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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성애 옹호 정치인   동성애를 합법화하기 위해 인본주의자들이 노력하고 있는 이 시점에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기름에 불을 지피는 정치인이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대만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첫 아시아 국가가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국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101407060514138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17941   2. 12월 전쟁 거짓 선지자   12월에 한국이 불바다가 된다고 거짓을 외치는 악한 자가 있으니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벌써 이세벨 같이 사악한 이 여인의 유튜브 동영상이 쫙 깔렸다고 합니다. 이런 추악한 일이 통하는 곳이 한국 교회라는 현실이 매우 가슴 아픕니다.   http://www.up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32840 http://blog.naver.com/kykk9714?Redirect=Log&logNo=220142267832   우리 하나님께서 공의로 속히 이런 자들을 심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예레미야 5장 26-31절   26 내 백성 가운데 사악한 자들이 있나니 그들은 올무를 놓는 자같이 숨어 기다리며 덫을 놓아 사람들을 잡는도다. 27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그들의 집에는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크게 되고 부유하게 되며 28 기름지고 빛이 나는도다. 참으로 그들의 행위는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능가하나니 그들은 사정 곧 아버지 없는 자들의 사정을 공정하게 재판하지 아니할지라도 형통하며 궁핍한 자들의 권리를 공정하게 재판하지 아니하는도다. 29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런 일들로 인하여 징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혼이 이 같은 민족에게 원수를 갚지 아니하겠느냐? 30 ¶ 그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31 대언자들은 거짓으로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것의 마지막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려느냐?
2014-10-14 18:44:39 | 관리자
요즘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비리를 담은 <숨바꼭질>이라는 책이 나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숨바꼭질>에는 전 목사의 성범죄 사실이 8명의 피해자 증언과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는 여성 교인들을 당회장실로 부른 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변태적인 성추행을 일삼고 심지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왔던 예비신부까지 성추행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전별금 10억 원을 받고 다시 목회에 복귀해 홍대새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을까요?    그 뒤에는 그를 통해 성공의 야망을 채우려는 불순한 교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사건은 불순한 목사와 불순한 성도들이 함께 만든 사악한 일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전병욱 목사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잘 정리한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겨보아야 할 내용이라 올립니다.   http://blog.naver.com/kaikk/70188868443   대언자 예레미야 시대의 사악한 상황이 2500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대로 우리나라의 교회들 안에서 재현되는 것을 보며 우리 성도들이 바르게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낍니다.   예레미야 5장 26-31절   26 내 백성 가운데 사악한 자들이 있나니 그들은 올무를 놓는 자같이 숨어 기다리며 덫을 놓아 사람들을 잡는도다. 27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그들의 집에는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크게 되고 부유하게 되며 28 기름지고 빛이 나는도다. 참으로 그들의 행위는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능가하나니 그들은 사정 곧 아버지 없는 자들의 사정을 공정하게 재판하지 아니할지라도 형통하며 궁핍한 자들의 권리를 공정하게 재판하지 아니하는도다. 29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런 일들로 인하여 징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혼이 이 같은 민족에게 원수를 갚지 아니하겠느냐? 30 ¶ 그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31 대언자들은 거짓으로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것의 마지막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려느냐?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10-10 10:49:0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 광주 은혜침례교회의 한 지체가 최근 사정을 알리며 사진을 보내와서 나눕니다.   교회가 부흥해서 건물을 얻고자 하는데 건물주들이 교회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흔든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임을 피부로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 정도로 교회가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김홍도 목사가 150억 사기 혐의로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516   이러니 교회를 누가 믿고 건물을 빌려주겠습니까? 교회에 세를 주면 새벽부터 꽝꽝대고 밤마다 시끄러워서 건물 가치가 하락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주 지체들은 하는 수 없이 지금 모이는 공간의 밖에 천막을 치고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귀한 모임이 전 세계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기를 원하며 또 광주에서의 모임이 활성화되기를 원하면 사진을 나눕니다.   앞으로 두고 두고 보게 될 사진인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10-06 17:33:46 | 관리자
사람이 왜 다양하게 생겼는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동물이나 식물의 품종 개량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대로부터 쓰인 품종 개량 방법은 사람이 원하는 형질을 지닌 생물 간의 자손을 얻어 이들 가운데 일부만을 선택하고 다시 이들 사이에 자손을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전 세계적으로 개는 종류 혹은 품종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레이트데인, 세인트버나드, 마스티프 등은 무게가 90Kg이나 나가는 큰 개입니다. 반면에 치와와 같이 무게가 1kg 정도 되는 작은 개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긴 털, 짧은 털, 긴 코, 뭉뚝한 코, 긴 다리, 짧은 다리를 가진 개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김새와 크기 등은 달라도 이것들은 모두 같은 염색체를 가진 개입니다(혹은 개과에 속한 짐승입니다).     사람들은 품종 개량을 통해 자기들이 원하는 형태의 개를 만들어 왔습니다. 서로 다른 개들을 연구한 결과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정착함에 따라 개들도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지역별 품종도 서로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의 품종은 지역별로 크게 북방 타입, 남방 타입, 유라시아 타입으로 구분됩니다. 북방견은 북유럽의 스피츠 품종을 말하며 대표적 품종은 에스키모 개입니다. 이런 종류의 개들은 추운 기후 때문에 중간 길이의 직모를 하고 있습니다. 진돗개, 풍산개, 시베리안 허스키, 저먼 스피츠, 재페니즈 스피츠 등이 여기 속합니다.     남방 타입 개는 중동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 개들을 말합니다. 남방견은 북방견에 비해 골격이 가늘고 길며 섬세하기 때문에 날렵하게 생겼고 귀는 똑바로 서 있습니다. 남방견에는 그레이하운드, 그레이트데인 등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라시아 타입은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품종을 말합니다. 이 타입의 대표적인 개는 가슴이 두툼하고 폭이 넓으며 사각의 큰머리에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는 마스티프입니다. 이 품종에는 불도그, 로트와일러, 세인트 버나드, 도베르만 핀셔 등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주요 품종에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개가 나왔습니다.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보통 유라시아, 아프리카, 아시아에 사는 사람을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이라 부릅니다.     오늘날 ‘인종’(race)이란 말은 피부 색, 눈 모양, 머리카락 등의 육체적 특성이 구별되는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하는데 사실 이러한 의미는 1800년대 후반에 사람들이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인종’이라는 말은 잘못 생각하면 서로 다른 세 종의 사람이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개의 예에서 보듯이, 개라는 한 종에 세 개의 주요 품종이 있는 것처럼 사실 사람도 한 종 즉 ‘사람 인종’(human race)이 있고 백인, 흑인, 황인이라는 세 개의 주요 품종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또 그분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행17:26)   사람들은 어리석을 때가 참 많습니다. 유전의 법칙을 이용하여 여러 대에 걸쳐 우성 형질을 개발하면 자기가 원하는 품종의 개를 만들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사람도 동일하게 그리될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 잊고 삽니다.     우리는 행17:26에 따라 아담과 이브에게서 모든 사람이 생긴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불신자들은 이에 대해 궁금해 하곤 합니다. 1987년 <Nature>지에는 여성들에게만 계속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연구한 결과 모든 여성들이 한 여성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보여 주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또한 1995년 <Nature>지에는 남성에만 존재하는 Y염색체를 연구해서 모든 남성들도 한 남성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증명하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라는 한 쌍의 부부로부터 나온 것을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한 쌍의 부부로부터 다양한 크기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부모의 유전자가 서로 교환되기 때문에 다양해질 뿐 아니라, 정자와 난자 등 생식세포가 형성될 때 유전정보 자체가 교환이 일어나 그 자체가 엄청나게 다양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약 4,300년 전에 노아의 대홍수가 있었고 그 뒤 바벨탑 사건이 생기면서 이때에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 바벨탑 근처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온 세상으로 흩어져 나갔습니다. 