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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장 19절: 신성모독을 비방 혹은 훼방으로 바꿈    신성 모독을 “비방” 혹은 훼방으로 바꾸는 것이 왜 심각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NIV, 개역성경 등의 현대 역본들은, 성경에서 가장 무겁게 다뤄지는 죄 중 하나인 **“신성 모독(blasphemy)”**을 단순한 “비방(slander)” 혹은 **“모욕(insult)”**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번역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성 모독”은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중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엄청난 죄이기 때문입니다. 1. “비방”(훼방)과 “신성 모독”은 완전히 다르다 **비방(slander)**은 사람을 향한 악의적 언어나 모욕입니다. 예: “그는 나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신성 모독(blasphemy)**은 하나님에 대한 조롱,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과 행동, 또는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서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침범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신성 모독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2. 현대 역본들은 왜 “신성 모독”을 삭제하거나 바꾸는가? 현대 역본, 특히 NIV와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신성 모독”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비방” 혹은 “욕”**으로 변개하고 있습니다: 구절KJVNIV / 개역성경 마 15:19blasphemies (신성 모독)slander (비방) 막 7:22blasphemy (신성 모독)slander (비방) 골 3:8blasphemy (신성 모독)slander (비방) 딤후 3:2blasphemers (신성 모독하는 자들)abusive (학대하는 자들) 딛 2:5that the word of God be not blasphemedthat the word of God be not maligned (비방 받지 않게) 계 2:9I know the blasphemyI know the slander 이 외에도 총 58회 등장하는 “blasphemy”라는 단어가 NIV에는 39회로 줄어들며, 나머지는 모두 비방(훼방), 욕, 모욕, 중상, 험담 등으로 바뀌어 본래 의미를 약화시킵니다. 3. 왜 “신성 모독”이라는 단어가 중요할까? 성경은 신성 모독을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막 3:29)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 (레 24:16)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며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 16:9) 이처럼 신성 모독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도 묘사되며,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외하라는 명령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은 이를 단순한 인간관계의 말싸움처럼 축소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무너뜨리고, 죄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4. 왜 KJV는 신성 모독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가? 킹제임스 성경(KJV)은 ‘blasphemy’라는 단어를 모든 구절에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그 죄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행임을 명백히 합니다. KJV는 신성 모독을 죄로 여기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NIV는 그에 반해, 신성 모독이라는 죄의 개념을 사람들 눈에 사라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를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루는 방향으로 번역해 갑니다. 결론: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자는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는다   현대 역본들이 “신성 모독”을 애매한 “비방”으로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고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들은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 (약 2:7)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딛 2:5)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믿음, 그분의 속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번역, 이 모든 것을 보존하고 있는 성경은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2025-05-19 21:07:01 | 관리자
디모데후서 3장 17절: NIV는 완전함을 제거한다. 왜 현대 성경들은 성도들의 "완전함"을 가로막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특히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성경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성경은 교리와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perfect)”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읽는 현대 역본, 예를 들어 NIV, 공동번역, 가톨릭 성경 등은 **“perfect”(완전하게)**라는 단어를 삭제하거나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막는 성경? 킹제임스 성경(KJV)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디모데후서 3: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NIV와 공동번역은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도록” (단, “perfect”라는 핵심 단어는 생략됨) 즉,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성경의 의도가, 현대 역본들에서는 삭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왜 "perfect"는 중요한가? 그리스어 원문에서 "perfect"로 번역된 단어는 **“ἄρτιος (artios)”**로, ‘완전하게, 온전하게, 충분하게 갖추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기술적 능력만 갖춘 상태가 아니라, 영적 성숙, 도덕적 온전함,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자로 자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대 역본들은 이 단어를 일부러 생략하거나, 단순히 “준비됨”이나 “훈련됨” 정도로 약화시켜버립니다. 이것은 신약 전체가 강조하는 **“완전함을 향한 성도의 성장”**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3.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명령한다 성경은 명백히, 성도들이 “완전하게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마 5:48)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엡 4:13)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제시하고자 하노라.” (골 1:28) 이처럼, “완전함(perfection)”은 단지 이상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실제 목표입니다. 성경의 목적은 단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4. 왜 현대 역본들은 “완전함”을 싫어하는가?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네슬레/알란트 사본들, 그리고 그것을 따른 NIV·공동번역·가톨릭 성경은 성도들의 **성화(聖化)**와 **성숙(成熟)**이라는 교리를 점점 모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완전함”이 요구되면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말씀을 통한 꾸짖음과 순종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복음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흐름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성숙보다는 심리적 안정, 순종보다는 자존감, 거룩함보다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결론: “완전함”이 제거된 성경은 불완전한 성경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목표를 축소하고 삭제함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7, KJV)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은, 온전한 말씀을 통해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KJV)**이야말로 온전한 본문을 보존하고 있다는 확증이 됩니다.
2025-05-19 21:00:47 | 관리자
고린도후서 1장 12절: 자랑이 아니라 기쁨이다.   우리는 “자랑”이 아니라 “기쁨”과 “온유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 성경은 절대 ‘자랑(교만) 복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사람의 내면을 고양시키는 듯 보이지만, 결국 교만을 미화하고 조장하는 번역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등에 나오는 “rejoicing”(기쁨), “glorying”(영광을 돌림) 같은 말들을 **“pride”(자랑, 자랑)**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태도”를 인간 중심의 자기 자랑으로 왜곡합니다. 1. 성경은 자랑(교만)을 칭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pride”는 결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교만한 태도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약 4:6, 벧전 5:5)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딤전 3:6)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지 아니하고 세상으로부터 나기 때문이라.” (요일 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본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라고 격려하는 듯한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겸손에서 사람 중심의 자기 고양으로 복음의 방향을 전환시킵니다. 2. 현대 역본들은 어떻게 번역을 왜곡하는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고후 1:12 KJV: “우리의 기쁨(rejoicing)은 이것이니…” NIV: “우리의 자랑(boast)은 이것이니…” 갈 6:4 KJV: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기쁨을 가질 것이요…” NIV: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pride)을 가질 수 있다.” 약 1:9-10 KJV: “낮은 자는 기뻐할지니… 부자는 낮아진 것을 기뻐할지니…” NIV: “형제는 자신에 대해 자랑을 가져야 하며… 부자는 자신이 낮아진 것을 자랑해야 한다.” ☞ ※ 주: "should take pride"는 어떤 그리스어 사본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 따르면 여기 사용된 단어들은 kauchaomai (자랑하다), kauchema (기쁨), glory (영광을 돌리다)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pride” 혹은 “자랑”**을 뜻하는 huperephanos나 alazon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를 조작하여 인본주의적 자기 긍정 신학으로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뉴에이지와 “자기 사랑 복음”의 연결 NIV는 “pride”라는 단어를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수용(self-acceptance), 자아 사랑(self-love), 자랑(self-pride)”을 영적 덕목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D. 헌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성경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자기 수용, 자아 사랑, 자기 신뢰, 자랑, 혹은 자기와 관련된 것들을 추구하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랑 혹은 자기 사랑 복음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유명한 목회자들에 의해 많이 선포되고 있다.” 오늘날 널리 퍼진 **자기 사랑 복음(Self-Love Gospel)**은 결국 회개와 십자가 없는, 자기 위로와 자기 치유에만 머무는 복음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명하십니다(눅 9:23). 4. “온유”가 사라지는 성경, 어떤 결과를 낳는가? KJV는 “온유”(meek, meekness)를 31번 사용하고 있지만, NIV는 고작 4번만 등장시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미덕 대신, 자신을 높이라는 메시지로 가득 찬 성경은 결국 교만한 세대, 자기 중심의 신앙, 순종보다는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교회를 만들어 냅니다. 결론: 우리는 겸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마 11:29)**라 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 역시 자랑이 아니라 겸손과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대 역본들이 만들어 내는 왜곡된 단어 하나하나가 성도들의 신앙 태도를 바꾸고, 교회 전체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붙들기 위해, 정확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믿고, 가르쳐야 합니다.
