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이트의 상단 메뉴 중 성경 공부 메뉴에서 성경 사전으로 가면 '이름' 항목이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2579
참조하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우측 상단의 전체 글 검색을 이용해서 공부를 먼저 하고 질문을 하기 바랍니다.
꼭 부탁합니다.
2010-04-17 13:47:30 | 관리자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4&write_id=9
하나님의 이름 강의 1편입니다. 해당 목록에 있는 총 8개의 강의를 들어보세요.
2010-04-17 13:10:58 | 김재욱
제가 이 사이트를 이용한지 오래되지 않아서 잘 몰라서 그렇구요.
어떤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지금까지 배우고 생각해 본 것들을 제시한 후에, 잘 알고 계신 분의 도움으로 성경적인 근거 위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성령님의 이름에 대해서 바른 신앙적 지식을 갖고 싶어서 입니다.
참고할 사이트나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셔도 좋구요.
2010-04-17 12:54:17 | 신대준
이 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답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합니다."라고 했는데 이 글을 쓰신 분은 이것에 대해 궁금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는 이미 글쓴이가 생각하는 답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트에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여러 차례 올라와 있기 때문에 다시 추가적인 글을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이미 있는 자료들을 찾아서 읽어보시고, 스스로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2010-04-17 12:38:43 | 김문수
하나님의 아들께서 묻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 사례를 제시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 ’ (마6:9)
또한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로 자신을 바치시기 직전 기도하신 때에도 아버지의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내셨다 고백하셨고 그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17:6),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
뿐만 아니라 계시록에서 3장 12절을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그에게 새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기는 자는 …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고 …’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고 생명을 얻으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행4:12, 롬10:9, 13, 요20:31, 요일5:11-12, 요14:13-14 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자세하게 계시되었으므로(마1: 21-13 등),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성경은 오직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을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을 위해 삶을 영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롬14:6, 8, 고전6:13, 빌4:7-8 등).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분명히 가장 존중(존귀히 여김을) 받으셔야 할 아버지의 이름을 그 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내셨다 고백하셨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달라고 간구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고 그 이름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존귀한 이름이라면 아버지의 이름은 더욱 존귀한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드디어 아버지께서 그 분의 생명, 진리, 영광을 온전히 보여주셨기 때문에(요1: 1-18, 14:6-7), 그리고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 하나이시므로(요일5:7)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요. 또한 성령님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몰라도 그 아들의 이름을 통해 충분히 구원받고 생명을 얻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고 살 수 있는데 굳이 아버지의 이름을 알 필요가 무어냐며 반박하기도 있다. 혹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작은(귀여운) 이름 정도로 생각하여, 여호와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생각하거나 여호와를 아들의 이름보다 높은 이름으로 엄숙하게 부르면서 두려움을 가지고 대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으로는 영원한 죄사함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또는 천국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된 성경 말씀은 없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아들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높여야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한편 성령님의 이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성령님의 정확한 이름을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다만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아들의 영,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 분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실 위로자(요14:26)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은혜와 진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증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에게 권능을 주시며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만들어 가시는 분으로 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령님에 대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분의 거룩한 성품과 사역과 뜻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칭(대명사)으로 봄이 타당한 듯싶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우리가 마땅히 거룩히 여겨야 할 아버지의 이름을 그리고,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분명히 고백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그리고 천상에서 이기는 자 위에 새겨질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름을 몰라도 되는 것인가요? 아버지의 이름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이름이 없으신 분인가요? 하나님은 세 인격으로서 한 분이신데, 과연 이름 없으신 인격이 있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성령님의 이름에 관심이 있으신 형제, 자매님은 저를 포함한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잘 알고 더욱 존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 그 이름(들)을 위해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 유익이 될 좋은 길라잡이가 되는 답변들을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1: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7 12:20:07 | 신대준
성경에는 동명이인만 있는 게 아니라 동일 인물이 뒤죽박죽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해서 그런 게 특히 어렵더군요. 그런 예 중에 가이난과 게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역대기상에도 표기가 창세기와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걸로 기억.
2010-04-13 22:48:37 | 김용묵
잘 알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010-04-13 21:20:02 | 허광무
올리신 내용의 글은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시키려는 자들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구약족보에 없는 이름일지라도 신약에 기록되어 있으면 실제로 존재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정확히' 읽고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철학이나 헛된 말들에 속지 않는 비결입니다.
이해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a).
2010-04-13 20:23:39 | 김형식
(마 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원래 역사적 사실대로 서술하자면, "요시야 - 여호야김 - 여고니야" 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왕 파라오느고가 세운(대하 36:4, 왕하 23:34) 꼭두각시 왕 여호야김을 다윗 왕가를 계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메시야 계보에서는 삭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빠지고 대신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니야가 들어가 있습니다.
(참고: 게시물 166번,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2010-04-13 18:07:36 | 김문수
이 문제에 대해서 논증의 글을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괜히 쓸데없는 억측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어서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하여 답하겠습니다.
-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롬3:4).
