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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라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테데요 우리의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는 설교내용이라 아시는 내용이시겠지만 모를시는 분도 계실것 같아 올려봅니다.   미국의 어느 청소년 집회에 Paul Washer 목사님이 강사로 나섰습니다. 그동안에 박수와 찬양으로 뜨거워졌던열기가, 이분이 설교를 시작 하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 버렸습니다. Paul Washer목사님은 이 설교 이후에,각종 부흥집회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강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설교는 미국 교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일으켰고, 그들을 깨우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 김학준 성도가 올린 글입니다. -      좁은 길, 넓은 길 ● 폴 워셔 오늘 오후 여러분과 함께하는 것은 저에게 큰 특권입니다. 먼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주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과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어가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청소년에게 설교를 하는 것처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가 제 인생의 마지막 설교인것처럼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오해하게 될 말씀들을 선포할것입니다. 또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화가나서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인하는 것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저에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할만한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에 대한 판단을 미리하기 전에 자신에게 한가지만 물어보십시오. 아시다시피 설교는 위험한 것입니다. 저에게도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거짓 선지자는 더 큰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죠. 만약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저는 큰일 난거죠. 그리고 설교를 할 때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서 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말씀이 진실이라면 당신들이 두렵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오늘 말씀할 성경구절을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여러분들의 문제는 저와 상관이 없고 하나님과 그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자리에서 필요한 질문은 지금 제가 저짓 선지자인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그 진리를 따라가는 것외에는 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저는 너무 작습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오 주여, 오직 거짓 불들만이 주님의 제단에 올려진 것입니까? 하늘에서 불이 모든 잡소리와 군중들의 외침들과 행위들 가운데 내려올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수 있습니까?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의 주권안에 기도하고 보좌앞에서 간청하오니 저희에게 은혜로 대하사 저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그들이 먼저 마음을 열기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주사 성경적인 진리를 보게 해 주십시오. 생기를 불어 주시옵고 회개와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안으로 인도하시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위대한 이름을 위하여 이것들을 해 주시옵소서. 주님, 형제가 말했듯이 이렇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무도 자기의 공로로 돌리지 못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 아무도 하나님의 궤에 손을 못대게 하시고 만약 그것을 만지면 그를 쳐 죽이시옵소서. 주님 우리들에게 역사하여 주십시오. 제발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그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길밖에는...아멘. 이제 마태복음 7장을 설교하겠습니다. 성경책 가지고 계시면 따라해 주십시오. 마태복음 7장 13-27절입니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15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나니 20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를 나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 26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라.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집이 무너져 그것의 무너짐이 심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저는 오늘 여러분의 자존감이나,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여러분의 인생이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의 재정상태가 어떤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 걱정이 나를 잠못들게 합니다. 아침나절도 그 한가지 걱정으로 지냅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백년 이내에 아마 여기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있을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될겁니다. 여러분은 "목사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라고 하겠죠.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미국내에서 사역을 하고 있지 않고 대부분을 남미나 아프리카 동유럽 등에서 사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무신론적인 문화에 오히려 더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고, 정말 많은 청소년들이 속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어른들도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 한번 영접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천국을 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그들처럼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도 자신처럼 세상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을 비교하면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겠죠. '뭐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 그런데 뭘'. 모두들 TV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보고 웃고 즐기죠. 감각적인 옷들을 입죠. 세상사람들처럼 걷고, 세상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세상것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우리 교회의 다른 사람들하고 나는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내가 어떻게 크리스천이냐구요? 내 인생 언젠가에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구하는 영접기도를 드렸었거든요." 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미국 개신교와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이단 사상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기를 구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들어오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어떤 침례교회 역사상 이것을 찾아 볼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이뤄집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안에서의 믿음은 회개가 먼저 일어나고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게 되고, 점점 거룩하게 되고 브리트니 스피어즈 같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세상처럼 되는 것을 거부하며 대부분의 미국 크리스천처럼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려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박수치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여러분 얘기를 하고 있는겁니다. 아멘 소리 듣자고 오늘 여기 나온게 아닙니다. 박수 받으려고 여기 나온게 아니예요. 지금 여러분들 얘기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많은 분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전 루마니아로 선교를 같이 가기 원합니다." "전 우크라이나로 같이 가고 싶습니다." "목사님, 페루 정글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 선포한 곳에 저도 가겠습니다" 전 말하죠. 그렇게 못할 거라고. 왜냐고요? 저처럼 선교하면 당신은 거기에 있는 교회들한테 파문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셔야 하는 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그저 그냥 까다롭게 구는게 아닙니다.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미국의 기독교가 완전히 잘못되고 있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제가 이 말을 하므로 다시는 초청받지 못할 대가를 알고 계십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왜 하는지 아세요? 돈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말씀을 이제 볼 것인데 여러분들이 잘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을 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지 말고 성경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길 원합니다. 어떤 청소년이 목사님에게 다가와 "저는 제가 구원 받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물어보면 대게 목사님은 "언제가예수님에게 기도하며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와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냐"고 물어 볼 것입니다. "네, 그런것 같아요." "진심이었나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사탄에게 더 이상 형제를 괴롭히지 말라고 선포하세요." "성경책 뒤에 다 썼나요? 전도자들이 구원받은 날짜를 책뒷장에 쓰라고 한것처럼 그렇게 해서 의심이 갈 때마다 사탄에게 보여줬나요?" 우리 교단에 이런 미신이 뒤덥고 있습니다. 성경에 크리스천에게 뭘하라고 써 있는지 아세요. 자신을 돌아보고 시험하여 말씀의 빛에 비추어 자기가 믿음안에 있는지 네가 정말 크리스천인지 시험해 보라고 되어 있다구요. 여러분들에게 지금 나가서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려라 하면 뭘 찾을지 아세요? 99%의 이 도시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사람이라고 믿는 거죠. 만약 여러분이 각자 자기 도시에 가서 문을 두드린다면 왜냐면 저도 구원받은 후에 제 고향에 가서 모든 사람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죠. 제가 뭘 발견하는지 아세요? 그 사람들 모두가 크리스천이었어요. 그중에 85%는 교회도 안나가고 나머지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거룩함과 섬기는 것엔 관심이 없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죠. 또한 복음을 다른 나라에 전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답니다. 왜 그들이 구원받았냐고요? 그것은 복음을 덜 전하고 성경공부를 더 했어야하는 전도자들이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도자들은 그 사람들이 부흥회때 참석한 것을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것입니다. 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이제 성경말씀을 보죠. 제가 여러분에게 생명안으로 들어가게끔 자극을 줬습니다.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거기엔 좁은 문이 있습니다. 제가 남침례교단인 이유는 남침례교단이 이것을 빨리 깨달았을 때 다른 교단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남침례교단은 거기엔 한 문이 있고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셨고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건 객관식 문제도 아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도 않습니다. 교단으로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것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성경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는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의 증오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냥 죄를 지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 밖에는 행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지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최고의 의로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알고 있죠. 그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여러분 중에선 "잠깐만요,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신걸요." 여러분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선지자도, 사도들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간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의 거역함과 죄때문에... 내가 대학들에서 강연할 때, 그들은 곧 지적하곤 합니다. "아니오, 하나님은 미워할 수 없으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여러분,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낙태를 미워합니다. 내가 거룩한 것을 사랑한다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은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많은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대개 청소년 부흥집회전에 준비기도를 많이 하죠. 하나님이 부흥집회에 역사해 주시라고. 그런데 그 기도 모음에 가기전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TV프로그램을 즐기다가 갑니다. 그리고서는 기도회에 성령님이 왜 임재하지 않으시는지 의아해하고, 가짜 불과 가짜 흥분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이 거기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짜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죄 많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오직 한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잘 들으세요. 오늘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로마인과 유대인이 예수님을 박해해서도 아닙니다.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맹렬한 진노가 그의 독생자에게 떨어진 겁니다. 누군가는 죄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죽이셔야만 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기를 원하였다"라 고 나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는 우리의 값어치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상징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켜야 할만큼 저희의 타락을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직접받으며 돌아가시고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시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라고 외칠수 있는 파워입니다! 자,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라고 하죠? 마가복음에 보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폴 목사님, 전 주님 영접기도를 해서 구원받았는데요"하고 물어보죠. 저도 여러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믿어요. 하지만 당신은 어떤 마법의 법칙이나 누가 따라하라는 말을 따라 해서 구원 받은게 아니라 바로 죄를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예전에 한 번 그러는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마가복음 구절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때가 찾느니라 이제 너의 여생을 회개하며 믿으면서 살아라" 이겁니다. 한번 했다고 믿었다고 회개했다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 된 부분입니다. 회개는 인생에서 단 한 차례 일어나며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가 됩니다. 그 이후에는 성화의 삶이 있으므로 죄의 고백은 있으나 또 회개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말에서 고백 대신에 회개하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워셔 목사님의 Lordship salvation의 문제입니다. 다음에 이 부분을 자세히 논할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워셔 목사님의 심정 즉 죄를 미워해야 한다는 심정만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DSJ] 문제는 계속 여러분이 지금도 죄의 회개를 하시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계속 믿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그분은 여러분에게 시작한 일을 끝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일을 끝내실 것입니다. 남침례교단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이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 잊은게 있습니다.