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5월 17일에 행한 "재림의 징조: 뉴에이지" 세미나 동영상 3개가
편집되어 우측 상단의 웹하드에 있으므로 누구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세미나의 모든 자료가 다 편집되어 들어가 있고
HD 고화질로 되어 있으므로
집에서 TV를 통해 아니면 큰 모니터 컴퓨터를 통해 보시면
세미나에 오신 것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 등에서도 다운받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배포해도 됩니다.
곧 유튜브와 사이트에도 올릴 것입니다.
그래도 자료가 필요한 분은 다음에서 다운받기 바랍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3&write_id=112
감사합니다.
샬롬
2013-05-23 12:33:49 | 관리자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중에 "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회개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시간상 건강상 습관상 책을 읽지 못하는 분들에게 제가 읽은 내용의 일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끔 저희 교회 홈피와 유튜브를 통한 말씀에 감명 받아 교회를 찾아온 분들 중에는
특히 설교에서 선포하는 죄와 회개 부분에 공감하고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처음에 와서는 너무나 감동되고 감화되어 이전 교회에서 하던 봉사를 스스로 해야겠다고
예배당 청소를 자청하는 모습에 저희는 몸 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강조하는 부분은 회개였습니다.회개가 있는 믿음.정말로 너무나 안이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젖기 쉬운 생활 속에서
그러한 생각은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왠지 그분들은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말씀과 회개의 외침 때문인지 얼마 후 떠났습니다.그리고 가끔 믿음이 무언지 고민하는 분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회개에 대해 혼란 때문에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이에 대해 딱히 설명할 재주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며 회개에 대한 부분이 있어 발췌해서 적습니다. 4장 율법적 회개인가, 복음적 회개인가? 중에서 믿는 자들을 다 싸잡아서 개독이라 부르는 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 되었나, 정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온 자들은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이런 상황과 잘 맞아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노의 하나님을 대변하고 곧 세상에 보내어진 선지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습니까?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하면 다 구원받습니까?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신사도 운동은 복음을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 관념만 가지게 한다.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금세 회개 병에 동화된다.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라며 쉽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면서 그런 이상한 회개의 열기를 전파하는 선지자들로 변해 버린다.그럴수록 십자가의 진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전하는 회개는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이다.율법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실 형벌을 예상하고서
그 형벌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회개하게 만드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신자가 회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노 아래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중략).
회개의 개념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한다고 하니 사실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그러나 그런 회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회개가 아니다 그런 말을 듣고 아무리 회개를 많이 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영혼이 행복하지 않다(중략).
율법적인 회개에 세뇌당하면 계속 이러한 진노와 회개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영원한 구원으로 인한 성도의 행복과 기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실한 은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성도에게 주신 자유 등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들이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사탄은 시의 적절하게 회개 사상을 퍼트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다. [구원 받은 이후] 복음적 회개의 원인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아니고
이미 경험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입어 변화된 마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회개다.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됨으로 회개하게 된다.그러므로 회개가 많아지고 깊을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회개하는 영혼은 더욱 행복해지고 자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복음적 회개다. 여기서 재미있는 예화 하나를 들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크고 작은 다양한 죄를 짓고 사는 죄인들이다.
그래서 누가 강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찔려서 고개를 숙인다.아무 사람에게나 무작정 “당신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오래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유명 정치인 10여 명에게 아무런 보충 설명을 달지 않고 “다 들통 났습니다!” 라는 문장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자 전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사라져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다양한 종류의 죄를 항상 짓고 산다.성도들에게도 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죽은 사람들에게만 죄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는 마음이 순수하고 여리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더 신사도 운동의 회개에 쉽게 속아서 휩쓸리는 것이다. 회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없어진 자리에
뜻 없는 열심과 기도 회개 봉사 충성 순종 찬양 기적 입신 방언 등이 들어선다. 이상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중에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17558
2013-05-22 22:14:4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앞으로 시간이 주어지면 칼빈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소책자를 내려고 합니다.
칼빈주의(개혁신앙)의 5대강령(TULIP)에 대해서는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성경적인 독재 교리가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오늘 전주에 있는 한 형제님으로부터 칼빈(칼뱅)의 만행을 자세히 설명한 책을 소개받았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42807X&start=slayer
신정 정치로 인간의 기본 자유를 말살시키려 했던 칼빈과 그 시대의 정신을 읽으면
왜 칼빈주의가 비성경적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부활을 기점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을 칼빈주의가
청교도 신앙과 개혁주의라는 기치를 걸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 산물인 Lordship salvation은 여러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Study5/View/3MF?page=4
시간을 내서 위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05-22 14:14:47 | 관리자
방언(타언어)의 목적을 이해하기 앞서 먼저 이해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점을 이해하면 방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여깁니다.
알다시피 방언과 관련한 성경구절은 고전 14:2-5에서 나옵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 3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나니 4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 5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차라리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타언어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가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나으니라."(고전 14:2-5)
이 중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가 바로 개역성경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부분입니다. 영어로는 unkown tongue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사람들이 현대의 "방언"을 붙드는 이유는 "하나님께 말하나니"와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함이라" 이 부분일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며 나는 영으로 신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바로 "신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란, 우리가 신비스럽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는 항상 "계시되지 아니한 감추어진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성경에서 "신비"와 함께 사용되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이 "알다"와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진리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눅 8:10, 킹흠정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11:25, 킹흠정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
롬 16:26, 킹흠정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해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고전 13:2, 킹흠정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5:51, 킹흠정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엡 1:9, 킹흠정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크신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엡 3:3, 킹흠정 곧 계시로 그분께서 내게 그 신비를 알리셨나니 (그것은 내가 전에 몇 마디 적은 것과 같으니라.
엡 3:4, 킹흠정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읽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깨닫게 되리라.)
엡 3:5, 킹흠정 그분께서는 이제 자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대언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이 신비를 계시하신 것 같이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아니하셨는데
엡 3:9, 킹흠정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골 1:26, 킹흠정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골 1:27, 킹흠정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 4:4, 킹흠정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할 말을 하여 이 신비를 드러내고자 함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방언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십시오.
방언이 가장 먼저 주어진 때는 오순절 날로 그 때 방언을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선포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행 2:11)
그 다음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믿지 못했던 유대인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방언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크게 높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이더라."(행 10:46)
그 다음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19장입니다. 오직 요한의 침례만을 알고 성령님의 침례에 대해 알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해 바울은 그들을 위해 재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받고 한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행 19:6)
이들은 방언을 가지고 대언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이 완전히 주어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언"의 역할입니다. 성경이 완전히 주어지기 전 "대언자"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대언자는 자기의 말들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방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계시되지 않은 감추어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사들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못했고 자기들이 가진 은사들을 남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은 혼란스러워졌고 바울은 그들의 남용되는 은사들의 사용을 바로 잡고자 고린도전서 14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대언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알립니다. 그러나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방언의 은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세움을 얻게 하려면, 그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목적에 따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전해 주던가 아니면, 교회 내에서 "통역자"를 통하여 그에게 계시된 것을 전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안에서 그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그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 14:21에서 인용한 말을 보십시오.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고전 14:21)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대언과 방언을 같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방언과 대언은 같은 목적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3:10의 완전한 것이 오면에 대해서는 저 역시 그것이 완전한 성경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견해는 문맥의 의미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같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대언과 방언은 완전히 그쳤는가? 저는 그 대답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드리고자 합니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입니다. 그 어떤 대언이나 방언이라도 성경보다 더 확실한 대언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2013-05-21 11:05:29 | 관리자
영어 성경은 몇 종류나 될까요?
