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 질문(2):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다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2: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은사주의에서는 보통 이 둘을 서로 번갈아 가며 사용하며 이 둘이 성령님의 단일한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기 때문에 은사주의자들은 늘 그 차이를 묻습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공부해 보면 이 둘이 단순히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각각을 살펴보고 나중에 둘을 비교해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성령 침례에 대한 구절은 신약에서 11번 나옵니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롬6:1-7; 고전12:13; 갈3:26-28; 엡4:5; 골2:12). 이 중의 다섯 구절은 예언의 말씀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다섯 구절 모두 성령 침례를 미래 시제로 다루고 있으며 이는 성령 침례가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과거 시제도 있는데(행11:16)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신 성령 침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구절은 서신서에 있으며 모두 성령 침례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이 성령침례인가? ‘침례’(밥티스마)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잠그다’ 혹은 ‘담그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하나의 사물을 다른 데로 옮겨놓다’는 의미가 있지요. 성령 침례는 이 일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침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성령님 안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여기서도 침례라는 단어가 쓰이며 이는 곧 그를 성령님의 세계로 옮기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즉, 그를 보편적 교회라는 새로운 세계로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보여 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장 3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바로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니라, 하셨기에”(요1:33)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3)
2. 언제 성령 침례가 일어났는가? 성경은 성령 침례가 성도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험의 일부라고 가르칩니다. 성령 침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거듭날 때 일어납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결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 같은 관계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3. 누가 성령 침례를 받는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도 이를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고전12:13).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신자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육적인 모습이 공공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4. 성령 침례를 사모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성령 침례를 추구하라는 명령도 없고 심지어 그 같은 언질조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왜 이리 조용한 한 걸까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는 순간 이루어지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유가 된다면 굳이 그것을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신약에서 15번 등장합니다(눅1:15, 41, 67; 4:1; 행 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엡5:18). 이 중의 14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모임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에서만 성령 충만이 명령으로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 충만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이 말씀은 충만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되는 것은 ‘무엇의 통치하에 있다’ 혹은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술에 취하는 것(술에 지배당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비교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성령 충만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하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입니다. 즉, 현재에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쓰자면 ‘계속해서 충만하라’가 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믿는 이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제라고 해서 성령 충만이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살면서 자동적으로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그때는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이 말씀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은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됩니다. ‘충만하라’는 명령은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처럼 복수를 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명령은 특정 소수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모두 동시에 충만하게 되지도 못합니다. 성령 충만의 명령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주님께 불순종하여 충만하게 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롬6:13; 12:1) 성령의 권능 안에서 걸을 때(갈5:16)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성령 침례는 단 한 번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 침례는 거듭나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항상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만 성령 충만은 믿는 자가 순종하는 때에 이루어집니다. 성령 침례는 명령이 아닌데 이는 하나님께서 맡으신 책임이기 때문이고, 성령 침례는 명령인데 이는 믿는 이가 따라야 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침례는 믿는 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성령 충만은 믿는 자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 침례는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사람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2009-05-13 15:19:04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 병고침이 속죄의 일부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질문이란 것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답을 안다면). 그래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15)는 말씀은 매우 고무적이며 또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여기서 소망이라 함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합니다(골1:23).
우리는 성경적인 ‘칭의의 교리’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목사나 집사 혹은 교회 학교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종이나 아내나 남편들에게 주는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8절과 그 이후의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는 지침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지체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목사를 구실로 삼아 이러한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목사는 목양 사역의 일부로서 각종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합니다. 누구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목사를 찾아가서 물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만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필요한 연습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곁에 성경을 잘 아는 목사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어떤 부인이 논쟁이 되는 교리 하나를 갖고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목사는 그 교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견해를 정리해 놓은 건전한 책 한 권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여러 견해가 아닙니다. 그냥 정답을 말해 주세요. 그럼 믿겠어요!” 이러한 부인의 태도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의 칭찬할 만한 태도와 비교됩니다. 사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조차도 성경을 통해 비추어 보고 상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요한1서 2장 27절 말씀은 멋진 균형을 이룹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2:27)
하나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어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인 제사장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 년 전보다 우리 믿음에 대해 더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질문 중 몇몇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가르친다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종종 은사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믿으며 다른 표적 은사들(기적을 행함, 병 고침 등)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60년 캘리포니아주의 밴누이스(Van Nuys)에서 시작된 이 은사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최근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그리스도인들의 19% 가량(2900만 명)이 자신을 은사주의자 혹은 오순절주의자로 여기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가히 놀랄 만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조사에 따르면 이런 은사주의자들의 21%가 뱁티스트(침례교도)라고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요 프로테스탄트 진영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초교파 운동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교리 설명이 없고 사람들이 표적이나 이적을 중심으로 모이며 각 사람이 믿는 바(정통이든 비정통이든)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공식적인 회원 명부도 없습니다. 단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도하고 같이 공부하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교회 등)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자, 여기 몇몇 은사주의자들 특히 성경을 믿는 교회 출신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성경대로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에게 묻는 열두 가지 질문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1: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속죄의 한 부분인 병 고침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도전적인 성격의 질문입니다. 비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채찍에 맞아야겠군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채찍은 분명히 그분의 죽음과 실제 처형 중에 당하신 채찍질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고침을 받도록 채찍을 맞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처럼 고침을 가져왔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체의 치유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것이 성령님께서 육체적인 치료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가 여기 있습니다.
