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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임멜의 아들. 그는 성전의 제사장이며 우두머리 감독이었고 대언자 예레미야를 심히 대적한 뒤 그를 때리며 차꼬를 채워 옥에 넣었다가 후에 주님의 저주를 받았다(렘20:1-6). II. 말기야의 아들. 그는 대언자 예레미야의 원수였으며 그를 옥에 넣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렘21:1; 38:1-6). 이 바스훌의 후손들은 바빌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대상9:12; 스2:38).  
2009-04-22 15:24:26 | 관리자
  요르단 동쪽의 비옥한 땅(민21:33). 이곳은 북쪽의 헤르몬 산과 남쪽의 길르앗과 암몬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언덕이 많은 좋은 지역이었다. 가나안 족속들 지도 참조(52). 이곳의 토양이 부드럽고 좋아서 그 이름이 바산이 되었고 성경은 이곳의 초장에 대해 극찬한다: ‘바산의 숫양’(신32:14), ‘바산의 모든 살진 짐승 곧 숫양과 어린양과 염소와 수소’(겔39:18).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함께 언급된다(사2:13). 여호수아 시대에 이곳의 주요 지역 중 하나인 아르곱에는 60개의 성벽을 지닌 고을이 있었다(왕상4:13; 참조 신4:43; 수20:8; 21:27). 바산은 모세가 옥과 그의 백성을 섬멸한 후에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이곳을 넘겨주었고(수12:4) 솔로몬은 이곳에서 물품들을 가져왔다(왕상4:13). 이곳은 후에 시리아의 하사엘에게 정복되었으나 요아스가 회복했다(왕하10:33; 13:25).  
2009-04-22 15:23:30 | 관리자
  I. 유스도라 하는 요셉. 그는 그리스도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아마도 70명 중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룟 유다를 대체하기 위한 두 명의 후보 중 하나였다(행1:16-26). II.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그는 대언자였고 실라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해서 안디옥으로 내려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다(행15:22-34).  
2009-04-22 15:22:51 | 관리자
  I.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세워진 고대의 유명한 도시. 원래 이곳은 바벨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고대의 전설은 이것을 지지한다. 한편 어떤 이들은 그 이후에 니므롯의 아내인 세미라미스가 혹은 느부갓네살이 이곳을 세웠다고 말하는데 세미라미스가 고대의 도시를 재건하고 느부갓네살이 그것을 확장하고 잘 단장했다고 하면 이런 주장들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가 비옥하게 만든 광활한 평야 위에 세워졌다. 성벽의 둘레는 100킬로미터, 높이와 너비는 각각 90미터, 22미터였다고 한다(렘51:44-58). 또한 성벽 주변에는 깊은 도랑이 돌아가며 있었고 도시의 네 면에는 25개의 놋 문이 있었으며 이렇게 정방형으로 생긴 도시 안에는 정원과 집이 매우 많았다. 느부갓네살의 궁궐은 둘레가 9킬로미터였으며 여기에 공중 정원이 있었다(단4:29-30). 느부갓네살의 통치 하에서 바빌론은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며 특히 천문학으로 유명했다. 위치적으로 바빌론은 중앙아시아와 아라비아와 이집트 사이를 오가며 무역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걷는 일을 하기에 적합했고 그래서 상인들의 도시라 불렸다(사43:14; 겔17:4). 따라서 거기로 온 세상의 좋은 것이 흘러 들어갔고 그 결과 대언자들은 그것을 ‘큰 곳’, ‘온 땅에서 칭송받는 자’, ‘갈대아 사람들의 빼어난 아름다움’, ‘왕국들의 귀부인’(사13:19; 47:5; 렘51:41; 단4:20)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으로 인하여 여기에서는 부패와 음란한 것들이 극도로 성행하게 되었고 벨, 느보, 네르갈, 메로닥, 숙곳브놋 같은 우상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더러운 종교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예언되었고 성경은 바빌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준엄함을 잘 보여 준다(사13:1-22; 14:22; 21:9; 47:1-15; 렘25:1-38; 50:1-46; 51:1-64). 바빌론은 영원히 세계의 수도로 남지 못했으며 느부갓네살의 손자 즉 벨사살이 통치하던 때에 고레스가 이곳을 점령하였고 그리스 역사가들의 진술 역시 성경과 일치한다. 그 이후부터 고레스가 수사를 자신의 왕국의 수도로 만들면서 바빌론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바빌론은 한때 다리오 왕에게 반역하였으나 다리오는 다시 바빌론을 정복한 뒤 거기의 성문을 모두 부수고 성벽의 높이를 50큐빗 미만으로 줄였다. 페르시아 사람들과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의 통치 밑에서 바빌론은 점점 더 힘을 잃게 되었고 결국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거의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말았다. 주후 4세기까지는 바빌론이 있던 곳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거기 거하였지만(벧전5:13) 그 이후부터 바빌론은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 유적이 발견된 것도 약 3세기 전의 일이다. 바벨 참조. 바빌론의 붕괴와 멸망에 대해서는 이사야 대언자의 예언을 참조하기 바란다(사13-14).또 신약성경에서 바빌론은 우상숭배, 미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채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집단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며(계14:8; 16:1-21; 17:1-18; 18:1-24) 중세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이 교황체제를 가리킨다고 확신하였다. II. 이집트에도 온(헬리오폴리스) 근방에 바빌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었다.  
