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첫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A.M.S. 사제님께: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아직까지도 사제께서 보내 주신 마지막 편지 두 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토록 오랫동안 그것들을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사정상 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에는 아파서 병석에 누워 몇 달을 지냈고 그러다 보니 그만 제때에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제와 다시 편지 교환을 하기에 앞서 저는 천주교의 가르침과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양쪽을 다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뉴먼(Newman)과 치니키(Chiniquy)의 책; 기본(Gibbon)과 리틀데일(Littledale)의 책; 「카톨릭 백과사전」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글; 교부들의 글, 니케아 공회 전․후와 중세와 현대 신학자들의 서적들 등등.
사실 저는 어떤 편견 없이 또한 사실을 잘못 표현하는 일이 없이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사제와 함께 살펴보기 위해 이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예전보다 한결 더 진지하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번의 연구를 통해서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천주교 교리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주교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 혹은 기독론 - 를 깊이 인정하는 데 대해서는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하나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셔서 통치자와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두는 한 몸 즉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의 한 지체입니다. 이 땅에서 그분을 믿는 참 신자는 모두 다 성령님의 침례를 통해 그 한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마의 주교 즉 교황과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처럼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심각한 저주의 말씀을 선언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지상에서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로마의 교황이 이처럼 두려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갈1:6-9).
마지막에 보낸 편지에서 ‘복된 성사 안에 담긴 실제적 임재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께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천주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복된 성찬 속에 실제로 임재합니까? 아니면 그것이 단지 상징에 불과합니까?” 이제 저는 아주 확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와 고대의 모든 기록은 사제의 주장 즉 미사에서 빵 조각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반박합니다.”
저는 사제께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무모하신 분이라는 점에 사실 크게 놀랐습니다. 분명히 사제께서는 교부들과 역사에 대해 잘 아십니다. 특히 교부들의 글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사제께서는 니케아 공회 이전 시대의 교부들이 어디에서도 지금 사제께서 주장하시는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천주교가 수세기 동안 그런 교리를 주장해 왔다는 것은 제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가 그런 교리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루터도 이와 비슷한 것을 가르쳤으며 헨리 8세 이후의 일부 영국 국교회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도 천주교의 교리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가르침들은 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고대의 가르침은 최근의 이러한 가르침들이 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 지금 ‘고대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의 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권위 있는 기록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경에 기록된 ‘주의 만찬’에 관한 말씀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사제 앞에 다 제시하면서 사제께서 가능한 한 니케아 공회 이후의 신학자들이 세워 놓은 이론은 잊어버리고 단지 이 말씀들만을 제대로 평가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제께서는 또한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들이 천주교의 해석을 지지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26-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의 기사도 비슷하지만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저는 마가복음 14장 22-25절을 인용하려 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 그것을 마시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성속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서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의 기사는 두 절(눅22:19-20) 밖에 되지 않습니다(17-18절은 주의 만찬이 제정되기 전에 있었던 유월절의 잔을 가리킵니다).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사제께서 아시다시피 성도 요한은 기독교의 어떤 명절을 제정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관해서는 나중의 편지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29절에서 주의 만찬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이제 주의 만찬에서 ‘잔’에 관하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문자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저는 한 가지를 더 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미 피를 흘리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니라”(This is my blood which is shed). 아직 피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미 흘렸다고 하시므로 “이것은 나의 피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흘렸다.”(which is shed)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사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잔에 담긴 액체를 가리켜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the fruit of the vine)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액체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했다면 사실 우스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논제는 마가복음 기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으며 누가복음은 이를 더 강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사제께서는 과연 그때에 주님께서 “이 잔 속에 새 언약이 담겨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 잔을 마시면 새 언약을 마시는 것이다.”라고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주님께서 이 ‘잔’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고 하실 때에 이것을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논리적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미 그분의 몸이 우리를 위해 주어져서 희생되고 부셔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빵에 대해서도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한 빵이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을 상징적으로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초기의 사도 교회들이 다 이런 것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배도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에 다른 어떤 의미도 첨가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혼과 신성이 하나 속에서 실제로 임재한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그로 인해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실재적 임재의 교리 즉 화체설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빵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넘겨진 그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구별된 그분의 피를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직 몸과 피의 분리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대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고전11:28). 여기서도 이것은 여전히 빵이며 잔입니다. 빵과 잔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빵과 잔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의 미사를 행하면서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 구절 속에서 드러난 주의 만찬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는 평신도와는 구별된 성직자 계급 혹은 거창한 고위 계급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크리스천 형제들이 함께 모여 기독교의 단순한 명절을 지키는 것뿐이며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건하게 두려움 마음으로 기억하면서 그 빵을 먹으며 그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1:11 | 관리자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요즘 옥성호 형제가 한국의 비뚤어진 기독교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맹공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런 일은 늘 있어 왔습니다. 최근에 옥 형제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 저희 근본주의 성도들이 주장해 왔던 것인데 우리는 워낙 수가 적고 괴상한 사람들로 분류되어 주류들이 우리 말에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책을 내니 그들도 참으로 난감한가 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맹공격이 쏟아지고 있고 이에 옥 형제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그대로 속시원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제 아내가 알려줘서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옥 형제를 통해서 근본주의 신앙을 일깨우고 나중에는 킹제임스 성경까지 알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옥 형제가 칼빈주의의 틀 밖으로 나와서 더 넓은 성경의 지식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부흥과 개혁사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게시판도 활성화 되어 있고 너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자주 가셔서 보고 격려도 하고 킹제임스 성경도 소개하고 알리기 바랍니다.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옥성호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게시판에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첨예히 대립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옥성호라는 평범한 사람이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쓰고 또 ‘방언’에 대한 책을 써야 할 정도로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도록 얼마 전 제가 모 신문사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2.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신앙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조엘 오스틴, 빌 하이벨스, 릭 워렌 등 미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을 실명 비판한 사실과 좀 더 명쾌한 신학적 시도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을 평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또 책을 펴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면?
좀 더 깊은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저보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할 때 많은 분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구도자 예배’나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 속에 있는 신학보다는 제 책 속의 신학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조엘 오스틴의 책들 속에 무슨 ‘신학’이 있습니까? 그 친구 스스로가 자기는 신학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분들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무신학’ 또는 ‘얄팍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 책에 대해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썼다는 점 때문에 말씀하신 그런 ‘비판 내지 아쉬움’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한 분들이 내는 책들을 향해서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더 많이 요구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유명한 분들의 책들을 향해 좀 더 엄중한 잣대를 가지고 제대로 검증해왔더라면 아마도 ‘부족한 기독교’와 같은 책이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이 못 잡은 강도를 시민이 잡았더니 경찰이 나타나서 시민에게 ‘강도 잡는 법’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책을 스스로 평가할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더 폭넓은 자료들을 공부하고 썼으면 더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간증집’으로 넘치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나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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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에 나온 책과 관련해 바라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옥성호씨, 저는 당신이 고전 13장에서 말한 ’온전한 것‘에 대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이런 근거로 볼 때 그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놓고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펴보는 논쟁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런 토론을 통해서 이곳에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방언을 반대하는 옥성호는 성령을 방해하는 자이다’라는 말보다.....“왜 사랑이 없어요? 왜 당신은 기독교 안에 분열을 조장하시나요?”라는 말이 더 듣기 힘듭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가 납니다. (물론 이 경우도 '더 안타깝습니다’라고 쓰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요....)
교회 안의 이런 식의 만연한 태도가 한국 교회를 오늘날 이 상황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부기’를 통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강조했듯이...
크고 성공하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천국 체험으로 가득 채운 황당무계한 책을 번역한 조용기 목사님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한국 교회를 성경 외에 천국에 대한 다른 계시를 들이밀며 분열을 조장하냐고 공개적으로 질문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성공했으니까요. 성공은 진리이고 선이니까요.
분별이 정죄가 아니듯이 사랑도 무조건적인 용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좋은게 좋은거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심부기’에서 썼듯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내세우며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무관심입니다. 아니....사람마다 다른 기질상 느끼는 ‘불편함’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분열이 무엇입니까?
돌팔이 의사가 우연히 몇 명 병을 고친 후 소문이 나서 병원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그 돌팔이 의사의 정체를 아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병원에 앉아있는 환자들에게 외칩니다.
“이 사람 엉터리 의사에요.”
그러자 누가 벌떡 일어납니다.
“환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혼동을 가져다줍니까? 환자들에게는 특히 ‘심리적 절대 안정’이 필요한 걸 모릅니까?”
마틴 루터가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이 없는 ‘분열주의자’라는 딱지입니다. 카톨릭(원래 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 일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으로 하나 되어 잘 나가던 교회를 아예 완전히 산산조각 분열내지 않았습니까?
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님의 종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협력하지 않고 영국 교회 내에 분열과 갈등을 유발시켰습니까? 아니, 어떻게 사람이 완전합니까? 빌리 그래함이라고 약점이 없겠습니까? 몇 가지 맘에 안 드는 점들은 눈 좀 감고 넘어가면 어디가 탈이 납니까? 교계를 초월해 모두가 하나되어 빌리 그래함을 선두로 ‘복음’이라는 깃발 아래 뭉치는 영국 교회에 왜 혼자 잘났다고 반대를 해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습니까?
왜 존 맥아더 목사는 그토록 ‘극단적’인 책들을 계속 씀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왜 교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할 근본주의자’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합니까? 가끔씩 나오는 래리 킹 쑈 같은 곳에서 좀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꼭 그렇게 고집스럽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의 냉소와 조소를 받아야 합니까? 그럴 거면 왜 TV에 나와서 기독교 망신을 시킵니까?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우리 예수님까지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지켜온 각종 율법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습니까?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은 일을 하면서 ‘거룩한 안식일’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교계에 일대 분열을 일으키셨습니까?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분열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요즘 우리의 분위기는 어떤지 아십니까?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 목사님이요? 물론 하는 소리는 다 틀리지요. 성경의 ‘성’자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참 저 분 말씀하시는 거 보면 정말 사랑이 넘쳐요. 저 표정 한번 보세요. 눈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런 표정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게 아니거든요. 저는 저 분 얼굴만 봐도 은혜를 받아요. 설교 필요 없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되요. 내 평생 저 분 설교에서 딴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는걸 못 들었어요. 참...대단해요. 다 사랑으로 용납해요. 얼마 전에는 이단들까지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였데요. 정말 은혜스러워요.”
and
"저 분 말이 뭐 일리는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 분 목소리가 왜 저래요? 표정을 꼭 저렇게 딱딱하게 해야되요? 좀 웃으면 안되나? 말은 일리가 있는데 영 은혜가 안되요. 사랑이 많이 부족해 보여요. 안타깝네요.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종교’ 아니에요?“
이게 사랑입니까? 이게 일치입니가?
그런데....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정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한 가지 덧붙이지요. 다수는 또는 주류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수는 그럴 여유가 없답니다. “민노당 주장이 일리는 있는데 너무 과격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는 말입니까? 소수는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하며 ‘긍정적’으로 폼을 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 외침은 소수입니다. 아니, 극히 소수입니다. 소수는 외치고 또 외쳐도 들릴까 말까입니다.
저는 분열을 걱정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지는 부부가 밖에서는 다정한 채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곪아 터진 관계를 터뜨리려니 우리가 잉꼬 부부인줄 알았던 이웃들이 충격받을까봐 계속 친한채 하고 사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이게 정상적인 부부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부부사이의 관계입니까? 이웃에 대한 체면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 100% 맞는 이론은 없을 것입니다. 옳다는 주장 속에도 반드시 나름의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랑과 연합 구호’ 때문에 나날이 실종되어가는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누군가는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갈등과 분열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건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일치....아니 ‘무관심’이야 말로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게시판에 오시는 분들은 다른 어떤 게시판들에 방문하는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신 분들입니다. 그 누구도 옥성호라 ‘이렇다’라고 한다고 ‘이렇다’라고 생각할 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이런 글 쓰는 거 또 이런 싸움 하는거 재미없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지만 저도 ‘싸우는 거’ 안 좋아합니다. 괴롭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일개 집사가 나서서 이런 소리를 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책을 많이 읽고 가장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갓피플에서도 ‘하늘의 언어’의 내용에 대해 수백 명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불이 나서 집이 타들어가는 이 상황이 안 보이십니까?
