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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것은 아내를 통해 아침에 들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자매(?)는 "이렇게 무서운 글에 은혜가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이 무엇이 그리 무서울까요? 지극히 정상적인 글인데 말입니다. 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사는 분들에게는 무서운 글일지 모르지만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극히 정상적인 글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의 어려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원 저자가 개역성경을 썼으므로 성경 구절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센스만 보시기 바랍니다.)   ----------------------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죄를 부추기는,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계속해서 오랫동안, 그대로 조장 되었던... <비겁한 침묵의 악들.>   침묵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다양한 언어의 색깔과 표현들이 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함께 해야 할 목표와 방향들을 정해야 될 때 그 의견들이 제시 되 면은, 그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일관 하게 된다.   그 침묵 속에는...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한다는 긍정의 의미가 들어가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나와는 뜻이 다르기에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 그 침묵들을 쓰기도 하며이것도 저것도 그다지 모두 다 관심이 없기에 그대로 그렇게 침묵들을 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여러 상황들과 오랜 정서 상조용히 있는 침묵들을, 미덕처럼 여겨왔고 여겨져왔었다. 한 두 번씩은 모두 다 경험들을 해 봤던 일들... 그것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말해서 생겨났던 어려운 일들 또 굳이 빠르게 행동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그러함에도...그러나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또 분명하게 행동하고 움직여야 할 때 임에도 가만히 있어서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위험한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죄를 부추기는 일들에... 함께 덩달아 수없이 무언의 동조를 해 왔던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불의와 불법들 앞에, 그대로 말하지 않는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그 곳이 바로 이 시대 전혀 부끄러움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벌거벗은 교회들이 아닐까?   오랫동안 하나님께선 불의와 불법 수많은 악들 앞에서그 악의 근원인 이유와 원인들 뿐 아니라침묵하는 절대 다수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뜻들도 계속해서 보내 오셨다.그 무지함과 안타까운 많은 연약함들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꼭꼭 집어서 다 드러내시고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데... 지금은, 침묵 할 때가 아니고... 절대로 결코, 침묵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9,10>   교회들 속... 수많은 불의와 불법들이 일어 날 때마다하나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속에서 수도 없는 무지함 가운데그 안에서 계속 되어지는 무분별함과 무책임들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의와 불법 속에 타락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렸고 설령, 불의와 불법들 앞에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뜻들을 알았다 해도서로의 기득권들과 더러운 이권들이 오랜 세월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 켜눈감고, 입을 다물고, 철저하게 침묵함으로...끓어오르는 탐심과 탐욕으로, 오랜 때가 찌들어가는 흉칙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렇게 까지, 이렇게 되도록 망가트려 버렸다. 이제, 이 상황들 속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그 어느 것보다... 불의와 불법들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하고 비참한 무언의 동조이다.이제 곧 이어, 그 책임들을 너무나 선명히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하나 물으실 것이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보라 이 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이사야65:2~7>   이제, 하나님의 그 모든 때가 되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영적 무지함 들과 무관심들로 함께 빚어 만들어 놓은 교만함의 축제들로 높이 쌓아올린 타락한 성들...   그 안에서... 그 속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악한 패역들의 끈질긴 고리들...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 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일에 무언의 동조들을 해 왔던 수많은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랫동안 진실들을 꼭꼭 감추고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이 시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우리들의 벌거벗은 몸,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아닐까?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이사야5:12,13>   정녕 눈앞에서 수많은 불의가 행하여지고 도적질한 영적 권력의 남용들이 자행되어도알면서도, 보면서도, 그 권력의 폭력들 앞에서자신들의 이름과 영역, 지위와 위치들을 모두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아무 말 하지 못하고도리어 그 권력 앞에 아부하고, 아첨하며, 묵인해 버리는 정녕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많은 모습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참 하도록...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왔던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와 비리가 무엇인지는 그 권력의 혜택들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 받는 영향력의 달콤함들 때문에 모두 다 쉬쉬쉬하며 꼬리들을 감추고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탐욕의 방들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은 정녕 아닌지....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이사야5:20>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 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어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8:12>   그러나 오래도록, 오랫동안 이 패역 앞에 긴긴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광과 이름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 일어나시리니... 그 때가 되면 불의와 불법들을 알면서도 도와주었던 자와 도움을 받았던 자 모두가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의 채찍들 앞에 반드시 그대로 두렵게 서게 될 것이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레미야 6;30,31>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3>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3988?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boardType=M&regdt=20130514032134
2013-05-16 23:25:21 | 관리자
역시, 김문수 목사님께서 정확한 말씀 적용으로 참된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하여 주셔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참되고 정확무오 하신가를 마음속에 한번더 새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6 14:59:41 | 김건
네, 여러 형제님들이 답을 올려주셨네요. 아래 말씀들도 함께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예비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 종은 채찍을 많이 맞되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들을 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사람들이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눅12:47-48).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약3: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진리를 듣고, 알면서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은 자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 책임에 있어서 차등을 둔다는 뜻이지 몰랐기 때문에 책임을 면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그들은 주의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9).
2013-05-16 14:28:11 | 김문수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네게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였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에게는 더 큰 죄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요 19:11)
2013-05-16 09:27:26 | 답변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만약 큰 죄를 지은 사람과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똑같은 벌로 다스리신다면 공평하지 못한 일입니다. 갈6:7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죽어서 지옥에 간 사람과 여러 번 듣고도 자기 마음으로 거부한 사람이 갈 곳의 등급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11:20-24 그때에 그분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시니라. 고라신아,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벳새다야,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 안에서 행한 능력 있는 일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오래 전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속에서 회개하였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여졌으나 지옥에까지 떨어지리라. 네 안에서 행한 능력 있는 일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것이 이 날까지 남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히10:28-29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 알 레이시의 천국과 지옥 바로알기(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책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찾아보고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05-16 09:13:38 | 유준호
정목사님 설교중  제가 들은 것인데요(지옥의 등급)  어떤 사람이 복음의 빛을 많이 받았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지옥의 고통이 더 클 것이고 복음의 빛을 적게 받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옥의 고통이 덜 할 것이라는 설교를 들었는데요.   그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 수가 있을까 해서요? 알려주셨음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20 22:5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16 05:33:09 | 김기덕
안녕하세요? 지인을 통해 옥성호 형제의 귀한 글 한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위력 있는 설교입니다. 바른 것을 선포하는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 위험한 설교   며칠 전 만난 친구에게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군요. “그 목사님 설교를 한 마디로 하면 ‘안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지.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안전한 설교....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없는 설교를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설교는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바로 안전한 설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의 가르침은 실로 ‘안전한 설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거나....둘 중 하나였습니다. 안전한 설교를 달리 표현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목회자들 중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설교는 안전한 설교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나의 설교가 과연 ......성도들의 현실과는 동 떨어져 저 멀리 구름 위에서 들리는 월요일 학교 조회 시간의 ‘교장 선생님 훈시’와도 같은 그런 설교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설교로 가득찬 교회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안전한 설교에 물든 목회자와 그런 설교를 듣는데 익숙해진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현상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상의 평온함을 깨는 어떠 시도들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해온 것이 비록 ‘거짓과 기만, 위선’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관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이 아닌 일상이 제공하는 기득권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참과 거짓을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소 귀에 경읽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위험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더 큰 위험과 더 많은 적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위험한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33년간 짧은 생이었지만 자신의 ‘위험한 인생’을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사는 것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몫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외쳤던 ‘위험한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집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는 점점 더 우리의 예배 속에서 사라지고 우리 주변은 ‘동업자 의식’에 젖은 ‘안전한 설교’, ‘믿음의 명문가를 만들자’라는 식의 안전함을 넘어 실로 하나마나한 헛소리 설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로 인해 바뀌었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메일을 통해 내가 갈급하던 ‘위험한 설교’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름 아닌 사랑의교회 문제들과 관련해 한 집사님이 내게 보낸 장문의 글었습니다. 그 메일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몇 년전 제 초심과 각오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지쳐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지만...그래선 안되겠지요?”   이 분의 글은, 이 분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내게 하나의 ‘위험한 설교’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강단 위에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가 실종되어가는 만큼 나는 내 주변에서 삶으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들을 더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신앙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사는 일이라는 기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Dxch/60?listURI=%2Fhowsarang%2FDxch%3FboardType%3D
2013-05-15 14:56:30 | 관리자
