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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2> 대답: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참으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하고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먼저 그것을 읽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될 만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왜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역본들과 모든 주석서, 여러분의 ‘연구를 돕는’ 모든 책을 일단 뒷전으로 치우고 단순히 하나님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 책의 저자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셔서(고전6:19-20) 여러분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신약의 끝까지 읽으십시오. 적어도 하루에 10페이지는 읽으십시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에 성경을 주시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 약간의 곤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까지 읽기를 마친 뒤에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복음까지 또 읽으십시오. 자, 한 번을 읽으셨습니까? 자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까지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쉬지 말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경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역대상의 처음 아홉 장과 같이 그 본문이 ‘무미건조한’것으로 여겨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독히 바쁜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 어떤 것도 성경 읽기를 중단할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만약 위에서 언급된 상황 속에서도 매일 10페이지씩 읽기를 계속한다면 여러분은 우리 사람에게 알려진 인격 테스트 중 가장 큰 것 하나를 통과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미건조한 날들 외에도 그 책이 여러분의 심령에 부드럽게 다가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는 날을 맞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의 하나님과 구원자를 알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 여러분의 친구들과 교사들 혹은 설교자들을 적대시하거나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그들이 제기하는 대부분의 비난들에 대해 은혜 안에서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 책 말고 또 신뢰할 만한 다른 책을 찾아내길 원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그들이 최종적으로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여부는 그들이 혹은 여러분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책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힘든 결정임에 틀림이 없으며 사실상 누구를 위해 충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친구와 모교인가? 여러분이 만약 설교자라면 완전하지 않은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소위 ‘금 덩어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떼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으며 성경을 읽도록 격려하는 것이 여러분과 그들 모두에게 풍성한 만족을 주는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 안에’ 거하고 성경을 읽는 무리들은 ‘성경 안에’ 거하며 그것을 읽는 목회자에게 절대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고 너무도 존경하는 친구가 다른 역본을 사용하는 교수나 목회자라면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책을 공격하거나 ‘고치려’ 한다면 그들의 메시지로부터 단지 그 부분만을 가려내십시오. 혹자는 여러분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어떤 이는 여러분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래 동안 내가 잘못을 범했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끝까지 그 성경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결국 여러분까지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더럽히도록 허락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그분 곧 하나님에게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자, 완전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2009-05-08 20:32:28 | 관리자
질문: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 발행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과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안에’와 말씀보존학회는 어떤 관계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3> 대답: 두 성경의 차이점에 대해 알기를 원하면 본 사이트에 들어 있는 공개질의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추후에 ‘한글 킹제임스 성경 분석’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와 말씀보존학회가 아무 관계가 없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본서의 역자는 미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1986년경에 처음으로 미국의 Chick 출판사(www.chick.com)를 통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뒤 1992년 2월에 귀국해서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말씀보존학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단체의 설립자인 이송오씨가 매우 과격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번은 저와 영어성경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원서 몇 권을 구입하러 말씀보존학회에 갔다가 판매하는 직원에게 저와 함께 영어성경공부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이송오씨가 나오더니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책상 위로 내던지면서 너희가 영어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으면 이 구절을 한 번 해석해 보라고 하며 화를 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 다 있구나!” 생각하고 그때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 저는 럭크맨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킹제임스 성경 문제를 의논하였고 또 그분은 자기의 모든 책을 번역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송오씨가 럭크맨과 접촉하면서 자기가 철저히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하기에 럭크맨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에 학회 참석차 갔다가 하루 시간을 내서 펜사콜라를 방문해서 럭크맨을 만났습니다. 그때에 이송오씨가 만든 「새 성경」을 보여 주고 거기 있는 한국 여자 분에게 「새 성경」 표지 안에 적혀 있는 대로 그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공인 본문’ - 말씀보존학회는 이를 「그리스어 표준 원문」이라 부름 - 에서 번역되었음을 보여 주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지적했으며 다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도 거의 없었고 그 날 저녁에 그의 교회로 가서 펜사콜라 성경학교(Pensacola Bible Institue, PBI) 강의를 두 시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럭크맨의 성경학교 즉 PBI는 말씀보존학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단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 갔다 온 사람들이 저녁 때 모여 성경을 배우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국의 여러 교회에서 밤에 운영하는 무인가 신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결코 인가 받은 신학교를 다녀야 훌륭한 목사나 전도자가 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목회 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훌륭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때에 저는 PBI의 많은 학생들이 - 제가 갔을 때는 150명 정도였음 - 어려운 가운데 낮에는 일하며 밤에는 주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했으며 그로 인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치 PBI가 엄청난 학교인 것처럼 말씀보존학회가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방문 이후에 하루는 사무실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다짜고짜 쌍욕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 너 혼 좀 나 볼래, 니네 학교 이사장이 조○○이지. 한 번 가서 너를 쫓아내라고 이야기할까?” 등등 이송오씨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 개(?)가 짖나보다 하고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기가 출간하는 월간지에 제 이름을 올려 마치 제가 엄청난 이단인 것 같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뒤에도 이송오씨는 너무나 많은 형제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말을 구사하여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그래도 저희에게는 대안이 없었으므로 마음속으로 ”대안이 나올 때까지 굳게 참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8월 저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출간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잡지 등을 통해 저나 다른 사람들 - 대개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말씀보존학회에 남아 있을 수 없어 그곳을 떠난 용기 있고 훌륭한 형제들 - 을 비판하거나 욕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비판하면 오히려 역작용이 나서 자기 잡지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대안이 나온 이후에 더 이상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글이나 상소리를 접하지 않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이것이 말씀보존학회와 저와의 모든 관계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보존학회의 언행을 종합하자면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보존학회는 오래 참지 아니하며 친절하지 아니하며 말씀보존학회는 시기하며 말씀보존학회는 자랑하며 우쭐대며 무례히 행동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며 쉽게 성내며…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그 동안 여러 차례 개정되었습니다(아마 여섯 차례가 넘는 것으로 기억됨). 그들의 주장대로 그 성경이 최종 권위라면 이미 지난 10년 사이에 최종 권위가 여섯 차례나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최종’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무엇을 출간하고 자기들이 그것을 최종 권위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희극 아닙니까? 그런 억지 주장을 편 뒤 그 최종 권위를 막 뜯어고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최종 권위는 언제나 최종이 될는지 참으로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끝으로 그들은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바른 대본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기초로 번역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성경도 우리에게 주어진 바른 성경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독자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추후에 바른 성경에 대한 정의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진신을 알리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글이 부담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종류로는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냥 부담 갖지 말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2009-05-08 20:30:2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몇 구절에 나오는 사랑과 마귀는 진한 명조체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4>대답:  ‘love’와 ‘charity’ 그리고 ‘the devil’과 ‘devils’를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이 모두 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사랑은 ‘charity’를 번역한 것으로 보통 다른 곳에서 사랑으로 번역된 ‘love’와는 다릅니다. 심지어 「옥스퍼드 영어 사전」조차도 ‘charity’를 크리스천의 사랑으로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것이 구분가능하나 우리말에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으므로 그냥 표기할 때 진한 명조로 하여 차이가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4장 1절에 보면 마귀 역시 진한 명조체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유일한 사탄 마귀를 ‘the devil’로 표현했으며 이에 상응하는 그리스말은 ‘디아볼로스’입니다. 한편 사탄 마귀 수하의 ‘devils’가 있는데 이에 상응하는 그리스말은 ‘다이모니온’입니다. 그리스말은 다르지만 영어에서 같은 단어로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일한 하나님’(God)이 있듯이 ‘많은 신들’(gods)이 있습니다. 이 신들은 속성이 ‘God’과 비슷하지만 ‘God’보다는 못합니다. 마귀들도 ‘유일한 마귀’(the devil)와 비슷하지만 ‘the devil’보다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또 그리스말의 ‘다이모니온’은 우리말의 귀신같은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고대 중국이나 그리스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사후 영이 ‘다이모니온’이 된다는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것을 이단 교리로 확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국의 공통 성경으로 삼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이런 개념이 들어 있는 단어가 쓰일 수 없었고 그래서 ‘다이모니온’을 ‘devil’로 표현해서 이교도들의 미신을 제거해 버렸습니다.「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가서 ‘demon’의 용례를 찾아보면 실제로 1706년 전에는 현대 역본에서 ‘demons’로 나오는 존재들이 성경 용어로 쓰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간혹 ‘demon’이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그것은 항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사람들 사이의 중간 존재를 나타냈습니다. 사실 이것이 ‘demon’의 1차적 용례입니다. 그러므로 1611년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올 때에 분명히 ‘demon’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성경 역자들은 ‘다이모니온’을 ‘demon’이라 하지 않고 ‘devil’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의 ‘devils’를 그리스 시대의 불신자의 사후(死後) 영 - 국내의 베뢰아 이단과 같이 - 이나 신화적 존재로 생각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유일한 마귀 즉 그리스말로 ‘디아볼로스’로 표현된 곳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서 진한 명조체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아마도 대안으로는 ‘마귀’(the devil)와 ‘악귀들’(devils)로 나누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왜 같은 단어를 통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쏟아질 것이므로 현재는 진한 명조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2009-05-08 20:28:10 | 관리자
