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한 분석이군요. 이래서 흠정역 성경을 안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3-19 19:27:13 | 소범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참으로 인간은 모든 재앙 앞에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경계의 글이었습니다.
2011-03-19 19:10:56 | 소범준
창조과학 홈에서 퍼온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데 왜 지진과 쓰나미가 있는가?
김홍석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지진과 쓰나미로 고통 받는 분들에게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시고, 도와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왜 지진과 쓰나미가 있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현상들이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 있는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마 10:29), 많은 참새보다 귀한 우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대량의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이 과정을 통하여 나는 어떤 의미를 발견해 내야하는 걸까?
2000년대에 들어서서만 해도 나의 기억 속에는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쓰나미가 23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고, 2005년 파키스탄의 지진, 2008년 중국의 스촨성 지진에서도 각각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2011.3.11, 일본의 쓰나미 참사를 실시간(real time)방송으로 보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파괴적 현상들은 지진과 이로 인한 쓰나미만이 아니었으며, 아주 근래에만 있었던 일도 아니었으며, 지진만이 대재앙도 아니었다. 주후 79년경에도 폼페이의 화산폭발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1340년대 몰아친 흑사병으로 인해 1억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유럽인구의 반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1918년에 시작된 스페인독감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사스(SARS)가, 그리고 조금 전까지 조류독감과 신종플루가 우리를 위협했고, 지금도 구제역이 우리의 가축들을 통하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세상에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망가진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면서 남긴 해령과 지판의 격변적 이동의 여력이 아직도 증거로 남아 지진과 쓰나미를 일으키면서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해준다. 무지개와 함께, 지층과 화석들과 함께 그 날을 기억하게 해준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나게 해준다. 지구의 평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며, 만유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통치 아래 있음을 생각나게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며, 우리 자신의 약함을 자각하게 한다. 우리의 분수를 각성하게 된다. 일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나게 한다.
더욱 근원적으로, 만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 우주 공간에 지구가 떠 있고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우주의 온도는 영하 270도씨 정도, 수 없이 많은 혜성들이나 거대한 운석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어디로부터 언제 지구를 향해 날아올지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지각 아래에는 바위가 녹아서 끓고 있다. 우리는 그 위에 떠있는 지각 판에 살고 있다. 지각판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에 인류는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이 그저 할 수 있는 한 예측하고 피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인류의 현실은 불안하기가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에는 자기장이 장치되어 있어서 태양풍을 비롯한 우주의 유해한 영향들을 막아주고 차가운 우주의 온도와 뜨거운 지각 아래의 온도와 태양으로부터의 적당한 거리와 빛으로 오늘도 우리는 적절한 온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의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누구이신가? 우리는 만유와 그 현상들을 바라보며 조금씩 더 알아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제공되는 장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류의 문제와 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것에나 또는 스스로를 의지하며 추구하고 높아지려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사건(”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노아홍수의 심판(”하나님의 아들들과의 결혼”), 바벨탑사건(”하늘에 닿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모두 사람이 분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초래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늘 기억하면서 사람과 만유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임을 끊임없이 명심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하여 욥기를 통해 들려주시는 위로와 지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욥은 왜 의인에게 혹독한 고통이 있게 되었는지를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께 항변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이상하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신다(욥 38:4). 때가 되면 아침이 오는 것도(욥 38:12), 흙덩이에 점성이 있어서 서로 붙는 것도(욥 38:38), 산 염소가 새끼 낳는 때를 아는 것도(욥 39:1)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욥은 더 이상하다. 대답 같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답을 얻고 크게 깨달았으며 앞으로 다시는 하나님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욥이 무엇을 깨닫고 답을 얻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신 분이심을 각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분의 피조세계 가운데 피조물로 살아가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경륜(economy)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불만스럽게 느낄 뿐, 사실은 모든 것은 완전하고 공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욥 40:8)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현상들은 마지막 날의 징조인가? 우리에게 이런 일들은 어떻게 의미 있는가? 마태복음 24장, 25장은 마지막 날에 이르는 재난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다(마 24:3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다(마 24:36).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7). 그리고 거듭 진실로(반드시, surely) 속히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그리고 또 사도바울을 통하여 아울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롬 2:40)과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심(롬 9:22)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며(마 24:37),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다(마 25:13).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하는 바는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일이다.