이것은 사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1500년 이후에 나온 영어 성경은 약 900종류가 된다고 합니다.
http://record.americanbible.org/content/bible-qa/number-english-translations-bible
웨이트 박사의 통계에 의하면 15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출간된 영어 성경전서와 신약전서는 약 428개라고 합니다.
http://truthinreality.com/2013/03/12/the-four-fold-superiority-of-the-kjv-bible/
위키 백과를 보니 19세기 이후의 현대 영어로 된 성경전서와 신약전서는 약 100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Modern_English_Bible_translations
그러므로 “영어 성경은 200개 이상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300개 이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 옳습니다.
이중에서 현재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성경은 KJB, NIV, NASB, NKJV, ESV, RSV, NRSV, Living Bible, Amplified Bible, ASV, CEV, Message 등입니다.
이렇게 영어 성경이 많아도 KJB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같은 종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성경과 ‘마귀에 의해 약 7%가 변개된 성경’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한 종류의 성경과 또 다른 종류의 성경이 일대일로 대립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성경 전쟁은 실제로 1881년에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80년 이후부터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이후부터 약 23년 동안 동일한 성경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바른 성경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우리가 교만히 행하지 않으면 흠정역 성경이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최후 보루로 남을 것입니다.
이 성경 사역이 바르게 펼쳐지도록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05-20 22:51:14 | 관리자
현시점에 개역개정 성경이 너무 많이 통용되다보니 흠정역 이란걸 잘 몰랐습니다.목사님 설교를 듣고 궁금한점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네슬레 헬라어성경이 소수본문(?) 이라는 말씀에,신약 원어성경ᅟ은 현재 어떤 버전이 가장 좋을까요?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도 번역본인데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아주 잘 보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2013-05-19 17:13:09 | 김종화
안녕하세요?
이번에 진리침례교회 김영균 목사님께서 히브리서 연구라는 좋은 책을 내셨습니다.
저자는 '율법이냐, 은혜냐' 등의 책을 지은, 유명한 M.R. 디한 박사입니다.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인용하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책에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 히브리서 주석서 중에서 가장 실제적인 책인 것 같습니다.
이 좋은 책을 무료로 볼 수 있게 PDF 파일을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8 10:16:0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것은 아내를 통해 아침에 들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자매(?)는 "이렇게 무서운 글에 은혜가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이 무엇이 그리 무서울까요?
지극히 정상적인 글인데 말입니다.
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사는 분들에게는 무서운 글일지 모르지만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극히 정상적인 글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의 어려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원 저자가 개역성경을 썼으므로 성경 구절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센스만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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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죄를 부추기는,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계속해서 오랫동안, 그대로 조장 되었던... <비겁한 침묵의 악들.>
침묵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다양한 언어의 색깔과 표현들이 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함께 해야 할 목표와 방향들을 정해야 될 때
그 의견들이 제시 되 면은, 그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일관 하게 된다.
그 침묵 속에는...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한다는 긍정의 의미가 들어가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나와는 뜻이 다르기에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 그 침묵들을 쓰기도 하며이것도 저것도 그다지 모두 다 관심이 없기에 그대로 그렇게 침묵들을 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여러 상황들과 오랜 정서 상조용히 있는 침묵들을, 미덕처럼 여겨왔고 여겨져왔었다. 한 두 번씩은 모두 다 경험들을 해 봤던 일들...
그것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말해서 생겨났던 어려운 일들
또 굳이 빠르게 행동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그러함에도...그러나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또 분명하게 행동하고 움직여야 할 때 임에도 가만히 있어서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위험한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죄를 부추기는 일들에... 함께 덩달아 수없이 무언의 동조를 해 왔던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불의와 불법들 앞에, 그대로 말하지 않는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그 곳이 바로 이 시대 전혀 부끄러움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벌거벗은 교회들이 아닐까?
오랫동안 하나님께선 불의와 불법 수많은 악들 앞에서그 악의 근원인 이유와 원인들 뿐 아니라침묵하는 절대 다수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뜻들도 계속해서 보내 오셨다.그 무지함과 안타까운 많은 연약함들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꼭꼭 집어서 다 드러내시고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데...
지금은, 침묵 할 때가 아니고... 절대로 결코, 침묵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9,10>
교회들 속... 수많은 불의와 불법들이 일어 날 때마다하나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속에서 수도 없는 무지함 가운데그 안에서 계속 되어지는 무분별함과 무책임들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의와 불법 속에 타락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렸고
설령, 불의와 불법들 앞에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뜻들을 알았다 해도서로의 기득권들과 더러운 이권들이 오랜 세월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 켜눈감고, 입을 다물고, 철저하게 침묵함으로...끓어오르는 탐심과 탐욕으로, 오랜 때가 찌들어가는 흉칙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렇게 까지, 이렇게 되도록 망가트려 버렸다.
이제, 이 상황들 속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그 어느 것보다... 불의와 불법들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하고 비참한 무언의 동조이다.이제 곧 이어, 그 책임들을 너무나 선명히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하나 물으실 것이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보라 이 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이사야65:2~7>
이제, 하나님의 그 모든 때가 되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영적 무지함 들과 무관심들로 함께 빚어 만들어 놓은 교만함의 축제들로 높이 쌓아올린 타락한 성들...
그 안에서... 그 속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악한 패역들의 끈질긴 고리들...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 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일에 무언의 동조들을 해 왔던 수많은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랫동안 진실들을 꼭꼭 감추고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이 시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우리들의 벌거벗은 몸,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아닐까?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이사야5:12,13>
정녕 눈앞에서 수많은 불의가 행하여지고 도적질한 영적 권력의 남용들이 자행되어도알면서도, 보면서도, 그 권력의 폭력들 앞에서자신들의 이름과 영역, 지위와 위치들을 모두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아무 말 하지 못하고도리어 그 권력 앞에 아부하고, 아첨하며, 묵인해 버리는 정녕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많은 모습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참 하도록...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왔던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와 비리가 무엇인지는 그 권력의 혜택들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 받는 영향력의 달콤함들 때문에 모두 다 쉬쉬쉬하며 꼬리들을 감추고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탐욕의 방들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은 정녕 아닌지....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이사야5:20>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 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어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8:12>
그러나 오래도록, 오랫동안 이 패역 앞에 긴긴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광과 이름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 일어나시리니... 그 때가 되면 불의와 불법들을 알면서도 도와주었던 자와 도움을 받았던 자 모두가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의 채찍들 앞에 반드시 그대로 두렵게 서게 될 것이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레미야 6;30,31>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3>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3988?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boardType=M®dt=20130514032134
2013-05-16 23:25:21 | 관리자
정목사님 설교중 제가 들은 것인데요(지옥의 등급)
어떤 사람이 복음의 빛을 많이 받았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지옥의 고통이 더 클 것이고 복음의 빛을 적게 받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옥의 고통이 덜 할 것이라는 설교를 들었는데요.
