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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위에 김대용 형제님께서 전체적인 내용을 잘 설명해 주셨네요. 제가 조금만 덧붙여 보자면.. 1.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임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특권이지요. 우리의 기도소리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딤전2:1 보면..."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의 유형(?)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문제되는 건 중보라는 말의 정확한 성경적 정의입니다. 2. 중보(Intercession)- 렘7:16에서는 중재라고 번역됨. (1)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재(렘36:25) (2)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중재(롬11:2, 딤전2:1, 렘27:18) (3) 사람을 대신한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중보(사53:12, 히7:25) (4)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신한 성령님의 중보(롬8:26-27,34) 3.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기도의 측면에서의 중보는 항상 혼의 구원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사람의 구원 이외의 다른 문제들로 소위 중보기도 한 사례는 못 찾겠더라구요.- 이건 제 의견 입니다.) 창18:20-33 아브라함이 소돔에 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사례 출32:30-33, 신9:18-29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한 사례 4. 소위 한국 기독교의 전통과 문화로 이어져 내려온 모습들 가운데,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면 무조건 나쁘다 비 성경적이다 라고 매도할 것은 많지 않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나온 서원기도책(?) 같은 것도 그런 인간적인 측면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놓고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기도의 내용과 마음가짐과 열매들을 성경의 원리에 비춰 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부모님도 기도 생활을 정말 철저히(?) 하시는데, 그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매일 교회에서 주무시면서 기도하시니까요) 그런데 인간이지라 올바른 진리안에 거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저도 인생의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저희 어머니께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끼는 건 매일 기도하시니까 기도 응답이 더 빠르겠지...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을 발견되었습니다. 5. 그런데 어느날 바로 그 점이 옳지 못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기도 영발이 쎈 누군가의 기도를 의지하게 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깨달은 뒤로는 저 자신을 더욱 조심하고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6. 정리하자면, 성도들이 어떤 급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 기도 내용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시겠지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연약한 내 입술로 기도한 것보다 기도 영발이 쎈 누군가를 의지해서 응답을 받으려 하는 기복적인 마음과 태도입니다. 인간적으로 좋아 보인다 하여 하나님 앞에도 좋을 것이라는 착각은 늘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03 00:20:57 | 오광일
예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일부 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지인들에게 킵바이블 소식을 들려줘 봤지만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교회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고요. 매우 안타깝지만...
2013-12-02 19:48:59 | 함치선
목사가 교인들의 기도제목을 취합해서 수시로 기도한다는 이야기는 일반 교회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일입니다. 물론 목사도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성도들의 필요와 소원하는 바를 알고 함께 기도한다는 의미라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깊이 들여다보자면 대부분이 무언가 목사의 기도가 다른 성도들의 기도보다 특별히 더 효력이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목사가 기도해 주면 무언가 좀 더 특별하고 응답이 잘 될 것 같고 또한, 목사에게 가서 삶의 자질구레한 문제까지도 상담하고 싶은 마음 등은 신약 시대의 성도에게 결코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대신 속죄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후 영적으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유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이 있었지만 신약 시대는 더는 그런 체계가 아닙니다. 바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는 만인 제사장 체계(보편적 제사장 체계)가 세워졌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 안에 위치한 지성소는 대제상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으로 그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마27:51, 막15:38) 그리하여 신약 시대의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제사장으로서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 영적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스스로 자신의 소원하는 기도를 아뢸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히10:19~20). 그래서 바른 신약 교회에서는 목사에게만 특별히 기도를 부탁하는 일보다는 성도의 간절하고 때로 시급한 기도제목을 모든 성도들이 나누어 함께 기도하는 정도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축복 기도는 목사님만의 특권일까? (고후13:14)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607&sfl=write_subject%7C%7Cwrite_content&stx=&sst=write_datetime&sod=asc&sop=and&page=13 물론 지혜롭게 잘하시겠지만, 혹여 킵바이블에서 배운 지식으로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 가셔서 다른 교인이나 목사님에게 무작정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거의 대부분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 아무 유익이 없고 논쟁과 분란만 일어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형제님과 가정이 더욱 구별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정진하시면 족하다 생각됩니다.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3-12-02 10:16:16 | 김대용
자주 들어와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 주일예배를 마치고 서원록 양식을 받아 왔습니다. 오래 전에는 서원록을 써서 교회에 제출을 했지만 몇년 전부터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쓰지 않고 있습니다. 제 아내와 어머니께서는 왜 작성을 하지 않느냐고 여러차례 얘기를 했지만 제 임의로 작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톨릭에서 하고 있는 고해성사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하고 전 교인의 기도제목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목회자가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에 합당할까? 라는 의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서원록에 대한 합당한 구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2013-12-01 21:30:03 | 함치선
참으로 도전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단순한 진리 하나만으로 충분해야 하는데, 화려한 쇼와 이벤트에 길들여져버린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볼때 참...답 없다..하는 답답함도 들지만.. 형제님의 말씀처럼 돌아가야지요... 단순한 진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 세대가 하나님 앞에 증명해 보였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샬롬!!
