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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유튜브로 듣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풀어주시는 주옥같은 말씀에 늘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궁금한 점이 몇 개 생겨서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아래 문의사항에 답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을때부터 성인이었나요? 성인이었다면 그 때부터 나이를 1살로 카운트해서 930세까지 산건지 궁금합니다.   2. 신약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왕국(메시아 왕국)을 전하시는데 유대인들이 받아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결국, 메시아 왕국이  예수님 재림때로 연기가 됐는데... 그럼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왕국 복음을 받아 드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류구속 죄사함)도 없고, 이방인들의 구원 또한 없었을까요?   3. 인류 최초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아담이 사용한 언어인지... 성경적으로 추측이 가능한가요..?   4. 새하늘과 새 땅 (제3의 하늘, 천국)에 들어가면 거기서 무엇을 하며 영원토록 지내나요?   아직 성경적 지식이 많이 부족하고 평소에 궁금했던 사항들이라 몇 자 적어봤습니다.
2019-03-19 22:42:48 | 이윤희
답변감사합니다 ! 제가 생각했던 부분과 답변 주신 부분이 일치 하니 이해는 확실히 되네요 다만 말보 뿐 아니라 개혁 등 워낙 향기로 알고 표현적으로 향기가 좋다고 생각되다 보니 전환하기에는 시간이 좀 소요되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바꾸는게 문제라기 보다 혹시라도 다른사람과 괜히 사소하게 언쟁이 날까봐 좀 그래요 구약에서 말씀하신 부분 따라서도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번째 성경 분철를 하려고 하니 왠지 기대되네요 ㅋ
2019-03-11 21:23:44 | 박세준
안녕하세요? 어느정도 가늠하고 계시는 것 같아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여놓겠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민수기를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앞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무장을 하고 성도의 삶을 살아야하는지 자꾸 되새기게 됩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은혜의 말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레 6:23) 제사장을 위한 모든 음식 헌물은 전부를 태울지니라. 그것을 먹지 말지니라. (레 3: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제단 위에서 태울지니 그것은 불로 예비하는 헌물의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주의 것이니라 (레 3:16) And the priest shall burn them upon the altar: it is the food of the offering made by fire for a sweet savour: all the fat is the LORD's.   savour의 그리스어는 오스메(ὀσμὴν, osme)라는 말로 향기, 냄새,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조(ozo, 냄새를 풍기다, 악취를 내다)라는 기본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레위기 말씀들에서 보시다시피 양과 염소를 태우는데 좋은 냄새가 나겠습니까? 하지만, 거의 모든 다른 역본에는 fragrance(향기, 향수)로 번역하여 마치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로 의미를 맞춰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성경은 아래와 같이 향기로운 헌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 같이 사랑 안에서 걸으라.   사도 바울도 자신을 헌물로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 2:17) 참으로 너희의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내가 헌물로 드려질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 (딤후 4: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이제 고린도후서 2장 14, 1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고후 2:15)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나 멸망하는 자들 중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니 (고후 2:15) For we are unto God a sweet savour of Christ, in them that are saved, and in them that perish:   누구의 냄새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이고 주님으로 인해 나는 냄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역본처럼 사람의 향기(fragrance)가 아닙니다. 성경기록들에서 보시듯이 지나온 성도들은 고고하고 우아한 삶을 살았던게 아닙니다. 채찍질, 결박, 감옥에 갇히고, 돌로 맞고, 톱으로 잘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오직 복음과 그리스도, 그리고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배고픔과 추위속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헌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때는 레위기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이런 것을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로운 향기로 번역을 한다면 문맥의 의미와 성경전체에 흐르는 말씀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네요.   더군다나 본문의 향기로운 냄새(a sweet savour)는 원어적으로도 유오디아(euodia)라고 하며, '좋은 냄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 성도들이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선진들처럼 살지는 않지만, 그 정신만은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냄새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악취를 풍기겠지만,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a sweet savour가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일을 감당할 준비가 된 성도가 지금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샬롬   (고후 2:16)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으리요?
