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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나 모순처럼 보이는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0> 대답: 믿음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함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부엌에서 전화벨이 울려 받아 보니 근처에 있는 신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던 학급의 학생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목사님이 킹제임스 성경에도 모순이 있음을 보여 주셨다고 말했습니다(굉장한 ‘믿음의 사람’이겠군요.). 그는 내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그 모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할 때 그 논쟁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나는 이야기 도중에 말을 끊었습니다. “아, 선생님께서는 거기에 대해 알고 계시군요?” 그가 물었습니다. “물론이지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 답이 무엇입니까?” 그는 기대에 차서 재촉해 물었습니다. “나도 모릅니다.”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나를 많이 신뢰했습니다. 나는 지금 그 청년에게 들려주었던 나의 답변을 여러분에게도 들려드리려 합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만약 저나 흠정역 성경을 믿는 다른 신자가 성경 질문에 대한 답을 다 알고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유한한 창조물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많은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라도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로, 만약 우리가 성경 문제에 관한 질문의 답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인해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히11:6; 고후5:7). 저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질문들이 항상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성경의 절대무오성에 관한 최종 판결은 우리가 좋아하는 ‘믿음의 방어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학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편 12편 6, 7절과 마태복음 24장 35절 등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리라 믿습니다. 물론 흠정역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러한 결론이 약간 불리한 것으로 느낄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은 그것을 알고 우리가 입은 갑옷의 구멍난 부분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재빨리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후 방어 수단으로 ‘믿음’을 의지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처럼 그렇게 모순되거나 불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구절들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신구약 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보여 주었던 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안에 믿음을 두기를 원하실 것이기에 이렇게 하는 데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일은 결코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고집스러운 적들의 처분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불안정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 이미 소실된 원본들의 완전성을 믿는 것처럼 나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비평 학자들이 원본의 절대무오성에 대해 그렇게 충성을 보이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절대로 원본을 출판할 수 없다는 것과 따라서 자기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나쁘게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 우쭐대는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모욕을 당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원본보다는 우리 만질 수 있는 성경에 대한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답변에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009-05-11 15:11:15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에 정말로 오류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1> 대답: 당신이 할 일은 성경을 펴서 시편 12편 6-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마태복음 24장 35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1960년대에 커다란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폭력적인 히피족들이 아메리카 은행 사무실을 불사르는 것이 보도되었고 다른 폭도들은 그 지역 전체를 “불태워라, 아가야, 불태워라!”하는 외침과 함께 철저히 파괴시켰습니다. 히피족들의 주장은 그 마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새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배웠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히피족들이 건물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그들이 어떤 건물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냉엄한 진리는 당신이 권위에 반항하게 될 때 당신도 히피족들과 마찬가지로 파괴 예술의 대가가 된다는 것입니다(벧후2:9-15). 파괴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삶은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히피족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건물은 파괴할 수 있어도 자기들이 파괴했던 것보다 더 향상된 건물은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반항적인 증오는 또한 자칭 학자라고 하는 자들이 성경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하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책을 파괴시키기 위해 맹렬히 비평하는 데는 능숙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학생들과 교회 회원들의 심령 속에서 그것을 파괴시켜 재가 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자기들이 그토록 혹독하게 비평했던 거룩한 작품과 견줄 만한 - 더 낫지는 못할지언정 - 그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영적 히피족들 - 비평 학자들 - 의 속임수에 넘어가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성경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들은 NIV 혹은 NASV 혹은 NKJV 같은 소위 ‘더 나은 역본들’이라 하는 잡동사니를 추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본들 중 그 어느 것도 시편 12편 6-7절이나 마태복음 24장 35절에 기록된 성경 즉 완전히 보존된 성경이라고는 아무도 감히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추궁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어 본문’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주장 즉 가시덩굴처럼 뾰족한 주장으로 당신을 찌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실 히브리어 혹은 그리스어를 읽고 연구하며 가르칠 실력이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국지 본문의 일부분을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 있다 해도 그들은 거기에도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과 닮은꼴인 1960년대 말의 히피족들처럼 자기들이 헛간조차 다시 지을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달은 채 연기 나는 폐허더미 위에 자기들이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 의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 없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성경 대적자에게 여러분이 충성과 사랑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 비평 학자가 여러분의 아버지, 형제, 목사, 교장, 대학 교수 혹은 여러분이 너무도 사랑하는 어떤 분이기에 여러분은 완전한 성경 문제에 대해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에 의해 흠정역 성경에도 오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킹제임스 성경을 NIV, NASV, NKJV와 그리스어 본문들을 담고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의 반지에 입을 맞추며 말하십시오. “오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은 반역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2009-05-11 15:09:25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2> 대답: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참으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하고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먼저 그것을 읽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될 만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왜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역본들과 모든 주석서, 여러분의 ‘연구를 돕는’ 모든 책을 일단 뒷전으로 치우고 단순히 하나님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 책의 저자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셔서(고전6:19-20) 여러분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신약의 끝까지 읽으십시오. 적어도 하루에 10페이지는 읽으십시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에 성경을 주시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 약간의 곤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까지 읽기를 마친 뒤에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복음까지 또 읽으십시오. 자, 한 번을 읽으셨습니까? 자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까지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쉬지 말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경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역대상의 처음 아홉 장과 같이 그 본문이 ‘무미건조한’것으로 여겨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독히 바쁜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 어떤 것도 성경 읽기를 중단할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만약 위에서 언급된 상황 속에서도 매일 10페이지씩 읽기를 계속한다면 여러분은 우리 사람에게 알려진 인격 테스트 중 가장 큰 것 하나를 통과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미건조한 날들 외에도 그 책이 여러분의 심령에 부드럽게 다가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는 날을 맞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의 하나님과 구원자를 알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 여러분의 친구들과 교사들 혹은 설교자들을 적대시하거나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그들이 제기하는 대부분의 비난들에 대해 은혜 안에서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 책 말고 또 신뢰할 만한 다른 책을 찾아내길 원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그들이 최종적으로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여부는 그들이 혹은 여러분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책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힘든 결정임에 틀림이 없으며 사실상 누구를 위해 충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친구와 모교인가? 여러분이 만약 설교자라면 완전하지 않은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소위 ‘금 덩어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떼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으며 성경을 읽도록 격려하는 것이 여러분과 그들 모두에게 풍성한 만족을 주는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 안에’ 거하고 성경을 읽는 무리들은 ‘성경 안에’ 거하며 그것을 읽는 목회자에게 절대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고 너무도 존경하는 친구가 다른 역본을 사용하는 교수나 목회자라면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책을 공격하거나 ‘고치려’ 한다면 그들의 메시지로부터 단지 그 부분만을 가려내십시오. 혹자는 여러분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어떤 이는 여러분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래 동안 내가 잘못을 범했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끝까지 그 성경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결국 여러분까지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더럽히도록 허락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그분 곧 하나님에게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자, 완전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2009-05-11 15:07:18 | 관리자
질문: ‘공인 본문’의 편집자 에라스무스는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나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7>   대답: 후에 ‘공인 본문’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이나 사본 등에 대해 논의하게 되면 언제나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며 그때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인본주의자였다.” 혹은 “그는 전형적인 로마 카톨릭 교도였다.”라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한 마디로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요점은 ‘인본주의자’나 ‘카톨릭 교도’가 만든 성경 본문에 기초를 둔 킹제임스 성경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이자 성경 무오성에 관한 국제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보이스(James M. Boice) 목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나쁘게 말하며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만든 에라스무스가 실제로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지난 400년 간 온 땅에 퍼져 복음의 빛을 발한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위와 같은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근본주의 대학인 밥존스 대학의 커스터(Stewart Custer) 교수 역시 「킹제임스 성경 논쟁에 대한 진실」이라는 글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펼칩니다.   「공인 본문」은 1516년에 로마 카톨릭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과 함께 시작되었다.   