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최근에 나온 뉴스코필드 성경도 킹제임스 성경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9>
대답: 뉴스코필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닐 뿐만 아니라 스코필드 성경도 아닙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이 스코필드 성경과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한 마디로 스코필드 박사(Dr. C. I. Scofield)는 뉴스코필드 성경을 편집하지 않았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21년에 작고했으므로 매우 ‘특별한 섭리에 의해’ 부활하지 않고서는 1921년에 죽은 사람이 1967년에 책을 편집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출판업자는 이 새로운 ‘판’을 내면서 스코필드 주석 성경도 스코필드 박사가 1909년에 처음 판을 출간한 후 1917년에 자료를 보충해서 다른 판을 출간했다는 점을 들어 자기들이 새 판을 낸 것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고친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이에게 그것도 자기가 죽은 지 45년 후에 자기 이름을 사용해서 자기의 작품을 자유롭게 고칠 수 있도록 백지 수표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드’의 끝 부분을 고치고서 셰익스피어의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직하지 못한 행위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뉴스코필드 성경 편집자들은 스코필드 박사가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편찬 작업에 포함시켰던 스코필드 주석의 특성들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이 부정직한 작품 즉 1967년판 뉴스코필드 성경 서문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뉴스코필드성경:
이 개정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개선 향상되었습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본문상의 주요 단어 변화(따로 음성표기를 하지 않고); 철자에 악센트 부호나 발음기호를 직접 표시하는 방식을 새롭게 편집한 것; 저자, 주제, 그리고 연대의 명시 외에 소제목 등을 포함한 성경 각 권의 도입 부분들의 개정; 각주들에 대한 해설, 몇몇 각주들의 삭제 그리고 많은 새로운 각주들의 추가; 난외주들의 보강; 전체적으로 새로운 연대표 제시 ; 새로운 색인; 이 판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용어 색인; 새 지도들; 그리고 더욱 읽기 쉬운 인쇄체.
그들은 자기 입으로 자기들이 스코필드 박사가 사용한 본문 즉 킹제임스 성경과 성경 각 권의 도입 부분 그리고 주석, 난외 주, 연대기 및 그밖에 다른 많은 특성들을 개정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과연 스코필드 박사가 이러한 개정들을 승인해 주었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엔돌의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던 것처럼 그 위원회의 9명의 위원들이 스코필드를 불러올릴 수 있었다면 혹시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사실 그 출판사는 개정 위원들이 자의로 그런 변화들을 선택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견해는 전체 위원회의 신념이나 사고를 반영한다.
이러한 속임수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침례(Baptism)에 대한 사도행전 8장 12절의 주석을 뉴스코필드 성경에서 살펴봅시다.
침례는 사도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안에 소속된 주요 그룹들 사이에서 실행되어 왔으며 주의 만찬과 더불어 두 가지 규례로 알려져 있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에는 침례의 세 가지 다른 유형이 사용되었는데 성수살포(sprinkling, 뿌리기), 관수례(pouring, 붓기), 그리고 침수(immersion, 담그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9명의 개역자들이 - 스코필드 박사가 아님 -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이들을 분리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느 한 그룹을 ‘프로테스탄트’라고 정의한다면 나머지 한 그룹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 그리스도의 교회란 말입니까?
두 번째로, 이 9명의 배도한 개역자들은 - 스코필드 박사가 아님 - 성경적인 증거도 없이 크리스천들이 침례뿐만 아니라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 즉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석이 1967년도 뉴스코필드 성경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책은 먼저 표지에서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 즉 스코필드 박사가 편집에 참여했다고 거짓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면 1917년에 나온 진짜 스코필드 성경에서 사도행전 8장 12절에 대해 그 책의 편집자인 스코필드 박사는 뭐라고 했을까요? 아무런 주석도 없습니다. 그런 주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은 스코필드 박사 본인이 자기의 생애에서 단 한 번도 승인한 적이 없는 주석들 즉 후에 임의로 추가된 ‘스코필드’ 주석들과 본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것이 정직한 것인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는 증거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KJV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난외주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며 더더욱 스코필드 성경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최근에 뉴스코필드 성경의 크기나 형태가 「스코필드 성경」과 더욱 비슷하도록 바뀌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진짜 스코필드 성경을 원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수로 뉴스코필드 성경을 구입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성경’ 판매는 수지맞는 사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009-05-11 13:36:58 | 관리자
질문: 최근에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하는 신국제역(NIV)은 믿을 만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0>
대답: 아닙니다. 신국제역은 신학과 교리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국제역(NIV)은 네슬레(Eberhard Nestle)가 1979년에 출간한 「그리스어 성경 제26판」에 기초한 역본으로 1969년에 출간된 「네슬레의 제23판」에 기초를 둔 신미국표준역(NASV)과 더불어 이집트 사본 계열에 속합니다. 이것들과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뉴킹제임스역과 뉴스코필드 성경을 제외한 나머지. 이 둘은 이 책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었음)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겐에 의해 더럽혀진 필사본들의 산물입니다.
NIV와 NASV에서 발견되는 몇몇 개악들(corruptions)에 대해서는 근본주의 교리들에 대해 다룬 이전 질문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이러한 실수투성이 역본들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연구한 책이 아님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다 논의하자면 두꺼운 책 한 권은 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7-18).
2009-05-11 13:34:3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얻을 수 없었던 필사본들이 1611년 이래로 상당수 발견되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에게 강점이 됩니까? 약점이 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1>
대답: 그것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뒷받침해 주는 강점이 됩니다.
