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에는 성경 예언에 대한 분석가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언을 이용해서 돈만 벌기도 하고
헛된 예측을 해서 성도들을 우습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성경 해석 면에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론을 펴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의 예측가들을 분석한 자료가 있으니
여기서 +로 평가된 분들의 책이나 글만 읽는 것이 좋습니다.
http://www.soundchristian.com/prophecy/who/
감사합니다.
샬롬
2014-03-10 14:10:37 | 관리자
요즘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 대한 나쁜 소식이 여기저기서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안 하면 교회 생활하기도 어려워질 것 같다는 소식입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십일조라는 뇌관이 터지면서 크게 위축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바라기는 대형 교회 목사들이 목회의 본질을 잘 깨닫고 양들을 섬기는 자세로 목회에 임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http://m.shinmoongo.net/a.html?uid=53124
2014-03-10 14:00:01 | 관리자
네 기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습니다.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3-08 18:03:52 | 관리자
저자 인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신성종이 아니라 신성남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천국과 지옥 체험하고 와서 책까지 쓴 충현교회 전 목사죠.
2014-03-08 15:56:36 | 김재근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기독교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2014-03-07 22:11:16 | 김상진
윗글에 나오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기사들이 있어 참조하시라고
링크 주소를 올립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02/2013050203064.html
http://www.cchannel.com/news/news_cch_view.asp?seq=0000007468&curpage=1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7123804&cp=nv
2014-03-07 20:38:31 | 김대용
네~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3-07 19:22:08 | 관리자
상단에 '목사님'을 '모사님'이라고 오타가 난 것 같습니다.
2014-03-07 19:12:50 | 김건
요즘 대형 교회 특히 사랑의 교회 관련 글들이 매체에 종종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마도 그나마 개신교계를 인원수와 물량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대형 교회들이 내부의 부패로 인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면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계는
급격하게 위축되며 본격적인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부디 이런 일들을 통해 교회를 비즈니스로 알고 사장 행세하는 목사들이 회개하고
또 무지한 성도들이 계몽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 글은 2014년 3월 7일 자 글이고
저자는 신성남으로 되어 있습니다(목사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음).
모든 교회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3000억 호화 예배당과 중세 삽질의 부활
건물 성장은 교회 성장이 아니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377
글쓴이: 신성남
“이 ‘돈’에 환장한 목사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가난한 목수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느냐. 이 ‘복’에 환장한 교인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던 세례 요한을 존경한다고 말하느냐. 그리고 이 ‘건물’에 환장한 교회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가정에서 모이던 초대 교회의 그 순수한 신앙을 따른다고 자랑하느냐.”
돈과 세속적 복과 그리고 교회당 건물은 이제 한국교회가 애지중지하는 애완용 우상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사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존경할 만한 목회자와 바른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의 글은 필자의 진심입니다.
하여튼 바벨탑처럼 높은 아방궁을 하나 세워 놓고 떼로 몰려가서 ‘솔로몬의 성전’이니 뭐니 하며 수선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냄새나는 잔칫상에 부끄러운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고 갖은 교언영색으로 두꺼운 얼굴에 서로 금칠하는 일부 거룩하신 목사님들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없군요.
서울에 교회당이 모자라나
몇 해 전 사랑의교회는 장소가 너무 비좁아서 신축한다고 공표했습니다. 그 심정은 필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처럼 초호화판 아방궁을 세운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처음엔 2,100억 원이라고 하던 건축비가 사전에 누구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려 3,000억 원으로 슬그머니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최종 건축비가 얼마가 될는지는 정말 며느리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요란한 잔치가 대충 끝이 났다면, 이제라도 취기를 좀 몰아내고 옆 동네 미자립 교회들을 한번 가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고작 몇십 평도 안 되는 셋방살이 작은 예배당마저 자리를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교회들이 지금 아주 널렸습니다. 즉 현재 서울에는 교회 수에 비해 교인이 부족한 것이지, 결코 교회당 건물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1960-70년 사이 전체 개신교 교인 수는 412%나 증가했고, 1970-85년 사이에도 103%나 증가했지만, 1985-95년 사이에는 그 증가율이 35%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5-2005년 사이에는 14만 4천 명이 줄어들어 급기야 -1.6%의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동안 가톨릭 신도는 무려 220만 명이나 늘어나서 74.4%의 초고속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인 수는 줄고, 자리가 빈 교회들이 매년 늘어나고, 또한 은행 빚을 못 갚아 경매로 넘어가는 교회들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는 초대형 신축을 용감하게 단행했습니다. 극심한 건축 반대 여론은 그냥 무시했습니다.
자신들만이 바른 교회라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유명한 제자훈련은 도대체 왜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훈련을 했으면 이젠 장성한 제자들을 이웃 미자립 교회들에 조직적으로 파송해야 옳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실전 배치는 평생 미루고 허구한 날 비대한 몸집만 키우며 끝까지 훈련만 받다가 그냥 편안히 돌아가시겠다는 말인지요.
‘아방궁’은 중국 시황제가 위수의 남쪽에 세웠던 호화롭고 거대한 궁전입니다. 후궁들의 처소였던 이 왕궁은 수많은 미희들로 가득했으나 그 진나라는 고작 15년만에 멸망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최초로 초호화 성전을 지었지만 도리어 나중에 후궁들에 둘러싸여 음란한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금으로 성전을 치장하고 그 화려함을 자랑했으나 왕과 백성들은 오히려 메마른 광야에서 천막 생활할 때보다 더욱 극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어리석고 부패한 인생들이 하는 일이란 늘 이 모양입니다.
결국, 그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은 오직 여자와 사치와 향락밖에 없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들 또한 간통과 호사와 공금 횡령으로 온 동네 망신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완공된 서초예배당을 보며 ‘일단 짓고 나면 땡이다’ 하며 혹시 기뻐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대단한 착각입니다. 무리한 건축으로 인한 엄청난 은행 빚의 상환 등 진짜 어려움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9천 명이 모이던 제자교회가 담임목사의 부정행위가 들통난 후에는 2천 명 이하로 급감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우선 당장 교회의 회복을 갈망하는 ‘마당기도회’에 대한 치졸한 방해와 압력을 즉시 철회하지 않는다면, 그런 난관은 더욱 구체화될 것입니다.
몇 해 전 ‘거룩한 땅 밟기’ 운운하며 새 예배당 부지에 빨간 리본들을 잔뜩 깔아 놓고 서낭당처럼 신성시 하던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기존 강남예배당의 마당을 쓰레기장 취급하며 별로 거룩하지 못 한 행동을 하시는 것인지요. 이젠 그 ‘거룩한 땅’마저 토사구팽을 하시나요. 이는 너무 모순적인 처사가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출입문을 용접하고 높은 담을 올리며 갖은 수단 다 동원해도 결국 양들의 의로운 분노를 막기는 힘들 것입니다.
삽질로 망한 중세 교회
사전을 찾아 보니, ‘삽질’이란 말은 ‘쓸모 없는 일을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관용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국교회의 예배당 대형화를 통한 건축 경쟁 행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단어는 드물 듯 합니다.
같은 소리음이라도 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 사용하면 듣기 싫은 소음이나 잡음이 됩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규모와 용도가 적절한 건축은 예술이지만, 실속 없는 허장성세용 건축은 삽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기성 면죄부까지 팔며 무리하게 추진한 초대형 건물 ‘성베드로성당’의 공사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공교회가 저지른 무분별한 건물 삽질의 아주 원조 격인 셈이지요. 당시 교회의 내부는 썩고 또 썩어 있었는데 오히려 외형만 키우고 겉치장에 열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루터의 그 묵직한 쇠망치가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 현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또 못질해야 정신을 차릴까요.
어두웠던 중세 천 년 동안 그 시대 교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고작 삽질 사역의 유산인 대형 건물들뿐입니다. 이스탄불의 그 거대한 성소피아성당도 이젠 관광용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한 때 융성했던 유럽의 개신교도 형편은 비슷합니다. 큰 건물들만 딸랑 남겨 놓고 지금은 거의 다 망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모텔, 식당, 상가, 그리고 술집 등 다른 용도로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 속의 수많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귀한 헌금을 허비하며 이렇게 허망하게 변해 버릴 건물에 열심히 삽질하다가 쫄딱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교회가 그 본질을 상실하면 언제나 망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사가 보여 주는 냉엄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팔아 가난한 신도들 장바구니 돈까지 짜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행 빚까지 돌려 막으며 대형 건축을 하는 행위가 그보다 무엇이 더 나은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 한쪽에서는 계속 문을 닫고 있는데 말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따르는 무리의 푼돈을 걷어 허름한 초막이라도 하나 지은 적이 있으셨던가요.
과연 서초동의 그 무슨 쇼핑몰같이 생긴 사치스런 벽돌 덩어리 속에서 종의 형체로 낮게 오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정신과 가난한 목수의 마음을 진정으로 잘 전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과거 거대한 헤롯성전 안의 상인들처럼 본격적으로 좌판이라도 한번 멋있게 펼쳐 보려는 것인가요.