비난을 받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러한 견해 역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언뜻 보면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가 이미 역사적으로 정립된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수많은 증거들은 에라스무스란 인물이 ‘로마 카톨릭 인본주의자’를 능가하는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처럼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해에도 어떤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이 완전하지 못하고 또 충분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450년이라는 긴 역사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현존하는 기록들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역사가나 기록자의 편견에 따라 한 쪽으로만 해석되곤 합니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가 영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문제들 -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 왕과 같은 완전한 사람도 지니고 있던 문제들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변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근본주의적 크리스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에라스무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완전치 못한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라 자신이 보고 있는 분명한 잘못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것, 이교도들의 학식을 열렬히 동경한 것, 각종 성사, 교황제도, 사제 제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명백한 잘못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등등.   그러나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를 “로마카톨릭 인본주의자요, 부주의한 성경본문 편집자”로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잘못임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해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서적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두 개의 중요한 책들을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저명한 역사학자 베인튼(Roland H. Baiton)이 저술한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Christendom)이고 다른 책은 1894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프로드(J. A. Froude)의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Life and Letters of Erasmus)입니다.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들을 검토했으며 그 결과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에라스무스를 부정적인 인물로 내모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에라스무스에 대해 그처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어 공인 본문」과 관련해서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그가 결코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다음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된 후 약 6,000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완전치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인가, 즉 천국인가 지옥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는 일에서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는가 선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도, 과연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었는지 혹은 영적인 사람이었는지 하는 것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발람, 삼손, 솔로몬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중에서 발람은 구약 성경 보존의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삼손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으며 특히 발람과 솔로몬의 경우에는 이들을 통해 영감된 성경기록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쓰였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44, 45장을 보면 하나님의 종이라 불림을 받은 페르시아(바사)의 고레스 왕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이교도들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사44:28).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사45:1).   이사야서 45장 4절을 보면 고레스가 구원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우리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비록 에라스무스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 보존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자료를 통해 독자들께서도 확신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요,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려 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본주의자’라고 정의 내리는 관점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는 결코 ‘인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라 하면 사람을 하나님 위에 놓으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인본주의자들은 무신론자요, 진화론자들입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그런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사실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16세기 이후로 그 뜻이 크게 변했습니다. 16세기 이전의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영국 ‘트리니태리안 성경협회’(Trinitarian Bible Society)의 브라운(Andrew Brown)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한 ‘크리스천 인본주의자’였다.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무신론적 진화론자’를 의미하지 않았다. 중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우민정책’으로 인해 말 그대로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인본주의자들은’ 고대문학, 문화, 교육 등에 큰 관심을 갖고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시민 생활을 추구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스테파누스, 베자, 칼빈 등이 모두 인본주의자였으며 이 같은 인본주의자들의 이상이 기독교의 복음과 합쳐져서 암흑시대를 벗어난 16세기 이후의 서구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히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교도였지만 동시에 개혁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권리 남용과 심각한 부패에 대해 크게 비판했으나 카톨릭 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해야 하며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프로테스탄트들과 카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 중 몇몇은 비록 그 안에 가끔씩 옳지 못한 교리가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다. 특히 그가 지은 「크리스천 군사를 위한 안내서」는 너무나 유익한 책이어서 영어 신약 성경을 출간한 틴데일이 영어로 옮길 정도였다.   사실 1997년도에 출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펴 보면 틴데일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의 손에 쥐어 준 프로테스탄트 학자도 ‘휴머니스트’ 즉 ‘인본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유명한 백과사전 편집자들 역시 그 당시에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들을 ‘인본주의자’로 분류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행적을 조사하여 과연 그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인본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복음을 깨닫지 못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1466년(혹은 1469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36년에 일흔 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16세기 경 유럽에서 최고의 학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시적 의학술과 함께 전염병이 사람의 평균 수명을 대략 30-40년으로 제한하던 그 당시 그가 그처럼 장수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에라스무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전염병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은 삼촌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양육비 부담을 회피하고자 하는 삼촌이 그들을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청년시절 에라스무스는 데벤터라는 도시에서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전수 받게 되었고 그가 지닌 매력과 예의범절 그리고 재치 있는 지혜로 말미암아 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는 확실히 비범한 지능의 소유자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열 시간 걸려서 하는 일을 단 한 시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대영 박물관내 도서관의 많은 부분이 에라스무스 개인이 저술하거나 편집한 책으로 쌓여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논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형제들 -Brethren of the Common Life - 사이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평생동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다(라이온의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 p.359).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라이온이 지은 「기독교의 역사」라는 책이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온은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 안에서 양육을 받아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의 믿음과 영은 천주교보다 성경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인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온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이 어떠했는가를 그 자신의 말을 통해 살펴봅시다.   나는 매우 연약한 여인이라도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스스로 읽고 깨닫기를 바라며…그런 말씀들이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람뿐만 아니라 터키 사람이나 이슬람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또한 쟁기질하는 소년이 쟁기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옷을 짜는 사람이 옷 짜는 기계소리에 맞추어 이 말씀들을 흥얼거리며, 여행하는 사람이 이 말씀들을 통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는 다른 공부를 한 것으로 인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올 때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귀한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으셨다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 주며, 그분이 바로 우리 옆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Famine in the Lord」, Norman Ward, p.38)   이와 같은 진술문은 결코 16세기에 살았던 ‘천주교 인본주의자’의 확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해 주려는 매우 고귀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에라스무스의 가장 훌륭한 점은 보통 사람들을 향한 그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엄격히 ‘계급화 된 사회’에서 그는 일반인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제롬의 라틴어 역본」이 로마 제국이라는 철저한 계급 조직의 명령에 의해 번역된 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라틴어 역본」 과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그 당시 일반인들의 손에 쥐어 주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번역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이 단지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번역한 성경을 집에서 읽는 자마다 그것으로 인해 큰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농부, 재단사, 여행자, 그리고 심지어 회교도들조차’ 손에 성경을 잡고 읽는 것을 보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상급 동료들이 놀라 자빠지도록 심지어 ‘석공과 매춘부와 포주들’까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한 후에 그는 카톨릭 교회의 어거스틴파 사람들이 가장 좋은 장서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파에 속하게 되었으며, 1492년에는 공식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어거스틴파 교도들의 기준에 따르자면 참으로 유별난 데가 많았습니다. 그는 교회 축제일 전야의 철야 기도를 지키기를 거부했고, 금요일에 고기 먹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으며 사제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으나 그의 영과 혼은 그런 틀에서부터 벗어나 언제나 자유로웠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많은 작품을 썼으며 그 안에서 자기가 속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조리와 무분별한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권력과 사제단, 그리고 수도승들의 허랑 방탕함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승들이 돈을 만지지는 않지만 술과 여자에 대해 성실하지 못함을 성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의 내연 관계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소위 ‘이교도’라 부르는 자들을 다루는 잔악성에 대해 공격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공연한 사악함에 대항하여 저술한 「야만인들에 대하여」(Against the Barbarians)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실제로 이런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한편 그는 율리우스 교황을 비롯한 여러 교황의 독재를 계속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는 종종 교황 율리우스가 이끄는 ‘성전’(聖戰)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율리우스’(교황)가 율리우스(카이사르) 역을 얼마나 잘해내고 있는가!”란 유명한 말 역시 그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로마 교황의 이 같은 독재는 기독교를 좀먹는 해충’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에서 교황좌(座)를 제거해 버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교황이 지옥에 간 것으로 묘사한 신랄한 풍자의 글이 익명으로 배포되었을 때 그 글을 지은 사람이 에라스무스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비난을 잠재울 양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은 그에게 추기경직을 수여하려 했지만 그는 그 같은 노골적인 뇌물을 거절했습니다.   온 유럽은 수도승들의 무지와 사제들의 미신 등을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에라스무스의 저서들로 인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요동했다…이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주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자신의 양심과 타협할 수 없었기에 그는 이 같은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가 이 같은 교황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며 여러 가지 기록들은 그가 자유롭게 남아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번역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거부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나 학자나 인쇄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 p.103),   완숙한 지경에 다다른 학자 에라스무스는 그 시대의 별이었으며 그 명성으로 인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천주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라틴어 신약 성경」은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와 너무나 달라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신약 성경」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드러내 놓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번역이 옮음을 보여 주는 각주들을 만들었으며 이런 각주에는 부패한 카톨릭 사제들을 겨냥한 뾰족한 가시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에라스무스가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을 비난했습니다. 