1611년 이래로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것들이 새로운 본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수많은 비평 학자들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소유하지 못했던 ‘새로운 증거’를 들어가며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현대 비평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독본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1611년 이후에 발견된 사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내 사본’이며 이것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는 사본입니다. 이 증거물은 1841년 티센도르프(Constantine Tischendorf)가 시내산 기슭의 성캐더린 수도원의 - 천주교 사원임을 기억하십시오 -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시내 사본’이 역시 변개된 천주교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의 자매 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둘 다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내 사본’이 흠정역 성경이 번역된 지 200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을지라도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에게는 이미 1481년에 발견된 ‘바티칸 사본’과 1582년에 출간된 영어 성경 즉 예수회 성경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본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에게는 없었으며 단지 현대 역본 역자들에게만 있는 ‘유용한 본문’(?)이란 단 하나도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009-05-11 13:32:40 | 관리자
질문: 현대 역본들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2>
대답: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읽기에는 쉬울지 모르나 그 어느 것도 말씀 자체를 이해하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현대 역본들을 판매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광고 전략 중 하나는 장래의 고객들에게 그것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었다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일단 고객이 된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고어로 된’ 킹제임스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감사한 마음으로 현대 역본 영어 성경을 구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이제부터 성경에 관한 한 나는 무지의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자기 자신에게 선고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 영어 역본들은 읽기엔 쉬울지 모르나 이해하기엔 용이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만일 킹제임스 성경의 ‘고어’와 ‘thee’ 그리고 ‘thou’가 성령님께서 크리스천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데 정말로 거침이 된다면, 지금 성경 판매 시장에 나와 있는 현대 역본들도 분명히 성령님의 사역에 거침이 될 것입니다. 한 번 그런가 안 그런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신미국표준역(NASV), 신국제역(NIV), 뉴킹제임스역(NKJV)과 현대인의 영어성경(TEV) 같은 현대 역본들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면 그것들을 읽을 때 성령님의 메시지가 크리스천들에게 보다 더 자유롭게 흘러넘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 보다 훌륭한 영적 승리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음은 명백합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19세기나 심지어 20세기 초의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양육 받았던 크리스천들보다 더욱더 세속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덜 헌신적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인 관측자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분명한 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이 정말로 ‘이해하기 쉬운’ 성경이었다면 죄와 세상 그리고 육욕과의 전투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어야 했지만 이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만약 현대 역본들이 정말로 이해하기에 더 쉽다면 하나님께서 그 중에 최소한 하나라도 사용하셔서 이 나라에 큰 부흥을 일으키시고 이로써 그것들에 대해 감사를 표하셨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스러운 고어체’로 적힌 킹제임스 성경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에 거침돌이 되어왔다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자신의 백성들이 이해하기에 더 쉬운 다른 역본을 사용하려 하셨을 것이며 또 그와 동시에 그런 역본들에게 큰 복을 주셨어야 한다는 것은 유년주일학교 학생이라도 다 아는 일일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오늘날의 현대 역본들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종류의 영적 각성 - 오순절 은사운동 등의 비성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 도 일어나지 않았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현대 역본들은 심지어 크리스천 학교에서조차도 부흥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1901년의 미국표준역(ASV)을 시작으로 해서 현대 영어 역본들이 등장한 이래로 미국에서는
1. 하나님과 기도가 공립학교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2. 낙태가 합법화되었으며
3. 전국적으로 동성연애가 ‘사람의 기호에 따른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4. TV와 VCR을 통한 도색 문화의 가정 침투와
5. 아동 유괴, 만연된 호색 문학의 득세와
6. 마약의 유행과
7. 사탄숭배의 기세가 드높아졌습니다.
이것을 ‘부흥’으로 간주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일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새 역본이 성공했음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는 단 하나의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잘 팔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뉴욕 매디슨가 (출판사 거리)의 타락한 판매 방식 즉 이윤 추구만을 위해 과대광고도 마다하지 않는 방식은 크리스천들에게 마땅히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TV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런 광고에 순종이나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그건 유익한 것임에 틀림없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있잖아?”
그러면 현대 역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단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있긴 합니다. 확실히 출판사들은 수백만 부의 성경을 찍어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들만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한국도) 크리스천들은 영적으로 곤핍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성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성경 심리학자’(Bible psychologist)에게로 갑니다. 미국은(한국도) 매춘부처럼 되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도덕적으로 부패했습니다(겔16:49).
‘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가져온 영적 도움과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희망은커녕 바로 그러한 역본들로 인해 우리는 이처럼 절망적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2009-05-11 13:31:04 | 관리자
질문: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님’을 ‘그것’이라고 부른 것은 오역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3>
대답: 로마서 8장 26절에서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를 ‘그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대적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주장은 실로 미약한 주장에 불과하며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서 쉽게 논박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어와 성경 비평 학자들의 위선적 행위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이것을 간단하게 논박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이기 때문에 주님의 증언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 26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Likewise the Spirit also helpeth our infirmities: for we know not what we should pray for as we ought: but the Spirit itself maketh intercession for us with 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
이 구절에서 중간에 ‘그것’(itself)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spirit)이라는 의미의 ‘프뉴마’(pneuma)입니다. 실로 ‘영’은 공기와 같기 때문에(창1:7; 요3:8) 우리는 공기의 작용에 의한 어떤 장치 혹은 작업 등을 설명하기 위해 ‘공기에 의해 움직이는’(pneumatic)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어는 각각 뚜렷한 성(性)이 있어서 남성, 여성 혹은 중성을 갖습니다. 남성은 관사 ‘o’로, 여성은 ‘a’로, 중성은 ‘to’로 표시됩니다. ‘영’(spirit)이란 단어인 ‘pneuma’는 중성이며 이 사실은 심지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1학년생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많은 열등한 역본들에서 ‘pneuma’를 ‘그분 자신’(himself)으로 번역한 것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고 킹제임스 성경이 ‘pneuma’를 ‘그것’(itself)으로 번역한 것은 정확하게 원본을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것이 마치 그리스어를 ‘오역한 것’인양 킹제임스 성경을 비웃기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어를 알맞게 번역한 이것을 그들이 비평하는 것은 정말로 위선입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모욕할 뿐 아니라 무지하게도 ‘pneuma’를 ‘그분 자신’(himself)으로 부적절하게 번역한 NASV, NIV 그리고 NKJV 같은 다른 역본들을 찬양합니다.
