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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을까요? ● 정동수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입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딸을 죽게 하면서까지 서원을 지키는 인물이 입다라고 배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사기 11장 37-39절을 봅시다. 개역: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흠정역: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개역성경은 히브리말에도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다가 처녀 딸을 죽여 번제 헌물로 바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뒤 문맥상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39절 끝에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는 평생 처녀로 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주대학교의 김경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 및 표준 새번역 등의 번역문은 번역과정에서 역자가 나름대로의 특정한 해석을 본문에 가미시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담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이미 「그 말씀」 1995년 7월호 (195-200쪽)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 번역본들의 부당성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사기 11:37-40에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중에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고대 역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해석은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009-05-30 15:10:44 | 관리자
마태복음 24장의 이 세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 정동수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올리브 산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징조들과 - 즉 전 세계적인 전쟁, 기근, 질병, 지진, 그리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의 싹이 남 등 - 자신이 권능으로 영광스럽게 이 땅에 재림하기 전에 있을 사건들 즉 7년 환난기에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들을 말씀하신 뒤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약속을 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4-35). 여기 이 놀라운 예언 속에는 ‘이 세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특별한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의미하며 바로 ‘이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세대를 이스라엘의 독립과 관련된 한 세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했고 한 세대는 20-40년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앞뒤 문맥상 이 세대는 24장의 무서운 일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2009-05-30 14:51:39 | 관리자
창세기 1-11장의 난해 구절 성경의 미스테리   ● 김경래 [김경래 교수는 총신대와 이스라엘 Institute of Holy Land Studies(M.A.)를 졸업하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본학으로 박사학위( Ph.D.)를 받았다. 지금은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글은 1996년 7월호 월간 그 말씀(p.190-196)에 실린 것이다. 창세기를 비유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이 교수님의 글은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특히 다음의 문제를 잘 다루셨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이들은 분명히 이것이 천사라고 믿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UFO는 있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구절: 이것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개역성경만이 범한 오역이며 킹 제임스 성경은 이를 정확하게 "살아 있는 혼"으로 번역했다. 이 구절로 인해 "영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소위 베뢰아의 거짓 교리가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빠져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노아의 대홍수: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아의 대홍수는 전세계를 덮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셈과 야벳의 나이 관계; 많은 이들이 셈을 장자라고 생각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야벳을 장자로 규정짓고 있다. 여러 가지 크리스천 소설 -진짜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이니 가짜임-을 지어 교계에서 유명하게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늘 장자 이론을 써서 글을 전개하지만, 사실 성경은 모두 두 번째 사람들에 의한 새 역사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성경의 처음부터 자세히 보기 바란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사울과 다윗, 첫째 아담과 나중 아담(예수님) 등등. 그래서 우리도 모두 두 번 태어나야만 한다. 부디 크리스천들이 소설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에 무지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소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우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현실임이 매우 안타깝다. 저자의 의도를 다 살리기 위해 성경 구절을 그대로 두었으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 덩어리(창2:6) 창세기 2장 6절에 "땅에서 '에드'가 올라와 온 지표면을 적셨다."는 기록이 있다. 히브리어 '에드'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두 차례 나온다(여기서와 욥기 36:27).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이를 '안개' 라고 번역한 반면에 표준새번역에서는 '물'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욥기 36장 27절의 경우, 개역은 역시 '안개'라고 번역하고 표준새번역은 이 낱말이 속한 문구를 '그것으로 빗방울을 만드시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전 3세기경에 번역된 칠십인역은 창세기 2장 6절의 '에드'를 보통 '샘'을 뜻하는 '페게'로 번역하고, 아람어 탈굼은 이를 '구름'을 뜻하는 '아네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 낱말의 해석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이를 '수증기' 내지는 '안개'로 보는가 하면, 혹자는 '샘' 또는 '우물'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대 근동 유사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지하의 물줄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창세기 2장 6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주소지인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창세기 2징은 그 초점을 인간 창조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전체 풍경을 촬영한 후 다시 줌을 이용하여 촬영자가 원하는 특정한 풍경을 보다 상세히 촬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러한 식의 대구적 묘사가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2장 4절 하반절에서 일반적으로 '히늘과 땅' 대신 순서를 바꾸어 '땅과 하늘'이라고 말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울러 창세기 2장 5-6절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말하는 바를 다른 문구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 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토후 바보후')라는 표현을 달리 또는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장 2절에서 '테홈'과 '물'('마임') 등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커다란 물의 집합체'는 2장 6절에서 우리의 관심사인 '에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 지표면('콜프네 하아다마')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에드'의 범위는 결코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만큼 땅의 일부분만 적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2장 5절에서 이미 비를 내리는 것과 식물의 생장을 연관시켜 언급하였으므로 2장 6절의 '에드'는 식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치 않은 점은, 2장 6절의 '에드'가 둘째 날 하나님이 물을 가르기 전의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물을 가르고 난 이후에 '궁창 아래의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다만 그 안의 동산만을 적실 뿐이었다(창2:10). 