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성경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술에 대해 경계하셨고, 음주를 금하셨다는 것이 맞습니다. 문제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는 독주를 만들기도 하고, 또 그걸 찾는 사람이 있고, 사고 팔고 있고,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술에 대해서 경계하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네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에서 무엇이든지라고 했으니 독주도 포함되기는 합니다. 이 말씀은 축제 기간 중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원하는 것 중 독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뜻이지, 그것을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거나 하나님이 음주를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자는 포도즙을 선택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독주를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졌을 겁니다.
현실 생활에서 음주의 문제에 대해서 답을 찾고 계신다면,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시고, 그 다음에 자기 신앙적 양심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성경의 입장을 말해줄 수는 있지만, 선택과 결단의 문제는 누군가가 대신 해 줄수 없는 부분입니다.
2012-02-01 07:31:26 | 김문수
예전에 KJB 를 모를 땐 딤5장22절에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즙(!)을 조금 쓰라고 했는데 이걸 보며 '포도주는 조금 먹어도 되는군' 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개역에는 포도주로 되어 있으니) 우리 말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절대 오해는 마시길, 이해를 돕기 위함입니다. 모든 지체님들을 존중합니다)는 말이 있나요. 그러니까 '술 먹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보면 그리 보이고요. 반대로 생각하면 반대로....저도 대학 시절에 필름 끊긴 적도 있고 작년에도 전혀 금주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은 알코올을 1g 섭취하면 그 만큼 취하고 몸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담배는 간접 흡연의 폐해가 큰데 알콜 중독은 후손에까지 영향이 있더군요. 성경에 술에 대한 많은 말씀들을 주셨는데 모두 금해야 될 것으로 생각하고 싶군요. 신14:26은 위에 글들처럼 깨달으시면 되겠고요. 저는 잠언31절에 포도주, 독주 내용을 읽어도 '술을 먹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경계하고 멀리해야 하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잠31:4 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마시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물론, 일반 백성, 피통치자들도 합당하지 않지만 리더들에겐 더욱 합당하지 않단 말인 줄 이해하겠지)
5 독주는 망하려는 자에게 주고 포도주는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주라(너희가 망하려면 독주를 먹고 포도주를 찾을 만큼 마음이 무거워 지지 말고 그 전에 네 마음을 잘 지키고 성령님을 힘 입어 항상 기뻐하고 마음의 무거운 짐은 나에게 맡기렴)
( ) 속의 말은 하나님의 생략한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고요.
저도 말씀 연구(?)하다가 저도 시험(!)에 드는 것은 4절 말씀과 관련되는 말씀 표시가 되어 있는 게 전도서 10장 17절인데 오 땅이여, 네 왕이 고귀한 자들의 아들이며 네 통치자들이 술 취하려 함이 아니라 힘을 얻으려고 정한 때에 먹으면 네게 복이 있으리로다! 이 구절이?
논에서 힘들게 일하시다가 "막걸리 한 사발" 드시고 힘 내서 일하는 건 괜찮다라고 생각해도 될지?? 1.힘을 얻으려고 2.정한 때에 흠...
2012-01-31 22:15:13 | 이윤호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을 말씀으로 합리화 또는 위로 받으시려는 성격이 보입니다. 자유의지를 존중합니다. 마음속에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면 정답입니다. 샬롬!
(약 2:12) 『너희는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 받을 자들처럼 말하고 행하라.』
2012-01-31 21:18:51 | 송재근
'환난기'를 제목만으로 검색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받은 구원이라는 것은 따로 없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습니다.
단지 시기와 신분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교회 성도이고
그들은 휴거되지 못했다가 뒤늦게 믿고 적그리스도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
2012-01-31 19:30:39 | 관리자
지금 당장 술에 대해서 마음에 결론내리기가 힘드네요.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서 충분히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2012-01-31 17:31:10 | 김양규
술 문제는 양심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신껏 답을 했지만 저도 모범답안은 모릅니다. 성경에 좌회전 우회전처럼 명기된 것도 아니겠지요.
포도주와 포도즙 관련 글들 보셨는지요?
그밖에도 다 찾기는 어렵겠지만 여러 곳에서 이미 다루어진 이야기들입니다.
