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성적인 표현들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개역이나 개역개정으로 읽을 때에는 참 민망하더군요. 주일학교에서는 그런 표현이 나오는 본문은 아예 설교본문으로 쓸 수도 없습니다. 아들들과 날마다 킹제임스성경을 읽고 있는데, 이 말씀은 TV 애정드라마나, 개역과는 달리 연령 제한없이 함께 읽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2010-02-03 13:57:29 | 김문수
너무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피터슨의 메시지는 성경이 아니지요.
샬롬.
2010-02-03 12:44:40 | 관리자
아멘. 공감합니다~
2010-02-03 11:51:10 | 김재욱
1.
성경을 전서도 아닌 일부만을 구해다 좀 읽으려고 해도, 필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고 인건비도 지금 우리 시세로 수십만원을 줘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가 박해 받는 곳에서는 마을 사람 전체가 목숨을 걸고 한데 모여 한 권뿐인 성경책을 읽으며 영적 생활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풍요 그 자체이다. 널린 게 성경책이고, 인터넷으로 위치만 입력하면 몇 초만에 원하는 성구를 바로 볼 수 있고, 단어 검색도 되고, 그것도 모자라 열몇 종류의 역본들을 줄줄이 꿰어서 한 눈에 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이 그렇게 바뀌었을진대, 지금은 성경을 두고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영적 싸움의 양상도 180도 변했다.
그렇다. 마귀는 과거에는 성경을 보는 대로 몰수하고 불태우는 식으로 공격했으나, 성경을 무식하게 없애 버리는 게 불가능해진 지금은, 숫제 가짜 짝퉁 성경들을 마구 만들어 내서 진짜 성경을 매장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는 역정보 유포라는 대단한 첩보 전략이다.
본인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나온 역본들이 내용과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돈의 창시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런 여러 성경을 모두 인정하실 리는 전무하다. 이는 기독교의 보안과 근간, 정체성이 걸린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이 읽는 성경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가짜 성경을 단호하게 버리고 진짜 성경을 손에 쥐어야만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예이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없음’ 처리되어 삭제된 구절이 없다. (마 18:11, 마 23:14, 행 8:37 등)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탄 마귀의 옛 이름이 루시퍼(사 14:12)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이름인 갈보리(눅 23:33)를 찾을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티로스, 유니콘, 용 등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구약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 하늘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유독 지옥만은 음부, 무덤, 스올, 하데스 따위로 정체를 가리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진짜 성경만이 판권이 없으며, 판권을 따내기 위해 다른 역본들과는 다른 어렵고 장황한 단어와 표현을 일부러 찾아 애쓴 흔적이 없다. 이렇듯, 진짜 성경의 특성만 열거해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들 중 좀 색다르고 어찌 보면 매우 심각한 주제를 두고 진짜 성경과 가짜 성경을 판단하고자 한다. 이제 여러분은 ‘킹 제임스 성경보다 읽기도 편하고 뜻도 정확하다는’ 소위 현대 역본(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기를 쓰고서 조장하는 표현,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혐오· 기피· 거부하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양심적인 태도와 현 시국의 심각성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의 지성과 양심을 자극하는 명확한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증거의 열매는 당신의 결단과 행동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2.
성경은 인간의 끔찍하고 추악한 죄, 그리고 인간의 가장 은밀한 면모에 대해 다룰 때, 이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상상과 자극도 일으키지 않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나 모른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창 4:1), “교접의 씨” (레 15:16), “여인들의 관례.” (창 18:11) 음란한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성 교육 시간에 다 배울 법한 단어조차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을 만드신 분이다. 그래서 성경이 성인물처럼 취급되지 않게끔,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지 않고 지극히 ‘순수하다’(시 12:6, 시 119:140)고 성경이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에 대해서까지 성경의 접근성을 고려하신 것이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눅 18:16 중간)
그렇다. 하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모름지기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고(딤후 3:15) 영적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쉽고 간결한 성경이며, 어린이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성경이다. 폭력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작 예수님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대인 어린이가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리스도의 수난> 같은 영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성경들에서는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세 구절만 해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은 그렇게 기록돼 있지 않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에게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라고 영감을 주셨지, “이브와 동침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여인의 관례에 따른 것을 멈추매”라고 말하셨지 “폐경기가 지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짐승과 함께 눕는 자”라고 했지 “짐승과 성관계를 갖는 자”라고 안 했다.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와 즐겁게 논다”(창 26:8 sport)고만 했지,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표현 안 했다.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렘 2:24)라고 말씀하셨지 “발정 나서 헐떡대는 암나귀”라고 하신 적은 없다!