성경의 연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1,656년이 지난 후에 노아홍수 심판이 있었고 그로부터 약 200년 후에 바벨탑사건이 있었으며(바벨탑사건이 일어났을 때 벨렉이 50세였다면 노아홍수 후 겨우 152년이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2,300여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약 33년 후에 십자가에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반드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제 2,000여년이 흘렀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려할 바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창조주로 믿으며, 예수님을 유일하신 그리스도로 믿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는 우리에게 그날은 소망의 날이다. 세상이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게 되었으며(벧후 2:5), 지금의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로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벧후 2:7).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아이를 낳는 고통을 보게 되면 선악과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개를 보게 되면 노아홍수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판이 아직도 움직이면서 섭입(subduction)이 일어나고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노아의 때에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가 지각판이 밀리고 충돌하면서 밀려올라와 다시 뭍이 드러나고 거대한 산맥들이 형성되고 물이 물러가면서 만들어낸 계곡들과 산줄기를 바라볼 때 노아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퇴적지층과 그 속에 땅과 함께 멸하여진 화석생물들을 바라볼 때도 우리는 노아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 공부가 힘들다고 느낄 때면 바벨탑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는 ”상속받을 너희”에 속한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긴장하며, 깨어 기다리자. 내일 당장 종말이 오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깨어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마 24:33, 36 ; 계 22:7, 2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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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흠)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요 3:18, 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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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9 11:08:46 | 허광무
김문수 형제님의 좋은 댓글에 감사합니다.
샬롬
2011-03-19 10:00:54 | 관리자
네..???? 제가 적은 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만.....
제 말의 의미가 잘못 전달 됐네요...
말씀하신대로,
믿는 자의 믿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상태를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써서 나타냈다고 생각한다는 글이었습니다.....
믿음 + 행위 = 구원 완성 이라는 말씀을 드린게 아니구...
믿음 + 행위
2011-03-19 00:25:52 | 홍석찬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바는 믿음에다가 행위를 더하여 의로움을 완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정말로 믿는 자라면 그 믿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 + 행위 = 완전한 구원"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행위 구원이며, 변질된 복음입니다.
2011-03-18 10:55:38 | 김문수
네네...사실 개역개정만 읽었을 때는 성경 번역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요..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면서... 다른 성경에 대해 경계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킹제임스 한글 번역에도 신뢰가 필요했었습니다ㅜㅜ
아, 어제 확인해본 바 헬라어로 된 성경들을 봤는데,
거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성취하다, 완성하다' 라는 뜻의 단어가 사용되어 있더라구요.
하지만 이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표현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지만 행위가 합쳐짐으로(나타냄으로)
완전히 의롭게 되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완성)
야고보서에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행위로)보이라고 강조하죠.
빌립보서 2:12의 '이루다'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그에 합당한 행위가 따를 때야만
구원받았음이 완전하게 입증되는 것이겠죠.
이게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구원을 완성하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와 비교해봤을 때)
결론은 빌립보서의 구원을 이룬다는 뜻은 구원 받은자가 그에 맞는 행위를 함으로
구원 받았음이 나타내어 지는(행위로 입증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걸 고려해 봤을 때
킹제임스 한글 번역이 여러 정황을 잘 따져서
이해하기 쉽게 번역이 잘 되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개역개정처럼 '구원을 이루라' 라고 표현 되어 있으면 그 구절만 봤을 때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생기니까요..
2011-03-18 09:13:42 | 홍석찬
답변 감사 드립니다.
참 놀라운 의미에 맞게 영어와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었네요.
핸슨 교수(James N. Hanson)가 느부갓네살은 ‘고귀한 보호자’를,
느부갓레살은 ‘고귀한 종’을 뜻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 느부갓레살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수행하는 도구로 쓰일 때 사용되었고
느부갓네갈은 단순히 그의 역사적 행보를 기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2011-03-18 06:28:18 | 황경수
형제님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잘 설명해 주신 형제님이 계셨고 또 잘 이해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정말 말씀을 바로 알고자하는 사람인지
아님 영어를 좀 알기때문에 성경번역에 대한 신뢰보다는 의심이 앞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어가 그렇게 낯설은 언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십여년 이상을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갈고 닦은 번역을 놓고
일일히 설명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좀 무리라고봅니다.
