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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시대에 대중문화예술은 장르를 불문하고 사탄의 손아귀에 쥐어진 가장 날카로운 창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형제님처럼 바르고 예리한 분별력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012-02-06 12:11:03 | 김대용
저번주말에 누나의 생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12세등급 실사영화도 욕이 난무하고, 정말 애들보기 민망한 장면도 너무 많아서   초등학생인 조카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애니메이션 해피피트2를 보았습니다.   전 이 영화를 보며, 정동수목사님의 UFO실체와 아귀가 딱 딱 맞아감을 두려움속에서 느꼈습니다.   어찌 이런 어린애들이 보는 것에 이런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다 들어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가족영화로 애와 어른이 다 볼수있고, 이런 내용을 어릴적부터 본 아이들이 나중에 중장년층이 되면   평화의 세계단일화에 박수갈채를 보낼 교육을 받고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교리 게시판에 있는 UFO실체 글을 보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그것을 꼭 읽고 세상을 보는것이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영화 내용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 이 영화는 눈 요기거리와 노래로 사람을 감성적으로 이끕니다.   해피피트2는 펭귄을 의인화한 영화입니다.(저는 이런영화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 지역에 잘 살던 펭귄(인간)들이 자연의 힘(재해)에 고립되어 꼼짝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잠시 나와있던 에릭과 친구들 아빠는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다른 지역(나라)의 펭귄(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곳의 펭귄들의 우상인 마이티 스벤(펭귄이 아닌 다른 종)은 펭귄이면서 하늘을 날수 있습니다.   (펭귄들은 같은 종족인줄 알고있었습니다. 나중에 하나가 됩니다.)   스벤이 이끌고 온 다른 펭귄(인간)들은 열심히 도움을 주는데   이전에 스벤과 그의 심복 A(이름을 잊었습니다.)가 만났었던 인간(외계인)에게 말이통하지 않지만   바디랭귀지로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의 기술(고도의 기술)로 고립 되었던 펭귄(인간)들을 금새 구출(혹은 구원)하려 합니다.(공교롭게도 영화내에서 인간들을 외계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다시한번 자연의 힘에 인간(외계인)들은 구출작전을 중단하고, 그곳을 빠져 나가 버립니다. (UFO실체에서 언급된 외계인이 우리와 기술을 나누다가 전쟁하여, 이젠 그 기술을 얻을수 없는 내용과 일치)   다시 죽음의 기로에 선 펭귄(인간)들은 다른 종인 바다코끼리(다른 나라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들도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영화는 중간 중간에 진화론을 언급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된다! 된다고 믿으면(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노력하면) 불가능한 무엇이든지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며 시청하는 애와 어른들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인 수많은 새우 종들이 함께 힘을 합하게 됩니다.   각 지역의 펭귄들과 그들의 우상인 마이티 스벤(위대한 스벤, 다른 종) 그리고 바다코끼리, 수많은 새우들이   자신들의 힘으론 절대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자신들의 의와 행동으로 다른 종족(세계 각 나라)과   평화롭게 하나가 되어(세계단일화,종교단일화) 열심을 내어 일을하니   인간이 인간을 죽음 앞에서 구원해 버립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의 우상이었던 위대한 스벤은 원래 펭귄(인간)이 아님을 실토하며, 펭귄 암컷(인간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당연히 교미를 하여 아이를 낳겠지요. 버림받은 천사들, 유전자조작.. 거인들 다른 외계종)   이것을 보고 마음이 요동하여, 어머니(교회 권사)께 이런 저런 말씀을 했더니 "너 정말 왜그러니","도끼눈을 뜨며 저를 피하십니다."   더구나 누나와 조카는 그걸 보고 두번이나 감동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정말 미칠노릇입니다. (교회 다니지요..)   어찌 이런것을 보고 우나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감동하여 울거나 울뻔한 세상사람들이 많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제 누나는 교회를 다녔지만, 세상 것을 좋아하며, 즐기지만 삶이 고통스럽던 차에 최근에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분별력이 없고 또한 그것을 분별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이 것을 말하는 것은 왠만큼 믿음생활했다는 교인들에게 꼭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 제가 KJV, 킹흠정을 알게 되었을때는 수개월동안 이것이 붙잡아도 될것인지 확인을 거듭했습니다. 다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하나님 말씀" 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확신을하며 한글화 된 KJV 번역본 중에서는 가장 좋은 흠정역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KJV1611이 최종권위=변개되지 않은 하나뿐인 성경책임을 믿습니다.   정동수목사님 계열이 극도로 세대주의적이고 한킹계열과 좀 다를뿐이지 인정하지 않는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여러분들이 하는 말은 자신이 정말 확인하며, 시험을 거듭하여 증명해본 것입니까?? 여러분들을 보면 남들이 하는말 또는 어디서 보거나 줏어들은 말을 읊을뿐이지 직접 확인하지 않음이 우리 눈에는 얼마나 미련해 보이는지 아십니까??"   그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요? 아니면 두개의 가면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십니까??   이곳에 와서 자신들이 취할 것만 취하고, 버리는 당신들이 세상속의 교인들과 뭐가 다릅니까?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발 담그면 더 따뜻할까요? 이도 저도 아닌게 될 뿐입니다.   [계 3: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각종 헐리웃영화를 보며 항상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내용들을 매번 빠짐없이 접합니다. 주님오실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제 어릴적보다 더욱 가깝게 느끼며 바른말씀을 붙잡아야 함을 알게됩니다.   벧전 4:7 오직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저는 정말 부족하고 못난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련한 저에겐 "바른" 하나님 말씀이 꼭 필요 합니다.   무조건 적인 신뢰와 믿음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6:00: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6 08:18:36 | 이민혁
