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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 ‘고아’인가, ‘아버지 없는 아이’인가? 출애굽기 22장 22절조회수 : 2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5년 5월 7일 10시 54분 48초
  • ‘고아’인가, ‘아버지 없는 아이’인가?
    – 하나님의 긍휼을 좁혀 버린 번역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시며,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특별히 과부나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은 구약 성경 곳곳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너희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2:22, 흠정역)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고아’라는 말은 익숙하고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는 그 뜻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데 있다. 국어사전은 고아를 “부모 모두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고아로 보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하심으로써, 아버지 한 사람만 없어도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로 인정하신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넓고, 더 세밀하며, 더 따뜻하다.
    흠정역은 그 긍휼의 범위를 그대로 살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도 하나님의 보호 대상임을 증언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을 비롯한 NIV, NASB,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은 ‘고아’라는 단어로 제한함으로써 그 따뜻한 긍휼의 손길을 좁혀 놓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단 한 구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 전체에는 “아버지 없는 자”라는 표현이 50군데 넘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이를 똑같이 ‘고아’로 번역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아이들이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의 대상이 아님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바로 사본의 문제 때문이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로마 카톨릭의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르며 번역되었다. 이 사본들은 본문을 축소하거나 표현을 단순화시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왜곡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초대 교회와 전통 교회들이 수 세기 동안 사용해 온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아버지만 없는 아이조차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배려의 대상임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고아’와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표현의 차이에서조차 하나님의 성품과 긍휼의 깊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기준을 좁히시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더 많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주는 고통받는 자의 힘이시며,
    고아들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니이다.”
    (시편 68:5, 흠정역)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분의 긍휼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긍휼의 폭을 좁히는 성경이 아니라,
    그 긍휼을 세밀하게 밝혀주는 바른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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