그러나 2장 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에드'는 '온 지표면'을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라고 불린 '물체'는 반드시 커다란 규모의 것이어야만 한다. '안개'나 '수증기', 또는 단순한 '샘' 같은 것들로는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창세기 1장 2절의 '태홈'과 관련된 '커다란 물 덩어리' 말고는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물체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개역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 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세기 1장 20∼21절, 24절, 30절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성경은 그 곳에서 '생물'이나(1:20∼21,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세기 2장 19절, 9장 10,12,15∼16절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역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우리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여타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2장7절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창6:1∼4) 창세기 6장1∼4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 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 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형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유일하게 욥기에 또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 6장 1∼4절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욥기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22:30, 막 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0장 34∼36절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 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말고도 에녹서, 요세푸스 등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세기 6장 1∼4절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떄까지 지키게 하신 일'(4절)과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5절)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의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베드로후서 2장 4절("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3장 19∼20절과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필자의 글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 전서 3:13∼22" 참조,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5월호, 12∼22쪽에 실림).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6장 3절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의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히브리어의 '레올람'은 '영원히'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수명을 누려왔었다(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할 때 더욱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의 존재에 대하여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노아 홍수 때 이미 모두 멸망하였겠고, 전자는 신약성경의 기록대로(그리고 이사야 24:21∼22 참조) 심판 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김상복 목사님의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서출판 횃불에서 간행한(1993년 초판) 그의 저술「잃어버린 왕좌」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강해집으로서, 창세기 6장 1∼7절에 대하여는 제16장에서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성경은 창세기 5장 32절을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5장 32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 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났다. 둘째,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 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났다. 셋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났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났다. 히브리어 어법 상 앞의 두 가지보다는 세 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 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세기 10장 21절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둘 다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로도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세기 10장 21절의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악히 예펫 하가돌')이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첫째, '야벳의 큰 형제', 둘째, '큰 야벳의 형제'이다.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마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마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세기 11장 10절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년에는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 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창 7:9∼12),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이년'(슈나타임 악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육백 세와 육백일 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 후 두 해(노아 나이 육백이 세와 육백삼 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육백사 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백 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오백사 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세기 5장 32절("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증거로서 창세기 9장24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9장20∼27절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창 15:16, 19∼21절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세기 9장 24절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개역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27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보았다. 노아의 세아들 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세기 9장 24절의 '작다'('하카탄')나 10장 21절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노아 집안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그렇게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오백 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오백사 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2009-05-30 14:26:51 | 관리자