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부모님들도 잘 들으세요. 우리가 복음에서 정말 중요한 걸 잊어먹고 있는게 하나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문만 좁은게 아니라 그 가는 길도 좁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영접기도시키고 주님께로 인도한 후 그들이 세상 사람처럼 살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만약 이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저는 통계자료를 가지고 와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설문조사나 통계를 봐도 미국에 사는 기독교인의 윤리와 도덕을 세상 사람의 기준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게 없다는 점입니다. 이건 통계입니다. 종교랑 상관없어요. 신학자와 철학자들그리고 사회학자들이 교회에 대한 책을 많이 씁니다. 도대체 기독교는 어디있냐고. 교회안에서 낙태도 교회밖에의 낙태처럼 많이 일어난다고요. 이혼도 그렇고 부도덕한것도 그렇고...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어떤 청년들은 부도덕한 일을하고 있으면서도 오늘 예배에 참석해서 같은 호흡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마약을 하면서 청년회에 계속 나오는 사람들도 있구요,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해서는 안될 것들을 하면서도 청년회에 나오고, 자신들에 만족하고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들을 보고 육적인 크리스천이라고 할뿐 그 아무도 이것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은 진짜 크리스천인데 육적일뿐이라고. 바로 이게 몇십년 전부터 침례교단 신학교에 들어온 한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적인 크리스천이란 건 없습니다. "폴 목사님, 고전3장에 보면 바울이 육적 크리스천에 대해 말했잖아요" 아니죠. 그런뜻으로 말한게 아닙니다.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의 문제는 뭐냐면요 들어주세요. 우리의 기독교 정신은 기독교 티셔츠 뒤에 씌여진 흔한 말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정신은 성경에서 오지 않고 찬양작곡자 같은데서 옵니다. 우리가 대게 진리라고 믿는 것은 성경에서 오는게 아니라 세상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면서 지속적인 악행과 육적인 삶을 계속 사는 것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진정한 크리스천은 새로운 환경에 산다고 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그들을 사랑하고 징계하며 지켜주시며 돌보아주시는 아버지가 있다는 겁니다. 제 마음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다 알고 있는거잖아요. 외식하지 말고 숨기지 말자고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알잖아요. 여러분 중에도 있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중에도 있잖아요. 그들도 다 청소년 모임도 오고 다 행하는 거 같은데 마음속으론 얼마나 부패했는지..빛이 없어요. 다른점도 없고요. 세상사람들이 하는 거 다 하면서 괜찮다고 하고.. 친구들이여, 이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들은 상급을 잃어버리는게 위험한게 아니라 지옥에 갈까 위험한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죠. 우린 뭘 가르치죠? 거기엔 좁은문만 있는게 아니라 가는 길도 좁다고 가르친게 도대체 언제였죠? 예수님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좁은길을 걸어가라고 지시하셨죠. 미국에서의 진정한 크리스천의 증거는 뭔 줄 아십니까? 영접기도를 한 번 한것입니다. 놀랍지 않아요? 여러분이 자신의 구원에 확신이 없다고 하면 무어라고 합니까? "영접기도 하셨나요?" 라고 묻지요. 성경에 보면 말씀을 통해 믿음안에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고 시험하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하신다면 기독교는 달라질것입니다. 제가 지금 크리스천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요한일서에서 크리스천도 죄를 짓고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빛 가운데로 걷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뭐가 다른 걸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제가 하려는 말은 만약 여러분이 진짜 다시 태어난(중생) 크리스천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의로움 가운데 살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의로움에서 벗어난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오셔서 훈계하시고 다시 그 길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좁은문을 통과했다고 하면서도, 대다수의 고등학생과 세상 사람들처럼 육적이고 악하며 편한 넓은 길로 살아간다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두려워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평생 증거하는 분들이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했다면 저는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구원 받았다고 얘기하지 말고, 오직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구원 받았는가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잊어버린게 있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태어난 크리스천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성경말씀에 "누구든지 예수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다" 성경에 보면 좁은문과 좁은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예전에 지혜로운 분이 저에게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도 아셔야 합니다. 그분은 "폴, 너의 진정한 친구는 그대로 솔직히 말하는 사람이란다"했죠. 요즘 미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너무 눈치보느라 아무도 비난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죠. 많은 목사님들과 리더들이 이 거짓에 속아넘어 갔습니다. 우리들은 상처주기를 원하지 않죠. 친구처럼 다가가길 원하죠.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친하게 대할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반응과 태도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항상 여러분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하고 절대로 다된 밥상에 재를 뿌리지 않으며 당신이 박수치게 만들며 덩실 뛰게 하고 어지럽게하며, 즐겁게 해 줄것이며, 요즘 기독교를 이쁘게 포장해서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예수님보다 더 즐거운 롯데월드처럼 보이게 할 것입니다. 너무 여러분을 즐겁게 하느라 오늘처럼 이런 심각한 문제를 꺼내지 않겠죠. 바로 하나님이 내 삶에 계신지, 내가 거룩해지는지, 정말 다시 태어났는지 말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만약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압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고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구원받았음으로 어떻게 확신합니까? 누군가 당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해줘서요? 영접기도를 했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모두들 믿는다고 하는데 당신이 믿는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그들과 다른걸 어떻게 압니까? 성경은 당신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가르치는지 아세요? 50년전까지만 해도 침례교단에선 여러분의 구원 확신을 어떻게 확인했는지 아세요? 당신의 인생이 예전과 같지 않고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확인하죠. 그리고 당신의 삶이 하나님의 진리속에 걸어가는 걸 아는거죠.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길에서 벗어나듯이 그렇게 이탈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그길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이 진정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의 증거는 하나님이 여러분이 세속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 하고 세상처럼 감각적인 옷과 또 교회안에서 허락한 감각적인 옷차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죠.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처럼 행동하고 세상적인 냄새가 나고 세상처럼 말하고 세상에서 듣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성경말씀 계속 읽어보면 16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 말고도 평범한 사람들도 적용되는데요 그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인 줄 어떻게 아냐고요? 바로 그들의 열매로 입니다. 바로 그들의 열매로 입니다. 당신의 삶을 보세요. 당신이 걷는 걸 보세요. 당신이 어떻게 말하는지 보세요. 당신의 마음속의 열정을 보세요. 그속 어딘가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그는 그저 당신 삶속에 있는 하나의 악세사리입니까? 그분은 그저 수요일저녁과 주일에 한번 보는 분입니까? 아님 그저 머리속으로 인정하는 분입니까? 그가 악세사리입니까? 아니면 당신 삶 중심에 계시는 분입니까? 당신이 맺고 있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세상처럼 보이고 행동하나요? 세상에서 즐기는 그 기쁨을 여러분도 같이 즐기나요? 여러분은 죄를 사랑하며 즐기나요? 하나님을 거역하며 그것을 즐길 수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하나님은 그들을 변화시킬 능력이있습니다. 잠깐 여기서 주님이 이 말을 전하고 여러분은 듣고 있는 중이라고 가장합시다. 예수님이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가시를 무화가나무에서 찾을 수 있느냐?" 여러분은 "에이, 주님 당연히 무화과나무에선 가시를 찾을 수 없죠" "그럼 하나 더 물어보자." "너희들은 좋은 열매를 가시나무에서 찾을수 있느냐?" "당연히 못찾죠. 절대로 가시를 무화과나무에서 못찾고 좋은 열매를 가시나무에서 찾을 수 없죠. 만약 이런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하거나 미친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내 제자라고 자칭하며 나쁜 열매를 맺는자들은 거짓말쟁이며 정신이 나갔다가고 말하는게 같은말이구나" 여러분 좀더 가장해 봅시다. 이 집회에 늦어서 헐레벌떡 강단으로 뛰어 올라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든 다른 목사님들이 화가나서 말씀하실테죠. "폴 목사님, 이런 기회를 준걸 감사해야지 어떻게 늦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말합니다. "목사님들,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일이죠?" "오는 도중에 고속도로에서 그만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가는데 나사가 빠져 굴러가길래 나사를 주워서 일어나 보니까 내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서 있고, 30톤짜리 통나무 트럭이 나를 향해서 170Km로 달려오더니, 나를 덮쳐 버린거예요. 그래서 늦었어요." 자, 두가지 경우밖에는 없습니다. 요새는 아무도 논리를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두가지 논리적인 결론밖에는 없어요. 제가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미친사람이거나. 목사님들은 "폴 목사님, 정말 말도 안되요. 그건 불가능해요. 통나무 트럭같이 거대한 물체와 부딪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구요?"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뭐가 더 큰가요? 통나무 트럭이요? 아니면 하나님이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딪쳤다고 하면서, 어떻게 완전히 변화되지 않을 수 있죠? 몇가지 생각해 봅시다. 내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거예요. 얼마나 여러번 여러분은 또 다시 헌신을 다짐합니까? 또하고 다시, 다시... 여러분들이 이런 집회를 갖고 불을 받고는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지속됩니까? 한 열흘쯤? 그리고 말하기를 "와!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예요. 그건 그냥 당신의 감정이었던 거예요. 다른 어떤건 될 수 있어도, 그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역사하셨나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시나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19절 봅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길 주목합시다. 히브리인들의 문헌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대게 우리는 어떠한 것을 강조하려고 할 때 흔히 목소리를 높이고 그에서 강조하고 싶으면 굵은 글체나 대문자로 쓰죠. 유대인들을 다릅니다. 그들은 무언가 강조하고 싶을때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악인은 땅에서 사라지고 악인은 멸망할 것이라는 것처럼 비유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서도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고 또하는 것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들의 가는 길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리고 주님은 누구든지 열매를 못맺는 자는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바로 어느날 세상에 임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당신들에게 떨어질 수도 있는 심판의 날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마음 속을 알지 못합니다.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고 속기 때문이죠. 그러나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 그리고 그분은 요즘의 크리스 찬 문화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걸 아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예수님은 21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이 예전에 주님을 영접한 기도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래요, 지금 본문을 읽었죠? 생각해 보세요. "나더러 주요 주여하는 자마다..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를 고백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중에 한분입니까? 다시 히브리인들의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말씀을 보면 주라고 한번 부른게 아니라 주여 주여 하고 두번 불렀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갑자기 심판이 와서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라고 항상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걸어다니면서 외쳤고, 춤추면서도 주를 외쳤고, 찬양하며 주를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라 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사랑스럽고 친절한 분들 중 한분인 빌리 그레함 목사님을 아시죠? 그러나 빌리 그레함목사님은 교회를 다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전도집회 중에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 중에 다만 5퍼센트라도 구원을 받는다면 자기는 행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나이지리아에 있을 때, 우리 교회 어떤 어머니의 아들의 장례식을 갔습니다. 무슬림에게 순교를 당했죠. 북나이지리아에서 누군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인정한다면 그건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백으로 죽을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미국에선... 대가를 아십니까? 생각하세요. 자신을 점검하세요. 성경말씀으로 점검하세요. 주님을 아십니까? 주님을 아시냐고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보세요. 뭐라고 말하는지 잘보라고요.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다시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우리들의 신학은 뭘 하는거죠? 교리는 뭘하고 도대체 뭘 가르치는 겁니까? 그냥 날라가 버렸어요. 아무도 교리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저 ccm음악이나 듣고 티셔츠 뒤에 씌여진 ccm 가사나 읽으려고 하죠. 도대체 진리는 어디로 간거죠? 진리는 이겁니다. 당신이 만약에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이라면,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 겁니다. "오, 목사님은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군요"라고 여러분은 얘기하겠죠? 아니예요. 아닙니다. 나는 믿음의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은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이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바너설문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65-75퍼센트가 자신이 구원 받고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한 짓을 하는 나라중 하난데 말이죠. 매일 4,000명의 아기를 죽이면서 75%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감사드리죠.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구여? 여러분의 믿음이 가짜가 아닌 걸 어떻게 압니까? 바로 당신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때는 성령님이 오셔서 말씀을 통해서 징계하시거나, 아니면 예수안의 형제자매를 통해서 여러분을 깨우치시고 다시 옳은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의 목사님이라고 가정하고 여러분중에 14살짜리가 공원에서 불량청소년들과 놀고 있는걸 제가 새벽 한시에 집회 끝나고 오면서 본다면 저는 바로 차에 태워 그 아이의 아버지께로 데려 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당신은 정말 무책임한 아버지군요. 이렇게 위험하게 애를 내버려두다니..." 여러분! 