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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대의 도시.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과 살만에셀이 이스라엘 포로 중 일부를 이곳 근처로 옮겨 놓았다(왕하17:6; 18:11).  
2009-05-03 22:37:05 | 관리자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리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시51:5).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다. 그의 몸에는 첫 사람 아담의 피가 돌므로 그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즉 사람은 죄를 지으므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모태 신앙’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이고 ‘모태 죄인’이라고 해야 맞는다. 사람 안에는 본성적으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롬7:18). 성경은 본성에 속한 사람 즉 자연인을 가리켜 ‘지각이 어두워진 사람’이라고 말한다(엡4:18). 그는 하나님의 영과 그분의 일을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의 것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엡2:3) 더욱이 하나님과 원수지간이고 따라서 결코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없다(롬8:7-8). 그의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렘17:9). 그래서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다(막7:21-22). 영적으로 볼 때 그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존재이다(엡2:1).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자연인도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는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렘13:23). 이런 상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일이 구원의 첫 걸음이다.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그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그를 지으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를 변화시켜 새 생명을 줄 수 있다.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2009-05-02 17:41:07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성경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 보아라.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성경을 펼쳐보면 구약은 짐승의 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표지를 제외한 테두리에는 통상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 칠해졌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붉은 색 대신에 금색이 둘러진 성경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피보다는 영광을 뜻하는 금색이나 또는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진 색으로 성경이 치장될지라도 근본적으로 성경이 ‘피의 책’(血書)인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화려하고 멋진 옷이 아니라 단지 피에 담겨진 옷을 입고 있음을 성경 스스로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9:13). “또 그분께서는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계19:13) 아울러 성경은 피(blood)의 순환(circulation)이 계속 이뤄지고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이요, 또한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히4:12; 레17:11,14).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히4:12상, 이하 흠정역)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레17:11상) 그리고 또한 성경은 수많은 피 가운데 오직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구원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이 유일하게 흘러나오는 ‘구원의 샘’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救贖)을 받으면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게 됨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1:18,19; 요7:38; 계21:6).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救贖)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성경 전체를 통해 피의 강이 흐르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피로 연결되게 하셨는지, 그리고 피를 통해서 생명이 있도록 하셨으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 있도록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생명 먼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 그가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셨던 장면을 생각해 보자(창2:7). 과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 아담이 살아 있는 존재(living soul)가 되었던 것일까? 이미 뇌, 심장, 폐, 위장, 간, 콩팥 등등 인간의 몸은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을 텐데 무엇이 이러한 인간의 각종 장기와 조직들이 동시에 살아서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피 때문이었다. 즉 우리 몸의 여러 기관들(systems) 중 유일하게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온 몸을 다니는 혈액(blood)이 순환(circulation)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자 우리 몸의 각 장기와 조직과 세포들은 피를 통해 산소와 각종 영양소를 공급받아 활동을 시작하며 생명현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처럼 피를 통해 생명을 갖게 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930세에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창3:6; 5:5). 곧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피는 부패하기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울러 그 후 아담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된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역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된 피(SIN+)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창5:3; 롬3:23). 즉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영적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처참한 인류의 운명이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롬5:12). 다시 말해서 부패된 피(SIN+)를 무죄한 피(SIN-)로 바꾸지 못한 사람(soul)은 육체적 사망에 이어 둘째 사망 곧 지옥․불못(lake of fire)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창조세계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롬6:23상; 계21:8). 3. 복음 그러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아담과 이브가 영적 사망에서 회복될 수 있는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곧 사탄은 여자의 씨로 오실 예수님의 발꿈치를 잠깐 상하게 할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사탄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복음(protoevangelium)이 선포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SIN-)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완전히 파멸시키시리라는 복된 소식(gospel)이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마27:4; 고전15:1-4).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시면서 피흘림을 통한 죄사함의 원칙을 인류에게 제시해주셨다(창3:21; 히9:22).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져 아벨은 양떼의 첫 새끼들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피의 제사를 드렸다(창4:3-5; 히11:4). 그리고 지구 전체를 뒤엎었던 대홍수 직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도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헌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피흘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계속 확인하였다(창8:20,21; 레1:1-17). 이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헌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친히 예비하셔서 어린양의 피를 통한 대속(代贖)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그림자를 보여주셨다(창22:1-14).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가 문의 인방(引枋)과 양옆 기둥에 뿌려진 집에는 파멸시키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다(출12:1-28).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월절 사건을 통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여 주실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려주셨다. 4. 어린양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유월절을 지키며 어린양의 피를 기렸고 또 연중 끊임없이 지속된 제사들을 통해 피흘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매일 확인하였다(출12:24-27; 레1:1-18; 17:11하; 히9:22).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하)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히9:22)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령님에 의해 수태되어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마1:21; 갈4: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리셨지만 마리아의 부패된 피(SIN+)를 한 방울도 받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산모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태반을 통하여 필요한 영양분만이 공급되게 하셨고 피는 단 한 방울도 넘어가지 않게 만드셨으며 오로지 태아의 피는 태아 자체의 조혈기관(fetal hematopoietic organs)에서 생성되도록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죄한 피’(SIN-)를 지니시게 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이 되셨던 것이다(요1:29,36).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다(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救贖)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5. 복(blessing) 다시 말해서 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팔려갔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다시 찾아주시는 구속(救贖, redemption)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blessing)을 얻게 된 것이다(행20:28; 엡1:3-7). 이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복이 있겠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진정한 복은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둘째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야벳(Japheth)의 후손들은 영어로 복(福)을 블레씽(blessing)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또는 bless(복주다)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 알아보면 앞서 언급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웹스터 영어 백과 사전(Webster's Encyclopedic Unabridged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996)과 노아 웹스터(Noah Webster) 초판 영어 사전(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828)을 보면 ‘bless’는 고대 영어(Old English)에서 ‘bletsian’이나 ‘bledsian’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피(blood)로써 신성하게 한다(consecrate)는 의미가 있다. 또 이보다 앞서 고대 프레즈랜드(Friesland)어(Old Frisian)나 고대 색슨어(Old Saxon)에서는 ‘blÕdisÕnian'으로 쓰였는데 여기에서 ‘blÕd'는 명백히 blood(피)라는 의미이다. 즉 피(blood)가 복(bless)이 된 것이다. 그렇다. 피흘림(bleeding)은 죄인인 우리가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blessing)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SIN-)를 우리를 위해 흘려주시게 된 것이다(마26:26-28; 27:4; 요1:29)! 6. 의(義) 그 결과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감히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롬3:10; 5:6-1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복주심(창9:27)을 좇아 중국 땅에 들어온 야벳의 후손들에게 한자라는 상형문자를 만들어준 창힐(蒼頡)이 왜 의(義)라는 한자어를 이처럼 기록하였는지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의(義) = 양 양(羊) + 손 수(手) + 창 과(戈) 의(義)란 바로 어린 양(羊)을 자신의 손(手)으로 잡고 창(戈)으로 찔렀을 때 나오는 것(寶血)을 의미한다. 즉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한 피’(SIN-)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요1:29,36; 벧전1:19; 요일1:7; 계7:14; 12:11). 또한 의(義)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도 있다. 의(義) = 양 양(羊) + 나 아(我) 이 등식은 양(羊) 아래에 내(我)가 있는 상태가 의(義)라는 것이다. 즉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Lord)이 되셔야 의로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야벳의 후손들은 ‘의롭다’를 영어로 ‘righteous’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관계성을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즉 “righteous relationship with God”을 의미한다. 한자어 의(義)의 풀이와 똑 같이 어린양(羊)이신 예수님을 내(我)가 구주로 모실 때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다는 뜻이다(롬3:25; 골1:19,20)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헌물(propitiation)로 제시하셨으니”(롬3:25상) “이는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19,20) 7. 예수님의 피흘리심 그렇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언제 어떻게 피를 흘리셨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는 예수님께서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심으로 피를 흘리셨다(눅2: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증표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 할례는 영적으로 새 창조(new creation)를 의미하는 8일에 시행되었는데 이 날은 혈액응고인자인 프로트롬빈(prothrombin) 농도가 출생 후 가장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후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피를 흘리셨다(눅22:39-46; 마26:36-46). “그분께서 고뇌(agony)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눅22:44) 이것은 의학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나 신체기관의 쇼크가 있을 때 혈액성의 땀이 분비되는 혈한증(血汗症, hemohidrosis, hematidrosis)인데 우리는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려는 그 영적 고통이 얼마나 컸던 것이지 잘 알 수 있다(요일4:10, 고후5:21, 롬5:9,10).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사실 겟세마네에서 혈한증을 보일 정도로 간절하였던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8. 십자가의 보혈 셋째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심으로 피를 흘리셨다(마27:26; 막15:15; 요19:1; 사53:3). 몇 번이나 채찍을 맞으셨는지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끝에 짐승의 뼈조각이나 납 같은 금속이 달린 채찍 때문에 근육과 뼈가 핏덩어리가 되어 다 드러날 정도로 맞으셨을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은 가시나무 관을 머리에 쓰시고 피를 흘리셨다(마27:28-31; 막15:15-20; 요19:2-16).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셨던 가시나무 관은 머리 전체를 덮었으며 각 가시의 길이는 2.5~5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학적으로 잘 알려졌듯이 머리는 혈관이 잘 분포된 부위인데 로마 군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기 때문에 이로 인해 엄청난 출혈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가시나무 관을 씌운 후 로마 군인들은 또 예수님에게 자주색 긴 옷을 입혔는데 이로써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지니신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주색(scarlet)은 죄(sin)를 상징하고, 가시(thorn)는 아담의 타락 후 저주(curse)의 결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사1:18; 창3:17,18). 다섯째로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며 피를 흘리셨다(마27:35; 막15:24,25; 눅23:33; 요19:16,17; 시22:16,17). 그 당시의 십자가형에는 길이가 17~18cm, 지름이 1cm 정도의 못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큰 못들이 요골과 척골 사이나 족관절 사이에 박히므로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는 성경기록이 성취되면서 상당한 출혈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요19:36; 출12:46; 민9:12; 시34:20). 여섯째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 로마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예수님께서 피를 물과 함께 흘리셨다(요19:28-36). 아마도 폐 속에 차 있던 물(pleural fluid)과 심장의 우심실에 있던 피(blood)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흘려진 예수님의 피로 인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완전히 피로 물든 십자가로 변해 버렸고, 대신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의 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救贖)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9. 구원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제 예수님의 피를 마음에 받아들여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하여 사탄의 권세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인 저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신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며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를 도와 주셔서 이 죄들을 미워하여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받기를 원하나 저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저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를 흘려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며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오직 보혈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저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 승리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을 신뢰하고 주위의 좋은 크리스천들에게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당신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께 당신의 새로운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분께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 당신의 삶은 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나니”(갈3:26)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죄와 마귀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같게 된 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1:7)
2009-05-02 17:40:16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들머리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인간의 존재(存在)가 시작된 후 약 40주 정도의 재태기간을 거쳐 출산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肉)적 출생에 이어서 인간이 ‘한 번 더 태어나’(born again) 얻게 되는 영(靈)적 출생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심지어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영(靈)적 출생에 대해 무지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경우를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영(靈)적 출생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영(靈)적 출생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를 하고자 한다. 먼저 인간론에 대한 몇 가지 명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봄으로써 영(靈)적 출생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이란 존재(存在)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둘째, 인간은 단지 육(肉)적인 존재인가? 셋째, 인간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2. 인간(人間)의 존재(存在)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정의를 내려오고 있지만 필자는 존재(存在)라는 한자어 자체만큼 존재(存在)에 대한 정의를 확연히 드러내 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노아의 두 번째 아들 셈(Shem)의 후손인 창힐(蒼頡)이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 때 황제의 사관으로서 만든 존재(存在)라는 한자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존(存) = 한 일(一) + 사람 인(人) + 아들 자(子), 재(在) = 한 일(一) + 사람 인(人) + 흙 토(土) 즉, 한(一) 사람(人)을 흙(土)으로 만들어 한(一) 사람(人) 남자(子)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상형문자인 ‘존재(存在)’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흙(土)으로 첫(一) 사람(人) 아담(子)을 만드신 사건이 바로 인간이 존재(存在)하게 된 이유인 것을 한자어 존재(存在)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2:7. 이하 흠정역) 그렇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우주만물의 존재(存在)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우리 인간의 존재(存在) 의의와 정체성이 확실케 되는 것이다. 3. 인간(人間)의 구성(構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육(肉)적인 존재로만 창조하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창세기 2장 7절을 다시 보도록 하자.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肉, body)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靈, spirit)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 soul)이 되니라.”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육(肉)과 영(靈)과 혼(魂)으로 이루어진 인격적인 존재(存在)로 창조가 되었다(창1:26; 살전5:23; 히4:12).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복주심(창9:27)을 좇아 중국 땅에 들어온 야벳(Japheth)의 후손들에게 한자라는 상형문자를 만들어준 창힐(蒼頡)이 왜 육(肉)과 영(靈)과 혼(魂)을 이처럼 기록하였는지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1) 육(肉) 육(肉) = 몸(冂) +〔사람 인(人)〕 + 들 입(入) + 사람 인(人) 즉, 육(肉, body)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冂)에 손을 넣으셔서(入) 한 사람(人)을 만드셨고, 이브(人)에게 아담(人)이 들어가(入) 연합(同, 冂)하여 한 몸(肉)이 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창2:21-24).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冂)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入) 그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人)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人)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 이러므로 남자(人)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人)와 연합(同)하여 한 육체(肉)가 될지니라.”(창2:21,22,24) 2) 영(靈) 영(靈) = 비 우(雨) + 입 구(口) + 입 구(口) + 입 구(口) + 지을 공(工) + 사람 인(人) + 사람 인(人) 우(雨)자는 위에 덮어씌운 괄호가 있고 그 괄호 안에 수직선 양 옆으로 짧게 둥글하게 가로 그은 선이 둘씩 있는데 그것은 물이 가득 찬 공간을 뜻한다. 그리고 그 물들을 둘러씌운 괄호는 물들의 표면 위에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구(口)자 세 개는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며 공(工)자와 인(人)자 두 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신 것을 나타내준다(창1:2,27).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靈)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따라서 영(靈, spirit)은 삼위일체(口+口+口) 하나님께서 창조의 클라이맥스로 아담(人)과 이브(人)를 만드시기(工) 위해 물들(雨)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는 창세기 1장 2절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다. 3) 혼(魂) 혼(魂) = 이를 운(云) + 삐침 별(丿) + 밭 전(田) + 사람 인(人) + 사사 사(厶) 귀(鬼) = 삐침 별(丿) + 밭 전(田) + 사람 인(人) + 사사 사(厶) 넋을 가리키는 혼(魂)은 ‘귀신 귀(鬼)’와 ‘속삭이다’를 뜻하는 ‘이를 운(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사탄 또는 마귀(魔鬼)를 나타내는 귀(鬼)자는 한 곳에서 갈라져 네(十) 개의 강이 흐르던 지역(口)인 에덴동산(田)에 사람(人)처럼 말을 하는 존재가 은밀하게(厶) 들어와 활동하는(丿)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창2:10-14; 3:1). 따라서 혼(魂)은 마귀(鬼)가 한 말(云), 곧 마귀가 이브에게 다가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속삭이는 내용을 말해준다(창3:4). 이 말대로 우리의 혼(魂, soul)은 ‘결코 죽지 않는 존재’이다. 4. 사후(死後)의 인간(人間) 인간이 살아 있을 때에는 육(肉)과 영(靈)과 혼(魂)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인간이 죽는 순간 이 셋은 명확히 구분이 되어진다. 즉 육(肉)은 죽음과 동시에 100여종의 원소로 분해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창3:19). 영(靈)은 위로 올라가게 되며(전3:21), 혼(魂)은 심판을 받아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히9:27; 눅16:19-31). 한자어 혼(魂)이 의미하는 대로 우리의 혼(魂)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인간의 혼(魂)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의(義)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罪)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렇다. 역사상 존재하였던 인간 모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義)롭지 못하며 또한 죄인(罪人)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義)와 죄(罪)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의(義) =  양 양(羊) + 손 수(手) + 창 과(戈) 의(義)란 바로 어린 양(羊)을 자신의 손(手)으로 잡고 창(戈)으로 찔렀을 때 나오는 것(寶血)을 의미한다. 즉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寶血)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요1:29,36; 벧전1:19; 요일1:7; 계7:14; 12:11). 죄(罪)를 뜻하는 원래의 글자는 자(自) 밑에 신(辛)이 놓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경 진시황제(秦始皇帝) 때 죄(自 + 辛)자가 임금 황(皇)자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지금의 죄(罪)자로 바꿔 쓰도록 하였다. 원래의 죄(自 + 辛)자 중 먼저 신(辛)자를 보면, 위의 하나님께(亠)(上) 죄를 지은(干) 첫째(一) 사람이 혹독한 고생(辛)을 한다는 뜻이다. 또 신(辛)자는 첫째(一) 사람 또는 한(一) 사람이 하나님의 입(口)에서 나온 말씀(言)을 떠남으로 인간에게 죽음과 같은 혹독한(辛) 고생이 시작된 것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죄(自 + 辛)자는 인간이 스스로(自) 죽음이란 혹독한(辛) 상황을 초래하게 된 사실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다시 로마서 3장 23절로 돌아가 보자. “모든 사람이 죄(罪)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렇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어느 누구도 죽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천국에 갈 수가 없다. 5. 죄(罪)의 대가(代價) 그런데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자신은 죄(罪)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속 중심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시44:21; 렘17:10; 히4:13; 계2:23).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마5:28) 또 요한일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자.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당신이 음욕을 품은 적이 있다면, 또 누구를 미워한 적이 있다면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판단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는 다 죄인인데 죄(罪)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된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罪)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罪)로 말미암아 사망(死亡)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罪)를 범하였으므로 사망(死亡)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禁)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 모두가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인데 죄(罪)의 대가는 사망(死亡)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같은 설명이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상) 그런데 죄(罪)의 대가인 사망(死亡)은 ‘육(肉)적 사망’과 ‘영(靈)적 사망’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육신적으로 죽는다면 그 사람은 불못(계20:10-15; 21:8)이라고 불리는 ‘둘째 사망’ 곧 ‘영(靈)적 사망’의 고통을 영원토록 겪어야 한다. 즉 죄인인 사람은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영존하는 불못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다. 한 번 지옥에 가면 영원토록 그곳에 머물며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눅16:19-31). 6. 영적(靈的) 출생(出生) 그런데 아주 놀랍고도 복된 소식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죄 값을 다 치르셨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다 해결하셨다(히10:10).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寶血)’를 흘려 돌아가셨다(벧전1:19).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씻어주실 수 있는 ‘무죄(無罪)한 피’를 흘리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불못의 영원한 고통을 대신 받으셨다(마27:4; 요일1:7). 따라서 이제 이 모든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6:23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니라.”(롬6:23하) 다시 말해 예수님을 자신의 인격적인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 언제 이 세상을 떠나가든지 지옥에 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마1:21; 요1:12; 3:16). 