질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판권이 없는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판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5> 대답: 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도 판권이 있습니다. 1999년 3월 5일 캠브리지 대학 출판사의 성경 출판부 담당자인 라이트(Christopher Wright)가 발표한 글에 의하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권리는 영국 왕(혹은 왕실)의 특권이며 지금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될 때에는 지금과 같은 의미의 판권이 없었고 또 킹제임스 성경이 이미 온 세상에 퍼졌으므로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그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판권이 있다고 해도 법적으로 맞으며 없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킹제임스 성경 이슈를 알고 계신 분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판권이 없는데 왜 그것을 번역한 한글 성경에는 판권이 있느냐고 따지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 그것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판권을 두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금전적인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그것을 이용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판권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가하여 금전적 이유 때문에 판권을 둔 것이 아님을 명시했습니다. ◈ 본문을 가감하지 않는 한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본 성경을 사용할 수 있으나 글에 인용하는 경우 진한 고딕체와 이탤릭체는 살려서 본 성경의 취지를 반영해야 함.◈ 본문의 모든 내용을 책이나 전자물 형태의 책으로 출간/게재하는 경우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함. 이런 글을 통해 엄밀한 의미에서 저희는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판권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음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희가 판권을 둔 것은 사실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점들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작업이 완료될 즈음 평소 안면이 있던 어떤 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성경이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희 성경의 구약 부분을 공유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과 저희의 구약 성경을 합쳐서 성경전서를 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통일하기 위해 구약의 몇몇 용어들을 자기들이 선호하는 특정 용어로 바꾸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고는 상당히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출간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런 이상한 용어를 사용해서 성경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기존의 질서를 허무는 것을 막고자 함인데 이렇게 판권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파일을 받아다가 단지 몇 가지 용어만을 고쳐서 또 다른 이름으로 성경을 출간한다면 킹제임스 성경의 신뢰성을 크게 손상시키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크리스천들이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이용해서 자기 교리에 맞도록 몇 단어들만을 엉뚱하게 바꾸어서 그 성경 전체를 자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봅니다.저희는 다른 사람이나 그룹이 또 다른 킹제임스 성경 역본을 출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크리스천으로서 정당한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 성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판권을 둔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을 막고자 함입니다.
2009-05-08 20:26:4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세대주의자들의 성경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6> 대답: 아닙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특정 신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본문을 바꾼 곳이 없으며 본문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역자(정동수)는 개인적으로 세대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대주의자는 결코 인류 역사를 몇 세대로 나누는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런 의미에서 세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흠을 내기 위해 마치 흠정역 성경은 세대주의라는 신학에 맞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성경 번역의 역사를 보면 번역자가 자신의 신학과 사상에 맞추기 위해 본문을 과감하게 뜯어고친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번역자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신학적 배경 위에서 번역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최종 작품에 배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담대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희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본문의 원래 의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저희의 신학적 입장에 그 본문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르게 번역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본문 중에서 영어 본문은 그렇지 않은데 한글 번역을 세대주의 신학(혹은 기타 특정 사상)에 맞추어서 번역했다고 느끼시는 구절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러한지 함께 검토해 볼 용의가 있습니다. 신학은 본문 다음의 문제이며 본 성경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결코 신학에 맞추어서 본문을 번역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 신학을 세우려고 본문을 바꾸었다면 그는 곧 말씀을 의도적으로 변개시킨 사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라킨과 럭크맨의 설명대로 처음에는 창세기의 재창조 신학 이론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전이 그런 용례를 지지하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곧장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저의 신학을 뒤로하고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이런 원칙 하에서 번역되었음을 밝힙니다. 특정 신학이 작용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다음의 예가 잘 보여 줍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모든 실족하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분의 왕국 밖으로 모아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권위역 마13: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모아다가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킹제임스 흠정역). The Son of man shall send forth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out of his kingdom all things that offend, and them which do iniquity; And shall cast them into a furnace of fire: there shall be wailing and gnashing of teeth(KJV). 어떤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졌으되 행위가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천년 왕국 동안 왕국 밖으로 쫓겨나서 통곡하고 이를 간 뒤에 정화되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밖으로’(without)를 첨가한 권위역 성경의 경우 그런 교회의 교리적 입장이 번역에 의도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영어는 ‘out of his kingdom’으로 되어 있으며 흠정역 성경은 이를 그대로 ‘왕국에서’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곧 특정 신학을 세우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킨 좋은 예가 됩니다. 마13:41은 결코 왕국 밖으로 모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런 자들을 왕국에서 거두어 ‘내어’(out of) 불에 즉 지옥에서 태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정화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부분을 단 한 군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구원받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에 따라 단지 보상이 다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결코 특정 신학을 세우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키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런 구절이 있는 것 같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러한 죄를 범한 것이 사실로 발견되면 그 부분에 대해 독자들에게 공개 사과를 하고 다음에 수정해서 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2009-05-08 20:24:58 | 관리자
질문: 작은 숲인가요, 아세라인가요? 킹제임스 성경은 아세라를 작은 숲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9> 대답: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작은 숲이 나오는 구절을 하나 보도록 합시다. 오히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 낼지니라(출34:13). 현대 역본 역자들은 이런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작은 숲’(groves)이 오역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아세라’ 혹은 ‘형상’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이 같은 주장을 펴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작은 숲’ 혹은 ‘나무’를 의미하는 히브리말 ‘아셀’(ashel)과 ‘복 받은’ 혹은 ‘안내자’를 의미하는 ‘아샤르’(ashar)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가정과 ‘아샤르’가 아스타르테 여신과 동일하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현대 역본 역자들은 여기서도 또 틀렸습니다. 첫째로 히브리말에는 형상과 작은 숲을 의미하는 단어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27:9를 보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두 개가 동시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불법이 깨끗하게 되며 이것이 그의 죄를 제거하는 모든 열매가 되나니 그분께서 제단의 모든 돌을 쳐서 산산조각 난 석회암 같게 하실 때에 작은 숲과 형상들이 서지 못하리라(사27:9). 만일 현대 역본들이 옳다면 사27:9는 “형상들과 형상들이 서지 못하리라.”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왕하18:4와 23:14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번역은 난센스입니다. 둘째로 아스타르테의 이름은 아스다롯이라고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왕상11:5; 33; 왕하23:13). 이 여신의 이름은 히브리 알파벳 ‘아인’(ayin)으로 시작되며 작은 숲을 의미하는 말은 알파벳 ‘알레프’(aleph)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아샤르’가 아스다롯의 어원이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셋째로 신16:21은 이스라엘이 결코 작은 숲을 심어서는 안 됨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 가까이에 어떤 나무로든 작은 숲을 심지 말며(신16:21) 창21:33처럼 작은 숲의 나무들을 ‘심는 것’(plant)은 말이 되지만 형상이나 나무로 된 우상들을 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끝으로 오늘날에도 신상 주변에 작은 정원이나 나무로 된 작은 숲을 만드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숲과 형상, 우상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2009-05-08 20:22:26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침례’란 단어를 ‘뱁타이즈’(baptize)로 음역을 해서 세례가 가능하게 된 것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2> 대답: 침례교인들 중에서 특정한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뱁타이즈’(Baptize)란 단어가 쓰인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어린 아기에게 세례를 행하는 자들이므로 ‘물에 담근다’는 의미의 ‘임머스’(immerse)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교묘히 원어를 음역하여 ‘뱁타이즈’로 만들었고 그 결과 세례를 주는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얼른 들어보면 그럴듯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 같은 주장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많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더라. 또 그들이 와서 침례를 받으니(요3:23). ‘뱁타이즈’라는 단어는 그리스말에서 나왔으면 주후 1066년에 처음으로 영어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영국에서의 침례(Baptism)는 항상 ‘물에 잠기는 침수례’(immersion)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 패트릭(389-465)이나 베너러블 비드(673-735) 등은 항상 침수례만을 베풀었습니다. 위클리프와 틴데일 역시 자기들의 성경에 ‘뱁타이즈’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이 단어가 ‘물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그 의미를 밝혔습니다.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뱁타이즈’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고안하여 세례를 줄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유아세례를 주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교인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그들의 대부분은 국교회 교인이었지만 그 당시 영국 국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영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 2세기부터 그들은 오직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국교회를 세운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등도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카톨릭 교도였던 매리 여왕조차도 물에 잠기는 침례 이외의 다른 방식 즉 세례 같은 것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역자들이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한 1611년경에도 침례는 오직 물에 잠기는 침례 밖에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 ‘뱁타이즈’라는 말은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영국 국교회는 카톨릭 교도로서 세례를 주장하던 찰스 1세(1625-1649)의 집요한 ‘세례 주장’을 성공적으로 물리쳐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1644년에 장로교인들이 영국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고 그들은 영국 내에서 침례를 불법으로 만들어 행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영국 국교회는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지 한참 뒤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유아세례를 주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잠긴다’라는 의미의 ‘immersion’을 쓰지 않고 ‘뱁타이즈’라는 음역된 단어를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뱁타이즈’가 ‘물속에 잠기는 것’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고 그 당시에 이미 그 단어가 ‘물속에 잠기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었으므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읽어보면 청교도들이 ‘침례’의 ‘뱁타이즈’라는 단어 대신 ‘씻는다’는 의미의 ‘washing’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청교도들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로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사람들이었으며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침례가 틀리고 세례가 맞았다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뱁타이즈’라는 단어 대신 곧장 ‘씻는다’는 의미의 ‘washing’을 도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가들이 또 다시 침례 문제에서도 바르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2009-05-08 18:53:3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고린도전서 15장 20, 23절 등에 나오는 ‘첫 열매’는 ‘첫 열매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해야 하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5> 대답: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 ‘첫 열매’가 맞습니다. 