2013-11-29 20:41:01 | 오광일
 킹 제임스 영어 성경,   셰익스피어보다 더 막강한 힘으로 영어를 전파했으며, 17세기 청교도 혁명(제임스 왕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이 때 처형됨)에서 정치적 논쟁을 가능하게 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문장들은 미국에서 권리와 정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의 주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언젠가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는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은 킹 제임스 성경의 이사야 40:4-5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미국 최초의 로마 카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조차도 취임 연설에서 “험한 땅은 평탄해질 것이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 만물이 그 모습을 함께 보리라.”라고 이사야 58:6절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77년에 킹 제임스 성경의 우월성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새로 번역하게 해 주십시오. 폐하.” 청교도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존 레이놀즈의 한 마디는 성경의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제임스 왕(제임스 1세)의 전임 왕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시로 1568년에 비숍(Bishop: 주교, 감독) 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지만, 청교도들은 이 성경을 신교황주의를 옹호하는 영국 왕실 감독파(성공회) 세력의 도구로 생각했고 제임스 왕 본인조차도 이 성경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존 레이놀즈와 같은 청교도(요즘의 장로교인들)들은 1560년에 제네바의 칼뱅 치하에서 번역되었던 제네바 성경을 선호했습니다. 이 성경의 특징은 주석이 많았으며, 특히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폭군(tyrant)이라는 단어가 이 성경에는 400번도 넘게 등장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폭군은 누구를 얘기하는 것일까요?   제임스 왕은 ‘감히 영국 교회의 머리인 왕에게 멋(?)대로 덤비는’ 제네바 성경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비숍 성경을 바탕으로 번역하라고 왕이 요구했음에도 킹 제임스 성경 중에서 비숍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이 8%도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번역자들은 왕에게 충성을 했다기보다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주는 일절 달지 말라. 제네바 성경에 실린 주해를 살펴보니 ... 몇몇 내용은 지극히 불공평하고 거짓되고 선동적이며, 위험스러운 반역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그 외 제임스 왕의 지시사항은 충실히 지켜졌습니다.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번역자들 중 란셀롯 앤드루스는 왕실 감독파의 대표자였고, 존 레이놀즈는 제네바 성경을 선호하며 왕에 반항적인 청교도 무리들의 대표자였습니다. 또한 탁월하며 믿음이 충만한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파벌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요? 본인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믿습니다.   제네바 성경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무리들(장로교의 ‘노회’라는 말을 왕 앞에 써서 왕을 화나게 했던 사람들)은 그 땅에 정착하면서 호전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청교도의 특징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이들은 개척으로 영토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자 ‘국가’의 권력과 지원으로 성경 교육을 의무화했습니다. 애덤 니콜슨에 의하면 17세기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이단, 주술, 신성모독, 우상 숭배, 안식일 파괴 같은 온갖 범죄를 처리하느라 민사 법원이 항상 북새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죄악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성경이 필요했고, 분리주의적 성격이 강한(감히 왕에게 덤비는) 제네바 성경은 내려오고 이 때부터 미국은 킹 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영어를 신대륙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언어로 거듭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왕 대신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이 통치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선포하게 된 것이 역설적이게도 킹 제임스 성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자, 윌리엄 틴데일이 선보인 수많은 단어와 구절들이 오늘날의 영어에 녹아 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Let there be light(빛이 있으라) 창 1:3 not my brother’s keeper(내 알 바 아니다) 창 4:9 filthy lucre(더러운 돈) 딤후 3:3,8 lu- : Lucifer(마귀, 사탄), luxury(화려함) - 탐욕,교만과 연관되어 있는 단어들입니다.   fight the good fight(싸우려면 의롭게 싸우라) 딤전 6:12, 딤후 4:7 flowing with milk and honey(젖과 꿀이 흐르는) 출 3:8,17 the apple of his eye(눈동자) 신 32:10, 시 17:8 a man after his own heart(죽이 맞는 사람) 삼상 13:14 the spirit is willing but flesh is weak(마음은 굴뚝 같은데 몸이 안 따른다) 마 26:41 signs of the times(시대의 징후) 마 16:3 ye of little faith(믿음이 부족한 자) 마 6:30, 8:26, 16:8, 눅 12:28 eat, drink and be merry(먹고 마시고 즐겨라) 전 8:15, 눅 12:19 broken-hearted(상처받은 마음) 사 61:1, 눅 4:18(킹 제임스 성경에는 dash가 없습니다.)   사랑침례교회 사이트에 접속하실 때 창으로 뜨는 “영화 : 세상을 바꾼 책(The Book That Changed The World)”를 함께 보시면 감동이 더욱 넘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 도서 : 세상을 바꾼 12권의 책/멜번 브래그 저/이원경 역/랜덤하우스, 2007
2013-11-29 18:45:30 | 송호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네요. 지당합니다. 사전적인 의미의 '겸손'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 가능한 것이고 창조물인 인간에게 해당하는 겸손은 먼지와 같은 창조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뿐이고 그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겸손 즉,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를 보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한한 은혜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그제야 우주를 가르는 이 위대한 진리 속에서 사람은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미처 글로 담지 못한 내용을 보충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13-11-29 16:39:04 | 김대용