두 번째로, 킹제임스 성경 로마서 8장에서 성령님을 ‘그것’이라 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비평 학자들은 자기들의 위선과 하나님의 성경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더욱더 드러내기 위하여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하나님을 비인격체인 것처럼 ‘What’으로 부른 NASV와 NIV 같은 역본들을 적극 장려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흠정역 성경은 하나님을 인격체로 ‘Whom’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20세기 성경 비평 학자들의 위협을 전혀 개의치 않는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여인에게 주저 없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Ye worship ye know not what: we know what we worship: for salvation is of the Jews.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what’ 즉 ‘알지 못하는 것’이란 누구 혹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절에서 그분의 말씀이 더욱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But the hour cometh, and is, when the true worshipers sha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eth such to worship him.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켜 중성인 ‘what’으로 칭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학식을 뻐기면서 롬8:26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21세기의 일류 학자들 집단은 NIV, NASV, NKJV 등을 번역하면서 요4:22에서 하나같이 중성인 ‘what’, ‘which’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위선입니다. 그들은 한 군데서는 그리스어에 있는 대로 중성으로 정직하게 번역하지 않고 다른 데서는 있는 대로 중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랬듯이 우리의 킹제임스 성경에 단 한 점의 오류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느 것을 따르시렵니까?
2009-05-11 13:29:0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에도 처음엔 외경이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4>
대답: 실리긴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으로 실리지 않았고 참고자료로 실렸습니다.
흠정역 성경을 향한 공격 중 또 다른 하나는 흠정역 성경의 초기판들이 구약과 신약사이에 외경들을 포함했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흠정역 성경 번역자들이 그런 외경들을 영감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일곱 가지 이유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외경이라고 번역된 ‘어포크라이퍼’(apocrypha)라는 말은 원래 ‘숨겨진’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으나 주후 450년경부터는 구약 시대의 ‘정경이 아닌 책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외경 문제의 핵심은 로마 카톨릭 성경 안에 포함된 몇 가지 책이 과연 성경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1. 외경의 성격
외경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약 400년간의 기간 즉 침묵기라 하는 기간에 기록된 15개의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입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역사적 가치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비논리적이고 그 저자를 알 수 없으며 또 그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나 권위를 받았다는 주장이 없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그 내용이 전설적이며 공상 만화 같기도 합니다. 이 책들 중 몇 개는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유대인들의 우상 숭배를 금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외경은 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2. 외경의 책들
다음은 15 개의 외경 책들 명단입니다. 그 이름은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한 「한글공동번역」에서 취했습니다.
외경 명단
외경 이름
연대
내용
1
솔로몬의 지혜서
주전 30년
교훈
2
집회서
주전 132년
교훈
3
토비트
주전 200년
종교 소설
4
에스드라상(*)
주전 150년
역사, 전설
5
마카베오상
주전 110년
역사
6
마카베오하
주전 100년
역사, 전설
7
유딧
주전 150년
로망스 소설
8
바룩
주후 100년
예언
9
예레미야의 편지
주전 200년
예언
10
에스드라하(*)
주후 100년
예언
11
에스델
주전 130년
전설
12
아사랴의 기도
(혹은 세 아이의 모래)
주전 100년
전설
13
수산나
주전 100년
전설
14
벨과 뱀(원래는 벨과 용)
주전 100년
전설
15
므낫세의 기도(*)
주전 150년
전설
(*) 천주교에서도 이 책은 외경으로 인정하지 않음.
3. 외경의 수용
1. 유대인들은 결코 외경을 자기들의 구약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2.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외경이 삶의 예와 예의 범절 등을 위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여깁니다.
3.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의 표에서 ‘에스드라상하서’와 ‘므낫세의 기도’를 뺀 나머지 12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구약 성경이 39권이 아니고 51권이라고 주장합니다.
4. 외경을 포함하는 사본들
1. 「70인역」 : ‘에스드라하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 포함
2. ‘알렉산드리아 사본’(A 코덱스) : 위의 외경들 외에도 ‘마카베오 3서 및 4서’ 포함
3. ‘바티칸 사본’(B 코덱스) : ‘마카베오상하서’ 및 ‘므낫세의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포함
4. ‘시내 사본’(알레프): 여러 권 포함
5. ‘체스터 비티의 파피루스’ : ‘집회서’ 일부분 포함
6. ‘사해 사본’ : 그리스어로 쓰인 몇몇 외경 포함
5. 트렌트 공회
외경은 1546년 4월 8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트렌트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성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트렌트 공회란 주후 1545-1563년 사이에 연속적으로 세 번 열린 카톨릭 교회의 공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공회가 열리기 28년 전인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뒤엎으려는 ‘반종교개혁’의 중심 기구가 바로 트렌트 공회였으며 주로 예수회(Jesuits, 제수이트)가 이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이 공회에서 교황은 다음의 세 가지를 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1. 카톨릭 교리의 정의
2. 카톨릭 교리의 개혁
3. 이단 말살
그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내세운 표어 중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e)였는데 카톨릭 교회 역시 이와 똑같은 구호를 외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구약 성경에다 외경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트렌트 공회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카톨릭 교회에서 해왔던 것처럼, 모두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드리고 읽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외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성경적 카톨릭 교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1. 연옥: 마카베오하서 12장 39-45절
2. 구제(즉 자선 행위)에 의한 구원: 집회서 3장 30절
이외에도 외경에는 자살을 인정한다든지(마카베오하서 14장 43-46절), 비참한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든지(집회서 33장 24-28절), 윤회(솔로몬의 지혜서 8장 19,20절)를 인정하는 구절이 있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몰래 죽이거나 마술을 통해 신비주의를 행하는 것 등을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어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성경과 상치됩니다.