이래도 성경이 뜻만 통하면 괜찮은 책인가? 성경 번역에서 동적 일치 기법이 얼마나 사탄적인 생각인지 부디 경각심을 가지기 바란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는 바이블은, 통계에 따르면 ‘주 lord’라는 단어가 71번밖에 안 나오고(킹 제임스는 8000여 번), 마치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한 번도 주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저질이다. 그런데 sex라는 단어는 199번이나 나온다. 특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행음에다 비유한 예레미야, 호세아서를 이 역본으로 보면 가히 섹스 성경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 전세계적으로 읽기 쉽고 잘 와 닿는다고 격찬을 받고 있는 <메시지> 바이블의 정체이다. (☞ 관련 링크)
NIV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알다(know)’, 개역성경도 ‘상관하다’라고 옮긴 단어를 ‘have sex with’ (창 19:5, 삿 19:22)라고 친절하게 진짜 의미를 써 놨다. 성령님의 가르침과 조명을 받으며 경건하게 묵상해야 할 성경에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나님이 정녕 성경을 그렇게 기록하셨단 말인가?
그 중 단연 압권인 예를 보이겠으니 놀라지 마시라. NIV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신약 시대가 됐는데도 아직도 할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너희를 혼동시키고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런 문제아들은 아예 자기 X을 짤라 버렸으면(emasculate) 좋겠다.” (갈 5:12)
정말이다. 직접 책이나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시길.
기가 차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결국 저런 뜻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신약 역사상 성령으로 가장 충만했을 거라고 회자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성경에 음담패설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 저게 도무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부패한 대화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엡 4:27, 29)고 권면한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지껄일 소리인가?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아들이 제발 교회에서 끊어지고(be cut off)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걸, 불온사상을 지닌 성경 번역자들이 cut을 능동으로 변개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성경 번역자가 아니라 성경 “반역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3.
성에 탐닉하고 있는 현대 역본들의 추태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그야말로 맛만 좀 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예를 든 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독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만큼 성 범죄, 성 문란,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엄금하고 정죄하는 책은 없다. 결혼한 남녀의 1:1 부부 관계 외의 모든 성적 접촉은 음행이고, 성 정체성이 문란해 지는 것도 중죄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은, 그런 죄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런 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을 혐오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정죄하고 있는 성 범죄에 대한 언급은 표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이다. 아무리 인간이 의학, 심리학으로 동성애를 합리화하려고 한들 소용없다. 하나님이 그건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롬 1:24-27) 못을 박아 버렸다면 그런 것이다. 그게 정말 맞는지는 동성애자 본인이 잘 알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성애자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동성애자’라고 중립적으로 불러 주기에도 너무나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꼭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자’라고 길고도 적나라하게 일컬으셨다. 영어로는 죄악의 온상 소돔의 이름을 딴 sodomite.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왕들은 부임할 때마다 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했지만 이런 자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그런데 구약 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 sodomite가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사라졌다. 미동(꽃미남 같은 남자), 내시, 남창 등으로 바꿔서 그냥 선천적으로 나긋나긋하고 남자 구실 못 하는 남자, 또 성매매를 하긴 해도 그렇게 변태 같은 느낌은 안 드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까와 같은 과감하던 문체는 어디로 사라졌나?
가나안 이방 종교에는 남창· 내시가 있었다고 아무리 신학자, 고고학자들이 변명하더라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동성연애자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동성연애자, 아니 남색하는 자가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1장과 더불어 성 문란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구절은 단연 고전 6:9이다. 그런데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가 언급되는 이 구절이 킹 제임스 성경만치 확실하고 단호하게 번역되어 있는 성경 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명백해서 동성애자 이외의 핑계가 틈탈 여지가 도저히 없으니, 변개된 성경들도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하지만 abuser 같은 단어도 빼고 마지못해, 아주 중립적이고 그다지 도덕적인 느낌이 없는 단어인 homosexual을 삽입한 것에 그쳤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아주 직설적이고 민망하기까지 한 토박이말로 성과 관련된 죄를 폭로하셨는데, 잘 와 닿지 않고 좀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한자어로 바꿨다는 뜻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지옥에 간 부자를 다루는 눅 16:23은 상황이 너무 명백하니까 어쩔 수 없이 hell을 인정했지만, “지옥의 문”들이 교회를 능히 이기지 못할 거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응당 음부, 하데스라는 뿌연 말로 바꿔 버린 고약한 센스이다. 지옥의 입구에는 문이 있고, 주님께서는 그 열쇠(계 1:18)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음부 권세”(마 16:18. 개역)는 도대체 뭘 뜻하는가?