그러나 그처럼 크고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절대로 잊지 마십시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고상한 아방궁에서 철 따라 냉난방 틀어 놓고 품위있는 예배를 즐기는 동안, 같은 시각 다른 한편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천 길바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힘든 삶을 버티고 있는 줄 진정 알기나 하시는지요.
반면에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풍족지 않은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에 먼저 힘을 쏟았습니다. 전도나 선교를 위한다는 허구적인 명분으로 자신들을 위한 대형 예배당 건축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정작 배우고 닮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의 검소한 사역이건만, 많은 대형 교회들은 하필이면 삽질하다 망한 중세 교회를 닮아 가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경향교회, 제자교회, 왕성교회, 경서교회, 광성교회, 그리고 사랑의교회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십시요. 이 외에도 주목할 만한 교회가 ‘물 반, 고기 반’으로 아주 차고 넘칩니다. 이를 보면 배도적인 목사 귀족화, 신도 우민화, 건물 대형화, 복음 기복화, 그리고 교회 사유화에서 자유로운 대형 교회가 요즘 과연 몇이나 되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중세 삽질의 부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려면 ‘왕궁’으로 가야 하고, 선지자를 만나려면 ‘광야’로 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눅7:24-26).”
예수님과 제자들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틈만 나면 아방궁 같은 건물을 세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라면, 신도들이 그 광야에서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들이 아니라 ‘선지자’를 만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요즘 왜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가 급증하고 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어떤 교회에는 부드러운 긴 옷 입은 자들만이 설치고, 정녕 선지자는 보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줍지 않은 박사모를 쓴 자들은 넘치는데, 예수님 고난의 가시관은 잘 보여 주지 않습니다. 물질적 축복은 넘치게 노래하는데, 십자가의 도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한 반복성 건물 삽질과 기만적 가르침에 염증이 나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진정한 악성 안티는 일부 무신론적 논객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귀족 교회의 ‘거짓된 목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지만, 이 종교 상인들은 반대로 신도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은 신축된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이야말로 성베드로성당에서 종지부를 찍었던 그 ‘중세적 원조 삽질’의 화려한 부활이 아닌가 그리 의심하고 있습니다.
건물 성장은 교회 성장이 아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고작 나귀 새끼를 타셨는데, 초대형 건축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은행 빚을 지고 있는 교회의 목사가 수억 원의 연봉을 받고, 기사가 딸린 최고급차를 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대형 콘도를 분양받아 골프치며, 비싼 특급 호텔에 가서 운동한다면 이게 정말 종의 모습일까요. 게다가 거액의 두 자녀 유학비까지 모두 교회 돈을 가져다 채웠다고 하는데 정말 듣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난 것입니까. 모두 순진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 바치라고 뜨겁게 설교하고 그 주머니를 열심히 흔들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신도들이 무슨 돈 내는 기계인가요. 입만 열면 ‘하나님께 바치라’며 설레발 치던 소중한 헌금을 엉뚱하게 목사가 사치를 떠는 데에 허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담임목사는 한 부목사가 나이 드신 성도들에게 모리배처럼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며 폭력적 언사를 하는 행위도 마냥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목사는 한 여성도가 집단 폭행 당하는 것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았다지요. 이처럼 담임목사에게 애완견처럼 충성하는 부목사들 중 상당수가 군목 출신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군견’도 저런 짓은 안 할 것입니다. 물론 군 사역에 성실히 수고하시는 다른 군목님들께는 너무 민망한 일입니다.
그리고 귀족 목사들 중에는 ‘의전’을 핑계로 최고급차를 굴리는 분들이 제법 많다고 하던데, 이게 종이 할 처신인가요. 하여간에 하늘 아래에 의전이 필요한 종놈이 있다는 말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참된 경건은 눈물 연기와 잔재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진정 자숙하기를 원한다면, 만날 성도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려 하지 말고 목사들부터 손수 그 비싼 차들을 팔아서 실용적인 차로 바꾸고 남은 은행빚이나 조금이라도 더 갚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30년간 영국 교회는 무려 5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약 30% 이상의 교인 수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건물 삽질에 비해 신도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 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건물 확장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의 바른 성장입니다. 큰 건물들만 잔뜩 세워 놓고 무너지고 있는 유럽 개신교를 보십시요. 건물 성장은 결코 교회 성장이 아닙니다. 따라서 일부 목회자들은 목사 말 잘 듣고 헌금 잘하는 맹신도를 키워 교회 외형만 확장할 궁리를 행여라도 하지 말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바른 성도를 키우는 데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전 건축’이라는 기만적 명분을 빙자한 경쟁적 건축을 이제 즉시 멈추기 바랍니다. 건물이나 재력 또는 교세를 자랑하는 교회는 이미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타락한 교회일 뿐입니다.
서초동의 그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아무리 잘난 건물이라도 감히 성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만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삽질로 목회하던 목사님들은 더 이상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요. 목회자로서 그런 거짓말은 면죄부 판매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바르게 성장해야 비로소 진정한 교회 성장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2014-03-07 18:55:42 | 관리자
오늘 또 이런 글이 들어와서 소개합니다.
사랑의 교회가 소위 목사 찬양가를 만들었다가 폐기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곳곳에서 생기는데
이런 배경엔 성도들의 무지가 큰 몫을 합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며 진리 안에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사랑의교회 '목사님 찬가' 만들어....권사들 반대로 폐기 (국민일보 김지방기자)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175967414&qb=7IKs656R7J2YIOq1kO2ajCDrqqnsgqzri5gg7LCs6rC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xEgJU5Y7twsstzAv3lssssssso-507515&sid=UxmT7XJvLBwAABziCW4
“뜨거운 찬양, 거대한 비전, 따듯한 사랑…” 사랑의교회 ‘목사님 찬가’ 논란
[쿠키 사회]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담임 오정현 목사를 위한 ‘찬가’를 만들었던 사실이 공개됐다.
인터넷 카페 ‘사랑의교회 소통과 회복을 위한 사랑넷’에 최근 한편의 노래 악보가 올라왔다. 제목은 ‘주님께서 세우신 목사님’이었다.
‘찬양 충만 우리 목사님 하이 프레이즈(Hi Praise) 깊은 기도로 모든 성도 하나되어 주께 영광 찬양드리네. 비전메이커(Vision Maker) 우리 목사님, 창조 은사 아이디어맨, 예배 속에 생기 불어 2007년 부흥 기대해.’
여기까지가 1절 노랫말. 후렴구는 이랬다.
‘목사님 뜨거운 찬양, 목사님 거대한 비전, 목사님 순수한 열정, 목사님 따듯한 사랑,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드리세.’
모두 3절까지 있는 이 노래에는 ‘2006년 스승의 날 축복송’이라고 표시돼 있다. 이 노래는 2006년 스승의 날 때 사랑의교회 성경공부 모임을 이끄는 ‘순장’들의 모임에서 악보가 배포돼 실제 연습까지 했으나, 일부 명예권사를 비롯한 성도들이 교회를 찾아가 항의하는 바람에 실제 교회 공식 순서에서 불리진 않았다고 한다. 이 악보를 공개한 이는 순장 모임의 임원들이 나서서 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사랑의교회 당회는 지난달 30일 오 목사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노스웨스트대학 박사 학위 논문 표절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했다. 최근 노스웨스트대가 ‘오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학위 수여는 취소하지 않기로 했다’는 공식 의견을 전해온 바 있다. 오 목사는 표절 문제에 책임을 지고 지난 3월부터 6개월 간 주일 설교를 중단한 상태다.
사랑의교회 부교역자들은 “불과 90 여일 앞으로 다가온 서초예배당 입당과 교회의 질서와 화평의 회복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당회장권이 원활히 수행되어야 할 때”라며 사실상 오 목사의 조기 복귀를 바라는 청원서를 29일 당회에 제출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오는 9일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신축 공사의 공공도로 지하 점유 문제에 대한 1심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출처:국민일보 쿠키뉴스 (2013년 7월 2일)
2014-03-07 18:46:09 | 관리자
사실 온누리교회는 서빙고예배당만 있던 시절인 90년대 중·후반, 군대를 전역하고 꿈 많고 생각도 많던 20대 청년 시절에 제가 3년 정도를 다녔던 교회입니다.
지금 위에 인용된 기사에서 지적하는 교회 확장과 비전교회 건립(사실상의 지교회) 등이 바로 그 시기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온누리교회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수준의 현란한 예배문화를 자랑하며 폭발적인 양적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위 기사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이미 대형교회였던 온누리교회 서빙고예배당으로 한 주에만 백 명 내외의 새 신자들이 밀려들어 와 그 인원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일단 대방동(제 기억으로는) 쪽에 큰 땅을 사고 전교인들이 기도하며 건축에 들어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축 인허가문제 등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온누리교회와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는 분이 소유주로 있던 양재 횃불선교센터를 인수하게 된 겁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설교 영상을 접할 수 있는 고 하용조 목사님은 설교 영상으로 접할 수 있는 온화한 모습과는 어찌 보면 반대로 교회에서 일을 수행하고 조력자들과 사역을 함에서는 말 그대로 불도저 같았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속해있던 온누리교회 청년부의 한 부서에 형이 두란노서원의 팀장이었는데 하 목사님의 일 처리 스타일은 조금의 빈틈이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불곰 같은 리더쉽이라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진을 쏙 빼놓았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추진력과 진취적인 성향이 이런 큰 덩치의 교회를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밤 10시 정도면 수면에 들어 새벽 3시에 기상하는 생활을 수십 년 해 오고 오로지 일밖에 생각 안 하는 사람, 신학생 시절부터 연예인들이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될 것을 직감하고 방송실 식당으로 출근도장을 찍으며 연예인들을 전도해서 연예인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파퓰러한 예배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초대형교회를 일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다 결국 쓰러져간 사람이 바로 하 목사님입니다.