지금이 5백 년 전 종교개혁의 시기 카톨릭보다 우리 개신교가 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 때보다 말씀이 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빗 웰즈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혁명’이 아닌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사랑과 일치’라는 이름으로 그 고통을 거부하자는 주장에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진짜 사랑은 진리로 하나 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009-05-13 15:57:17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2): 사도행전의 체험은 지금도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 ‘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2: 사도행전의 체험들이 교회 시대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앞에 나온 내용에 대개 들어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과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실제 행해졌던 때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은사들은 표적의 성격을 지니며 하나님의 새 메시지 곧 신약을 전하는 자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되자 표적의 은사들은 그 소임을 다했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그 동료들이 보여 주었던 기적의 은사들은 교회 시대의 일반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기의 것을 가지고 현재의 교리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다룹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 시대에 태어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바로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비로소 신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였던 모세의 법을 성취하시고 끝내셨습니다. 또 그것 대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두셨고 이 복음이 교회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물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처음 세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구약의 성전 예배 등을 행했고 사도행전의 뒷부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하나님께 정결례를 드리는 등 율법에 따른 관행들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동차에서 기어를 바꾸셨는데 백성들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새로운 운행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일시적이나마 자신을 특별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과도기 역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교회 시대 전체의 청사진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의 교회와 똑같은 모습의 교회를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첫째,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들이 서신서에 나타난 역사들과 늘 같지는 않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쳐서 죽이심으로 즉각적인 교회의 징계를 보여 주셨습니다(행 5:1-11). 그러나 서신서에서 하나님은 지역 교회가 죄지은 자를 겸손하게 기도하며 징계하라고 말합니다(고전5:1-5; 고후2:5-11; 갈6:2; 살후3:6-14, 15; 딛3:10-11). 오늘날의 지역 교회는 앞에 나온 두 가지 경우처럼 차이가 있을 때에는 과도기의 사도행전의 예가 아니라 모든 것이 확정되고 이방인 교회를 향하여 주신 에베소서를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행전이 오늘날 교회의 청사진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식대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침례의 교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둘째 축복이라는 의견을 지지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강림이 늦어진 경우가 사도행전 2장과 8장에 등장합니다. 2장의 경우는 위에서 계속 설명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은 지 몇 년 후에 성령침례를 받은 이유는 그들이 성령 침례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 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장의 사마리아인들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이미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의 두 부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순서로 전파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성령님의 나타나심 즉 방언이나 표적으로 나타나심이 매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구원받은 후에 방언 등과 함께 임하는 두 번째 축복 즉 성령 침례에 대해 일관적인 사례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침례를 구원의 일부 즉 구원받는 즉시 신자의 몸을 가득히 채우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는 성령의 역사로 보는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의지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교리를 지지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 8, 10, 19장 중 오직 2장만이 믿는 자들이 성령을 기다린 사건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자들은 성령님을 간청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실 때를 단순히 기다렸습니다(행1:4, 5, 8). 서신서에는 성령을 받는 것, 심지어 성령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지침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우리의 지침서는 서신서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과도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서신서는 교회 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리와 실천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신약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엡3:20). 이 위대한 부활의 권능(엡1:19-21)은 기적 같은 일을 해 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엡3:21).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순종하고 기도하며 움직일 때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행하시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적의 은사를 구할 때 행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2009-05-13 15:53:44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1):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1: 신약 시대에 방언이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표적이 아니라면 성령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이 흔히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면 보통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릅니다. “그럼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겠네요?” 두 번째 질문은 방언의 은사가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면 그는 방언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고린도전서만 보아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살펴볼 때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전문가들만 모인 곳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그 어떤 다른 교제보다 더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그렇게 널린 퍼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의 근본 목적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목격했고 이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에게도 임하여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같이 대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같은 방언의 목적을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니” 바로 전 구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유대인)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불신), 주가 말하노라.”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방언이 널리 행해진 것은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특하게 그리고 널리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아마도 성경 시대에 고린도 교회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목이 대상이 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고린도에서, 그것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행18:1-3). 바울은 관례대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선포했습니다(행18:4). 실라와 디모데가 곧 바울과 합류했고 고린도의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행18:5). 그런데 마침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복음 선포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고, 사도들과 믿는 무리들은 회당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행18:6). 이제 그들은 복음 전도의 초점을 이방인들에게 맞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때 세워진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행18:7). 따라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교회 모임이 바로 자기네 옆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당장 그리스보가 자기의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었습니다(행18:8). 이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네들의 지도자가 변절하여 교회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보의 뒤를 이은 차기 회당장이 어떻게 하든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교회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 자체를 금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스데네가 그리스보의 자리를 이을 자로 뽑혔습니다(행18:17). 물론 성경은 소스데네가 복음의 확산을 막으려는 본연의 책임을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최종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서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는…”
하나님은 또 한 명의 유대인 회당장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부담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교회 모임은 바로 회당 옆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의 지체들 중에는 전직 유대인 회당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 교회를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조치로서 이 교회에 방언의 은사,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작용할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9-30절에서 일곱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중 하나가 “모두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겠느냐?”입니다. 어쨌든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한 공통된 답은 “아니다”입니다. 모든 고린도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방언이 하나의 은사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은사들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12:11). 모든 은사를 다 갖춘 성도는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 침례입니다. 우리는 다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에 들어왔습니다(고전12:13). 앞에 나온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동일한 장에서 가르쳐지고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성경은 이 신약 시대에 방언의 은사가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령 침례는 모든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받았으나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9-05-13 15:51:25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0): 지금도 특별계시가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0: 당신은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계시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까?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오순절주의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오순절주의는 성경에 나오는 대언 - 즉 직접 말씀을 받아 대신 전하는 것 - 의 은사와 대언자가 오늘날에도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대언자는 본래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때론 그 메시지가 미래의 있을 일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포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은 대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여 줍니다.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차례대로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계시를 주신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신약 성경이 완성되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알리고 싶은 모든 일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즉 주님은 기록된 말씀에 빛을 비추사 우리가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적용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런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신약 성경의 끝 부분에 친히 추신을 다셨다면 일은 간단해질 것입니다. 가령 “이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직접적인 계시는 끝이 났다”라든지 아니면 단순히 ‘끝’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간접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참으로 놀라운 구절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1-2)
이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신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는 한 방식을 쓰셨고 이 마지막 날들에는 또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주님은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계시와 영감된 기록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때마다 하나씩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계시들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했습니다(물론 전체로는 완전함). 이 구절의 그리스어 어순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나간 때에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지금 마지막 날들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in the past)’에 쓰인 그리스어는 ‘낡은’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되었음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 혹은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포드사의 썬더버드 자동차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모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단어는 ‘사용하기에 오래되었다’, 즉 ‘낡았다’, ‘닳았다’, ‘바꿀 때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경찰차나 택시가 낡은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 1장 1-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조금씩 계시를 주셨던 기간이 다른 기간 - 계시의 수여 방식이 전혀 다른 기간 - 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대언자를 통하지 않습니다. 만유의 상속자요, 세상들을 만드신 분, 하나님 자신의 정확한 형상이신 그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월등한 분이 월등한 계시를 가져오십니다. 풍부함과 완전함에 있어 월등한 계시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분이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져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셨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처 제자들이 받지 못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완성하셨습니다(요16:12-15). 역사를 보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70년 내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은 사도들과 그들의 측근들이 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메시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두 가지 사항을 더할까 합니다. 계시록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마지막 장이 되기에 적합합니다. 계시록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 세계를 꿰뚫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읽다 보면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결론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마지막 일들의 책(계시록)의 결론 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 책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먼저는 성경 전체가 아닌 계시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위대한 성경전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마지막 계시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역사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추가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그렇게 믿지도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성경이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2009-05-13 15:46:09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9): 지금도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9: 왜 병 고침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가 건강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탈 없이 잘 지내도록 몇몇 사람에게 치유(병 고침)의 은사를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을 공부해 보면 건강이 나쁜 것이 때로는 어느 특정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고후12:7-10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예).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치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시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수만이 이런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온갖 종류의 병자들에게 나아가 병자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치료하였습니다. 심지어 몸 전체를 완전히 고치기도 했습니다(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
사실 치유의 은사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입니다(히2:3-4). 그렇습니다. 치유 받은 자는 고통과 불편함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도 다른 기적들처럼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었습니다. 치유하는 자(healer)가 땅에 걸어 다닌 시간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극히 짧았습니다. 심지어 그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참 신자들이 병이 났을 때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그 당시에도 치유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매우 드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사인’ 에바브라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2:25-27). 바울은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딤후4:20). 바울은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먼저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원하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의 은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나 다른 성도들이 처한 상황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이 됩니다. 즉, 아프면 기도하고 의학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아픈 그리스도인이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처방으로 기름을 부을 것을 가르칩니다. 이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하나의 의학적인 처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로 쓰인 그리스어가 ‘크리오’(chrio) - 즉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에서 나온 단어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뜻함 - 가 아니라 ‘알레이파오’(aleipho) - 즉 몸을 문지르는 것 -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치유의 은사를 바라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만일 치유의 은사가 교회 시대에도 계속 된다면 야고보서 5장 14절 말씀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확실하게 고침을 받는 것은 실로 내세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롬8:23).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몸을 구속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께서 영화로운 몸을 주셔서 죄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치유를 잘한다고 크게 소문이 난 소위 크리스천 치유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치유사들이 고친다는 질환들은 실제 병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거나 외적인 영양에 의해 악화된 것입니다. 희생자들은 단지 생각을 달리함으로써 - 가령 치유함을 받았으므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 상태가 완화되는 체험을 합니다. 몇몇 질환은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것들은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치유 사례를 연구해 보면 증상은 완화되었으나 실제 상태는 그대로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치유사가 귀머거리나 복합골절 환자나 선천성 기형아를 고친다거나 죽은 자를 일으킨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만이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설사 오늘날 능력의 치유사가 나타난다 해도 우리는 그런 치유사를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심령술에 빠졌다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악한 세력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도 분명히 사탄이 대환난 기간 동안 그러한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살후2:9-10; 계13:11-15). 마귀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나타낼 수 있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고후11:14-15).
치유는 표적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자 치유의 은사는 곧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대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더라도 치유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비교해 보더라도 치유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뜨거운 기도에 응답하사 자신의 뜻 안에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으며 지금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런 은사를 받아 손만 대면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없습니다.
2009-05-13 15:43:58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8): 기적의 은사는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8: 왜 기적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 자신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행하십니다. 더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에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치리하기 위해 정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양식 혹은 법칙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양식은 너무도 질서 정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특별한 방법으로도 움직이십니다. 이렇듯 변칙적인 운행 방식을 보통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기적이란 흔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이 흔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니라 일상사가 될 테니까요. 지구가 일정한 각도로 회전하여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른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도는 과정을 기적으로 분류하진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에 세 가지 커다란 기적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기적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율법이 주어질 때로부터 시작되어 약 1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은 엘리야와 초기 대언자(선지자) 시대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상당 부분이 이때 주어졌는데 이 기간은 약 1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지막 기적의 기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사도들의 활동하던 때에 일어납니다. 이때가 바로 신약 성경이 주어진 시기이고 약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어셔의 연대기(Usher's dates)에 따르면 성경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약 6000년임을 보여 주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이 같은 역사가 옳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발생한 시기는 그 중 5% 정도인 320년에 불과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33년간의 지상 생애 동안에 단 3년 동안만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분의 전체 생애의 9%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적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성경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위의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곧 사도 시대에 주어진 기적의 은사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같은 주장에 타당성이 없음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일시적인 목적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기적을 말할 때 쓰인 세 단어가 이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먼저 기적은 ‘능력 있는 일들’로 불리는데 이는 행위 뒤에 숨겨진 권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론 기적이 ‘이적’(wonders) 즉 ‘놀라운 일’이라 불리는데 이때에는 기적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기적은 ‘표적’(signs)으로도 불립니다. 이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임을 보여 주고자 함을 강조하기 위해 즉 기적의 첫째 목적을 강조할 때 쓰였습니다. 만일 기적이 능력 있는 일이나 이적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항상 하나님의 일꾼과 말씀의 참됨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앞에 언급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난 시기가 성경 말씀을 주신 시기와 비슷한 시기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나의 대변인이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 내가 표적으로 그들의 말을 확증해 주지 않느냐?”
신약 성경은 특히 기적을 표적으로 봅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과 10장 37-38절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권위를 실제 자기가 행한 기적의 권능을 이용하여 입증하려 했습니다(고후12:11-12).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실성을 확신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목격한 증인들이 기적으로 자신들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히2:3-4).
기적의 취지가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될 때 기적의 은사도 그쳤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적의 은사는 초세기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육신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두어들이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논거는 기적의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은 우리가 기적의 은사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시대에서 지속되는 현상으로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특정 개인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2009-05-13 15:41:31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7): 마귀 쫓는 것은 성경적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7: 당신이 마귀들을 내쫓을 수 없다면 어떻게 마귀들을 다룹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을 강력히 그리고 단호하게 내쫓으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귀를 내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마귀와 활동과 엑소시즘(逐邪, 마귀 쫓아내는 일)이 세인들의 관심을 끈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마귀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요,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른 타락한 천사들 곧 성경에서 종종 마귀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사탄의 일을 도우며 선한 천사들의 역사를 방해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려 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우리가 혈과 육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을 믿습니다(엡6:12).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강력한 악의 세력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들을 내쫓아야 할까요? 아니면 마귀를 쫓는 일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초대 교회에만 주어진 일시적인 표적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침 사항이 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주어졌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지침의 중심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마귀를 쫓아야 한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일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가 잘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체험해야지 사도들의 체험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마귀를 쫓는 것과 관련하여 사도들이 가르친 바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은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전쟁을 다루는 구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과연 마귀를 쫓아내는 것(축사)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이 말씀은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방어용 갑옷과 사탄과 마귀들을 패주시킬 공격용 무기를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악한 영들의 적수가 못됩니다. 악한 영적 존재들은 힘과 능력 면에서 사람보다 월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권위로 마귀를 대항하거나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려 하는 것은 마치 장난감 총으로 전함을 침몰시키려는 어린아이의 시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도다”(요일4:4)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마귀들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마귀들의 능력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 머무르며 자기들의 힘을 행사하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욥의 경우처럼). 따라서 우리는 마귀들이 하나님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이 시대의 믿는 자 모두 안에 내주하십니다. 승리하기 위해선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두 번째 단계는 마귀들의 공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 계획을 미리 아는 전략가는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공격에 대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5:8). 그리고 성경은 마귀의 공격이 간교하고 속임수로 가득하다고 말하며(엡6:11). 동시에 우리가 이런 사탄의 전략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고후2:11). 그렇다면 이 같은 전략이 무엇일까요?