더러운 영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더러운 줄 모르겠지요? 아마, 구원 받기 전에 내 영도 저랬을 것입니다. {시51:10]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2012-02-05 19:37:30 | 이광국
斗의 원형 글자가 사람(勹)이 등에 칼(刂)을 꽂고 있는 모습이라면, 斗자의 의미를 '무언가 튀어 나왔거나 남 다른 구조로 눈에 띄는 것'으로 풀어 본 저의 해석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겠군요.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창세기 한자' 해석 방법으로 한자어 본래의 감추어진 의미를 흥미 있게 풀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2012-02-05 17:14:22 | 김정훈
형제님 글의 다른 의견이 아니라 그야말로 “즐거운 상상”이 되시라고 덧글을 썼습니다. 고대사회가 科자에 學자를 붙여서 科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드라도 ‘Science’는 아니였을 테지만 ‘學校’의 ‘學’자와 ‘校’자가 神政일치 시대의 청동기문자인 점을 감안하면, 학교는 교육의 한 분류로 神 즉 하나님의 생명나무를 가르쳤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 버린 정치사회가 윤리도덕을 가르치듯이… ‘창세기한자’에서 ‘科’와 ‘課’ ‘課題’와 ‘科程’을 해석하는 목적은 선악과 사건의 본질이 생명나무를 먹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이고 시험이 아니라 과제였다는 점을 설명할 때 인용합니다. 課題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頁머리 혈)을 바르게(是옳을 시) 하도록(題제목 제) 말씀(言-하나님)이 과일 나무(果)의 임무를(課) 3. 매기다 4. 부과하다(賦課)입니다. 아무쪼록, 과학이(Science) 하나님이 심은 나무를 헤아려서(科)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學) 증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추신: 科에 사용된 斗의 원형 글자는 사람(勹)이 등에 칼(刂)을 꽂고 있는 모습입니다.
2012-02-05 10:30:11 | 이광국
이 글은 아래 자유게시판 1458번의 댓글로 달았던 글을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새로운 독립글로 다시 올리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선악과는 과연 왜 있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선악과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적어도 한번쯤은 고민해 보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 선악과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음을 보여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 또한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그 분을 의지적으로 순종함으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을 때 하나님만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소위 '짝사랑'의 존재로 지으시기 보다는 우리도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은 바된 존재 답게 그 분을 우리의 의지로 '사랑'하길 원하시지 않으셨을까요?   2. 선악과가 있는데 그것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켰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하셨던 그 말씀 그대로 그 자체가 이미 천국입니다. 천지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합력하여 만드신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 거했을 것입니다. 3. 선악과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것을 먹었다면, 그 일로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그것은 곧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우리의 영원한 죽음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죄인된 모습으로 성육신 하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그 방법에 참여하는 자에게 이제는 양아들 자격을 주시어 (엡 1:5)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구요. 안타깝게도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4.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선악과의 존재 자체는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과 사랑의 표현이며, 이것에 대하여 '순종'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함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없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과 에덴동산에서 함께 거닐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의 2번의 경우에 해당). 따라서 이번 글의 서두에서 질문한 "선악과 사건이 있어야지만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분명 "아니다"입니다. 선악과 사건 이전에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우리의 믿음에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5. 마찬가지로 또 다른 질문으로 "그렇다면 선악과 사건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양아들이 될수 있게끔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라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선악과 사건이 저질러진 이상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양아들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의 순서를 잘 따져 보시면, 선악과 사건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양아들이 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방법, 그 방법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지 선악과 사건 그 자체가 우리를 양자 삼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여 지지요. 6.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선악과 사건을 계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었고 그것의 결과로 인하여 비로소 구속을 계획하심이 맞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5 02:42:43 | 김정훈