위 기사는 작심하고 온누리교회 리더쉽의 핵심 중의 하나인 확장주의를 비판한 내용으로 아마 온누리교회 교인들이나 옹호자들은 너무 편파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온누리교회가 가장 눈부시게 확장하고 양적 성장을 이룩하던 시기를 직접 목격했던 한사람으로서 분명히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목회에 있어 천부적 재능이 있던 한 인간의 모든 진액이 쏟아부어 졌고 수많은 교인들의 봉사와 헌신으로 일구어진 저 초대형교회는 결국 사탄의 지렛대질 한 번으로 그 모든 찬란한 수고와 사연들이 사악한 마귀의 사역을 돕는 연료로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누리교회의 안타까운 면면은 이미 바른 지각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조금만 손품을 팔면 인터넷을 통해 그런 부분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명백한 사실을 모함이요, 시기와 질투의 산물이요, 사실 왜곡이라고 부질없는 합리화와 자기방어만 할 것입니까? 부디 한사람이라도 더 바르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였나니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닫으사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닫으사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9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며 지식도 없고 명철도 없으므로 이르기를, 내가 그것의 일부를 불로 태우고 또 그것의 숯 위에서 참으로 빵을 굽기도 하며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그것의 나머지로 가증한 것을 만들리요? 내가 나무줄기에 엎드리리요? 하는 자가 없나니 20 그는 재를 먹으며 속아 넘어간 마음으로 인해 옆으로 벗어났으므로 자기 혼을 건져 내지도 못하고 또 이르기를, 내 오른손에 거짓된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사44:18~20)
2014-03-07 13:14:58 | 김대용
소설에 나오는 ‘김건축 목사’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이 누구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짐작할 만합니다.
책 소개에서는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인지 부인하지만 결국 논픽션을 기반으로 한 소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옥성호 형제님은 불과 얼마 전에 본 소설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며 철저하게 사실을 보도한 내용의
‘왜 Why?- 한국 교회 미래를 위한 특별 보고서’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104618
비록 일반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이지만 옥성호 형제님에 대한 성경 신자들의 애정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 많은 목사들이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가장 목사로서 자격이
출중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옥성호 형제님은 아버지가 담임하던 교회와 척을 지고 외로운 별똥별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그의 예리한 비판정신에 편승해서 이득을 보려는 불순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소식이 가끔 들린다는 것입니다.
https://www.facebook.com/newsnjoy/posts/457816984262545
앞으로도 성경 신자들의 믿음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부디 그의 사역이 쇠락해가는 한국교회에 작은 빛이라도 던져줄 수 있길 소망합니다.
2014-03-07 12:09:43 | 김대용
프렌차이즈 교회의 실상과 허상을 담은 글을 누가 보내줘서 올리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온누리교회의 맥도널드식 운영과 캠퍼스 체제를 비판한 글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온누리옹호자들의 항의가 있어 아래 자료를 올립니다.
http://inyouwithyou.blog.me/10110010842
제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들은 이야기, 언론 기사에 주로 근거합니다. 추가 정보나 세부적인 정보가 있으면 업데이트하고자 합니다.
온누리교회 잔혹사
http://inyouwithyou.blog.me/10125434606
1. 온누리교회 양재 성전 - 지역교회초토화
온누리교회가 횃불회관을 인수(?)하여 소위 양재성전을 세우자마자 인근 양재동, 서초동 인근의 수십 개 개척교회가 문을 닫았고 여러 중소형교회가 사실상 몰락하였다. 사랑의교회 한 청년은 전에 양재동에 소재한 교인 300명 정도의 견실한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온누리 양재 성전이 세워지자 6개월이 안 되어 교인 100명만 남게 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수지지역으로 교회를 이동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회자와 남은 교인들이 받은 상처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양재 성전은 서빙고와 함께 양대 항공모함 모선 구조로 전국적인 선단망을 갖추는 기지 역할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투자하였다. 온리교회서빙고본당에 다니던 교인들이 양재성전으로 이동하기도 하였지만 양재성전의 성장 과정은 한 마디로 지역교회에 대한 침탈의 과정이었다. 양재 성전에 신도 1만명이 증가되면 서울 지역 특히 인근에서 적어도 100개교회에서 100명씩의 교인들이 빠져나간 것이 된다. 특히 수평이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20-40청년 그룹이므로 지역교회들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서초구청 통계에 의해면 서초구 관내 10년 전 283개 교회였는데 현재 187개로 거의 30%의 교회들이 사라졌다. 그 모두가 온누리교회 때문은 아니지만 양재동 서초구청 인근의 경우 양재성전의 영향력은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수원 영통 온누리교회 지성전 건립 시도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어 온누리교회 비전교회의 허구성과 비윤리성이 드러난 대사건이었다. 지역 중소교회들이 대책위를 만들고 항의하고 하용조목사 면담을 하여 여론에 밀려 온누리교회가 한 발 물러선 사건이었다. 하지만 온누리교회는 저항이 약한 지역에 쳬계적으로 지성전 캠퍼스를 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더욱 은밀하게 더욱 치밀하게. 문어발식으로. 지역교회들의 반대와 항의가 거세자 독립교회로 추진하겠다는 듯이 제스처를 하고서는 캠퍼스를 세웠으며 결국은 독립교회를 세운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침내 온누리교회는 전국적인 캠퍼스망을 갖추고 전세계적인 비전교회 시스템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 아래 언론기사 참고 -
3. 얼바인 온누리교회
2003년인가 2004년인가 온누리교회 부목사 한 사람이 미국 남가주 지역의 얼바인에 온누리비전교회를 세웠는데, 그야말로 교회개척이 아니라 교회 선전과 서울 온누리교회 시스템과 물량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얼바인온누리교회는 내가 살던 곳과 지근거리에 있고 나는 인근의 미국인교회에 출석하고 있어 그 진행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Church Planting이 아니라 임플란트였다. 단번에 수백 명의 교인들을 모아 온누리비전을 선전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하용조 목사가 야망에 찬 경영인이자 장사꾼이 되어간다는 평가가 그 당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용조 목사의 초기의 순수한 진정성과 거룩한 비전은 아마 그 때부터 퇴색되고 교회가 속물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4. 보스톤 온누리교회 이웃교회 침탈
보스톤 온누리교회는 치밀하게 지역 한인교회들의 지성인들을 흡수하거나 뻬내어간 대표적인 경우이다. 보스톤온누리비전교회가 세워지자 마자 보스톤 지역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휘청거렸다. 일례로 캠브리지의 어느 한인교회는 백수십명의 교인들이 출석하는 알찬교회였는데 온누리교회가 세워지자 마자 단 2주만에 교인이 60명만 남게 되었다. 청년들이 다 떠나고 하바드대학출신 소그룹의 리더가 맴버들을 몰고 온누리교회로 갔다. 담임목사는 하용조 목사를 직접 만나 항의를 하였고 하용조 목사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연신 사과만 하고 위로할 따름이었다.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받은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온누리교회는 겉으로는 부정하고 있어도 핵심맴버들은 치밀하게 접촉하여 온누리신화를 만드는데 동참시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를 쉽게 옮기는 이민교회의 문화가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온누리교회는 그러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부추기는 가장 대표적인 초대형교회에 해당된다.
5. 국내 캠퍼스 부천, 중국 등등
내가 목격하거나 그 교회 관련자에게 직접 들은 경우는 한국의 부천의 경 경우와 중국 어느 도시 온누리비전교회의 경우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캠퍼스의 담당목사가 담임목사가 아니요 지역비전교회가 별도의 재정권 인사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서빙고 본당에서 담당목사의 해임을 통고하면 비전교회 혹은 캠퍼스의 담당목사가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지고, 발령을 내리면 부목사 신분으로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 재정 역시 지역캠퍼스에서는 결정권이 없다. 현재 서빙고성전에서 교인투표로 담임목사로 청빙된 이재훈 목사는 서빙고의 담임이 아니라 전세계 온누리비전교회와 캠퍼스의 담임목사이자 최종결정권자이다. 왜 이러한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서빙고 성전에서 돈과 인력, 자본을 동원하여 직접 세운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즉 온누리비전교회들과 캠퍼스는 독립교회도 아니라 온누리그룹의 지사인 셈이다. 문제는 각 여러 캠퍼스나 비전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자기 교회가 서울 온누리교회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 사실상 독립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사에서 전무하였던 교회구조가 온누리와 하용조목사의 욕망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건강한 방식의 교회 개척과 설립이란 옥한흠 목사가 그 부교역자에게 독립적인 개척교회를 하도록 돕거나 유진소 목사가 LA온누리교회를 세우는 방식의 독립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LA온누리교회를 유진소목사가 세웠다고 하용조목사가 그를 적대시하고 관계가 단절된 것은 미국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문이다. 이러한 것이 대형교회 목사의 겉과 속이 다른 이미지의 실상이자 대형교회의 화려함과 웅대함 속에 숨겨있는 허상인 것이다. 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일종의 욕망의 바벨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ACTS29비전의 실체와 온누리교회의 기형적 확장 과정은 사실상 유럽 제국주의의 동인도회사나 대기업의 지사 확장 시스템과 다를 바 없다. 브랜드의 힘이요 돈과 자본의 역사이다. 하지만 온누리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고 성경적인 비전의 실현이라고 한다.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행위이다.
