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야베스에 대한 기록은 역대기상 4장 9~10절을 빼고 나면 전무합니다.
이 두 구절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많은 신자들이 그 기도를 따라 복을 달라고 간구하며, 잘못된 신앙관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 야베스는 누구이며 그 기도가 지금도 유효한가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짚어보려 합니다.
1. 야베스는 누구인가?
역대기는 아담부터 시작하는 긴 족보와 함께 주로 남 왕국 유다의 사건들을 보여주며 다윗과 그의 자손들 속에, 약속된 왕 메시아의 계보를 따라 이름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백 명 이상의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야베스는 바로 다윗 왕의 혈통인 유다 지파에 속했습니다.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조금 살펴보면,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혹은 '빼앗는 자'(grabber)인데 이름 그대로 그는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또한 나오미가 그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은 말론과 기룐인데, 말론은 '병약한'(puny)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기룐은 '수척해지다'(pining)라는 뜻을 가진 것과 같이 이 이름대로 두 사람 모두 젊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솔로몬의 뜻은 '평화'(peace)인데 그는 이름처럼 전쟁에 한번도 나가지 않은 첫 번째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의 뜻이 한 사람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야베스라는 이름도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베스가 살던 시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 골고루 땅의 지분을 나누어 주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전(B.C) 1450년대경으로 추정됩니다.
야베스(יַעְבֵּץ֙, Jabez)라는 이름의 뜻은 '슬픔에 잠긴' 또는 '슬퍼하다' '고통을 겪다'이지만, 그는 그 의미와 다르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지어 주었다는 사실에서 유복자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도 있고, 8절의 아하헬의 가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보면 원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데 어머니가 지어준 것을 보면 유복자라는 말이 신빙성이 있습니다. 또, 아이가 할례를 받을 때까지도 그 어머니가 낳았던 고통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평생 그 고통을 기억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전승에 보면 그는, 훌륭한 율법학자요 많은 제자들을 남겼습니다.
대상 2:55절에서 보듯이 '야베스에 거주하던 서기관 가족들'이라고 기록된 말씀이 유대인의 전승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야베스는 자기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자더라'라는 말씀으로 보아 경건과 학식에 뛰어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이라 함은 그가 드리는 기도에서 보듯이 항상 하나님을 삶에서 인정하려 하는 것과 그분의 축복과 보호하심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율법학자로서 제자들을 배출할 만큼 학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존귀하다는 말씀은 그 지역에서 명예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성경 기록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삼상 9:6) 그가 그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존귀한 사람이니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니 이제 우리가 거기로 가사이다. 혹시 그가 우리가 가야 할 우리의 길을 보여 줄까 하나이다, 하므로
위 구절은 사울과 그의 종이 사무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야베스의 기도는 무엇인가?
그의 집안이 별로 좋은 집안은 아니었던지 3장에 나오는 왕족의 족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4장에 유다의 아들들에서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고통과 슬픔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그가 구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많은 신자들에게 붐? 이 일어나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보면서, 다른 말씀은 왜 따라 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빌 2:5-8)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이 빌립보서 2장 말씀은 웬만한 신자라면 다 아는 구절인데 말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의 기도를 한번 보겠습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원하건대 주께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내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사 주께서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그에게 주셨더라.
야베스는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으로 이겨서 얻은 이름. 바로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니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창 32:28) And he said, Thy name shall be called no more Jacob, but Israel: for as a prince hast thou power with God and with men, and hast prevailed.
이 말씀도 어떤 목사님들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육체적으로 이겼다고 이해를 하며 설교를 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이기다니요? 위 말씀의 뜻은, 기도를 그만큼 끈질기게 하며 사람들 중에 통치자로서의 파워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prince hast thou power"를 히브리어로 보면 싸라(שָׂרִ֧יתָ, sarah)이며, '왕으로서 힘을 가지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견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는 야곱, 바로 자신과 견주어 이겼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닥쳐오니 얼마나 그 마음이 다급하고 간절했겠습니까?
바로 그 심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한 것처럼 야베스의 기도가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죽을 고생을 다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야베스가, 고통과 수고와 슬픔으로 얼룩진 모친의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뼈저리게 겪고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며 야곱의 마음과 동화된 심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여호수아로부터 분배될 자신의 땅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평안을 구한 것입니다.