바로 이때에 비로소 이방인들의 민족들과 나라들이 형성되면서 세계 4대 문명이 생겼습니다. 이러면서 유전 정보의 교환이 폭넓게 일어나지 않게 됨에 따라 지역에 따라 어떤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되는 현상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피부색은 햇빛에 예민하기 때문에 햇빛의 조사량에 따라 사람들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고, 집단 내에서 소외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연선택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품종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적도 근처에 살면서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피부암과 같은 심각한 위험에 더 민감하며 따라서 그들은 생식 가능한 시기까지 살아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밝은 색의 피부색 유전자를 전달할 기회를 적게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태양 빛의 흡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피부에서 형성되는 비타민 D3의 결핍 가능성이 크고 극지방에서 이것은 구루병(rickets)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세대가 지난 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자연히 적도 지방 근처에, 흰 피부의 사람들은 고위도 지방 근처에 많아졌을 것입니다.   또한 문화적 선호 역시 품종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서 한 사람의 문화가 종족 계통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나가면서 자연적으로 말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각각의 그룹 안에서 우성 인자는 더욱더 강하게 되고 열성 인자는 점점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특정한 요소들이 극대화되는 효과가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현시대에 짐승의 품종을 개량하는 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 집단(혹은 짐승 집단)은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집단 내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단에서 소수가 고립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면 이 새로운 그룹은 전체 집단에 비해 매우 적은 유전적 특징(또는 유전형질의 적은 범위)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세대가 흐른 뒤 그 지역에는 원래의 집단과는 유전적 특징이 많이 다른 종족이 살게 될 것입니다.   자연선택, 문화적 선호, 고립된 인구집단 등이 조합되면서 여러 세대를 지나면 자연히 지금과 같이 여러 지역에 다양한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생물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출판된 <Nature>지 논문에서, 과학자들은 유럽, 아프리카, 중국, 일본 등 네 지역에 사는 270여 명의 DNA 지도를 작성하면서 잃어버렸거나 중복되어 있는 DNA의 부분들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논문에서 숨겨져 있는 사실(일반 언로에서 보도하지 않음)은 그 표본들이 네 개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채취되었지만 그것들은 세 개의 분명한 그룹 즉 중국인과 일본인의 한 그룹, 유럽인 그룹, 그리고 아프리카인 그룹으로 깔끔하게 나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셋을 세 개의 조상 집단이라고 불렀는데 다음 그림은 이 세 그룹이 얼마나 분명하게 확연히 구분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세 그룹은 각각 나이지리아(Nigeria, YRI), 유럽(Europe, CEU), 일본(Japan, JPT)과 중국(China, CHB)입니다.이 연구 결과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이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유래했다는 창세기 9-11장에 기록된 성경 말씀과 놀라우리만치 일치합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야벳의 후손은 유럽으로, 함의 후손들은 남쪽 아프리카로, 셈의 후손들은 일부는 중동에 머물었고 일부는 북동쪽의 아시아로 흩어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같이 형성된 사람의 세 그룹과 개의 세 그룹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북방, 남방, 유럽 그룹). 사람보다 개가 더 많은 변이를 보이는 것은 개의 경우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인위적 품종 개량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에게는 인위적 품종 개량 시도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에게서 나온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지금처럼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과 짐승이 출현하였음을 과학적으로도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2014-08-18 12:02:24 | 관리자
“불교를 믿든지 다른 종교를 믿든지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 (김수환 추기경, 도올의 논어 이야기 58강 중 2001년 4월 27일)   http://youtu.be/l3F7aXJccSc   하나님의 말씀: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행4:12).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갈1:8-10).
2014-08-16 11:06:35 | 관리자
안녕하세요?   8월 14일에는 평화의 사도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옵니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이 공항까지 나가서 영접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알려진 대로 평화의 사자일까요?   다음의 동영상을 보면 그의 속 중심 깊은 곳을 알 수 있습니다.   http://youtu.be/XTeo3EkuTJ8   동영상에 인용된 스페인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와 2년 전 추기경 시절 로만 칼라를 목에 두르고 BBC 방송에 나와 한 그의 발언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주의 성경 신자들을 가장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이 동영상은 개신교에서 만들었기에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하고 계시록 12장의 여인을 교회라고 잘못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면 교황은 적그리스도를 돕다가 죽임을 당하는 천주교 음녀 체제의 수장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이스라엘입니다.   이 점만 빼면 동영상의 내용이 좋으니 아이들과 함께 교황의 정체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마귀의 사자가 방문하여 이 나라를 영적으로 어둡게 만드는 가운데도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와 큰 평안이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들 위에 가득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8-08 11:35:36 | 관리자
안녕하세요?   한국 성도들의 신앙적 갈등은 대개 구약과 신약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한마음 미션에서 성경 바로 보기 시리즈를 하면서 지난주에는 구약과 신약을 바로 구분하는 것을 강해하였으니 시간을 내서 듣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구약과 신약 바로 보기 0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719   구약과 신약 바로 보기 02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720   성경 바로 보기 시리즈는 말 그대로 성경을 바로 보게 해 주는 강해입니다. 어느 면에서 성경 신자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강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내서 부지런히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25
2014-07-23 10:11:16 | 관리자
질문: 골리앗의 동생입니까? 골리앗의 아들입니까? 삼하21:19-22와 대상20:5-8은 서로 모순이 아닙니까? 대답: 현대 역본 역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먼저 이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더니 거기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또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더니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개수가 스물네 개더라. 그도 그 거인에게 태어났더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은 가드에서 그 거인에게 태어난 자들로서 다윗의 손과 그의 신하들의 손에 쓰러졌더라(삼하21:19-22).   또 다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더니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의 창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더니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스물네 개로 손과 발마다 여섯 개씩 있더라. 그도 그 거인의 아들이었더라.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이들은 가드에서 그 거인에게 태어난 자들로서 다윗의 손과 그의 신하들의 손에 쓰러졌더라(대상20:5-8).   삼하21:19와 대상20:5를 보면 엘하난이 분명히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골리앗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자, 살펴보겠습니다.   (1) 삼하21:15-18을 보면 골리앗의 아들인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나 아비새가 그를 죽입니다. (2) 또한 십브개가 골리앗의 아들인 삽을 죽입니다.(3) 그리고 19절에는 골리앗의 동생인 라흐미를 엘하난이 죽입니다.(4) 마지막으로 20-21절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골리앗의 다른 아들이 나옵니다.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총 개수가 스물네 개인 자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삼하21:22절은 이 4명이 골리앗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 삼하21:19절을 보면 엘하난이 죽인 라흐미는 골리앗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이것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골리앗은 자기 어머니와의 근친상간(incest)을 통해 이들을 낳았습니다.그래서 이들은 골리앗의 아들이기도 하고 동생이기도 합니다(적어도 라흐미는 그러함).마귀의 자식들이므로 이런 일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의 기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에 시내에서 돌멩이 5개를 가지고 갑니다(삼상17:40). 이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다윗이 골리앗과 그의 아들들(동생들)을 다 죽이려고 5개를 가지고 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상상의 비약입니다. 삼상17에는 다른 거인들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늘 하던 대로 주머니에 돌멩이를 충분히 가지고 갔을 뿐입니다. 그때에는 5개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해석은 상식을 벗어난 근거 없는 해석입니다.   샬롬