고전15:23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But every man in his own order: Christ the firstfruits; afterward they that are Christ's at his coming. 언뜻 보면 영어 ‘firstfruits’가 복수로 되어 있어 ‘첫 열매들인 그리스도’로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며 특히 럭크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주 강하게 이것을 고집합니다(말씀보존학회). 그런데 성경의 용례는 다릅니다. 성경에는 ‘firstfruits’가 총 32번 나오며 이것들의 용례를 보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6장 15절을 보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인 것과…) ye know the house of Stephanas, that it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여기서 보다시피 ‘firstfruits’는 보기에는 복수 같지만 실제로는 단수입니다. ‘it is’라는 단수 대명사와 동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6장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가야에서 그리스도께 첫 열매가 된 자니라. Salute my wellbeloved Epaenetus, who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unto Christ. 여기에도 단수 동사 ‘is’로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저희는 어떤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용례에 따라 ‘firstfruits’를 단수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첫 열매들 그리스도’하면 벌써 말 자체가 꼬이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보지 못한 다른 사실이 있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2009-05-08 18:50:16 | 관리자
질문: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의미를 잘못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8>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πολλα γαρ πταιομεν απαντες, 영어 KJV : For in many things we offend all,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우리 모두는 많은 일에 실수하나니, 한글 개역판 :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영어 KJV는 헬라어의 의미를 잘못 전달할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영어 KJV를 직역하면 “많은 일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넘어지게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거침돌이 되어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인가?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다면 한글 개역판이나 한글 KJV같이  번역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글 KJV는 또 문제가 된다. 왜 영어 KJV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이송오씨는  「교회와 신앙」(1995년 2월)과의 인터뷰에서 13년이나 걸려서 한글 KJV를 영어 KJV에서 100% 번역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분명히 영어 KJV의 번역은 아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영어 KJV가 오역인줄 알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들 스스로가 영어 KJV도 영감된 말씀이 아님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는가? 이 부분에서 장 박사는 영어 문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함정을 팠습니다. 먼저 영어 구문을 살펴봅시다. “For in many things we offend all.” 장 박사는 ‘offend’라는 단어를 타동사로 보고 ‘all’을 목적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offend’는 자동사이며 ‘all’은 목적어가 아니라 ‘we’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나 한글 KJV나 개역성경의 번역은 100% 맞습니다.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그는 곧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흠정역). 그러면 다른 현대 역본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For we all stumble in many things. If anyone does not stumble in word, he is a perfect man, able also to bridle the whole body(NKJV). For we all stumble in many ways. If anyone does not stumble in what he says, he is a perfect man, able to bridle the whole body as well(NASV). We all stumble in many ways. If anyone is never at fault in what he says, he is a perfect man, able to keep his whole body in check(NIV). 다른 현대 역본들도 모두 동일한 그리스어 문장을 ‘우리는 다’ 혹은 ‘우리 모두는’으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장 박사의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어 생긴 것이지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offend’가 자동사라는 것은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너무 명백합니다. For in many things we offend all. If any man offend not in word, the same is a perfect man(KJV). 한편 개역성경은 ‘많은 것에서‘(in many things)를 삭제해서 또 다시 번역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9-05-08 18:46:59 | 관리자
질문: 빌립보서 3장 20절의 ‘conversation’은 시민권입니까? 아니면 생활 방식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7> 대답: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두만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ημων γαρ το πολιτευμα εν ουρανοις υπαρχει, 영어 KJV : For our conversation is in heaven,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한글 개역판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폴리튜마‘( πολιτευμα)이다. 이 단어는 ‘시민권‘ 또는 ‘시민권이 있는 장소‘란 의미인데 영어 KJV에서는 ‘회화‘(會話)라고 번역했다. 고어에서는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회화‘는 현대 영어의 ‘시민권‘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영어 KJV를 번역했다는 한글 KJV에서는 ‘회화‘라고 번역하지 않고 ‘시민권‘이라고 번역했다. 아마 영어 KJV의 번역이 잘못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직역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글 KJV는 영어 KJV의 번역이 아니라 새로운 번역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장 박사가 지적한 대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지 않고 자의로 번역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를 어떻게 번역했습니까?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이제 ‘conversation’이 시민권인가 생활 영역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성경의 용례를 찾아봅시다. 이를 위해 성경 소프트웨어로 가서 빌립보서 3장 20절의 ‘conversation’을 찾아보면 스트롱 번호가 4175로 되어 있으며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 한 군데서만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4176 번호가 매겨진 단어에서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Englishman's Concordance」로 가서 4176을 넣으면 신약 성경 전체에서 4176이 쓰인 구절이 두 군데 나옵니다: 행23:1; 빌1:27. 바울이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노라, 하거늘(흠정역 행23:1). And Paul, earnestly beholding the council, said, Men and brethren, I have lived in all good conscience before God until this day(KJV).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개역성경). Paul, looking intently at the Council, said, “Brethren, I have lived my life with a perfectly good conscience before God up to this day.”(NASV)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흠정역 빌1:27). Only let your conversation be as it becometh the gospel of Christ(KJV).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개역성경) Only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NASV). 이런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conversation’이라는 단어가 ‘생활하다’, ‘살다’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 ‘생활 방식’, ‘행실’ 등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현대 역본들도 다 그렇게 번역했으며 따라서 빌립보서 3장 20절을 굳이 시민권으로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장 박사는 ‘conversation’의 현대 용례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그 지적은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가서 ‘conversation’의 용례를 보면 그것의 1차적 의미가 ‘생활’, ‘행실’(action of living)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오역을 했다는 비난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 성경을 보는 사람들도 그 당시 뜻을 알려면 당연히 그 당시 뜻을 담은 사전을 보아야지 현대 사전을 보면 안 되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은 성경의 용례와 원어의 용례대로 ‘생활권‘(生活圈)이라고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오래된 단어를 쓸 이유가 뭐냐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영국/미국에서는 킹제임스 성경과 동시대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자주 무대에서 공연됩니다. 그런데 배우들은 1600년도의 영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거기 나오는 대사를 현대어로 바꾼 것은 더 이상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닙니다. 일개 연극 대사도 1600년도 대사를 그대로 쓰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담은 성경을 마음대로 바꾼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또한 한국어와는 달리 영어는 지난 4세기 동안 뜻이 변한 단어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특히 성경에는 몇 단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단어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뜻이 부패한 것도 하나님이 감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한편 개역성경은 행23:1에서 ‘생활했다‘ 혹은 ‘살아왔다‘(lived)는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입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진리이며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거짓이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며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2009-05-08 18:43:54 | 관리자
질문: 빌립보서 1장 13절의 ‘palace’는 시위대를 오역한 것이 아닙니까? 현대 역본 역자들과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6>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εν ολω τω πραιτωριω, 영어 KJV : So that my bonds in Christ are manifest in all the palace,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모든 궁전 안과 다른 모든 곳에도, 한글 개역판 :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단어는 ‘프라이토리온‘(πραιτωριον)인데 이 단어는 여기서 ‘황제의 시위대‘를 의미한다. 물론 때로는 ‘프라이토리온‘이 총독이나 왕의 관저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 당시에 벌써 로마 황제의 궁전 전체에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황제의 궁전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셋집‘에 살면서 차꼬에 매여 시위대의 감시를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행28:30).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프라이토리온‘을 ‘궁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역이다. 먼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결박당한 일이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 드러나게 되었고(흠정역) 장 박사의 주장은 현대 역본 역자들과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영향을 받은 성경 주석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성경 비평학이 나오기 이전에 쓰인 「매튜 헨리의 주석」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emperor, the courtiers, the magistrates, are convinced that I do not suffer as an evil-doer, but as an honest man, with a good conscience. They know that I suffer for Christ, and not for any wickedness. 황제와 대신들과 행정관들이 내가(바울이) 악행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장 박사가 여기서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궁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언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억울하게 결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일이 알려지면서 자연히 궁궐 안에 복음이 전파되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을 보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 문안하느니라. 여기의 카이사르는 분명히 로마의 황제를 말하며 바울은 로마 황제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 성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궁궐 안에 바울의 소식이 알려지고 복음이 선포되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빌립보서 1장 13절의 ‘궁궐’ 즉 ‘palace’는 킹제임스 성경역자들이 아주 정확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더 이상 믿음이 없는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지니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잠30:5-6).