그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 수가 있을까 해서요?
알려주셨음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20 22:5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16 05:33:09 | 김기덕
안녕하세요?
지인을 통해 옥성호 형제의 귀한 글 한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위력 있는 설교입니다.
바른 것을 선포하는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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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설교
며칠 전 만난 친구에게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군요.
“그 목사님 설교를 한 마디로 하면 ‘안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지.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안전한 설교....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없는 설교를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설교는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바로 안전한 설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의 가르침은 실로 ‘안전한 설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거나....둘 중 하나였습니다.
안전한 설교를 달리 표현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목회자들 중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설교는 안전한 설교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나의 설교가 과연 ......성도들의 현실과는 동 떨어져 저 멀리 구름 위에서 들리는 월요일 학교 조회 시간의 ‘교장 선생님 훈시’와도 같은 그런 설교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설교로 가득찬 교회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안전한 설교에 물든 목회자와 그런 설교를 듣는데 익숙해진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현상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상의 평온함을 깨는 어떠 시도들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해온 것이 비록 ‘거짓과 기만, 위선’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관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이 아닌 일상이 제공하는 기득권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참과 거짓을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소 귀에 경읽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위험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더 큰 위험과 더 많은 적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위험한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33년간 짧은 생이었지만 자신의 ‘위험한 인생’을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사는 것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몫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외쳤던 ‘위험한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집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는 점점 더 우리의 예배 속에서 사라지고 우리 주변은 ‘동업자 의식’에 젖은 ‘안전한 설교’, ‘믿음의 명문가를 만들자’라는 식의 안전함을 넘어 실로 하나마나한 헛소리 설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로 인해 바뀌었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메일을 통해 내가 갈급하던 ‘위험한 설교’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름 아닌 사랑의교회 문제들과 관련해 한 집사님이 내게 보낸 장문의 글었습니다. 그 메일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몇 년전 제 초심과 각오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지쳐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지만...그래선 안되겠지요?”
이 분의 글은, 이 분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내게 하나의 ‘위험한 설교’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강단 위에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가 실종되어가는 만큼 나는 내 주변에서 삶으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들을 더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신앙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사는 일이라는 기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Dxch/60?listURI=%2Fhowsarang%2FDxch%3FboardType%3D
2013-05-15 14:56:30 | 관리자
안녕하십니까? 첨부의 파일은 2012년 초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에 관한 특강을 했을 때 사용한 자료로서, 스트라우스 박사님의 <성경론> 교재를 주 Reference로 해서 기타 관련 자료와 책을 참고하여 작성한 ppt 자료입니다. 미약하지만, 혹 성경의 진리를 소개하는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소망하며 공유하고자 합니다. 내용 중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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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14:26:36 | 임재영
안녕하십니까? 첨부의 파일은 2012년 초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에 관한 특강을 했을 때 사용한 자료로서, 스트라우스 박사님의 <성경론> 교재를 주 Reference로 해서 기타 관련 자료와 책을 참고하여 작성한 ppt 자료입니다. 미약하지만, 혹 성경의 진리를 소개하는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소망하며 공유하고자 합니다. 내용 중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3-05-13 14:26:36 | 임재영
마태복음 11장 12절 전,후 문맥
침례요한이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를 하면서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며 이스라엘에 외치던 중에 그가 감옥에 갇힙니다. (물론 갇힌 이유 중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2절 전후 문맥을 보면 침례를 주던 요한까지 대언자로 언급되며 침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마태복음 11장12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개역성경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핵심 포인트
침례자 요한이 선포를 시작한 시점부터 감옥에 갇혀있는 침례자 요한과 침례자 요한이 자기의 제자 2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물어보는 말에 예수님이 대답하시던 그 시점까지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했다고 기록 되었으며 개역성경도 천국은 침노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만을 본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다른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질문 1 : 천국과 하늘의 왕국은 같은가?
차이점
개역성경에서 천국은 대부분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흠정역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아 즉 구세주, 왕으로 오셨기에 하늘로 부터 이스라엘 땅에 실제적으로 세워지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왕국을 하늘의 왕국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 2 : 폭력배는 누구인가? 피해자는 누구인가?
차이점
개역성경에서는 천국을 침노하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언급이 없는데 이 구절만 딱 떼어서 좋게 해석하면 천국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차지할 수 있다가 됩니다. 비슷한 말로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라고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사실 그렇게 영해해서 좋은 말 많이 했지요???????????
반면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은 하늘의 왕국이 폭력을 당했는데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들이 폭력배라고 말하며 강제로 빼앗는데 누구에게서 빼앗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가운데 이들에 대한 언급(몽타쥐)들을 말하셨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은 39절까지 있는데 23장 전체에 걸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 등등 종교지도자들을 저주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 11장 12절의 폭력배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명확한 구절이 있는데 마태복음 23장 13절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아니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허락하지 아니하는도다. (마 23:13)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메시아의 표적인 병 고침과 마귀 들린 자들을 자유케하며 많은 기적들과 이적들 행하시면서 메시아 왕국인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고 다니시는데 이것을 막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름 아닌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위선자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실질적으로 세우시려는 하늘로 부터 오는 하늘의 왕국을 닫아 버리고 자신들도 안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다고 화를 내시며 저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어떤 씩으로 폭력을 행사했는지 구체적인 근거가 있느냐? 묻는다면 많지만 하나를 예로 제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이르되, 이자가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내쫓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4)
예수님이 직접 메시아 표적들을 보이면서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시는데 이 종교지도자들은 마귀의 힘을 빌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종국에 가서는 백성들을 선동해 죄수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 27장 15절~26절)
폭력배 :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지도자 (임의적 권력자들)
피해자1 :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피해자2 : 침례자 요한, 예수님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고 왕으로 마땅히 이 땅에 실제적인 가시적인 하늘로 부터 오는 하늘의 왕국을 세우려 하셨는데 마태복음 23장 39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말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이제부터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 될 때까지 연기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은 은혜의 시대,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르고 있는 때,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어 있는 때, 교회의 시대라 말하며 이때가 끝나면 다시금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일이 문자 그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 도출
마태복음 11장 12절 전후 문맥과 더불과 12절을 보면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조롱하며 거짓을 꾸미며 가시적으로 이 세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우려 하는 것을 막는 세력들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세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부터 예수님이 주시려 했던 하늘의 왕국을 빼앗아 자기들도 안 들어가고 백성들도 못 들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12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개역성경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개역성경의 번역이 잘못되어서 많은 그릇된 것들이 파생되었고 말씀의 왜곡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마귀 입장에서 본다면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져 오시려 했던 하늘의 왕국을 1차적으로는 막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그 왕국을 백성으로 부터 빼앗으니까요!
마태복은 11장 12절은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의 번역의 우수성과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2013-05-13 00:34:22 | 노영기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성경 읽다가 궁금점이 생겨서 질문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이렇게 씌어 있고 개역개정에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렇게 씌어있습니다.
흠정역은 안좋은 이미지이고 개역개정은 간절히 바라는 자가 천국을 얻기때문에 빼앗는 심정으로
열심과 간절함으로 천국을 바라보라는 말같아서 좋은 이미지가 드네요.