2019-03-11 17:38:16 | 이명석
  가입이 안되었는 줄 알았는데 7년전에 질문을 드린적이 있더라구요 ㅋㅋ 킹제임스 말씀보존학회 번역 성경 15년 정도 읽었는데 너무 오래 사용한거 같고 제 나름에 성경 환기? 가 필요한거 같아서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흠정역을 사용해보려고 하거든요 영어를 못하는 저에게는 한글번역된 성경이 권위입니다 ㅠㅠ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영어는 못하네요 ;;   제가 속해있었던 교회가 단독침례교회였다보니 킹제임스영어 성경과 한글번역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잠깐 봤던 기억이 있는데  궁금 했던게 해당 구절에 관한거에요   고린도후서 2장 14~17절   14 Now thanks be unto God, which always causeth us to triumph in Christ, and maketh manifest the savour of his knowledge by us in every place.   15 For we are unto God a sweet savour of Christ, in them that are saved, and in them that perish:   16 To the one we are the savour of death unto death; and to the other the savour of life unto life. And who is sufficient for these things?   17 For we are not as many, which corrupt the word of God: but as of sincerity, but as of God,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다른 번역하신 분들 내용 봤을때 보통 그리스도의 향기로 번역들을 많이 하셨더라구요 근데 그리스도의 냄새라고 번역하신 이유가 있나 해서요   영어사전으로 보니까 savour 가 맛으로 뜻이 나오던대 하나님앞에는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맛보여 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되네요 영어를 못하니까요 ㅋㅋ;   아무래도 구약쪽에서 하나님께 불살라질때 향기로운 냄새다 라는 내용이 있었던 구절들을 봤었는데 그부분을 기준으로 하여 그렇게 번역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사람의 행위가 항상 향기가 나지 않을테니 그러신거 같기도 하구요   왜냐면 제가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게 되면 그 성경에 맞춰 그리스도의 냄새 나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하는게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향기는 긍정적이라면 냄새는 상황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는 순수한 의미가 있는거 같아 차이는 좀 있을거 같아서요
2019-03-11 13:05:55 | 박세준
안녕하세요?   우리가 소개하는 지역 교회들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제 참으로 난감한 글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킵바이블 담당자님. 지역 교회 난에 저희 교회가 있는데 삭제를 부탁드립니다. 킵바이블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오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목회자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하나님께 불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만 하는데 정작 본인들은 술을 한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몇 분이 오셨는데 다 동일합니다. 지방 개척교회라 재정도 어렵고 오시는 분도 많지 않습니다. 한 명이 귀한데 함께 일 할 마음 없는 이런 분들이 한두 번 오셔서 불평만 하다 가면 사역하는 데 엄청 힘이 듭니다. 제발 부탁드리오니 저희 교회는 킵바이블에서 제외해 주세요.”   이런 편지는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또 이런 항의도 있습니다.   “목사님, 지역 교회 난에 이름이 있어서 목사님 교회처럼 하나님의 오른쪽의 가치,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줄 알고 예배드리러 갔더니 교회가 좌익 세력들 중심이라 실망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좌익임을 표방하더군요.”   이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킵바이블 지역 교회 난에 올라온 교회들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쓰는 교회들입니다. 그 교회들과 거기 목사님들이 어떤 교리와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http://keepbible.com/Cmn4   그러므로 직접 방문하셔서 살펴보시고 영혼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으면 다니시기 바랍니다. 다만 못 다니시는 경우에도 신사답게 조용히 나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예의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 교회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영혼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으면 가까운 교회에 다니셔야 합니다. 교회가 가까워야 자연히 교제를 하면 좋은 믿음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9-03-05 11:03:02 | 관리자
참고로 부르스 메츠거의 추신(로마서 16장 27절 추신)에 대한 글을 영어로 올립니다. 이런 자료들은 추신이 본문인지 아닌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추신)의 차이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Romans 16:27      Subscription (a) The earliest subscription is merely πρὸς Ῥωμαίους א A B* C D* al. Other subscriptions include: (b)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γράφη ἀπὸ Κορίνθου (to the Romans from Corinth) B2b Db (P); (c)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γράφη διὰ Φοίβης ἀπὸ Κορίνθου (to the Romans, carried by by Phoebe the servant) 35 (201 om πρ. Ῥωμ.); (d)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γράφη ἀπὸ Κορίνθου διὰ Φοίβης της διακόνου (to the Romans written from Corinth through Phoebe the servant) 42 90 216 339 462 466* 642; (e) as (d) but prefixing τοῦ ἁγίου καὶ πανευφήμου ἀποστόλου Παύλου ἐπιστολή (of the saints and to the Romans written from Corinth carried by Phoebe the servant) L; (f) ἐγράφη ἡ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πιστολὴ διὰ Τερτίου· ἐπέμφθη δὲ διὰ Φοίβης ἀπὸ Κορινθίων 337; (g) as (d) but adding τῆς ἐν Κεγχρεαῖς ἐκκλησίας 101 241 460 466c 469 602 603 605 618 1923 1924 1927 1932, followed by the Textus Receptus. •Metzger, Bruce Manning, United Bible Societies.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Second Edition a Companion Volume to the United Bible Societies’ Greek New Testament (4th Rev. Ed.). Londo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4. Print.