그가 제롬의 역본을 반대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 사본이 4세기경에 오리겐 등에 의해 개악(改惡)되었음을 간파했고 제롬의 역본이 4세기초에 기록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에 기초를 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한편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경 구절들을 제롬과 달리 번역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롬은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을 “고해성사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번역했는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달리 번역했습니다. 어느 번역이 맞는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성경 비평 학자들과 인본주의 학자들이 그 신빙성을 의심해온 마가복음 16장 9-20절과 요한복음 8장 1-12절 말씀을 충실히 옹호한 사람이었습니다.   밀러(Andrew Miller)라는 역사학자는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밑에서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모든 지적 능력을 동원하여 참으로 힘든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편집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1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라틴어 신약 성경」과 함께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는데 그가 만든 「라틴어 신약 성경」에는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의 오류들이 수정되어 있었다.   사실 이 같은 작업은 그 당시에 아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사방에서 그의 작품을 공격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종파분쟁을 일으키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신성하고 전통적인 라틴어를 간섭하려 하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말하였다. ‘도대체 누가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에 수정을 가하여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에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역본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매우 큰 범죄로 여기는 것들 중 하나였다 (「Miller's Church History」, Andrew Miller, Bible Truth Publishers, 1980, p.696).   한편 에라스무스의 성경 주석 역시 카톨릭 교회의 왜곡된 모습에 대일격을 가했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에라스무스가 일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저서들과 「그리스어 신약 성경」 출간은 곧장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라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입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나 ‘로마 카톨릭 교도’가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가 힘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지난 400년 간 온 세상에 선교사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 같은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일으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편집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다섯 판에 걸쳐 출판했습니다. 그것들은 주후 1516년, 1519년,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연속해서 나왔습니다. 첫째 판의 번역 및 출간 작업은 1515년 3월 15일에 시작되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516년 3월 1일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젤에는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페인 학자 스투니카가 저술하여 1514년에 시메네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나 1522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출간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이라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출간되기에 앞서 자신이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라스무스를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했고 결국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보다 먼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출간된 첫 번째 판은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동시에 들어간 두 가지 언어로 구성된 성경 즉 ‘디아글롯’이었습니다.   한편 두 번째 판은 첫 번째 판을 조금 개정한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판은 소위 ‘사도 요한의 쉼표’라 불리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삽입시킨 것으로 인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은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는 것으로 이 구절은 모든 알렉산드리아 본문에서 삭제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명백한 구절입니다.   비록 자신이 수집해서 소장하고 있던, 주후 15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량의 비(非) 그리스어 자료들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본문이 들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에는 요한일서 5장 7절 말씀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신약 성경 본문에 이 구절을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권위를 입증해 줄 만한 최소한의 그리스어 필사본도 없이 이 일을 했다가는 큰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판에서와 같이 자신의 두 번째 판을 출판할 때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다음 판에 이 구절을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그가 편집한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나오자 카톨릭 교회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그는 15세기경의 사본을 찾아내게 되었고 자기가 약속한 대로 이 구절을 신약 성경에 포함시켰으며 그 뒤 이 구절은 영원히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에 남아 보존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구 라틴 벌게이트」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고대 ‘왈덴시안들의 성경’, ‘테플 성경’ 등 10 여 개의 증거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들의 특징은 이들이 한결같이 비잔틴 계열이 아니라 라틴 계열이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파의 철학에  심취한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저술한 알렉산드리아 본문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으나 삼위일체를 인정하여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증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과를 따른 라틴 계열의 기독교계는 처음부터 「구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면서 이 구절을 지지했습니다. 결국 영지주의자들과 아리안주의자들이 성경 본문을 맹렬하게 공격해서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비잔틴 계열이 아니고 라틴 계열의 사본 및 역본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셨습니다.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의 이 구절을 반대하는 소위 ‘근본주의 학자’라 하는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새로 발견한,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고 있는 두 개의 필사본이 에라스무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릇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 당시에도 옹호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너무나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며 16세기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였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 같은 비난은 사실 그 근거를 잃게 됩니다. 또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기원이 오래 되지 않은 몇 개의 사본들에 근거해서 성경 본문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작품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표는 그가 사용한 사본들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사본들       사본 번호   사본 시기   신약 성경 부분   비고   1   11세기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비교용   2   15세기   사복음서   본문으로 채택          2ap 12/14세기   사도행전, 서신서   본문으로 채택         4ap 15세기   사도행전, 서신서   비교용          1r 12세기   계시록   계시록만       맞습니다. 그는 주로 두 개의 사본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본의 개수나 시기가 아니라 그 사본이 어느 계열에 속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본들을 수집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더욱이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으므로 카톨릭 교회가 수집한 수많은 사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 ‘바티칸 사본’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본은 이미 1481년에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 성경 사본에 두 종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사본을 ‘바티칸 사본’과 일치하는 사본과 비잔틴 계열의 사본으로 분류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윌켄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또한 얼마든지 ‘바티칸 사본’을 참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로마에 있는 봄바시우스라는 교수와 계속해서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그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부분의 본문을 보내 주었다. 한편 1533년에 에라스무스에게  ‘바티칸 사본’의 여러 부분을 보내 주면서  ‘바티칸 사본’이 ‘공인 본문’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니고 카톨릭 교도인 세풀베다였으며 그는 ‘바티칸 사본’ 본문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바티칸 사본’이 위 표의 1번 사본과 같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무시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가 ‘바티칸 사본’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존시켜 주신 본문이 어떤 것인가를 확신했으며 그 같은 확신에 따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편집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프로드가 지은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온 세상 사람들이 원어로 된 신약 성경 즉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자신의 새로운 라틴어 역본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으며 지성인들을 일깨워 성경 말씀이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풍금이 내는 소리같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 했다.   마침내 이 작업은 끝이 났고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인쇄되었으며 기독교가 전하는 생생한 사실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들의 역사, 생애, 가르침 등이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고 온 세상이 이로 인해 크게 놀라게 되었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신도들은 온 세상을 변화시킨 성경의 기독교와 교황, 추기경, 종교재판, 각종 거짓신화로 가득한 천주교를 서로 대조 비교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일은 영적으로 볼 때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를 고자로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대하여 :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독신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려는 유혹을 받거나 혹은 그런 서약을 하도록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서약을 한 사제들은 창녀에게 갈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며 단지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얽매이게 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첩을 둔 채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두게 되면 화형에 처해진다. 따라서 자기 자녀들을 독신 사제로 만들려는 부모들은 그들이 어릴 때에 거세를 시켜서 탐욕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기록관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마태복음 23장에 대하여 : 만일 동정녀 마리아의 우유가 돈을 벌기 위해 전시된 것을 성자 제롬이 본다면 무어라고 말할까? 어떤 이들은 ‘여기에 성 프란시스의 모자가 있다.’고 하며, ‘저기에 동정녀 마리아의 겉옷이 있다.’고 말하며, 혹은 ‘성자 앤의 빗이나 캔터베리의 성자 토마스의 신발이 있다.’고 말한다. 사제들과 수도승들의 침묵과 위선을 통하여, 또한 일반 백성들의 무지를 통하여 이런 일들이 -즉 회칠한 무덤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주교들조차도 이런 멋있는 쇼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포고령을 통해 이런 불법들을 승인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마태복음 24:23의 말씀에 대하여 : 나는 직접 내 눈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볼로냐에 있다가 로마로 간 것을 보았다. 그는 행렬의 맨 앞에서 마치 그리스도처럼 당당하게 행진해 갔다. 과연 베드로가 믿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아니면 무기나 군대나 혹은 다른 전쟁하는 기계들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 있는 ‘알지 못하는 언어’에 대하여 : 그들(사제들 및 수도승들)은 현재 우리 교회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로(즉 라틴어로) 찬트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난 여섯 달 동안 사람들이 그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단 한 차례도 전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마땅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해야할 사람들이 그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6절의 헛된 논쟁에 대하여 : 신학자들은 죄의 형태에 대해 논하는 일에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이 죄가 영혼을 좀먹는 것인가? 