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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지요. 글 잘 봤습니다. ^^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여러 저열한 음해들 중에서도, 부활이 조작되었다는 식의 얘기는 제일 질이 낮은 비방입니다. 형제님은 전공 분야의 특성상 저런 분야의 과학적 증거가 더욱 와 닿으실 것 같습니다.
2012-04-09 19:45:32 | 김용묵
감사합니다. 시사를 보는 견해가 저와는 다른 분이라도 저의 의도를 너그러이 이해하고 글을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1. 수요일에 꼭 투표합시다. 2. 사랑 침례교회의 새 인사 발령을 환영하고 축하합니다. ^^
2012-04-09 19:43:46 | 김용묵
선거철을 맞이하여 관심있게 읽었어요. 이제 점점 더 형제님의 글을 소화하고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이런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기쁨도 생기네요.역시 맑은 정신을 요구하는 이곳 홈피는 보통수준이 아니라고 봐요...자화자찬!! ㅋㅋ
2012-04-09 15:18:52 | 오혜미
예전에 간증에서도 썼듯이, 본인은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다. 그리고 기존 개신교회로부터는 별다른 실족이나 분쟁· 충돌이 없이 자연스럽게 분리가 이뤄졌으며(타지에서 학교 다님), 자습을 통해 KJV 진영에 입문했다. 기존 신앙 노선에다 KJV가 그대로 추가, 보충, 보강되는 형태로 신앙관이 발전한 사례이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서 본인은 이단들에 대해서는 과격하게 비판하고 공격한 전적(?)이 있으나 우리나라 현대사나 교회사는 심지어 정치적인 관점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미우나 고우나 내 정신세계의 고향이니까. 예를 들면,   - 우리나라 정부가 잘못한 것보다는 북한이 저지른 만행을 훨씬 더 규탄한다. - 과거의 독재 정권은, 민주화 인사나 용공분자들을 탄압하긴 했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괴롭힌 적은 없는데,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들보다 그들이 더 카리스마 있게 훌륭한 큰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 옛날에 좀 무고한 사람들이 정치 정적으로 몰려 죽은 것보다는, 오늘날 국가가 흉악범에게 사형 집행을 안 하고 있는 게 훨~씬 더 열불나는 일이고 그거야말로 인권 침해이다. - 한국 교단이 과거에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보다는(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몇몇 순교자들,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이라든가 제헌 국회가 기도로 시작한 것 등에 더 애착이 간다.   이런 식이다. 내가 자유가 있고 이만한 기독교 인프라가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덕분에 이를 바탕으로 KJV에 대한 믿음도 쉽게 추가될 수 있었다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 (1) 비록 모교회는 여전히 KJV를 잘 모르고 심지어 이단시하고는 있지만, 그건 걔네들 사정이고.   또한 나는 우리나라 사회와 국가 제도에 대해 피해의식이 없다.그 열악하던 여건에서 그나마 이 정도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것이 다행이고, 옛날에 저질러진 부조리는 피아식별도 안 되던 시절에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게 많았다고 생각한다. 세상 정부가 교회처럼 행동하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나라 현대사에 피해의식이 많은 진영의 사람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시나리오가, 내가 보기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과 같은 사고방식은 대체로 우파 내지 보수라고 불리는 듯했다.   나는 그 반대편 성향의 진영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했다.현대사에 대해 편협한 정보로 자꾸 쓸데없는 피해의식과 반체제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주 거북스러웠고, 또 그런 진영이 대체로 반기독교 성향도 강하며 반성경적인 사회 운동도 대개 그쪽 주관이니까 말이다. 체벌 반대, 동성애와 낙태 합법화, 사형 폐지 운동 같은 것들.   글쎄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내가 미국 산골짜기에서 자랐으면 전형적인 redneck 같은 꼴통 부류가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개인적인 성향은 그렇다.난 오만하게도 킹 제임스 성경을 믿고 세상 정세를 성경으로 판단하는 크리스천일 정도이면, 사회· 정치관도 당연히 그런 쪽으로 기우는 게 마땅하다고 한동안 생각했다.   비록 내가 국가 교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지 않은가?기독당 같은 것이야 정말 멍청한 짓이지만, 까놓고 말해 학생 인권 조례 반대 서명 같은 건 공감할 만하지 않냐 말이다.   그랬는데 KJV 진영 내부에도, 교리적으로 알 거 다 알 만한 분들 중에도, 진보 성향이 강한(명백하게 성경과 어긋나는 교리는 제외하고 나머지 다른 성향이)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다는 걸 훗날 알게 됐을 때 나는 굉장한 culture shock을 경험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연구와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얻은 해답은 이렇다. 이런 분들은 기존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본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썩어빠진 기성 교계의 '대안'으로 기독교 안티 대신 KJV 진영을 선택한 관점이다. ... (2) 기존 개신교회에서 정말 산전수전 다 겪고 힘들게 KJV 진영으로 오신 분들, 메이저급 교회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리적 배도와 부정부패, 몰상식한 짓들을 직접 본 분들은 기성교회들의 치부가 눈에 훨씬 더 빨리 들어오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공격하는 수준은 정말 어지간한 기독교 안티들을 능가한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도 안 좋은 부분을 더욱 부각시켜 보는 듯하다.   