하나님은 무책임한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 당신이 죄의 안에서 놀며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항상 세상 일에 얽혀있고 세상의 일을 하며 세상 사람들의 영웅이며, 그들처럼 보이고 그들처럼 행하고 그들이 행하는 것을 똑같이 행하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외침을 잘 들으세요. 만약 이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결말로 갑시다. 21-23절을 보겠습니다. 22절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마7:21~23) 여러분은 살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아시냐는 겁니다. 내가 조지 부시를 안다고 해서 내일 백악관에 가도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지 부시가 나와서 내가 Paul Washer 를 안다고 하면 저를 들여 보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당신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진정 아십니까? 여기서 이 구원받지 못한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봅시다. "불법(anomia)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그리스말로 anomia는 'a'는 부정사, 'nomos'는 법. 즉, 불법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말하겠습니다. 정확한 번역을 해 볼게요. 내가 내려가서 여러분을 껴안고 이 얘기를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잘 들으세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제자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내가 너희에게 순종해야 할 법을 전혀 주지 않는 것처럼 사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은 북미 대다수의 크리스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 율법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 그리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과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할 것을 성경적인 원칙을 두고 말한다면 모두가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난리를 칩니다. 율법주의자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께 순종해야할 법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사는 자들은 다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요즘 미국 기독교는 그러죠. "야호~ 문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만 괜찮아요. 그냥 육적인 크리스천 일 뿐이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죠." 이런 잘못된 복음관 때문에 무슨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여름성경학교에서 구원받은 수많은 아이들의 대부분이 15살이 되면 다시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마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아이 서른쯤에 다시 주께 헌신하며 돌아오는 사람도 있겠 죠. 어쩌면 겨우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구원은 주님을 인정하고 간증했다고해서 받는게 아닙니다. 사탄마저도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 후에 두 사람, 두 집의 기초에 대하여 또 이야기 하십니다. 이 비유가 요즘 기독교..이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돌과 모래의 요즘 기독교의 해석은 이렇답니다. 만약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의 삶을 반석위에 세워야합니다. 만약 모래위에 세운다면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거고 당신의 삶은 옳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제겐 역사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된 적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세요? 거기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여러분은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그리고 두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서 천국에 가는 좋은 나무가 있고,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에 나쁜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는 잘리고 불에타서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사람중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지옥을 가는 이유는 행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부족함이 행함이 없는 걸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시죠. 이것은 두 개의 다른 기초에 집을 짓고 있는 두 명의 크리스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다시 말하듯이 한명은 구원받은 자고 한명은 구원받지 못한자의 비유입니다. 구원받지 못한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는 기울이지만 기초를 깔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집의 기초가 되는 걸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만약 숫자에 상관없고 우리가 여태 한말에 상관없이 이 비유를 남부침례교인들에게 비교해서 이렇게 물어 본다고 가장합시다. "당신의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둡니까?" "당신의 아이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키우나요?" "당신의 재정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관리하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과 다르게 살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들을 한다면 얼마나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나요? 그들은 "됐네. 난 고백했다구!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말이지. 내 주일학교 선생님이 가르쳐줬다"고 말하겠죠. 오, 여러분...제 아는 분중에 레이븐 힐씨는 제게 말했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침례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많이 있어요"라고. 저도 오늘 여기서 사탕발린 말만 사전에서 골라써서 여러분을 놀랍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붕뜨게 만들어서 날아갈 것 같은 설교를 할 수도 있었죠. 또 여러분을 웃게 할 이야기도 할 수 있었고 할머니와 강아지 이야기를 해서 여러분을 울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에 전 여러분을 너무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구원을 못 받았다는 걸 압니다. 지금 여기서 여러분들 중 "나는 구원받았어. 우리 청년부 회원이랑 다른게 없는걸?" 여러분! 당신의 청소년 그룹도 안전하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중 "난 우리 부모님같고 우리 교회 장년부 그리고 집사님과 목사님과 같은데요?" 도대체 이런게 무슨 상관이죠? 앞으로 주님이 오는 날에는 그들에게 심판받는게 아닌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저의 자녀 같습니다. 그리고 이중엔 커서 목사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서 "이제 이런건 그만!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봅시다! 성스러운 성령의 불앞에 당신의 인생은 떳떳하게 설 수 있습니까?"라고 선포하는 아이들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소녀여, 사랑하는 소년이여! 그 마지막 날에도 당신의 신앙 고백이 유효합니까? 유효합니까? 당신은 구원 받으셨나요? 저는 여러분중에 "아마도 내 생각에 난 구원받은 것 같아"
2009-06-07 22:13:40 | 관리자
내 아버지는 6.25 때에 인민군으로 내려와 후퇴하다가 UN군에 사로잡혀 거제도로 가서 수용소 생활을 하고 반공 포로로 풀려났습니다. 북에 돌아갈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분은 온 가족을 포기하고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사촌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 채 지냈습니다. 그 아버지가 통일을 바라다가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늘 하시는 말씀은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 봐야 그 체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체제 밑에서 산 적이 없으나 성경을 보면 그것은 명백한 마귀 시스템입니다. 몇 명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위해 온 민중이 희생되는 사악한 체제입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으면서 기독교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사는 성도들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구약 시대의 예레미야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바빌론에게 항복하면 살고 이집트와 동맹하면 죽는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복음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종교가 왜 정치에 개입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열심이 예레미야 안에서 일할 때에 그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여 평생을 백성의 안위를 위해 외쳐댔습니다. 물론 그의 말은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울면서 진심을 이야기해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지금 나타나서 우리에게 바른 것을 전한다 해도 아마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거의 고통과 배고픔을 잃어버린 세대들의 이념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터질 때에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세계관이요. 가치관입니다.   6월, 전쟁의 때에 과거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과거를 알아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긍휼을 베풀되 특별히 내 아버지의 고향 북한 땅에서 독재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내 동포들에게 풍성히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은 과거를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만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조국과 바른 체제를 사랑합니다.   백선엽 장군과의 대화
2009-06-06 13:15:59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접 기도 복음이 아니다 ● 정동수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일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책자를 읽고 간단히 설명한 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은 뒤 손을 들고 나오면 목사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람 순수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지요.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무 쉽게 Easy believism에 빠져서 또 압력에 견디지 못해 영접 기도를 하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손을 들든지 안 들든지, 영접 기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이미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드러나는 외적 행동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을 들라고 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선자(혹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회나 집회에서 손든 사람의 수를 세면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한때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고 또 순순한 의도로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폴 워셔 목사의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세상에게 기독교를 받아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앞에 말할 기회가 오직 한번 뿐일 때 제가 하던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벌써 복음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사영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의 사실들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있지도 않는데도 그저 다른 사람들의 결심을 도와주는 것과 그들이 구원받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저 설교들과 신앙고백하는 법 그리고 교회성장등을 가르치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이에게 다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천국가길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그가 그렇다라고 진지하게 대답을 하며 기도하면,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 일컫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법의 전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사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정작 변하지도 않으면서, 그들 자신을 거듭난 기독교인이라 일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젠 그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간단한 결정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탄에게 물어보십시오. 사탄도 그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죄인중에 죄인으로 말이죠. 질문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가 아니라, 복음을 깊이 들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하셔서 그동안 사랑해 왔던 죄악을 이젠 진심으로 싫어하냐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천국가고 싶습니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하나님이 없길 원하죠. "당신은 천국가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복음이 당신에게 전해진 이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주권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을 통해 그동안 싫고 무시해왔던 하나님을 이젠 당신이 간절히 원하며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으로 받아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라는 기도에 대해 그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성경에선 그를 영접하라고 했는데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사영리에 나오는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그를 당신 인생의 악세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속에서 당신의 인생을 더 좋게 만드는 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이 되십니다. 그가 당신의 삶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누가 자신의 마음속에 와달라고 나에게 기도할 것인가?"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회개는 삶의 열매에 의해 증거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구원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결심을 더 의지한 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습니까?" "네" "어떻게 아시죠?" "3년전에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거든요" "정말로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했습니까? 구원의 증거, 회개의 증거, 믿음의 증거는 변화되었고 변화하고 있는 삶입니다. 예전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 이유는 오늘도 그 회개를 지속해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 믿을 수 있냐고요? 왜냐하면 오늘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통해 그는 당신의 인생을 바꾸셨을 뿐만아니라 지속해서 당신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복음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복음은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십시오. 200년 전, 또는 30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서적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스펄전이나 청교도나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된 회심인가? 어떻게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을까? 오늘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셔서, 그러한 복음에 대해 기록된 책들을 찾아보십시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어떻게하면...열가지 순서들"뿐일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모르고, 진정한 회심을 모르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것들을 예배속에서 어떠한 미디어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작된 찬양방식이나 하나님보다도 더 원하는 우리의 좋은 인생을 원하기에 우리가 듣길 원하는 설교만을 전하는 화려한 연설자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잃었기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남자, 여자 그리고 자녀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저 꾸밈없는 순전한 복음말입니다.