아니면 영혼에 흠이 되는 것인가? 등을 논한다. 도대체 한 마디로 죄를 미워하라고 단순히 말하면 되지 않는가? 유명하다는 신학자들이 겨우 이런 일에 대해 논의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다. 기독교를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이 신학자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디모데전서 3장 2절 말씀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감독의 직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격을 나열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살인, 근친살인, 근친상간, 해적행위, 동성연애, 도둑질 같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결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수많은 사제들이 있지만 그들 중 동정인자들은 거의 없다. 수많은 사제들이 욕심에 빠져 심지어 근친상간 등을 행한다. 따라서 욕정을 참을 수 없는 자들은 합법적으로 아내를 얻어서 살 수 있게 하여 이처럼 더러운 오염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은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원리 등에 대해 숙고한 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의 각주에 적은 기록들입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신약 성경 첫 판부터 기록되었으며 나머지는 판이 갱신되면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결코 만평이나 논쟁거리를 담은 소책자에 실린 글이 아닙니다. 이런 기록들은 신약 성경 본문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와 이 같은 기독교를 대신한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신을 비교하고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것입니다.   그는 천주교의 의식과 예식, 신학, 철학, 사제들의 인격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그들의 참상을 온 세상에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주교와 신부와 수도승들은 심판대로 끌려와 교황이 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책 즉 모든 책 중에 가장 거룩한 책을 통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의 책처럼 열광적으로 팔린 책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만 순식간에 수 만 부가 팔렸을 정도였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여우에 불을 붙이자 불이 순식간에 번져 나간 것처럼 에라스무스가 일으킨 경각심의 불은 온 유럽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후에  ‘공인 본문’으로 알려지게 된 그리스어 본문의 기초가 된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와 더불어 그 교회의 신조들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은 각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문제이며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로마 카톨릭 주의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판을 치니 복음을 설명할 시간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러면 에라스무스가 말하고자 했던 복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그분의 피가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습니다.   그는 교회의 어떤 의식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는 회개한 강도가 간 길이 바로 “낙원에 이르는 길”이며 단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혔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이 에라스무스의 글과 같은 것을 쓸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라스무스는 결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를 ‘인본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도 아니며 또한 무지에 갇힌 로마 카톨릭 교도도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베드로나 바울을 기쁘게 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으라. 그렇게 하는 것이 로마에 열 번 순례 여행을 다녀오는 것 보다 더 나을 것이다. 당신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그리스도의 형상을 존중히 여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복음서에 기록해 주신 것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다. 당신들은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이나 수건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크게 흥분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은가? 나무 십자가를 집에다 갖다 놓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그분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나음을 잊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입술을 예수님의 입에 댄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유품 등은 결코 당신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당신들의 소유와 관심과 염려를 모두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자기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리는 죽음과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대해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들의 사면과 이생에서의 백 배의 결실 그리고 그 이후의 영생을 약속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의 선한 공로와 행위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은혜로 인함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의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안전하다. 그분께서는 우선 아담의 타락을 이겨내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으니 이 모든 것은 대언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거에 의해 확증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같은 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의 인치심을 주셨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가 되시며, 승리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안전이 되신다. ‘우리에게 한 아이가 났으니…’ 라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이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바로 이분께서 우리를 위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승리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이 같은 역사적 고증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도가 아닌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에라스무스의 마음과 영혼을 보고 듣게 되며 또한 하나님을 배격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닌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로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비록 로마 카톨릭 주의의 범주 안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성경을 믿은 신자요, 개혁자였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성경적인 무리로 여겨진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미 1523년경에 그들을 ‘재침례교도’라 불렀고 심지어 그 스스로도 종종 ‘16세기의 유일한 재침례교도’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에라스무스가 ‘근본주의’(fundamental)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에라스무스가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증명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1535년 바젤로 다시 돌아가서 프로테스탄트 친구들과 함께 거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고 지내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특히 카톨릭 신자라면 죽을 때 반드시 받아야 하는 ‘종부성사’도 거절한 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Dear My God!)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바젤의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선구자 에라스무스의 시신을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 안치하였고 그 역사는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라스무스는 1536년 7월 11일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결코 ‘충실한 카톨릭 교도’의 삶과는 동떨어진 프로테스탄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프로테스탄트 성향 및 기질로 인해 그가 받게 된 가장 큰 찬사는 그가 죽은 지 23년 후인 1559년에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황 바오로 4세가 에라스무스의 저작물을 모두 금서 목록에 올려놓은 일이었습니다.   성경이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기를 원했던 그의 순수한 소망을 아신 하나님께서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번역된 영어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로서 에라스무스가 저술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들 “에라스무스가 품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말에는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에라스무스의 성경, 그의 저서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주의의 협박에 저항하는 그의 태도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의 운명이 그의 운명과 연관된다 하더라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루터의 편입니다.” 그는 루터를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썼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행위가 아닌 은혜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의견에 전심으로 동의했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루터를 이교도로 선포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거절했습니다. 만약 당대 최고의 석학인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공격하기 위해 그의 펜의 힘을 사용했더라면 교황과 그의 하수인들이 할 수 있었던 힘없는 압력보다도 더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의 확신에 따라 그들을 옹호했고 단지 루터의 예정설을 믿지 않았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펜과 잉크로 종교 개혁자들을 비난했습니다.   한편 에라스무스가 만든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개정한 편집자들 역시 프로테스탄트 성경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어 신약 성경」판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 에라스무스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완전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한 철저한 성경 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박해를 받으며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완전히 개정되어 ‘공인 본문’이 나오게 되었고 이 ‘공인 본문’을 기초로 해서 -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이 아니고 -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를 ‘인본주의자’니 혹은 ‘로마 카톨릭 교도’니 하며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결국 에라스무스를 통한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 개혁’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요한 웨슬리, D.L. 무디, 요나단 에드워드 등 프로테스탄트 부흥을 가져온 이들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본문을 편집하는 동안 에라스무스는 그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같은 확신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고대 및 중세를 통해 신약성경 본문을 안전하게 보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인쇄해서 중세 이후의 사람들에게 주려 하실 때에도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할 확신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나 베자나 틴데일이나 혹은 제임스 왕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처음에 완전한 성경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완전히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뿐이다.
2009-05-11 15:05:31 | 관리자
질문: 성경 문제를 논할 때 박사들의 학식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4> 그들이 그들의 학위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다면 그래야겠지요. 오늘날 교회는 ‘박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편찮으시다.”라는 농담이 들립니다. 박사 학위에는 단 두 종류가 있습니다. 취득 학위와 명예 학위가 그것입니다. 취득 학위는 교육상의 학위입니다. 그것은 단과대학 혹은 종합대학에서 그러한 학위를 따기 위해 학교의 요구 사항을 다 채운 졸업자에게 수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학문 분야의 성취를 뜻하며 그 졸업자가 그 지식의 폭넓은 분야에 정통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취득 학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M.D.  Doctor of Medicine(의학박사) Ph.D.  Doctor of Philosophy(철학박사) Th.D.  Doctor of Theology(신학박사) Ed.D.  Doctor of Education(교육학 박사) 명예 학위는 말 그대로 대학에 대해 봉사 활동이나 혹은 괄목할 기여를 한 남녀에게 그 명예를 기리기 위한 방도로 수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명예 학위가 즉석으로 그 학위 수여자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명예 학위를 받은 사람이 받기 전보다 성경 사본들에 관해 더 많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명예일 뿐이지 학구적인 학위는 아닙니다. ‘명예 학위’를 가진 외과 의사에게 수술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 문제들에 관한 명예 학위 소유자들의 의견은 취득 학위를 가진 사람의 연구 결과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혹은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 유용한 증거들을 다 모아 철저히 연구한 이들도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명예 학위는 태권도의 ‘명예 검정 띠’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집안에서 띠고 다닐 수는 있지만 실제로 도둑과 싸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죽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다음은 몇 개의 명예학위 명단입니다. D.D.  Doctor of Divinity(신학박사) D.Mus  Doctor of Music(음악박사) D.Sc.  Doctor of Science(이학박사) L.H.D.  Doctor of Human Letters(인문학박사) Lit.D.  Doctor of Literature (or D.Lit)(문학박사) L.L.D.  Doctor of Laws(법학박사) Litt.D.  Doctor of Letters(문학박사)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형태의 학위는 제각기 중요성을 지닙니다. 명예 학위는 공훈의 상징이며 따라서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학교를 위해 수행한 가치 있는 행적에 대해 개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취득 학위는 학자를 부르는 학계의 칭호이며 실질적인 교육 업적에 의거한 것입니다.