2014-06-21 22:16:4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제는 제가 <그리스도인의 옷차림>이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옷차림 규정을 설명하였습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517   목사의 책무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려주는 것이므로(행20:19-20, 26-27) 아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부득이 시간을 내어 전달하였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무엇을 입든, 무엇을 하든 교회만 오면 된다는 논리를 펴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널리 알려야 하는 존재이므로(벧전2:9) 겉모습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공예배에서 우리는 주님을 공경하는 태도와 목소리를 가지고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다음의 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 위험, 은혜, 긍휼, 사랑, 아름다움,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1.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시29:1-2)2. 가장 좋은 것으로(말1:6-7; 12-13)3. 희생정신으로(막12:41-44)   그래서 예배 복장이 중요합니다. 특히 여성의 복장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야기합니다(벧전3:3-4; 딤전2:9-10).그 이유는 남자는 보는 것에 약하고 여자는 듣는 것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오용해서 여자는 화장하거나 장식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예쁘게 꾸며 주십니다(계19:8, 엡5:27; 시45:13-14). 그러므로 자매님들이 단정하게 꾸미는 것은 모두에게 좋습니다. 이런 말씀들의 요점은 단정하게 차려입는 것 이상으로 외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단정함, 정숙함, 얌전함(shamefacedness)이며 이것들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예배 복장의 경우 남자는 대개 정장이면 다 해결되지만 자매님들의 경우 어떤 옷이 단정하고 정숙하고 얌전한 옷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22:5을 인용하면서 남자는 바지, 여자는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 하고 치마가 아니면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연이어 나오는 10, 11과 12절을 보면 혼방은 안 되고 또 옷에 술을 달아야 하는데 5절을 인용하는 분들 가운데 이렇게 옷을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가지고 여자가 치마를 입지 않으면 가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최초의 옷 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고 지내다가(창2:25) 죄를 지은 후 벌거벗은 수치를 깨닫고 앞치마를 만들어 입었지만(창3:7-11) 이 앞치마는 벌거벗음을 가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쫓으면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가죽 코트). 여기의 핵심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벌거벗음을 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막5:1-15 참조, 특히 15절, 바른 정신, 옷).   그러면 어느 정도가 벌거벗음의 기준일까요? 즉 아담과 이브의 가죽옷 길이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출28:42의 제사장 규정과 사47:1-3 여인의 수치에 대한 규정을 보면 성경적으로 남자든 여자든 넓적다리가 보이면 벌거벗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또 그들(남자 제사장들)을 위하여 아마로 반바지들을 만들고 그것들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에까지 이르게 하여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게 할지니라(출28:42). 오 바빌론의 처녀 딸아,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오 갈대아 사람들의 딸아, 왕좌가 없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부드럽고 우아하다고 불리지 아니하리라. 맷돌을 가져다가 곡식을 갈며 네 머리 단을 드러내고 다리를 드러내며 넓적다리를 드러내고 강들을 건너라. 네 벌거벗은 것이 드러나고 참으로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이리라. 내가 원수를 갚되 사람으로서 너를 만나지 아니하리라(사47:1-3).   그러므로 자매님들은 무릎 이하로 내려가는 옷을 입는 것이 합당합니다. 물론 미니스커트는 안 좋습니다. 남자에게 음욕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마5:28).또한 땅에까지 닿는 옷도 불필요합니다. 무릎 밑으로 오면 됩니다. (1) 그러면 꼭 치마여야만 할까요?   이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사용하여 판단하게 하십니다. 고전11은 남자와 여자의 머리 문제를 다룹니다. 여자는 길게, 남자는 짧게 머리를 해야 합니다. 본성도 남자의 긴 머리는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14). 그러면 여자의 긴 머리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이처럼 남자와 여자의 옷도 본성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화장실 입구를 보기 바랍니다. 말은 달라도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즉 본성을 고려할 때 여자는 치마를 입는 것이 합당합니다.   (2) 그러면 여자는 반드시 치마만을 입어야만 할까요? 성경의 답은 “아니다.”입니다. 바지를 입어도 됩니다. 다만 단정하게 얌전하게 입어야 합니다. 여기서 얌전함은 여성의 신체 형태를 드러내지 않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역시 남자의 음욕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몸의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준의 적당한 바지를 입는 것은 허용됩니다.   (3) 또한 단정하다는 것은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동, 등산, 카누 등을 할 때는 여자도 운동 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정함입니다.   (4) 그러면 치마면 다 될까요? 아닙니다. 몸을 조이는 치마는 바지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5) 끝으로 남자는 양복을 입고 여자는 치마를 입으면 영적인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외적 모습은 영성의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다만 내적으로 영이 단정한 사람은 외적으로도 그것이 표출됩니다(눅6:45). 결론을 드립니다.   공예배의 옷차림 기준은 다음과 같이 하면 좋습니다: 남자는 정장(긴 바지) 혹은 칼라 있는 셔츠, 여자는 무릎 이하의 치마나 바지   다만 예배 때 섬기는 분들은 (주의 만찬, 찬양, 기도, 말씀 낭독, 안내 등) 반드시 정장과 치마를 입으면 좋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실족거리를 주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6-17 09:15:2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오순절 은사은동, 신사도 운동 등으로 인해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은사(선물)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 모임에서 고린도전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이번에 고전12-14장까지 강해한 것을 올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방언 및 각종 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추후에 고린도전서 강해 전체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고전14:20).   샬롬   패스터 정동수   1. 방언 및 각종 은사 강해_01 (고린도전서 12-14장)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64   2. 방언 및 각종 은사 강해_02 (고린도전서 12-14장)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65   3. 방언 및 각종 은사 강해_03 (고린도전서 12-14장)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66   4. 방언 및 각종 은사 강해_04 (고린도전서 12-14장)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67   5. 방언 및 각종 은사 강해_05 (고린도전서 12-14장)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68
2014-06-07 09:32:36 | 관리자
예수님의 탄생일(탄생 혹은 출생 시기 혹은 연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시면서 예수님의 탄생일이나 아담의 창조 날짜, 아브라함의 출생일 등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이런 날짜들을 계산해서 정하려는 노력은 사실 불필요하며 많은 경우 상상의 허구 속으로 사람을 인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죽을 때 직접 그를 묻으셔서 아무도 그의 무덤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신34:5-6). 그의 무덤이 알려지면 무덤을 순례하며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일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의 탄생일을 알면 그 날을 절기로 지키려고 애쓰는 종교인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이날을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사실이 중요하지 정확한 날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많고 미약한 성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그래도 날짜를 알면 그 날을 좀 더 귀중하게 또 거룩하게 여길 수 있으므로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예수님의 탄생일을 추정하고 그렇게 믿고 기념하게 하는 종파들도 있습니다.    여기의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 카톨릭 교회일 것입니다. 이교도들의 문화를 수용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이라고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상식이 있는 성도라면 12월 25일이 진짜 성탄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교회에서는 이런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 참된 성도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합니다.   