이부분은 어떻게 다른 것이고 그이유는 무엇인지 알수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는 구절인가요?
정말 궁금한데 어디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아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1 09:40:05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읽다가 궁금점이 생겨서 질문하려고합니다.
잠언 29장 21절에 '자기 종을 아이 때부터 자상하게 키우는 자는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같이 되게 하리라'
이렇게 씌어있는데 개역개정에는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이렇게 씌어 있어요.
둘이 다른 의미 같은데 이 부분은 번역상의 오류인가요?
아니면 안좋은 의도로 변개된 구절 중 하나인가요?
그렇다면 변개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궁금한데 어디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아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1 09:38:48 | 관리자
삿 14장 15절에 일곱째 날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동무들에게 수수께끼를 낸 기간이 잔치 기간 이레인데 14절에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있고 15절에는 일곱째 날에 그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7절에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흘이 지나서 하면 4일 남았는데 17절에 이레 동안 이라하면 날짜가 안 맞는거 같은데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면 감사합니다. 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이해가 부족하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10 10:1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09 16:22:00 | 김기덕
왜 안 하는가? (통성기도) 05
통성기도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대예배 시간을 제외하고는 새벽기도나 금요기도회 그리고 기도원에서 ‘주여 삼창’과 함께 목청이 떠나가라고 앞 다투어 큰소리로 통성기도를 합니다. 사실 새벽기도와 마찬가지로 통성기도도 전 세계 교회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믿음의 어떤 위인들도 이런 식으로 기도했다는 사례가 없습니다. 저희 교회 같은 자유교회를 방문하는 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왜 이 교회는 이런 식으로 열심을 내서 기도하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하므로 이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통성기도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성도들이 통성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기에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성도들의 통성기도 인식
질문 1: 통성기도 꼭 해야 되나요?
저는 통성기도를 못 하겠어요. 저희 교회에서는 자꾸 통성기도를 하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제가 병적으로 내성적이고 사람들을 의식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말하는 게 많이 어색하므로 제 기도를 누가 옆에서 들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또 저는 “~옵소서. ~주시고, ~합니다.” 등등 이런 말들을 잘 못해요. 그래서 그냥 대화하듯이 기도하는데 혹시 어떤 사람이 듣고 “아 유치해. 무슨 기도가 그래.”라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아직 믿음도 없고, 교회에 간 목적이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찔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기도해도 되나?”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 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백해야 된다고 나와 있다던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혼자 마음속으로 하면 죄가 되나요? 저는 마음속으로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대화하는 식으로 기도하는 게 많이 편하거든요.
수련회 때도 날마다 기도회를 하잖아요? 처음 갔는데 사실 엄청 신경이 쓰였어요. 한 30분 하다가 그냥 나와서 숙소에 가고 그랬거든요. 옆 사람들은 다 소리 내서 고백하고 눈물 흘리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저는 뻘쭘하게 그냥 앉아서 눈 감고 마음속으로 몇 마디 한 것밖에 없어요.
내일 새벽기도를 처음으로 가는데 두 시간 동안 사실 할 말이 없어요. 미칠 듯이 힘든 일도 없고, 한두 마디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거든요.
기도회 하다가 먼저 나와도 되나요?기도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죠?아는 언니 오빠들은 기도할 때 술술술 말을 하는데 저는 한 마디 하고 생각하고 한 마디 하고 생각하고 그러거든요.
대답 1: 통성기도 꼭 해야 되나요?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에게 통성기도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훈련으로서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훈련하지 않으면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창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을 고정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단 5분이라도 좋습니다. 매일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차츰 기도 시간을 늘려 가시면 됩니다.통성기도는 그러한 장애물을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면 얼마든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성기도 할 때 남을 의식하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기도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면 어느 순간 기도의 줄이 잡히면서 유창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울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바라면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우리가 너무 힘들어 어떤 말로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기도를 유창하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어투로 경건해 보이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므로 욕을 쓰거나 속어나 비어를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기도는 처음에 남들 앞에서 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막막했답니다. 혹시 다른 사람 앞에서 기도를 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연습을 해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서투르게 한다고 웃긴 건 아니에요.
질문 2: 통성기도에 관해서
저희 집에서는 엄마만 교회에 다니시고요. 저도 엄마 따라 몇 번 교회 가다가 대학 들어오면서 한번 제대로 하나님 믿어 보고 싶어서 큰맘 먹고 CCC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채플도 열심히 하고 수련회도 열심히 가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수련회랑 그런 데 분위기가 참 저랑 안 맞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간사님이나 선배님들한테 그렇다고 말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티를 내지 않고 2년 정도 다녔습니다.
일단 수련회 같은 데 가면 기도 제목 말하면서 “자, 큰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옆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땅 치고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는데 저는 눈 감고 기도하려고 해도 딴 사람들 기도 소리 때문에 집중도 안 되고 한두 마디 하면 기도도 안 나오고 똑같은 말만 계속한다거나 아니면 그냥 멍하게 눈감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통성기도에 거부감도 드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자꾸 수련회도 가고 싶지 않고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추신: 아, 그리고 수련회 가면 ‘은혜 받는다’고 하는데 ‘은혜 받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대답 2: 통성기도에 관해서
제가 예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증상입니다. 교회 사람들 착하잖아요? 친절하고. 그래서 친해지기 쉽고. 교회 활동도 열심히 하다 보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도 맡게 되고.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나오는지.
교회 다닌 지도 어느 정도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믿음이 깊은 줄 알고 있고. 나 자신이 생각해 봐도 믿음은 있는데 기도를 못하니 이것 참~ 허허~~ ^^.
기도하는 뜨거운 분위기를 타고 “주여 삼창!”하고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싶은데 “주여 삼창!” 끝나는 동시에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 같은 말만 계속하고.
이거는요. 쉽게 말해 기도를 안 해봐서 그래요. 또 자기 자신을 안 드러내서 그렇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소리 지르며 울부짖으며 꼭 그렇게 기도해야 믿음이 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통성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야 말로 믿음이 강하신 분들이죠.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기도가 중요한 것이지 통성이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남들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방식대로 기도하세요. 꾸밈 없이요. 저도 그 통성기도를 잘하고 싶어서 철야 예배 때 교회 본당 맨 꼭대기 아무도 안 보이는 가장자리에서 기도한 적도 있었는데요. 1년 만에 되더라고요.
‘은혜 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글로는 설명 못 하겠어요. ‘성령을 영접한다’라고도 하는데 이건 때가 없어요. 찬양하다 기도하다 말씀 듣는 중에 제각각 다르니까요. 뭔가 확~~~ 소름이 돋는 기분인데 흠. 뭐라 설명해야 할지. 귀하도 나중에 느껴 보실 거예요. 성령만 영접한다면야~~!!