2019-03-01 09:54: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 뒤에 추신(Postscripts)이 들어 있습니다.   위의 질문자가 말한 대로 데살로니가전후서의 마지막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째(둘째) 서신을 아테네에서 써서 보내다."가 있습니다.   이런 추신들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본문의 일부로 생각하고 넣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스테파누스와 베자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도 이것들이 들어 있고 심지어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이라고 할 때에는 이런 추신들은 본문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저는 믿습니다. 즉 추신은 말 그대로 추신이지 본문은 아닙니다. 제목, 장, 절 번호 등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인 것과 성경이 아닌 것>   http://keepbible.com/KJB6/View/2Zd   감사합니다.   패스터 정동수
2019-03-01 09:46:5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인혜 자매님.    신약성경 연대기   위 신약성경의 연대를 보시면 사도행전은 AD 6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야고보서가 45년경이고 그 다음이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절에 보시면    (살전 3:1) 이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우리만 아테네에 남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 연대기와 함께 말씀을 보시면서 잘 이해를 하셔야합니다. 고린도전후서를 쓴 시기와 얼마 차이가 나질 않습니다.  성경 사전에 '이 기간에 그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했고' 라는 것은 그 얼마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고, 링크 해 주신 데살로니가전서 개요에도 '바울사도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사전과 개요에 대한 글들의 이해 문제이니 이 부분들은 더 설명이 필요 없어도 될거 같습니다.    추신부분은, 성경앱이나 베들레헴 성경에서는 이 영문을 빼 버렸지만 흠정역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흠정역 :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을 아테네에서 써서 보내다. KJV    : The first [epistle] unto the Thessalonians was written from Athens. 원문  : 4314 prov (에게) (unto)  2331 Qessalonikeuv (데살로니가인들) (Thessalonians)   4413 prw'to (첫번째는) (first)  1125 gravfw (기록되었다) (was written)  575 ajpov (로부터) (from)  116  jAqh'nai (아테네) (Athens)    Scrivener's Textus Receptus 1894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θ’ ὑμῶν. ἀμήν. πρός Θεσσαλονικείς πρώτη ἐγράφη ἀπό Ἀθηνῶν   Stephanus Textus Receptus 1550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θ' ὑμῶν ἀμήν πρός Θεσσαλονικείς πρώτη ἐγράφη ἀπό Ἀθηνῶν   원문에는 이렇게 나와있지만, 문맥의 성격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첨가한 추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충설명이 필요하면 목사님께서 보시고 시간 되실때 따로 해 주실것입니다. 샬롬  
2019-02-24 01:49:53 | 이명석
안녕하세요? 흠정역 성경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킵바이블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는 이인혜 자매입니다. 흠정역 사역을 위해 수고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서를 묵상하고 공부하다가 의문이 생겨서 질문을 드립니다.   사도행전 17-18장을 봐도 그렇고, 성경사전과 우리가 보는 흠정역 성경 개요에도 쓰여 있듯이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써서 보낸 것으로 사료됩니다. *성경사전: http://keepbible.com/Dictionary/View/2ys *데살로니가전서 개요: http://keepbible.com/BQNA52/View/4Hw   그런데 데살로니가전후서의 마지막에 쓰여 있는 각주를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째(둘째) 서신을 아테네에서 써서 보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사도 바울 서신의 각주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기록이 아니라 번역자들의 첨언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각주에 오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이 잘못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2019-02-23 14:57:43 | 이인혜
그리고 김형욱 형제님~ 라일 목사님이 전한 다음의 설교도 참조하세요. 라일 목사님의 책 "거룩"에 나오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란 설교의 한 부분인데요, 라일 목사님은 아직 어리고 미성숙했던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같이 설교했습니다.   ----------------------------------------------------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습니다!!!>  파도가 배를 때리기 시작하자 제자들이 보인 행동이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황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   "그분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라.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매"(마가복음 4장 38절)   제자들은 “성급했습니다” 주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렸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 이것이 제자들의 비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의 안전과 안녕을 돌보시는 것을 의심하면서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믿음 없는 가엾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들이 왜 무서워해야 합니까? 신랑이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무수한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결코 그들을 위험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선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눈앞에 닥친 위험이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한 모양입니다. 위험이 코 앞에 닥친 것을 느끼면, 사람들은 가장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람 소리를 들었고, 파도를 보았습니다. 자신들을 때리는 차가운 물결을 느꼈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이 바로 이렇습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도 많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이 없을 때는 아주 잘 지냅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꽤 그럴 듯하게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염려를 그분께 다 맡겼다고 우쭐해 합니다. 아주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평판도 얻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시험이 찾아들고, 재물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립니다. 건강도 약해지고, 집 안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말씀으로 인한 고난과 핍박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믿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자기에게 있다고 믿었던 강한 확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평강과 소망, 인내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한 것이 드러납니다. 