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 성경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 그래요 !"하고 호기심을 보이고 본인도 정보를 알아본다고 인터넷을 검색해봅니다.정성권 형제님도 언급하셨듯이 이내 "이거 이상한 성경인 것같은데 ?"하고 바로 전화가 옵니다. (저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로 옮기면서 겪었던 저를 보는 부담스런 시선들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 아는 범위내에서 설명하고 선입견을 버리고 킹제임스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하며 자료도 드립니다.하지만 기대보다는 모자라서 솔직히 낙담할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갖게되는 세상적 시각/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저 또한, 킹제임스를 너무 세상지식같이 전달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됩니다.
그런데 왜 옳은 말씀을 읽으라고 전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를까요 ?믿음의 방향과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맹신하시는 분과 방향은 잘못됐지만 그쪽으로의 옅은 믿음을 가지신 분은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후자는 대화라도 좀 되지요....물리적 현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는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으로 움직이려고 하고 정지상태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에 맞는 일정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빠른 속도를 가지고 그 방향으로 급속히 성장하시는 분도 있고 느린 속도를 가지신 분도 있으며 반면에 거의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시는 분들은 점점 더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시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가시는 분들은 상당한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정지상태를 거쳐 "돌이키게" 됩니다.이런 분들에게 킹제임스 소개를 처음할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돌이키도록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올까요 ? 말씀과 주님의 도우심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알려주는 메신저에 불과한 아무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Word는 말씀이고 World는 word에 l이 추가된 것이라 하며 여기서 l은 lie 거짓말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말씀과 세상은 절대로 같이 공존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할때에 오해를 당하거나 세상이 우리의 열심/노력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의 능력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희망적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5 13:12:37 | 김학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온전히 보존된 성경을 접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0-02-25 07:57:33 | 김대우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창 3:18)
->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셔서 그분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셨습니다(요 19:2).
주께서 이 날 지면으로부터 나를 쫓아내셨사온즉... (창 4:14)
->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셔서 그분의 발은 지면에서 떨어져 공중에 달렸습니다(요 3:14, 행 5:30).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니라(신 21:23).
->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셔서 그분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갈 3:13).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은 벌거벗으시고(요 19:23,24),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옷으로 주셨습니다(롬 13:14).
이는 너희 손이 피로, 너희 손가락이 불법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며(사 59:3)
-> 우리 손이 행한 죄 때문에, 그분의 손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셨고(요 20:25),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므로(롬 3:15)
-> 우리 발이 행한 죄 때문에, 그분의 발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눅 24:39).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사 59:2)
-> 이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죄가 되신 그분을 외면하셨습니다(시 22:1, 마 27:46).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2010-02-23 10:18:02 | 김문수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샬롬.
2010-02-22 19:19:05 | 관리자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형태였습니까?
유관순, 전태일 같은 열사형? 전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 유대인에게 독립을 달라!” 열사라고 부르기에는 예수님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조용히 침묵을 지켰으며,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제자들까지 맥빠지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신 것입니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는지 저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순교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상 숭배하던 동족을 책망하다 죽어간 그런 대언자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와는 정반대로 제 딴에는 ‘신성모독’이라는 구실로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따라 훗날 이루 셀 수 없는 크리스천들의 순교 행렬이 이어졌지만, 예수님 자신이 무슨 이념이나 신앙을 위해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모습을 두고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이 좀 있다 체포되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대못이 박힐 게 무서워서, 그게 두려워서 그렇게 괴로워한 거라고 믿는다면, 심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형은 전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고통스럽고 잔학한 사형 방법으로 손꼽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만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형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참하게 죽은 순교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한 이유는 그런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서로 사랑하며 기쁨만을 주고받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가 오로지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잠시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차원을 넘어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분이 죄 덩어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만 하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저주가 되고 진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늘 아버지라고만 부르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나온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인간의 감정으로 쉽사리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 22:42, 44)
그래도 결국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탈진과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기에 앞서 스스로 자기가 목숨을 내어 줬습니다. (요 10:15)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보다 유난히 빨리 숨을 거두었지만, 장사된 후 부활하셨고,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창시자가 되고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은 주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낱 고문과 사형 집행이 두려워서 예수님이 저렇게 기도한 거라고 아는 건 정말...