그러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born again)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이요,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요, 천국시민권자가 되는 것이요,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호적에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금 출생신고가 되는 것이다(요1:12; 3:3-7; 롬8:14-17; 고후5:17; 빌3:20; 계21:27; 22:4) 7. 마무리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구원받는 방법’(how to be saved)을 우리에게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독자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자신의 인격적인 구원자(Saviour)와 주님(Lord)으로 모셔들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다음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인 저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게 하신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며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를 도와 주셔서 이 죄들을 미워하여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받기를 원하나 저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저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며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을 신뢰하고 주위의 좋은 크리스천들에게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당신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께 당신의 새로운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분께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 당신의 삶은 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나니”(갈3:26)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2009-05-02 17:39:23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들머리   요즈음 대한민국호(號)가 엄청난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법무장관이 건국 이래 최초로 지휘권을 발동하여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한 친김(親金)주의자에 대해 불구속을 지시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제 대한민국호의 좌초는 시간문제인 것 같다. 비단 동국대 강 교수뿐이랴. 적지 않은 소위 지식인들과 종교인들과 예술인들과 시민단체들이 한 목소리로 반미, 반일, 민족, 자주, 민주, 인권, 자유, 평등, 평화, 통일 등을 합창하며 대한민국호의 파선을 재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외침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시작이 되었지만 특히 문민정부라는 이념적 과도기를 거치고난 후 이제 완전한 친김(親金)내지 종김(從金) 정부인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들어오면서 그 극(極)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05년 한해만 보더라도, 가장 흥행이 되었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그 아류(?)라 할 수도 있는 ‘천군’ 등을 통해 판타지로 포장된 폐쇄적 민족주의와 북존남비(北尊南卑)의 메시지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너무도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고, 또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과 같은 일견 과격한 액션은 그 스펙트럼을 확실히 하면서 그 동안 혼돈된 국가관과 민족관의 이슬에 젖어버린 이들에게 끝내기 수순의 퍼포먼스로 기획, 실행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대한민국호의 좌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금의 상황은 2003년 노동당에서 제작한 ‘력사적인 6. 15 북남 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대중투쟁의 조직과 지도방법’(이하 ‘노동당 문서’라 칭함)에 따른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국민도 드물지만 또 대부분의 국민이 이와 같은 김정일의 책략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일 뿐이다. 노동당 문서 중 ‘전략적 지도원칙’에 이은 ‘전략전술적 지도방법’을 보면 “우리 당의 정책적 요구를 반영하여 혁명발전의 요구와 군중의 의식수준에 맞게 제시하여야 할 것”을 가장 먼저 지적하고 있다. 이는 ‘조선노동당’을 지칭하는 ‘우리 당’의 정치적 기본구호를 군중의 요구와 정서,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구체화하여 작성해서 제시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이 노동당 문서는 “현 시기 대중투쟁에서는 ‘자주’, ‘민주’, ‘통일’을 자기 실정에 맞게 구체화한 구호를 들고 나가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2천만이 갇혀 있는 저 거대한 북녘의 수용소로부터 전달되고 있는 이러한 대중투쟁의 구호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거짓과 기만의 술수를 확인하고 아울러 이 나라를 향한 주님의 긍휼을 함께 구해보도록 하자. 2. 민족(民族, nation, race) 민족이란 말은 다의적(多義的)이어서 그 정의를 내리기가 무척 어렵지만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유행어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민족이란 너무나도 고귀하고 또 선험적(先驗的)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인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끼리’라고 말할 때 그 ‘우리’는 누구인지 정말 우리는 냉철히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우리’ 속에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온 정치가, 법조인, 자유언론인, 국군, 기업인, 중산층 등도 들어 있어야 마땅하며 아울러 해방이후 북한 공산화 과정에서 고향의 집과 땅을 모두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140만 명의 실향민도 ‘우리’에 포함이 되어야 하고 또 지금도 끊임없이 탈북하여 중국, 몽고, 시베리아, 동남아 각지를 유랑하며 남한으로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수십만의 탈북자들도 마땅히 포함이 되어야 한다. 이뿐이랴. 소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십만의 동포들과 또 동요계층 및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갖은 박탈과 억압 속에 신음하는 약 1,500만 명 이상의 북녘동포들도 ‘우리’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또 범위를 넓혀 보면 세계 각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해외동포들은 물론 구미 선진국인 독일, 프랑스, 미국보다 한국이 좋아 한국인이 된 이한우씨나 이다도시, 로버트 할리 같은 이들도 ‘우리’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다니엘 헤이와는 반대로 최근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수많은 버림받은 코시안(Kosian)들도 ‘당신’이라며 ‘우리’ 밖으로 내몰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해는 역사 속에서 너무도 잘 가르쳐져 왔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학습능력은 실로 미천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나치의 아리안주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나 대동아공영(大東亞共營)을 부르짖으며 일본이 한반도와 아시아를 침탈했던 것도 그렇고 또 오늘날도 오대양육대주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각종 인종분규들도 다 ‘민족’이란 슬로건 하에 자행되고 있는 집단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지만 가까이는 조선시대의 사색당파(四色黨派)처럼 참여정부에 들어서까지도 더욱 불거지고 있는 지역감정 및 각종 님비현상들도 이러한 폐쇄적 민족주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보편적 인류애를 그 바탕으로 하지 않는 ‘민족’이란 구호는 단지 증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의 외침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정일의 아버지(김일성이라 하는 김성주)는 동족을 치기 위하여 스탈린과 모택동 등 외세를 불러들여 300만 명의 남북한 동포를 죽였고 또 김정일 자신은 여러 가지 구제 수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willful negligence)으로 북한동포 30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다. 그런데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100일에 즈음하여 소위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의 담화에서 “지금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하고 있다”라고 했으며 평양방송도 1995년에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이라고도 했다. 더 나아가 1996년 평양방송은 ‘김일성 민족’에 이어 다음과 같이 ‘김정일 민족’을 새롭게 소개하면서 결국 그들이 선동하는 ‘민족’이란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사는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 태양이 영원하듯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은 영원무궁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결코 ‘김일성 민족’도 ‘김정일 민족’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후손이요, 곧 하나님의 자손일 뿐이다(창1:26; 행17:26-29),. “또 그분께서 인류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작정하신 때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하심이요, 혹시라도 그분을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행17:26,27상, 이하 흠정역) 3. 자주(自主, independence, autonomy) 스스로가 주인이란 한자어 뜻풀이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자주(自主)란 북녘에서건 남녘에서건 민족(국가)이 주체가 되어 타민족(타국가)의 도움을 받지 말고 우리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보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미 전술하였듯이 김일성은 외세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6.25라고 하는 사대주의적 전쟁을 일으킨 바가 있다. 따라서 김일성에겐 애사당초 ‘자주’를 외칠 자격이 전무한 것이다. 그러기에 북한은 남한이 먼저 북침하였던 것이라고 전 인민들을 세뇌시켜온 것이며 또 최근에는 강 교수 등을 통해 ‘통일전쟁’이라는 또 다른 거짓된 내재적 접근법을 선전하도록 하여 ‘자주’에 대한 원초적 반역을 남한의 국민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외세를 등에 업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사실은 (지금도 살아 계시는 수백만의 전쟁세대들의 증언은 차치하고서라도) 중국 단동에 소재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 곧 1950년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에게 보낸 자필편지 등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입증이 된다. 또한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동양학과 아나톨리 바실레비치 토르크노프 교수가 문서 해지된 자료들을 근거로 펴낸 ‘조선전쟁의 수수께끼와 진실’이나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기자로 근무하면서 평양특파원을 지낸 바도 있는 하기와라 료(萩原 遼)가 워싱턴에서 6.25 때 미군이 북한지역에서 수거해온 160만 페이지의 방대한 자료를 모두 섭렵한 끝에 출간한 ‘조선전쟁-김일성과 맥아더의 음모’에서도 김일성의 비(非)자주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르고 난 이후엔 강대국에서일지라도 자주국방의 개념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생겨난 것이며 또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나 북중 및 북소 군사동맹도 생기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정치와 국방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경제, 과학, 문화 등 우리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자주’는 그 폐쇄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이 바로 21세기 지구촌의 모습이다. 특히나 에너지와 식량을 자기들이 원수로 여기는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오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자주’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거짓과 증오와 교만 속에 ‘자주’를 외쳐온 김씨왕조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북한이 세계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필연적 순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잠10:18; 16:18).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4. 민주(民主, popular rule, democracy) 민주주의란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어(語)의 ‘demokratia’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demo(국민)’와 ‘kratos(지배)’의 두 낱말이 합친 것으로서 ‘국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전적 정의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으로서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는 뜻이다. ‘직접민주주의’나 ‘대의(代議)민주주의’ 또는 ‘사회적 민주주의’ 등 민주주의의 해석과 실행에는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으나 기본원칙은 같은데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은 대략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민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절대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적어도 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민권(民權)을 보장하여야 하는데 이 민권에는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포함되며 적법절차 없이 국민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 넷째,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여야 한다. 정부의 관리들은 계속적으로 의회와 언론에서 반대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독립된 사법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섯째, 정권교체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거라는 형식은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오직 노동당 후보 1인이 후보로 나와 100%의 찬성으로 당선되는 기가 막힌 선거만이 있으며, 노조도 없고 노동당이 주관하지 않는 언론도 전무한 상황이다. 또 정부의 시책은 인민의 복리증진이 우선이 아니라 김정일을 정점으로 한 선군(先軍)정치여서 인민들은 김정일과 군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정부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나 반대의견도 결코 허락될 수 없고 입법 및 사법제도도 유명무실한 것이며 정권교체는커녕 오직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는 것이 소위 ‘조선민주주의’인 것이다. “화 있을진저, 불결하고 더러운 여자 곧 학대하는 도시여! 그녀 안에 있는 통치자들은 울부짖는 사자요, 그녀의 재판관들은 뼈를 갉아먹되 이튿날까지 기다리지 아니하는 저녁때의 이리요, 그녀의 대언자들은 경솔하고 배신하는 자들이요, 그녀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침해(侵害)한 자들이로다.”(습3:1,3,4) 5. 인권(人權, human rights, civil liberties) 1966년 제21차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인권의 국제적 보장을 위하여 채택되어 1976년에 발효된 ‘국제인권규약’(國際人權規約, International Covenants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국제인권규약은 ‘조약’(條約, treaty)으로서 체약국(締約國)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인 A규약은 이른바 생존권적 기본권을 대상으로 노동기본권·사회보장권·생활향상·교육권 등을 각 체약국이 그들의 입법조치로써 실현 달성할 것을 내용으로 하며, 이의 실시상황을 UN에 보고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인 B규약은 이른바 자유권적 기본권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체약국이 이를 존중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이것의 실시 확보를 위하여 인권심사위원회와 그리고 필요에 따라 특별조정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선택의정서 참가국에 대해서는 개인이 인권심사위원회에 직접 청원(請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러한 국제연합(UN)의 방침을 좇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중고교생 두발제한은 인권침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교육부에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등 다방면에서의 ‘인권’ 보호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북한은 어떠한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아리랑 공연을 참관하였던 이들에 의해 “어쩌면 저 많은 사람들이 하나와 같이 움직일까?”, “무슨 힘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참가시킬 수 있는가?”라며 기적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데 대하여 쏟아지는 놀라운 찬사들이 우리 언론에도 보도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공연의 꽃이라 할 2만 명 규모의 대규모 카드섹션에 참가한 학생들이 수개월간 겪어야 했던 인권침해 덕에 아리랑 공연이 뜨게 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곧 불량학생이라고 낙인찍혀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 몽둥이질을 감수하고 소변을 참아 방광염에 걸리는 등 그 어린 학생들의 인권이 처참히 짓밟힘을 당한 결과 그러한 기적 같은 공연이 가능하게 된 사실은 감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이 핵심계층인 평양의 학생들에게 뿐이랴? 수많은 탈북자들의 수기 곧 ‘수용소의 노래’,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 ‘김정일 로열 패밀리’, ‘김정일 요리사’, ‘DMZ의 봄’, ‘두만강 건너는 예수’, ‘내래 예수 믿갔시오’ 등에 나오는 도저히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보면 북한의 인권상황은 한마디로 ‘인권’이란 단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의로운 자들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기뻐하나 사악한 자들이 다스리면 백성이 애곡하느니라.”(잠29:2) 6. 자유(自由, freedom, liberties) 자유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내용을 획일적으로 정식화(定式化)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자유의 원리의 공통된 내용을 중심으로 파악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보편적 인권’의 원리로서 정신적·사회적 활동에 있어서의 각 개인의 자유와 발의권(initiative)의 원리이다. 이것은 개성과 그 활동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며, 이성적 전달(communication)을 통해서 보다 나은 것이 형성될 것을 믿는 입장이다. 따라서 개인의 정신적·사회적 활동의 자유에 대한 비인간적·강제적 구속과 획일화를 가능한 한 제거하려 한다. 예컨대 시민적 자유(civil liberties) 곧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고와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를 비롯하여 재판에서 정당한 절차(due process)를 존중하는 것 등은 이 원리의 전형적 표현이다. 둘째는 ‘보편적 시민권’의 원리로서 이 시민적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정치제도와 정책과 기관을 비판하고, 만들고, 고칠 수 있는 자유를 모든 남녀에게 인정하는 원리이다. 정치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권리로서의 참정권(參政權), 정치에 있어서의 토론과 설득과정의 중시, 정치에 대한 사고와 비판의 자유, 보도에의 권리(알 권리), 정치적 집회·결사활동의 자유, 소수자의 권리보호 등의 정치적 자유가 여기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상기한 자유의 범주 가운데 어떤 항목이 북한에서는 가능한 것일까?  신체의 자유? 죄명도 모르고 즉시 수용소행이 비일비재하다. 거주·이전의 자유? 통행증 없이는 군과 군 또는 도와 도 사이의 경계도 넘어갈 수 없다. 종교의 자유? 지금도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고 있다. 사고와 표현의 자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만이 실질적인 최고 행위규범이다. 집회․결사의 자유? 어떤 노조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이다. 직업선택의 자유? 전적으로 노동당이 결정한다. 재판에서의 정당한 절차의 존중? 남편이 자기 부인을 직접 공개처형하기도 한다. 참정권? 오직 김정일에게만 있다. 알 권리? 이것도 오직 김정일에게만 있다. 소수자의 권리보호? 평양에서조차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국대 강 교수는 북한에도 자유가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약 강 교수가 북한에 가서 그가 주장하는 대로 “6.25전쟁은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다”라고 한마디만 해보면 북한에 자유가 있는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7. 평등(平等, equality, impartiality) 평등사상은 고대 노예제시대에는 아테네의 자유민 사이에서 ‘정치적 평등’의 실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중세암흑기 이후에는 성경보급의 영향으로 ‘하나님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노제와 함께 공장제 수공업을 기초로 하는 도시가 발전하여 시민계급이 형성됨에 따라 ‘법 앞의 평등’(equality before the law)이라는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그래서 결국 평등사상은 신분제적 불평등을 바탕으로 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성장·발전함에 따라 일반화가 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도 헌법 제11조에서 다음과 같이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어떠한 형태로도 창설할 수 없으며, 훈장(勳章) 등의 영전은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따르지 않는다.” 이외에도 우리 헌법에 명시된 ‘여성근로자의 부당한 차별의 금지, 혼인과 가족생활의 양성(兩性)의 평등’(36조), ‘교육의 기회균등’(31조), ‘선거권과 투표권의 평등’(41·67조) 등은 모두 ‘법 앞의 평등’의 기본원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평등한 사회인 것일까? 일례로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약 45억 달러의 비자금을 맡겨두고 식량구입에는 한푼도 쓰지 않아 수백만의 동포들을 굶겨죽이면서도 세계 최고급 꼬냑과 곰발바닥 요리와 매일 매일 비행기로 실어 나르는 파리의 아이스크림과 수단산(産) 수박을 즐기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초근목피(草根木皮)도 못 구해 인육(人肉)을 먹기도 하는 수많은 인민들이 있는 사회가 곧 북조선 ‘김정일왕국’이다. 크게는 20%의 핵심계층, 60%의 동요계층, 20%의 적대계층으로, 작게는 51계층으로 인민들을 충성도에 따라 세세히 분류하여 모든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곳이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멸망하고 주의 원수들은 어린양의 기름같이 되리니 그들은 타 버리고 연기가 되어 사라지리로다.”(시37:20) 8. 평화(平和, peace, harmony) 굳이 네이버 국어사전의 ‘평화’에 대한 정의(① 평온하고 화목(和睦)함. ② 전쟁이 없이 세상이 평온함)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평화’의 반대 개념이 ‘전쟁’인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어찌되었든 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후보 시절 “남북관계만 잘되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좋다”내지는 거듭 “전쟁이냐 평화냐”를 외친 결과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 대통령과 온 국민의 바람대로 지금 북한은 남한과 전쟁할 준비를 포기하고 있는 중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래 전 박영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했던 ‘서울 불바다’ 발언은 사실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군사평론가 지만원 박사에 의하면 북한은 남한과 달리 전술무기 외에 전략무기도 가지고 있는데 이 전략무기들에는 ‘서울 불바다’ 무기,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장거리 유도탄 등이 있다고 한다. 서울 불바다 무기는 아름드리 굵기의 야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프로그 미사일, 170mm 야포, 한 번 쏘았다 하면 36발이 거의 동시에 날아가는 240mm 구경의 공포의 다연장 로켓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대구경 포들은 수도권 전역에 분당 1만발 정도의 포탄을 쏟아 부을 수 있다. 또한 북한은 사정거리 300km의 스커드B, 500km의 스커드C를 600기나 남한 공격을 위해 배치해놓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유도탄의 중량은 500kg으로 한 발을 가지고도 ‘삼풍 참사’를 재현해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유도탄이라면 한국의 어느 도시든 순식간에 초토화할 수 있으며 어느 원자력발전소를 겨냥해 수백 대를 집중 사격하면 한국이 체르노빌로 변할 수 있다. 아울러 북한은 남한 인구를 3회 이상 살상할 수 있는 엄청난 화학탄과 생물학 무기를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한 다양한 투발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 불바다’ 무기와 유도탄 공격뿐 아니라 이러한 화학무기, 생물학 무기 등에 대해서도 우리에겐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2월 북한은 이들 기존의 엄청난 무기 외에 ‘핵무기’를 갖고 있음을 온 세계에 선언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선군’(先軍)정치를 내세워 당도 인민도 모두 다 군(軍)에 귀속시킨 김정일에 의해 이처럼 ‘조선인민 공화국’은 시나브로 ‘인민군 공화국’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리게 된 것이다(미3:5). “나는 화평을 원하나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120:7) 9. 통일(統一, unification, uniformity) 황장엽씨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하여’란 제목의 글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방안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안’과 관련하여 한 김일성의 발언내용을 참고로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며 “김일성이 연방제와 관련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핵심간부들에게 강조하였다”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연방제는 통일전선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적 방안이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북과 남이 자유롭게 내왕하면서 자기 제도와 자기 사상을 선전하게 되면 공화국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된 국가이기 때문에 조금도 영향을 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남조선은 사상적으로 분열된 자유주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조선에 나가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주체사상 선전을 대대적으로 하면 적어도 남조선 주민의 절반은 쟁취할 수 있다. 지금 인구 비례로 보면 남조선은 우리의 2배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실시하여 우리가 남조선 주민의 절반을 쟁취하는 날에는 공화국의 1과 쟁취한 남조선주민의 1을 합하여 우리 편이 2가 되고 남조선이 1로 된다. 이렇게 되면 총선거를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되고 전쟁을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된다. -중략- 그러나 태권도 부대를 한 100만 명 조직하여 권총이나 한 자루씩 채워 남조선에 내보내면 같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이남 출신이고 누가 이북 출신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남침이라는 구실을 주지 않고도 능히 우리가 남조선의 친북진보세력과 힘을 합쳐 정권을 잡을 수 있다. -중략- 연방제를 실시하여도 무력에 대한 통수권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무력을 쓸 수 있다. 이번에 국방위원장이 총사령관을 겸하도록 헌법을 고친 것은 그 때문이다.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총비서이기 때문에 국가수반과는 관계가 없다.” 이 글에서 보듯 북한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이란 단지 대남적화 통일의 전술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남북관계만 잘 되면’이라는 코드의 주가가 날로 치솟고 있으며 심지어는 강 교수같이 아예 ‘통일내전(內戰)’인 6.25전쟁이 맥아더 때문에 한 달 만에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지 않은 것을 노골적으로 원통해 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즉 한반도의 무조건 통일을 그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높은 가치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날로 팽배해 지고 있는 것이다. 통일? 물론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된 민주, 인권, 자유, 평등, 평화 등 ‘추구하는 가치가 실질적으로 같아야’ 하는 것이다(고후6:14-16상; 요이1:10,11)! “누구든지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채 너희에게 나아오거든 그를 너희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축복 인사도 하지 말지니 이는 그에게 축복 인사를 하는 자가 그의 악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자이기 때문이니라.”(요이1:10,11) 10. 마무리 인질사건이 며칠씩이나 계속되면서 범인이 인질을 방패로 하고 버티게 되면 인질로 사로잡힌 사람들 간에 기묘한 감정이 생겨서 인질범을 숭배하게 된다. 이것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불리는 병적 현상이다. 실제로 1973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와 인질이 된 여성 간에 연애감정이 싹터서 사건 해결 후 그 둘이 결혼한 예가 있다.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은 범인을 미워하기는커녕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동국대 강 교수와 같은 친김(親金)내지 종김(從金) 세력들은 마치 인질이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범인에게 감화되듯이 핵을 무기로 남북한을 인질로 삼고 있는 김정일을 숭배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있다. 특별히 북녘의 저 거대한 수용소로부터 전달되는 민족, 자주, 민주, 인권, 자유, 평등, 평화, 통일 등을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합창하며 대한민국호의 침몰을 앙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수용소의 노래’는 사실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채택된 ‘고전적인 사탄의 전략’의 김정일 버전으로서 이미 이브가 넘어간 적이 있었듯이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또 당할 수 있는 것이다(창3:1-5).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상)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여!”(사5:20)
2009-05-02 17:38:29 | 관리자
영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내세 혹은 영원에 대한 의문을 품고 산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은 사람의 영원성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구원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나는 대부분의 세상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으로서 한 사람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보다 많으면 그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 선행, 고행, 예배, 문화, 희생, 자선 등을 통해 스스로의 행위를 가지고 영원하며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이런 것을 가리켜 가인의 길이요, 종교라고 부른다(유11).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에 종교를 가르치는 자들을 향해 ‘독사들의 세대’라고 꾸짖으셨다(마3:7; 23:33).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서신서에서 3회나 종교라는 말을 쓰면서 종교 체제 하에서의 부정적인 것을 기술하였다(행26:5; 갈1:13-14). 종교는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오히려 지옥 불 속으로 그를 밀어 넣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롬3:23).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서면 다 더러운 존재로 판명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람 안에 있는 의는 모두 더러운 누더기라는 데 있다(사64:6). 그러므로 피조 세계의 외부로부터 오는 의 즉 사람을 지은 창조주가 베푸는 의가 아니고는 그분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 된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사람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닿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죄 없는 그분께서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죄로 인한 형벌을 다 담당하고 피를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사 그 뒤에 부활의 소망이 되신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고전15:2-4; 20-23).
