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세대주의자들의 성경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6>
대답: 아닙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특정 신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본문을 바꾼 곳이 없으며 본문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역자(정동수)는 개인적으로 세대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대주의자는 결코 인류 역사를 몇 세대로 나누는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런 의미에서 세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흠을 내기 위해 마치 흠정역 성경은 세대주의라는 신학에 맞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성경 번역의 역사를 보면 번역자가 자신의 신학과 사상에 맞추기 위해 본문을 과감하게 뜯어고친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번역자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신학적 배경 위에서 번역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최종 작품에 배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담대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희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본문의 원래 의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저희의 신학적 입장에 그 본문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르게 번역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본문 중에서 영어 본문은 그렇지 않은데 한글 번역을 세대주의 신학(혹은 기타 특정 사상)에 맞추어서 번역했다고 느끼시는 구절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러한지 함께 검토해 볼 용의가 있습니다.
신학은 본문 다음의 문제이며 본 성경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결코 신학에 맞추어서 본문을 번역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 신학을 세우려고 본문을 바꾸었다면 그는 곧 말씀을 의도적으로 변개시킨 사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라킨과 럭크맨의 설명대로 처음에는 창세기의 재창조 신학 이론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전이 그런 용례를 지지하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곧장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저의 신학을 뒤로하고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이런 원칙 하에서 번역되었음을 밝힙니다.
특정 신학이 작용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다음의 예가 잘 보여 줍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모든 실족하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분의 왕국 밖으로 모아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권위역 마13: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모아다가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킹제임스 흠정역).
The Son of man shall send forth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out of his kingdom all things that offend, and them which do iniquity; And shall cast them into a furnace of fire: there shall be wailing and gnashing of teeth(KJV).
어떤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졌으되 행위가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천년 왕국 동안 왕국 밖으로 쫓겨나서 통곡하고 이를 간 뒤에 정화되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밖으로’(without)를 첨가한 권위역 성경의 경우 그런 교회의 교리적 입장이 번역에 의도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영어는 ‘out of his kingdom’으로 되어 있으며 흠정역 성경은 이를 그대로 ‘왕국에서’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곧 특정 신학을 세우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킨 좋은 예가 됩니다.
마13:41은 결코 왕국 밖으로 모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런 자들을 왕국에서 거두어 ‘내어’(out of) 불에 즉 지옥에서 태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정화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부분을 단 한 군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구원받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에 따라 단지 보상이 다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결코 특정 신학을 세우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키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런 구절이 있는 것 같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러한 죄를 범한 것이 사실로 발견되면 그 부분에 대해 독자들에게 공개 사과를 하고 다음에 수정해서 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2009-05-08 20:24:58 | 관리자
질문: 작은 숲인가요, 아세라인가요? 킹제임스 성경은 아세라를 작은 숲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9>
대답: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작은 숲이 나오는 구절을 하나 보도록 합시다.
오히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 낼지니라(출34:13).
현대 역본 역자들은 이런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작은 숲’(groves)이 오역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아세라’ 혹은 ‘형상’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이 같은 주장을 펴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작은 숲’ 혹은 ‘나무’를 의미하는 히브리말 ‘아셀’(ashel)과 ‘복 받은’ 혹은 ‘안내자’를 의미하는 ‘아샤르’(ashar)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가정과 ‘아샤르’가 아스타르테 여신과 동일하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현대 역본 역자들은 여기서도 또 틀렸습니다.
첫째로 히브리말에는 형상과 작은 숲을 의미하는 단어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27:9를 보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두 개가 동시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불법이 깨끗하게 되며 이것이 그의 죄를 제거하는 모든 열매가 되나니 그분께서 제단의 모든 돌을 쳐서 산산조각 난 석회암 같게 하실 때에 작은 숲과 형상들이 서지 못하리라(사27:9).
만일 현대 역본들이 옳다면 사27:9는 “형상들과 형상들이 서지 못하리라.”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왕하18:4와 23:14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번역은 난센스입니다.
둘째로 아스타르테의 이름은 아스다롯이라고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왕상11:5; 33; 왕하23:13). 이 여신의 이름은 히브리 알파벳 ‘아인’(ayin)으로 시작되며 작은 숲을 의미하는 말은 알파벳 ‘알레프’(aleph)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아샤르’가 아스다롯의 어원이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셋째로 신16:21은 이스라엘이 결코 작은 숲을 심어서는 안 됨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 가까이에 어떤 나무로든 작은 숲을 심지 말며(신16:21)
창21:33처럼 작은 숲의 나무들을 ‘심는 것’(plant)은 말이 되지만 형상이나 나무로 된 우상들을 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끝으로 오늘날에도 신상 주변에 작은 정원이나 나무로 된 작은 숲을 만드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숲과 형상, 우상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2009-05-08 20:22:26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침례’란 단어를 ‘뱁타이즈’(baptize)로 음역을 해서 세례가 가능하게 된 것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2>
대답: 침례교인들 중에서 특정한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뱁타이즈’(Baptize)란 단어가 쓰인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어린 아기에게 세례를 행하는 자들이므로 ‘물에 담근다’는 의미의 ‘임머스’(immerse)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교묘히 원어를 음역하여 ‘뱁타이즈’로 만들었고 그 결과 세례를 주는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얼른 들어보면 그럴듯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 같은 주장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많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더라. 또 그들이 와서 침례를 받으니(요3:23).
‘뱁타이즈’라는 단어는 그리스말에서 나왔으면 주후 1066년에 처음으로 영어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영국에서의 침례(Baptism)는 항상 ‘물에 잠기는 침수례’(immersion)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 패트릭(389-465)이나 베너러블 비드(673-735) 등은 항상 침수례만을 베풀었습니다. 위클리프와 틴데일 역시 자기들의 성경에 ‘뱁타이즈’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이 단어가 ‘물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그 의미를 밝혔습니다.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뱁타이즈’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고안하여 세례를 줄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유아세례를 주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교인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그들의 대부분은 국교회 교인이었지만 그 당시 영국 국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영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 2세기부터 그들은 오직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국교회를 세운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등도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카톨릭 교도였던 매리 여왕조차도 물에 잠기는 침례 이외의 다른 방식 즉 세례 같은 것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역자들이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한 1611년경에도 침례는 오직 물에 잠기는 침례 밖에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 ‘뱁타이즈’라는 말은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영국 국교회는 카톨릭 교도로서 세례를 주장하던 찰스 1세(1625-1649)의 집요한 ‘세례 주장’을 성공적으로 물리쳐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1644년에 장로교인들이 영국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고 그들은 영국 내에서 침례를 불법으로 만들어 행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영국 국교회는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지 한참 뒤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유아세례를 주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잠긴다’라는 의미의 ‘immersion’을 쓰지 않고 ‘뱁타이즈’라는 음역된 단어를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뱁타이즈’가 ‘물속에 잠기는 것’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고 그 당시에 이미 그 단어가 ‘물속에 잠기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었으므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읽어보면 청교도들이 ‘침례’의 ‘뱁타이즈’라는 단어 대신 ‘씻는다’는 의미의 ‘washing’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청교도들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로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사람들이었으며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침례가 틀리고 세례가 맞았다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뱁타이즈’라는 단어 대신 곧장 ‘씻는다’는 의미의 ‘washing’을 도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가들이 또 다시 침례 문제에서도 바르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2009-05-08 18:53:3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고린도전서 15장 20, 23절 등에 나오는 ‘첫 열매’는 ‘첫 열매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해야 하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5> 대답: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 ‘첫 열매’가 맞습니다. 고전15:23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But every man in his own order: Christ the firstfruits; afterward they that are Christ's at his coming.
언뜻 보면 영어 ‘firstfruits’가 복수로 되어 있어 ‘첫 열매들인 그리스도’로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며 특히 럭크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주 강하게 이것을 고집합니다(말씀보존학회). 그런데 성경의 용례는 다릅니다. 성경에는 ‘firstfruits’가 총 32번 나오며 이것들의 용례를 보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6장 15절을 보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인 것과…)
ye know the house of Stephanas, that it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여기서 보다시피 ‘firstfruits’는 보기에는 복수 같지만 실제로는 단수입니다. ‘it is’라는 단수 대명사와 동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6장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가야에서 그리스도께 첫 열매가 된 자니라.
Salute my wellbeloved Epaenetus, who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unto Christ.
여기에도 단수 동사 ‘is’로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저희는 어떤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용례에 따라 ‘firstfruits’를 단수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첫 열매들 그리스도’하면 벌써 말 자체가 꼬이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보지 못한 다른 사실이 있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2009-05-08 18:50:16 | 관리자
질문: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의미를 잘못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8>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πολλα γαρ πταιομεν απαντες, 영어 KJV : For in many things we offend all,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우리 모두는 많은 일에 실수하나니, 한글 개역판 :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영어 KJV는 헬라어의 의미를 잘못 전달할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영어 KJV를 직역하면 “많은 일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넘어지게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거침돌이 되어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인가?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다면 한글 개역판이나 한글 KJV같이 번역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글 KJV는 또 문제가 된다. 왜 영어 KJV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이송오씨는 「교회와 신앙」(1995년 2월)과의 인터뷰에서 13년이나 걸려서 한글 KJV를 영어 KJV에서 100% 번역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분명히 영어 KJV의 번역은 아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영어 KJV가 오역인줄 알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들 스스로가 영어 KJV도 영감된 말씀이 아님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는가?
이 부분에서 장 박사는 영어 문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함정을 팠습니다.
먼저 영어 구문을 살펴봅시다.
“For in many things we offend all.”
장 박사는 ‘offend’라는 단어를 타동사로 보고 ‘all’을 목적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offend’는 자동사이며 ‘all’은 목적어가 아니라 ‘we’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나 한글 KJV나 개역성경의 번역은 100% 맞습니다.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그는 곧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흠정역).
그러면 다른 현대 역본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For we all stumble in many things. If anyone does not stumble in word, he is a perfect man, able also to bridle the whole body(NKJV).
For we all stumble in many ways. If anyone does not stumble in what he says, he is a perfect man, able to bridle the whole body as well(NASV).
We all stumble in many ways. If anyone is never at fault in what he says, he is a perfect man, able to keep his whole body in check(NIV).
다른 현대 역본들도 모두 동일한 그리스어 문장을 ‘우리는 다’ 혹은 ‘우리 모두는’으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장 박사의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어 생긴 것이지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offend’가 자동사라는 것은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너무 명백합니다.
For in many things we offend all. If any man offend not in word, the same is a perfect man(KJV).
한편 개역성경은 ‘많은 것에서‘(in many things)를 삭제해서 또 다시 번역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9-05-08 18:46:59 | 관리자
질문: 빌립보서 3장 20절의 ‘conversation’은 시민권입니까? 아니면 생활 방식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7>
대답: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두만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ημων γαρ το πολιτευμα εν ουρανοις υπαρχει, 영어 KJV : For our conversation is in heaven,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한글 개역판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폴리튜마‘( πολιτευμα)이다. 이 단어는 ‘시민권‘ 또는 ‘시민권이 있는 장소‘란 의미인데 영어 KJV에서는 ‘회화‘(會話)라고 번역했다. 고어에서는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회화‘는 현대 영어의 ‘시민권‘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영어 KJV를 번역했다는 한글 KJV에서는 ‘회화‘라고 번역하지 않고 ‘시민권‘이라고 번역했다. 아마 영어 KJV의 번역이 잘못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직역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글 KJV는 영어 KJV의 번역이 아니라 새로운 번역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장 박사가 지적한 대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지 않고 자의로 번역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를 어떻게 번역했습니까?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이제 ‘conversation’이 시민권인가 생활 영역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성경의 용례를 찾아봅시다. 이를 위해 성경 소프트웨어로 가서 빌립보서 3장 20절의 ‘conversation’을 찾아보면 스트롱 번호가 4175로 되어 있으며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 한 군데서만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4176 번호가 매겨진 단어에서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Englishman's Concordance」로 가서 4176을 넣으면 신약 성경 전체에서 4176이 쓰인 구절이 두 군데 나옵니다: 행23:1; 빌1:27.
바울이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노라, 하거늘(흠정역 행23:1).
And Paul, earnestly beholding the council, said, Men and brethren, I have lived in all good conscience before God until this day(KJV).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개역성경).
Paul, looking intently at the Council, said, “Brethren, I have lived my life with a perfectly good conscience before God up to this day.”(NASV)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흠정역 빌1:27).
Only let your conversation be as it becometh the gospel of Christ(KJV).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개역성경)
Only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NASV).