악한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길 원하며 또한 말씀보다 이성을 우위에 놓기를 원합니다(창3장).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자연적인 질병의 고통과 죽음을 이용합니다(욥기; 히2:14). 악한 세력들은 악한 생각을 불어넣으며(요13:2) 이것을 매우 그럴듯하게 만들어 우리가 거기에 말려들도록 합니다. 그들은 또한 ‘육’(肉)을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타고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나 휴거를 받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흔히 ‘육’이라고 부릅니다. ‘육’은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며 마귀는 이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에 관여하려 합니다. 우리가 ‘육’에다 자신을 내어줄 때 마귀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 우리를 이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육’을 통해 사탄이 우리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고후2:6-11; 엡4:25-29).
주님의 군사라면 마귀가 이러한 경로로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격을 경계하며 대항할 준비를 갖출 때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 공격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영향력을 이겨내기 위한 최선의 길은 날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항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은 바로 이것을 위한 병기고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의 거짓말에 대항하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장에 투입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을 간파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사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무장한 채 전장에 들어가 악을 파악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는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들고 전장에 들어가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사탄과 마귀는 의심을 심습니다. 따라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탄과 마귀의 공격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적을 간파하고 적의 사악한 생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 뒤에 우리는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공격 무기인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릅니다. 사탄은 우리의 결단이나 열심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도망갑니다. 물론 말씀을 기억하고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신갑주를 원활히 움직이게 하는 윤활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상이 우리가 마귀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009-05-13 15:39:31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6): 방언은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6: 당신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까?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연구한 결과 현재 은사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논리적인 구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즉, 거의 항상 영문 모를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화자가 모르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거나 흔히 하늘의 언어, 천사의 언어라고 말하는 황홀경의 소리들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방언(타언어)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고 고린도전서의 경우는 하늘의 언어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비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늘 사람의 언어였고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대부분의 언사(utterance)는 하나님의 은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 그럼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검증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에서 ‘방언’(타언어:tongues)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 원어는 ‘글로싸’(glossa)이며 이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입 안에 있는 혀; 사람이 구사한 언어; 특별한 지역의 사투리, 즉 방언; 이해할 수 없는 말’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신 ‘글로싸’(glossa)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각각에 해당되는 바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에서는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2장 4-11절의 오순절 사건인데 여기서 4절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령님을 기다린 사람들이 성령님이 임하시매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 줍니다. 6, 8절을 보면 이 다른 언어가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절날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놀란 것은 ‘각 사람마다 자기 나라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듣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바로 이 구절 다음에 그들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명단이 등장하며 그 각 지역은 곧 그 지역의 언어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사건은 사도행전의 나머지가 어떻게 전개될지 보여 줍니다.
두 번째는 10장 44-48절에 나오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일어난 기적도 사도행전 2장과 동일하게 “타언어로 말하다.”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 단어가 사도행전 2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의 선물이 ‘이방인들 위에’ 임하셨다는 언급이 있습니다(45절).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며 그 일을 자신이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오순절 사건과 비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되 마치 처음에 우리 위에 임하신 것같이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행11:15, 17). 베드로가 우선적으로 언급한 것도 성령님이라는 인격이지 방언의 나타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라는 분은 그분이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 한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것(방언)을 보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일한 선물을 주셨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도행전 19장 1-7절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기적도 “그들이 타언어로 말하더라.”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그 말이 사도행전 2장이나 10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도 방언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논쟁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에서 나온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봅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하늘의 언어나 혹은 천사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사도행전처럼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방언을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그 본문을 읽어 보아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아무래도 인간의 언어라는 결론에 더 가깝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했고 사도행전은 의사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누가는 가까운 동역자요, 친구 사이였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전도 여행 때 그와 두루 동행했습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글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사도행전이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앞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도행전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년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며 거기에 바울이 이미 사용했던 방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틀림없이 동일한 선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기에 누가는 그 선물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바울은 굳이 방언의 본질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독자들이 이미 그 선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누가가 동역자였다는 것과 바울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것, 누가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바울이 쓴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 등과 같은 사실들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강력히 뒷받침해 줍니다. ‘분명한 소리’(distinct sounds, 고전14:7-11)라는 말의 개념도 14장 21절의 인용과 14장 22절의 설명을 볼 때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tongues of men and of angels, 고전13:1)도 문장이 보여 주는 대로 하나의 가정 하에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가 ‘사람들의 언어들’(tongues of men)을 한다고 했고(14:18) 실제로 모든 지식과 믿음을 가지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천사의 언어들을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 과정이 없이도 구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알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은 어떤 종류의 인간의 언어도 아니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방언의 은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2009-05-13 15:31:48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5): 왜 방언을 하지 않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데(히 13:8) 왜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방언을 하지 않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어제(사도 시대) 하신 방식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유지하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도 시대에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오늘날에도 동일한 은사를 주실 것이고 이 일은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과연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경하지 않으실 이 위대한 진리를 간과한 것일까요?
은사주의자들이 히브리서 13장 8절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명백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방언의 은사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3:8). 그 정확한 시기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방언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입니다. 성경이 분명 방언을 일시적인 것으로 말하기에 방언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은사주의자들이 ‘어제’를 사도 시대로만 국한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왕과 대언자(선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가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거나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와 연관 지으려는 사람은 자연히 ‘어제’에서 구약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 혹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방언의 은사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역사를 보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제’가 그렇게 최근에 시작되었다면 ‘영원’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겠네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어제의 시작을 사도행전으로 보고 그 이전의 인류 역사를 빠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은사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봅시다. 우선 히브리서 13장 8절의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할 뿐이며 그분과 관련된 어떤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그분의 활동이나 역사하시는 방식조차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기초하여 그들은 방언의 은사도 오늘날 유효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운행 방식이 변한다는 것은 성경을 보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변화 정도가 심해 다른 직무(administration)를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 직무를 일컬어 우리는 보통 ‘세대’(dispensation) 혹은 ‘경륜’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순절 이전에는 방언의 은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하나님은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운영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이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이 늘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항상 동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히브리서 13장 8절을 그 문맥에 비추어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의 레위의 제사장 체계보다 월등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대교의 ‘레위 제사장 체계’로 되돌아갈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와 일관성을 모두 발견합니다. 좋은 변화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구약) 대신에 새롭고 좋은 언약(신약)을 가져오셨다는 것이고 나쁜 변화는 유대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일관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7-9절 말씀은 히브리서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깊이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 다니지 말라.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요,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니 음식에 전념하는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 13:7-9)
7절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살아생전에 그리스도께 신실했던 그들의 이전 지도자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비록 이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다음 세대가 따라야 할 본을 남기고 갔습니다. 8절은 히브리인들이 항상 신실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선배들은 갔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계십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들도 계속 신실해야 하는 동일한 근거와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9절은 적용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합하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거짓된 교리들을 피하고 참된 은혜의 교리에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견고하게 해 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특정 음식(희생으로 성별된 음식물)을 먹는 의식이 히브리인들의 마음을 세워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경영 방식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 레위인들의 의식, 레위의 제사장 체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활동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것을 지속하는 것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 본질, 위치는 동일합니다. 또한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불변합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변치 않으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변치 않는다는 것이 그분의 인격과 본질에 관련된 것이지 그분의 역사와 경영 방식까지 똑같다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 13장 8절이 방언의 은사가 지속됨을 보증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9-05-13 15:26:55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4): 방언은 성경적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4: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은 분명히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당신은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본인 스스로 방언을 하지 않고 심지어 오늘날 방언이 있다고 믿지도 않지만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런 은사주의의 관행을 교회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단호한 입장 때문에 우리는 옹졸하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좀 더 심각하게는 이것이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고전13:8). 단지 방언이 언제 그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이 언제 그칠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먼저 고전13:8-12를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가지 임시적인 복이 나옵니다: 대언, 방언, 지식. 분명히 대언(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말하는 것)도 없어지고 지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 동사의 성격상 - 즉 ‘없어지다’(done away)와 ‘사라지다’(vanish away) - 대언과 지식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끝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부의 힘이란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대언과 지식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보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봅니다. 만일 그 ‘완전한 것’이 신약 성경이라면 대언과 지식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9절은 부분적으로 알고 대언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0절은 완전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란 틀림없이 부분적인 것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은 지식과 대언의 완성 혹은 완성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임시 복인 방언(타언어)에 대해 살펴봅시다. 방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동사인 ‘그치다’의 성격상 우리는 방언이 앞에 나온 대언이나 지식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끝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방언(타언어)이란 단어는 고린도전서 13장 9절과 그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방언은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며 심지어 완전한 것이 임하므로 대언과 지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이해한다면 방언은 그 이전에 그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여전히 방언이 그분의 재림 때가 아니라 재림 이전에 그칠 것이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1-22절은 방언이 종결된 시기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구인 고전14:21을 보면 외국어 방언의 표적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심판의 개념이 고린도서에도 적용된다면 방언의 은사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말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주후 70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진노를 부으셨으며 이때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방언은 주후 70년에 지식과 대언은 주후 90년에 각각의 목적을 다 이루고 그치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방언이 2세기나 그 이후의 정통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압니다. 그러나 몇몇 이단들은 계속해서 방언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나 집사의 자격에도 방언은 없습니다(딤전3장; 딛1장). 만일 방언이 교회 시대 전체에 필요한 은사였다면 분명 본을 보이며 양 무리를 이끄는 자들은 마땅히 이 은사를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방언을 주장하며 이에 대해 설교하는 목사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그리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언이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유효했고 실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방언 전부가 금지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이런 경고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방언은 그친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날 방언은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를 금하신 명령(마10:5-6) 만큼이나 교회와 무관한 사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언의 은사가 그쳤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 목적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표적이라는 목적을 거의 달성할 수 없다는 성경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은사주의 관행을 우리 교회 안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방언을 하는 사람과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교회에 있게 되면 늘 불화가 일어납니다. 게다가 오늘날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실행의 규정을 거의 지키지 않은 채 행해지고 있습니다.
2009-05-13 15:24:20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3): 초대 교회와 성령의 역사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3: 성령 침례가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일어나는 두 번째 축복이 아니라면 왜 초대 교회 사도들은 구원받은 후 몇 년 뒤에 성령을 받게 되었을까요?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성령 침례가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한 순간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즉, 성령 침례는 그 후에 - 기간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음 -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늦추어진 성령 침례를 소위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축복에 버금갈 만큼 놀라운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질문에 나온 사도들의 예는 소위 ‘두 번째 축복’으로서의 성령 침례를 증명해 준다고 알려진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원받았고 심지어 그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님의 침례를 경험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분명히 많은 이들은 우리 역시 이러한 사도들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을 전후하여 하나님의 치리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세대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믿는 자들을 향한 성령님의 사역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은 이미 지상에 있었고 성령님은 심지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 사역에도 계셨습니다. 구약에서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고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각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몇몇 사람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령님의 내주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영속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 침례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세대만이 가지는 독특한 것이며 바로 오순절에 이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내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세대에서 성령님은 장막을 만드는 자나 재판관, 대언자(선지자), 왕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임하셨습니다. 이때 성령님의 내주는 단순히 그들의 구원을 보여 준다기보다 그들이 맡은 직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상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맡은바 소임을 마치지 못하거나 불순종으로 인해 자격을 박탈당하면 자연히 성령님도 그를 떠나가셨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봅시다. 처음에 그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님께서는 사울 안에 거하셨습니다(삼상10:1-6).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주님의 영께서는 그를 떠났습니다(삼상16:14). 이 때문에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한 후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두어가지 마시도록 부르짖었던 것입니다(시51:11). 다윗의 기도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두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기도는 적절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믿는 모든 자 안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롬8:9).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동안에도 성령님은 활동하고 계셨지만 아직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요7: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직전에 성령의 사역이 곧 바뀌게 되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함께 혹은 그들 가운데 계셨던 성령님께서 곧 제자들 안에 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7).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이 있은 뒤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7-1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행11:15, 17).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성령님께서 모든 신자 안에 영구히 거하게 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 침례를 생각해 봅시다. 성령께서 침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 그것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고전12:13). 그리스도의 몸은 보편적 교회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엡1:22-23).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개개인을 교회 안으로 옮기는 일도 교회가 존재한 후에야 시작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성령 침례는 오순절 이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승천하실 때 성령 침례를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행1장). 오순절이 오기 10일 전만 해도 성령 침례는 현실이 아닌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은 후 몇 년이(혹은 최소한 몇 달이) 지난 후의 일인데 이는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 침례가 없었고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시대에 태어나신 것처럼 율법 시대에 구원을 받았습니다(갈4:4). 그런데 그들이 구원받은 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성령 침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 침례는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축복’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성령 침례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는 순간에 주어지는 복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체험은 독특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두 세대 사이의 과도기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예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2009-05-13 15:22:00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2):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다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2: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은사주의에서는 보통 이 둘을 서로 번갈아 가며 사용하며 이 둘이 성령님의 단일한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기 때문에 은사주의자들은 늘 그 차이를 묻습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공부해 보면 이 둘이 단순히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각각을 살펴보고 나중에 둘을 비교해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성령 침례에 대한 구절은 신약에서 11번 나옵니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롬6:1-7; 고전12:13; 갈3:26-28; 엡4:5; 골2:12). 이 중의 다섯 구절은 예언의 말씀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다섯 구절 모두 성령 침례를 미래 시제로 다루고 있으며 이는 성령 침례가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과거 시제도 있는데(행11:16)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신 성령 침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구절은 서신서에 있으며 모두 성령 침례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이 성령침례인가? ‘침례’(밥티스마)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잠그다’ 혹은 ‘담그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하나의 사물을 다른 데로 옮겨놓다’는 의미가 있지요. 성령 침례는 이 일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침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성령님 안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여기서도 침례라는 단어가 쓰이며 이는 곧 그를 성령님의 세계로 옮기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즉, 그를 보편적 교회라는 새로운 세계로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보여 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장 3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바로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니라, 하셨기에”(요1:33)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3)
2. 언제 성령 침례가 일어났는가? 성경은 성령 침례가 성도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험의 일부라고 가르칩니다. 성령 침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거듭날 때 일어납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결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 같은 관계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3. 누가 성령 침례를 받는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도 이를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고전12:13).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신자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육적인 모습이 공공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4. 성령 침례를 사모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성령 침례를 추구하라는 명령도 없고 심지어 그 같은 언질조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왜 이리 조용한 한 걸까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는 순간 이루어지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유가 된다면 굳이 그것을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신약에서 15번 등장합니다(눅1:15, 41, 67; 4:1; 행 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엡5:18). 이 중의 14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모임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에서만 성령 충만이 명령으로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 충만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이 말씀은 충만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되는 것은 ‘무엇의 통치하에 있다’ 혹은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술에 취하는 것(술에 지배당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비교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성령 충만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하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입니다. 즉, 현재에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쓰자면 ‘계속해서 충만하라’가 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믿는 이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제라고 해서 성령 충만이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살면서 자동적으로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그때는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이 말씀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은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됩니다. ‘충만하라’는 명령은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처럼 복수를 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명령은 특정 소수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모두 동시에 충만하게 되지도 못합니다. 성령 충만의 명령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주님께 불순종하여 충만하게 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롬6:13; 12:1) 성령의 권능 안에서 걸을 때(갈5:16)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성령 침례는 단 한 번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 침례는 거듭나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항상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만 성령 충만은 믿는 자가 순종하는 때에 이루어집니다. 성령 침례는 명령이 아닌데 이는 하나님께서 맡으신 책임이기 때문이고, 성령 침례는 명령인데 이는 믿는 이가 따라야 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침례는 믿는 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성령 충만은 믿는 자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 침례는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사람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2009-05-13 15:19:04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 병고침이 속죄의 일부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질문이란 것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답을 안다면). 그래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15)는 말씀은 매우 고무적이며 또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여기서 소망이라 함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합니다(골1:23).