주 예수님의 탄생일은 이처럼 큰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정하여 지키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여러 이론을 들어보고 그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이론을 선택하고는 만족해합니다. 또 그런 날을 기념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도가 다 헛됨을 알고 있지만 그중에 어떤 분들은 거의 아무 근거도 없이 특정일을 정해 기념하려고 하기도 하므로 오늘은 대략적인 예수님의 출생일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라는 사람이 양력 5월 14일(혹은 20일)이 예수님의 탄생일이었다고 이야기했으므로 그 날이 탄생일이며 1995년 5월 14일이 예수님의 2,000번째 생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1967년의 ‘6일 전쟁’ 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날을 예루살렘의 날이라고 지정하여 기념하는데 바로 그 날이 예수님의 탄생일인 5월 14일이므로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가 신비하냐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현시대의 어떤 사건을 과거의 무언가와 연결시켜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증거는 그분의 탄생일이 5월 14일(혹은 20일)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성도들은 이런 주장을 펴는 분들 - 대개는 선한 의도를 가진 분들 - 이므로 아무 생각 없이 이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5월 14일(혹은 20일)을 조촐하게라도 기념하자고 하면 따르려고도 합니다.   이 글은 성경 공부 차원에서 이런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지 결코 성탄일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구글에 가서 ‘Jesus birthday’라고 치면 여러 가지 글이 나옵니다. 이 중에는 성경적으로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통해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이런 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http://www.hebrew4christians.com/Articles/Christmas/christmas.html   위의 글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성경 신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 추론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나온 날짜 역시 추정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적은 것은 헛된 상상 속에서 헤매는 이들이 있기에 최소한 이런 정도의 추론 과정을 거치면서 성경을 연구해야 함을 보여 드리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사를 보면 예수님의 출생은 침례자 요한의 출생과 6개월 간격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의 출생 시기를 알면 예수님의 출생일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장에서 침례자 요한에 대해 살펴봅시다. 5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계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5 유대 왕 헤롯 시대에 아비야 계열에 사가랴라는 이름의 어떤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아론의 딸들에게 속하였고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벳이더라.   23-24절을 보면 사가랴는 직무 수행을 마친 뒤 집에 갔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곧 수태하였습니다.   23 그가 자기 직무의 날들을 다 마친 뒤 곧 떠나서 자기 집으로 가니라. 24 그 날들이 지난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르되,   26절 이하에 보면 엘리사벳이 수태 후 여섯 달이 지난 뒤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하였습니다.   26 [수태한 이후로]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에 의해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보내어져서  27 다윗의 집에 속한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렀는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더라.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은 사가랴가 직무를 마친 뒤 약 280일(유대인들의 음력으로 약 10달) 뒤이고 예수님의 탄생일은 사가랴의 직무 수행 후 약 16달 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가랴가 직무를 수행한 날만 알면 두 분의 출생일을 성경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제사장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모든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동시에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제사장을 24 계열(그룹 혹은 개역성경의 반열 혹은 반차)로 나누어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였습니다(대상28:11–13). 대상24:1-19는 이렇게 구분된 24 계열의 제사장들의 명단을 보여 줍니다.   7 이제 첫째로 제비 뽑힌 자는 여호야립이요, 둘째는 여다야요, 8 셋째는 하림이요, 넷째는 스오림이요, 9 다섯째는 말기야요, 여섯째는 미야민이요, 10 일곱째는 학고스요, 여덟째는 아비야요, -----19 이와 같은 순서로 그들이 {주}의 집에 들어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의 밑에서 자기들의 관례대로 섬겼더라.   이처럼 구분된 24 계열의 제사장들은 안식일부터 그다음 안식일까지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성소에서 섬겼고 나중에는 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대하23:8).   그러나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기간, 오순절 기간,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기간에는 어차피 모든 남자가 예루살렘에 가야 했으므로(신16;16) 모든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장 직무를 행했습니다. 이 삼대 절기에는 율법에 따라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으므로 많은 수의 제사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달은 음력으로 계산되어 월삭(초하루)에서 다음 월삭까지가 한 달이었습니다. 이 음력의 달은 각각 29일 반이었으며 그래서 한 달은 30일, 그다음 달은 29일로 교대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30일이 되는 달은 완전한 달이고 29일이 되는 달은 불완전한 달로 불렸습니다. 음력의 열두 달은 354일 6시간이므로 유대인들의 한 해는 태양력의 한 해보다 12일 적습니다. 춘분과 추분을 회복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3년마다 베아달 즉 ‘둘째 아달’이라는 열셋째 달을 첨가하였고 이렇게 하면 그들의 음력과 현재의 태양력이 거의 일치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음력의 달들을 쓰고 우리는 태양력의 달들을 쓰므로 서로 잘 일치하지 않지만 대개 그들의 첫째 달인 니산(아빕) 월은 지금의 3월 말에서 4월 초에 해당하며 다음은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의 달과 현재의 달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의 열두 달   1월: 니산 혹은 아빕(현재의 3-4월, 출12:2; 13:4; 에3:7)2월: 시브 혹은 이야르(4-5월, 왕상6:1) 3월: 시반(5-6월, 에8:9) 4월: 담무스(6-7월, 겔8:14) 5월: 아브(7-8월) 6월: 엘룰(8-9월, 느6:15) 7월: 티쉬리 혹은 에다님(9-10월, 왕상8:2) 8월: 불(10-11월, 왕상6:38) 9월: 기슬래(11-12월, 슥7:1) 10월: 데벳(12-1월, 에2:16) 11월: 스밧(1-2월, 슥1:7) 12월: 아달(2-3월, 에3:7)   따라서 유대인들은 정상적인 해에는 일 년에 50.6주(반올림하여 51주)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24 계열로 구분된 제사장들은 1년에 두 번(전반기와 후반기에 각각 한 주씩) 의무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삼대 절기에는 관례에 따라 모두가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정상적인 해에 51주 직무 수행이 완료됩니다. 윤달이 있는 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의 직무 수행에 대해서는 위키 백과 등의 자료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en.m.wikipedia.org/wiki/Priestly_divisions   http://www3.telus.net/public/kstam/en/temple/details/priest_service.htm   따라서 1월부터 각 계열(반열)의 제사장들이 섬기는 순서는 아래 도표와 같았습니다(제사장의 이름은 대상24:1-19 참조 바람).     히브리 달력 1월 (니산 혹은 아빕) 2월(시브) 3월(시반) 첫째 주 1. 여호야립 4. 스오림 전체(오순절) 둘째 주 2. 여다야 5. 말기야 8. 아비야 셋째 주 전체(무교절) 6. 미야민 9. 예수아 넷째 주 3. 하림 7. 학고스 10. 스가냐     이 표에서 보듯이 아비야 계열(반열)에 속했던 사가랴는 셋째 달인 시반 월의 둘째 주에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뒤 그달 중순경에 귀가하였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바로 그때에 침례자 요한을 수태하였습니다. 따라서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은 히브리 달력으로 ‘셋째 달 중순 + 임신 기간 열 달(음력) = 열셋째 달 중순경’이며 이것은 곧 그다음 해 첫째 달 중순경입니다. 이때는 히브리 달력에서 첫째 달인 아빕 월 또는 니산 월의 중순경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곧 유월절(14일)을 포함하는 무교절 기간의 어느 날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보다 여섯 달 늦게 수태되셨으므로(눅1:24–27) 그분의 탄생일은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보다 여섯 달 늦게 되므로 히브리 달력에서는 그 해 일곱째 달 중순경이 됩니다. 히브리 달력에서 일곱째 달인 티쉬리 월 중순은 유대인들의 장막절(초막절)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지금의 태양력으로는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있는 장막절쯤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 직무를 유대인들의 달력에서 셋째 달 둘째 주에 수행한 것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24 계열의 제사장 직무는 1년에 전반기에 한 번 후반기에 한 번 총 두 차례 돌아오므로 사가랴는 그 해의 후반기에 34번째 주에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즉 24 계열의 제사장들은 그해 전반부에 한 주씩 24주 동안 직무를 수행하고 또 모두 무교절과 오순절에 걸쳐 두 주 동안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리고 나서 후반부가 되면 아비야 계열은 여덟째 주에 직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후반부 직무 수행 주는 24주+2주+8주=34번째 주가 됩니다. 