이런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conversation’이라는 단어가 ‘생활하다’, ‘살다’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 ‘생활 방식’, ‘행실’ 등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현대 역본들도 다 그렇게 번역했으며 따라서 빌립보서 3장 20절을 굳이 시민권으로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장 박사는 ‘conversation’의 현대 용례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그 지적은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가서 ‘conversation’의 용례를 보면 그것의 1차적 의미가 ‘생활’, ‘행실’(action of living)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오역을 했다는 비난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 성경을 보는 사람들도 그 당시 뜻을 알려면 당연히 그 당시 뜻을 담은 사전을 보아야지 현대 사전을 보면 안 되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은 성경의 용례와 원어의 용례대로 ‘생활권‘(生活圈)이라고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오래된 단어를 쓸 이유가 뭐냐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영국/미국에서는 킹제임스 성경과 동시대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자주 무대에서 공연됩니다. 그런데 배우들은 1600년도의 영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거기 나오는 대사를 현대어로 바꾼 것은 더 이상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닙니다. 일개 연극 대사도 1600년도 대사를 그대로 쓰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담은 성경을 마음대로 바꾼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또한 한국어와는 달리 영어는 지난 4세기 동안 뜻이 변한 단어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특히 성경에는 몇 단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단어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뜻이 부패한 것도 하나님이 감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한편 개역성경은 행23:1에서 ‘생활했다‘ 혹은 ‘살아왔다‘(lived)는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입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진리이며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거짓이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며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2009-05-08 18:43:54 | 관리자
질문: 빌립보서 1장 13절의 ‘palace’는 시위대를 오역한 것이 아닙니까? 현대 역본 역자들과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6>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εν ολω τω πραιτωριω, 영어 KJV : So that my bonds in Christ are manifest in all the palace,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모든 궁전 안과 다른 모든 곳에도, 한글 개역판 :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단어는 ‘프라이토리온‘(πραιτωριον)인데 이 단어는 여기서 ‘황제의 시위대‘를 의미한다. 물론 때로는 ‘프라이토리온‘이 총독이나 왕의 관저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 당시에 벌써 로마 황제의 궁전 전체에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황제의 궁전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셋집‘에 살면서 차꼬에 매여 시위대의 감시를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행28:30).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프라이토리온‘을 ‘궁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역이다.
먼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결박당한 일이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 드러나게 되었고(흠정역)
장 박사의 주장은 현대 역본 역자들과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영향을 받은 성경 주석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성경 비평학이 나오기 이전에 쓰인 「매튜 헨리의 주석」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emperor, the courtiers, the magistrates, are convinced that I do not suffer as an evil-doer, but as an honest man, with a good conscience. They know that I suffer for Christ, and not for any wickedness.
황제와 대신들과 행정관들이 내가(바울이) 악행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장 박사가 여기서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궁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언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억울하게 결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일이 알려지면서 자연히 궁궐 안에 복음이 전파되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을 보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 문안하느니라.
여기의 카이사르는 분명히 로마의 황제를 말하며 바울은 로마 황제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 성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궁궐 안에 바울의 소식이 알려지고 복음이 선포되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빌립보서 1장 13절의 ‘궁궐’ 즉 ‘palace’는 킹제임스 성경역자들이 아주 정확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더 이상 믿음이 없는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지니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잠30:5-6).
2009-05-08 18:40:21 | 관리자
질문: 사도행전 19장 37절에서 ‘교회’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신전’으로 번역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4>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ουτε ιεροσυλος, 영어 KJV : which are neither robbers of churches,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이 사람들은 교회들의 물건들을 훔치지도 않았고, 한글 개역판 :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여기서 문제의 초점은 헬라어 단어 ‘히에로쉴루스‘(ιεροσυλους)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KJV나 한글 KJV같이 ‘교회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이 아니고 ‘헬라인의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을 의미한다. 바우어(Walter Bauer)의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는 분명히 ’신전 물건을 훔치는 도둑‘(temple robber)을 의미한다. 문맥적으로도 ‘교회 물건을 훔치는 자‘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 사도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므로 에베소 지역에 기존 교회가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KJV나 한글 KJV 성경은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KJV나 한글 KJV 성경의 분명한 오역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교회’입니다. 보통 신약 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클레시아’로서 이것은 ‘부름을 받아 나온 자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로 번역된 단어는 ‘히에로쉴루스’로서 ‘에클레시아’와는 다르며 이것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주로 성전(templ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에서 ‘전’(temple)이란 신에게 경배하기 위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이 경우 경배 대상인 그 신은 그 전에 거해도 되고 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따라서 이 ‘전’은 그 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 신에게 경배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보면 ‘교회’(church)라는 단어는 ‘주의 집, 특히 어떤 특정한 주의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the house of a lord, a specific lord; each house having its own lord.
이 구절에서 마을 서기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도시에 가서 거기 있는 교회 물건을 탈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여기의 문맥이 특정한 신을 위한 전 즉 다이아나의 신전을 가리킨다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특정한 신이 거하는 특정한 집’ - 이 경우에는 여신 다이아나에게 경배하는 집 - 을 나타내기 위해 ‘교회’(church)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실 1600년대에는 심지어 이슬람교도들의 모스크도 ‘교회’라 불렸으며 ‘교회’ 즉 ‘church’의 뜻은 문맥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같은 신조나 사상을 가진 자들의 모임’(14번째 용례)도 분명히 ‘교회’ 즉 ‘church’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루었던 모임도 성경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또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행7:38).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 중에 여기 나오는 교회가 지금 신약 시대의 교회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도 넓은 의미에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아 특정한 신 즉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모임’을 형성했기에 ‘교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물론 「옥스퍼드 영어 사전」도 13번째 용례로 이것을 들고 있습니다.
한편 ‘교회’ 즉 ‘church’는 영어에서나 한국어에서나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건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교회가 ‘건물’의 의미로 쓰였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들도 다 자기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합니다. 몰몬 교도들도 다 자기들이 ‘교회’(Church of the Latter Day Saints)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몰몬 템플(전)에 가서 경배를 드리면서도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문선명의 통일교도 자기들의 모임과 건물을 교회라고 하며 목양자를 목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도 자기들 건물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면 “교회에서 도둑맞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에베소 시의 마을 서기가 “이들이 교회에서 물건을 탈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용례 면에서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을 서기는 진정으로 신전이 아니라 지역 교회 건물을 의미했을 수도 있습니다. 행19:10을 보면 바울 일행이 에베소에서 두란노라는 사람의 학교에서 거의 2년 동안 사역을 했고 그 결과 아시아(물론 소아시아를 가리킴)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두 해 동안 계속해서 이루어지므로 아시아에 거하던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행19:10).
이렇게 복음이 2년 동안 왕성하게 전파되었으므로 그 지역에 이미 여러 개의 지역 교회가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존 교회가 있을 리 없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마을 서기가 교회라고 말한 것은 영어 단어 ‘교회’(church)의 넓은 뜻으로 보아도 맞고 이단이나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모임/건물을 교회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도 맞으며 실제 지역 교회라 해도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킹제임스 성경역자들이 문맥에 맞게 이 구절을 잘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9-05-08 18:36:57 | 관리자
질문: 사도행전 8장 37절은 원래 없는 구절이라고 들었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3>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 : 없음
영어 킹제임스 성경: And Philip said, If thou believest with all thine heart, thou mayest. And he answered and said, 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제외시키고 있는 사본: P45(5세기), P74(7세기), א(4세기), A(5세기), B(4세기), C(5세기), P(9세기),ψ (8/9세기), Byz 등
포함시키고 있는 사본: 630(9세기), 945(11세기), 1739(10세기), 1877(14세기) 등
이 구절은 초기 사본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잔틴 계열의 다수사본(Byz)도 이 구절의 삭제를 지지하고 있고 Hodges-Farstad의 다수 사본설에 의한 헬라어 성경도 이 구절의 삭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구절이 사도행전에 원래 있던 말씀이라면 필사자들이 삭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원독이 아니라는 강력한 뒷받침을 받고 있다.
여기서 장 박사가 사본들의 증거를 대면서 연대를 기록하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 구절을 삭제한 사본들 - 거의 대부분이 천주교 사본임 - 의 연대가 이 구절을 포함한 사본들의 연대보다 앞섬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내 사본’을 א로, ‘바티칸 사본’을 B로 표기한다고 해서 독자들이 이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로써 그는 다른 현대 학자들과 함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이론을 따라 “오래된 것이 좋다.”는 주장을 펴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행8:21에 나오는 마법사 시몬의 마음보다도 바르지 못합니다. 성경 사본을 연구하면 몇 가지 증거물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교부들의 글입니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나오기 100년 전에 이미 키프리안(주후 200-258)은 이 구절이 본문에 있었음을 확증해 주었습니다(The Treatises of Cyprian I: 1:17). 또한 주후 190년의 이레네우스와 주후 370년의 파시안도 이 구절이 원래 본문에 있었음을 확증해 줍니다. 단지 가이사랴의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주후 250-350년 사이에 변개시킨 사본들만 이 구절을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사본들 명단 역시 의심스런 알렉산드리아/천주교 사본들 아닙니까? 과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성경의 파급을 저지하던 천주교에서 교회를 위해 사본들을 보존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합니까?
도대체 근본주의 성서침례교회 목사인 장 박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고백 없이도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논리적일까요? 한 번 사본의 증거를 따지기에 앞서 앞뒤 문맥을 보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주며 이 과정 속에서 크리스천 교회가 어떤 일을 실행했는지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8장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스데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이때에 처음으로 빌립이 이방인인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장면이 자세히 나옵니다(26-40절).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한글개역성경은 이상하게 37절을 ‘없음’으로 삭제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구절이 없었다면 그 다음 구절들이 한 절씩 앞으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가 자기의 교리나 신학을 세우기 위해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36절에서 내시는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무엇이 내가 침례 받는 것을 방해하리요?”라고 물었으며 이에 대한 답이 37절에 나오고 내시는 그 답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니라(흠정역 행8:37).
이 부분에서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37절을 친히 기록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명확한 근거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교도들의 믿음과 연합한 천주교가 생겨났습니다. 중세암흑시대를 주도한 천주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들의 체제 하에 가두기 위해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 관행을 도입하여 믿음 고백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어 어려서부터 천주교인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행8:37의 말씀이 이런 비성경적 관행에 큰 거침돌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감히 성경 본문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습니다. 그 결과 한글개역성경,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NASB 등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역본에는 이 중요한 구절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은 이 구절을 잘 보존하여 천주교의 유아세례 교리가 허구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2009-05-08 18:26:23 | 관리자
질문: 십일조를 3일 만에 드릴까요, 3년 만에 드릴까요? 킹제임스 성경은 아모스 4장 4절에서 오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4>
대답: 이 문제 역시 장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모스 4:4의 경우를 보자. KJV는 “Come to Bethel, and transgress; at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s; and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and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 (“벧엘로 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년 후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 NIV도 이탤릭체 부분은 동일함).
NASB는 “Enter Bethel and transgress; in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your tithes every three days” (“벧엘에 들어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일 후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 NKJV도 이탤릭 부분은 동일함). 재미있는 것은 KJV는 히브리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3일’을 ‘3년’으로 해석했다(이 구절의 히브리 원문은 ‘3년’이 아니라 ‘3일’이다).
킹제임스 성경이 히브리 원문대로 ‘3일’이라 번역하지 않고 ‘3년’으로 의역했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맞을까요? 성도들이 3일마다 십일조를 가져오면 현대 교회는 얼마나 부자가 될까요?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간단하게 조사를 해 봅시다.
먼저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에 가서 킹제임스 성경이 ‘3년’으로 번역한 단어를 찾아보면 색인 번호가 ‘구약 3117’로 되어 있고 이것의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의 용례도 나와 있습니다.
yowm (yome); from an unused root meaning to be hot; a day (as the warm hours), whether literal (from sunrise to sunset, or from one sunset to the next), or figurative (a space of time defined by an associated term), [often used adverb]:
KJV - age, + always, + chronicals, continually (-ance), daily, ([birth-], each, to) day, (now a, two) days (agone), + elder, X end, + evening, + (for) ever (-lasting, -more), X full, life, as (so) long as (… live), (even) now, + old, + outlived, + perpetually, presently, + remaineth, X required, season, X since, space, then, (process of) time, + as at other times, + in trouble, weather, (as) when, (a, the, within a) while (that), X whole (+age), (full) year (-ly), + younger.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여기 쓰인 히브리 단어 ‘욤’이 주로 ‘날’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말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이 히브리 단어 역시 ‘날’ 말고도 분명히 ‘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용례의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를 보면 밑줄 친 것과 같이 ‘년’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단어가 ‘년’으로 번역된 곳을 찾아가 봅시다. 여러분이 「Englishman's Concordance」를 가지고 있으면 그 책에서 스트롱 번호 ‘구약 3117’을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그 단어가 쓰인 곳과 번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더더욱 편할 것입니다.