가령, 난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을 존경할 줄만 알았지, 신사 참배에 굴복한 친일 기독교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한국의 주류 기독교계로 이어졌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을 안 해 본 관점이었다. 한 마디로 놀랐다.   요컨대 KJV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경로로 이쪽으로 유입되었으며, 신앙 배경도 의외로 다양하다. 이것이 정치 견해라든가 기성 기독교계에 대한 호불호 차이로도 나타나는 듯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과 (2)를 비교해 보기 바란다.   물론, 성경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정치 중립적이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엔 수구 기득권층과 외세뿐만이 아니라 민중들도 똑같이 기여했다.한편으로는 부자들, 통치자들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도 똑같이 악했다고 분명히 기록한다.그런 성경으로부터 한 논조만 뽑아서 자기 프로파간다의 정당화에 써먹는 것은 잘못이다.사실은, 세상에 왜 이런 지저분한 이념 대립이 생기는지조차도 성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성장 배경과 취향의 특성상, 특정 논조에 대해 사람이 저마다 bias와 preference를 갖는 것 자체는 개인 자유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크리스천도 국가 시민이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허나 반역을 저지르는 것만 아니라면 이것으로 사람 인격을 판단하고 불필요하게 싸우는 일은 없어야겠다. 좌빨이든 수꼴이든 똑같이 죄인이고, 예수 믿어 거듭나면 각각 구원받은 좌빨과 구원받은 수꼴이 될 뿐이다. ^^;;   아, 물론 상대방 편을 보고 네놈들이 하는 짓이 반역과 똑같다고 싸우는 경우도 있긴 하다. ㅜㅜㅜ 답이 없네 그럼. 그런 행위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판단하시길 원한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7: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9 11:56:56 | 김용묵
처음에는 여러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믿음을 갖게 되면, 창조론과 복음의 관련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여 그런 일이 벌어 질 수도 있지만, 차차 성경을 알고 믿음이 자라 가면서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이심을 발견하게 되고 모든 진리를 밝게 깨닫게 되지요.. 형제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4-09 10:36:46 | 김정훈
주변에 창조론은 믿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믿는다는 분이 있지요 정말 넌센스중에 넌센스요 거짓말중에 거짓말 입니다. 아마 그분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고 계시는것 같습니다. 그분은 현재 모교회 장로님으로 계시구요 아주 똑똑하고 출석교회에 지극정성 충성맨이십니다. 주변에 그런분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2012-04-09 08:53:46 | 송재근
고통스러울 때마다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고 또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너무나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우리 각자의 삶을 생각하면 고통이 오히려 약이 되었던 것에 너무나 감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고통을 이길 힘도 주님께서 번번이 주시는데도 너무나 무덤덤했던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유익한 글 감사드립니다. 샬롬~
2012-04-08 20:32:22 | 소범준
진화론을 깊이 파고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얼마나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 체계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마련해 주신 구원 시스템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인간의 종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는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여 구원받는 일이 얼마나 큰 복이고 귀한 일인지 입증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마귀의 속삭임과 계략을 면밀히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일진대 작금의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까지도 속이려 하는 저 사악한 옛 뱀 마귀의 교활함을 이길 힘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말씀밖에는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2012-04-08 19:55:34 | 소범준
아...;; 원래는 다른 분들께 참조하라고 추신을 쓰는 거였는데 형제님께 참조하라고 이해가 되시는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하지만 형제님이 아니라 이 글을 읽으신 다른 분들에게 참조하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혹시라도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수정하겠습니다.
