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성경교리

  • 성경공부
  • 성경교리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성도의 죽음은 고귀하다 조회수 : 1135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2일 17시 28분 46초
  • 성도의 죽음은 고귀하다
     

    성경말씀: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의 눈앞에서 귀중한 것이로다. 시116:15

     

    인생찬가- 롱펠로우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마라. 인생은 한낱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니 만물은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일 수는 없다.

    <너는 흙,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고 있는 길은 향락도 슬픔도 아니다.

    모두가 오늘보다 내일이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고 길이다.

    중/고등학교 때 이런 시를 읽고 들을 때는 죽음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모르고 살다가 요즘은 장모님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일단 건강은 자신할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그분은 장수하는 가정에서 나서 지금까지 큰 병 모르고 건강히 살다가 갑자기 암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려도 일어나는 기적이 그분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일반 통계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실정임을 본인이나 가족이 느끼고 있습니다. 암 덩이가 자라면서 사람을 괴롭게 하며 암 치료로 인해 너무 고통이 가중되어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전화할 때 우시는 것을 보고 나의 무능함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도대체 무어라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당해 보지 않은 것을 당해 본 것처럼 가장하고 위로할 수도 없고 그냥 벙어리처럼 있자니 1초, 2초가 한 시간, 두 시간 같고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 저의 뇌리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제 장모님의 죽음이 아니라 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확실한 일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이것은 100%의 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큰 실패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누구나 견딜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도에는 교회 문제로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것을 맛보며 말 그대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의사가 “당신 이러다가 죽습니다.”라고 경고할 정도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빨리 죽어야지. 이대로 살아서 무엇하나?”하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장모님의 죽음이 함께 겹치자 죽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과연 어디서 이런 확신이 올까요? 정말로 우리가 담대하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제 옆방에는 제가 존경하는 은사 선생님이 계십니다. 저보다 15살 많으며 인품이 훌륭하고 예수님을 확신하는 분이기에 저는 인생 문제로 그분과 자주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금부터 6년 전 쯤에 저의 소개로 교수님의 아들이 미국의 Bob Jones 대학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년 공부를 하고는 다른 주립대학으로 옮겼는데 방학 때에 멀리 여행을 갔다가 차가 뒤집혀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교수님에게는 그 아들이 외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비행기로 실어 와서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로 교수님은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내 아들이 어디 있을까?” 그때부터 보는 것이 달라지고 특별히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도 그 전에는 실패를 몰랐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 다니고 유학 다녀와서 정말로 부족한 것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 이후에 인생을 보는 것이 매우 많이 달라졌습니다. 최근에 저는 저의 고통과 장모님의 죽음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죽는 게 무얼까요?”라는 질문에 그분은 오랫동안 정리한 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 박사,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분에게는 그 일이 큰 일이 아니야. 생명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결국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지. 그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이며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장모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좋은지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이 다음에 그 상황에 들어가면 그렇게 기도할 것인가? 그러나 어쨌든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주님의 뜻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하고 끝을 맺습니다.

    이제 저는 목요일에 미국에 가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분의 얼굴을 뵙고 올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어려서부터 자란 교회에서 함께 있었고 미국에 가서 이민 생활 하느라 고생하며 나의 도움으로 운전면허를 따서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내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신 그분을 마지막 대하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려 합니다. 사람이 갈 곳이 확실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텐데 갈 곳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합니다. 제가 잘 아는 사돈어른이 있습니다. 연세가 75세신데 주변에서 친구들이 하나씩 죽어가니까 식사를 제대로 못합니다.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제 장모님은 말 그대로 모태 신앙으로 구원받았지만 천국을 잘 모릅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천국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다고 하셔서 이번에 가면 성경을 펴서 가르쳐 드리려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 확실한 존재로 여러분의 삶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까? 천국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 일, 교제 등에는 열심을 내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으려면 멸치를 우려서 국물을 맛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멸치를 두 마리 넣고 하루 종일 끓여도 그 국물은 맛이 좋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불을 때고 조절해도 안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진 소망이 확실하려면 바른 지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복음으로 인한 고난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나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내가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딤후1:12).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4:7-8).

    그래서 성도라면 성경을 읽고, 모르면 배워야 합니다. 평생토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16편은 저자가 나와 있지 않지만 다윗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3절을 통해 우리는 그가 정말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의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지옥의 아픔이 나를 붙들었으므로 내가 고난과 슬픔을 만났도다.

    그는 사울, 압살롬,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죽을 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절에서 주님이 자기 혼을 사망에서, 자기 눈을 눈물에서, 자기 발을 걸려 넘어짐에서 건져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15절에 이르러 “주님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다.”고 고백합니다. 앞뒤 문맥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취해도 대충 “성도는 죽어도 좋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뒤 문맥을 살피면 조금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왜 갑자기 주님의 성도들의 죽음이 귀중하다고 말했을까요? 그는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자기가 죽지 않은 것은 주님의 성도가 죽는 일이 매우 귀중하고 중요하므로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되기까지는 하나님이 그를 살려 주심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성도라면 죽음으로 인해 그분의 목적이 모두 성취되기까지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연장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게 되면 그것은 곧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바를 다 성취하고 죽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도 중 하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려면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매우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성도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존재 중 하나가 이미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므로 매우 귀중합니다(아담, 아벨,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물론 예수님). 둘째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계획한 일의 성취를 뜻하므로 매우 귀중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죽음은 성도의 믿음의 실체가 피상적인 공허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므로 매우 귀중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예수 믿어 생명 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보험이 가장 큰 가치를 발휘할까요? 죽어서 우리의 믿음의 실체를 경험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매우 귀중합니다. 이제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연습합시다. 사실 저는 이번 주에도 지난해의 악몽이 되살아나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죽음이 닥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죽고 싶어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서 저와 여러분의 죽음이 귀중한 죽음이 되기까지는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근본 침례 신앙이 어디서 왔습니까? 초세기 성도들과 그 뒤를 이은 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은 귀중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제가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은 제 장례식에 올지 모릅니다. 저는 그때에 여러분 가운데 한두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제가 누워 있는 관 앞에서 “그래, 저 분 할일 하고 천국 갔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죽음의 침상에서 사도 바울처럼 내 아이들에게 내가 신뢰한 분을 내가 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의 묘비에는 “성도 정동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아 할 일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다”라고 새기고 싶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아모스 대언자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4:12)고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죽어가는 침상에서도 패니 크로스비와 함께 이런 찬송(295장)을 할 수 있습니까?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하신 집 있네.”

    이제 죽음의 의미를 알았으면 롱펠로우와 함께 씩씩하게 인생찬가의 뒷부분을 부릅시다.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정 내에서,

    말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며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삶에 풍성히 넘치길 기원합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