조사를 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히브리 단어는 거의 대부분 ‘날’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끝나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5장 29절에 가보니 이 단어가 드디어 ‘년’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nd if a man sell a dwelling house in a walled city, then he may redeem it within a whole year after it is sold; within a full year may he redeem it.
사람이 성벽을 두른 도시 안에 있는 집을 팔았으면 그 집을 판 지 한 해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만 한 해 안에 그것을 무르려니와
여기에도 분명히 동일한 히브리어 ‘욤’이 쓰였지만 그 단어를 ‘날’로 하면 안 되기에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그 단어의 또 다른 의미인 ‘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현대 역본들은 어떠할까요?
If a man sells a house in a walled city, he retains the right of redemption a full year after its sale. During that time he may redeem it(NIV).
Likewise, if a man sells a dwelling house in a walled city, then his redemption right remains valid until a full year from its sale; his right of redemption lasts a full year(NASV).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한글개역성경).
모든 현대 역본들도 여기에서 동일한 히브리어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여기서 의역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그 히브리어의 뜻 가운데 ‘년’이 있음을 알았기에 여기서 정확하게 ‘년’이라 번역했습니다.
자, 더 확신을 갖기 위해 민수기 9장 22절을 보십시다.
Or whether it were two days, or a month, or a year, that the cloud tarried upon the tabernacle…(KJV).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그 위에 남아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장막에 거하고…(흠정역).
물론 NIV, NASV, 한글개역성경도 동일한 히브리어를 여기서 다 ‘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한글개역성경)
이제 우리는 문제가 되었던 아모스 4장 4절의 히브리어 ‘욤’이 ‘하루’로도 번역되고 또 ‘일 년’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의 ‘3년’과 한글개역성경 등을 비롯한 현대역본들의 ‘3일’과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성경에서 십일조가 언급된 구절을 살펴보면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3일’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신14:28).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너는 네 모든 소출의 십일조 드리기를 다 마치고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아모스 4장 4절을 ‘3년’이라고 바르게 번역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영감과 보존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구절들로 인해 주눅 들거나 의기소침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들이 제시하는 구절들을 다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학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하신 말씀으로 응징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2009-05-08 18:23:36 | 관리자
질문: 이사야서 65장 11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갓’을 ‘군대’로 ‘므니’를 ‘수’로 오역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2>
대답: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 ךשׁממ ינמל… ןחלשׁ דגל
영어 KJV: But ye are they that forsake the LORD, that forget my holy mountain, that prepare a table for that troop and that furnish the drink offering unto that number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그러나 너희는 주를 버린 자들이며 나의 거룩한 산을 잊어버리고 그 군대를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며 그 수대로 술을 제물로 제공하는도다.
한글 개역판: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두 단어는 가드(דג)와 므니( ינמ)라는 단어이다. KJV에서는 ‘가드‘를 ‘군대‘로 ‘므니‘를 ’수‘(數)라고 번역하여 문맥상 그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고대의 종교에 관한 지식이 불충분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오역이 가능했다는 것이 이해는 된다. 오늘날 밝혀진 바로는 바빌론이나 수리아에서 ‘가드‘는 ‘행운의 신‘(god of fortune)을 ‘므니‘는 ‘운명의 신‘(god of destiny)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백성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번역은 KJV와 사뭇 다르다. NKJV는 ‘가드‘(Gad)와 ‘므니‘(Meni)를 번역하지 않은 채 남겨 놓았고, NIV나 NASB는 ‘행운의 신‘(Fortune), ‘운명의 신‘(Destiny)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글 개역판은 NKJV와 같이 ‘갓‘, ‘므니‘라고 함으로써 오역의 실수는 범하지 않고 있다.
히브리어를 음역하느냐, 번역하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의 ‘갓’과 ‘무니’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문제 단어 중 하나인 ‘갓’(스트롱번호 1409)은 이 구절 말고도 창세기 30장 11절에 나옵니다.
레아가 이르되, 군대가 오는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흠정역).
And Leah said, A troop cometh: and she called his name Gad(KJV).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개역성경)
Then Leah said, “A troop comes!” So she called his name Gad(NKJV).
Then Leah said, “How fortunate!” So she named him Gad(NASV).
여기서 뉴킹제임스역(NKJV)은 ‘갓‘을 분명히 군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역자들은 도저히 양심상 여기를 NASV나 개역성경처럼 ‘운이 좋도다!‘라고 번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자기의 자식들에게 일일이 축복하는 장면이 묘사된 창세기 49장에서 갓에 대한 해석이 명백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갓은 군대가 그를 이길 것이나 끝에는 그가 이기리로다(흠정역 창49:19).
Gad, a troop shall overcome him: but he shall overcome at the last(KJV).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개역성경).
Gad, a troop shall tramp upon him, But he shall triumph at last(NKJV)
심지어 개역성경도 여기서는 갓과 관련해서 ‘군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는 이사야서 65장 11절의 ‘갓‘이 킹제임스 성경대로 ’군대‘로 번역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무니‘(스트롱 번호 4507)의 경우 성경에서 여기 한 군데만 나오므로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이 단어는 스트롱 번호 4487인 단어에서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단어는 구약에서 대개 ‘수‘ 혹은 ‘수를 세다‘는 의미의 ‘number’로 번역되었습니다(창13:16; 삼하24:1; 대하5:6; 사65:12 등).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이사야서 65장 11절에서 ‘갓‘처럼 ‘므니‘도 ‘수‘로 잘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현대 역본들과 킹제임스 성경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현대 역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우상 숭배 대상이 ‘갓‘과 ‘므니‘ 둘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킹제임스 성경은 그들이 섬긴 이방 신들이 군대처럼 많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처럼 번역을 하느냐, 개역성경처럼 음역을 하느냐에 상관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처럼 번역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음역을 해도 해석의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고치지 않고도 매튜 헨리처럼 있는 그대로 다음과 같이 주석을 쓸 수 있습니다.
They prepared a table for that troop of deities which the heathen worship and poured out drink-offerings to that numberless number of them.
그들은 이교도들이 경배하던 수많은 신들을 위해 상을 마련했고 수없이 많은 신들을 위해 음료 헌물을 부었다.
성경에 어려운 구절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와 성경 주석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주석이 맞는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주를 버리는 자들이요, 나의 거룩한 산을 잊고 그 군대를 위하여 상을 예비하며 그 수대로 음료 헌물을 제공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 수를 세어 칼에 넘길 터인즉 너희가 다 몸을 구부리고 살육을 당하리니(흠정역 사65:11-12).
But ye are they that forsake the LORD, that forget my holy mountain, that prepare a table for that troop, and that furnish the drink offering unto that number. Therefore will I number you to the sword(KJV).
물론 NKJV도 사65:12에서 ‘number’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65:11의 ‘number’와 사65:12의 ‘number’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수많은 이방 신에게 경배를 드렸듯이 나도 그렇게 너희 수를 세어 칼에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65:11의 ‘므니’를 ‘수’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만이 사65:1과 함께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히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도 또 한 번 영어 킹제임스 성경 이 최종 권위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2009-05-08 18:19:0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라고 지시한 제임스 왕이 동성연애자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제임스 왕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유명한 킹제임스 성경 번역을 위임했던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는 비록 영국이 낳은 최고의 군주는 아니었다 해도 많은 이들이 존경을 금치 않았던 위대한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와 결단을 통해 그는 스코틀랜드의 상호 투쟁하는 족속들을 하나의 통합 민족으로 연합하였으며 그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은 대영제국의 기틀을 형성하였습니다.
단지 영국의 국교회들만이 영어로 된 성경을 소유하던 때에 제임스 왕은 평민들 즉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소유할 것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1603년에 제임스 왕은 이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학식 있는 54명의 학자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이 영적 무지에 빠져 지내길 바라던 때에 제임스 왕은 자기 국민들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영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쳤던 제임스 왕은 「담배를 강력히 반대한다」(Counterblast to Tobacco)라는 소논문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은 영국 내에서의 흡연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항상 적들을 두게 마련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웰돈(Anthony Weldon)은 조정에서 추방당했고 이에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제임스 왕이 죽은 지 25년 후인 1650년에 가서야 웰돈은 그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는 제임스 왕을 동성연애자로 몰아 부치는 글을 썼는데 그때는 이미 제임스 왕이 죽은 뒤라 왕이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웰돈의 이 보고서를 무시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제임스 왕을 비방함으로써그의 이름이 담긴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을 더럽힐 수 있으며 그 결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책인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좀 더 현대화 된’ 역본들로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최근 들어 끄집어낸 것인데 사실 그전까지 이것은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 그런 종류의 시시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한 번 웰돈의 이 거짓 보고서는, 그 보고서의 저자였던 웰돈과 같이 불순한 동기를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에 의해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1605년 영국 국민들의 손에서 그 참된 성경을 빼앗기 위하여 의회의 의원 전원과 제임스 왕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05년에 가넷(Henry Garnet)이라는 예수회(Jesuits) 사제의 지도하에 포크스(Guy Fawkes)라는 이름의 로마 카톨릭 교도 한 명이 의회와 제임스 왕을 살해하기 위해 암살용 화약 36통을 가진 채 의회 지하실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살해한 후 그의 자녀들을 감금시키고, 반항했던 자들을 다 죽이고, 영국을 교황에게 충성하는 나라로 재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영어 성경’도 그 계획의 희생물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포크스와 가넷 그리고 8명의 공모자들은 체포되어 다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제임스 왕의 인품에 먹칠을 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는 자들은 한결같이 성스럽지 못한 자리에 동참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2009-05-08 18:15:24 | 관리자
질문: 열왕기상 10장 28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오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79>
대답: 먼저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두만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 הוקמו םירצממ המלשׁל רשׁא םיסוסה אצומו
영어 KJV: And Solomon had horses brought out of Egypt, and linen yarn.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솔로몬에게 이집트에서 가져온 말들과 베실이 있었으니
한글 개역판: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 왔으니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 (‘크베’)라는 단어이다. 영어 KJV와 한글 KJV는 이 단어를 ‘베실’이라고 번역했고 한글 개역판은 아예 이 부분을 삭제해 버렸다. 사실 1611년경에는 고대의 지리나 종교에 관해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크베’를 ‘베실’로 번역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오늘날 ‘크베’(또는 쿠에)는 지리적 이름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NASB나 NIV는 ‘쿠에’(Kue)라는 지명으로, NKJV는 ‘케베’(Keveh)로 번역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새 역본들이 만들어 내는 혼동을 보고 있습니다. 반격 재료가 모자라자 이제 현대 학자들은 음역과 번역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서 제기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이름은 거의 대부분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역자들이 번역을 할 때 이름이나 장소가 나오면 번역을 해야 할지(KJV처럼 아마 실로) 혹은 음역을 해야 할지(NKJV처럼 케베로)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이 결정은 문맥에 좌우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펜사콜라(Pensacola)라는 도시는 스페인 말로 ‘다섯 개 별’(Five stars)을 뜻합니다. 자, 거기 사는 사람이 스페인 사람을 만나서 “나는 펜사콜라에서 왔습니다.”(I am from Pensacola)라고 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펜사콜라에서 왔습니다.”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나는 다섯 개 별에서 왔습니다.”로 생각할까요? 바로 이런 문제가 히브리말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크베’ 역시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새 역본들은 이 단어를 장소로 음역 처리해서 솔로몬이 구매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맥을 보면 그가 구입한 것이 말과 병거 등임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아마 실’은 문맥에 맞지 않는 듯 하므로 새 역본 역자들은 이 단어를 장소로 음역 처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흠정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집트에서 말과 아마 실을 가져오매 왕의 상인들이 한 값에 아마 실을 받았으며(흠정역)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이를 ‘아마 실’로 번역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의 ‘크베’(Keveh)는 ‘모은다’(to gather)는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실’ 즉 ‘린넨 실’은 아마 섬유를 ‘모은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다시 아마포를 만듭니다. 사실 이집트는 아마포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네(두로)가 이집트에서 들여온 수놓은 제품과 고운 아마포를 넓게 펴서 돛을 삼았으며 엘리사의 섬들에서 들여온 청색과 자주색 옷감으로 너를 덮게 하였도다(겔27:7).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7:16-17에서 왕이 되는 자는 말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왕)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느니라. 또 그는 자기를 위해 아내를 많이 두어 자기 마음이 돌아서지 않게 하며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지니라.