사사기 14:10-17 10 이처럼 삼손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젊은이들이 그리하곤 하였더라. 11 그들이 삼손을 보고 서른 명의 동무를 데려다가 그와 함께하게 하니라. 12 ¶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능히 수수께끼를 알아내어 확실히 내게 밝히 보이면 내가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능히 내게 밝히 보이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수수께끼를 내어 우리가 듣게 하라, 하매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15 일곱째 날에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네 남편을 꾀어 그가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밝히 보이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너와 네 아버지 집을 불태우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려고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매 16 삼손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당신이 내 백성의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는 그것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였도다, 하니 삼손이 그녀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늘 어찌 그대에게 알려 주리요? 하였으나 17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그 앞에서 울며 그를 몹시 괴롭게 하므로 일곱째 날에 그가 자기 아내에게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수수께끼를 자기 백성의 아이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질문의 요지는 15절에서 삼손의 아내가 일곱째 날에 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왜 17절은 그의 아내가 잔치하는 이레 동안 울었느냐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그냥 풀리는 것 같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이 잔치를 시작하면서 수수께끼를 냈는데 아무도 그것을 풀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처음부터 그에게 울면서, 이레 동안 내내 울면서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15절에 있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불사르고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급해지니까 이레 째 되는 날 그녀에게 와서 15절처럼 확실하게 위협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삼손 앞에서 또 울었습니다. 큰 문제가 안 되는 이런 부분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잠시 생각하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와 자기 아버지 집의 생명이 위협을 받자 처음부터 이레 동안 내내 운 것으로 보면 됩니다. 샬롬 (*) 참고로 다음에 질문을 올릴 때에는 차분하게 요점을 잘 적어서 올리면 좋겠습니다. 글을 잘 쓰면 보기에도 좋고 답하는 사람도 요점을 알고 잘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5-10 10:15:56 | 관리자
삿 14장 15절에 일곱째 날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동무들에게 수수께끼를 낸 기간이 잔치 기간 이레인데 14절에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있고 15절에는 일곱째 날에 그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7절에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흘이 지나서 하면 4일 남았는데 17절에 이레 동안 이라하면 날짜가 안 맞는거 같은데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면 감사합니다. 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이해가 부족하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10 10:1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09 16:22:00 | 김기덕
왜 안 하는가? (통성기도) 05    통성기도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대예배 시간을 제외하고는 새벽기도나 금요기도회 그리고 기도원에서 ‘주여 삼창’과 함께 목청이 떠나가라고 앞 다투어 큰소리로 통성기도를 합니다. 사실 새벽기도와 마찬가지로 통성기도도 전 세계 교회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믿음의 어떤 위인들도 이런 식으로 기도했다는 사례가 없습니다. 저희 교회 같은 자유교회를 방문하는 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왜 이 교회는 이런 식으로 열심을 내서 기도하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하므로 이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통성기도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성도들이 통성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기에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성도들의 통성기도 인식 질문 1: 통성기도 꼭 해야 되나요?   저는 통성기도를 못 하겠어요. 저희 교회에서는 자꾸 통성기도를 하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제가 병적으로 내성적이고 사람들을 의식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말하는 게 많이 어색하므로 제 기도를 누가 옆에서 들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또 저는 “~옵소서. ~주시고, ~합니다.” 등등 이런 말들을 잘 못해요. 그래서 그냥 대화하듯이 기도하는데 혹시 어떤 사람이 듣고 “아 유치해. 무슨 기도가 그래.”라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아직 믿음도 없고, 교회에 간 목적이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찔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기도해도 되나?”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 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백해야 된다고 나와 있다던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혼자 마음속으로 하면 죄가 되나요? 저는 마음속으로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대화하는 식으로 기도하는 게 많이 편하거든요. 수련회 때도 날마다 기도회를 하잖아요? 처음 갔는데 사실 엄청 신경이 쓰였어요. 한 30분 하다가 그냥 나와서 숙소에 가고 그랬거든요. 옆 사람들은 다 소리 내서 고백하고 눈물 흘리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저는 뻘쭘하게 그냥 앉아서 눈 감고 마음속으로 몇 마디 한 것밖에 없어요.   내일 새벽기도를 처음으로 가는데 두 시간 동안 사실 할 말이 없어요. 미칠 듯이 힘든 일도 없고, 한두 마디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거든요.   기도회 하다가 먼저 나와도 되나요?기도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죠?아는 언니 오빠들은 기도할 때 술술술 말을 하는데 저는 한 마디 하고 생각하고 한 마디 하고 생각하고 그러거든요.   대답 1: 통성기도 꼭 해야 되나요?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에게 통성기도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훈련으로서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훈련하지 않으면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창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을 고정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단 5분이라도 좋습니다. 매일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차츰 기도 시간을 늘려 가시면 됩니다.통성기도는 그러한 장애물을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면 얼마든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성기도 할 때 남을 의식하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기도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면 어느 순간 기도의 줄이 잡히면서 유창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울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바라면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우리가 너무 힘들어 어떤 말로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기도를 유창하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어투로 경건해 보이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므로 욕을 쓰거나 속어나 비어를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기도는 처음에 남들 앞에서 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막막했답니다. 혹시 다른 사람 앞에서 기도를 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연습을 해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서투르게 한다고 웃긴 건 아니에요.   질문 2: 통성기도에 관해서 저희 집에서는 엄마만 교회에 다니시고요. 저도 엄마 따라 몇 번 교회 가다가 대학 들어오면서 한번 제대로 하나님 믿어 보고 싶어서 큰맘 먹고 CCC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채플도 열심히 하고 수련회도 열심히 가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수련회랑 그런 데 분위기가 참 저랑 안 맞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간사님이나 선배님들한테 그렇다고 말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티를 내지 않고 2년 정도 다녔습니다.   일단 수련회 같은 데 가면 기도 제목 말하면서 “자, 큰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옆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땅 치고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는데 저는 눈 감고 기도하려고 해도 딴 사람들 기도 소리 때문에 집중도 안 되고 한두 마디 하면 기도도 안 나오고 똑같은 말만 계속한다거나 아니면 그냥 멍하게 눈감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통성기도에 거부감도 드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자꾸 수련회도 가고 싶지 않고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추신: 아, 그리고 수련회 가면 ‘은혜 받는다’고 하는데 ‘은혜 받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대답 2: 통성기도에 관해서 제가 예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증상입니다. 교회 사람들 착하잖아요? 친절하고. 그래서 친해지기 쉽고. 교회 활동도 열심히 하다 보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도 맡게 되고.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나오는지. 교회 다닌 지도 어느 정도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믿음이 깊은 줄 알고 있고. 나 자신이 생각해 봐도 믿음은 있는데 기도를 못하니 이것 참~ 허허~~ ^^.   기도하는 뜨거운 분위기를 타고 “주여 삼창!”하고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싶은데 “주여 삼창!” 끝나는 동시에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 같은 말만 계속하고.   이거는요. 쉽게 말해 기도를 안 해봐서 그래요. 또 자기 자신을 안 드러내서 그렇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소리 지르며 울부짖으며 꼭 그렇게 기도해야 믿음이 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통성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야 말로 믿음이 강하신 분들이죠.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기도가 중요한 것이지 통성이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남들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방식대로 기도하세요. 꾸밈 없이요. 저도 그 통성기도를 잘하고 싶어서 철야 예배 때 교회 본당 맨 꼭대기 아무도 안 보이는 가장자리에서 기도한 적도 있었는데요. 1년 만에 되더라고요.   ‘은혜 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글로는 설명 못 하겠어요. ‘성령을 영접한다’라고도 하는데 이건 때가 없어요. 찬양하다 기도하다 말씀 듣는 중에 제각각 다르니까요. 뭔가 확~~~ 소름이 돋는 기분인데 흠. 뭐라 설명해야 할지. 귀하도 나중에 느껴 보실 거예요. 성령만 영접한다면야~~!! 통성기도에 대한 오해 평범한 성도들이 겪고 있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에서 기도 및 통성기도가 얼마나 잘못 인식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질문자들은 사실 순수한 분들이고 이들이 하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옆의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크게 하자 이들은 크게 위축되고 무언가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줄 알고는 질문해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데 답변자들의 글을 보면 어느 부분은 맞고 어느 부분은 틀려서 오히려 질문자를 더 혼동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답변자들의 글에서 잘못된 것들을 찾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초신자에게 통성기도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지만 기도의 훈련으로서 좋은 방법이다.2. 통성기도를 통해 기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3. 통성기도 할 때 남을 의식하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으므로 큰소리를 내서 자기의 기도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4. 이렇게 집중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다.5. 통성기도는 울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6. 통성으로 기도하는 분들은 믿음이 강한 분들이다.7. 통성기도는 열심히 한 1년 연습하면 된다.8. ‘은혜 받는다’는 것은 찬양하거나 기도하다가 혹은 말씀을 듣다가 소름이 돋으면서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통성기도도 새벽기도와 마찬가지로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성기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의 유래   한국에서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와 함께 초기 부흥 운동에 나타난 특징 중 다른 한 가지는 회중이 동시에 소리 내어 기도를 드리는 통성기도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뜨겁게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신비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맥큔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보고서에 통성기도와 회개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예배당 안은 “기도합시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예배당 안에 있는 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큰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어떤 이는 울고 있었고, 어떤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목을 나열해 가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모두가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있었다. 많은 소리가 있었음에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일사불란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이처럼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길선주 목사와 장대현 교회에서 비롯되었음이 확실합니다. 비록 선교사들이 이에 대하여 좋게 평가를 하였지만 이런 현상은 이교도들의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에서도 통성기도를 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7:16, 20; 눅6:44). 길선주 목사 등이 주축이 된 평양 부흥 성회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을 살펴보면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등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무지와 암흑으로 몰았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열매는 1906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오순절/은사운동의 열매와 동일합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귀의 거짓 영은 ‘아주사 부흥’을 기점으로 해서 전 세계 교회에 무지와 흑암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무질서와 혼동과 무지와 부정함의 근원인 신사도 운동 등을 포함하는 이런 은사 운동은 현재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의 매개체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 영의 활동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시작된 통성기도입니다. 오순절/은사주의의 거짓 영은 예배 음악 및 질서의 파괴와 기복 신앙을 조장하면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데 쓰이는 마귀의 도구 중 하나가 통성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이 무슨 견해를 피력하고 어떤 결과를 개인적으로 경험했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 고장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들이 왜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고 또 그것들이 기독교 식 샤머니즘 내지 자기 열심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땅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 행위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위선으로 크게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요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5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6:5-6). 마태복음 6장에는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의 기도와 금식 문제가 자세히 분석되어 있습니다. 또 7장 21절부터는 그 당시 마귀들을 내쫓고 “주여, 주여, 주여” 하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자들의 문제와 예수님의 정죄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기도의 요점은 골방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한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통성기도를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다음은 사도행전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한 사례들입니다.   이들이 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행1:14).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행2:42).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그들이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행4:31).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그 일을 깊이 생각한 뒤에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5, 12).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13:3).