 식으로- 청교도를 뛰어넘어 행위구원을 가르치거나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가 소위 '깨어있는 믿음'으로 인기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구원을 잃어버리는 조건’과 ‘잃어버린 구원을 다시 찾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입증을 못한단 말이죠! 마귀는 말씀이 없는 것을 알고 다른 것들로 교회를 장악하고 채웁니다. 특히 세상이 흉흉한 이때에 환상과 계시, 꿈, 천국, 지옥 등 은사적인 요소가 결합하여 말씀은 더 멀어지고 그야말로 혼탁 그 자체입니다. 종말론에 관한 베스트셀러 서적들이나 마지막을 전하는 카페등을 보시면 전부 다, 믿음+행위 구원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것이 두려움이지 복된 소망이 아닙니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욕심대로 거짓선생들을 둔다 했듯이 (딤후4:3) 말입니다. 변개된 말씀 ,잘못된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을 붙들고 있으니 순진한 양들이 거짓선생에 속고 또 속게 되는 것이 문제인데 , 저는 거짓선생들 중 일부도 ‘속이는 자’ 라기 보다 ‘속은 자’ 즉,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이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겠습니까? 저를 비롯해 여기의 많은 분들이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위와 같은 오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로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보존된 이 진리의 말씀을 붙들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2012-05-15 00:22:37 | 이상걸
사람들은 물리학에서 배운 것과 비슷하게 관성이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특별한 계기나 자극이 없는 한 현재의 상태대로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 참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따라 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2012-05-14 21:46:31 | 이진호
형제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한없이 모자른 저 역시도 형제님 글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자문하지 않고 목회자나 신학자의 글을 있는 그대로 정론화하며, 의심없이 받아들임에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뿐 입니다. 글도 배우기 전 귀로 듣고 배운 "돌다리도 두둘겨 보고 건너라" 라는 속담이 생각이 나는군요. 의문과 의심이 없이는 잘못된 것을 찾을 수도 그것을 고치는 일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2012-05-14 21:16:29 | 윤대원
  자유의지 많은 사람들이 오류와 착각 속에서 산다.특히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그렇다.바른성경을 알려줘도 믿음의 오류에 대해 알려줘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뭐 이런 수준이다. -_-;그리고 그 오류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아니 나오려는 생각을 안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재 믿고있는 믿음이 절대 옳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오류의 고정화 토착화 되어 바른것을 알려줘도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 하기에 바쁘지 진짜 한번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자신이 속해 있는곳이 자신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주장하는 프로그램이나 신학(?)이 내가 알고 있는것이 믿고 있는것이 잘못된 것이라 단 한번도 생각을 안한다. 예전에 사도신경에 기원과 진실을 알고 그사실에 대해 프린터를 해서 담당여전도사님께 물어보았더니   당사자도 갸우뚱? 하시더니 자신이 속한 신학대학교 교수님께 질문을 한 후 돌아온 답변이 "사도신경을 해서 뭐가 문제가 되냐"는 답변을 들은 후   난 정말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구나 라고 생각을 했고   그 후엔 내 신앙양심에 따라 예배시간에 절대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았다.   지금은 바른교회를 다니고 있고 그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다..     믿음의 기준은 성경말씀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한번 진짜로 그런가 아닌가 연구하고 생각해봐야 되는 것이 상식 아닌가?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가장많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과 개역개정 성경이 잘못된사본과 번역의 오류로 13군데의 말씀의 삭제와 전체 내용의 7%정도의 변개 첨삭이 있는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이 바른성경이라고 "없음" 이 없는 성경이 있다고 알려줘도 시큰둥이다. 반응이 거의 없다.아는 형님(현재 목회중)께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후원회 행사를 통해선물을 드렸더니 "없음"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답변을 해왔다.상식적으로 절은 있는데 내용이 없으면 "아 원래 절은 있는데 내용이 삭제 된것이구나" 라고 생각해야 하는것이 정상아닌가? 왜 개역성경이 개역개정으로 바뀌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들이 정말 바르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교과서가 잘못되어 있는데 그 잘못된 교과서로 말씀을 잘못 공부해서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어 진짜를 알려줘도 거짓을 진리로 철두철미하게 고집하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모든것이 자유의지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것도   잘못된 믿음을 갖는것도   잘못된 교리나 사람을 추종하는 것도   잘못된 성경을 바른 성경이라 고집하는것도 다 자유의지다.   당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절대 동의하지는 않지만 ........종교, 그 어둠의도시 란 글을 강력하게 추천한다.http://new.keepbible.com/Pds1-5/View/3nI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1: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14 19:09:32 | 송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