트렌트 공회 이후 1582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펴낸 「두에랭스 역본」은 원래의 구약 성경 39권에다 위 표의 15개 외경 중 12개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트렌트 공회는 매우 교묘하게 외경을 포함시키는 일을 진행하여 외경 15권 모두를 포함시키지 않고 특히 에스드라하서를 뺐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의 7장 105절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6. 초기 영어 성경에 외경이 포함된 이유
초기 영어 성경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대개 외경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중세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대개 외경을 가치 있는 책으로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킹제임스 성경과 같은 경우에는 성경 분석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외경을 넣었든지 간에 영어 성경에서 외경은 부록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정경이 아님을 밝히는 분명한 글과 함께 성경책에 포함되었습니다.
1. 「틴데일 성경」(주후 1525년)은 외경들만을 따로 떼내어 그것들이 ‘영감 받지 않은 책들’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2. 「커버데일 성경」(주후 1535년)도 「틴데일 성경」과 마찬가지로 했으며 아예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외경 : 고대 교부들이 성경의 다른 책처럼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은 책들이며 또한 히브리인들의 정경에도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3. 「마태 성경」(주후 1537년)과 「태버너 성경」(주후 1539년)은 외경을 구약과 신약 성경 사이에 부록으로 넣었습니다.
4. 킹제임스 성경(주후 1611년)은 「비숍 성경」 (주후 1568년)과 마찬가지로 외경을 부록에 넣었으나 1629년부터는 아예 외경을 빼기 시작하여 1827년부터는 부록에서도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 안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었다.”는 것과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성경에 넣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혼동에 빠져 있습니다. 다음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선 “성경 안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었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 모두 66권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 경우 외경은 던지 성경 안에 들어 있는 지도책과 같이 참조 자료라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초기 영어 성경들의 경우가 거의 다 이러합니다.
반면에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성경에 넣었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 모두 78권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며 이 경우에는 책의 목차에 아예 외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경이 모두 구약 성경 정경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발간하는 성경은 모두 후자로 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참고로 「Catholic Study Bible」이나 「New American Bible」 등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외경을 부록으로 넣은 경우와 정경으로 인정한 경우의 차이점
외경을 부록으로 넣은 경우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한 경우
구약 성경 39권
구약 성경 51권
외경(부록)
신약 성경 27권
신약 성경 27권
부록이 없음.
외경은 성경이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았음.
부록이 없고 대신에 외경이 구약 성경 중 일부분으로 들어가서 구약 성경이 총 51권으로 구성됨.
7.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
1. 이 책들은 전이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분명히 이 책들을 구약 성경에서 제외시켰다.
․주전 20년에서 주후 50년까지 살았던 필로 역시 이것들을 언급하거나 인용한 적이 없다.
2.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외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히브리서 11장 35절이 마카베오하서 7장과 12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 구절은 왕상17:22와 왕하4:35를 인용한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유다서 14절이 외경인 에녹 서신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구절은 에녹의 말을 인용할 따름이며 분명히 우리 성령님께서는 에녹이 한 말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에녹 서신을 인용하지 않고서도 아무 문제없이 그의 말을 기록하실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딤후3:8이 외경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 과거에 있었던 이집트 마술사의 이름을 언제든지 기록하실 수 있으므로 이 구절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야브네 공회에 모인 유대인 학자들은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4. 대부분의 교부들이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5. 외경의 어느 책도 스스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6. 외경의 많은 책들이 역사적, 지리적, 연대기적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7. 외경의 많은 책이 성경 말씀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8. 외경의 형식은 전설적이며 공상 만화 같으며 어떤 이야기들은 매우 괴기적이며 마귀와 연관이 있습니다.
9. 외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같은 뚜렷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된 외경들은 - 라틴어로 존재하는 단 한 가지만을 빼놓고 - 동양의 예의범절, 언어, 견해와 역사 등에 대해 설명을 주는 ‘고대 문서’로서의 가치만을 지닐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외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단지 부록으로 넣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여러분 성경에 있는 지도 같이 말입니다.
2009-05-11 13:26:56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다른 성경을 사용해서도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5>
대답: 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단순성을 둘러싼 사실들은 현대 역본들이 가장 많이 왜곡시킨 부분에서조차도 많이 손상되지 않은 채 발견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크리스천의 무기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12절 과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것은 새로운 크리스천을 적절히 자랄 수 있게 하는 양식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히4:12)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이런 면에서 새 번역 성경들은 취약점을 드러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구절들이 많은 새로운 역본들에서는 변개되어 성경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역본들로 구원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그런 성경으로 바르게 성장하여 마귀를 대적하기는 미흡합니다.
2009-05-11 13:20:53 | 관리자
질문: 사해 사본이 킹제임스 성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6>
대답: 아닙니다. 오히려 사해 사본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합니다.
‘사해 사본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는 1947년에 여리고 근처의 쿰란 동굴에서 아랍인 양치기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본문은 사실 킹제임스 성경과 일치합니다. 이 사실은 완전한 성경을 던져 버리고 싶어 하는 학자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얄궂게 발견되었다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 외에는 대개 그것을 무시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미 ‘사해 사본 두루마리’와 일치하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2009-05-11 13:19:05 | 관리자
질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읽을 때 ‘thee’와 ‘thou’ 같은 고어들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되면 어쩝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7>
대답: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고기를 주시나 그것을 잘라서 먹여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영감을 통해 완전한 원본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구약과 신약 성경을 조합하시고 그것의 신빙성을 문서로 입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로마 카톨릭 압제자들과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보존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그분 자신의 가장 충성스런 종들의 생명과 가정과 가족들의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학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전 세계적 공통어인 영어로 완전하고도 순전하게 그것을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thee’와 ‘thou’ 등이 고어라고 하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불평을 그치고 고기를 잘라서 먹는 수고는 여러분이 감당하십시오!
2009-05-11 13:17:39 | 관리자
질문: 번역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9>
대답: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역에도 여러 차례 영감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2-45장은 요셉이 자기 형제들과 재회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구사한 말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이집트어입니다. 이것은 창42:23에서 보듯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요셉이 통역자를 통해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창42:23).