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제자들과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성령 강림 후에 그들은 교리를 배우며 기도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이 있자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또 후에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순교하게 되자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모여서 기도하고 선교 여행을 하도록 보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모여서 기도한 사례들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은 결코 그들이 통성으로 기도했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은 통성기도가 아닙니다. 왁자지껄 대며 기도하는 것은 사실 이교도들의 풍습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바알의 대언자들과 대결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그들이 자기들에게 넘겨진 수소를 취하여 예비하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오 바알이여, 우리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만들어 놓은 제단 위에서 껑충 껑충 뛰더라.…28그들이 큰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관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왕상18:26, 28). 이교도들은 소리를 지르고 말을 많이 해야만 자기들의 신이 듣는 줄 알고 북  치고 장구 치며 큰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하였지만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이교도들의 산물이 많아서 교회가 혼잡하였습니다. 특히 이교도들의 방언이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기도하는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32대언자들의 영은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나니 33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 34너희의 여자들은 교회들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고전14:23, 32-34).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지금 통성기도 하는 집회에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통성기도 하는 그 모임 자체가 혼동의 도가니가 아닙니까? 더욱이 교회에서 자매들이 소리를 내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이 그 자체를 아예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여자들은 소리 내어 기도하거나 남자들 위에 서서 남자들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딤전2:11-15). 그래서 성경은 목사와 집사는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으로 남자만 될 수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딤전3:2, 12). 성경의 기도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혼의 소원과 감정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대화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혼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욥21:15; 시10:4).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고(시55:17; 단6:10) 성경의 모든 성도들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족별로 기도하였으며 일반 업무를 하면서도 짧게 기도하였습니다(느2:4). 기도의 자세는 특별하게 규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왕상8:22) 머리를 숙이거나(창24:26) 무릎을 꿇거나(눅22:41)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였습니다(마26:39).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열렬히,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에는 죄의 고백과 감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바른 이성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마음으로 무신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므로(겔36:37; 마7:7-11; 빌4:6; 딤전2:1-3; 약1:5)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입니다. 어떤 이들은 통성기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네가 부르짖는 소리에 그분께서 네게 크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 소리를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9).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시34:6).  사실 이런 구절들은 다 개인이 하나님과 홀로 기도하는 것을 묘사하지 교회가 통성으로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개역성경의 렘33:3을 인용하며 통성기도를 합리화 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개역성경)   그러나 이것은 개역성경의 명백한 오역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물론 NIV, NASB, NKJV, RSV 등도 하나같이 이 부 분을 “Call unto me.” 즉 “나를 부르라.”로 번역하였습니다.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흠정역).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이 구절도 실은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열심을 다해 기도한다 해도 기도의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은 오직 성경에서 오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십니다(잠28:9).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습관을 ‘백독일도’(百讀一禱) 즉 “백 번 말씀을 읽고 한 번 기도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통성기도에 대한 결론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의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통성기도같이 성도들이 예배 때에 어디서나 동일하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남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귀가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교도들의 관례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진정으로 전체 회중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무방하지만 이것도 스스로 잘 통제하면서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부터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권면이 우리나라 교회들에서도 지켜지면 좋겠습니다.  32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40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지니라(고전14:32, 40).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35:3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새벽기도) 04    새벽기도   1년 365일, 성도들이 날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교회만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새벽기도는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심지어 다른 나라에 선교하러 가서도 새벽기도를 정착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유교회 성도들은 한 번도 이런 것을 시행한 적이 없으므로 과연 새벽기도는 어디에서 나왔고 성경적인지 아닌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기도의 유래   교회 역사가들은 길선주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로 시무하던 때 그분을 중심으로 1905년경부터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하나님을 믿기 전 친구로부터 <천로역정>과 몇 권의 책을 받아 읽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분은 “무엇이 참 도인가?”를 알기 위해 번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섬기던 신에게 빌어보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자 그분은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는, 중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상제님’이라고 부르듯이 ‘상제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한 시쯤 하늘에서부터 사방이 진동하는 듯한 큰소리가 나면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하고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길선주 목사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주옵소서!”하며 방성대곡하는 가운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더욱 힘써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그분은 새벽 미명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기고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의 운명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다음에는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경건하고 간절하고 신비로운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새벽기도는 1907년 평양 부흥 운동과 함께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습니다.   사실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그의 종교 편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구원받기 전에 병을 얻게 되어,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한국 무교 종파 중 하나인 관성교(關聖敎) - 삼국지의 관우를 섬기는 도교의 일종 - 에 심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영적 만족도 얻을 수 없게 되자 21세부터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였습니다. 전통 무교에서 새벽에 수련시간을 갖던 것에 익숙하였던 그는 기독교로 귀의한 이후에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고 이런 관습을 교인들에게 강제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새벽 3시 반에 수행이 시작되고 승려들은 새벽 예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불교는 수행을 중시했고 그중에서도 새벽 예불을 수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교도들의 샤머니즘 정서와 한국 민족의 특유한 종교성이 결합되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새벽기도 전통이 만들어졌음을 누구라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창시자인가?   어떤 이들은 새벽기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벽기도의 기원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 하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복음서 기록을 그 근거로 내밉니다(막1:35).   그러나 이것은 새벽기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매일 새벽에 기도하신 것도 아니고, 그분이 한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한다면 우리도 믿음 생활 시작하면서 다 40일 금식 기도를 해야 하고 그분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것처럼 매일 밤 땀을 피처럼 흘리면서 기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이 새벽기도의 확실한 근거라면 왜 지금까지 근 2,000년 동안 다른 나라의 성도들은 한 번도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믿음의 위인들 즉, 루터, 칼빈, 에드워즈, 스펄전, 휫필드, 웨슬리, 무디, 로이든 존스 같은 분들은 새벽기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이 개인적으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했을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365일 새벽기도는 전 세계 어떤 교회도 알지 못하던 관행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 중 하나가 ‘새벽기도’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나라 교회에서도 한국의 새벽기도를 배워 시행하는 곳이 있고 한국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 역시 선교지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더 이상 한국 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를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다른 나라 성도들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새벽기도라는 큰 은혜를 특별히 한국 교회에만 베풀어 주셨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큰 은혜를 받아 새벽기도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는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었을까요?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더욱이 하루를 시작하며 첫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새벽기도가 한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눈에 들어 장로나 집사의 직무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과 열심 - 이것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함 - 을 표출하기 위해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새벽기도를 명령하셨으므로 이것이 큰 구속력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는 반드시 교회에서 새벽이나 밤에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샤머니즘의 도가니 속에서 바로 이 같은 무지에 의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벽기도라는 것이 한국에서만 생기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의 폐해 새벽 5시에 예배를 드리려면 적어도 4시에는 깨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8시까지 출근해야 하므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곧바로 회사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저녁 8시 이후에 퇴근합니다. 새벽 4시에 깨려면 적어도 10시에는 자야 합니다. 한 집의 가장이 이러면 집안은 누가 돌봅니까? 어쩌다 한 번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매일 이런 일을 하려면 온전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이룰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는 새벽기도 이후에 잠을 충분히 더 자고 하루 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만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그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 몸은 구원 받은 이후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몸을 피곤하지 않게 잘 가꾸는 것도 성도의 의무입니다. 또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을 가족들과 같이 지내야 합니다. 성경도 읽고 책도 읽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정상인에게는 새벽기도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의 어느 목사나 성도도 이런 식의 새벽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믿음은 대개 새벽기도회나 매일 교회 가서 일하는 것 같이 몸으로 때우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척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한국 성도들에게는 성경의 진리를 알려는 열망이 없고 산 기도나 새벽기도를 통해 하늘에서 직통으로 무언가를 받으려는 생각이 팽배할 뿐입니다. 머리를 써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기능들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다보니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이 교회 안에 팽배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기도 등이 영성과 충성의 잣대로 인식되고 있으므로 큰 교회의 장로가 되려면 반드시 주차장 봉사와 새벽기도 참석 등이 요구됩니다. 특히 이단들은 새벽기도를 크게 강조하며 새벽기도를 안 하는 것은 큰 죄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이 출석을 부른다는 말이나 천사가 참석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다미 선교회 회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는다고 흰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고 밤 12시 정각에 예배드리던 것과 비슷하게 지금까지 새벽기도는 성도의 열심을 측정하는 잣대로 알게 모르게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새벽기도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특별새벽기도(특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특정한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면 말 그대로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심지어 부산에서도 KTX를 타고 서울의 OO 교회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용한 것으로 알려진 그런 교회의 목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자기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특별새벽기도로 유명한 OO 교회에서는 최근에 ‘2013 새벽기도 목회자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강사인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자그마치 5,000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또한 이 교회에서는 2013년에만 50만 명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새벽기도를 하니 교회가 부흥된다고 광고하자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도 300명의 목회자와 신학생이 그 콘퍼런스에 참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벽기도 예찬론을 펴며 교회 성장론을 가르치는 이 교회 목사가 바로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준비한 분입니다. 