2009-05-11 14:57:24 | 관리자
질문: 성경 역본들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5> 대답: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을 다해 지키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강조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1. 여러분 생각에 성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방법을 이용해서(레 10:1-3을 보십시오) 2.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적 권고들을 가능한 한 엄격히 지키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분께 사랑을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게 될 수고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구분 짓는 표시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그분을 사랑하는 표시는 곧 ‘그분의 말들’(words)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sayings)을 지키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8장 51, 5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와 같이 사랑은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saying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들’(word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 다시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건 단지 그리스어 원문의 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호 애재라! 이런 말은 단지 여러분을 더 깊고 더 치명적인 함정으로 유인할 뿐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예가 이를 잘 설명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는 도중 ‘큰 물고기’에게 삼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욘1:17).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큰 물고기’가 ‘고래’라고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유전학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치에 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바로 이 성경 구절에 이르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분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씀을 훔칩니다. 모든 새 역본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고래’를 한결같이 ‘물고기’로 고칩니다. 이 일은 그들이 중학교 생물학 시간에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고 배웠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보기에 모순을 가진 것 같은 성경 - 그런데 이들의 모순은 그들의 중학교 생물학 교사가 불어넣어 준 지식과 모순이 되는 것이지 성경 자체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님 - 과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것도 모를 만큼 지식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직면하고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여 쩔쩔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마태복음 12장 40절로 달려가서는 성경 즉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최종 권위가 되는 책과 예수님 곧 자기의 ‘주님’이시요, 구원자이신 그분의 입술에서 나온 ‘고래’라는 단어를 빼 버립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나오는 ‘고래’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ketos’이며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ichthus’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같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0절, 17장 28절 같은 곳에서 ‘ichthus’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만약 원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도 그것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로서 ‘성경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여기서 두 개의 중요한 성경적 진리들을 간과합니다. 첫째로, 그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해 두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졌음을 간과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이 단 하나의 생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 나머지 창조물에게 이름을 주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 21절에서 고래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피조물 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사실은 고래가 창세로부터 이미 ‘예정’(창1:21; 욘1:17)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성경 교정가들조차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을 돕겠다는 작은 ‘원조자’가 무시하는 두 번째 진실은,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고래’에서 ‘물고기’로 바꾼 것으로서, 이는 요한복음 14장 23절의 “내 말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깨뜨리는 것이며 실로 심각한 죄에 해당됩니다. 성경을 ‘정정하는 것’은 마치 흐르는 모래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헤치고 나오려고 발길질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그 속으로 더 빨리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NASV, NIV, NKJV와 나머지 새 역본들의 편집자들은 ‘ketos’를 번역하는 일에서도 틀렸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 또한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 즉 고래를 말씀하시고 여러분의 목사, 부모, 혹은 교수가 다른 것 즉 물고기를 말할 때 여러분은 단호하게 사람의 견해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감싸고 옹호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전적으로 사로잡혀야 합니다.
2009-05-11 14:55:28 | 관리자
질문: 성경과 그리스어 사전이 모순을 일으킬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6> 대답: 성경 말씀을 신뢰하고 과감히 사전을 던져 버리십시오. 종종 하나님의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단어가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권위 있는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사전을 예로 들 것입니다. 이것은 다소 어리석은 것으로서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최종 권위로 받아들인다는 그들의 소문난 주장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전이라든가 오류가 없는 그리스어 문법책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 하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그리스어 참고서들을 만든 오류투성이 인간 저자들의 견해보다 훨씬 더 권위 있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009-05-11 14:53:29 | 관리자
질문: 저는 저의 동료집단 내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한다면 미래 승진에 손해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9> 대답: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경의 입장에 서서 그분께서 당신의 앞날을 도우시리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정직함을 내다 팔고는 개가 뼈다귀를 바라며 유순히 행동하듯이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선택도 전적으로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009-05-11 14:48:33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성공회의 유아 세례 주는 자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9> 대답: 아닙니다.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흠정역 성경을 번역한 모임의 사람들은 성공회와 청교도 교회 출신의 성경 신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인품과 능력은 이미 위에서 증명한 바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성공회의 유아세례를 주는 자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말은 애석하게도 사실무근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신공격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빼앗아가려는 바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최소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음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다윗처럼 간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모세와 다윗처럼 살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 솔로몬 - 또 다른 성경 기록자 - 처럼 자기 자녀를 그모스와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처럼 주님을 격렬히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성경 기자들에게 무례히 행하려고 그들의 이 같은 단점들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기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좀 더 은혜로워야겠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예를 들었습니다.
2009-05-11 14:47:0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제 모교의 입장과 상반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0> 대답: 여러분은 ‘충성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여러분의 출신 학교보다 당연히 우위에 두어야 할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여러분은 ‘모교’(Alma Mater)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교’라는 단어는 ‘처녀’라는 뜻의 히브리어 ‘almah’와 ‘어머니’라는 뜻의 그리스어 ‘meter’의 조합어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Alma Mater’라고 하면 그것은 ‘처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용어는 명백히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녀 어머니’(Virgin Mother)를 가졌다고 외치며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다녔던 대학’ 혹은 ‘나의 출신 학교’라는 좀 더 긴 표현을 쓰는 편이 예수 그리스도께 더 많은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가 여러분을 교육시키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겪었을 노고와 노력에 감사해야 합니다. 교육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들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모교에 대한 감사를 고려한다 해도 여러분의 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은 것만큼 그 대학에 은혜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일단 졸업한 뒤에도 자신의 확신에 통제를 받을 정도의 굴욕적인 태도로 학교에 대해 ‘영원토록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협하여 자기네 학교 방침대로 끌고 가려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마련된 편지 즉 모교의 학장으로부터 온 ‘친애하는 청년 목회자에게’라는 편지에 대해 3종 우편물 이상의 비중을 두어선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속적으로 여러분에게 ‘우리가 너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하는 학교는 여러분의 자유가 아니라 구속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요구나 주장하는 바를 정중히 무시해 버리는 데 대해 전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이 학비, 방과 후 식사비, 그리고 교육에 관련된 다른 경비들을 자비로 지불하며 학교에 다녔다면, 소위 여러분 학교에 대한 ‘빚’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와 지도자들의 ‘희생, 선견지명, 헌신 등등’에 전심으로 감사할 수는 있겠으나 여러분의 빚은 여러분이 마지막 학비를 냈을 때 끝났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학위는 그들이 자선을 베풀기 위한 선물로서 거저 여러분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희생, 선견지명, 그리고 헌신’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의 학구적인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며 현금으로 지불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학교는 학위를 수여하는 일이 ‘멋진’ 행위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학위를 수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었기에 여러분에게 학위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원했던 요구 조건들을 채워 주면서 그것을 벌어들였습니다. 여러분이 현금 지폐를 지불한 것을 포함해서(어떤 경우에는 이자까지 더하여)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교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완전한 성경을 찾았지만 여러분의 학교나 ‘동창생’ - 그리스어로는 ‘alumni’인데 이는 ‘조명을 받은 사람들’(?)을 뜻함 - 과 불화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진 ‘빚’은 진짜이지만 모교에 진 ‘빚’은 단지 상상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쪽과 불화하는 게 더 좋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모교입니까? 여러분의 모교가 그릇된 것을 요구한다면 여러분이 예수님과 모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2009-05-11 14:45:3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원본보다 더 신뢰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진보적 계시’가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1> 대답: 아닙니다. ‘진보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란 용어는 성경 비평 학자들이 성경 신자들을 위협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에서 나온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영감은 자필 원본에서 끝이 났다. 따라서 단순한 역본이 자필 원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새로운’ 계시 즉 ‘진보적 계시’를 믿는 것이다. 과연 ‘진보적 계시’라는 것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편견, 견해 혹은 신념의 비중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최종 권위만이 사람이 믿기에 적당한 것이 무엇이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공적으로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백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성경에 ‘진보적 계시’에 대한 예가 있습니까? 최소한 두 군데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파라오 앞으로 갑니다. 그는 자기가 정말로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표적과 기적을 행합니다. 경쟁의 초기에는 파라오의 마술사들도 모세와 ‘기적 대 기적’으로 겨루기 위해 노력합니다(출7:11,12,22 ; 8:7). 우리는 파라오의 주요한 두 명의 술객들이 얀네와 얌브레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이름은 출애굽기의 마흔여덟 장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서른아홉 권 중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의 이름은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후에야 계시됩니다(딤후3:8).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진보적 계시’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열왕기상 17장 1절을 보도록 합시다. 구약 성경의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엘리야 대언자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왕기상 18장 41절에 보면 ‘자기의 말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삼 년 반 동안의 가뭄을 거두었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삼 년 반’의 가뭄이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열왕기상에는 어느 곳에서도 그 가뭄의 기간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25절에서 ‘삼 년 육 개월’이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엘리야의 가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삼 년 육 개월’이란 이 정보는 야고보서 5장 17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한 사건의 일부가 구약에 기록되고 그 나머지가 수 세기가 지난 후 신약에서 계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소 ‘진보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 비평 학자들의 이번 주장만큼은 참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이 난 김에 만일 여러분이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 모세가 내리친 반석이 어떤 종류인지 알고 싶다면 출애굽기에서 답을 찾지 말고 시편 114편을 읽으십시오. (*) 저자의 의도는 성경에 ‘진보적 계시’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 결코 킹제임스 성경이 원본보다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거나 ‘향상된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제들을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반대 진영에게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므로 이런 논제는 이런 것이 있다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는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원어 성경을 교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원어는 처음부터 완전하므로 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 원어 단어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었습니다.