미갈과 메랍 ● 정동수 일반 성경은 삼하21:8에 메랍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는데 흠정역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어 KJB에도 미갈로 되어 있구요. 그런데 삼상18:19을 보면 사울의 큰 딸 메랍은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어졌고 삼하6:23에는 사울의 다른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하21:8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삼하21:8을 개역성경과 흠정역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흠정역: 다만 왕이 아이야의 딸 리스바의 두 아들 곧 그녀가 사울에게 낳은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의 다섯 아들 곧 그녀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을 위하여 키운 아들들을 붙잡아 개역: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KJV: But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whom she bare unto Saul, Armoni and Mephibosheth; and the five sons of Michal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brought up for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NIV: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미갈이 '낳은 아들들'이 아니라 '키운 아들들'이라고 말하며 개역성경과 NIV는 메랍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히브리 마소라 원문은 메랍이라고 할까요? 미갈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이 생전에 보시던 전통 마소라 본문은 분명히 미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역본인 NKJB조차도 미갈이라고 정직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같은 현대 역본들은 미갈은 아들들이 없으므로 히브리 기자가 메갈을 미갈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메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을 근거로 듭니다. 여기에 원어의 함정이 있습니다.  원어는 어느 단어든지 몇 개의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각 단어의 뜻(번역)은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은 대부분 '낳다'(bear, bege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그렇게 번역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 50장 23절을 봅시다. 흠정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을 삼대까지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이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랐더라. 개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여기서도 동일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흠정역이나 개역 모두 '자라다', '양육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같은 히브리말(예를 들어 스트롱 번호 3205)이라도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원문에 있는 대로 미갈을 그대로 두고 미갈이 키운 아들들이라고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NIV 등은 '낳다'는 뜻만 고집하고 그러면 앞뒤가 안 맞으므로 과감히 미갈을 메랍으로 바꾸고 서기관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주석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신학자들도 대부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독자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그 말씀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안에 확실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완전한 성경입니다. 우리말 킹제임스 성경은 그 성경을 우리말로 최대한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2009-05-30 14:08:32 | 관리자
뵈베와 여자 집사 ● 정동수 다음은 뵈베와 여자 집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을 알려 주어도 이미 마음에 그렇게 믿기로 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이 성경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사람(그리스도인 포함)의 현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만 성경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나 집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 등에서도 여자 집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매들이 집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집사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신학교나 목사 혹은 집사는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를 가리킵니다. I commend unto you Phebe our sister, which is a servant of the church which is at Cenchrea:(KJV) I commend to you our sister Phoebe, a servant of the church in Cenchrea.(NIV) 영어 KJV, NKJB, NIV, NASB 등은 모두 뵈베를 servant 즉 종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IV와 NASB는 그 옆에 각주로 여집사(deaconess)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즉 원래는 종이 맞지만 현대의 여집사 추세를 반영하여 여집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상충되는 듯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때에 우리가 취해야 할 성경 해석 원칙은 명백한 구절을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는 개인이나 교단의 역사성 혹은 이득을 위해 명백한 것들을 흐릿한 것들 뒤로 놓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 여기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기록자는 디모데전서라는 목회 서신에서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동일한 기록자 사도 바울은 분명히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로 인해 타격을 입지만 그래도 교단이나 개인의 생각을 버릴 수 없으므로 이들은 원어 게임장으로 달려 갑니다. 즉 딤전 3장의 집사는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이며 신약성경에 30회 나오고 ‘minister’, ‘serve’, ‘servant’로 번역되었습니다(마20:26; 마23:11; 롬16:1 등). 또 동사 ‘디아코네오’(스트롱 번호 1247)는 신약성경에 37회(마4:11; 마20:28; 행6:2 등)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는 분명히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입니다. 그런데 ‘디아코노스’는 딤전 3장의 집사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minister, servant로만 번역되었습니다. 디아코노스의 용례를 보기 위해 16장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 15장 8절을 보겠습니다. Now I say that Jesus Christ was a minister of the circumcision for the truth of God, to confirm the promises made unto the fathers: 이제 내가 말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확증하려 하심이요, 여기서 minister 즉 사역자로 번역된 단어는 16장 1절의 servant와 마찬가지로 '디아코노스'입니다. 원어를 주장하는 이들의 뜻대로 하자면 이것도 deacon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할례자들의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번역되면 맞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이 바로 원어 게임의 함정입니다. 그러면 왜 같은 디아코노스를 딤전 3장에서는 집사라고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거기의 집사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종으로서의 집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딤전 3장 12절을 종으로 바꾸어 봅시다. 종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집사 대신 종으로 바꾸면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므로 한 마디로 집사는 교회에서 종의 직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집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집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첨언: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혹은 성경대로 함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교회에는 여자 집사가 없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의 여자 집사들만큼 부지런히 일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들의 문제입니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랑할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이 우습게 여기는 일반 교회 성도들보다 더 사랑하고 더 뜨겁게 모이고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미지근하고 덜 모이고 덜 희생하는 게 근본주의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근본적인 교회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009-05-29 14:14:53 | 관리자