그나마 NIV는 그 동성연애자에다가도 “homosexual offenders”이라고 단어를 또 바꾸어, 모든 동성애가 다 나쁘지는 않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얼마나 치떨리고 교묘한 변개인가!
고전 6:9에 역시 존재하는 effeminate, 즉, 하리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천성을 버리고 여자가 되어 버린 남자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남아나지를 못해 있다. 전부 구약의 sodomite와 마찬가지로 남창으로 단어를 변개했다.
끝으로, fornication(음행)이라는 직설적인 단어도 요즘 성경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다. fornication은 주님께서 인정하신 이혼 사유 중의 하나이다. (마 5:32, 19:9) 이 단어도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창녀짓으로 바뀌었다. (대하 21:11, 사 23:17, 겔 16:29) 창녀짓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따로 언급되어 있다. (겔 16:15) 즉,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왜 기를 쓰고 음행이란 단어를 안 쓰려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성적 부도덕함(sexual immorality)으로 바뀌었고, 어떤 데서는 그냥 sexual이라는 단어까지 빼서 의미를 훨씬 약화시켰다. 음행을 책망하는 고린도전서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이다. 그리고 롬 1:29와 갈 5:19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 가운데 간음(adultery)만 남기고 음행은 아예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음행에 대한 정죄가 희석되고 약화된 성경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바른 믿음의 선조들이 손에 쥐었던 그 성경이 결코 아니다!
4.
독자들이여, 이 모든 예가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현대 역본 번역자들은 독자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음란한 생각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추하고 역겹고 죄스러운 성 범죄의 실체를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어떠할까? 문자적으로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만치 동성애나 음행을 혐오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사람이 당신이 읽는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말을 굉장히 돌려서 번역하거나, 아예 변개· 삭제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세력의 음모이다! 어떻게 성경을 만드는 일에 마귀가 개입하겠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응당 돈이 되는 책장사이다. 지금이 성경을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성경으로 이익 챙기고, 덩달아 성경을 부패시키고 그 속에 독약을 타려는 음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AND와 OR의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선은 오로지 AND이다. 지극히 작은 말씀 하나만 부패시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하고 순수함은 깨져 버린다. 마귀는 성경의 무오성과 일관성을 깨뜨리고 성경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을 심으려고 노력 중일 뿐이지, 성경에 “너는 사탄을 숭배할지니라”란 멍청한 구절을 넣으려고 투쟁 중인 게 결코 아니다.
근래에 영어권에서는 성별·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용어만을 공식 석상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죄까지 덮어 주는 제도로 오래 전부터 변질되었다. 오늘날이 얼마나 죄로 넘쳐나는 음란한 세상인가? sodomite가 gay가 되고, drunkard가 alcoholic이 되고, fornication이 free love나 pre-mature sex로 미화되는 것 말이다. 성경은 악을 악이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자에게 화를 선포하고(사 5:20), 이런 거짓된 입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한다(잠 17:4). 그런데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경 자체가 죄를 미화하는 단어로 물갈이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런 저질 성경을 읽고서 참 성경의 저자인 성령님의 조명을 어떻게 받겠으며,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 어떻게 양성되겠는가? “읽기 쉬운 우리 시대 길거리 말투”라는 광고 문구는 그 자체가 저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란 성구로 유혹을 이겨라.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는 한낱 인간의 고대 영어가 아니라, 지극히 절제되고 연단된 하나님의 언어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언어라서 처음에 좀 생소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은 고어일 수는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은 어중이떠중이가 다 자기 권리 따지고 외치는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 기간 대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에 탄생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카톨릭을 대적하던 올곧은 왕, 그것도 리처드, 찰스 같은 이름도 아니요 성경의 인물과 이름이 일치하는 제임스라는 왕의 명령에 의해 질서 있게 번역되었다. 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저작권, 돈 같은 문제가 개입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번역자들은 TV, 인터넷처럼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매체가 없던 보수적이고 건전한 시절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원어 성경을 술술 외우고 성경의 원어는 물론 인접 국가들의 고대 언어들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수재였다. 덕과 지식을 고루 갖추었으며, 더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임을 진심으로 믿고 두려워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소설 쓰듯이 제멋대로 번역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어와 문자적 일치가 이루어지게끔 하나님의 의도를 살려 번역하였고, 심지어 부득이하게 원어와 대응이 안 되는 단어를 추가할 때는 두려워서 이탤릭체 처리를 하는 정직함까지 보였다. 한 마디로 사상이 건전하고 올발랐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쓰셔서 신구약 성경을 걸출한 영어 합본으로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미디어(책, 신문기사, 영화, TV, 게임, 인터넷 등)를 영적으로 시험하고(prove), 저자나 번역자가 무슨 믿음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이것을 만들었는지 따져 보자. 성경도 예외가 아니며, 성경이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자. 개역성경, NIV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과, 올바른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인 사람은 서로 사상이 다르고, 믿는 영이 다르다.