과연 이분은 예수님만이 진리요,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새벽기도회에서 외칠까요? 과연 그렇게 진리를 외치는 목사가 WCC 개최지 확정을 위해 그리고 WCC 총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 무지한 성도들을 모아놓고 특별새벽기도를 주관하며 종교 올림픽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는 10월 하나님 섭리 아래 세계적인 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 WCC 부산 총회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WCC는 세계 140개국 349개 교단이 연합한 단체다. 세계에 유엔이 있다면 기독교에는 WCC가 있다. WCC에는 약 5억 9000만 명의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다. WCC 총회는 7년 만에 한 번씩 열린다. 한국에서 WCC 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국민일보 쿠키뉴스 2013년 1월 29일).   이런 교회에서 특별하고도 특별한 ‘특새’가 주로 언제 열리는지 아십니까? 수능 시험 전입니다. 이때가 되면 온 나라의 교회들이 특별새벽기도를 하고 절과 암자에서도 중들과 신도들이 지성을 다해 특별새벽기도를 합니다. 지성으로 빌어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샤머니즘의 한 형태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특별새벽기도와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복채 주고 복을 빌어달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한국의 특별새벽기도는 오순절/은사주의 기복 신앙의 분출구입니다. 종교 통합을 강조하고 신비주의를 조장하며 과거에 유대인들이 행한 것처럼 무지 속에서 성도들을 파멸로 몰아가면서까지 교회 성장을 위해 성공하려는 목사들의 전유물이 바로 특별새벽기도입니다. 이런 무지의 결과에 대해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경고하였습니다. 1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곧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니라. 2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3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1-4).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지 속으로 성도들을 집어넣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매우 엄중한 정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1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새벽기도에 대한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새벽기도는 무속 신앙에서 나왔음이 확실합니다. 한국 교회 사가들도 이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결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모든 분들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원 자체는 바르지 않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순수한 성도들이 있으므로 새벽기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지도자들의 무지와 허영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가서 국가를 위해 자식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순진한 성도들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이런 성도들의 기도로 인해 이 나라 체제가 유지되고 경제가 부흥한 것도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희 교회 성도들 중에서 새벽기도를 원하는 분들은 다른 교회에 가셔서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다만 기도가 무엇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목사들이 바르게 알고 바르게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가운데 새벽기도가 기복 신앙 종교 생활의 일환으로 전락하면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모두 성도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벗어난 기도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29:5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축도) 03    축 도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의 맨 끝에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향해 복을 기원하는 축도를 합니다. 보통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형언키 어려운 영원무궁하고도 오묘한 구원의 섭리 및 주관하심과 우리 가운데 늘 역사하시어 슬프고 힘들 때 위로하시고 약하여 쓰러질 때 도와 일으키시며 우리의 구원과 행복과 축복의 성취를 위하여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세계만방에 복음을 펼치기 위하여 마음을 모아 계획하고 기도하며 나아가 충성하고자 하는 주님의 모든 종들에게, 진리 안에서 참된 복으로 영원히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개신교회에서 축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다 보니 심지어 설교는 듣지 못해도 축도는 꼭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축도 역시 천주교회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회만의 특징이며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형태의 기도를 목사가 예배 때에 한 적이 없습니다. 축도의 유래 장로교회의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는 축도는 복을 비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이며 목회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축도의 유래와 행위자 그리고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신교 예배 순서의 끝 부분에는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강복 선언(降福 宣言-축도)이라는 순서가 있다.   축도의 유래를 보면, 구약시대에 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전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허락하신 사역이다(민6:24-26). 이 축도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가장 활발히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물에게 주는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본다. 실제 예수님은 어린이에게 손을 올려 복을 주시고(막10:16)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에게 축복하셨다(눅24:50). 사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축도의 내용을 일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으로 구체화하여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고후13:14; 롬15:5-6; 엡6:23-24; 살전5:23; 살후3:16, 18; 히13:20-21 등이다.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축도는 사도적 전승을 받은 교회의 감독과 교부들이 사용하였으며 이는 사도적 전통으로 예배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주후 363년의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이단들의 축도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예배 순서로서의 축도를 존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후기의 신학자들은 축도를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은사로 이해하였다.   축도의 자세는 역사적으로 두 형태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두 손을 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긋는 것이었다. 중세의 교회를 비롯하여 현재의 구교(천주교)에서는 축도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사제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고 강복 선언이라 칭하면서 예배에서 실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 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축도를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그 정신은 현대의 세계 개혁교회에서 계승되어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 교수가 잘 정리해 주었듯이 개신교회의 축도는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축복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 사제의 강복 선언으로 이어졌고 개신교회를 세운 루터, 칼빈 등이 개신교회 안에 이것을 들여왔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상관없는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축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회자들만 축도를 합니다.   개신교 축도의 용어 문제 이렇게 구약시대 제사장의 전통을 물려받아 축도를 하다 보니 요즘에는 목사들의 축도 용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특히 축도 끝의 ‘있을지어다’에 대해서는 개신교회 안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습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는 고후13:14의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후속사이며 문안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마다 기록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 자신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인 목사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실수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있을지어다’로 축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근대적이요, 내면에서는 권위 의식이 가득 찬 발상이다. 현 사회에서는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층 간의 간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교회가 이 간격을 더 조성하여 목사와 신도들 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발상을 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있을지어다’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고후13:14 본문대로 목사가 주문 외우듯 한다면 축복 기도의 참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분별하여야 할 것은 고후13:14는 어디까지나 축복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축도문을 목사만 전용한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 같이 그 본문도 목사의 ‘축도 전용문’이므로 성도들은 성경에서 그것을 빼놓고 읽어야 한다는 이론이나 또는 그 본문을 이용하여 신도 누구나 축도를 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일부 목사들(특히 젊은층)의 권위 의식의 문제이다. 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진정 하나님의 소명을 가진 자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희생과 봉사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소유할 때 해결이 된다. 축도를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로 한다고 해서 목사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100년의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에 이미 토착된 목사의 축도의 말미어는 국문학적으로 손색이 없고 이미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에도 사용된 ‘빕니다’로 하여야 한다. ‘빕니다’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뜻이라고 국문학적으로 해석된 단어이다. 또한 청소년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빕니다’로 함이 가하다고 할 것이다.   축도의 실제 문제  개신교 목사들이 축도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개념이 은밀히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교 교육과 목회 사역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일반 백성을 축복하거나 저주한 기록들을 근거로 자기들도 성도들에게 복을 빌 수 있고 또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시대 목사의 직무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직무로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입니다. 신약시대의 목사에게는 결코 하나님께 명령해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게 하는 능력도 권위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저주할 수 있는 특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고후1:24). 1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기독교의 목사(Pastor)는 천주교의 사제(Priest)나 구약시대 유대교의 제사장(Priest)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동등한 형제로서 다만 양 떼를 이끄는 목양자의 직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가 설립된 지 채 6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교회 안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니골라당이 생겨났고 계시록은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15).  그리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니골라당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로서 구약시대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통치하려는 자들입니다. 신약 교회가 생기자마자 이런 무리가 생겼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자들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구약시대의 종교로 남아 자기들의 성직자를 제사장(Priest)이라 부르고 있고 성직자 계급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제는 제사장이 아니라 목사(Pastor)가 감독이나 장로로 교회를 치리함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경향은 개신교회 안에 늘 있어 왔고 그래서 이들은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지존자(Reverend)라는 호칭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목사들이 사용하는 ‘레버런드’(Reverend)라는 호칭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구속함을 보내시며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으니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지존자’ 즉 ‘레버런드’란 단어는 라틴어 ‘레베르’(revere)에서 온 것으로 15세기에 처음으로 존경의 호칭으로 영국의 성직자들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호칭에서 변형된 호칭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The Reverend’, ‘The Very Reverend’, ‘The Most Reverend’, 그리고 ‘The Right Reverend’ 등.   이 호칭들은 다 ‘가장 지존하신 분’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이러한 호칭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런던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종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모든 언행이 정말로 내가 그분이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길 원한다. 만일 하나님의 종인 내가 나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내 이름 앞에 하나님의 지존하신 호칭 즉 ‘Reverend’를 도둑질해서 붙이거나 천주교 사제의 로만 칼라를 하거나 성직자처럼 보이는 가운을 입는 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첨의 호칭들을 반대하시면서 제자들끼리 겸손하게 평등하게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가식적인 권위를 마땅히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스스로 영광을 받는 대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을 주도하며 사람들을 마귀의 제물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요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라.”(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좀 더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   다음의 글은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분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용기 있게 이런 글을 쓰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멸시하고 손가락질 하는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목사들로 인한 반발 심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뒤집어 본다면 목사들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무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천사도 흠모할 만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직무에는 그것에 합당한 더 엄격하고 분명한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직무가 존귀하다고 하여 목사가 도덕과 윤리를 초월해서 살아도 되거나 그럴 만한 권한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개신교 내에 이상한 바람이 불면서 목사들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또 그런 의식에 근거한 행동을 하면서 약한 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하는 것 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막으면 모든 것이 막힌다고 여깁니다. 노회나 목사들의 조직에서 다른 목사들을 심판하고 책벌할 때에도 진리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해 이런 일이 생김을 종종 봅니다.   