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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임    불임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1년간 있었는 데도 임신이 되지 않거나 아기를 이미 낳은 뒤로 2년 이상 임신을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최근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임부부들의 수는 8만7000쌍이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자녀를 두지 않고 맞벌이를 하며 돈과 출세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딩크(DINK)족과 달리 아기를 갖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불임부부들의 애환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불임부부들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라헬, 엘가나와 한나가 겪었던 불임의 시련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창16:1∼6; 18:9∼15; 25:19∼23; 30:1∼13, 22∼24; 삿13:2∼5; 삼상1:4∼18; 눅1:5∼7). 그들은 결혼 후에 당연히 찾아올 태의 열매를 오랜 기다림과 기도 끝에 힘겹게 얻어야 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권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드리기 위한 뼈저린 훈련을 체험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불임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되는 데는 그분께서 정하신 시간과 방법이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전3:1).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적 출생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영적 출생'(거듭남)을 관할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롬11:36; 엡4:6).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불임부부들에게도 이와 같은 영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불임클리닉을 찾아가 최첨단 의학기술로 불임 문제를 해결 받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불임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경 말씀을 통해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성경은 혈연 중심으로 가족을 말하지 않는다(마12:46∼50). 대신 사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을 말하고 있다(요일3:14).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롬8:15;23; 갈4:5; 엡1:5).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8:15; 엡2:19). 아울러 우리는 시험관 아기, 배아 이식, 정자 직접 주입술, 착상 전 유전진단 등 여러 불임 치료법을 고려하기에 앞서 이미 태어난 소중한 아기들을 입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확연히 드러날 것이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시127:3).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1:34 | 관리자
웃음    '일소일소(一笑一少) 일노일로(一怒一老)'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한 번 늙는다'는 뜻이다. 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도 있다. 그 뜻은 '웃는 문으로 만복이 찾아온다' 곧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나 웃음이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로마린다 의과대학의 리 버크 교수는 1996년 심리신경면역학 연구학회에서 웃으면 면역기능이 강화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전 세계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폭소 비디오를 보고 난 뒤 혈액 속에 강력한 면역조절물질인 감마 인터페론의 양이 200배 늘어났음을 밝혀냈다. 또한 백혈구와 면역글로불린이 많아지고 면역을 억제하는 코르티솔과 에피네프린이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했다. 또 200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리 버크 박사팀은 암을 잡아먹는 NK세포가 웃음에 의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이 외에도 웃음이 건강에 효과가 있다는 많은 연구결과들이 보고가 되어 왔는데, 대표적으로 뇌하수체에서 엔도르핀 같은 천연 진통제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또 부신에서 통증과 신경통 같은 염증을 낫게 하는 화학물질이 나오고, 동맥이 이완돼 혈액순환과 혈압이 낮아지며, 암 환자의 통증을 경감시키고, 심장박동 수를 높여 혈액순환을 돕는 것 등이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웃음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스태그플레이션의 상황 속에서 활력을 잃고 웃음을 찾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웃음치료'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웃음을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모든 방법이 다 성경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는데 웃음도 이에 해당된다(전3:4). 사실 힌두교, 아프리카 토속종교, 중국의 기공, 최면요법 등 다양한 영적 배경을 가진 집단에서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는 웃음이 다 우리에게 참된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한때의 유행처럼 지나가긴 했지만 소위 '거룩한 웃음'이라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인식하여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웃음을 채워주시는 분이다(욥8:20, 21).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예표로서 으뜸가는 인물인 '이삭'의 뜻이 '웃음'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웃으며 기뻐하길 원하고 계신다(창21:6; 눅15:3,7). 이제 하나님의 선물인 '웃음'을 통해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복을 누리도록 하자.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말리느니라."(잠17:22).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0:58 | 관리자
어느 분이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또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글이지만 내용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탐욕에 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솔직함이 결여되면 위선자가 됩니다. 특히 목사나 교회의 리더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글 ****************************    제가 요즘 저의 상황을 보면서 한 가지 배우는 점이 있습니다. 책이 출판되고 또 이런 지면을 통해서 글을 올리다 보니까 제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느낌과 함께 행여나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시시각각으로 저를 위협합니다. 저의 이런 우려에 대해서 모범답안으로 대답한다면, “집사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세상이 그렇게 모범답안과 같이 간단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반드시 심각할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그 확율은 100%라고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행여나 사람들이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나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고 항상 ‘내 주제 파악’을 바로 할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라는 경각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다가 다른 한 가지 사실에 문득 생각이 미쳤습니다. 바로 목회자의 고독과 관련된 점입니다. 더불어 목회자의 불륜과 관련한 힌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목회자는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매주 강단에서 ‘바른 소리’를 외쳐야 하는 처지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목회자가 외치는 강단에서의 ‘바른 소리’가 그 사람의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치’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가 아닙니까? 