그나저나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형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적인 원칙대로라면 인간의 죄를 사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일단 독극물 주사나 교수대, 화형 등은 아닙니다. 유혈 공법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능지처참 정도로 오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인데 예수님이 그런 사유로 죽으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몇 차례 돌로 맞을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는 오히려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럼 참수는? 참수의 신약 성경적 의미는 믿음을 지킨 의인의 억울한 죽음에 가깝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죽음이나 계시록에 기록된 환란 성도들의 죽음 등. 이것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죽음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이거야말로 예수님 자신보다는 그 이후의 순교자적 죽음이란 의미로 남겨 둬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반면 십자가형은 채찍질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유혈 공법임과 동시에 나무에 매달린 자라는 수치와 저주의 의미(신 21:23, 갈 3:13)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높게 쳐든 불뱀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의미를 넣어 둔 것도 정말 절묘한 일치입니다. (요 3:14)
십자가형은 그 자체가 죄수의 목숨을 끊는 방법이 아닙니다. 죄수를 극도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상태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방법이란 점에서 더욱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갑자기 숨을 거두신 것 역시 십자가형 자체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이라는 논리가 틈탈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집행 방법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명절은 사형 집행은커녕 오히려 죄수를 한 명 풀어 주는 날이었고 오히려 악한 무리들부터가 명절에는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가룟 유다의 동조 덕분에 기적적으로 명절 바로 직전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부적절한 시기에 완전히 졸속으로 전시용으로 사형이 집행된 바람에, 옆의 두 들러리 강도는 십자가에 잠깐 폼으로 매달려 있다가 나중에 다리까지 꺾인 채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사형에 처하기에는 좀 뭔가 허했나 보죠?) 십자가형 집행으로 사형수가 죽기까지는 원래 며칠 정도 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형 집행을 계속할 수 없는 바로 전날 집행을 강행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의 음모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성경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8)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예수님 명령에 즉시 살아난 것처럼, 온 몸이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으신 예수님도 문자 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서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몸은 나사로와는 달리 썩지도 않았겠죠. 시체에서 갑자기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게다가 옷까지 짠하고 다시 생겼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밀어낼 수 없다던 돌문은 그냥 통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문 개방은 예수님의 무덤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명하는 전시용으로 하신 거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시면류관을 쓴 얼굴의 상처와 다른 채찍을 맞은 상처들은 다 사라졌지만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 20:27) 이 역시 참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이 당한 상처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찬송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크리스천이 두고두고 묵상하고 감동 받고 영적으로 도전 받아야 할 주제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2 15:45:10 | 김용묵
너무너무 좋아요 많이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김** 형제님 감사합니다.
2010-02-11 22:38:18 | 송재근
저는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매일성경으로 Q.T를 했었는데, 카톨릭 집안인 시댁에 갔더니 저희 시어머님은 매일미사로 Q.T를 하시더라구요 .
2010-02-10 15:34:57 | 진숙희
감사합니다 답글 잘읽었습니다
2010-02-10 11:13:48 | 김규태
답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02-10 11:12:53 | 김규태
혼자 하는 QT를 통해 성경을 자기 선에서 해석하고 잘못 이해하는 것도 큰 문제지요.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아침마다 각자 같은 범위의 성경을 묵상하고 조별로 나누는 것이 아침 일과의 시작이었는데요, 각자의 묵상을 통해 진지하고 그럴 듯한 이야기들로 남의 생각도 알고 스스로도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은 사실이지만 해석이 들어가면 문제가 커집니다. 생활영성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데요, 어떤 사물과 현상을 보고서도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과도하게) 연상시키는 것이 은사라고 생각하는 식이라서 성경과 신앙에 대한 왜곡이 많이 일어납니다. Quiet Time은 '명상' 등이 떠올라서 그리 좋은 용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2010-02-10 10:07:57 | 김재욱
188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시작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진 용어가 아니라 그들이 그 시간을 Quiet Time 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Quiet Time 이라는 용어 자체에는 말씀 묵상이나 기도와 같은 개념이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기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어떤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명상의 시간과 혼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점이 문제가 된다면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경건의 시간, 주께 헌신하는 시간, 주님과의 교제시간, 성경말씀 묵상 시간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0-02-10 09:35:13 | 김문수
궁금합니다. 늘 보고듣는 용어중에 Q.T(Quiet Time)가 말씀에 대한 명상/묵상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원래 영어적 어원을 제대로 갖고 있는건지 아니면 교회전통으로 쓰다보니 사용되온것인지요 혹시 한국사람들만이 쓰는 토속영어(콩글리쉬)는 아닌지요 검색해보면 1800년대에 누가 최초로 사용했느니등등의 정보가 보이지만 만족한 용어설명은 아닌듯합니다. 진정 올바른 역사를 가진 표현이 아니라면 많은사람들이 쓰고있고 써왔다는 이유만으로 사용되서는 안될텐데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0:3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10 08:26:54 | 김규태
너무 귀한 글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
2010-02-06 22:38:03 | 박종철
형제님 많이 답답하시죠...그 마음 이해 합니다.