드보라와 여자 목사   ● 정동수   다음은 드보라와 여자 목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제가 오늘 읽은 글을 쓴 저자는, 여대언자 드보라를 리더쉽과 연결시켜 말하면서, 교회나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리칠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속 드보라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은 드보라 시대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삿17:6, 21:25 이렇게 평가하신다. 여대언자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다른 재판관( 옷니엘, 기드온 등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대언자가 아니다, 그녀가 행동한 것은 "또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작은 숲들을 섬겼더라" 삿 3:7과  관련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을 받은 여대언자이지만, 하나님께선 그녀를 대언자로 혹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대충 이런대용이였는데요,, 이 저자가 쓴 드보라에 대한 평가가 아무래도 아닌것 같아서요.. 제 생각과 너무 많이 달라서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어떤 한 글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드보라의 시대에 재판관을 대신할 남자가 없없고, 결국 하나님은 여자 드보라를 대언자로 사용하셨다, 이것을 지금시대랑 연결시킬수 있는데, 어느 한 지방에 형제,자매 기독교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목사의 역할을 대신할 형제가 없다면, 능력부족이나, 믿음부족으로,, 그렇다면 성경믿음,지식방면으로 뛰어난 자매를 목사로 세울수 있다.   여대언자 드보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한국 교회에서는 특이하게 여자 목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고 거기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자 목사의 근거로 대는 것이 바로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여대언자 드보라입니다.   대언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대언자(Prophet)의 여성형인 여대언자(Prophetess)는 성경에 8번 나옵니다(출15:20; 삿4:4; 왕하22:14; 대하34:22; 느6:14; 사8:3; 눅2:36; 계2:2).   가장 처음 나온 사람은 미리암입니다. 그리고 드보라, 훌다 등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안나와 거짓 여대언자 이세벨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드보라를 가리켜  여대언자라고 하므로 드보라는 대언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And Deborah, a prophetess, the wife of Lapidoth, she judged Israel at that time(Judg 4:4).   그러나 여자 대언자가 구약성경에 있었다는 것과 여자 목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성경(딤전3장)은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그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목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목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2009-05-29 13:30:29 | 관리자
질문: 계시록 4장 6절은 짐승이 맞습니까? 아니면 생물이 맞습니까? 그리스어로는 생물이 맞는다고 하는데요. 대답: 먼저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헬라어 원문 : τεσσερα ζωα, 영어 KJV : four beasts,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네 생물, 한글개역판: 네 생물이 부분도 영어 KJV는 완전한 오역이다. ‘조아‘(ζωα)는 헬라어에서 ‘생물‘을 의미하지 영어 KJV같이 ‘짐승‘이나 ‘야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라어에는 ‘짐승‘이나 ‘야수‘를 의미하는 ‘데리온‘(θηριον)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다 (cf. 계13:1, 2, 11).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왜 영어 KJV를 번역하지 않았는지 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한글 KJV가 영어 KJV의 번역이라면 영어 KJV가 비록 잘못되었더라도 그대로 번역을 해야 한다. 만약 고치려면 sic이란 문장 부호를 사용하든지 다른 방법으로 원문대로 번역하지 않았음을 표시해야지 번역자의 마음대로 내용을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KJV는 영어 KJV의 번역도 아니고 헬라어 원문에서의 새로운 번역도 아니다.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KJV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2009-05-07 17:21:3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계시록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대답: 둘 다 가능하지만 계시록 전체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므로 전자를 택한 것입니다. 영어 원문은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영어에서 ‘of’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주격, 소유격, 목적격 등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므로 추후에 ‘of’의 용례에 대해서는 하나씩 다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혹은 대한) 계시’로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책의 제목이 ‘요한의 계시록’이기 때문에 계시록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며 이 경우 예수님은 계시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하면 예수님이 계시의 주체가 되며 이 경우 예수님이 계시록 전체를 주시는 분이 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어떤 번역을 취하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희는 계시록이 ‘예수님의 계시’라고 믿습니다. 그 근거는 계시록 2, 3장에서도 일곱 교회에게 계시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4장 이후부터 일어나는 7년 환난 기간의 모든 계시를 주는 분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계시록 22장에는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계22:16).이 구절과 1장 1절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계시록을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모든 계시의 주체가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계시를 적은 사람은 요한이므로 요한의 계시록이라 해도 이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럭크맨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로 가르치므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럭크맨  말고도 훌륭한 성도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읽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는 성경의 문맥입니다.한 성경에 두 가지 번역을 다 담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만 적어야 하므로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앞뒤 문맥을 살펴보고 전체 책의 요점을 머리에 둔 채 적합하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계1:1을 논하실 때도 오역이라 하지 말고 이역이라 하기 바랍니다.