1. 성경 전체에서 ‘고침’(healing)이란 단어는 여러 종류의 고침을 나타내는 데 쓰였습니다. 이 말은 주로 육체적인 치유를 나타내었지만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 데도 쓰였고(눅4:18) 마귀의 억압을 제거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으며(행10:38) 또 죄악된 행실을 버리거나(히12:13)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할 때에도 ‘고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런 의미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벧전2:24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잘 아시는 ‘stick’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의 뜻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빗자루, 성냥개비 혹은 접착제 같은 단어가 함께 나온다면 아마 이 단어의 뜻을 문맥을 통해 미루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고침’이라는 단어의 뜻도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벧전2:24 전체 내용이나 또 전후의 문맥에 육체적인 치료를 연상하게 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죄가 여러 번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고침이 영적인 치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체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독자 여러분)는 죄를 짓지 않으신(2:22-23)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2:21). 이러한 높은 수준의 행실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죄들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24). 우리는 습관적인 죄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더 이상 잃어버린(구원받지 못한) 양처럼 방황하지 않고 우리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2:25).
이처럼 여기서의 ‘고침’(healing)은 영적인 치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의 고침을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로 본다면 글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3. 베드로전서 2장 24절의 마지막 구 즉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와 25절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명한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6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범법과 불법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 관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죄의 치유는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이사야서 1장). 대언자 이사야가 다룬 환자인 이스라엘 민족은 죄 많고 불법에 싸여 있으며 주님께서 버리신 악인들로 가득합니다(1:4). 하나님은 이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사1:5-6).
이 환자의 병세가 신체의 부위별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절은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의사, 그것도 영적인 의사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주님을 꾸짖자 주님은 자신이 왕진을 나온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진을 나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입니다(마9:10-30). 정확한 때에 위대한 의사께서 영적인 치료의 일을 마치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오르시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즉, 손수 내리신 처방에 필요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누구나 죄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9-05-13 15:14:19 | 관리자
제24장 교회분별
저는 지금부터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교회를 네 종류의 교회로 분류하여 여러분의 교회 분별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네 종류의 교회 중 한 종류 교회만이 참 교회 곧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 세상에는 세속주의적 교회들이 있습니다. 세속주의적 교회는 말이 교회이지 실상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격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됨과 무오류성을 부정하고,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 정도로 여기며, 유대인 도덕 교과서 정도로 여깁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기적도 부정합니다. 이들은 소위 고등비평주의, 과학주의, 인문주의를 생명처럼 여기는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해방주의 신학 등 사신 신학, 사회 복음주의 신학 등을 내세우며 결국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서슴없이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곧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 예수님의 부활, 승천, 재림,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정합니다. 이들 속의 어떤 집단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인격자, 성인, 마리아의 아들 정도로만 여깁니다. 이들은 세상과 동화되어 세상을 흉내내고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과 짝하려고 합니다. 곧 음주, 흡연, 세속 노래, 세속 오락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며, 조상 제사도 인정하고, 불신자와의 결혼도 인정합니다. 심지어 동성에까지 인정합니다.
이들은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그럴 듯한 미명을 앞세우며 종교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세계 종교의 통일과 세계 종교의 단일화 운동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동일성이라는 주장은 교회와 타종교 곧 우상 종교들과 동일하다는 뜻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회를 우상 종교와 동일 선상에 두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실수나 오류 정도로 해석하여 죄의 심각성과 치명상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 천국, 지옥, 영생을 부정하고 구원이라면 정치, 사회, 경제, 계급적 구원을 주장합니다. 또 이들은 진화론을 인정하며, 겉으로는 유신론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형주의와 물량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건한 예배의 중요성을 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신 배우, 탤런트, 유행가 가수, 경건치 못한 복음가수, 정치인 등을 초청하여 바람잡이식 선동으로 교회 성장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타종교 곧 우상종교 의식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의식의 일부로 사용하고 이를 권장합니다.