지구와 온 우주가 불로 소멸된 뒤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셋째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때 하늘에 적혀 있을 말씀은 도대체 어느 역본 말씀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하듯이,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음란한 성경으로부터 보호하자![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8: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03 10:30:55 | 김용묵
몇년전에 화성 탐사선의 제작은 미터법으로 하고
조종팀은 인치단위를 적용하는 오류로
화성 탐사선이 화성에 충돌한 사건도 있었지요.
미국에서 많이 쓰는 단위 마일이나 온스를 접하면
우리는 어립 잡기가 참 힘이 듬니다.
2010-02-01 14:46:11 | 허광무
과학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이야기군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말씀의 영원성이 새삼 느껴집니다.
킬로그램과 미터 등이 거슬리는 나라들이 많겠지요.
국제협약도 지키지 않고 아쉬운 사람이 환산하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미국부터...
어떤 기준이 나온다 해도 거기에는 허점이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2010-02-01 11:55:06 | 김재욱
이전에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었지요.
"금을 공기 중에 장시간 노출시킬 경우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정답은, "사라진다."였습니다.
엄중한 감시와 첨단 과학에 의해 보호받는 킬로그램 원기도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2010-01-31 23:48:17 | 김문수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31767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 폭탄이 떨어져도 어떤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이것에 대한 보안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것은 먼지조차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공기의 습도와 온도 역시 철저하게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이것은 높이와 너비가 39.17밀리미터가 되는, 끝이 둥근 원형 유리관 속에 또 다른 작은 원형 유리관 여러 개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세상과 공기도 섞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지난 120년 동안 이것이 저장실 밖으로 나온 것은 고작 3번뿐. 이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극소수로, 일반인은 그 누구도 이것에 접근할 수 없다.
* * * * *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이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의 어머니와 같다.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은 바로 이 원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질량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에 의해 정해진다. 정확하게 1킬로그램이란 게 얼마나 되는 거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인 것이다.
* * * * *
겨우 1킬로그램짜리 쇳덩어리가, 거의 반도체 공장 이상의 우주 철통 보안을 받으며 애지중지 보관되는 과학계의 최고 보물인 이유는,
이게 정확하게 1kg, 아니 1kg을 정의하는 "최종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질량은 비행기, 인터넷, 우주선을 만들어 낸 인류의 21세기 과학 지식으로도 아직 원시적인 인공 구조물에 의존하여 정의하고 있는 유일한 단위입니다.
옛날, 그러니까 18세기쯤에는 길이의 단위도 미터 원기가 최종 권위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절대불변인 기준으로, 가령 "빛이 진공에서 1/xxxxx 초 동안 진행한 거리"와 같은 식으로 수 차례 정의가 바뀌었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초의 정의도 "무슨 원자가 절대 온도 0도에서 xxxxx 번 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이런 식으로 절대불변이면서, 현대 과학 기술로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1/86400 이런 식으로 더 부정확했었습니다.
그러나 킬로그램의 정의만은 19세기에 제정된 정의를 아직까지도 업데이트하지 못했습니다.
질량은 시간, 길이와 더불어 시공간과 물질을 기술하는 한 축으로써, 과학에서 기본 중의 기본 개념입니다.