그만큼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나 자신의 실체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모습 사이에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경우에 그 차이는 당사자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를 공격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대상들이 별로 없는 목회자들이 겪는 값비싼 댓가입니다. 더 유명해지고 더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질수록 이 고독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이 깊어지고 자신을 허상 속에 고립시키는 실수가 잣아지는 목회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 누군가를 만날 때 자기도 모르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목사’가 아닌 ‘한 남자’로 대하는 여자에게 자신을 내 던지게 됩니다. 또한 그 여자는 그 여자대로 강단에서는 힘 있는 외치는 저 목사의 얼굴 뒤에 숨은 고독을 바라보며 ‘연민의 정 또는 모성애’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목사와 불륜에 빠지는 여자의 경우 그 ‘헌신도 내지 충성도’가 일반 불륜보다 더 깊지 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할 말 못할 말을 못 가리는 ‘주책 바가지’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고독’을 느낄 틈이 없는 바쁜 사람들이지요. 함께 어울려 놀기에도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이성과 관련한 유혹에서 좀 더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고독한 목회자가 안전한 ‘주책 바가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고독이 초래할 수 있는 불륜과 관련해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두 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는 자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여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호칭은 이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점은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매들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도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면서 그러던데….” 제대로 된 문장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남편이 식사를 하면서 그러던데….” 회사에서 부장의 부인이 과장의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철수 엄마, 글쎄 어제 우리 부장님이 나한테 이번 달 월급이 올랐다고 그러면서….” 말이 안 되지요….아내가 회사의 직원입니까? 왜 자기 남편을 부장이라고 부릅니까? 왜 이런 말도 안되는 호칭이 교회에서는 가능할까요? 남편을 남편이 아니라 목사로 바라보는 아내는 남편을 고립시킵니다. 남편을 남자가 아닌 목사로 인식하는 아내는 남편을 어떤 의미에서 ‘거세’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목사가 아니라 ‘남자’여야 합니다. 두번째는 목회자에게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서로간에 ‘무슨 무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어떻게 보면 좀 더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뒷통수 치지 않을 사람을 잘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뉴스 진행자 중에 오라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오라일리 팩터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의 조건 1위는 단연 ‘뒷통수 치지 않는 친구’입니다. 뒷통수 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다. 둘 사이에 한 얘기를 딴 데 가서 나불거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은 정말로 사생활과 관련한 힘든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가서 ‘기도 제목’으로 발설하는 사람말입니다. “집사님, 정말로 어려운 얘기인데요. 그래도 꼭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요. 저기 최 집사님 있잖아요? 그 분에게 이렇고 저런 일이 있데요. 참 안타까워요. 사실 말하면 안 되는데…그래도 집사님이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 얘기를 하는 거니까 딴 사람한테는 가서 말하지 마시고 그냥 최 집사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해 주세요.” 이런 사람은 둘 중의 하나지요. 대단한 바보이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위선자이거나…. 뒷통수치지 않는 친구를 만난다면….그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목사의 은밀한 얘기를 당회에 가서 ‘기도제목’으로 내어 놓거나 주보에 기도 제목으로 싣는 친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완전한 인간 ‘아담’에게서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점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는 하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울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흔히 듣는 말들 중에 하나가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알게 되면 실망하니까 아예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서 설교만 들으라는 충고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들리는 목사의 잘못에 대해서도 아예 눈을 감곤 합니다. 그런 경우 그가 막은 눈과 귀는 목사에 대한 애정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비겁한 자기 보호의 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도 여전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허상을 조금씩 걷어내고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좀 더 솔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목회자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목회자의 가정과 친구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2009-05-01 16:17:55 | 관리자
성경의 와인(Wine)   1. ‘와인’은 성경에서 알코올이 없는 포도 주스 혹은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 혹은 술을 가리킨다. 다음의 구절은 와인이 알코올이 없는 포도 주스임을 보여 준다: 신11:14; 대하31:5; 느13:15; 잠3:10; 사16:10; 65:8; 딤전5:23.   2. ‘와인’이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 혹은 술을 가리킬 때는 문맥이 그것을 보여 준다. 이 경우 하나님은 와인의 악영향을 지적하신다. 창세기 9장의 노아의 경우가 이렇다. 잠언 20장 1절도 이것을 보여 준다. 포도주는 항상 사람을 속이고 조롱하게 만든다. 잠언 23장 30-31절도 포도주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와인’이 쓰인 문맥에서 우리는 항상 그것이 포도 주스인지 포도주인지 조심스레 구분해야 한다.   3.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경고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그렇다. 잠언 23장 32-35절과 잠언 31:4-5절을 보기 바란다. 재미있는 것은 잠31:6-7절 말씀이다. 여기서 포도주는 진통제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용해도 됨을 보여 준다. 아무나 이것을 마실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진통제가 없었으므로 보통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것은 독한 술이었고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예외적으로 허락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람은 살리라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또한 지금 이 시대에는 다른 진통제가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도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이사야서 5장 11-14절 역시 술 먹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13-14절은 술 먹는 것으로 인해 지옥이 확장됨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리고 그들의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르도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또 기뻐하는 자가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한 곳이다(마25:41). 그러나 알코올에 의해 지옥은 지금도 스스로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사야서 28장 7-8절도 술의 악함에 대해 경고한다.   4. 