두려움, 의심, 염려, 걱정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그들은 그 속에서 속절없이 이리저리 떠다닙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합당한지 묻고 싶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완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탁월하고 빛나는 하나님의 성도라고 해도 순전하지 못한 가련한 존재일 뿐입니다. 회심하고 새롭게 되고 성화되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항상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전 7:20) 우리는 여전히 많은 죄를 짓고 삽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항상 그 믿음을 발휘하며 살지는 못합니다(약 3:2)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믿음으로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상속재산으로 주실 것을 믿으며, 나그네와 순례자로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불신앙에 사로잡히자, 사람이 두려운 나머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얼마나 나약한 모습입니까? 하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성도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소년이었을 때, 거인 골리앗과 싸울 정도로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이 블레셋 사람에게서도 자신을 구해 내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공언했습니다. 비록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사울은 산속에서 새를 사냥하듯 자신을 쫓고 있어서 죽음이 지척에까지 다가왔지만, 엔젠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도 두려움과 불신앙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마음속으로 이르되, 이제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멸망하리니 내가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빨리 도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없도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지경에서 나를 더 찾다가 나로 인해 절망하리니 내가 이와 같이 그의 손에서 도피하리라, 하고”(삼상 27:1)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놀랍게 역사하여 그를 구해낸 많은 일들을 잊었던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위험만 생각하고 불경건한 블레셋 사람에게로 도망쳤습니다. 다윗에게 있는 큰 흠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다윗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진 신자는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보여준 두려움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과 실제로 함께 있었던 그들은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만약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처럼 믿음 없는 소리를 하거나 겁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혹을 받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의 연약함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합니다. 연약함이 드러날 만한 환경에 처해 보지 않으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확신이 너무 커서, 이런 일로 크게 요동하는 제자들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만한 믿음이 있다니 너무 기쁩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은 연단을 거친 믿음입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확신은 시험을 통과해서 생긴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제자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너무 성급히 판단하지 마십시오. 교만한 마음이 아닌 두려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지금은 의기양양하지만, 항상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다고 해서 “내일도 오늘같이 크게 넘치리라”고 말하지 마십시오(사 56:12).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한껏 고양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맘껏 누린다고 해서 “내가 사는 동안 그분을 잊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긍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지금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휠씬 많은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역대기하 32장 31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히스기야의 마음속에 있던 모든 것을 알고자 하사 그를 시험하시려고 그를 떠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옷 입”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벧전 5:5). “항상 두려워하는 자는 행복”합니다(잠 28:14). “그런즉 스스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고전 10:12). 제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타락을 변명하고 그들의 죄를 덮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성화의 수준을 낮추고,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묵인하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는 사람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없애고, 신앙고백과 삶의 불일치에 대해 눈감으려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된 그리스도인, 신자와 불신자,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믿음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의 차이이고, 신앙고백의 차이가 아니라 실천의 차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신자의 삶의 방식은 불신자의 삶의 방식과 확연히 다릅니다. 달콤한 것이 쓰디쓴 것과 다르고, 빛이 어둠과 다르고, 뜨거운 것이 차가운 것과 다른 것처럼 분명히 다릅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서” 발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기 안에 있는 참 믿음과 은혜를 발견하십시오. 비록 마귀가 가짜라고 거짓으로 속삭이고, 스스로도 자신의 믿음과 은혜에 대해 많은 의심과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도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잘 보십시오. 이들이 비록 참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이지는 못했기 때문에 항상 두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을 변명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통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두려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믿음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 “다른 신자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 사람에게는 은혜가 없다고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해같이 밝은 곳에도 흑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해는 밝은 빛을 내어 온 세상을 비춰 줍니다.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들어오는 많은 금덩어리에는 수정과 찌꺼기가 뒤섞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금의 가치를 무시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값진 다이아몬드도 흠은 있기 마련입니다. 