정말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 계신 것처럼 야곱이나 야베스와 같은 진실되고 간절한 심정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막연히 집이 잘되고 풍족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의미 없는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을 잘 살펴봐야 할거라 생각됩니다.
허벅지 뼈가 탈골될 정도로 자기 육신(사람)을 이기고 오직 그분만이 내 생명이 된다는 심정 속에서 기도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완전한 마음으로 무장하고 그분께 매달린 적이 있습니까?
많은 설교자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4 분법으로 나누어서 설교를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3. 신약 교회에서 바라본 관점과 결론
그의 기도는 땅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리고, 근심과 환난이 없는 복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누구에게 구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고 했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복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 기도의 복입니다.
왜 그런가 다음 구절들을 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엡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
(롬 8:16-18)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빌 1:29-30)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나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보았고 또 지금도 내 안에 있다고 듣고 있는 그 동일한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느니라.
더 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이 말씀들로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위 말씀들이 초대교회 시대만 해당되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에겐 해당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까?
사도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만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린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야베스가 받았던 복보다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눈에 보이지가 않거든요. 실질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내 손에 잡히지가 않으니까 자꾸 헛된 것을 구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런 물질적인 복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그날의 악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세상에 충만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아버지께서 육신의 아버지보다 못할까요?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좋은 것을 해 주려 하는데 영원에 같이 있을 자녀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을 채우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완전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더디고 그분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바른 믿음 안에서 그분의 숨이신 말씀을 대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바로 공의(公義, judgment)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록들을 통해 확실하고 바꿀 수 없는 많은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도들은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는 발동이 되지 않게 됩니다.
공의는 그분께서 세워놓으신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잣대 안에 있게 되면 자연히 야베스의 기도의 복은 모두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과 신약의 믿음은 모두 동일하지만, 신분이 바뀐 것을 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로 다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고난이 오면 고난으로,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복이 오면 축복으로, 때로는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려움으로,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 오면 브니엘의 야곱의 심정으로 그분께 매달리며, 오직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의 절대적 믿음으로 쇠벽을 뚫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 기록은 우리의 배움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지금 곧 죽을 것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내일 죽는 것이 확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실질적이고 애절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지금 신약시대에는 정욕에 쓰려고 구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주신 말씀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약 4:3)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요일 5:14-15)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확신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것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안즉 또한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들을 얻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바로 공의가 되시는 성경 기록들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바로 다음 구절의 말씀으로 잣대를 삼으시면서 구하시게 되면 잘못된 기도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이 잣대 안에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롬 14:8~9)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일어나사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아멘.
2019-01-11 20:14:40 | 이명석
안녕하세요?
우리 출판사가 출간하는 모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찬송가가 뒤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점 유념하고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01-10 17:54:30 | 관리자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2019-01-05 09:01:27 | 장윤석
저도 받을수 있을까요? jesper96@naver.com 입니다
2019-01-02 04:36:28 | 임숙연
저도 오디오파일받을수 있을까요?jesper96@naver.com 입니다
2019-01-02 04:35:00 | 임숙연
예전에 자존심 낮추는 법과 자존감 높이는 법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제 그 글을 쓴지 일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다시 한번 되짚어 봐야겠다라는 마음이 들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 높이는 법 자존심 낮추는 법. 이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안에서는 너무 쉽습니다. 이제 그 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인정 욕구의 방향을 잡아라.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인정 욕구입니다.
인간을 심각하게 좌절하도록 만드는 욕구는 다양하지만, 인간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가장 중요한 근간은 무엇보다도 '인정에 관한 욕구'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욕구를 인정받지 못할 때 우울감이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인정 문제'와 '인정을 위한 싸움'은 심리적 인정이든, 정치적 인정이든, 제도적 인정이든, 경제적 인정이든, 사회적 인정이든, 실존적 인정이든 간에 모든 세대에 걸쳐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바로 자신과 타인이 바라보는 관점에 방향을 맞추고 있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인정 욕구는 강해집니다. 또한 자존심이 낮은 사람일수록 인정 욕구는 약해집니다.