중력이라는 개념이 가미된 무게야 디지털 저울로도 측정하지만, 지구에서나 달에서나 동일한 절대 질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원시적인 양팔 저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kg 추 얹고, 1kg 추 얹고.. 마치 돈 내듯이.
* * * * *
그래서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표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일종의 수치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1킬로그램이 얼마인지는 전적으로 이 구닥다리 물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이 바로 질량이라는 건 과학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기에 딱 좋은 예다. 독일의 한 표준 과학자는 “킬로그램은 측정과학계에서 하얀 재킷에 묻어 있는 얼룩과도 같다”고 말했다.
* * * * *
세계 각국에는 이 킬로그램 원기를 정교하게 복제한 사본이 국가별로 표준 과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마다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어 복사본들의 질량을 서로 측정하여 오차가 생기지는 않았나 대조합니다.
이게 어긋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밀리그램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금이나 귀금속 거래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원기와 복사본, 또는 복사본과 복사본 사이의 오차가 점차 커지고 있고(물론 그래 봤자 마이크로그램 단위이긴 하지만) 그 원인 및 해결 방안을 과학계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짬밥을 너무 오래 먹은 구닥다리 킬로그램 원기를 궁극적으로 퇴출시킬 목적으로, kg의 새로운 정의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이 애쓰고 있습니다.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정의를 만들어 낸 국가 내지 학교, 연구소는 돈과 명예를 한몸에 거머쥐는 스타가 되겠죠. 그 방법은 절대적으로 엄밀하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게 어디서나 재연이 가능해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할 뾰족한 대안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히브리/그리스어가 쓰였고 큐빗, 므나, 바스, 드라크마 같은 길이, 화폐, 부피, 무게 등의 단위가 쓰였습니다.
그 반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고 미터법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달러나 유로 같은 화폐가 꽤 널리 통용되는 편입니다. 세계의 공용 언어라든가 단위는, 국제 정세 및 영적 동향과도 무척 큰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단위의 최종 권위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 권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는 bible believer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생각됩니다. 세계 각국에 샘플로 전달되어 있는 킬로그램 원기의 복사본은 성경의 필사본하고 정확하게 같은 개념이지요!
그 약점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딱히 대안이 없어서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우리나라 교계에다 비유하자면 개역성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변개, 삭제에 대해서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신자는,
마치 과학자라고 하면서 킬로그램 원기가 어긋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새로운 정의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과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_-)
과학자들은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에 견주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측량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절대무오한 말씀"에 맞춰 나의 마음과 행실을 교정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성경 자필 원본이나 KJV 1611년판 원본을 교황청 도서관 지하의 반도체 제조실 같은 벙커에다 kg 원기처럼 고이 짱박아 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눈으로 본 당사자의 체험보다도 더 확실하고(벧후 1:19) kg 원기보다 더 정확하고 무오한 최종 권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KJV 1611), 그 말씀의 순수성과 절대불변 보존에 대한 약속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기독교가 존재 가능하지 않겠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6:1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31 23:33:02 | 김용묵
어제는 어느 미국 목사가 적은 다음의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태평양의 나병 요양소를 방문했다.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 격리를 자청한 사람들 - 몸이 흉하게 일그러진 사람들 - 과 인사하며 나는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그 고통이란 차마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눈길을 돌리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기에 간 것은 잠시나마 그들의 병을 잊게 해 주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그들의 몸은 갈 수록 더 인간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집중하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일단 내면의 인간을 만나고 나니 그 뭉그러져 쇠해가는 몸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때 눈길을 돌리지 않기를 잘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남태평양 작은 섬 북단에 파묻혀 격리되어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나병 요양소는 내게 교회의 한 은유가 되었다.
타락의 일그러진 피해자들 - 아직도 죄의 오물에 물들어 있는 - 이 회중석을 채우고 지도자가 되고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강단에 서서 설교까지 하는 곳이 교회다. 그래서 나는 사역을 계속한다.
나의 추한 모습으로 인해 목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의인은 그분 앞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합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병같은 죄를 가진 한 인간이 가정을 이끌고 교회를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새삼 새겨봅니다. 죄로 인해 고민할 때, 그래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느낄 때 손을 놓기 전에 한 번 읽어 보려고 여기에 올립니다. 샬롬.
2010-01-26 22:00:23 | 관리자
감사합니다. 앞 뒤 문장을 더 자세하게 읽어야 하는 것을.. 앞으로도 지도해 주세요.