둘째, 율법주의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현대판 구약식 교회 곧 현대판 유대교식 교회로서 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신약 성경을 중심에 두지 않고 율법이 중심이 되어 율법을 율법식으로 해석하여 오늘에 적용합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심지어 유대인들처럼 토요일에 모여 예배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신앙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주장하면서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만 구약 시대 때 적용되었던 음식 가리는 것을 큰 계율로 알고 철저히 지키며, 상대적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의식주의 ,율법 준수를 통한 행의 구원을 주장하며 믿음을 통한 은혜구원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의식준수, 율법 준수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목사를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격상하며, 목사만이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으며, 강대상에는 목사만이 등단할 수 있고, 아무나 강대상으로 올라가면 저주받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으며, 의식주의와 형식주의·위선주의가 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죄권까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그렇게 실행하기도 합니다.
셋째, 신비주의적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 아닌 교회는 현대 교회에서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신비주의적 운동은 성경 진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신비성>을 흉내내면서 그 실체를 위장하여 전염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교회들보다 분별하기 어렵고, 그 정체를 알았다 할지라도 <신비주의>에 약한 인간의 심성은 그 사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어가는 매우 두려운 대상인 것입니다.
신비주의적 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기도하거나 느낀 대로 자신의 마음이나 육신에 체험된 현상 그대로 해석하고 믿어버립니다. 이들은 신 규약 성경 시대에 있었던 일이 성경이 완성된 이후 곧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그런 것들을 바라며 추구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이들은 주로 초자연적 현상을 추구하는데, 입신이나 환상·환청·꿈·방언·예언·신유·안찰·안수·투시·영서 등 직통 계시를 특히 강조합니다. 이들 집단에서는 점쟁이 식의 활동이 매우 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집단 최면, 자기 최면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성경의 객관적 진리보다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중시하여 감정에 의존한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신비 체험을 중시하고, 이것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 이들은 영혼과 마음의 축복보다는 육적 건강, 재물 축복, 사업 성공, 자녀 잘됨, 육신 출세, 무사고, 부귀 영화를 유별나게 강조하며 특히 부자되고 병고침 받는 것을 더욱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집단에 와야만 이런 것을 모두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비성경적 축복관을 가지고 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비주의적 교회 형태 집단에서는 금욕주의적 요소가 매우 진하여 독신주의 권장, 부부 분방 권장, 금식 기도, 연속 철야 기도 등을 극심하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성경 공부가 없습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이 텅텅 비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천국과 지옥을 갔다왔다고 주장하고, 천사와 귀신을 보았다고 하기도 하며, 천사를 만나 함께 대화도 하고 여행도 다녔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어진 신앙 양심이나 이성 곧 생각기능이나 지각을 사용하지 않고 즉흥적 감정이나 기분에 의한 생각이나 자신이 신비 체험을 통해 경험한 것을 성경의 검증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대로 확신하고 그 체험에 따라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최상의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외 다른 바른 교회들을 오히려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비성경적 성령론을 신봉하여 은사 운동이나 성령 운동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오히려 악령 운동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이나 경건한 성도의 생활보다는 표적이나 이적 기사에 영혼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를 서슴치 않습니다. 이들은 일인 혹은 소수 그들 집단의 지도자들을 카리스마화 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이들의 성경 해석 방법은 주먹구구식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이나 신조를 먼저 만들어 놓고 , 그것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성경 구절이 있으면 여러 정황을 보아 그렇게 적용해서는 안되는데도 강하게 강조하고 또 적용해서는 전후 좌우가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적용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을 매 구절마다 연결지어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요행수를 많이 바라기도 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영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들은 열광적인 분위기에 의해 자신들이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분위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들에게 맞는 것들만 좋아합니다. 성경을 비정상적으로 해석 인용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비윤리적인 말들 즉 반말이나 욕같은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직통 계시를 유도 주장합니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감정 흥분과 그 충동을 자극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을 가능한 대로 총동원합니다. 또 이들은 가정을 등한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의 신앙 생활은 기독교식이라기 보다 이교도적인 요소가 더 진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다가 기도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고 그렇게 말합니다.