흠이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절하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이 좀 있다고 해서 바로 출교시키려고 하는 병적인 까탈스러움은 버리십시오! 흠은 더디게 보고, 은혜는 속히 보십시오! 타락이 있는 곳에서 은혜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세상 어디에서도 은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몸을 입고 있습니다. 마귀도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천사와 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담벼락을 긁어낸다 해도 그 집을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집 안에 있는 나병이 다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사실이지만, 들림받고 변화되기 전까지는 완전한 성전이 아닙니다. 은혜는 정말 소중한 보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질그릇에 담긴 보화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일어나는 의심과 두려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교훈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 폭풍 가운데서  사도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너무 매몰차게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해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우십시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도, 거룩한 사람도 아니라는 진리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마십시오. 하지만 회심하여 새로운 마음을 가진 거룩한 사람이라도 연약함과 의심과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2019-02-15 19:24:28 | 이승훈
김형욱 형제님~ 성경에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단언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 "육신에 속한 자"(carnal)를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babies in Christ)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영에 속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로 구분한 것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을 "영에 속한 자"로 대할 수 없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 곧 "육신에 속한 자"로 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3:1) 그 까닭은 비록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1년 8개월 동안 양육한(행 18:11) 고린도 신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성숙한 상태, 육신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2-3절) 바울은 분명 그들이 회심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그들 중에 다수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같은 육신적인 행위가 있음을 지적하며 그들이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본성에 속한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3절).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점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을 책망하면서 표현하기를 그들을 단순히 "육신에 속한 자"로 표현하지 않고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기들"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의 "상태"와 "신분"을 아주 세심히 구분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울이 보기에 그들의 "상태"는 여전히 육신에 속한 상태, 즉 미성숙한 상태지만, 바울이 믿기에 비록 갓난아기라 할지라도 그들의 "신분"(위치)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님도 인정하시겠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전 5:17). 갓난아기처럼 아무리 미성숙한 신자라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성도라는게 성경의 은혜로운 선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 그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1)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3장에 가서 "육신에 속한 자"로 대하면서 경책할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거룩히 구별된 성도"라 불렀다면, 바울은 분명 그들을 "거듭난" 성도로 대하고 믿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거듭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단언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물론 자신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회심하지 않은 거듭나지 못한 쭉정이들(거짓 신자들)'도 많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거나 구원을 유지하는 것은 "행위 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by grace through faith) 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하도록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엡 3:8-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선한 행위"에 전혀 힘쓰지 않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죄를 사랑하거나 거룩을 전혀 추구하지 않는 형제라 불리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울의 권면처럼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고후 13:5-6). 그리스도인은 결코 육신적인 상태에 머물거나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성장하기를 사모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소원하며 성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결론적으로 저는 육적인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성경이 말한다고 해서 이를 당연시하거나 육의 방종을 위해 이 가르침을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이를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미성숙한 형제들을 함부로 정죄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형제님~ 라일 목사님이 말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알곡"(하나님의 왕국(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쭉정이"(지옥에 갈 사람)로 인류를 나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회색지대나 연옥 같은 것을 믿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본성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과 은혜 안에 있는 사람, 좁은 길로 가는 사람과 넓은 길로 가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 편에 선 사람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모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오직 두 부류만 있다고 그들도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기준은 오직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없느냐? 혹은 그 사람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있느냐? 없느냐로 갈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구세주를 믿는 믿음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님도 라일도 저도 같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구원받은 우리들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완전하지만(골 2:10; 히 10:14), 우리들의 "상태"는 지금 완전하지 않고, 자랄 필요가 있고, 성장 속도에 따라 영적일 수도 있고 육신적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3장; 히 5:12-14). 