내가 아는 한, 목사는 상대가 죄인이든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내게 유익을 주든지 불이익을 주든지 상관없이 사람을 살려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직무는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약하고 병들고 상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지 저주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저주는 특히 같이 믿음 생활을 하던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 자주 발생합니다. 한 성도가 은혜로운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심하다가 교회를 떠난다면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여겨야 합니까? 물론 성도가 잘못을 하거나 오해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목사는 항상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떠나는 성도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은 편치 아니할지라도 목사로서 편안하게 대해 준다면 떠난 성도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설령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난다고 성도를 저주한다면 근본적으로 목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자신의 소유로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소유도 아니고 교회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양들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강조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소유인 양들을 잠시 맡아서 양육하고 꼴을 먹이고 돌보는 직무를 수행할 뿐이지 결코 그 양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으면 교회관에 문제가 발생하며 목사의 윤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목사가 축복권도 있고 저주권도 있다는 의식을 보이기 시작하면 약한 성도들은 심지어 공포감을 느끼고 마음이 아프고 상하여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양들이 살아나서 기뻐하고 춤을 추며 젖을 짜고 생육하고 번성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아니하고 목사가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면 양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음은 육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메말라서 상한 채 죽는 것을 말합니다. 제대로 된 말씀의 양식과 지식과 사랑과 영적 능력을 통하여 양들을 먹이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자신에게 예속된 소유물로 본다면 이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바로 이런 목사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욕을 먹고 많은 성도들이 영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죽어 가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목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직무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자신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을 갖추고, 신앙의 담력을 얻은 목사라야 이 시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교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축도에 대한 결론   축도 역시 교회관의 차이에서 발생한 부산물입니다. 신약시대 목사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연장으로 보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을 휘두를 수 있지만 자유 독립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회에서 축도를 하는 목사나 목사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최소한 이 의식의 기원과 의미를 깨닫고 바르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20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22:17, 20-21).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25:3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주기도문)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9-13).   Lord's prayer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1)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 또는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 예배를 마칠 때(목사가 있는 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로 마침) (2) 수요 예배나 금요 기도회 등 기도회 성격의 예배를 마칠 때 (3) 전도사나 교육 전도사 등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교역자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를 마칠 때(전도사나 교육 전도사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라도 마치는 시간에 목사가 와서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음) (4) 가정 예배를 마칠 때 (5) 교회의 각 기관에서 회의를 마칠 때(6) 기타 주로 공예배 외의 예배나 집회 또는 모임을 마칠 때   이처럼 주기도문은 주로 예배를 마칠 때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암송하기도 하며 목사가 있어도 예배의 성격에 따라 주기도문 암송으로 예배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목사가 참여하지 않은 예배를 끝날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를 물으면 많은 분들이 주기도문에 축도와 비슷한 영적/물적 축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예배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와 주기도문 암송에 따른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배경   ‘주님의 기도’(Lord's prayer)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쳐 준 대로 형식에 가득한 위선적인 기도를 늘 반복해서 암송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기도 관행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5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6:5-8).   이 말씀이 끝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7절에 있듯이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면 자기들의 신이 기도를 잘 들어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제외한 이방 종교의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주어진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여전히 주기도문을 글자 그대로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무슨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지 단순히 암기한 말들을 암송하지 않습니다(빌4:6-7).미국의 교회들 중에 주기도문을 시도 때도 없이 암송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마도 복음을 받아들인 뒤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주기도문 암송을 강요한 것이 지금까지 교회의 규례로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도문 암송 관행은 먼저 천주교회를 통해 중국에 전달되었고 그 뒤에 한국의 개신교회에도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   천주교회는 기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 봅시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곧 기도하자면 먼저 기도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4편 p.903 #2650]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인용문에서 우리는 심각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한 기도의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내 목소리로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내 말을 들으셨도다. 셀라(시3:4).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나를 고치셨나이다(시30:2).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시62:8).  로마 카톨릭주의의 기도는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에 쓰여 있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이교도들이 하는 행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기도 방법을 금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6:7). 둘째,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교리 문답서는 성경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카톨릭 교회가 있어야만 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있기 오래 전에도 사람들은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창20:17).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주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민11:2).   성경의 성도들은 카톨릭 교회의 도움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연 발생적인 감정의 표현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에 박힌 듯이 주기도문 같은 것을 암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진심어린 기도를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교리적 문제   1. 율법적 구문   주기도문에는 신약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11절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님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약시대에는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시대에 살면서 헤매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도 사실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 교회 성도들과 자유교회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2.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을 번역할 때 사용된 바티칸 사본의 본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도 마태복음 6장 13절에 각주를 달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이 말하는 그 고대 사본이 바로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경 원본에 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기 위해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주신 것입니다.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3. ‘대개’의 문제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대개’라는 말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대개’를 넣어 암송하기도 하고 어떤 교인들은 뺀 채 암송합니다.   그럼 ‘대개’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그리스어 접속사 - 영어로는 for - 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앞부분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는 [메시아]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1930년대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때에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경에서 ‘大槪’ 혹은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 번역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혹은 ‘대략적으로’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중국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경우 1936년 신약성경에는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4.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한다   그냥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왕국’이 땅에 임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Heaven)이 아닙니다.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경에서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 등에 나오는 천국은 원래 ‘하늘의 왕국’이며 이것은 결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 즉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어 성경을 참조하여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중국어 번역처럼 ‘천국’으로 번역하여 교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신구약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며(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4:17). 또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는 글이 붙었습니다(마27:37).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배척당하시고 결국 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 상속 언약 즉 신약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잘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였으며(막1:1, 14)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을 제시하셨습니다(마4:17).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마지막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단2:44).   예수님은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시고 침례자 요한의 사역과 각종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했고(마23:37-39)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달되었습니다(롬11:30-31).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여기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때까지 견디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1차적으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입니다(롬11:26).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왕국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이 땅에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메시아로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천년왕국을 세워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랐고(눅2:30-34; 38) 그래서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속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실망에 잠겼지만(눅24:21) 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그분이 승천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행1:6) 이때에 그분께서는 왕국의 회복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므로 너희는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행1:7) 이에 그들은 왕국의 회복을 바라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행3:19-26). 복음의 초기에는 이렇게 왕국의 회복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인들의 회개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훼파시키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왕국의 회복은 이방인들 중심의 교회 시대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대언자들이 말하고 예수님이 초림 때에 세우려 했던 하늘의 왕국은 그분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문자 그대로 위엄 있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은 성경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하면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자들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등을 인용하며 천국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기존 우리말 성경의 ‘나라’는 원래 왕국입니다. ‘왕국’을 ‘천국’ 혹은 ‘나라’로 바꾸는 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완전히 가려 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폐해를 낳으며 그 결과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이스라엘 대체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기도문은 바로 이 ‘하늘의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속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유대인들이 간구해야 함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기본적인 교리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용어가 변경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의 모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을 알려줍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결정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 외에도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 사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 등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반복해서 외우는 것을 금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샘플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잘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그대로 암송해 드리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며 또 우리 마음에서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말이지 우리가 암송하는 특정한 형태의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개신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도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주기도문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잘 모르는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고 진리로 잘 인도해야 합니다.   신약 교회의 초기부터 자유교회 성도들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살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에게 경배하며 그분의 왕국이 이 땅에 속히 임할 것을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 왔습니다. 다만 예배 때마다 끝에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일은 반복하는 말로 암송 기도를 하지 말라는 주기도문 제정의 목적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는 암송하지 않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6:7-8).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19:43 | 관리자