2012-04-08 19:45:11 | 소범준
Simon Greenleaf (1783-1853) 교수는 미국 하바드 대학의 법과대학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고, 법률적 지식과 방법을 사용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legal apologetics 의 중요한 리더였습니다. 그의 책 는 이 분야에서 하나의 모델이 될 만큼 중요한 저서가 되었지요. 아마 이 분야에서는 워낙 잘 알려진 분이라 여러 사이트에서 그 분의 글을 인용하거나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을 겁니다. 위에 형제님이 소개해 준 링크도 그런 면에서 참조 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2012-04-08 19:06:56 | 김정훈
  진화론은 도대체 성경과 조화가 될 수 있는 이론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쩌면 진화론 사상의 정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윈은 한때 신학도로서 본래 목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을 믿게 되면서 그는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은 그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는데, 유명한 진화론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나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같은 사람은 모두 진화론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과 진화론을 같이 혼합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지켜야 마땅할 신학교에서 조차도 진화론과 타협한 신학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령,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으나 진화론적인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든지, 이를 조금 변형하여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의 중간 중간에 필요에 따라 개입하여 창조를 하셨다는 ‘점진적인 창조론’, 그리고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지질학적 연대로 해석하는 소위 ‘날-시대 이론’ 등이 모두 진화론과 타협하여 나온 이론들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 사실의 기록에 대하여 매우 엄격히 말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진화론과는 혼합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에 진화론의 본질은 반-성경적이다.   우선 먼저 진화론이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열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에 안식을 취하심으로 (창 2:2-3; 히 4:3, 10) 지질학적 연대와 생물의 점진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심으로, 수억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진화의 가능성을 부정케 하셨다. 넷째, 예수님 자신께서 직접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셨다 (마 19:4-6; 막 10:6).   그럼 이제 진화론이 왜 반-성경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의 조상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00 만 년 전으로서, 그 전에 이미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나타나기 까지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생존을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진화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지으셨다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수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모순이 된다. 성경은 잘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과 사람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창세기 1장), 이 말은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죽음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같이 어울려 생각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가 있은 후에,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죽음이 들어 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더 분명하게 명시되어 나타나는데,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롬 5:12) 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한사람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전 15:22).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물들도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기록 (롬 8:22) 함으로써, 결국 생물계에 나타나는 죽음이 사람의 존재 이후에 생겨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혹은 이것의 변형인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에 빠지는 일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기원과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활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부활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음으로 부활을 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요 (고전 15:12-19), 그래서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의 죄악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죽음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으로 죽음은 우리의 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 가셨다가 부활을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고 만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동시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결국은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진화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화론이 갖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반-성경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매우 열심이면서도 정작 그 복음의 기초를 두고 있는 부활의 사실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많은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혹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진화니 창조니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도 부활의 사실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엡 4:13) 성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경험해본 이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 옆에 같이 있던 한 범죄자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 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었겠지만 (눅 23:40-43),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아직 이 땅에 살면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엡 4:13), 믿음 안에 거하되 터를 다지고 정착해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아야 (골 1:23)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오직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성경과 진화론을 혼합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이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의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이론들이 그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졌었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를 하셨으며, 따라서 창세기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지구 진화의 역사에 걸맞게 재해석 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신학적 접근 방식의 모순을 아주 예리하게 웅변적으로 잘 지적했던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 소문이 나있었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이었다. 