2009-05-08 18:40:21 | 관리자
질문: 사도행전 19장 37절에서 ‘교회’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신전’으로 번역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4>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 : ουτε ιεροσυλος, 영어 KJV : which are neither robbers of churches,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이 사람들은 교회들의 물건들을 훔치지도 않았고, 한글 개역판 :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여기서 문제의 초점은 헬라어 단어 ‘히에로쉴루스‘(ιεροσυλους)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KJV나 한글 KJV같이 ‘교회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이 아니고 ‘헬라인의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을 의미한다. 바우어(Walter Bauer)의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는 분명히 ’신전 물건을 훔치는 도둑‘(temple robber)을 의미한다. 문맥적으로도 ‘교회 물건을 훔치는 자‘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 사도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므로 에베소 지역에 기존 교회가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KJV나 한글 KJV 성경은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KJV나 한글 KJV 성경의 분명한 오역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교회’입니다. 보통 신약 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클레시아’로서 이것은 ‘부름을 받아 나온 자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로 번역된 단어는 ‘히에로쉴루스’로서 ‘에클레시아’와는 다르며 이것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주로 성전(templ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에서 ‘전’(temple)이란 신에게 경배하기 위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이 경우 경배 대상인 그 신은 그 전에 거해도 되고 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따라서 이 ‘전’은 그 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 신에게 경배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보면 ‘교회’(church)라는 단어는 ‘주의 집, 특히 어떤 특정한 주의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the house of a lord, a specific lord; each house having its own lord. 이 구절에서 마을 서기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도시에 가서 거기 있는 교회 물건을 탈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여기의 문맥이 특정한 신을 위한 전 즉 다이아나의 신전을 가리킨다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특정한 신이 거하는 특정한 집’ - 이 경우에는 여신 다이아나에게 경배하는 집 - 을 나타내기 위해 ‘교회’(church)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실 1600년대에는 심지어 이슬람교도들의 모스크도 ‘교회’라 불렸으며 ‘교회’ 즉 ‘church’의 뜻은 문맥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같은 신조나 사상을 가진 자들의 모임’(14번째 용례)도 분명히 ‘교회’ 즉 ‘church’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루었던 모임도 성경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또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행7:38).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 중에 여기 나오는 교회가 지금 신약 시대의 교회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도 넓은 의미에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아 특정한 신 즉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모임’을 형성했기에 ‘교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물론 「옥스퍼드 영어 사전」도 13번째 용례로 이것을 들고 있습니다. 한편 ‘교회’ 즉 ‘church’는 영어에서나 한국어에서나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건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교회가 ‘건물’의 의미로 쓰였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들도 다 자기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합니다. 몰몬 교도들도 다 자기들이 ‘교회’(Church of the Latter Day Saints)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몰몬 템플(전)에 가서 경배를 드리면서도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문선명의 통일교도 자기들의 모임과 건물을 교회라고 하며 목양자를 목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도 자기들 건물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면 “교회에서 도둑맞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에베소 시의 마을 서기가 “이들이 교회에서 물건을 탈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용례 면에서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을 서기는 진정으로 신전이 아니라 지역 교회 건물을 의미했을 수도 있습니다. 행19:10을 보면 바울 일행이 에베소에서 두란노라는 사람의 학교에서 거의 2년 동안 사역을 했고 그 결과 아시아(물론 소아시아를 가리킴)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두 해 동안 계속해서 이루어지므로 아시아에 거하던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행19:10). 이렇게 복음이 2년 동안 왕성하게 전파되었으므로 그 지역에 이미 여러 개의 지역 교회가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존 교회가 있을 리 없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마을 서기가 교회라고 말한 것은 영어 단어 ‘교회’(church)의 넓은 뜻으로 보아도 맞고 이단이나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모임/건물을 교회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도 맞으며 실제 지역 교회라 해도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킹제임스 성경역자들이 문맥에 맞게 이 구절을 잘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9-05-08 18:36:57 | 관리자
질문: 사도행전 8장 37절은 원래 없는 구절이라고 들었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3> 대답: 이 문제 역시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 : 없음 영어 킹제임스 성경: And Philip said, If thou believest with all thine heart, thou mayest. And he answered and said, 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제외시키고 있는 사본: P45(5세기), P74(7세기), א(4세기), A(5세기), B(4세기), C(5세기), P(9세기),ψ (8/9세기), Byz 등 포함시키고 있는 사본: 630(9세기), 945(11세기), 1739(10세기), 1877(14세기) 등   이 구절은 초기 사본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잔틴 계열의 다수사본(Byz)도 이 구절의 삭제를 지지하고 있고 Hodges-Farstad의 다수 사본설에 의한 헬라어 성경도 이 구절의 삭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구절이 사도행전에 원래 있던 말씀이라면 필사자들이 삭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원독이 아니라는 강력한 뒷받침을 받고 있다. 여기서 장 박사가 사본들의 증거를 대면서 연대를 기록하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 구절을 삭제한 사본들 - 거의 대부분이 천주교 사본임 - 의 연대가 이 구절을 포함한 사본들의 연대보다 앞섬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내 사본’을 א로, ‘바티칸 사본’을 B로 표기한다고 해서 독자들이 이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로써 그는 다른 현대 학자들과 함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이론을 따라 “오래된 것이 좋다.”는 주장을 펴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행8:21에 나오는 마법사 시몬의 마음보다도 바르지 못합니다. 성경 사본을 연구하면 몇 가지 증거물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교부들의 글입니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나오기 100년 전에 이미 키프리안(주후 200-258)은 이 구절이 본문에 있었음을 확증해 주었습니다(The Treatises of Cyprian I: 1:17). 또한 주후 190년의 이레네우스와 주후 370년의 파시안도 이 구절이 원래 본문에 있었음을 확증해 줍니다. 단지 가이사랴의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주후 250-350년 사이에 변개시킨 사본들만 이 구절을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사본들 명단 역시 의심스런 알렉산드리아/천주교 사본들 아닙니까? 과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성경의 파급을 저지하던 천주교에서 교회를 위해 사본들을 보존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합니까? 도대체 근본주의 성서침례교회 목사인 장 박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고백 없이도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논리적일까요? 한 번 사본의 증거를 따지기에 앞서 앞뒤 문맥을 보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주며 이 과정 속에서 크리스천 교회가 어떤 일을 실행했는지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8장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스데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이때에 처음으로 빌립이 이방인인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장면이 자세히 나옵니다(26-40절).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한글개역성경은 이상하게 37절을 ‘없음’으로 삭제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구절이 없었다면 그 다음 구절들이 한 절씩 앞으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가 자기의 교리나 신학을 세우기 위해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36절에서 내시는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무엇이 내가 침례 받는 것을 방해하리요?”라고 물었으며 이에 대한 답이 37절에 나오고 내시는 그 답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니라(흠정역 행8:37). 이 부분에서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37절을 친히 기록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명확한 근거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교도들의 믿음과 연합한 천주교가 생겨났습니다. 중세암흑시대를 주도한 천주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들의 체제 하에 가두기 위해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 관행을 도입하여 믿음 고백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어 어려서부터 천주교인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행8:37의 말씀이 이런 비성경적 관행에 큰 거침돌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감히 성경 본문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습니다. 그 결과 한글개역성경,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NASB 등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역본에는 이 중요한 구절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은 이 구절을 잘 보존하여 천주교의 유아세례 교리가 허구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2009-05-08 18:26:23 | 관리자
