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정리하다 한참 전에 퍼논 글이 좋아서 여기에 올려 봄니다.
여친 생긴 아들에게 주는 엄마의 편지
아들아, 세상의 반은 여자, 그리고 나머지 반은 남자로 이루어져 있단다.
하느님은 어떤 생각을 하셧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게 하셧어.
엄마가 인생의 짝인 아빠를 만났듯이 우리 아들도 나머지 반쪽을 찾게 되겠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너는 잘 모를 거야.
왜냐구?
그건 자석의 극과 극처럼, 그녀는 여자고 넌 남자이기 때문이지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알아라는 말을 하고 싶구나.
그러기 위해서 네가 알아야 할 몇가지를 엄마는 당부하고 싶단다.
♡ 아들아! 그녀의 몸은 유리와도 같아 너의 그녀의 가장 큰 차이는 뭐니뭐니해도 신체적인 차이겠지?
그러나 아들아,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자 몸의 소중함이란다.
여자는 유리와 같아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
잘못했다간 영영 붙일 수 없는 깨진 유리조각이 되 버리고 만단다.
요즘 너희들 세대의 성 가치관이 많이 개방됐다고는 하지만!
실제 행동이 앞서갈 때는 이미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라야 해.
낙태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가고 사랑없이 쾌락만 좇아서는 안되겠지?
엄마가 너를 낳았을 때의 그 아픔은 실로 상상하기 힘든 것이란다.
하지만 아픈 만큼 믿음직한 아들을 보게 되었지.
그런데 여자의 몸이란 너무나 복잡하고 하나라도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야.
특히 한 번 낙태를 하는 것은 출산의 아픔, 후유증과 맞먹는 것이기 때문에 젊음은 물론 건강까지 앗아가게 되지.
네가 정말 사랑하는 "그녀"라면 그녀의 신체까지 소중히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해.
장차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생명을 잉태하게 될 그녀의 귀중한 몸을 조심스럽게 다뤄져야겠지?
♡ 아들아! 작은 섬세함이 그녀를 감동케한단다 설마 너까지 여자는 화려한 것과 크나큰 이벤트에 감동하는 존재로 알지는 않겠지?
수백송이의 장미와 값비싼 반지, 브랜드 옷만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네가 무심코 내던진 자상한 말 한 마디, 길을 걷다 무심코 생각난 그녀를 위해 꺾은 들꽃 한 송이, 잘 자라는 전화 한 통화에 여자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야.
그녀를 위해 뭔가 큰 것만을 해주려 골머리를 앓지도 말 것이며 그녀를 감동시키는 자체가 귀찮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정말 사랑한다면 너의 감정 가는대로, 그녀를 위한 노력 그대로 표현하면 그녀도 가슴속으로 느끼게 될 거야. 여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방법, 그것은 바로 작은 섬세함이란다.
♡ 아들아! 때로는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다 왜 너는 항상 그녀에게 이기려 드니?
모든 싸움은 서로의 기와, 자존심, 고집 등이 부딪쳐서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네가 그 조그만 여자에게 이겨서 무얼 어쩌려고 그러니.
여자란 말이지, 자신이 잘못 했다는 걸 안다 해도 고개를 굽히려 들지 않아.
그건 고집이나 뻔뻔함만으로는 설명이 안돼.
최소한의 여자로서의 "자존심"때문이지. 여자는 자존심이 꺾이는 순간, 여자로서의 매력도 일순간에 상실하지.
이 세상이 모두 끝난 것만 같은 자포자기의 심정을 갖기도 하거든. 물론 너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여자의 속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단다.
혹시 그녀와 싸우게 되더라도 5번 중 3번 정도는 항상 져 주어라.
그렇다고 해서 넌 패자, 그녀는 승자가 되어 의기양양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전보다 더 상냥하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태도를 접하게 될 걸?
여자는 남자의 무조건적인 이해를 갈구할 때가 많아.
알아도 모른 척, 그녀의 자존심을 받들어 주는 것이 현망한 길이며 사랑을 가꾸는 비결이란다.
♡ 아들아! 환상은 욕심의 씨앗! 여자든 남자든 이성에 대해 크고 작은 환상을 갖고 있단다. 물론 너 역시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거야.
너희 아빠만 해도 총각 시절, 여자는 화장실도 안 가고, 이슬만 먹고사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 너희 세대야 그런 "순진함"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여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라.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야.