2009-05-07 17:20:20 | 관리자
아침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왜 candlestick을 촛대로 번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즉 candle이 초라면 candlestick은 촛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계시록 2:1, 5 등에 나오는 candlestick이라는 단어는 최초로 출애굽기 25장 31절에 성막을 지으면서 기구의 하나로 등잔대(candlestick)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는 단복수 합해서 44번 나오는 것 같습니다. And thou shalt make a candlestick of pure gold: of beaten work shall the candlestick be made: his shaft, and his branches, his bowls, his knops, and his flowers, shall be of the same(출25:31). Remember therefore from whence thou art fallen, and repent, and do the first works; or else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and will remove thy candlestick out of his place, except thou repent(계2:5).  이런 혼동은 현대 영한사전에 candlestick이 촛대로 나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candle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지로 기름이나 밀랍을 빨아올려 빛을 내는 기구를 뜻합니다. 최근에는 양초의 재료인 밀랍이 주로 쓰이고 있지만 과거에는 특히 성전과 성막에서는 언제나 기름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출27:20-21에는 등잔대에 쓸 올리브 기름이 나오고 또 슥4:1-4에서는 등잔대와 일곱 등잔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일곱 개의 관이 나옵니다. 왜 관이 필요할까요? 기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초가 흐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계시록에서도 동일한 등잔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를 촛대로 번역하면 완전히 잘못된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의 근원이 어디인가 봤더니 또 말씀보존학회더군요. 그들은 candlestikc을 모두 촛대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익숙한 사람이 우리 흠정역 성경을 보고 또 현대 영한 사전을 보면 우리 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지요. 요즘 이런 질문을 받으면서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물론 개역, 표준 새번역, 공동 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도 모두 등잔대로 번역했습니다. 아무리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옳아도 그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을 잘못하면 나쁜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을 잘한 경우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틀린 데가 있다고 생각되면 통보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협조가 성경 본문을 고정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어 봐야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낼 때 인격적인 글로 보내기 바라며 제안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노력은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05-07 17:19:45 | 관리자
하나님의 사람 성도 요한의 계시록: 요한계시록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기록자: 요한, 기록 시기: 주후 96년경, 성격: 예언, 수신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성도 이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담은 기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받아 천사에게 주었고 천사는 요한에게 그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었다. 주제: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요5:22, 27) 목적: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종 목적과 인류와 사탄의 최종 종착지 특별히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 상태를 보여 주는 것 내용: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부의 원수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또 미지근한 성도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위로와 경고의 메시지로 모든 교회에게 주어졌다. 이 책은 또한 신구약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의 성취를 보여 주고 특히 창세기와 함께 완전하게 진리의 사이클을 구성한다. 요한은 자기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을 기록하면서(1:19) 먼저 그리스도의 환상(1장), 교회의 심판(2-3장), 교회의 휴거 이후에 이 땅에 남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을 향한 7년 환난기(4-19장), 천년왕국(20:1-6),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사탄의 패배(20:7-15),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21-22장)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 12,000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9장(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핵심 절: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1:19)핵심 단어: 이기다(2:7, 11, 17, 26; 3:5, 12, 21), 세상을 이기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이다(요일5:5), 핵심 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2:7) 계시록의 그리스도: 살아 계셔서 승리하시는 주님(1:18), 영적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라.”(1:3)
2009-05-07 17:19:03 | 관리자
유다의 일반서신: 유다서 The General Epistle of JUDE 기록자: 유다, 기록 시기: 주후 67년경, 성격: 일반서신, 수신자: 하나님의 모든 성도 이름: 이 책의 이름은 이 책을 기록한 유다에게서 유래되었다(1:1). 그는 야고보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동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였다. 주제: 배도의 때에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 목적: 성도들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하는 것 내용: 유다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구원에 관하여 기록하려 했으나 성령님은 경건치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는 것을 강하게 지적하기 원했다. 그래서 유다는 주님을 부인하고 마음대로 죄를 짓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말하고 구약성경의 배도의 예를 보여 준다. 그는 짧은 서신에서 삼위일체, 구약성경의 확실성, 천사들의 존재, 사탄의 존재와 그의 권능, 심판과 보복,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신성 등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유다서는 1장, 25절, 613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절: “이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넘치는 기쁨으로 자신의 영광이 있는 곳 앞에 흠 없이 너희를 제시하시는 분”(24)핵심 단어: 보존되다, 핵심 구: “힘써 싸우라.”(3) 유다서의 그리스도: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25), 영적 교훈: “그리스도는 능력이 있으시다.”