이 경우 침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위의 경우에 계산된 날짜에 24주를 더한 날에 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침례자 요한은 장막절을 지키는 시기에, 그리고 예수님은 무교절을 지키는 시기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경우 예수님의 탄생일은 3월말에서 4월 초가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배반당하고 처형당하신 마지막 유월절을 포함하여 네 번의 유월절이 나옵니다(세 번은 확실하고 한 번은 추정 가능함). 이 네 번은 정확히 3년을 뜻하고 첫째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예비 사역을 약 반 년 동안 하신 것으로 보이므로 그분의 사역은 서른 살이 되시던 해 장막절(지금의 태양력으로 9월 말-10월 초)에 시작되어 3년 반이 지난 유월절(3월 말-4월 초)에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예수님의 출생이 장막절 즈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1. 요1:14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거하다’로 번역된 그리스말은 ‘장막을 치셨다’는 뜻이며(tabernacled) 그래서 예수님이 장막절(feat of tabernacle)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2. 유대 땅의 늦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은 상당히 추우므로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들에 둘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밤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눅2:8). 그러므로 이런 정황으로 보아 예수님은 유월절 부근이 아니라 장막절 부근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예수님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루살렘에서 왕국을 세우실 때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반드시 장막절을 지켜야 합니다(슥14:16-19). 이런 면에서 장막절이 그분의 출생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사실 장막절은 기쁨의 절기요(눅2:10), 이방 민족들을 위한 절기입니다(눅2:31-32).   4.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이 행하는 유월절 의식에서 고려할 것이 있습니다. 유월절 의식에서 유대인들은 다시 올 엘리야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엘리야(말4:5–6)가 유월절에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약성경은 침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왔다고 합니다(눅1:17). 따라서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온 침례자 요한은 유월절에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로부터 6개월 뒤인 장막절에 탄생하셨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연구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일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추정 가능한 날짜를 공부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어떤 확실한 도움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도 상식과 논리를 가지고 이런 문제를 대해야 함을 배웠을 뿐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일이나 아담의 창조 날짜 등에 아무 가치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할 수는 있으나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이런 날짜들은 확고하게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날짜를 정하는 일에 과도한 시간을 투자하거나 어떤 사람이 정한 날짜를 기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전혀 합당치 않습니다. 이렇게 날짜를 정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 같은 사이비/이단들에게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공격의 빌미를 줍니다.   http://cafe.naver.com/kobi9702/210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우리는 보는 것으로 걷지 않고 믿음으로 걷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고후5:7)
2014-05-29 10:12:4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저는 <가정과 결혼> 시리즈로 8회에 걸쳐 오전 예배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때에 믿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폭행과 폭언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성도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에서도 다시 한 번 저는 믿는 남편들이 폭행과 폭언을 하면 안 되고 또 아내에게 무관심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512   짧은 기간에 이런 설교를 몇 차례 하다 보니 혹 우리 교회에서 누가 그런 일을 하는가 보다 하고 추측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큰딸은 미국에서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사위와 딸 모두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서 교육을 받았기에 한국식 교회에 익숙하지 않아 미국 독립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8년 전에 이 아이들과 저의 막내딸 그리고 가끔 미국을 방문하는 제 아내 등은 볼티모어에 있는 좋은 독립침례교회를 찾아서 잘 다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은 제가 보기에도 선량해 보이고(인상이 대단히 좋음) 양심적인 분처럼 보였으며, 그 목사님의 아버지도 독립침례교회 목사님인데 참으로 경건하게 보이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가 그분들 모두를 모시고 식사 대접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설교도 깔끔하게 잘하고 전형적인 독립침례교회 틀에 매이지 않고 여러 면에서 목회를 잘하였습니다. 저의 아이들과 사위도 바이올린 연주, 노래도 하고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도 하며 교회에 적응을 잘하였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교회는 부흥을 해서 큰 대지를 사서 이사도 가고 여러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가끔 제가 미국을 방문해서 찾아가 보면 흠잡을 데가 없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저의 큰딸에게서 놀라운 소식이 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이 사모님을 자주 때려서 사모님이 경찰을 불러 조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교회의 어떤 처녀 자매와 불륜을 저지르고 교회 돈을 유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오래전부터 사모님을 때렸고 이번에는 사모님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야기했으며 아예 친정에 가서 안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자기 부인이 정신적인 문제로 앓고 있으니 그 말을 믿지 말라고 교인들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이런 식의 변명은 통계적으로 볼 때 아내를 때리는 남편들의 공통적인 행동양식이라고 합니다.   이 일이 제 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한 뉴스라 그 아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저나 제 아내도 그런 소식을 접하고 믿기지 않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요, 그래서 그 목사님은 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우리 집에도 그런 일이 생길까 봐 두렵네요.”라고 제 큰딸이 카톡 메시지를 보내서 그 아이가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3,000년 전 구약 시대의 다윗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제 주변에서,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보시다시피 목사도 아내를 때릴 수 있고 간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육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아내에게 폭행하고 폭언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런 일은 심지어 세상 법정에서도 이혼 사유에 해당합니다.   또한 자기 몸만 생각하고 아내와 자식의 문제나 복지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즉 무관심도 이에 필적하는 죄악입니다. 이 무관심 역시 아내와 아이들을 병들게 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남편(아빠)과 함께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폭언, 폭력, 무관심의 대다수가 남편들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저는 목사로서 우리 교회 성도들과 저 자신에게 선한 양심의 경고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을 기억하고 구원받았어도 두려움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 배우자, 자녀들, 부모에게 친절을 베풀고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 뒤에야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교회 성도들의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목사인 저는 심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다음의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남편 형제들이 아내와 자녀들을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4-17절 14 너희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알지 못하던 때의 이전 정욕들에 따라 너희 자신을 꾸미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라. 16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17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에베소서 5장 25-28절 25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같이 하라.  26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 27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자들도 마땅히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느니라.   샬롬   패스터