"사랑하니까", "여자니까"라는 이유들로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에 한계를 긋다 보면 그녀도 힘들겠지만 오히려 네가 더 힘들어질 거야.
비록 네 눈에 못마땅한 점도 있을 테고 눈에 띄는 단점도 있을 거다.
하지만 옥에서 티를 찾으려 하지 말고, 티에서 옥을 찾는 습관을 길러라.
지나친 환상은 널 괴롭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단다.
괜스레 욕심을 키워 한참 예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나이에 불만 투성이어야 되겠니?
너의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네 주위의 여자들의 장점부터 찾는 습관을 길러라.
특히 네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녀의 단점도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단다.
♡ 아들아! 화려한 꽃보다는 너만의 꽃을 찾아라 화려한 꽃은 꺾기 쉽겠지만 모두 한 순간이란다.
예쁜 여자를 보면 엄마도 같은 여자이지만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모두 그때뿐이지, 그녀가 너의 꽃은 될 수 없을 거야.
그녀의 가치관, 성격, 말투, 행동가짐, 취미 등 여러 가지가 어우러졌을 때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
또한 화려한 외모의 여자들은 이미 너 뿐만 아니라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
그만큼 경쟁률도 높을 뿐더러 알고 보면 그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거야.
하지만 너의 안목, 심미안으로 고른 꽃은 오로지 너만의 꽃이 되는 것이지.
한 순간 폈다 져버리는 화려한 꽃보다는 꾸준하게 빛을 더해 가는 실속 있는 꽃을 골라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여자란 사랑받는 만큼 빛나게 되어 있어.
진실한 너의 사랑을 그녀에게 듬뿍 쏟아 보렴.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한 송이 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5 15:23:18 | 허광무
성경은 환란전 휴거를 말하고있습니다. 휴거후 환란기간동안에 일곱나팔이 울리는데
왜 고린도전서15장에서는 휴거시에 울리는 나팔이 마지막나팔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것입니다.
성경에 첫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있듯이, 첫번째 나팔소리와 마지막 나팔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2011-05-25 00:10:24 | 최홍진
역시 아버지란 분은 그런 분이라고 느낄 수 밖엔 없군요..
그러기에 자녀 된 자의 입장으로서 더 큰 이해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2011-05-24 19:58:20 | 소범준
저도 감사합니다.^^
2011-05-24 19:51:00 | 소범준
역시 용묵 형님의 KJB 사랑에 버금가는 철도 사랑은 여전하시군요 ㅎㅎ
그러다가 혹시 철도로 완전히 빠지시는 건..? ㅎㅎ 아니시겠죠? ㅋ;
(괜시리 묻습니다..^^;)
2011-05-24 19:49:12 | 소범준
한참 전에 본 글인데 여기에 올려 봄니다.
아버지란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않을때 "괜찮아,괜찮아"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면서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곳을 직장이라고 한다)에는 즐거운 일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세개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 시킬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여기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살이든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 :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 :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 : 아빠와 선생님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 :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다. 14세때 : 우리 아버지요? 세대차이가 나요. 25세때 :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 :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 :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 :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 : 아버님 께서 살아 계셧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를 안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하고 성가도 부르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 옮긴 글입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4 14:58:13 | 허광무
이 내용으로 설교하신 건 아니죠?^^
용묵 형제의 글은 삼천포가 아니라 늘 철도청으로 빠집니다.ㅎㅎㅎ
2011-05-24 10:32:42 | 김재욱
귀한글 감사합니다. 그글을 올리신 분은 본인의 믿음대로 될것입니다.
2011-05-24 05:01:31 | 송재근
잘 읽었습니다. 우리교회 카페의 [성경]코너에다가 옮겨놔야겠습니다.
2011-05-24 04:21:55 | 류인선
일모요연한 정리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1-05-23 23:55:05 | 최홍진
* 스포일러: 이 글은 잘 나가다가 뒷부분부터 삼천포로 빠지는 구조임을 밝힌다. 분명히 예고했다.
본인은 정확하게 언제 구원받았는지 모르는 일명 '예수쟁이'이다. 고등학생이던 1998년 가을에 처음으로 성경을 한 번 완독했으며, 2002년 무렵에 KJV believer가 되고 세례 대신 침례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6년엔,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전체 거리 설교 때 난생 처음으로 preaching을 해서 지금까지도 이를 계속하고 있다.