아래 글은 창조과학회 사이트에서 발췌했습니다.
혹시 보셨을수도 있는 내용이지만...참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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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 관한 두 작은 간증
김무현
한국창조과학회 미주 텍사스지부장
Texas A&M 대학 교수
해양/토목 공학 박사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이사야 42:5)
2002년 12월 26일에는 과학동아 주최로 과학기술회관 대강당에서 600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창조냐 진화냐?' 강연과 토론이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그날 진화론 주제 강연은 경북대 지구과학 교육과의 양승영 교수가, 그리고 창조론 주제강연은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의 김정훈 교수가 담당하였다.
김정훈 교수는 뇌의구조와 지적설계, 중간화석부재, 화학진화 불가, 돌연변이 실체, DNA와 정보 등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로부터 창조를 주장한 반면, 양승영 교수는 창조론을 과학이 아닌 기독교 신앙으로 몰아 붙이며,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도 미흡한채, 진화는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인데 단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지 모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창조과학회 (KACR, Korean Association of Creation Research) 홈페이지 (www.kacr.or.kr)을 참조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공교육에서는 마치 진화만이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가르쳐 왔다. 이러한 진화론적 인본주의 세뇌의 영향 아래서 창조가 오히려 과학적인 눈으로도 더 설득력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크리스챤이 얼마나 될까? 이 공개적 토론회를 계기로 앞으로도 객관적 입장에서 창조와 진화를 동시에 꺼내놓고 논할 수 있는 심도있는 토론회가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창조과학 연재와 관련하여 필자의 간증과 와이즈 (Kurt Wise) 박사의 간증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박사학위를 받은후 까지도 성경 말씀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깊이 있고 윤리적인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으며, 그중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도 있다. 과연 성경이 그와 같은 경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일까? 물론 성경에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딤후3:16) 고 증거하지만,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성경구절로 증명한다는 것은 순환논리이므로 설득력이 없었다.
미국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항상 짐이 되었던 위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도전해 보기 위해 매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한 시간씩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묵상이 몇 년동안 계속되는 가운데 참으로 많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깨달음이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그때까지 막연히 품고 있었던 성경에 관한 많은 의심과 회의가 걷히고, 성경이야 말로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적 경전이 결코 아니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평범하고 필요없을 것 같은 내용 가운데에서도 심오한 진리가 숨겨져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되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역시 예언의 성취와 저자가 40명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완벽한 일관성에 있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후에도 한가지 찜찜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창세기 1-11장의 내용이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과학적 사실이라고 배운 내용들과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6일 창조와 노아홍수는 특히 그러하였다. 나 자신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창세기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에도 과학을 전공한 교우들이 말도 안된다고 우길 때에는 그냥 믿기 힘들면 상징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하라며 어물쩍 넘어가곤 하였다.