2025-05-19 20:47:21 | 관리자
잠언 8장 18절: “의”를 “번영”으로 바꾼 NIV –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성경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킹제임스 성경(KJV)과 달리 “의(righteousness)”라는 단어를 점점 덜 사용하고, 대신 “번영(prosperity)”이나 “좋은 것(good things)” 같은 표현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언어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며 탐욕과 세속적 물질주의를 영적인 가치로 위장하는 위험한 방향이다. 1. 잠언 8:18 – “의”가 “번영”으로 바뀐 구절 KJV: “Riches and righteousness are with me” (재물과 의가 나와 함께하느니라.) NIV: “With me are wealth and prosperity” (재물과 번영이 나와 함께 있다.) 여기서 **righteousness(의)**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지혜가 동반하는 도덕적 정직함이다. 하지만 NIV는 이를 **“번영”**으로 바꿔버려, 마치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가장 귀한 유익이 부요와 성공인 것처럼 읽히게 한다. 2. 잠언 21:21 – “의”를 “번영”으로 대체 KJV: “He that followeth after righteousness and mercy findeth life, righteousness, and honour.” (의를 따르는 자는 생명과 의와 명예를 얻느니라.) NIV: “He who pursues righteousness and love finds life, prosperity, and honour.” (의와 사랑을 따르는 자는 생명과 번영과 명예를 얻는다.) 두 번이나 등장하는 “의”가, NIV에서는 단 한 번 등장하고, 그 자리에 **“번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이로 인해 구절의 중심 개념이 하나님의 성품과 도덕적 순결에서 세상적 성공과 부요로 전환된다. 3. 로마서 9:28 – 의의 삭제 KJV: “…cut it short in righteousness.” (…의 안에서 그것을 단축하시리니) NIV: 해당 부분 삭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공의롭고 의로운 기준에 따라 일을 마치신다는 선언인데, NIV에서는 아예 “의(righteousness)”라는 말 자체가 삭제되었다. 이처럼 “의”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모호해지고 인간 중심의 해석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4. “의”와 “번영”은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의로운 자가 항상 세상적으로 번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악인이 잘되고 번성할 수도 있다. 시편 73편: 악인들이 형통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 시편 기자가 괴로워하며 질문한다. 라오디게아 교회(계3:17):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였다. “번영”은 외적인 형편이고,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복음은 기복주의 신학으로 전락하게 된다. 5. 결론: 왜 “의”를 지켜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은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나니…” (롬 3:22)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이며, 인간의 구원 문제 자체가 희미해지는 심각한 영적 손상이다. 우리는 반드시 올바른 사본, 올바른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 NIV, 개역성경, 공동번역 등 현대 역본들은 여러 구절에서 “의”를 삭제하거나 “번영” 같은 단어로 대체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을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로 오용하게 만드는 위험한 사본들, 즉 천주교 소수사본에서 비롯된 변개된 성경들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하나님의 “의”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도, 삶도, 판단도 “의”로 기준 삼는 말씀 위에 서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며, 그것이 진리이다.
2025-05-19 20:42:20 | 관리자
로마서 12장 17절: 왜 “정직”이라는 말이 사라졌는가?   KJV만이 정직한 성도를 만든다 1. 정직은 성도의 삶에서 핵심이다 성경은 믿는 자가 세상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정직(honesty)은 단지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성화된 삶의 열매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점검하는 필수적인 성품이다. 그런데 현대 역본들(NIV, 개역개정 등)은 ‘정직(honest)’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무려 13회 이상 제거하고, 그 자리에 ‘고상한(noble), 단정한(decent), 선한(good)’ 같은 애매하고 윤리적일 뿐인 말들을 끼워 넣었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명확한 도덕 기준을 흐려버리는 심각한 변개다. 2. “정직”을 제거한 대표적 구절들 (1) 눅 8:15) KJV: 정직하고 선한 마음 NIV/개역: 고상하고 좋은 마음 (2) 행 6:3) KJV: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NIV/개역: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정직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짐) (3) 롬 12:17) KJV: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 NIV: 모든 사람 앞에서 바른 일을 도모하라 (정직함 → 일반적 도덕성) (4) 고후 8:21) KJV: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노라 NIV: 사람 앞에서도 바른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정직 → 추상적 표현) (5) 빌 4:8) KJV: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 NIV: 무엇이든지 고상한 것 (윤리적 가치로 대체) (6) 살전 4:12) KJV: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정직하게 걷게 하려 함이요 NIV: 외인들의 존경심을 얻기 위함이라 (내면의 성품 → 외적 평판으로 바뀜) (7) 딤전 2:2) KJV: 정직한 가운데 평안하고 조용한 삶 NIV/개역: 경건하고 단정한 삶 이 외에도 고후 4:2, 롬 13:13, 히 13:18, 벧전 2:12 등 다수의 구절에서 ‘정직’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그 뜻을 희석시키는 번역이 채택되었다. 3. 왜 이처럼 “정직”이 사라졌는가? 이것은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뉴에이지 사상이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윤리적 상대주의’를 반영한 결과이다. 정직은 절대적 기준이 있는 성품이다. 하지만 “고상함”, “단정함”, “바른 일” 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주관적 표현이다. 더욱이 뉴에이지적 사고 속에는 ‘정직(honesty)’이라는 단어 자체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뉴에이지는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면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정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면,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비추기보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하게 된다. 4. 왜 킹제임스 성경은 정직함을 지켜냈는가? KJV는 “정직(honest)”이라는 단어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도덕적, 영적 기준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우리가 외적인 평판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태도와 내면의 정직함을 지켜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KJV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직함, 곧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의 투명한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5. 결론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자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확실히 그들은 내 백성이요, 거짓을 말하지 아니할 자녀들이라, 하시며 이렇게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이사야 63:8)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의도적으로 “정직”이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도의 기본 성품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한 성도, 정직한 교회, 정직한 말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KJV)**을 붙잡아야 한다.