2009-05-02 17:37:34 | 관리자
글: 차한 박사 1. 프롤로그(prologue)   지난 5월 28일 폐막된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연배우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밀양’의 흥행속도에 불이 붙고 있다. 6월 2일 현재 전국 303개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밀양’은 개봉 2주차를 지나면서 오히려 상영관을 40개나 더 늘리는 등 기염을 토하고 있다.   또 전국 스크린의 절반에 가까운 상영관을 점령하다시피 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 3편’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밀양’은 주요 영화 예매 사이트 집계 예매율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어서 장기상영에 돌입할 것이 예측되고 있다. 이는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라는 프리미엄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영화전문 온라인매체 인디와이어가 ‘밀양’을 ‘올해 칸 영화제에서 꼭 봐야 할 10편의 외국어 영화’로 선정하였다는 보도와 함께 영화 자체에 대한 관객들의 호평과 입소문 등에 의해 많은 관객들이 찾아들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관객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기꺼이 촬영에 협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밀양’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교묘하게 왜곡된 반성경적인 것이어서 이 영화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더욱더 진리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밀양’의 줄거리를 먼저 소개한 후 이 영화 속에서 뒤틀려 나타나는 몇 가지 중요한 영적인 주제들을 점검하면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지혜를 구해보고자 한다(딤후3:1-5). 2. 시놉시스(synopsis) 구름 몇 점이 한가로이 떠 있는 하늘로부터 영화는 시작이 된다. 집에서 극심히 반대하던 결혼을 했던 신애(전도연 분)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교통사고로 죽어버리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아들 준과 함께 내려온다. 그런데 밀양 외곽의 낯선 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정비사인 종찬(송강호 분)의 도움을 받게 된다. 또 종찬의 소개로 피아노 학원과 안채가 붙어 있는 작은 집을 구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아들 준을 유치원에 보내면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꿈꿔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곁에는 언제부터인지 종찬이 붙어 다닌다. 이웃들은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 고향으로 아들을 데리고 왔다고 이상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아들과 함께 있는 그녀는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다 그녀의 아들은 유치원 원장에 의해 유괴되어 살해된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신애는 가슴에서 터지는 극심한 고통에서 괴로워하다 교회에서 하나님(神)을 만나 그 아픔을 극복하고 신실한 신자가 된다. 그 신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러 교도소로 면회를 갔는데 그 살인자는 편안한 얼굴로 하나님(神)이 이미 자신을 용서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보다 먼저 그 살인자를 용서한 하나님(神)에 대한 분노로 신애는 하나님(神)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장로를 유혹하기도 하고, 도둑질을 한 CD로 야외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고, 또 그녀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고는 병원으로 실려 간다. 퇴원 후 머리를 다듬고 싶어 종찬과 함께 들어갔던 미용실에서 그녀는 범인의 딸과 마주친다. 소년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보조로 일하고 있는 그 아이의 손에 맡겨져 머리를 자르던 중 그녀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위를 집어 들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그녀 옆에서 종찬은 묵묵히 거울을 받쳐 들어준다. 그 잘려진 머리카락들은 바람에 날려 볕이 드는 마당 구석으로 향한다. 3. 아이의 죽음(death of children)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플롯은 신애의 아들 준의 죽음이다. 그런데 만약 죽은 아들 준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정확히 알았더라면 신애는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인인 약사는 아들이 유괴되어 죽은 상황을 하나님 입장에서 설명해 달라는 신애의 요청을 받자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 ~ 저 햇살 한 줌에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만 말한다. 아마도 관객들에게는 ‘주님의 뜻’이 ‘인샬라’와 혼동되었을 터인데 어찌되었든 신애에게 정확한 성경적 진리가 선포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의 죽음 이후 안타까운 몸부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뜻하지 않게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신애와 같은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는 어떠한 말을 해주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대로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죽은 아이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정확히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롬12:15; 고전12:26; 요8:32). 먼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어린아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그들이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와 그분께서 그들을 쓰다듬게 하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들을 데려온 자들을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며 팔로 그들을 안고 그들 에게 안수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니라.”(막10:13-16, 이하 흠정역)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 ~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14)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러한 구절들은 단지 어린이처럼 순수함을 갖고 살라는 비유만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어린이는 그 상태로서는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4. 선악의 구별(knowing good and evil)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어린이와 어른의 기준이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몇 살까지는 죽으면 천국에 가고 몇 살 이후에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도 아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헬라어 상으로 볼 때 성경에서 어린아이인 ‘파이디온’이 자라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때를 ‘파이다리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이디온’이 ‘파이다리온’으로 변하는 때는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이다. 신구약 여러 곳에서 이 사실들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신명기 1장과 이사야 7장 정도만 살펴보더라도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주께서 너희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분명히 이 악한 세대의 이 사람들 중에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다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주를 따랐은즉 그는 그 땅을 볼 것이요, 그의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리라, 하시고 주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네 앞에 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거기에 들어가리니 그의 용기를 북돋으라. 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을 상속하게 하리라. 또한 너희가 탈취물이 되리라 하던 너희의 어린것들과 그 날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은 거기에 들어가리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줄 것이요,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리라.”(신1:34-39) 신명기 1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광야에서 불신의 죄를 지은 것을 기억나게 한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죄를 범했을 때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어른들은 모두 요르단 강 저 편에서 죽어 그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선과 악을 알지 못하던 아이들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민14:29-31).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책임질 수 있는 나이를 알고 계셨고 또한 어린아이들은 그 죄악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버터와 꿀을 먹겠고 이로써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리니 이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몹시 싫어하는 그 땅이 자기의 두 왕에게 버림을 받으리라.”(사7:14-16) 그렇다. 심지어 주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성숙한 상태로 자라나셔야만 했다. 물론 그분께서 선을 택하시고 악을 거부하실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선 그렇게 될 때까지 자라나셔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를 지은 바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까지 자라나셨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것이다. 5. 천국(Heaven) 구체적으로 욥과 다윗의 경우를 통해 어린이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부터 죽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배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들이 먼저 가서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젖가슴이 먼저 가서 내가 빨게 하였던가? 그리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제는 내가 가만히 누워 평온히 지내고 잠들어 안식하였을 것이요, 자기를 위해 황폐한 거처를 세운 땅의 왕들과 조언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혹은 금을 가진 통치자들 곧 은으로 자기 집을 가득히 채운 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은 남모르게 유산된 자같이 내가 존재하지도 아니하였겠고 전혀 빛을 보지 못한 어린아기들 같았으리라. 거기서는 사악한 자가 소란을 그치고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안식을 얻으며”(욥3:11-17)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욥은 자신이 태아나 신생아나 유아의 상태로 죽었더라면 자신의 혼(soul)이 ‘거기’에 가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표현된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 부활 이전이므로 스올(Sheol), 그 중에서도 낙원(Paradise)임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하거늘 ~ 그러나 이 행동으로 인하여 왕이 주의 원수들에게 신성 모독의 큰 기회를 주었으니 왕에게 태어난 아이 또한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니라. ~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주께서 치시매 아이가 심히 앓더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더니 ~ 빵도 먹지 아니하더라. 일곱째 날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 그들이 이르되, 죽었나이다, 하매 이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주의 집에 들어가 경배하고 ~ 그 앞에 빵을 차려 놓으니 그가 먹으므로 이에 그의 신하들이 ~ 왕께서 일어나서 빵을 드시니 도대체 왕께서 행하신 이 일이 무엇이니이까? 하매 그가 이르되 ~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I shall go to him)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13-23) 다윗은 자기 아이가 앓다가 죽었을 때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들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일반적인 행태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이미 천국에 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현재 천국에 있을 것을 의심하는 크리스천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 난 지 일주일 만에 죽은 다윗의 아이가 어디에 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해진다. 다윗과 그의 아이는 분명 같은 장소에 있을 것이라고 성령님께서는 다윗의 입을 통해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신애의 아들 준과 같은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수 있는 신애와 같은 어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 개인의 인격적인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여야만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마1:21; 요1:12). 6. 치유(healing)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고 나온 신애는 괴로움에 구토를 연발하다가 눈을 치켜뜨면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치유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발견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손들고 노래하는 사람들,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 여기저기서 흑흑대는 분위기 속에서 결국 오열하고 만다. 처참하게 울부짖는 신애의 머리 위에 목사의 손이 얹어지고 나자 신애의 흐느낌이 잦아든다. 신애에게 하나님(神)이 찾아와 그녀를 어루만져 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신애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초연해하며 평안과 기쁨에 들떠 변화된 자신을 간증한다. 그렇다면 정녕 신애의 상처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손길로 치유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신애는 다만 위장된 치유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었다(마7:16; 12:33; 약3:12). 소위 오늘날 기독교계 내에서 행해지는 영적치유의 메커니즘이 상당부분 인본주의에 근거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신애가 진정한 치유를 얻으려면 먼저 진정한 치유자(Wonderful Counsellor)를 만나야 했었다(사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Wonderful), 계획자(Counsellor),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사9:6) 그러나 신애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틀 속에 빠져서 우리의 진정한 치유자시요, 생명의 주인이시요,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출15:26; 사53:4-9; 벧전2:24; 요14:6; 행4:12; 롬3:10,23; 5:12; 6:23상; 5:8; 6:23하; 10:9,10,13). 이것은 비단 신애에게만 국한된 상황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집회, 치유집회 등을 쫓아다니며 나름대로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애와 같이 위장된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7. 신앙의 심리학화(psychologizing of the faith) 그렇다면 인본주의 심리학의 갖가지 테크닉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기고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이다(롬3:23; 5:12; 6:23상). 그리고 이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14:6; 행4:12; 롬5:8; 6:23하; 10:9,10,13). 그러나 오늘날 세련되고 우아한 많은 교회 내에서 기능결손(dysfunctionalism), 피해자화(victimization), 병이나 장애(disorder) 등의 개념이 죄(sin)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는 “모든 사람들의 기능이 결손 되어 그 기능이 ‘사람들이 바라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니”로 대치되고 있다. 따라서 이의 해결책 또한 인본주의 방법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눅9:23). 그러나 신앙이 심리학화되어 가고 있는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자기를 귀하게 여기라고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긍지’(self-esteem)가 강조되다 보니 요즈음 교회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로 족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족해야 한다(골2:9,10; 3:4,11; 빌1:21; 딤후3:16,17; 요8:31,32; 17:17). 그러나 자기 개선 테크닉, 자기 계발 코스, 자기 활성화 원리 등이 그리스도로 족함을 무시하고 있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다’라는 그럴듯한 인본주의 슬로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다. 넷째, 예수님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7:3). 그래서 바울이나 베드로나 전 인생에 걸쳐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였다(빌3:8-10; 벧후1:2,3). 그러나 신앙이 급속도로 심리학화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알라’ 대신 갖가지 새로운 목회 도구들을 통해 ‘네 자신을 알라’라는 외침을 더 많이 듣게 된다(호6:3). 8. 자기 사랑(lovers of their own selves) 다섯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 명령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마22:37,38).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마22:39). “그때에 그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은즉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마22:35-40) 그러나 오늘날의 심리학화된 많은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자기 사랑’을 힘써 선포하고 있다(딤후3:1,2).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아주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자기 사랑의 신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사기꾼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읽고나서 다음과 같은 교묘한 해석을 붙인다. “우리가 그동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던 까닭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 사랑하듯 할 수 있겠는가? 우선 제 몸 사랑하기를 바로 하고 나서야 이웃 사랑도, 또 나아가 하나님 사랑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살이에서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고 또 무거운 짐에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을 가득 메운 정서적인 문제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기며 그 다음 단계의 논리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즉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려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여 전문가의 특별 지도를 받거나 특별한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사랑 예찬론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인용한 성경구절을 숙고해 볼 때 두 가지 점에서 반성경적인 속임수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첫째는 본문 안에 나오는 두 명령에다 자신들이 만든 명령을 추가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는 점이다. 9. 용서(forgiveness) 그래서 심리학화된 신앙을 통해 하나님(神)을 만나 자기 사랑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신애는 그 다음 단계인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곧 아들 준을 죽인 유치원 원장을 용서하기 위해 그를 면회하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면회실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살인범의 모습은 어린아이를 유괴해 살해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하나님을 만난 내가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다.’는 신애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내 다음과 같은 살인범의 신앙간증에 묻혀버리고 만다. “나는 이미 주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주머니도 주님의 품에서 지내는 걸 보니 참 다행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기도로 신애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뉘앙스까지 풍기면서 말하는 유괴살인범의 온화한 모습에 신애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용서? 하나님이 벌써 용서했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요?” 영화 ‘밀양’에서 가장 중요한 반전인 이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준이를 살해한 유치원 원장이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여 크리스천이 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다. 진정 거듭난 크리스천이라면 자기가 죽인 아이의 엄마 앞에서 그렇게 평안한 얼굴로 당당하게 용서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까?  진정 하나님의 긍휼로 죄사함 받은 자라면 준이 엄마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매일매일 눈물로 회개하고 있다고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 용서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 값을 달게 받겠다고 말하며 신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았을까(마5:23,24)?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대적하는 일이 있음을 기억하거든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아울러 중생하지 못하여 진정한 치유를 받지 못한 신애, 그래서 이웃사랑에 실패한 그녀에게도 끊임없이 이웃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과 죄의 용서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진리가 그녀 주변의 크리스천들에 의해 선포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마9:6상; 18:21,22)?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마18:21,22)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진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마9:6상) 10. 구원(salvation) 이창동 감독이 그린 하나님께 용서 받은 살인자는 회개 전과 회개 후가 별 차이 없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기독교인들의 모습도 대부분 가식적으로 보이고 있다. 손을 들고 고래고래 ‘주여’를 외치는 모습이나 만트라(mantras)처럼 터져 나오는 목사나 성도의 기도도 그러하지만 특별히 담임 목사를 비롯한 약사부부나 교인 모두가 신애의 슬픔에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있다. 함께 모여 신애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면 신애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함께 슬피 울며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했었다(롬12:15; 고전12:26). 그러나 ‘밀양’ 속의 교인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따르라 말할 뿐이었다. 이건 이창동 감독이 철저히 의도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밀양’이 말하는 하나님(神)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밀양’은 성경적 진리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마1:21; 요1:12; 3:16; 14:6; 행4:12; 롬3:10,23; 5:12; 6:23상; 5:8; 6:23하; 10:9,10,13). 신애가 자기 손으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이 영화는 보편적인 신(神)을 받아들임을 통한 ‘스스로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밀양’(secret sunshine)으로 동일시되는 ‘하나님’이나 ‘교회’가 가해자로 인식되는 반면 고통의 순간마다 신애의 곁에 있어준 보통 사람 종찬이 뿜어내었던 따뜻한 사랑이 진정한 ‘밀양’(secret sunshine)으로, 곧 구원의 메시지로 관객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11. 다른 복음(another gospel) 즉 기독교의 하나님이 하지 못하는 사랑을 오히려 속물인 종찬과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다는 ‘복음’이 ‘밀양’(secret sunshine) 속에 비밀스럽게 녹아 있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밀양’은 하늘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사는 땅 위에서 맺어지는 이야기이며 신에 관한 영화가 아닌 인간에 관한 영화”라고 규정한 사실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gospel)과는 완전히 다른 복음(other gospel)이다(갈1:6-10).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곧바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창3:15). 가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포된 원형복음(protoevangelium) 곧 여자의 씨(the woman's seed)를 구원자로 보내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후에도 계속 대언자들을 통해 선포되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약속의 말씀은 성취되었다(마5:17).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무죄(無罪)한 피를 흘려 돌아가셨다(마1:21; 27:4; 눅23:33,46; 요19:34; 요일1:7). 그리고 정확히 삼일 만에 예수님께서는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눅24:1-12).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만 있게 되면 누구든지 부활하여 영생의 복을 받게 된다(고전15:12-22). 즉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롬10:9,10).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한다. 석가나 마호메트나 공자나 하다못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신애나 속물근성으로 살아가는 종찬과 같은 보통 사람들 스스로도 구원자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며 어느 종교나 신앙에서도 다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즉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진리이지 유일주의나 절대주의는 진리일 수 없다는 사고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교계 내에서도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12. 에필로그(epilogue) 그래서 이를 반영하듯 요즈음 기독교계 내에서도 ‘밀양’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 기독교의 현실적이고 진솔한 모습을 다분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가 대세인 가운데 여러 교회에서 ‘밀양’을 설교의 주제로 다루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 소모임 등에서 나눔의 소재로도 활용한다는 보도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할 점은 ‘밀양’에서 기독교 내부고발자의 시선을 통한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와 결과는 오래전 뱀이 에덴동산에서 행했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한다는 사실이다(창3:1-5). 그래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이이건 간에 성경적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밀양’의 현주소이다. 그렇다. ‘밀양’(secret sunshine)에서 비치는 빛은 ‘참 빛’(the true Light, 요1:9; 요일2:8)이 아니라 루시퍼(Lucifer, helel, light bringer, 사14:12)의 빛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an angel of light)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제 ‘참 빛’(the true Light)이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요8:12)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2009-05-02 17:36:41 | 관리자
1. 들머리 차한 박사   지난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분당 샘물교회 교인 23명이 피랍되었다. 탈레반은 자국내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의 철수와 탈레반 죄수 23명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에 불응시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탈레반은 인질석방 협상이 실패하였음을 선언한 후 배형규 목사를 살해하였고 7월 31일에는 심성민 씨를 추가로 살해하였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8월 1일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였다. 8월 10일 우리나라 정부와 탈레반 대표가 가즈니서 첫 대면을 하고 인질석방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고 사흘 뒤 탈레반은 아픈 여성인질 2명을 석방하였다.8월 27일 우리 군 당국은 아프간에 파병된 동의․다산 부대를 3개월 연장 주둔 후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한국과 탈레반 대표가 가즈니 적신월사 건물에서 대면협상을 재개하여 나머지 인질 19명 전원을 석방키로 합의하였다.드디어 8월 30일 모든 인질이 석방됨으로써 아프간 피랍사태가 42일 만에 막을 내렸다.이상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프간 피랍일지이다.그런데 이번 아프간 사태는 아마도 한국 기독교 역사상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반기독교 정서를 촉발시킨 사건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특히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을 보면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 맺혔던 각종 응어리들이 이 아프간 사태에 덧붙여 무섭게 분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물론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한 교계 안팎의 충고와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며 또 모든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선교의 방법론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을 통해 선교의 기초들(basics)을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principles)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히6:1,2). 2. 선교(宣敎) 아프간 사태를 보는 국민들의 상당수가 반기독교 정서에 쉽게 편승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샘물교회 교인들이 선교를 하러 갔는데 왜 샘물교회 측에서는 순수한 봉사활동이라고 거짓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사건 발생 이후 교회는 피랍자 생명을 위해 ‘선교’를 ‘봉사’로 써줄 것을 언론에 요청했고 예배, 교회, 목사 등 기독교적 용어가 보도되지 않게 하기 위해 피랍자 가족 사무실을 샘물교회에서 한민족복지재단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이후 재단 측 항의가 잇따르자 다시 사무실을 교회로 옮기고 교회 건물 이름인 ‘분당타운’으로 써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그렇다면 이처럼 선교는 얼마든지 순수한(?) 봉사활동으로도 대체가 될 수 있는 개념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선교는 그 정의상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다른 지역이나 타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을 일컫는다. 둘째는 “선교(mission) = 복음전파(evangelism) + 봉사(service)”의 공식으로 정의가 된다. 이 공식은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압살라(Uppsala) 회의 후에 존 스타트(John Stott)에 의해 제안이 된 것인데 그 후 스타트는 ‘교회가 세상에서 활동해야 할 모든 것’을 포함하기 위해 선교의 정의를 ‘복음전파’(proclamation)와 사회활동(social action)을 포함하는 ‘사랑의 봉사’(love and service)로 수정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고전적인 선교의 정의에 의하면 ‘봉사’ 또는 ‘사회활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따라 ‘선교’의 정의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사회활동이 복음전파의 수단(행18:1-3; 20:34,35)으로, 또는 동반자(partner, 눅4:16-32)로, 또는 전도의 표현(요14:11)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들 중 어떤 식으로 적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선교의 모습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급기야는 본말이 전도되어 ‘봉사’가 ‘전도’를 잡아먹는, 즉 전도가 완전히 사라진 경우까지도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회의 선교가 로터리클럽이나 다른 어떤 NGO의 사회활동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점차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선교는 단지 순수한 봉사활동으로 변질되어 소위 기독교인들조차 ‘봉사’라고 하는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을 복음인양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고후11:3,4).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3,4, 흠정역) 3. 선교(mission) 그런데 “선교 = 봉사”라고 하는 잘못된 개념은 사실 선교(mission)의 어원을 살펴볼 때 충분히 납득이 갈 수가 있다. 우리말로 선교로 번역되는 영어의 ‘미션’(mission)은 라틴어 ‘미시우스’(missius)에서 나온 말로서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 곧 사도(apostle)에 해당되는 말이다. 사도권 계승이라는 이단 교리에 기초하여 성경의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던 로마 카톨릭은 처음에 교황만을 사도라고 가르치면서 교황의 선포를 실제적으로 성경의 권위 위에 두었다가 이것이 성경의 권위에 밀려 흔들거리게 되자 교황뿐 아니라 사제들도 사도직에 해당한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실제로 사도란 말의 의미처럼 사도회를 조직하여 해외에 파송하였는데 그것마저 성경의 권위에 위축된 나머지 사도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라틴어로 돌려서 ‘밋쇼나리’(선교사, missionary)라 하게 된 것이다.<그후 로마 카톨릭은 아예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일으키면서 모든 평신도들도 사제들과 협동하여 사도적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1921년 마리아 군단(Legio Mariae, Legion of Mary)이라는 평신도 조직망을 형성한 다음 도제제도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카톨릭 교회에 의한 세계정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다.그러나 성경은 사도직이 대언자(선지자)직과 함께 교회 설립의 기초에 해당되는 일시적 직분임을 밝혀주고 있으며(엡2:20; 4:11) 마지막 사도인 바울 이후에는 결코 사도라 불릴 자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9:1-5; 엡3:5; 벧후3:2; 유1:17; 계21:14). 사도들과 대언자들은 성경을 위해 부름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경으로 기록하며 성경을 맡아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이 활동할 당시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동등하게 인정될 정도로 그들은 특별한 존재들이었다(행2:42).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끝났고 그후부터 성경 자체가 사도권과 대언자직을 대체하면서 모든 것의 최종권위로 드러나게 되었다(고전13:8-10).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사도권의 계승을 직접, 간접으로 주장하게 되면 바로 성경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적 위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이처럼 비성경적인 어원을 가진 선교(mission)가 (비록 우리는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말이지만) 복음을 담지 못하고 대신 봉사(service)라는 다른 복음(another gospel)으로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고후11:13-15). “그러한 자들은 거짓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흠정역) 4. 제자 삼기(making disciples) 이번에 아프간에서 피랍된 샘물교회 교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적 열정을 갖게 되는 이유는 틀림없이 마태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개역) 그런데 여기서 ‘제자 삼는다’의 헬라어 원어인 ‘마쎄테스’(mathetes)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비인격적이고 상업적인’ 성격으로 주로 도제제도에서 쓰인다고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제자 삼는다’란 번역이 적합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문에서 ‘마쎄테스’는 주님의 가장 긍정적인 지상명령의 동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의미의 ‘가르친다’로 번역이 되어야 적합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흠정역) 모든 민족들에게 말씀을 가지고 가서 ‘가르치는 것’이 ‘제자를 만들어 내는’ 인위적이고도 비인격적인 개념보다 주님의 의도에 더 가까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소위 제자훈련을 시키는 사람의 제자가 만들어져왔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겠다.