통성기도에 대한 오해
평범한 성도들이 겪고 있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에서 기도 및 통성기도가 얼마나 잘못 인식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질문자들은 사실 순수한 분들이고 이들이 하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옆의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크게 하자 이들은 크게 위축되고 무언가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줄 알고는 질문해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데 답변자들의 글을 보면 어느 부분은 맞고 어느 부분은 틀려서 오히려 질문자를 더 혼동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답변자들의 글에서 잘못된 것들을 찾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초신자에게 통성기도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지만 기도의 훈련으로서 좋은 방법이다.2. 통성기도를 통해 기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3. 통성기도 할 때 남을 의식하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으므로 큰소리를 내서 자기의 기도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4. 이렇게 집중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다.5. 통성기도는 울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6. 통성으로 기도하는 분들은 믿음이 강한 분들이다.7. 통성기도는 열심히 한 1년 연습하면 된다.8. ‘은혜 받는다’는 것은 찬양하거나 기도하다가 혹은 말씀을 듣다가 소름이 돋으면서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통성기도도 새벽기도와 마찬가지로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성기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의 유래
한국에서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와 함께 초기 부흥 운동에 나타난 특징 중 다른 한 가지는 회중이 동시에 소리 내어 기도를 드리는 통성기도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뜨겁게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신비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맥큔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보고서에 통성기도와 회개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예배당 안은 “기도합시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예배당 안에 있는 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큰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어떤 이는 울고 있었고, 어떤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목을 나열해 가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모두가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있었다. 많은 소리가 있었음에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일사불란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이처럼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길선주 목사와 장대현 교회에서 비롯되었음이 확실합니다. 비록 선교사들이 이에 대하여 좋게 평가를 하였지만 이런 현상은 이교도들의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에서도 통성기도를 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7:16, 20; 눅6:44). 길선주 목사 등이 주축이 된 평양 부흥 성회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을 살펴보면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등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무지와 암흑으로 몰았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열매는 1906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오순절/은사운동의 열매와 동일합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귀의 거짓 영은 ‘아주사 부흥’을 기점으로 해서 전 세계 교회에 무지와 흑암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무질서와 혼동과 무지와 부정함의 근원인 신사도 운동 등을 포함하는 이런 은사 운동은 현재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의 매개체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 영의 활동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시작된 통성기도입니다. 오순절/은사주의의 거짓 영은 예배 음악 및 질서의 파괴와 기복 신앙을 조장하면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데 쓰이는 마귀의 도구 중 하나가 통성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이 무슨 견해를 피력하고 어떤 결과를 개인적으로 경험했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 고장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들이 왜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고 또 그것들이 기독교 식 샤머니즘 내지 자기 열심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땅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 행위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위선으로 크게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요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5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6:5-6).
마태복음 6장에는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의 기도와 금식 문제가 자세히 분석되어 있습니다. 또 7장 21절부터는 그 당시 마귀들을 내쫓고 “주여, 주여, 주여” 하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자들의 문제와 예수님의 정죄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기도의 요점은 골방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한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통성기도를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다음은 사도행전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한 사례들입니다.
이들이 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행1:14).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행2:42).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그들이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행4:31).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그 일을 깊이 생각한 뒤에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5, 12).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13:3).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제자들과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성령 강림 후에 그들은 교리를 배우며 기도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이 있자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또 후에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순교하게 되자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모여서 기도하고 선교 여행을 하도록 보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모여서 기도한 사례들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은 결코 그들이 통성으로 기도했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은 통성기도가 아닙니다. 왁자지껄 대며 기도하는 것은 사실 이교도들의 풍습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바알의 대언자들과 대결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그들이 자기들에게 넘겨진 수소를 취하여 예비하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오 바알이여, 우리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만들어 놓은 제단 위에서 껑충 껑충 뛰더라.…28그들이 큰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관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왕상18:26, 28).
이교도들은 소리를 지르고 말을 많이 해야만 자기들의 신이 듣는 줄 알고 북 치고 장구 치며 큰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하였지만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이교도들의 산물이 많아서 교회가 혼잡하였습니다. 특히 이교도들의 방언이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기도하는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32대언자들의 영은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나니 33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 34너희의 여자들은 교회들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고전14:23, 32-34).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지금 통성기도 하는 집회에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통성기도 하는 그 모임 자체가 혼동의 도가니가 아닙니까? 더욱이 교회에서 자매들이 소리를 내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이 그 자체를 아예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여자들은 소리 내어 기도하거나 남자들 위에 서서 남자들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딤전2:11-15). 그래서 성경은 목사와 집사는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으로 남자만 될 수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딤전3:2, 12).
성경의 기도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혼의 소원과 감정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대화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혼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욥21:15; 시10:4).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고(시55:17; 단6:10) 성경의 모든 성도들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족별로 기도하였으며 일반 업무를 하면서도 짧게 기도하였습니다(느2:4).
기도의 자세는 특별하게 규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왕상8:22) 머리를 숙이거나(창24:26) 무릎을 꿇거나(눅22:41)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였습니다(마26:39).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열렬히,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에는 죄의 고백과 감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바른 이성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마음으로 무신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므로(겔36:37; 마7:7-11; 빌4:6; 딤전2:1-3; 약1:5)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입니다.
어떤 이들은 통성기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네가 부르짖는 소리에 그분께서 네게 크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 소리를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9).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시34:6).
사실 이런 구절들은 다 개인이 하나님과 홀로 기도하는 것을 묘사하지 교회가 통성으로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개역성경의 렘33:3을 인용하며 통성기도를 합리화 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개역성경)
그러나 이것은 개역성경의 명백한 오역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물론 NIV, NASB, NKJV, RSV 등도 하나같이 이 부
분을 “Call unto me.” 즉 “나를 부르라.”로 번역하였습니다.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흠정역).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이 구절도 실은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열심을 다해 기도한다 해도 기도의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은 오직 성경에서 오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십니다(잠28:9).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습관을 ‘백독일도’(百讀一禱) 즉 “백 번 말씀을 읽고 한 번 기도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통성기도에 대한 결론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의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통성기도같이 성도들이 예배 때에 어디서나 동일하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남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귀가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교도들의 관례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진정으로 전체 회중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무방하지만 이것도 스스로 잘 통제하면서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부터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권면이 우리나라 교회들에서도 지켜지면 좋겠습니다.
32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40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지니라(고전14:32, 40).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35:3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새벽기도) 04
새벽기도
1년 365일, 성도들이 날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교회만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새벽기도는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심지어 다른 나라에 선교하러 가서도 새벽기도를 정착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유교회 성도들은 한 번도 이런 것을 시행한 적이 없으므로 과연 새벽기도는 어디에서 나왔고 성경적인지 아닌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기도의 유래
교회 역사가들은 길선주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로 시무하던 때 그분을 중심으로 1905년경부터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하나님을 믿기 전 친구로부터 <천로역정>과 몇 권의 책을 받아 읽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분은 “무엇이 참 도인가?”를 알기 위해 번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섬기던 신에게 빌어보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자 그분은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는, 중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상제님’이라고 부르듯이 ‘상제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한 시쯤 하늘에서부터 사방이 진동하는 듯한 큰소리가 나면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하고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길선주 목사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주옵소서!”하며 방성대곡하는 가운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더욱 힘써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그분은 새벽 미명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기고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의 운명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다음에는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경건하고 간절하고 신비로운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새벽기도는 1907년 평양 부흥 운동과 함께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습니다.