술을 만드는 것은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주스를 오래 두면 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술을 만들려면 시간 외에 다른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주스가 술이 되게 했으므로 술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술은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의 기술로 술 만드는 법을 만들어 냈다. 양조 공장 주인들은 술을 만들려면 물, 온도, 설탕 등이 모두 맞아야 함을 알고 있다. 주스를 냉장고에만 넣어도 결코 술이 되지 않는다. 또한 뜨거운 열대 지방에서도 주스는 발효되지 않으며 술이 되지 않는다. 고대 사람들은 주스를 끓여서 잼처럼 만들었고 필요할 때 여기에 물을 타서 마셨다. 발효가 자연적으로 일어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사람이 이 조건을 조절하지 않으면 거의 술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술은 사람이 발명한 것이다.   5.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술(포도주)을 만들거나 마시지 않았다. (1) 첫째 이유는 그분의 거룩한 본성 때문이다. 히7:26은 그분께서 거룩하고 해가 없으시고 더럽지 않으면 죄인들로부터 분리된 분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 어느 누구라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그분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분을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도 그분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증언한다(요7:46). 그분께서 거룩하시므로 성경이 사람을 조롱하게 하는 것, 사람을 속여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르는 포도주를 마시거나 만들 수는 없다. 그분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7-18에서 주님은 율법과 대언자들을 폐하러 오지 않고 성취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박국 2장 15절은 자기 이웃에게 술을 주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만일 술을 마시거나 만들었다면 스스로 이런 말씀을 폐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분은 결코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2) 둘째 이유는 레위기 10:9-11절에 있는 제사장의 규례 때문이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의 차이를 가르쳐야 하므로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긍휼 많고 실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2:17). 그러므로 그분은 결코 술을 마시거나 만들 수 없다.   (3) 셋째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잠언 31-45절에 있다. 왕들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왕들의 왕이시므로 그분의 본성 상 술을 만들거나 마실 수 없다(계19:16; 마27:11; 슥9:9).   (4)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조롱하거나 속이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잠언 20장 1절은 포도주가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오셨다. 그런데 술은 지옥을 확장시키는 일을 한다(사5:11-14).   (6)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분은 포도주를 만들지 않았다(요2). 많은 사람들이 10절을 근거로 잔치 때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했을 거리고 추측한다. “그에게 이르되, 모든 사람이 처음에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을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10절) 즉 술에 취한 그 사람들이 나중에 나온 포도주를 맛보고 그것이 처음 것보다 더 좋다고 했으니 그것은 분명히 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중에 나온 술이 처음 것보다 좋은 것을 맛보고 알 수 있을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면 그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히려 그들이 포도 주스를 마시고 정신이 온전했기에 나중에 나온 것이 더 좋음을 그들이 증언했음을 보여 준다.   (7) 11절에 그 다음 이유가 있다. 이것을 계기로 그분께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11절은 말한다. “예수님께서 기적들 중의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11절)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일까? 그런 일은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8) 11절에는 그분의 제자들이 이 기적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즉 그 일이 그들의 믿음을 증대시켰다. 사람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게 만든 그 기적이 과연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켰을까? 어떤 이들은 딤전5:23을 근거로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고 주장한다. 즉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그들은 말한다. 알다시피 디모데는 위장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의사가 위장병 환자에게 술을 권할까? 지금도 모든 의사가 위장병에는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 대신 포도 주스를 마시라고 권고한 것이다.
2009-05-01 16:10:13 | 관리자
자살   요즈음 한 탤런트의 자살 사건이 매스컴에 연일 보도가 되고 있다. 원래 밝은 이미지의 연예인이었고 또 인기 있는 동료 연예인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잉꼬부부였기에 그의 자살 소식은 많은 시민들을 깊은 충격에 빠지게 하였다. 특히 이들 부부는 신앙간증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경우들을 방지해보고자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자살에 대한 연구를 해왔지만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두 달 전 캐나다의 한 생리학 교수가 자살자의 뇌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특정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이 과도하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마치 자살 유전자를 찾아낸 것처럼 보도한 언론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의학적으로 자살을 확실히 방지하는 약제의 개발은 요원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고뇌와 절망에 의한 것으로서 자살에는 너무도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일정한 형태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성 등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살에는 영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엡6:12; 벧전5:8). 우리가 영적으로 심히 곤고하게 되면 자살의 충동이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약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인정받은 모세도 자살을 생각하였었다(민11:15; 12:3; 요1:17). 또 성도들에게 인내의 본이 되는 자로서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였던 욥도 자살을 원하였었다(욥1:1; 7:15,16; 약5:11). 그리고 메시야가 오기 전에 보냄을 받아야 하는 자로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였던 엘리야도 자살을 구하였었다(왕상19:4; 왕하2:11; 말4:5). 또한 자살하면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삿16:21-31; 히11:32; 삼상28:19; 31:1-6). 진실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죽음을 맞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사실이다(요1:12; 롬10:9,10).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은 너무도 확고하다. 첫째, 하나님께서 살인을 금하시기 때문이다(출20:13; 요일3:15).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1:26,27; 9:6). 셋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2:7; 욥33:4; 시21:4; 36:9; 행17:15). 넷째,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신32:39; 삼상2:6,7; 욥1:21; 시68:20).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행20:28; 고전6:19,20; 엡5:29,30; 벧전2:9). 여섯째, 복음이 훼손되기 때문이다(요3:16; 10:10). 일곱째,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창1:28; 마18:19,29; 갈2:2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4:15 | 관리자
