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는 구약에서 희생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을 통해 많이 나온다(레16:21).
이런 예식은 안수를 통해 사람의 죄를 무죄한 짐승에게 옮기는 것을 상징했다. 안수는 또 축복하는 것(창48:18), 임직식(신34:9) 등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아이들과(마19:13, 15) 병자들(마9:18)에게 안수하셨다. 초대 교회에는 안수가 병 고치는 것, 성령님을 받는 것(행9:17), 교회에서의 특별한 일을 위해 사람을 구분하는 것(행6:6), 선교사 파송(행13:3) 등과 상관이 있었다. 그런데 안수는 무슨 마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안수했을 뿐이다. 안수는 보통 기도와 함께 이루어졌다. 현대 교회에서 목사나 집사에게 안수한다는 것은 ‘직무에 임명하다’를 뜻하는 Ordination을 말하며 이때에 손을 얹느냐 얹지 않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부르심(소명)을 가지고 지역 교회를 통해 하나님에게 임명받는 것이 핵심이다.
2009-07-19 00:47:08 | 관리자
보는 눈. 사물을 보아서 알고 분별하는 견식.
2009-07-19 00:46:41 | 관리자
신약성경에 나오는 두 도시의 이름.
하나는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근처에 위치한 대도시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의 1, 2차 선교 여행 지도 참조(42).
이곳은 자기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 셀레우코스 니카토르가 세운 도시로서 명성과 영화가 대단해서 한때는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은 위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중간에 있었고 수목이 많아 아름다웠으며 그래서 동서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니카토르는 그들이 오는 것을 환영했다. 바로 이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행11:19, 26; 13:1; 갈2:11). 이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경을 바르게 필사하여 후대에 넘겨주었고 그들의 사본은 안디옥 계열의 사본으로 불린다.
이곳은 그 어느 도시보다 지진의 피해를 많이 입었으며 특히 1822년도의 지진으로 인구의 사분의 일 이상이 죽기도 했다. 또 다른 안디옥 역시 니카토르가 세운 도시로 ‘비시디아의 안디옥’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이곳이 브루기아에 있었지만 비시디아 지방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행13:14; 14:19, 21; 딤후3:11).
2009-07-19 00:46:18 | 관리자
팔레스타인의 도시.
이곳은 해안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의 비옥하고 관개가 잘된 평야에 위치했다.
이곳은 헤롯 대왕이 자기 아버지 안티파트리스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곳이며 사도 바울은 이곳을 방문했다(행23:31).
2009-07-19 00:45:39 | 관리자
I. 헤롯 안디바 참조.
II. 버가모에 있던 신실한 순교자(계2:13).
2009-07-19 00:45:09 | 관리자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롬16:7).
2009-07-19 00:44:46 | 관리자
모세의 율법에는 여러 가지 씻는 의식이 있었으며 제사장과(출30:19-21) 다른 사람들이(레12:1-8; 13:1-59; 14:1-57; 15:1-33; 히9:10)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함의 씻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영적 씻음과도 관련이 있다(딛3:5; 계1:5).
이 외에도 유대인들은 전통으로 다른 것을 추가하고(막7:2-4) 그리스도처럼 그런 것을 무시하면 경건치 못한 자라고 평가하였다(눅11:38). 먹기 전과 후에 손을 씻는 것은 그들이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며(마15:2) 지금도 시리아 등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종이 있는 경우 종이 주인의 손 밑에 큰 그릇을 대고 손에 물을 부었다(왕하3:11; 시60:8).
또한 손을 씻는 것은 무죄를 보여 주는 표시였다(신21:6; 마27:24).
2009-07-19 00:43:16 | 관리자
천이나 옷감을 짤 때 가로로 놓는 실(레13:48-59). 날실 참조.
2009-07-19 00:42:06 | 관리자
창1:11에서 처음 언급되는 이 말은 대부분의 경우 문자 그대로의 씨를 의미하였지만 종종 상징적으로도 쓰였다(단9:1; 벧전1:23; 요일3:9).
성경적 용례 면에서 볼 때 씨는 생리학적 의미에서 종종 후손이나 자손(레 18:21 등) 혹은 유일한 아이(창4:25; 삼상1:11) 등을 의미하였다. 또 어떤 때에 이것은 집합적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왕가의 씨(왕하11:1), 아브라함의 씨(대하20:7), 거룩한 씨(스9:2; 사6:13; 비교 렘2:21).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씨를 보이는 것은(스2:59; 느7:61) 그 사람의 계보를 보이는 것이며 어떤 사람의 씨는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민족을 뜻하기도 하였다(에10:3).