질문: 십일조를 3일 만에 드릴까요, 3년 만에 드릴까요? 킹제임스 성경은 아모스 4장 4절에서 오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4> 대답: 이 문제 역시 장 박사가 제기한 것이므로 먼저 그의 지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모스 4:4의 경우를 보자. KJV는 “Come to Bethel, and transgress; at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s; and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and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 (“벧엘로 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년 후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 NIV도 이탤릭체 부분은 동일함). NASB는 “Enter Bethel and transgress; in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your tithes every three days” (“벧엘에 들어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일 후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 NKJV도 이탤릭 부분은 동일함). 재미있는 것은 KJV는 히브리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3일’을 ‘3년’으로 해석했다(이 구절의 히브리 원문은 ‘3년’이 아니라 ‘3일’이다). 킹제임스 성경이 히브리 원문대로 ‘3일’이라 번역하지 않고 ‘3년’으로 의역했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맞을까요? 성도들이 3일마다 십일조를 가져오면 현대 교회는 얼마나 부자가 될까요?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간단하게 조사를 해 봅시다. 먼저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에 가서 킹제임스 성경이 ‘3년’으로 번역한 단어를 찾아보면 색인 번호가 ‘구약 3117’로 되어 있고 이것의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의 용례도 나와 있습니다. yowm (yome); from an unused root meaning to be hot; a day (as the warm hours), whether literal (from sunrise to sunset, or from one sunset to the next), or figurative (a space of time defined by an associated term), [often used adverb]: KJV - age, + always, + chronicals, continually (-ance), daily, ([birth-], each, to) day, (now a, two) days (agone), + elder, X end, + evening, + (for) ever (-lasting, -more), X full, life, as (so) long as (… live), (even) now, + old, + outlived, + perpetually, presently, + remaineth, X required, season, X since, space, then, (process of) time, + as at other times, + in trouble, weather, (as) when, (a, the, within a) while (that), X whole (+age), (full) year (-ly), + younger.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여기 쓰인 히브리 단어 ‘욤’이 주로 ‘날’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말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이 히브리 단어 역시 ‘날’ 말고도 분명히 ‘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용례의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를 보면 밑줄 친 것과 같이 ‘년’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단어가 ‘년’으로 번역된 곳을 찾아가 봅시다. 여러분이 「Englishman's Concordance」를 가지고 있으면 그 책에서 스트롱 번호 ‘구약 3117’을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그 단어가 쓰인 곳과 번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더더욱 편할 것입니다. 조사를 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히브리 단어는 거의 대부분 ‘날’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끝나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5장 29절에 가보니 이 단어가 드디어 ‘년’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nd if a man sell a dwelling house in a walled city, then he may redeem it within a whole year after it is sold; within a full year may he redeem it. 사람이 성벽을 두른 도시 안에 있는 집을 팔았으면 그 집을 판 지 한 해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만 한 해 안에 그것을 무르려니와 여기에도 분명히 동일한 히브리어 ‘욤’이 쓰였지만 그 단어를 ‘날’로 하면 안 되기에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그 단어의 또 다른 의미인 ‘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현대 역본들은 어떠할까요? If a man sells a house in a walled city, he retains the right of redemption a full year after its sale. During that time he may redeem it(NIV). Likewise, if a man sells a dwelling house in a walled city, then his redemption right remains valid until a full year from its sale; his right of redemption lasts a full year(NASV).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한글개역성경). 모든 현대 역본들도 여기에서 동일한 히브리어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여기서 의역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그 히브리어의 뜻 가운데 ‘년’이 있음을 알았기에 여기서 정확하게 ‘년’이라 번역했습니다. 자, 더 확신을 갖기 위해 민수기 9장 22절을 보십시다. Or whether it were two days, or a month, or a year, that the cloud tarried upon the tabernacle…(KJV).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그 위에 남아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장막에 거하고…(흠정역). 물론 NIV, NASV, 한글개역성경도 동일한 히브리어를 여기서 다 ‘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한글개역성경) 이제 우리는 문제가 되었던 아모스 4장 4절의 히브리어 ‘욤’이 ‘하루’로도 번역되고 또 ‘일 년’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의 ‘3년’과 한글개역성경 등을 비롯한 현대역본들의 ‘3일’과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성경에서 십일조가 언급된 구절을 살펴보면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3일’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신14:28).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너는 네 모든 소출의 십일조 드리기를 다 마치고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아모스 4장 4절을 ‘3년’이라고 바르게 번역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영감과 보존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구절들로 인해 주눅 들거나 의기소침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들이 제시하는 구절들을 다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학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하신 말씀으로 응징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2009-05-08 18:23:36 | 관리자
질문: 이사야서 65장 11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갓’을 ‘군대’로 ‘므니’를 ‘수’로 오역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2> 대답: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 ךשׁממ  ינמל…  ןחלשׁ דגל 영어 KJV: But ye are they that forsake the LORD, that forget my holy mountain, that prepare a table for that troop and that furnish the drink offering unto that number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그러나 너희는 주를 버린 자들이며 나의 거룩한 산을 잊어버리고 그 군대를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며 그 수대로 술을 제물로 제공하는도다. 한글 개역판: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두 단어는 가드(דג)와 므니( ינמ)라는 단어이다. KJV에서는 ‘가드‘를 ‘군대‘로 ‘므니‘를 ’수‘(數)라고 번역하여 문맥상 그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고대의 종교에 관한 지식이 불충분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오역이 가능했다는 것이 이해는 된다. 오늘날 밝혀진 바로는 바빌론이나 수리아에서 ‘가드‘는 ‘행운의 신‘(god of fortune)을 ‘므니‘는 ‘운명의 신‘(god of destiny)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백성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번역은 KJV와 사뭇 다르다. NKJV는 ‘가드‘(Gad)와 ‘므니‘(Meni)를 번역하지 않은 채 남겨 놓았고, NIV나 NASB는 ‘행운의 신‘(Fortune), ‘운명의 신‘(Destiny)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글 개역판은 NKJV와 같이 ‘갓‘, ‘므니‘라고 함으로써 오역의 실수는 범하지 않고 있다. 히브리어를 음역하느냐, 번역하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의 ‘갓’과 ‘무니’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문제 단어 중 하나인 ‘갓’(스트롱번호 1409)은 이 구절 말고도 창세기 30장 11절에 나옵니다. 레아가 이르되, 군대가 오는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흠정역). And Leah said, A troop cometh: and she called his name Gad(KJV).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개역성경) Then Leah said, “A troop comes!” So she called his name Gad(NKJV). Then Leah said, “How fortunate!” So she named him Gad(NASV). 여기서 뉴킹제임스역(NKJV)은 ‘갓‘을 분명히 군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역자들은 도저히 양심상 여기를 NASV나 개역성경처럼 ‘운이 좋도다!‘라고 번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자기의 자식들에게 일일이 축복하는 장면이 묘사된 창세기 49장에서 갓에 대한 해석이 명백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갓은 군대가 그를 이길 것이나 끝에는 그가 이기리로다(흠정역 창49:19). Gad, a troop shall overcome him: but he shall overcome at the last(KJV).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개역성경). Gad, a troop shall tramp upon him, But he shall triumph at last(NKJV) 심지어 개역성경도 여기서는 갓과 관련해서 ‘군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는 이사야서 65장 11절의 ‘갓‘이 킹제임스 성경대로 ’군대‘로 번역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무니‘(스트롱 번호 4507)의 경우 성경에서 여기 한 군데만 나오므로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이 단어는 스트롱 번호 4487인 단어에서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단어는 구약에서 대개 ‘수‘ 혹은 ‘수를 세다‘는 의미의 ‘number’로 번역되었습니다(창13:16; 삼하24:1; 대하5:6; 사65:12 등).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이사야서 65장 11절에서 ‘갓‘처럼 ‘므니‘도 ‘수‘로 잘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현대 역본들과 킹제임스 성경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현대 역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우상 숭배 대상이 ‘갓‘과 ‘므니‘ 둘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킹제임스 성경은 그들이 섬긴 이방 신들이 군대처럼 많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처럼 번역을 하느냐, 개역성경처럼 음역을 하느냐에 상관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처럼 번역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음역을 해도 해석의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고치지 않고도 매튜 헨리처럼 있는 그대로 다음과 같이 주석을 쓸 수 있습니다. They prepared a table for that troop of deities which the heathen worship and poured out drink-offerings to that numberless number of them. 