2009-05-11 14:43:57 | 관리자
질문: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역사에 근거를 둔 입장’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2> 대답: ‘역사에 근거를 둔’ 견해는 성경을 절대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변개시키려는 자를 보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데 사용하는 논의들 중 하나는 ‘전통’에 대한 권위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1545년에 열린 트렌트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요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 공회에서 전통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트렌트 공회는 이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근본주의’ 성경 정정가들은 전통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똑같은 이유 즉 성경으로부터 권위를 빼앗으려는 이유로 그러한 일을 합니다. 물론 근본주의 성경 정정가는 자기가 설교단에서 ‘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회중들의 머리속에 ‘경종’이 울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이라고 말하는 대신 ‘역사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적 견해란…’이라고 말하여 청중들을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도대체 ‘역사적 견해’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것은 전통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누군가가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적 견해가 아닙니다.”라는 연약한 논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될 때 경계하십시오! 여러분은 영적으로 로마 카톨릭 주의 성향을 띤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이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그가 여러분을 저주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2009-05-11 14:41:33 | 관리자
질문: 할 일이 많은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가 역본 문제를 거론해야만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3> 대답: 여러분이 이 문제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거론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정말로 완전한 성경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듣게 될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난 역본 문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뒤로 숨고는 경건한 척하며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시종일관 여러분의 견해를 똑같이 유지한다면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완전한 성경의 존재 여부에 관한 문제가 여러분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에게는 다음의 어떤 사항도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사7:14)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일5:5)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롬5:8)  4.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고전15:4)  5.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구원(엡2:8,9)  6.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이전의 재림(살전4)  7. 문자 그대로의 천국의 존재(요3:13)  8. 문자 그대로의 지옥의 존재(마9:42-44)  9.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 인정(창1:1) 이것은 결코 자칭 ‘근본주의자’라 하는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확신들을 정리한 목록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려 깊고 이성적인 사람이 성경으로부터 도출된 이런 것들은 문제 삼으면서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되는 성경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 성경이 그 안에 오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확신의 바탕이 되는 이런 구절들이 옳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나는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라면 인정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몰몬 교도들도 다 믿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 판결을 내릴 자가 누구입니까? 성경 자체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를 ‘문제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근본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됨으로 발생하는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친구, 가족, 그리고 동료들의 거부 반응을 두려워합니다. 진리를 위해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담대하십니까?
2009-05-11 14:39:50 | 관리자
질문: 성경 문제로 인한 혼란의 배후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게 아닐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3> 대답: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창시자이시므로 마귀야말로 이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많은 성경 비평 학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전투의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다고 다소 분개하여 외치는데 이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다는 그들의 말은 옳지만 성경에 대한 완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귀에 의해 지시를 받고 있다는 그들의 추측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옳은 추측일까요? 성경 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봅시다. 1611년 초판이 인쇄된 이후 킹제임스 성경의 인기는 상승해 왔습니다. 제임스 왕이 영국의 교회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제적인 법령을 선포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년 내에 이전에 번역된 모든 역본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작금의 역본들처럼 뉴욕 매디슨가의 타락한 방식으로 과대 선전되지도 않았지만 이내 영국 국민들과 영국의 식민지 시민들의 손과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역본들을 쓸어내 버렸습니다. 대영제국을 정복한 후 그 성경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그 성경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깃발 아래 이미 확고히 심겨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점을 뒤엎어버렸으며 그 후 자신의 이상대로 나이 어린 미국의 숨결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의 진리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 체계 즉 성경에 기초한 교육 체계의 설립을 유도했으며 종교와 출판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습니다. 그 당시 그러한 사상들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도 낯선 것이어서 단지 정부의 ‘실험’으로밖에 묘사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성경은 의로운 설교자들을 임명했고 그들은 도보로 그리고 말을 타고 광야를 개척하며 어느 곳이든 복음과 올바른 삶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민족’이라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일이 완수되자 그 성경은 이방 세계 정복에 올랐으며 프린스턴, 하버드, 예일 등의 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선교 단체가 만들어지고 열정을 가진 젊은 선교사들이 오직 킹제임스 성경과 하나님의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사탄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사역자들 그리고 그 능력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던 그가 하나님의 성경이 도전 받지 않은 채 세계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습니다. 사탄은 웨스트코트(Brook Foss Westcott)와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같은 자기의 하수인을 통해 1884년에 자신의 변개된 역본인 「영어개역성경」(Revised Version, RV)을 출간했습니다(신약 성경은 1881년에 출판되었음). 1611년과 1884년 사이에 산발적으로 사적인 역본들이 나오긴 했어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받은 성경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는 개역성경(RV)이라 불린 이 새 역본이 첫 번째였습니다. 비록 그 개역성경이 하나님의 성경을 대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자들의 주장은 지난 400년 간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과 관련하여 치러진 전쟁 중 적군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장을 향해 쏜 첫 총탄이었습니다. 1901년에는 후에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ASV)이라 불리게 된 「미국개역성경」(American Revised Version, ARV)이란 총탄이 다시 쏘아 올려졌습니다. 사실 ASV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표준’(standard)이 될 수 없기에 그 명칭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미국 신학자들의 총아였던 이 역본은 23년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그 판권이 팔려나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처럼 들리십니까? ASV는 더 개정을 거친 후 1954년에 개역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 RSV)으로 재 출판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는데 몇몇 이름만 말하자면 1960년에는 신미국표준역(NASV)이, 1967년에는 뉴스코필드역(New Scofield Version, NSV)이, 1978년에는 신국제역(NIV)이, 그리고 1979년에는 뉴킹제임스역(NKJV)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향해 발사된 이 모든 총탄들 즉 새 역본들은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성경이 완전하다는 대전제를 부인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산물이며 결국 사탄의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들의 상당량은 개악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순수한 안디옥 필사본들로부터 번역된 것도 소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에 의해 오염되었습니다. 이것은 출판 분야에서 나타난 사탄과의 전쟁이며 사실 그것만이 그의 공격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전후방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이용했습니다. 자기의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이 출판물을 통해서 대중화되는 사이에 그는 신학교 안에서 그리고 신학교를 통해서 자기의 알렉산드리아 철학을 조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본주의 신학교에 입학한 진지하며 젊고 순수한 신학생들은 교실에서 성경의 무오성에 도전을 주는 강의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는 성경의 완전성에 대해 극도의 찬양을 듣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연사들은 영어 성경의 권위를 평가 절하시키며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면서도 자기 학생들에게는 자기들이 자필 원본의 무오류성을 믿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도 ‘근대주의자’도 아니라는 확신을 언제나 심어 줍니다. 모든 배도자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감추기 위해 지금 존재하지 않고 구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신비한 존재인 자필 원본을 들고나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 한 때 성경의 완전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순수한 신학생은 이제 자신의 ‘모교’(Alma Mater)에 전적으로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교육에 의해 의기소침하게 되고 무장해제 된 젊은 신학교 졸업생들은 미국 곳곳의 설교단 위에 서서 자기 교수들에게서 배운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약한 비평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됩니다. 사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인쇄기로부터 갓 찍혀 나온 새 역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크리스천이 “이 성경 즉 예전에 소실된 고대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한 권의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한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면 - 사실 그들도 교육을 받기 전에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육의 혜택으로 인해 이를 빼앗겼음 - 그들은 큰 위협을 느끼고 그를 ‘광신자’나 ‘이단 교도’로 몰아서 쫓아내려 합니다. 진지한 눈빛을 하면서 그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믿는 믿음으로 가득 찬 크리스천에게 최종적으로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신은 마귀가 이 성경 논쟁을 이용해서 크리스천들을 분열시키고 주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이죠.”라는 답변을 한 뒤 그는 “그러나 결코 내 동료들이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지 않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부언: 아직 좀 더 생각해 볼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우리가 우리 방식을 따른다면 목회자는 설교단에 서서 성경을 읽고 앉아 있는 다른 이들도 그와 동일한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일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성경을 수정하고자 하는 자들의 말을 따르게 되면 모두가 각기 다른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큰 혼란입니다. 그렇다면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누구겠습니까?(고전 14:33). 그것은 바로 마귀입니다.