또 제자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한 ‘배가의 원리’(the principle of multiplication) 혹은 ‘재생산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복음화함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들이 이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개역)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흠정역) 그런데 제자운동가들은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이 말씀이 바울로부터 시작하여 디모데와 충성된 사람들을 거쳐 다른 사람들까지 이어짐으로써 배가의 모델이 잘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배가의 모델이라기보다는 실제적으로 성경말씀을 보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즉 사도 바울은 이미 디모데가 들은 것이 건전한 말씀들(sound words, 딤후1:13)임을 설명하였기에 바로 이 말씀들을 신실한 사람들(faithful men)에게 맡기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딤후2:15) 곧 ‘거룩한 성경기록들’(딤후3:14,15)임을 바울은 계속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제자운동가들이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그 말씀을 신실하게 보존하는 자들을 길러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 삼는 자에게 충성된’ 자들을 만들어보기를 원하고 있다. 즉 배가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조직에 충성을 다하고 리더의 권위에 복종하는 제자들을 양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5. 복음전파(傳道) 이번에 아프간에서 풀려난 어느 자매의 싸이월드를 본 많은 네티즌들이 ‘과연 그들이 선교를 간 것인가 관광 문화체험을 하러 간 것인가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필자는 그래도 그 자매가 복음을 들고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자신이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며 감격한 사실에 긍정적인 점수를 주고 싶다.비단 이 자매뿐이랴. 선교의 열정에 불타는 많은 젊은 크리스천들이 특별히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종족을 향해 달려가기를 소원하고 있는데 이는 이를 통해 주님의 재림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개역)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 곧 우리가 구원받게 된 복음(고전15:1-4; 마1:21; 요1:12; 3:16; 행4:12; 16:31; 롬10:9,10,13)이 선포되어야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구절을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왕국의 이 복음(this 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흠정역) 그렇다. 그냥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란 단어의 의미가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어떤 복음이건 그 의미가 다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왕국의 복음(마24:14),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 요3:16; 롬1:1,16; 고후10:14; 엡6:15), 영광스러운 복음(고후4:4; 딤전1:11; 히2:10), 영존하는 복음(계14:6) 등은 그 의미가 다르다. 왕국의 복음은 누가복음 1장 32절과 33절에 예언된 것으로서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실 지상왕국을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 한다는 좋은 소식이다. 성경에서 이 복음이 선포된 것은 두 번 나오는데 처음에 뱁티스트 요한의 사역과 함께 왕국의 복음의 선포가 시작되었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이 복음을 선포했지만, 유다인들이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끝이 나고 말았다(마3:1-6; 4:17,23-25; 9:35; 막1:14). 그러나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이 왕국의 복음은 다시 선포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있는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마24:14)은 현재 각 민족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은혜의 복음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전파되고 있는 것은 구원의 복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지 하늘의 왕국의 복음이 아니다. 하늘의 왕국의 복음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증거를 위한 것으로 왕국을 건설할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통보하는 것이다. 하늘의 왕국의 복음은 대환난 때에 선두주자 엘리야(말4:5-6)와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할 것을 위임받은 다른 사람들이 선포할 것인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모으는 것이다. 6.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 아프간에서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몸값이 탈레반에게 지불이 되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탈레반과 약속한 게 있어서 밝힐 수 없다.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 이외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얘기할 수 없다.”고 답을 하였다.그리고 정부는 탈레반과의 협상을 통해 아프간 내 한국인 선교사 철수와 한국 선교사 아프간 활동 중지를 공식적으로 약속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피랍자 측에 실비정산을 하기로 하여 사실상의 구상권을 행사키로 결정을 하였다. 정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적용할 전례를 만들겠다는 정책적 판단을 한 것이다.그런데 이와 같은 정부의 행동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통해 얻은 기독교회의 정체성에 너무도 심각한 훼손을 가져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라고 하는 성경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교회와 국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리되어야 하며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통제할 수 없음을 믿어왔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서로 독립적인 관계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마22:15-22).그렇다. 교회와 국가는 각각 독립적이며 그 관여하는 영역이 다르다. 교회는 영적인 영역에 관여를 하고 국가는 세속적인 영역을 다룬다. 이 두 영역에는 서로 구분이 있다.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쳐져야 한다(마22:21). 우리는 이것을 정교분리(政敎分離) 또는 정종분리(政宗分離)의 원칙이라고 한다. 만약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게 될 경우 실제적으로 교회는 국가라고 불리는 기관의 한 부속물이 될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 교회는 독립적인 지위나 목소리를 상실하고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정치적 엘리트들의 손아귀에서 조종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왕국인 교회와 세상 국가를 분명하게 구분하셨다(요18:36). 사도들도 교회의 사역인 전도와 교육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함이 마땅하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행5:29). 그러므로 정부관리는 교회 곧 신앙의 영역에 관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물론 우리는 교회와 국가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음도 있지 말아야 한다. 교회와 국가를 서로 배타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민등록증과 천국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중국적자이다(빌3:20).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각각 다른 부분으로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다. 죽은 이후에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지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혼과 육체가 서로 연합하여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7. 마무리 “정부는 탈레반에 건넨 몸값에 대해 국민에게 공개하고 구출비용 전액을 피랍자와 교회단체에 구상권을 행사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국가가 보호할 수 없는 국민의 생명까지 보호할 의무가 있을까요?  해외봉사활동 가시는 분들은 유서와 구출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갑니다. 아프간 피랍사건에서 정부가 탈레반과 협상하지 않는다 하여도 정부를 탓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피랍된 23명 중 21명을 구출하였습니다. 피랍 기간 중 국민들은 40여 일 동안 가슴 졸이며 피랍자의 죽음에 아파해야 했습니다. 국제사회는 납치범과 협상하고 몸값을 건넨 한국 정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피랍자와 피랍에 관련된 교회단체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아닐까요! 이런 청원마저 하지 않는다면, 또 정부가 피랍자와 단체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런 사건이 또다시 재발될 수도 있을 것이며 우리 정부와 국민은 서로를 바보처럼 느끼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구출된 피랍자들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기보다 국민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분은 하나님이지만 당신들을 구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기에……가슴은 따뜻하지만 머리는 차가운 많은 국민 여러분들의 서명을 부탁합니다.”이상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려진 ‘아프간 피랍자 구출비용 청구하라.’란 제하의 서명운동 발의문이다.그러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가? 정녕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만약 다시 떠난다면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무해하라.”(마10:16, 이하 흠정역)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일을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 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흠이 없고 무해한 자 곧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빌2:13-15) 필자는 소망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오늘 아프간 딜레마를 겪고 있는 우리의 간증이 되기를…… “그러나 형제들아, 내게 일어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을 진전시키는 기회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원하노라.”(빌1:12)
2009-05-02 17:34:34 | 관리자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원하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라탔습니다. 아직도 숨이 가빠 헐떡이며 땀을 닦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놓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십니다.” “네! 이 열차를 놓쳤으면 네 시간이나 무료하게 기다릴 뻔했습니다.” 짧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뜁니다. 하지만 영원한 미래를 생각하며 참된 길로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진화론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자동차나 비행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다 설계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먼지 가루를 땅바닥에 놓고 아무리 수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도 자동차나 비행기가 저절로 생겨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비롭게 이루어진 인간이란 존재가 우연히 생겨날 수 있을까요? 인간과 온 우주를 우연의 결과로 돌리는 진화론은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가설과 이론뿐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집마다 지은 자가 있으되 모든 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브리서 3장 4절) 성경은 말합니다. 우주 만물을 보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위엄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1장 20절). 저 하늘을 보십시오. 해와 달과 별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충돌하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시계 부품을 통에 넣고 흔든다고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설계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고의로 그분을 무시하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짐승이나 해와 달 같은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장 21-23절).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지 않습니까? 이교도들은 돌덩어리를 깎고 나무를 새겨서 만든 각종 형상에게 경배하고 있습니다. ◆ 세상의 슬픔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세상에 슬픔과 혼돈이 가득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이사야서 59장 1절) 인간이 제멋대로 행한 죄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성연애로 인한 에이즈(AIDS)의 만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 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로마서 1장 27절)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므로 모든 사람을 무조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건을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 물건을 검사하여 설계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다 폐기시키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도 창조물인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행하면서 창조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존재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더불어 공의를 집행하십니다. ◆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멸망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면서도 눈앞의 일에만 빠져있습니다. 시간이 아깝다고 쉴 새 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자기 인생이 치닫고 있는 방향은 보지 못합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브리서 9장 27절)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파멸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영원의 문제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방향 없는 인생, 떠돌다 끝나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부담을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선하고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까맣게 잊고 있던 일과 자신도 모르던 마음의 의도까지 낱낱이 다 밝혀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자신 있으십니까? 우리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로마서 3장 10-11절). TV나 신문에 나오는 흉악한 범죄자들만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죄인이면 마땅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려고 애써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철학에 몰두하고 종교에 심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심판을 잊게 해주거나 조잡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는 그 어떤 노력에도 구원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모든 사람의 죄의 대가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로마서 5장 8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9장 13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조물인 우리 사람은 창조주께서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이제 당신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듯이 지금 이 글을 읽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잊은 채 살아가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준비해 놓으신 은혜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온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당신은 이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선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 분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www.KeepBible.com | www.KACR.or.kr
2009-05-02 17:33:34 | 관리자
1. 프롤로그(prologue) 차한 박사   얼마 전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타이타닉 서울 전(展)’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미국, 러시아, 유럽 등에서 2천만 명이상이 관람한 바 있고  ‘인체의 신비 전’, ‘진시황전’과 함께 세계 3대 전시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이 ‘타이타닉 전’이 아시아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것이란 소식을 듣고 바쁜 시간을 쪼개 딸아이와 함께 전시장을 찾게 되었다.   휴일에다가 또 여러 이벤트가 동시에 열렸기 때문에 전쟁터를 방불케 한 주차장에서 어렵사리 곡예에 가까운 주차를 하고 입장한 전시장은 주차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그 스케일과 구성이 소문대로 대단하였다. 미국 RMS 타이타닉사가 프랑스, 러시아와 공동으로 1987년 이후 총 6회의 해저탐색으로 수집한 6천여 점 이상의 유물들 중 대표적인 3천여 점이 최첨단 기술로 옮겨진 40피트 규모의 대서양 빙산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으며, 1998년 아카데미상 14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을 비롯하여 총 11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1959년의 ‘벤허’와 함께 아카데미상 역사상 최다수상 기록을 세운 영화 ‘타이타닉’의 감동을 다시금 불러일으켜주는 대규모의 선실 세트들도 재현이 되고 있었다.   엔진 원통 및 닻 등 선체 일부로부터 도자기로 된 거울, 치약통, 나비넥타이, 선원들의 옷에 달렸던 작은 단추들이나 다이아몬드 목걸이 등 ‘타이타닉’ 영화를 본 이들의 향수(?)를 자극할 각종 유물들이 세련된 연출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아두고 있었으며, 아울러 영화의 주인공 ‘잭’(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분)과 ‘로즈’(케이트 윈즐릿 분)가 다시 만나게 되는 라스트 씬의 무대인 중앙계단을 비롯하여 등급별로 나누어져 있는 선실내부와 보일러실, 갑판 등이 정교하게 복원되어 마치 타이타닉 호에 승선한 것과 같은 멋진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관람을 하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전시장을 나오면서 너무나도 놀라운 느낌이 엄습해왔다. ‘떠다니는 궁전’ 또는 ‘꿈의 여객선’이라 불렸던 이 타이타닉 호가 처녀항해에 나선 지 5일도 안되어 역사상 가장 처참한 재해로 사라져 버린 이야기는 바로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이었다. 2. 항해(voyage) 주지하다시피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높이 30m, 너비 28m, 길이 270m, 무게 4만6천 톤으로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이자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불침선(不沈船)이라고 알려졌던 타이타닉 호가 북대서양에서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다.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처녀항해에 나선 지 겨우 4일 17시간 30분 만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만 것인데 이 사고로 배에 탄 2,223명 가운데 1,50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날씨는 아주 맑아서 사람들은 넓은 갑판을 산책하거나 일광욕을 하며 해상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울러 ‘물 위에 뜬 궁전’이란 이름에 걸맞은 각종의 호화로운 시설들 곧 연회장과 우아하게 굽어지는 중앙계단, 네 개의 승객 엘리베이터, 대양을 지나는 배 위에 만들어진 최초의 수영장, 헬스 시설, 라운지와 바 등은 승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이타닉 호가 주는 풍요로움을 즐기면서 항해를 하는 이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고 영향력이 있는 백만장자나 학자 등의 저명인사들이 많았지만 3등실 승객 가운데에는 가난한 이민자들도 적지 않았고 또한 사기꾼과 신용불량자들도 섞여 있었다. 즉 다양한 부류의 탑승객들이 뉴욕을 향해 가는 이 초호화 여객선에 승선하고 있었던 것인데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수십억의 벼라별 사람들이 타이타닉 호의 항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간의 항로를 따라 영원까지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원을 향해 가는 여행에는 타이타닉 호와 달리 1등실에서 3등실에 이르는 등급의 구분이 없으며 또 영화 속 ‘잭’과 ‘로즈’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 신분의 차이도 없고 심지어는 승무원과 승객의 차이도 없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여행을 감독하시는 분으로서 이 항로를 여행하는 이들을 단지 한 등급으로만 보시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등급이다(롬3:23).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인생을 여행하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신분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이하 흠정역) 3. 경고(warning) 타이타닉 호의 앞길에 빙산이 떠다니고 있음을 알리는 첫 무전이 들어온 때는 오전 9시였다. “타이타닉 호 선장에게. 북위 42도, 서경 49∼51도, 바다에 떠돌이 빙산이 있음. 캐로니아 호로부터.” 정오에는 발틱 호로부터 비슷한 무전이 들어왔고 오후에도 타이타닉 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지나던 캘리포니안 호로부터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배에는 승무원들 말고도 타이타닉 호를 만든 화이트 스타 선박회사의 브루스 이스메이 전무와 설계사 토머스 앤드루스도 타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 무전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항해사와 당번들에게 바다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속도를 늦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여객선들이 도착 시간을 꼭 맞추어 대는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었던 데다가 ‘거인, 태양의 신, 절대군주’를 뜻하는 ‘타이탄’(titan)에게 소속된 승무원들이었기에 그 어느 누구도 빙산 따위는 안중에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자만심에 들뜬 승무원들을 태우고 타이타닉 호는 22노트라는 엄청난 속도로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밤이 되자 날씨가 매서워졌다. 밤 11시에 타이타닉 호로부터 10마일 떨어진 곳에서 밤을 새기 위해 정선하고 있던 캘리포니안 호로부터 또 무전이 들어왔다. “여보세요, 우리는 빙산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배와 교신하고 있던 타이타닉 호의 무선사는 벌컥 짜증을 냈다. “끼어들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남의 무전 교신을 방해하고 있소.” 면박당한 캘리포니안 호의 무선사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일이 끝나는 11시 30분이 되자 무전기를 끄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이처럼 북대서양을 항해하는 동안 위험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타이타닉 호가 경고를 무시했으므로 뉴욕항에 안전히 도착하지 못했던 것처럼 죄인인 우리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된다(히2:3상; 겔18:4하; 롬6:23상; 계21:8). “죄를 짓는 그 혼은 죽을지니라.”(겔18:4하) “진노가 임하였으니 그대는 주의하여 그분께서 그대를 쳐서 제거하지 아니하시도록 하라.”(욥36:18상)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으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4. 구조요청(SOS) 타이타닉 호의 망대에서 바다를 살피고 있던 당번이 이상한 물체를 발견한 시각은 밤 11시 40분 조금 못 되어서였다. “바로 앞에 빙산입니다!”라는 보고를 듣고 일등항해사 윌리엄 머도크는 즉시 키잡이에게 소리쳤다. “우현으로 끝까지!” 키잡이가 있는 힘을 다해 타륜을 돌리자 머도크는 잇달아 외쳤다. “전속으로 후진!” 키잡이가 다시 타륜을 돌리자마자 타이타닉 호는 아슬아슬하게 빙산을 비켜 갔다. 그러나 사실은 물 속에 잠긴 얼음덩어리에 옆구리를 들이받힌 뒤였다. 스미스 선장은 급히 설계사 앤드루스와 함께 배를 점검했다. 제1선창, 제2선창, 우편실, 6호 보일러실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물에 잠겨 있었다. 배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타이타닉 호는 어느 한 곳에 물이 들어와도 다른 곳에는 번지지 않도록 격벽(隔壁)을 16개나 만든 배지만 워낙 큰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니 그 엄청난 수압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계산해 보니 배가 가라앉기까지는 겨우 90분이 남아 있었다. 스미스 선장은 구조 신호를 보내라고 무선사에게 말하고 이어 구명보트 내릴 준비를 명령했다. 그러나 구명정 16척과 조립식 보트 4척은 고작 1,200명만 태울 수 있었다. 나머지 1,000여 명의 목숨은 구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스미스 선장으로부터 배의 위치를 나타내주는 한 장의 종이를 넘겨받은 무선사 잭 필립스는 국제 재난신호 CQD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막 가라앉기 시작하는 타이타닉 호로부터 긴급신호가 여러 곳에 위치한 배들이 듣도록 타전되고 있었다.  “CQD, CQD, SOS, SOS. 즉시 와주시오. 우리는 빙산에 부딪쳤소. 여기는 북위 41도 46분, 서경 50도 14분, CQD, SOS!” 그렇다. 이처럼 갑자기 빙산에 부딪혀 침몰 직전에 있는 타이타닉 호의 경우와 같이 우리 인생의 여정도 1시간 후인지 1분 뒤인지 정확한 시간만 모를 뿐 예정된 침몰(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히9:27).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영원의 문제를 깨닫는 즉시 신속하게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롬6:23; 계20:11-15; 21:8; 롬10:13).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롬10:13) 5. 구조(rescue) 타이타닉 호로부터 긴급신호를 받은 카르파티아 호는 지체 없이 뱃머리를 돌려 그 배가 낼 수 있는 14노트보다 더 빠른 17노트로 달렸다. 코텀은 무선실로 돌아가 즉시 타이타닉 호에 알렸다. “MGY, 네 시간 안에 가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코텀은 송신기를 껐다. 다른 배들이 타이타닉 호로부터 구조요청 신호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타이타닉 호로부터 SOS를 받은 배는 카르파티아 호말고도 두 척이 더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와 가장 가까운, 한 시간도 안되는 10해리 거리에 있었던 캘리포니안 호만은 끝내 구조요청 신호를 받지 못했다. 타이타닉 호의 무선사에게 모욕을 당한 캘리포니안 호의 무선사가 그 시간에 무전기를 끄고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15일 오전 2시 20분 마지막 보트 두 척을 미처 내리지도 못하고 타이타닉 호는 수천 명의 울부짖음과 엄청난 폭음을 남기고 물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빙산과 부딪친 지 2시간 40분 만이었다. 오전 3시 55분쯤 되어 카르파티아 호가 사고해역에 도착했지만 타이타닉 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을 향해 가는 인생의 항로에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 처한 것을 깨닫고 구원을 요청하는 즉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시121:2-4; 요3:16; 눅23:39-43).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아울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은 언젠가 조난의 위험에 다시 빠질 수도 있는 이 세상의 구조선과 달리 영원토록 안전이 보장된 완전한 방주(the Ark)이다(마24:37; 벧전3:20,21; 요10:28).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6. 사랑(love) 대피 명령이 내렸기 때문에 잠자리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갑판으로 나온 타이타닉 호 승객들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구명대를 걸치고서도 다른 사람의 차림새를 손가락질하며 낄낄대고 있었다. 선원들이 여자와 아이들 먼저 보트에 타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저 작은 배에 타느니 차라리 여기 남겠소.”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더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4월 15일 0시 45분, 긴급구조를 바라는 신호탄이 밤하늘에 불꽃을 터뜨리자 사람들은 비로소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이미 배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고 있었다. 갑판은 삽시간에 어지러워졌다. 이 와중에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계속 보트로 옮겨 탔다. 그러나 메이시 백화점 스트라우스 회장의 부인 아이다와 앨리슨 부인은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배에 남아 남편과 함께 죽음을 택하였다. 그리고 앨리슨 부인의 세 살배기 딸 로렌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부짖어 1등 선실 어린이 29명 가운데 유일하게 타이타닉 호에 남아 죽음을 맞았다. 25세의 엘리자베스 에반스는 한 구명보트에 안전하게 타고 있었는데 막 그 보트가 내려질 무렵 너무 많은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자 곁에 있던 제이 브라운 여사에게 “당신의 필요가 내 것보다 크군요. 당신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저는 없지요.” 하고는 일어서서 보트를 떠나 천천히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 호와 함께 어두움 속으로 사라졌다. 그 외에도 존 제이콥 아스톨, 아더 라이어슨, 아키발드 버트 등을 비롯한 여러 영웅적 희생자들에 의해 구조된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도 구조된 자들은 자기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준 이들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들에게 진 생명의 빚을 일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과 생명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롬5:8). 따라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영원한 멸망’(lake of fire, 계20:15; 21:8)으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새로운 삶’(new life, 갈2:20)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하) 7. 찬송(hymn) 타이타닉 호가 빙산과 충돌한 후 침몰할 때까지 2시간 40분 동안 있었던 수많은 영웅적 행동가들 가운데에는 8명의 선박 악단 단원들도 마땅히 포함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타이타닉 호의 악단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 실력을 소유한 당당한 음악가들이었는데 공포와 근심이 배를 휩쓸고 있을 때 승객들을 진정시키려고 배 위의 여러 장소로 옮겨가면서 래그타임(ragtime), 오페라, 왈츠, 찬송가 등 다양한 곡들을 계속 연주하였다. 이 용감한 음악가들이 타이타닉 호와 함께 대서양으로 내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주하였던 찬송가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사라 아담스(Sarah Flower Adams)의 불후의 명곡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인데 이 찬송의 우리말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두 번째는 ‘가을’(Autumn)이라는 의견이 있다. 무선 보조기사 해롤드 브라이드는 그가 미친 듯이 긴급 조난구조 신호를 타전하던 동안이나 얼음 물 위에 떠 있었을 때에도 악단이 ‘가을’을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가을’의 가사 중 특별히 끔찍한 시련을 겪게 되는 이들을 위한 노랫말이라고 여겨지는 3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유혹이 나를 맹렬히 내려칠 때, 내가 내 원수들을 발견할 때, 죄와 허물과 죽음과 사탄이 모두 연합하여 내 영혼을 대적할 때, 장엄한 바다 가운데서 나를 붙드소서. 내 눈으로 위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소서. 의(義, righteousness)와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과 평강과 영원한 사랑을…” 용감한 8명의 음악가들에 의해 마지막 몇 분 동안에 연주된 이 찬송가의 마지막 가사는 아마도 그들의 마지막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장엄한 바다 가운데서 나를 붙드소서. 내 눈으로 위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소서. 의(義, righteousness)와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과 평강과 영원한 사랑을…” 8. 구령(救靈, soul winning) 타이타닉 호가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와 뗏목, 나무판자 조각 등에 의지하여 구조선이 올 때까지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는데 이 공포의 50분 동안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그 밤을 가득 채웠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에바 하트는 “저는 사람들이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내는 소리를 당신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소리였어요. 그 뒤에는 두려운 정적만이 감돌았어요.”라고 하였으며 또 아키발드 그레시 대령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애처롭고 두려운 모습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던 불쌍한 사람들의 곡성이 아직도 내 귀에 선합니다.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겁니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였다. 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마지막 몇 분 동안 한 사람이 나무판자에 매달려서 존 하퍼(John Harper) 가까이 떠내려 왔다. 물 속에서 생사의 고투를 하고 있던 하퍼는 외치듯이 말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그 사람은 “아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하퍼는 성경을 인용하여 몇 마디 말을 계속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 사람은 어둠 속으로 떠내려갔다. 잠시 후 해류의 방향이 바뀌어 서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이르게 되자 거의 죽어가고 있던 하퍼는 다시 한 번 외치듯 물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그 사람은 또 같은 대답을 하였다. “아뇨.” 하퍼는 다시 사도행전 16장 31절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 행16:31) 그리고 나서 얼음 물 속에서 힘이 쇠잔해진 하퍼는 서서히 붙들고 있는 나무판자를 놓으며 물 무덤 속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하퍼가 힘써 복음을 전하였던 그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고 몇 시간 후 카르파티아 호의 구명보트에 의해 구조가 되었다. 온타리오에 있는 해밀턴 호텔에서 이 생존자는 자신이 존 하퍼에 의한 ‘마지막 회심자’(last convert)임을 증언하였다. 그렇다. 타이타닉 호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다른 영혼(soul)을 진정으로 살려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는 존 하퍼(John Harper)뿐이었다(요6:63; 롬10:15; 고전15:45). 9. 구조된 자들과 잃어버려진 자들(the saved vs the lost) 밤바다에는 초록빛 등불을 단 구명보트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물결을 따라 넘실대고 있었다. 첫 번째 보트에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사이에 날이 밝아 왔다. 사고 해역에는 여기저기 빙산이 널려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을 새까맣게 태운 보트들이 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카르파티아 호에 먼저 닿으려고 힘껏 노를 저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다 여자였고 남자 선원 한 사람씩이 보트를 이끌고 있었다. 노를 빨리 저으려고 ‘뱃사람이여, 기슭으로 저어가세’ 라는 뱃노래를 부르는 보트도 있었다. 오전 8시 40분. 마지막 구명보트로부터 75명이 카르파티아 호에 옮겨 탐으로써 구조 작업은 막을 내렸다. 구조된 보트는 모두 16척, 살아난 사람은 720명. 마침 카르파티아 호 선실은 반이 넘게 비어 있어서 생존자들을 태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구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캘리포니안 호가 그곳에 왔다. 그들은 카르파티아 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카르파티아 호는 타이타닉 호가 가라앉은 사실을 알려주고, 자기들은 급히 뉴욕으로 돌아갈 테니 그곳에 남아 주검들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했다. 1912년 4월 10일 수요일 정오에 시작된 여행은 카르파티아 호가 뉴욕 항구 54번 부둣가에 도착함으로써 마침내 종료가 되었다. 그 시각은 4월 18일 밤 9시 30분이었다. 그리고 1912년 5월 12일 화이트 스타 선박회사는 “구조된 자들(the saved)과 잃어버려진 자들(the lost)”에 대한 최종 리스트를 발표하였다. 구조된 사람 수는 720명, 잃어버려진 사람들은 1,503명이었다. 그런데 잃어버려진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이름이 ‘잃어버려진 자들(the lost)’의 명단에 포함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이란 여행을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려진 자들(the lost)’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여행은 궁극적으로 두 개의 종착지 곧 천국(heaven)과 지옥․불못(hell; lake of fire) 가운데 하나에 도착함으로써 끝나게 되어 있다(히9:27). 타이타닉 호가 수많은 경고를 무시하며 잘못된 판단을 하였기 때문에 1,503명이 뉴욕에 도착할 수 없었듯이 우리가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려지게 된다. 화이트 스타 선박회사가 발표한 “구조된 자들(the saved)과 잃어버려진 자들(the lost)”의 명단은 변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둘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었으며 잃어버린 자의 명단에서 구조된 자의 명단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the saved)와 구원받지 못한 자(the lost)”에 관한 하나님의 최종명단도 변경이 불가능하다. 10. 에필로그(epilogue) 며칠 전 홍해에서 1,400여 명의 승객들을 태우고 가던 이집트 여객선 ‘알 살람 98’ 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집트 당국은 구조선박 4척과 헬기를 급파했고 영국 해군도 인근에서 작전 중이던 군함을 보내 구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고 해역은 강풍이 계속되는 등 기상이 나빠 구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아마도 타이타닉 호 이후 최대의 해양 참사로 기록될 전망인데 2월 3일 현재까지 사고 해역에서 시신 100여 구가 인양되었으며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생존자 200여 명이 구조되었다고 AP통신은 전하고 있다. 그렇다. 1912년의 ‘타이타닉’ 호나 2006년의 ‘알 살람 98’ 호처럼 우리 인생의 항로는 ‘구조되거나 아니면 잃어버려지는’(saved or lost) 것으로 끝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싶으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구조된 자들의 명단에서 여러분의 이름이 발견되도록 하지 않으시렵니까?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니라.”(롬6:23)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2009-05-02 17:32:14 | 관리자
