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삶에 있어서 그리고 앞으로 읽을 많은 신앙서적에서도 성경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성경을 통해서 모든 것들을 바라보아야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KJB를 알게 하시고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1-04-21 20:01:42 | 손정현
제가 다 이해는 못해도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좋아했습니다. 손정현님의 글에서처럼 저도 그 책에서 그 문구가 의아했었습니다. 뭐랄까...교만같은게 느껴지더군요.
결국, 믿을수 있는건 성경뿐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2011-04-21 18:31:16 | 윤영원
아래 게시물에 켄달 박사가 정리한 pdf 파일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pp.47-48에 Holy Ghost에 대해 대명사 it, itself 를 사용한 경우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28
신학자는 실수가 있어도 성경 말씀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시면 됩니다.
그리스어 원문이 중성이면 중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을 남성형으로 바꾸면 성경을 변개하는 것이 됩니다.
2011-04-21 14:51:04 | 김문수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96
먼저 검색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KJB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2011-04-21 14:38:09 | 관리자
저는 성경을 사랑하는 일반 청년입니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배경은 [천사와 ufo 바로 알기]를 읽고 마지막장에 추천하는 책 목록을 보면서 하나하나씩 읽어나가야겠다는 결심에 의해서 성경바로보기, 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등을 읽고나서 이 홈피를 알게되고 많은것을 읽고 배웠고 깨달았습니다 그후 몇주전에 킹제임스흠정역을 구입해서 계속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전부터 방언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오순절 은사주의 바로알기]와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되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저 옥성호, 를 읽고 그집사님이 쓴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집사님이 스승으로 삼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알게되고 존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등으로 통해서 청교도 신앙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된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를 읽고 있던중에 오늘 아침 그 시리즈 2권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을 보다가 "흠정역 성경이 안타까운 실수"라는 글귀에 이거는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처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1장 성령의 인격을 다루는 내용에서
p25에 아래의 내용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 자주 어려움을 겪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신약 성경의 여러 서신서 서두에 나오는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만 언급할 분 성령은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한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성령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도 자기의 첫 번째 서신에서 똑같이 말합니다. " 우리의 사귑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여기서도 요한은 성령을 명확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헬라어에서 영(Spirit)이라는 말이 중성명사이기 때문에 성령과 그 분의 사역을 비인격적이고 중성적 의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흠정역(King James Version)성경이 안타까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성령이 친히(The Spirit itself)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친히" 라는 말을 "Himself"가 아닌 "itself"로 표현한 것을알 수 있습니다. 또 같은 장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the Spirit itself)간구하시느니라."(롬 8:26)라는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정역(Revised Version)이 훨씬 낫습니다 .비록 헬라어에는 명사뿐 아니라 대명사도 중성이지만 두 구절 모두 "Himself"라고 바르게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먼저 이부분에서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말 흠정역이 실수입니까?..아님 niv가 실수입니까..아님 로이드 존스가..실수 입니까..당연히 흠정역이 실수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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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1 13:44:35 | 손정현
ㅋㅋ 그럼 김 형제님께서는 제 나이때 어떻게 보내셨는지요?ㅎㅎ
2011-04-20 22:05:10 | 소범준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깊이 공감되는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1-04-20 12:34:27 | 이은희
아멘! 승리하신 주님 안에만 있으면 승리는 항상 우리 것입니다.
2011-04-19 00:10:10 | 류인선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자기들 입맞대로 바꾸는데 찬송가 가사쯤이야 누워서 떡먹기죠
정말 주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자들입니다. 나중에 심판석에서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합니다. -_-;
2011-04-18 21:55:40 | 송재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2011-04-18 16:43:05 | 김관운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지옥에서 능히 멸하실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아멘.