그들은 이교도들이 경배하던 수많은 신들을 위해 상을 마련했고 수없이 많은 신들을 위해 음료 헌물을 부었다. 성경에 어려운 구절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와 성경 주석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주석이 맞는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주를 버리는 자들이요, 나의 거룩한 산을 잊고 그 군대를 위하여 상을 예비하며 그 수대로 음료 헌물을 제공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 수를 세어 칼에 넘길 터인즉 너희가 다 몸을 구부리고 살육을 당하리니(흠정역 사65:11-12). But ye are they that forsake the LORD, that forget my holy mountain, that prepare a table for that troop, and that furnish the drink offering unto that number. Therefore will I number you to the sword(KJV). 물론 NKJV도 사65:12에서 ‘number’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65:11의 ‘number’와 사65:12의 ‘number’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수많은 이방 신에게 경배를 드렸듯이 나도 그렇게 너희 수를 세어 칼에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65:11의 ‘므니’를 ‘수’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만이 사65:1과 함께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히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도 또 한 번 영어 킹제임스 성경 이 최종 권위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2009-05-08 18:19:0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라고 지시한 제임스 왕이 동성연애자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제임스 왕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유명한 킹제임스 성경 번역을 위임했던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는 비록 영국이 낳은 최고의 군주는 아니었다 해도 많은 이들이 존경을 금치 않았던 위대한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와 결단을 통해 그는 스코틀랜드의 상호 투쟁하는 족속들을 하나의 통합 민족으로 연합하였으며 그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은 대영제국의 기틀을 형성하였습니다. 단지 영국의 국교회들만이 영어로 된 성경을 소유하던 때에 제임스 왕은 평민들 즉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소유할 것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1603년에 제임스 왕은 이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학식 있는 54명의 학자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이 영적 무지에 빠져 지내길 바라던 때에 제임스 왕은 자기 국민들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영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쳤던 제임스 왕은 「담배를 강력히 반대한다」(Counterblast to Tobacco)라는 소논문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은 영국 내에서의 흡연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항상 적들을 두게 마련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웰돈(Anthony Weldon)은 조정에서 추방당했고 이에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제임스 왕이 죽은 지 25년 후인 1650년에 가서야 웰돈은 그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는 제임스 왕을 동성연애자로 몰아 부치는 글을 썼는데 그때는 이미 제임스 왕이 죽은 뒤라 왕이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웰돈의 이 보고서를 무시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제임스 왕을 비방함으로써그의 이름이 담긴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을 더럽힐 수 있으며 그 결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책인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좀 더 현대화 된’ 역본들로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최근 들어 끄집어낸 것인데 사실 그전까지 이것은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 그런 종류의 시시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한 번 웰돈의 이 거짓 보고서는, 그 보고서의 저자였던 웰돈과 같이 불순한 동기를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에 의해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1605년 영국 국민들의 손에서 그 참된 성경을 빼앗기 위하여 의회의 의원 전원과 제임스 왕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05년에 가넷(Henry Garnet)이라는 예수회(Jesuits) 사제의 지도하에 포크스(Guy Fawkes)라는 이름의 로마 카톨릭 교도 한 명이 의회와 제임스 왕을 살해하기 위해 암살용 화약 36통을 가진 채 의회 지하실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살해한 후 그의 자녀들을 감금시키고, 반항했던 자들을 다 죽이고, 영국을 교황에게 충성하는 나라로 재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영어 성경’도 그 계획의 희생물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포크스와 가넷 그리고 8명의 공모자들은 체포되어 다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제임스 왕의 인품에 먹칠을 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는 자들은 한결같이 성스럽지 못한 자리에 동참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2009-05-08 18:15:24 | 관리자
  질문: 열왕기상 10장 28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오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79> 대답: 먼저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두만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 הוקמו  םירצממ  המלשׁל  רשׁא  םיסוסה  אצומו 영어 KJV: And Solomon had horses brought out of Egypt, and linen yarn.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솔로몬에게 이집트에서 가져온 말들과 베실이 있었으니 한글 개역판: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 왔으니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 (‘크베’)라는 단어이다. 영어 KJV와 한글 KJV는 이 단어를 ‘베실’이라고 번역했고 한글 개역판은 아예 이 부분을 삭제해 버렸다. 사실 1611년경에는 고대의 지리나 종교에 관해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크베’를 ‘베실’로 번역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오늘날 ‘크베’(또는 쿠에)는 지리적 이름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NASB나 NIV는 ‘쿠에’(Kue)라는 지명으로, NKJV는 ‘케베’(Keveh)로 번역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새 역본들이 만들어 내는 혼동을 보고 있습니다. 반격 재료가 모자라자 이제 현대 학자들은 음역과 번역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서 제기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이름은 거의 대부분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역자들이 번역을 할 때 이름이나 장소가 나오면 번역을 해야 할지(KJV처럼 아마 실로) 혹은 음역을 해야 할지(NKJV처럼 케베로)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이 결정은 문맥에 좌우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펜사콜라(Pensacola)라는 도시는 스페인 말로 ‘다섯 개 별’(Five stars)을 뜻합니다. 자, 거기 사는 사람이 스페인 사람을 만나서 “나는 펜사콜라에서 왔습니다.”(I am from Pensacola)라고 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펜사콜라에서 왔습니다.”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나는 다섯 개 별에서 왔습니다.”로 생각할까요? 바로 이런 문제가 히브리말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크베’ 역시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새 역본들은 이 단어를 장소로 음역 처리해서 솔로몬이 구매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맥을 보면 그가 구입한 것이 말과 병거 등임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아마 실’은 문맥에 맞지 않는 듯 하므로 새 역본 역자들은 이 단어를 장소로 음역 처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흠정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집트에서 말과 아마 실을 가져오매 왕의 상인들이 한 값에 아마 실을 받았으며(흠정역)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이를 ‘아마 실’로 번역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의 ‘크베’(Keveh)는 ‘모은다’(to gather)는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실’ 즉 ‘린넨 실’은 아마 섬유를 ‘모은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다시 아마포를 만듭니다. 사실 이집트는 아마포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네(두로)가 이집트에서 들여온 수놓은 제품과 고운 아마포를 넓게 펴서 돛을 삼았으며 엘리사의 섬들에서 들여온 청색과 자주색 옷감으로 너를 덮게 하였도다(겔27:7).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7:16-17에서 왕이 되는 자는 말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왕)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느니라. 또 그는 자기를 위해 아내를 많이 두어 자기 마음이 돌아서지 않게 하며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지니라. 그런데 솔로몬은 말과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특히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파라오의 딸을 포함하여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과 에돔 족속과 시돈 사람들과 헷 족속의 여인들이라(왕상11:1).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들여온 말과 병거는 솔로몬을 위한 것이었으며 아마 실은 그의 아내들 특히 파라오의 딸을 위한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맥이 이를 지지하므로 현대 역본들처럼 음역을 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또한 “1611년경에는 고대의 지리나 종교에 관해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주장 또한 거짓입니다. 이 단어를 ‘크베’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은 라틴 벌게이트와 70인역에 근거한 것으로(아담 클락의 주석서 참조) 1611년 번역 당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산물인 이런 자료들의 허구를 잘 알고 있는 역자들은 신빙성 없는 이런 자료를 단호히 배격하고 문맥에 맞게 이를 ‘아마 실’로 번역한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현대 학자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음역과 번역 문제를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순수하게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개역성경이나 말씀보존학회 성경처럼 아마를 베로 번역한 것은 오역입니다. 아마 즉 ‘린넨’은 아맛과에 딸린 한해살이 풀이며 베는 삼(hemp)에서 만든 것입니다.