2009-04-22 15:22:15 | 관리자
  바빌론을 수도로 둔 지방. 이 유명한 지방은 유프라테스 강에 놓였으며 북쪽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남쪽에는 페르시아 만, 서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었다. 고대와 현대에 티그리스 강의 동쪽 지역과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지역 그리고 이 두 강이 만나는 곳의 양쪽 지역은 바빌로니아 혹은 ‘이라크 엘아랍’으로 인정되었다. 바빌론 제국 지도 참조(35).고대에 이 지역의 이름은 시날이었고(창10:10; 단1:2) 그 후에 바벨, 바빌론, 바빌로니아 등이 이 지역의 이름이 되었으며 갈대아 사람들이 이 지역의 대부분을 소유한 이후에는 갈대아로 불리기도 했다. 바빌로니아는 언덕이나 산이 거의 없는 평지로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범람으로 인해 기름진 퇴적물이 쌓여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지역이었다. 유프라테스 강은 4월말부터 6월까지 평상시 수위보다 3.6미터 정도 높은 상태로 흘렀고 그 결과 그 주변의 초기 경작자들은 충분한 물을 이용해서 관개 시설을 개발하여 농업에 이용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바빌로니아에는 크고 작은 운하가 많았으며 아마도 이런 운하들이 시137:1에 나오는 강들일지도 모른다. 이런 운하들 외에도 이곳에는 여러 개의 큰 호수가 있었고 그래서 대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론이 많은 물들 위에 거한다고 말하였다(렘51:13).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 중 셈족에 속하고 그들의 말은 히브리말과 비슷하며 특히 갈대아말과 거의 비슷하였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주전 2000년경에 니므롯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바벨, 에렉, 악갓, 갈네 같은 도시들을 포함하였다(창10:10). 니므롯 참조. 주전 1237년경에 니누스가 니느웨를 지은 후에 이 도시는 아시리아 제국이 갈대아 사람들에게 넘어가서 바빌론이 명성에서 최고조에 이른 주전 606년경까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살았으며 복음의 초기에 그들의 후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베드로는 거기에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벧전5:13).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여러 개의 발전하는 회당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탈무드 중 하나가 여기서 작성되었다. 갈대아 사람들 참조.                       바빌론의 벽돌    
2009-04-22 15:21:07 | 관리자
  키프러스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해양 도시. 여기에는 좋은 항구가 있었고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복음을 선포하였다(행13:6-13). 엘루마 참조.  
2009-04-22 15:20:14 | 관리자
  노아의 자손들이 홍수 후 120년이 지나서 니므롯을 중심으로 지은 높은 탑.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했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창10:10; 11:9). 그들이 도시와 탑을 쌓은 것은 거기에 자리를 잡고 흩어지지 않으려 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홍수 후에 땅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그들이 서로 다른 말을 쓰게 하시고 결국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하셨다(행2:1-11). 탑은 완공되지 못했지만 기초는 놓였고 거기에 남은 사람들이 바로 그 자리에 바빌론 도시를 세웠으며 결국 그 탑을 완공해서 벨루스의 탑이라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거기를 방문해서 그것이 피라미드 형태이며 그것의 기초의 둘레가 0.8킬로미터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이 탑에서 벨 숭배와 점성술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유물이 거기에 보관되었고 예루살렘에서 빼앗은 유물들도 여기에 보관되었다(대하36:7; 렘51:44). 느부갓네살 참조.    
2009-04-22 15:19:43 | 관리자
  그리스의 관용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아무리 학식이 있고 예의가 있어도 다 바바리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라는 표현은 결국 모든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다(롬1:14).
2009-04-22 15:19:01 | 관리자
  산당(겔20:29). 이것의 복수형은 바못(Bamoth)이며 바못바알은 모압의 경계 근처에 있던 히브리 사람들이 머물던 곳으로(민21:20; 22:41) 후에 르우벤 지파에게 배정되었다(수13:17). 물론 이곳에서 바알 숭배가 이루어졌고 사15:2에 나오는 산당들은 이런 곳을 의미했을 것이다. 산당 참조.  