왜 안 하는가?(사도신경)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혹은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암송하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습니다.   (1) 주일 낮 예배를 드릴 때 (2) 교회 학교에서 주일 예배를 드릴 때 (3) 새벽 기도회를 시작할 때(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 (4) 특별한 성격의 예배를 드릴 때(예: 총회나 노회 등의 개회 예배) (5) 기타 예배 시 그 필요성이 인정될 때 (6) 또한 예배 인도자의 재량이나 예배의 성격에 따라서는 그 외의 예배 순서에 포함되는 경우도 많다. 예배를 마칠 때 주로 암송하는 주기도문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예배 순서의 앞부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의 근본주의 침례교회 같은 자유교회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 주로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들도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암송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이상한 전통이 있으므로 이것은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성령님에 의해 처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어 탄생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 교리가 담겨 있으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사실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사도신경의 적합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사도신경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려 합니다.  사도신경의 정체   ● 사도신경은 천주교회의 작품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설에 의하면, 주후 55년에 12 사도가 기독교의 요점을 요약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이때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베드로가 사도신경의 처음 한 구절을 기록하자 나머지 사도들이 차례차례 한 구절씩 더하여 오늘의 사도신경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의 신앙이 요약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사도신경은 주후 3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신약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약 교회가 생긴 이래로 주후 100년경까지는 사도들이 살아 있었으므로 사도신경 같은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주님을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 다 떠나고 사도들의 제자인 속사도 또는 교부들의 시대가 이르자 침례 문답 때 간단한 문답서 같은 안내서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주후 100-125년경에 간단한 교리 문답서로 <신앙의 규율>(Rules of Faith)이란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어떤 이들은 주후 170-180년경에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사도신경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주후 325년의 니케아 신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결의, 431년의 에베소 결의, 451년의 칼케돈 신조 등은 역사적으로 교회 회의에서 사도신경을 제정했다거나 합의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줍니다.   정직한 역사가의 증언에 의하면, 주후 400년경에 활약한 암브로스 등이 사도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주후 650년경에 사도신경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란 말이 삽입되었고 또 650년 이후에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이 다시 삽입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주후 750년경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완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이들이 주후 381년경에 사도신경이 완성됐다고 주장하지만 그 당시 교회의 회의 자료는 사도신경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결코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많은 세월 동안 조금씩 발전시키고 보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도신경의 교리적 문제   자유교회에서는 이런 신조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도신경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숨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것들을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 페이지의 표는 카톨릭 사도신경과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한 것입니다.   <천주교 사도신경과 개신교 사도신경 비교>   카톨릭교회의 사도신경 개신교회의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저승(고성소)에 가시어(내리시어) 사흘 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나이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으며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혹은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의 사함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아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동정녀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신성을 나타내는 명사 즉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은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그 동정녀’(The Virgin)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치켜세워 신성화시킨 카톨릭 교회에서 나온 심각한 오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뒤에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남녀 동생들은 그분의 사촌들이라고 주장합니다(마13:55-56; 막6:3; 요7:3; 갈1:19). 그리해야만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 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절한 중보자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동정녀 또한 천주교회의 이런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a virgin’을 ‘동정녀’가 아니라 ‘처녀’로 바르게 번역해서 읽고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명백하게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없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분께서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지옥에 다녀오셨다.”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카톨릭주의에서 주장하는 연옥 - 카톨릭 교리에서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정도의 큰 죄를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다. 영혼들은 연옥에서 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이승에서의 죄를 씻고 정화한다. 연옥이 정죄계(淨罪界, 깨끗함과 죄 사이의 경계)나 정화소(淨化所, 깨끗해지는 장소)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화의 방법으로는 ‘정화하는 불(purgatorius ignis)’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심판의 날에 내려질 불’에 근거하고 있다(두산백과사전). - 과 림보 -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지옥의 변방: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으며 그리스도교를 믿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착한 사람 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백치 등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네이버 영어 사전). - 등의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중심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 [예수님의 혼을]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 - 엄밀하게는 그분의 혼 - 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런 부분의 지옥을 모두 불교 용어인 ‘음부’라고 번역해서 바른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 8-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9(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천주교회에서 굳이 밝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개신교회에서는 이것을 막으려고 할까요? 천주교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례가 있고 실제로 천주교인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과 벧전3:18-20을 묶고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18…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19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20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이 구절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과연 사람이 죽은 뒤에 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여부를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성경은 명백하게 사람이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고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벧전3:19는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감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영들은 분명히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세 부류의 존재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천사들입니다. 벧후2:4와 유6은 이 천사들이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버리고 죄를 지어 지옥에서 영존하는 사슬에 묶여 어둠 속에 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째는 노아 당시에 죄를 지어 대홍수로 멸망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입니다(창6:4). 물론 이들도 대홍수에 휩쓸려 다 멸절되었습니다. 이 세 부류가 벧전3:19에 있는 ‘감옥에 있는 영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은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영이라 불린 적이 없으므로 여기의 영들은 천사들과 그들이 낳은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해서 구원의 기회를 주셨을까요? 여기에서 ‘선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복음을 선포하다는 의미의 ‘유앙겔리조’가 아니라 선언하셨다는 의미의 ‘케륏소’입니다. 그러므로 벧전3:19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힘입어 그들에게 가셔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승리’와 ‘그들의 정죄’를 선언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는 죽음 이후에 심판 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는 결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을 가지고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또 다시 선포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비성경적인 믿음입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도신경의 이 부분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보면서 뿌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3. 거룩한 공회   영어 사도신경에는 분명히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으나 천주교나 개신교 신경에서는 ‘거룩하고 공번된 - 혹은 보편된 -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이나 종교 회의를 뜻하므로 ‘교회’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2세 아이들 즉 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나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왜 우리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의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이 ‘소문자’(catholic)로 쓰인 경우 원래의 사전적 의미는 ‘보편적인’ 혹은 ‘전 우주적인’(Universal)이므로 ‘카톨릭 교회’라는 말 자체가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 사도신경에서처럼 ‘카톨릭’이라는 말이 ‘대문자’(Catholic)로 쓰이면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므로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몸인 ‘거룩한 교회’로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지상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만 신조를 암송하는 당사자는 현재 자신이 속한 교회가 거룩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므로 이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새로 나온 사도신경에는 ‘카톨릭’을 반영하여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 천주교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들의 통공)  개신교의 사도신경의 표현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 즉 ‘세인트’(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 등).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saints)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saints)과 또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성경의 정의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미 죽은 카톨릭 교회의 특정 인물을 신앙적 영웅인 ‘성인’(saint)으로 만들었고 이로써 성경적 의미의 참 세인트 즉 ‘성도’(saint)를 배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신자들을 시성함으로써 즉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히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 강력히 작용하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 신자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 줌으로써 그들의 희망을 북돋아 준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교회헌장 40;48-51항, 제1편 p.322 #828]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 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입니다.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합니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중심 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 낸 인간 자랑입니다. 사탄은 로마 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 왔습니다.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 파를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약 3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습니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사실 현 시대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종교 성자들 - 어거스틴, 프란시스 등 - 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편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통’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 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과의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의 이 같은 교류를 명백히 인식한 지상 여정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대단한 신심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였다’,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장하고도 경건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교회헌장 50항).