어떤 글을 ‘한 낱말 한 낱말 완벽하게’(word perfect) 축자적으로 번역할 수는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요셉이 이집트어로 말했던 그 내용이 구약 필사본에 기록될 때는 히브리어로 번역되었다.”는 것과 ‘그 번역이 단어 대 단어의 완전한 일 대 일 대응의 축자적 번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습니까? 이집트어로 말했던 요셉입니까? 아니면 이집트 사람 통역관의 구두 번역이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에서 보는 대로 모세가 기록했던 번역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영감을 주셨다면 요셉의 ‘원래 진술’은 그의 이집트 사람 통역관에 의해 혹은 모세의 번역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영감을 주사 ‘영감된 번역’을 기록하도록 하신 걸까요? 후자의 경우라면 ‘진보적인 영감’(progressive inspiration)을 비난하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질문이 모세가 파라오(바로))와 대결하는 장면에서도(출애굽기 4-14장) 제기됩니다. 하나님을 대변해 모세가 이집트 왕과 말할 때는 왕이 쓰던 이집트어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록할 때는 자신의 말이나 파라오의 말을 모두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기록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세의 이집트어 구두 진술 복사본인가요? 아니면 모세의 히브리어 번역인가요?
“번역에도 영감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사도행전 22장을 보면 바울은 자기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합니다(행21:40; 22:2). 1절부터 21절까지의 증언은 바울이 모두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을 히브리어로 기록한 사도행전 22장의 필사본은 이 시간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어로 기록했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느 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바울의 말(히브리어)인가요? 아니면 누가의 ‘진보된 영감’ 즉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인가요?
그 대답은 간단하며 딤후3:16에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All scripture)은 하나님의 영감 - 숨을 불어넣으심 - 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구절에 나오는 ‘scripture’라는 단어의 어근은 ‘script’인데 이것은 ‘기록된’(written)이란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포함된 여러 개의 번역 - 제가 지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 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근본주의자가 이 같이 영감 받은 번역을 고의적으로 믿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와 같은 명백한 성경의 관행에 역행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 여기서 독자들이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저자인 사무엘 깁은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보존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번역도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혹시 킹제임스 성경도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닌지 의아해 하실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 한 말에서 다른 말로 번역(통역)된 부분도 그것이 기록될 때는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중영감설’ 즉 “킹제임스 성경도 자필원본과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전혀 오류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담고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2009-05-11 13:16:1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어를 영어로 옮긴 일개 역본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옮긴 것이 원래의 것만큼이나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0>
대답: 옮긴 것이 원래의 것만큼 좋을뿐더러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옮김’(translations)에 관해 세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세 경우 모두 옮긴 것이 원래의 것보다 개선되었습니다.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이므로 우리는 단순히 ‘사람’의 어떤 의견보다 성경의 ‘관행’을 상위 권위로 인정해야 합니다.
1. 첫 번째 ‘옮김’(translation)은 삼하3:7-10에서 발견됩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더니 그녀의 이름은 아이야의 딸 리스바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에게로 들어갔느냐? 하니 그때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로 인해 심히 노하여 이르되, 내가 개의 머리냐? 내가 유다를 대적하고 이 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 대한 허물로 나를 비난하는도다. 주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그에게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넬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니 그 맹세는 곧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부터 옮기고 - To translate the kingdom -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 위에 다윗의 왕좌를 세우는 것이라, 하매
사무엘기상 31장을 보면 사울이 죽은 후 사울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 대신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삼하2:8-9). 그런데 이스보셋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브넬은 심히 노하여 이스라엘이 이스보셋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질 것’(translate)에 대해 말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열 두 지파 모두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는 사무엘하 3장 9절에 나오는 아브넬의 말을 볼 때 아주 명백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에게로 ‘옮겨진 것’(translation)은 한 민족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서 한 쪽은 다윗이 바르게 통치하고 다른 한 쪽은 이스보셋이 바르지 않게 통치하던 ‘원래 상태’보다 더 나아졌습니다(첫 번째 언급의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2. 두 번째 ‘옮김’(translation)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발견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 hath translated us.
여기서의 ‘옮김’(translation)은 잃어버린바 되었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 안으로 전환된 것을 말합니다. 편견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보게 되면 누구라도 이러한 ‘옮김’(translation)이 ‘원래 상태’보다 엄청나게 향상된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세 번째 ‘옮김’(translation)은 히브리서 11장 5절에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Enoch was translated -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 God had translated - 그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before his translation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translate’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단지 다섯 번 쓰였습니다. 사무엘기하에 한 번, 골로새서에 한 번, 여기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나머지 세 번이 나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부족한 크리스천이라도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대언자요,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음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으므로 에녹은 육신을 입고 죽지 않은 채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이러한 에녹 개인의 경험은 고린도전서 15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 디도서 2장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이는 소위 크리스천들이 ‘휴거’(Rapture)라고 말하는 것의 축소판입니다. 성경은 ‘휴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미래 현상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즉 디도서의 ‘복스러운 소망’(Blessed hope) 혹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끌어올림’(Catching up) 혹은 히브리서의 ‘옮기는 것’(Translation) 등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옮기신 일(Translation)이 ‘원래 상태’보다 향상된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이 언급하는 모든 ‘옮김’(translation)이 원래의 것보다 향상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순수하게 성경을 믿는다면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지만, 만일 여러분이 학문에 최고 가치를 두거나 혹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동의할 수 없었던 성경의 사실들을 다 거부했던 것처럼 성경의 이 사실 또한 거부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미국표준역(NASV)과 신국제역(NIV)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선입견으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을 때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위에서 언급한 그 어느 구절에서도 ‘옮기다’(translation)란 단어를 쓸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야겠습니다. 즉 그들은 ‘translation’이란 단어를 빼고 대신 다른 단어를 썼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르시렵니까? 성경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입니까?