멜라민   최근 중국발 멜라민 공포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먹고 4명의 어린이가 사망을 했으며 또 4만 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도 중국산 분유를 원료로 한 제품들에서 멜라민이 검출되었고, 심지어는 뉴질랜드산 우유단백질 락토페린에서도 미미한 양이기는 하지만 멜라민이 발견되어 뉴질랜드 당국이 수출을 중단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멜라민은 주로 플라스틱, 접착제, 주방용조리대, 접시류, 화이트보드, 화학비료 등에 사용되는 공업용 화학물질이다. 그런데 질소함량이 풍부한 흰 결정체이기 때문에 우유에 물과 함께 섞을 경우 검사시 단백질 농도가 진짜 우유처럼 나타나게 된다. 멜라민이 함유된 우유나 유제품을 섭취하여 멜라민에 중독이 되면 소변이 거의 나오지 않거나 혈변 및 불안감을 보일 수 있으며, 심하면 방광결석, 요도결석, 신장염 등이 발생하면서 고혈압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수유를 하여야 하는 영아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신장기능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매일 먹게 되면 농도가 소량이어도 체내에 지속적으로 축적돼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 일단 멜라민 중독으로 인해 신장질환이 발생하면 소변을 알칼리화 시키며 전해질 이상을 교정해야 한다. 또 혈액투석이나 복막투석을 할 수도 있는데 심한 경우 신장결석에 대한 수술을 시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사가 길갈에서 죽에 들어 있던 독을 없앴던 것처럼 멜라민 중독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의학의 현주소이다(왕하4:38-41). 그러므로 유제품 외에 멜라민이 주로 사용되는 합성수지 식기 등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아울러 차제에 국가적 차원에서 원산지표시제와 식품성분표시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식품관련 행정사항들도 철저히 점검하여 식품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멜라민 파동을 통해 드러난 이 시대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 대신에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마6:24; 롬16:18; 벧전5:8). 특별히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상거래를 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레19:35; 신25:13-16; 잠11:1; 16:11; 암5:24; 미6:11). 그리할 때 공의의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거짓된 저울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공정한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1:1)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2:43 | 관리자
아동학대   최근 발간된 ‘2007년도 전국 아동학대 현황보고서’를 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9,478건으로 전년대비 6.5% 증가했고 학대아동 보호건수도 5,581건으로 7.3% 늘었다. 또 아동학대 열 중 여덟이 가정에서, 그것도 부모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며 구타에 정서적 학대까지 일삼는 가해자의 절반이 친아버지고 피해아동의 절반이 거의 매일 학대를 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율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사실을 감안하면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동학대가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학대에 따른 상처가 학대받는 당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은 어른이 되서도 쉽게 털어버리지 못한다. 주지하다시피 학대받은 사람이 되레 남을 학대할 확률이 높다. 또한 맥길대 연구팀이 ‘플로스 원’지에 발표한 대로 자살을 시도하게 하는 위험인자가 아동기 학대에 의해 유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동학대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발본색원을 해야 할 의학적, 사회적 아젠다인 것이다. 그래서 지난 달 LA에서 훈육을 목적으로 아들에게 회초리를 든 30대 한인 부부가 아동학대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녀에게 매를 들면 아동학대가 된다는 주장이 점점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자신감을 키워주고 사랑으로 감싸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오히려 ‘회초리’를 소개하고 있다(잠10:13; 13:24; 19:29; 20:30; 22:15; 23:13,14; 29:15). 필자는 두 자녀를 키우면서 회초리를 무척 많이 들었다. 아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성경(특히 잠언)을 읽고 회초리로 징계한 후 같이 기도하고 마무리를 하곤 하였다. 욕을 하거나 직접 손발을 이용한 체벌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었다(잠22:6; 29:17). 그런데 사랑의 매와는 상관없는 신체적 학대나 성적 학대, 비기질적 성장 장애 등이 발생하면 먼저 그 학대받은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이 언제나 사회에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출22:21-27; 마25:31-46).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엡5:11; 딤전5:20; 눅17:3). 이때 가해자는 자기가 지은 죄를 확실히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를 통해서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겔18:31,32). 그러나 예방보다 좋은 치료는 없다.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적 가족관계를 이루어야 한다(엡5:22-25,28; 6:1-4).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남편,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 성경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될 때 아동학대와 같은 가정폭력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너희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육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1:55 | 관리자
안락사   며칠 전 안락사를 요청하는 소송에 대한 현장검증이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에서 실시되었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환자의 자녀들이 어머니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게 해 달라며 낸 소송과 관련해 재판부가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보기 위해 비공개 현장검증에 나선 것이다. 재판부는 아직 안락사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공론의 장(場)이 형성된 적이 없었기에 이 소송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안락사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법원이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현장검증까지 실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안락사에 대한 법리적 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지만 안락사는 단지 죽음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의료장비를 제거하는 ‘소극적’ 방임뿐 아니라 약물 등 치명적인 수단에 의해 환자를 죽이는 ‘적극적’ 행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안락사는 공동의 이해 속에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미명하에 합법적으로 살인을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안락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먼저 성경에 나온 안락사의 예들을 살펴보자.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의해 두개골이 깨진 아비멜렉이 수치스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병기 드는 청년의 칼에 죽은 사건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게 된 사울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말렉 사람에게 부탁하여 최후를 맞은 경우는 전형적인 안락사라 할 수 있다(삿9:53,54; 삼하1:6-10).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도와주었던 행위를 자비로운 것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다. 다윗은 오히려 그 아말렉 사람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삼하1:13-16).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창1:26,27; 9:6). 그래서 살인을 한 경우 외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을 거두실 권한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창9:6). 즉 안락사가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2:7; 시21:4; 36:9; 행17:25).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신32:39; 삼상 2:6,7; 시68:20).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안락사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행20:28; 고전6:19,20; 7:23; 벧전2:9).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고전6:19,2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1:17 | 관리자