6. 언론기사들 - 지성전 체제의 방식의 특징과 신학적 윤리적 문제점 해부
지난 2003년 온누리교회는 장기 계획의 하나로 2010년까지 국내외 30개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대형 프로젝트인 ‘액츠 29’에 따라 수원의 신도시 지역인 영통지구에 지성전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수원 지역의 목회자들은 ‘온누리교회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공동 대응했다. 온누리교회의 지성전이 교세를 확장하는 전략에 불과하며 수원 지역 중소 교회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책위의 김창주 목사는 “온누리교회라는 브랜드를 이용해 지역 교회의 신자들을 뺏는 형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라며 매섭게 비판했다.
온누리교회의 ‘액츠 29’는 지성전에 관한 기독교계의 논란을 불러왔다. 지성전을 건립하는 대형 교회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한 명의 목회자가 있다. 그리고 예배는 중앙에서 송출하는 예배 프로그램으로 대신한다. 마치 네트워크 방송을 통해 원격 예배를 하는 셈이다. 본 교회에 재정·인사·행정 등 사실상 교회 운영을 위한 모든 권한이 예속되어 있고 본 교회의 명칭을 그대로 쓰면서 단지, 위치한 지명을 머리말에 붙여 구분하고 있다. 지성전을 건립하면서 대형 교회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다른 지역에 퍼뜨렸고 신자 수를 확대해왔다. 대기업의 본사와 지역 지사와 같은 개념이다.
논란은 ‘종교 대 기업’이라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선 일각에서는 ‘프랜차이즈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지성전이 중앙 교회의 전도 전진 기지로 기능하면서 주위의 작은 교회를 고사시킨다는 주장은 항상 제기되는 문제점이다.
마치 지역에 진출한 대형 마트가 소규모 슈퍼마켓을 고사시키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지역 담임 목사의 예배가 아니라 TV 모니터를 통해 중앙 교회의 목사가 진행하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시사저널 2009. 1. 7 부분 발췌
월간 ‘기독교사상’은 오는 27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심포지엄 ‘한국교회 지성전체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통해 지성전체제를 심층 해부한다.
◈지성전 설립에 반발하는 중소교회들〓지난 4월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온누리교회(담임목사 하용조)는 300억원을 들여 2010년까지 전국에 30개의 비전교회(지성전)를 설립하는 ‘액츠(ACTS) 29’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하 목사는 ‘28장으로 끝난 사도행전을 잇는다’는 의미의 ‘액츠29’에 대해, “모교회인 서빙고동 온 누리교회와 양재 온누리교회가 항공모함이라면 신자수 2000∼3000명 규모의 30개 교회를 구축함으로 세우는 전략”이라고 밝혔다.
온누리교회는 1호점 양재 온누리교회에 이어 지난달까지 부천· 수원·대전에 2∼4호점을 잇달아 세웠다. 온누리교회 수원 입성 소식에 위기감을 느낀 수원 팔달구 영통지역 중소교회들로 구성된 대책위 총무 정재현(45·새순교회)목사는 “대기업들이 사세 확장을 위해 직영점을 차려 운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프랜차이즈 행태”라며 지성전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태세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 수원 영통지역에 1000여평의 새 지성전을 건립해 이전할 예정이던 온누리교회 측은 일단 ‘독립교회’로 형태를 전환키로 했다. 대책위는 “수원온누리교회의 경우 건립 예정지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있는 같은 교단 교회 측의 동의도 구하지 않는 등 최소한의 ‘기업윤리’마저 어겼다”며 의혹의 눈초 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지성전 무엇이 문제인가〓지성전이란 한마디로 본교회에 종속된 교회다. 독자적인 운영권을 상실한 채 본 교회 목회정책과 행정 지시를 받는다. 지성전 예배때는 카리스마를 갖춘 교회창립자인 본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위성방송 등을 통해 영상으로 방영된다. 신학자들은 대체로 지성전체제를 교회성장제일주의와 개(個)교회주의가 낳은 종교상업주의의 산물로 규정한다.한국일 장신대 교수는 “대형교회의 인지도와 브랜드, 풍부한 인력과 재정적 힘을 자본으로 삼아 대기업의 분점을 여는 방식으로 개교회를 확장시키는 지성전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원리 를 교회성장에 결부시킨 종교적 세속주의”라며 “똑같은 교회들을 복제품 방식으로 양산하려는 시도”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정배 감신대 교수는 “교회론적 시각에서 볼 때 지성전체제는 동종교배로 교회를 열등한 기관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조기연 서울신학대 교수는 “설교자와 신자 간의 인격적 접촉과 교감, 친밀감이 배제된 지성전의 중계예배는 예배라기보다 신앙집회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문화일보 2003. 10. 22 부분발췌
2014-03-07 10:18:51 | 관리자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옥성호 형제가 지은 "서초 교회 잔혹사"라는 책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왜 교회가 이 모양일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꼭 참조하기 바란다.
서초 교회 잔혹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1953
"...김건축 목사의 등장과 더불어 날로 번창하는 서초교회. 그러나 김건축 목사의 눈부신 활약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한 인터넷 언론에 익명의 제보가 들어가면서부터다. 글로벌 미션을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본격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생명을 건 기도의 사투를 벌이고 왔다는 김건축 목사가 수염을 기른 채 나타나 사탄의 무리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저자 :옥성호
기독교 내에서는 드물게 교단을 초월하여 널리 존경받는 사랑의교회 설립자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자 ‘부족한 기독교 3부작’으로 알려진 기독교 분야 베스트셀러 저자다. 아버지가 유명한 목사였음에도 정작 본인은 20대 후반 어느 시점, 기독교에 회의를 느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해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러다 2005년 로이드 존스 목사의 『교리 강좌 시리즈』를 읽던 중 기독교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탄탄한 논리 위에 영성을 더한 설교로 유명한 아버지의 일면을 빼닮아, 2007년 ‘부족한 기독교 3부작’을 통해 비판과 성찰이 사라진 한국 교회에 일침을 가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이드 존스가 그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문학의 세계로 안내한 건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경험한 후, 솔제니친의 모든 저작들을 끌어안고 많은 밤을 지새웠다. 감동은 자연스럽게 창작으로 이어졌다. 밤은 여전히 고독하고 치열했으며, 절망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 고뇌와 열정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생각과 상식이 실종된 채 방황하는 한국 기독교에 작지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자 첫 장편소설 『서초교회 잔혹사』를 탈고하여 오늘 선보인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주 노터데임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MBA를 취득했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특허 전문 솔루션 벤처기업 위즈도메인 시카고 지사를 설립하고, 10년간 미국 전역의 유수한 회사들을 상대로 특허 분석 소프트웨어 포커스트(FOCUST)를 세일즈했다. 2010년 가을, 아버지의 소천 이후 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의 본부장으로 일했으며, 2014년 현재 본인의 1인 출판사 '은보'에서 출판의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옥성호의 한 마디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와서 얘기하면 부모님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공부하기 싫으니까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핀잔을 주셨다. 그 학교에서 매년 서울대를 몇 명이나 보내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느냐고도 하셨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고교 선배 중 한 명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말죽거리 잔혹사>
그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영화니까 당연히 재미를 위해 내용을 꽤나 과장했을 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그 학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영화가 과장은커녕 오히려 실제로 그 학교 내에서 있었던 많은 일을 완곡하게 표현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책을 읽은 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에이, 세상에 이런 교회가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안됐지만 그거야말로 편견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 책 속에 표현된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황당무계할 뿐 아니라 무자비하기까지 하다. 그게 현실이다. 마치<말죽거리 잔혹사>가 내가 실제로 다닌 고등학교의 일면만, 그것도 부드럽게 보여준 것처럼.
후진적인 사회일수록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드러낸다. 그건 성역과 금기가 차고 넘친다는 점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종교를 대상으로 무언가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종교는 여전히 성역이자 금기다.
소설가 황석영은 ‘작가’를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작가란 당대의 한계와 금기를 깨뜨려 일상화하는 사람이다.”
내가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황 작가가 말하는 작가의 정의 비스무리하게라도 다가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나는 금기를 혐오하고 성역을 경멸한다. 무엇보다 금기와 성역은 필연적으로 위선과 거짓을 양산한다. 더욱이 그 금기와 성역이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위선과 거짓이 난무한다.