그런데 솔로몬은 말과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특히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파라오의 딸을 포함하여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과 에돔 족속과 시돈 사람들과 헷 족속의 여인들이라(왕상11:1).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들여온 말과 병거는 솔로몬을 위한 것이었으며 아마 실은 그의 아내들 특히 파라오의 딸을 위한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맥이 이를 지지하므로 현대 역본들처럼 음역을 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또한 “1611년경에는 고대의 지리나 종교에 관해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주장 또한 거짓입니다. 이 단어를 ‘크베’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은 라틴 벌게이트와 70인역에 근거한 것으로(아담 클락의 주석서 참조) 1611년 번역 당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산물인 이런 자료들의 허구를 잘 알고 있는 역자들은 신빙성 없는 이런 자료를 단호히 배격하고 문맥에 맞게 이를 ‘아마 실’로 번역한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현대 학자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음역과 번역 문제를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순수하게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개역성경이나 말씀보존학회 성경처럼 아마를 베로 번역한 것은 오역입니다. 아마 즉 ‘린넨’은 아맛과에 딸린 한해살이 풀이며 베는 삼(hemp)에서 만든 것입니다.
2009-05-08 18:00:47 | 관리자
질문: 민수기 33장 52절의 그림은 오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76>
대답: 한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그룹 중 하나는 성서침례교회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거의 대부분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하는 독립침례교회들의 모임인 ‘Bible Baptist Fellowship’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가장 잘 알고 근본주의 침례교회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여전히 세례 성경인 개역성경을 고집하며 킹제임스 성경을 배격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내에 성경 이슈가 크게 번지자 당황한 개신교 학자들과 목사들은 근본주의 성서침례교회 출신으로 달라스 신학교에서 공부한 장두만 박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글을 쓰게 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배운 대로 행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신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이분으로부터 성경의 영감과 보존에 대한 바른 교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글을 보면 그의 사상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그 향유의 가치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NIV에서는 1년 분 봉급 (one year's wage)라고 번역했다. 그러면 NIV의 번역을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필자는 이 부분의 NIV 번역은 너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면 1년 동안에 안식일과 절기를 빼면 300데나리온 정도 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NIV의 번역은 현대인들에게 훨씬 더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1998년 6월과 7월호 「목회와 신학」).
장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 데나리온, 에바, 큐빗 등을 모두 ‘1년 치 봉급’, ‘10평’, ‘세 바구니’, ‘50센티미터’ 등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 부분만 ‘1년 치 봉급’으로 해야 한단 말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정할 권한과 그에 필요한 영감을 그에게 주었습니까? ‘축자 영감’(Verbal or word inspiration)에 대해 이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근본주의 신학교에서 근본주의 목사 후보생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단어, 단어에 영감을 불어넣으시고 단어, 단어를 보존하시지 단지 뜻만을 보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300 데나리온이라 두고 그것이 대략 1년치 봉급이라고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부디 근본주의 진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고치는 일에 도움을 주어 자유주의자들을 기쁘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 박사 같이 하나님께서 본문을 보존해 주심을 믿지 못하고 학자들이 원본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처음부터 철학이 다르므로 여러 구절을 비교해서 설명하는 일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창조와 진화’의 문제처럼 ‘믿음의 문제’이므로 아무리 증거를 대도 상대방이 틀렸다고 믿으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상 문제를 논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히브리 원문 : .....םתיכשׂמ־לכ תא םתדבאו
영어 KJV : and destroy all their pictures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그들의 모든 그림들을 파괴하고
한글 개역판: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단어는 ‘마스키트’(תיכשׂמ)이다.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의 히브리어 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는 “show-piece, specifically carved figure of idolatrous symbols”(전시물, 특히 우상적 상징의 새긴 상), “figure”(상) “imagination, conceit” (상상)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구약 원어 신학 사전」도 ‘마스키트’의 의미를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33:52은 영어 KJV나 한글 KJV같이 ‘그림’으로 번역해서는 안되고 ‘새긴 상(像)’ 또는 ‘석상(石像)’으로 번역해야 될 것이다. 히브리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원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KJV의 번역을 맹신하는 럭크만은 사람들이 KJV의 ‘그림’이라는 번역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각종 그림이나 TV를 즐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그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스트롱 번호는 4906이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6번 나오며 ‘형상’(image)으로 2번, ‘그림’으로 2번 번역되었으며 나머지 다른 용례로 쓰였습니다. 어떤 단어든지 두세 가지 이상의 뜻을 갖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을 따르느냐는 문맥이 결정합니다. 도대체 누가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의 히브리어 사전과 「구약 원어 신학 사전」에 최종 권위를 부여했단 말입니까? 이런 사전을 지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신자들인데 이들이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흠정역 민33:52).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교도들의 숭배 대상을 다 부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이 형상의 그림들을 신전에 걸거나 그려 두고 거기에 경배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에서도 형상과 함께 그림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림과 형상과 산당을 즉 가장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몽땅 다 부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번역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또한 영어에서 ‘picture’는 ‘조각칼 등으로 만든 것을 묘사한 것’이라는 용례도 있습니다(「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두 번째 용례 f항 참조).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최종 결과는 그림이며 이는 우리말 큰사전에 있는 그림의 정의와 똑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적으로 인해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완전한 성경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 우리 손에 완전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콧구멍에 있나니 어떤 점에서 그를 수에 넣어야 하겠느냐?(사2:22)
2009-05-08 17:39:52 | 관리자
질문: 일개 역본보다는 오히려 최초의 자필 원본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
대답: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필 원본에 가치를 부여하신 만큼만 가치를 두면 됩니다.
자필 원본(Original autographs)이란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최초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원본’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필 원본은 이미 오래 전에 소실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사실상 자필 원본에 충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실한 성경 신자라면 자필 원본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정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위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답변의 끝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필 원본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실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레미야서 36장에 나오는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 즉 예레미야가 기록한 두루마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예레미야서의 몇 장을 면밀히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에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왕과 왕 곁에 서 있던 모든 통치자들의 귀에 그것을 낭독하니라. 이제 왕은 구월에 겨울 집에 앉아 있고 왕 앞에는 불타는 화로에 불이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했을 때에 왕이 펜 칼로 그것을 찢어 화로 위에 있던 불에 던지더니 마침내 그 두루마리 전부가 화로 위의 불에 소멸되니라(렘36:21-23).
21절에 보면 여호야김 왕 앞에 두루마리가 놓이고 그의 종 여후디가 그것을 낭독하는 장면이 나오며 23절에는 여후디가 두루마리의 서너 쪽을 낭독하자 여호야김 왕이 그것을 펜 칼 즉 소도로 일일이 찢어서 활활 타오르는 화로 불에 던져 넣어 그 두루마리를 전소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자필 원본’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우리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감동시키사 재차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하셨고 거기에 몇 말씀을 추가하셨습니다(렘36:32).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니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이 불에 태운 그 책의 모든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서 받아 거기에 기록하고 그것들 외에도 그와 같은 말씀들을 거기에 많이 더하였더라(렘36:32).
이리하여 ‘두 번째 원본’이 탄생했으며 예레미야 45-51장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재생된 이 ‘두 번째 자필 원본’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그가 바빌론에 이르거든 이 두루마리를 읽고(렘51:59-61) 다 읽은 후에는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고 말하였습니다(렘51:63)!
이리하여 ‘두 번째 자필 원본’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잠깐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아직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45-51장의 그 두루마리 본문의 복사본이 지금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복사본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그 ‘두 번째 자필 원본’의 ‘복사본’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사실 우리는 그것을 ‘세 번째 자필 원본’이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필 원본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1) 이제껏 출판된 모든 성경에는 예외 없이 예레미야서 45-51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본문은 ‘두 번째 자필 원본’이나 혹은 ‘세 번째 자필 원본’의 복사본으로부터 번역된 것이다.
(2) 이 사실을 통해 일단 원본이 복사되어 자신의 메시지가 전달된 이상 하나님께서는 그 ‘원본’을 보존하시는 데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으셨음이 분명히 드러났으며 이 점은 그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 이상으로 자필 원본을 강조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같이 원본을 강조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자필 원본의 본문이 하나의 오류도 없이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이 시간에 자필 원본이 발견된다 해도 우리에겐 큰 의미가 없습니다.
2009-05-08 17:36:11 | 관리자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간의 침묵기
구약성경이 끝난 뒤 곧 바로 신약성경이 시작되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 기간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할 필요를 느낀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로부터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까지의 기간은 400년으로, 보통 이 기간은 '침묵기'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며 세속 역사가들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의 역사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주후 37-100년 사이에 살았던 요세프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이다. 요세프스는 유다인 역사가로 주후 66-67년 사이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며 저항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타이투스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는 로마로 끌려가 베스파시안, 타이투스, 도미티안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유명한 저술로는 마카비 시대부터 주후 73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일곱 권으로 기록된 「유다 전쟁사」(The Jewish War)와 유다인들의 기원으로부터 주후 66년의 전쟁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스무 권으로 기록된 「유다인들의 고대 역사」(Jewish Antiquities)가 있다.
I. 세계의 권력
A. 페르시아 왕국(주전 333년까지 지속됨)
1. 몇몇 외경이 기록됨.
2. 유다인들이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옴.
3.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됨.
4. 신정 정치, 제사장, 율법 체제.
B. 그리스 왕국(주전 333-167년)
1.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이김.
2. 알렉산더가 유다인들에게 자비를 베풂.
3. 유다인들이 흩어져서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임.
4.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왕국은 네 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됨.
5. 네 왕국과 그 통치자들은 다음과 같음.
a. 이집트 - 프톨레미
b. 시리아 - 셀루시드
c. 마케도니아 - 리시마쿠스
d. 소아시아 - 카산데르
*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은 서로를 대적하며 전쟁을 함.
6. 이집트와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땅을 놓고 전쟁을 벌였으며, 유다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 피난처를 찾기 시작함.
7. 소위 「70인역」이라 불리는 구약성경 역본의 전통에 따르면,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 필라데프스가 명령을 내려 70명의 유다인들에게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고 한다.
주의 사항: 사실 이 같은 전통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비의 「70인역」을 사용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현존하는 「70인역」 사본들은 한결같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다.
8. 그 당시 가장 많이 쓰인 언어는 다음과 같다.
a. 그리스어
b. 아람어(히브리 방언)
C. 마카비 시대(주전 167-63년)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주전 175-164년 사이에 시리아의 왕으로 통치함.
2. 그의 정책은 자신의 왕국 전체를 그리스화 시키는 것이었으며, 그의 정책에 반대한 유일한 그룹은 유다인들이었음.
3. 신실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형제인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유다인들을 그리스화 시키는 조건으로 자기를 대제사장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함.
4. 안티오쿠스가 칙령을 내리자 야손이 이를 유다인들에게 가져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a. 그의 왕국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같은 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함.
b. 유다인들의 축제, 안식일, 희생, 할례 등을 지키거나 행하는 것을 금함.
5. 이 같은 칙령의 위협으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 유다인들을 대적함.
6. 등록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중에는 요아립의 계통에서 나온 마타디아라는 이름의 나이 많은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와 및 그의 다섯 아들은 예루살렘 북쪽 산에 있는 자기 선조들의 영토로 들어갔음.
7. 안티오쿠스의 밀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이교도들의 제단에서 희생물을 바치라고 명령함.
a. 마타디아는 희생물을 바치려 한 배도한 제사장들을 즉각적으로 죽임.
b. 또 그는 왕의 사자들을 죽이고 가증한 제단을 무너뜨림.
8. 백성들은 마타디아의 지도를 받으며 대항하기 시작했고 반역의 세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많은 마타디아는 이 일이 있은 뒤 일년이 지나 죽었고, 그의 아들들이 그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함.
9. 그의 아들들은 마카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장남의 이름이 유다 마카비였기 때문이었음.
10. 10,000여 명의 유다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번씩이나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패주시킴; 한번은 50,000명, 또 한 번은 65,000명.
11.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5년에 다시 성전에서의 예배를 시작함.
12. 마카비들은 78년 동안 권력을 행사함.
D. 로마제국(주전63∼?)
1. 폼페이 대제가 주전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함.
2. 주전 40년에 로마인들은 헤롯 대왕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주전 37년에 유대 지방의 유일한 왕이 됨.
a. 헤롯은 에돔 사람임.