2025-05-19 20:37:59 | 관리자
주님의 만찬은 아무렇게나 참여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 “합당하지 않게”를 삭제한 NIV는 무엇을 숨기려 하는가? 1. 성경은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를 주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며 자기가 받을 정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라.” (고전 11:29, KJV)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핵심 표현인 **‘합당하지 않게(unworthily)’**를 삭제하였다. 그 결과 구절의 의미가 매우 흐려지고 말았다. NIV는 단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신다”고만 기록하여, 행위의 ‘태도’와 ‘자기 점검’의 중요성을 완전히 희석시켰다. 2. 왜 “합당하지 않게”가 중요한가? KJV는 이 구절을 통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가 먼저 스스로를 살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전 11:28도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살펴보고 그 빵을 먹으며 그 잔을 마실지니…” (고전 11:28, KJV) 이와 같은 구조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회개와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성경적 원칙을 확립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30절에서 경고하는 것처럼 병이 들거나 죽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고전 11:30). 하지만 NIV는 이러한 경고의 맥락을 삭제된 한 단어로 흐려 놓았다. 3. 로마 카톨릭의 미사 교리와의 충돌 로마 카톨릭은 미사를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종교 행위로 가르친다. 그들은 미사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즉: 죄는 고해성사로 해결되고, 미사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은총에 들어가며,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정반대의 질서를 말한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BEFORE) 회개하고 자기를 판단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성찬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증표이며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11:29에서 “합당하지 않게”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천주교 미사 교리처럼 아무 준비 없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자 개인의 영적 상태나 자백, 회개 없이도 성례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를 성경이 뒷받침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4. 사본 증거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합성서공회(UBS)의 주석에 따르면, “ἀναξίως(합당하지 않게)”라는 단어를 포함한 사본이 53개, 이를 삭제한 사본은 14개에 불과하다. 약 4:1의 비율로 다수 사본이 이 단어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Nestle-Aland/바티칸 계열)을 따라 이를 삭제해 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사본 문제는 결국 교리 문제로 이어진다. 삭제된 말씀 한 구절이 전체 신학 체계와 예배 관행을 바꿔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주의 만찬은 아무 준비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믿는 자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회개한 후, 겸손히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감사함으로 참여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합당하지 않게(unworthily)”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신자의 자세, 회개, 경건한 삶을 요구하는 거룩한 기준이다. 이 중요한 단어를 사본에서 삭제하고, 그 결과가 교리를 왜곡시키는 역본(NIV, 개역성경 등)은 결코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이 될 수 없다. 오직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있으며, 이 진리는 사본과 교리의 일치 속에 분명히 드러난다.
2025-05-18 19:24:29 | 관리자
로마서 13장 9절: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 왜 삭제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천주교 사본의 대조를 통해 본 교리의 왜곡 1. 삭제된 여덟 번째 계명 – “거짓 증언하지 말라” 로마서 13장 9절은 십계명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서 이웃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롬 13:9, KJV)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중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이 통째로 빠져 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의도적 삭제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요약하는 십계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2. 왜 이 계명이 문제시되는가? 이 삭제는 그 자체로 “거짓 증언”에 해당한다. 말씀을 의도적으로 변개하고 감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대한 죄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너는 내가 네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며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그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요한계시록 22:19) 즉, 말씀을 삭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속과 영생에서도 삭제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다. 3. 천주교는 왜 이 구절이 불편한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은 천주교 교리와 전통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씀이다. 천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이고 거짓된 교리들을 가르쳐 왔다: 성직자 독신제: 성경은 “베드로가 장모가 있었다”(마8:14)고 기록함으로써 사도들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음. 미사(제사적 성찬):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은 “한 영원한 제사”를 부인하는 것(히10:12). 연옥: 성경 어디에도 “연옥”이라는 개념은 없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히9:27). 종부성사: 죽기 전 의식을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교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대체하는 이단적 주장. 마리아 및 성인 숭배: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로 높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이심을 부정(딤전2:5). 면죄부, 고해성사, 유아세례, 행위로 받는 구원 등: 이 모든 교리는 은혜에 더해 사람의 행위를 요구하는 복음 변개이다. 이 모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의 전통과 거짓 증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교리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만든 소수사본(예: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은 자신들의 교리에 불편한 말씀을 삭제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4.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본의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개역성경, NIV 등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Westcott & Hort)의 소수사본 계열을 따른다. 이들은 천주교 사본과 일치하는 텍스트를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본문에서 중요한 교리를 드러내는 구절들을 지속적으로 삭제하거나 축소하였다. 특히 다음과 같은 본문들은 천주교적 전통을 보호하거나, 성경의 핵심 진리를 흐리기 위해 변개되었다: 로마서 13:9 – “거짓 증언하지 말라” 삭제 → 거짓 교리를 합리화 골로새서 1:14 –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삭제 → 피의 속죄 은폐 디모데전서 3:16 – “하나님이 육체로 나타나셨다”를 “그가”로 변경 → 그리스도의 신성 축소 요한일서 5:7 – 삼위일체 명확한 본문 삭제 5. 결론: 올바른 사본만이 올바른 교리를 지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세세하게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12:7) 그러나 부패한 소수사본들은 천주교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삭제하고 거짓 증언으로 치환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학술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직접 연결된 중대한 영적 전쟁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성경, 킹제임스 성경(흠정역)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 사본에 기반한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거짓 증언과 인본적 교리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2025-05-18 19:19:16 | 관리자
로마서 14장 1절을 중심으로: 올바른 사본이 올바른 교리를 만든다 –   1. 성경 본문은 교리의 기초이다 기독교 교리는 결코 인간의 철학이나 문화적 흐름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교리는 “기록된 말씀”(It is written)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성경 원문이 훼손되면, 반드시 그 결과로 신학과 교리가 왜곡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로마서 14장 1절이다. 2. KJV와 올바른 본문: 의심에 찬 논쟁은 거부하라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이는 교회 안에서 불확실한 문제나 개인적 확신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모든 행동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3. 개역성경과 NIV: 비판을 하지 말라는 위험한 명령 그러나 개역성경과 NIV는 이렇게 말한다: “그를 비판하지 말라.”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포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죄를 지적하지 말고, 무엇을 믿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윤리 상대주의로 연결된다. 즉, 잘못된 것을 보고도 침묵하라는 가르침이다. 4. 이 구절이 무너뜨리는 교회 내 질서 이 구절이 잘못 번역되면, 교회 안으로 모든 죄와 잘못된 신학, 이단 사상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나는 다른 복음을 믿는다”고 해도, “비판하지 말라”는 논리로 그를 제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올바른 분별과 경고의 사역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죄를 분명히 지적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고(마23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죄인을 출교하라고 명확히 지시했다(고전5장). 사도 바울은 "죄를 꾸짖으라"(딤전5:20)고 명백히 말한다. 이런 교훈은 “비판하지 말라”는 부정확한 번역과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6. 결론: 변개된 사본은 진리를 흐린다 로마서 14장 1절에 대한 NIV와 개역성경의 번역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계열의 소수 사본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교리를 훼손하는 첫 단추이다. 올바른 성경은 죄와 의를 분명히 구분하며, 의심에 찬 논쟁은 거절하되 진리 안에서는 판단하고 지적해야 함을 분명히 한다. 말씀 요약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롬 14:1, KJV)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개역성경) “Accept the one whose faith is weak, without quarreling over disputable matters.” (NIV)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 말씀은 인간의 입맛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하셨으며(시12:6), 그것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다(시12:7, 흠정역).