그러던 중에 창조과학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는데, 특히 헨리 모리스 박사의 책들이 그리고 ICR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www.icr.org) 과 AIG(Answers In Genesis: www.answersingenesis.org)의 여러 자료들이 정말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전까지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적 진화론으로 너무도 철저히 세뇌되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진화론이란 것이 증명할 수 있는 참과학이 아니라 추론에 불과한 유사과학임을, 그리고 실제로 진화론을 뒷받침 해주는 자료들도 별로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화석마저도 진화론의 가장 큰 장애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조나단 웰스 박사의 책 'Icons of Evolution'에서 밝혔듯이 진화론에 관한한 과학교과서 들이 얼마나 많은 허구적이고 철학적 (자연주의에 관한 맹신)인 내용들로 가득찼는지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최근들어 DNA 연구와 정보이론, 지적설계이론들을 접하며 창조와 지적설계에 대한 확신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에 관해 찜찜했던 마지막 짐이 벗어진 것이다.
이후에야 모든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확신으로 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하시며 '모세를 믿지 못한다면 나 또한 확신으로 믿지 못할것'이라고 말씀하신바 있다 (요한복음 5:46-47). 모세오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신화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만큼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것도 힘들다는 것이다.
이후로 본인은 확신을 갖고 한국창조과학회 (KACR)와 미주창조과학 선교회 (ACTS), 그리고 기독학술교육 동역회 (DEW)의 남부지부장으로서 사역하고 있다. 이와같이 귀하고 보람된 일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쁨으로 강연사역과 제반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 만물이 다 그로 말마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1:16)
와이즈(Kurt Wise) 박사는 하버드 대학에서 진화론계의 리더인 굴드(Gould) 교수 밑에서 화석학과 역사지질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연주의로 종교화된 현대과학의 패러다임과 진화론 일색인 동료들의 연구분위기 속에서도, ICR과 AIG의 연구진들과 힘을 합하여 종래의 화석학과 지질학을 창조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옥같은 연구결과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 후 프리셉트(Precept) 성경연구원과 동역하며 창세기 1-11장에 대한 심도있는 성경공부교재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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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간증하였다.
'나도 한때는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배운 후 한때 고민에 빠졌었다. 한번은 대학에 진학 하기전 만일 진화가 사실이고 초월자의 창조가 아니라면, 성경에서 그로 인해 신뢰하지 못할 부분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와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나의 성경책에서 가위로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그 작업은 며칠 밤을 세워가며 계속되었다. 며칠 후, 작업이 다 끝났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잘라낸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 남은 부분으로는 성경의 무게조차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진화론과 성경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 와이즈 박사는 진화론의 선봉인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진화론에 관련된 이론들을 배우며, 그 속에 어떠한 문제점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것들을 창조와 격변의 관점에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를 연구하였다. 그러한 과정중에 창세기의 기록이 진리라는 것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Creation Science Evangelism (www.drdino.com)의 켄트 호빈드 (Kent Hovind)박사는 홈페이지에 '진화의 확실한 증거를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250,000의 상금을 지급하겠노라'고 공개적으로 광고 하였다. 엄청난 상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상금을 타간 사람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진화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기에--.
호빈드 박사는 십여년전에는 $10,000의 상금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수년동안의 창조과학 사역, 자료연구로 그의 확신은 더욱 커져서 이제는 그 상금을 25배로 늘린 것이다. 당신은 크리스챤으로서 창조주와 창조에 대해 얼마 만큼의 확신이 있는지 한번 자문해 보기 바란다.
2010-02-06 17:42:14 | 박준화
맞습니다. 그동안 우겼던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따르게 되지요.
하지만 논리적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 돌아와서 큰 일을 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아직 생각이 굳어지기 전인 아이들에게는 창조론을 심어주고, 최소한 두 가지를 다 들어보고 생각할 기회를 줘야겠지요.
2010-02-06 17:21:17 | 김재욱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진화론이 진리이거나 그 모든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믿고 싶어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화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고 그들의 선택입니다.
그들은 진화론을 믿으면서, 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믿으면 안된다는 겁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일일이 다 반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친절하게 자세히 설명을 해 줘도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믿기 마련입니다.