먼저 서로의 신뢰관계가 우선시 되야하는 문제가 있고
저마다 다른 의견을 한 성경에 반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이 홈페이지에서 무수히 많은 증거로서 바른 번역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시는 분들이 있으므로 이쯤이면 신뢰도를 충분이 쌓았다고 봅니다.
이제는 번역보다는 말씀의 이해와 신뢰를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에서 제 입장을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한국어로 말씀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먼저 투자하신다면 더욱 많은 깨달음이있으리라 권면합니다...
2011-03-17 11:24:43 | 정혜미
흠~ 역시 사전보다 문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보니 '이러이러한 상태가 되어가라' 라기 보다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 계속 강조되는 것 같네요.
5~12절 까지만 보면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셔서 그렇게 겸손으로 순종하셨는데 너희도 그것을 본받아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보이고,
그 뒷 구절들도 보면 역시 무언가(순종)를 하라는 뉘앙스의 말씀으로 보이네요.
성장이 아닌, 하라는 것에 촛점이 맞춰진...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완성되어져 가라'는 뜻이라기 보단..
행동으로 나타냄으로서 그렇게 불려지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완벽하게 성장해야만 빛들로 빛나고 생명의 말씀을 제시할 수 있는건 아니니까...
위와 같은 일을 하시는건 하나님이시라고 13절에 나오고...
12절의 work out은 문맥상으로 보면 일하여 드러내라는 뜻이 적절하네요.
다만 영한 사전들이 문제인건지... 이건 인터넷 말고 오프라인에서 더 조사해보려구요~
잠언 17:8에서 다른 성경들은 전부 뇌물이라고 번역했지만
흠정역에서만은 선물로 번역한 것을 보고
'아 역시 이 성경은 문맥에 맞게 해석이 잘 되어있는 성경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래서 빌립보서 2:12절에 관한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신경써서 답변해주신 두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구요~^^
2011-03-17 10:41:46 | 홍석찬
게시물:"느부갓레살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수행하는 도구로 쓰일 때 사용되었고 느부갓네갈은 단순히 그의 역사적 행보를 기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줄이야.. 저도 오늘 처음 알아요!
2011-03-17 10:37:00 | 신진성
질문하기 전에 먼저 이 사이트 우측 상단의 검색창을 통해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게시물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71
2011-03-17 06:34:35 | 김문수
사소한 것입니다만,
흠정역 한글로 표시한 위 명칭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서에서는 "느부갓레살"로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느부갓네살"로 되어 있네요.
특별한 구별 이유가 없다라면, 다음 개정 작업이 있을때에는 한가지로 하시는 것이...
혹시라도 다른 의미가 있다라면, 알게 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00:1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7 06:31:06 | 황경수
work out 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입니다.
work out,
a. to bring about by work, effort, or action.
b. to solve, as a problem.
c. to arrive at by or as by calculation.
d. to pay (a debt) by working instead of paying money.
e. to exhaust, as a mine.
f. to issue in a result.
g. to evolve; elaborate.
h. to amount to (a total or specified figure); add up (to): The total works out to 176.
i. to prove effective or successful: Their marriage just didn't work out.
j. to practice, exercise, or train, especially in order to become proficient in an athletic sport: The boxers are working out at the gym tonight.
a.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다 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개역이나 한글킹제임스역과 같이 "구원을 이루라"고 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을 너희 삶으로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는 14-16절에 나옵니다.
"모든 일을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 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흠이 없고 무해한 자 곧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런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세상에서 빛들로 빛나며 생명의 말씀을 제시하나니"
구원받았으니 모든 일을 불평과 시비가 없이 하고, 흠없고 책망받을 것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드러나며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것을 일하여(행동으로) 드러내는 삶입니다.
2011-03-17 05:31:51 | 김문수
아~! 3장 11절은 바울의 그런 의지가 담긴 표현으로 볼 수 있겠군요~!
이런이런~
넘넘 감사합니다~^^
2011-03-16 22:39:50 | 홍석찬
마지막 질문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바울은 이미 속사람은 거듭나 구원을 받았구요. 이제 남는것은 겉사람의 부활입니다.
겉사람의 부활은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때 최종적으로 이루어지죠.