개구리와 함께 하룻밤만 더   (One More Night With the Frogs, 1956년 8월 17일, 휴 파일 목사)   “모세가 파라오에게 말하되, 내게 영광이 있나이다. 내가 왕과 왕의 신하들과 왕의 백성을 위해 어느 때에 간구하여 왕과 왕의 집에서 이 개구리들을 멸하고 그것들이 강에만 있게 하리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하매,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될지니 왕께서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음을 아시리이다.”(출 8:9-10)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그곳에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고, 400년 동안이나 고센 땅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파라오)이 통치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박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올라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지도자를 이스라엘에 보내셔서 그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 땅위에 임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개구리 재앙이었습니다.   어디에나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침실에도 개구리, 부엌에도 개구리, 거실에도 개구리, 빵 반죽 통에도 개구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이스라엘 백성) 가는 것을 네가 거부하면, 보라, 내가 개구리로 네 온 지경을 치리라.”(출8:2)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빵 굽는 오븐을 여는 이집트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개구리가 튀어나오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맙니다! 한 친구가 안락한 잠을 자기 위해 이불을 젖히는데 그 안에도 그의 잠자리 친구가 되려는 개구리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그의 옷에 올라가 앉아 있고, 주머니 속에는 뭐가 있을까요? 역시 개구리입니다! 개구리들이 발가락 사이에 끼어 짓이겨지며, 학교로 가는 이집트 소년들의 발길에 채이는 걸 보십시오! 궁궐에도 개구리, 더러운 오두막에도 개구리. 작은 개구리, 큰 개구리! 개굴개굴 우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다 먹을 정도입니다! 집안에도 개구리, 뜰에도 개구리 - 수백만 마리의 개구리들이 서로 앞 다투어 자기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강에서 나옵니다. 수많은 개구리들이 죽임을 당한 뒤 악취 나는 산 무더기로 쌓아 올려진 광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파라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 모세를 불렀습니다. “주께 간구하여 개구리들이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백성을 가게 하리니 그들이 주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출8:8) 모세는 틀림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드디어 파라오가 결심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파라오가 개심 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왕과 왕의 신하들과 왕의 백성을 위해 어느 때에 간구하여 왕과 왕의 집에서 이 개구리들을 멸하고 그것들이 강에만 있게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파라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일 그리하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아니 ‘내일’이라니, 그건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 아닙니까? 개구리가 그의 음식에도, 침대에도, 옷에도,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에 널려 있어서 그와 그의 백성들은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를 듣고 언제고 그 개구리들을 즉시 없애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결정은 오직 파라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개구리와 하룻밤만 더 지내게 해 주시오!” 어떻게 그는 그토록 지긋지긋한 개구리들과 함께 하룻밤을 더 지내고자 했을까요? 파라오는 죄인이자 죄인들의 유형이었습니다. 그는 순종하지 않고, 자만하며, 육적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벗어나 길 잃은 사람, 즉 오늘날의 많은 죄인들의 좋은 표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그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죄인들처럼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개구리였습니다. 개구리는 그의 죄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죄 때문에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난, 의심, 무거운 짐, 고통, 질병, 슬픔, 두려움, 혼란, 절망, 비탄의 개구리들. 이것들 모두가 다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까?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슬픔과 어려움의 개구리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개구리들을 제거하시려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파라오와 같이 우리들 대부분은 “내일 제거해 주십시오! 부디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 묶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파라오는 ‘내일’이라고 말했으나, 성령님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히3:7-8)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는 ‘내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오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내일 무엇을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너무나 잘 씁니다! 어떤 크리스천에게 가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라고 설교해 보십시오. 그는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속받은 존재인 것도 인정합니다(고전6:20). 그는 성화되고 성령 충만한 삶만이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참 된 예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항복하기로 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영적인 승리자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내일!’입니다. 그는 언제나 ‘내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 하룻밤만 더 패배하여 황폐케 된 크리스천의 삶을 살도록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품을 떠난 배교자에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해 보십시오. 그는 대개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형제님, 저도 확실히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이후로는 슬픔과 비참함밖에 없었어요. 저는 이제 이런 비참한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요. 주님과의 교제를 끊은 뒤로는 아픔과 슬픔, 어려움과 패배만을 겪어왔어요. 저는 하나님께 돌아갈 거예요!” 이에 당신은 기뻐서 이렇게 말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자,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같이 기도드립시다.” 그러면 그 배교자는 말합니다. “저, 형제님, 지금 당장은 안 되고요, ‘내일’ 하겠습니다.” 그는 개구리와 함께 하룻밤을, 그의 육적인 욕망과 함께 하룻밤을, 타협하고 흥청망청 마셔대면서 하룻밤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깃발을 내어 던지고는 하룻밤을, 즉 더러운 개구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뉴욕에서 열다섯 살 된 한 소년이 거리 밑의 하수구 통 안에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다툰 뒤 집에서는 더 이상 자기가 필요한 존재가 못된다고 느끼며 낡아서 내버려진 큰 하수구 통에서 살기로 하고 그곳에다 잠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가 낡고 더러운 매트 위에서 자고, 음식을 끓일 수 있는 버너가 하나뿐인 조그만 석유난로에서 요리를 하며 하수구 통 안의 쥐들과 이 주일을 지낸 뒤에야 마침내 경찰들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경찰이 그를 집에 데려 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애야, 네가 집에 돌아오기만 했다면, 난 그 다음 날 바로 너를 용서했을 거다!” 많은 배교자들은 죄 많은 세상의 하수구 통에서 두 주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많은 경우에 거의 일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그의 눈물을 입맞춤으로 씻어주시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오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9) 길 잃은 죄인 역시 개구리와 함께 하룻밤을 더 지내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승리자는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당신의 짐을 들어주실 것이며 당신의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 같은 말에 종종 그 죄인은 여러분이 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으려 하지만 끝에 가서는 ‘내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에서 늘 미루기만 하는 ‘내일 사람’(Tomorrow men) 셋을 만나셨습니다.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담무쌍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자 더 이상 그 사람으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를 위해 희생과 궁핍한 생활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최상의 잠자리’에서 ‘하룻밤 더 즐기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59절). 그러나 그는 “주님, 내가 먼저 무엇 무엇을 하게 허락하시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내가 먼저!’에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하시옵소서.” 물론 그의 아버지가 정말로 죽었다면 그가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한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이 남자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즉 계속해서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 지내려 했습니다. 이 구절의 요점은 다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부모님이나 다른 친인척들에게 더욱 헌신하는, 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하여 쉬기 위해 주일(the Lord's Day)을 이용합니다. 그들은 예전에 자기들의 육신적 욕망을 채워 주던 농장으로 되돌아가 빈둥빈둥 지내기 위해, 자기들의 영혼은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주의 날에 먹고 잡담이나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무엇 무엇을 하게 허락하시옵소서!” 저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몇 사람이 주님께 순종하기 전에 자신들의 부모님 혹은 어린 자식들 혹은 사랑하는 이들을 말 그대로 무덤에 장사지내야만 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사람에게,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 세상이라는 영안실과 묘비에서 ‘하룻밤만 더’ 지내기 위해 자기의 옛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자들만을 사용하실 수 있으며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만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자원했던 세 번째 사람은,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그러나’가 바로 그의 문제였습니다. 휴즈(Walter Hughes)는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보통 교회 주변에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 당신이 양 우리에 온 것이 아니라 염소 우리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그러나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가서 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성가대에서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에 정규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성도로부터 혹은 죄인으로부터 늘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사람은 말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여기서 우리는 또 ‘내가 먼저’라는 아주 익숙한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과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단숨에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고 나서는 “내가 먼저…”(me first)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내 가족과 작별하는 것을 허락하시옵소서.”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그의 가족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만약 그의 가족들이 그를 보았더라면 곧장 달려가서 그에게 금방 내렸던 결정을 번복하라고 종용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 남자와 같은 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주여, 제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방종함을 허락하소서. 하룻밤만 더 컨트리클럽에서, 혹은 놀음판에서, 혹은 무도회장에서, 혹은 선술집에서 보내게 해 주소서.” 비록 그들이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라고 말하지만 그 ‘하룻밤’은 끔찍하고 끝없는 밤 즉 ‘영원히 어둡고 캄캄한 밤’으로 계속해서 연장되고 맙니다. 저는 창세기에서 리브가라는 여인이 이삭의 아내가 되기 위해 아브라함의 종과 즉시 떠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사실 리브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죄인들은 모두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의 이삭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겠다는 결정을 단숨에 내려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오랜 여행 끝에 드디어 리브가에게 이르렀습니다. 리브가는 그 사람과 그의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도록 했으며, 이 충성스러운 종은 자신이 마침내 자기 주인의 아내가 될 처녀를 제대로 찾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브가와 그녀의 가족은 그 종이 이삭의 막대한 재산을 보여 주는 보석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런 것들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기 위해 떠나야 했고 떠나기 전날 밤에 리브가의 어머니와 그녀의 큰 오라비 라반은 이마를 맞대고 의논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이것 좀 봐라, 얘야, 리브가가 이 일을 서두르게 할 순 없어. 아직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아침 신문 사회면에 낼 사진도 찍지 않았잖니!” “맞아요, 어머니, 그리고 리브가처럼 혼수 상자나 웨딩드레스 하나 없이 결혼하는 처녀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그들은 이삭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처녀 리브가가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더 지내게 하십시오. 그 뒤에 그녀가 갈 것입니다.”(창24:55) 이처럼 신앙이 없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은 종종 죄인으로 하여금 단숨에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더 이상 머물기를 거절하자 그들은 리브가를 구슬려 자기들과 함께 머물도록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리브가야, 이 사람과 함께 갈 거니?”(창24:58) 그때 리브가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가겠습니다.”(I will go)! ‘만약’도, ‘그리고’도, ‘그러나’도 없었습니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도 없었습니다. “가겠습니다!”, “일어나 예수님께로 가겠습니다!”, “가겠습니다!” 더 이상 개구리와 함께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도 이 같은 결정을 내리셨다면 저는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플로리다주 어떤 마을에 있는 제일침례교회(the First Baptist Church)에서 이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 주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제가 개구리에 관해 설교하던 그 날 밤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다른 교회에서 온 영리하고 매력적인 소녀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교의 어떤 동아리 모임의 회장이었습니다. 그날 밤 예배를 드린 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날 밤 교회를 나서며 그녀는 제게 눈을 반짝이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제게는 더 이상 개구리와 함께 지내는 밤은 없을 거예요!” 저는 그녀가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녀의 고백을 믿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왜 여러분이 개구리와 단 하루도 더 지내서는 안 되는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설명하려 합니다! 첫째, 개구리는 내일 떠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회가 항상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한 젊은 부자 관원도 구원을 얻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는 그것에 아주 근접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탐욕이라는 암이 그의 영혼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돌아서 버렸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그 다음날도 슬픔, 비참함, 불행, 허전함이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개구리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표를 샀습니다(욘1:3)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그러나 요나는 깊고 푸른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즉 하나님의 방법 대신 요나 자신의 방법으로 하룻밤을 더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은 항상 어려움을 동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나운 비바람을 보내셨습니다. 그 낡은 배는 삐거덕거리고 신음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고 흔들거렸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내던져지기까지 그 배는 확실히 부서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킬 커다란 고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역사상 최초로 고래 잠수함을 탄 승객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래 뱃속이라는 이상한 배 안에서 지중해 행 여행을 했습니다. 그 안에서 요나는 토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고래가 느꼈던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실로 배교자는 너무나 메스꺼운 존재라 고래조차도 요나를 더 이상 참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요나는 성경에서 가장 소화가 안 되는 사람으로 불린다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주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래를 해변으로 끌어 올리셨고, 마침내 고래는 요나를 자기 뱃속에서부터 끌어 올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단추를 누르셨고, 고래는 쉼을 얻었으며 요나는 배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자기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던 니느웨를 향해 마른 땅위로 달려갔습니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그같이 많은 슬픔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방법대로 행했을 때는 개구리가 떠나지 않았고 다른 많은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저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시에 있는 교도소를 처음 방문했던 것 - 수감자로서가 아니라 단지 방문자로서 - 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선교 단체에 속한 여성 회원들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여자 죄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월요일마다 그곳에 내려갔고, 그 날 아침 저도 감옥에 있는 여인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이 우리보고 여자들 감옥에 가게 될 거라고 얘기했을 때, 저는 매춘과 악으로 얼룩진 세월을 지내고 이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더럽고 늙은 사회의 낙오자들, 추한 노파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감옥이 온통 십대의 소녀들로 꽉 차 있는 걸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가장 어린 소녀는 열네 살이었으며 평균 나이는 열일곱 정도였습니다. 거기서는 ‘나이든’ 여인이래야 겨우 이십대였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전 주말에 무도회장 주변에서 음란 행위를 하다가 잡혀왔습니다. 열다섯 살 먹은 한 아름다운 소녀는 자정 무렵에 대략 열 명의 선원들과 함께 있는 것이 발견되어 잡혀왔습니다. 제가 한 소녀에게 어떻게 그런 생활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물어보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실은요, 목사님, 전 춤추는 게 좋아요.” 그래서 그들은 거기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더럽고 누추하며 낡은 감방으로 더러운 침상이 놓여 있고, 빈대 및 쥐들이 밤에는 그들의 발밑에서 돌아다니고 공중 화장실에는 문도 없고 고약한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우리는 그 소녀들에게 설교한 뒤 크리스천이 되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으며, 그들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고, 그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바르게 시작할 수 있게 하실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과 용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실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하자 그들은 단지 히죽 히죽 웃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죄의 맛을 보았고 그들의 옛 육신은 그런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만, 싫어요! 제발 우리가 쥐와 빈대와 하룻밤을 더, 더러운 감옥에서 하룻밤을 더, 개구리들과 하룻밤을 더 보낼 수 있도록 이대로 내버려두세요!” 그러나 개구리들은 다음 날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녀들은 여전히 감옥에 그들의 죄 속에 비참함 속에 감금된 채 있었습니다! 플러(Charles E. Fuller) 목사님은 “구식의 부흥 시간”(Old Fashioned Revival Hour)이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기 남편을 교회로 데려갈 수 없었던 한 크리스천 부인은 그 방송을 듣고 있었고 자기 남편이 집안 어디에 있든지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라디오의 음량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 복음 설교에 너무나도 화가 난 그녀의 남편은 마침내 부엌에 있는 의자를 집어던져 그 라디오를 산산조각 내 버렸습니다. 그는 플러 형제의 목소리를 잠시 동안 멈추게 할 수는 있었으나 자기의 영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설교를 멈추도록 라디오를 부순 것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비참함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개구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떨쳐 버릴 수 없었고 예수님을 모셔 들여 결국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 분은 또 다시 라디오 하나를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죄인들은 자기들이 모든 일을 바르게 한 뒤 교회에 다니겠다고 말합니다, “목사님, 참으로 저는 똑바로(혹은 올바로) 되었을 때 크리스천이 되겠어요.” 혹은 “믿어도 돼요, 목사님, 우린 모두 똑바로 되자마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러한 죄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교회에 오는 것은 단지 그들이 판자처럼 곧고 뻣뻣하게 되었을 때 즉 그들 모두 송장이 되어 똑바로 되었을 때뿐입니다. 그들은 약 2미터 길이의 상자 안에 담겨진 채 교회 안으로 굴러들어 옵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꽃들이 쌓여진 채 예배당 앞의 상위에 올려집니다! 비록 그들은 이제 똑바로 되었으나(straightened out) 그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일들이 모두 똑바로 되고 개구리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신다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에게 모두 맡기십시오. 그분에게 모든 일을 내맡기시고 당신을 위해 똑바로 펴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전보다 더욱 더 굽어지게 될 것입니다! 개구리들은 내일 떠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여러분이 개구리와 함께 하룻밤도 더 지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또 있습니다. 개구리 대신 더 나쁜 것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개구리 다음에 이, 파리, 메뚜기, 악질, 불, 어둠, 그리고 마침내는 이집트 각 가정에 맏아들의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비극이여! 오, 죄인의 비참함이여! 개구리들이 그들을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모든 교만한 자가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사2:11) 그 날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죄 위에 떨어질 것입니다. 개구리보다 더 나쁜 것이 올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탐욕입니다. 돈과 물건들을 사랑하는 것! 성경은 이에 대해 여전히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러 꿰뚫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돈에 미친 사람들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가정과 건강과 자기들의 자녀들과 도덕과 하나님조차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개구리들을 견뎌내고 있으나, 어느 날인가 더 나쁜 것이 개구리의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저녁 부흥회 전에 한 아름다운 농장에서 식사대접을 받았습니다. 거실 탁자에는 곱슬머리를 가진 예쁜 남자 아기 사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안에는 아기의 조그만 발바닥에서 타닥타닥 나는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 부모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 같았으나 슬픔의 기색이 있었습니다. 집은 훌륭했고 창고는 인상적이었고 거의 새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 목사님께 들은 바로는 그 사람들은 서로 잘 지냈고 돈도 잘 벌었고 농장도 번창했지만 그 곱슬머리 아이가 거의 우상이 되어 더 이상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매우 바쁘게 되었고 모든 일은 너무나 순조로웠으며 그 결과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병이 찾아 왔으나 여전히 불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비극이 왔습니다. 그 아버지가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을 때 창고가 불탔고 그들의 어린아이는 그만 그 불꽃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 아이가 창고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그 부모는 절망을 안고 대단히 낮아져서 하나님께로 왔고, 그들의 삶을 내놓고 교회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로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대가입니까! 그들은 한 때 자신들이 개심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의 사악함이 너를 바로잡고 네 타락함이 너를 꾸짖으리라. 그런즉 네가 주 네 하나님을 버림과 네 속에 나를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요, 쓰라린 악인 줄 알고 주의하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렘2;19) 오, 저는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더 나쁜 것이 개구리의 자리를 대신할지도 모릅니다! 시리아의 벤하닷 왕과 늘 함께 있던 것은 술이었습니다! 그는 대형 천막 안에서 술을 마셔 크게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주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뚜에 하는 것이라.”(잠20:1)고 말씀하시지만 죄인들은 그분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술꾼들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마침내 시리아 군대는 패배했고 그 뒤 벤하닷 자신은 결정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부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쁜 것이 옵니다. 여러분은 술과 동행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라이스(Bill Rice)가 시카고 시에서 데뷔 파티를 가지면서 처음으로 사교계에 나온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한 밤 중에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엉뚱한 모험을 하기 시작했고 새벽 3시경에 동물원에서 동물들과 함께 놀다가 그곳에서 큰 낭패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곰들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사교계에 처음으로 데뷔한 여인”은 회색빛을 띤 크고 늙은 곰을 향해 철장의 막대 사이로 자신의 팔을 내 밀고 흔들어 댔습니다. 그러자 그 곰은 갑자기 그녀의 팔에 달려들어 앞발로 그녀를 철장의 막대에 밀어붙이고는 짓누르면서 그녀의 손과 팔로부터 고기를 떼 내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 곰이 그녀의 팔을 어깨까지 깨끗이 먹어 치웠을 때에야 비로소 술 취했던 그녀의 친구들은 앰뷸런스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깨까지 팔을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평생토록 ‘개구리를 대신해서 더 나쁜 것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빈 소매를 가혹한 기념물로서 달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더 이상 개구리와 하룻밤도 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일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잠27:1)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히2:3) 최근에 미국은 ‘갑작스런 죽음의 땅’으로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에만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831명의 영혼이 영원한 세계로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621명은 고속도로에서 참사를 당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조지아주 아틀란타시의 한 일간 신문에서 미국인 가운데 약 400-500명이 해마다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을 읽고 놀랐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면 누구든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내일이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지금 당장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은 기꺼이 여러분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지고한 뜻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께서는 어느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악한 자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분은 “내 영이 항상 사람과 함께 다투지는 않을 것이라!”(창6: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 단순히 믿음으로 그분께 온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몫을 모두 다 이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셨고, 그분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미 피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오늘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요3:36) 그렇지만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절을 보십시오. 테네시주에 사는 어떤 부인은 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목사님과 다른 분들께 자신이 부흥회 때 앞으로 나아가 믿음을 고백해야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공중 앞에서 믿음의 서원이나 약속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배 시간에 앉아 있었고 복음도 들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손도 올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오후 저녁 식사 시간에 그 교회의 목사님은 긴급한 호출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그 날 아침 늦게 병원에 실려 갔고 오후가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채타누가시에 사는 열여섯 살난 소년은 타이어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타이어가 그의 얼굴 앞에서 터졌고, 이틀 뒤 그들은 그 소년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버밍엄시에서는 한 부인은 자기 잔디밭을 걷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TV 안테나가 지붕에서 떨어져서 순식간에 그녀의 앞마당에 그녀를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피츠버그시에서는 견인 트럭의 중간 부분이 구부러지면서 강철로 된 막대기 뭉치가 집을 꿰뚫어서 두 명의 여인이 즉사했습니다. 어저께 지금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와 있는 잭슨빌 교회의 목사님은 지난 해 12월 여객기가 활주로에 닿기 전에 추락해서 17명의 영혼을 영원 속으로 보낸 곳의 초토화된 현장을 보여 주셨습니다! 미국은 참으로 ‘갑작스런 죽음의 땅’입니다. 제가 플로리다주의 한 도시에서 목사로 있을 때에 구원받지 못한 어떤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부인은 죄인인 남편으로 인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날 정도로 술을 마셔대는 술꾼으로서 난폭하고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그를 보러 갔습니다. 그는 그때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진 않았지만 그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 왔습니다. 훌륭한 안내원들이 그를 앞쪽으로 앉혔습니다. 몹시 더운 날도 아니었고 코트도 걸치지 않았는데 그는 셔츠가 몸에 달라붙을 정도로 땀을 흘렸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괴로운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고 그는 설교가 끝날 때 기도를 받기 위해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왔습니다. 그는 비참한 상태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으나 끝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교회를 나설 때, 저는 문에 서서 부디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당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강권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그가 믿음 안에서 주님께 요청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그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그가 알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다시 교회에 나오겠다고 약속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나중에 구원받으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대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 할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약속을 해도 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는 그날 밤도 그 다음 주일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보러 갔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더 그를 찾아갔으나 그는 저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술을 마셨으며 전보다 더욱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장교들을 태우고 자기가 사는 곳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공군 기지로 차를 운전해 갔습니다. 그것이 그의 일거리였습니다. 그는 빨리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멧돼지가 튀어나왔고 그는 그것을 피하려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차 오른 쪽 앞바퀴가 교량의 받침대를 들이받아 차가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핸들이 즉시 그를 관통했고 그는 즉사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내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내일’은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할 때입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이라고!