2009-06-04 10:32:22 | 관리자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 사망을 접하면서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시대 정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대언자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보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힘들게 한 주를 보냈는데 오늘 우연히 한동대학교 학생의 글을 읽고 여기에 바른 그리스도인과 애국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특히 청년들이) 곳곳에서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목사들이 바른 것을 바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라는 타이틀을 부끄럽게 만든 이 글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韓東大 총학생회 성명서   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校內 분향소 설치를 반대하는가?(한동대 홈페이지에서 퍼옴) 저는 분향소 설치를 분명히 반대합니다!  28일 한동대에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저희 총학생회는 분명히 반대 입장을 표했고 학교에서도 허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이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우선 유감을 표합니다.   저와 총학생회가 분향소 설치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와 많은 학우들은 전직 국가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국가적’ 비극으로 보고, 지난 월요일부터 3일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셋째날인 지난 수요일, 하루 이상 금식한 100여 명의 학우들이 비전광장에 함께 모여 오늘 우리 나라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애통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 뜻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학으로 자타가 말하는 한동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무엇보다 목회자의 아들로서 이 국가적 사태 앞에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매우 큰 논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악담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값진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제 부모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정직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제 신앙 양심으로써 분명히 표명하는 것은, 한동대 내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설치는 옳지 않습니다.   1.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관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대학입니다. 이곳 거룩한 하나님의 대학에서 이 사실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국민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국가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그분의 명예롭지 못한 방식의 죽음에 대해 어떤 미사여구로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2. 이념적 성향의 분향소 설치는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대통령은 아니고, 오직 노무현 대통령만은 분향소를 설치해서 추모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일정한 이념성향 때문일 것입니다. 건국의 위업을 달성한 분도 거부되고, 가난을 극복하도록 한 분도 거부되며, 그밖에 그 어떤 치적을 가진 대통령도 거부되겠지만 오직 그분만은 ‘추모하여 마땅할 만큼 위대하다’는 논리가 이념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에, 꼭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부끄러워하며 회개해야 할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어 우리 주님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아프칸에서의 의롭고 아름다운 순교는 파렴치한 기독교 신자들의 철부지짓처럼 치부되었으며,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 오판하여 끝없는 유화정책으로 김정일을 달래는 것만이 북한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알려졌습니다. 탈북자들은 유리방랑하면서 냉대를 당했고, 북한의 인권문제는 부당하게 금기시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이 현 정권의 강경한 대북 태도의 소산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주장이 아닙니까? 공중파 방송에서 무당과 귀신부름이 드라마로 오락으로 정당화되었고, 성적 타락과 높은 이혼율, 저출산과 가족의 해체, 자살율의 급증과 우울증의 확산.   오늘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이 비극은 어떤 한 자연인의 자살이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였고 대한민국의 상징이었던 분의 비극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나라의 비극입니다. 이때야 말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국가적’ 차원의 죄악을 점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겸허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보내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의 향을 올려야 할 때입니다. 겸손하게 무릎꿇고 청년, 지식인,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 새로운 축복을 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이 글에 연서하는 학우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이 나라의 슬픔을 함께 애도합니다. 주님, 오셔서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옵소서.   한동대학교 14대 총학생회장 박총명    박수근 경영경제학부 김문정 생명과학부 이미선 GEA 정서륜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남윤성 생명과학부 이태훈 GEA 박정은 국제어문학부 노민지 생명과학부 조은주 GEA 이종원 국제어문학부 오현교 생명과학부 하임숙 GEA 최다은 국제어문학부 신명환 생명과학부 윤영훈 GEA 김성아 국제어문학부 정민주 생명과학연구소 김유진 글로벌리더십(GLS) 박현성 국제어문학부 김미선 생활관 간사 김형진 GLS 성선제 국제어문학부 최은경 상담심리학부 한진식 GLS 송영호 기계제어학부 김은총 상담심리학부 황민혜 GLS 허준석 기계제어학부 김아영 전산전자공학부 김세정 GLS 최병철 법학부 주충성 전산전자공학부 이예은 GLS 송수연 산업디자인학부 신민용 글로벌에디슨(GEA) 김정훈 GLS
2009-06-03 22:33:25 | 관리자
  십일조와 그리스도인   ● 김재근(전주 소망침례교회 목사)   말라기 3장 7절부터 12절까지 보겠습니다.   7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심지어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내 규례들을 버리고 떠나 그것들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돌아가리이까? 하였도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   9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으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10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먹어 삼키는 자를 꾸짖으리니 그가 너희 땅의 열매를 멸하지 못하리라. 또 너희 포도나무가 때가 이르기 전에 자기 열매를 밭에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12 너희가 심히 기쁜 땅이 되므로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러분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까? 십일조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십일조와는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까? 십일조 때문에 늘 꺼림직 하게 살았습니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했더니, 물질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십일조뿐만 아니라 돈 문제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전통적 개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라기 3장 본문에 근거한 십일조 설교를 한두 번쯤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심지어는 근본주의 침례교회들조차도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설교하며 ‘압박’할 때면 언제나 말라기 3장을 인용합니다.   본문은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8절].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9절]. 왜?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먹어 삼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을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 십일조를 취해 가신다.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질병에 걸린다든지, 입원을 한다든지, 분실한다든지, 무슨 재난을 당한다든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그동안 배워왔고, 이렇게 알고 있으며, 이렇게 설교를 들어 왔습니다.   또 10절 말씀에 따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물질적인 축복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나를 시험해봐라.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득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안하십니까?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나를 시험해 봐라!!   그러니까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 말씀을 믿는 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다른 면에는 신앙생활은 모두 엉망인데도 십일조만 철저히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 쏟아지는 줄 알고서 그러한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러니까 물질축복 받고자하는 성도들은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먼저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 심지어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의견은 일치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르칩니다. 십일조에 대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여타 죄에 대해서는 오래참고 인내하시지만, 십일조를 안 하는 죄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징계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안했더니 우환(憂患)이 닥쳤다.’ 또 하나님께서 다른 선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지만,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크게 보상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르침에 세뇌된 교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역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더니만, 그렇게 되는구나.’ 라고 쉽게 단정 짓습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안 하더니만! 쯧쯧.’ 하며 철저하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인들은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책망합니다. (어라, 저 집사는 왜 저럴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요. (어, O 집사, 이리 와보라고. 십분의 일을 떼서 반드시 드려야 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한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철저히 십일조를 드린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소유의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하나님, 축복하실 때 좀 감안하세요!’   성경에 따라서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조한다면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돈! 좋잖아요. 교회로 돈 많이 가져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십일조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정확한 진리를 제시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도움은 있을지언정 각 성도들의 영적 삶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성경 앞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믿었고, 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지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날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건 안하는 사람이건 수많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강조하건 강조하지 않건 대부분의 목사들이 차분하게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을 찾아가며 공부할만한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는 그냥 어디서 배우고 들은 대로 가르칩니다.     십일조(tithe)라는 용어와 십일조에 대한 설명 및 그 내용과 원칙은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십일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는 8번만 나옵니다. 32번은 구약에 있습니다(창14:20; 레27:30-32; 민18:24,26,28; 신12:6,11,17;14:22-23,28;26:12; 대하31:5-6,12; 느10:37-38; 12:44; 13:5,12; 암4:4; 말3:8,10).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누가복음 18:12에서 세 번 나오고, 나머지 다섯 번은 전부 히브리서 7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구절도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십일조는 교리적으로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 외의 위대한 사도들이 신약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말할 때, 왜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도들은 헌금의 의무를 설명하면서 아무도 ‘십일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한 번이라도 기록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아무 효력 없는 구약의 율법을 되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진리라고 해서 아무런 구분 없이, 시대의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그대로 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건 이단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라고해서 아무것이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바른 영적 사귐을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 교사가 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성경의 방언은 전부 외국어)을 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언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시대는 지금과 맞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왕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단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국 복음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단입니까? 지금 이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해서 적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신유(神癒)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신은 사도 직분을 계승 받았다고 한다면 우린 그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직분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됐지요? 그 사람들이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창고! ‘스토어하우스’(storehouse)입니다. 창고!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를 쌓아놓는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창고는 구약시대 성전에 딸린 건물이었습니다. 봉헌한 물건들을 성전에 딸린 창고에 쌓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8절을 보기 바랍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취할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우리 하나님의 집의 방들로 가져다가 보고 집에 둘지니.   지금은 돈을 은행에 보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행이라는 단어도 모르셔서 십일조를 창고에 두라고 하셨겠습니까? 성경에는 ‘은행’이란 단어가 분명히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성경대로 하면 십일조는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교회마다 창고를 마련해서 거기에 갖다 넣어야 합니다. 은행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창고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곡식이나 가축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말해 봅시다.   많은 부작용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의 수입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솔직하게 시인하셨습니다. ‘아! 그 사람이 십일조를 내야지 교회가 운영되는데 왜 안 낼까!’     돈 있는 교인이 십일조를 내야지만 교회가 운영될 수 있다는 단순한 계산에서 또 성경에 십일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있고, ‘복을 쏟아 부어 주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십일조를 독려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물론 교회는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운영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충족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는 교회 운영을 걱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목양하라고 사람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그 설교자에게 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라고 일꾼들을 세우시지 교회의 운영을 걱정하라고 세우시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는 반드시 잘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은 주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고 있는 성도들의 성실한 ‘헌금’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마음에는 없는데 억지로 하거나, 율법에 근거해서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지만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강조해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사람은 기뻐할지언정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목회자로서 나에게 맡겨진 사명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교회 운영이요? 이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니까, 교회 운영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좀 걱정해 주십시오. 나는 교회 운영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사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목적이 왜곡되면 신자들이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일과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는 일이 주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가 아니라 “무서움과 두려움! 또 이렇게 안하면 우환(憂患)이 닥칠 것 같은 마음! 더욱이 말라기 3장을 보니까 십일조 떼먹은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정말 무섭다. 또 십일조 해야지 물질축복을 받는다 하니까” 하는 동기에 의해서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 3장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볼 때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았을 때 당장은 이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적 삶에는 별로 유익을 끼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데 정말 기쁨과 자원함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과 이것을 안 드리면 사업이 망할 것 같고 교통사고가 날 것 같고, 병에 걸릴 것 같고, 그러한 마음에서 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엄청납니다.        십일조와 할례의 근거는 동일하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강요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든지, 유대인들의 모든 명절 즉 유월절이나 장막절을 지키라 한다든지, 아니면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든지, 부정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든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는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신약교리로 가르치는 교회나 목사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아, 이건 율법이 아니다! 물론 율법에도 있지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은혜의 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십일조를 배운 거다. 율법 시대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율법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모세의 율법과 상관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율법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만 한다.’   정말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같은 이유로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행했듯이 율법 이후 시대인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세기 17장 24절). 율법 이전에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합니다. 십일조도 드리면서, 율법 이전에 받은 할례도 다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안디옥 교회의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신자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사도행전 15장 10절) 그들은 자신들도 메질 못하고 조상들도 지질 못했던 멍에를 새롭게 복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부담시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행했는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하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안 해도 된다는 그러한 원칙은 누가 정한 것입니까?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도 받고 십일조도 했는데 십일조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해야 되고 할례는 하면 안 되고 그런 원칙은 도대체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습니다. 175년을 사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딱 한 번 있습니다. 175년 동안에 단 한 번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통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십일조 생활을 착실하게 했기 때문에 물질 축복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가지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강조하는 모든 목사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각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걱정하고 주님과의 올바른 사귐에 대해서 걱정하기 때문에 착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강조하는 목사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강조함으로 신자들에게 의무 조항으로 놓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성경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연구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개 그냥 들은 내용, 책에서 읽은 내용,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어떤 100m 선수가 죽을 힘을 다해 가지고 9초 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실격일 수 있습니다. 실격인 경우에는 금메달을 못 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의 트랙으로 왔다 갔다 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법일 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의 십일조 생활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십일조 생활을 했을까요? 십일조에 대한 기록 대부분은 모세의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은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한 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일조가 강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자유의사가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율법 하에서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드시!! 