한센병(Hansen's disease)   지난 9월 3일 한국한센복지협회의 창립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한때 문둥병 또는 나병이라고도 불렸던 한센병이 현재 인구 십만 명 당 0.12명으로 발생율이 낮춰진 것은 무엇보다 이 한국한센복지협회의 지속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한센병 환우들에게 의료적, 사회적 재활뿐 아니라 체계적인 의료복지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국가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환우들이 차별과 박해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격보호와 복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국가에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센병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잘못된 성경적 해석과 적용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 성경에는 한센병(leprosy)을 진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법을 소개한 레위기 13장과 14장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한센병이 언급되고 있다(출4:7,8; 레22:4; 민5:1-4; 12:1-13; 신24:8; 삼하3:28,29; 왕하5:1-27; 15:1-7; 대하26:16-23; 마8:1-4; 26:6; 막1:40-45; 14:3; 눅4:27; 5:12-15; 17:11-19).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한센병들이 모두 1874년 한센이 명명한 레프라 간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에서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피부질환으로 한센병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성경에서 한센병은 전염이 잘되는 부정한 질병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항생제가 개발되기 수천 년 전의 상황임을 인식하여야 한다(레13:45,46; 민5:1-4; 신24:8; 왕하15:1-7). 오늘날 한센병은 발병하더라도 약을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한센병은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병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도 가능하다. 더더욱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한센병이 저주의 상징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영적으로 죄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전병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한센병은 단지 균이 체내에 들어와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일 뿐이다(레13:13; 삼하3:28,29; 롬5:12). 이제 한센병 환우의 집에 계시기도 하셨으며 많은 한센병 환우들을 고쳐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마8:1-4; 26:6; 막1:40-45; 14:3; 눅5:12-15; 17:11-19).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0:38 | 관리자
장기기증   지난 주 서울대병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망한 사람의 간을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간은 혈액공급에 쉽게 영향을 받는 장기이므로 생체이식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이번 수술은 장기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모자라는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지난 한 해 국내에서 신장이나 간을 이식받은 환자는 천사백여 명이지만 여전히 이만여 명의 환자들이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또 지난 한해 국내에서 장기를 기증한 뇌사자는 148명으로서 이는 뇌사자 100만 명에 3.1명꼴로 장기이식이 이뤄지는 것으로, 장기기증이 활성화된 스페인의 30명, 미국의 25명과 비교하면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신체 훼손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기인하는 바도 있다. 즉 신체가 온전한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 경우 부활에는 적절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전6:3; 렘8:2,3; 단12:2). 그러나 장기기증이나 장애로 신체가 일부 훼손되었거나 또는 화장으로 신체가 완전히 소실된 채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하더라도 부활 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살전4;17; 계21:4; 22:3). 오히려 성경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버리며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권하고 있다(요15:12-15; 요일3: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특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을 섬길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마10:8).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나병 환자들을 정결하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쫓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아울러 이웃을 섬기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레19:18; 마22:39; 눅10:27).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기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8) 이제 영생을 얻게 되는 우리에게 육체는 이 땅에 있는 동안만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하자(계21:4). 그리하여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4:8)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0:00 | 관리자
비만   며칠 전 전직 대통령 중의 한 분이 ‘하루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유가 폭등과 곡가의 상승으로 경제가 어려운 지금 하루 두 끼만 먹으면 상당히 절약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자기 혼자 안 먹고 싶어도 옆에서 먹으면 먹어야 되는데 이 운동을 하면 비만인 사람이나 여성들도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이러한 사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는 어느덧 비만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현실이다. 이미 비만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유병률이 지난 10여년 사이에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성인 인구의 약 60%가 과체중이고 30% 이상이 비만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40세 이상 성인 인구의 약 30% 이상이 과체중 혹은 비만 인구이다. 또한 소아 및 청소년의 비만도 현저히 증가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비만은 더욱더 심각한 사회적 위협이 될 것으로 예측이 된다. 왜냐하면 제2형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심근경색, 협심증, 뇌경색, 뇌출혈 등과 같은 성인병뿐 아니라 역류성 식도염이나 정신질환들도 비만에 의해 유발될 수 있으므로 비만의 증가는 향후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만의 원인으로 유전적 소인, 환경, 발달과정 등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스트레스가 많은 경우 뇌에서 식용중추가 잘못 자극되어 살이 찌게 될 수 있다. 비만의 치료는 생활과 행동습관, 음식을 섭취하는 습관을 건강한 방식으로 바꾸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고 지방과 열량 섭취를 줄이며 유산소 운동과 체력단련 운동을 병행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도 비만에 대한 치료지침이 잘 나와 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식사량을 줄이라는 것(잠23:2,3,21; 눅21:34)과 몸을 많이 움직이라는 것(창3:19상; 시128:2; 살후3:10하)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제 비만을 잘 치료하고 예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고전3:16). “네가 만일 식욕에 빠진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지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들은 속이는 것들이니 그것들을 바라지 말라.”(잠23:2,3)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창3:19상)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하)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9:23 | 관리자
