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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수정보다 맑고 고귀한 눈물을 보셨네요? ^^* 읽는 것 만으로도 상황이 그려지고, 은혜가 됩니다. 그 자매님의 마음을 저 또한 깊이 공감하기에,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오래도록, 이왕이면 주님 오실때까지 이런 모든 분들과 더불어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힘들어 하는 많은 성도님들이 어서 속히 바른 말씀과 참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며 애써야 할 것 같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을 바랄 뿐입니다.
2010-04-14 01:02:23 | 이은희
솔직하고 소탈하게 적어 놓으신 글, 진심으로 은혜가됩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보아 온 사모님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힘겹고 외롭고 아플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저의 두 눈에 비친 그분들의 모습에서 말 못할 외로움이 묻어났다고나 할까요? 사모..,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분들이 가끔은 위대해 보이고, 때론 안스럽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한 번은 저에게도 사모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저는 저 자신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 자리를 거절했었지요. 덕분에 지금은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 하지만 사모님 못지않게, 어쩌면 더더욱 힘들지도 모르는 자리가 목사님의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힘겨움에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바라보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두 분들 모두 너무도 귀하고 어떻게든 힘이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입니다. 비록 모든 것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는 않겠지만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목자들과 사모님들 위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2010-04-14 00:41:56 | 이은희
성경에는 동명이인만 있는 게 아니라 동일 인물이 뒤죽박죽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해서 그런 게 특히 어렵더군요. 그런 예 중에 가이난과 게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역대기상에도 표기가 창세기와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걸로 기억.
2010-04-13 22:48:37 | 김용묵
우리나라에도 아직 저런 분이 계시는군요. 정말 경이롭고.. 내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영적 복이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 이은희 자매님께서 올리신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그 아름다운 어린이 생각이 나네요!
2010-04-13 22:43:33 | 김용묵
성경적으로 목사(감독)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목사(목자)였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자라지 못합니다. 모두가 형제이지만 모두가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설교가 없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적인 목사를 만나기가, 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돈이 개입되고 욕심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풀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도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사심없이 보려고 하면 대부분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사람인지라 그게 잘 안되네요. 그래서 자비량 목회를 하면 이 문제를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그저 주님의 긍휼을 바랄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경험이 없이 설교하는 것 이것이 현대 목사들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하겠다고 작정하고 연구하면서 다른 선각자들의 글을 읽고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설교할 때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지요. 이런 것이 없으면 목사와 양들에게 모두 치명적인 절망이 오게 됩니다. 목사! 쉬운 직분(officei)이 아닙니다. 일단 인생의 밑바닥에 갔다 와야 설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이며 겨우 준비할 때 주님의 은혜로 하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책들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바른 목사 상이 나와 있습니다. 그분의 신학(종말론 등)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성도의 성화와 목사의 자세에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잘 가르칩니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설교보다 글이 더 좋습니다. 샬롬.
2010-04-13 22:15:00 | 관리자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야말로 사람의 소명 중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관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교회의 강단에 세울 목자를 구별해 놓지 않으실리는 만무하고다 봅니다. 문제는 설교자라는 위대한 사명을 저버리고 강단을 세속적인 것과 욕망이 분출하는 무대로 변질시킨 목자들이겠지요. 교우들끼리 말씀을 나눈다는 평신도교회가 인간의 눈으로는 발전된 교회 모델로 보여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씀의 위대한 권위마저도 낮추어 버릴 치명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왜곡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을 지키고 그 말씀 그대로를 선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강단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다니던 교회라서 아무 고민도 갈등도 없이 주일마다 성경책 챙겨 습관적으로 교회로 나아가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주님이 인정하시는 강단을 찾아 떠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게 보실까 상상해봅니다. 저도 몇 개월 전 부터 성경지킴이 사이트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소박하게 덧글로 인사드립니다.^^ 변질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간절해있는 사람들에게 인터넷공간에 이런 귀한 말씀의 장을 여시고 운영하시는 정동수목사님 그리고 돕는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10-04-13 21:23:45 | 김대용
올리신 내용의 글은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시키려는 자들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구약족보에 없는 이름일지라도 신약에 기록되어 있으면 실제로 존재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정확히' 읽고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철학이나 헛된 말들에 속지 않는 비결입니다. 이해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a).
