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우상이나 미신 형상.
고대 사람들은 이것을 소유하면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고대의 드라빔은 한 가족의 신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이것도 경배하고 동시에 하나님도 경배하였다(삿17:1-13). 이런 우상들은 사람의 모습처럼 생기기도 하였다(삼상19:13, 16). 야곱의 아내 라헬의 형상은 드라빔이었다(창31:19, 30; 참조 삿17:5; 18:14, 20; 호3:4).
2009-06-14 12:51:41 | 관리자
그리스도 당시에 드라고닛은 팔레스타인의 북동쪽, 다마스커스의 남쪽에 위치하였다(눅3:1).
신약시대의 땅 지도 참조(39). 헤롯 대왕은 이곳에 많이 있던 강도들을 정복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빌립이, 그 뒤에는 헤롯 아그립바가 이곳을 다스렸다.
2009-06-14 12:50:58 | 관리자
I. 구스의 손자(창10:7).
II. 그두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욕산의 아들(창25:3).
그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부족들의 창시자가 되었다. 구스 지역의 드단의 후손들은 페르시아 만 근처의 남부 아라비아에 정착했으며 이두매아 근처에 살았다(렘49:8). 사21:13에 언급된 ‘여행하는 드단의 무리’는 겔38:13에서 다시스의 상인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2009-06-14 12:50:34 | 관리자
가말리엘이 언급한 폭동 주도자(행5:36-37).
헤롯 대왕이 죽은 이후에 유대 지방에 많은 폭동이 일어났으며 드다는 이런 폭동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였다.
2009-06-14 12:50:07 | 관리자
예루살렘에서 19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유다의 도시(렘6:1).
요압은 이곳 출신의 지혜로운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어 압살롬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다(삼하14:2). 아모스 대언자 역시 이곳 출신이다(암1:1).
2009-06-14 12:49:38 | 관리자
우림 참조.
2009-06-14 12:49:10 | 관리자
천년 왕국 이후에 불신자가 부활해서 큰 흰 왕좌 심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토록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불 호수에 들어가는 것.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흰 왕좌 심판 바로 전에 둘째 사망인 불 호수에 들어가고 사망과 지옥은 불신자들과 함께 불 호수에 던져진다(유12; 계2:11; 20:6, 14; 21:8). 불 호수 참조.
2009-06-14 12:48:48 | 관리자
두아디라는 버가모와 사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업 도시로 주전 300년경 알렉산더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한 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이다. 에게해 지도 참조(41). 하지만 이 도시는 소아시아의 수도격인 버가모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수비대가 주둔했으며 염색 공장으로 유명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자주 옷감 장사였다. 그래서 이 도시의 주민은 직공과 상인 그리고 군인 등 여러 부류로 구성되었고 이런 이유로 두아디라 교회의 회원은 거의 다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계1:11; 2:18, 24). 이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서머나나 버가모의 경우처럼 바울이 에베소 체재 중에 전도해서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빌립보에 살던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자기의 고향에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9-06-14 12:48:21 | 관리자
라멕과 실라의 아들. 그는 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창4:22).
2009-06-14 12:47:48 | 관리자
야벳의 아들(창10:2).
그는 소아시아의 북동부 지역을 차지한 족속들의 선조로 추정된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였으며 두로의 시장에 노예와 놋그릇 등의 상품을 가져왔다(사66:19; 겔27:13; 32:26; 38:2; 39:1).
2009-06-14 12:47:26 | 관리자
아라비아에 있던 이스마엘 사람들의 지파와 지역(창25:14; 대상1:30; 사21:11).
2009-06-14 12:46:46 | 관리자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페니키아의 상업, 재물, 권력의 중심지.
이곳은 여호수아가 아셀 지파에게 준 지역의 경계 안에 있었으나(수19:29) 이스라엘은 이곳을 한 번도 정복하지 못했다. 두로는 시돈의 누이뻘 되는 도시였으나 곧 시돈을 누르고 페니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었다. 모세는 이 도시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다윗 이후로 이곳은 구약에 많이 나온다. 다윗과 두로 왕 히람 그리고 후에 솔론 사이에는 동맹 관계가 있었다. 두로의 왕과 백성들은 다윗의 집과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삼하5:11; 왕상5:1-18; 대상14:1-17; 대하2:3; 9:10).
한편 아합은 페니키아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북 왕국 이스라엘에 엄청난 저주와 재난을 가져왔는데 그 이유는 두로 사람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이교주의의 모든 악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는 두로가 해양 제국을 만들고 식민지를 개척하여 지중해와 대서양의 많은 지역에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두로 사람들이 교만하고 사치하며 이로 인한 죄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느부갓네살에 의해 두로가 파괴되는 것은 이미 사23:13; 겔26:7; 27:1-36; 28:1-19; 29:18 등에 예언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셨으며(마15:21) 여기에는 주후 58년경에 기독교회가 세워졌다(행21:3-7; 비교 마11:21-22).