2014-05-18 19:38:1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라는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꼭 읽고 원래 책도 구매해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69   하나님의 뜻을 직통 계시로 착각하고 직통 계시(꿈 등)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심히 두려운 불신의 행위입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오 내가 주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 주의 명령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주께서 그것들을 통해 나를 내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셨나이다. 주의 증언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내게 더 많은 명철이 있으며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더 잘 깨닫나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내 발을 삼가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게 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판단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훈계들을 통해 내가 명철을 얻으므로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편119:97-104) 그리스도인들에게 쓸데없는 스트레스와 혼란을 가져다주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관련된 문제는 아마도 최고로 높은 순위를 자랑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도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의의 행로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23편). 그렇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인도하신단 말인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9-10). 하지만 이 말 또한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로그인’만 하면 하늘에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는 대화방을 개설해 놓으셨단 말인가?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서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의사소통을 하시면서 그들 인생의 모든 우여곡절에 대한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단 말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특정한 단계들이 있단 말인가? 만약에 그러한 단계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공식은 무엇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이 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롬8:14).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도와 인도를 받는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문제가 어찌 스트레스를 주지 않겠는가? 가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원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가지는 직업, 우리가 결혼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교회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나 내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질문들 앞에서 다소 위축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픈 그리스도인들의 열망은 좋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스스로를 괴롭힌다. 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을 그토록 힘들어하는가? 왜 그것으로 인해 그토록 불안해하는가? 부득이하게도 그 대답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들과 기대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공통적인(그리고 전통적인) 관점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일단 밝힌 다음에 그러한 관점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잘못된 관점과 바른 관점을 모두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잘못된 관점  이 관점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경우 하나님의 인도란, 그와 같은 계획을 찾아내는 일이 되어 버린다. 만약에 그와 같은 계획이 존재한다면 나의 모든 질문에 대해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계획이 있다면 매사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언제나 한 가지 결과만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올바른 판단, 하나님의 핵심적인 뜻, ‘완벽한 계획’ 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결혼이 들어가 있다면, 하나님의 계획에는 단 한 사람의 배우자가 내정되어 있으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신중하게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의사 결정은 수수께끼 풀기가 되어 버린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 발견하기’라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는 ‘형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치 퍼즐 조각처럼 찾아서 서로 맞출 수 있는 단서와 암시들을 흘리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그토록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확신은 그러한 태도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관점은 매우 주관적이다. 예를 들어, 오늘 당신이 어떤 신발을 신을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하나님은 오늘 아침에 당신이 무엇을 먹기를 원하시는가? 오늘 당신이 읽어야 할 성경 구절 혹은 당신이 가야 할 휴가지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은 무엇인가?  일터에 자가용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가, 아니면 기차나 택시를 타야 하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일관되게 매사에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감사하게도 의사결정에 대한 그와 같은 관점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상식과 개인적 기호에 기초해서 자유롭게 선택한다. 만약에 그들이 매우 종교적이라면 종교적인 주문으로 자신들의 선택에 ‘세례’를 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하도록 나는 인도를 받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진정한 화평을 누리고 있다” 와 같은 말들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화 다음의 짤막한 이야기를 통해서 잘못된 관점의 예를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함께 첫날을 보내게 된 아담과 이브를 한번 상상해 보자. 죄가 없었기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원예가로서 바쁜 하루를 보낸 아담은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으로 왔다. 그는 집으로 가면서 나무에서 요리 재료들을 따갔다. 이브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담은 개인 풀장인 비손 강에서 수영을 즐겼다.  그러나 부엌에서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브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너무도 막중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도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맛있는 과일들 중에서 무엇을 요리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이브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그 많은 과일들을 다 먹을 수는 없었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이브는 알고 있었다. 이제 갓 결혼한 이브는 초반부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놓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브는 자신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아담에게 부탁했다. “내가 저녁 식사로 무엇을 준비하기를 원하시는지 주님께 물어봐 주세요.”  아담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 주시는 계시가 없구려. 우리의 식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밖에 없구려. 그러니까 ‘이 동산에 있는 그 어떤 나무의 열매든 다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안 된다’는 말씀 말이요.” 아담은 자신이 금지된 나무에서는 열매를 따지 않았다고 이브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브는 여전히 결정을 못했고, 식사 준비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몹시 배가 고픈 아담은 아삭아삭하고 빨간 사과가 아주 맛있어 보여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에 정말로 화평이 느껴지는데, 아마도 사과를 먹도록 인도를 받는 것 같소.” 이브는 사과를 먹는 데에 순순히 동의했고 자신에게도 아담과 같은 ‘화평’이 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과를 먹기로 한 결정이 이브에게 새로운 문제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아담, 이 사과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밀까요, 깍둑썰기를 할까요, 으깰까요, 파이 안에 넣어 구울까요, 아니면 사과파이나, 튀김이나, 푸딩을 만들까요, 아니면 사과 턴오버(turnover, 잼 들을 넣어 반원형으로 접은 파이)를 만들까요, 아니면 그냥 날 것으로 먹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요. 하나님의 인도를 나는 기꺼이 받기를 원해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한 번만 더 하나님께 가서 물어봐 주겠어요?” 다시 한번 기도를 하고 나서 아담은 말했다. “마찬가지의 대답을 받았소. ‘이 동산에 있는 그 어떤 나무의 열매든 다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안 된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본 아담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요, 이브, 주께서는 그 말씀만으로도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충분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소.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확하게 무엇을 먹고 어떻게 그것을 먹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나는 확신하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결정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구려. 오늘 내가 짐승들의 이름을 붙인 것처럼 말이요. 하나님은 내가 알아서 그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소.”  이브는 충격을 받았지만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이 과일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저녁식사로 먹든 내가 그것을 어떻게 요리하든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요?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놓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요? 