사실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그의 종교 편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구원받기 전에 병을 얻게 되어,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한국 무교 종파 중 하나인 관성교(關聖敎) - 삼국지의 관우를 섬기는 도교의 일종 - 에 심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영적 만족도 얻을 수 없게 되자 21세부터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였습니다. 전통 무교에서 새벽에 수련시간을 갖던 것에 익숙하였던 그는 기독교로 귀의한 이후에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고 이런 관습을 교인들에게 강제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새벽 3시 반에 수행이 시작되고 승려들은 새벽 예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불교는 수행을 중시했고 그중에서도 새벽 예불을 수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교도들의 샤머니즘 정서와 한국 민족의 특유한 종교성이 결합되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새벽기도 전통이 만들어졌음을 누구라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창시자인가?
어떤 이들은 새벽기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벽기도의 기원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 하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복음서 기록을 그 근거로 내밉니다(막1:35).
그러나 이것은 새벽기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매일 새벽에 기도하신 것도 아니고, 그분이 한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한다면 우리도 믿음 생활 시작하면서 다 40일 금식 기도를 해야 하고 그분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것처럼 매일 밤 땀을 피처럼 흘리면서 기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이 새벽기도의 확실한 근거라면 왜 지금까지 근 2,000년 동안 다른 나라의 성도들은 한 번도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믿음의 위인들 즉, 루터, 칼빈, 에드워즈, 스펄전, 휫필드, 웨슬리, 무디, 로이든 존스 같은 분들은 새벽기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이 개인적으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했을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365일 새벽기도는 전 세계 어떤 교회도 알지 못하던 관행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 중 하나가 ‘새벽기도’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나라 교회에서도 한국의 새벽기도를 배워 시행하는 곳이 있고 한국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 역시 선교지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더 이상 한국 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를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다른 나라 성도들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새벽기도라는 큰 은혜를 특별히 한국 교회에만 베풀어 주셨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큰 은혜를 받아 새벽기도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는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었을까요?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더욱이 하루를 시작하며 첫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새벽기도가 한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눈에 들어 장로나 집사의 직무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과 열심 - 이것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함 - 을 표출하기 위해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새벽기도를 명령하셨으므로 이것이 큰 구속력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는 반드시 교회에서 새벽이나 밤에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샤머니즘의 도가니 속에서 바로 이 같은 무지에 의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벽기도라는 것이 한국에서만 생기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의 폐해
새벽 5시에 예배를 드리려면 적어도 4시에는 깨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8시까지 출근해야 하므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곧바로 회사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저녁 8시 이후에 퇴근합니다. 새벽 4시에 깨려면 적어도 10시에는 자야 합니다. 한 집의 가장이 이러면 집안은 누가 돌봅니까? 어쩌다 한 번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매일 이런 일을 하려면 온전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이룰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는 새벽기도 이후에 잠을 충분히 더 자고 하루 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만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그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 몸은 구원 받은 이후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몸을 피곤하지 않게 잘 가꾸는 것도 성도의 의무입니다. 또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을 가족들과 같이 지내야 합니다. 성경도 읽고 책도 읽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정상인에게는 새벽기도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의 어느 목사나 성도도 이런 식의 새벽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믿음은 대개 새벽기도회나 매일 교회 가서 일하는 것 같이 몸으로 때우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척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한국 성도들에게는 성경의 진리를 알려는 열망이 없고 산 기도나 새벽기도를 통해 하늘에서 직통으로 무언가를 받으려는 생각이 팽배할 뿐입니다. 머리를 써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기능들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다보니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이 교회 안에 팽배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기도 등이 영성과 충성의 잣대로 인식되고 있으므로 큰 교회의 장로가 되려면 반드시 주차장 봉사와 새벽기도 참석 등이 요구됩니다. 특히 이단들은 새벽기도를 크게 강조하며 새벽기도를 안 하는 것은 큰 죄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이 출석을 부른다는 말이나 천사가 참석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다미 선교회 회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는다고 흰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고 밤 12시 정각에 예배드리던 것과 비슷하게 지금까지 새벽기도는 성도의 열심을 측정하는 잣대로 알게 모르게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새벽기도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특별새벽기도(특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특정한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면 말 그대로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심지어 부산에서도 KTX를 타고 서울의 OO 교회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용한 것으로 알려진 그런 교회의 목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자기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특별새벽기도로 유명한 OO 교회에서는 최근에 ‘2013 새벽기도 목회자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강사인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자그마치 5,000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또한 이 교회에서는 2013년에만 50만 명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새벽기도를 하니 교회가 부흥된다고 광고하자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도 300명의 목회자와 신학생이 그 콘퍼런스에 참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벽기도 예찬론을 펴며 교회 성장론을 가르치는 이 교회 목사가 바로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준비한 분입니다. 과연 이분은 예수님만이 진리요,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새벽기도회에서 외칠까요? 과연 그렇게 진리를 외치는 목사가 WCC 개최지 확정을 위해 그리고 WCC 총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 무지한 성도들을 모아놓고 특별새벽기도를 주관하며 종교 올림픽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는 10월 하나님 섭리 아래 세계적인 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 WCC 부산 총회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WCC는 세계 140개국 349개 교단이 연합한 단체다. 세계에 유엔이 있다면 기독교에는 WCC가 있다. WCC에는 약 5억 9000만 명의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다. WCC 총회는 7년 만에 한 번씩 열린다. 한국에서 WCC 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국민일보 쿠키뉴스 2013년 1월 29일).
이런 교회에서 특별하고도 특별한 ‘특새’가 주로 언제 열리는지 아십니까? 수능 시험 전입니다. 이때가 되면 온 나라의 교회들이 특별새벽기도를 하고 절과 암자에서도 중들과 신도들이 지성을 다해 특별새벽기도를 합니다. 지성으로 빌어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샤머니즘의 한 형태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특별새벽기도와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복채 주고 복을 빌어달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한국의 특별새벽기도는 오순절/은사주의 기복 신앙의 분출구입니다. 종교 통합을 강조하고 신비주의를 조장하며 과거에 유대인들이 행한 것처럼 무지 속에서 성도들을 파멸로 몰아가면서까지 교회 성장을 위해 성공하려는 목사들의 전유물이 바로 특별새벽기도입니다. 이런 무지의 결과에 대해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경고하였습니다.
1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곧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니라. 2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3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1-4).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지 속으로 성도들을 집어넣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매우 엄중한 정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1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새벽기도에 대한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새벽기도는 무속 신앙에서 나왔음이 확실합니다. 한국 교회 사가들도 이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결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모든 분들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원 자체는 바르지 않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순수한 성도들이 있으므로 새벽기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지도자들의 무지와 허영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가서 국가를 위해 자식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순진한 성도들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이런 성도들의 기도로 인해 이 나라 체제가 유지되고 경제가 부흥한 것도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희 교회 성도들 중에서 새벽기도를 원하는 분들은 다른 교회에 가셔서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다만 기도가 무엇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목사들이 바르게 알고 바르게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가운데 새벽기도가 기복 신앙 종교 생활의 일환으로 전락하면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모두 성도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벗어난 기도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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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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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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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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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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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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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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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29:5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축도) 03
축 도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의 맨 끝에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향해 복을 기원하는 축도를 합니다. 보통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형언키 어려운 영원무궁하고도 오묘한 구원의 섭리 및 주관하심과 우리 가운데 늘 역사하시어 슬프고 힘들 때 위로하시고 약하여 쓰러질 때 도와 일으키시며 우리의 구원과 행복과 축복의 성취를 위하여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세계만방에 복음을 펼치기 위하여 마음을 모아 계획하고 기도하며 나아가 충성하고자 하는 주님의 모든 종들에게, 진리 안에서 참된 복으로 영원히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개신교회에서 축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다 보니 심지어 설교는 듣지 못해도 축도는 꼭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축도 역시 천주교회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회만의 특징이며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형태의 기도를 목사가 예배 때에 한 적이 없습니다.