2009-06-14 12:46:15 | 관리자
두려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경외, 공포, 염려, 놀람 등을 뜻한다.
두려움은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할 때 발생하는 마음의 감정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무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미신; 형벌로 인한 걱정으로 죄 짓는 것을 금하는 노예 상태; 사랑 안에서 발생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려는 경외심. 두려움은 실제적인 경건을 나타내는 말이며 경건한 인격의 모든 덕을 망라한다(시111:10; 잠14:2). 두려움이 없는 것은 사악하고 패망하는 자의 특징이다(롬3:18). 참된 두려움은 성령님에 의해 혼 안에서 생성되며 이런 특징을 가진 자는 큰 복을 받는다. 먼저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며(시34:7) 그들은 전능하신 이의 그늘에 머문다(시91:1). 이런 경외감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그분의 호의를 구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존중하며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진심으로 그분께 경배 드리고 그분의 명령들을 달갑게 지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빌2:12). 신자 안에는 두려움과 사랑이 반드시 건강하게 공존해야 하며 그럴 때 바르게 또 기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의 시작이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욥28:28; 시111:10; 잠1:7). 반면에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른 일을 행하면서 주변 사람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것이다(잠29:25).
2009-06-14 01:33:57 | 관리자
경륜(경영 체계), 청지기직 등으로 번역된 이 말은 원래 ‘무게를 달아서 나누다’란 뜻을 가지며 옥스퍼드 사전은 ‘나누어 주거나 배포하는 행위, 그리고 행정을 보거나 관리를 하며 물건들을 주거나 운영하는 체제, 신학적으로는 점진적 계시의 한 단계, 특정한 민족이나 기간의 필요에 특별히 부응하는 단계 혹은 어떤 체제가 널리 보급된 시대나 기간’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는 ‘관리하다, 집행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나왔으며 ‘사람이 사는 집의 일을 경영하다’를 뜻한다. 이와 같이 ‘경륜/세대/경영체제/청지기직’이란 단어의 중심 개념은 집안의 일을 관리하거나 집행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여러 형태로 20회에 걸쳐 나타난다.
동사 ‘오이코노메오’는 눅16:2에서 ‘청지기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1회 사용되었고 명사 ‘오이코노모스’는 ‘청지기’란 뜻으로 10회에 걸쳐 사용되었으며(눅12:42; 16:1, 3, 8; 롬16:23; 고전4:1-2; 갈4:2; 딛1:7; 벧전 4:10) 명사 ‘오이코노미아’는 청지기, 직분, 경륜, 위임, 일의 뜻으로 9회 사용되었다(눅16:2-4; 고전9:17; 엡 1:10; 3:2, 9; 골1:25; 딤전1:4).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이 단어는 두 비유에 나와 있다(눅12:42; 16:1, 3, 8).
이 두 비유는 모두 청지기가 집안을 관리하는 내용인데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비유는 청지기직 혹은 세대/경영 체제의 구성 및 배열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준다.
(1) 의무를 부과하는 자와 명령을 수행할 책임을 지닌 자가 있다;
(2) 청지기에게는 독특한 책임이 있고 또 회계 보고할 책임이 있다;
(3) 현재의 경영 체제 하에서 신실하지 못한 요소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세 가지 경륜(세대)을 언급하고 있다. 엡1:10에서 그는 ‘충만한 때의 경륜’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미래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엡3:2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청지기직’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바울이 선포한 내용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골1:25-26에서 그는 신약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된 현재 경륜(세대)보다 앞선 또 다른 경륜이 있었음을 암시한다.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점진적 계시를 담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점진적 계시란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번에 주어지지 않고 일련의 연속적 행위와 다양한 배경을 지닌 많은 사람의 마음과 손을 통해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히1:1-2).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시대에 핵심이 되는 사건들이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경영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1) 사람의 타락;
(2) 노아 시대의 대홍수;
(3) 바벨탑 심판;
(4) 아브라함을 부르심;
(5) 율법 수여;
(6)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7) 성령 강림;
(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러한 사건들 사이의 경영 체제를 보통 ‘경륜’(Dispensation)이라고 부르며 경륜에는 기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기간을 보통 ‘세대’라 부른다. 그 결과 이 말은 영어권에서 유대인 세대(경륜), 크리스천 세대(경륜), 복음 세대(경륜) 등과 같이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각 세대는 하나님이 독특한 경영 방식과 특권을 허락하신 기간이며 그 길이는 다 다르다. 각 경륜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규정과 권리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빛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책임이 주어진다. 새로운 경륜이 열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전 세대에서보다 더 많은 진리와 빛을 허락하신다. 시대와 경륜 선도 참조(11).