그러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실행하기 전에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의 모든 세부사항을 구석구석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함께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뜻을 놓치는 경우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폭넓은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과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다. 경건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사용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과일 샐러드를 먹자!”  잘못된 관점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이브는 마치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단 하나의 올바른 선택을 찾아다니는 신비로운 여행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브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광범위한 자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은 동그라미 안에 찍혀 있는 자그마한 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가 가능한 거대한 강과 같다. 그 가능성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백 혹은 수천 가지의 대안적 선택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충격적인 진실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폭넓은 자유보다는 끝도 없는 규칙들을 더 편안하게 여긴다. 그들은 지혜보다는 미성숙을 선호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치 아기처럼 자신들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모든 세부 사항을 다 알려주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모든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한 성인처럼 다루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폭넓은 원칙들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타당한 결정들 중에서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올바른 관점 어떤 특정한 사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난 것인지를 묻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서로 완벽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그와 같은 구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뜻은 계시되었거나 혹은 계시되지 않았다. 다음의 도표가 우리의 사고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                    ↙                    ↘           계시된 뜻                       숨겨진 뜻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계획           도덕적 뜻                       주권적 뜻           교훈                            섭리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        (앞으로 일어날 일들) 하나님의 계시된 뜻 _ 도표의 왼쪽 부분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 뜻 혹은 하나님의 교훈적 뜻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서 기대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지를 설명해 준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 우리가 일하고, 쉬고,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눕고,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모든 것 - 의 기준으로 삼기를 원하시는 모든 윤리적 원칙들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알려 주셨다. 그 뜻은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성경66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십계명에 그 개요가 들어가 있으며(출20장), 더 요약해서 두 개의 주요 원칙으로도 주셨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36-40). 우리가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 _ 도표의 오른쪽 부분 하나님의 숨겨진 뜻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 은밀한 뜻, 혹은 언약적 뜻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정하신 모든 일과 관련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령적 뜻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뜻은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이다. 그 청사진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는지 까지 포함해서 - 다 들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맹세를 성취해 가시는 동안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사용 하실지가 다 들어 있다. 이 은밀한 뜻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천사들이 자유롭게 내린 결정들을 다스리고 지배하셔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신다. 이 말은 모든 것이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숨겨진 뜻에 대해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내일 아침에 당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내일 오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과 명령 속에서 정해진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어떤 것을 계획하고 계신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 어디에도 ‘당신의 인생을 향한 완벽한 계획’이라고 불리는 별도의 셋째 ‘뜻’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지 않다. 당신의 인생 지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은밀한)뜻 안에 있는 수십억 개의 세부 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우여곡절을 안고 있는 그 지도를 알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만약에 그와 같은 인도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좌절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을 뿐이다.  모세는 그것을 신명기 29장 29절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서 속하거니와 계시된 그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것은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은밀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인도는 성경에 다 나와 있다. 말하자면 “나타난 일이 율법의 모든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관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사 결정을 잘하는 방법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거나 논리적으로 암시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전부다. 우리가 성경과 일관된 결정을 내리는 한 우리는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다. 2. 우리가 그 뜻을 안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엿볼 수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왜냐하면 안다 해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의도하시고 명하신 일들은 피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나아가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보여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비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한가?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의 죄와 실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그리고 비도덕적 행동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들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실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덕적 뜻을 어기는 많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는 모든 역사속의 모든 사람과 천사들의 완고함과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아담의 죄,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화형당한 순교자들에게 가해진 잔인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밀한 뜻을 보여 주셨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을 보여 줄 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만약에 내일 오후 3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서, 당신이 특정한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도 아닌 이유는 그러한 말을 해야 마땅한 것인지를 당신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하나님의 인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이러한 경우에는 특히 혀의 사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말이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 충분한 안내자가 된다.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기억하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심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사탄까지도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심지어 사탄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스터플랜에 계획해 놓지 않으신 일들을 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된 도덕적 뜻에 근거해서 심판을 받는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면과 관련된 행동 원칙들을 제공해 줌으로써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준비시켜 준다. 하지만 성경은 반드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잘못 행동하기란 너무도 쉽다. 해석의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역할은 무엇인지, 논리적 추론의 역할은 무엇인지도 살펴볼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에서 발췌, 피터 블룸필드,  성서유니온선교회