2010-02-06 16:29:40 | 김문수
자상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휴~ 요즘 아이들은 이런 글들을 보면 무슨 큰 발견이나 한듯..답변을 요구합니다... 무시할 수도 없고.. 제대로 반박하자니.. 자료가 넘 방대하여 시간이나 능력이 따라주질 못하네요. 그래도 애를 써봐야죠. 감사합니다^^
2010-02-06 16:25:39 | 박종철
창조론자들이 조작할 이유가 많다고 하는군요. 즉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를 찾을 확률이 많은 반면에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증거를 조작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고 합니다. 이건 참 어리석은 이야기네요. 진짜 창조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별도의 과학이 필요 없습니다. 창조나 하나님의 존재나 믿는 것이지 입증하는 게 아니니까요. 진화론이 있기 때문에 속는 영혼들을 위해 과학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고 싶고 창조를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런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기가 안 보여도 있다는 것을 알듯이 하나님이 계심을 압니다. 에어컨을 틀면 시원하기 때문에 찬바람이 나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코트를 껴입고 아직도 덥다는 이들을 위해 통풍구에 끈을 묶어서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과학이라는 분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한 마디로 우리에겐 편견이 생겼습니다. 입증할 수 있는 것과 입증할 수 없는 것을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 편견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에게도 편견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위 글을 쓴 사람은 창조론자들이 조작할 확률이 많다고 했는데, 실제로 거짓 조작이 드러난 것은 그들의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쪽에서 조작했다고 하는 것은 입증할 수 없다는 것뿐이지, 우리가 웬 뼈를 가지고 아담의 화석이라고 우기는 식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눈에 보여줄 수 없는 증거들은 서로 가지고 있고, 종류로는 그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진화론자들이 조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130년 동안 헤켈은 배아 그림을 조작해서 인간이나 동물이나 잉태되는 과정은 비슷하고 점차 진화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게 만들었나요? 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북경원인과 자바원인, 네브라스카인과 필트다운인을 지금은 배우지 않나요? 이런 것들이야말로 집단소송을 할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유 때문에 조작을 합니다. 온 천지에 하나님의 눈이 있으니 눈가리개를 하고 ‘하나님은 없다’고 스스로 위안하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사람도 왜 이토록 긴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동조자를 얻으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반과학자들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도 훌륭한 과학자가 있고, 좋은 업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창조론이 발을 못 붙이게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화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살아왔지만, 창조론에 대해 다룬다면 사람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겠지요. 늘 학문을 추구하고 논리적이라는 사람들이 왜 다른 의견을 들어줄 용기나 포용력이 없는 것일까요.
http://mall.godpeople.com/mall/?G=1259122867-0
이 페이지를 보십시오. 간단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전체 내용이 담긴 DVD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진화론을 원천봉쇄하는 이들의 생각 밑에 어떤 것이 깔려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창조과학회의 사역 중에는 교과서 개정위원회가 있습니다. 학회 회장인 이웅상 목사는 몇 년 전 교과서 개정에 관한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진화론도 하나의 ‘론’인데, 왜 그것만 배우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창조론을 주장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하기 이전에, 두 가지 다 배워서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만일 그런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면 창조론자들이 그토록 열심을 내지 않았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밤새워 반박을 할 수 있지만 많은 기존 자료들이 있으니 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영상자료와 책으로는 켄 햄의 책들을 추천드립니다. 이 사이트에는 스캇 휴스의 ‘진화론의 붕괴’ 전문이 수록돼 있으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 이 자유게시판에도 관련 내용들이 있습니다.
2010-02-06 15:31:55 | 김재욱
http://blog.naver.com/attltb/150045579497
최근의 진화론 연구결과에 의해 창조론의 주장을 아주 철저히 무시하고 논박하고 있는 페이지인데요.
시간이 되시면 적절한 반론이 될만한 글을 올려주시면 제게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믿음은 과학적 사고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무조건 도외시할 수도 없더군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8: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06 06:41:16 | 박종철
형제님글을 읽으니 뒤로 미뤄놓은 성경번역본문제에 다시금 경종을 울려
정신을 깨우네요.모두 이 글을 읽고 성경을 믿는지 믿음을 믿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음 좋겠습니다.너무나 절박한 마음이 생깁니다.
2010-02-04 00:07:48 | 정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