안 하면 큰일 납니다. 레위기 27장 30절 말씀을 보십시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의무사항으로써의 십일조는 성막을 관리하며 레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적으로 정해진 세금과 같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신정(神政)국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헌법(憲法)입니다. 모세의 율법아래에서 십일조는 오늘날 국민의 의무조항인 세금(稅金)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 십일조를 삼키는 자가 되는 것이며 저주를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한 가지 종류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십일조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매년 내는 십일조가 있고, 또 삼년마다 한 번씩 내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먼저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두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민수기 18장 24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럼 그걸 누가 갖습니까? 레위 사람들이 갖습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은 상속받은 땅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로 드린 것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당시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고 일 년에 한 번 수확을 하면 십일조는 어떻게 했을까요? 반드시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게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고 삼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신명기 14장 28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삼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자, 그러면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용도가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위한 십일조가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6장 12절을 보면 ‘the year of tithing’ 즉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정해져 있습니다. 삼년에 한 번씩.   아모스서 4장 4절에도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십일조입니다.     개역성경에서 왜곡된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를 많이 거둬드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아모스서 4장 4절에 삼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읽고는 깜짝 놀랍니다. ‘어, 십일조를 삼 년 뒤에 내라고! 이거 말도 안 돼!’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했을 까요? 성경을 뜯어 고쳤습니다. 개역성경이 뭐라고 뜯어 고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삼일마다 십일조를 내라고 성경을 뜯어고쳤습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결하게 손질을 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현금(現金)으로 드릴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출의 십일조를 드릴 때 그것은 레위 사람,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주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를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드려야할 전체 양은 대략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23%입니다(가축의 십일조, 매년 소출의 십일조,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등). 만약에 당신이 성경에서 정한 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려한다면 수입의 23%를 드려야 됩니다. 무지에 의해서든 불신에 의해서든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잘 해 주시고 물질 축복을 해 주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은 그들이 지금 십일조에 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내 수입의 철저하게 1/10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23%를 내야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입니다. 유대인들은 소산과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십일조 드릴 것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건지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 이 가축들은 십일조다.’ 이렇게 따로 분리해 놨는데 이것들을 팔게 될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 경우 십일조로 정해 놓았던 곡식이나 가축을 돈으로 바꿨더라도 당연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7장 31절을 보면 이런 경우에는 원금에다가 5분의 1을더하여 십일조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하에서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에는 10분의 1 즉 10%가 아니라 12%입니다. 왜냐하면 5분의 1을 더하도록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금으로 십일조를 드릴 때는 12%를 드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제가 오늘 정답을 드리겠습니다. 수입의 12%가 철저한 십일조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신자가 자신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물질 축복 하셨다고 한다면 성경과 어긋난 주장입니다. 철저한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12%입니다. 현금(現金)일 경우에는 12%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의식   십일조를 받는 사람도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 읽어봅시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해야 할 의무 조항으로 여긴다면 동일한 이유에서 할례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나 짐승 희생제 등도 지켜야 합니다. 또 십일조를 받은 뒤에는 의식이 뒤따라옵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거제헌물(Heave offering)이라고 해서 그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께 높이 들어 올려서 바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민수기 18장 24절). 지금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돈 밝히는 목사들이 십일조 봉투를 높이 들고서 공개적으로 이름 부르며 기도하는 의식에도 나름대로의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누구 집사님 십일조 헌물 하셨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레위 사람들이 시행했던 거제 헌물과 똑같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명히 가르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 현재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수입의 12%를 드립니까? 아니면 23%를 드립니까? 당신의 수입에서 정확하게 10%를 정말 드릴 수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의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이자가 붙었습니다. 그 이자의 십일조는 어떻게 하십니까? 친구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십일조는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이익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감히 나는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 응답을 해 주실 것이며 물질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것은 투자(投資)일 뿐입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투자했으니까 나에게 10배로 돌려 주십시오!’ -사실 이것이 순복음 교회의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므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초등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율법에게 종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가고 의무와 규범만을 남깁니다. 여러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정말 자유와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의무와 규범만 남았습니까? 십일조라는 주제가 여러분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이 명절에 대한 것이든, 유월절이든, 장막절이든, 십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든, 짐승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이든,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는 요구이든,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 시켰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많은 성도가 자기 소유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몽땅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봅시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과 영,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소유물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요구할 자격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세금을 강요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이 올바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에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십일조의 법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말라기 3장에 근거한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 신앙의 자유가 없이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십일조, 이런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야호 해방이다. 해방! 십일조 안 해도 되는구나. 속 시원하다.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십일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설교가 의미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하면서도 십일조라는 법에 얽매여서 돈 문제에서 자유로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 조문인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고 우리도 감당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멍에를 다른 성도들에게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자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얽어매는 속박의 멍에를 감히 누가 성도에게 얹어 놓는단 말입니까?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신정국가에 살던 유대인에게 정해진 세금(稅金)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 십일조란 단어가 8번 나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 레위 사람들이 받았던 십일조를 합쳐서 5번,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3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십일조는 전부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드렸던 십일조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2절 -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신약 성도의 드림은 율법에 의해 규정된 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 하면 재앙이나 우환이 닥친다.’ 이런 말은 애들 장난보다도 못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것을 떼먹고,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고도 여러분이 멀쩡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드림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드림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봅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읽읍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율법은 마지못해서라도 하게 하지만, 복음은 자진해서만 하게 합니다.   ‘나는 10분의 1로 정했어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1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저... 나는 20분의 1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3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니까요.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십일조를 안 드리면 우환이 생길 거야, 우리 애가 아플 거야.’ 이런 헌금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고귀한 사역,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돈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십일조를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자유함 속에서 자발적으로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1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2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10분의 2가 될 수도 있고, 5분의 1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믿음에 따라서 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대로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10분의 1을 최소 수준으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10분의 1을 나의 최소 수준으로 정합니다. 그건 내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나처럼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자기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10분의 1을 철저하게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더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덜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고 예는 될 수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조문에서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단 말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얼마를 드릴지는 전적으로 자신과 주님과의 문제입니다. 혹시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기도하세요. ‘주님, 나의 삶이 이렇고, 나의 수입이 이렇고, 나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만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 돈에 대해서조차도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자   바울 서신에서 성도들이 범할 많은 죄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꾸짖고 있지만 십일조 안 한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네가 십일조 떼먹었으니 너는 저주받았다!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도 네가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차원이 다릅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명령으로 가르치며 ‘반드시’라는 조항으로 가르친다면 초대교회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물질을 드림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앙의 자유 안에서 결정될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좋다. 내가 모세의 율법대로 철저하게 난 23%를 드리겠다.’ 이렇게 율법에서 규정한 대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너는 특별대우다, 너는 보너스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모세의 율법조항인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십일조라는 한 항목만 행합니까? 율법을 다 실행해야 합니다. 신자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킴으로 믿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다 인간적 수고를 더해 보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때 할례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듯이 오늘날 십일조가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마 성경을 바꿔서 기록했을 것 같습니다.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십일조를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시리라. 내가 십일조를 행하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어떻습니까? 느낌이 팍 옵니까? 초대교회 때 할례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아브라함의 할례를 예로 들어서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파들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들어서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할례가 무효화 됐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십일조가 무효된 것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또한 구약에서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은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10분의 1만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딱 떼어드리면 나머진 땡입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됩니까? 신약성도의 드림은 각자의 재량권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사귐 가운데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몇 퍼세트를 드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10분의 1만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드림에 동기는 사랑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제적인 법조항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 사역하면서 한 번도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모금을 해서 가난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을 봅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때문에 움직여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운영을 걱정한다는 핑계로 구약성경의 율법조문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당장은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각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사귐 속에서 건전하게 영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에 대해서, 십일조에 대해서는 율법에 끌려 다니고, 무척 부담스럽게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 율법 아래로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끌고 가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성경의 본을 따라 스스로 10분의 1을 정해서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십일조라는 그 조문, 율법조문의 오용(誤用)이 얼마나 잘못된 적용이고, 비 성경적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뭔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뭔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함에 이르렀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여러분에겐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을 봅시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사랑을 우리가 행함으로 모든 율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섬기겠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며 살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 돈에 대해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도 주께서 가르치신 본에 따라 사랑의 동기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 자유를 잃어버리고서 부담스러운 속박에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십일조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2009-06-03 20:14:38 | 관리자
항상 킵바이블에서 유익한 정보를 얻어가는 사람이온데 다름이 아니오라 성경에 관련한 질문이 있어서 올립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5-28 21:33:06 | 변영선
현대 교회는 배도의 물결 속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 명상 등을 강조하는 카톨릭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교회, 은사주의로 팽배한 교회 등이 앞으로 온 세상을 어둠으로 이끌 교회들입니다.   다음의 사이트는 이런 교회들의 실상과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깊은 연구를 통해 보여 주고 관련 자료들을 만들고 판매하는 곳입니다. 세상과 교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고자 하면 여기를 방문해 보기 바랍니다.   http://www.lighthousetrailsresearch.com/[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5-21 20:53:46 | 관리자
현 시대 교회안에 일어나는 각종 이단 현상들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PDF파일로 각종 문제들이 정확하게 분석되어 있다.   http://www.mediaspotlight.org/   앨 데이저(Al Dager)가 운영하는 이 사이트는 현 시대 교회의 대부분의 배교 운동을 성경적으로 분석해서 제시한다. 알파 코스, 뉴에이지, 교육, 잘못된 교회 운동에 관한 성경적 분석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 데이저는 전직 신부로 알려 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자세하게 현 시대의 상황을 잘 분석해 주고 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5-21 20:51:54 | 관리자
위험한 지도자들 요즘 기독교 서점에서 뜨는 책들이 있다. 하나님의 모략(달라스 윌라드) 헨리 나우엔의 영성 편지 기도, 레노바레 컬렉션 1, 그분 모시고 세상 속으로(리차드 포스터) 사랑의 교회를 담당했던 옥한흠 목사님은 '하나님의 모략'을 가리켜 "나는 성경 외에 하나님의 모략만한 책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 책을 추천했다. 이동원 목사도 강력히 추천했다. 이래저래 유명 목사들의 추천에 힘입어 이 책은 근 30쇄를 찍었다. 이 정도면 한국 기독교계에서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다. 미국 아마존 서점에서도 윌라드(Dallas Willard)의 책이 기독교인들이 읽어야 할 20가지 책 중에 상위 4-5개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복있는 사람이라는, 장로교 계통의 출판사에서 이 책을 찍어 내고 있다. 그러네 이 출판사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들을 찍어 낸다. 그러니 사람들이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다. 마틴로이드존스 목사가 가장 증오할 대상들이 바로 윌라드와 포스터와 유진 피터슨, 나우엔인데 이런 사람들의 책이 존스 목사의 책과 같은 데서 나오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철학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달라스는 궁극적으로 카톨릭 수도사들의 명상 기법, 고독 훈련, 예수회를 세운 로욜라의 영성훈련 기법 등에 의지하는 제자도를 가르치고 있다. 이상하다 싶어 어젯밤에는 밤 1시까지 Google에서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한결 같이 카톨릭 영성주의를 기독교에 파급시키는 전도사들이다. 이전까지 예수회 사제인 나우엔이 이런 일을 하다가 이제 포스터, 윌라드 등이 기독교 포장을 갖고 철학과 카톨릭 신비주의로 무장한 채 기독교 안으로 깊숙히 마귀의 것을 가져오고 있다. 그런데 유명하다는 목사들이 속수무책이다. 그러니 신학생, 청년들이 이런 철학적 성경해석 책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http://www.lighthousetrailsresearch.com/ 위의 사이트에 가면 이들의 면모가 소상히 밝혀져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조심하지 않으면 다 거기에 빠진다. 이들이 참가하는 레노바레는 무엇인가? 이것은 제3의 물결의 일부로서 알파코스, 빈야드 운동, G12운동, 임파테이션운동(IMI), 늦은비 운동, PURPOSE DRIVEN(릭 웨렌), 교회 성장 운동, 뉴에이지 운동, 종교다원주의 등과 같이 종교통합을 위한 모임이다. 여기의 주 강사가 포스터요, 윌라드요, 유진 피터슨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우상이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네이버에 가서 레노바레를 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첨부하는 PDF 파일을 보기 바란다. 주여, 분별의 영을 우리에게 주소서.