즉, 헤겔이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심리의 인정 욕구는, 개개인 자신의 자존심은 높이 세울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사람은 육신안에 여전히 악한 본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가지고 있는 이 인정 욕구의 방향을 바로 잡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높아지게 되고 스스로를 세우려는 자존심은 낮아지게 될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사탄 루시퍼의 생각은 정반대로 다릅니다.
(사 14:13)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우리가 다 스스로를 세우려는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어쩔수 없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본성속에 있는 인정 욕구이기 때문에 포장이 되어서 보이지 않던,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던, 우리 몸에 피가 도는 한 이것은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방향을 바로 잡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정 욕구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중하고 고귀한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한번 보시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실 것입니다.
(시 119:10) "내가 온 마음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오 주의 명령들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게 하소서."
(시 42:2)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그리하리이다."
왜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위 구절들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다윗의 욕구가 너무나 간절하고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도 밧세바를 차지하기위해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던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크신 긍휼하심과 성령하나님의 부드러움으로 그를 높이셨고 크게 만드신 것은, 다윗이 가지고 있던 인정 욕구의 방향이 주(LORD)를 향해 똑바르고 올바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 5:42) "다만 내가 너희를 알거니와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느니라."
(요 14:21) "내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들, 즉 성경 기록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마음판에 새기려고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 따위는,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그 말씀들의 강력한 힘으로 인해 spirit, 영에서 전달되어져 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져 육신은 저절로 말씀에 맞춰져 체질화 되어 갑니다. 그래서 인정 욕구의 방향을 바르게 잡는 것은, 귀중하고 고귀함으로 향해 가는 것이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행해야 할 마땅한 본분(本分)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중심을 세운 성도가 좋은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상극이다.
자존감을 높이려는 마음과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은 비슷한 것 같으나 많이 다릅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긍정'을 뜻하고 자존심은 '경쟁 속에서의 긍정'을 뜻하는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을 바로 알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 세울 수 있는 것이며 자존심은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가장 커지게 됩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또는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고 자꾸 길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존감은 가장 낮아지게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또는 가장 존경하고 특별한 사람,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모든 일이 형통함을 얻을 때 자존심은 가장 높아지게 됩니다. 이런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존심과 자존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존감 높이는 법과 자존심을 낮추는 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합니다. 일단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다시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받으시며,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기 위해 죽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그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며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우리의 자존심이 어디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신분 자체가 이미 영원한 하늘 왕국의 자녀로 옮겨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자존심 따위로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 따윈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먼지같은 저와 여러분이 무엇이관대 하나님앞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추켜세우는 자존심을 부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고 웃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없애버리는 그 순간부터, 즉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배운 그 순간부터 자존감은 저절로 높아져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을 따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생각을 가졌다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리라는 마음을 굳혔다면 그 기초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스스로를 내세우려하는지 모릅니다.
(롬 10:3)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바울에게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위에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의 힘이나 생각,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됩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오는 사랑말입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편만하게 있어서 웬만한 교리적인 지식이나 성경 지식을, 마치 세상 지식을 습득하는 것 같이 교회를 어느정도 다니신 분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게 되면 이런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찾게되며 묵상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친족이나 가족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할수록 자신의 자존심을 부인하는 것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고, 그분을 향한 인정욕구가 강해지면서 자존감은 신기하게 저절로 올라가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자존심은 낮아지고 자존감은 올라갑니다. 이와같이 오직 한 목적,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기록된 말씀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 행위는, 그 자체로 불의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 곧 그는 참되며 그 속에는 불의가 없느니라."
결론.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다시 하나님께로 다 돌아갑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거짓되며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성도의 참 생명과 참 진리는 그분안에 영원으로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설때에야 비로소 완전해지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가 조그맣게나마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존심은 버리듯이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항상 언제 어디서나 고난이 오든 시험이 닥치든 이 생각을 가지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생각, 그것은 기록된 성경 말씀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자존감은 바로 예수님의 생각을 담은 우리의 의(righteousness)의 지게표가 되시는 말씀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법과 자존심을 낮추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 목사님의 강해설교를 같이 들으시며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8-12-27 00:46:14 | 이명석
2018년 대전은혜침례교회 한해 동안의 모습 입니다.
2018-12-26 22:03:16 | 김기범
2018년 대전은혜침례교회 연말 가족모임 음악회
2018-12-26 21:58:41 | 김기범
^^ 깔끔하고 정돈된 첫화면이 멋지네요.