넷째, 복음 경전주의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인 교회요 온전한 교회요 바른 교회요 참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성경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성경 이외에는 다른 계시가 없음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자신의 주관적 체험이 아닌, 성경에 의해서 해석하고 적용하며 이를 순종하려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수하고, 성경 연구와 성경에 의한 훈련을 통한 성경 중심주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그 분의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재림하실 것을 성경대로 믿고 준비합니다. 이들은 성령님의 인격과 성령님께서 성령의 검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말씀 안에서 활동하심을 믿고, 말씀을 통한 성령님과의 교제를 신봉하고, 성령님의 성도 안에서의 내주를 믿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회개, 죄 사함, 영혼 구원을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이들은 육신의 잘 됨보다 영혼의 축복을 강조하고, 영혼의 축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들은 행위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또 술, 담배, 세속 노래, 세속 영화와 연극 등 세속적 오락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일체의 비성경적이고 교권주의적인 요소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성도의 경건한 생활 즉 검소한 생활, 정직한 생활, 성결한 생활, 책임 있는 생활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정을 중시하고 가정에서의 청지기 생활에 충성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전도와 선교를 지상 목표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근로 정신과 노동의 신성함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 불간섭을 중요한 행동 지침 중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난에 대해 인내를 강조하며, 박해에 대한 무력적 항거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믿음 생활 속에서 덕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성도간의 교제를 강조하며, 복음 안에서의 사랑을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권면과 징계, 용서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국교화와 교회의 계급화를 반대합니다. 이들은 종교 단일 운동을 절대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들은 복음 안에서 온 성도의 지체됨과 제자직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질적인 면을 중시하지 결코 양적인 면을 치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의 예배를 중시하고,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복음적인 일체의 신비주의, 세속주의,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2009-05-13 15:10:50 | 관리자
내 몸을 쳐야 하는가?
고대로부터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몸을 혹사시키거나 참기 어려운 고행을 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집트의 이시스, 로마의 키벨레, 그리고 에베소의 다이아나같이 피에 굶주린 여신들을 위해 사람들이 피의 제전을 열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천주교회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자기 몸을 극도로 상하게 한 사람들이 많았고 루터 같은 경우도 이런 일을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영적으로 높은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고행이 필요하다는 이교도들의 교리를 지지한다.
개역: 내가 내 몸을 쳐(I beat my body)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한국 성도들에게 보상 심리를 허용하면서 많은 은혜를 끼친 이 구절은 실제로 나를 때리라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는 ‘치다’(beat)라는 뜻을 갖는 그리스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후포피아조’(hupopiazo)이며 실제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흠정역: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바울 사도는 육체의 정욕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자기를 치는 행위’ 즉 자학 행위는 특히 왕상18:28에서 잘 드러나는데 거기서 바알의 대언자들은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성경의 개념이 아니다.
흠정역: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3).
2009-05-13 15:02:25 | 관리자
거세해야 하는가?
자기 학대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이제는 신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거세(去勢)를 행하려 하며 개역성경은 이것을 지지하고 있다.
개역: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5:12)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지방의 신자들을 유혹하던 거짓 대언자들이 그곳의 신자들과 교제하는 것에서 끊어지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흠정역: 나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아예 잘려 나가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에서 분명히 바울 사도는 그곳 성도들이 아니라 ‘그들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잘려 나가기를 즉 교제에서 단절되기를 원하였다. 누군가가 자기 몸을 자해하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뉴에이지와 고대 신비주의 관습이다.
개역성경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번역한 부분을 NIV와 NASB 등은 ‘emasculate’(거세하다)와 ‘mutilate’(신체를 절단하다)라고 번역하여 그 의미가 거세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결국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서 나온 현대 역본들은 고행을 통한 구원이라는 자기들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이런 두려운 일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거세 풍습은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의 기독교와 무관하며 신비 종교들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하고도 무서운 관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적인 가르침들로 인해 현대 역본들의 기반이 된 ‘부패된 그리스어 신약 사본’을 편집한 장본인인 오리겐은 스스로 자기의 몸을 잘라 내는 거세를 행했다.