2014-05-15 13:33:0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번 주일 아침(14년 5월 11일)에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이 <목사의 타락 과정>이라는 글을 카톡으로 보내왔습니다.생각할 것이 더러 있으므로 같이 나누고자 올립니다.아마 글의 원저자는 목사인 것 같습니다. 저부터 선한 양심을 지키는 목사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   목회자들은 어떤 타락 과정을 밟는가?   1. 힘든 목회 생활 속에서 처음 가졌던 소명들이 점점 식는다.   2. 목회 소명이 식으면서 은혜도 식고 그러면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3. 세상 것을 가지고 싶어진다. 돈도 가지고 싶고, 좋은 차도 타고 싶어진다.대형 교회 목사들 보면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노후를 위해 집도 한 채 마련해 두고 싶어진다.   4. 세상 것을 찾다 보니 교회를 키워야 한다.교회를 키우는 목적이 영혼 사랑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5. 목회자도 사람이다. 자기가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진다.그래서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교회를 키워야 되겠다고 마음먹는다.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방법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도입한다.온갖 세미나에 쫓아다니면서 방법론을 배운다.   6. 교회 건물을 크게 지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생각한다.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교회 건물을 잘 짓는다.세상 비즈니스 방법, 마케팅 방법을 교회 성장에 사용한다.   6. 진리를 말하고, 회개를 외치면 다들 도망간다고 생각되니까, 인간 비유 맞추는 설교하기 시작한다. 천국 설교, 지옥 설교를 하면 인기 없어지니까 세상 부귀영화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설교한다.번영 신학을 도입하고, 부자 되도록 부추기는 설교하기에 바쁘다.   7. 세상 비즈니스가 '고객 중심'이 되어야 성공하는 것처럼,목회자들도 성공하기 위해서 '성도 중심'의 목회를 한다.그러다 보니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고 성도들, 대중들이 되어 버린다.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 아니다. 대중들의 뜻이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판을 친다.다수결이 최고의 힘을 가진다. 그러니 목사들도 표를 던지는 청중들에게 비유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마치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에게 한 표를 구걸하는 것처럼 목회자들도 그렇게 굽실거리기 시작한다.   8. 상황이 이 정도쯤 되면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어떻게든 교회 돈을 좀 더 자기 앞으로 빼내서 유용하고,차세대 통장을 만들어서 자식 유학시키고,자기 노후 대책 세우기 바쁘다.   9.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중형교회가 되면 '교만'해지기 시작한다.노회장쯤 되고, 목사 세계에서도 파워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면 목에 힘을 준다.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 세상 영광의 맛을 보면서 점점 세상으로 빠져간다.그것이 사탄이 놓은 올무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10. 이렇게 교만의 올무에 빠지게 되면 사탄은 이 목회자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이젠 세상 영광을 취하게 해 준다.정치인들도 손을 뻗쳐오고, 지방 자체 단체에 있는 시장을 비롯한유력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가 이루어진다.그러면서 정치적 파워도 생기고, 사회 유지로서 한 몫을 감당하게 된다.그럴수록 마귀는 점점 더 높은 자리로 올려 주어서 다시는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세상 사람들은 그런 목사를 '성공한 목사'라 하지만, 영적으로는 마귀에게 완전히 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11.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사단의 공격은 점점 더 강해진다.대형교회는 목회자로서의 성공의 척도가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그런 대형교회는 사단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하나님이 그렇게 해 준 것으로 생각하지 누가 마귀가 그렇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겠는가?그러나 대형교회는 이미 마귀들이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혼합주의로 나가지 않는데 어떻게 대형교회가 가능하겠는가?부부간에도 맞지 않아 다투고 이혼하는 판국에수천 명, 수만 명이 한 뜻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진리를 고집하고, 회개를 외치고, 천국 지옥을 외쳐보라!장례식 예배, 추도 예배 폐지한다고 해 보라!아마도 교인들이 데모할 것이다. 그러니 대형교회 목사는 그들과 타협하여 혼합주의로 가 버리는 것이다.   12. 돈은 하나님만큼이나 힘이 있다.그래서 목사들이 처음엔 하나님을 의지해서 시작했지만 나중엔 돈을 붙잡는다.교회를 지어야 하고, 선교사업도 해야 하는데 그것을 기도로 하기보다는 돈으로 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사탄에게 넘어간다.사탄은 돈을 주어서 선교도 하게 하지만, 구원 없는 선교, 열매 없는 선교를 하게 한다.목사도 속고, 성도들도 속고, 다 하나같이 속는다.그렇게 하고선 목사도 교회도 자기들이 선교 많이 한다고 나팔을 불고, 광고하고, 인터넷에 올린다.   13. 대형교회 목회자는 인기 연예인을 방불케 한다. 그 인기에 맛 들여진 목회자들은 자꾸만 스크린에 나오려 하고,자기의 설교 모습을 전국 방송에 내보내려 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 영광을 구하며, 자기를 나타내려 하다 보니예수님은 뒷전이고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만다.   14. 목회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음란 마귀'가 찾아온다.수많은 아름다운 여성도들을 대하다 보면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목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단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음란에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여자를 통해 접근해 온다. 목사 자신이 천국을 위해 고자가 되지 않은 이상집요하게 찾아오는 음란의 영을 물리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사모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또 육체적 접촉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에 이미 간음하게 된다.수많은 목회자들이 음란죄에 빠진 것이 현실이다. 유명할수록 더욱 그러하고, 부흥사일수록 음란죄에 빠져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설마 저 목사님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누구도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신다.   15. 목회자로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면 국가조찬기도회에 초청을 받게 된다.크리스천 국회의원 기도회에도 가게 된다.그렇게 정치인들과 접촉하게 되면 위세 등등한 목사님이 된다.변질되기 시작한다.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누구를 밀어 주라고 하고어느 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둥 정치적 발언을 교회 강단에서 하게 된다.이미 사탄에게 넘어간 상태이다.   16. 큰 교회를 세워 놓은 목회자들은 그 교회 남 주기 아까워서 자기 자식에게 세습시킨다.그 세습 작업은 자기 자식이 어릴 때부터 서서히 이루어진다.유학을 보내서 박사학위를 받아 오게 해서 목사로 강단에 세운다.그러면서 자기는 서서히 뒤로 빠진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식하고 강단을 나눠 먹기 한다.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자기 사유화된 교회이다.그런 교회 성도들은 불행하다.   17. 목사들이 한기총이니 총회니 노회니 하는 곳에 나가 한자리하려고 돈 봉투를 돌린다. 서로 싸우고 다툰다. 상대방 후보를 헐뜯는다.세력 다툼을 하고, 정치하기 시작한다.그러다 보니 목사가 아니라 '깡패'가 되고 만다.목사 입에서 "개XX"가 나오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면서상대방 세력을 향해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린다.완전히 사탄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   18. 더 이상 목사들이 천국과 지옥에 관심이 없다.믿음 생활이야 어떻게 하든 죽으면 당연히 천국 갈 거라고 믿는다.회개하고는 담쌓은 지 오래다!자기만큼 의로운 자가 없고, 자기만큼 성공한 목회자가 없다고 착각한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이 땅에 있다.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어떻게 하면 부동산을 더 많이 소유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더 좋은 차를 탈까?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더 많은 재산 물려 줄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자식들 미국이나 외국에 유학시킬 수 있을까?예수님을 발판삼아 출세해 보려고 하고,자기 배를 채우려 하는 목회자로 전락한다.   이런 목사들을 주님이 어떻게 쓰시겠는가?돈과 음란과 명예와 세상 영광, 쾌락,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차서 그런 것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달려가는 목사들을 주님이 어떻게 쓰시겠는가? 그들이 가는 곳은 지옥불이다. 열심히들 달려가고 있다.한국교회 많은 목사들, 하나같이 지옥불로 달려간다. 정말 주님이 쓰시는 숨겨놓은 목회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지금 한국교회 많은 목사들은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돌이켜야 한다.죽고 싶지 않으면 회개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가운데 목회자가 있다면당신도 타락의 길을 걷고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주님께 책망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사의 타락 과정을 당신만큼은 밟지 말기를 부탁한다. 주님이 원하는 정도로 가라!그 길은 고난과 핍박이 있는 곳이다. 좁고 험난한 길이요, 십자가 지지 않고서는 못 가는 길이다.배고픈 길이요, 인기도 없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길이다. 그래도 그 길을 가야 산다. 목회 실컷 하고 정죄 받지 말고, 지금 돌이켜라!타락한 목사가 되지 마라!'내 마음에 합한 종'이란 말을 듣도록 하라! 주여!한국교회 목사님들 타락을 막아 주시옵소서!예수님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게 해 주시고,목사님들에게 먼저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목사가 살면 교회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대형교회, 중형교회, 소형교회를 담임하는 모든 목사님들을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고,타락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목회자들을 살려 주시옵소서!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그리하여 한국 교회가 마지막 때,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4-05-13 13:25:2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