주변의 불신자, 개독안티, 무신론자와 얘기를 나눠 보면, 그들은 교회 댕기는 주변 사람들의 행실 때문에 실망하고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잃은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디서 접했는지 별 희한한 교회, 예수 사칭하고 다니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람에 의한 온갖 나쁜 기억과 응어리는 꼭 하나씩 갖고 있는 듯했다. 저런 인간들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고.
물론, “크리스천들의 행실은 불신자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상대로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본인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 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예외가 아니다-_-. 그런 못난 것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고상하게 산 사람들도 다 예수 안 믿었기 때문에 죽어서 지옥 간다고 말하면 그것만치 기분 나쁘고 정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애시당초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란, 열심히 도 닦고 인격 수련해서 구원을 받으려 애쓰는 고매한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다니는 일종의 병원 같은 곳이다. 병원에 완벽한 사람, 성한 사람이 다닐 리가 없잖아..;; 100% 완벽한 교회에 당신이 가입하고 나면 그 교회의 100% 완벽 무결성은 깨진다. -_-;;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초청에 차별이 있던가?? 신앙생활이란 그런 마인드로 하는 거다.
그리고 기독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안목이 늘 객관적이고 정확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대형 교회에 대해서는 부패하고 비리 많고 돈만 밝힌다고 욕하면서, 한편으로 진짜 성경대로 좁은 길을 고집하는 마이너 교회에 대해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편협하고 옹고집 교조주의라는 식으로 응수한다면?
교회는 어떤 노선을 가든 어차피 욕을 하게 돼 있는 불신자의 취향까지 만족시켜 줄 의무는 결코 없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마 11:18-19 같은 부류들.
난 지금까지 살면서 참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기는 점이 하나 있는데, 신앙생활에 관한 한 사람 때문에 시험 들고 실족한 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온갖 오덕질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남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이 원래 다 저렇나 식으로(ㄲㄲㄲㄲㄲㄲㄲㄲ) 시험 들게 하고 간증 망친 게 더 많을 것이며, 기독교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내가 빚진 게 더 많을 것이다. -_-;;; 죄인을 받아준다는데 내가 왜 마다하며, 다른 죄인으로부터 끼친 여파에 그렇게까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사후 심판이 있다는 것,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의는 몹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거나 그에 반감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신이 인간을 지옥에 보낸다는 말에 불쾌해하기에는 인간의 죄악이 너무 극심하다는 현실에 훨씬 더 공감이 갔다. 이런 발상의 차이가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신자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만들어 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누구 만만찮게 나만의 인생 개똥철학에 빠져서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고, 죄의 결과와 여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열폭하고 인생이... 으, 생각도 하기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고전 15:10)
길거리에서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자기만의 패턴이 있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패턴이 있다. 나는 내가 깨달은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성경이 어떤 책인지 먼저 얘기한 뒤, 인생은 유한하고 언젠가 죽음과 심판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 교육· 정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살인· 간음을 저질러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던 것, 절대적인 선과 악이란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 ... 이걸 전하려고 한다.
거리 설교라는 게 처음에 입을 떼기가 힘들다. 본인도 초창기에는 원고를 미리 써 보기도 하고 여러 방법을 찾아 봤는데, 결국은 여러 번 하고 나니까 요즘은 원고 없이도 한번 말을 하면 최하 15분은 금방 지나는 것 같다. 나 자신이 복음과 구원 메카니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를 조리 있게 얘기도 곧장 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다른 곳에서 공개적으로 얘기를 하다가 말 더듬고 혀 꼬이고 실수하는 것에 비하면, 내가 생각해도 거리 설교는 꽤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이다. -_- (본인, 작년 여름에 간증할 때도 얼마나 말 자주 더듬고 말투가 어눌했던가? ㄲㄲㄲㄲ)
또박또박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나면 굉장히 기쁘고 후련한 마음이 든다. 이걸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님이 주는 기쁨”이라고 한다.
“네가 드디어 나에 대해서 공개 석상에서 당당히 증언을 할 정도로 성장했구나! 아이고 기특해라!” 정도? ㄲㄲㄲㄲ거리 설교가 주는 유익: http://biblebaptistpublications.org/streetpreaching.html 클릭. (영어)
그런데, 하루는 거리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이런 선포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간절히 들었다.