잠언 31장 4절 말씀은 여러 곳에서 술의 위험을 말하는 구절과 같은 맥락이고요,
문제는 십일조로 독주를 사라는 신명기 부분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그 말씀은 술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네 혼이 원하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다른 선한 것을 원한다면 좋겠지만 인간들이 늘 원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렇다 할지라도 그날만은 허락이 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적절한 범위 내에서 누리라고 하시는 말씀 아닐까요...
잠언 31장 6절의 경우도 '한 잔 마시고 다 털어버리라'는 식의 지금 시대 뉘앙스는 아닙니다.
치료나 특정한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잠언 성격상 교훈이므로 참고용 교리와 지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은 교리적인 부분 이외에 100%를 말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교리적인 부분도 바르게 보지 않으면 백인백색이지요.
잘 판단하고 전체적인 맥락과 대전제, 즉 술을 권장하지 않으시는 전제를 두고 해석해야지
어떤 구절에서 달라 보이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전혀 엉뚱한 허용으로 보아
'음주 가능, 또는 때에 따라 권장'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목사와 집사들에게 술을 금하고 있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새롭게 주어진 측면도 있고, 구약의 큰 맥락을 유지하는 차원이기도 하다고 보는데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던 율법적 규약들을 이방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기로 한 이후이므로
십일조에 관한 의무를 지지 않음과 동시에 신명기 14장 26절의 독주에 관한 것도
관계가 없어지므로 더욱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구절 하나하나를 들어 반박하거나 명확한 흑과 백의 결론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겐
성경의 어떤 부분으로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2012-01-31 16:43:57 | 김재욱
제 질문에 관심을 가지고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명기 14:26을 십일조와 관련하여서 이해해야 하며 이 구절이 신약성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러면 잠언 31:6-7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나요?
잠언 31:4-7을 보면 포도주를 마시는 게 합당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과 포도주를 마시는 게 허용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는 데요.
(잠언 31:4-5) 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마시는 것이 통치자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이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고난 받는 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할까 염려하노라.
(잠언 31:6-7) 독주는 망하려는 자에게 주고 포도주는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주라. 그가 마시고 자기의 빈궁함을 잊어버리며 다시는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게 할지니라.
그러면 잠언 31:4-5에 나오는 왕들과 통치자들에게 술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신약성도들에게 술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인지요, 아니면 합당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아예 금지되는 것인지요. 잠언 31:6-7을 읽어봤을 때 제 생각에는 성도들이 빈궁하거나 고통스런 가운데 있을 때에도 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합당한 일이겠지만, 술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술을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면 모세시대에 하나님께서 결혼에 대해 새 명령을 주셨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술에 대한 새로운 명령을 주셨다는 것인가요.
물론 술이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경우는 드물며 이런 때에도 다른 것으로 술을 대신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꾸 술을 마실 구실을 만들기 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술을 멀리하는 게 좋겠지만, 남들이 성경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물어볼 때 명확하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2012-01-31 13:19:50 | 김양규
김** 형제님이 언급하신대로 십일조와 관련이 있는 구절입니다.제가 추가로 이에 덧붙여 보겠습니다.독주는 성경에서 보면 잠언/이사야/누가복음을 참고시에 다 좋지 않은 용도로 사용됩니다.그래서 일반적으로 술마시는 것은 성경에 반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 구절은 술을 허용하시는 것 같은 문맥이라서 이해가 좀 어렵고 혼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독한 포도주가 음료 헌물로 사용된 경우가 있으므로, 그럼 이 독주도 단순히 이런 용도일까요?그런데 먹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므로 단순히 음료 헌물로만 드려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eat이라는 단어는 다른 구절에서도 음료를 먹을 때도 사용합니다)신명기 14:24-27의 전체 문맥을 한번 보시면,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곳", "하나님 앞", "레위사람과 함께"라는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어느 시간/장소에서는 허용되는 것이 다른 시간/장소에서는 불허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택하신 곳,하나님 앞,레위와 함께"라는 단어는 그냥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어떤 통제와 절제가 있음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고 이런 상황하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들에게 허용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무난하지 하지 않을까요?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와 같은 신약성도에게 적용되는 구절이 아니며, 술을 허용하는 구절도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이 독주에 대한 해악을 설명해주시는 다른 성경 구절을 무효화 하거나 모순되게 하지 못합니다.성경을 읽으시다 보면 간혹히 전체적으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분과 배치되는 구절이 나오게 되면, 이것은 수신자/시대/환경등이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것으로 그 구절이 전체 성경의 말씀을 모순되게 하게나 무효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깊이있는 어떤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샬롬.