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intercession, 중보)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1편 p.364 #958]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 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면서도 ‘저리로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곳’을 가리키는 ‘저리’에다 ‘으로부터’를 뜻하는 조사 ‘로서’가 붙어서 이루어진 옛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올라가신 그 하늘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6. 사도신경은 충분하지 못하다 사도신경은 위에 있는 것처럼 교리적인 문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 교리들을 누락하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론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또 성령님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성장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이 강조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약되어 있으나 성령님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사도신경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약시대 율법에 틀에 갇혀 있는 전통적 카톨릭 교회 유산에 얌전히 순복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함께 암송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가 마치 다 동일한 성도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사도신경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수없이 많이 암송한다 할지라도 정확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 삶 속에 성령님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이런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걸레와 같습니다. 외적인 신조의 암송은 결코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성도의 반열에 넣을 수 없습니다. 7. 종교연합의 매개체 최근 들어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WCC 등을 통해 교회 연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세에 맞추어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쓰기 위한 공동 번역 성경이 나왔고 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공동으로 만들기 위한 일도 추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의 차동엽 신부는 사도신경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인하여 가히 수천만이 피를 흘렸고 그 덕에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며, 내가 살도록 해 주는 힘이며, 내게 설렘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희망이다. 나는 그것을 외울 줄 알았지만 몰랐다. 명색이 공인된 신학도인 내가 그랬으니 신자들은 오죽하랴. 그래서 글을 쓰는 내내 깨달음이며 회개였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보물이다. 여기에는 교파도 없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별도 없다. 그리스도교에 속한 모든 이들은 적어도 세 가지 보물을 공유한다. 그 첫째가 ‘성경’, 둘째가 ‘주기도문’, 셋째가 바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 속에 금맥이 있다. 어떤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기가 막힌 좋은 것들을 주님께서 사도신경에 감춰놓으셨다. 또한 인천교구장인 최기산 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젖줄이다. 이것으로 많은 이들의 신앙이 잉태되고 성장되고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하늘 밥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사도신경이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을 위한 매개체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는 천주교회와 인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믿지 않으며 사도신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천주교회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문을 외우듯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결론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일부를 짧게 표현한 신앙고백문이지만 몇몇 부분에서 치명적인 로마 카톨릭주의의 비성경적 교리가 많이 가미되었으므로 주 예수님의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는 암송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말세를 맞아 천주교를 중심으로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고 사도신경이 이를 위한 매개체로 쓰이고 있음을 감안하면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여기에 어떤 가치를 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신교회들이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써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면 이 같은 행위 자체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아무리 많이 암송한다 해도 성령님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생기고 인격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덕분에 믿음이 자랐다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의미를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든 기관이든 뿌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는 뿌리가 천주교회이므로 언젠가는 종교 통합의 미명 하에 다시 천주교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게 천주교회의 실체를 바로 알려줌으로써 이들이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 사도 바울과 여러 성도들이 직접 순교하면서 몸으로 세운 교회, 바로 이 기독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진리를 알려야겠습니다.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11:55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사도신경, 주기도문, 축도, 새벽기도, 통성 기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주일 대예배 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끝에는 목사가 두 손을 들어 축도를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갖고 있는 침례교회나 한국의 독립침례교회 - 앞으로 이 책에서는 이런 교회들을 자유교회 혹은 독립교회라 하겠음. -  등에서는 예배 순서에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와 같은 교회를 방문하면서 이 교회가 이상한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단 감별의 시금석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암송 여부를 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순서에 이런 것들이 없는 교회에 들어서면 일단 이 교회가 이단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으로 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기존 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새벽기도나 통성기도를 하지 않고 또 자매들이 공적인 기도를 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존 교회와 자유교회는 겉모습만 살펴봐도 무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대개 목사가 가운을 입고 시간이 되면 ‘땡땡땡’ 하고 종을 친 뒤 예배 의식을 집행하며 이런 의식의 일환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또 기존 교회는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 부르며 많은 경우 축도를 하는 목사는 축복권 및 저주권을 가진 구약시대 제사장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자유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할까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신약 교회의 예배 형식으로 더 적합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자에서는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를 추적하고, 사도신경 및 주기도문 암송, 축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이 성경적인 예배 절차라 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책자를 통해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성도들이 불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요4:22-24).   두 종류의 교회   한국에는 개신교회가 주류이므로 역사적으로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해 왔음을 아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예배 형식의 큰 차이는 교회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므로 먼저 교회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 교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I will build my church, 마16:18)라는 웅대한 선언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라는 기관을 세우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이 획기적인 선언 속에는 신약 교회의 소유주가 예수님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란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예배당을 교회로 알고 있지만 사실 교회 곧 ‘에클레시아’(Ecclesia)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즉,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된 성도들 자체가 교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달리 신약 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입니다(벧전2:5, 9). 그러나 주후 1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구약의 제사장 계급 체제로 돌아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무리가 교회 안에 생기기 시작했고 이들은 예수님의 신약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계2:15). 그 이후의 교회 역사는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와 창조물인 교회를 따르는 ‘교회교’ 사이의 심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입니다. 즉, 교회 역사는 ‘국가교회’(State church)인 ‘교회교’가 ‘자유교회’(Free church)인 ‘기독교’를 심히 핍박하고 박해해 온 역사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참된 교회와 바른 교회사에 근거하여 ‘성도들의 피 흘린 발자취’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말세의 배도가 바로 교회라 불리는 곳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오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천주교가 아니라 유대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구약 성도들, 열두 사도들, 첫 순교자 스데반, 첫 선교사 바울 등 대부분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천주교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으며 성경의 대부분이 유대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사실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은 천주교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신약의 복음 또한 로마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확산되어 땅 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작부터 천주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왔다는 거짓말을 믿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입니다. 기독교회사가 필립 샤프 같은 자유주의자 즉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교회사가들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었고 또 ‘천주교에서 나왔으나 천주교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이처럼 ‘왜곡된 교회사’ 즉 엄밀한 의미에서 천주교회사를 자기들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여과 없이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무리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시민으로 국가의 법에 순응하였으나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가이사)가 자기를 주 하나님으로 선언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기를 신이라 부르면서 자기에게 경배와 희생을 드릴 것을 요구했으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들에 대한 무서운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도덕이나 가치관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의 법도 주 하나님의 법에 우선할 수 없다고 믿었고 결국 자기를 신으로 선언한 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카이사르는 기독교와 바빌론 신비 종교를 혼합해서 자신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가교회인 천주교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많은 교인들이 천주교라는 배도의 넓은 길을 따라갔습니다. 한편 이것을 거부하는 참 성도들은 맹렬한 핍박을 받으며 맹수들의 밥이 되면서도 결코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귀한 무리들은 자기들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신앙 양심을 따라 국가교회가 아닌 자유교회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냐, 카이사르냐?  주후 313년, 대음모자 콘스탄틴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독교를 로마의 국가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 타락한 국가교회는 이교도들의 풍습에 근거한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각종 우상 숭배, 제사장 체계, 교황, 추기경, 교부, 연옥, 면죄부, 유아 세례 등 도저히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가증한 것들을 강제로 교회에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국가교회는 자기들의 범주 안에 거하려 하지 않는 자유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참 성도들을 화형이나 수장 등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이단이란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중세암흑시대에 천주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피 흘린 발자취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가 1세기 후반에는 그 당시의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 국가교회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짊어지고 도시를 떠나 산지에서 계곡에서 유랑하며 꾸준히 순례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주후 2세기에는 처음으로 소아시아에서 몬타니스트들이 사도 교회의 순수성을 외치면서 믿는 성도만이 교회의 회원이 됨을 주장했으며,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베푸는 유아세례는 전적으로 비성경적임을 선언하고 재침례를 행했습니다.   주후 3세기에는 전 로마제국에서 노바티안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 역시 유아세례의 죄악을 폭로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외쳤습니다. 이들은 그 순수성으로 인해 후에 ‘순수한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카타리들이 되었습니다. 그 뒤 4세기 초에는 아프리카에서 도나티스트들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또한 7세기경에는 타우루스 산지에서 폴리시안들이 초대 자유교회의 맥을 이으며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역시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침례와 그런 성도들만의 교회 회원권을 주장했습니다. 