교회에서는 보통 이런 말을 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신본주의자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인본주의자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신본주의야말로 가장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본주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이름으로 가장된 인본주의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양심’마저 쉽게 마비시킨다. 신의 이름으로 가장된 인본주의는 인간이 인간이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한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단 한순간이라도 도대체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럼 이 글을 쓴 내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다. 덧붙여 아직도 한국에 만연해 있는 각종 금기와 성역이 ‘상식의 관’을 통과하며 정화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제 역할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 책의 제목은 ‘서초교회 잔혹사’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연을 쌓은 서초교회는 한 곳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소설 속의 교회 이름을 ‘서초교회’로 정한 이유는 서울 강남의 ‘서초동’이 지닌 부유함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특정 교회를 지칭한 것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서초교회는 단지 부유한 동네 안에 위치한 대형 교회를 상징할 뿐이다. 이 글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묻는다면, 내가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풍자이며, 이는 단지 조소가 아닌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정할 때<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힌트를 얻는 빚을 졌다. 주목받는 영화로 좋은 영감을 주신 유하 감독에게, 비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감사함을 전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좋은 조언을 아끼지 않은 후배 유인호와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나는 우리 사회를 잔혹하게 만드는 성역과 금기가 사라지도록 만드는 데 책보다 더 중요한 매체는 없다고 확신한다. 스마트폰 대신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독자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하나님은 십자가 장식을 한 그 거대한 건물에 거주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묻는 촌철살인의 블랙코미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 지속적이고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해온 옥성호의 첫 장편소설이다. 다수의 저서가 기독교 분야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면서 교단에선 이미 진보적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에게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더 있다. 사랑의교회 설립자이며 원로목사였던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라는 사실이다. 옥한흠 목사가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국 기독교 교단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존경받아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0년에 작고했음에도 옥한흠 목사는 최근 사랑의교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해 거듭 회자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저자가 중요한 발언들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3부작’을 포함한 저자의 기독교 관련 저작들은 선친이 평생을 두고 실천해온 종교적 양심의 연장선에서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서초교회 잔혹사』 또한 방황하는 한국 기독교와 목회자의 일탈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그동안 천착해온 작업의 문학적 버전이라고만 하기에는 그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 『서초교회 잔혹사』는 현실에 빗대어 그 의미를 더욱 증폭시키는 알레고리와 일관성 있는 주제의식, 유머러스한 상상력과 재기 발랄한 문체 등이 문학으로서의 독자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는 단지 글재주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고유의 영역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등단이란 절차를 밟은 적 없는 사람의 첫 장편소설이 본격문학의 영역 안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다. 더구나 첫 소설을 통해 확고한 자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기대를 품게 할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그에게는 또 다른 작품의 초고들이 있거니와, 이 소설을 굳이 첫 장편소설이라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단지 사용되었을 뿐이다. 믿음과 위선, 신앙과 욕망에 대한 가장 유쾌한 방식의 질문!
소설 속의 김건축 목사는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짓고 사업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는 사람이다. 그의 신앙은 교회의 신도 수와 십일조 액수, 사업의 규모에 비례하여 깊어진다. 이 모든 게 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일이므로 방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속임, 모략과 배신, 협박과 폭력도 하나님의 사업 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한인교회를 운영하던 김건축 목사가 서초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한다.
김건축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특유의 화법과 카리스마로 단숨에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사로잡는다. ‘쌀루리 긴다 꼰다리 말까…’ 그는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언어로 만들었다는 찬양을 가르치고, 교역자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목청껏 따라 부른다.
그리고 글로벌 미션(세계 선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토익시험을 치를 것이며, 교역자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교회 내에 언론홍보팀이 신설되고 교역자들은 담임목사와 전무목사, 부장목사, 과장목사, 목사, 파트타임 목사 등으로 철저히 수직 재편성된다. 그리고 글로벌 미션 팀을 이끌 마이클 서 목사와 알렉스 리 목사가 소개된다. “에이멘~” “핼럴루야~” 마침내 교역자들의 발음도 서서히 바뀌어 간다.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황당무계하고 코믹하기까지 한 상황들이 이후로도 이어진다. 김건축 목사는 지식경제부에서 주관하는 신지식인에 선정 되고, 『글로벌 마인드로 정복하는 영어회화』라는 책도 출판된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김건축 목사의 등장과 더불어 서초교회는 날로 번창한다. 서초교회를 통해 글로벌 미션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꿈은 그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김건축 목사의 눈부신 활약은 마침내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한 인터넷 언론에 익명의 제보가 들어가면서부터다. 글로벌 미션을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본격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생명을 건 기도의 사투를 벌이고 왔다는 김건축 목사가 수염을 기른 채 나타나 사탄의 무리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팩트에 기반한 르포르타주도 아니다.
신도 수 늘리기에 급급한 일부 대형교회와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위선적 태도에 대한 비유적 성토이며, 금기와 성역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가하면 참담한 종교적 현실에 대한 포복절도할 풍자(諷刺)이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풍자이며, 조소가 아닌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풍자이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금기와 성역을 깨고 상식의 관을 통해 정화되는 데 이 소설이 기여하길 바란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목차
프롤로그
사자 사냥꾼의 등장과 살생부요루바족 언어가 준 교훈잇 해즈 섬 굿 포인트글로벌 미션을 수행하라마침내 올 것이 오다하나님의 거룩한 뜻보이느냐, 공중의 저 새가중용된 이유가 밝혀지다운명을 건 최후의 영적 전쟁소나무야, 소나무야, 푸른 소나무야작가의 말
출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1953
2014-03-07 10:16:31 | 관리자
매우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3-05 11:14:02 | 백관선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간입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이트의 기사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PDF 파일을 다운받아 인쇄해서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으로 소책자를 읽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머리에 넣기 바랍니다.
요즘 구원 취소 교리로 성도들을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 많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부랴부랴 이 글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2-20 14:58:36 | 관리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히브리서 6장, 10장 설명)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606
히브리서 배경
1. 요즘 구원이 취소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많다. 이들이 이런 이단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6장 4-8절과 10장 26-27절이다. 이런 악한 교리로 인해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기에 이 글에서는 성경을 통해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자 한다.
2.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의 수신자와 문맥이다. 이런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이 히브리서 구절들 역시 수신자와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초대 교회가 형성될 때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히브리) 성도들이다. 이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유대인 교사들은 기독교로 회심한 이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다시 유대교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3. 이에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악한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천사와 모세와 여호수아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레위의 제사장 체계와 그 안의 모든 희생물보다 우월함을 증명한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율법의 의식 법들이 제정된 목적과 용례를 보여 주고 이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옴으로써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논리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사도는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을 참으라고 권면하면서 배도의 물결에 휘말리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구약시대 영웅들의 믿음 열전을 보여 주며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동일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우리의 참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4. 이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때에 그분을 믿은 자들에 의해 주님께 인도된 자들이었다(히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안으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밖으로는 로마 제국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히10:32-34; 12;4; 13:13-14) 믿음의 진보를 거의 이루지 못하고 성화의 삶을 포기한 채 영적으로 답보 상태에 있었다(히6:1). 이들은 또한 거짓 교리들에 유혹을 받았고(히13:9) 처음에 자기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차츰 잊어버리는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히13:7), 그중에는 심지어 예배에 나오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히10:25).
5. 이런 위험에 빠진 히브리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들이 이런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면 비록 구원은 잃지 않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히12:5-11; 고전3:11-17).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누구인가?”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 믿음을 평가한 뒤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전진해 나가라고 권면한다(히12:12-13).
6. 이 점들을 기억하면서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난해 구절들이 사실 구원 취소가 아니라 보상의 취소와 징계를 가르치는 말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배경 설명
1. 사도는 5장에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신약시대의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구약시대 대제사장들과 달리 아론(레위)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하면서 5장 11절에서 사도는 과연 이 히브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미숙하여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5장 12-14절에서 그들이 시간상으로 보아 마땅히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이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아직도 젖을 빠는 아기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이것을 지적한 뒤 사도는 6장 1-3절에서 이제는 그들이 이런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 완전함(성숙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권면한다. 바로 이런 문맥의 흐름에서 저 유명한 4-8절 말씀이 연이어 나온다.
히브리서 6장 4-8절 설명
히브리서 6장을 전체적으로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구절들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 대해 말하지 않음을 금세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이 히브리 성도들을 일깨우려고 충격 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히6:4-8과 히10:26-39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고 이 구절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6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7 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8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버려지고 저주함에 가까이 있어 마지막에는 그것이 불살라지리라.
1.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여기서 사도는 구원받은 자들이 믿다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들은 완전히 배도하여 옛 생활로 돌아갔으므로 구원을 잃고 영원히 구원을 잃게 된다.”
a. 이것은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은사주의 순복음 교회 등과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짧게 ‘구원 취소 교리’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으로 서울 ‘큰 믿음 교회’의 변OO 목사, 연세중앙교회의 윤OO 목사, 서울 순복음교회의 조OO 목사 같은 유명(?) 목사들이 이런 교리를 주장한다. 이들 외에도 7년 환난 통과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와 거기서 소개하는 데이비드 O, 벤자민 O 등의 목사들 - 이 이 교리를 주장하면서 신부 단장 연습, 주님의 군대 가입 등을 통해 행위로 믿음을 유지할 것을 가르친다.
b.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 교리와 전적으로 배치된다. 히브리서 자체가 이를 증언한다.