성경에는 여러 경륜이 나오며 각각의 경륜 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1) 각 경륜의 처음에 사람의 상태;
(2) 사람의 책임;
(3) 사람의 실패: 각 경륜마다 사람은 비참하게 실패하며 이 사실은 사람이 위대한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큰 죄인이라는 점을 거듭 거듭 상기시켜 준다;
(4) 하나님의 심판: 각 경륜은 사람의 실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난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면서 사람과 놀랍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고 그 길을 열어 놓으셨다. 모든 경륜(세대)에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이사야와 바울과 우리가 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받았다(히11, 롬1:16-17; 4:6). 경륜주의 혹은 세대주의는 결코 시대마다 구원받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며 은혜에 행위를 더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아니다(롬11:6).
다만 세대/경영체제를 구분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에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분별할 수 없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자적’이라는 말보다 ‘정상적’ 혹은 ‘평범한’이란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해석 참조. 어쨌든 문자적 해석은 주어진 문장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체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롬11 참조).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세대 구분을 주장하지 않으며 그 결과 신구약성경의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들을 모두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지금 중동에 서 있는 이스라엘과 그로 인한 팔레스타인 분쟁, 문자적인 천년왕국 등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
(2)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중심 주제로 삼는 인간 중심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 주제로 삼는 하나님 중심의 책이다. 성경은 분명히 구원이 중요하고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을 위한 방편이라고 가르친다(엡1:6, 12, 14).
결론적으로 경륜주의(세대주의)는 사람이 만든 신학체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면 그것을 정말로 뜻하셨다고 믿으며 그분께서는 오직 자신이 의도한 것만을 말씀하신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고 충고하였다(딤후2:15). 그러므로 누구라도 정상적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2009-06-14 01:32:22 | 관리자
조심하거나 삼가도록 미리 주의를 주는 것.
성경에서 경고는 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바빌론, 아시리아, 블레셋, 이집트, 유다와 이스라엘 등 여러 민족과 나라에게 경고를 주셨다. 경고로 번역된 말은 ‘소리를 높이다’는 뜻을 지니며 이것은 크게 외치는 대언자의 말씀을 가리킨다(사13:1; 나1:1). 이런 경고의 말씀은 그 대상에게 큰 짐이 되므로 영어로는 burden, 우리말로는 엄중한 부담의 말씀이 되었다(렘23:33-38). 짐 참조. 히11:7의 경고는 ‘지시를 받다’ 혹은 ‘미리 말씀을 받다’를 뜻한다(마2:12, 22).
2009-06-14 01:30:29 | 관리자
경계가 되는 선.
고대에는 소유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대개 경계석이 사용되었다(신19:14; 잠22:28). 지계표 참조. 성경은 나라들 혹은 지파들(민21:13; 신3:14; 수18:20; 삿11:18; 삼상 6:12) 혹은 개인이나 집단(신19:14; 수13:23)의 경계에 대해 말하며 또 특별하게 땅(시74:17), 물(욥26:10; 시104:9) 등의 경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찾아 알 수 있게 하려고 그분께서 그들의 거주의 경계를 주셨다고 말한다(행17:26).
2009-06-14 01:30:04 | 관리자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을 뜻하며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의 성품과 같이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시12:1; 말2:15; 딤전4:7-8; 딛2:12). 이 같이 하나님을 닮는 것 혹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계시 종교의 본질이며(딤전3:16; 4:8; 벧후1:6)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딤전4:7).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불경건을 심판하신다(유15-16).
2009-06-14 01:29:37 | 관리자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않은 것을 뜻한다(시1 참조). 경건 참조.
2009-06-14 01:29:11 | 관리자
밤의 시간을 구분하는 단위. 시간 참조.
2009-06-14 01:28:47 | 관리자
겸손은 ‘몸을 숙이다’, ‘마음을 낮추다’라는 뜻이며 영적으로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것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지 않으려는 내적 태도라 할 수 있다(엡4:1-2; 골3:12-13; 롬12:3).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겸손해야 하는데(마11:29; 참조 약1:21)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며 그분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잠15:33). 겸손은 결코 비굴함이 아니며 헛된 영광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므로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동반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저항 없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에게도 겸손을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행20:18-21 참조). 겸손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골3:12; 약4:6, 10; 참조 시25:9)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필수 요건이다(마18:3-4). 성경은 겸손을 높이며(잠15:33; 16:19) 특별히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겸손함에서 뛰어나셨다(요13:4-17; 빌2:5-8).
2009-06-14 01:28:2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