2025-05-18 19:15:37 | 관리자
마가복음 10장 21절 십자가 없는 복음?    부패한 사본이 빚어낸 심각한 왜곡   1.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삭제되다 마가복음 10장 21절은 예수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너라, 나를 따르라, 십자가를 지고.” (KJV, “Come, take up the cross, and follow me.”) 그러나 NIV와 개역성경,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천주교 계열 소수사본(Nestle-Aland, UBS 본문)**에서는 **“십자가를 지고”(take up the cross)**라는 결정적인 구절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과 자기부인을 요구하시지 않은 것처럼, 본문이 크게 약화되어 버렸습니다. 2. 왜 십자가가 중요한가?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자기부인과 헌신,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입니다. 바울 역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 3. 왜 소수사본은 십자가를 지우려 하는가? 이 삭제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주교 알렉산드리아 계열 소수사본들의 일관된 경향입니다. 이들 사본은 예수님의 신성, 피, 부활, 그리고 십자가와 같은 희생 중심의 복음 진리를 지속적으로 삭제하거나 약화시켜 왔습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결국 다른 복음입니다(갈1:6–9). 이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왕관만 주겠다고 했던 제안(마4장)**과 똑같습니다. 고난은 없이 영광만 누리려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이 구절을 외면하는가? 오늘날 “새 기독교(New Christianity)” 혹은 현대 기독교 문화는 십자가보다 왕관을, 고난보다 번영을, 거룩함보다 행복을 선택합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밀려나고, 대신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길 원하십니다”라는 표면적인 메시지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딤후2:12)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습니다. 5. 결론: 부패한 사본이 만든 십자가 없는 복음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십자가에 대한 언급을 삭제한 것은 단순한 문장 축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공격하는 사탄의 전략이며, 그 근원은 천주교 계열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방식이며, 진정한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킹제임스 성경(KJV)의 본문을 붙들고, 어떤 사본이라도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의 도를 훼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025-05-18 19:12:02 | 관리자
로마서 1장 16절: 그리스도의 복음   단순한 ‘복음’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1. 복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것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KJV) 그런데 개역 성경이나 NIV를 포함한 현대 역본들은 **“그리스도의”**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복음”**만 남겨놓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NIV, 개역) 이렇게 되면 어떤 복음인지가 모호해집니다. 성경에는 “다른 복음”(고후 11:4), “사람의 복음”(갈1:11), “영원한 복음”(계14:6) 등 다양한 표현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자 한 복음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복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복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복음의 본질을 명확히 정의합니다. 그 복음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고, 성경 기록대로 장사되셨으며,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아니면 다른 것은 모두 거짓된 복음입니다. “너희가 받아들인 것 외에 다른 어떤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9) 3. 현대역본은 왜 ‘그리스도의’라는 핵심 단어를 빼는가? 이 삭제의 원인은 다시 “4번 사본 문제,” 즉 천주교 계열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있습니다. 이 사본들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을 흐리거나 삭제하는 경향이 반복됩니다. 로마서 1:16에서 **“그리스도의”**라는 단어가 빠지면, 바울이 말한 복음이 **불특정한 ‘좋은 소식’**처럼 바뀌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뉴에이지, 사회복음, 인본주의적 메시지 등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4. 단어 하나의 삭제가 어떻게 복음 전체를 흔드는가? 복음은 단지 ‘기쁜 소식’이라는 느낌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으심, 장사됨, 부활하심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영적 능력에 기초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뺀 복음은 그리스도의 피 없는 복음, 그리스도의 부활 없는 복음, 구원이 없는 복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성경은 정확해야 하고, 복음은 명확해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단어 앞에 반드시 “그리스도의”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삭제된 단어 하나가 복음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단어 하나까지도 보존하신 **하나님의 말씀(KJV)**을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8 19:06:41 | 관리자
베드로전서 2장 2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의 오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 잘못된 번역이 만든 구원론의 오해   1. 구원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 성경 전체는 구원(salvation)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임을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즉 구원은 진행형 상태나 점진적 과정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8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흠정역) 여기서 구원은 받았던(past tense) 사건이며, 자라가야 할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신앙과 말씀 안에서의 성숙입니다. 2. 벧전 2:2에서 벌어진 번역의 왜곡 킹제임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KJV) 반면 개역성경과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현대 역본들은 구원을 ‘성장’의 결과로 둠으로써 성경의 구원 개념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3. 왜 이런 오역이 발생했는가? – 4번 사본(Textus Criticus)의 영향 킹제임스 성경의 근거가 되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구원에 이르도록”(εἰς σωτηρίαν)**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합성서공회(UBS)와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 등의 **소수 사본 계열(=4번 사본)**은 여기에 **"εἰς σωτηρίαν"**을 임의로 추가해 버렸고, 개역성경과 NIV는 그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간다”**는 오역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로 인해 마치 구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가톨릭의 점진적 구원론이나 행위 구원론, 혹은 뉴에이지의 자아성장 사상과도 맞닿게 됩니다. 4.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출생 이후의 영적 양육’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신자들은 태어난 이후 자라나는 것이지, 자라나야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벧후 3:18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또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 가라.” (흠정역) 여기서 성장은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logikon)**을 통해 영적으로 양육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여야 합니다. 결론 구원은 성장이 아닙니다. 구원은 새로운 탄생이며, 그 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라갑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식의 번역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즉시성과 은혜의 본질을 흐리는 위험한 오역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4번 사본 계열(소수 본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2025-05-18 19:02:47 | 관리자
로마서 11장 6절의 삭제는 왜 심각한가? 구원은 오직 은혜로, 행위는 배제된다 —    1. 성경은 명백하게 구원을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다고 선언한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구원의 원천과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KJV, 흠정역) 이 말씀은 구원이 사람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며, 어떤 행위도 그 안에 섞일 수 없습니다. 2. 로마서 11장 6절은 이 진리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적 구절이다 로마서 11장 6절은 은혜와 행위가 절대적으로 양립 불가능함을 논증적 구조로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또한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KJV) 즉 은혜와 행위를 섞는 것은 수학 공식에 모순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는 철저히 공로 없는 선물이기에, 행위가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게 됩니다. 3. 그런데 이 중요한 후반부를 개역성경과 NIV는 삭제했다 현대역본들은 대부분 로마서 11장 6절의 후반부를 삭제하거나 각주로 처리합니다. 예를 들어 개역성경과 NIV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끝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그 다음,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가 아니다”는 후반부는 빠져 있음) 이로 인해 은혜와 행위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이중 논증 구조가 절반만 전달되고 나머지는 소거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독자는 “어느 정도 행위가 있어도 되는 게 아닌가?”라는 혼동에 빠질 수 있습니다. 4.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4번 사본”에 있다 이 구절을 훼손한 배후에는 항상 등장하는 4번 사본 문제, 즉 **천주교 계열의 알렉산드리아 사본군(Textus Criticus, Nestle-Aland 본문)**이 있습니다. 해당 사본군은 고의적으로 로마서 11:6의 후반부를 삭제하여, 구원의 은혜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주는 핵심 문장을 없애버렸습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이 근거한 **공인본문(Textus Receptus)**과 **대다수 사본들(다수본문, Majority Text)**은 이 구절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구조야말로 구원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론 성경은 구원에 있어 은혜와 행위를 절대적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이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일부 삭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은혜가 은혜이기 위해서는 행위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진리를 흐리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담고 있는 성경을 붙들어야 하며, 삭제되거나 왜곡된 사본들로부터는 멀어져야 합니다.