축도의 유래
장로교회의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는 축도는 복을 비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이며 목회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축도의 유래와 행위자 그리고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신교 예배 순서의 끝 부분에는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강복 선언(降福 宣言-축도)이라는 순서가 있다.
축도의 유래를 보면, 구약시대에 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전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허락하신 사역이다(민6:24-26). 이 축도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가장 활발히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물에게 주는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본다. 실제 예수님은 어린이에게 손을 올려 복을 주시고(막10:16)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에게 축복하셨다(눅24:50).
사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축도의 내용을 일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으로 구체화하여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고후13:14; 롬15:5-6; 엡6:23-24; 살전5:23; 살후3:16, 18; 히13:20-21 등이다.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축도는 사도적 전승을 받은 교회의 감독과 교부들이 사용하였으며 이는 사도적 전통으로 예배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주후 363년의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이단들의 축도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예배 순서로서의 축도를 존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후기의 신학자들은 축도를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은사로 이해하였다.
축도의 자세는 역사적으로 두 형태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두 손을 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긋는 것이었다.
중세의 교회를 비롯하여 현재의 구교(천주교)에서는 축도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사제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고 강복 선언이라 칭하면서 예배에서 실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 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축도를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그 정신은 현대의 세계 개혁교회에서 계승되어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 교수가 잘 정리해 주었듯이 개신교회의 축도는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축복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 사제의 강복 선언으로 이어졌고 개신교회를 세운 루터, 칼빈 등이 개신교회 안에 이것을 들여왔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상관없는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축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회자들만 축도를 합니다.
개신교 축도의 용어 문제
이렇게 구약시대 제사장의 전통을 물려받아 축도를 하다 보니 요즘에는 목사들의 축도 용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특히 축도 끝의 ‘있을지어다’에 대해서는 개신교회 안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습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는 고후13:14의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후속사이며 문안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마다 기록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 자신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인 목사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실수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있을지어다’로 축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근대적이요, 내면에서는 권위 의식이 가득 찬 발상이다. 현 사회에서는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층 간의 간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교회가 이 간격을 더 조성하여 목사와 신도들 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발상을 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있을지어다’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고후13:14 본문대로 목사가 주문 외우듯 한다면 축복 기도의 참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분별하여야 할 것은 고후13:14는 어디까지나 축복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축도문을 목사만 전용한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 같이 그 본문도 목사의 ‘축도 전용문’이므로 성도들은 성경에서 그것을 빼놓고 읽어야 한다는 이론이나 또는 그 본문을 이용하여 신도 누구나 축도를 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일부 목사들(특히 젊은층)의 권위 의식의 문제이다. 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진정 하나님의 소명을 가진 자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희생과 봉사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소유할 때 해결이 된다. 축도를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로 한다고 해서 목사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100년의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에 이미 토착된 목사의 축도의 말미어는 국문학적으로 손색이 없고 이미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에도 사용된 ‘빕니다’로 하여야 한다. ‘빕니다’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뜻이라고 국문학적으로 해석된 단어이다. 또한 청소년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빕니다’로 함이 가하다고 할 것이다.
축도의 실제 문제
개신교 목사들이 축도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개념이 은밀히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교 교육과 목회 사역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일반 백성을 축복하거나 저주한 기록들을 근거로 자기들도 성도들에게 복을 빌 수 있고 또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시대 목사의 직무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직무로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입니다. 신약시대의 목사에게는 결코 하나님께 명령해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게 하는 능력도 권위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저주할 수 있는 특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고후1:24).
1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기독교의 목사(Pastor)는 천주교의 사제(Priest)나 구약시대 유대교의 제사장(Priest)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동등한 형제로서 다만 양 떼를 이끄는 목양자의 직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가 설립된 지 채 6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교회 안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니골라당이 생겨났고 계시록은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15).
그리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니골라당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로서 구약시대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통치하려는 자들입니다. 신약 교회가 생기자마자 이런 무리가 생겼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자들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구약시대의 종교로 남아 자기들의 성직자를 제사장(Priest)이라 부르고 있고 성직자 계급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제는 제사장이 아니라 목사(Pastor)가 감독이나 장로로 교회를 치리함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경향은 개신교회 안에 늘 있어 왔고 그래서 이들은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지존자(Reverend)라는 호칭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목사들이 사용하는 ‘레버런드’(Reverend)라는 호칭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구속함을 보내시며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으니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지존자’ 즉 ‘레버런드’란 단어는 라틴어 ‘레베르’(revere)에서 온 것으로 15세기에 처음으로 존경의 호칭으로 영국의 성직자들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호칭에서 변형된 호칭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The Reverend’, ‘The Very Reverend’, ‘The Most Reverend’, 그리고 ‘The Right Reverend’ 등.
이 호칭들은 다 ‘가장 지존하신 분’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이러한 호칭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런던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종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모든 언행이 정말로 내가 그분이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길 원한다. 만일 하나님의 종인 내가 나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내 이름 앞에 하나님의 지존하신 호칭 즉 ‘Reverend’를 도둑질해서 붙이거나 천주교 사제의 로만 칼라를 하거나 성직자처럼 보이는 가운을 입는 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첨의 호칭들을 반대하시면서 제자들끼리 겸손하게 평등하게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가식적인 권위를 마땅히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스스로 영광을 받는 대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을 주도하며 사람들을 마귀의 제물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요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라.”(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좀 더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
다음의 글은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분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용기 있게 이런 글을 쓰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멸시하고 손가락질 하는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목사들로 인한 반발 심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뒤집어 본다면 목사들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무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천사도 흠모할 만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직무에는 그것에 합당한 더 엄격하고 분명한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직무가 존귀하다고 하여 목사가 도덕과 윤리를 초월해서 살아도 되거나 그럴 만한 권한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개신교 내에 이상한 바람이 불면서 목사들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또 그런 의식에 근거한 행동을 하면서 약한 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하는 것 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막으면 모든 것이 막힌다고 여깁니다. 노회나 목사들의 조직에서 다른 목사들을 심판하고 책벌할 때에도 진리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해 이런 일이 생김을 종종 봅니다.