그런즉 위에서 성경을 공격하는 신학자나 문서비평가들의 말이 거짓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입니다.
-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글이 아니라,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딤후3:16). 성경의 각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이므로 누가복음 3장에 게난이 들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단어를 주셨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기록자가 어느 문서를 보고 족보를 계산했느니, 이것이 어느 사본에서부터 등장하느니, 필사가들이 제대로 옮겨 적었느니 못 적었느니 하는 논의는 믿을 수도 없거니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 창세기와 역대기의 기록이 누가복음하고 일치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간음사건이 나오는데 역대기에는 안 나옵니다. 그렇다고 역대기의 기록에서 다윗의 간음사건을 필사가들이 삭제했다거나 사무엘기에 누군가가 다윗을 모함하려고 있지도 않은 간음사건을 집어넣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각 기록들은 각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과 기록하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누가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고 차례대로(눅1:3) 하나님께서 주신 단어들로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창세기나 역대기의 족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게난이라는 단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 아르박삿은 살라를 낳았는데 여기서의 낳았다(begat)는 것은 "출산"(bear)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속 관계가 법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관계는 대부분 자녀 출산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유다의 며느리가 낳은 아이가 유다의 아이로, 요셉의 두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처럼 인준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누가의 족보 기록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입니다. 이것은 사실적인 관계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창세기와 역대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게난(가이난)이 법적 상속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시고 그를 계보에 넣어주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2010-04-13 17:55:50 | 김문수
제 아내가 성경 공부중 누가 복음 족보에 가이난(게난) 2번 나오는데 아르박삿의 아들 셀라는 성경의 오기 라고해서 성경이 잘못될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창조과학 홈에서 찾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건지 알고 싶습니다.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Cainan or Shelah?)
Answers Magazine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 – 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 – 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출처 : AiG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번역자 : IT 사역위원회[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1:1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6:39:08 | 허광무
답변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강문호 목사님께 배웠다는 걸 아셨다니 놀랍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성막론 중 히 9:4절의 내용은
성막에 성물을 운반하던 고핫자손(오래전 내용이라 기억이잘,,)이 법궤 안에 3가지를 넣고 다녔던 30~40년 쯤의 내용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흠정역 성경을 통해 지금은 확실해 졌습니다...하하하.
2010-04-02 18:26:40 | 최형순
거기에는 금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으며(히9:4)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것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에 주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거기에 넣은 것이더라(왕상8:9).
히브리서 9장 4절에 나오는 "거기에는"이라는 말은 2절에 나오는 "성막"(tabernacle)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8장 9절은 솔로몬이 지은 "주의 집"(the house of the LORD)을 말합니다. 성막과 성전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막론이 잘못되었고, 자기가 만든 성막 모형이 옳다는 내용이나 궤 안에는 언약의 돌 판들만 있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강문호 목사님의 성막 강해를 배우신 모양입니다. 이 분은 성막 강해를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성막(히9장)과 솔로몬의 성전(왕상8장)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성막 연구에 너무 몰두한 탓인지, 이 분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린 목적은 이집트를 징계하고, 그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성막 만드는데 사용될 금, 은, 보석들을 뜯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원헌금, 강제헌금, 아이디어 헌금이라는 용어도 이 분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참고: http://kcnnews.net/bbs/board.php?bo_table=special&wr_id=23)
저는 강문호 목사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9장 4절을 통해 성막에 있는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2010-04-02 09:23:29 | 김문수
너는 긍휼의 자리를 궤 위에 두고 내가 네게 줄 증언을 궤 속에 넣을지니라(출25:21).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말하여 그가 아무 때나 성소 안으로 휘장 안쪽의 궤 위에 있는 긍휼의 자리 앞에 들어오지 말게 하라. 그리하여야 그가 죽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서 긍휼의 자리 위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니라(레16:2).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안에 만나 일 오멜을 가득히 담아 그것을 주 앞에 두어 너희의 세대들을 위하여 간수하라, 하매(출16:33)
=> 증언은 궤 속에 있고,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증언을 담은 궤 위에 긍휼의 자리가 있는데 주께서 긍휼의 자리 위에 나타나시므로 그것은 곧 주 앞에 둔 것입니다.
주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막대기는 증언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간직하여 반역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증표가 되게 하며 또 너는 내 앞에서 그들의 불평을 완전히 치우고 이로써 그들이 죽지 않게 할지니라, 하시니(민17:10)
=> 증거궤(개역) 앞이 아니라 증언 앞(킹제임스흠정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4절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언약궤 속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금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으며(히9:4)
히9:4에서 개역은 "있고"라고 하였고, 흠정역은 "있었으며"라고 합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있었고 언약궤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은 분명히 세 가지가 궤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2010-04-01 23:29:17 | 김문수
출애굽기 25장부터 보면 성막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제가 성막을 공부할 때는 증언 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만 있다고 공부하고 배웠는데
정동수 목사님께서 하신 성막 강의안을 보니까
증언 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다고 있네요.
전 증언 궤 속에 내용물을 이렇게 배웠거든요
"한국의 성막론은 약간의 잘못된 점이 있다.