김** 형제님께서 '드디어'라고 표현해주셨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품성을 단 두 마디로 표현한다면 『........ 자기를 낮추시고 ........』 (빌 2:8) 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높은 분이 아니면 낮아질 수 없는데, 겸손이 낮아지는 것이라면, 더 이상 낮아질 것이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직시하고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013-11-29 13:28:47 | 류인선
아멘입니다. 복음으로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억지로 산소호흡기를 씌워놓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구분도 안 되지요. 형제님이 지금은 청년들과 힘을 합쳐 귀한 일을 하시되, 머지않아 귀한 자매님을 만나 결혼해 좋은 목회자가 되시면 참 좋겠습니다. 파이팅~!! 참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2013-11-28 23:33:37 | 김재욱
흔히 청년 혹은 청춘을 아직 활짝 피어나지 않은 망울이 맺힌 꽃봉오리에 비유합니다. 저의 청년기는 20대를 고스란히 지내온 9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응답하라~!’ 라는 제목으로 90년대 청춘의 다양한 군상을 다룬 드라마가 추억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90년대도 이제 어엿하게 과거 대접을 받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청년기는 고등부, 청년부를 거쳤던 교회 생활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소위 경배와 찬양 문화가 전국적 열풍을 일으켰던 90년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함께 이런저런 찬양집회를 쫓아다니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 애쓰기도 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캠퍼스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명한 선교단체에서 그들의 뜨거운 열정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군 전역 후에는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아는 대형교회에 출석하며 수천 명이 넘는 청년부와 미국에서 직수입한 첨단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 속에서 나를 변화시킬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저는 제 나이에 걸맞지 않게도 아직 미혼이기에 청년부에 속하게 되는 호사(?)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 청년의 시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보내야 하며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당시 다니던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집에 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늦은 밤에 항상 한쪽에서 기도하시던 여자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고등부 같은 학년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안 들으려 해도 한쪽에서 열성적으로 기도하시던 그분의 기도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가족, 특히 자녀들을 위한 기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어머니 뜨거운 기도를 받고 자란 제 친구는 그 후 무난하게 결혼하고 자녀도 낳고 무난하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무난한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볼 수 없는 교인이 되었다는 것, 바른 성경이나 바른 교리 찾아 고민하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그저 원만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그 친구에 대한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과거 저도 가끔 경험했던 교회 간증집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흔히 ‘전도 왕 모 집사’라고 해서 열정적인 전도 혹은 교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로 유명한 여 집사가 초청되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역설하는 전형적 모습이 연상되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런 간증에 흔히 등장하는 것이 자녀 자랑입니다. 대략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기도를 심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자녀들이 세상적으로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전문 직종에 진출해 엄마에게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하라고 용돈을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었다는 자랑에 회중들은 이내 아멘을 합창하곤 했습니다. 과연 그 뜨거운 어머니의 믿음의 기도를 받아먹고 자란 자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간증집회에 자주 거론되던 그 많은 잘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사회 곳곳에서 리더로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원만한 기독교인이 되었을지 몰라도 비진리와 불법에 항거하고 진리를 위해 손해 볼 수 있는 크리스천이 되지 못한 이들이 간증에 등장하는 복 받은 자녀들 중 허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크리스천 부모들의 열망은 실상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럴싸한 눈에 보이는 복에 대한 갈망이었음을 과연 숨길 수 있을까요? 코스타(KOSTA)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웬만한 크리스천들은 다 아는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 단체는 해외 여러 국가에 흩어져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앙 수련회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아마도 애초에 이것을 시작한 목사님들의 생각은 해외 유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국내 들어오든 해외에서 자리를 잡든 후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는 리더들이 될 터이니 이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포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분들의 바람은 얼마나 실현되었습니까? 