우리는 성경적인 ‘칭의의 교리’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목사나 집사 혹은 교회 학교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종이나 아내나 남편들에게 주는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8절과 그 이후의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는 지침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지체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목사를 구실로 삼아 이러한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목사는 목양 사역의 일부로서 각종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합니다. 누구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목사를 찾아가서 물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만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필요한 연습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곁에 성경을 잘 아는 목사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어떤 부인이 논쟁이 되는 교리 하나를 갖고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목사는 그 교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견해를 정리해 놓은 건전한 책 한 권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여러 견해가 아닙니다. 그냥 정답을 말해 주세요. 그럼 믿겠어요!” 이러한 부인의 태도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의 칭찬할 만한 태도와 비교됩니다. 사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조차도 성경을 통해 비추어 보고 상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요한1서 2장 27절 말씀은 멋진 균형을 이룹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2:27)
하나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어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인 제사장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 년 전보다 우리 믿음에 대해 더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질문 중 몇몇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가르친다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종종 은사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믿으며 다른 표적 은사들(기적을 행함, 병 고침 등)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60년 캘리포니아주의 밴누이스(Van Nuys)에서 시작된 이 은사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최근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그리스도인들의 19% 가량(2900만 명)이 자신을 은사주의자 혹은 오순절주의자로 여기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가히 놀랄 만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조사에 따르면 이런 은사주의자들의 21%가 뱁티스트(침례교도)라고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요 프로테스탄트 진영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초교파 운동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교리 설명이 없고 사람들이 표적이나 이적을 중심으로 모이며 각 사람이 믿는 바(정통이든 비정통이든)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공식적인 회원 명부도 없습니다. 단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도하고 같이 공부하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교회 등)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자, 여기 몇몇 은사주의자들 특히 성경을 믿는 교회 출신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성경대로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에게 묻는 열두 가지 질문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1: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속죄의 한 부분인 병 고침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도전적인 성격의 질문입니다. 비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채찍에 맞아야겠군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채찍은 분명히 그분의 죽음과 실제 처형 중에 당하신 채찍질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고침을 받도록 채찍을 맞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처럼 고침을 가져왔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체의 치유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것이 성령님께서 육체적인 치료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가 여기 있습니다.
1. 성경 전체에서 ‘고침’(healing)이란 단어는 여러 종류의 고침을 나타내는 데 쓰였습니다. 이 말은 주로 육체적인 치유를 나타내었지만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 데도 쓰였고(눅4:18) 마귀의 억압을 제거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으며(행10:38) 또 죄악된 행실을 버리거나(히12:13)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할 때에도 ‘고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런 의미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벧전2:24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잘 아시는 ‘stick’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의 뜻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빗자루, 성냥개비 혹은 접착제 같은 단어가 함께 나온다면 아마 이 단어의 뜻을 문맥을 통해 미루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고침’이라는 단어의 뜻도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벧전2:24 전체 내용이나 또 전후의 문맥에 육체적인 치료를 연상하게 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죄가 여러 번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고침이 영적인 치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체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독자 여러분)는 죄를 짓지 않으신(2:22-23)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2:21). 이러한 높은 수준의 행실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죄들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24). 우리는 습관적인 죄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더 이상 잃어버린(구원받지 못한) 양처럼 방황하지 않고 우리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2:25).
이처럼 여기서의 ‘고침’(healing)은 영적인 치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의 고침을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로 본다면 글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3. 베드로전서 2장 24절의 마지막 구 즉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와 25절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명한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6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범법과 불법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 관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죄의 치유는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이사야서 1장). 대언자 이사야가 다룬 환자인 이스라엘 민족은 죄 많고 불법에 싸여 있으며 주님께서 버리신 악인들로 가득합니다(1:4). 하나님은 이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사1:5-6).
이 환자의 병세가 신체의 부위별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절은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의사, 그것도 영적인 의사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주님을 꾸짖자 주님은 자신이 왕진을 나온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진을 나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입니다(마9:10-30). 정확한 때에 위대한 의사께서 영적인 치료의 일을 마치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오르시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즉, 손수 내리신 처방에 필요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누구나 죄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9-05-13 15:14:19 | 관리자
제24장 교회분별
저는 지금부터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교회를 네 종류의 교회로 분류하여 여러분의 교회 분별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네 종류의 교회 중 한 종류 교회만이 참 교회 곧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 세상에는 세속주의적 교회들이 있습니다. 세속주의적 교회는 말이 교회이지 실상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격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됨과 무오류성을 부정하고,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 정도로 여기며, 유대인 도덕 교과서 정도로 여깁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기적도 부정합니다. 이들은 소위 고등비평주의, 과학주의, 인문주의를 생명처럼 여기는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해방주의 신학 등 사신 신학, 사회 복음주의 신학 등을 내세우며 결국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서슴없이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곧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 예수님의 부활, 승천, 재림,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정합니다. 이들 속의 어떤 집단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인격자, 성인, 마리아의 아들 정도로만 여깁니다. 이들은 세상과 동화되어 세상을 흉내내고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과 짝하려고 합니다. 곧 음주, 흡연, 세속 노래, 세속 오락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며, 조상 제사도 인정하고, 불신자와의 결혼도 인정합니다. 심지어 동성에까지 인정합니다.
이들은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그럴 듯한 미명을 앞세우며 종교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세계 종교의 통일과 세계 종교의 단일화 운동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동일성이라는 주장은 교회와 타종교 곧 우상 종교들과 동일하다는 뜻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회를 우상 종교와 동일 선상에 두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실수나 오류 정도로 해석하여 죄의 심각성과 치명상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 천국, 지옥, 영생을 부정하고 구원이라면 정치, 사회, 경제, 계급적 구원을 주장합니다. 또 이들은 진화론을 인정하며, 겉으로는 유신론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형주의와 물량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건한 예배의 중요성을 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신 배우, 탤런트, 유행가 가수, 경건치 못한 복음가수, 정치인 등을 초청하여 바람잡이식 선동으로 교회 성장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타종교 곧 우상종교 의식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의식의 일부로 사용하고 이를 권장합니다.
둘째, 율법주의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현대판 구약식 교회 곧 현대판 유대교식 교회로서 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신약 성경을 중심에 두지 않고 율법이 중심이 되어 율법을 율법식으로 해석하여 오늘에 적용합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심지어 유대인들처럼 토요일에 모여 예배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신앙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주장하면서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만 구약 시대 때 적용되었던 음식 가리는 것을 큰 계율로 알고 철저히 지키며, 상대적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의식주의 ,율법 준수를 통한 행의 구원을 주장하며 믿음을 통한 은혜구원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의식준수, 율법 준수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목사를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격상하며, 목사만이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으며, 강대상에는 목사만이 등단할 수 있고, 아무나 강대상으로 올라가면 저주받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으며, 의식주의와 형식주의·위선주의가 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죄권까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그렇게 실행하기도 합니다.
셋째, 신비주의적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 아닌 교회는 현대 교회에서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신비주의적 운동은 성경 진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신비성>을 흉내내면서 그 실체를 위장하여 전염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교회들보다 분별하기 어렵고, 그 정체를 알았다 할지라도 <신비주의>에 약한 인간의 심성은 그 사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어가는 매우 두려운 대상인 것입니다.
신비주의적 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기도하거나 느낀 대로 자신의 마음이나 육신에 체험된 현상 그대로 해석하고 믿어버립니다. 이들은 신 규약 성경 시대에 있었던 일이 성경이 완성된 이후 곧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그런 것들을 바라며 추구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이들은 주로 초자연적 현상을 추구하는데, 입신이나 환상·환청·꿈·방언·예언·신유·안찰·안수·투시·영서 등 직통 계시를 특히 강조합니다. 이들 집단에서는 점쟁이 식의 활동이 매우 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집단 최면, 자기 최면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성경의 객관적 진리보다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중시하여 감정에 의존한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신비 체험을 중시하고, 이것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 이들은 영혼과 마음의 축복보다는 육적 건강, 재물 축복, 사업 성공, 자녀 잘됨, 육신 출세, 무사고, 부귀 영화를 유별나게 강조하며 특히 부자되고 병고침 받는 것을 더욱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집단에 와야만 이런 것을 모두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비성경적 축복관을 가지고 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비주의적 교회 형태 집단에서는 금욕주의적 요소가 매우 진하여 독신주의 권장, 부부 분방 권장, 금식 기도, 연속 철야 기도 등을 극심하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성경 공부가 없습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이 텅텅 비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천국과 지옥을 갔다왔다고 주장하고, 천사와 귀신을 보았다고 하기도 하며, 천사를 만나 함께 대화도 하고 여행도 다녔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어진 신앙 양심이나 이성 곧 생각기능이나 지각을 사용하지 않고 즉흥적 감정이나 기분에 의한 생각이나 자신이 신비 체험을 통해 경험한 것을 성경의 검증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대로 확신하고 그 체험에 따라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최상의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외 다른 바른 교회들을 오히려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비성경적 성령론을 신봉하여 은사 운동이나 성령 운동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오히려 악령 운동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이나 경건한 성도의 생활보다는 표적이나 이적 기사에 영혼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를 서슴치 않습니다. 이들은 일인 혹은 소수 그들 집단의 지도자들을 카리스마화 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이들의 성경 해석 방법은 주먹구구식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이나 신조를 먼저 만들어 놓고 , 그것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성경 구절이 있으면 여러 정황을 보아 그렇게 적용해서는 안되는데도 강하게 강조하고 또 적용해서는 전후 좌우가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적용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을 매 구절마다 연결지어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요행수를 많이 바라기도 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영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들은 열광적인 분위기에 의해 자신들이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분위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들에게 맞는 것들만 좋아합니다. 성경을 비정상적으로 해석 인용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비윤리적인 말들 즉 반말이나 욕같은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직통 계시를 유도 주장합니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감정 흥분과 그 충동을 자극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을 가능한 대로 총동원합니다. 또 이들은 가정을 등한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의 신앙 생활은 기독교식이라기 보다 이교도적인 요소가 더 진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다가 기도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고 그렇게 말합니다.
넷째, 복음 경전주의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인 교회요 온전한 교회요 바른 교회요 참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성경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성경 이외에는 다른 계시가 없음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자신의 주관적 체험이 아닌, 성경에 의해서 해석하고 적용하며 이를 순종하려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수하고, 성경 연구와 성경에 의한 훈련을 통한 성경 중심주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그 분의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재림하실 것을 성경대로 믿고 준비합니다. 이들은 성령님의 인격과 성령님께서 성령의 검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말씀 안에서 활동하심을 믿고, 말씀을 통한 성령님과의 교제를 신봉하고, 성령님의 성도 안에서의 내주를 믿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회개, 죄 사함, 영혼 구원을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이들은 육신의 잘 됨보다 영혼의 축복을 강조하고, 영혼의 축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들은 행위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또 술, 담배, 세속 노래, 세속 영화와 연극 등 세속적 오락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일체의 비성경적이고 교권주의적인 요소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성도의 경건한 생활 즉 검소한 생활, 정직한 생활, 성결한 생활, 책임 있는 생활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정을 중시하고 가정에서의 청지기 생활에 충성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전도와 선교를 지상 목표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근로 정신과 노동의 신성함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 불간섭을 중요한 행동 지침 중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난에 대해 인내를 강조하며, 박해에 대한 무력적 항거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믿음 생활 속에서 덕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성도간의 교제를 강조하며, 복음 안에서의 사랑을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권면과 징계, 용서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국교화와 교회의 계급화를 반대합니다. 이들은 종교 단일 운동을 절대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들은 복음 안에서 온 성도의 지체됨과 제자직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질적인 면을 중시하지 결코 양적인 면을 치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의 예배를 중시하고,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복음적인 일체의 신비주의, 세속주의,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2009-05-13 15:10:50 | 관리자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간의 침묵기
구약성경이 끝난 뒤 곧 바로 신약성경이 시작되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 기간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할 필요를 느낀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로부터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까지의 기간은 400년으로, 보통 이 기간은 '침묵기'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며 세속 역사가들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의 역사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주후 37-100년 사이에 살았던 요세프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이다. 요세프스는 유다인 역사가로 주후 66-67년 사이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며 저항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타이투스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는 로마로 끌려가 베스파시안, 타이투스, 도미티안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유명한 저술로는 마카비 시대부터 주후 73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일곱 권으로 기록된 「유다 전쟁사」(The Jewish War)와 유다인들의 기원으로부터 주후 66년의 전쟁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스무 권으로 기록된 「유다인들의 고대 역사」(Jewish Antiquities)가 있다.