그는 아주 열렬한 진화론의 신봉자로서 ‘다윈의 불독’ 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다윈 자신보다도 더 진화론을 전파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화론을 가지고 성경 기록의 진실을 파괴하길 원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을 믿지 않으려 할 때 이를 즐거워하였다. 반면에 진화론을 성경과 혼합하여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공격을 통하여 그들이 취하는 자세의 부당성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성경 구절을 직접 펼쳐 보이면서, ‘성경의 창조 기록에 진화론을 합치는 일은 결국은 믿음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며, 결국 창세기를 진화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리를 진리로 붙들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고 조롱하고 다녔다. 물론, 그의 말의 요점은, 결국 더 이상 그와 같이 어리석은 타협을 그만두고 진화론을 제대로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성경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진화론은 잘못된 사상이다. 진화론은 우리의 신앙을 노략질하는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이다 (골 2:8). 그러나 헉슬리의 지적은 옳았다. 비록 그 자신은 성경을 불신하였었지만, 무엇이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인 줄을 잘 알고 그것을 정확히 공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공헌 할 수가 있었다. 진화론자였던 헉슬리가 오히려 더 잘 파악하고 있던 것처럼, 기독교의 교리는 절대로 진화론과는 양립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은 지 백년이 더 지난 지금은 어떤가? 도대체 언제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며, 교회가 지켜내야 할 성도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을 참인가?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8:2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8 18:36:20 | 김정훈
아멘. 우리의 생명과 부활 그 자체이신 주님을 찬송합니다.(요11:25-26)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심한 말로 죽은 개, 죽은 사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전9:4) 또한 내세의 소망도 자연히 없어질 수밖엔 없지요. 주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도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살전4:13-17) 부활의 확신을 주는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P.S> 싸이먼 그린리프의 그 글을 언급한 글이 다음 링크에 있습니다. http://moogi.new21.org/av1611/resurrec.htm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2012-04-08 17:47:41 | 소범준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14, 17).   또한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성경이 기록한 인간의 기원과 타락,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속하심의 역사, 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것은, 바로 기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본주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심들을 제기해 왔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과, 둘째, 예수님께서 죽기는 하셨으나 실제로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으셨다는 사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숨을 거두셨는지에 대하여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받으신 고통은 어느 정도쯤 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동안, 로마 병정들로부터 수 없이 많은 채찍질을 받으셨다. 이 채찍은 플래그럼(flagrum)이라고 불렸는데, 가죽 끝에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와 납 조각을 붙여 만들어,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을 뜯어냄으로, 여러 번 내리치게 되면 피부 밑에 근육까지 뜯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피부 조직을 망가뜨리면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는 대략 50kg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무게로 인하여 고통은 가중되고, 마침내 언덕에 다다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가 있었을 것이다. 의사인 트루만 데이비스(Truman Davis)는 그의 저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인간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해 잘 기술하고 있다. 먼저 온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양 팔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점차 가슴의 근육이 마비되고, 결국은 숨을 못 쉬게 됨으로, 십자가상에서 질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려 주면 막힌 숨을 내뿜어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리를 꺾어 주게 되면, 그들의 죽음을 재촉할 수가 있는데, 성경 (요 19:31-34)에 보면, 바로 이와 같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 곁에 같이 매달렸던 강도의 다리를 꺾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그가 이미 죽은 관계로 꺾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죽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 19:33-34). 상처가 난 곳에서 많은 물과 피가 흘러내리는 경우는 십자가상에서 심장파열로 죽은 경우에 나타난다고,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증언(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에서, 더블린 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사무엘 호우톤(Samuel Houghton)의 말을 인용하여 적고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살아 계셨다면 피만 나왔을 것이나, 피와 물이 같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로마 병사는 그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고 4 복음서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마 27:50; 막 15:37; 눅 23:46; 요 19:30). 또한,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까지 하였으므로 (막 15: 44-46),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의심은 없어도 될 것 같다.   자,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은 갖추어 졌다. 하지만, 부활이 문자 그대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한다. 과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   조쉬 맥도웰은 그의 저서 <부활의 요인(The Resurrection factor)>에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될 일곱 가지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돌무덤의 봉인 (마 27:66)이 끊어진 사실이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야 되는 두려운 일을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 몸이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척에 둔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 하였는데, 만약에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의 주장은 누군가에 의해 금방 탄로가 났을 것이다.   셋째, 당시에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의 무게는 대략 1,400~1,800 kg 이라고 한다.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다고 가정했을 때,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렇게 큰 돌을 그들에게 전혀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이다. 만약,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섯째,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딴 곳에 개켜 있었는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옷을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상처까지 확인되고 (요 20:24-29),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다양한 시각에 여러 계층의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까지 나타나셨다 (행 9:1-9). 