2009-05-02 17:30:31 | 관리자
고난당할 때의 노래   성경말씀: 그들이 찬송 하나를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가니라(마26:30).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 호화 여객선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연회장에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객 중 한 명이 무대로 나와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유행가 같은 인기 있는 노래를 들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찰스 웨슬리가 작사한  441장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 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 아름다운 바리톤 목소리가 극장을 채우자 사람들은 다 마술에 걸린 듯 조용해졌습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참으로 특이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찬송가는 정말로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어디서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끝나자 그는 노래를 부른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선생님, 혹시 선생님은 전쟁에 나간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상대방은 그렇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선생님은 몇몇 연대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노래를 부른 사람은 깜짝 놀라며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테이블에 가서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한 때 독일군 병사였습니다. “그 날 밤 저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적군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특별히 저의 임무는 보초병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을 기어가 드디어 보초병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분명히 그 날의 보초병은 선생님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보초병은 오늘 선생님이 부른 찬송가를 부드럽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크리스천인 것을 알고는 되돌아가서 장교에게 영국군의 전력이 강화되었으므로 지금 공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른 전략을 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래를 부른 사람은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저도 그 날 밤을 기억합니다. 보초병으로 위험한 곳에 있게 되자 저는 크게 걱정하게 되었고 오늘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 속에서 나의 구원자 예수님만이 내게 도움을 주실 수 있으므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독일군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 찬송가가 선생님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노래는 우리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고난당하는 가운데 노래하는 사람은 자기 혼의 절박함을 잘 드러내 보여 줍니다. 이런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 내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 주 예수님께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성경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고 그것을 주의 만찬으로 바꾸어 주신 뒤 제자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상 사역의 기간 중에 분명히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시편에 맞추어 종종 노래를 부르시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복음서에는 그런 일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십자가 고난을 당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려고 하는 아주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정말로 기뻐해야만 할 시간이 긴장과 공포와 의심의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감사와 기쁨을 느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그들은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자기들을 이집트라는 속박의 땅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을 넘어간 사실을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렐’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 ‘할렐’은 보통 시편 115-118편과 시편 136편을 말합니다. 그들은 기쁘게 이 시편들을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이 앉아 있는 다락방에는 그런 기쁨이 없었고 대신 주님의 죽음이라는 것과 그로 인한 엄숙함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배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말로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비록 다락방 주인이 음식을 많이 준비했지만 거기에는 유월절 어린양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주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짝이 맞지 않고 혼란스럽게 보였습니다. 이제 유월절 행사가 끝나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심한 이 제자들이 어떻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앞날이 어두운 가운데 어떻게 과거의 유월절 사건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할렐’의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그분의 노래 소리를 듣고 제자들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극도의 긴장과 공포가 감도는 시간에 예수님께서 친히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우리 주님은 자신이 그 날 밤 배반당할 것을 확실히 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것도 아셨습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그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542:14). 겟세마네에서는 땀방울이 마치 핏방울 같이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간단한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할렐’의 시편들을 부르려면 적어도 20분이 걸립니다. 도대체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평정을 유지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할렐’의 노래가 주님의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시편들을 외웁니다. 이것들을 암송하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유대인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신실하게 보호해 주신 사실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기 앞에 다가오는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것과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그분께서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손에 내 영을 맡기나이다”(눅23:46)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한 예수님의 믿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롬6:4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워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위로를 얻습니다. 승리를 얻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찰스 웨슬리는 미국에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큰 폭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는 간신히 미국에 도착해서 1736년 12월 3일에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이런 어려움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를 드렸다.” 그는 아주 맹렬한 폭풍우 속에서 한 가지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리 작은 새가 공포에 질려 승객들이 머무는 곳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자기의 코트 주머니로 들어와 앉아서 평안을 누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웨슬리는 이 작은 새가 자기 가슴속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은 것같이 자기 역시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이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할렐의 시편에 나오는 구절 중 가장 중요한 구절은 시편 115편 12절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깊이 생각하셨나이다” 영어로는 “mindful of us"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깊이 존중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죄인들을 깊이 생각하고 존중해 준다는 사실이 여러분과 저에게 위안이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위로를 생각할 때 비로소 시편 116편 12, 17절 같은 찬송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내게 베푸신 모든 은택으로 인하여 내가 그분께 무엇으로 보답하리요?(12절)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물을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7절). 이런 감사를 드린 뒤에 그들은 시편 136편을 불렀습니다. 26절로 구성된 이 시편에는 구절마다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기 때문이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 시편 기자는 26절 모두에서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편 136편은 크게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의 정사와 권세를 장악하고 계시며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가 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뒤 시편 기자는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낮은 처지를 돌아보셨다고 기록합니다(시136:23). 우리 예수님만큼 이 시편의 메시지를 잘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5-8). 마지막으로 136편 23-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구속하시고 새 힘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시편을 노래하시면서 바로 이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갈보리의 십자가로 가시기 바로 전에 이 시편을 노래하시면서 자신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영원함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 옆에 달린 강도와 다소의 사울이라는 바리새인과 모든 제자들과 이들의 복음 선포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향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시며 우리 주님은 고난의 순간에 ‘할렐’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가운데 마음에 고통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다가오는 미래가 걱정되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로 가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할렐의 시편 136편을 노래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긍휼이 영원함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저주가 아니라 영원한 복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지금의 가벼운 고난이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 한 주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심령을 우리 하나님께서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할렐’의 시편인 115-118편과 136편을 한 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 주님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는 노래를 부른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님의 발 앞으로 가져다 둡시다. 우리 주님이 처리해 주실 줄 믿습니다.  
2009-05-02 17:29:44 | 관리자
성도의 죽음은 고귀하다   성경말씀: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의 눈앞에서 귀중한 것이로다. 시116:15   인생찬가- 롱펠로우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마라. 인생은 한낱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니 만물은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일 수는 없다. <너는 흙,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고 있는 길은 향락도 슬픔도 아니다. 모두가 오늘보다 내일이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고 길이다. 중/고등학교 때 이런 시를 읽고 들을 때는 죽음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모르고 살다가 요즘은 장모님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일단 건강은 자신할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그분은 장수하는 가정에서 나서 지금까지 큰 병 모르고 건강히 살다가 갑자기 암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려도 일어나는 기적이 그분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일반 통계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실정임을 본인이나 가족이 느끼고 있습니다. 암 덩이가 자라면서 사람을 괴롭게 하며 암 치료로 인해 너무 고통이 가중되어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전화할 때 우시는 것을 보고 나의 무능함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도대체 무어라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당해 보지 않은 것을 당해 본 것처럼 가장하고 위로할 수도 없고 그냥 벙어리처럼 있자니 1초, 2초가 한 시간, 두 시간 같고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 저의 뇌리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제 장모님의 죽음이 아니라 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확실한 일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이것은 100%의 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큰 실패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누구나 견딜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도에는 교회 문제로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것을 맛보며 말 그대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의사가 “당신 이러다가 죽습니다.”라고 경고할 정도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빨리 죽어야지. 이대로 살아서 무엇하나?”하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장모님의 죽음이 함께 겹치자 죽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과연 어디서 이런 확신이 올까요? 정말로 우리가 담대하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제 옆방에는 제가 존경하는 은사 선생님이 계십니다. 저보다 15살 많으며 인품이 훌륭하고 예수님을 확신하는 분이기에 저는 인생 문제로 그분과 자주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금부터 6년 전 쯤에 저의 소개로 교수님의 아들이 미국의 Bob Jones 대학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년 공부를 하고는 다른 주립대학으로 옮겼는데 방학 때에 멀리 여행을 갔다가 차가 뒤집혀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교수님에게는 그 아들이 외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비행기로 실어 와서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로 교수님은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내 아들이 어디 있을까?” 그때부터 보는 것이 달라지고 특별히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도 그 전에는 실패를 몰랐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 다니고 유학 다녀와서 정말로 부족한 것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 이후에 인생을 보는 것이 매우 많이 달라졌습니다. 최근에 저는 저의 고통과 장모님의 죽음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죽는 게 무얼까요?”라는 질문에 그분은 오랫동안 정리한 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 박사,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분에게는 그 일이 큰 일이 아니야. 생명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결국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지. 그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이며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장모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좋은지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이 다음에 그 상황에 들어가면 그렇게 기도할 것인가? 그러나 어쨌든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주님의 뜻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하고 끝을 맺습니다. 이제 저는 목요일에 미국에 가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분의 얼굴을 뵙고 올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어려서부터 자란 교회에서 함께 있었고 미국에 가서 이민 생활 하느라 고생하며 나의 도움으로 운전면허를 따서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내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신 그분을 마지막 대하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려 합니다. 사람이 갈 곳이 확실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텐데 갈 곳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합니다. 제가 잘 아는 사돈어른이 있습니다. 연세가 75세신데 주변에서 친구들이 하나씩 죽어가니까 식사를 제대로 못합니다.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제 장모님은 말 그대로 모태 신앙으로 구원받았지만 천국을 잘 모릅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천국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다고 하셔서 이번에 가면 성경을 펴서 가르쳐 드리려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 확실한 존재로 여러분의 삶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까? 천국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 일, 교제 등에는 열심을 내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으려면 멸치를 우려서 국물을 맛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멸치를 두 마리 넣고 하루 종일 끓여도 그 국물은 맛이 좋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불을 때고 조절해도 안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진 소망이 확실하려면 바른 지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복음으로 인한 고난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나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내가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딤후1:12).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4:7-8). 그래서 성도라면 성경을 읽고, 모르면 배워야 합니다. 평생토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16편은 저자가 나와 있지 않지만 다윗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3절을 통해 우리는 그가 정말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의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지옥의 아픔이 나를 붙들었으므로 내가 고난과 슬픔을 만났도다. 그는 사울, 압살롬,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죽을 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절에서 주님이 자기 혼을 사망에서, 자기 눈을 눈물에서, 자기 발을 걸려 넘어짐에서 건져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15절에 이르러 “주님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다.”고 고백합니다. 앞뒤 문맥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취해도 대충 “성도는 죽어도 좋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뒤 문맥을 살피면 조금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왜 갑자기 주님의 성도들의 죽음이 귀중하다고 말했을까요? 그는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자기가 죽지 않은 것은 주님의 성도가 죽는 일이 매우 귀중하고 중요하므로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되기까지는 하나님이 그를 살려 주심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성도라면 죽음으로 인해 그분의 목적이 모두 성취되기까지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연장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게 되면 그것은 곧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바를 다 성취하고 죽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도 중 하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려면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매우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성도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존재 중 하나가 이미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므로 매우 귀중합니다(아담, 아벨,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물론 예수님). 둘째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계획한 일의 성취를 뜻하므로 매우 귀중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죽음은 성도의 믿음의 실체가 피상적인 공허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므로 매우 귀중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예수 믿어 생명 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보험이 가장 큰 가치를 발휘할까요? 죽어서 우리의 믿음의 실체를 경험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매우 귀중합니다. 이제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연습합시다. 사실 저는 이번 주에도 지난해의 악몽이 되살아나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죽음이 닥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죽고 싶어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서 저와 여러분의 죽음이 귀중한 죽음이 되기까지는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근본 침례 신앙이 어디서 왔습니까? 초세기 성도들과 그 뒤를 이은 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은 귀중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제가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은 제 장례식에 올지 모릅니다. 저는 그때에 여러분 가운데 한두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제가 누워 있는 관 앞에서 “그래, 저 분 할일 하고 천국 갔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죽음의 침상에서 사도 바울처럼 내 아이들에게 내가 신뢰한 분을 내가 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의 묘비에는 “성도 정동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아 할 일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다”라고 새기고 싶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아모스 대언자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4:12)고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죽어가는 침상에서도 패니 크로스비와 함께 이런 찬송(295장)을 할 수 있습니까?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하신 집 있네.” 이제 죽음의 의미를 알았으면 롱펠로우와 함께 씩씩하게 인생찬가의 뒷부분을 부릅시다.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정 내에서, 말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며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삶에 풍성히 넘치길 기원합니다.  
2009-05-02 17:28:46 | 관리자
부활하는 자   성경말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 빌3:21   요즘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지냅니까? 행정 수도, 보안법, 과거사 입법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일들입니다. 10년, 20년 전에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그리 많이 들리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주변에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두 달 전에는 유학 중인 제자가 갑자기 방문해서 인사를 했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테네 올림픽 취재에 갔던 매형이 KBS 직원인데 갑자기 죽어서 장례를 치르러 왔다고 합니다. 나이가 서른여덟입니다. 그리고 8월 말에 미국에 다녀왔더니 제 이종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 자메이카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이 나빠져서 수술 받으러 혼자 갔다가 즉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도 역시 서른여덟입니다. 그리고 추석 바로 전에는 잘 아는 대학 교수의 부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도 서른일곱 여덟 정도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열흘 전에는 제 장모님이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정정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주변에서 죽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인생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입니까? 조금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누린 솔로몬의 탄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어 사람의 영을 괴롭게 한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삶을 누린 사람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요즘 저는 일주일에 두 명씩 학생들을 면담합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부류는 갈 곳을 알고 있고 다른 부류는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갈 곳을 알고 있습니까? 창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며 즐겁게 여행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왜 살고 있습니까? 아침에 에스더를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정육점 앞을 지납니다. 그러면 큰 냉동 트럭에서 사람들이 소와 돼지 몸통을 갈고리로 들고 등에 멘 채 정육점으로 나릅니다. 여러분과 저의 몸이 소나 개나 돼지처럼 그런 몸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저 흙에 녹아 없어지는 그런 존재입니까? 교회에 와서도 영과 혼이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기만 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려는 마음이 없이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과 혼과 육이 여기 온전히 있습니까? 아니면 정육점의 고기처럼 육만 와 있습니까? 왜 우리가 예수 믿습니까? 지금부터 15년 전 쯤에 박사 학위를 했다고 하니까 동년배의 한 분이 만나자고 해서 차를 마셨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분은 제게 “왜 예수 믿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매우 실망한 눈초리였습니다. 그래도 박사가 되고 공부를 했으면 좀 고상한 이야기, 철학적인 이야기, 멋있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영원히 살기 위해 믿는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 믿으십니까? 제가 “왜 교회에 나오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묻는 자에게 온유함으로 그 이유를 보려 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 믿으십니까? 저는 대통령, 판사, 검사, 부자, 변호사, 의사, 박사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생선 장수, 연탄장수, 고무신 파는 사람, 무식한 할머니,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는 고지식한 사람들 좋아합니다. 물론 배우고 재물이 있고 명예도 있으면서 예수 믿으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예수 믿지 않으며 소유한 모든 것은 나팔 소리 나는 날 모두 잿더미로 변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아요. 그분만이 제 구원자예요. 성경은 다 몰라도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어요. 구원을 확신해요”라고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좋아합니다. 제 처형의 아들이 이제 22살인데 정치외교과를 졸업하게 되어 지난여름에 경험을 쌓기 위해 백악관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그 날 부시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저는 에릭 안입니다”라고 소개하자 부시 대통령은 악수하면서 다짜고짜“에릭, 너 예수 그리스도를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새벽에 열리는 기도회에 오기 바란다” 저는 이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배웠든지 안 배웠든지, 재물이 있든지 없든지, 명예가 있든지, 없든지, 잘생겼든지 못생겼든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위선의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설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를 지으신 이가 우리의 행위를 낱낱이 회계장부에 적어 두었다가 계산하는 날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비하고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까?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습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행위가 없어야 합니다. 행위가 행위가 되려면 은혜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롬 11장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 공식입니다. 창세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공식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을 합쳐서 무엇을 이루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며 사람의 머릿속에서 상상해서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 아내는 장례를 치르고 잘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있는데 단지 숨이 없습니다. 이렇게 숨이 없으면 활동을 못하므로 땅에다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살전4:13). 여러분, 예수님 밖에서 죽은 자들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원래 울음이 많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 그 자리에 있었으면 참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고통을 당한 제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어머니가 주님을 사랑하다가 돌아가셨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의 아픔을 통해 저는 큰 아이와 e-mail을 나누는 기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딸만 있어서 외할머니가 얼마나 이 아이들을 귀여워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할머니가 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모두 보았고 엄마 아빠 대신에 졸업식에도 참석하고 피아노 레슨도 데려가 주고 쇼핑도 해 주고 음시고 만들어 주고 옛날이야기도 해 주고 참으로 얼마나 귀중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큰 아이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번에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큰 아이는 풍요한 미국에 살면서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결국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잠시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인생을 쏟아 부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모두 영원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고 본인도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이것을 보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할머니의 심장이 멎으려고 맥박의 수치가 80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해서 20까지 내려가다가 결국 멎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제가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후5:1-8절 말씀을 주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 우리가 옷 입고 있으면 벌거벗은 채 드러나지 아니하리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아이는 이 글을 받은 뒤 장례식 조사에서 그대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삶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짐을 진 채 신음함이 없으면 예수 믿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모든 일에서 승승장구하면 예수 믿기 어렵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도 기뻐합니다. 예수 믿으면 믿을수록 어려움이 와도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해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귀중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고전1장 26-29를 보십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육신적인 가난함이나 쓸모없음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의 영적인 가난함과 벌거벗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부자나 학식이 있는 자도 영이 가난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소유가 학식이 우리 것이 아니기 때입니다. 주님을 구원자로 맞이하고 여러분의 재능과 학식과 재물과 모든 복을 영원한 것을 위해 투자하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서 오는 집을 입혀 주실까요? 어떤 사람은 죽어서 짐승의 밥이 되고 어떤 사람은 이미 죽은 지 2,000년이 되어서 뼈도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즘 연금술사라는 책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말씀 즉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자 그녀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자신의 동생은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으니 그녀를 좀 나무라달라고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대목을 인용하며 시작하며 이 발췌문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나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려 했습니다. 물론 이 책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은 당연하지만 현대인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보려는 고민을 담고 있기에 그렇게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연금술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기원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체계화되어 중세 유럽에 퍼진 주술적 성격을 띤 일종의 자연학으로 비금속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연금술에는 금속전환을 실현하여 사람에게 불로장수를 부여하는 힘을 가진 ‘철학자의 돌’ 즉 엘릭서’를 만드는 실천적 연금술과 물질적인 금속전환을 단순한 비유로 여기고 종교에 귀의하여 기도 등을 통해 죄 있는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신앙적 차원의 신비적 연금술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연급술사라는 책이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금술은 헬레니즘의 이집트에서 싹트면서 그리스 자연철학의 물질관과 이집트, 바빌론 등 중동지역의 신비주의 관념과 천체와 금속을 관련짓는 점성술 사상을 포함하였고 페르시아, 시리아 등을 거쳐 이슬람 세계에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8세기 이후에는 수은과 황을 적절히 배합하여 금속 특히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 생겼고 그 결과 금으로 떼돈을 벌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성경을 변개시키고 또 허황된 신비주의 사상을 만들어 지난 몇 천 년 동안 사람의 혼을 빼앗아 지옥으로 쳐 넣어 왔습니다. 그러면 과연 물질의 근본인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뀌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불가능하면 우리의 부활도 불가능합니다. 현대 원자 물리학은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운 해법을 제공합니다. 오늘날에는 원소들의 성질을 바꾸는 변성이 가능하고 그래서 언제라도 원자력 연구소나 공장 등에서 이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1919년에 러더포드가 처음으로 변성에 성공한 이후로 원자 변성은 이제 연구 기관에서 매일 행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소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질의 기본 구성 요소는 어디에서나 같습니다. 그것이 금이든, 은이든, 황이든, 탄소든, 산소든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 안에 들어 있는 양자와 중성자와 전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원소인가는 이것들의 수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원자핵이 일곱 개의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고 그 주위를 일곱 개의 전자가 돌면 우리는 그것을 질소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것들의 개수가 여섯 개면 그것은 탄소입니다. 여든 개면 수은이고 일흔아홉 개면 금입니다. 그런데 만일 원자핵이 한 개나 그 이상의 양자나 중성자를 얻거나 잃게 되면 그 원소는 다른 것이 됩니다. 즉 변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라늄은 방사에 의해 라듐이 되고 라듐은 납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은 원자의 핵에서 중성자를 쏠 수 있다면 수은이 금으로 바뀌며 결국 중세 연금술사들의 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연금술사들이 여러 세기 동안 구하려 애쓰던 엘릭서 즉 변성을 가능하게 하는 인자는 바로 수백만 볼트의 전기입니다. 수백만 볼트의 전기만 있으면 수은을 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다이아몬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와 연탄 혹은 연필심은 다 같은 탄소입니다. 단지 엄청난 압력과 온도를 받을 때 같은 탄소가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험실에서 원자핵에 폭격을 가해 양자와 중성자를 제거하면 한 원소를 쉽게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이것은 다시 말해 값싼 금속을 귀금속으로 바꿀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변성을 통해 이 일은 가능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진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원소들을 다른 종류의 원소로 만들지 못하시겠습니까? 만일 사람이 수은을 금으로 만들 수 있을진대, 연탄을 다이아몬드로 만들 수 있을진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물을 포도즙으로 바꾸지 못하시겠습니까?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런 일은 실로 너무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변성을 이루려면 엄청난 전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전기 요금이 너무 들므로 수은에서 금을, 연탄에서 다이아몬드를 못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발전소보다 더 크고 무한한 동력원의 소유자가 아닙니까? 참으로 그분은 창조의 시작부터 이런 원자들의 능력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것들을 결합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원자력은 사실 그분의 능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원자들의 조성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썩어 분해된 우리의 천한 몸을 예수님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우리의 부활할 몸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변화될 몸입니다(빌3:21;요일3:1-3). 이런 몸은 살과 뼈로 되어 있지만(눅24:39-40) 결코 중력과 시간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요20:19; 눅24:31,36). 이런 몸은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는 몸이며 (마8:11; 눅16:3; 고전13:12) 또 영원한 몸입니다(고후5:1). 궁극적으로 이런 몸은 영이 지배하는 몸입니다(고전15:44,49).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 즉 부활한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처럼 죽음에 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이런 소망이 있습니까? 주님을 신뢰하여 이 소망을 내 것으로 삼은 적이 있습니까?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변화될 것을 믿으십니까? 어려움을 겪을 때마나 이 부활의 소망을 되새기며 위로받기 바랍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삶에 풍성히 넘치길 기원합니다.    