2009-05-21 20:33:06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여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사제께서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일랜드로 가신다는 소식과 함께 제 서신을 받았음을 알리는 다정한 편지를 받고 감사를 드립니다. 편지를 읽고 저는 사제께서 제가 보낸 편지의 많은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또 동시에 천주교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 것에 대해 그리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가 성경과 전통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보여 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전에 제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사제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으며 저는 그때에 우리가 너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분모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제께서는 성경과 전통이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물론 천주교가 인정한 전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만이 믿음과 윤리에 관한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계시요, 그 자체가 진리이므로 신자들이 진심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성경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서 그들을 지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전통을 다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통이 확실한 근거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다양한 의견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하지 못했던 성경의 표현들(결코 성경의 교리들이 아님)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누구도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주의 날’이 한 주의 첫째 날 즉 일요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후 1-2세기경의 교부들이 만장일치로 그렇게 가르쳤고 그 이후로 어느 곳에서나(일부 파당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지금 저는 더 이상 거기 나오는 주의 날이 일요일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도들의 뒤를 이었던 사람들이, 과거에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혼자 힘으로만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 몇몇 현대의 논쟁자들보다 ‘주의 날’이라는 용어가 쓰인 용례를 더 잘 이해했을 것이라는 점을 시인합니다. 기독교는 세기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계시의 종교가 아니며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산 즉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초기의 말씀 선포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입증된 유산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대 기독교의 화려한 전통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시와 직접 마찰을 빚을 때에 저는 그것을 배격하며 오직 성경만을 믿습니다. 전통은 어려운 단어나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의 교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전통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속박할 수 있는 그런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전통을 가지고 사람의 양심을 속박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며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는 위험’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수준에 놓은 사람들이 끝에는 성경보다 전통을 더 위에 올려놓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주교가 일반 백성이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주시해 볼 때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천주교가 펼쳐온 정책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번역해야 할 책’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천주교는 이런 중요한 책이 보통 천주교에서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읽힐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을 보고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것 또한 성경보다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관한 한 천주교는 아직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천주교 사제가 필리핀에서 성경을 소각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야만스런 행동이며 20세기 문명 시대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신앙의 행위입니까! 사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잘못된 번역을 반대합니다. 이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인해 자극을 받은 천주교가 오류투성이 역본, 수세기 동안 한 번도 오류들을 수정하지 않은 역본을 널리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런 성경을 불태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잘못된 역본이라 하더라도 어두움 속에 갇힌 영혼에게 빛을 비추어 줄 만한 하나님의 진리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제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에게 「두에랭스성경」(Douay and Rheims Bible)을 건네준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천주교 사제들이 제게 화를 냈습니다. 이 성경에는 분명히 로마 교황의 출판 승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은 그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몇몇 이유 때문에 천주교는 참으로 성경을 두려워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사제께서는 “성서 공회들이 그토록 많은 성경을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도대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영적인 일에서나 이 세상일에서나 그 유익은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입으로 말할 수도 없으며 펜으로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그 유익은 대단합니다.” 환한 태양이 빛을 발해 박쥐나 해충을 물리치듯이 성경은 어디에서나 야만과 독재를 몰아내고 문명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며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도록 허용하고 장려하는 곳에서는 성경이 미신과 무지를 몰아내었습니다. 영적인 유익에 관한 한 성경이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에게 안겨 준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복을 감히 어떻게 말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위에 떠다니던 성경책이 한 일본 귀족에게 구원과 거룩함을 가져다주었고 그로 인해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출입을 통제 당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오늘날 그 나라에서 평화롭게 선교 활동을 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성경 덕택입니다. 저는 주석이나 해석이 없는 단순한 성경만을 읽고서도 아주 추한 죄인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받은 사례를 많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한 번도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곳에서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국내나 국외의 선교 보고서에는 단지 성경만을 읽고 개종까지 하게 사례들 즉 거의 기적에 가까운 사례들이 가득합니다. 한국에 나간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박사는 동방의 고요한 나라의 한 마을에서 두세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한두 서신서만을 읽고서도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례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거기에는 아직 성경 전체가 발간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의 이 적은 분량의 책들이 산골 마을까지 들어가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사실 많은 선교사들이 어떤 나라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든 기반이 닦여 있고 영혼들이 깨어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천주교가 미워하는 성경 보급자들이 이미 거기 먼저 들어가서 성경을 팔고 복음서 같은 성경의 일부 책자를 원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의 길을 바르게 보여 줍니다.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전통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유서 깊다할지라도 신뢰할 수 없으며 사람의 혼을 속입니다. 성경과 전통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등불과 태양 빛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의 교리 중에서 사람의 전통이 제거하려고 하거나 애매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은 교리가 어디 있습니까?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사람의 전통이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교리가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사제께서는 제가 위에서 언급한 ‘주의 날’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신빙성 있는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을 단지 확증해 줄 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크리스천의 교리가 아니라 ‘주의 날’이라는 용어의 용례와 의미였습니다. 원어에 대한 지식은 성경의 여러 구절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는 데 도움을 주지만 성경의 교리에는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신자들이 사용했던 성경 용어의 용례를 잘 아는 것이 때로는 새로 유행하는 잘못된 개념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저의 취지는 결코 밝은 태양 빛을 보여 주기 위해 등불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람의 이성에 의해 어둡게 된 캄캄한 구석의 일부를 밝히는 데에는 심지어 그 미약한 등불도 유익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하면서 전통들을 하나씩 하나씩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고 만일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교회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 결코 늘어날 수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천주교 사제가 1년 동안 오직 성경만을 읽되 매일 같이 기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경만을 읽으면서 자기가 배운 것 중에서 성경과 일치한지 않는 것은 다 거부하기로 결심한다면 12달이 지난 후에 그는 수많은 전통적 우화들을 폐기 처분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큰 복과 깨달음을 경험하였으므로 그 이후에도 오직 성경만을 주 연구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또 완전한 날이 이를 때까지 점점 더 밝게 빛나는 의인들의 길 속에서 화평과 경건함 가운데서 걷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1년 동안의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았으므로 자기가 폐기 처분한 사람의 전통과 교회의 교리들을 결코 동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때 자기가 경시했던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호흡이 있으며 빛과 진리의 말씀이 가득 들어 있는 거대한 하늘의 양식 창고 속에서 자기의 모든 영적인 필요가 충족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 친애하는 사제님, 부디 확신을 갖고 제가 무책임한 열성분자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는 것과 성경에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교리들에 관한 지침서들을 읽는 것은 결코 성경 그 자체를 읽는 것과 견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귀를 틀어막은 사람을 어찌 건방진 사람이라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의 타락에 대해 경고하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엄중한 권면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아노니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행20:29-30). 이 같이 경고한 후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디에다 위탁하였습니까? 전통의 권위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공회의 결정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의견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친애하는 사제님, 다음의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시고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32절).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도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명백한 교훈을 무시하였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성경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오류투성이며 수도 없이 번복된 전통과 교회와 공회를 따라갔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만 굳게 붙드는 제가 잘못하고 있습니까? 이제부터 사제께서도 이렇게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사제님을 위해 진심으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신실한 벗   해리 아이언사이드 드림 추신 - 저는 사제께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며 그래서 사제께서 더 이상 서신 교환을 원치 않으시면 다시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2009-05-13 16:18:40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다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지난번 편지의 결론 부분에서 사제께서는 비록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결국 영생은 기독교의 여정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킨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이 점을 보여 주는 적절한 예로서 사제께서는 주인의 명령을 끝까지 잘 지킨 자에게 주인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크게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결코 서로를 혼합시킬 수 없는 진리의 두 선(線)이 확연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중 한 가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왕좌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값으로 친히 사신 구원 즉 우리가 값없이 얻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로써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시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엄청난 이 칭의의 복에 관해서 성경은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공로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의 행위와 공로는 이처럼 엄청난 구속(救贖)을 얻는 데 필요한 속죄 값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들은 구원받은 뒤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이 엄청난 선물을 유지하는 데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 선물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수고하셔서 친히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지할 수 있는 구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제시한 것보다 더 명쾌한 설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제께서 성경을 펴서 로마서 3장 1절부터 5장 11절에 이르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읽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완전히 길을 잃었음을 발견하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들로 인한 화목 제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셨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더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이것에서 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요 완성된 사역으로 이미 끝이 난 사역입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미 끝난 일에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것을 망치고 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에는 사람의 어떤 공로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행도 필요 없고 성자나 천사의 중보도 필요 없으며 의식이나 예식도 물론 필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게 만든 일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유효합니다.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버나드)가 죽는 순간에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은혜의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께서는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시여, 당신의 상처만이 내가 내세울 공로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그분의 공로 위에 서 있네. 나는 더 이상 안전한 기반을 알지 못하네. 임마누엘의 땅 영광이 거하는 곳이라도 그분보다 안전하지는 못하리. 이것은 행위와 상관없는 의(義)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는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서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빚더미 속에 넣어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서 나지 않고 모든 신자가 선한 일을 했으므로 이로 인해 각 신자에게 빚을 지신 하나님께서 어쩔 수없이 그 빚을 갚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은 이런 의미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으며 사람의 의(義)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공로는 오직 영광스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단 번에 성취하신 사역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로는 행하는 데서 의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은 선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공로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행하고 믿는 자에게 이런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도 완전히 제외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 큰 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 2장에서도 똑같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또한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6절). 우리는 결코 이 두 원리를 혼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둘 중 하나로만 구원받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제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강조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과 또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사 지키고 따르라고 하신 지침들에 순종할 때에 마지막 날에 이에 대한 보상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든 성경 구절이 영혼 구원의 문제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보상을 주실 자들의 행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제께서도 확인해 보시면 이 점을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은혜로 영생을 소유하고 모든 죄로부터 떠나 의롭게 된 이후에 그들의 몸에서 이룬 행위들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고 보상을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련한 처지의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그는 본성과 행위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영원히 불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로 은혜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그 순간 영생을 소유합니다. 