언약궤 그니까 법궤 속에는 몇가지가 들어있는가? 3가지? 그렇다면 틀린것이다.
법궤 속에는 한가지만 들어있었다. 그것은 십계명 두 돌판이다.
출 27:21을 보라. 보면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넣으라고 되어있지 않느냐?(당시엔 개역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만나 항아리는 출 16:33을 보면 여호와 앞에라고 되어있다.
이 당시 법궤에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여호와 앞이면 법궤 앞이다.
즉 만나 항아리는 법궤 속 증거판 앞이 아닌 법궤 앞이 되는 것이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마찬가지로 법궤 앞에 있다.
민 17:10을 보면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가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법궤 앞에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바침 해주는 증거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법궤를 성전에 안치할 때의 일을 보면 된다 (왕상 8:9)"
제가 공부할 때 이렇게 공부했거든요.
그런데 흠정역 성경으로 공부했던 구절을 보면 민 17:10은 증언 궤로 되어있는데 나머지는 증언 앞이라고 되어있어서요.
전 너무 햇갈리네요..
확실한 답변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17: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01 22:05:15 | 최형순
최형제님 감사해요. 댓글은 몇 번이고 읽어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중요한 글인데 사라져서 깜짝 놀랐어요.
형제님 덕분에 저는 물론 다른 분들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어 감사드려요.
2010-03-14 21:44:33 | 이정순
사라지기 전에 갈무리해 두었던 댓글들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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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 | 10-03-11 19:09
다윗은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었던 온전한 마음이 한 여자에 대한 간음으로 깨어지면서 이후에 살인과 그외의 많은 나쁜 일들이 결과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에게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 깨끗하셔서 죄를 바라보실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극단적인 비약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누구에게 죄를 짓게 되면 이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형제에게 고의적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그 형제에게 용서만 구하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
논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 용서와 긍휼 역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는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경우"가 있고 "고의적으로 알면서 짓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두번째인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죄를 저질렀습니다.
선지자 나단앞에서 다윗은 어떤 변명도 없이 4절과 같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무게가 너무 크고 두려우며 뭐라고 비교할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 그는 절절하면서 깊은 회개를 한 것으로 보면 될 것같습니다.
또한, 어떤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모습 역시 다윗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세상사람들 다 보라고 공개적으로 말이지요....
우리를 되돌아보면 우리 역시 세상살면서 짓는 죄들 대부분이 알면서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에 비해 준수하지"하고 말이지요
저 역시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지만, 상대적인 가치가 아닌 절대적인 가치에 우리의 시선을 두고 끊임없이 장성한 분량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문수 | 10-03-11 19:51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므로, 다윗의 고백과 같이 주께 죄를 짓는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간음을 한 것도, 살인을 한 것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으로 주께 지은 죄입니다. 우리아는 그 죄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요.
성경에 사람에게 죄를 짓는다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문맥을 살펴보면 "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무슨 해를 입혔느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시편51편은 우리아에게 보내는 사죄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회개의 기도이므로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김용묵 | 10-03-11 21:25
탁월한 설명입니다.
죄 그 자체와, 죄가 끼친 결과를 성경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거짓말을 하거나 살인· 간음을 저지른다 한들 하나님이 그로 인해 해를 입는 게 있습니까? 아니죠. 그래도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는 단지 결과 차원에서 논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아무리 서로 동의하고 좋아서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음행이라고 말씀하시면 그건 음행이며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결과로 인해서 남이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약 5:16에서 너희 잘못/허물(faults)을 서로 고하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걸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KJV이외의 모든 성경에서 sin으로 변개되어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정당화하게 된 걸로도 유명하구요.
(그래도 개역성경을 갖고도 ‘서로 고백하라고 했지, 사제에게 고백하라고 안 했다’ 이렇게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는 글도 봤습니다. -_-)
시편 51편은 우리야에게 보내는 사죄 편지가 절대 아니라는 것 공감합니다.
김학준 | 10-03-11 20:37
제가 쓴 글에 "세상에서 보는 죄"와 "성경의죄"가 혼용되어 있었던 같습니다.
김문수 형제님의 설명이 더 바른 것같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이정순 | 10-03-11 23:08
세 형제님들 모두 감사드려요. 주께 죄를 짓고 에서 항상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어요.
감사드립니다.
2010-03-14 00:40:16 | 최상만
어머! 깜짝 놀랐어요. 댓글이 모두 없어졌어요. 세 형제님들의 답글과 제가 단 감사의 글도 모두 없어졌어요. 어떻게 복사도 안해놨는데..
2010-03-13 21:56:44 | 이정순
시편 51:4절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사였사오니 물론 모든 죄는 주 앞에서 이루어진 것을 압니다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다는 것은 이해가 안가요. 밧세바,우리야와 우리야의 집, 요압에게도 죄를 지은 것의 빌미를 제공했으면서말이죠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11 16:02:28 | 이정순
생각없이 기른 제 머리를 보며 다시 주님과 남편을 향한 순종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010-03-10 03:39:05 | 정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