근친혼   얼마 전 호주의 한 남성이 자신의 딸과 7년 넘게 근친상간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드러나 호주 사회는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남성이 무장 강도 혐의로 법정에서 심문을 받던 도중 밝혀졌는데 이들 사이에는 현재 한 살 난 딸이 있으며 2001년에 태어난 첫아이는 출생 후 며칠 만에 선천성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이들의 근친상간을 불법으로 판결내리고 앞으로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3년 동안 감시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어떤 사회에서나 근친자의 통혼은 금기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전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유전병과 관계가 있는 해로운 열성 유전자를 4-8개 가지고 있다. 비록 해로운 열성 유전자가 있어도 대부분 보인자이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 수 있지만, 근친결혼을 하면 보인자인 부모에게 감춰져 있던 해로운 열성 유전자가 그 자손에서 동형이 되어 표현형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아울러 한 개체군에서 동종교배가 20세대 동안 계속되면 각 개체는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하게 되어 그 개체군의 적응 능력은 매우 낮아진다. 따라서 그 개체군은 환경 조건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적응하는 데 탄력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교배개체군들 간에 자연도태가 잘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근친혼을 허락하셨을까? 가인도 분명 아담이 낳은 많은 누이들 가운데 한 명과 결혼을 하였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사라를 아내로 삼았으며, 이삭은 삼촌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 즉 오촌하고 결혼을 하였고,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과 레아 즉 사촌 두 명과 동시에 결혼을 하였다(창4:17; 5:4,5; 20:12; 24:15,24; 창29:12,23,28). 그렇지만 이 같은 근친혼은 어느 정도 인류가 번성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이었다(창1:28; 9:1). 그리고 근친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다가 모세의 때에 율법으로 금지되는데, 이는 사회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근친혼을 통한 유전적인 위험성도 상당히 커졌기 때문이다(레18:6-10; 20:10-21; 신27:20-23). 왜냐하면 노아홍수 이후 궁창 위의 물이 제거됨으로써 몸에 해로운 우주복사선이 증가하여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즉 유전자 돌연변이가 덜 축적되었던 족장시대까지는 한동안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올드 보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6)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8:44 | 관리자
동성애   여성으로 살다 성전환수술을 거쳐 법적으로 남자가 된 34세의 한 미국인이 지난 주 여아를 출산했다. 동성애 전문 잡지 ‘디 애드버킷’(옹호자)에 ‘사랑의 출산’이란 제목으로 기고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이 임신한 남자(?)는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에 출연하여 “아이를 갖는 것은 남자나 여자의 소망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이기 때문에 나의 생물학적 아이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 대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까지 동성애에 대해 알려져 왔던 다양한 스펙트럼을 총정리하는 듯한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정말 동성애는 이 출산한 남자를 비롯해 동성애인권운동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어떤 발견도 이루어진 바 없으며, 일란성 쌍둥이에서의 연구결과도 마찬가지이다. (또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절대 치유가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정신과 상담 또는 신앙의 힘으로 치유되고 있다.) 알프레드 킨제이 등에 의해 세워진 성연구원의 공식 간행물의 보고에 의하면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특히 게이들은 수많은 섹스파트너를 갖고 난교(亂交)를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학적으로는 동성애자들에서 예견되는 성행위로 인해 구강, 폐, 전립선, 남자성기, 쓸개. 항문, 직장, 결장, 여자성기, 자궁, 골반, 뇌, 피부, 혈액, 면역시스템 등 여러 신체시스템에 갖가지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동성애가 에이즈에 매우 취약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감염자의 살을 파먹는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의 새로운 변종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의 게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성애는 이처럼 신체적 이상들을 잘 일으키는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심각한 침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더욱 더 문제가 됨을 알아야 한다. 동성애자들이나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를 적절히 인용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배격한다(창1:27). 대신 그들은 대부분 진화론을 동성애의 토대로 삼는다(딤전6:20). 또한 성경이 동성애가 가증스런 죄악임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한다(레18:22; 20:13; 왕상14:24; 롬1:26,27; 고전6:9; 딤전1:10; 유다1:7). 결국 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요일1:8). 아울러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부정한다(엡5:22-33).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지 못하게 한다(딛2:13; 계19:7,8; 22:20). 이제 동성애가 영육 간에 치명적임을 잘 인식하여 동성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이들을 참 건강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자(약5:19,20).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7:44 | 관리자
성폭행   요즈음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연일 성폭행 뉴스가 매스컴을 달구고 있다. 특히 어린 초등학생에서부터 연로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무차별로 성폭행을 당하고 있고 집단적이며 조직적인 성폭행까지 만연한 것을 보면 정말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출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딤후3:1-5). 성폭행은 남녀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에 의해 성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하는데 만일 성폭행의 희생자가 된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즉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목욕은 물론 양치질도 하지 말고 옷도 갈아입지 말고 바로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옷이나 몸에서 떨어진 체모나 가해자의 피부가 남아 있을 수 있는 손톱 등이 조사대상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조기 진료를 통해 신체적, 정신적 안정을 빨리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행을 당하게 되면 출혈, 외상, 성병 등과 같은 신체적인 문제뿐 아니라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직접 경험할 때 받는 것과 같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생기게 된다. 