주의 사항: 에돔 족속은 페트라에서 내쫓김을 당해 남부 유대 지방에 정착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두매아(에돔)라고 불렀다. 이 에돔 족속은 그 뒤 50년이 지나 히르카누스에 의해 정복을 당해 할례를 강요받았고, 유다인들의 집회의식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다(신 23:7).
b. 창세기 27장 40절의 에언이 헤롯 대왕을 통해 이루어짐.
3. 헤롯 대왕은 주전 4∼5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남.
Ⅱ. 변화된 것과 새로 나온 것
신약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곧바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집단 등을 접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 400년의 '침묵기'에 생긴 것이다.
A. 제사장
1. 복음서에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옴.
2. 대제사장 혹은 수제사장이라는 단어가 84번 나옴.
3. 모세 당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장 직무의 기능은 종교적인 것이었음.
4.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인들의 시민권리는 제사장들의 손으로 넘어감.
B. 레위인
1. 사복음서에서 단 2번만 나옴 - 눅 10:32, 요 1:19.
C. 서기관
1.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2. 준비된 서기관은 모세 오경을 외움.
3. 아주 전통적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
4. 율법사라고도 일컬음을 받음.
D. 다스리는 자(치리자, 관원)
1. 여러 종류의 관리를 지칭함.
2. 용례 :
a. 연회장 - 요2:8,9
b. 산헤드린 공회 회원 - 요3:1
c. 주치리자 - 요12:42
d. 행정관 - 눅12:58
E. 바리새인
1. 이 명칭은 "분리된 자"라는 뜻임.
2. 기록된 율법을 옹호하며 지키는 사람들.
3. 보수적임.
4. 정통이었으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음.
F. 사두개인
1. 유다인들의 귀족으로 정치 집단임.
2. 종교적 측면에서 현대주의/자유주의자들임.
a. 영의 존재를 부인함.
b. 부활을 부인함.
c. 혼의 불멸을 부인함.
주의사항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에 생긴 그룹으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음.
G. 헤롯당원
1. 정치집단
2. 이 이름은 로마정부의 권세를 위임받은 헤롯에게서 유래됨.
3. 정치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함.
H. 갈리리 사람들
1. 이 집단은 북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나 모든 외국 세력에 대항했음.
2. 정치적으로 광적인 사람들임.
I. 사마리아 사람들
1.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다시 사람이 거하게 하도록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사이에 생긴 혼혈민족.
2. 아시리아의 에살하돈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제사장을 보내었으며 그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들은 주 하나님도 두려워 하고 동시에 자기들의 신에게도 경배를 드림.
3. 주전 535년, 두 번째 성전을 지을 때에 이들은 자기들도 이 일을 돕겠다고 했으나 유다인들이 이 같은 제안을 거부함.
4.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인 간에는 늘 적대심이 존재함.
J.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1.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번 나옴 - 요7:35 ; 약1:1 ; 벧전1:1.
2. 이 단어는 밖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포로 시절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서 돌아오지 않고 그 곳에서 남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그 규모가 작음.
K. 개종자
1. 원래는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을 뜻함.
L. 회당
1. 유다인들이 모이는 장소.
2. 이 기관의 유래는 바빌론 포로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감.
3. 성전 밖에서나 성전이 없는 경우에 유다인들은 작은 그룹으로 모였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자기들의 종교적 삶을 온전하게 유지함.
M. 「70인역」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하자.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유다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인의 유다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이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의 추측 연대는 대략 주전 250년 경인데, 이 시기는 주전 397년 구약 성경의 마감 시기와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주전 4-5년 경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간의 침묵기 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번역본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조하라는 압력이 오자 학자들은 급히 주후 200년 경 오리겐의 「육단 성경」(헥사플라, Hexapla)을 그 증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70인역」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이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두 번째 단은 오리겐 자신(결코 72인의 유다 학자의 번역이 아닌)이 그리스어로 구약을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벨과 용', '유디스서', '토비트서'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조차 포함시키고 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제5단에다 직접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려 들 것인데, 이런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인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여지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the Ryland's Papyrus, #458)인데, B.C.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제 「70인역」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2. 모든 유다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명기 17:18; 31:24,25,26과 말라기 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 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그런 금지된 계획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유다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법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언어 계승의 열심에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고자 하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이야기는 모순된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외경을 포함한 구약 성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자체에서 발견된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첫 번째 난제는,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12 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신학자들이 이같이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보고서도 이 거짓된 「70인역」을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슬프지만 아주 단순한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고,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의 공식 번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며, 단 번에 성경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킬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이다.
N. 산헤드린
1. 공회라고도 불림.
2. 공회는 모세가 구성한 70명의 상담자들에게서 유래됨.
3. 구성원은 다음과 같음 ;
a. 수제사장이나 24개 제사장 계열의 수장들.
b. 서기관이나 율법사.
c. 일반사람을 대표하는 장로들.
d. 공회에는 70명이나 72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고, 이들의 임기는 종신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됨.
2009-05-08 17:25:12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를 잘 알아야 하며, 이런 종류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3년간 사역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지역의 여러 지방, 산, 도시, 마을 등과 익숙해지는 것은 이 땅에 미친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과 그분의 사악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지리
Ⅰ. 이름
A. 그 땅 - 룻 1:1
B. 거룩한 땅 - 슥 2:12
C. 주의 땅 - 호 9:3
D. 영광스런 땅 - 단 11:16,41
E. 약속의 땅 - 히 11:9
F. 이스라엘 땅 - 삼상 13:19
G. 가나안 - 창 9:18
H. 팔레스타인 - 욜 3:4(가장 오래된 이름)
Ⅱ. 특징
A. 팔레스타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분의 사역 속에서 자신의 구속의 은혜를 계시하는 장소로 택하신 땅임.
B.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을 문자 그대로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루시며 기뻐하실 것임을 보여 줌.
Ⅲ. 크기(매우 작음)
A. 길이가 224km
B. 북쪽에서는 너비가 37km
C. 남쪽에서는 너비가 128km
D. 면적이 22,500km2
Ⅳ. 비옥함
이 땅은 그곳에 거하는 주민들의 필요를 모두 만족시키는 땅이었으며, 이처럼 비옥한 것은 강과 샘 그리고 적당한 강우 등으로 인함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또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이곳의 오렌지는 그레이프 프룻과 같으며 아주 달아서 그 껍질도 먹는다고 함.
A. 과일 : 올리브, 무화과, 오렌지, 살구, 석류, 포도
B. 나무 : 떡갈나무, 종려나무, 은매화나무, 백향목, 뽕나무, 호도나무
Ⅴ. 격리성
자연적인 장애물이 팔레스타인 땅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런 장애물은 이 땅을 격리시켜 그 주변의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이란 칭호를 부여받기도 했다. 이 땅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A. 동쪽: 사막, 요르단을 통과하는 언덕들, 요르단 계곡의 갈라진 틈
B. 서쪽: 지중해
C. 남쪽: 큰 광야
D. 북쪽: 레바논의 산들
Ⅵ. 중심성
위와 같이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위대한 민족들과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A. 남쪽의 이집트
B. 동쪽의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C. 북쪽의 그리스, 로마
Ⅶ. 지역 구분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이 다음과 같이 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
A. 북쪽의 갈릴리
B. 중앙의 사마리아
C. 남쪽의 유대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마을과 강과 산등에 대해서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이 구약시대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2009-05-08 17:24:16 | 관리자
교육에서 잃어버린 도구들
(Lost Tools of Learning)
저자 : Dorothy L. Sayers
역자 : 정동수
교육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교육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변명하기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사실 현세대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천주교 주교들이 경제학에 대해 논하거나 생물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논하며 무기화학자가 신학에 대해 논하는 등 어떤 주제에 대해 그리 관련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적인 것을 논하도록 임명을 받으며, 평범하고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엡스타인이나 피카소 등이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비판하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특히 온건한 비평과 함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활동들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너무나 전문성을 띄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된다. 따라서 진실한 아마추어가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전문교사는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다 한번씩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참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제 나는 소위 교육 혹은 가르침이라 불리는 주제에 대해 다룰 것을 제안한다. 내가 제안하는 교육개혁사항들이 앞으로 참고가 될지는 참으로 미지수이다. 부모나 교육대학이나 시험기관이나 주지사 회의나 교육부 등에서 잠시라도 이런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내용들이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육받은 사람들의 사회 곧 현대사회의 복잡한 압력 속에서도 자기들의 지적 자유를 보존하려 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진보의 수레바퀴를 400-500년 정도 뒤로 돌려 교육이 그 참된 목표를 잃어가기 시작한 시절 즉 중세암흑시대의 끝부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여러분이 반동주의자, 낭만주의자, 중세주의자 등과 같은 용어를 써 가면서 나를 흉보기 전에 나는 여러분이 내 모든 생각의 뒷면에 남아있는 한두 가지 부차적인 질문들 곧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근심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주십사고 부탁드린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질문들
튜도 왕조 때와 같이 젊은이들이 아주 어릴 때에 대학에 들어가고 그 이후로는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성숙한데도 지적으로는 어린아이나 사춘기 시대에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편안한 감을 느낄 수 하는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자꾸자꾸 뒤로 미루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학적 문제를 수반하며, 비록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어떤 흥미를 유발시킬지 모르지만, 개인이나 사회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들어가는 일을 늦추고 점점 더 교육의 기간을 늘이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된 이유는 중세에 비해 지금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현대의 소년 소녀들은 참으로 여러 과목을 배운다. 하지만 과연 이 사실이 그들이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뜻할까?
서구 유럽사회의 문맹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 시대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광고나 대중매체의 선전 영향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에 대하여 당신은 이상하게 느끼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혹은 신문방송 등이 보다 넓은 지역에 어떤 사실을 좀더 쉽게 선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기계적 사실로 인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현대 교육 방법에 인한 생산물 즉 현대 학생들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증명된 것과 가정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불안하게 의심하고 있는가?
당신은 혹시 어른들 혹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대부분이 질문의 요지도 파악하지 못하며 상대방의 논쟁의 요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함을 보고 초조하게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위원회 모임 등에서 참으로 별 것 아닌 문제들이 수없이 튀어나오며, 위원회 의장으로서 회의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고 또 동시에 우리의 공무의 대부분이 논의와 위원회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마음이 철렁하고 가라앉지는 않는가?
혹은 신문 등에 실린 논설에서 저자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주고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그 글에 대해 답변하면서 그 사람이 정의 내린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로 그 용어를 정의 내려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당신은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문장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가? 만일 그랬다면 당신이 괴로움을 느낀 것이 그 글이 우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글이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인가?
혹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떠나서는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것은 당연한 결과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정말로 그것에 대해 알았는지조차도 모르며 또한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푸는 것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또한 당신은 건전하고 학적이며 적절하게 문서로 입증된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분간 할 줄 모르는 수많은 남녀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도서관의 장서 목록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혹은 참고문헌을 주어도 거기에서 자기들이 찾고있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적당한 구절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또한 당신은 평생토록 어떤 과목을 그 과목 자체로만 인식한 채 다른 과목이나 주제하고는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수학의 대수와 탐정소설간의 관계나 혹은 하수처리와 연어의 가격 등의 관계,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과 경제학과의 관계나 화학과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하여 이 과목들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해 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몇 가지 예
당신은 종종 다 큰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기록한 글로 인하여 불만을 느낀 적이 없는가? 예를 들어 한 유명한 생물학자는 주간지에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사실 그는 이보다 더 강한 어조로 썼지만 불행히도 참고문헌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훨씬 약하게 그의 요점을 적은 것이다.) -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이와 똑같은 변이가 개나 고양이 등을 번식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다는 이 사실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읽고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논지는 이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논지가 증명하는 것은 이중 교배 등을 통한 염색체의 재결합 같은 어떤 물질적 원인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변종에 대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피아노의 열세개의 음반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소리나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서 아무렇게나 건반을 누를 때 내는 소리를 만드는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은 결코 베토벤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으며 증명하지 않지도 않는 것이다. 이 생물학자의 논지에 의해 증명된 것은 결국 그가 물질과 최종적인 원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문장은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임즈 문학 증보」(Times Literary Supplement)의 첫머리 기사보다 더 학적인 데서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에피나스(Alfred Epinas)는 개미나 말벌 같은 특정한 종들이 삶과 죽음의 두려움을 서로 연관 지으며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사실 그 프랑스 사람이 무어라 말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적은 영국 사람의 글을 따르자면, 그 프랑스 사람의 발언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개미에게 있어서 과연 삶이 어떤 두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도 없으며 나와 당신이 창문에서 손으로 꾹 눌러 죽이는 말벌이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지 맞이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 글의 주제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대중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의 동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주요 명제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어떤 예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 논지는 그 논지가 증명하려 한 것을 가정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이것이 좀더 형식을 갖춘 삼단논법으로 제시되었을 경우 즉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지적한 것은 많은 책을 파고드는 해악의 한 종류로서 특히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이나 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타임즈 문학 증보」의 같은 호에서 나온 다음의 예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잘 정리해 준다. 이번에는 리빙스톤경의 「교육을 위한 과제들」(Some Tasks for Education)의 논평에서 취한 것이다.