이런 일반적인 의미에서 씨는 종종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말2:15; 참조 사1:4; 57:4).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남자만이 씨를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여자의 씨(창3:15)로 오신 예수님 즉 처녀 탄생의 신비를 지닌 분의 신비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처녀 탄생: 예수님의 계보 선도 참조(63).
한편 씨와 씨들의 차이는 갈3:16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세의 율법에는 여러 종류의 씨를 섞어서 뿌리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다(레19:19). 귀한 씨를 뿌릴 때에는 두려움과 수고가 동반되지만 그것의 열매를 거둘 때에는 큰 기쁨이 있다(시126:5-6).
2009-07-19 00:41:43 | 관리자
매우 쓴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
욥16:13; 20:14, 25에서 이것은 쓸개즙을 뜻한다. 마27:34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쓸개를 섞은 식초를 주어 마시게 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막15:23에는 그것이 몰약을 썩은 포도즙이라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로마 군인들이 몰약과 다른 쓴 물질을 섞어서 마신 신 포도즙일 것이다(시69:21). 쓸개라는 말은 종종 상징적으로 큰 재난, 사악한 것, 타락한 것 등을 가리킨다(렘8:14; 암6:12; 행8:23).
2009-07-19 00:41:15 | 관리자
쓰고 독이 있는 식물.
이것은 파괴시키는 것, 메스꺼운 것을 나타낸다(애3:15; 신29:18; 렘9:15). 사악한 일에 빠지면 그 결과는 쑥 같이 쓰며(잠5:4) 불공정과 학대는 쑥과 쓸개와 같다(암5:7; 6:12). 갈대아 사람들은 죽음을 쑥과 같이 쓴 것으로 표현하였다.
계8:10-11에 나오는 쑥이라는 별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강력한 통치자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떨어지면서 여러 사악한 자에게 심판을 가져왔다(단10:20-21; 참조 사14:12).
2009-07-19 00:40:49 | 관리자
버려진 땅에서 자라는 식물(욥30:7; 잠24:31; 사34:13; 호9:6; 습2:9).
이것은 포기 전체에 가시털이 나고 줄기에 세로능선이 있으며 가시에는 포름산이 있어 찔리면 쐐기한테 쏘인 것처럼 아프다.
2009-07-19 00:40:23 | 관리자
이것은 ‘먹어치운다’는 히브리말에서 파생되었으며 메뚜기가 알에서 깨어나 성충이 되기까지의 한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왕상8:37; 시78:46; 105:34; 사33:4; 욜1:4; 2:25).
2009-07-19 00:39:58 | 관리자
독사와 전갈은 사람을 쏜다(잠23:32; 계9:10).
사망은 이런 짐승들처럼 치명적인 것 즉 죄로 사람을 쏜다(고전15:55; 참조 호13:14).
2009-07-19 00:39:31 | 관리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말씀하신 것.
(1)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네 어머니를 보라!”(요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6) “다 이루었다.”(요19:30);
(7)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2009-07-19 00:39:02 | 관리자
나무로 만든 사형 틀.
십자가 처형은 불명예의 상징으로 보통 가장 천박한 노예들에게 이루어졌으며(신21:23; 갈3:13) 특히 로마 사람들 사이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반드시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십자가가 고통과 수난의 상징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의 상징이다.
보통 십자가 처형 때에 집행자들은 범죄자의 양 손에 각각 못을 한 개씩 박고 두 발을 모아 한 개의 못을 박았다.
어떤 경우에는 범죄자의 몸 주위를 끈으로 감아서 아픔을 덜어 주고 대신 오랫동안 달려 있게도 했으며 못과 끈을 다 사용해서 범죄자를 묶은 뒤 십자가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집행자들은 못을 박기 전에 범죄자를 채찍으로 때리고 심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몸을 십자가에 묶은 뒤 처형장까지 끌고 가기도 하였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셨고 결국 구레네 사람 시몬이 강제로 그것을 지고 갔다(막15:21).
처형의 집행자들은 범죄자를 못 박은 후에 마취제를 마시게 해서 아픔을 줄여 주기도 하였으나 우리 주님은 이를 거절하셨다(마27:34; 막15:23). 우리 주님은 온 인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완전하게 모든 아픔을 담당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그분은 실제로 잔의 찌꺼기까지 다 마셨다. 태양 아래에 십자가를 세우면 채찍질과 못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열이 생기고 심한 갈증이 일어나며 또 피가 제대로 흐르지 못해 몸의 여러 곳에 모이고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이 발생한다. 또한 범죄자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고통이 늘어나며 결국 죽어야만 이 모든 것이 해소된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며칠 동안 사는 경우도 있으므로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일찍 죽은 것을 보고 놀랐다(막15:44). 안식일이 다가오므로 집행자들은 두 강도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그들의 다리를 꺾어서 빨리 죽게 하였지만(신21:23; 수8:29) 대개는 그런 상태로 방치해 두고 새나 짐승이 몸을 먹게 하였다.