집중력 장애, 학업 부진, 불면증, 악몽에 시달림, 식욕 감퇴 등의 행동장애가 나타날 수 있고 불안감, 수치심, 혹은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흔히 편두통이나 신체 하부통증, 피부병과 같은 정신신체 증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때로는 분노와 증오심을 자신에게 돌려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성폭행은 다른 행동의 유발원인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태가 ‘폭력’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것에 불과하다(잠23:7상).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폭력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이다(렘17:9; 막7:20-23; 롬3:10-12). 그래서 성폭행을 포함한 인간문화의 모든 폭력적인 모습은 인간의 본성 곧 폭력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이 잘못된 마음으로부터 연유한 성폭행들이 소개되고 있다. 소돔에서 시도된 집단 동성애적 성폭행을 위시하여 롯의 두 딸이 롯에게 행한 성폭행, 야곱의 딸 디나가 당한 성폭행, 벨리알의 아들들이 레위 사람의 첩에게 행한 성폭행,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에게 행한 성폭행과 이후 압살롬이 서모들에게 행한 성폭행 등이 언급되고 있다(창19:4-11,30-38; 34:1-5; 삿19:22-28; 삼하13:6-14; 16:20-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성폭행들을 철저히 심판하셨으며 또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명령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신22:25-27; 창19:23-25; 습2:9; 창34:25-31; 삿20:12-48; 삼하13:28,29; 18:9-17; 살전5:22). 따라서 우리는 성폭행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을 해야 하며 아울러 성폭행을 부추기는 안방까지 침투한 갖가지 음란문화들을 빠짐없이 제거해야 한다. 그리할 때 진정 성폭행으로부터 해방된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가 이뤄지게 될 것이다.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 잠자리는 더럽히지 말아야 하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라.”(살전5:22)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7:07 | 관리자
잔소리   잔소리의 사전적 정의는 ‘듣기 싫게 늘어놓는 잔말’이다. 특히 아내가 남편하게 하는 잔소리는 바가지라고 표현이 된다. 아담과 이브가 한 몸을 이룬 후 그들 간에 잔소리가 오간 적이 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아마도 아담이 930년을 사는 동안 이브로부터 바가지를 긁힌 적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창5:5). 그 후 많은 인물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데 잔소리가 처음으로 성경에 언급된 것은 창세기 16장에서이다. 즉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로 인하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바가지를 긁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창16:1-6). 그러나 아쉽게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후손을 얻으려 했던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우를 범하였다(창16:2). 그리고는 또 사래가 수태한 하갈로부터 멸시를 받고 아브람에게 바가지를 긁자 사래의 뜻대로 하갈을 다루도록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창16:6).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사실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잔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되어 정신적인 불안, 우울, 가슴앓이, 오해, 망상, 그리고 사고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아마도 사래의 잔소리는 일회성이지 않았을 것인데 사래의 지속적인 잔소리에 어느 순간 아브람의 판단력에 문제가 생겨 아브람도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결정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잔소리에 의한 스트레스는 정신건강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신체적 병까지 일으킬 수 있다. 불면,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위궤양, 당뇨병, 성기능 장애, 심지어는 암까지도 유발될 수 있다. 그래서 잔소리는, 특히 바가지는 다른 스트레스처럼 만병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죽하면 역사상 가장 지혜가 출중하였던 솔로몬이 “다투는 여자와 함께 넓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모퉁이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9) “다투며 성내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19) 등과 같은 고백을 하였겠는가(왕상4:29-34). 그리고 비단 잔소리는 부부관계에서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뇌의 전두엽이 한창 성숙될 시기인 10대 자녀에게 잔소리를 해대면 새로운 신경 세포망이 정비되지 못해 인내심과 책임감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증가하는 ‘노르에피네프린’이 전두엽과 인지 기능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성급하게 잔소리를 하는 대신에 인내하며 나누는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우리 가족의 건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는 오히려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잠29:20) “오래 참음을 통해 통치자도 설득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25:15)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6:07 | 관리자
최진실법   지난 주 온 국민을 경악케 한 최진실씨의 자살은 악성루머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을 뿌리 뽑기 위해 일명 ‘최진실법’의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울러 경찰은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자와 악질적, 상습적 ‘악플러’를 구속수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집중단속에 착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익명성을 이용해 인터넷상에서 타인을 비방하여 심적 고통을 주고 그로 인해 우울증을 유발시켜 자살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것은 올바른 처사라 생각된다. 또한 최근 보건복지가족부가 우울증 조기 검진을 위해 현재 초․중․고생 10만 명을 대상으로 시범실시 중인 정신건강 검진을 성인으로 확대하기로 한 것도 국민건강을 위해서는 매우 바람직한 방침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무심코 뱉는 말 한마디가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사실은 정신신체의학이 발달하기 수십 세기 전에 살았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인물인 솔로몬이 잘 표현하고 있다(잠12:18; 16:24).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게 달고 뼈에게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또한 솔로몬은 최진실씨의 자살원인이 된 악성루머가 얼마나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잠18:8; 26:22).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상처들과 같아서 배 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18:8) 그런데 최진실법의 형량이 어떻게 정해질지 알 수 없지만 성경적으로는 수군수군하거나 뒤에서 헐뜯을 경우 ‘사형’에 해당이 된다(롬1:29-32). 그렇다면 최진실법에는 걸리지 않을지라도 성경적 기준으로 사형을 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악플’을 구상하는 갖가지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마15:10-20; 롬3:10,12,23).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님으로 인해 말로 지은 죄뿐 아니라 어떠한 죄악도 다 용서받고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이르지 않을 수 있음을 감사하자(롬5:8-10; 6:23). 그리고 이제는 비방과 허위와 악플이 아니라 따뜻한 말과 웃음과 칭찬으로 이웃을 세워주도록 하자(롬14:19; 살전5:11).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최진실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5:22 | 관리자