I. 세계의 권력
A. 페르시아 왕국(주전 333년까지 지속됨)
1. 몇몇 외경이 기록됨.
2. 유다인들이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옴.
3.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됨.
4. 신정 정치, 제사장, 율법 체제.
B. 그리스 왕국(주전 333-167년)
1.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이김.
2. 알렉산더가 유다인들에게 자비를 베풂.
3. 유다인들이 흩어져서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임.
4.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왕국은 네 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됨.
5. 네 왕국과 그 통치자들은 다음과 같음.
a. 이집트 - 프톨레미
b. 시리아 - 셀루시드
c. 마케도니아 - 리시마쿠스
d. 소아시아 - 카산데르
*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은 서로를 대적하며 전쟁을 함.
6. 이집트와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땅을 놓고 전쟁을 벌였으며, 유다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 피난처를 찾기 시작함.
7. 소위 「70인역」이라 불리는 구약성경 역본의 전통에 따르면,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 필라데프스가 명령을 내려 70명의 유다인들에게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고 한다.
주의 사항: 사실 이 같은 전통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비의 「70인역」을 사용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현존하는 「70인역」 사본들은 한결같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다.
8. 그 당시 가장 많이 쓰인 언어는 다음과 같다.
a. 그리스어
b. 아람어(히브리 방언)
C. 마카비 시대(주전 167-63년)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주전 175-164년 사이에 시리아의 왕으로 통치함.
2. 그의 정책은 자신의 왕국 전체를 그리스화 시키는 것이었으며, 그의 정책에 반대한 유일한 그룹은 유다인들이었음.
3. 신실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형제인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유다인들을 그리스화 시키는 조건으로 자기를 대제사장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함.
4. 안티오쿠스가 칙령을 내리자 야손이 이를 유다인들에게 가져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a. 그의 왕국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같은 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함.
b. 유다인들의 축제, 안식일, 희생, 할례 등을 지키거나 행하는 것을 금함.
5. 이 같은 칙령의 위협으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 유다인들을 대적함.
6. 등록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중에는 요아립의 계통에서 나온 마타디아라는 이름의 나이 많은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와 및 그의 다섯 아들은 예루살렘 북쪽 산에 있는 자기 선조들의 영토로 들어갔음.
7. 안티오쿠스의 밀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이교도들의 제단에서 희생물을 바치라고 명령함.
a. 마타디아는 희생물을 바치려 한 배도한 제사장들을 즉각적으로 죽임.
b. 또 그는 왕의 사자들을 죽이고 가증한 제단을 무너뜨림.
8. 백성들은 마타디아의 지도를 받으며 대항하기 시작했고 반역의 세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많은 마타디아는 이 일이 있은 뒤 일년이 지나 죽었고, 그의 아들들이 그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함.
9. 그의 아들들은 마카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장남의 이름이 유다 마카비였기 때문이었음.
10. 10,000여 명의 유다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번씩이나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패주시킴; 한번은 50,000명, 또 한 번은 65,000명.
11.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5년에 다시 성전에서의 예배를 시작함.
12. 마카비들은 78년 동안 권력을 행사함.
D. 로마제국(주전63∼?)
1. 폼페이 대제가 주전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함.
2. 주전 40년에 로마인들은 헤롯 대왕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주전 37년에 유대 지방의 유일한 왕이 됨.
a. 헤롯은 에돔 사람임.
주의 사항: 에돔 족속은 페트라에서 내쫓김을 당해 남부 유대 지방에 정착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두매아(에돔)라고 불렀다. 이 에돔 족속은 그 뒤 50년이 지나 히르카누스에 의해 정복을 당해 할례를 강요받았고, 유다인들의 집회의식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다(신 23:7).
b. 창세기 27장 40절의 에언이 헤롯 대왕을 통해 이루어짐.
3. 헤롯 대왕은 주전 4∼5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남.
Ⅱ. 변화된 것과 새로 나온 것
신약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곧바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집단 등을 접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 400년의 '침묵기'에 생긴 것이다.
A. 제사장
1. 복음서에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옴.
2. 대제사장 혹은 수제사장이라는 단어가 84번 나옴.
3. 모세 당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장 직무의 기능은 종교적인 것이었음.
4.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인들의 시민권리는 제사장들의 손으로 넘어감.
B. 레위인
1. 사복음서에서 단 2번만 나옴 - 눅 10:32, 요 1:19.
C. 서기관
1.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2. 준비된 서기관은 모세 오경을 외움.
3. 아주 전통적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
4. 율법사라고도 일컬음을 받음.
D. 다스리는 자(치리자, 관원)
1. 여러 종류의 관리를 지칭함.
2. 용례 :
a. 연회장 - 요2:8,9
b. 산헤드린 공회 회원 - 요3:1
c. 주치리자 - 요12:42
d. 행정관 - 눅12:58
E. 바리새인
1. 이 명칭은 "분리된 자"라는 뜻임.
2. 기록된 율법을 옹호하며 지키는 사람들.
3. 보수적임.
4. 정통이었으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음.
F. 사두개인
1. 유다인들의 귀족으로 정치 집단임.
2. 종교적 측면에서 현대주의/자유주의자들임.
a. 영의 존재를 부인함.
b. 부활을 부인함.
c. 혼의 불멸을 부인함.
주의사항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에 생긴 그룹으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음.
G. 헤롯당원
1. 정치집단
2. 이 이름은 로마정부의 권세를 위임받은 헤롯에게서 유래됨.
3. 정치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함.
H. 갈리리 사람들
1. 이 집단은 북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나 모든 외국 세력에 대항했음.
2. 정치적으로 광적인 사람들임.
I. 사마리아 사람들
1.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다시 사람이 거하게 하도록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사이에 생긴 혼혈민족.
2. 아시리아의 에살하돈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제사장을 보내었으며 그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들은 주 하나님도 두려워 하고 동시에 자기들의 신에게도 경배를 드림.
3. 주전 535년, 두 번째 성전을 지을 때에 이들은 자기들도 이 일을 돕겠다고 했으나 유다인들이 이 같은 제안을 거부함.
4.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인 간에는 늘 적대심이 존재함.
J.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1.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번 나옴 - 요7:35 ; 약1:1 ; 벧전1:1.
2. 이 단어는 밖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포로 시절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서 돌아오지 않고 그 곳에서 남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그 규모가 작음.
K. 개종자
1. 원래는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을 뜻함.
L. 회당
1. 유다인들이 모이는 장소.
2. 이 기관의 유래는 바빌론 포로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감.
3. 성전 밖에서나 성전이 없는 경우에 유다인들은 작은 그룹으로 모였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자기들의 종교적 삶을 온전하게 유지함.
M. 「70인역」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하자.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유다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인의 유다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이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의 추측 연대는 대략 주전 250년 경인데, 이 시기는 주전 397년 구약 성경의 마감 시기와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주전 4-5년 경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간의 침묵기 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번역본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조하라는 압력이 오자 학자들은 급히 주후 200년 경 오리겐의 「육단 성경」(헥사플라, Hexapla)을 그 증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70인역」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이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두 번째 단은 오리겐 자신(결코 72인의 유다 학자의 번역이 아닌)이 그리스어로 구약을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벨과 용', '유디스서', '토비트서'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조차 포함시키고 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제5단에다 직접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려 들 것인데, 이런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인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여지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the Ryland's Papyrus, #458)인데, B.C.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제 「70인역」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2. 모든 유다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명기 17:18; 31:24,25,26과 말라기 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 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그런 금지된 계획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유다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법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언어 계승의 열심에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고자 하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이야기는 모순된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외경을 포함한 구약 성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자체에서 발견된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첫 번째 난제는,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12 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신학자들이 이같이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보고서도 이 거짓된 「70인역」을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슬프지만 아주 단순한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고,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의 공식 번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며, 단 번에 성경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킬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이다.
N. 산헤드린
1. 공회라고도 불림.
2. 공회는 모세가 구성한 70명의 상담자들에게서 유래됨.
3. 구성원은 다음과 같음 ;
a. 수제사장이나 24개 제사장 계열의 수장들.
b. 서기관이나 율법사.
c. 일반사람을 대표하는 장로들.
d. 공회에는 70명이나 72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고, 이들의 임기는 종신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됨.
2009-05-08 17:25:12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를 잘 알아야 하며, 이런 종류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3년간 사역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지역의 여러 지방, 산, 도시, 마을 등과 익숙해지는 것은 이 땅에 미친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과 그분의 사악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지리
Ⅰ. 이름
A. 그 땅 - 룻 1:1
B. 거룩한 땅 - 슥 2:12
C. 주의 땅 - 호 9:3
D. 영광스런 땅 - 단 11:16,41
E. 약속의 땅 - 히 11:9
F. 이스라엘 땅 - 삼상 13:19
G. 가나안 - 창 9:18
H. 팔레스타인 - 욜 3:4(가장 오래된 이름)
Ⅱ. 특징
A. 팔레스타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분의 사역 속에서 자신의 구속의 은혜를 계시하는 장소로 택하신 땅임.
B.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을 문자 그대로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루시며 기뻐하실 것임을 보여 줌.
Ⅲ. 크기(매우 작음)
A. 길이가 224km
B. 북쪽에서는 너비가 37km
C. 남쪽에서는 너비가 128km
D. 면적이 22,500km2
Ⅳ. 비옥함
이 땅은 그곳에 거하는 주민들의 필요를 모두 만족시키는 땅이었으며, 이처럼 비옥한 것은 강과 샘 그리고 적당한 강우 등으로 인함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또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이곳의 오렌지는 그레이프 프룻과 같으며 아주 달아서 그 껍질도 먹는다고 함.
A. 과일 : 올리브, 무화과, 오렌지, 살구, 석류, 포도
B. 나무 : 떡갈나무, 종려나무, 은매화나무, 백향목, 뽕나무, 호도나무
Ⅴ. 격리성
자연적인 장애물이 팔레스타인 땅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런 장애물은 이 땅을 격리시켜 그 주변의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이란 칭호를 부여받기도 했다. 이 땅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A. 동쪽: 사막, 요르단을 통과하는 언덕들, 요르단 계곡의 갈라진 틈
B. 서쪽: 지중해
C. 남쪽: 큰 광야
D. 북쪽: 레바논의 산들
Ⅵ. 중심성
위와 같이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위대한 민족들과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A. 남쪽의 이집트
B. 동쪽의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C. 북쪽의 그리스, 로마
Ⅶ. 지역 구분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이 다음과 같이 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
A. 북쪽의 갈릴리
B. 중앙의 사마리아
C. 남쪽의 유대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마을과 강과 산등에 대해서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이 구약시대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2009-05-08 17:24:16 | 관리자
교육에서 잃어버린 도구들
(Lost Tools of Learning)
저자 : Dorothy L. Sayers
역자 : 정동수
교육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교육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변명하기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사실 현세대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천주교 주교들이 경제학에 대해 논하거나 생물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논하며 무기화학자가 신학에 대해 논하는 등 어떤 주제에 대해 그리 관련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적인 것을 논하도록 임명을 받으며, 평범하고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엡스타인이나 피카소 등이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비판하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특히 온건한 비평과 함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활동들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너무나 전문성을 띄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된다. 따라서 진실한 아마추어가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전문교사는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다 한번씩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참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제 나는 소위 교육 혹은 가르침이라 불리는 주제에 대해 다룰 것을 제안한다. 내가 제안하는 교육개혁사항들이 앞으로 참고가 될지는 참으로 미지수이다. 부모나 교육대학이나 시험기관이나 주지사 회의나 교육부 등에서 잠시라도 이런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내용들이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육받은 사람들의 사회 곧 현대사회의 복잡한 압력 속에서도 자기들의 지적 자유를 보존하려 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진보의 수레바퀴를 400-500년 정도 뒤로 돌려 교육이 그 참된 목표를 잃어가기 시작한 시절 즉 중세암흑시대의 끝부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여러분이 반동주의자, 낭만주의자, 중세주의자 등과 같은 용어를 써 가면서 나를 흉보기 전에 나는 여러분이 내 모든 생각의 뒷면에 남아있는 한두 가지 부차적인 질문들 곧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근심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주십사고 부탁드린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질문들
튜도 왕조 때와 같이 젊은이들이 아주 어릴 때에 대학에 들어가고 그 이후로는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성숙한데도 지적으로는 어린아이나 사춘기 시대에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편안한 감을 느낄 수 하는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자꾸자꾸 뒤로 미루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학적 문제를 수반하며, 비록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어떤 흥미를 유발시킬지 모르지만, 개인이나 사회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들어가는 일을 늦추고 점점 더 교육의 기간을 늘이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된 이유는 중세에 비해 지금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현대의 소년 소녀들은 참으로 여러 과목을 배운다. 하지만 과연 이 사실이 그들이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뜻할까?