독자는 한번 이상 최소한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가치가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며 이로써 "지식의 의미"를 알게 되며 그것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정확성과 인내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해도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자기 이웃들 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괴로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지는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특히 마지막 문장 곧 저자가 "괴로운 사실"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설명을 주는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다시 말해 그 "괴로운 사실"은 우리의 교육을 통해 우리가 얻은 지적 기능 혹은 기술이 우리가 그런 기술을 습득한 그 과목 혹은 주제 이외의 다른 과목이나 주제에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가를 전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예술
오늘날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 곧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의 모든 불안한 현상을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는 문제점은, 곧 우리가 학생들에게 어떤 주제나 과목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잘하지만 그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배워도 유독 교육 혹은 학문의 예술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먹구구식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학생에게 "금발의 제니"같은 유명한 곡을 치는 것은 가르치지만 음보를 읽는 것이나 스케일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학생은 "금발의 제니"를 다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떠나서 또 다른 "스와니강"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비유를 들은 것일까? 예술이나 공예 같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학생이나 아이에게 색깔이나 붓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기술자는 결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새로운 소재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자기의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을 배웠고 올바른 목적으로 물건을 취하는 것을 배웠으므로 어떻게 하면 바른 도구를 사용할까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새로운 소재를 놓고 두들겨보며 감을 잡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세시대의 교육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즉 학교들의 교수방법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혹은 나이가 든 학생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하는 것은 당분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습득해야 하는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중세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여 올바른 교육 과정이 어떤 것인가를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중세 교육과정
중세 교육 과정은 트리비움(Trivium)과 콰드라비움(Quadravium)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콰드라비움은 여러 가지 과목으로 이루어졌고 당분간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주제이다. 우리가 흥미 있게 살펴 보려는 것은 트리비움의 구성요소인데 이 트리비움은 콰드라비움에 들어가기 전의 과정으로 콰드라비움을 택하기 위한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여기에는 문법, 변증, 수사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먼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런 과목들 가운데 최소한 두 개는 실제로 과목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문법은 실제로 말을 배우는 것이므로 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물론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말이라는 것은 생각을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트리비움은 한 마디로 학생들이 학문의 도구들을 어떤 과목에 적용하기에 앞서 그런 도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먼저 학생은 말을 배우되 외국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의 구조 혹은 말 그 자체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모으는 방법과 말이 이루어진 방법을 배웠다. 그 다음에 학생은 말을 사용하는 방법과 자기의 용어를 정의 내리는 방법과 정확하게 진술하는 방법과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과 어떤 논지의 허점을 찾아내는 방법 (학생 자신의 논지든 혹은 다른 사람의 논지든)을 배웠다. 변증학은 곧 논리와 반박을 포함했다. 세 번째로 학생은 말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결국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우아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과정이 끝난 뒤에 그는 자기 스승이나 혹은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 논문을 작성하여 교수진의 비평에 대응하여 자기를 방어하는 것을 배워야했다. 이때쯤 되면 그는 글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단에서 큰소리로 지적으로 말하며 질문 공세를 받을 때 곧장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큰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이미 혹독한 논증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강력하며 힘든 질문들을 하곤 했다.
중세 교육 전통의 일부가 아직도 우리 학교 시스템에 남아 있거나 부활되고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문법 지식이 여전히 필요하며 나는 "그것이 반드시 다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우리는 명사, 동사 등의 어형 변화를 가르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그런 단계를 거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하나씩 하나씩 알면 된다고 배웠다. 학교의 토론 단체들이 붐을 이루었고 에세이를 써야만 했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너무 그것만을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대개 주요 과목들과 분리되어 이루어졌으며, 어떤 특별한 과목에 대해서만 그것도 비둘기장의 구멍처럼 조그만 일부분으로 취급되었고 모든 과목들에 영향을 미치는 지적 훈련 과정의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체계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문법은 특히 외국어 과목에만 속하게 되었고 에세이 쓰는 것은 영어 과목에만 한정되었다. 한편 변증은 교과 과정 전체에서 삭제되어 아무런 체계도 없이 정규학교 시간 이외에 과외 활동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학문을 배우는 것과는 거의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 교육과 중세 교육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 교육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각하고 논평하고 결론을 내리는 방법 등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체득하게 하고 있다; 반면에 중세 교육은 먼저 학문의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연마하고 배우는데 강조점을 두었으며 어떤 과목을 사용해서 이를 가르치든지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학생의 제2본성이 되기까지 가르쳤다.
물론 학문에서 어떤 종류의 과목이 있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실제의 말을 배우지 않고서는 문법이론을 배울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논쟁하거나 토론할 수 없다. 중세의 토론 주제는 대개 신학이나 혹은 고대의 윤리와 역사였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이런 주제들이 너무 닳고닳아 - 특히 중세 말에는 더욱 심각했음 - 학자들의 터무니없는 논증이나 논지 등이 밀톤과 같은 사람을 부추겨서 심지어 오늘날에까지도 즐거움을 주는 글을 쓰게 했다. 이런 주제들이 현대 학생들의 에세이 쓰기 주제보다 더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휴가의 여러 날 중 하루를 지겹게 여기게 되었고 그 결과 나머지 날들도 다 지겹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상 교육의 즐거움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토론 주제의 목표와 목적을 이제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늘 위의 천사들
브레인즈 신용회사 즉 두뇌 신용회사의 입심 좋은 한 연사는 중세의 경우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장이 춤을 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사실 그것이 "믿음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토론 시합이었고 그 주제는 천사들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천사들이 사람과 같이 물질적 존재였다면 과연 그들이 어떤 공간을 차지했을까? 내가 믿기로는, 대개 사람들이 옳다고 판단한 대답은 천사들은 순수한 지적 존재로 물질적 요소는 없되 제한적이어서 공간상의 어떤 위치를 가질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이며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이 바늘 끝과 같은 어떤 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면 생각 그 자체가 거기에 있으므로 어떤 점에서 생각은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거기에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바늘구멍과 같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지의 합당한 주제는 공간상에서의 위치와 공간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피나 거리간의 구분인 것이다. 이 논지를 논하는 주제는 천사의 본질이며 (물론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사실 주제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이 논지에서 얻어내려는 실질적인 교훈은 당신이 "거기에"라는 단어를 "거기에 위치해 있냐?" 혹은 "거기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냐?" 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비과학적으로 느슨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세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려는 열정을 보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조소했다. 그러나 책이나 강단에서 애매모호하며 주제를 흐리게 만드는 함축적인 말들을 담은 논쟁거리 표현들이 뻔뻔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속에서 모든 독자나 청취자가 자기의 교육을 통해 철저히 무장되어 그들에게 "분별하라"고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무장해제
이처럼 갑옷이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전혀 무장하지 않는 채 학교 밖으로 나가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읽을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인쇄되어 나온 말들의 손아귀에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맡기고 있다. 영화와 라디오 등의 발명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들의 폭격에서 그들을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실제로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들을 물리치거나 세력을 약하게 하거나 혹은 되받아 치는 것을 알지 못한다. 1940년에 우리는 군사들에게 단지 총만을 주고 무장한 탱크들과 싸우라고 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젊은 남녀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겉핥기 식으로 가르쳐주고 세상에 나가서 대중매체의 공격에 대응하여 싸우라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 지금 모든 교실에서 모든 민족들이 웅변가의 기교에 빠져 최면에 걸렸는데도 우리는 놀랄 만큼 뻔뻔스럽다. 우리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늘 입으로만 말하고 가끔씩 돈을 기부하기도 하며 학교를 떠나는 일을 자꾸 늦추고 크고 더 좋은 학교를 지으려 하여 교사들을 학교의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에도 혹사시키고 있다. 그런데 내가 믿기로는 이런 모든 노력이 대개 다 실패로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육의 도구들을 잃어 버렸고 그 대신에 조금씩 임기웅변 식 누더기질로 교육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물론 중세로 되돌아 갈 수 없다.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우리에게 익숙한 외침이다. 과연 우리가 되돌아 갈 수 없는가? 아니면 돌아갈 수 있는가? 분별하기 바란다. 나는 위의 명제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정의 내리기 원한다. "돌아간다"는 말은 시간상으로 뒤로 간다는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수정한다는 것인가? 우선 첫 번째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두 번째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일 행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세기가 결코 14세기도 아니며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말한 "중세"가 문맥상에서 단지 어떤 교육 이론을 보여주는 구절로 이해된다면 우리가 이미 돌아갔던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며 물론 여기에도 조금 수정할 것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정할 것이 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연극들을 기록한 것 같이 그의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지, 결코 연극 진보 과정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 여겨져서 추앙을 받는 키버와 가릭의 현대판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이 일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해 보자. 또 우리가 교육 권세를 잡은 모든 단체나 인물 등을 싹 쓸어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년 소녀들을 예비하여 조그만 학교로 들이고 실험적으로 그들에게 앞으로 맞게 될 지적 갈등을 이겨 나가게 교육시켜 보자.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유순한 부모들을 허락하고, 트리비움의 목적과 교육방법들을 잘 알고 있는 교사들로 학교를 채우고, 학생들을 적당한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건물과 교사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또한 시험 위원회가 우리가 키우는 학생들을 입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자. 이처럼 예비한 후에 우리는 수정된 현대판 트리비움이라는 교과과정을 시험하고 과연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살펴 보려한다.
먼저 학생들의 연령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이들을 색다른 차원에서 교육시키려 한다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고쳐서 다시 새로이 배울 것이 없는 상태가 좋을 것이다. 또한 좋은 것은 일찍 배울수록 좋은 것이다. 트리비움은 그 성격상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교육을 위한 예비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택하되 오직 그들이 읽고, 쓰고, 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만 요구할 것이다.
세 연령층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내 견해는 정통 견해도 아니며 어떤 면에서 개화된 견해도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내 자신을 살려보건대 (사실 나야말로 내가 가장 잘 아는 아이이며 나야말로 내 속에서부터 정말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나는 아이들의 성장에 세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단계를 좀 거칠긴 하지만 앵무새, 까불이, 시인의 세 단계로 부르고자 하는데 이 시인의 단계는 대개 사춘기가 시작되는 점이라 보면 되겠다.
앵무새 단계는 암기하는 것이 아주 쉬우며 대개 즐거운 단계이다. 반면에 추론하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대개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쉽게 사물의 형태나 모습을 외우고, 자동차 번호판을 암기하며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긴 단어나 리듬 등을 중얼거리고 외치며 여러 가지를 모은다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바로 그 뒤에 오는 까불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논쟁하고, 대꾸하며, 자기보다 윗사람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 하고, 수수께끼를 잘 해석하곤 한다. 또한 남에게 방해를 주는 정도가 매우 심한데 대개 이 단계는 중학교 2학년 즈음에 수그러든다. 시인의 단계는 대개 다루기 어려운 나이로 더 잘려져 있다. 이 때에 학생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나타내려 하고 남에게 오해받았다고 느끼며 불안해하며 독립하려 하고, 행운과 함께 좋은 지도가 뒷받침되면 창조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종합하려 하며 어떤 것을 알고자 노력하며 어떤 한가지를 다른 것보다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트리비움의 구성 그 자체는 이런 세 가지 나이 그룹에 그대로 적용된다: 문법은 앵무새 단계에서, 변증은 까불이 단계에서, 수사학은 시인의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제 먼저 문법부터 시작해 보자. 사실 문법은 특히 어떤 특정 언어의 문법을 의미하는데 이 언어는 굴절언어 이어야 한다. 비굴절 언어의 문법구조는 너무 분석적이어서 변증과정을 거치지 않는 학생이 다루기는 너무 어렵다. 또한 굴절 언어는 비굴절 언어를 해석할 수 있지만 비굴절 언어는 굴절 언어를 해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즉각적으로 교육을 위한 최상의 기초가 라틴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라틴어가 전통적 언어이고 중세 언어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에 대한 초보지식만 있어도 다른 어떤 과목을 배울 때 필요한 노력과 수고를 50%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라틴어는 모든 로만스 언어와 튜톤 언어의 어휘와 구조에 핵심이 되며 동시에 모든 과학 분야의 기술 어휘와 지중해 문명 문학 및 이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핵심이 된다. 살아있는 말을 공부해야 한다는 학자적 관점으로 인하여 학생들에게서 라틴어의 이런 장점들을 빼앗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러시아말을 선택해도 되는데 러시아말은 라틴어보다 더 원시적이다. 물론 러시아말은 다른 슬라브족들의 방언들과 함께 유익하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라틴어를 좋아한다. 이제 여러분 중의 고전파들을 즐겁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일반 학생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신고전주의 시대의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듯한, 아주 교묘하고 인위적인 형태의 웅변이나 구절 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 현명한 일도 아니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려 한다. 물론 이에 대해 고전파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라틴어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다시 말해 굴절 언어가 이 놀라운 세상에서 그리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하는 때 즉 "아모, 아마스, 아맛"하고 흥얼거리는 것이 "이니 미니 마이니 모"하고 흥얼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좋다는 것이다.