(*) 독자들은 여기서 저자의 의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translate라는 단어의 용례를 보여 주면서 그것이 이전보다 좋은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의 translate는 성경 번역의 trabslate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으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원어들)이 바르게 영어로 번역되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그 안에 보존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영어가 원어를 대체한다거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원어를 교정한다(correct)는 주장 혹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영감을 받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볼 때 영감은 오직 원어에만 주어졌으며 원어의 단어들은 완벽하므로 그것들을 교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로 주신 성경을 올바르게 가감하지 않고 번역하여 원어 이후의 사람들이 최종 권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역본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오류도 없습니다.
2009-05-11 13:14:27 | 관리자
질문: 다른 성경에는 근본적인 교리들이 없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성경들을 나쁘다고 말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1>
대답: 다른 역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기본 교리가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더욱 더 명쾌하게 그리고 더욱 더 빈번히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이 분야에서 최고입니다.
다른 역본들에서도 근본적인 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들이 그런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교리가 원래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나왔음을 잊고 있습니다. 다음의 교리들은 다른 역본들에서도 발견되나 삭제나 변개 등으로 인해 킹제임스 성경에서보다 그 의미가 약화된 것들입니다.
1.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신미국표준역(NASV), 신국제역(NIV), 뉴킹제임스역(NKJV) 등이 사도행전 3장 13절, 26절 그리고 4장 27절, 30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 부름으로써 크게 희석되었습니다.
2. 지옥 교리는 누가복음 16장 23절에서 희석되어 NKJV와 NASV에서는 ‘지옥’(hell)이 아니라 ‘음부’(hades)로 음역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부가 어디 있는지 혹은 어떤 곳인지 아는 분이 계십니까?
3. 사도행전 8장 37절의 본문이 삭제되어 NIV와 NASV에는 이디오피아 내시의 구원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4. NASV의 누가복음 24장 5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5. NIV와 NASV에서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이 부인되고 있고 누가복음 2장 33절에서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이 같은 신성모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6. 삼위일체 교리가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제거되거나 문제시됩니다. NIV와 NASV는 그 구절을 삭제하고 6절을 나누어 엉터리로 7절을 만들어 냈고 NKJV는 그 구절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현대 역본들의 본문에 들어 있는 단지 몇 개의 변개 사항들입니다. 모든 목록을 남김없이 기재한 것이 아님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혹자는 다른 성경들에 대한 이러한 비평을 두고 “별것 아닌 것을 문제 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현대 역본들에서 어떤 특별한 교리를 200번 발견했다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그와 똑같은 교리를 그보다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이 교리 면에서도 현대 역본들보다 훨씬 더 권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09-05-11 13:10:14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정말 완전하다면 그렇게 많은 목회자들과 학자들이 다 틀렸단 말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2>
대답: 지금까지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다수는 언제나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성경의 진리 즉 다수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이 구절은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릇 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지옥에 갈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대강 살펴볼지라도 대개 다수는 항상 틀림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대홍수 때에 죽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의 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예레미야 같은 대언자들의 직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삽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다수가 킹제임스 성경을 부인하는 사실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사실인데 다만 그것이 매우 잘못된 사실임이 유감일 뿐입니다.
2009-05-11 13:08:48 | 관리자
질문: ‘공인 본문 주의자’와 ‘킹제임스 성경 주의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5>
대답: ‘공인 본문 주의자’(TR 주의자)는 안디옥으로부터 필사본을, 이집트로부터 철학을 따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연구(질문8)에서 이 지역들로부터 두 가지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역성을 통해 우리는 필사본들을 유도해냈고 그런 필사본들을 판단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도출해 냈습니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리겐의 비평의 손길에 의해 더렵혀진 ‘변개된 사본들’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성경은 거룩하나 완전하지는 않으며 실수가 있다.”는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얻습니다.
한편 안디옥으로부터 우리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TR)으로 승화되어 최고조에 이른 순수한 사본들의 노선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성경은 거룩할 뿐 아니라 완전하며 실수가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얻습니다.
1. 대부분의 성경 비평 학자들은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 또한 그들은 대개 안디옥 사본보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합니다.
2. 킹제임스 성경 신자는 안디옥의 사본들 혹은 ‘공인 본문’을 알렉산드리아 사본보다 훨씬 더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절대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 어떠한 실수나 오역도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개선될 수 없다는 안디옥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입니다.
3. ‘TR 주의자’ 또한 안디옥 사본들이나 ‘공인 본문’을 알렉산드리아 사본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TR 주의자’는 안디옥 사본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역본도 ‘실수가 없는 완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개 그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은 역본이지만 그것도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는 사도행전 12장 4절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이 오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러한 자가당착은 부정직하고 좋지 못한 마음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릇된 교육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TR 주의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중에 받아들이도록 속임을 당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아래 편지는 역자가 과거 미국의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의 도너반 목사에게 공인 본문 주의와 킹제임스 성경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받은 답변 편지로서 독자 여러분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사료되어 번역 게재한 것입니다.
형제님께 !
저는 그리스어 ‘공인 본문’(TR)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를 묻는 형제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피터 럭크맨 목사 시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TR주의’를 따르지 않는데 본 편지에서는 그 중 몇 가지 이유만을 설명 드리려 합니다.
최근 들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알렉산드리아 본문이 전적으로 부패되었음이 분명하게 입증되면서 TR을 표준으로 삼으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타협적인 입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입장은 최종 권위의 문제를 성경이 아닌 사람에게 두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TR 주의’를 취한다면 그는 킹제임스 성경이 올바른 본문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역본 중에서 가장 좋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강조점과 최종 권위를 그 특정한 그리스어 본문에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하게 되면 사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TR 안에 있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특정한 그리스어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할지 결정한단 말입니까? 예를 들어 그리스어 ‘하데스’(Hades)는 신약 성경에서 11번 쓰였는데 KJV에서는 그 중 10번이 ‘지옥’(Hell)으로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무덤’(Gra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는 KJV이 최종 권위라는 사실과 KJV이 이미 그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어야만 하는가를 결론지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TR 주의자라면 그는 ‘하데스’를 자기 마음대로 번역할 것입니다. 즉 그 사람 자신이 성경의 최종 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KJV 역자들이 올바른 그리스어 본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업 속에서 그것 외에도 라틴어역, 시리아역, 기존의 영어역 등도 사용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 종류의 TR간에 서로 차이나는 부분을 다 모은다면 그것들이 1611년 이후에 재쇄된 킹제임스 성경들의 차이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완전한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어 절충 본문을 사용하셨다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TR’을 완전한 성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신약 성경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TR’은 여러 종류의 그리스어 사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핫지스(Hodges), 버건(Burgon)과 같은 사람들은 TR 주의를 취하지만 우리는 KJV 영어성경주의를 취합니다. 앞으로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TR 등으로부터 나오게 될 한국의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그들의 작업 속에서 행했던 것과 비슷하게 되리라 사료되며 나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TR과 KJV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려 합니다.