2009-05-07 17:17:28 | 관리자
요한의 세 번째 서신: 요한삼서 The Third Epistle of JOHN 기록자: 요한, 기록 시기: 주후 90년경, 성격: 개인적인 서신, 수신자: 가이오와 하나님의 모든 성도, 이름: 요한복음 참조 주제: 겸손 목적: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는 자들임을 보여 주고 사역에서 자기를 높이는 일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내용: 요한은 가이오에게 이 서신을 보내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사람을 지목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그를 조심할 것을 권고한다. 요한삼서는 1장, 14절, 299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절: “내게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걷는다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도다.”(4) 핵심 단어: 진리, 핵심 구: “선한 것을 따르라.” 요한삼서의 그리스도: 합당한 이름을 지니신 주님(7), 영적 교훈: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2009-05-07 17:16:56 | 관리자
요한의 두 번째 서신: 요한이서 The Second Epistle of JOHN 기록자: 요한, 기록 시기: 주후 90년경, 성격: 가족 서신, 수신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부인과 하나님의 모든 성도, 이름: 요한복음 참조 주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목적: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 내용: 요한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해 경고를 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 안에서 서로를 사랑할 것을 권고한다. 요한이서는 1장, 13절, 303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절: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걷는 것이라.”(6)핵심 단어: 사랑하라, 핵심 구: “교리에 거하라.” 요한이서의 그리스도: 진리(1, 2), 영적 교훈: “진리를 보존하라.”
2009-05-07 17:16:15 | 관리자
요한의 첫 번째 일반서신: 요한일서 The First Epistle General of JOHN 기록자: 요한, 기록 시기: 주후 90년경, 성격: 일반서신, 수신자: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 이름: 요한복음 참조 주제: 하나님의 가족 목적: 하나님과의 교제를 보여 줌으로써(1:3)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5:11-13) 내용: 만년의 요한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성도를 ‘내 어린 자녀’라고 부른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세상 속에서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고난과 박해를 뛰어넘는 성도의 기쁨을 강조한다. 특히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지 않았다는 영지주의가 널리 파급되었으므로 그는 성도들이 이런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게 교리적인 안내 지침을 준다(4:1-2). 그는 성도들 안에 죄가 없다는 것과 성도들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등을 강하게 정죄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자들의 논리를 강하게 논박한다(5:7). 요한일서는 5장, 105절, 2,523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5장(이기는 믿음), 핵심 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5:13), 핵심 단어: 교제, 핵심 구: “우리가 말하면” 요한일서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5:20), 영적 교훈: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2009-05-07 17:15:28 | 관리자
질문: 창세기 5장과 베드로후서에 나와 있는 노아에 대한 기사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대답: 문제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5장 기사를 보면 노아는 아담의 십대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역대기상 1장에도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레엘,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 야벳이 있었더라(대상1:1-4).그런데 베드로후서에서는 그를 가리켜 여덟째 사람이라고 하니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이 틀린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째 사람 노아만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벧후2:4-5).킹제임스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이번 질문은 질문 자체가 틀렸습니다. 지금 베드로후서의 문맥은 방주에서 구원받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여덟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셈, 함, 야벳, 노아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 노아가 마지막으로 방주에 올랐다면 그는 여덟째 사람입니다. 여기의 문맥은 결코 노아가 아담의 십대손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서기관들은 아예 사본을 뜯어고치고 자기들 마음대로 ‘그 일곱 식구를’ 첨가시켜 놓았습니다.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개역성경 벧후2:5)이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기들의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들’(words) 즉 ‘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2009-05-07 17:14:45 | 관리자