2009-05-13 15:00:53 | 관리자
‘없음’이 없는 성경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을 읽다가 신약의 13 구절에 ‘없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전체 절이 삭제된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한 성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구절들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왜 절 수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사실은 성경을 믿지 못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뜻과 맞지 않으므로 이런 구절을 다 삭제한 것이며 루터, 칼빈, 무디 등이 사용한 성경의 대본이 된 99%의 「다수 사본」들이 이런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고 단지 천주교에서 후원하는 1%의 「소수 사본」에만 이런 구절들이 삭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단 하나의 성경’ 즉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보존하셨으며 이 성경은 단 한 번의 변화도 없이 꿋꿋이 역사 속에서 그 위용을 떨치며 수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반면에 사탄은 예로부터 ‘수많은 성경들’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속여 왔다. 세계 동향을 주시할 때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이제 과연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성경 보존 문제에 관한 오랜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을 보존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009-05-13 14:59:05 | 관리자
믿음인가, 행위인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일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개역성경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못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개역: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4:6)
개역성경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근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신다.
흠정역: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반드시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줄을 알거니와 먼저 복음 선포를 받은 그들은 믿지 아니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의 문제로 보시지 행위의 문제로 보시지 않는다. 바른 믿음이 있으면 바른 행위가 나온다. 이런 예는 로마서 11장 32절, 로마서 15장 31절, 히브리서 3장 18절, 히브리서 4장 11절 등에서 반복되고 있다.
개역성경의 행위 신학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개역: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요3:36)
흠정역: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다 보디 개역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흠정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롬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였는가?
하나님의 선물 즉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인가, 값을 치르고 받는 것인가?
흠정역: 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the free gift)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the gift)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거저’ 주신다고 기록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은 NIV 등과 마찬가지로 ‘거저’(free)라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삭제했다(롬5:16; 5:18에서도 마찬가지임). 이 단어가 이 구절의 핵심이 아닌가?
개역성경은 조상들의 은덕으로 자손들이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개역: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니니라(출20:6 참조)
흠정역: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수천 세대라는 것은 원문에도 없고 알렉산드리아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첨가한 것이다. 앞 뒤 문맥과 성경의 구원 및 은혜관이 무엇을 지지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2009-05-13 14:57:15 | 관리자
영존하는 지옥 형벌
어떤 이들은 지옥의 불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진짜 불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뜨겁게 느끼는 그런 불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불 즉 상징적인 불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자신의 창조물을 진짜 불 속에 영원토록 던져 넣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eternal’이다. 이 말은 원래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을 나타낼 때 혹은 천상의 것의 우수함이나 고매함 등을 지상의 것과 비교할 때 즉 질적 비교를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개역: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eternal fire)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반면에 영어에서 양을 강조하면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을 나타낼 때는 ‘영존하는’이란 의미의 ‘everlasting’을 사용한다.
흠정역: 그러므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들을 찍어 네게서 내버리라. 네가 절뚝거리거나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존하는 불(everlasting fire)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라.
이렇게 ‘영존하다’(everlasting)를 사용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안식교인들의 ‘영혼 멸절설’ 같은 이단 교리가 발붙일 수 없다. 영원토록 계속해서 불 속에서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영혼이 멸절될 수 있는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질적으로 우수한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기도 하며 동시에 양적으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영존하는 생명’(everlasting life)이기도 한다. 즉 질적으로 양적으로 영원무궁한 생명인 것이다.
흠정역: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everlasting life)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5-16).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치밀하게 자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전달하고 있으며 그래서 믿는 자들의 최종 권위가 된다.
2009-05-13 14:54:54 | 관리자
지옥인가, 음부인가?
마귀는 지옥을 숨기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음부에 갑니다.” 혹은 “스올에 갑니다.”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는가?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죽어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과 지옥으로 갔으며(눅16:19-31) - 이 구절의 음부도 음부가 아니고 지옥임 -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낙원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 즉 천국으로 옮겨졌으나(엡4:8-10; 고후5:8; 12:2-4; 히11:40) 지옥은 여전히 지옥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죽은 사람은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지옥은 성경에 54회 나오는데 개역성경은 이 중에 구약에 나오는 31번의 지옥을 모두 스올로 번역했고 신약에서도 13번만 지옥으로 번역하고 나머지는 음부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스올 혹은 음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말 큰 사전은 음부는 저승인데 저승은 ‘죽은 혼령이 가서 사는 세상으로 구천, 유명’이라고 말한다. 즉 개역성경은 번역자들의 샤머니즘으로 인해 불교 용어와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개역: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잠15:11)
개역: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잠27:20)
이런 이교도 사상이 개역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교리와 신학에 참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흠정역성경은 정확하게 ‘지옥과 멸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지옥의 본질을 성경에서 제거해 버렸다.