1994년 4월 7일
미국 펜사콜라 성경 침례교회
브라이언 도너반(Brian Donovan)
2009-05-11 13:05:43 | 관리자
질문: 신학 교육이 작금의 성경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6>
대답: 아닙니다. 거의 틀림없이 - 99%의 확률 - 신학 교육은 한 학생이 완전한 성경이 있다고 믿는 믿음을 흔들리게 하거나 파괴시킬 것입니다.
신학 교육에는 많은 혜택이 있습니다. 신학생은 사역하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것 등에 대해 매우 귀중한 수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리에 약한 학생은 믿음 안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의 우정과 경험들은 종종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하나님께서 완전한 성경을 주셨다.”는 믿음은 종종 신학 교육으로 인한 은혜가 되기보다는 그런 교육으로 인한 희생물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신학교에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을 받아 그 희생자가 된 선량한 사람들이 교수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정확한 사본 계열에 대해서는 옳게 판단을 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의식중에 성경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수중에 있는 단 한 권의 성경이 정말로 완전하다는 믿음을 결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종종 킹제임스 성경만 혹은 ‘공인 본문’만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신학교들조차도 여전히 이러한 만성병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의 성경을 자주 정정해야만 한다는 모순되는 소리를 들으며 혼동에 빠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빈번하게 그는 그 통렬한 비난의 말에 굴복하고는 자기 스스로 성경의 완전성을 비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약 학교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대개 그는 ‘광신자’로 낙인찍히거나 배척받거나 심지어는 퇴학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 교육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교육이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학생의 믿음을 거의 강화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2009-05-11 13:03:55 | 관리자
질문: 다른 역본들을 사용하는 크리스천들이나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7>
대답: 혹자는 ‘하나의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마가복음 9장 38-41절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신학교 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못 인도된 것처럼 많은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무척 사랑할지 모르지만 다만 무지해서 혹은 속아서 잘못된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릇된 성경을 사용하는 그 사람도 언젠가는 성경 문제에 직면해서 시비를 가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옳은 것’을 선택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강건해질 것이며 그들은 다른 성경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설교하는 도중에 성경을 ‘정정하려는’ 시도를 대개 그만 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자기들의 ‘출신 신학교’(Alma-Mater)가 틀렸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결국 성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한 설교자가 “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제 출신 신학교가 그 입장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저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동료들 사이에 서서 자신들의 명성에 미칠 손해를 먼저 저울질해 보고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을 지지할 수가 없다고 느낍니다. 어떤 이는 대학 교수로서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신학교에서 안디옥 입장을 취했을 때 경험할지도 모를 재정적인 손해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여러분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대개 이 같은 경멸은 지적인 확신보다는 방어 수단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론 이것이 여러분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 할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이 자기가 단순히 한 권의 책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그는 그의 인생에서 성경의 권위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위를 가지신 분(마7:29)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싫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009-05-11 13:02:2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된 것인가요, 아니면 보존된 것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8>
대답: 자필 원본들은 물론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은 그 자필 원본들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성경의 ‘영감’(Inspiration)과 ‘보존’(Preservation)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시켜서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백지 한 장에 자신의 말씀을 적게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된 말씀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행동 모두 거룩하며 시편 12편 6,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원본이 완전함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비록 그것들이 살인(모세와 다윗), 간음(다윗), 우상숭배(솔로몬) 그리고 주를 부인한 것(베드로) 등과 같은 가증한 죄들로 인해 잘못을 범하기 쉬운 사람들에 의해 씌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기록자들의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원본 전부가 영감을 받아 완전하다는 것은 오늘날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단지 자필 원본만이 완전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는 사본들 혹은 사본들의 역본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역본’을 원본의 완전한 사본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분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본들과 역본들은 영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산물이며 따라서 모두 실수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잘못된 신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그릇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어리석음은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영감 받은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죄인들을 사용하셨다고 믿으면서 동일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해 죄인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당히 모순되고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신의 말씀에 완전한 영감을 주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것들을 완전하게 보존하실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런 능력을 상실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2. 왜 하나님께서는 영감을 통해 완전한 자필 원본들을 만드시고는 얼마 지난 뒤 그것들을 잃어버리셨을까요? 우리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그리고 기타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완전한 성경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주님을 직접 보았으며 들었으며 만졌습니다(요일1:1).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누군가 완전한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원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거의 2000년이란 세월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필 원본을 보존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왜 그것에 영감을 주셨겠습니까? 혹자는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성경 안에 여러 군데의 잘못된 것들을 허락하셨다고 믿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자필 원본에도 그런 실수들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요? 혹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본들에 실수가 생기는 것을 막으실 수 없었다고 믿는 것입니까? 이 같은 생각들은 결국 하나님을 이것은 하실 수 있고 저것은 하실 수 없는 반쪽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3. 이런 것은 검증될 수 없는 ‘임기응변식’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소실된 원본들을 완전하다고 믿는 편이 덜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상실되었으므로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갖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얄팍한 이유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틀리다고 증명하기에 필요한 증거물 즉 원본이 상실되었으므로 결코 아무도 자기들이 틀리다고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오늘날 누구나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성경도 원본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자기들이 그런 믿음을 수호하다가 결국 피투성이가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도 보지 못한 원본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영어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단지 완전한 원본만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4. 완전한 성경이 보존되었다는 교리를 대적하려는 그들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몸소 대답하실(행1:8) 만큼이나 성경에 의해 보증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 12편 7절은 명백하게 말합니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따라서 우리는 친히 영감을 주셨던 완전한 말씀들을 그대로 완전히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께는 실로 그것이 별로 큰 어려운 일이 못됩니다.