“여러분은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나라 철도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드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어쩌구저쩌구... 중략)이처럼 철도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철도는 21세기의 트렌드에 어울리는 친환경 고효율 교통수단입니다. 우리나라 철도를 알면 역사와 지식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철도는 정서 수양과 교양 함양에 좋습니다. 철도를 알면 국토 사랑 정신이 생깁니다. 이렇듯 철도 덕질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선한 간증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앞으로 철도에 관심을 갖고, 여행 갈 때 철도를 적극 이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나눠 드리는 열차 시각표를 꼭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설마 진짜로 길거리에서 이렇게 외치고 왔다면, 여기 계시는 크리스천들께서 “용묵 형제가 부디 철도를 끊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라도 하셔야 할 배도(背道)-_- 단계이겠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철도를 전하는 데는 영적 전투가 필요하지 않다. 철도를 전하다가 순교? 순직?했다는 사람 얘기는 못 들었다. -_-철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죄, 죽음, 심판, 지옥 같은 유쾌하지 못한 주제를 꺼낼 필요가 없다.“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해 줘야지 왜 너만 독단적으로 구냐?” 이런 말을 들을 일도 없다.
요즘은 철도역, 시외버스 터미널, 고속버스 터미널을 통합해서 교통 허브로 건설하는 게 유행이라지만, 그게 무슨 교통수단간의 에큐메니컬 운동이랍시고 경계라도 해야 할 대상이지는 않다.
허나, 철도에는 불행히도 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하늘로부터의 보상이 있다고 약속되어 있지도 않다. 그런 인센티브가 없으니 철도 전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해야지 뭐, 별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님도 철도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는다. (뭐, 주변에서는 용묵 형제가 철도 덕질을 할 때마다 성령님은 탄식할 거라고 악담을 하는데... ㄲㄲㄲㄲㄲ) 새마을호 객실에서 Looking for you가 내 귀에 울려 퍼지던 그 날은 내게 정말 오순절 성령 강림절이나 마찬가지인 날이었다. 철도와 본인과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고 필연이었다.
본인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 밑으로 지하철이 깔리는 날을 꿈꾼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 “열 도시를 다스리라”(눅 19:17)가 ‘10개 철도 노선(사철 ㄲㄲ)을 다스리라’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사 40:3)는 사막에서 철도가 건설되는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어디 가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나, 지하철 시스템에 대해서 강연이라도 실컷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철도 얘기를 담대하게 늘어놓고 싶다.
나는 한때는, 요즘 같은 영악하고 험악한 세상에 나 같은 별종, 괴짜, 덕후가 아니면 누가 성경 따위를 믿겠는지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나 말고는 이제 아무도 주를 안 섬긴다고 생각했던 엘리야 타입의 소영웅주의 중2병이긴 했다만, 세상의 유행 풍조하고 성경의 사고방식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다시 말해, 철도 덕후나 KJV believer나 비슷한 수준의 geek라고 생각했....는데, 후자에 속한 분에 따르면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그 둘을 상호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그러네.. ㅋㅋㅋㅋㅋ 정말인지?? ㅠㅠ[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3 23:22:37 | 김용묵
본문과 달아주신 댓글들 잘 봤습니다.스스로 구원받지 못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 같군요. 장로교나 감리교 일반이 거의 다 그렇지 않나요?
2011-05-23 23:05:51 | 류인선
형제님 글을 보며 설교말씀을 같이 들으니 훨씬 이해가 잘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귀한 수고 감사합니다. 샬롬!
2011-05-23 19:43:48 | 송재근
앗!^^ 감사합니다.
2011-05-23 18:31:15 | 최홍진
지금 우리나라 안에 킹제임스 성경(한킹)을 쓰는 분 중에 네이버 블로그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분도 위 형제님과 같이 구원이 탈락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혹시라도 참조하시는 데 도움이 될 까 하여 링크를 올립니다.
http://blog.naver.com/dfgiyo/140039385821
2011-05-23 15:59:48 | 소범준
그래서 그 다음날에 극동방송 자유게시판에 이 글을 올렸는데...
무반응이네요... 그 때 조회수가 13번밖에 되지 않아서.. 참 아쉽습니다..