2010-01-24 07:05:35 | 이정순
우리는 성경 본문 내에서 충분히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룻기 3:9에 먼저 나옵니다. 그러므로 룻기 3:16을 읽으실 때, 그 앞에 있는 룻기 3:9과 함께 읽으시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그가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매 그녀가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그러므로 당신의 옷자락으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가까운 친족이니이다, 하매(룻 3:9)
And he said, Who art thou? And she answered, I am Ruth thine handmaid: spread therefore thy skirt over thine handmaid; for thou art a near kinsman.
9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을 때, 룻은 "당신은 가까운 친족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룻의 이 말은 "보아스 당신은 우리의 상속재산을 회복시킬 책임이 있는 자이고, 나는 당신의 도움으로 엘리멜렉의 상속재산을 회복하고 그의 씨가 끊어지지 않게 할 여인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16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던지는 질문과 룻의 답변도 이와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2010-01-23 22:05:28 | 김문수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새벽에 한 여인이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므로 놀라서 '너는 누구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딸은 나이가 든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룻3:10 참조).
물론 아들도 내 아들이 아니라도 나이가 적은 사람을 가리킬 때 씁니다.
이것은 히브리, 그리스, 영어 권에서 동일합니다.
(2) 나오미가 룻인 것을 알고 그녀의 상태를 물을 수 있습니다.
즉 "아직도 너는 모압 여인 룻이냐? 아니면 보아스의 아내가 될 사람이냐? 네 신분은 이제 무엇이냐?"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녀를 신부로 맞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상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2010-01-23 20:34:19 | 관리자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정말 측량할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얻은 자들입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비판과 질시로 스스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2010-01-23 18:59:05 | 김문수
저도 모두 공감합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었지요.
불가지론자처럼 끝내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실제로 해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010-01-23 14:12:02 | 김재욱
룻기 3:16절에 시어머니가 룻에게 내 딸아, 너는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이해가 잘 안돼서요. 설명 좀 해 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2: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8:34:10 | 이정순
100% 공감가는 글입니다.
이렇게 글로 보니 정말 많은 변화와 차이가 있구나 하고 새삼 느껴집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알수 있게 정리해 주시니 더욱 감사하고 정말 셀 수 없는 많은 복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확실히 이러한 교제는 많은 유익을 줍니다.
글이나 말로 소통한다는 것 (나만 알고 있지 않고 )이 힘이 됩니다.
2010-01-23 06:51:27 | 정혜미
참 은혜가 되는 글입니다.
좋은 가정을 꾸려서 경건한 씨를 많이 남기기 바랍니다. 샬롬.
2010-01-23 02:00:22 | 관리자
아멘. 자기 전에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글 읽고 갑니다. ^^
2010-01-23 01:59:56 | 김용묵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나는 내가 왜 태어났고 왜 이런 세상을 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죽는 그 과정과 고통은 인간적으로 두려울지 모르나, 죽음 그 자체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생겼습니다.죄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비관/좌절/피해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 정치인, 재벌, 강대국 헐뜯기 등 -_-;;)
이 세상이 무슨 운석 충돌이나 지구 온난화 따위로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일제도 북한도 무너뜨리지 못한 이 나라 역시 결국 죄와 욕심과 불의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문제의 본질인 죄를 볼 줄 알기 때문에, 겨우 죄가 초래한 최말단의 그 나쁜 ‘결과’만 어떻게든 척결하려 애쓰고 우왕좌왕하는 인본주의적인 사회/정치 단체, 각종 모임 등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특히, 죄를 근절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필요악’이 나쁘다고 없애자고 드는 정말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결코 동조하지 않게 됐습니다. (체벌, 사형 제도, 군 복무, 공권력 등)
귀신, 초능력, 불가사의, 이상한 공상 과학 내지 음모론 쪽 얘기를 들어도 현혹될 일이 없어졌으며, 온갖 미신적인 관행들에 관심이 싹 사라졌습니다.남이 안 알아 주고, 남처럼 안 했다간 나만 바보 되고 손해 보는 상황에서도 선행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이걸 알면, 예수만 안 믿고 착하게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됨)
우리를 창조한 절대자의 성품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그냥 기독교 경전이니까 상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구가 아니라 진짜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예수님이 겨우 입에 발린 탁상공론으로 종교놀이나 하러 이 땅에 오신 게 절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쓸 거리는 얼마든지 더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이 가치관이 딱 잡힘으로써 제가 얻은 영적, 물질적 복과 정신 건강상의 이득,그리고 그 덕분에 다른 쓸데없는 이상한 이념이나 사상, 집단, 이단 종파, 혹은 연예/오락 쪽에 심취하지 않고 사고 안 쳐서 절약된 돈과 시간은 제겐 정말 추정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매주 꼬박꼬박 교회 가는 데 드는 돈과 시간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정말 바보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3:3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1:57:06 | 김용묵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느 목사가 지은 예수님의 일대기 책만을 들고 왔다.