무엇보다 우리는 오류나 실수를 범할 수도 있고 속임을 당할 수 있고 분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눈에는(혹은 분별에는) 그 상태가 영적인(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육신적인(타락한 육신의 지배를 받는)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 영적으로 보여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없으면" 그는 "쭉정이"(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거짓 신자)"라는 것이고, 반면에 우리 눈이 보기에 육적으로 보여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알곡"(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참 신자)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쭉정이"(본성적인 사람=자연인)와 "알곡"(영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성한 사람) 그리고 쭉정이도 알곡도 아닌 중간 형태의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자든 미성숙한 자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즉 그리스도로 옷입었으면) 그는 분명 "알곡"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없다면, 그가 누구든 그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든간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쭉정이"로 분류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 라일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이나 위치"는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마지막날의 그 위대한 분리에는(알곡과 쭉정이로 가르는) 조금도 오류가 없을 것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확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온전히 죄용서를 받았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얻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실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정죄치 않을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내게 있는지, 마지막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나를 안다고 하실지, 하나님과 내가 정말 화목케 되었는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지를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확실히 점검하고 확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을 때만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일 목사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거듭나지도 않고 회심하지도 않은 채, 그저 열심히 믿으면 되겠지,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니 막연히 구원받겠지 하면서 종교적인 생활을 하거나 회개없이 온전한 믿음없이 복음에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육신적인 모습을 당연시 하면서 살아가는 "거짓" 신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믿음으로 살라"고, 그리고 거듭났지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며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라고 라일 목사님이 촉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일 목사님이 고린도전서 3장 1절의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라일 목사님을 존경하고 적극 추천하는 존 맥아더 목사님은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육신에 속한 자> _ 비록 고린도의 신자들은 더이상 "본성에 속한 사람(=자연인)"이 아니었지만, "영적인"(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육신적"(타락한 육신의 지배를 받는)이었다. 비록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있기는 하지만(참고 롬 8:9) 그들은 여전히 타락한 육신과 싸우고 있었다(롬 7:14-25; 8:23)""<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 아기들>_ 그 신자들이 육에 속했다는 것은 그들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들에 비춰볼 때 성숙한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그들에게 말할 수 있었어야 한다고 암시했기 때문이다(2절, 히 5:12-14; 벧전 2:1,2)" - 맥아더 성경 주석 P 1294      
2019-02-15 19:09:47 | 이승훈
J.C. 라일 믿음으로 살라 - 위대한 분리 p614~616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을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것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한사코 사람을 두 부류가 아닌 세 부류로 나누려고 합니다. 너무 높고 엄밀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이 세상 현실에는 맞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도 이 땅을 성도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전혀 갖지 않는 것 역시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렇게까지 악하지 않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을 만큼만 신앙을 갖고 더 이상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지만, 구체적인 선행을 하지는 않습니다. 얌전하고, 편하고, 적당한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별 어려움 없이 천국에 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좋아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생각하는 제3의 부류-알곡과 쭉정이의 중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중간 부류에는 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는 구분을 싫어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알곡이 되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쭉정이로 드러나는 것도 싫은 것입니다. 하지만 제3의 부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속임수입니다. 이런 생각에 솔깃해서는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의 연옥만큼이나 헛된 생각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이 피난처로 삼는 생각입니다. 공중누각입니다. 봄이 오면 녹아 없어질 러시아의 얼음궁전입니다. 전혀 실체가 없는 공허한 망상일 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제3의 부류의 그리스도인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방주안에 있는 사람과 방주 밖에 있는 사람 두 부류만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그물 비유에서도 두 부류만을 말합니다. 좋은 물고기에 해당하는 사람과 나쁜 물고기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두 부류만을 말합니다. 심판 날에 대한 기사에서도 양과 염소, 보좌 우편과 좌편에 앉은 사람들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따라 이들이 갈 곳도 천국과 지옥 두 곳뿐입니다.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 역시 두 부류의 사람으로 채워져 있을 뿐입니다. 본성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과 은혜안에 거하는 사람, 좁은 길로 가는 사람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편에 선 사람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모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결국 "알곡"과 "쭉정이" 두 부류뿐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이 땅의 교회는 결국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뉩니다.제3의 부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알곡입니까? 쭉정이입니까? 중간은 없습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2019-02-14 23:07:08 | 김형욱