저 큰 대적자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고소한다 해도 그 모든 고소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한한 효능에 의해 무효가 되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영원토록 구원받습니다. 전도서 3장 14절을 보면 이와 같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리라.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무엇을 뺄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그에 부응하는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이제 무한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주님께 복종해야 하며 말씀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길을 따라 걸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제 상태가 바뀌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것처럼 것을 책임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우리가 그분 앞에 함께 모일 때에 여기 이 땅에서 그분을 섬긴 것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됩니다. 보상과 그에 따른 관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 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의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딤후4:7-8).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그 날을 바라보며 그때에 거기에 자신을 위해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제께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 일이 자기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여기서 관은 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여기의 관(Crown)은 왕들이 쓰는 관(Diadem)이 아니라 경기의 승리자들에게 주는 월계관을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을 때 이미 획득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을 우리가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사제께서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도 결코 이 사실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드러난 은혜를 나타내야 하며 성령의 열매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믿음 고백이 거짓 고백이 아니라 참 고백임을 분명히 보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에 동의를 표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를 마음속에 받아들여 우리 속에 그 증거를 소유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선한 행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자는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입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열매를 맺으며 특별히 선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이같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1-22). 사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노인이었으며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그는 장차 자기에게 씨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의 출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를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메시아가 이삭을 통해 오리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래서 사실은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 행위를 가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유했던 믿음이 산 믿음임을 보여 준 증거였습니다. 이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보통 ‘신실한 말’(faithful saying)이라 불리는 다음의 두 성경 구절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밀이로다.”이며 다른 하나는 디도서 3장 8절로서 “이 말은 신실한 밀이로다. 원하건대 너는 확고하게 이것들을 단언(斷言)하라. 그 목적은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조심하여 선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들은 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입니다. 이 두 구절은 진리의 양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무궁토록 그분에게 모든 찬양과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부지런히 선한 행위를 이루어야 한다고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선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다 같은 정도의 영적 기쁨을 맛보지는 않습니다. 그 왕국에서 우리의 위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도 보상에 관한 한 서로 다른 등급의 보상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도 동일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많이 맞으며 어떤 자들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될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에서 쫓겨나 바깥의 어두운 곳에 즉 불 호수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지만 그들이 받는 형벌의 정도는 그들의 죄의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들도 그들의 유일하신 구원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영원히 하늘나라에 거할 것이나 그 영원한 왕국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고 어떤 보상을 받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사실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므로 과연 누가 이와 달리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따라서 저는 사제께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실 것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우리가 함께 살펴본 성경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과연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그 믿음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제 편지가 사제님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는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편지에서 길게 답변을 적기보다는 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제기한 문제 중 하나라도 가볍게 대하고 싶지 않으며 사제께서 제게 보낸 답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저는 사제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싶지 않으며 단도직입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15:25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네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이번에 저는 중재(Mediatorship)와 변호(Advocacy)라는 주제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명백한 말씀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2:5). 흔히 크리소스톰의 글로 알려져 있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설교’에 들어 있는 진술 즉 “성경 말씀과 배치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보편적(Catholic)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중보라는 주제에 관한 천주교의 교리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의 어거스틴은 “성경을 믿는 것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중재자는 오직 한 분뿐이며 다른 중재자는 없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만일 천주교가 이와 상반된 것을 가르친다면 천주교는 결코 거룩하고도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th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될 수 없습니다. 사제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 즉 은혜와 구속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변호자와 중재자를 많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 요셉이 매우 거룩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공로를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 중재자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록 사제께서 한 중재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셨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천주교의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제께서 말씀하는 것 즉 유일한 중재자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는 것이 과연 천주교 신학자들의 교리 서적이나 경건 서적에서조차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지 사실 저는 의심이 갑니다. 천주교가 우리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의 위치로 승격시킨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밑에서 제가 인용한 구절들, 즉 교황들이 허락한 기도 모음집인 「라콜타」(Raccolta) - 리틀튼이 편집하여 권위를 부여함 - 에서 인용한 기도문들을 통해 천주교가 마리아의 위치를 극도로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 인용문들의 권위를 인정하시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왕이시요, 긍휼의 어머니시요, 우리의 생명이요 감미로움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신 이에게 찬양을 드릴지어다! 이브의 추방당한 자손들인 우리는 당신께 울부짖나이다. 우리는 이 눈물 골짜기에서 당신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탄식하나이다. 오 우리의 변호자시여, 당신의 긍휼의 눈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이제 우리가 추방되었사오니 당신의 태의 축복의 열매인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오, 긍휼이 많은 분이시여,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의 동정녀 마리아시여! 오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거룩한 이시여, 우리가 당신의 보호 아래로 날아가나이다. 곤궁한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간청을 멸시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항상 구하여 주옵소서. 오 영광스러운 축복의 동정녀시여.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동정심 많은 마리아여…천사들과 사람들의 존경을 다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여…선으로 가득하신 분이시여, 항상 우리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는 분이시여, 부디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녹여 주옵소서…거룩한 교회가 당신 안에서 피난처를 얻게 하시오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의 기쁜 피난처와 망대와 힘이 되어 주옵소서.…곤궁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시험에 빠질 때에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며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위험에 처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소서…. 친애하는 마리아의 마음이시여,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내 어머니시여, 나를 내 손안에 버려두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나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나이다. 내가 오직 당신께만 매달리게 하옵소서. 나의 희망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지옥에서 구원하소서. 리구오리가 지은 「마리와의 영광」(Glories of Mary)에서 발췌한 다음의 인용문을 읽고 난 뒤에 마리아가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간주됨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피난처요 도움이요 은신처이시다. 고대 유대에는 여러 개의 도피성이 있어서 범죄자들이 보호받기 위해 이곳으로 도피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같은 도피성이 많지 않으며 유일한 도피성은 오직 하나 즉 마리아뿐이다. 마리아의 탄생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의 입을 통해 자신이 죄인들을 징계하려 하는데 일어나서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셨다. 사실 그분께서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무는 우리의 복 받은 마리아 즉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그분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분이 맡아야 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리 응답을 받고 또 보호를 받는 길이다. 하나님께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마리아께 구하면 얻을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명령에는 만물이 복종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복종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마리아의 사랑과 보호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 마리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가 말만하면 그의 아들이 모든 것을 집행한다. 천주교회는 죽어 가는 자들의 입 속에 “은혜의 어머니요, 긍휼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죽음의 시간에 나를 받아 주소서”라는 구절을 넣어주지 않는가? 이 말은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이 죽으면서 한 말 즉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아 주소서!”와 얼마나 다른가? 이제 다시 「라콜타」(Raccolta)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 발견되는 다음의 말보다 더 비성경적인 것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거룩한 동정녀시요, 하늘의 여왕이시요, 온 우주의 여주인이시요, 영원한 아버지의 딸이시며 그분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시며 성령님의 가장 사랑 받는 아내인 마리아시여, 나는 당신을 인정하며 당신을 존경하나이다! 위대하신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겸손히 기도하나이다. 하늘로 들어가실 때에 그토록 풍성하게 소유하셨던 하나님의 긍휼로서 부디 내게 은혜와 동정심을 베푸소서. 또 나를 취하사 당신의 가장 안전하고 신실한 보호막 아래 놓으시고 당신의 행복하고도 총애 받는 신하 중 하나로 삼으소서. 또한 나의 이름을 당신의 처녀 가슴에 새기시옵소서. 사제께서는 중보의 본보기로 성 요셉을 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요셉의 중보를 갈망하는 이들이 요셉에게 바친 「라콜타」(Raccolta) 기도들 가운데 들어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인용문을 볼 때 과연 제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의 보호자이신 자애로운 요셉이시여, 우리와 성 교회를 보호하소서. 동정녀들의 수호자요 거룩한 아버지이신 요셉이시여, ‘죄 없으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신 마리아를 신실하게 보호하신 분이시여, 내가 사랑스런 두 보증인 곧 예수와 마리아를 의지하여 당신께 기도하며 간청하나이다. 나를 모든 불결함에서 보존하사 흠 없는 생각과 순결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항상 정조를 지키며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는 천주교의 여러 가지 경건 기도서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제쳐놓고 그분보다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천사들과 성자들을 중재자로 내세운 예를 수도 없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20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일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오직 그분께만 간청할 수 있다.”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투쟁한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70년에 삼위일체 이단 교리인 아리우스 주의를 비난하면서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신격의 영광을 격하시키면서도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이시다.”라는 성경 구절의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을 조롱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연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 즉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런 구절이 주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 성도들이 결코 창조된 존재를 가리켜 자기들의 도움이요 피난처라고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성경 말씀과 일치합니다. 성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1-2).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왕좌의 의와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자신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접근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마음은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인자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언제나 풍성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따른 자신의 어머니나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에게 간청할 어떤 성자나 천사 같은 중간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에게 중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제사장으로 동정심이 많은 분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로서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가 됩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다른 어떤 중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하신 중재자이십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사제께서는 신자들이 땅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하늘의 성도들이 변호해 주는 것과 것으로 여기시면서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당신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그 편지의 끝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료 신자인 당신을 위해 제가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나도 당신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 곁에서 나의 중보자와 나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당신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성령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중재자와 변호자의 신분으로 그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한 크리스천으로서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할 뿐이며 결코 저의 개인적인 공로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사제께서 읽으라고 보내 주신 설교 말씀 즉 사제께서 성 요셉의 중보에 관해 설교하시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과 저의 생각이 분명히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친근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경계할 만큼 조심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어떤 여인이 그분의 어머니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바로 이 복을 원합니다. 제가 만일 천주교가 제시하는 수많은 작은 중보자들 즉 마리아와 성인과 천사들을 원하여 그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저는 영원토록 이 복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추신 - 저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가 천주교 성당의 사진을 정면에서 찍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정문 위에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영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마리아에게로 오라. 그녀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마리아를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여긴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닙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을 이보다 더 무섭게 왜곡할 수 있습니까?