그분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주는 글이 있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2010년 1월 24일 미국의 고향 볼티모어에서
진실(진리)을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네 가지 영원한 교훈
악과 싸우는 무기 중에 진리의 검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누구든지 용감한 사람은 언제라도 이 검을 쥘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만도 하다. 이처럼 강력한 도구를 휘두르는 특권에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 거짓 고소, 관계의 단절, 외로움, 좌절 등 큰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옳은 편에 서면 무서운 자기 회의와 심지어 자괴감이 자주 도진다. 진실의 손잡이를 잡기로 선택하면 영광스런 승리를 맛볼 때도 있지만 악의 역공이 놀랍도록 흉포하게 찾아와 오랜 파괴를 남길 때가 많다.
진리의 검을 들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모본에서 찾을 수 있는 네 가지 교훈을 나누고 싶다.
첫째, 자신의 사명을 알면 계속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히 아셨고 인기나 성공이나 박해나 위협이나 심지어 측근들의 불화 때문에 곁길로 빠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돌보시면서도 올곧게 그 사명에 집중하셨다. 그분은 진리를 밝히려 노력하셨고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초대를 되풀이하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실패 때문에 궤도를 벗어나시는 일은 절대 없었다.
둘째, 악을 상대하려면 싸워야 한다. 싸움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진실 편에 서서 악에 맞서려면 싸움이 불가피하다. 때로는 꼭 해야 할 말인데, 말하기도 어렵고 상대방 쪽에서 듣기도 어렵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심한 질책이 필요한 싸움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평생에 한 번일 것이다. 악이 클수록 싸움도 강해야 한다. 대체로 이렇게 권하고 싶다. 친절한 접근이 무책임해지지 않는 한 친절로 대하되 솔직한 발언을 희생한 친절은 절대로 안 된다.
진실을 솔직히 말할 각오를 하라.
셋째, 고결한 싸움에서 담대함은 가치 있는 모험이다. 진리 편에 서려면 담대해야 한다. 반감을 품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방식에 대해 비난이 가해질 것을 예상하라. 상대방은 내용에 흠잡을 게 없으면 방식이라도 문제 삼는다. 나아가 담대하려면 강한 발언에 뒤따르는 강한 행동이 요구될 수 있다. 당신은 직장을 그만 두거나, 관계를 끝내거나, 강적과 대결하거나 두려움을 수습하거나 위협에 대항하거나 심지어 어떤 패배에 직면해야 할 수도 있다. 물러서지 말라. 당신이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소심함은 나중에 후회가 되어도 담대함은 절대로 후회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진실(진리)을 말한다고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법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현 세상 제체는 선행을 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상을 준다. 제임스 로웰의 말로, “진실은 영원히 단두대에 있고 악은 영원히 왕좌에 있다.” 불행히도 진실(진리)을 말하는 사람들은 가장 잔인무도한 학대를 당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니 현실에 눈을 뜨라. 용기를 내라. 당신이 진실 편에 섰음에도 아마 그 정당성은 조만간 혹은 당신의 평생 동안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로웰의 말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그 단두대가 미래를 지배하며 흐릿한 미지의 세계 저편에 하나님이 그늘 속에 서서 자기 사람들을 지키신다.”
희생이 따를지라도 진리의 검을 두 손으로 꼭 붙들면 큰 상이 따른다. 진실(진리)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자유를 가져다준다. 진실(진리)은 만족감을 낳고 확신을 심어 주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친밀함을 길러 주며 정직을 장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으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진실(진리)은 우리를 하나님 편에 서게 한다. 진실(진리)을 위한 모든 희생에 하나님이 후히 상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이생에서는 혹 아닐지라도 다음 생에서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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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00:40:2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