안녕하세요?   인천 국제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차한 형제님께서 좋은 책을 지어 소개합니다. 읽어 보시면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샬롬   패스터       도서정보 1. 도서명 : 개독교를 위한 변명2. 영문 도서명 : Excuses For Doggish Christianity3. 저 자 : 차 한 4. ISBN : 978-89-86767-44-5 032305. 판 형 : 152*2246. 면 수 : 256면7. 가 격 : 12,000원 8. 발행일 : 2019년 2월 13일 9. 출판사 : 라온누리 (T.3673-3421)10. 총판처 : 예영커뮤니케이션 (T.766-7912)   책 소개 비난받는 교회, 오해받는 기독교... 명쾌한 변증으로 풀다 !!   “교계 안팎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는 세태를 보면서 필자의 칼럼들과 설교들 중 일부를 추려 기독교 변증서를 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필자가 집필한 저서들 가운데 「성경으로 세상보기」 및 「성경으로 세상보기2」도 기독교 변증서이지만 좀 더 도발적인 제목 하에 업그레이드 된 내용들을 담아보려고 하였다..... 앞으로 이 책이 누구의 손에 들려 읽히든지 생명의 역사가 순결하게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일일이 거명을 하지는 못하지만 필자의 사역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주고 계시는 많은 동역자들께도 지면을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로 모든 영광과 존귀가 올려지길 기도한다.“ - 저자 서문 중에서.   저자 소개 <차 한>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동대학원 예방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였으며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친 후 소아소화기영양학 전임의로 근무하였다.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응급의학과 전문의로서 서울적십자병원 교육수련부장 및 서울의대 외래교수를 역임하였으며현재 가천의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8년 「Marquis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되었으며저서 및 역서로는 「성경으로 세상보기」, 「성경으로 세상보기2」,  「똥 이야기」, 「성서건강학」, 「성경과 의학」, 「개독교를 위한 변명」, 「음악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공저), 「스트레스는 없다」(공저), 「생로병사, 그 신비를 벗긴다」(공저), 「크리스챤 육아백과」(역서), D. L. 무디의 「하나님께 가는 길」(역서) 등이 있다. 월간 「건강과 생명」의 편집인이며 인천 송도에 위치한 「Incheon International Baptist Church」(IIBC, 인천국제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E-mail : onecar@gilhospital.comjoyfulworld@hanmail.net Home page : www.healthlife.co.kr   목차 서문   1. 기독교의 실제세 부류의 사람들 왜 창조인가?선교와 전도 그 허와 실   2. 뉴에이지 스포츠와 영적 손상 동성결혼 시대의 믿음인공지능과 불로장생   3. 성경 속 과학참 빛성경 속 유전공학성경 속 불임   4. 간증섭식장애하늘의 비전특별한 결혼식   5. 성경 이슈자녀교육과 체벌귀신유감성경관   * 부록/AppendixA letter to Pastor Chuck SmithA letter from Pastor Chuck SmithThree kinds of people보혈문서선교사로의 초대 저자 서문   가천의대 ‘선택의학’ 강좌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 단행본 「성경과 의학」이 출간된 지 두 해가 지났다.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월간 「건강과 생명」을 위시하여 여러 매체에 계속해서 신앙칼럼을 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아울러 여러 교회와 선교회 등에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셨다.   이러던 중 교계 안팎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는 세태를 보면서 필자의 칼럼들과 설교들 중 일부를 추려 기독교 변증서를 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필자가 집필한 저서들 가운데 「성경으로 세상보기」 및 「성경으로 세상보기2」도 기독교 변증서이지만 좀 더 도발적인 제목 하에 업그레이드 된 내용들을 담아보려고 하였다.그래서 이 책의 출간을 위해 기도하던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출판에 필요한 재정도 여러 도움의 손길들을 통해 놀랍게 마련해 주셨다. 특히 성호네 가족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책은 결코 발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또한 주님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을 하였다. 기독교의 실제, 뉴에이지, 성경 속 과학, 간증, 성경 이슈 등의 주제 하에 각각 3편의 설교 또는 칼럼을 실었다. 그리고 부록에서 척 스미스 목사님과 주고받은 편지들과 필자가 출석하는 인천국제침례교회(IIBC)의 외국인들을 위해 이 단행본의 주제가 되는 영어 설교 한 편을 수록하였다. 또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을 잘 해나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보혈(寶血) 칼럼도 첨가하였다.   그간 필자의 책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이 책의 칼럼들 중 세 편은 이미 저자의 기존 책들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개독교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 하에 다시 수록하는 까닭은 기독교 변증에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책이 누구의 손에 들려 읽히든지 생명의 역사가 순결하게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일일이 거명을 하지는 못하지만 필자의 사역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주고 계시는 많은 동역자들께도 지면을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로 모든 영광과 존귀가 올려지길 기도한다. - 2019년 2월 1일 차 한 본문 중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   고전2:14-3:17 “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4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5 그런즉 바울은 누구며 아볼로는 누구냐? 그들은 단지 주]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니라. 8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10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그것을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1. 들머리   매스컴에서 기독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 피이드백이 엄청나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익명성을 갖고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기독교라는 말보다 ‘개독교’라는 표현이 일반 네티즌들에게 더 친숙한 말이 된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 비하는 너무도 많은 근거와 팩트를 가지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대학동문 중에 현재 큰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일 년에 몇 번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가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오래전부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해오고 있는 중인데 하루는 이 친구가 제게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 병원 재무책임자가 아주 독실한 기독교 장로인데 (그래서 더 재무담당을 시켰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몰래 수억 원을 착복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지난 달 정말로 믿고 싶지 않은 사건이 모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일마다 각기 다른 두 번의 예배 곧 ‘열린 새 신자 예배’ 및 한국으로 돌아온 교포나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포인트 파이브 예배’를 인도해 왔고, 비서실과 통역실 등 그 교회의 실제 업무를 담임목사를 대리하여 모두 맡아온 J 목사의 불륜행각이 밝혀졌습니다.J 목사는 존 파이퍼 목사의 설교와 필리핀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의 간증을 통역했고, 유명 연예인의 결혼 주례 및 외교부와 기업체강의 등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분이죠. 