(1)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히5:9). (2)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히7:25). (3)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속이다(히9:12). (4) 우리는 영원한 상속 유업을 받는다(히9:15).(5)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히13:5-6).
c.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구원이 취소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말한다.(1)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5:24). (2)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10:20). (3) 이 세상 어떤 창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롬8:28-39).
d. 아이러니하게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또한 구원을 잃은 뒤에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지만 6절은 그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즉,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말로는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다.
a. 이들은 ‘한 번’ 빛을 받은 자들이다(히6:4). 여기의 ‘한 번’은 사실 ‘영원한 한 번’을 말한다. 히브리서의 ‘한 번’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히7:27; 9:12, 26-28; 10:10 등).
b. 이들은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다(6:4).
c.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다(6:5).
d. 이런 주장을 펴는 자들은,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않았음을 강변하기 위해 그들이 구원을 맛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맛보다’라는 말은 실제로 먹는 것을 뜻한다. 히2:9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고 기록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죽지는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을 맛보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맛보다’는 표현은 실제로 맛보고 먹었다는 뜻이다. 벧전2:2의 ‘맛보다’도 같은 뜻이다.
e. 이들은 성령님에게 참여한 자들이다(6:4). 히3:1은 이들을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하며 히3:14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라고 한다.
f. 이런 것들로 보아 이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구원받지 않은 불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모욕할 수 있겠는가?(6절) 불신자들은 항상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항상 그분을 모욕하지 새로이 하지는 않는다.
3. 어떤 이들은 이런 죄가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 있을 때까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지금 영적 성숙과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연결하고 있는가? 히브리 성도들은 지금 영적으로 미숙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미숙한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지금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런 권면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4.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7년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럭크맨(Peter Ruckman)을 추종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히12:23을 보면 이들은 교회에 속한 자들이므로 히브리서를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5. 그러면 이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6절의 ‘if’와 9절의 ‘But’과 ‘though’이다. 이것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a. 사도 바울은 복지부동의 자세를 고집하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기 위해 가정법을 사용해 구원받는 자는 구원이 아니라 보상을 잃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히6:9-10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잠시 후에 9-10절을 보여 주면서 설명할 것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런 가정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들,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롬9:3). 자기 육신의 친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다고 고백했다.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애타게 바라는 바울의 심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결코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듯, 가정법은 화자(話者)의 간절한 의도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는 서법이다.
b. 히6:3까지 사도는 자기를 포함하여 ‘우리’(we, us)라는 표현을 쓰다가 4절부터는 갑자기 ‘우리’ 대신 ‘자들’(those)로 주체를 바꾼다(우리말 성경에서는 5절). 즉, 지금 그는 무언가를 가정하려 하고 있다. “For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were once enlightened…”
c. 히브리서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우리’는 사도 바울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을 가리킨다(히1:2-3; 2:1; 3:1, 14; 4:14; 4:16…12:1-2, 28-29; 13:6, 15).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d.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쉽고 바르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19-25절을 살펴보자.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20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므로 22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23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 히10:19-25의 ‘우리’는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몸은 순수한 물로 씻긴 자들이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를 포함한 이 히브리 성도들이 즉 ‘우리’가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바로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임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뒤에 유명한 26-27절이 나온다. “26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27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
f. 그러면 히10:26의 ‘우리’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않고 불 같은 격노를 두렵게 기다려야만 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도 사실 사도는 ‘if’를 사용하여 가정하고 있다.) 어쨌든지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여기의 ‘우리’가 바로 위에 있는 히10:19-25의 ‘우리’라는 점이다. 즉, 여기의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19-17절을 통합적으로 보아야지 26-27절만을 따로 떼어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면 안 된다.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의 ‘우리’는 히브리서 전체와 10장에서 보듯이 분명히 사도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만 한다(23절). 그리하지 않으면 히10:28에 있듯이 구원은 받았어도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히10:28).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어린양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고전10:1-5). 이집트 탈출은 성경에서 항상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고라와 그의 무리들(민16장) 또 나답과 아비후처럼(민3:4)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다가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이 더 이상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 심지어 육체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지 구원의 상실을 뜻하지 않는다.
h. 구원받은 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히브리서의 교훈은 히10:34-35에 있다. 즉 성도들이 확신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확신을 버리고 말씀을 저버리면 보상의 손실을 입고(고전3:12-17) 더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i.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보상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j. 신약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적)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요일5:16-17; 고전5:5; 딤전1:19-20; 딤후2:16-17; 요삼9-10).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니니야와 삽비라이다. 이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님을 속이려 들다가 즉사하였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멸시하다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전11:28-30).
k.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는 - 특히 6장과 10장 - 결코 성도가 구원을 잃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l. 히브리서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성도들은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완전함으로/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벧후3:18).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신다(히10:30; 12:5-11). 또한 성도가 극심한 죄를 지으면 신구약의 여러 사례에서처럼 곧바로 죽이기도 하신다.”
6. 히브리서 6장은 산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열매)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이 가르치는 바이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7. 사도는 4-6절에서 충격 요법인 가정법을 사용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7-8절은 4-6절과 동일한 맥락으로서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태워짐을 말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이 불로 태워져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불타 없어지는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등이지 땅 자체가 아니다. 땅은 남아 있다. 즉 비록 불살라지는 저주를 받을지언정 땅 자체는 남아 있다. 이것은 고전3:13-16절을 그대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8. 이제 끝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수신자인 이 히브리 성도들은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는 올바른 질문이다. 반면에 “이 히브리 성도들은 구원을 잃는가? 잃지 않는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9절과 10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9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9. 먼저 9절이 ‘그러나’로 시작됨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는 앞에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를 가리키는 역접 접속사이다. 즉, 9절에서 사도는 앞의 4-8절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말하려고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구절을 시작한다. 또한 사도는 앞에서 가정법을 써서 그들에게 있지 않을 일을 이야기하였음을 보여 주기 위해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이라는 양보 구절을 사용한다. 즉, 내가 앞에서 그렇게 심하게 가정하여 말을 했지만 그게 너희와는 실제로 상관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는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이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즉 열매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열매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는 10절에서 그들에게 구원 이후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음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은 땅(구원)도 좋고 그 위에 열매 즉 믿음의 행위도 내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보상도 받는다. 다만 지금 그들이 믿음의 답보 상태에 있으므로 이대로 가면 앞으로 더 받을 수 있는 보상을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기에 사도는 이들을 자극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10. 그래서 사도는 11-12절에서 열심을 내어 너희가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1 우리는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바라노니 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즉, 사도는 그들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많은 보상을 받기 바랐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결코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은 끝났다. 12절에서도 사도는 그들이 확실하게 인내하여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약속들’을 상속받으라고 주문하다.
11. 그리고 앞부분이 보상에 대한 내용임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14절 말씀 즉 “내가 반드시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창22:16-17에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무슨 약속인가? 구원에 대한 약속인가? 아니면 구원 이후의 상속에 대한 약속인가?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미 창15:6에서 끝났다. 여기의 약속은 분명히 그의 씨가 번성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즉, 보상에 대한 것이다.
12.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견딘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자손들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 그는 75세에 자손들의 복을 약속받았고(창12:1-5), 그 이후에 24년을 약속의 자식 없이 떠돌아다니다가(창17:1-6), 100세에 가서야 이삭을 유일한 아들로 받았다(창21:1-5). 실제로 그는 자기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음을 보지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고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8:56). 즉, 그는 육체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 후손들까지 다 보았다. 그가 이처럼 상속의 소망을 - 구원이 아니다 - 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한다.
13.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6장과 10장에서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히브리서 6장 1-3절의 권면 즉 완전함으로, 성숙함으로 나아가라는 사도의 권면이 문맥상으로 딱 들어맞게 된다.
성경 문제
1. 위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6장과 10장이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의 손실과 징계를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6장에서 개역성경은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2. 먼저 4-6절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if를 사용한 가정법 문장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가정법의 ‘if’(만일 …하면)를 없애고 6절에서 아예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개역 히6:6). 즉, 개역성경은 ‘if’를 없앰으로써 아예 히브리 성도들을 타락한 자들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배교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NIV도 6절에서 ‘if’는 그대로 살려놓았다. NKJV, Amplified Bible 등도 다 6절에 ‘if’를 제대로 달아놓았다. 개역성경이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ASV(NASB의 모체)를 대본으로 사용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ASV와 NASB는 개역성경처럼 ‘if’가 없고 ‘타락한 자들의 경우에는’으로 되어 있다.