2011-04-18 15:48:46 | 소범준
매우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의 신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4-17 12:42:22 | 김재욱
히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께서 나를 돕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
2011-04-17 09:12:48 | 김문수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제가 어릴 때는 TV에서 무서운 음악과 함께 시작하는 ‘전설의 고향’을 보곤 하였습니다. 그 때는 그것을 보면서 무서운 귀신이 나와서 사람을 해칠 까봐 두려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머니에게 ‘귀신 지나갔어?’ 라고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또한,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의 ‘귀신들’이 나를 해치거나 죽일까봐 두려워하곤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의 대상이 있습니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인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각종 시험 및 학교에서 소위 주먹 좀 쓰는 아이들을 무서워 할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군대, 취업, 승진, 금전적 문제, 결혼, 출산, 질병, 죽음 등의 수많은 두려움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각자 마다 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혹은 이겨내기 위해서 방법들을 고안해 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학문으로 풀어보려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운동이나 무술을 연마하고, 어떤 이들은 명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를 찾게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종교생활’을 통해서 서로 위로하고 안락함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죄이후에 느꼈던 첫 번째 감정이기도 합니다.
창 3:9-10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렇듯 인간은 원초적으로 죄를 짓고 난 후에 두려움을 느꼈고, 현재도 쌓여가는 죄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근간에는 죄의 결과물인 죽음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종교행위도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어떤 인간도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워하는 자들=범죄한 자들=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귀와 사망과 지옥이 던져질 불호수에 던져지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구속받은 성도들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시27:1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는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23:4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두려움을 내어쫓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시며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창15:1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또한,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신 말씀도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수1:9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크게 용기를 내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주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전12:13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롬3:18)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엉뚱한 대상 즉, 하나님과 반대되는 대상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 범죄하다가 결국 아시리아의 포로로 된 이스라엘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왕하17:7-8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 밑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 자기들의 하나님께 죄를 짓고 또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며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법규와 이스라엘 왕들이 만든 그들의 법규 안에서 걸었기 때문이더라.
이러한 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신명기18:10-11에서 모세는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찰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마녀나 마법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마술사나 강신술사가 너희 가운데 있지 못하게 할지니라 하며, 22절에서 자기 뜻대로 말하는 거짓대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사람을 찾으려고 하며, 점쟁이들의 말한마디를 하나님이 내려주신 천명인냥 따르고, 그들을 두려워합니다. 자기 위에 사제나 교주를 모시는 모든 종교에서 비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또한,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거짓대언자들은 그러한 인간의 두려움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하나님이 원치 않는 교세확장과 자기만족을 위해 일하며 열심히 자기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은 이런 거짓대언자를 떠나야 하겠습니다.
롬16:17-18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배를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느니라.
빌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런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골2:8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벧전3:16-17 너희가 자유로우나 너희의 자유를 악을 덮는 도구로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들로서 행하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라.
잠14:26-27 주의 두려움 속에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 샘이라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죄를 멀리하게 합니다.
시4:4 두려움 가운데 서며 죄를 짓지 말지어다.
잠23:17 너는 마음에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며 종일토록 주를 두려워하라.
딤전5:20 죄짓는 자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꾸짓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쫓아 주십니다.
딤후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시118:6 주께서 내 편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리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거짓대언자들의 헛된 속임수에 속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단번의 속죄로(히9:28) 인해 지성소로 직접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당당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8:14-15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
세상과 분리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완전한 거룩함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후7:1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또한, 이 하나님 안에서의 순종함과 두려움으로 우리의 구원을 당당히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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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초적인 죄악된 감정인 두려움을 항상 느끼며 삽니다. 이는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이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환자들을 가끔 보면, 건강에 대한 많은 두려움을 갖고 병원을 찾아옵니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아프게 되면 어찌해야 할까 걱정에 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하게 아플 때나 심하게 힘들 때 그 사람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평소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되어지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절한 두려움 속에서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간사한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믿음을 고백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종교생활(천주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무속신앙등)을 해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주에게 묻고 의지하기도 합니다. 자기 주먹만 믿고 살아 왔다고 하며 자신을 모시며 살아오던 사람들은 스스로 이겨내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되신 예수님의 피흘려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고, 우리를 양자 삼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성령님에 의한 인도함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더 이상 최후의 죽음이 아니며,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우리들의 생활 방식은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아니합니다.(빌3:20)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요일4:16-1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 믿었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점에서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요일5:4-5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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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06:26:20 | 곽연우
마지막 나팔소리이자 살리는 영으로는 첫번째 나팔소리이군요.