이런 나이에 우리는 물론 라틴 문법 이외의 다른 것들도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보고 기억하는 것이 아주 활발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현대 외국어를 배우려면 이 때 곧 얼굴과 생각의 근육이 이상한 억양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라틴어 문법과 함께 프랑스어나 독일어 회화를 함께 연습하는 것도 좋다.
기억력을 이용하라
영어의 구절과 산문은 쉽게 외울 수 있으며 학생의 기억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 즉 고대 신화, 유럽의 전설 등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간다. 나는 고전적인 이야기나 고대 문학 작품을 문법 기교를 연습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속할 필요가 없는 중세 교육의 잘못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어로 즐기고 기억하면 되고 그 후에 그들의 기원 등을 살펴보면 된다. 크게 암송하는 것은 늘 연습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나 함께 코러스로 하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변론과 수사학에 대한 기초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입문은 시간과 사건과 일화와 인물 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학생이 나중에 배울 역사 지식에 사용할 수 있는 연도 등을 쉽게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서 실로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어떤 연대나 연도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국 왕들의 연대기 등이 그 당시 의복과 건축과 기타 다른 일상용품 등과 함께 제시되고 그런 것들을 외움으로써 그 당시 연도만을 대도 그 시대를 그림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지리 역시 여러 사실과 지도와 지형적 특징과 관습, 의복, 식물, 동물 등의 자료와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몇몇 나라의 수도와 강과 산 바다 등을 외우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 또한 우표를 수집하는 것도 권장하고 싶다.
앵무새 단계에서 과학은 저절로 이루어지며 특히 무엇인가를 수집하면서 샘플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고 하는 것을 통해 쉽게 이루어진다. 대개 "자연 역사" 혹은 "자연 철학"이라는 자체가 과학인 것이다. 이 나이 또래에서는 사물의 이름과 특성 등을 아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운 것이며, 마귀의 수레를 끄는 말을 보고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비록 모습은 그래도 그 말이 침을 쏘지는 않음을 확신시켜주며, 카시오피아와 플레이아데스 별자리를 구분하며,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고 박쥐는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등이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주며, 독사와 독사가 아닌 뱀을 구분하고 독버섯과 독이 없는 버섯 등을 구분하는 것 또한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수학 입문은 구구단 표와 함께 시작되는데 사실 구구단을 이때 외우지 않으면 나중에는 즐겁게 외울 수 없다. 또한 이 때에는 기하학적 형태나 숫자를 모으는 것 등도 배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연히 간단한 덧셈에 이르게 하고 학생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면 그 때까지 성취한 모든 재주는 좋은 것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제 곧 보여 줄 이유들 때문에 이보다 더 어려운 수학 과정은 추후에 배우는 것으로 연기되어야 할 것이다.
(라틴어 공부를 빼고는) 지금까지의 교과과정이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마도 그 차이는 교사들의 태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교사들은 이 모든 것을 개별 과목으로 보지 말고 트리비움의 다음 단계를 위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재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외워서 기억에 넣어야 할 모든 것을, 그것들이 지성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바로 이 시기에 외워서 기억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판 교육의 경향은 너무 어릴 때에 아이들의 생각 속에 합리적인 설명을 집어넣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성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기들이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이런 일들이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거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거나 다어휘 소리를 내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과학: 여왕
이것은 신학 입문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이것 역시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 이유는 신학이야말로 과학의 여왕으로 이것이 없이는 전체 교육과정이 최종적인 합성 과정을 잃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학생들의 교육을 합당한 목표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는 덜 중요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교육의 도구들이 강화될 무렵에 다다르게 되면 학생이 스스로 신학을 다루게 되고 아마도 그렇게 하려고 주장하며 그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문제는 이유 있게 다루기 위하여 늘 준비된 상태로 지니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입문/문법을 배우는 나이에 학생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잘 알아야 하며 다시 말해 사람의 창조, 타락, 구속 등의 이야기를 열거한 신구약 성경과 신조, 주기도문, 십계명 등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정말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수준으로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익숙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어떤 나이에 트리비움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할 지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다. 학생이 민첩함을 보이고 계속해서 논쟁을 하고자 할 때 옮기면 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중요한 기능이 관찰과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중요한 기능이 광범위한 판단력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라틴어 문법이 기타 다른 모든 재료의 핵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단계에서는 형식적 논리가 핵심사항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트리비움 교과 과정은 현대 표준과 크게 다르다. 형식적 논리에 대한 나쁜 평판은 전적으로 옳지 않으며 사실 이것을 무시한 결과 현대 지성인에게서 늘 볼 수 있는 현상, 즉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형식적 논리를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증명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공통적인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통적인 전제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설령 공통적인 전제들이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A는 B다"라는 모든 삼단 논법이 다른 형태의 가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라는 것은 정확하게 논쟁하는 기술로 "A는 B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A의 추론적 성격에 의해 무효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 참으로 오늘날 형식적 논리의 실제적 가치는 어떤 긍정적인 결론을 확립하는데 있다기보다는 유효하지 못한 추론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알리는데 있다 할 것이다.
변증과의 관계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재료들을 신속히 점검하고 과연 이것이 변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려보아야 한다. 언어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어휘와 어형론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문장론과 분석론 즉 말할 때의 논리적 구성요소와 언어 발달 즉 우리가 사상을 전하려 할 때 어떻게 우리의 말을 정리하는가에 대한 것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낭독은 에세이와 논리와 비평 등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에서부터 시작되며 학생은 이런 종류의 것들을 쓰기 위해 손을 놀리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지 많은 수업이 변론의 형태를 띄게 될 것이며 개인적으로 혹은 그룹으로 낭송하는 일 대신에 연극을 하되 특별히 논지가 연극의 형태로 되어 있는 연극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수학 - 대수, 기하 및 좀 더 차원 높은 연산학 등이 이제 교과과정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되 개별적인 과목이 아니라 논리의 하부 과정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수학은 이것을 수나 계량등에 적용할 때에 삼단 논법 법칙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어둠에 가려진 신비나 혹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특별한 계시 등이 아닌 것으로 가르쳐야 하며 또한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주제로 가르쳐서는 결코 안 된다.
역사는 신학 입문에서 나온 간단한 윤리체계의 도움을 받아 논의에 필요한 합당한 재료를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 정치가의 행동은 옳은가? 그런 법의 제정이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런 형태의 정부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헌법역사개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 주제는 사실 나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논증하거나 변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신학 그 자체도 행동과 윤리 등에 대해 논할 재료를 제공하므로 간단한 교리 신학(즉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이성적 구조)을 통해 그 내용을 확장시켜야 하며, 교리와 윤리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윤리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 즉 결의론이라 할 수 있는 것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지리학이나 과학 등도 이와 마찬가지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무엇보다도 우리는 학생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레슬리 폴이 지은 「산울타리」라는 책에는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자기들의 도시에 내린 아주 이상한 비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여러 소년이 논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참으로 이상해서 그 도시의 주도로의 반에만 내려 그쪽만 적시고 나머지 반은 적시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이 날 비가 도시 위에 혹은 도시 너머에 혹은 도시 안에 내렸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비가 되려면 도대체 물방울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등등. 이에 대한 논쟁은 그와 비슷한 문제들, 예를 들어 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 자는 것과 걷는 것, 시간을 무한히 작게 나누는 것 등등으로 아이들은 이끌고 갔다. 그 책의 그 부분은 사람의 추리 능력을 순간적으로 개발하는 것과 용어들의 정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는 이성을 향한 당연하고도 합당한 갈증 등에 대한 아주 풍성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건이 사실상 이런 것에 대한 입맛을 충족시키는 재료가 된다.
심판의 결정: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이들은 대개 나면서부터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결의론자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천부적 경향은 계속해서 개발시키고 훈련시켜야 하며 특히 어른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지적인 관계를 갖게 해야한다. 사실 신문에는 이런 것을 위한 재료가 수없이 많다. 근본 이유가 너무 난해하지 않은 법적 결정들, 누구라도 쉽게 그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이름 있는 통신 칼럼 등 아주 많이 들어있는 잘못된 추론과 얼빠진 논쟁 등.
"까불이 나이"의 비판
어디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든지 간에 우리는 훌륭한 예나 혹은 잘 이루어진 논지의 아름다움과 질서 등에 큰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흠모할 만한 것이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판 혹은 비평은 반드시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것을 통해 교사와 학생은 동시에 잘못된 것, 바르지 못한 추론, 애매 모호한 것, 적합하지 않은 것, 중복되는 것 등을 발견할 태세를 갖추고 쥐에게 달려들 듯이 이런 결함들에게 달려들어 이것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확하게 글을 쓰는 것이 유용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에세이를 쓴 뒤에 그것을 25∼50% 줄이는 연습 등을 수행하게 된다.
까불이 나이에 속한 어린아이들에게 어른들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변증을 하라고 권면하게 되면 그 아이들이 너무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귀찮은 아이들이 될 것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 나이의 어린아이들은 그냥 두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논쟁하려 하는 것을 잘 살려 좋은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런 본능을 모래바닥에 던져버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면 집에서는 덜 눈에 거슬릴 것이다. 어쨌든지 아이들은 봐주면 되는 것이지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건전한 원리를 저버린 어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단계에서의 교육 과정 내용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과목들은 재료를 제공하지만 이것은 제분소 기계에서 처리해야 할 제분용 곡식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도서관과 참고서적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한 어떤 자료들이 권위가 있고 어떤 것을 권위가 없는가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상력
이 단계의 끝 부분에 다다르면 학생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며 자기들이 훈련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소화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까불이 나이에 잠복되어 있는 상상력은 그들을 다시 일깨워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의심해 보게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시인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제 수사학을 공부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식 창고의 문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배웠던 것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될 것이고 무미건조하게 분석한 것들을 모아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얻는 통찰력이 모든 발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들은 곧 공리가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사학 공부
수사학 공부에 대한 교과 과정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있어야만 이 일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다시 한번 감상하는 일이 파괴적인 비평을 앞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예리하게 잘 다듬어져서 깨끗하게 자르며 양을 살펴볼 수 있는 도구들과 함께 앞으로 전진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도구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바르게 제대로 익힌 학생이라면 그 도구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각각의 학생이 한 두 과목은 정말로 잘하고 다른 부수 과목을 들음으로써 마음을 넓혀서 모든 지식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여러 과목을 분리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변증에서는 모든 종류의 학문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을 가르쳤지만 이제 수사학에서 모든 지식이 결국 하나임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이것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여왕인 과학인의 역할이다. 학생이 신학을 공부했든지 공부하지 않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최소한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려는 아이들이 반드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반대로 수학이나 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임무를 수행한 라틴어 문법은 현대어를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이 듣지 않아도 된다. 또한 수학을 사용하거나 관심이 아예 없는 학생들도 이 시점에서 그만두게 해도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은 다 뒤로 물러가게 해도 되며, 훈련받은 지성을 예비시켜 학생이 트리비움을 다 마쳤을 때에 스스로 완전히 해결해야 하는 과목들을 전공하게 해야 한다. 트리비움의 최종 과정 즉 논문의 준비와 발표는 어떤 특정한 형태로 회복되어야 하며 아마도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에 치르는 최종 시험으로 대치하면 좋을 것이다.