2009-07-19 00:38:23 | 관리자
사람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거룩한 용도로 드리는 것(창14:20; 28:22).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모세의 율법은 두세 종류의 십일조를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였다.
I. 첫 번째 것은 각 사람이 자기 밭과 나무와 짐승 등의 소출의 십분의 일을 유대인들의 왕이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레27:30-32).
이것은 신정국가의 백성이 내는 세금으로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는 레위 사람들을 먹이는 데 사용되었고(민18:21-24) 또 왕의 통치를 위해서도 사용되었으며(삼상8:15, 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가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돈으로 이 세금을 낼 수 있었다. 레위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들에게 바쳤고(민18:26-28) 이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의식주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II. 두 번째 것은 신12:17-19, 22-29; 14:22-27에 나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 즉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자기와 자기 가족과 레위 사람들을 위해 즐겁게 먹어야 했고 거리가 멀면 물건으로 바꾸어서 가져가도 되었다.
III. 세 번째 것은 신14:28-29에 나오는데 이것은 3년 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십분의 일을 다시 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신정 정치 하에서 매해 평균적으로 수입의 23.3%를 주님께 바쳤다고 할 수 있으며 물론 신정 정치이므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이 부과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십일조 제도는 바빌론 포로 생활 이전과 이후에 갱신되었다(대하31:5-6, 12; 느10:37; 12:44; 13:5). 그러나 유대인들은 특히 포로 생활 이후에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내지 않아서 주님의 일을 하는 레위 사람들이 도망가기도 하고(느13:10) 하나님의 복이 내리지 않았다(말3:8-12). 바리새인들은 조그만 것의 십일조를 드리는 데는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십일조의 원리 즉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무시하다가 주님께 책망을 받았다(마23:23).
신정 정치 하에서 운영되던 율법의 십일조는 신약의 도래와 함께 분명히 사라졌지만 십일조의 정신과 원리 즉 복음의 사역자들과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 수입의 일정 부분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과 주의 일을 위해 성심성의껏 헌금을 할 때 주께서 땅의 복을 주신다는 원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신약성경에 수입의 얼마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규정은 없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수입의 십분의 일 이상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기에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서 십일조로 드리는 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만 교회에서 이런 헌금을 율법의 십일조로, 강제 규정으로 세금을 걷듯 걷는 것은 신약시대의 헌금의 원리(고후9:6-7)와 배치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둘씩 보내면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고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마10:9-14; 눅10:4-8, 16). 사도 바울 역시 그와 동일한 것을 말한다(고전9:13-14; 갈6:6).
그는 성도들을 위한 기부 헌금으로 주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신 대로 각 사람이 수입에 비례하게 주의 첫 날에 즉 주일에 헌금을 드리라고 하였다(고전16:2).
그러므로 교회에서 헌금 드리는 것을 비난하는 일은 비성경적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 수입에 비례하게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 주님의 사역자들과 교회 사역이 유지되게 해야 한다(고후9:7).
2009-07-19 00:37:36 | 관리자
7년 환난기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마에 봉인이 찍힌 실제적인 유대인들(계7:4; 14:1, 3).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12,000명씩 나온 사람들로 온 세상에 다니며 하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할 사람들이다(마24:14). 그들을 구원 받은 사람들의 집합체로 보는 것은 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는 결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9-07-19 00:36:23 | 관리자
이집트에 있던 히브리 산파.
그녀와 부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새로 태어난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보답해 주셨고 그래서 그들의 집안은 흥왕하였다(출1:15-21).
2009-07-19 00:35:58 | 관리자
이드로의 딸.
그녀는 모세의 아내였으며 엘리에셀과 게르솜의 어머니였다. 이집트를 떠나 미디안으로 도망한 모세는 이드로의 딸들이 양 떼에게 물을 주는 것을 방해하는 목자들을 보고 그들을 도와 그들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이에 이드로는 그를 자기 집으로 불러 그에게 자기 딸 십보라를 아내로 주었다(출2:15-22; 4:25; 18:2-4). 모세와 결혼한 이디오피아 여인(민12:1)이 십보라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구스 참조.
2009-07-19 00:35: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