감사합니다.
2011-04-16 20:09:34 | 곽연우
마지막 나팔 소리
(*) 편집이 된 PDF 파일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창세 이후로 없었던 극심한 7년 환난기를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 계시록 3장 10절은 분명하게 이를 약속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계3: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5:9).
7년 환난기에 구원받는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이런 무서운 환난을 통과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으며 통과할 사람도 단 하나도 없다. 초대 교회시대부터 지금까지 성경대로 믿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환난전 휴거(Pretribulation Rapture)를 믿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는 환난전 휴거와 상치되는 듯한 말씀이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고전15:51-52)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미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성도들의 몸이 변하는 때에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을 가르쳤다. 또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 이미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남은 성도들이 함께 땅에서 들려서 - 휴거되어 -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을 가르쳤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사도 바울이 동일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이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며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역시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므로 우리는 이 두 부분에 나오는 나팔 소리가 동일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론지을 수 있으며 아마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휴거와 관련한 살전4:16-17의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당연히 고전15:52에 기록된 ‘마지막 나팔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의 휴거 때에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린다는 사실은 ‘환난전 휴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환난전 휴거관은 교회의 휴거가 7년 환난기 전에 일어날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 ‘마지막 나팔 소리’는 반드시 환난기 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계시록 8-11장은 7년 환난기에 일곱 나팔이 울린다고 말하며(사실임) 또 예수님께서도 7년 환난기가 끝나는 시점에 - 즉 일곱 나팔이 다 울린 이후에 - 친히 땅에 강림하실 때에 또 다른 나팔 소리가 있다고 마태복음 24장 29-31절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들의 환난 뒤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마24:29-31).
그렇다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말한 ‘마지막 나팔 소리’가 7년 환난기 전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 입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가 의도한 것과 그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이 단순히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말한 점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분명히 그 ‘마지막 나팔 소리’는 그들이 이미 소유한 성경 기록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거나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다른 부분에서 가르친 어떤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혹은 그것이 그 당시의 그리스 문화권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떤 것이거나 로마 제국에서 흔히 행하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자기들 주변의 유대인들을 통해 알게 된 유대교의 믿음이나 실행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이 의도하지 않은 것
만일 누군가가 ‘마지막 나팔 소리’의 ‘마지막’이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 다시 말해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다른 나팔 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 사도 바울은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도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나팔이나 혹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전체가 ‘마지막 나팔’임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 친히 강림하실 때에 분명히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마24:29-31). 그런데 계시록의 순서를 보면 분명히 일곱 나팔이 다 울린 뒤에 그분께서 강림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강림하실 때 울릴 나팔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이후의 나팔이다.
둘째로, 스가랴서 14장 16-19절은 천년왕국 내내 장막절이 매해 지켜질 것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남은 모든 자가 심지어 해마다 올라와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며 장막절을 지키리라(슥14:16).
그런데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알 수 있듯이 장막절을 지킬 때는 항상 나팔 소리가 울린다. 천년왕국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이후에 시작되며 따라서 장막절의 나팔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이후에 있을 것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 나팔’을 언급한 뒤 30-40년이 지나서야 요한의 계시록이 기록되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받았을 때에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나팔 혹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들이 그가 말한 ‘마지막 나팔소리’가 자기들이 아직 들어 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계시록의 일곱 나팔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를 받고 거기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나팔’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고전15:52에 있는 ‘마지막 나팔 소리’에 대해 기록하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알지 못한 계시록의 일곱 나팔 혹은 일곱째 마지막 나팔을 의미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점에 대해 칼드웰(J. R. Caldwell)은 이렇게 말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아직 계시도 되지 않은 예언에 대해 언급한다거나 혹은 기록되지도 않은 책 즉 계시록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넷째로, 사도 바울은 결코 그 ‘마지막 나팔’이 계시록의 일곱 나팔 모두(즉 복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전15:51과 살전4:16에서 그는 단 하나의 나팔만을(즉 단수)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나팔 소리’가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나팔 소리 - 즉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나팔 소리가 있을 수 없는 - 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너무나 명백하며 그래서 알포드(H. Alford)는 ‘마지막 나팔 소리’의 ‘마지막’이 결코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나팔 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다른 의미의 나팔 소리임에 틀림이 없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에서 나팔 소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고린도전서 15장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회중을 모을 때 나팔을 사용하셨다. 출19:10-20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뵐 때 나팔 소리가 울렸음을 알 수 있다.