2009-05-02 17:27:51 | 관리자
엑소시스트   성경말씀: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3:18)   지금부터 50년 전에 행한 여론 조사를 보면 그 당시 미국 내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마귀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마귀를 믿고 심지어 사탄주의에 빠지는 아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별히 1973년 워너브라더스 픽처스가 제작한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엑소시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12세 소녀의 몸에 깃들인 악령과 이를 퇴치하려는 신부들 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봉 당시 졸도하는 관객이 속출하며 전 세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제4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각색상과 녹음상을 수상하고 현재까지 공포영화 분야에서는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지금은 후속타로 엑소시스트 4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추세가 반전된 데에는 경험을 중시하고 성경을 왜곡하며 성령님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오순절 은사주의의 영향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약 시대에 성령님의 일과 또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 마귀의 일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가르쳐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순진하고 무지한 크리스천들을 미끼로 삼아 돈을 갈취하고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자들이 매우 많이 있으며 특히 목사라는 자들이 이런 일을 하기에 더더욱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귀와 마귀를 내쫓는 일 즉 축사 등의 영적인 것에 대해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1. 병과 마귀 들린 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먼저 병과 마귀와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김기동 목사, 이초석 목사 등의 사이비 목사들은 모든 병이 마귀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들은 병이 걸리면 삼촌 귀신, 할아버지 귀신 등을 내쫓기 위해 축사를 행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이 마귀 들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거나 사람이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일반적인 병에 걸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별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밤에 천사를 보기도 하고 악몽을 보기도 한다고 말하는데 실로 이것은 대개 신경의 질서가 깨지거나 독한 약을 먹거나 과민 반응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지 마귀 들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정상적인 병자들을 보고 마귀 들렸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은 아마도 그들 자신이 마귀 들려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녁이 되매 그들이 마귀 들린 많은 자들을 그분께 데려오거늘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그 영들을 내쫓으시고 또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시니 병든 것은 육체의 연약함입니다. 마귀 들리는 것은 영적인 침투 현상으로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입니다. 의사가 병의 처방을 내리기 전에 철저히 검사를 하듯이 우리도 육체의 질병과 영적 침입 현상을 잘 나누어야 합니다. 마귀 들리지 않은 사람을 마귀 들린 것으로 몰아붙여서 축사를 하고 난리를 치면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2. 마귀 들린 것과 마귀의 영향을 받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자 어떤 사람이 와서 제게 “목사님, 제가 마귀 들렸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면 제가 무어라 대답해야겠습니까? 저는 먼저 그분에게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원자로 맞이한 적이 있는가 물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분명히 성경대로 구원 간증을 하면 저는 그분에게 “선생님은 마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육신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아픈 증세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의 피로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이라면 결코 마귀가 우리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마귀에게 영향을 받는 것과 마귀 들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크리스천도 마음을 놓고 주님의 말씀을 게을리 하면 마귀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마귀 들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사역 중 하나는 우리가 마귀의 소유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마귀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롬8:9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한 사도 요한은 요일4:4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적그리스도의 영들)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 사도 바울은 엡1:13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이야기 해 줍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 또한 엡4:30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자, 그러면 봉인된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마태복음 27장 62-66절에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뒤에 누가 와서 그분의 몸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돌무덤의 돌에 봉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가서 그 돌을 봉인(封印)하고 파수꾼을 세워 돌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자 그들이 봉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걸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까? 로마 군인들은 감히 그런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누가 들어가 그분의 몸을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해 봉인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령님께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에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몸을 봉인하시므로 마귀가 침입하여 우리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엡6:11-17은 신자들의 영적 전투에 대해 잘 보여 주며 특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보여 줍니다. 11 너희가 마귀의 간계(奸計)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를 입으라. 12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政事)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가 악한 날에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해 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으며 15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하며 그것으로 능히 저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전신갑주는 곧 갑옷을 뜻합니다. 여러분, 왜 군사들이 갑옷을 입습니까? 밖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나오는 흉갑, 투구, 신, 방패, 칼은 모두 밖에서 침투하는 것을 박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마귀를 대적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이 기록하였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결코 마귀의 소유가 될 수 없으며 다만 계속해서 마음과 생각이 마귀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주의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책, 음악, 영화, 그림, TV 프로그램, 친구 등을 조심해야 하며 또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3. 마귀를 어떻게 쫓을까?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마귀 들린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일까요? “이 감기 귀신아,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여인에게서 썩 나오라”고 외쳐야 할까요? 성도로서 특히 목사로서 이런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목사의 경우 멋있게 마귀를 내쫓으면 금방 신도가 늘고 교회가 부흥하기 때문에 여기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에 제가 다니던 주립대학 옆의 한 교회에 LA에서 귀신 쫓는 것으로 유명한 김요한 목사가 온다기에 호기심에 차서 갔었습니다. 찬송을 하고 말씀을 하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가 그 여인을 데리고 올라왔는데 그 여인의 입에서는 그 여인의 원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가 “너 누구냐? 왜 들어갔냐?” 등등을 묻더니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뒤에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귀신 쫓는 목사가 나타나면 꼭 귀신 들린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마귀들이 합작으로 쇼를 잘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귀들의 합작 쇼입니다. 여러분, 마귀 들리는 일은 실제로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많은 부분이 마귀를 쫓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들이 존재하고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자가 지금 이 시간에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시간 우리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마귀 들린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초석 목사처럼 축사를 해야 할까요? 행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또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시간 우리의 임무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부활과 영생의 메시지를 들고 예수님만이 구원하신다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책임입니다. 그러면 마귀 들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 이제 어떤 사람이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마귀 들렸습니다. 밤에 잠도 못자고 이상한 것을 보며 꿈이 사납고 자살할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하면 제가 무어라고 해야 할까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마귀야 나가라”고 외쳐야 할까요?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순서를 밟아야 합니다. 먼저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대답이 그렇다고 하고 분명히 구원받은 증거를 대면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가 결코 마귀에게 사로잡힐 수 없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기동 목사처럼 큰 소리로 축사를 해야 할까요?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복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먼저 롬3:23을 펴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게 하고 롬6:23에 따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뒤에 롬10:9-10으로 데리고 가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뒤에 요일5:11,12로 데리고 가서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정하고 믿고 수용하면 그 순 간에 두 가지 일이 자동적으로 발생합니다. 먼저 성령님이 그 안에 들어와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둘째로 그에게 마귀들이 있었으면 그 순간에 그들이 쫓겨날 것입니다. 그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성령님의 일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쫓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사람의 소유권이 바뀌면 자동적으로 마귀는 쫓겨납니다.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마귀를 설혹 쫓아낸다 해도 이것은 허사가 되고 더 비극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으면 그가 마귀 들렸든지 들리지 않았든지 그는 마귀의 소유이며 여전히 지옥 자식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담배 피는 사람에게 권유하여 금연하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는 여전히 지옥에 갑니다. 다만 담배 냄새만 없을 뿐입니다. 술 먹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술을 끊었다 해도 여전히 그는 지옥으로 갑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사회사업가 혹은 사회 복지사 혹은 마귀 쫓는 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서 사람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사람의 가장 큰 필요는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도 아니고 마귀나 병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가장 큰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개인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이 허사요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 혼돈의 시기에 사탄 마귀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시편91:11,12를 문맥 밖에서 취해 자기 마음대로 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은 마12:26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만일 사탄을 내쫓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기들이 마귀를 내쫓는 일은 마귀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뒤의 43-45를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43 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마른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구하나 전혀 찾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내 집 곧 내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비고(empty) 청소되고 꾸며져 있으므로 45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기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이 사악한 세대도 참으로 그와 같이 되리라. 여기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44절에 비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 마귀가 하나 있었는데 축사를 받고 나중에는 여덟 마귀가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축사를 받아 마귀가 쫓겨났지만 여전히 그의 주인이 없이 빈 상태로 있었고 더더욱 청소까지 되어 있으므로 더 많은 마귀들이 들어와 그를 점령한 것입니다. 축사를 받아 마귀를 쫓아내도 그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지 않으면 그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타 나쁘게 됩니다. 사탄 마귀는 자기의 부하 마귀 하나가 내쫓겼다가 나중에 여덟 명으로 불어나는 것을 보고 더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축사하는 자가 나가라고 할 때에 그 마귀가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목사가 영력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전히 지옥행이며 나중 상태가 더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축사를 행하는 것은 실제로 마귀의 계략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제 정신으로 복음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으면 아무리 축사를 해서 마귀를 쫓아내도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로 구원받았으면 마귀를 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안에 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다 해도 이 사람에게 축사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제 정신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마귀는 쫓겨나갑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마12:26, 43-45는 마7:21-23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크리스천들이 축사를 한다고 설치며 다니면 실제로 마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탄의 왕국을 분열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서 잠시 나갈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문맥에 맞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탐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사람을 구원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소원을 품고 기도하며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구합시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삶에 풍성히 넘치길 기원합니다.  
2009-05-02 17:26:54 | 관리자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   성경말씀: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눅24:26)   지금부터 약 1975년 전 4월경의 한 일요일 오후에 유대 지방의 먼지 나는 길을 두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로서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기록하며 다른 사람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남자 형제든지 아니면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입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면 다 왔다는 생각에 기뻐하지만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가는데 전혀 기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머리를 숙인 채 한숨을 쉬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기에 누가 보아도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 갑자기 그들 앞에 낯선 나그네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길을 가면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기에 이렇게 침통한 표정입니까?”그러자 그 중에 한 사람이 의아해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이 생소하여 요즘 거기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그러자 그 나그네가 되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말합니까?”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나사렛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는 로마의 학정 아래서 죽을 고생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나타나셔서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왕국과 자유와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분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말 같지 않았습니다. 또 그분은 자신이 구약의 대언자들이 오리라고 대언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며 진실로 메시아의 표적들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구속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대적하고 모함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자 빌라도는 결국 그분을 로마의 죄수로 정죄하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게 했습니다. 오늘은 그 일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의 어떤 여자들이 그분의 돌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몸을 보지 못하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실제로 우리와 함께 있던 자들 중 몇 사람이 거기에 가 보니 여자들이 말한 바가 사실임을 알게 되었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그 낯선 사람이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아니하겠느냐?”영어로 가서 보니까 “O fools”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 바보들아” 아니면 “이 정신 나간 자들아”를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을 당하고 그 뒤에 영광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왜 그렇게 대언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서 더디 믿느냐”라고 질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성경공부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펴지 않고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눅24:2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7 [그분께서]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성경을 배우기 원합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성경의 모든 난해 구절들이 그분의 무릎 앞에서 배우면 일시에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성경공부가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들은 곧장 예수님을 떠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32절 말씀입니다. 32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에게 이런 성경공부가 있었습니까? 저는 바로 이런 성경공부와 말씀 선포가 우리 독립침례교회에서 나와야 되리라 믿으며 그래서 저 자신도 이것을 위해 애를 쓰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풀어 주신다’는 말은 영어로 ‘open’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그들에게 성경 기록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많이 읽었으나 여전히 그것은 그들에게 닫힌 책이었습니다. 성경 기록들을 열어서 풀어 주는 성경공부와 말씀 선포가 있어야 비로소 교회가 부흥합니다. 말세를 당한 성도들이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자기 동료들에게 이 모든 일을 고할 때에 예수님이 전체 회중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44-46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4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 즉 모든 히브리 성경에 -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바로 이것들이라, 하시고 45 그때에 그들의 지각(知覺)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 46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같이 기록되었은즉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셋째 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경 기록을 깨닫게 되면 메시아 예언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줄기는 메시아가 실질적으로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하고 메시아 왕국을 세우며 이 땅에서 통치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줄기는 이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난당하는 메시아’와 ‘영광을 받는 메시아’ 즉 두 명의 메시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메시아가 두 번 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즉 한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한 번은 유다 지파의 사자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왕으로 통치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에 먼저 어린양으로 고난을 당하고 세상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오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한 메시아가 두 번 오십니다. 초림 때는 고난 받기 위해 오시며 재림 때는 통치하며 영광을 받기 위해 오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먼저 그리스도로 인해, 의로 인해 고난당하고 핍박받는 일이 있고 그 뒤에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뀌면 문제가 생깁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에 대해 벧전1장 10-11절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의 많은 대언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대언하면서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탐구하기만 하였다고 말합니다. 10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11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먼저 고난을 당하고 그 뒤에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도표를 보기 바랍니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산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앞의 것은 작고 뒤의 것은 큽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이 산들을 멀리 앞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산의 두 꼭대기가 마치 하나로 보였습니다. 즉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계곡이 교회 시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이 지나고 재림이 가까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없지만 작금의 상황으로 보아 우리의 시대가 이미 두 번째 산의 꼭대기 근처에 이르렀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 예언이 매우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고 하면 200여 가지가 되지만 그것들을 한 번에 다룰 수는 없고 오늘은 그 중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다섯 가지 중요한 예언만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메시아의 출생지, 메시아 탄생의 기적, 메시아의 성격, 메시아의 초림 시기, 그리고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성경 기록들을 펴셔서 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줄 때에 그들 안에 성령의 뜨거움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런 뜨거움이 오늘의 성경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메시아의 출생지 먼저 미가서 5장 2절을 보겠습니다. 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메시야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빵이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들을 연관시켜 보면 참으로 그분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와 룻의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 고을입니다. 대언자 사무엘이 이곳에 가서 이새의 아들 중에서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었으므로 이곳은 보통 다윗의 도시라 불립니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은 별 볼일 없는 미천한 마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그리 뛰어난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자체도 미천했지만 그곳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영광에 비하면 정말로 형편없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정확한 분입니다. “너 베들레헴아”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또 다른 베들레헴이 나옵니다. 수19:15에 보면 갈릴리 근처에 스블론 지파를 위한 베들레헴이라는 또 다른 도시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곳이 아니고 유다에 속한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창35:19에서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은 뒤 묻힌 곳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도 베들레헴 시 외곽에는 라헬의 무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많은 이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선명도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며 인도, 미국, 스웨덴, 계룡산에는 많은 자칭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는 유다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십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시작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육신을 입고 출생하셨으나 그분에게는 시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나아가심 - 즉 행하시는 일들 - 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고 랍비들의 전통을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통치자가 다윗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미가서는 다윗이 죽은 지 200여년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지금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미래형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2) 메시아의 특이한 탄생 방법 이사야 대언자는 사7:14에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기에서 표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기적을 뜻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가 아들을 낳는 기적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피를 갖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임마누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1:21-23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1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대문이라, 하니라. 22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이라. 여기서 조심할 것은 임마누엘이 개역성경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알라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부처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잠언 30:4를 보기 바랍니다. 4 하늘에 오르신 이가 누구냐 혹은 내려가신 이가 누구냐? 바람을 자기 주먹 안에 모으신 이가 누구냐? 물을 옷에 싸신 이가 누구냐? 땅의 모든 끝을 굳게 세우신 이가 누구냐?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 지난주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편 2편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시2:7,12 역시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처녀 탄생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처녀라고 번역된 ‘알마’라는 히브리어가 ‘젊은 여자’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말에서 처녀를 가리킬 때는 대개 ‘베툴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근거로 현대역본인 ‘ 미국표준역’ 등은 각주에서 이 단어를 ‘젊은 처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단어는 앞뒤 문맥을 통해 그 뜻을 잘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이 기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매일 수천 건씩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여기서 하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들을 낳는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알마’는 구약 성경에 총 7번 나오며  모든 경우에 처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창24:43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구하러 가면서 기도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알마’가 처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서 창24:16은 리브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이 소녀- 즉 리브가- 는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지금까지 남자를 알지 아니한 처녀더라.”그러므로 메시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에서 나사 하나님의 피를 소유한 존재여야 합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3) 메시아의 특성 이사야 대언자는 계속해서 사9:6-7에서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계획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7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君臨)하여 그것을 정비(整備)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것을 이루리라. 이 구절이 메시아와 메시아의 왕국을 가리킨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녀 탄생으로 태어난 그 아이의 이름이 ‘강하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1919년에 영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하면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음역해 버렸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펠레 요위츠 엘기보 아비 아드사 샬롬이라.” 여러분, 이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메시아가 히브리어로 ‘엘기보’즉 ‘강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이렇게 번역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들의 특성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숨겨질 수 없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강하신 하나님’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4) 메시아의 초림 시기 자, 이제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유다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며 다윗의 왕국을 세울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그분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 메시아는 앞으로 올 것입니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메시아가 오는 때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자기의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10절에서 유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 여기의 실로가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홀은 왕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의 첫 부분은 메시아가 오기까지는 유다에 왕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86년경에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붙잡아서 눈을 빼고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다 혹은 유대 지방의 마지막 왕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 이후에 마카비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왕정이 복구되고 예수님 당시에 헤롯 가문으로 왕권이 넘어가면서 유대 땅의 마지막은 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후 44년경에 죽었고 그 이후에는 유대 땅에 왕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주후 44년 전에 와야 합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법을 주는 자’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을 뜻할 수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 마지막으로 법을 집행하던 기관은 산헤드린 공회였으며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될 때에야 비로소 유대 땅에서 법을 주는 기관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주후 70년 전에 이 땅에 와야 합니다. 이 구절보다 더 정확하게 메시아의 초림을 보여 주는 곳은 다니엘서 9:25-26절입니다. 대언자 다니엘은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70 이레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25 그러므로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심지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26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다니엘의 70이레 예언에 대해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70 이레가 “70*7” 즉 490을 뜻하며 이것이 곧 490년을 의미한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의 죽음까지의  69 이레는 483년을 뜻합니다. 그때가 되면 메시아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 죽음은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여기서도 “이 죽음이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구절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까? 그것은 주전 454년경에 아닥사스다 왕의 칙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느2:1-8). 여기에 483년을 더하고 주전 1년 다음에 주후 1년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메시아는 주후 30년경에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때에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메시아는 주전 4년경에 태어나서 주후 30년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머지 한 이레 즉 7년이 유대인들을 위해 남아 있으며 보통 이것을 우리는 환난기라고 부르고 후반부 3년 반을 대환난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 메시아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5) 메시아의 죽음 이제 마지막으로 메시아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53장에 너무나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된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 그는 참으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이 남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상 명백한 구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성경 기록들을 여셔서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 주시고 자신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이 일어났으며 이것을 깨달은 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 침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사렛 예수님 곧 먼저 고난을 받아 모든 사람의 죄악을 대속하려고 어린양으로 와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이 바로 구약 성경이 말하는 참 메시아임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선포가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초점이요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먼저 성경의 메시아를 바로 알고, 누구든지 이 메시아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바른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예수님은 요17:3에서 한 마디로 잘 요약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성경의 예수님이 이 번 한 주간 내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입으로 간증되길 원합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생기 있게 드러나길 기원합니다.