2009-05-11 14:38:04 | 관리자
질문: 성경 문제를 다룰 때 늘 언급되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누구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4> 대답: 그들은 열렬한 마리아 숭배자요, 구원받지 못한 성경 비평 학자들입니다. 웨스트코트(Brook Foss Westcott, 1825-1903)와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는 거듭나지 않은 성공회 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성경도 완전하지 않다.”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에 완전히 심취되어 킹제임스 성경과 안디옥 계열의 그리스어 본문인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 대해 악의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불신앙에 대해서는 본인의 저서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에서 여러 문서들의 증거를 들어 충분히 논의한 바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행위로든 믿음으로든 사람은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이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코트는 공산주의를 신봉했기에 그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가 ‘코에노비움’이라고 불렀던 대학 캠퍼스의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자기들 스스로 조직하여 ‘유령 길드’라고 이름 붙인 단체를 통해 그런 일을 많이 시도했습니다. 웨스트코트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고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사라에서 ‘마리아’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호르트는 다윈과 진화론의 숭배자요, 옹호자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다 열렬한 마리아 숭배자였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안디옥 본문을 버리고 마귀의 알렉산드리아 주술에 빠지게 되었고 또 어떻게 마귀에 의해 1871-1881년의 영어 성경 개정 위원회를 지도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그리스어 본문을 편집한 다음 - 이 본문은 출판되지도 않았고 사실 ‘공인 본문’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었음 - 성경 개정 위원회를 통해 그 내용을 비밀리에 조금씩 조금씩 반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흠정역 성경을 개정한 개역성경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영어 성경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학자들은 사본 역사에 관한 그들의 불안정한 이론들을 검토하고 그들의 논리가 설득력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여 구원받지 못했고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2009-05-11 14:35:32 | 관리자
질문: 그리스 태생의 학자라면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므로 영어 성경을 고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5>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성경을 고칠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그리스어와 현재 그리스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대 그리스어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서로 호환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그리스 사람’이기 때문에 영어 성경을 정정하기에 적합할 것이라는 그릇된 추측은 좋게 말하면 유머가 넘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누구든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성경을 고치라는 영감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광고업자가 “그리스 사람이 그리스어로 무엇을 가르치니까 믿을 만 하다.”라는 주장은 그 그리스 사람의 책을 팔아 주어 그를 부자가 되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효과가 없습니다.
2009-05-11 14:29:52 | 관리자
  질문: 그리스어 사본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금 덩어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7> 대답: 금광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데도 왜 고작 ‘금 덩어리’만으로 만족하려 하십니까? 목회자들이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같은 원어에서 찾아내려 하는 ‘금 덩어리’의 대부분은 사실 그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조차 못합니다. ‘금덩어리’를 찾아내려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동안 그리스어에서 아무도 찾아낸 적이 없는 대단한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보여 주시리라고 믿는 매우 오만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금덩어리’를 찾아낸 뒤 자기들만이 가진 매우 놀랄 만한 그리스어 ‘실력’으로 동료 목회자나 성도들을 감화시키려고 합니다. 비록 그들이 설교단에 서서 성경을 들고는 “이 성경은 완전합니다.”라고 외치지만 사실 그들은 영어 성경이든 그리스어 성경이든 세상에 있는 성경은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면서 읽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분께서 그리스어를 좀 더 낫게 번역할 방법을 자신들에게 보여 주시기를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시기에 그들은 대개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어 게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게임은 그리스어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그리스어 게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거짓 학자나 우쭐대려는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단순히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Strong's Concordance)이나 혹은 「영의 성구용어색인」(Young's Concordance) 등을 구입하는 일입니다. 이런 ‘성구용어색인’의 뒤에는 성경에서 사용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목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어의 아래에는 그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번역된 예와 목록이 있습니다. 이제 원어에서 ‘금 덩어리’를 캐려고 열심을 내는 학자나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란 단지 거기에서 번역된 영어 용례를 서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하플로테스’(haplotes)라는 그리스어를 하나 택합시다. 이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어 ‘하플로테스’(haplotes)의 번역 용례 그리스어 ‘하플로테스’(haplotes)의 번역 용례   구절 번역 예 1 고후9:11 Bountifulness(풍부함) 2 고후9:13 Liberal(너그러운) 3 고후8:2 Liberality(너그러움) 4 롬12:8, 고후1:12 Simplicity(단순함) 5 엡6:5, 골3:22 Singleness(단일함) 자, 이제 우리의 열심 있는 학자가 자신의 뛰어난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플로테스’가 번역된 다른 구절을 찾는 일입니다. 예를 들기 위해 먼저 에베소서 6장 5절을 택하겠습니다(위 표의 5번 용례).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단일한 마음(in singleness of heart)으로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6:5). 그는 설교 시간에 자신이 미리 준비한 ‘희생물’ 즉 위의 구절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몇 마디 혹평을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달리 번역될 수 있는 단어들 중 하나를 취해 - 예를 들어 위 표의 3번이나 혹은 4번 - 그 구절에 집어넣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게거품을 물고 흠정역 성경역자들이 원어를 매우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여러 차례나 지적하면서 자기가 선택한 단어에 대한 장점들을 장장 10-15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합니다. 물론 그가 나중에 로마서 12장 8절의 말씀을 설명할 때는 즉 같은 그리스어가 위 표의 4번처럼 ‘단순함’(Simplicity)으로 번역된 곳에서는 역으로 5번 용례를 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장점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섬기며,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simplicity) 그 일을 하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8). 물론 이때에도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의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혹독하게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이 일이 이처럼 손쉽게 이루어진 줄도 모르고 그의 지성과 그리스어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으로 인해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우러러 쳐다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의 오류를 지적해 줄 재능 있는 목회자나 교수를 만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얄팍한 ‘그리스어 게임’의 속임수에 걸려 넘어가게 되고 결국은 자신들같이 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설교자가 소유한 그리스어에 관련된 도구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경받을 만한 스승만큼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나리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칭 성경학자라 하는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는 그가 너무도 쉽게 청중을 속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로마서 8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 절을 읽으며 그는 어떤 특별한 단어에 이르자 거기서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어를 잘못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의 장점에 대해 10-12분 동안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중들은 어리석게도 이 사람의 ‘원어 실력’으로 인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설교 경연대회’에서 14살짜리 소년이 그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런 일은 사실 15달러짜리 ‘성구용어색인’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저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또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열심 있는 설교자 역시 로마서 8장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같은 절을 읽고는, 그 전 날 다른 전문가가 끄집어냈던 똑같은 단어에 다다르자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게도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전 날 저녁에 제가 들은 적이 있는 그 설명을 재탕하는가 보려고 재빨리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지는 않더군요. 이 유별난 학자는 문제시되는 단어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전 날 저녁의 판매원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선택한 단어나 혹은 전 날 저녁 제가 들은 적이 있는 그 전문가가 선택한 단어보다 자신이 선택한 단어가 갖는 장점들에 대해 장황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두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두 개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유일하게 일치한 점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오역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존경받는 견해를 재빨리 학문 쓰레기 더미 위로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께서 1611년에 선택하사 자신의 책에 기록하신 단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원어에서 ‘금 덩어리’를 찾는 두 번째 방법은 그리스어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 위와 같은 일을 할 때 줄곧 사용하곤 하는 방법인데 이 경우에 그들은 ‘성구용어색인’ 대신 ‘그리스어 사전’에서 단어를 선택합니다. 이 경우에도 결과는 항상 동일하여 킹제임스 성경은 오역 투성이로 매도당하고 청중들은 설교자의 원어 실력과 지성의 깊이에 압도당합니다. 그들은 성경 교사들의 그리스어 실력과 겨루어 보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력이 그보다 훨씬 못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세 번째 형태의 ‘금 덩어리’는 원어 성경학자들이 만들어낸 완전 허위 진술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예로 그리스어 ‘아가페’(agape)와 ‘필레오’(phileo)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모두 ‘사랑’(lo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15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웬만큼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이라면 아마도 거짓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한두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어에서 ‘아가페’(agape)라는 단어가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필레오’(phileo)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친구 사이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뒤 우리의 설교자는 영어 단어(혹은 한국어 단어)의 제한된 표현에 대해 거의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한탄을 하며 자기의 주장을 폅니다. 