서구 유럽사회의 문맹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 시대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광고나 대중매체의 선전 영향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에 대하여 당신은 이상하게 느끼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혹은 신문방송 등이 보다 넓은 지역에 어떤 사실을 좀더 쉽게 선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기계적 사실로 인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현대 교육 방법에 인한 생산물 즉 현대 학생들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증명된 것과 가정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불안하게 의심하고 있는가?
당신은 혹시 어른들 혹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대부분이 질문의 요지도 파악하지 못하며 상대방의 논쟁의 요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함을 보고 초조하게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위원회 모임 등에서 참으로 별 것 아닌 문제들이 수없이 튀어나오며, 위원회 의장으로서 회의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고 또 동시에 우리의 공무의 대부분이 논의와 위원회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마음이 철렁하고 가라앉지는 않는가?
혹은 신문 등에 실린 논설에서 저자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주고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그 글에 대해 답변하면서 그 사람이 정의 내린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로 그 용어를 정의 내려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당신은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문장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가? 만일 그랬다면 당신이 괴로움을 느낀 것이 그 글이 우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글이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인가?
혹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떠나서는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것은 당연한 결과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정말로 그것에 대해 알았는지조차도 모르며 또한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푸는 것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또한 당신은 건전하고 학적이며 적절하게 문서로 입증된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분간 할 줄 모르는 수많은 남녀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도서관의 장서 목록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혹은 참고문헌을 주어도 거기에서 자기들이 찾고있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적당한 구절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또한 당신은 평생토록 어떤 과목을 그 과목 자체로만 인식한 채 다른 과목이나 주제하고는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수학의 대수와 탐정소설간의 관계나 혹은 하수처리와 연어의 가격 등의 관계,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과 경제학과의 관계나 화학과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하여 이 과목들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해 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몇 가지 예
당신은 종종 다 큰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기록한 글로 인하여 불만을 느낀 적이 없는가? 예를 들어 한 유명한 생물학자는 주간지에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사실 그는 이보다 더 강한 어조로 썼지만 불행히도 참고문헌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훨씬 약하게 그의 요점을 적은 것이다.) -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이와 똑같은 변이가 개나 고양이 등을 번식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다는 이 사실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읽고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논지는 이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논지가 증명하는 것은 이중 교배 등을 통한 염색체의 재결합 같은 어떤 물질적 원인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변종에 대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피아노의 열세개의 음반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소리나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서 아무렇게나 건반을 누를 때 내는 소리를 만드는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은 결코 베토벤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으며 증명하지 않지도 않는 것이다. 이 생물학자의 논지에 의해 증명된 것은 결국 그가 물질과 최종적인 원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문장은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임즈 문학 증보」(Times Literary Supplement)의 첫머리 기사보다 더 학적인 데서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에피나스(Alfred Epinas)는 개미나 말벌 같은 특정한 종들이 삶과 죽음의 두려움을 서로 연관 지으며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사실 그 프랑스 사람이 무어라 말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적은 영국 사람의 글을 따르자면, 그 프랑스 사람의 발언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개미에게 있어서 과연 삶이 어떤 두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도 없으며 나와 당신이 창문에서 손으로 꾹 눌러 죽이는 말벌이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지 맞이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 글의 주제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대중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의 동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주요 명제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어떤 예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 논지는 그 논지가 증명하려 한 것을 가정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이것이 좀더 형식을 갖춘 삼단논법으로 제시되었을 경우 즉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지적한 것은 많은 책을 파고드는 해악의 한 종류로서 특히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이나 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타임즈 문학 증보」의 같은 호에서 나온 다음의 예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잘 정리해 준다. 이번에는 리빙스톤경의 「교육을 위한 과제들」(Some Tasks for Education)의 논평에서 취한 것이다.
독자는 한번 이상 최소한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가치가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며 이로써 "지식의 의미"를 알게 되며 그것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정확성과 인내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해도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자기 이웃들 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괴로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지는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특히 마지막 문장 곧 저자가 "괴로운 사실"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설명을 주는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다시 말해 그 "괴로운 사실"은 우리의 교육을 통해 우리가 얻은 지적 기능 혹은 기술이 우리가 그런 기술을 습득한 그 과목 혹은 주제 이외의 다른 과목이나 주제에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가를 전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예술
오늘날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 곧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의 모든 불안한 현상을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는 문제점은, 곧 우리가 학생들에게 어떤 주제나 과목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잘하지만 그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배워도 유독 교육 혹은 학문의 예술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먹구구식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학생에게 "금발의 제니"같은 유명한 곡을 치는 것은 가르치지만 음보를 읽는 것이나 스케일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학생은 "금발의 제니"를 다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떠나서 또 다른 "스와니강"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비유를 들은 것일까? 예술이나 공예 같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학생이나 아이에게 색깔이나 붓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기술자는 결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새로운 소재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자기의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을 배웠고 올바른 목적으로 물건을 취하는 것을 배웠으므로 어떻게 하면 바른 도구를 사용할까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새로운 소재를 놓고 두들겨보며 감을 잡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세시대의 교육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즉 학교들의 교수방법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혹은 나이가 든 학생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하는 것은 당분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습득해야 하는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중세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여 올바른 교육 과정이 어떤 것인가를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중세 교육과정
중세 교육 과정은 트리비움(Trivium)과 콰드라비움(Quadravium)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콰드라비움은 여러 가지 과목으로 이루어졌고 당분간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주제이다. 우리가 흥미 있게 살펴 보려는 것은 트리비움의 구성요소인데 이 트리비움은 콰드라비움에 들어가기 전의 과정으로 콰드라비움을 택하기 위한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여기에는 문법, 변증, 수사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먼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런 과목들 가운데 최소한 두 개는 실제로 과목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문법은 실제로 말을 배우는 것이므로 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물론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말이라는 것은 생각을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트리비움은 한 마디로 학생들이 학문의 도구들을 어떤 과목에 적용하기에 앞서 그런 도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먼저 학생은 말을 배우되 외국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의 구조 혹은 말 그 자체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모으는 방법과 말이 이루어진 방법을 배웠다. 그 다음에 학생은 말을 사용하는 방법과 자기의 용어를 정의 내리는 방법과 정확하게 진술하는 방법과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과 어떤 논지의 허점을 찾아내는 방법 (학생 자신의 논지든 혹은 다른 사람의 논지든)을 배웠다. 변증학은 곧 논리와 반박을 포함했다. 세 번째로 학생은 말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결국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우아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과정이 끝난 뒤에 그는 자기 스승이나 혹은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 논문을 작성하여 교수진의 비평에 대응하여 자기를 방어하는 것을 배워야했다. 이때쯤 되면 그는 글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단에서 큰소리로 지적으로 말하며 질문 공세를 받을 때 곧장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큰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이미 혹독한 논증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강력하며 힘든 질문들을 하곤 했다.
중세 교육 전통의 일부가 아직도 우리 학교 시스템에 남아 있거나 부활되고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문법 지식이 여전히 필요하며 나는 "그것이 반드시 다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우리는 명사, 동사 등의 어형 변화를 가르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그런 단계를 거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하나씩 하나씩 알면 된다고 배웠다. 학교의 토론 단체들이 붐을 이루었고 에세이를 써야만 했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너무 그것만을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대개 주요 과목들과 분리되어 이루어졌으며, 어떤 특별한 과목에 대해서만 그것도 비둘기장의 구멍처럼 조그만 일부분으로 취급되었고 모든 과목들에 영향을 미치는 지적 훈련 과정의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체계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문법은 특히 외국어 과목에만 속하게 되었고 에세이 쓰는 것은 영어 과목에만 한정되었다. 한편 변증은 교과 과정 전체에서 삭제되어 아무런 체계도 없이 정규학교 시간 이외에 과외 활동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학문을 배우는 것과는 거의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 교육과 중세 교육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 교육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각하고 논평하고 결론을 내리는 방법 등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체득하게 하고 있다; 반면에 중세 교육은 먼저 학문의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연마하고 배우는데 강조점을 두었으며 어떤 과목을 사용해서 이를 가르치든지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학생의 제2본성이 되기까지 가르쳤다.
물론 학문에서 어떤 종류의 과목이 있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실제의 말을 배우지 않고서는 문법이론을 배울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논쟁하거나 토론할 수 없다. 중세의 토론 주제는 대개 신학이나 혹은 고대의 윤리와 역사였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이런 주제들이 너무 닳고닳아 - 특히 중세 말에는 더욱 심각했음 - 학자들의 터무니없는 논증이나 논지 등이 밀톤과 같은 사람을 부추겨서 심지어 오늘날에까지도 즐거움을 주는 글을 쓰게 했다. 이런 주제들이 현대 학생들의 에세이 쓰기 주제보다 더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휴가의 여러 날 중 하루를 지겹게 여기게 되었고 그 결과 나머지 날들도 다 지겹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상 교육의 즐거움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토론 주제의 목표와 목적을 이제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늘 위의 천사들
브레인즈 신용회사 즉 두뇌 신용회사의 입심 좋은 한 연사는 중세의 경우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장이 춤을 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사실 그것이 "믿음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토론 시합이었고 그 주제는 천사들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천사들이 사람과 같이 물질적 존재였다면 과연 그들이 어떤 공간을 차지했을까? 내가 믿기로는, 대개 사람들이 옳다고 판단한 대답은 천사들은 순수한 지적 존재로 물질적 요소는 없되 제한적이어서 공간상의 어떤 위치를 가질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이며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이 바늘 끝과 같은 어떤 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면 생각 그 자체가 거기에 있으므로 어떤 점에서 생각은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거기에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바늘구멍과 같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지의 합당한 주제는 공간상에서의 위치와 공간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피나 거리간의 구분인 것이다. 이 논지를 논하는 주제는 천사의 본질이며 (물론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사실 주제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이 논지에서 얻어내려는 실질적인 교훈은 당신이 "거기에"라는 단어를 "거기에 위치해 있냐?" 혹은 "거기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냐?" 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비과학적으로 느슨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세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려는 열정을 보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조소했다. 그러나 책이나 강단에서 애매모호하며 주제를 흐리게 만드는 함축적인 말들을 담은 논쟁거리 표현들이 뻔뻔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속에서 모든 독자나 청취자가 자기의 교육을 통해 철저히 무장되어 그들에게 "분별하라"고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무장해제
이처럼 갑옷이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전혀 무장하지 않는 채 학교 밖으로 나가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읽을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인쇄되어 나온 말들의 손아귀에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맡기고 있다. 영화와 라디오 등의 발명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들의 폭격에서 그들을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실제로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들을 물리치거나 세력을 약하게 하거나 혹은 되받아 치는 것을 알지 못한다. 1940년에 우리는 군사들에게 단지 총만을 주고 무장한 탱크들과 싸우라고 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젊은 남녀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겉핥기 식으로 가르쳐주고 세상에 나가서 대중매체의 공격에 대응하여 싸우라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 지금 모든 교실에서 모든 민족들이 웅변가의 기교에 빠져 최면에 걸렸는데도 우리는 놀랄 만큼 뻔뻔스럽다. 우리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늘 입으로만 말하고 가끔씩 돈을 기부하기도 하며 학교를 떠나는 일을 자꾸 늦추고 크고 더 좋은 학교를 지으려 하여 교사들을 학교의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에도 혹사시키고 있다. 그런데 내가 믿기로는 이런 모든 노력이 대개 다 실패로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육의 도구들을 잃어 버렸고 그 대신에 조금씩 임기웅변 식 누더기질로 교육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물론 중세로 되돌아 갈 수 없다.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우리에게 익숙한 외침이다. 과연 우리가 되돌아 갈 수 없는가? 아니면 돌아갈 수 있는가? 분별하기 바란다. 나는 위의 명제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정의 내리기 원한다. "돌아간다"는 말은 시간상으로 뒤로 간다는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수정한다는 것인가? 우선 첫 번째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두 번째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일 행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세기가 결코 14세기도 아니며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말한 "중세"가 문맥상에서 단지 어떤 교육 이론을 보여주는 구절로 이해된다면 우리가 이미 돌아갔던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며 물론 여기에도 조금 수정할 것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정할 것이 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연극들을 기록한 것 같이 그의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지, 결코 연극 진보 과정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 여겨져서 추앙을 받는 키버와 가릭의 현대판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이 일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해 보자. 또 우리가 교육 권세를 잡은 모든 단체나 인물 등을 싹 쓸어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년 소녀들을 예비하여 조그만 학교로 들이고 실험적으로 그들에게 앞으로 맞게 될 지적 갈등을 이겨 나가게 교육시켜 보자.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유순한 부모들을 허락하고, 트리비움의 목적과 교육방법들을 잘 알고 있는 교사들로 학교를 채우고, 학생들을 적당한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건물과 교사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또한 시험 위원회가 우리가 키우는 학생들을 입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자. 이처럼 예비한 후에 우리는 수정된 현대판 트리비움이라는 교과과정을 시험하고 과연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살펴 보려한다.
먼저 학생들의 연령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이들을 색다른 차원에서 교육시키려 한다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고쳐서 다시 새로이 배울 것이 없는 상태가 좋을 것이다. 또한 좋은 것은 일찍 배울수록 좋은 것이다. 트리비움은 그 성격상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교육을 위한 예비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택하되 오직 그들이 읽고, 쓰고, 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만 요구할 것이다.