그 뒤 자유교회는 12세기경의 왈덴시스(왈덴시안)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알프스 계곡에서 바른 성경을 붙들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임을 외치면서 천주교회와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불가리아와 보스니아에서는 보고밀이라는 이름의 자유교회가 천주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으면서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폴리시안의 뒤를 이은 알비겐시스들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주후 1517년 천주교회의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교황과 천주교회에 대항하며 ‘항거자’ 즉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개신교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성경의 자유교회에서 출발하지 않았기에 천주교회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보다는 그 안에 남아 있으면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루터교회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핵심 교리를 제외하고는 천주교회의 악습과 전통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아 생명이 없는 국가교회로 전락하고 말았고 결국 1998년 6월에 미국의 루터교회는 다시 천주교회와 하나가 되기로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장로교회의 아버지 칼빈 역시 유아세례 등의 악습을 타파하지 못하고 제네바에서 구약시대 장로들의 신정정치 국가교회를 구축하면서 재침례교도 같은 자유교회 무리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천주교회에서 나온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들 - 개신교회들 - 은 교회가 다스리는 세상이 곧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천주교회의 신념을 그대로 수용하여 한결같이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를 따랐고, 성경 말씀 준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교리에서 자유교회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근대 자유교회       한편 종교개혁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교회는 재침례성도, 메노나이트 등의 이름으로 온 유럽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회중 통치를 가르치며 믿는 자들만의 교회 회원권, 전 성도 제사장 직분, 국가와 교회의 분리, 양심의 자유 등을 외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민의 물결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17,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는 자유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침례교인들(Baptists)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존 번연, 찰스 스펄전, 윌리엄 캐리, 아도니람 저드슨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국가교회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침례교인들이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결국 이들로 인해 국가와 교회의 분리,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헌법에 명시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든지 양심에 따라 종교를 택할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국가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대 국가들의 대부분이 미국 헌법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자유들을 허락함으로써 결국 전 세계 시민들이 자유교회의 투쟁으로 인한 인권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세의 배도       지금 온 세상은 정치와 경제와 종교의 통합을 원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UN 주도 하에, 경제는 WTO 등을 통해 이미 통합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종교는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 천주교회의 주도 하에 급속도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WCC, NCC, 오순절/은사주의, 뉴에이지 운동, 록음악, NIV, Living Bible 등의 타락한 성경,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복음주의자와 천주교도의 연합, ECT) 등이 모두 천주교회의 통제를 받으며 기독교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천주교회가 주축이 된 사상 최대의 국가교회가 우리 앞에 출현하여 다시 한 번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말세의 배도에 대하여는 이미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들에 여러 차례 기록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루터로부터 출발한 프로테스탄트 루터교회가 천주교회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뿌리를 성경에 두지 않으면 누구나 배도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종교개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당신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배도한 교회와 철저히 분리된 사람들이 성경을 따라 피를 흘리며 남겨 준 발자취를 따를 때에만 배도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의 극심한 우상 숭배 속에서도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신도 그런 남은 자 중에 있습니까? 성경대로 믿는 자가 구원을 받고 후에 주님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크기를 보지 말고 내가 속한 무리가 순결한 자들인가 살펴보기 바랍니다. 부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과연 맹목적으로 ‘교회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당신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그분의 ‘내 교회’에 속해 있습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예배 형식 차이의 원인   자, 이제 기독교와 개신교 그리고 천주교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알았으면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자유교회의 예배 형식이 왜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곧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천주교회는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면서 구약시대의 성전 예배와 비슷한 형식의 ‘의식 예배’(Ritual service)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임 장소를 성전 대신 성당이라고 부르고 사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세워 평신도와 다른 부류로 취급하며 예배 안에 각종 형식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이런 형식과 의식을 보면서 천주교 예배는 대단히 장엄하다고 말합니다.   천주교회에서 나온 개신교회도 태생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대부분 천주교회와 유사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내의 개신교회는 대개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목사가 거의 구약시대 제사장 수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평신도와 확연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약 2,000년 전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고 이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내리면서 예표였던 구약시대가 사라지고 실체인 신약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므로 마태, 마가, 누가가 모두 이것을 기록하였습니다(마27:51; 막15:38; 눅23:45). 이를 확증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기 전날 밤 유월절 관례를 주의 만찬으로 바꾸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 마26:28의 ‘새 상속 언약’은 영어로 ‘New Testament’이며 짧게 ‘신약’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주교 사본에서 나온 개역성경(개정개역 포함)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새’(New)를 제거하여 새 언약의 신약시대가 열린 것을 성도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 -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희생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신약시대가 열렸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구약시대의 형식과 계급체제 등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확실히 인식한 자유교회 성도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구약시대의 형식에 갇힌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왔고 이것은 ‘의식 예배’가 아니라 ‘비의식 예배’(Non-ritual service)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 이전까지 신약시대의 초기 10년 동안에는 그리스도인이 모조리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자연스럽게 예배 장소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서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이 있은 이래로 사도 바울에 의해 곳곳에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형식으로 가득한 구약시대의 의식 예배는 완전히 폐지되고 간결한 형태의 비의식 예배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면서 제사장처럼 가운을 입고 예배를 집례했을까요? 예배당을 성전 혹은 성당이라고 불렀을까요? 구약시대의 의식 예배를 집행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사도 베드로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유대인 조상들이나 심지어 유대인 사도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입니다(행15:10). 이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성령님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우상숭배, 부정한 음식, 음행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짐도 지우지 아니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교회 성도들의 예배에는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와 대언(설교)만 있었습니다(엡5:19; 고전14:26-33). 또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이 예배 모임에서 회중이 정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 주의 만찬을 행하였습니다(마26:26-30; 고전11:23-34). 이것이 자유교회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에는 천주교 예배의 일부인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암송이나 목사의 축도 등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한 뒤 사도신경, 주기도문, 축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에 대한 분석을 읽으면 더 확실히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4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본문 http://www.keepbible.com/KJB2/View/2RA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03:47 | 관리자
싸이의 젠틀맨을 분석한 글을 담은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블로그에는 여러 가지 세상의 변화들을 담은 유익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나 회복 교회 그리고 종말론을 다루는 이런 블로그는 대부분 환난 통과를 가르치는 분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들은 열심을 다해 행위로 7년 환난가를 통과하는 것을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스스로에게는 기쁨이 될지 모르지만 이들이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믿음을 가르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대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로서 열심을 다해 행위로 무엇인가 해 보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해 정보는 보되 결코 두려워하거나 행위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보여 주는 시대의 추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리 칩이 짐승의 표라고 해서 성도들을 속여 불안 속에 집어넣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평안입니다. 부디 이런 것들을 잘 분별하면서 환난 전 휴거의 복된 소망 가운데 평안히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세상이 다 변해도 안전합니다. 샬롬
2013-04-27 10:39:0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싸이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배후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싸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노영기 형제님이 올려 준 기사가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109#c_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110   오늘 지인에게서 매우 유용한 정보가 와서 소개합니다.   안의 내용을 살펴보니 거의 다 맞습니다.   특히 싸이와 호루스를 다루는 첫째 링크를 주의 깊게 잘 보기 바랍니다.   물론 싸이가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 바빌론 미스테리를 이루어가는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래서 뉴에이지 세미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안전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안에 계신 분께서 싸이를 덮은 악령인 마귀보다 훨씬 더 크십니다.   샬롬   (1) 「싸이의 Gentleman과 호루스」 http://blog.naver.com/esedae?Redirect=Log&logNo=90171244147&from=postView    (2) 가수 싸이는 장막성전(신천지의 모태가 되는 이단)의 교주였던 유재열의 사위이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48   유재열은 한국 기독교 이단 중 가장 어린 나이(18세)에 교주가 되었고 과천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신도를 이끌었다고 한다.   70년대 사기사건에 연루된후 잠적하였고, 이후 장막성전은 여러개의 이단종파를 파생시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이다.   유재열은 현재 스포츠제품회사와 철강회사를 경영한다고 한다.   가수 싸이는 유재열의 딸인 유혜연과 결혼하였다.
2013-04-23 23:40:27 | 관리자
여기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옳고 사람의 해석은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유다(유다와 베냐민의 두 지파)의 왕이었지만 유다는 넓은 의미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속하기에 이스라엘의 왕이라 불린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기에 아마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불린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바로 전에 대하20:34에서 보면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책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보라, 이제 여호사밧의 남은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책에 언급되어 있느니라(대하20:34). 바로 이 구절 다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35 이 일 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연합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하게 행한 자더라. 36 여호사밧이 그와 연합하여 다시스로 갈 배들을 만들고자 하였더라. 그들이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만들었더니 37 그때에 마레사 출신으로 도다바의 아들인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해 대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연합하였으므로 {주}께서 왕이 이룬 일들을 부수셨나이다, 하더라. 그 배들이 부서져서 그들이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유다 왕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책에 언급되어 있고 또 그가 아하시야와 연합하여 행한 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역대기 기자가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면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연합한 것을 주님이 매우 싫어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기는 우상숭배로 멸망한 유다 자손들이 바빌론으로 포로 생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후에 왜 유다가 멸망하였는지를 회고하며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유다에 도입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투로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음의 두 사례가 이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1) 역대기하 28장 19절에 보면 아하스 왕도 이스라엘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로 하여금 벌거벗게 하고 또 {주}께 크게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로 인하여 유다를 낮추셨기 때문이더라. 아시다시피 아하스는 심히 타락하여 우상 숭배를 한 인물입니다. (2) 한편 유다의 왕으로 이스라엘 왕들의 책에 언급된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의 아들로서 사악한 일들을 많이 행한 므낫세입니다. 보라, 이제 므낫세의 남은 행적과 그가 자기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선견자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전한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대하33:18) 이런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포로 생활 이후의 역대기 기자는 유다 왕국 몰락의 원인인 우상 숭배를 이스라엘로부터 배워 실행하거나 도입하게 한 왕들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추측입니다. 여기서 모르는 일은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다 안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이성적으로 맞추기 위해 개역성경처럼 여호사밧을 유다의 왕으로 바꾸는 것은 명백한 성경 변개입니다. NASB와 NIV 등은 각주에서 이런 일을 하였고 개역 성경은 본문 자체를 변개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샬롬
2013-04-16 12:18:3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