2025-05-18 19:00:53 | 관리자
요한계시록 21:24의 번역 논쟁과 진리의 수호   누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가?    요한계시록 21장은 성경 전체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장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요,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도성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도시에 누가 들어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성경 번역에 따라 전혀 다르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언어 문제를 넘어, 복음의 본질과 연결된 심각한 문제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의 명확한 선언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요한계시록 21:24,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들은 단순히 민족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구원의 조건을 충족한 자들만이 어린양의 신부로서 그 도성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표현입니다. 2.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의 위험한 생략 개역성경과 NIV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개역성경) “The nations will walk by its light…” (NIV) 여기서 문제는,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핵심 문구가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구원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민족이 자동적으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교리적 왜곡이며, **보편적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라는 이단 사상의 기반이 됩니다. 3. 원문에 따르면 KJV가 정확하다 Textus Receptus 그리스어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습니다: τὰ ἔθνη τῶν σωζομένων (the nations of them which are saved) 즉,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Nestle-Aland 소수 본문에서는 이 표현이 제거되어, 단지 “모든 민족들”로 남아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구원과 무관하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4. 보편적 구원론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위험 이 구절의 생략은 단순한 문구 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암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 조건의 희석 “모든 종교, 모든 인간은 결국 구원받는다”는 뉴에이지적 사고와 연결 하지만 성경은 명백히 말합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요 3:3) 결론: 오직 구원받은 자들만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요한계시록 21:24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천국의 입장 조건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흐리거나 삭제하는 현대 역본들은 독자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진리를 떠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지켜야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유일한 천국의 길임을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2025-05-18 17:52:01 | 관리자
골로새서 1장 14절: 예수님의 피 삭제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 그 피를 삭제하면 복음이 무너집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며, 그 중심에는 ‘그분의 피’가 있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면이 없느니라”(히 9:22). 그런데도 오늘날 개역성경,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예수님의 보혈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골로새서 1장 14절입니다. 비교: 킹제임스 vs 현대 역본 킹제임스 성경(KJV):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even the forgiveness of sins.”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느니라.” 개역성경 / NIV 등 현대역본: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피”라는 단어는 아예 사라져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 역본들은 가장 중요한 단어, 곧 '그분의 피'를 본문에서 삭제하고, 그 삭제에 대해 각주조차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삭제는 단순한 문장 생략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공격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중요한가?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구원은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에서 보호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레위기 17:11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로마서 5:9는 말합니다: “그분의 피를 통해 의롭게 되었으니...” 에베소서 1:7도 증언합니다: “그분의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가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11은 명확히 말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마귀를 이기었도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피 없이 구원은 없습니다. 사탄은 왜 예수님의 피를 싫어하는가?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그 피가 성도들을 정죄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그 진리를 폭로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로 마귀를 이기었으니...” 마귀는 이기지 못할 무기, 곧 예수님의 피를 성경에서 빼내려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대 역본들은 그의 이 계략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사본의 차이인가? – 아니면 의도된 왜곡인가? NIV 등 현대역본이 따르는 **네슬레-알란트 비평 본문(UBS)**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 왕국 복음, 부활, 하늘의 통치권과 같은 교리 핵심 구절들에서 중요한 표현들을 계속 삭제해왔습니다. 골로새서 1:14의 경우, Textus Receptus(다수 사본 기반)는 "그분의 피로"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지만, 네슬레-알란트 본문은 이 문구를 완전히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대 역본은 “죄 사함”의 도구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복음의 중심을 빈 껍데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피 없이는 복음도, 구원도 없다 골로새서 1:14은 복음의 핵심을 단 한 절로 요약한 구절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느니라.” (KJV) 이 ‘피’를 성경에서 삭제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잃습니다. 복음을 잃으면, 구원의 길도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단어, 특히 ‘피’ 한 단어의 삭제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확고히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2025-05-18 17:44:40 | 관리자
히브리서 2장 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를 선포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계는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을 두고 깊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실제 땅 위에서 이루어질 왕국, 즉 전천년주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NIV 등 현대 역본들은 히브리서 2장 7절에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삭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흐리며, 무천년주의나 뉴에이지적 왕국주의로 경도되는 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 –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지운 번역들 히브리서 2장 7절은 시편 8편 5–6절을 인용한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겸손, 고난뿐 아니라 미래의 영광과 통치권까지 포함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구절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하나님)께서 그(예수님)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그리고 그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셨나이다.” (히 2:7, KJV)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은 마지막 구절인 **“그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셨나이다”**를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창조물 위에 세워져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핵심 메시지가 누락되어 버립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 – 그리스도의 재림 왕국 히브리서 2장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드러내며, 그분이 죽음을 맛보신 이후 부활하셔서 만물 위에 권세를 얻으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통치는 단지 하늘의 보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신 실질적 통치권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나오는 천년왕국의 실제 통치와 직결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영적인 왕이 아니라, 이 땅의 실제적인 왕으로 세우셨으며, 그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직접 왕국을 다스리시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슥 14장 참조). 