지금도 이 단체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핵심 운영진이라는 분들의 면면 보노라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음을 혼탁하게 하는 이분들이 과연 젊은이들을 이끌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당 홈페이지에서 그 수련회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아도 유학생들이 멀리 타국에서 공부하며 느끼는 고독과 어려움을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의 반응일까요?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필요들을 채우고 현실 속에 느끼는 여러 고민을 나누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과연 이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들이 청년들을 양육시켰던 패턴들이 거의 이와 같습니다. 저는 단언하건대, 이렇게 해서는 복음을 위해, 진리를 위해 손해 볼 수 있는 크리스천이 절대로 양육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들은 그동안 청년들에게 무엇을 심어 주었습니까? 진로와 취업, 결혼 등 미래가 불안정하기만 한 청년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과거 교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바로 비전(vision)입니다. 하나님의 비전 혹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비전 등을 모토로 내세워 뭔가 원대한 가치를 청년들에게 던져주고 그것을 좇아 쉼 없이 달려가면 그 끝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그야말로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전략이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는 젊은 세대를 교회에 붙잡아두는 한국 교회의 방법론이었습니다. 주로 미국에서 검증된 최신 프로그램의 도입과 교회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유지하는 것에 효과만점인 각종 대외 선교활동, 은사주의의 부스러기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받은 감동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특성을 지닌 현란한 찬양 문화 등 정말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지 않고 철저하게 세상에 물든 청년들이 입맛만을 맞추는, 더 나아가 담백한 입맛을 가지고 있던 청년들조차 자극적인 영적 양식에 익숙하게 만들어 버리는 교육이 바로 한국교회가 청년들에게 행했던 교육입니다. 마땅히 진리의 보금자리로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가르쳐야 함에도 많은 청년들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만 있다면 MSG가 잔뜩 들어간 프로그램도 전혀 마다치 않고 도입했던 모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 문화가 그야말로 한국의 크리스천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허리케인보다 더한 광풍으로 감싸 안았던 90년대 초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엄청난 행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경배와 찬양문화를 선도하던 모 선교단체에서 주최하는 ‘올네이션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였습니다. 그 시절 모임을 주최하던 목사가 “88 올림픽 이후 이곳에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라는 감격스러운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당시 그 단체를 이끌던 하 모 선교사님이 그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선교사로 헌신할 청소년, 청년들은 일어나십시오, 거룩한 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청소년, 청년들은 일어나십시오.”라는 외침에 회답해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던 그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액면 그대로 당시 그런 거룩한 가치에 헌신한 청년들이 진정성이 있었고 그 후 잘 양육되었다면 지금 한국의 교회들이 영적 기상도가 이렇게 암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원만하게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갖고 교회 집사로서, 평범하고 성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30~40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와 함께 90년대 청년기를 거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때로 2,000억 원 넘어 들여 지은 웅장한 교회 건물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또 일부는 그렇게 교회를 이끄는 리더들에게 항거해 마치 세상에 이 교회밖에는 갈 교회가 없는 양 분리되어 나올 생각도 못하고 끊임없이 아옹다옹하기만 합니다. 그들은 또한 전임자가 물러난 후 새로이 담임을 맡은 40~50대의 젊은 목사들이 이전보다 더욱 악하게 교회를 이끌어도 대형교회 교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꿋꿋하게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에 편입되어 진리로 인한 심각한 고민보다 현실에 순응하며 그 속에서 안식하는 요령을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너무도 바쁘게 땀 흘리며 살아가다가 주일 하루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유일한 낙이요 자부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바른 신약교회가 도대체 무엇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 생각도 전혀 없는 그저 원만한 기독교인 일 뿐입니다. 저는 감히 확신하건대, 90년대 중·고·청년부를 거쳐 온 대부분 한국의 30~40대 크리스천들의 가장 대표적인 현재의 모습들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오 청년이여, 네 젊은 때를 기뻐하라, 네 젊은 시절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들로 걸으며 네 눈이 보는 대로 걸으라. 그러나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 자리로 데려가실 줄 너는 알라. 그러므로 슬픔을 네 마음에서 제거하며 악을 네 육체에서 치우라. 어릴 때와 젊을 때는 헛된 것이니라(전11:9~10). 아마도 청년에 대한 구절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구절 중 하나가 위 전도서 11장의 구절일 겁니다. 이 두 구절에는 청년들의 특징이 함축되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미래를 위해 도전하며 마음에 열망하는 것들을 소유하고자 달려가는 시기가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때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향락에 몸을 내어 맡기는 것이 이 시기의 특권인 듯 행동하는 것이 우리 주위에 흔한 젊은이들의 모습이고 솔직히 상당수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90년대 청년들에게 통했던 교회들의 구호와 프로그램의 효력도 이제는 서서히 그 수명을 다해가는 듯합니다. 