2009-04-22 14:23:35 | 관리자
  유대인들의 분파의 하나. 그들은 교리나 실행의 주요 문제에서는 서로 동의하였지만 작은 문제에서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유명한 학파인 힐렐과 샤마이 파가 그러하였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분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말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그들이 지혜와 성별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음을 뜻하였다. 그들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하나의 특정한 분파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기록된 말씀이 유대교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금식, 기도, 구제, 이방인과 세리들과 접촉하는 것 등의 외적 의식에 관한 한 여러 가지 전통과 규례를 첨가하였고(마6:5; 9:11; 23:5; 막7:4; 눅18:12) 그래서 미신과 자기 의를 세우려는 형식의 틀에서 천주교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조문을 중시하였지만 자기들의 전통과 철학으로 그 안의 영적 진리를 무시하였다(마5:31, 43; 12:2; 19:3; 23:23). 그들은 겉으로 경건하게 드러났고 거룩하게 보였으므로 보통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그들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처럼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 규제되지만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믿었고 혼의 불멸과 몸의 부활을 믿었다(행23:8).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 그들의 위선과 교만과 탐욕을 책망하셨으며(마6:2, 5; 23:1-39; 눅16:14; 18:9; 요7:48-49; 8:9.) 이로 인해 그들은 처음부터 그분을 미워하고(마12:14) 그분을 죽일 방도를 구했으며 그 결과 그분의 피가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돌아갔다. 한편 그들 중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시므온처럼 진실로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다(마27:57; 눅2:25; 요3:1). 다소의 사울 역시 엄격한 바리새인이었다(행26:5; 갈1:14). 사두개인, 분파 참조.  
2009-04-22 14:23:03 | 관리자
  I. 시므온 지파에 속한 므홀랏 사람. 그는 사울의 딸 메랍과 결혼한 아드리엘의 아버지였다(삼상18:19; 삼하21:8). II. 길르앗 출신의 노인. 그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요르단 강을 건너 피난할 때 많은 양식과 침상과 필수품을 가져와 왕과 왕의 신하들을 도왔다(삼하17:27; 19:32). 다윗이 돌아갈 때에 그는 요르단까지 함께 갔으나 나이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가서 영광을 누리는 것은 사양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겨 바르실래의 가족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을 왕실의 가족들로 만들라고 말했다(왕상2:7). III. 위에서 언급된 바르실래의 딸과 결혼한 제사장(스2:61; 느7:63).  
2009-04-22 14:21:48 | 관리자
  I. 네리야의 아들. 그는 유다의 명문 집안 아들이었으며 예레미야 대언자의 신실한 친구였다. 주전 605년경에 그는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백성과 통치자들에게 낭독해 주었다. 그런데 통치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여호야김 왕에게 갔으나 그는 그 책을 불살라 버렸고 이에 바룩은 한 번 더 예레미야의 입에서 말씀들을 받아 적었다(렘36:1-32). 그는 자기 형제 스라야와 함께 바빌론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예레미야가 바빌론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렘51:59-64). 후에 그는 예레미야와 함께 핍박을 공유하며 옥에 갇히고 반역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강제로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렘43:1-13). II. 느헤미야의 친구 중 하나(느3:20; 10:6; 11:5).  
2009-04-22 14:20:19 | 관리자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주로 남서풍이 불었으며(눅12:54) 고대에는 북풍이 자주 일기도 하였는데(욥37:9) 이것은 좋은 날씨를 예고하며 따라서 북풍이 비를 몰아낸다는 잠25:23을 지지한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바람은 열매를 말리는 데 쓰인 바람과(창41:6; 겔17:10; 19:12) 큰 위력을 가진 바람(시48:7; 겔27:26; 욘4:8) 등인데 후자는 주로 뜨겁고 메마른 여름에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돌풍을 의미한다. 이 바람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므로 열기가 대단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마르게 하였다. 유로클루돈 참조.  
2009-04-22 14:19:22 | 관리자
  팔레스타인 남쪽에 있는 큰 사막 지대(창14:6). 이곳은 엘아라바 계곡 즉 사해에서 아카바 만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서쪽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38년 동안 유랑하던 광야 지역 근처에 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사흘 정도 가면 시내 산이 있으며(민10:12, 33; 12:16) 이곳의 북쪽에는 가데스와 신이 있다(민13:3, 21, 27). 여기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거하였고(창21:14, 21) 다윗과 하닷이 잠시 머물렀다(삼상25:1; 왕상11:18).  
2009-04-22 14:18:43 | 관리자
  아비노암의 아들. 그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게데스 출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대언자 드보라를 이용하여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서 구출하셨다. 그는 여대언자와 함께 가서 10,000명을 모아 다볼 산에 주둔시켰는데 이것은 적군이 900대의 철 병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삿4:3).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전쟁에서 싸우셨고 드보라와 바락은 이것을 찬양했으며(삿5:1-31) 후에 바락은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에 들어갔다(히11:32).  
2009-04-22 14:18:12 | 관리자
  그리스도 당시의 유명한 강도. 그는 폭동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총독이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구하였다(마27:16-26).  
2009-04-22 14:17:4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