2009-05-02 17:25:50 | 관리자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   성경 말씀 : 왕상10:4-7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또 그가 건축한 집과 그의 상의 음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앉는 것과 그의 일꾼들의 섬기는 것과 그들의 의복과 잔 나르는 자들과 그가 주의 집에 올라갈 때 쓰는 오르막 통로를 보고는 더 이상 정신이 없어서 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 되도다. 그러나 내가 와서 내 눈으로 그것을 볼 때까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그들이 절반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을 능가하는도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이 되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1,000개의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에 나타난 하나님께 부와 명예 등을 구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함으로 지혜뿐만 아니라 부, 명예, 권세도 동시에 소유하여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하나님의 전과 자신의 궁을 아름답게 건축하였는데 특별히 그가 지은 성전은 그 어떤 어느 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며 그 결과 유다 왕국은 태평성대를 누렸고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으로 되었으며 레바논 숲의 나무로 만든 집의 그릇도 다 순금으로 되었더라. 은으로 된 것은 전혀 없었더라. 솔로몬 시대에 은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니…이같이 솔로몬 왕이 부와 지혜에서 땅의 모든 왕을 능가하였더라(왕상10:21-23). 드디어 지혜자 솔로몬의 영광에 대한 놀라운 소문은 먼 나라에까지 퍼져나갔고 온 땅이 그의 지혜를 들어 보기 위해 예물을 들고 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왕국이 강성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며 부유한 도시 예루살렘에는 갖가지 상품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모여든 상인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솔로몬 궁의 아름다움과 그의 지혜를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소문은 중앙아프리카의 세바 왕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세바 왕국은 이집트 남단의 이디오피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 상인들이 자기들의 특산물인 향료와 상아 등을 팔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고가면서 솔로몬의 소식을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 세바의 여왕은 지혜자 솔로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와 또 그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왕은 솔로몬으로부터 지혜의 말을 듣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인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세바의 여왕은 신하와 종들과 함께 막대한 양의 금과 향품, 그리고 보석들을 선물로 준비하고 2,000km가 넘는 먼 길을 가로질러 여행을 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같은 흑인들이 행렬은 모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솔로몬은 검은 피부를 지닌 세바의 여왕과 그의 수행원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먼 지방에서 온 타국인에 관하여는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강한 손과 주의 뻗은 팔에 대해 들을 터이므로) 그가 와서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께서는 그들이 부르짖는 대로 다 행하소서(왕상8:41-43).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한 뒤에 드디어 세바의 여왕이 왔으므로 이번 일은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사실 세바 여왕으로서는 눈으로 보는 것이 다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궁도 찬란하고 아름다웠지만 솔로몬의 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제까지 들었던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이 내게 말한 것은 실제의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보다 더 크다'(왕상10:7)라고 찬탄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화려한 복장을 갖추고 요소요소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솔로몬의 관원들과 신하들의 자세에 감탄했으며 또 잔치가 열렸을 때 거기 참석한 신하들과 배석한 사람들의 질서 정연함에 더욱 놀랐습니다. 사실 세바의 여왕은 예루살렘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안고 있는 난제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녀의 형편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문제들의 핵심을 시원스레 풀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속에 있던 것에 대하여 그와 대화하매 솔로몬이 그녀의 모든 질문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였으니 왕에게 숨겨져서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왕상10:2-3). 그래서 결국 그녀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솔로몬에게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 러나 내가 와서 내 눈으로 그것을 볼 때까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그들이 절반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을 능가하는도다(왕상10:6-7).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나며 신약은 구약 속에 숨겨져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구약의 기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약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솔로몬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먼 이방의 왕이 이스라엘의 왕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장차 이방 사람들이 주 예수님께로 돌아올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동방의 지혜자들이 주 예수님을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은 솔로몬이 예표하듯 다윗의 자손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오신 왕이십니다. 이것을 확증해 주시려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녀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의 맨 끝 지역에서 왔기 때문이거니와,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42). 먼 여행의 대가로 그녀는 실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로부터 소문을 전해 듣고 그 사실에 대해 반신반의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을 듣고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결국 길고 먼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기가 들은 모든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이켜봅시다. 우리는 지금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에 대한 소식을 다 담고 있는 성경을 가진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분께서 실제로 얼마나 은혜롭고 지혜로우며 그리고 부요한 분인가를 살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2,000km를 걸어가서 그분을 만나야 한다고 하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기꺼이 가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세바의 여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영광을 누리는 솔로몬을 보고서는 마침내 불신으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끝내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내 눈으로 본즉, 보라, 내게 말한 것은 그 절반도 못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전해들은 소문이 다 사실임을 확인하고 만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솔로몬보다 더 크신 주 예수님께로 온 뒤에 세바의 여왕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런 저런 경로로 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께로 나아올 때에야 비로소 그 소문의 진상이 확연해지고 비로소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바 여왕의 의문들을 멋있게 풀어 준 솔로몬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왕입니까. 그러나 여기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깊은 생각까지 세밀히 살피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고 있는 어떤 난제도 쉽게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복음의 소문을 듣고 주 예수님께로 나와 그분을 주와 구원자로 영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 뵙고는 즉시 자기들이 과거에 풀 수 없었던, 얽히고설킨 난제들, 영적 문제들을 다 해결 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자기에게 고백하고 해결 받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바의 여왕처럼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지혜의 대왕 예수님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2) 세바의 여왕은 섬기는 사람들의 자세에 탄복했습니다. 솔로몬 궁의 여러 가지가 세바 여왕을 놀라게 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잔 나르는 자들과 신하들의 섬기는 자세는 그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질서 정연하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왕을 섬길까”하고 그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솔로몬 궁의 장엄함과 아울러 솔로몬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자세와 헌신적인 믿음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의 바른 섬김의 자세로 인해 우리 주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을 섬기는 데도 이들이 이렇게 정성을 다 했는데 왕의 왕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저 역시 이런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3) 세바의 여왕은 많은 귀한 것을 얻고 돌아갔습니다.이 이야기는 세바의 여왕이 자기 신하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끝이 납니다(왕상10:13).  떠나기 전에 그녀는 자기가 고국에서 가져온 예물 즉 금과 보석 그리고 많은 향품을 솔로몬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그녀의 선물을 매우 귀중히 여겼고 그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바 사람들이 솔로몬을 찾아와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이미 다윗 왕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시편 72편에 잘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선함과 영광을 드러내되 예표와 사실로 그리스도의 왕국의 선함과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찬송함” 시편 72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스와 섬의 왕들은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시바의 왕들은 선물을 바치리니 참으로 모든 왕들이 그 앞에 엎드리며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리이다(시72:10-11). 얼마나 놀라운 예언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약속을 지키듯이 이 예언의 경우에도 100% 그대로 이루어져서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찾아 왔으며 특별히 많은 예물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왕상10:10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그녀가 금 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주었으니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준 이 향료처럼 많은 향료가 다시는 오지 아니하였더라(왕상10:10). 이것이 바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의 지혜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도 이처럼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최상의 것을 가지고 높은 사람에게 나아갑니다. 그런데 하물며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 왕의 왕 되시는 주님께 나갈 때 아무 것도 예비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세바의 여왕처럼 우리의 마음과 사랑을 그분께 온전히 바치고자 할 때에야 비로소 왕의 왕 되시는 그분께 귀한 향품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왕과 왕의 정혼자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솔로몬의 아가서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어여쁘냐! 네 사랑이 포도즙보다 훨씬 낫구나! 네 향유 냄새가 모든 향료보다 낫구나!(아4:10).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세바의 여왕으로부터 선물을 받고는 고맙다고 하며 끝을 내지 않습니다. 그는 세바의 여왕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솔로몬 왕이 왕의 하사품 중에서 세바의 여왕에게 준 것 외에 또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녀에게 주니 이에 그녀가 돌이켜서 자기 신하들과 함께 자기 나라로 갔더라(왕상10:13). 사실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바친 것은 그녀가 솔로몬에게서 받은 것과 비교할 때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부를 비교해 볼 때 그녀가 받은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먼 나라에서 온 여왕에게 그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하사품 외에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다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영과 육의 부와 재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요10:10). 그래서 그분께서는 이렇게 확신 있게 선포하셨습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42). (4) 세바의 여왕은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전파했습니다.이제 세바의 여왕은 더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자기의 왕국을 치리하기 위해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대개 그분과 함께 거하기를 원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돌아가서 네가 있는 곳에서 나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세바의 여왕처럼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왔을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많은 선물을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네 친지들에게 돌아가 주께서 너를 위해 큰일들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그들에게 고하라(막5:19).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이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는 솔로몬을 방문했던 세바 여왕이 남긴 희미한 흔적입니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녀의 일행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전했으며 그 진리가 이디오피아를 포함한 중앙아프리카에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디오피아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주 하나님을 섬기는 흑인 유대인들이 많이 있으며 여러 학자들은 세바의 여왕으로 인해 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디오피아에 생기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세바의 여왕의 방문이 있은 지 약 천 년 후에 이디오피아 땅에서 예루살렘에 온 한 내시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이 내시는 율법의 요구사항을 만족시켰으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소식은 미처 듣지 못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아셨기에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단 한 사람의 영혼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의 큰 기쁨을 전해 준 빌립은 가자 주변의 광야로 내려가라는 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사마리아시의 많은 사람들이 빌립을 원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아프리카 관리를 만나게 함으로써 구원자를 찾아 나선 심령이 가난한 이 흑인 하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왜 그 길로 가야하는지 까닭도 모른 채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드디어 그가 내시의 병거를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흑인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서둘러서 다가갔습니다. 그는 그 이디오피아 두루마리에서 대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에서 시작하여 주 예수님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즉시 복음을 받아들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행8:37)는 엄청난 신앙 고백을 한 뒤에 즉시 길가 물 있는 곳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쁨으로 돌아간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도 역시 '사람들이 내게 말한 것은 사실의 절반도 못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계신다'라고 말했을 줄로 믿습니다.
2009-05-02 17:24:57 | 관리자
‘Do’종교와 ‘Done’복음  이 글은 Christians Evangelizing Catholics(P.O. Box 99141, Louisville, KY 40269, USA)에서 천주교인들과 이들에게 복음을 심어 줄 크리스천들을 위해 발행한 「What Must We Do or Has Christ Done the Work for Salvation?」(Dr. Bill Jackson)이라는 소책자를 역자가 번역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설교 형태로 만든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유익을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는 신실한 증인이 되어 우리의 선교지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Do’ 종교와 ‘Done’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복음의 핵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믿는 바가 더 확실해져서 좋은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선교사와 선교지 로마서 10장은 성경에서 선교사와 선교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는 복음 선포에 대한 도전의 말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와 선교지가 무엇인지 잘 정의되어 있습니다. 먼저 선교사에게 주는 도전의 말씀은 13-15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   예수 믿은 이후에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폭발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도 바로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을 전하는 사람을 증인이라고도 하고 복음 선포자라고도 하며 선교사라고도 합니다. 선교사는 영어로 ‘missionary’인데 이 말의 뜻은 사명을 가진 자, 사명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방금 읽은 13-15절 말씀처럼 화평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으며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누구나 선교사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선교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선교사’에 대한 진리는 4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4절). 여기에 나오는 ‘끝마침’은 영어로 ‘End’인데 사실 이 단어는 짧지만 참으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길을 가다가 끝이 나면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더 이상 없는 것이 바로 끝입니다. 그것이 ‘end’입니다. 선교사는 바로 이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말 그대로 끝을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여러분이나 저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다 끝냈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거기에다 무엇을 더하려고 한다면 “다 이루었다.”고 말한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씩 접시를 닦습니다. 그런데 제가 접시 닦는 일을 다 마쳤다고 하는데 제 아내가 또 다시 닦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를 모욕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를 못 믿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끝냈다.”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자꾸 거기에다 무엇을 더하려고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되며 결국 그분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끝내신 일 즉 요19:30 말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주석서를 썼지만 이 일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서는 성경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우리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지금도 서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일을 다 끝내시고 앉아 계십니다. 일이 다 끝났으므로 서 계시지 않습니다. 자 이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2000년에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 구원을 얻어서 2040년에 죽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천국에 가기 위해 이 40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십일조를 하고, 주일 성수하고, 큰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베풀고, 전도하고 등등 여러분,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참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끝내 놓으셨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행을 베풀고 큰 죄를 짓지 않으며 남을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여러분을  하늘 나라로 보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하고도 충분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분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용서(시103:12)와 완전한 구속(사53:5-6)을 얻으며 사실 이것을 위해 그분께서는 무한대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선물은 누구나 값없이 얻을 수 있지만 값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크리스천은 로마서 10장 4절의 진리 안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모두 선교사입니다. 로마서 10장은 이처럼 선교사가 누구인지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교지가 어디인지도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다 같이 로마서 10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여’로 번역된 ‘ignorant’라는 단어는 결코 ‘무식하다’는 것이 아니고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도 칼국수 만드는 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여인이라 해도 자동차가 고장 나면 그것을 고치는 방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르는 것이 있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학식 있는 사람들도 로마서 10장 4절의 말씀 즉 예수님께서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일을 모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를 따르려고 노력합니까? 그들은 자기가 세워 놓은 기준대로 일들을 행하고는 가슴 뿌듯해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로마서 10장 4절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범주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는 어떻습니까? 선교사입니까? 선교지입니까? 힌두교도들은 영원한 복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갠지스 강에 몸을 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인들 중에서는 도덕률을 잘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목사가 하라는 대로 하면 구원을 받을 줄 알고 충성 봉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주교인들은 선행을 하고 주일에 미사에 참석하며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면 구원을 받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부들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90%를 했고 나머지 10%는 각 사람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사역 즉 십자가에서 단 번에 끝마치신 일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단 번에 끝내신 사역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도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이 끝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계속해서 일을 해서 그것을 끝내려 할 것입니다. 사실 일이 끝났음을 알게 되면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도 집에 가서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손님들이 많이 와서 대접을 한 뒤에 설거지 할 그릇이 수북이 쌓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식사 후 또 곧 바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경우 제 아내는 교회 가서도 설거지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예배 끝나면 빨리 와서 설거지를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런데 제 딸이 엄마를 생각하고 이미 설거지를 다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배드리는 동안에 이미 설거지는 다 끝났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제 아내는 그것으로 인해 걱정할 것입니다. 딸이 이미 설거지를 다 끝냈음을 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요? 그렇습니다. 일이 끝났음을 알게 되면 언제나 위안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구원 사역을 다 끝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내 것으로 적용하면 구원받습니다. 정말로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선교사든지 선교지든지 둘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단번 속죄의 복음을 들고 선교지로 나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교지가 멀리 있지 않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내 가족, 이웃, 친구, 직장 동료 등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 선교 대상이며 선교지입니다. 선교 후원금을 모금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0장에서 바로 선교사와 선교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선교지와 선교사가 바로 붙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로마서 10장 4절의 진리 안에 있으면 선교사입니다. 여러분의 선교지는 10장 2-3절에 있는 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의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Do’ 종교와 ‘Done’ 복음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바구니를 비유로 들겠습니다. 하나는 여전히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속한 ‘Do 바구니’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알며 믿는 사람이 속한 ‘Done 바구니’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은 우리의 선교지로서 ‘Do 바구니’에 속한 사람이며 복음을 믿는 사람은 선교사로서 ‘Done 바구니’에 속한 사람입니다. ‘Do 바구니’에 속한 사람은 무엇인가 자신이 계속해서 해야만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따라서 쉬지 않고 일하며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Done 바구니’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전하게 끝내놓으신 일을 100% 신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를 보여 드리기 위해 검은 색과 하얀 색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검은 색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말에 검은 색을 표현하는 말이 여럿 있습니다. “새까맣다”, “까맣다”, “검다”, “거무튀튀하다”, “거무스레하다”, “거무잡잡하다”. 도대체 어느 것이 거무잡잡하냐고 물으면 대답이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밤과 낮을 비교해 봅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낮과 다른 것같이 이것은 저것과 다릅니다.” 자,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언제 밤이 시작되는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절대적으로 밤과 낮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저녁 6시면 밤입니까? 낮입니까? 물론 언제 낮이 시작되는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이처럼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무엇을 하고 있는 것’ 즉 ‘Do’와 ‘이미 끝난 것’ 즉 ‘Done’ 사이에는 절대적인 구분이 있습니다. 너무 명확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의 끝난 것은 아직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하고 있는 것”과 “이미 끝난 것”은 확연히 구분됩니다. 이보다 더 절대적으로 확신 있게 구분하기 쉬운 것은 없습니다. 집을 떠나서 교회에 왔으면 집을 떠난 것입니다. 아직도 집에 있으면 교회에 안 온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들으면 이미 찬송 부르는 것은 끝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일을 끝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아직도 무엇을 하고 있으면 아직 끝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끝을 냈으면 더 이상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 끝났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구원에 필요한 속죄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이것은 보상의 문제요,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다 선교사로서 ‘Done 바구니’에 속한 사람이고 선행과 학식과 지식과 재물을 통해 자기 의를 세우려는 사람은 선교지로서 ‘Do 바구니’에 속한 사람입니다. 전자는 복음에 속한 사람이고 후자는 종교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모양만 다를 뿐이지 다 같습니다. 거기 속한 이들은 다 ‘Do 바구니’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Do 바구니’에 속한 사람이냐 ‘Done 바구니’에 속한 사람이냐로 분류하면 됩니다. 정치가냐, 종교인이냐, 잘 생겼냐, 부자냐, 학식이 많으냐로 구분하지 마시고 선교사냐 아니면 선교지냐로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이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또 아브람이 이르되, 보소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은즉, 보소서, 내 집에서 태어난 자가 내 상속자이니이다, 하매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요, 오직 네 속 중심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분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하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이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창15:1-6) 도대체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기 위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할 때에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은 바로 ‘Done 바구니’에 속한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구절이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3장 5절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구원받기 위해 여러분의 선행과 종교와 전통과 학식과 재물과 지혜를 따르시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Do 바구니’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일을 신뢰하며 오직 그분만 의지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Done 바구니’에 속한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뿐이 없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셔서 “나는 Do 바구니에 속했다.”고 느끼시는 분은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단번에 끝내신 일만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들의 용서와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Done 바구니’에 속하신 분들은 다 선교사입니다. 내 선교지가 어디인지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예수님의 ‘Done 바구니’의 복이 여러분 위에 영원히 임하길 기원합니다.  
2009-05-02 17:23:56 | 관리자
무저갱(無低坑)의 열쇠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별 하나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지는데 그가 바닥없는 구덩이(the bottomless pit, 無低坑)의 열쇠를 받았더라. 그가 바닥없는 구덩이를 여니 그 구덩이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대기가 그 구덩이의 연기로 인해 어두워지며 또 메뚜기들이 연기 속에서 나와 땅 위로 올라오는데 그것들이 땅에 있는 전갈들의 권능과 같은 권능을 받았더라.”(요한계시록 9장 1-3절) 우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또 우리는 어떠한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날 이에 대한 성경 말씀을 놓고 많은 상반된 주장들이 있어서 여러분들 가운데 혼란을 느끼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듣기에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성경에 의하면 앞으로 제가 말씀드릴 놀라운 일은 실제로 곧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에 여기에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하여 어떠한 사람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앞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성경적 예언에서 일어날 일은 휴거입니다. 휴거는 믿는 자들이 공중에서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죽은 자들은 몸이 무덤에서 나오게 되고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공중으로 채어 올라가 예수님과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어서 7년간의 대환난이 이 지구상에 있게 된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의 처음 3년 반은 ‘환난’기간, 이후 3년 반은 ‘대환난’기간으로 나뉩니다. 이때에는 각각 7개의 심판으로 구성된 3가지의 심판이 있습니다. 첫째는 7개의 봉인된 심판이고, 두 번째는 7개의 나팔심판인데 이중 6개를 오늘 살펴볼 것입니다. 세 번째는 7개의 대접(vial)심판입니다. 즉 모두 21개의 서로 다른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 144,000명에게 인을 치시는데 아마 이들이 대환난기 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8장을 보십시오. 일곱 번째 봉인된 심판이 있게 되면 다음의 나팔심판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의 나팔심판이 있으면 다음의 대접(vial)심판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분께서 일곱째 봉인을 여실 때에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하더라.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더니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계8:1,2) 성경에서 나팔(trumpet)은 심판을 뜻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나팔을 불자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 그 예입니다. 성경은 나팔심판이 있기 전에 2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늘(heaven)에 반시간쯤 고요함(silence)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미래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저는 이 구절은 '천국에는 여자가 없다’(역자주: 계8:1하의 ‘there was silence in heaven’을 빗댄 말)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침례교 방식으로 의미를 해석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여기서는 완벽한 30분간의 고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7개의 봉인된 심판 후 지구는 대혼란에 빠져있을 것이고 아울러 30분간의 절대적인 고요함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가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금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앞에 서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향을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왕좌 앞에 있는 금 제단 위에 드리게 하려 함이더라.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피어난 향의 연기가 그 천사의 손에서 나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더라. 그 천사가 향로를 취하여 제단의 불로 가득 채워 땅에 내던지니 음성들과 천둥들과 번개들과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려고 준비하더라.”(계8:3~6) 그렇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항상 효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는 통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항상 응답하십니다. 나팔심판은 전쟁과 고통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나팔(trumpet)이 전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7절을 보십시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 위로 쏟아지니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고 푸른 풀이 다 타니라.” 첫 번째 심판은 초록색 식물에 대한 것입니다. 나무와 풀의 삼분의 일이 타 버려 없어집니다. 우박과 불이 피와 섞여 온다는 것이 상상이 갑니까? 상상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그러나 제가 이태리에 경험한 사실인데 7월에 우박이 와서 농작물을 완전히 망가뜨렸을 때 정말로 모든 것이 다 쓸어버려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두 번째 심판은 8,9절에 나와 있습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며 또 바다에서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부서지더라.” 이것은 상업, 생명, 석유, 군사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저는 20년 전에 해상에는 약 25,000개의 배가 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구절에 의하면 적어도 8천에서 9천개의 배가 파손된 것입니다. 여러분 중 혹시 대환난 때 이 지구위에 남아 계실 분은 해상여행을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무섭고 파멸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휴거는 성경에 의하면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오늘 이 순간에 우리가 채여 올라가 예수님과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럴 경우 즉시 대환난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끔찍한 심판은 어느 먼 미래의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임박해 있습니다. 성경은 생각지도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실히 해야만 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확실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에 대해 손끝만큼이라도 의심이 있는 분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재앙들에 대해서 증언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교회에 나가 신앙고백을 하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천만에요. 이것은 천국과 무관합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일어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떤 분은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영접기도를 해서 괜찮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매일 밤낮으로 기도하고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레17:9) 그러면, 누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정답은 아무도 모르나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어려서 침례도 받고 신앙고백도 해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중에도 분명히 구원 받지 못한 분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고 마귀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할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라고 하실 것입니다. 일요성경공부 교사, 집사, 목사 등의 직분을 가지면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마음도 잘 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심판은 계시록 8장 10,11절에 나옵니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등불처럼 타는 큰 별이 하늘로부터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물들의 근원 위에 떨어지니 이 별의 이름은 쑥이라 하더라. 그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물들이 쓰게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물들로 인하여 죽더라.” 쑥은 쓴 사막식물입니다. 신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나 구약에서는 7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항상 고통과 쓴 심판을 의미합니다. 강의 물들이 써져서 사람들이 마실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 심판은 12,13절에 있습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입어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고 낮이 삼분의 일 동안 빛을 내지 아니하며 밤도 그러하더라. 또 내가 보고 들으니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한 천사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이제 세 천사가 불게 될 또 다른 나팔 소리들로 인함이라! 하더라.”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생태계나 건강시스템 그리고 치안 등이 완전히 엉망으로 되어 대환난이 올 것입니다. 그때 온도는 어떻게 변해버릴까요? 저는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 이 지구위에 있지 않을 것이니까요. 13절에는 화, 화, 화 즉 3개의 심판이 더 남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즉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9장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계시록 9장 1,2절을 보십시오. 바닥없는 구덩이에는 마귀들(demons)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마귀(Devil)가 그 열쇠를 가지고 구덩이를 열어 연기가 나오고 그 후 마귀들(demons)이 나오게 됩니다. 계시록 20장 1-3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7년 환난이 끝나고 예수님이 천년왕국을 세우려고 할 때의 일입니다. 여기서 바닥없는 구덩이는 오늘 본문의 바닥없는 구덩이와 같은 것으로 여기에 다시 마귀가 가두어지게 됩니다. 천사는 전달자란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아닙니다. 전달자란 그리스어로 남자 성(gender)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계시록 9장 3~6절을 보십시오. 메뚜기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인이 없는 사람만 해하라고 명을 받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 144,000명처럼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이 있게 되고 그들은 해를 받지 않습니다. 즉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인이 없는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여러분은 전갈에 쏘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지만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끔찍하다고 합니다. 6절에는 고통이 너무 커서 죽고 싶지만 죽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죽지도 못하고 다섯 달 동안 고통만 받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지구상의 지옥이 될 것입니다. 9장 7절~11절을 보십시오. 그 메뚜기는 얼굴이 사람의 얼굴 같고 이빨이 사자의 이빨 같습니다. 이들이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할 것입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도시, 마을에서 사람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러분 중의 일부가 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는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되어있는데 사탄은 그리스어로 파괴자의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마귀들(demons)은 대환난 때 이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 달 동안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당할 때 누구든지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하면 그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심판은 9장 15~19절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로써 지구 인구의 반이 죽게 됩니다. 아마 수십억이 될 것입니다. 지금 시작되면 20-30억이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때 우리 교회목사가 휴거에 대해 이야기 했고 대환난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면서 자신이 그때 뉘우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예수님께 자기 죄의 용서를 빌며 나아가게 되리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20, 21절을 보십시오. 이 환난을 경험하고 자신들의 마술과 음행, 다른 신을 섬긴 것을 회개할 것 같으나 실은 하지 않습니다.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 중 일부도 이 심판을 통과해야 합니다. 상상이 갑니까? 어떤 분은 그런 협박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보십시다. 인생의 마지막 때에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저는 전적으로 성경에 의거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의 죄를 오늘 이 아침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전적으로 신뢰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불과 겨루고 있는 중입니다. 많은 성경 주석들도 그렇지만 디모데후서 2장에 의하면 오늘 아침 같이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듣고서도 거부한다면, 즉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을 들은 후에도 마귀를 계속 따르면 여러분은 대환난 때 전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의해서 오는 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나는 그런 것은 믿지 않는다고 할 분이 계시겠지만 저는 단지 성경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저는 여러분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자신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별이 떨어져 바닥없는 구덩이가 열릴 것입니다. 그때는 고통의 때가 될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다시 태어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으신 분 즉 자신의 삶을 통해 구원을 확실히 알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아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시라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구원 받으신 것이 확실한 분 즉 이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분은 더 늦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시길 또한 부탁드립니다.
2009-05-02 17:22:4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