베드로의 두 번째 일반서신: 베드로후서 The Second Epistle General of PETER 기록자: 베드로, 기록 시기: 주후 66년경, 성격: 일반서신, 수신자, 이름: 베드로전서 참조 주제: 마지막 일들 - 영원한 왕국, 재림, 사악한 자들의 심판, 주의 날 목적: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게 하는 것(3:18) 내용: 이 서신은 베드로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먼저 성도들이 은혜와 영적 지식에서 자랄 것을 촉구하고 거짓 대언자들에 대해 경고를 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소망을 말해 주고 성도들이 믿는 바를 계속해서 실천할 것을 권면한다. 베드로후서는 3장, 61절, 1,559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2장(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핵심 절: “너희가 전에 거룩한 대언자들이 전한 말씀들과 주 곧 구원자의 사도인 우리에게서 받은 명령을 명심하게 하려 함이라.”(3:2)핵심 단어: 아는 것, 핵심 구: “하나님을 아는 것”(1:2) 베드로후서의 그리스도: 영광의 주님(3:18), 영적 교훈: “명령을 명심하고 자라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
2009-05-07 17:14:12 | 관리자
베드로의 첫 번째 일반서신: 베드로전서 The First Epistle General of PETER 기록자: 베드로, 기록 시기: 주후 65년경, 성격: 일반서신, 수신자: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거하던 그리스도인들 이름: 이 책의 이름은 이 책을 기록한 베드로에게서 유래되었다(1:1). 그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고 베드로는 그의 성으로 조그만 돌을 뜻한다(요1:42). 그는 충동적이고 쉽게 낙담하며 겁이 많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분의 양들을 맡은 이후로(요21:15-18) 성령 충만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주제: 순례자들이 통과하는 고난의 길 목적: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고난과 시련이 임할 때 그들에게 격려와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 내용: 로마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곳곳으로 흩어져서 불 같은 시험을 당했다. 그때에 마귀는 삼킬 자를 찾으려고 울부짖으며 돌아다녔고 이에 베드로는 서신을 통해 성도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베드로는 먼저 구속과 중생과 성화와 보존의 은혜를 말하고 성도들이 은혜와 믿음과 소망과 사랑 등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입증할 것을 촉구하였다. 베드로의 삶과 생각을 잘 반영하는 베드로전서는 5장, 105절, 2,482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장(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확신과 약속)핵심 절: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잠시 근심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 이것은 너희 믿음의 단련이 불로 정제해도 없어지는 금을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1:6-7), 핵심 단어: 고난을 받다(15회)핵심 구: “순례자와 나그네”, 베드로전서의 그리스도: 고난당하는 어린양 영적 교훈: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귀중하시다.”(2:7)
2009-05-07 17:13:29 | 관리자
야고보의 일반서신: 야고보서 The General Epistle of JAMES 기록자: 야고보, 기록 시기: 주후 45년경, 성격: 실제적인 교훈, 수신자: 일차적으로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고 실제적으로는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 이름: 이 책의 이름은 이 책을 기록한 야고보 즉 사도행전 12장에서 순교당한 사도 야고보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에게서 유래되었다(1:1). 주제: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과 구원의 열매인 선한 행위(2:14). 목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믿음의 특성을 보여 주고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을 주는 것 내용: 야고보는 초기 사도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거하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실제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지 가르친다. 야고보서는 로마서처럼 상세하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의 삶에서 어떤 행위가 나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실제적인 생활지침서이다. 먼저 야고보는 성도들이 고통과 핍박 중에서 인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것을 권면한다. 또 그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 가운데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악한 행습을 지적하고 그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그는 행위가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임을 확증하며 그래서 어떤 이는 야고보서를 신약성경의 잠언이라 부른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지만 야고보서는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야고보서는 5장, 108절, 2,309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2장(믿음의 시험), 핵심 절: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었느니라.”(2:26), 핵심 단어: 행위, 핵심 구: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 야고보서의 그리스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 영적 교훈: “삶에서 믿음을 입증하라.”