내가 아는 한, 목사는 상대가 죄인이든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내게 유익을 주든지 불이익을 주든지 상관없이 사람을 살려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직무는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약하고 병들고 상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지 저주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저주는 특히 같이 믿음 생활을 하던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 자주 발생합니다. 한 성도가 은혜로운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심하다가 교회를 떠난다면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여겨야 합니까? 물론 성도가 잘못을 하거나 오해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목사는 항상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떠나는 성도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은 편치 아니할지라도 목사로서 편안하게 대해 준다면 떠난 성도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설령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난다고 성도를 저주한다면 근본적으로 목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자신의 소유로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소유도 아니고 교회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양들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강조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소유인 양들을 잠시 맡아서 양육하고 꼴을 먹이고 돌보는 직무를 수행할 뿐이지 결코 그 양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으면 교회관에 문제가 발생하며 목사의 윤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목사가 축복권도 있고 저주권도 있다는 의식을 보이기 시작하면 약한 성도들은 심지어 공포감을 느끼고 마음이 아프고 상하여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양들이 살아나서 기뻐하고 춤을 추며 젖을 짜고 생육하고 번성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아니하고 목사가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면 양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음은 육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메말라서 상한 채 죽는 것을 말합니다.
제대로 된 말씀의 양식과 지식과 사랑과 영적 능력을 통하여 양들을 먹이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자신에게 예속된 소유물로 본다면 이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바로 이런 목사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욕을 먹고 많은 성도들이 영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죽어 가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목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직무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자신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을 갖추고, 신앙의 담력을 얻은 목사라야 이 시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교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축도에 대한 결론
축도 역시 교회관의 차이에서 발생한 부산물입니다. 신약시대 목사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연장으로 보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을 휘두를 수 있지만 자유 독립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회에서 축도를 하는 목사나 목사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최소한 이 의식의 기원과 의미를 깨닫고 바르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20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22: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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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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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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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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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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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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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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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25:3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주기도문)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9-13).
Lord's prayer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1)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 또는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 예배를 마칠 때(목사가 있는 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로 마침) (2) 수요 예배나 금요 기도회 등 기도회 성격의 예배를 마칠 때 (3) 전도사나 교육 전도사 등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교역자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를 마칠 때(전도사나 교육 전도사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라도 마치는 시간에 목사가 와서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음) (4) 가정 예배를 마칠 때 (5) 교회의 각 기관에서 회의를 마칠 때(6) 기타 주로 공예배 외의 예배나 집회 또는 모임을 마칠 때
이처럼 주기도문은 주로 예배를 마칠 때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암송하기도 하며 목사가 있어도 예배의 성격에 따라 주기도문 암송으로 예배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목사가 참여하지 않은 예배를 끝날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를 물으면 많은 분들이 주기도문에 축도와 비슷한 영적/물적 축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예배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와 주기도문 암송에 따른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배경
‘주님의 기도’(Lord's prayer)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쳐 준 대로 형식에 가득한 위선적인 기도를 늘 반복해서 암송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기도 관행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5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6:5-8).
이 말씀이 끝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7절에 있듯이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면 자기들의 신이 기도를 잘 들어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제외한 이방 종교의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주어진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여전히 주기도문을 글자 그대로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무슨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지 단순히 암기한 말들을 암송하지 않습니다(빌4:6-7).미국의 교회들 중에 주기도문을 시도 때도 없이 암송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마도 복음을 받아들인 뒤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주기도문 암송을 강요한 것이 지금까지 교회의 규례로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도문 암송 관행은 먼저 천주교회를 통해 중국에 전달되었고 그 뒤에 한국의 개신교회에도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
천주교회는 기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 봅시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곧 기도하자면 먼저 기도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4편 p.903 #2650]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인용문에서 우리는 심각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한 기도의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내 목소리로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내 말을 들으셨도다. 셀라(시3:4).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나를 고치셨나이다(시30:2).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시62:8).
로마 카톨릭주의의 기도는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에 쓰여 있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이교도들이 하는 행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기도 방법을 금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6:7).
둘째,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교리 문답서는 성경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카톨릭 교회가 있어야만 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있기 오래 전에도 사람들은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창20:17).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주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민11:2).
성경의 성도들은 카톨릭 교회의 도움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연 발생적인 감정의 표현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에 박힌 듯이 주기도문 같은 것을 암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진심어린 기도를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교리적 문제
1. 율법적 구문
주기도문에는 신약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11절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님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약시대에는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시대에 살면서 헤매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도 사실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 교회 성도들과 자유교회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2.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을 번역할 때 사용된 바티칸 사본의 본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도 마태복음 6장 13절에 각주를 달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이 말하는 그 고대 사본이 바로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경 원본에 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기 위해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주신 것입니다.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3. ‘대개’의 문제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대개’라는 말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대개’를 넣어 암송하기도 하고 어떤 교인들은 뺀 채 암송합니다.
그럼 ‘대개’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그리스어 접속사 - 영어로는 for - 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앞부분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는 [메시아]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1930년대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때에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경에서 ‘大槪’ 혹은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 번역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혹은 ‘대략적으로’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중국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경우 1936년 신약성경에는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4.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한다
그냥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왕국’이 땅에 임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Heaven)이 아닙니다.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경에서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 등에 나오는 천국은 원래 ‘하늘의 왕국’이며 이것은 결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 즉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어 성경을 참조하여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중국어 번역처럼 ‘천국’으로 번역하여 교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신구약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며(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4:17). 또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는 글이 붙었습니다(마27:37).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배척당하시고 결국 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 상속 언약 즉 신약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잘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였으며(막1:1, 14)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을 제시하셨습니다(마4:17).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마지막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단2:44).
예수님은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시고 침례자 요한의 사역과 각종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했고(마23:37-39)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달되었습니다(롬11:30-31).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여기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때까지 견디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1차적으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입니다(롬11:26).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왕국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이 땅에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메시아로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천년왕국을 세워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랐고(눅2:30-34; 38) 그래서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속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실망에 잠겼지만(눅24:21) 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그분이 승천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행1:6)
이때에 그분께서는 왕국의 회복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므로 너희는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행1:7) 이에 그들은 왕국의 회복을 바라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행3:19-26).
복음의 초기에는 이렇게 왕국의 회복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인들의 회개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훼파시키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왕국의 회복은 이방인들 중심의 교회 시대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대언자들이 말하고 예수님이 초림 때에 세우려 했던 하늘의 왕국은 그분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문자 그대로 위엄 있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은 성경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하면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자들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등을 인용하며 천국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기존 우리말 성경의 ‘나라’는 원래 왕국입니다. ‘왕국’을 ‘천국’ 혹은 ‘나라’로 바꾸는 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완전히 가려 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폐해를 낳으며 그 결과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이스라엘 대체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기도문은 바로 이 ‘하늘의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속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유대인들이 간구해야 함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기본적인 교리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용어가 변경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의 모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을 알려줍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결정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 외에도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 사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 등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반복해서 외우는 것을 금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샘플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잘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그대로 암송해 드리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며 또 우리 마음에서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말이지 우리가 암송하는 특정한 형태의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개신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도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주기도문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잘 모르는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고 진리로 잘 인도해야 합니다.
신약 교회의 초기부터 자유교회 성도들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살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에게 경배하며 그분의 왕국이 이 땅에 속히 임할 것을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 왔습니다. 다만 예배 때마다 끝에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일은 반복하는 말로 암송 기도를 하지 말라는 주기도문 제정의 목적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는 암송하지 않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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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19:4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