주님이 오실때 부활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로는 죽은자들의 부활이요-
두번째로는 산자들의 부활입니다.(살전4:16~17)
여기서 중요한것은 - 죽은자들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빌3:11)"
이와 같은 고백은 죽은자의 부활에 동참하기위해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라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라 할수있겠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샬롬~
2011-03-16 21:20:03 | 최홍진
그리스도 예수안에의 킹제임스 흠정역을 읽은지 3주 정도 돼가는 청년입니다.
먼저... 아래의 질문을 올리는 것은 제가 남다른(?) 구원관이 있어서도 아니고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 쓰는 글도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을 때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기길 원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몇 일동안 수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찾아보고 또 찾아봤지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어서
지식인에 올려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식인엔 워낙 다양한(?) 분들이 있기에 신뢰할 수 없어서 출판사의 홈페이지라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들르게 됐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토론중빌립보서를 보다가 의문이 생겼는데, 빌립보서 2:12 의 한글 번역에 있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라는 부분 중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라는 부분입니다. 개역개정에는 '구원을 이루라' 라고 돼 있지요.
문맥상 여기서의 구원을 이루라는 뜻은, 구원받기 위해 계속해서 순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영어 킹제임스로 봤을 때 이 부분이 'work out' 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work out의 뜻을 찾아보니, 운동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등의 뜻이었습니다.)
이 'work out'의 뜻을 몰랐을 땐,
봐라, 킹제임스에서 한글로 일해서 드러내라고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냐 라고 했으나...
인터넷사전, 집에 있는 영어 사전, 핸드폰 사전, 모두 뒤져서 work out의 뜻을 찾아봤지만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work out이 사용된 문장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몇분동안만 찾아본게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시는 분이 해석하시는 빌립보서 외에는요...
난감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뜻이 당신이 말한대로 그런뜻이라면
있는그대로 번역해두고 뜻을 해석할 때 그렇게 해석하면 되지
왜 굳이 사전에도 없는 뜻인 일하여 드러내라고 해석 되어있냐
번역은 있는 그대로 번역을 해둬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난감햇지요...
제가 생각할 때도 일하여 드러내라 라고 해석한 게 틀리다고 할 순 없지만
조금 과장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work out이 옛날에는 일하여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는데
요즘엔 그런 뜻으로 안 쓰이기 때문일 수도 있구...
혹은 현재 work out이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일수도 있구요...
빌립보서 3:11 에 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건 킹제임스 성경이랑 상관없이
KJV - 빌립보서 3: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라는 구절입니다.
앞뒤 구절들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같은 그런 권능을 경험하고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에 도달 하고자 한다는 고백같습니다.
그런데 위의 11절의 내용이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치 마지막 때에 부활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처럼 보여집니다.
왜 바울은 11절의 고백을 썼을지 궁금하구요.
이 구절로 구원관이 흔들리진 않지만 이에 대해 뭔가 확실히 변증할 수 없기에 질문 드립니다...
별거 아닌 것일 수 있지만 지금 이것들에 대한 확실한 변증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한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관한 질문을 인터넷에 처음 올려봅니다.
여태껏 열심히 조사하면 왠만한 것들은 다 답을 찾을 수 있었지만 빌립보서에 관한 것은 어렵네요...
아까전에도 이 질문을 올렸는데 철없이 글을 올렸던 것 사과드리구요..
이것들에 관한 궁금증이 꼭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4:57:4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6 21:05:15 | 홍석찬
성경에는 고린도 장로교인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갈라디아 감리교인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에베소서 침례교인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빌립보서 형제교인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골로새서 가정교인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데살로니가 독립침례교인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인만 있습니다. (행11:26)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 (고전1:13)
2011-03-16 13:41:07 | 김태균
독일 베를린에 있는 대학 훔볼트신학은 어떤 계통인지 알 수 있을가요?
2011-03-12 21:53:50 | 안옥영
메신져가 죽어야 비로소 메세지가 사는법인데-
요즘은 메신져는 기름지고 유명해지는 대신 메세지가 죽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속에 살고있는것같아 가슴이 매우 아픕니다.
이와중에 마음에 위로가 되는 좋은 찬양을 추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2011-03-12 18:15:43 | 최홍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