무천년주의와 뉴에이지 왕국주의의 위협 무천년주의자들은 이 땅에 실재하는 왕국은 없고, 오직 상징적인 영적 통치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히브리서 2장 7절 같은 구절을 “영적 적용”으로 몰아가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를 교회 시대에 이미 성취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다음의 성경적 진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셨다”는 구절은 실제 창조세상 위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를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는 것은 이미 끝난 일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예언적 사건(계 19–20장)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하늘이 아니라, 아담이 실패한 이 땅에서 회복되는 왕국(시 2편, 단 7장 참조)입니다. 결국 무천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무화시키며, 뉴에이지적 왕국주의 – 즉 인류가 자체적으로 평화의 시대를 만들 수 있다는 거짓 종교 사상과도 연결됩니다.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왕권 예수님은 단지 개인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만물 위에 통치자로 세우셨으며, 그것이 바로 성경 전체가 향하는 종말적 클라이맥스입니다(엡1:10, 고전15:24–25). 킹제임스 성경만이 히브리서 2장 7절을 온전히 보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회복과 재림 통치를 바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반면 현대 역본들은 그 핵심 구절을 빼버림으로써, 성도들에게서 복음의 소망과 왕국의 실제성을 빼앗고 있습니다. 결론 성경은 결코 무천년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비전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실제 땅에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은 이 진리를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으며, 삭제된 현대 역본들은 이 복된 소망을 흐리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한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실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셨나이다.” (히 2:7, KJV) 이 말씀은 역사의 종말에 오실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복된 소망에 기초해야 합니다.   Scrivner’s Greek NT (Textus Receptus 1894 TBS) Hebrews 2:7 ἠλάττωσας αὐτὸν βραχύ τι παρ᾽ ἀγγέλους· δόξῃ καὶ τιμῇ ἐστεφάνωσας αὐτόν, καὶ κατέστησας αὐτὸν ἐπὶ τὰ ἔργα τῶν χειρῶν σου· Nestle and Aland Greek NT 27th ed. (UBS 1975)  Hebrews 2:7 ἠλάττωσας αὐτὸν βραχύ τι παρ᾽ ἀγγέλους, δόξῃ καὶ τιμῇ ἐστεφάνωσας αὐτόν, 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5-05-18 17:34:08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지우는 성경 삭제 – 왜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역본 성경들(NIV, NASB, 개역개정 등)은 겉으로는 쉽게 읽히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본문 삭제와 교리적 훼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베소서 5장 30절과 사도행전 2장 30절입니다. 이 두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즉 육체를 지닌 부활에 대한 성경적 증거입니다. 하지만 현대 역본들은 중요한 단어들을 삭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교묘히 흐리고 있습니다. 1. 에베소서 5장 30절 – 그분의 살과 뼈를 지닌 교회 킹제임스 성경(KJV)은 에베소서 5장 30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이라.” (엡 5:30, KJV) 하지만 개역성경과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은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을 삭제하고 단지 “그 몸의 지체” 정도로 축소시킵니다. 이 삭제는 단순한 표현의 간소화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하와가 아담의 몸에서 나왔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살과 뼈”라는 표현이 사라지면 이 관계가 영적 개념으로만 축소되어 그리스도의 실제적 몸, 즉 부활하신 몸을 무시하게 됩니다. 2. 사도행전 2장 30절 –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그리스도 KJV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에 따라 자기 허리의 열매(후손)에서 그리스도를 일으켜 자기 왕좌에 앉히실 것을 알았고.” (행 2:30) 하지만 현대 역본들은 “육체에 따라”, “그리스도를 일으켜”라는 구절을 삭제하거나 희석시킵니다. 그 결과, 마치 다윗의 후손 중 한 사람을 상징적으로 택해서 하나님의 왕좌에 앉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다윗의 육체적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체적 부활과 통치의 실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언약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육체적 후손을 통해 왕좌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삼하 7장 참조). 그래서 베드로는 이 약속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단지 영적인 존재로 부활하셨거나 상징적 왕이시라면, 이 말씀은 헛된 것이 됩니다. 왜 현대 역본은 ‘몸의 부활’을 거부하는가? 이 두 구절에서 일어난 삭제는 우연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신플라톤주의와 뉴에이지 영성의 영향이 숨어 있습니다. 이들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여기고, 영혼의 해방만을 구원으로 보는 세계관을 따릅니다.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은 이런 철학에 영향을 받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비평 본문, 그리고 **로마 가톨릭 사본들(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에 따라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수님의 부활을 신체적인 부활이 아닌 영적인 회복으로 축소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실체적 몸이 아니라 상징적 공동체로 바꾸며, 성도의 소망인 몸의 부활과 영광스러운 변화(빌 3:21)를 약화시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음을 선포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졌고(요20:27), 예수님은 생선까지 드셨습니다(눅24:42–43). 예수님의 부활은 “살과 뼈를 지닌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활 소망의 근거입니다(고전15장). 만일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들입니다(고전15:17).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체적 부활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복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결론   에베소서 5:30과 사도행전 2:30의 삭제는 단지 단어 하나를 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곧 기독교 신앙의 중심 교리를 흔드는 치명적인 변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 살, 뼈, 육체를 명확하게 언급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다윗 언약의 성취, 실제적 부활의 증거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오늘날 수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흐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 살과 뼈를 지닌 부활의 주님이시며, 그 몸은 바로 우리와 연결된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지키는 성경, 킹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우리가 신뢰해야 할 말씀의 표준입니다.
2025-05-18 17:30:15 | 관리자
요한일서 5장 7절 삼위일체 삭제   요한일서 5장 7-8절은 성경 전체에서 삼위일체를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과 NIV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특히 7절 전체와 8절의 일부 내용을 없애거나 재배치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흐리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번역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의 본문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며,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훼손하는 심각한 행위입니다. 1. 삭제된 구절: 삼위일체의 핵심이 빠져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요일 5:7) 하지만 NIV, 개역성경, NASB 등 현대 역본은 이 구절을 완전히 생략하거나, 8절의 내용을 끌어올려 마치 7절처럼 보이게 만드는 식으로 배열을 바꿔버립니다. 개역성경은 특히 6절의 마지막 구절인 “성령은 진리니라”를 떼어다가 7절로 둔갑시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본문을 꾸며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본문을 정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조작한 것입니다. 2. 왜 이 구절이 중요한가? 이 구절은 성경에서 아버지, 말씀(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이 하나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함한 하나님 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결정적인 교리입니다. 이 구절이 없다면, 삼위일체를 명시적으로 말하는 구절이 성경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삭제는 단지 문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 전체의 토대를 흔드는 일입니다. 3. 사본과 역사적 증거들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이 초기 그리스어 사본에 없다는 이유로 본문에서 삭제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라틴어 역본(구 라틴역, 라틴 벌게이트 등)에는 이 구절이 명확하게 들어 있습니다. 이 라틴어 성경들은 2~5세기에 필사된 것입니다. 초기 교부들 중에서 키프리안(주후 250년), 프리스킬리안(주후 350년), 클라루스, 제롬, 카시안, 풀젠티우스 등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라틴 지역 교회들에서는 이 구절이 널리 인정되었고, 실제로 서방 교회들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본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들에서도 이 구절이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코덱스 61(16세기), 629(14세기), 88(12세기), 221(10세기) 등에서 이 구절이 존재하며, 이 사본들 다수가 **비잔틴 전통에 따라 KJV의 근간이 되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지지합니다. 