시내 산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주께서 불 가운데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더라. 그곳의 연기가 화로의 연기같이 위로 올라가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더라. 나팔 소리가 오랫동안 나며 점점 더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성으로 응답하시더라. 주께서 시내 산에 곧 그 산의 꼭대기에 내려오시고 주께서 그 산의 꼭대기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19:18-20)
한편 로마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용도로 나팔을 사용했다. 그들은 황제가 있는 곳으로 사람을 모을 때 나팔 소리를 사용했다. 이것은 보통 ‘클래시컴’(Classicum)이라 하는데 그 기능으로 인해 이것은 ‘황제의 나팔 소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고대에는 적들을 놀라게 하거나 다가오는 심판 혹은 위험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사용했다. 성경에도 이런 용례들이 여러 번 나온다(렘4:19-21; 6:1; 겔33:3-6; 암3:6 등).
이제 고린도전서 15장의 문맥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과 사망의 패배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 ‘마지막’ 것에 대해 언급한다: 패하여 없어지게 될 마지막 원수(사망 26절), 마지막 아담(그리스도 45절), 마지막 나팔 소리(52절).
셋째로,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여러 가지가 대비되어 있다. 바울은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 불명예와 명예, 약한 것과 강한 권능, 본성에 속한 몸과 영에 속한 몸,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 죽는 것과 죽지 않는 것,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등을 대비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면서 첫 아담을 통해 육체의 죽음이 왔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몸의 부활로 사망을 이기는 승리가 있을 것을 보여 준다(20-22절, 45, 54, 57절).
넷째로 사도 바울은 고전15:56에서 죄로 인해 사망이 생겼으며(롬5:12-19) 사망을 일으키는 죄의 힘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임을 보여 주고 있다(롬4:15; 5:13, 20; 7:7-13).
앞에서 우리는 교회의 휴거가 있을 때 울리는 살전4:16의 나팔 소리가 고전15:52의 ‘마지막 나팔 소리’임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팔 소리’라고 했는데(살전4:16) 이것은 곧 그 ‘마지막 나팔 소리’가 그 당시 황제들이 백성을 모을 때 사용하던 나팔 소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표현은 아주 익숙한 표현이었다. 황제의 나팔 소리가 나면 백성들이 황제가 있는 곳으로 모이듯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 즉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성도들이 휴거되어 그리스도가 계시는 공중으로 함께 모일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했을까?