2009-05-08 18:00:47 | 관리자
  질문: 민수기 33장 52절의 그림은 오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76>   대답: 한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그룹 중 하나는 성서침례교회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거의 대부분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하는 독립침례교회들의 모임인 ‘Bible Baptist Fellowship’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가장 잘 알고 근본주의 침례교회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여전히 세례 성경인 개역성경을 고집하며 킹제임스 성경을 배격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내에 성경 이슈가 크게 번지자 당황한 개신교 학자들과 목사들은 근본주의 성서침례교회 출신으로 달라스 신학교에서 공부한 장두만 박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글을 쓰게 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배운 대로 행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신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이분으로부터 성경의 영감과 보존에 대한 바른 교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글을 보면 그의 사상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그 향유의 가치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NIV에서는 1년 분 봉급 (one year's wage)라고 번역했다. 그러면 NIV의 번역을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필자는 이 부분의 NIV 번역은 너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면 1년 동안에 안식일과 절기를 빼면 300데나리온 정도 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NIV의 번역은 현대인들에게 훨씬 더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1998년 6월과 7월호 「목회와 신학」). 장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 데나리온, 에바, 큐빗 등을 모두 ‘1년 치 봉급’, ‘10평’, ‘세 바구니’, ‘50센티미터’ 등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 부분만 ‘1년 치 봉급’으로 해야 한단 말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정할 권한과 그에 필요한 영감을 그에게 주었습니까? ‘축자 영감’(Verbal or word inspiration)에 대해 이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근본주의 신학교에서 근본주의 목사 후보생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단어, 단어에 영감을 불어넣으시고 단어, 단어를 보존하시지 단지 뜻만을 보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300 데나리온이라 두고 그것이 대략 1년치 봉급이라고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부디 근본주의 진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고치는 일에 도움을 주어 자유주의자들을 기쁘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 박사 같이 하나님께서 본문을 보존해 주심을 믿지 못하고 학자들이 원본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처음부터 철학이 다르므로 여러 구절을 비교해서 설명하는 일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창조와 진화’의 문제처럼 ‘믿음의 문제’이므로 아무리 증거를 대도 상대방이 틀렸다고 믿으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상 문제를 논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히브리 원문 : .....םתיכשׂמ־לכ תא םתדבאו 영어 KJV :  and destroy all their pictures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그들의 모든 그림들을  파괴하고 한글 개역판: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단어는 ‘마스키트’(תיכשׂמ)이다.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의 히브리어 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는 “show-piece, specifically carved figure of idolatrous symbols”(전시물, 특히 우상적 상징의 새긴 상), “figure”(상)  “imagination, conceit” (상상)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구약 원어 신학 사전」도 ‘마스키트’의 의미를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33:52은 영어 KJV나 한글 KJV같이 ‘그림’으로 번역해서는 안되고 ‘새긴 상(像)’ 또는 ‘석상(石像)’으로 번역해야 될 것이다.  히브리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원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KJV의 번역을 맹신하는 럭크만은 사람들이 KJV의 ‘그림’이라는 번역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각종 그림이나 TV를 즐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그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스트롱 번호는 4906이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6번 나오며 ‘형상’(image)으로 2번, ‘그림’으로 2번 번역되었으며 나머지 다른 용례로 쓰였습니다. 어떤 단어든지 두세 가지 이상의 뜻을 갖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을 따르느냐는 문맥이 결정합니다. 도대체 누가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의 히브리어 사전과 「구약 원어 신학 사전」에 최종 권위를 부여했단 말입니까? 이런 사전을 지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신자들인데 이들이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흠정역 민33:52).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교도들의 숭배 대상을 다 부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이 형상의 그림들을 신전에 걸거나 그려 두고 거기에 경배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에서도 형상과 함께 그림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림과 형상과 산당을 즉 가장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몽땅 다 부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번역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또한 영어에서 ‘picture’는 ‘조각칼 등으로 만든 것을 묘사한 것’이라는 용례도 있습니다(「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두 번째 용례 f항 참조).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최종 결과는 그림이며 이는 우리말 큰사전에 있는 그림의 정의와 똑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적으로 인해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완전한 성경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 우리 손에 완전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콧구멍에 있나니 어떤 점에서 그를 수에 넣어야 하겠느냐?(사2:22)
2009-05-08 17:39:52 | 관리자
  질문: 일개 역본보다는 오히려 최초의 자필 원본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 대답: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필 원본에 가치를 부여하신 만큼만 가치를 두면 됩니다. 자필 원본(Original autographs)이란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최초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원본’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필 원본은 이미 오래 전에 소실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사실상 자필 원본에 충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실한 성경 신자라면 자필 원본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정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위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답변의 끝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필 원본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실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레미야서 36장에 나오는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 즉 예레미야가 기록한 두루마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예레미야서의 몇 장을 면밀히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에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왕과 왕 곁에 서 있던 모든 통치자들의 귀에 그것을 낭독하니라. 이제 왕은 구월에 겨울 집에 앉아 있고 왕 앞에는 불타는 화로에 불이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했을 때에 왕이 펜 칼로 그것을 찢어 화로 위에 있던 불에 던지더니 마침내 그 두루마리 전부가 화로 위의 불에 소멸되니라(렘36:21-23). 21절에 보면 여호야김 왕 앞에 두루마리가 놓이고 그의 종 여후디가 그것을 낭독하는 장면이 나오며 23절에는 여후디가 두루마리의 서너 쪽을 낭독하자 여호야김 왕이 그것을 펜 칼 즉 소도로 일일이 찢어서 활활 타오르는 화로 불에 던져 넣어 그 두루마리를 전소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자필 원본’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우리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감동시키사 재차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하셨고 거기에 몇 말씀을 추가하셨습니다(렘36:32).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니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이 불에 태운 그 책의 모든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서 받아 거기에 기록하고 그것들 외에도 그와 같은 말씀들을 거기에 많이 더하였더라(렘36:32). 이리하여 ‘두 번째 원본’이 탄생했으며 예레미야 45-51장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재생된 이 ‘두 번째 자필 원본’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그가 바빌론에 이르거든 이 두루마리를 읽고(렘51:59-61) 다 읽은 후에는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고 말하였습니다(렘51:63)! 이리하여 ‘두 번째 자필 원본’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잠깐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아직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45-51장의 그 두루마리 본문의 복사본이 지금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복사본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그 ‘두 번째 자필 원본’의 ‘복사본’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사실 우리는 그것을 ‘세 번째 자필 원본’이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필 원본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1) 이제껏 출판된 모든 성경에는 예외 없이 예레미야서 45-51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본문은 ‘두 번째 자필 원본’이나 혹은 ‘세 번째 자필 원본’의 복사본으로부터 번역된 것이다. (2) 이 사실을 통해 일단 원본이 복사되어 자신의 메시지가 전달된 이상 하나님께서는 그 ‘원본’을 보존하시는 데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으셨음이 분명히 드러났으며 이 점은 그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 이상으로 자필 원본을 강조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같이 원본을 강조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자필 원본의 본문이 하나의 오류도 없이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이 시간에 자필 원본이 발견된다 해도 우리에겐 큰 의미가 없습니다.