저도 궁금하거나 성경 공부할 때마다 이곳에서 많은 유익 누립니다~!
2018-12-20 08:40:13 | 주경선
KEEP BIBLE - home page 새 단장 되었군요.
멋지고 깔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에서 기쁨의 상급을 받는 용사들로 승리하십시오. -샬롬
2018-12-15 18:16:47 | 심재국
안녕하세요?
Understanding Roman Catholicism
By Rick Jones
https://www.chick.com/products/item?stk=0160
저희는 영어판 킹제임스 성경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언 문의는 이메일로 해 주세요.
샬롬
2018-12-13 17:09:05 | 관리자
좋은 문서 자료들을 제공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Middletown교회의 성경공부 자료를 안내해 주셔서 크게 도움 받고 있습니다. 1. 영어권 선교사로서 릭 존스의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책자의 원문을 구할 수 있는지 여쭙습니다.ebook으로 다운 받을 수 있는지요? 2. 이곳이 영어권이기는 하나 영어는 제2의 공용어 이기 때문에 영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성경을 살 수 있는 서점도 거의 전무한 실정이지요. 수도 지역에서나 겨우 NIV 또는 Goodnews Bible을 살 수 있는 정도지만 현지인들의 생활 수준으로는 성경 한 권 구매하는 것이 적쟎은 헌신이 됩니다. 혹시 귀 교회에서는 저희의 작은 모임을 위해 20권 정도의 영어판 킹제임스 성경을 증정해 주실 의사가 있으신지요? 남태평양 피지에서유정옥 드림
2018-12-12 10:01:57 | 유정옥
안녕하세요? 2018 년 8월 29일, 월간 목회라는 잡지에서 제게 < 나는 설교준비를 이렇게 한다>는 제목으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월간 목회는 목회정보 교환과 목회자료 제공, 효율적인 현대 목회의 연구와 개발, 참 지도자를 통한 교회 부흥 촉구를 목적으로 발행되는 잡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게 잘못 온 이메일로 생각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부탁한 것이 맞는다고 해서 의아해 했습니다. 어쨌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제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바를 기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제 2018 년 12월호를 보내 와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목회를 하시는 분들, 그리고 앞으로 하시려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샬롬 패스터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설교자의 특성>http://cbck.org/bbs/board_m.html?board_table=qt&write_id=1799
2018-11-24 15:31:0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안드로이드 버전의 Play Store에 들어가시면
「Lifove Bible」이라는 앱이 있습니다.
거기에 저희 흠정역 성경도 있으니
설치하셔서 이용하시면 됩니다. 샬롬~
2018-11-16 13:55:49 | 정진철
안녕하세요. 제가 핸드폰을 바꾸게 되어서 Play Store에서 킵바이블 킹제임스성경 흠정역 앱을 설치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ㅠ.ㅠ안드로이드용 버전 앱을 다시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18-11-16 11:16:00 | 김승열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주님안에서 평안하세요^^
2018-11-07 16:47:30 | 김지환
안녕하세요?
목사님께서 성경 작업외에도 여러 일로 바쁘셔서 일단 답변을 드리지만, 부족하면 보충 설명 해 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질문 : 은총을 호의로 범죄자를 범법자로 판이 바뀔 때 단어가 바뀌게 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 이미 킹제임스 흠정역은 은총이 호의로, 범죄자가 범법자로 바뀌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절을 보시면,
(잠 13:15) 선한 명철은 은총을 베푸나 범죄자들의 길은 험하니라.=> 선한 명철은 호의를 베푸나 범법자들의 길은 험하니라.