개역: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5)
흠정역: 만일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절뚝거리며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지옥은 결코 불이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흠정역: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4, 46, 48).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44, 46, 48절에서 연거푸 이 사실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44, 46절은 생략했다. 단 한 번만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강조하실 때는 늘 반복을 하셨다.
흠정역: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구원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우리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셨다. 마찬가지로 지옥에 빠지는 것 역시 치명적이므로 그분께서는 연거푸 세 번이나 지옥의 실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거기에 가지 말 것을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44, 46절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참고로 영어의 지옥 즉 ‘hell’은 ‘감추다’ 또는 ‘덮다’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1차적으로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지하 세계’를 뜻하고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 지하 세계에서 악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곳’을 뜻한다.
hell: The abode of the dead; the place of departed spirits; the infernal regions or lower world regarded as a place of existence after death(옥스퍼드영어사전)
그러므로 한자의 ‘지옥’(地獄) 즉 ‘땅의 감옥’이란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말 성경에 아주 근사한 용어를 허락해 주셨다. 지옥이 땅의 중심부에 있음을 성경이 말하지만 현대판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이것을 믿지 않는다.
흠정역: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39-40).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중심부에 가셔서 고난을 당하셨다.
흠정역: (다윗이)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더니(행2:31)
그러나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지옥을 음부라고 하여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음은 우리나라 성도들이 자주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들어 있다. 한영 성경이나 한영 찬송가의 표지 안에 들어 있는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H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원래 사도신경에는 “그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구절이 있으나 번역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하였다. 우리는 결코 주문 외우듯이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으며 사실 신조 자체를 외울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천주교나 불교처럼 기록된 말씀 이외의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지옥에 대해 바른 개념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 주기 위해 사도신경을 예로 들어 설명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믿지 않은 악인들이 영원토록 살 곳은 성경에서 불 호수라 하는 곳 즉 불로 가득한 호수이며 이곳의 위치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계19:20; 20:14).
2009-05-13 14:52:55 | 관리자
공동번역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카톨릭 교회의 연합 작품인 공동번역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것은 사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종교일치 운동(Ecumenism)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1962년에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니다(E. A. Nida)와 브래드녹(W. J. Bradnock)이 한국을 방문해서 새로운 번역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형식적 일치’보다는 ‘동적 일치’ 번역을 해야 하다고 주장했으며 공동번역 위원회는 이런 원칙을 수용했다. 공동번역의 구약은 1937년도에 발행된 키텔의 Biblia Hebraica에서 번역되었으며 신약은 연합성서공회가 1966년에 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1판에서 번역되었다. 이렇게 출간된 공동번역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가 연합해서 만든 성경 중 두 번째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의역 성경(Paraphrased Bible)이며 프로테스탄트 판과 카톨릭 판이 출간되었는데 카톨릭 판에는 외경도 정경으로 들어가 있다.
2009-05-13 14:50:21 | 관리자
표준새번역
개역성경이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는 동안 대한성서공회는 새로운 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번역의 필요를 느꼈다. 또 동시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번역이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힘으로 거의 이루어진 개역성경을 대체시켜야겠다는 생각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한성서공회는 외국에서 공부한 국내 학자들이 이런 작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1983년에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표준새번역이라는 새 역본을 발간하였다. 표준새번역은 연합성서공회가 1983년에 발행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3판과 키텔(R. Kittel)이 수정한 ‘히브리어 구약성경’(Biblia Hebraica)과 거의 유사한 ‘슈투트가르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1967/1977, BHS)를 번역의 원전으로 삼아 만들어졌다. 표준새번역 역시 개역성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그리스어 본문과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했으므로 문체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05-13 14:49:02 | 관리자
우리말 성경 분석
우리말 성경의 역사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언더우드(H. R.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첫 선교사들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된 로스(John Ross)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어 성경을 들고 1874년과 1876년에 한중 국경 지대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 지 11년 뒤인 1887년에 신약성경을 우리말로 출간하였다. 로스가 스코틀랜드에 보낸 선교 보고에 따르면 우리말 성경 번역을 위해 그가 사용한 본문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서 나온 영국의 영어개역성경(ERV)과 중국어 성경이었다. 그는 또한 번역을 위해 형식적, 문자적 일치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뜻만 통하면 된다는 동적 일치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 사실은 그가 1877년에 만주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출간하기 위해 발간한 「조선어 문법」(Corean Primer)이라는 소책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한국인 번역자가 중국의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다.
(2) 그 원고를 그리스어 신약성경 및 영어성경과 대조해서 수정한다.