세 연령층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내 견해는 정통 견해도 아니며 어떤 면에서 개화된 견해도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내 자신을 살려보건대 (사실 나야말로 내가 가장 잘 아는 아이이며 나야말로 내 속에서부터 정말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나는 아이들의 성장에 세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단계를 좀 거칠긴 하지만 앵무새, 까불이, 시인의 세 단계로 부르고자 하는데 이 시인의 단계는 대개 사춘기가 시작되는 점이라 보면 되겠다.
앵무새 단계는 암기하는 것이 아주 쉬우며 대개 즐거운 단계이다. 반면에 추론하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대개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쉽게 사물의 형태나 모습을 외우고, 자동차 번호판을 암기하며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긴 단어나 리듬 등을 중얼거리고 외치며 여러 가지를 모은다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바로 그 뒤에 오는 까불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논쟁하고, 대꾸하며, 자기보다 윗사람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 하고, 수수께끼를 잘 해석하곤 한다. 또한 남에게 방해를 주는 정도가 매우 심한데 대개 이 단계는 중학교 2학년 즈음에 수그러든다. 시인의 단계는 대개 다루기 어려운 나이로 더 잘려져 있다. 이 때에 학생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나타내려 하고 남에게 오해받았다고 느끼며 불안해하며 독립하려 하고, 행운과 함께 좋은 지도가 뒷받침되면 창조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종합하려 하며 어떤 것을 알고자 노력하며 어떤 한가지를 다른 것보다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트리비움의 구성 그 자체는 이런 세 가지 나이 그룹에 그대로 적용된다: 문법은 앵무새 단계에서, 변증은 까불이 단계에서, 수사학은 시인의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제 먼저 문법부터 시작해 보자. 사실 문법은 특히 어떤 특정 언어의 문법을 의미하는데 이 언어는 굴절언어 이어야 한다. 비굴절 언어의 문법구조는 너무 분석적이어서 변증과정을 거치지 않는 학생이 다루기는 너무 어렵다. 또한 굴절 언어는 비굴절 언어를 해석할 수 있지만 비굴절 언어는 굴절 언어를 해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즉각적으로 교육을 위한 최상의 기초가 라틴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라틴어가 전통적 언어이고 중세 언어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에 대한 초보지식만 있어도 다른 어떤 과목을 배울 때 필요한 노력과 수고를 50%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라틴어는 모든 로만스 언어와 튜톤 언어의 어휘와 구조에 핵심이 되며 동시에 모든 과학 분야의 기술 어휘와 지중해 문명 문학 및 이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핵심이 된다. 살아있는 말을 공부해야 한다는 학자적 관점으로 인하여 학생들에게서 라틴어의 이런 장점들을 빼앗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러시아말을 선택해도 되는데 러시아말은 라틴어보다 더 원시적이다. 물론 러시아말은 다른 슬라브족들의 방언들과 함께 유익하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라틴어를 좋아한다. 이제 여러분 중의 고전파들을 즐겁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일반 학생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신고전주의 시대의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듯한, 아주 교묘하고 인위적인 형태의 웅변이나 구절 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 현명한 일도 아니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려 한다. 물론 이에 대해 고전파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라틴어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다시 말해 굴절 언어가 이 놀라운 세상에서 그리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하는 때 즉 "아모, 아마스, 아맛"하고 흥얼거리는 것이 "이니 미니 마이니 모"하고 흥얼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좋다는 것이다.
이런 나이에 우리는 물론 라틴 문법 이외의 다른 것들도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보고 기억하는 것이 아주 활발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현대 외국어를 배우려면 이 때 곧 얼굴과 생각의 근육이 이상한 억양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라틴어 문법과 함께 프랑스어나 독일어 회화를 함께 연습하는 것도 좋다.
기억력을 이용하라
영어의 구절과 산문은 쉽게 외울 수 있으며 학생의 기억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 즉 고대 신화, 유럽의 전설 등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간다. 나는 고전적인 이야기나 고대 문학 작품을 문법 기교를 연습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속할 필요가 없는 중세 교육의 잘못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어로 즐기고 기억하면 되고 그 후에 그들의 기원 등을 살펴보면 된다. 크게 암송하는 것은 늘 연습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나 함께 코러스로 하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변론과 수사학에 대한 기초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입문은 시간과 사건과 일화와 인물 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학생이 나중에 배울 역사 지식에 사용할 수 있는 연도 등을 쉽게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서 실로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어떤 연대나 연도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국 왕들의 연대기 등이 그 당시 의복과 건축과 기타 다른 일상용품 등과 함께 제시되고 그런 것들을 외움으로써 그 당시 연도만을 대도 그 시대를 그림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지리 역시 여러 사실과 지도와 지형적 특징과 관습, 의복, 식물, 동물 등의 자료와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몇몇 나라의 수도와 강과 산 바다 등을 외우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 또한 우표를 수집하는 것도 권장하고 싶다.
앵무새 단계에서 과학은 저절로 이루어지며 특히 무엇인가를 수집하면서 샘플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고 하는 것을 통해 쉽게 이루어진다. 대개 "자연 역사" 혹은 "자연 철학"이라는 자체가 과학인 것이다. 이 나이 또래에서는 사물의 이름과 특성 등을 아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운 것이며, 마귀의 수레를 끄는 말을 보고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비록 모습은 그래도 그 말이 침을 쏘지는 않음을 확신시켜주며, 카시오피아와 플레이아데스 별자리를 구분하며,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고 박쥐는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등이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주며, 독사와 독사가 아닌 뱀을 구분하고 독버섯과 독이 없는 버섯 등을 구분하는 것 또한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수학 입문은 구구단 표와 함께 시작되는데 사실 구구단을 이때 외우지 않으면 나중에는 즐겁게 외울 수 없다. 또한 이 때에는 기하학적 형태나 숫자를 모으는 것 등도 배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연히 간단한 덧셈에 이르게 하고 학생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면 그 때까지 성취한 모든 재주는 좋은 것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제 곧 보여 줄 이유들 때문에 이보다 더 어려운 수학 과정은 추후에 배우는 것으로 연기되어야 할 것이다.
(라틴어 공부를 빼고는) 지금까지의 교과과정이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마도 그 차이는 교사들의 태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교사들은 이 모든 것을 개별 과목으로 보지 말고 트리비움의 다음 단계를 위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재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외워서 기억에 넣어야 할 모든 것을, 그것들이 지성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바로 이 시기에 외워서 기억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판 교육의 경향은 너무 어릴 때에 아이들의 생각 속에 합리적인 설명을 집어넣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성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기들이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이런 일들이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거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거나 다어휘 소리를 내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과학: 여왕
이것은 신학 입문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이것 역시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 이유는 신학이야말로 과학의 여왕으로 이것이 없이는 전체 교육과정이 최종적인 합성 과정을 잃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학생들의 교육을 합당한 목표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는 덜 중요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교육의 도구들이 강화될 무렵에 다다르게 되면 학생이 스스로 신학을 다루게 되고 아마도 그렇게 하려고 주장하며 그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문제는 이유 있게 다루기 위하여 늘 준비된 상태로 지니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입문/문법을 배우는 나이에 학생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잘 알아야 하며 다시 말해 사람의 창조, 타락, 구속 등의 이야기를 열거한 신구약 성경과 신조, 주기도문, 십계명 등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정말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수준으로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익숙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어떤 나이에 트리비움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할 지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다. 학생이 민첩함을 보이고 계속해서 논쟁을 하고자 할 때 옮기면 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중요한 기능이 관찰과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중요한 기능이 광범위한 판단력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라틴어 문법이 기타 다른 모든 재료의 핵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단계에서는 형식적 논리가 핵심사항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트리비움 교과 과정은 현대 표준과 크게 다르다. 형식적 논리에 대한 나쁜 평판은 전적으로 옳지 않으며 사실 이것을 무시한 결과 현대 지성인에게서 늘 볼 수 있는 현상, 즉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형식적 논리를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증명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공통적인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통적인 전제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설령 공통적인 전제들이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A는 B다"라는 모든 삼단 논법이 다른 형태의 가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라는 것은 정확하게 논쟁하는 기술로 "A는 B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A의 추론적 성격에 의해 무효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 참으로 오늘날 형식적 논리의 실제적 가치는 어떤 긍정적인 결론을 확립하는데 있다기보다는 유효하지 못한 추론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알리는데 있다 할 것이다.
변증과의 관계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재료들을 신속히 점검하고 과연 이것이 변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려보아야 한다. 언어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어휘와 어형론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문장론과 분석론 즉 말할 때의 논리적 구성요소와 언어 발달 즉 우리가 사상을 전하려 할 때 어떻게 우리의 말을 정리하는가에 대한 것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낭독은 에세이와 논리와 비평 등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에서부터 시작되며 학생은 이런 종류의 것들을 쓰기 위해 손을 놀리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지 많은 수업이 변론의 형태를 띄게 될 것이며 개인적으로 혹은 그룹으로 낭송하는 일 대신에 연극을 하되 특별히 논지가 연극의 형태로 되어 있는 연극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수학 - 대수, 기하 및 좀 더 차원 높은 연산학 등이 이제 교과과정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되 개별적인 과목이 아니라 논리의 하부 과정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수학은 이것을 수나 계량등에 적용할 때에 삼단 논법 법칙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어둠에 가려진 신비나 혹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특별한 계시 등이 아닌 것으로 가르쳐야 하며 또한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주제로 가르쳐서는 결코 안 된다.
역사는 신학 입문에서 나온 간단한 윤리체계의 도움을 받아 논의에 필요한 합당한 재료를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 정치가의 행동은 옳은가? 그런 법의 제정이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런 형태의 정부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헌법역사개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 주제는 사실 나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논증하거나 변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신학 그 자체도 행동과 윤리 등에 대해 논할 재료를 제공하므로 간단한 교리 신학(즉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이성적 구조)을 통해 그 내용을 확장시켜야 하며, 교리와 윤리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윤리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 즉 결의론이라 할 수 있는 것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지리학이나 과학 등도 이와 마찬가지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무엇보다도 우리는 학생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레슬리 폴이 지은 「산울타리」라는 책에는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자기들의 도시에 내린 아주 이상한 비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여러 소년이 논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참으로 이상해서 그 도시의 주도로의 반에만 내려 그쪽만 적시고 나머지 반은 적시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이 날 비가 도시 위에 혹은 도시 너머에 혹은 도시 안에 내렸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비가 되려면 도대체 물방울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등등. 이에 대한 논쟁은 그와 비슷한 문제들, 예를 들어 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 자는 것과 걷는 것, 시간을 무한히 작게 나누는 것 등등으로 아이들은 이끌고 갔다. 그 책의 그 부분은 사람의 추리 능력을 순간적으로 개발하는 것과 용어들의 정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는 이성을 향한 당연하고도 합당한 갈증 등에 대한 아주 풍성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건이 사실상 이런 것에 대한 입맛을 충족시키는 재료가 된다.
심판의 결정: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이들은 대개 나면서부터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결의론자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천부적 경향은 계속해서 개발시키고 훈련시켜야 하며 특히 어른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지적인 관계를 갖게 해야한다. 사실 신문에는 이런 것을 위한 재료가 수없이 많다. 근본 이유가 너무 난해하지 않은 법적 결정들, 누구라도 쉽게 그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이름 있는 통신 칼럼 등 아주 많이 들어있는 잘못된 추론과 얼빠진 논쟁 등.
"까불이 나이"의 비판
어디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든지 간에 우리는 훌륭한 예나 혹은 잘 이루어진 논지의 아름다움과 질서 등에 큰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흠모할 만한 것이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판 혹은 비평은 반드시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것을 통해 교사와 학생은 동시에 잘못된 것, 바르지 못한 추론, 애매 모호한 것, 적합하지 않은 것, 중복되는 것 등을 발견할 태세를 갖추고 쥐에게 달려들 듯이 이런 결함들에게 달려들어 이것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확하게 글을 쓰는 것이 유용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에세이를 쓴 뒤에 그것을 25∼50% 줄이는 연습 등을 수행하게 된다.
까불이 나이에 속한 어린아이들에게 어른들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변증을 하라고 권면하게 되면 그 아이들이 너무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귀찮은 아이들이 될 것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 나이의 어린아이들은 그냥 두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논쟁하려 하는 것을 잘 살려 좋은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런 본능을 모래바닥에 던져버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면 집에서는 덜 눈에 거슬릴 것이다. 어쨌든지 아이들은 봐주면 되는 것이지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건전한 원리를 저버린 어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단계에서의 교육 과정 내용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과목들은 재료를 제공하지만 이것은 제분소 기계에서 처리해야 할 제분용 곡식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도서관과 참고서적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한 어떤 자료들이 권위가 있고 어떤 것을 권위가 없는가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상력
이 단계의 끝 부분에 다다르면 학생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며 자기들이 훈련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소화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까불이 나이에 잠복되어 있는 상상력은 그들을 다시 일깨워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의심해 보게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시인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제 수사학을 공부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식 창고의 문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배웠던 것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될 것이고 무미건조하게 분석한 것들을 모아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얻는 통찰력이 모든 발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들은 곧 공리가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사학 공부
수사학 공부에 대한 교과 과정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있어야만 이 일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다시 한번 감상하는 일이 파괴적인 비평을 앞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예리하게 잘 다듬어져서 깨끗하게 자르며 양을 살펴볼 수 있는 도구들과 함께 앞으로 전진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도구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바르게 제대로 익힌 학생이라면 그 도구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각각의 학생이 한 두 과목은 정말로 잘하고 다른 부수 과목을 들음으로써 마음을 넓혀서 모든 지식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여러 과목을 분리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변증에서는 모든 종류의 학문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을 가르쳤지만 이제 수사학에서 모든 지식이 결국 하나임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이것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여왕인 과학인의 역할이다. 학생이 신학을 공부했든지 공부하지 않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최소한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려는 아이들이 반드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반대로 수학이나 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임무를 수행한 라틴어 문법은 현대어를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이 듣지 않아도 된다. 또한 수학을 사용하거나 관심이 아예 없는 학생들도 이 시점에서 그만두게 해도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은 다 뒤로 물러가게 해도 되며, 훈련받은 지성을 예비시켜 학생이 트리비움을 다 마쳤을 때에 스스로 완전히 해결해야 하는 과목들을 전공하게 해야 한다. 트리비움의 최종 과정 즉 논문의 준비와 발표는 어떤 특정한 형태로 회복되어야 하며 아마도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에 치르는 최종 시험으로 대치하면 좋을 것이다.