3. 그 뒤 개역성경은 9절에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개역 히6:9). 일단 9절 처음에 ‘그러나’가 나오면서 문장이 역전됨을 보여야 하는데 개역성경은 ‘그러나’를 없앴다. 참고로 NKJV, ASV, NASB, Amplified Bible 등도 다 ‘그러나’로 시작한다. 그리고 개역성경은 ‘though’를 단순히 뒤에 ‘말하나’로 번역하여 뜻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개역성경은 “우리는 너희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구원에 가깝다면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면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도 받지 못한 자들의 행위와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단 말인가? 이것은 실로 말이 안 되는 번역이다. NKJV, ASV, NASB, NIV 역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다”라고 바르게 번역하였다. 다만 카톨릭 성경인 Amplified Bible만 ‘구원에 가까운’이라는 절을 삽입하여 놓았다. 즉, 이런 번역은 구원을 평생 과정으로 이해하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산물이다.
4.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바로 벧전2:2이다.
흠정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개역(ASV, NASB, Amplified Bible 등):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5. 개역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평생 과정임을 보여 준다. 이런 성경으로는 구원을 받았다가도 언제라도 잃을 수 있다는 구원 취소 교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무지한 성도들은 이런 성경과 그 안의 가르침으로 인해 평생토록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면서 살게 된다. 이렇게 두려움의 불씨를 품고 사는 자들에게 개역성경의 빌립보서 2장 12절은 기름을 부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6. 성경이 두렵고 떨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꼼짝없이 교회와 교단과 목사의 말에 순종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개역성경을 사용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바른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7.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미 얻은 구원을 가지고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밖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요점이다. 여기서 영어는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이라고 말한다. 요즘 우리는 ‘워크아웃’(work out) 기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잘 나가던 회사의 재무 상태가 나빠지면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회사가 일하는 것을 감독하고 채찍질하는 것을 워크아웃이라고 한다. 즉, 기업의 경우든 성도의 경우든 워크아웃은 기업이나 구원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여 외부로 무언가를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뜻한다.
8. 이런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이 믿음 생활에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가 성경 때문에 잘못되면 이로 이한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성도들이 당해야 한다. 사실 구원 취소 같은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도 잘못된 성경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1.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한다(엡2:8-10; 딤2:14).2.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모든 죄를 지은 것과 같다(약2:10). 그러므로 무슨 죄든 죄로 인해 구원을 잃는다면 구원을 유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즉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일조하지 못하듯이 우리의 행위는 또한 구원 유지에도 일조하지 못한다. 3. 예수님의 단번 속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4. 구원은 출생이므로 출생이 여러 번 있을 수 없다.5. 구원은 영원한 생명, 영존하는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롬8:14-17; 31-39), 이런 영원한 생명과 영존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에게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며 영존하기 때문이다.6.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성령님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엡5:30; 고전12:18). 이 세상의 어떤 창조물도 성령님을 이기고 그분의 봉인을 풀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7.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요일5:10).
이 글과 함께 <구원의 기쁨과 확신> 소책자를 참조하면 구원의 기초가 확실히 놓일 줄 믿는다.
2014-02-20 14:33:54 | 관리자
위험한 목사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연세대 이석영 교수가 설명하는 빅뱅 우주론을 세 편 보았는데 그분은 그것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이해하지만 저는 창조의 과점에서 이해하니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KBS 인문학당 강의).
그러다가 우연히 장경동 목사의 설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제목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dWQbTeNc&feature=youtube_gdata_player
요즘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목사들이 하도 많기에 도대체 무어라 가르치는지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분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을 설명하는 듯하다가는 결국 엉뚱한 곁길로 빠지더니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결론을 내기에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더불어 논리가 매우 부실한 설교를 무조건 아멘 하는 청중들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유명 목사의 교리 이해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는 매우 심각하다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또 갑자기 고 김성수 목사의 7분 설교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의 의미>가 뜨기에 흥미가 있어서 들어보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9N0KwQqcBc&feature=youtube_gdata_player
이분은 원어를 가지고 비유 해석을 충실하게 하여 십일조를 영해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설교를 들은 분들은 이분의 원어 실력과 비유 해석에 신선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이분은 소천한 이후에도 여전히 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분의 설교 역시 성경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원어를 가지고 그럴듯하게 펼친 것입니다. 장경동 목사처럼 코미디언 흉내를 안 내기에 이런 분에게 매료되어 푹 빠지는 사람들 - 특히 지식층의 사람들- 이 더 많을 뿐입니다. 이 경우 그분의 해석은 이단 교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문맥에 따라 그대로 설교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신학이 필요한데 장경동 목사는 그게 없고, 고 김성수 목사는 신학교에서 배운 원어 지식에 의지하여 바른 성경해석을 뒤엎는 위험한 일을 합니다. 물론 무지한 성도들은 이들의 말장난에 빠져 이런 목사들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그 폐해는 고스란히 이런 목사들을 따르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른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것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을 우리에게 더욱 풍성히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1-24 01:26:24 | 관리자
참고로 이 글은 다음 설교를 김대용 형제님이 녹취한 뒤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44
수고해 주신 김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수고가 결국 주님께 영광이 되리라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4-01-10 15:05:4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원만큼은 확실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구원 방정식
문장으로 길게 쓰인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때 문장을 잘 읽고 분석하여 여러 변수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한 뒤 방정식을 세워서 풀면, 어렵고 복잡해 보이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을 경험 적이 있을 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복잡해 보이는 인간의 구원 문제도 몇 개의 변수로 나누어 요약/정리하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필요성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그것들을 만든 존재 즉 메이커가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펜, 의자, 자동차, 책 등이 모두 메이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메이커는 자기가 만든 물건이 설계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한 뒤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은 따로 분리하여 폐기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메이커가 있습니다. 물건도 메이커가 있는데 하물며 물건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고등 존재인 사람이 무(無)에서 그냥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만든 메이커 역시 자기가 만든 사람이 자신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반드시 판단합니다(행17:31; 히9:27). 이 같은 심판에서 부적격자로 드러난 사람은 메이커가 폐기합니다. 성경은 이 같은 메이커를 ‘창조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람이 심판 받은 뒤 폐기되는 것을 ‘영원토록 지옥 불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계20:11-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폐기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나를 만든 메이커가 있는가, 없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구원의 방해물
사람과 물건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자신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부적격자로 판정하시는 근거가 죄라고 말하는데 성경적 의미의 죄란 ‘목표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만드시며 사람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고의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지었습니다(롬3:23).
첫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 죄의 독은 사람의 핏줄을 타고 전 인류에게 퍼졌습니다(창5:3; 롬3:10). 그 결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아담과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에게 육체적 사망이 임했고(롬6:23) 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서 지옥 불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티끌만큼의 죄도 차마 보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합1:13).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과연 나는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구원 계획
그러면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공장에서 갓 만들어진 펜이 하나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펜은 쓰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설사 이 펜이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그것이 자기를 고치거나 혹은 그 옆의 펜이 그것을 고칠 수 없습니다. 같은 범주에 속한 것들이 서로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다 해도 고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앓고 있는 죄라는 병 역시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마더 테레사, 교황, 교주, 목사, 사제 등이 절대 고칠 수 없습니다. 펜을 설계한 메이커만이 펜을 고칠 수 있듯이, 사람과 차원이 다른 외부의 고등 설계자 즉, 사람의 설계자인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의 독을 제거함으로써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행4:12).
4. 구원 방법
사람의 죄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처녀 탄생을 통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죄 없는 삶을 사시고 온 인류를 대신하는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단번에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습니다(마1:23; 고후5:21; 히9:26).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뜨거운 지옥 불 심판을 다 감당한 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몸으로 부활하셔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기나 햇빛같이 사람에게 필수불가결 한 모든 것을 거저 주십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 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롬5: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 사역을 믿기만 하면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구원받습니다(엡2:8-9).
5. 구원의 확신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습니까? 그 사람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 곧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창조자 하나님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기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믿습니다(요14:6).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6. 구원 초청
인생은 마치 기차역을 향해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 몇 시간을 아끼려고 열차 시간에 늦지 않게 부지런히 역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이라는 무궁한 시간을 아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은 언제 당신에게 닥칠지 모릅니다(히3:13). 나이와 직업과 성별과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오늘 그 시간이 당신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방법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당신에게 일어납니다(벧전1:23). 오직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값없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미루지 말고 오늘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7. 구원 방정식의 요소들 설명
1.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온 세상 만물은 다 만들어졌습니다. 즉, 창조자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가장 고등한 생명체 역시 그냥 우연히 생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메바 같은 단순한 생명체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꾸며낸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크기를 제대로 측량하기조차 어려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지구가 그냥 생기는 것은 열역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창조자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첫머리에서 그 창조자를 ‘하나님’(God)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주보다 더 크고 권능이 월등하게 넘치는 분이어야 합니다. 또한 온 세상 만물보다 훨씬 더 고등한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I AM)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출3:14).