2011-05-23 15:07:27 | 소범준
아멘. 감사합니다.
흠정역과 여러 성경들을 대조해서 올려주시니 차이가 명확하군요..
그리고 정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님의 강의 정리를 보고서 왠지 모르게 도전이 되네요..ㅎ
이렇게 많이 흠정역 성경과 다른 성경들을 비교/분석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여태 뭘 했나 싶네요...ㅎ 저도 분발해야 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정리글 더욱 부탁합니다. 샬롬!^^
2011-05-23 13:20:02 | 소범준
와~~형제님의 노트 실력이 점점 더 돋보이네요. 잘 익혀두겠습니다.
"주께서 값을 치로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3
이 말씀이 제 눈앞에 있네요.
말씀안에서 자유를 얻는 성도들이 용기를 갖게 되는 그 날까지 선전해 주세요...
2011-05-23 09:02:07 | 정혜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가? (갈 2:16)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98
2011-05-23 04:04:28 | 김문수
말씀을 들으면서 킹제임스흠정역성경, 개역성경, 카톨릭성경, KJV, NIV 성경을 대조하면서 탐구하시면 아마 뭔가가 가슴에 와 닷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제가 전에 올린 글에 빼먹으면 안될 것들이 있음에도 제가 빼먹어서 부담감을 가지고 늦은 시간까지 글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여기서 완성도라 함은 피차 바르게 말씀의 은혜를 나누어야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을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5월 22일 주일 설교 : 믿음에서 믿음까지 (정동수 목사님)
http://www.cbck.org/NewSermon/View/1o8
로마서 10장 17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개역성경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KJV : So then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NIV :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 개역성경은 난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믿음이 온다 라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개역성경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카톨릭성경 :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KJV :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mine own righteousness, which is of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the faith of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is of God by faith:
NIV :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is by faith.
*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명확한 말씀과 개념으로 이해를 가지면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것을 발견하리라 봅니다.
로마서 4장 21~22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개역성경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KJV : But now the righteousness of God without the law is manifested, being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NIV : But now a righteousness from God, apart from law,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 This righteousness from God come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갈라디아서 2장 20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개역성경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카톨릭성경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KJV :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NIV :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한 번 도 불순종하신 적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예수님에겐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말씀들을 묵상해 보면 아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하실겁니다.
로마서 1장 16~17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개역성경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카톨릭성경 :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KJV : For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of Christ: for it is the power of God unto salvation to every one that believeth;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NIV :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because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 사탄도 짝퉁복음이 있겠죠? 누구의 복음인가가 중요하겠죠! 그리스도 라는 말이 빠져도 별 문제없는데 뭘그러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도 해 봐야겠죠! 온전히 보전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꽝! 인쇄 도장을 찍혀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개역성경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카톨릭성경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KJV : Whom God hath set forth [to be] a propitiation through faith in his blood, to declare his righteousness for the remission of sins that are past, through the forbearance of God;
NIV :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갈라디아서5장 22~23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개역성경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KJV :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longsuffering, gentleness, goodness, faith, / Meekness, temperance: against such there is no law.
NIV :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 성령의 열매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인해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성품이라고 보면 될까요?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요~기 있네요!!!!!!!!
개역성경은 충성으로 번역되어 예수님이 자유를 주셨는데 요~기요 충성 땜에 교회에 열심히 ( ) ( ), 목사님께 ( ) ( ), ....이것은 요즘도 쌍방간에 많은 피해사례를 만들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2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개역성경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KJV : Wherefore seeing we also are compassed about with so great a cloud of witnesses, let us lay aside every weight, and the sin which doth so easily beset [us], and let us run with patience the race that is set before us, /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NIV :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and let us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us. /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믿음을 따라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흠정역 성경과 개역성경은 번역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교회가 킹제임스흠정역성경으로 교정되어지길 소망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개역성경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카톨릭성경 :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KJV :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NIV :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crucified the sinful nature with its passions and desires. / Since we live by the Spirit, let us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 한국교회는 '행하라'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냥 성령안에서 삶의 길들을 걷고 또 걸으면 된다고 말하네요. 성령으로 누가 이걸 행하라 저걸 행하라 하면 참된자유가 이겁니다. 라고 프리~~한 모습 보여 줘야 하겠습니다.
**** 설교를 듣고 내용을 달아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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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02:38:09 | 노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