말(言語)   하나님께서는 단지 말씀하심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창1:3,6,9,11,14,20,24). 또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에 의해 그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히1:3).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우리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말(言語)에도 그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다(막11:23). 즉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 우리 삶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기까지 하다. 최근 들어 정신신체의학의 발달을 통해 말이 우리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잘 밝혀지고 있다. 일례를 들어 보자. 어느 학자가 같은 종류의 식물을 같은 장소에 두고 같은 양의 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한 식물에게는 매일 사랑의 말을 들려주고 한 식물에게는 나쁜 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몇 주 후 두 식물을 비교해 보니 사랑의 말을 들려준 식물은 건강하게 잘 자라났지만 나쁜 말을 들려준 식물은 시들어 죽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담긴 긍정적인 말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선천성 관절병이 치료된 바네사의 간증’에서처럼 어떤 말을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건강에 이로운 것이다(잠16:24).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인 말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 쉽다. 예를 들어 ‘죽겠다, 죽고 싶다, 안 된다’ 등의 표현은 거의가 절망적으로 또는 자기비하로 쓰이기 때문에 스트레스 호르몬의 과다분비를 가져와 우리 몸에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마7:7,8; 살전5:16-18). 아울러 말을 빨리 반복하여 건강하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만트라’(mantras) 기법 또한 영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마6:7; 딤후2:16). 만트라 기법은 힌두교나 불교에서 뿐 아니라 스트레스 증상 관리와 관련하여 이용되기도 하는데, 명상의 생리적 효과에 대한 연구를 해온 허버트 벤슨은 이완반응이란 논문에서 말을 빨리 반복하는 동안에 깊은 이완상태가 나타남을 보고하고 있다. 즉 실험대상자들의 산소 소모가 감소되고, 심장박동수는 느려지고, 전기피부저항은 증가하고, 혈압은 낮아졌다. 그러나 비록 말을 빨리 반복함으로 여러 건강수치가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는 있지만 만트라를 하게 되면 영적으로 침해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살전5:22). 이처럼 말은 우리의 육적, 영적 건강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말을 하며 우리의 건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게 달고 뼈에게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4:29 | 관리자
23. ‘순간’에 현혹되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는 ‘영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의 이 ‘순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잠깐 있다가 영원히 사라질 가치들로 우리를 현혹하는 사탄의 은밀한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 이 ‘순간’의 것들이 아무리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영원’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잠깐이라도 양지 바른 곳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세상은 우리의 쓴웃음을 자아낸다. 이제 교회는 다시 ‘영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교회에게 허락하신 무한한 복은 바로 ‘영원’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길게 보아야 한다. 현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숫자나 세는 짓을 중단하고, 자신이 지금 어떤 기초 위에서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교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위해 동분서주하지 말고, 영원히 남는 것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영원’의 도장을 찍어 놓으신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유행을 좇는 인기 있는 교회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얕은 시냇물에 비유될 수 있다. 반면 ‘영원’을 생각하는 교회는 깊은 대양과 같다. 시냇물은 최근의 소나기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대양이 너무 조용하고 재미없다고 불평할 것이다. 하지만 ‘영원’의 큰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은 대양뿐이다. 주님! 제가 늘 영원을 의식하며 살 수 있게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2:15 | 관리자
22. 하나님은 인기 사냥꾼 대신 조용한 영웅을 찾으신다   이 시대에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실상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밀어붙여서 혹은 운이 아주 좋아서 현재의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눈길을 돌린 다음 심히 낙심이 되어 “인류가 배출한 영웅이란 자들이 고작 이 꼴인가?”라고 한탄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낙심하지는 말라.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릴 때 이런 한탄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누구도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도래를 알리지 않고 그들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허풍선이들보다 훨씬 고결한 성품을 갖고 있다. 교회도 사이비 영웅들 때문에 아주 피곤하다. 목소리 큰 자들과 얼굴이 많이 알려진 자들이 가장 훌륭한 교인으로 통하는 상황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인기 있는 교인’을 ‘신앙 좋은 교인’으로 착각하는 잘못을 범한다. 신자들은 온유한자들보다는 주제넘게 나서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애통하는 자들보다는 의기양양한 자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마음이 깨끗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들보다는 ‘인기 사냥꾼’이 되어 신문의 1면 머리 기사를 장식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더 대접받고 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명심하라. 하나님은 조용한 영웅들을 찾으신다는 것을! 주여! 무명의 충성스러운 성도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조용한 영웅들’과 그들의 숨은 봉사로 인해 감사합니다. 오늘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1:33 | 관리자
21. 하나님은 일의 결과보다 동기를 보신다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내가 과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나의 수고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인생을 헛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여러 봉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다”라고 규정해 왔는데,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견해가 옳았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어떤 일이 진정한 봉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일의 종류나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숫자나 규모에 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갈 것이다. 그분 앞에서는 오직 도덕적 질(質)이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평가를 내리시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봉사의 질을 문제 삼으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봉사가 원하는 바의 목적을 달성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이 우리의 봉사를 받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분이 보시는 것은 인간들이 보는 것과 다르다. 신앙적 봉사에서는 ‘봉사를 하는 동기(動機)’가 전부이다. 동기에 따라 어떤 봉사는 ‘죽은 봉사’가 되고, 또 어떤 봉사는 ‘산 봉사’가 된다. 주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숫자나 규모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오직 도덕적 질(質)에 대한 이야기만 나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제가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0:52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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