이런 논제에 겁을 먹은 근본주의자들은 시12:7에서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두 가지 공격을 가합니다.
1. 그들은 7절의 ‘그것들’(them)은 말씀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후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시12:7에서 그 단어를 그렇게 번역한 역본들을 부리나케 출간합니다. 신국제역(NIV)에서 이 구절을 봅시다.
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안전히 지키사 그런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시리이다.
O LORD, you will keep us safe and protect us from such people forever.
이것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부정직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지킨다’로 번역된 ‘to keep’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shamar’인데 신국제역(NIV) 번역자들은 2인칭 단수 미래로 나타나 있는 “thou shalt keep them”을 “you will keep us”로 번역했으며 3인칭 복수인 ‘them’을 1인칭 복수 ‘us’로 번역해 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오역의 본보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본의 본문을 정확하게 보존한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은 신뢰할 수 없는 신국제역(NIV)이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임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시12:7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약속 즉 유대인들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직접적인 언급은 시12:6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2. 종종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서 시12:6-7을 문자 그대로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크리스천은 경건하게 시119:89를 인용할 것입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
For ever, O LORD, thy word is settled in heaven.
그 뒤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의 완전한 성경을 보존하신 곳은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밀짚더미 속에 숨어 버리는 모습이란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필 원본을 하늘로 가져가시려고 이 땅에서 영감을 통해 완전한 원본을 만드셨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분께서 원본을 쓰신 이유가 하늘로 가져가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낼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신 후에 그들이 그러한 완전한 성경으로 인한 유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늘나라 도서관에 그것을 보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만일 그 완전한 책이 우리 손이 닿지 않는 하늘나라에 감금되어 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두 번째로, 시편 12편 6절은 땅에 있는 그분의 말씀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이 아닌 다른 곳에 그것들을 보존하시는 것은 전혀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본에 완전하게 영감을 주셨고 수 세기가 흘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같은 말씀들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들 즉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들은 흠정역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2009-05-11 13:00:4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숭배’하고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성경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원본들을 파괴하신 것이 아닐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1>
대답: 그들은 결코 성경책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아니요.”입니다.
최근 몇 년 간 완전한 성경을 비평해 온 비평 학자들은 크게 좌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항하기 위한 자기들의 모든 논의가 역사적 사실에 의해 체계적으로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학자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킹제임스 성경을 변함없이 복 주신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성경 신자들을 ‘비방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두 가지 질문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성경책을 숭배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처럼 그 책에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구원한다.”고 설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설교합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에다 마크를 하기도 하고 참조가 되는 주석이나 짤막한 글을 적어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성경을 숭배한다는 그릇된 오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누명은 불행히도 정직함에서 나오지 않고 악의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성경을 숭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자필 원본을 파괴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자필 원본의 유일한 가치는 그 안의 말씀들이었기에 그분께서는 그 원본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허락하셨으며 그 말씀들은 곧장 사본으로 보존하셨습니다. 자필 원본은 그 목적을 수행하자마자 곧 필사되었으며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들은 더 이상 원본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늘날 자필 원본이 어떻게 해서 ‘기적적으로’ 나타난다 해도 성경 신자들은 그것에 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책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면 아마도 원본에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는 오늘날의 성경 비평 학자들일 것입니다.
2009-05-11 12:57:0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이단 종파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2>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을 이단 종파에 속한 자들로 누명을 씌우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숭배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 비평 학자들의 좌절감과 악의에서 파생된 동일한 결과입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사실을 가지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 자연히 이들의 비난은 인신공격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단 종파가 두 가지의 명백하고도 중요한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단 종파를 정의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이단 종파의 특성은 모든 신도들에게 결정 사항을 지시하는 중앙 본부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매우 독립적이며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성경 외에 여타의 교리들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중앙 권위는 오로지 성경뿐이며 결코 어떤 특정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이단 종파는 자기들의 신도들이 반대편 신앙을 연구하여 그것으로 개종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재료나 책들을 금지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듭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진실과 사실들이 흠정역 성경의 편이기에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평 연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책도 성경 비평 학자들의 모든 비난에 정정당당히 맞서기 위해 씌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점은 오늘날 여러 신학대학과 종합대학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모든 책을 제거하기 위해 종합/연합 정책을 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책도 언젠가는 그들의 목록에 오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누가 ‘이단 종파’이고 누가 아닌가를 보여 주는 깜짝 놀랄 만한 증거입니다.
(*) 이런 일은 미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기타 킹제임스 성경 관련 책들을 금서 목록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할 신학교들이 자기들의 선조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방법을 동원하여 성경을 막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그들이 얼마나 킹제임스 성경을 무서워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무식하고 교양 없는 자들이 흙탕물을 튀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9-05-11 12:54:54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완전한 성경으로 믿는 것은 ‘이단’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3>대답: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완전한 성경이 있음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뿐입니다.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킹제임스 성경신자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은 재미있긴 하지만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이단’(Heresy)이란 ‘진리 혹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신앙에 반하는 교리나 견해’를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성경책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보여줄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 학자들도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믿는’ 절대무오한 성경책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은 “절대무오한 성경은 지구상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실로 우리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로부터 ‘이단’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단’이라는 딱지는 험담가들의 느낌을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젊은 신자들에게 겁을 주어 그들이 절대무오한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입니다. 성경 비평 학자들의 의도는 열심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단’의 딱지가 붙으리라는 두려움을 줌으로써 성경 비평 학자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 믿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사실이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널리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비평 학자들는 여러분이 제시하는 모든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과연 누가 정말로 이단일까요?
2009-05-11 12:52:2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