(3) 그리스어 성구사전과 주석을 참조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다.
(4) 문자 그대로의 축자적 번역보다는 의미에 유의하고 조선어의 관용구를 그대로 살린다.
한편 1882년에 이수정은 일본에서 역시 중국어 성경을 사용하여 신약성경의 일부를 번역하였으며 한국 프로테스탄트교의 첫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인천에 상륙하면서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개역성경
국내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온 지 8년 뒤인 1893년에 미국성경협회의 지원을 받아 주로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로 구성된 성경실행위원회와 성경번역자회가 설립되었고 이 두 기구의 주도 하에 1906년에 구약성경이 출간되었으며 신구약을 다 담고 있는 한국어 성경(구역)은 1911년 3월에 신구약 3권으로 출간되었다. 두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국의 교계 지도자들이 함께 번역한 이 성경은 최초의 공식적인 한글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구역 성경 역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수정 그리스어 본문에 근거한 네슬레의 25판과 영국의 영국개역성경(ERV)과 미국의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Bible, ASV)을 본문으로 채택하였다.
구역 성경의 구약은 영어개역성경의 미국 판인 미국표준역을 가장 중요한 원전 중 하나로 사용하였으며 특별히 미국표준역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어 사자음 문자 ‘YHWH’를 ‘주’(LORD)로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여 ‘여호와’로 표기했다. 사실 미국표준역과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신세계역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성경은 이 신성한 ‘사자음 문자’를 ‘주’ 즉 ‘LORD’로 번역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한편 1938년에는 구역 성경을 개정한 성경 개역판이 출간되었다. 케이블(E. M. Cable), 스토크스(M. B. Stokes) 등의 미국 사람들과 남궁혁, 김인준 등의 한국 사람들이 개정에 참가하였으나 이번에도 여전히 오리겐의 70인역, 네슬레 25판, 영국개역성경, 미국표준역 등을 중심으로 개정이 이루어졌고 필요한 경우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 등도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이 성경은 철자 수정과 얼마간의 본문 수정을 거쳐 1961년도에 ‘성경전서 한글개역판’으로 고정되었고 바로 이 성경이 우리나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장 많이 애독하고 애용하며 대부분의 성도들이 단 하나의 오류도 없다고 믿고 있는 개역성경인 것이다.
간단하게 개역성경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개역성경이 중국어 성경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영향을 받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통 그리스어 공인본문’이 아닌 ‘수정 그리스어 본문’ 혹은 ‘비평본문’(Critical text)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서 파생된 영국개역성경과 미국표준역을 번역의 대본으로 삼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나채운은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 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영국개역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밝힌다.
개역성경은 문장이 간결하고 우아하고 웅장하여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마치 영어권의 킹제임스 성경 같이 한국의 독보적인 성경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는 달리 개역성경 문장의 간결성 등은 본문의 정확성을 무시하고 한자 숙어나 한국어 용례 등을 사용하고 많은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자체에 한계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본문 선택과 번역자들의 사상에 기초한 용어 선택을 살펴보면 개역성경이 기독교 교리와 신학 및 믿음의 실행 등에 큰 폐해를 끼쳤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개역성경은 보통 사람들의 감정과 문화를 잘 반영하였으며 아름다운 문체와 운율 등을 통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회심하고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으므로 이 성경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자취는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2009-05-13 14:47:28 | 관리자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인가?
마태복음 1장에는 우리 주 예수님이 마리아의 맏아들임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흠정역: (요셉이) 그녀(마리아)가 그녀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다가 낳으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5).
성령님께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여 평생 동정녀라 부를 자들이 생길 것을 미리 아시고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그녀의 ‘맏아들’(firstborn son)이라고 분명히 기록해 놓았다. 잘 알다시피 마리아는 예수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다 그분의 사촌이라고 주장하며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 평생토록 동정녀로 지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맏아들’의 ‘맏’을 삭제해 버렸다.
개역: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2009-05-13 14:45:20 | 관리자
복음의 핵심 부인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개역성경처럼 그냥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인가?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이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죄인들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
흠정역: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회개’이다. 이것이 빠지면 예수님의 메시지가 아무 효력도 갖지 못한다.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개역성경은 자꾸 삭제한다.
개역: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9:55-56).
흠정역: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니라.
2009-05-13 14:43:38 | 관리자
하늘들인가, 하늘인가?