그러므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자들에게서 있을 법한 무슨 집단 환각 증세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사실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또한 무엇보다 잘 증거하고 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 하려고 하였겠는가?   증거의 신빙성을 다루는데 있어 최고의 전문가로서, 하버드 대학의 법학 교수를 지냈으며, 이 분야의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증거의 법칙에 관한 논문>을 남긴 바 있는 싸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을 조사해 본 끝에,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의 그 어느 사건보다도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 확실한 증거들 앞에 더 이상 어찌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모두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게 외치자.   할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 하셨으니,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다 같이 소리 높여 부활하신 우리 주를 찬양 할 찌어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8:2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7 17:26:31 | 김정훈
아픔은 아파 본 사람 만이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이 그렇듯이 고통의 감각 또한 매우 상대적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하여 느끼는 반응의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이 되며, 주변에서 같이 아파함으로 어느 정도 고통의 경감은 가져 올 수 있을지라도,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고통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하며, 그래서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 몸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가령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비명과 함께 손을 떼게 만드는 고통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손은 다 타버리고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은 또한 우리의 성격 형성에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어렸을 적에 크게 앓고 난 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통이 우리 몸에서 어떻게 전해지는지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조직의 세포막이 부서지면서 주변에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호르몬 같은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근처에 있는 통각전달신경세포에 신호를 보내어 그 신경세포의 반응 문턱을 낮추게 한다. 이제 반응 문턱이 낮아진 신경세포는 평상시에는 무시해 버리던 동일한 크기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하게 되고, 그 반응은 뇌로 전달되어져 우리에게 통증을 느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만일 프로스타글란딘의 역할을 방해 한다면 진통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먹는 ‘아스피린(aspirin)’이나 ‘이부프로펜(ibuprofen)’ 같은 성분이 들어 있는 약들이 이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함으로써 진통제로써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편, 우리에게 타이레놀 이라는 상품명으로 유명한 진통제도 그 안에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 이라는 성분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으며, 역시 간접적으로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한 진통제들은 일반적으로 몸의 통증을 억제하는 데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불안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같이 수반될 때에는 아편류 만큼 진통효과가 큰 물질은 없다. 보통 양귀비에서 추출해낸 모르핀(morphine)이 가장 대표적인 예인데, 모르핀은 우리의 뇌와 척수 속에 들어가 통증 전달의 신경경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우리 몸의 통증을 전혀 못 느끼게 하는 매우 강력한 진통제로 병원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그 양을 너무 많이 늘리게 되면 우리의 뇌 속에 황홀감을 만들어 결국은 중독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힘도 가지고 있는데, 일부 십대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점점 사용 증가 추세에 있는 헤로인(heroine)도 이 모르핀의 변형체인 것을 보면 그들이 헤로인에 탐닉하는 이유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중독성 때문에 만성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일지라도 의사들은 모르핀을 처방하는데 상당히 신중을 기하고 있고, 일단 처방이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그 양을 조절하는데 따른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의 몸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모르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endogenous 인데, 여기에 morphine을 결합하여, endogenous morphine 이라 하고 이를 줄여서 엔돌핀(endorphine)이라고 부르는 물질이 바로 그것이다. 엔돌핀은 아편 속의 모르핀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속에서 스스로 생성과 분해가 이루어짐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중독을 일으키거나 할 염려가 없는 그야말로 천연의 진통제이다. 엔돌핀은 우리가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분비되어 우리 몸의 통증을 완화시키고 행복감을 갖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감수 해내야 할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진통의 선물도 주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계실 때에 병사들로부터 아편류성 진통제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들이 쓸개를 섞은 식초를 그 분께 주어 마시게 하였더니 그분께서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려 하지 아니 하시더라”(마 27:34)   여기에서 나오는 쓸개란 단어는 히브리어 ‘Rosh’에서 온 말로서 이 말은 보통 쓴 맛을 내는 독성식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신명기 29장 18절에서는 ‘쓴 것’으로, 그리고 신명기 32장 32절에서는 ‘쓸개 포도’등과 같은 말로 붙여져 사용되고 있다. 특히 Gesenius가 쓴 히브리어 사전에는 이 단어가 양귀비를 뜻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죄수에게 고통을 경감시켜 줄 목적으로 이와 같이 쓸개를 탄 식초나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도 이와 같이 관습에 따라 일종의 모르핀과 유사한 효능을 발휘하는 아편류성 진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약을 거절하셨다. 우리 몸을 친히 지으시고 피조세계를 직접 만드신 예수님께서 어찌 마약의 진통효과를 모르시겠는가? 하지만 그 분께서는 능히 유혹을 물리치시고 스스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사야서에 그 답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53:3)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53:4)   “그는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53:7)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53:5)     그렇다. 예수님께서 친히 받으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 하사 그를 고통에 두셨은즉..” (53:10)     할렐루야!     *********************************************************************************************************   <에필로그>   고난 주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신 구원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함은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고자 예수님께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일을 기억하는 시간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고통’을 일체 피하지 아니하시고, 몸소 직접 겪으셨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감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8:5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5 22:41:39 |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