2009-05-07 17:09:41 | 관리자
질문 : 아브라함의 아들은 몇 명인가요? 대답 :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으나 자기가 취한 그 첩의 아들들에게는 선물을 주고 자기 생전에 그들을 내보내어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쪽으로 곧 동쪽 지방으로 가게 하였더라."(창25:5,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의 독생자(獨生子)를 바쳤느니라."(히11:17)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  이삭, 그리고 첩 그두라가 낳은 아들들을 포함해서 아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히11:17은 이상하게 그가 자기의 독생자를 바쳤다고 기록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의 초점은 "독생자"(only begotten son)에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합법적인 아들과 비합법적인 아들을 구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갈4:4-7). 성경은 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번 마태복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1:2-15) 여기에서 "낳다"로 번역된 단어는 "beget"이며 따라서 아버지가 낳은 아들은 "begotten son"이 됩니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기록된 아담과(눅3:38) 하나님의 독생자 즉 "그분께서 유일하게 낳은 아들"이라 기록된 예수님(요1:20;3:16)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아담은 그분의 아들이지만 그는 아버지가 낳은 아들 즉 "begotten son"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의 "유일하게 낳으신 아들" 즉 독생자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독생자"(only begotten son)라는 단어는 단지 이삭과 예수님에게만 적용됩니다. 그 이유는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은 예수님처럼 기적적으로 탄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갔듯이 이삭 역시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기 위해 스스로 나무를 지고 희생 제단까지 감으로써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항변하지 않았듯이 이삭 또한 자기 아버지에게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기꺼이 희생 예물로 바쳤듯이 아브라함도 자신의 독생자를 기꺼이 희생 예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모형으로 부활한 이삭 즉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삭과 함께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지어 죽은 자들로부터 능히 그(이삭)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또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느니라."(히11:19)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활을 보기까지 사흘 길을 갔으며 예수님께서도 사흘 안에 부활하셨습니다. 끝으로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 근처의 동일한 장소에서 희생 예물로 드려졌습니다(창22:2).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히11:17은 "독생자"라는 단어를 써서 이 두 인물 간의 의미 심장한 관계 즉 예표와 실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25:6과 히11:17은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09-05-07 17:08:55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 히브리서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 기록자: 바울, 기록 시기: 주후 66년경, 성격: 교리, 수신자: 일차적으로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고 실제적으로는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 이름: 이 서신의 이름은 바울이 편지를 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유래되었다. 사실 그 당시 이방인들 가운데는 히브리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로마서가 이방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한다면 같은 저자가 기록한 히브리서는 동일한 내용을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들을 동원하여 선포한다. 주제: 유대교의 인물이나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신 그리스도 목적: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보여 주고 그분께 초점을 두게 하는 것 내용: 그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유대인 교사들은 기독교로 회심한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다시 유대교로 복귀시키려 하였다. 이에 사도는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가 천사와 모세와 여호수아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레위의 제사장 체계와 그 안의 모든 희생물보다 우월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사도는 율법의 신비를 아는 것과 그 안의 의식 법들이 제정된 목적과 용례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실체가 옴으로써 완전히 폐기된 것 등을 논리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사도는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을 참으라고 권면하고 배도의 물결에 휘말리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구약시대 영웅들의 믿음 열전을 보여 주며 ‘구약과 신약의 동일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우리의 참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지만 히브리서는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히브리서는 13장, 303절, 6,913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9, 11장(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핵심 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1:3)핵심 단어: 더 나은(13회), 단 한 번(9회), 하늘(15회), 핵심 구: “더 나은 상속 언약” 히브리서의 그리스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 영적 교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왕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2009-05-07 17:07:3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