은총 => 호의는 "헨"이라는 히브리 원어를 사용하여 보존하셨고, 영문 kjv는 "favour"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흠정역은 처음 원어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여 호의로 번역을 한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헨"이라는 원어의 의미는 주관적으로 "호의"를 말하고 있으며 객관적으로는 "은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명철(Goodunderstanding)"은, 각자 개인이 깨닫고 이해하는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때문에 호의라고 바르게 번역을 했다고 이해를 하고 있으며, 범죄자 => 범법자는, "바가드"라는 원어로 기본어근은 '덮다'이지만, '범죄자, 범법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KJV 에서는 "transgressors"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뜻은 "위반자, 범칙자"로 잘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문NIV 같은 경우는 "unfaithful, 외도를 하는, 바람을 피우는", 또, 영문 NASB 같은 경우는 "treacherous, 기만적인, 신뢰할 수 없는" 등으로 번역을 해 놓아 원래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덮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안으로 들어오면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조금 더 설명드리면, 하나님앞에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아담이후로 육신을 입고 있든지 벗고 있든지 누구도 이 죄의 굴레에서 피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가능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법이지만, 오직 믿음으로 이 법 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흠정역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원 뜻의 "바가드"를 바르게 기록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질문 :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산토끼 무리를 국민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국민이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답변 : 할 수 없이 단어를 설명하자면 원어를 같이 말씀 드려야겠기에 부득이 사용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원어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알고자 할때 참고를 하고 있습니다.
(잠 30:26) 약한 국민이지만 자기 집을 바위 속에 짓는 산토끼와
(잠 30:26) The conies are but a feeble folk, yet make they their houses in the rocks
위에 허광무 형제님이 말씀하셨듯이, 국민(folk)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암(עַ֣ם)"으로 "아맘(amam, 결합하다)"이라는 기본어근에서 나왔으며, 그 뜻은 일차적으로 '백성', '지파', '무리' 처럼 집합체를 말하고 있고, 상징적으로는 사람들, 민족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 30:25) 곧 강하지 않은 백성이지만 여름에 먹을 것을 예비하는 개미와
(잠 30:25) The ants are a people not strong, yet they prepare their meat in the summer;
25절의 '백성, people'도 같은 단어로 "암(עַ֣ם)"이 쓰였습니다.
잠언은 주전 1000~ 700년경에 솔로몬의 때에 쓰여진 지혜서입니다. 즉,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가르쳐서 훈계하기 위해 쓰여졌고, 우리에게는 주를 두려워 하는 것과 매일의 생활속에서 지혜를 주기 위해 주신 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맡기신 것은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히브리인이라는 한정된 국민입니다.
민족, 혹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지만, 여기선 문자적으로 국민과 백성은 한정되어 일차적으로 개미와 산토끼의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상징적으로는 이스라엘 유대 백성, 또는 지금의 성도.즉, 한 개인을 의인화 해서 말하는구나, 하고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문맥의 의미는, 자기 집을 바위 속에 짓는 산토끼, 여름에 먹을 것을 예비하는 개미는 육신의 기회가 있을때 영원한 하늘 왕국을 바라보고, 상급을 쌓으며 나가는 성도들로 그려집니다. 이건 그냥 제가 이해하고 있는 문맥의 의미니 참고만 하셔도 됩니다.
부족한 답변을 드렸지만, 나중에 목사님께서 보시고 더 올바르게 보충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샬롬
2018-11-01 15:33:58 | 이명석
문장의 의인화 아닌가요?
의인화 :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에 비기어져 표현되다.
사람은 아니지만 동물이나 곤충들도 어떤 특정적인 면에서 사람과 비슷하거나 동등 이상의 행태를 보이는 것을 의인화한 문장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그냥 제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2018-11-01 09:36:28 | 허광무
샬롬!흠정역 성경을 구입해서 읽고 있는 사람입니다. 매일 잠언을 1장씩 읽는 습관이 있어서 흠정역 성경에 잠언을 주위깊게 읽고 있습니다. 일전에도 게시판에 단어가 변경된 것을 확인하고 질문들였는데....이전 판이라고 고치겠다는 답변을 올려 주셨는데....아직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권위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 지식이 부족하여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은총을 호의로 범죄자를 범법자로 판이 바뀔 때 단어가 바뀌게 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10월 30일 이라서 잠언 30장을 읽던 중에 26절에서 " 약한 국민이지만 자기 집을 바위 속에 짓는 산토끼와"The conies are but a feeble folk, yet make they their houses in the rocks;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산토끼 무리를 국민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국민이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국민의 사전적의미는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고요. folk라는 단어 역시 국민이라고 쓰이지는 않고 있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싶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친절한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안하세요
2018-10-30 09:15:30 | 김지환
주 안에서 만나니 반갑습니다.
저에게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okhelpu@naver.com
감사합니다.^^~
2018-10-22 15:32:56 | 허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