세상의 유혹은 더욱 강렬하게 조직화하며 자극적이 되어 가는데 교회들은 세상과 대항하고 그 흐름에 역행하기는커녕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 호응해 따라가던 그 발걸음조차 이제는 힘겨워 보입니다. 그나마도 이곳저곳 심지어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들까지 몰려들던 대형교회의 청년부마저도 아주 조금씩 위축되고 그 위상이 추락하여 갈 때쯤이면 정말 한국 기독교는 암울한 쇠락의 시대로 본격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독립침례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독립침례교회의 청년부도 당연히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분리되어 온 귀한 지체들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여기도 사람의 속성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며 역설적으로 독립침례교회 청년부를 경험하며 왜 이전 일반 교회의 청년부 담당 사역자들이 그런 현란한 프로그램과 세상의 시스템을 청년부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욕구와 열망을 충족시키지 않고는 그들을 모을 수 없다는 일반적 원리를 청년부 사역자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20대 중반의 몇 년을 보냈던 서빙고의 한 대형교회는 청년들의 주일 예배장소 중 하나로 홍대의 유명 클럽을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청년 유흥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세상 속으로 침투하는 사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욕망의 카니발의 벌어지던 장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행한다는 것은 사실 치기 어린 의욕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참신함과 진취적인 것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들의 청년부 문화의 극단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사용해 청년들을 모으고 그런 행위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그것을 또 다른 교회에서 벤치마킹을 하며 복음이 빠진 속된 부흥기법만 난무하는 청년부가 곳곳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는 단순하고 명료하며 담백한 복음만을 가지고는 청년들에게 다가가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 보입니다. 더불어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니라 이유 없는 기독교 안티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늘어나고 복음은 이전보다 더욱 젊은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11장 9~10절은 세상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청년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권면을 합니다. 노년에나 생각해야 할 인생의 마감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청년 시절부터 묵상하라는 선명한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교회들은 청년들에게 세상의 관념에서 보아도 거부감이 없는 교훈만을 주고 양육해 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도전, 진취적 기상, 열정적 헌신, 창의적인 활동, 심지어 세상에 나가 높은 고지를 정복하라는 ‘고지론’까지 모두 도전하고 쟁취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크리스천 청년들은 세상에 나아가 건실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청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면 매우 큰 문제입니다. 보이는 것들의 가치를 초월하는 영존하는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전도서 11장의 교훈을 교회에서조차 청년들에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진정 암울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청년들이 추구해야 할 불변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보존되는 영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고전3:12~15, 고후5:10) 더불어 몇십 년의 짧은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쇠락하는 인간의 청춘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허무할 뿐이라는 단적인 선언이 명료한 진리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전11:10) 효율성을 자랑하는 세상의 기법으로 부흥하는 교회들의 청년부가 그 위세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청년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허약하고 헐벗은 초라한 영적 상태에 처한 중년이 될 뿐임을 우리는 지난 세월의 교훈 속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담백하고 깨끗한 복음의 위력으로 청년들의 삶을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 때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진리의 횃불이 청년들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말씀을 수호하고 많은 교회들의 그릇된 행위들을 정확히 분별하며 바른 교리 안에 굳건하게 서서 좁은 길 가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들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세상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이전 시대에 없던 인면수심의 젊은이들마저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삭막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시대의 영적 상황이 암담할수록 더욱더 세상의 가치가 아닌 영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진리로 인해 청춘의 꽃봉오리를 활짝 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청년들이 일어나는 참된 부흥이 이 땅 곳곳에 허락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내가 온 마음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오 내가 주의 명령들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숨겼나이다. 오 찬송을 받으실 주여, 주의 법규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내 입술로 밝히 드러내었으며 모든 재물을 기뻐하는 것 같이 주의 증언들의 길을 기뻐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고 주의 길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 자신이 주의 법규들을 기뻐하고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119:9~16).