다시 말해 영어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께서 사실은 이렇게 물어 보신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agape, 즉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로 사랑하느냐? 이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 즉 일상적인 친구간의 사랑)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뒤 원어 성경 추종자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던 대답을 듣지 못하셨기에 베드로에게 다시 물어 보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agape)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런 깊은 관계에 자신을 맡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다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제 이쯤에서 우리의 성경 교정자는 큰 슬픔에 잠기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헌신이 부족함을 이해하시고 ‘아가페’ 대신 ‘필레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질문을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느냐? 그러자 이같이 갑작스런 변화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자신이 주님께 영적으로 성실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설교자는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긴 베드로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의 거짓 교사는 의미가 빈약한 영어나 한국어를 사용해서는 이 구절의 깊은 뜻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저 신뢰할 만한 ‘그리스어’는 영어나 한국어가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참으로 위의 예는 ‘원어 찬양’을 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큰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단점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위의 정의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저의 선입견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견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아가페’와 ‘필레오’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 기자들이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에서 사용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세밀하고 정직한 연구에 근거하여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아가페’와 ‘필레오’에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 기자들은 이 두 단어를 늘 바꾸어가며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그리스어 교사들 그리고 그리스어 설교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신학 대학의 교수나 혹은 목사가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해 잘못 가르쳐서 이 같은 속임수에 빠지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즉시 여러분의 선입견을 가지고 저의 주장을 반박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경건하고 지식이 많은 교수들이 틀릴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사실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 바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제가 대조를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신약 성경의 다른 기자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결코 그들만이 저를 지지하는 최후의 증인들은 아닙니다. 최종적이고도 가장 확실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분은 바로 독자 여러분입니다. 수년 동안 저는 제가 말씀을 전하는 성경 사경회에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거짓 가르침에 관하여 성도들에게 한 가지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 시험지는 다음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다면 자유롭게 그 시험 문제에 대답을 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1부에서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가페’와 ‘필레오’를 사용하신 용례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나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혹은 다른 어떤 도움에 의지하지 마시고 단지 영어 성경 비평 학자들이 제시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십시오. 자, 이제 인용문을 읽으십시오. 그 뒤 예수님께서 그 구절에서 ‘아가페’를 말씀하셨을지 혹은 ‘필레오’를 말씀하셨을지 깊이 생각해 보시고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런 다음 ‘아가페’라고 생각되면 ‘A’를, ‘필레오’라고 생각되면 ‘P’를 인용 구절 옆에 있는 공란에 적어 넣으십시오. 제2부도 제1부와 동일한데 단지 신약 성경의 다른 기자들이 기록한 용례들을 사용했다는 것만 다릅니다. 제1부와 마찬가지로 ‘아가페’에 해당되면 ‘A’를, ‘필레오’에 해당되면 ‘P’를 적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단지 원어 성경학자들이 이 단어에 내린 정의를 사용해서 시험을 치러야만 합니다. 결코 추측으로나 예감으로도 하지 말고 그들의 정의를 따라 시험 문제에 정직하게 답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끝마쳤으면 이 글의 뒤에 있는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첨부된 PDF 파일을 보기 바랍니다. 
2009-05-11 14:11:27 | 관리자
질문: 공인 본문은 1633년에 가서야 등장했는데 어떻게 1611년에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이 그것으로부터 번역될 수 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8> 대답: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에 사용된 그리스어 본문은 역사를 통해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수년 간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 본문은 상당수의 서로 다른 편집자들에 의해 조합되었습니다. 이들 중 유명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베자(Theodore Beza),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엘지버 형제(Elzevir Brothers), 아브라함과 보나벤쳐(Abraham and Bonaventure) 등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다섯 가지 판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1516년의 첫 판에 이어 마르틴 루터가 그의 역사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독일어 번역에 사용했던 1519년 판이 나왔습니다. 그의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판은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나왔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작품은 훌륭했고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모범이 되었습니다. 스테파누스는 1546년, 1549년, 155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1551년에 네 개의 판을 내었습니다. 베자도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여러 판 출판했으며 1565년, 1582년, 1588년, 그리고 1598년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의 판을 출판했습니다. 이것들은 2절판으로 인쇄되었는데 이는 종이 한 장을 접어 4페이지 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한 1565년, 1567년, 1580년, 1590년, 그리고 1604년에 다섯 개의 8절판 책을 출판했습니다. ‘8절판’이란 종이 한 장이 여덟 개의 페이지를 갖도록 인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쇄된 책들은 2절판 책보다 지면의 크기가 더 작아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두 권 혹은 그 이상의 권수로 작품을 인쇄해야 하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1598년의 베자 판과 1550년, 1551년의 스테파누스 판은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에 의해 가장 중요한 번역 원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뒤 몇 년 후에 엘지버 형제가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1624년, 1633년, 그리고 1641년에 출판했습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표준을 따랐던 베자의 판을 충실히 따랐으며 1633년 판 서문에다 그때까지 나온 본문들을 다 수용하는 유명한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문구는 라틴어로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사람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수용된 책으로부터 입수한 본문에 따르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공인 본문’(영어로 Received Text 혹은 그리스어로 Textus Receptus)이라는 호칭이 제목이 탄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인 본문’이라는 호칭이 비록 흠정역 성경이 번역된 지 22년 후에 만들어졌지만 그렇게 불린 본문이 안디옥에 기원을 둔 ‘참된 그리스어 본문’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이 ‘공인 본문’에서 나왔다고 하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 명칭 안디옥 계열 알렉산드리아 계열 안디옥 본문(Antiochian Text)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 시리아 본문(Syrian Text) 다수 본문(Majority Text)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 종교개혁 본문(Reformation Text) 황제 본문(Imperial Text) 전통본문(Traditional Text)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알렉산드리아 본문(Alexandrian Text) 이집트 본문(Egyptian Text) 국지적 본문(Local Text) 헤시키안 본문(Hesychian Text) 소수 본문(Minority Text)      
2009-05-11 14:04:41 | 관리자
질문: 뉴킹제임스역은 안디옥 사본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보다 개선된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8>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뉴킹제임스역은 킹제임스 성경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뉴킹제임스역(NKJV)과 영어 성경과의 관계는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과 그리스어 성경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뉴킹제임스역은 “성경이 완전할 리가 없다.”는 개탄스런 교리 - 그들이 설교할 때 뭐라고 말하든 상관이 없음 - 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과 무기력한 지성인들이 순수한 본문을 변개하고 개정해서 만든 것입니다. 다른 현대 역본들과는 달리 뉴킹제임스역은 개악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이 아닌 ‘정확한 안디옥 필사본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번역 작업을 실행한 사람들은 성경이 완전하지 않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그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이 같은 혐의를 맹렬히 부인하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성경도 완전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만든 뉴킹제임스역 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이미 소실된 것이며 - 하늘나라에 ‘안치된’ 것이며 -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말씀들’이 아니라 ‘사상들’이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 바로 학자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번역 위원회에 소속된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훌륭한 설교자요 목사일지는 모르지만 그 같은 사실이 그들에게 성경을 정정할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직함이 완전함을 향상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듯이 ‘좋은 것(즉 KJV)을 더 좋게 만드는(NKJV로)’ 대신에 그들은 단지 가까스로 많은 애를 써서 ‘완전한 것을 더럽혀 놓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현대판’ 성경 번역 위원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상당한 명성을 가져다준다(마23:5-7)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문제가 돈 때문에 생깁니다.
2009-05-11 14:02:2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