수사학의 범위는 학생이 16세에 이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대학에 들어갈 것인가에 따라 따르게 된다. 대개 수사학을 14세 정도에 들어야 하므로 우수한 학생들은 9세에서 11세에 문법을 배우고 12세에서 14세까지 변증을 배우고 나머지 2년은 수사학에 전념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수사학은 전문화되고 직업화된 것으로서 학생이 곧장 실질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범주의 학생들은 예비학교에서 변증 수업을 끝내고 공립학교에서 첫 2년 동안 수사학을 택한다. 16세에 그는 대학에서 공부할 과목들을 접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그의 교육은 중세의 콰드리비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16세에 정규교육을 끝내는 학생들은 트리비움만을 택하고 학자가 되려는 학생들은 트리비움과 콰드리비움을 둘 다 택함을 의미한다.
16세에 대학을 보내도 되는가?
그렇다면 트리비움만으로도 평생 동안의 교육이 될 수 있는가?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변증 교육의 끝부분에 이르면 아이들이 어떤 특정한 과목의 상세한 지식에 관한 한 영국에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현대 방식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보다 떨어지게 보일 것이다. 그
2009-05-08 17:22:38 | 관리자
요즘 교회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록 밴드 없는 교회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과연 밴드가 예배에 필요할까요? 말씀이 없으니 이제는 교회에 워십댄스, 록 음악, 각종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옥성호 형제의 찬양에 대한 고민을 다룬 글입니다. 크리스천들이, 특히 자녀들을 둔 크리스천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른 예배가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독자와 독자의 아이들을 위해 이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찬양에 대한 고민(부흥과 개역사 사이트에서 어는 분이 보내 줌) *****
최근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회장이신 김명혁 목사님께서는 한 강연회에서 한국 교회를 좀 먹는 세 가지 병폐를 지적하시면서 그 중의 한 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먼저 김 목사는 “영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라며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는 것은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라고 꼬집었다.http://newspower.co.kr/sub_read.html?uid=11565§ion=sc4§ion2=
저는 며칠 전 갓피플에서 ‘왕의 기도’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손기철 장로님의 온누리 교회 월요 치유 집회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그 집회 내용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각설하고 그 집회에서 제가 두드러지게 느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음악을 통한 교묘한 감정적 흥분 상태의 조장이었습니다. 과거의 각종 부흥회가 보다 시끄러운 음악을 통해 참석자의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치중했다면 손 장로님의 집회는 한 마디로 ‘발라드’를 이용한 무드 조성에 힘을 쓴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그 분이 소위 말하는 “입신 또는 서 있는 사람 괜히 뒤로 넘어뜨리기....영어로는 slain by the spirit”를 할 때 자주 쓰는 구호는 “더, 더, 더, 더, 터어치~~” 입니다. 이 구호 역시 촌스러운 부흥사들이 목소리를 변조해 무식하게 고함지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부드럽고 세련되기만 합니다. 손 장로님의 이런 ‘괜히 넘어뜨리기’에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가 바로 무대에 도열해 백 뮤직을 부르는 젊은 여성분들입니다. 이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스펠 발라드를 쉬지 않고 부릅니다. 이들이 없는 집회 현장...글쎄요, 과연 몇 명이나 괜히 뒤로 넘어질지 모르겠습니다.저는 얼마 전 10여 년 동안 찬양 사역에 헌신했던 한 형제와의 교제를 통해서 ‘디사이플즈’라는 그룹과 그 그룹의 리더인 천관웅 목사님이라는 분이 얼마나 특히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 목사님은 최근 New Sound church라는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천 목사님의 ‘새로운 소리 교회’는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내용으로 채운 홈페이지를 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홈페이지에서 가장 최근 예배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약 2시간 반에 육박하는 주일 예배는 거의 대부분이 음악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의 구성은 적절한 발라드와 락이 혼재된.....한 마디로 잘 조화된 한편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천 목사님의 주장 그대로...Radical Worship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오늘날 청소년들은 음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이제 음악과 이미지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라고 말하고 진리를 ‘알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분명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힘든 가르침대신 보다 쉬운 ‘노래 운동’으로 그 방향을 하루가 다르게 더 급진적으로 전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소요되는 긴 시간을 참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래만 좀 말빨 확실한 사람 한 두 명 무대 위에 세우고 확실하게 불러 제끼면 바로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그 힘든 길을 가겠습니까? 어쩌면 예수님도 제자들 데리고 어려운 비유들 얘기하시는 대신 매일 음악 집회를 했으면 그들이 훨씬 더 빨리 변화되었을지도 모르지요.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지금 이 중고등학생들, 나아가 대학생들을 포기하는 순간....여기서 제가 말하는 ‘포기’란 말씀보다는 음악으로 그들을 감동시키는데 승부를 걸겠다는 모든 시도를 말합니다.....우리 교회의 10년 후는 더 이상 ‘의미’에 의한 메시지가 아닌 ‘멜로디’에 의한 메시지가 지배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고 깨달으라는 성경 말씀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교회들이 기독교인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화’, 교회의 ‘열린 음악회화’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호소하고 싶습니다. 제발 노래 못하고 목소리 별로 좋지 않는 목회자들이라도 함께 힘을 뭉쳐서 이 노래 운동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아니 드럼치고 난리 법석을 떨면 그 현장을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기막힌 코메디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일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주 아주 어릴 때 지금은 사라진 TBC라는 방송국에서 “쑈쑈쑈”라는 프로를 방영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처음 가수와 그 가수 뒤에 서 있는 여러 명의 백 뮤지션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가수가 빛나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받쳐주는지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웬만한 교회만 가면 이런 “쇼쇼쑈”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예배’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예배, 역동적인 예배, 영감이 넘치는 예배’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서 말입니다. 저는 전교인의 ‘노찿사화’와 전교회의 ‘열린 음악회화’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 천 목사님의 New Sound Church으 태동은 하나의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만약에 이 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급속하게 성장한다면???조만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Ultra Sound ChurchMega Sound ChurchNew Sound Community ChurchReal Sound ChurchThe Church of Beat and Sound판소리 장로 교회 등등....그리고 그 중 어떤 교회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할지도 모르지요.“우리는 찬양으로 설교하고 찬양으로 기도합니다. 찬양으로 시작해 찬양으로 끝나는 천상의 예배가 있는 곳, 내 영혼이 천상을 뛰놀도록 예배드리는 곳...당신이 꿈꿔온 바로 그 예배가 있는 곳이 바로 XXX 교회입니다.참고로, 우리 교회는 프랜차이즈로 운영될 형제 자매 교회를 모집합니다. 교회 이름을 XXX 교회로 바꾸고 가맹비와 매월 로얄티를 내시면 전문적으로 훈련된 찬양팀이 투입되어 한 달 안에 교인 수를 30% 이상 증가시켜 드립니다."2008년 5월의 한국 교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09-05-08 17:20:26 | 관리자
음악에 부쳐
글·김희섭_동국대 일산병원 소아과. 서울제일침례교회. E-mail:kimhesp@yahoo.co.kr
최근 어떤 가수가 몸매를 자랑하며 노래를 한다고 하여 선정성 논란이 있었다. 원래 음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것으로 신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지만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음악을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바하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음악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
흔히들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하 이후의 음악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데 필자는 특히 바하가 영을 움직이는 수단으로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어느 음악가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을 한다.
필자는 20년 전쯤에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샀던 적이 있었다. 파블로 카잘스는 자신이 이 곡을 악보점에서 발견한 후 수년간 연습을 하고 발표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연주는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최고의 연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음반을 산 후 며칠간 듣지 않다가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일어나 우연히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이 음악을 듣는 순간 이 우주의 신비함과 역동성에 대한 영혼의 깊은 느낌을 바하는 어쩌면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며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박봉에 오디오도 집에 없을 때) 차를 몰고 저녁 늦게 야외에 나가 별을 보며 이 무반주 조곡을 듣곤 하였다.
바하의 음악은 현대와 같이 악기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시대의 곡임에도 내적인 영혼의 표현력에서는 어느 음악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브란덴부르그 협주곡, 하프시코드 협주곡에서의 인간이 가지는 내면의 힘은 어쩌면 더 이상의 악기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이다. 실제 무반주 첼로조곡과 무반주 바이올린 곡은 한 악기로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악기 종류와 수가 많아지고 기능이 향상이 되었어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의 상태이다(잠4:23). 따라서 영에 호소하는 음악을 작곡한 바하가 아직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베토벤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한 작곡가이다. 난청과 가난 그리고 사회적 냉대를 인간의 의지로 극복한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어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운명 교향곡은 바로 그런 면을 나타내주는 베토벤의 대표적 음악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그런 반면 교향곡 6번은 인간의 내면적 평화를 찾는, 즉 괴로운 이 세상에서 안식과 평안을 구하는 음악이다. 말년의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작곡인 현악 사중주에서 그의 내적 편지를 썼고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추구하기까지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베토벤을 나타내는 결정적 음악은 9번 교향곡 합창의 3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토벤이 생각하는) 천국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다다르고 싶고, 얻고 싶은 그 어떤 곳을 나타내주고 있다. 아마도 베토벤의 말년의 모습을 여기서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4악장에서는 인류애를 표현했는데 그가 사용한 시는 인본주의 시인 쉴레의 시로서 도입부는 앞 악장들에서와 달리 좀 더 기쁨의 노래를 하자고 하면서 합창이 시작된다.
바하가 영에 호소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다면 베토벤은 인간의 혼을 울리는 곡을 만들었다. 바하의 음악은 별을 보면서 들을 수 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그러기에는 영의 깊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두 작곡가 모두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바하에게는 영의 고향, 베토벤에게는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과 평화)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요, 또 우리 모두가 바라보아야 할 본향은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신약의 예수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바라보았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히11:14).
두 위대한 작곡가는 그 본향을 바랬으나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인본주의 시각으로 접근을 하여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바하와 베토벤에게 인간의 원초적 문제를 다루는 수단은 음악이었다. 비단 이들과 같은 음악의 거성들뿐 아니라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나름대로 영적인 감흥을 얻어왔기 때문에 음악이 꾸준히 사랑을 받고 또 음악 자체가 하나의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게도 되는 것이리라.
이후 음악은 그 수준이 더 내려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락을 하고 만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의미를 붙여 낭만주의라고 부르게 된다. 슈만, 쇼팽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 상류사회의 살롱문화에 의해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도 나온다. 이때쯤 되어서는 더 이상 영과 혼에 호소하는 음악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만다.
20세기에 와서는 재즈가 나오고 급기야는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대중가수가 나오며 우리의 육에 직접 호소하는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갖가지 락 음악이 나오게 된다. 현재에는 이것에 더해 자기 몸을 사용한 음악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고 있다. 단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것이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음악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음악을 영에서 혼 그리고 육으로 끌어내려 사람이 더 이상 영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작곡가만 그러한가? 필자는 10여 년 전에 요요마가 연주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 판을 사서 연주를 들어보았다. 듣는 순간 어떻게 이 곡을 감각에만 호소하게 연주할 수 있을까 하며 너무 실망을 한 나머지 언젠가 요요마를 만나면 판을 산 돈을 물어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중에 뉴에이지 음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바로 요요마가 뉴에이지 음악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필자는 실제 그가 그렇게 불리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뉴에이져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비단 요요마뿐 아니라 현재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뉴에이져이기 때문에 필자는 1980년 전의 연주가의 음악을 주로 듣는다.
그러면 연주자만 그러한가? 필자는 약 25년 전에 선배로부터 매우 싼 가격에 구입한 오디오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앰프는 영국제 쿼드이고 스피커는 같은 영국제 탄노이다. 기본적으로 현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음질이다. 앰프가 오래되어 수리를 자주 하게 되는데 수리할 때마다 전문가에게 신형 오디오는 어떠한지 물어보면 신형은 음이 강하고 현대적이나 깊은 맛이 없고 쉽게 피곤해지니 바꾸지 말라는 권유를 받는다.
최근의 오디오는 주로 외적이고 감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음반도 LP에서 CD, 그리고 요즈음은 MP3 등 모두 디지털로 옮아간 지가 오래된다. 그러나 음반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옮아가면서 그 질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 음이 좋은 음반은 1960년대 것이 많다. 필자는 주로 LP를 듣는데 인간적인 따사로운 맛은 역시 아날로그에 있다고 느껴진다. 언젠가는 진공관 앰프를 사용하고 싶으나 시간과 자금이 지금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코앞에 둔 마지막(digital)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탄도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자마저 미혹케 하려고 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보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 혼, 육과 함께 음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한 주신 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도 함께 주셨다.
음악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여야 할까 하는 결정도 우리 각자의 몫이다. 몸을 사용하여 노래하는 가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2009-05-08 17:19:4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