2010-04-13 20:23:39 | 김형식
작년말에 저도 교회를 옮기면서 독립침례교회를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방문하여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배후에 집에 오면서 아내가 제게 얘기하더군요(하나님의 종인 목사님에 대해 서로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죄송하게도 잠깐하겠습니다), "이전교회 목사님 보다 말씀중심이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그 자매님도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요 ? 그후로 이 교회에 나가게 되고 이전 교회에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사람이 지금은 자발적으로 일을 있으면 하려고 하고 이전 교회 생활에서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설교 말씀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김문수 형제님 책도 아내가 주위분들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이게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적극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성경에 근거한 말씀 선포를 들으면 사람이 변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2010-04-13 19:10:50 | 김학준
지난 주에는 예배를 마치고 한참을 서서 울고 있는 한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예쁘게 생긴 딸아이는 엄마를 맴돌며 위로하고 있었고 지긋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빠가 옆에 든든이 서 있었는데 ... 민망할 것 같지만 그 눈물의 원인이 무엇일지 궁금해져서 진정되기를 기다렸는데 온 가족이 함께 이곳에 와서 예배드리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언제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는가? 또한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감동이 있었는가? 딱딱하고 무뎌진 제 마음이 부끄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자매님댁은 이동원목사님이 시무하는 지구촌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이동원목사님은 지성과 인품이 있는 분으로 평판이 나 있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지만 우리나라에 관상기도를 설파하고 두 날개 운동을 펼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만 있었는데 오늘은 그곳의 동정이 어떤지 궁금해져서 그 교회 홈피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지구촌교회는 ‘3·3·3 비전’ 달성을 자축했다.  교회 설립 때부터 품어온 성도 3만명, 평신도 선교사 3000명, 해외 선교사 300명 양육의 바람을 실현한 것이다. 이 목사는 이어 새로운 ‘2020 비전’인 ‘동역으로 펼쳐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축제는 연합 합창단 700여명의 ‘할렐루야’ 찬양과 꿈과 비전을 담은 오색 풍선들을 하늘로 띄워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곳에 모였던 수 많은 군중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모임이었는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하더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안일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고 게을렀던 제가 자다가 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혹시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위해 쓴웃음과 괴로움을 겪는 또 다른 가족이 있는지 찾아 헤메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전쟁의 후방에서 전방의 긴박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야 할 것 같아 부족한 글솜씨지만 올려봅니다.   (부족한 글솜씨라 용기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저를 시작으로 해서 용기내시라는 의미도 담으면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8:38:50 | 정혜미
(마 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원래 역사적 사실대로 서술하자면, "요시야 - 여호야김 - 여고니야" 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왕 파라오느고가 세운(대하 36:4, 왕하 23:34) 꼭두각시 왕 여호야김을 다윗 왕가를 계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메시야 계보에서는 삭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빠지고 대신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니야가 들어가 있습니다. (참고: 게시물 166번,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2010-04-13 18:07:36 | 김문수
이 문제에 대해서 논증의 글을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괜히 쓸데없는 억측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어서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하여 답하겠습니다. -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롬3:4). 그런즉 위에서 성경을 공격하는 신학자나 문서비평가들의 말이 거짓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입니다. -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글이 아니라,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딤후3:16). 성경의 각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이므로 누가복음 3장에 게난이 들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단어를 주셨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기록자가 어느 문서를 보고 족보를 계산했느니, 이것이 어느 사본에서부터 등장하느니, 필사가들이 제대로 옮겨 적었느니 못 적었느니 하는 논의는 믿을 수도 없거니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 창세기와 역대기의 기록이 누가복음하고 일치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간음사건이 나오는데 역대기에는 안 나옵니다. 그렇다고 역대기의 기록에서 다윗의 간음사건을 필사가들이 삭제했다거나 사무엘기에 누군가가 다윗을 모함하려고 있지도 않은 간음사건을 집어넣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각 기록들은 각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과 기록하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누가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고 차례대로(눅1:3) 하나님께서 주신 단어들로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창세기나 역대기의 족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게난이라는 단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 아르박삿은 살라를 낳았는데 여기서의 낳았다(begat)는 것은 "출산"(bear)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속 관계가 법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관계는 대부분 자녀 출산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유다의 며느리가 낳은 아이가 유다의 아이로, 요셉의 두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처럼 인준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누가의 족보 기록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입니다. 이것은 사실적인 관계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창세기와 역대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게난(가이난)이 법적 상속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시고 그를 계보에 넣어주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2010-04-13 17:55:50 | 김문수
제 아내가 성경 공부중  누가 복음 족보에 가이난(게난) 2번 나오는데 아르박삿의 아들 셀라는 성경의 오기 라고해서 성경이 잘못될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창조과학 홈에서 찾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건지 알고 싶습니다.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Cainan or Shelah?)  Answers Magazine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 – 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 – 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출처 : AiG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번역자 : IT 사역위원회[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1:1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6:39:08 | 허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