고린도전서 15장에 여러 가지가 대비되어 있음을 고려해 볼 때 - 예를 들어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등 - 그는 그 ‘마지막 나팔 소리’와 성경에 처음 나오는 ‘첫째 나팔 소리’를 대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의 대비는 대부분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 역시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 그리고 사망의 패배를 대비시키고자 함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가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과 사망의 패배이므로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과 사망의 패배와 상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를 대비해 볼 때 우리는 마지막 나팔 소리의 용도와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첫째 나팔 소리의 용도와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나팔 혹은 나팔 소리가 가장 처음 언급되는 곳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출애굽기 19장 10-20절이다.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 친히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려 하시며 바로 이 시점에서 첫째 나팔 소리가 울린 것이다. 이 모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자신과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모세의 율법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다(출19:3-8; 20:1-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모세 율법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나팔 소리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만났으며 율법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 고린도전서 15장의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위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죄가 사망을 불러왔고 사망을 불러일으킨 죄의 힘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임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계신 산에 다가와 그 산에 닿기만 하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출19:12-13, 21-25). 바울은 율법이 진노를 이루며(롬4:15) 또 율법을 통한 죄의 정욕들이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사람들에게 이루고(롬7:5, 13) 또 율법이 사람을 죽인다고(고후3:6) 분명히 말하였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이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참으로 율법은 죽음과 정죄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영광 곧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무도 영광이 될진대 의의 직무는 영광이 더욱 뛰어나니라(고후3:7-9).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어 하나님을 만나게 하였고 그들을 율법 아래 놓이게 하였으며 또 그 율법이 죽음을 일으키는 죄의 힘이 되면서 사망의 직무를 감당하였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의 목적이 시내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로써 사망의 직무를 시작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너희는 만질 수 있는 산과 불이 붙은 산에 이르지 아니하였고 깜깜함과 어둠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씀하시는 음성에 이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그 음성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마시기를 간청하였으니 (그들은 주께서 명령하신 것 즉, 짐승 하나라도 그 산에 닿기만 하면 돌로 맞거나 화살로 꿰뚫림을 당하리라, 하신 것을 견디지 못하였느니라. 그 광경이 이같이 무서웠으므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히12:18-21).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의 목적이 백성을 공중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불러 모으고 이로써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의 부활과 몸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는 전혀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불러내기 위해 울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사망)이 끝나고 그 직무가 폐지된다. 또한 이 마지막 나팔 소리는 고대의 나팔 소리의 또 다른 목적 즉 적을 두렵게 하거나 혹은 다가오는 위험이나 심판에 대해 경고를 주는 것 같은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가 사람들을 불러내어 사망의 직무의 시작을 알렸으므로 사도 바울은 이와 대조적으로 사람들을 불러내어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삶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한 것이다. 그가 이것을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한 것은 그 나팔 소리 이후에 또 다른 나팔 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첫째 것과 마지막 것을 비교하면서 ‘마지막’이 ‘첫째’의 반대가 되므로 그 나팔 소리를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라 한 것이다. 이 나팔 소리는 교회의 휴거 때에 울릴 것이며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가 울렸을 때의 목적과 정반대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공중으로 그리스도께로 모으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에 대해 칼드웰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준다.
우리는 고전15장에서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에 대해 읽는다. 그러므로 여기의 ‘마지막 나팔 소리’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즉 정죄와 사망의 직무가 시작되었을 때에 울렸던 나팔 소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그것은 한 마디로 정죄와 사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반면에 ‘마지막 나팔 소리’는 부활과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나팔 소리는 저주를 선포했고 그 무섭고 큰 소리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서 떨게 되었다. 반면에 마지막 나팔 소리는 복을 선포하는데 그 이유는 그 소리가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부활시키고 살아남은 자들을 죽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 주는 일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레날드 샤우어스(Renald Showers)의 「마라나타」(Maranatha: Our Lord Come!)에서
2011-04-16 14:13:34 | 관리자
좋은 글입니다.
쓰신 분 개신교 신자여서 바른 성경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교계 현황에 대해서 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글을 썼음이 분명합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서 나 자신과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이로부터 건져야겠습니다.
2011-04-15 19:44:01 | 소범준
저도 동감입니다. 저는 그 나이 때 어땠었나... 소 형제님을 통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011-04-13 19:11:33 | 김재욱
제가 위에서 연대를 약 100년 전 쯤이라고 했는데. '청나라 시대 까지'(= 조선시대 까지) 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2011-04-13 12:41:16 | 류인선
주님, 이런 것이 없었다면 제가 진실을 어찌 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지금 시대가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계3:14-22)임을 직감합니다.
다시 각성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제발 폴 워셔 목사님 같은 분 뿐만이 아니라
이같은 분들이 더 많이 나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정호 형제님 감사합니다.
2011-04-13 11:48:45 | 소범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