즉, 이 구절은 단지 “후대에 삽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기 교회에서 사용되었고, 후에 특정한 이유로 일부 사본들에서 빠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4. 그리스어 문법적 문제도 발생한다 현대 역본들이 이 구절을 삭제했을 때, 그리스어 문법상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요일 5:7에서는 “증언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에 **남성 복수 정관사(οἱ μαρτυροῦντες)**가 사용되는데, 8절의 “영과 물과 피”는 중성 명사입니다. 남성 정관사와 중성 명사의 일치가 맞지 않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어색하거나 오류가 됩니다. 그러나 KJV 본문처럼 요일 5:7의 **“아버지, 말씀, 성령”**이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정관사의 성과 일치가 맞아 떨어지며 문법적으로도 완전해집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본문을 감동하신 명확한 증거입니다. 5. 왜 이 구절이 빠졌는가? 초기 동방 교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둘러싼 사벨리안주의 이단 논쟁이 매우 격렬했습니다.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는 구절이 사벨리안주의의 주장(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존재라는 주장)과 혼동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 동방 사본에서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제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단 사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삭제는 정당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고 믿어져야 하며, 사람이 판단하여 말씀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신 4:2, 계 22:18-19). 6. 결론 요한일서 5:7은 단지 한 구절이 아니라,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명확히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삭제하거나 조작한 현대 역본들은 성경의 핵심 교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본문 자체에 대한 공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요한일서 5장 7절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역본이며, 이는 성령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성경 보존의 열매입니다.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요일 5:7, KJV) 이 구절이 사라진 성경은,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고대 역본과 교부들의 확실한 증거 이 구절은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서 빠져 있다고 주장되지만, 초기 기독교의 방대한 증거들은 요한일서 5장 7절이 원래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1. 고대 교부들의 인용 키프리안(주후 250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해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라고 인용. 프리스킬리안(주후 350년), 클라루스, 바리마둠, 카시안, 풀젠티우스, 제롬, 비질리우스, 안스버트 등 다수의 교부들이 요한일서 5장 7절을 직접 인용. 이들 모두가 3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활동했으며, 이는 이 구절이 후대 삽입이 아니라 원래 본문에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2. 고대 성경 역본들 구 라틴역(Vetus Latina, 주후 200년), 라틴 벌게이트(Vulgate, 제롬 역), 구 시리아역(Peshitta), 이탈리아 사본들, 고딕역, 에티오피아역, 슬라보닉역 등 많은 언어의 초기 번역본들이 요한일서 5:7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보존되었으므로, 문헌적 보편성과 고대성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3. 그리스어 사본들 KJV가 근거하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은 이 구절을 포함합니다. 일부에서는 그리스어 사본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코덱스 61, 629, 88, 221, 429, 918, 2318 등 다양한 시대의 사본들이 이 본문을 포함하고 있으며, 15세기 이전의 파피루스에서도 이 구절이 빠진 자리처럼 보이는 간격이 확인됩니다. 문법적으로도 반드시 있어야 할 구절   그리스어 문법상, 요일 5:7의 “증거하는 이들”에 해당하는 명사들에 **남성 복수 정관사 ‘οἱ’(hoi)**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 말씀, 성령이라는 남성 명사들이 삭제되면, 뒤에 나오는 중성 명사들(영, 물, 피)과 성 일치 오류가 발생합니다. NIV와 개역성경은 이 오류를 무시한 채 구절을 삭제하고 말았습니다. 이 문법적 일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이 구절이 본문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함을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1: 요한의 콤마를 삭제하는 NIV가 옳다면 7절에 나오는 그리스어 남성 정관사 hoi  [marturountes(οἱ μαρτυροῦντες 남성 복수 분사)=하늘에 증언하는…]는 왜 8절에 나오는 세 개의 그리스어 중성 명사(영, 물, 피)와 불일치하고 있는가? (역주: 즉, 두 단어들이 성[性: gender]이 서로 일치가 되어야 하는데 맞고 있지 않다는 뜻) (성)령, 물, 피는 그리스어에서 모두 중성 명사로 중성 정관사를 취하는데 그렇다면 7절에 나오는 정관사는 당연히 중성이 되어야 한다(그러니까, 아예 7절 자체가 없다면). 하지만 7-8절에서 정관사는 모두 (복수) 남성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가? 질문 2: 7절과 8절에서 남성 정관사 hoi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그 이유는 7절 요한의 콤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아버지와 말씀 이 둘이 남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남성 명사가 그것들과 붙어 있는 정관사의 성을 지배하므로 지금 있는 대로 남성 정관사 hoi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요한의 콤마가 그리스 성경 본문에 포함되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그러므로 NIV나 NWT(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신세계 역본)는 요한의 콤마를 삭제함으로써 그리스어 문법상의 문제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본 대로 7절의 남성 정관사가 뒤에 나오는 8절의 세 개의 중성 명사(영, 물, 피)와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 3: 그렇다면 어떻게 요한의 콤마가 어떤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없는데 라틴 사본들에는 있게 되었는가? 첫째로, 7절과 8절이 비슷한 어구들로 끝나므로 필사자가 7절에서 정신이 산만한 상태에 있다가 8절을 필사하면서 그만 요한의 콤마를 우연히 누락했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필사 오류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필사 과정 중에 일어날 수 있다. 둘째로, 아직 아리우스주의 이단 교리가 일어나지 않았던 주후 220-270년경에 그리스 크리스천들이 대항해서 싸워야 했던 이단 교리는 사벨리안주의(사벨리안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교리)였는데 이 교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동일한 존재로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요한의 콤마에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는 말씀이 사벨리안주의 이단 교리,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요한의 콤마가 누락된 그리스어 사본이 우연히 발견되자 소위 정통파라 불리는 사람들이 7절이 훼손된 것이 오히려 참된 사본이라고 쉽게 간주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어를 구사했던 동방(비잔틴 지역)에서 사벨리안주의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으므로 이단 교리를 피하기 위해 요한의 콤마는 만장일치로 거부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벨리안주의의 영향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아프리카와 스페인 같은 곳에 있던 라틴(서방) 사본들에는 요한의 콤마가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라틴 사본들에 요한의 콤마가 강하게 제시되어 있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것을 성경에 포함시켜야만 하는 이유이다   왜 이 구절이 사라졌는가?   요한일서 5:7이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서 빠지게 된 데에는 당시의 이단 교리와 논쟁이 관련 있습니다. 3세기 동방 교회에서 **사벨리안주의(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일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이단)**가 유행했는데,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는 표현이 이단 교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에, 고의적으로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이런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서방 사본들과 라틴 역본들은 이 구절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1522년에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제3판에 이 구절을 삽입한 것도 이러한 맥락과 사본 증거들에 기초한 것입니다. 결론: 이 구절은 성경의 일부이다 요한일서 5:7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초기 교부들에 의해 인용되었고 그들의 신학의 중심 구절로 사용되었다. 초기 역본들 다수가 이 구절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스어 문법적 구조상 이 구절이 반드시 있어야 일치가 이루어진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유일한 본문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단지 신학자들의 고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핵심을 삭제하거나 흐리게 만든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요일 5:7) 이 위대한 진리를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삼위일체의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부정하는 번역은 버리고,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을 따릅시다.