2013-11-28 19:58:20 | 김대용
예, 시님 사랑께서 계신 곳에서도 여건상 자주 모이지는 못하지만, 성경신자들의 모임을 하신다는 소식 접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이 뜨거운 그곳의 열정이 좋은 결실을 맺길 저희도 함께 기도드립니다.^^
2013-11-26 19:38:21 | 최문선
참, 재미있는 영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눈을 허락하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보며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것은 너무도 귀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얼마나 연약하고 한계가 많은가 하는 것은 손가락을 눈앞에 가져가 조금만 빨리 움직여 봐도 흩어지는 손가락의 잔영들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2,000억이 넘는 건축비를 소비한 강남의 모 교회가 드디어 입당하여 첫 예배를 드렸다 하여 단순한 호기심에 어젯밤 집에 와서 해당 교회 홈피의 영상을 구경했습니다. 예배 사회를 맡은 목사나 설교를 하는 목사나 숨기려 해도 얼굴에 나타난 상기된 표정과 감격을 숨길 수 없더군요. 해당 교회 교인들도 신문지상까지 오르내린 그 수많은 논쟁과 분열을 뒤로하고 초현대식 건물의 웅장함에 이때만큼은 매료된 듯 보였습니다. 보이는 것의 권능은 이렇게나 강렬합니다. 문득 수많은 풍파를 지나 바른 신약교회를 찾아왔다는 소수의 무리도 과연 이 보는 것의 권능에서 자유로울까 생각해 봅니다. 보이는 현상에 기뻐하고 좌절하고 무언가 일이 잘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춤을 추다가도 뭔가 썰렁해지면 이내 곧 풀이 죽고 불평이 나오지는 않은지, 절대 사람을 외모와 세상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면서 실상 철저하게 사람을 그런 기준으로 판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능력이 넘치고 모자라고를 떠나 모든 사람을 귀하게 치우침 없이 대한다고 하면서 절대 그러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를 바로 저 자신부터 돌이켜 살펴보겠습니다. 보이는 것이 소유한 이 강렬한 권능에 거의 모든 인간의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려도 제발 나 혼자는 이 무리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항상 밝은 미소와 활력 넘치는 말과 글로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11-25 17:21:46 | 김대용
https://www.facebook.com/photo.php?v=547296392020717 보이는 것들, 세상은 얼마나 허망한 것들이 될 수 있는지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영상을 올렸습니다.   은사주의, 기복신앙, 오순절운동, 성령충만, 기도응답, 관상기도, 경청기도, 영성훈련, 방언훈련, 성령체험, .... 수많은 모습들로 사람들은 표적과 증거를 찾아 다닙니다. 심지어 꿈을 꾸고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거나, 기도중에 떠오른 생각들도 기도응답이라고 포장하여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매우 지혜롭고 알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실체를 밝히 드러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여 주신 바른 성경 말씀(킹제임스 흠정역)이 캄캄한 암흑 한가운데 빛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내 눈에 아무 증거 보이이지 않아도 킹제임스 흠정역 말씀 가운데 기록된 신비한 약속들을 믿는 믿음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히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013-11-25 13:58:45 | 최호준
최문선 자매님의 열정이 참 대단합니다. 부디 뉴질랜드 성경 신자들의 모임이 그곳에서 진리의 등대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부어지길 소망합니다. 멀리서나마 마음 깊이 응원하겠습니다.
2013-11-25 11:58:35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