2012-01-31 11:05:28 | 김학준
네~ 저의 책을 애독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시간에 관계 없이 유익한 글들은 이곳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 질 수 있도록 일부 발췌하여 소개할 기회를 갖을 예정입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은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경우 그 내용을 update 하여 소개할 것이구요~
2012-01-30 23:11:25 | 김정훈
네, 그 말씀은 물론 백번 맞는 말씀이지만,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믿는 자들도 현혹하여 바른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때에 올바르고 정확한 과학지식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들어 내고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과학적으로도 하등 모순이 없는 사실인 것인가를 널리 알리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의 정립에도 중요하고요..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귀하지만, 증거를 통해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2012-01-30 23:08:07 | 김정훈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2165
신명기의 이 부분은 십일조에 관한 내용입니다. 위 링크의 두번째 항목을 보시기 바랍니다.
술이 구원의 교리이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둘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신약의 지침들은 우리가 술에 취하거나 누룩으로 부패된 것을 마시는 것에 대해 권장도 적당한 허용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술에 대해 우리가 따를 지침은 신약성경, 그중에서도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서신서 부분입니다.
포도즙, 포도주 관련 글도 찾아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2-01-30 22:14:40 | 김재욱
[이브의배꼽 아담의 갈비뼈]에서 반딧불이야기 앞에 실렸네요. 3년전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재밌구나싶어 책장에서 꺼냈어요 박사님.
이렇게 친절하게 또 열심으로 창조의 신비를 과학으로- 믿음에 지식을 지식에 넓이와 깊이를 더해 주시느라 수고하시네요 강건하세요 박사님~~
2012-01-30 21:02:47 | 최양순
(신명기 14장 26절) 네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즙이나 <독주> 등 네 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고 거기서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너와 네 집안이 먹고 기뻐할지니라.
전에는 술에 대해서 완전금주해야 하며 한 모금이라도 마셔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금 오래전에 신명기 14장 26절에서 독주를 먹어도 된다는 글을 보고는 조금 당혹스러웠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술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고 있지만, 신명기 14장 26절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글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도 아닌 것 같아서 술을 주량만큼 마시는 것은 허용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술에 대한 적지 않은 글들을 봤을 때 위의 구절을 언급한 글은 본 적이 없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여기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 모르고 있는 게 있다면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6:04: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30 20:39:54 | 김양규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것이 상식이 된 세상에서 붙잡을 건 삼위의 하나님과 성경 뿐이 없습니다.
2012-01-30 16:35:53 | 박주영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부족하여 미처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의심할 때가 있지만, 역시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일 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배려하시며 기다리시는 멋진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2012-01-30 11:40:23 | 김정훈
그랬군요.. 과거에 생화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다윈의 시대에도 눈은 워낙 그 구조가 복잡하고 정교하여 다윈 자신도 자연발생만으로 그 존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끼고 매우 고민을 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전하여 보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눈의 구조와 기능이 더 복잡하고 정교함을 알게 되어, 이것이 저절로 생겨 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갖 괘변에 불과할 뿐입니다!
2012-01-30 11:36:59 | 김정훈
귀가 이렇게 복잡한데... EBS에서 최재천교수가 눈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고 발생과정에서 잘못된 발생으로 인해 망막 박리가 잘 일어난다고?
이분 강의를 들으면 억장이 무너짐니다.
강의를 경청하며 메모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구요.
2012-01-30 11:06:04 | 허광무
어떻게 하다보니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과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귀로 정작 들어야 할 것들에 귀를 기울이며 살기를 원합니다.
2012-01-30 09:08:22 | 조양교
글 감사합니다. 눈도 신기하고 귀도 신기하죠.
전문 분야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증언하는 좋은 글 자주 올려 주세요~!