2025-05-18 17:26:04 | 관리자
요한복음 3장 13절:  예수님의 신성과 편재성 왜곡   요한복음 3장 1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편재성(편만 존재)**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개역성경과 NIV, NASB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 즉 “하늘에 계신(which is in heaven)”이라는 표현을 아예 삭제하거나 각주 처리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은폐해버립니다. 1. 킹제임스 성경이 보여 주는 예수님의 신성과 편재성 요한복음 3:13, 킹제임스 성경 (KJV) “And no man hath ascended up to heaven, but he that came down from heaven, even 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당시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와 대화하고 계신 상황에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진술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분,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편재성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곧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교리를 직접적으로 가르칩니다. 2. NIV와 현대 역본의 심각한 변개 NIV (현대 영어역본) “No one has ever gone into heaven except the one who came from heaven—the Son of Man.” → “하늘에 있는”이라는 표현이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개역성경 또한 이 표현을 생략하거나 괄호로 처리합니다. 즉,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만을 언급하여 그분의 신성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이거나 하늘에서 보냄을 받은 인물 정도로 격하되도록 유도할 수 있으며,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진리를 흐리게 합니다. 3. 삭제된 “하늘에 있는”이 포함된 사본 증거들 킹제임스 성경이 따르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은 “하늘에 있는”(ὁ ὢν ἐν τῷ οὐρανῷ)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καὶ οὐδεὶς ἀναβέβηκε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όν, εἰ μὴ ὁ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ταβάς,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ὁ ὢν ἐν τῷ οὐρανῷ. 반면, Nestle-Aland(UBS) 본문, 즉 현대역본의 기준이 되는 비평본문은 이 마지막 구절을 삭제합니다. 그러나 삭제된 이 구절은 거의 모든 고대 사본과 초기 교부들의 저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그 사본적 증거들입니다: 995개의 사본이 “하늘에 있는”을 포함하고 있으며, 단지 5개 사본만이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고대 역본: 라틴어 역본, 시리아어 페시타, 콥트어, 에티오피아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 모두 포함. 교부들: 오리겐, 히폴리투스, 암브로스, 키릴, 아타나시우스, 제롬, 노바티안 등 최소 38명의 교부들이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표현은 모든 지리적 지역과 시대를 통틀어 광범위하게 보존된 말씀입니다. 이를 삭제한 것은 텍스트 자체의 증거가 아닌, 특정 편향된 사본들에 의존한 인위적 판단입니다. 4. 신학적 해설: 예수님은 왜 "하늘에 있는 인자"이신가? 예수님은 그분의 육신으로는 지금 땅에 계시지만, 그분의 신성은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이며,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인성(사람의 아들)과 신성(하늘에 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적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성경적 선언입니다. 5. 결론: 이 구절의 삭제는 단순한 편집 문제가 아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를 삭제하거나 흐리는 것은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신성 부정이라는 심각한 신학적 왜곡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에 기반한 현대 역본이 아닌, 본문 보존의 증거가 풍부한 다수 사본을 따른 킹제임스 성경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3:13, KJV) 이 진리를 믿고, 지키고, 증거하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의무입니다.
2025-05-18 17:03:39 | 관리자
고린도전서 15장 47절: 삭제된 ‘주’는 누구인가?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4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증거하는 강력한 본문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구절에서 핵심 단어인 **‘주(Lord)’**를 삭제하거나 생략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은연중에 흐리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역본의 차이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second man is the Lord from heaven."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고전 15:47) 그러나 NIV와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second man is from heaven."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났느니라. 표현상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주’라는 단어가 존재하느냐, 삭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단어 하나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핵심 교리를 건드리는 심각한 본문 변개입니다. 2. 본문적, 사본학적 근거 킹제임스 성경이 따르고 있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ὁ Κύριος’(ho Kyrios, 주)라는 표현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ὁ δεύτερος ἄνθρωπος, ὁ Κύριος ἐξ οὐρανοῦ 둘째 사람, 주께서는 하늘로부터 나셨느니라. 반면에 현대역본들이 따르는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 27판) 본문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ὁ δεύτερος ἄνθρωπος, ________ ἐξ οὐρανοῦ 둘째 사람, (공백) 하늘로부터 나셨느니라. 여기서 보듯이, ‘주(Κύριος)’라는 단어가 통째로 삭제되어 있습니다. 이 삭제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Westcott and Hort)가 편집한 천주교 소수 사본 계열(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을 따랐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3. 사본의 압도적 증거 ‘주(Κύριος)’가 포함된 사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문자 사본(Uncials):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A), K, P 등 소문자 사본(Minuscules): 81, 104, 181, 326, 330, 451, 614, 1241, 1739 등 20여 개 이상 고대 역본들: 시리아 페시타(주후 170년), 고딕역(341년), 시리아 할크렌시스역(616년), 아르메니아역(400년) 등 교부들의 인용: 오리겐, 바실, 크리소스톰, 키릴, 데오도레트 등 다수의 초기 교회 저자들이 이 구절을 ‘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증거는 ‘주’라는 단어가 본래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단지 소수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이를 생략했을 뿐입니다. 4. 신학적 의미: ‘주’의 존재가 왜 중요한가? 고전 15:47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분, 곧 하늘에서 오신 주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본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흙에서 왔고(창2:7), 누구도 하늘에서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요3:13).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로부터 오실 수 있으며, 그분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십니다(딤전6:16). 이런 의미에서 **‘하늘에서 오신 주’**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강력한 진리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를 제거하면, 예수님을 단지 하늘에서 보낸 사람처럼 격하시켜 그분의 신성을 흐리게 만듭니다. 5.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이 중요한가? 오늘날 수많은 현대 역본들이 따르고 있는 소수사본 계열은,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신성, 삼위일체, 복음의 핵심 구절들을 삭제하거나 약화시켜 왔습니다. 고전 15:47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단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구속주이십니다. 이 진리를 명확히 보여 주는 **고전 15:47의 ‘주’(Κύριος)**는 삭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고전 15:47, KJV)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기준입니다.
2025-05-18 16:59:33 | 관리자
삼손, 왜 믿음의 장에 기록되었는가? 오늘은 사사기에서 가장 강하고도 가장 연약했던 인물, 삼손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삼손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이름을 올린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삼손, 믿음의 장에 기록된 사람? 히브리서 11장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한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 히브리서 11:32 (흠정역)   이 말씀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겉보기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육신에 끌려다니는 인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녀를 찾아가고,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사명을 가볍게 여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2.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나실인 즉 나사르 사람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13장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주의 천사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즙이나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그 아이는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 사사기 13:7 (흠정역) 삼손은 나실인 즉 나사르 사람으로 구별된 자였고, 그는 자라면서 주의 영이 그를 감동시키셨습니다. (13:25) 그는 신체적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받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3. 삼손의 반복된 타락과 육신적인 삶 하지만 삼손은 그 거룩한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으며,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삶을 살았습니다. 딤낫의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 요구 (14장) 창녀와 함께 있음 (16:1) 들릴라와의 육신적 사랑 분노에 따른 폭력과 보복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능력을 신뢰함 특히 들릴라와의 관계는 삼손의 인생을 완전히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들릴라의 유혹을 거짓말로 피했지만, 결국 진실을 말해버렸고, 그의 머리털이 깎였고, 주의 영께서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가 잠에서 깨며 말하기를, 내가 예전의 다른 때와 같이 나가서 내 몸을 흔들리라, 하였으나 그는 주께서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사사기 16:20 (흠정역) 삼손은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수치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온 자가, 이제는 적국의 포로가 되어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4. 믿음의 반전, 마지막 기도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나타납니다. 삼손은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오 주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나를 기억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내가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 사사기 16:28 (흠정역) 삼손은 죽음을 각오하며 블레셋의 신 다곤을 섬기던 큰 절기 가운데 서 있던 두 기둥을 밀어 무너뜨립니다. 그 결과, 그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완수합니다. 삼손의 마지막은 비참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회개의 승리였습니다.   5. 왜 믿음의 장에 기록되었는가? 삼손은 우리가 보기에 연약하고 실수투성이의 인물이지만, 결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육신에 끌려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떠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완벽한 자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은 자들의 기록입니다. 삼손은 자기 힘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진정한 믿음의 표현이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의 실수와 연약함이 너의 인생을 규정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내게 부르짖는 자를 나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도 때때로 삼손처럼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실수를 덮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기억하신다." 삼손의 인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2025-05-16 17:43:0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