‘科學’의 ‘科’자를 '창세기 한자'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참 흥미롭군요.. 말씀하신 내용을 토대로 저는 조금 다르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斗'는 헤아리다란 의미도 있지만, 무언가 튀어 나왔거나 남 다른 구조로 눈에 띄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科’는 결국 '하나님이 심은 나무 가운데 무언가 남달리 두드러진 것'을 말하며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科人’의 뜻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사람의 결합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죄인'의 뜻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科學’이라는 용어는 서양에서 온 개념으로 라틴어 'scientia (앎)'이 그 어원이고, 과학이 앞서 발달 하였던 독일에서는 'wissenschaft'라고 불렸는데 그 의미는 '체계적인 지식'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일본에 들어 올 때 그들이 달리 부를 말이 없어 ‘科學’이라는 약간은 모호한 말로 바꿔 불렀는데, ‘科’자는 우리가 오늘날 학과를 분류할 때 무슨 무슨 ‘科’ (예를 들면 數學科 [수학과], 心理學科 [심리학과] 등등)로 나누는 것처럼 무언가를 분류할 때 쓰이는 말이기에 서양의 과학의 특징인 분석적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이리 부른 것으로 이해합니다. 결국 ‘科學’이라는 용어는 동양에는 이전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말로서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기 시작한 때에 새로이 생겨난 말이고, 따라서 창세기적 해석으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한자의기원에 대한 창세기적 해석은 한자 형성 초창기에 생겨난 일부 한자들에 한하여 매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해 주고는 있으나, 그 후에도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한자들이 생겨졌기에 현재 사용되는 모든 한자들이 '창세기적 해석'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科學’이라는 단어를 창세기 한자 방식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심은 나무 혹은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가르친 학문”이라고 해석한 방식은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 즐거웠고, 차라리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과학'이라는 말의 진짜 본래 뜻이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문'이었으면 좋겠다는 즐거운 상상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2012-02-05 01:16:25 | 김정훈
아멘 입니다. 이런 글을 올려도 될까요? ‘科學’에서 ‘科’자는 기원 전부터 사용된 글자인데 ‘창세기한자’ 방식으로 글자 모양을 해석하면 ‘하나님이 심은(丿) 나무를(木= 禾) 헤아리다(헤아릴 두斗)가 됩니다. ‘여기에 사람 인(人)자를 붙인 ‘科人’은 “하나님이 심은 나무를 헤아려 봤드니 사람은 죄인이드라”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科人’의 사전 해석은 정확히 ‘죄인’입니다. ‘科學’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가르친 학문”에서 비롯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생명나무를(禾) 먹어야(口) 하나님과 화목(和-화목할 화)을 이룰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2012-02-04 22:00:35 | 이광국
우상 숭배와 인본주의 진화론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그 기초는 진화론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인간을 우연 발생한 동물의 연장으로 이해한다. 진화론의 주장이 결코 성경과 같이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적 방법을 인정하면서 창조도 믿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진화론의 핵심은 목적성 없는 무작위적 자연발생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목적 없는 분이 아니시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이어지게 됨은 너무도 자명하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리차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말처럼 하나의 “망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매우 중대한 도전이다.   과학과 신앙   과학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연구하여 그 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주신 문화명령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하여 많은 부분에 있어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그분께서 권능의 말씀으로 떠받치고 계시며 (히 1:3),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골 1:17). 사실,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분의 발끝에도 못 미칠 만큼 아주 적은 것이다. 신앙엔 분명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신앙이 진리에 관한 문제라면, 그 믿음이란 것이 결단코 무조건 적인 믿음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과학적 접근을 통해서도 더욱 공고해져야 마땅할 것이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 자연 만물 속에서도 그 분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롬 1:19-20).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증거 없이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으신다. 증거는 믿음을 더욱 강화 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활의 증거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듯이, 창조의 증거 또한 우리에게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발견하고 찾기를 원하신다. 과학도 그 분이 허락하신 축복이다. 따라서 그 분 안에서 올바른 과학을 한다면, 반드시 그 연구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고통 받는 욥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누가 그것의 치수들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것 위에 줄을 팽팽히 쳤느냐? (욥 38:4-5)”, “누가 아무도 없는 땅과 아무도 거하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게 하며, 연한 채소로 하여금 싹을 내게 하였느냐? (욥 38:26-27)”, “누가 속 중심부에 지혜를 넣어 주었느냐? 