이 말씀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자시요, 만들어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이 온 우주 공간에 “나는 I AM이다.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영원 전에도 I AM이시요, 지금 이 순간도 I AM이시요, 영원한 미래 속에서도 I AM이신 분 즉, 변함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권능과 위대함과 전능함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무한대의 지혜와 능력과 위엄과 영광과 공의와 사랑과 진노를 지닌, 측량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영원토록 무한하듯이,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와 심판 역시 영원토록 무한합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다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이렇듯 무한한 권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구는 먼지보다도 작고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은 먼지의 100만 분의 일도 안 되는 매우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거룩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창조자 하나님은 창조물과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님이시요, 창조자이시고 사람을 포함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자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2. 사람 (1) 사람의 창조와 타락 사탄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셋째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던 존재였습니다. 사실 그는 매우 특별한 창조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는 천상의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겔28:14).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마음속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불법이 생겨나자 그는 자신을 따르는 악한 천사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결국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마귀는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마침내 이브에게 접근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또 이브는 그것을 아담에게 먹게 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심연(深淵)의 간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에서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금지 항목을 두셨는데 그것은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인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하나님의 장치였습니다. 이 제약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따르게 되었고 그 결과 죄가 그에게 들어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였습니다(창1:26-27).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고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 중 일부만을 유지한 채 본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뒤 아담의 후손들은 다 아담의 형상에 따라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죄로 인해 사람은 다 결국 늙고 병들어 육신적으로 죽게 되었고(창5:5) 또 죽는 날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사람 즉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 곁을 떠나 사탄과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사람의 상태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1-3)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 즉, 죄 가운데 태어나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이제 막 새로 구매했지만 아직 개통되지 않은 스마트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통신사에 가입되지 않아도 이 스마트폰은 거의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전화기로서의 본연의 역할 즉 의사소통은 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개통되지 않은 스마트폰처럼 거의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인간 본연의 존재 목적 즉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은 할 수 없습니다. 통신사에 가입해야 통화할 수 있듯이 사람도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가입해야 그분과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구원받아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최신 스마트폰이라 할지라도 통화할 수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전화기라 할 수 없습니다. 구형 전화기라도 깨끗한 음질로 통화가 가능하다면 전화기로서의 자격을 충족시킵니다. 전화기의 생명이 통신사와의 연결에 달린 것처럼,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과의 연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명예와 권세와 학식이 높다 해도 통화가 안 되는 전화기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성경대로 그는 마귀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입니다(요일3:10; 엡2:3). 또한, 아무리 선행을 열심히 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려 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의 선행과 의로운 행위는 다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합니다(사64:6).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과 같이 달리고 그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 그분과 같이 부활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구원받은 사람은 즉시 천국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앉아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이란 이처럼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복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엡2:4-7).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이토록 놀라운 ‘인간 구원 드라마’를 천사들과 하늘의 영적 존재들에게까지 드러내 보이시고자 하십니다(엡3:10). 이로써 하나님의 친절과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은 다가오는 영원한 시대 속에서 무궁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람 안에는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구원에서 사람의 행위가 이바지하는 것은 0%이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는 100%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행위는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은 이후에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으로 자신을 갈고닦아 시간이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뒤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의 열매가 드러나야 합니다.
(3) 사람의 구속(救贖) 성경에서 ‘죄’란 근본적으로 ‘설계자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조물이 창조자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곧 죄이며 이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가 바로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동성연애, 시기, 질투 등의 ‘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에 이르도록 즉 자신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성경 기록대로 죄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 마치 설계대로 나오지 않은 불량제품이 폐기되듯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극히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의 창건 이전에 한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가 무한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분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이 두 성품 중 어느 하나를 양보하거나 완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공의와 무한한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키시며 사람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온 우주 공간 어디에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충족시킬 완전한 희생 예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죄가 되어 죽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완전한 공의의 심판을 그분에게 쏟아 부으셨고 이로써 자신의 거룩함과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키셨습니다(고후5:21). 또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속죄의 희생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시면서 사람의 모든 죄를 깨끗이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6).
3. 믿음: 구원의 핵심 요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아 구원받으려는 사람에게 단 하나만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사람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들은 악행을 극복하기 위해 선행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주인에게 귀여운 강아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강아지가 길에서 놀다가 갈비뼈다귀를 발견하였습니다. 강아지는 그것이 먹고 싶었지만 자기를 아끼고 보호해 주는 주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그것을 먹지 않고 물어다가 주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뼈다귀를 보자마자 즉시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오히려 강아지를 나무라며 더러워진 강아지의 몸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마. 네가 가져온 이 뼈다귀가 오히려 집안을 더럽게 하지 않니? 너는 그저 나만 바라보고 나를 믿고 기뻐하며 내 품 안에서 마음껏 뛰놀면 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다야.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바로 이 쓸모없는 갈비뼈다귀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선행, 위대한 업적, 찬란한 지식, 고매한 철학, 각종 종교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뼈다귀 즉,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더러운 뼈다귀에 불과합니다.
믿음이란 마치 강아지가 제 주인을 알아보고 그의 보호를 확실히 믿으며 그의 품에서 기뻐 뛰어놀 듯이, 사람이 자신을 만든 창조자 하나님을 알아보고 믿으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품 안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것입니다. 즉, 창조자 하나님 외에 나를 보호하고 나를 온전하게 해 주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뻐하는 단순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입니다.
4. 은혜: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의 선한 행위나 재물, 노력, 학식, 지혜 등이 구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까요? 아니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일까요?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해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요소인 공기나 햇빛 등은 사람의 공로나 행위와 상관없이 거저 주어집니다. 이것들은 그 가치가 너무 커서 감히 어느 누구도 그 값을 지불하고 누릴 수 없습니다.
70-80년의 인생에서 누리는 모든 자연환경도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할 수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사는 삶을 과연 사람이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공짜로 즉,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엡2:8-9).
5.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거대한 개미집이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지나가다 그것을 발견했는데 공교롭게도 저 멀리 홍수가 나서 잠시 후에는 사나운 물길이 개미집을 온통 집어삼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량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 수많은 개미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들 가운데로 들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 즉, 지금 빨리 개미집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으면 잠시 후 홍수로 몰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직접 사람의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한 날을 정하사 그 날에 자신이 정하신 그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터이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그 사람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일에 대한 확신을 주셨느니라(행17:30-31).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누구에게나 회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소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증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친히 구원의 길을 여시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렇듯 오직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으므로 기독교는 타종교와 달리 절대적으로 배타적입니다. 그러므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와 WCC 종교통합운동 등은 모두 하나님과 상관없는,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어리석은 종교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온 백성은 이것을 알라, 곧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곧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온전하게 여기 너희 앞에 서 있느니라. 이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업신여긴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행4:10-12).
6. 선한 행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의 구원에는 사람의 그 어떤 행위도 일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에 따라 구원받은 이후의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훈련하며 나날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장성한 분량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한 행위를 하며 자신을 희생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에는 어떤 차등도 두지 않지만, 본래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구원 이후에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달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선수가 상을 바라보고 결승점까지 전력을 다해 달리듯이,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며 복음을 알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선한 믿음의 행위를 신실하게 행해야 합니다(히11:6).
7. 불신자에 대한 최후의 심판
보상에만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형벌에도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적용됩니다. 생전에 심히 악한 죄를 저지르고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하며 하나님께 대항한 사람들, 복음을 증언하는 크리스천들의 경고를 수없이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경멸한 사람들은 유황으로 타는 불 호수에서 더욱 뜨거운 형벌의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엄중한 공의를 영원토록 쉼 없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계20:11-12).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들이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다 불려 나와 크고 흰 왕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 뒤에 불신자들은 사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지옥 불 속에 들어가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8. 구원 초청
아침 출근 시간에 밖으로 나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면 그야말로 분주하게 단 몇 초를 아끼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지나가는 시간은 양초가 불꽃을 내며 연소하여 없어지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입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 속에 사는 사람에게 절실하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장성해서 결혼하면 자녀를 낳고 행복한 삶을 위해 땀을 흘리며 일합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안정되고 행복한 노년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기도 힘든 세상이기만 그런 노년은 고작해야 20년에서 길면 30년 정도입니다. 그 이후에 펼쳐지는 끝없는 시공간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요즘처럼 각종 보험이 넘쳐나는 때에도 죽은 후에 삶을 보호해 줄 보험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험이 제공하는 안전장치라고는 고작해야 죽은 후에 유가족들에게 지급되는 사망보험금 정도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그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는 것이 언젠가는 꼭 죽어야 하는 사람이 맞이할 냉정한 현실입니다.
당신은 죽은 뒤의 삶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창조자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시간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언제 당신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이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셨다면 그 문제를 더는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당장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의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하라(히3:13).
기회는 항상 당신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특히 구원의 기회를 놓쳤을 때 감당해야 할 대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한대의 영역에 계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무궁토록 바로 당신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맹렬한 속도로 날카롭게 돌아가는 원형의 칼날 바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칼날이 닿기 직전까지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칼날과 당신이 아직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당신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 날카로운 칼날에 당신은 결국 파멸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당신 앞에 놓인 날카로운 칼날을 저 멀리 치워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값없이, 거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놀라운 특권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상 우주 만물을 공동으로 상속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무지와 교만과 고집을 내려놓고 지금 바로 당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끝끝내 진리를 거부하고 마지막 기회마저 소진하며 이 세상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십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지금 당장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벧후3:9-10).
2014-01-10 11:35:4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