수사학의 범위는 학생이 16세에 이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대학에 들어갈 것인가에 따라 따르게 된다. 대개 수사학을 14세 정도에 들어야 하므로 우수한 학생들은 9세에서 11세에 문법을 배우고 12세에서 14세까지 변증을 배우고 나머지 2년은 수사학에 전념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수사학은 전문화되고 직업화된 것으로서 학생이 곧장 실질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범주의 학생들은 예비학교에서 변증 수업을 끝내고 공립학교에서 첫 2년 동안 수사학을 택한다. 16세에 그는 대학에서 공부할 과목들을 접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그의 교육은 중세의 콰드리비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16세에 정규교육을 끝내는 학생들은 트리비움만을 택하고 학자가 되려는 학생들은 트리비움과 콰드리비움을 둘 다 택함을 의미한다.
16세에 대학을 보내도 되는가?
그렇다면 트리비움만으로도 평생 동안의 교육이 될 수 있는가?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변증 교육의 끝부분에 이르면 아이들이 어떤 특정한 과목의 상세한 지식에 관한 한 영국에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현대 방식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보다 떨어지게 보일 것이다. 그
2009-05-08 17:22:38 | 관리자
요즘 교회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록 밴드 없는 교회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과연 밴드가 예배에 필요할까요? 말씀이 없으니 이제는 교회에 워십댄스, 록 음악, 각종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옥성호 형제의 찬양에 대한 고민을 다룬 글입니다. 크리스천들이, 특히 자녀들을 둔 크리스천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른 예배가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독자와 독자의 아이들을 위해 이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찬양에 대한 고민(부흥과 개역사 사이트에서 어는 분이 보내 줌) *****
최근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회장이신 김명혁 목사님께서는 한 강연회에서 한국 교회를 좀 먹는 세 가지 병폐를 지적하시면서 그 중의 한 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먼저 김 목사는 “영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라며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는 것은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라고 꼬집었다.http://newspower.co.kr/sub_read.html?uid=11565§ion=sc4§ion2=
저는 며칠 전 갓피플에서 ‘왕의 기도’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손기철 장로님의 온누리 교회 월요 치유 집회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그 집회 내용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각설하고 그 집회에서 제가 두드러지게 느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음악을 통한 교묘한 감정적 흥분 상태의 조장이었습니다. 과거의 각종 부흥회가 보다 시끄러운 음악을 통해 참석자의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치중했다면 손 장로님의 집회는 한 마디로 ‘발라드’를 이용한 무드 조성에 힘을 쓴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그 분이 소위 말하는 “입신 또는 서 있는 사람 괜히 뒤로 넘어뜨리기....영어로는 slain by the spirit”를 할 때 자주 쓰는 구호는 “더, 더, 더, 더, 터어치~~” 입니다. 이 구호 역시 촌스러운 부흥사들이 목소리를 변조해 무식하게 고함지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부드럽고 세련되기만 합니다. 손 장로님의 이런 ‘괜히 넘어뜨리기’에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가 바로 무대에 도열해 백 뮤직을 부르는 젊은 여성분들입니다. 이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스펠 발라드를 쉬지 않고 부릅니다. 이들이 없는 집회 현장...글쎄요, 과연 몇 명이나 괜히 뒤로 넘어질지 모르겠습니다.저는 얼마 전 10여 년 동안 찬양 사역에 헌신했던 한 형제와의 교제를 통해서 ‘디사이플즈’라는 그룹과 그 그룹의 리더인 천관웅 목사님이라는 분이 얼마나 특히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 목사님은 최근 New Sound church라는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천 목사님의 ‘새로운 소리 교회’는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내용으로 채운 홈페이지를 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홈페이지에서 가장 최근 예배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약 2시간 반에 육박하는 주일 예배는 거의 대부분이 음악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의 구성은 적절한 발라드와 락이 혼재된.....한 마디로 잘 조화된 한편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천 목사님의 주장 그대로...Radical Worship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오늘날 청소년들은 음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이제 음악과 이미지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라고 말하고 진리를 ‘알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분명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힘든 가르침대신 보다 쉬운 ‘노래 운동’으로 그 방향을 하루가 다르게 더 급진적으로 전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소요되는 긴 시간을 참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래만 좀 말빨 확실한 사람 한 두 명 무대 위에 세우고 확실하게 불러 제끼면 바로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그 힘든 길을 가겠습니까? 어쩌면 예수님도 제자들 데리고 어려운 비유들 얘기하시는 대신 매일 음악 집회를 했으면 그들이 훨씬 더 빨리 변화되었을지도 모르지요.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지금 이 중고등학생들, 나아가 대학생들을 포기하는 순간....여기서 제가 말하는 ‘포기’란 말씀보다는 음악으로 그들을 감동시키는데 승부를 걸겠다는 모든 시도를 말합니다.....우리 교회의 10년 후는 더 이상 ‘의미’에 의한 메시지가 아닌 ‘멜로디’에 의한 메시지가 지배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고 깨달으라는 성경 말씀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교회들이 기독교인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화’, 교회의 ‘열린 음악회화’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호소하고 싶습니다. 제발 노래 못하고 목소리 별로 좋지 않는 목회자들이라도 함께 힘을 뭉쳐서 이 노래 운동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아니 드럼치고 난리 법석을 떨면 그 현장을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기막힌 코메디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일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주 아주 어릴 때 지금은 사라진 TBC라는 방송국에서 “쑈쑈쑈”라는 프로를 방영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처음 가수와 그 가수 뒤에 서 있는 여러 명의 백 뮤지션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가수가 빛나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받쳐주는지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웬만한 교회만 가면 이런 “쇼쇼쑈”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예배’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예배, 역동적인 예배, 영감이 넘치는 예배’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서 말입니다. 저는 전교인의 ‘노찿사화’와 전교회의 ‘열린 음악회화’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 천 목사님의 New Sound Church으 태동은 하나의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만약에 이 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급속하게 성장한다면???조만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Ultra Sound ChurchMega Sound ChurchNew Sound Community ChurchReal Sound ChurchThe Church of Beat and Sound판소리 장로 교회 등등....그리고 그 중 어떤 교회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할지도 모르지요.“우리는 찬양으로 설교하고 찬양으로 기도합니다. 찬양으로 시작해 찬양으로 끝나는 천상의 예배가 있는 곳, 내 영혼이 천상을 뛰놀도록 예배드리는 곳...당신이 꿈꿔온 바로 그 예배가 있는 곳이 바로 XXX 교회입니다.참고로, 우리 교회는 프랜차이즈로 운영될 형제 자매 교회를 모집합니다. 교회 이름을 XXX 교회로 바꾸고 가맹비와 매월 로얄티를 내시면 전문적으로 훈련된 찬양팀이 투입되어 한 달 안에 교인 수를 30% 이상 증가시켜 드립니다."2008년 5월의 한국 교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09-05-08 17:20:26 | 관리자
음악에 부쳐
글·김희섭_동국대 일산병원 소아과. 서울제일침례교회. E-mail:kimhesp@yahoo.co.kr
최근 어떤 가수가 몸매를 자랑하며 노래를 한다고 하여 선정성 논란이 있었다. 원래 음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것으로 신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지만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음악을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바하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음악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
흔히들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하 이후의 음악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데 필자는 특히 바하가 영을 움직이는 수단으로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어느 음악가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을 한다.
필자는 20년 전쯤에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샀던 적이 있었다. 파블로 카잘스는 자신이 이 곡을 악보점에서 발견한 후 수년간 연습을 하고 발표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연주는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최고의 연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음반을 산 후 며칠간 듣지 않다가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일어나 우연히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이 음악을 듣는 순간 이 우주의 신비함과 역동성에 대한 영혼의 깊은 느낌을 바하는 어쩌면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며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박봉에 오디오도 집에 없을 때) 차를 몰고 저녁 늦게 야외에 나가 별을 보며 이 무반주 조곡을 듣곤 하였다.
바하의 음악은 현대와 같이 악기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시대의 곡임에도 내적인 영혼의 표현력에서는 어느 음악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브란덴부르그 협주곡, 하프시코드 협주곡에서의 인간이 가지는 내면의 힘은 어쩌면 더 이상의 악기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이다. 실제 무반주 첼로조곡과 무반주 바이올린 곡은 한 악기로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악기 종류와 수가 많아지고 기능이 향상이 되었어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의 상태이다(잠4:23). 따라서 영에 호소하는 음악을 작곡한 바하가 아직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베토벤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한 작곡가이다. 난청과 가난 그리고 사회적 냉대를 인간의 의지로 극복한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어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운명 교향곡은 바로 그런 면을 나타내주는 베토벤의 대표적 음악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그런 반면 교향곡 6번은 인간의 내면적 평화를 찾는, 즉 괴로운 이 세상에서 안식과 평안을 구하는 음악이다. 말년의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작곡인 현악 사중주에서 그의 내적 편지를 썼고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추구하기까지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베토벤을 나타내는 결정적 음악은 9번 교향곡 합창의 3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토벤이 생각하는) 천국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다다르고 싶고, 얻고 싶은 그 어떤 곳을 나타내주고 있다. 아마도 베토벤의 말년의 모습을 여기서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4악장에서는 인류애를 표현했는데 그가 사용한 시는 인본주의 시인 쉴레의 시로서 도입부는 앞 악장들에서와 달리 좀 더 기쁨의 노래를 하자고 하면서 합창이 시작된다.
바하가 영에 호소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다면 베토벤은 인간의 혼을 울리는 곡을 만들었다. 바하의 음악은 별을 보면서 들을 수 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그러기에는 영의 깊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두 작곡가 모두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바하에게는 영의 고향, 베토벤에게는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과 평화)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요, 또 우리 모두가 바라보아야 할 본향은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신약의 예수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바라보았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히11:14).
두 위대한 작곡가는 그 본향을 바랬으나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인본주의 시각으로 접근을 하여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바하와 베토벤에게 인간의 원초적 문제를 다루는 수단은 음악이었다. 비단 이들과 같은 음악의 거성들뿐 아니라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나름대로 영적인 감흥을 얻어왔기 때문에 음악이 꾸준히 사랑을 받고 또 음악 자체가 하나의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게도 되는 것이리라.
이후 음악은 그 수준이 더 내려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락을 하고 만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의미를 붙여 낭만주의라고 부르게 된다. 슈만, 쇼팽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 상류사회의 살롱문화에 의해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도 나온다. 이때쯤 되어서는 더 이상 영과 혼에 호소하는 음악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만다.
20세기에 와서는 재즈가 나오고 급기야는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대중가수가 나오며 우리의 육에 직접 호소하는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갖가지 락 음악이 나오게 된다. 현재에는 이것에 더해 자기 몸을 사용한 음악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고 있다. 단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것이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음악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음악을 영에서 혼 그리고 육으로 끌어내려 사람이 더 이상 영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작곡가만 그러한가? 필자는 10여 년 전에 요요마가 연주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 판을 사서 연주를 들어보았다. 듣는 순간 어떻게 이 곡을 감각에만 호소하게 연주할 수 있을까 하며 너무 실망을 한 나머지 언젠가 요요마를 만나면 판을 산 돈을 물어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중에 뉴에이지 음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바로 요요마가 뉴에이지 음악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필자는 실제 그가 그렇게 불리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뉴에이져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비단 요요마뿐 아니라 현재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뉴에이져이기 때문에 필자는 1980년 전의 연주가의 음악을 주로 듣는다.
그러면 연주자만 그러한가? 필자는 약 25년 전에 선배로부터 매우 싼 가격에 구입한 오디오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앰프는 영국제 쿼드이고 스피커는 같은 영국제 탄노이다. 기본적으로 현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음질이다. 앰프가 오래되어 수리를 자주 하게 되는데 수리할 때마다 전문가에게 신형 오디오는 어떠한지 물어보면 신형은 음이 강하고 현대적이나 깊은 맛이 없고 쉽게 피곤해지니 바꾸지 말라는 권유를 받는다.
최근의 오디오는 주로 외적이고 감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음반도 LP에서 CD, 그리고 요즈음은 MP3 등 모두 디지털로 옮아간 지가 오래된다. 그러나 음반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옮아가면서 그 질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 음이 좋은 음반은 1960년대 것이 많다. 필자는 주로 LP를 듣는데 인간적인 따사로운 맛은 역시 아날로그에 있다고 느껴진다. 언젠가는 진공관 앰프를 사용하고 싶으나 시간과 자금이 지금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코앞에 둔 마지막(digital)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탄도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자마저 미혹케 하려고 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보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 혼, 육과 함께 음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한 주신 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도 함께 주셨다.
음악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여야 할까 하는 결정도 우리 각자의 몫이다. 몸을 사용하여 노래하는 가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2009-05-08 17:19:4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