혹은 누가 마음에게 명철을 주었느냐? (욥 38:36)” 욥기에 기록된 이 같은 하나님의 많은 질문들은 바로 그분이 우주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과학을 할 수 있는 지혜까지 주신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며,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마음속의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한 자세로 자연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곳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올바른 과학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발견하는 과학자들   실제로 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발견을 통하여 초월적 설계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 가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저 우주의 수많은 평범한 행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세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수록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 구성물질들의 정교함과 복잡함에 더욱 경탄하며 그 기원에 대한 무작위한 우연 발생적인 설명 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많은 물리화학자들이 마치 발견되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자연의 법칙들과 수학적 상수들에 대하여 예사롭지 않은 경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학은 과연 하나님을 발견했는가? “무신론을 향해 가던 길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도 그랬다.” 한 때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하여 지금은 목사가 된 리 스트로벨 (Lee Strobel)의 말이다. “내게 있어 지적 능력을 갖춘 신의 존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력해 보이는데, 그것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로부터 온다.” 오랫동안 인본주의 무신론 진영의 최고 리더였던 안토니 플루 (Antony Flew)의 말이다. 과연 그들의 고백처럼 오늘날 과학은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냄 (시 19:1)” 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마치 미세 조정된 다이얼이 가득 찬 것과 같은 모습의 이 우주를 움직이는 뛰어난 지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과 기독교   분명히 우리는 다윈 시대보다 앞선 과학적 지식 속에 살고 있다. 한 때 소위 ‘과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님’을 몰아내고 무신론의 강력한 토대를 세운 다윈의 진화론이 이제는 동일한 ‘과학’에 의하여 상당수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부정되어 지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손에 갖고 있는 기독교는 ‘기원’ 문제에 있어서 항상 명쾌하고 분명한 답을 갖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진화론은 일부 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어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 내지 ‘점진적 창조론’ 등의 타협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교회 내에서 확고한 “성경적 창조론”을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매우 등한시 하였다. 만약 인간이 정말 우주 진화의 부산물로서 우연 발생한 존재라면, 죄의 문제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고, 도대체 복음을 사실로 받아드릴 논리적 이유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복음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진화론의 주장은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조화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결국은 기독교의 토대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 찬란했던 유럽의 교회들이 썰물처럼 젊은이들이 빠져 나가고 오늘날 텅 비게 된 이유는 바로 진화론의 출현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교회여, 창조주를 선포하라!   하지만, 진화론이 어떤 절대적인 과학적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최신 과학 정보들을 볼 때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걸 보면, 성경을 떠나 진화론과 타협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언젠가 또다시 그 이론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이제 답은 분명하다. 교회는 성경에 기술된 분명한 창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선포 하고 전하는데 조금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일부 교회가 진화론 과학자들의 눈치를 적당히 보면서 이론적 타협을 하고 있는 동안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진화론을 잉태한 동일한 과학의 이름으로 이제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고 계시다. 과학자들의 입을 통하여 창조 사실을 증거 하게 함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하신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할 때 창조의 메시지를 들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처럼 (행 14:15, 17:24-25),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초가 들어갈 마음의 밭을 준비케 하는데 창조과학적 내용이 도구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기록된 바, 말세에 천사가 전할 ‘영존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7)” 바로 그 분이 창조주 되심을 새삼 선포하는 것이며, 동일한 그 분께서 이제 곧 심판주로 오실 것이란 뜻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요 4:23). 우리들이 입을 열어 그 분을 창조주라고 인정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을 믿을 만한 확신을 주셨다 (행 17:31). 올바른 과학은 참 신앙과 대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 (고후 10:5)”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4 18:58:16 | 김정훈
윤리적 부패 때문에 개신교인 수가 감소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편로는 천주교의 배도와 세속성, 모호함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요인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사람을 끌어모으는 데는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과 개인의 사욕을 채워주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근본적이고 성경적인 믿음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항상 소수일 수 박에 없습니다.
2012-02-04 13:45:56 | 류인선
우리가 믿는 바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이요, 그냥 교양 수준에서 적당히 믿고마는 그런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처절한 결단이 요구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면, 비록 마음이 여린 성도라 할지라도 그 깜짝 놀란 값을 할 수 있겠다 말 할수 있겠지요..!
2012-02-04 01:10:41 |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