2009-05-13 16:12:13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세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전에 약속드린 대로 오늘 저는 매우 비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보이는 천주교의 소위 미사라는 희생 제사 제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제께서 미사를 살아 있는 성도들과 죽은 성도들의 죄로 인해 계속해서 드리는 피 없는 제사라 주장하셨습니다. 또한 사제께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적어도 2세기까지는 기름부음 받은 사제들에 의해 문자 그대로 제단 위에서 이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이렇게 교회 역사의 초기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토록 중요한 교리 즉 교회의 전 체계의 중심이 되는 이 교리에 대해 오류를 범했겠습니까? 혹은 전혀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진리 속에 포함될 수 없으므로 폐기시켜야 할 그런 황당한 제도를 만드실까요? 그렇다면 ‘지옥의 문들이 그것(교회)을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등과 같은 주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같은 질문을 받고 사실 저는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진리의 영께서는 자신의 백성 한가운데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지옥의 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가 아니라 - 이미 오류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감동적인 편지의 증거를 살펴보십시오.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퍼진 이단 교리는 은혜의 언약에다 율법의 행위를 더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1세기의 이단 교리가 오늘날에는 정통 교리가 되고 말았다.”고 잘 말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즉 갈라디아 사람들의 오류가 없는 교회 공동체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이런 오류가 하나도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천주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회에는 다른 어떤 교회와는 달리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 오류가 세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인 이신 칭의 교리 즉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마치 폭풍과 같이 몰아치던 종교개혁 시대에 새로이 발견된 교리처럼 간주했으며 이것을 막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또한 골로새 지방에 몰래 기어 들어온 오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골로새서 2장에는 진리로부터 떠난 세 가지 중대한 오류가 나와 있는데 이것들은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에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다음의 세 가지 중대한 오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대치하려는 이성주의 철학적 경향이며, 둘째는 은혜의 진리를 대체하려고 율법 중시 경향이며, 셋째는 가장 심각한 것으로서 머리되시는 주님을 붙들지 않고 스스로 몸을 학대하고 천사들을 숭배하는 무서운 의식주의의 제도화 경향입니다. 저는 이제 사제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께서는 이 같은 오류가 하나도 빠짐없이 현대 천주교 안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이뿐 아니라 디모데전후서도 오류들이 급속히 퍼져 나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즉 그의 생전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다른 곳의 기독교회들이 아직 믿음을 굳게 잡고 있을 때에 가장 오래된 모임이 형성된 아시아의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배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 역시 이 점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의 초창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주의 만찬의 상과 단순한 기념 명절을 버리고 실제로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또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Biblical)이라거나 사도적(Apostolic)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물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Catholic)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 무렵에 제단이 주의 만찬의 상을 대체하고 미사라는 희생 제사가 주의 만찬을 대체했음을 보여 주는 신빙성 있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글을 남긴 사람들 즉 니케아 공회 이전의 교부들 가운에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 주지 않았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은 그 누구보다도 주의 날에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집회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초대 크리스천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플리니의 저 유명한 편지도 그가 살던 때에 여전히 그와 똑같은 일이 있었음을 사실로 보여 줄 뿐입니다. 플리니는 자기의 상관인 트라얀 황제에게 크리스천들에게서는 어떤 악도 찾아볼 수 없으며 신성 모독이나 범죄 행위를 발견할 수 없음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보낸 정탐꾼들은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찬송을 드리며 빵과 포도즙으로 구성된 간단한 식사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기독교 초기의 이 같은 단순함에서 이탈하여 그리스도의 단번 희생 제사와 그분께서 단번에 끝내신 십자가 사역에 관한 진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주 후대의 일입니다. 이때에는 사도 바울이 엄중하게 예언한 대로 사나운 이리들이 그리스도의 양들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말들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들을 위탁한 곳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뿐입니다. 그는 결코 교회의 권위나 공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무오류성 같은 것에다 그들을 위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산 자나 죽은 자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를 지금도 드릴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9장과 10장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 즉 결코 반복될 수 없는 희생 제사와 율법 아래서 이스라엘이 드린 모든 희생 제사 즉 그림자에 불과한 희생 제사가 생생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율법 아래서 드린 예물과 희생물은 양심에 관한 한 결코 경배하는 자를 완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희생 제사들은 단지 계속해서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천주교의 미사 즉 천주교 사제가 드리는 희생 제사의 경우에도 그래도 해당됩니다. 천주교에서 매일 같이 성체 성사 즉 미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죄는 결코 제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히9:11-12).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단 한 번 드리신 희생 제사의 효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신자들의 양심은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이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께서는 이것이 천주교에서 매일 드리는 미사라는 희생 제사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께서는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라는 천주교 희생 제사의 희생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갈보리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미사의 희생물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이 시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위대하심과 우리가 그분께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만 드리는 희생 제사입니다. 우리가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기 위해 성직 임명을 받은 제사장들의 사역에 의해 제단에서 드려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드리는 주 제사장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의 손에 의해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즉 빵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꾸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부인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주장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14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또한 히브리서 9장 24-26절은 이 점에 대해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여기서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 드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분의 희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완벽하며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이며 그래서 복되고 완전히 끝이 난 일이므로 그분께서 결코 되풀이해서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을 다 끝마쳤다는 표시로 이제 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죄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셨으므로 하늘의 전능하신 아버지의 왕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시며 천주교의 제단이나 그 밖의 다른 제단에서 또 다시 자기 몸을 희생물로 드리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러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와 불법은 단 한 번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서 영원히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히10:1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사제께서 주장하는 천주교의 미사 즉 피 없는 희생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으면 사면(赦免)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이 세상의 어떤 논증으로도 이 같은 사실의 정당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데 충분하며 따라서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과연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사제께서는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다시 살펴보면서 저는 사제께서 ‘주의 만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부인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는 천주교의 성체 성사가 주의 만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제께서는 주의 만찬이라는 말이 단지 초대 기독교인들이 교제하러 모여서 함께 나눈 공동 식사 즉 애찬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오용한 것을 꾸짖은 다음에 어떻게 주의 만찬을 지켜야 할지 사도 바울이 상세히 가르쳤다는 점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는 우리가 주의 상에서 축복의 잔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부서진 빵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의 상에서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주의 만찬입니다. 만일 사제께서 이 두 가지가 다 ‘미사라고 하는 천주교의 희생 제사’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는 사제께서 옳다고 인정하겠습니다. 주의 만찬을 천주교의 미사와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되며 주의 상을 천주교의 제단과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기독교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와 이교도 주의가 묘하게 혼합된 혼합물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천주교의 미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단 한 줄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중대한 주제에 대한 더 이상 길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면 제가 너무나 명백히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려 드리려고 해도 우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 신학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 하며 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배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편지를 맺으면서 간청하건대 부디 이 일들이 정말 그런가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리신 희생 제사가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달라고 그분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사제의 영혼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제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십자가의 그 영원한 사역에 무엇인가를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7:32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두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저는 이제 천주교에서 소위 평신도라 불리는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의 잔을 주지 않는 것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사제께서 하신 말씀이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킴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으며 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고대 자료들이 사제의 주장과 배치된다는 점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주의 만찬의 요소인 빵과 잔 중에서 신도가 빵에만 참여할 것을 명한 법령은 1415년 6월 15일에 통과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천주교회에 교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령을 통과시킨 공회가 1415년 5월 29일에 교황 요한 23세를 폐위시켰으며 그 뒤 1417년 11월 11일에 가서야 그의 후임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전에는 평신도라도 빵과 잔에 다 참여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변증가들은 교황이 주의 만찬의 두 요소 즉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과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에 참여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바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사제들은 원래의 주님의 명령대로 따르게 하고 평신도들은 한 요소에만 즉 빵에만 참여하게 하도록 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콘스탄스 공회의 이 법령은 그 전에 내려온 천주교의 다른 법령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황 레오’(Pope Leo the Great)는 마니 교도들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하지 못한 입으로 그리스도의 몸 - 물론 그는 지금 주의 만찬의 빵을 말합니다 - 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구속한 피 - 천주교 해석에 따르면 그는 지금 잔을 가리킵니다 - 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에게 이 같이 신성을 모독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음을 알리며 이들을 사제들의 권위로 성도들의 교제권에서 추방할 것을 알리노라”(그의 41번 설교에서 인용함). 한편 교황 겔라시오 1세는 교황 레오보다 더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마조리쿠스와 요한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 이것은 후에 천주교 법령집에 수록되었음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성스런 몸만을 먹고 거룩한 피의 잔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어떤 미신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진술했으므로 이런 자들은 성찬을 다 받든지 아니면 성찬에서 완전히 제외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라. 동일한 성찬물 즉 그 신비를 나누는 것은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다”(Corp. Jur. Can. Decre. 3:11,12). 교황 우르반 2세가 주후 1095년에 주재한 클레몬트 공회의 선언도 이와 동일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나 조심하려는 이유 이 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고는 몸과 피를 동시에 받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제단에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노라.” 그 다음 세기인 주후 1118년에 교황 파스칼 2세는 클루니의 수도원장인 폰티우스에게 글을 쓰면서 성 키프리안(St. Cyprian)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키프리안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주의 몸과 피를 받을 때 주님께서 정하신 전통을 지키도록 하라. 사람의 제도를 추종하면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정하고 명하신 데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주님께서 빵을 따로 주시고 포도즙을 따로 주셨으므로 이 전통을 가르치고 성 교회에서 항상 지키도록 명령하라. 빵을 삼킬 수 없는 유아나 병자를 제외하고는 이를 지키도록 하라.’” 이런 중요한 문제를 다루면서 회의를 주재하는 교황도 없었던 종교 회의에서 네 교황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면  천주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기들의 실행과 교리가 보편적이며(Catholic) 사도적(Apostolic)이라 결코 변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사실상 천주교는 이 점에서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전히 폐기시켰습니다. 사실 이것은 카톨릭 신자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이 말씀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자연스레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사제가 아니면 잔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므로 이것은 일반 성도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요한복음 6장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주의 만찬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이것이 단지 커다란 영적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일까요? 저는 후자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제께서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도 사제께서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채택하는 일에 있어서 역시 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물론 사제께서는 아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천주교회의 해석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회의 해석보다 성경의 가르침이 더 큰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이익을 구하던 유대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그 양식을 위해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그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봉인하셨느니라”(요6:27). 사실 그들은 그분께 광야에서 자기 조상들에게 만나를 베푼 모세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분께서 자기들에게도 문자 그대로 빵을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느니라.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47-48절). 이 말을 듣고 불신에 찬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이에 예수께서는 이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53-54절).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에 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무엇을 행하려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곧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심으로써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우리 주님은 아직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또 그분의 몸도 죽음으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믿고 그분께 나온 자들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한 새 생명을 이미 소유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며 57절은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아님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57절에서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십니까? 그것은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분 즉 아버지를 신뢰하리라.”는 말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늘 하시던 말씀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이것이 곧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63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저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아직 제정하지도 않은 주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분을 믿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영적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어떤 공회도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던 주님의 제자들은 이미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아직 단 한 번도 주의 만찬에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온 세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 피를 마시는 것이며 이로써 영원한 생명 즉 천주교 미사를 통해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생명을 소유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천주교 신자 중에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자기가 영원한 생명 - 결코 위조할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생명 - 을 소유할 것이라고 믿을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이 미사라는 성례전도 천주교의 다른 모든 성례전과 마찬가지로 그 참여자에게 마지막 결말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기 참여해도 결국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느니라.”(47절)는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는 달리 확신을 갖게 됩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실례가 되지 않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사제께서는 자신을 믿는 모든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큰 선물 즉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제께서는 스스로 영생을 소유하셨다고 확신하십니까? 사제께서는 천주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봉사했으며 천주교의 명령에 복종해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간 사제께서는 죄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안식을 누리십니까? 사제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로 인해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제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까? 오 친애하는 사제님, 만일 사제께서 이런 간단한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토록 충성을 다한 천주교회는 어찌하여 사도적 기독교를 기뻐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확신과 평화를 주지 못하는가?” 혹시 사제께서는 지금까지 길을 헤맨 것이 아닙니까? 사제께서 책임지실 일은 아니지만 실로 사제께서 속한 천주교회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의 단순한 복음을 떠나서 심각한 배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다음 편지에서 저는 천주교 성찬식에서 미사의 성격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4:1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