우리말에서는 하늘의 복수형인 ‘하늘들’ 같은 표현을 잘 쓰지 않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복수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개역: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2:1)
흠정역: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개역성경은 참으로 간결해 보이지만 많은 면에서 내용은 부실하다. 이런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임을 보여 주시기 위해 복수를 쓰셨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을 보면 성경에는 최소한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있으며 다른 영어 역본들도 이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흠정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노니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런 신학을 무시한 채 대부분의 중요 복수 단어를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많은 경우 개역성경의 간결성은 성경의 정확성을 희생하면서 얻은 결과이다. 성경이 이처럼 부실하니 그 부실한 기초 위에서 부실한 기독교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09-05-13 14:41:41 | 관리자
순교하고 약속도 받지 못하는가?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믿음의 전당에 들어간 사람들은 순교하고 아무 약속도 받지 못하였는가?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11:13)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이 순교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 약속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여기서도 개역성경은 오역을 했다(히11:39 참조).
흠정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받아들였고…
2009-05-13 14:38:15 | 관리자
십일조를 삼 일만에 바치는가?
개역성경은 NASB 등과 같이 십일조를 삼 일만에 바치라고 요구한다.
개역: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암4:4)
과연 성경에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가? 신명기 14장 28절과 26장 12절 등은 분명히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있다고 말한다.
흠정역: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신14:28)
그러므로 아모스 4장 4절은 킹제임스 성경처럼 되어야 한다.
흠정역: 벧엘에 가서 죄를 짓고 길갈에서 범죄를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2009-05-13 14:36:39 | 관리자
정반대를 기록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대적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인해 눌림을 당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개역성경은 다른 현대 역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들을 누른다고 기록한다. 앞뒤 문맥을 보면 너무 이해하기 쉬운 일 아닌가?
흠정역: 12 그러나 너희가 나사르 사람들에게 포도즙을 주어 마시게 하고 대언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대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눌림같이 내가 너희 밑에서 눌렸나니 14 그러므로 빠른 자도 도주하지 못하고 강한 자도 자기 힘을 강하게 하지 못하며 힘센 자도 자신을 건지지 못하고(암2:12-14)
개역: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암2:13)
아무 뜻도 없는 번역
개역: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암5:20)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사람이 있는가? 뜻을 모르고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흠정역: 주의 날은 어둠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빛이 아니니라. 심지어 너무 어두우므로 그 날에는 밝음이 없지 아니하겠느냐?
다음은 신약성경에서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구절 중 하나이다.
개역: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1:3)
여기서 ‘신기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divine’이며 이는 ‘하나님의 신성을 띠다’를 뜻한다. ‘영광과 덕으로써’는 어떤 수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을 뜻한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다.
흠정역: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2009-05-13 14:35:04 | 관리자
아멘을 무시함
아멘이란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기도한 뒤 ‘아멘’ 한다. 성경에는 아멘이 총 78회 나오는데 개역성경은 이 중에서 20회 이상을 삭제하고 50여 회만 적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멘이 아니란 말인가?
흠정역: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계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흠정역: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요일5:21).
개역: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2009-05-13 14:32:56 | 관리자
여인들을 무시함
성경은 남녀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평등함을 보여 준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NIV 같은 현대 역본들과 마찬가지로 여인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워 준다.
개역: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딤전5:16)
흠정역: 만일 어떤 믿는 남자나 여자에게 과부들이 있거든 그들이 그들을 구제하게 하고 교회에게 짐을 지우지 말라. 이것은 교회가 참 과부인 자들을 구제하게 하려 함이라.
또한 현대 역본들은 한결같이 여인들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우고 남자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려 한다.
개역: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4:4)
흠정역: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아버지 없는 아이와 고아
하나님은 인자하시며 긍휼이 풍성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특별히 명령하셨다.
개역: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22:22)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구절에서도 번역을 잘못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고아’를 가리켜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로 정의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아이만이 고아인 것이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없는 아이에게만 긍휼을 베풀라고 하신 것처럼 기록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이와 다르다.
흠정역: 너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고아’와 ‘아버지 없는 아이’는 완전히 다르며 이것을 통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이 개역성경에 드러난 긍휼보다 더 큼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킹제임스 성경은 부모가 아니라 아버지만 없어도 긍휼의 손길을 베풀라고 하므로 약자를 더 많이 위로하는 성경이다. 이렇게 ‘아버지 없는 자’를 ‘고아’로 표현된 구절은 자그마치 50 여 군데나 된다.
이 모든 부패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서 나왔으므로 NIV나 NASB 그리고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 같은 현대 역본도 내용이 동일하다.
2009-05-13 14:31:2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