그리고 기독교잡지 리빙라이프의 편집장이며 모 재벌그룹 부회장의 개인 성경공부를 수년간 지속해오기도 했는데 한 영화배우로부터 ‘청년 예수의 모습 같다’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죠. 이처럼 전도유망하던 J 목사가 상대방에게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 5년 전부터 서류상의 이혼을 못했을 뿐 이혼한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간통을 한 사실이 일 년 만에 밝혀졌습니다.자, 이와 같은 현실에서 여러분들은 ‘개독교’라 칭해지는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변명을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저는 오늘 ‘세 부류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기독교에 대한 변명을 하는 동시에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제가 함께 주님께로 온전히 나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본성에 속한 사람 오늘 주일에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 지역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영적인 상태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눠진다고 하는 것입니다.먼저 고전2:14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첫 번째 부류는 ‘본성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natural man입니다. (참고로 natural man을 인문사회과학적으로는 ‘자연인’이라 번역하는 것이 일반인데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진화론적 개념을 깔고 있는 ‘자연인’이라는 말 대신에 ‘본성에 속한 자’라고 번역을 잘해 놓았습니다.)14절을 보면 본성에 속한 사람의 정의는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한 자 곧 구원받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십일조 이상 헌금도 하고, 찬양대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심지어 장로나 목사의 직분을 맡고 있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본성에 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본성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시편 14편 1절입니다.“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즉 ‘본성에 속한 사람’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비록 인사기록지의 종교 난에는 기독교라 쓰지만, 또 오늘처럼 주일에 교회에 나름 열심히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기도 하여 기독교인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본성에 속한 사람’인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3. 육신에 속한 사람 두 번째 부류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육신에 속한 자’는 일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영어로는 ‘carnal Christian’ 곧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은 받았지만 영적으로 갓난아이라 표현되는 경우입니다. 이 말은 구원 받은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10년, 20년 또는 한 평생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영적으로 갓난아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저는 소아청소년과 의사입니다. 제 전공분야는 소아소화기영양학입니다. 그래서 신생아나 영아에게도 내시경을 시행하곤 합니다. 특히 동전이나 수은 배터리 같은 이물질들을 삼킨 아이들에게 내시경을 시행하여 위장관 이물질을 자주 제거하곤 합니다. 분별력이 있다면 결코 삼킬 수 없는 각종 이물질들을 삼키며 사고를 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갓난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영적으로 갓난아이이기 때문에 각종 사건사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계속하여 고린도전서 3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그렇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갓난아이이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오직 젖만 먹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히브리서 5장 12절입니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들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 신앙연륜은 오래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들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성경말씀에 무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장 3,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육신적인 자’ 곧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시기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며 세상 사람들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구원은 받아 천국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지만 믿지 않는 불신자와 결코 구별되지 않는 인생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4. 영에 속한 사람 세 번째 부류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2장 15,16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고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요14:26; 벧전2:12). 즉 성경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 Christian 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영에 속한 자’ 곧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달리 젖이 아니라 비프스테이크 같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영적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히브리서 5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곧 성경말씀의 깊은 이해를 통해 영적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써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 p 11-20 중에서  
2019-02-14 09:46:56 | 관리자
박영숙 자매님, 안녕하세요? 저는 뉴질랜드에 사는 최문선 자매입니다. 저처럼 해외에 거주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세상을 바꾼 책(한글자막)' 동영상이 예전에 keepbible에 올라왔던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어서 다른 독립침례교회에서 올려놓으신 영상을 알려드릴게요. 이와 함께 '어둠속의 등불' 동영상도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성경신자모임이 있는데, 참석은 못하시더라도 교제하고 싶으시면 연락해 보세요.   킹제임스 흠정역@Toronto 예배 장소 변경 안내 http://new.keepbible.com/Cmn1/View/46G   * The Book(세상을 바꾼 책) https://www.youtube.com/watch?v=IlZnE84vNbc   * 어둠 속의 등불 https://www.youtube.com/watch?v=OoNZv1Te-6Q      
2019-02-12 08:10:41 | 최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