2012-01-30 00:02:16 | 김용묵
오래 전에 한국에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TV 프로그램 가운데, “특수 공작원 소머즈” 라는 프로가 있었다. 사고로 잃게 된 오른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한쪽 귀를 인공전자기관으로 대체하여 정상인과는 다른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여성 특수공작원의 이야기였다. “소머즈”에 있어서 특히 인기 있었던 것은 초능력적인 전자 인공 귀였는데, 멀리서 들려 오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귀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아직 소머즈 같은 초능력은 아니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사람의 귀에 인공 달팽이관을 이식하여 청력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니 이런 식으로 기술이 계속 발전해 간다면 실제로 공상과학 속에나 나오던 ‘소머즈의 귀’를 보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귓속을 들여다보면 그 세밀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귀에 부딪힌 소리는 먼저 외이도-우리가 귀지를 팔 때, 귀 후비개로 지나면서 건드리게 되는 부분으로 대략 2.5 cm 길이에 7 mm의 직경을 갖는다-라고 부르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그 통로의 끝에 연결된 마치 펼쳐진 우산 모양으로 생긴 얇은 고막을 진동 시킨다. 이때 만들어진 진동은 고막에 연결된 세 개의 작은 이소골을 차례로 통과 하면서 그 귀에 들어온 소리의 강도를 증폭시키는데, 이소골이 들어 있는 이 부분을 중이라고 하며, 대략 우리가 보통 커피에 넣어 먹는 각설탕만한 크기의 공간에 해당한다. 중이 속의 이소골은 그 구조와 배치가 소리를 증폭시키기에 매우 적절하게 놓여 있어 우리의 귀에 들어온 소리를 거의 잃어버림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이소골을 통과한 소리는 마지막으로 대략 완두콩만한 크기의 달팽이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달팽이관 속에는 약 눈물 한 방울에 해당하는 부피의 액체가 들어 있어, 고막에서부터 이소골을 통해 전해져온 소리의 진동은 이제 이 달팽이관 속 액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이 액체 위에는 얇은 막이 하나 떠 있는데,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이 막이 같이 움직이면서 거기에 붙어 있는 미세한 머리카락 모양의 신경세포들이 이 막을 통해 전해지는 물결의 높낮이를 감지하게 되고, 그것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뇌에 전달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 방울의 적은 액체 속에서 생겨나는 물결의 파고를 가지고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소리의 신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람의 귀는 보통 20에서 20,000 Hz 사이의 주파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참고로 이야기 하면, 피아노의 소리는 27.5에서 4,186 Hz의 소리를 내며, TV를 켜고 소리를 가장 낮게 줄여 놓았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는 16,000 Hz에 해당 한다), 그 중에서도 약 2,500 Hz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외이도의 구조가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증폭해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는 자그마치 우리의 고막이 불과 1억 분의 1cm 즉, 수소 원자의 두께에 해당하는 길이만큼만 움직임으로도 소리를 전달 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수소 원자의 직경에 해당하는 길이만큼의 고막의 미세한 움직임이 달팽이관 속의 눈물 한 방울만한 액체에 파고를 일으키고, 그 물결의 높낮이를 머리털 같은 신경세포가 감지하여 전기 신호를 일으키고 그것을 뇌에 전달하여 마침내 소리를 듣게 하는 과정을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설계를 통하지 않고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겠는가?
우리들은 아주 어릴 적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 주변의 소리에 익숙해 와서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그래서 청각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쉽지 않은데, 마치 TV의 벙어리 화면을 보는 답답한 기분은 아닐까? 사실 소리는 우리에게 많은 신비감을 주며, 또 상상을 자극한다.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을 떠 올려 보라. 소리의 세계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우리를 또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삼중고의 유명한 헬렌켈러는 만약에 한 가지를 골라서 회복할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삼중고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소리를 듣고 싶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과연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새롭게 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몇 번이나,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청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었던가?
성경에서는 소리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요한복음은 처음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 1:1).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으로 ‘이르심으로’ 천지를 지으시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길을 예비한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마 3:3). 예수님이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으며 성령이 임하셨다 (마 3:16-17). 마가의 다락방에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으며 (행 2:2),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때에도 하늘에서는 음성이 있었다 (행 9:3-4). 이제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 질 때에도 하늘에는 큰 음성이 있어 축제의 소리가 하늘에 자자하게 될 것이다 (계 19:1-8). 이와 같이 성경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소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청각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소리를 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그것도 아주 고요한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왕상 19:12) 그 분의 음성에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원하신다. 그야말로 우리의 고막을 수소 원자 두께 만큼, 눈꼽의 눈꼽만큼 움직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를 열어 그 분의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싶은 것이다. 태초부터 계시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렘 7:23)라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로부터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니 (딤후 4:4), 주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교회에 거듭하여 말씀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3:9),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계 2-3장).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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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9 19:21:56 |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