2009-05-08 17:36:11 | 관리자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간의 침묵기   구약성경이 끝난 뒤 곧 바로 신약성경이 시작되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 기간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할 필요를 느낀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로부터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까지의 기간은 400년으로, 보통 이 기간은 '침묵기'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며 세속 역사가들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의 역사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주후 37-100년 사이에 살았던 요세프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이다. 요세프스는 유다인 역사가로 주후 66-67년 사이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며 저항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타이투스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는 로마로 끌려가 베스파시안, 타이투스, 도미티안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유명한 저술로는 마카비 시대부터 주후 73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일곱 권으로 기록된 「유다 전쟁사」(The Jewish War)와 유다인들의 기원으로부터 주후 66년의 전쟁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스무 권으로 기록된 「유다인들의 고대 역사」(Jewish Antiquities)가 있다.   I. 세계의 권력   A. 페르시아 왕국(주전 333년까지 지속됨)     1. 몇몇 외경이 기록됨.     2. 유다인들이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옴.     3.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됨.     4. 신정 정치, 제사장, 율법 체제.   B. 그리스 왕국(주전 333-167년)     1.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이김.     2. 알렉산더가 유다인들에게 자비를 베풂.     3. 유다인들이 흩어져서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임.     4.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왕국은 네 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됨.     5. 네 왕국과 그 통치자들은 다음과 같음.         a. 이집트 - 프톨레미         b. 시리아 - 셀루시드         c. 마케도니아 - 리시마쿠스         d. 소아시아 - 카산데르             *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은 서로를 대적하며 전쟁을 함.    6. 이집트와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땅을 놓고 전쟁을 벌였으며, 유다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 피난처를 찾기 시작함.    7. 소위 「70인역」이라 불리는 구약성경 역본의 전통에 따르면,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 필라데프스가 명령을 내려 70명의 유다인들에게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고 한다.        주의 사항: 사실 이 같은 전통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비의 「70인역」을 사용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현존하는 「70인역」 사본들은 한결같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다.    8. 그 당시 가장 많이 쓰인 언어는 다음과 같다.       a. 그리스어       b. 아람어(히브리 방언)   C. 마카비 시대(주전 167-63년)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주전 175-164년 사이에 시리아의 왕으로 통치함.    2. 그의 정책은 자신의 왕국 전체를 그리스화 시키는 것이었으며, 그의 정책에 반대한 유일한 그룹은 유다인들이었음.    3. 신실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형제인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유다인들을 그리스화 시키는 조건으로 자기를 대제사장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함.    4. 안티오쿠스가 칙령을 내리자 야손이 이를 유다인들에게 가져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a. 그의 왕국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같은 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함.       b. 유다인들의 축제, 안식일, 희생, 할례 등을 지키거나 행하는 것을 금함.    5. 이 같은 칙령의 위협으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 유다인들을 대적함.    6. 등록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중에는 요아립의 계통에서 나온 마타디아라는 이름의 나이 많은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와 및 그의 다섯 아들은 예루살렘 북쪽 산에 있는 자기 선조들의 영토로 들어갔음.    7. 안티오쿠스의 밀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이교도들의 제단에서 희생물을 바치라고 명령함.       a. 마타디아는 희생물을 바치려 한 배도한 제사장들을 즉각적으로 죽임.       b. 또 그는 왕의 사자들을 죽이고 가증한 제단을 무너뜨림.    8. 백성들은 마타디아의 지도를 받으며 대항하기 시작했고 반역의 세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많은 마타디아는 이 일이 있은 뒤 일년이 지나 죽었고, 그의 아들들이 그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함.    9. 그의 아들들은 마카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장남의 이름이 유다 마카비였기 때문이었음.    10. 10,000여 명의 유다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번씩이나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패주시킴; 한번은 50,000명, 또 한 번은 65,000명.    11.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5년에 다시 성전에서의 예배를 시작함.    12. 마카비들은 78년 동안 권력을 행사함.   D. 로마제국(주전63∼?)    1. 폼페이 대제가 주전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함.    2. 주전 40년에 로마인들은 헤롯 대왕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주전 37년에 유대 지방의 유일한 왕이 됨.       a. 헤롯은 에돔 사람임.       주의 사항: 에돔 족속은 페트라에서 내쫓김을 당해 남부 유대 지방에 정착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두매아(에돔)라고 불렀다. 이 에돔 족속은 그 뒤 50년이 지나 히르카누스에 의해 정복을 당해 할례를 강요받았고, 유다인들의 집회의식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다(신 23:7).       b. 창세기 27장 40절의 에언이 헤롯 대왕을 통해 이루어짐.    3. 헤롯 대왕은 주전 4∼5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남.   Ⅱ. 변화된 것과 새로 나온 것   신약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곧바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집단 등을 접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 400년의 '침묵기'에 생긴 것이다.   A. 제사장    1. 복음서에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옴.    2. 대제사장 혹은 수제사장이라는 단어가 84번 나옴.    3. 모세 당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장 직무의 기능은 종교적인 것이었음.    4.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인들의 시민권리는 제사장들의 손으로 넘어감.   B. 레위인    1. 사복음서에서 단 2번만 나옴 - 눅 10:32, 요 1:19.   C. 서기관    1.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2. 준비된 서기관은 모세 오경을 외움.    3. 아주 전통적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    4. 율법사라고도 일컬음을 받음.   D. 다스리는 자(치리자, 관원)    1. 여러 종류의 관리를 지칭함.    2. 용례 :    a. 연회장 - 요2:8,9    b. 산헤드린 공회 회원 - 요3:1    c. 주치리자 - 요12:42    d. 행정관 - 눅12:58   E. 바리새인    1. 이 명칭은 "분리된 자"라는 뜻임.    2. 기록된 율법을 옹호하며 지키는 사람들.    3. 보수적임.    4. 정통이었으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음.   F. 사두개인    1. 유다인들의 귀족으로 정치 집단임.    2. 종교적 측면에서 현대주의/자유주의자들임.    a. 영의 존재를 부인함.    b. 부활을 부인함.    c. 혼의 불멸을 부인함.       주의사항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에 생긴 그룹으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음.   G. 헤롯당원    1. 정치집단    2. 이 이름은 로마정부의 권세를 위임받은 헤롯에게서 유래됨.    3. 정치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함.   H. 갈리리 사람들    1. 이 집단은 북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나 모든 외국 세력에 대항했음.    2. 정치적으로 광적인 사람들임.   I. 사마리아 사람들    1.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다시 사람이 거하게 하도록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사이에 생긴 혼혈민족.    2. 아시리아의 에살하돈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제사장을 보내었으며 그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들은 주 하나님도 두려워 하고 동시에 자기들의 신에게도 경배를 드림.    3. 주전 535년, 두 번째 성전을 지을 때에 이들은 자기들도 이 일을 돕겠다고 했으나 유다인들이 이 같은 제안을 거부함.    4.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인 간에는 늘 적대심이 존재함.   J.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1.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번 나옴 - 요7:35 ; 약1:1 ; 벧전1:1.    2. 이 단어는 밖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포로 시절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서 돌아오지 않고 그 곳에서 남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그 규모가 작음.   K. 개종자    1. 원래는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을 뜻함.   L. 회당    1. 유다인들이 모이는 장소.    2. 이 기관의 유래는 바빌론 포로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감.    3. 성전 밖에서나 성전이 없는 경우에 유다인들은 작은 그룹으로 모였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자기들의 종교적 삶을 온전하게 유지함.   M. 「70인역」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하자.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유다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인의 유다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이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의 추측 연대는 대략 주전 250년 경인데, 이 시기는 주전 397년 구약 성경의 마감 시기와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주전 4-5년 경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간의 침묵기 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번역본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조하라는 압력이 오자 학자들은 급히 주후 200년 경 오리겐의 「육단 성경」(헥사플라, Hexapla)을 그 증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70인역」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이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두 번째 단은 오리겐 자신(결코 72인의 유다 학자의 번역이 아닌)이 그리스어로 구약을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벨과 용', '유디스서', '토비트서'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조차 포함시키고 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제5단에다 직접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려 들 것인데, 이런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인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여지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the Ryland's Papyrus, #458)인데, B.C.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제 「70인역」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2. 모든 유다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명기 17:18; 31:24,25,26과 말라기 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 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그런 금지된 계획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유다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법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언어 계승의 열심에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고자 하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이야기는 모순된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외경을 포함한 구약 성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자체에서 발견된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첫 번째 난제는,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12 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신학자들이 이같이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보고서도 이 거짓된 「70인역」을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슬프지만 아주 단순한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고,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의 공식 번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며, 단 번에 성경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킬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이다.   N. 산헤드린    1. 공회라고도 불림.    2. 공회는 모세가 구성한 70명의 상담자들에게서 유래됨.    3. 구성원은 다음과 같음 ;       a. 수제사장이나 24개 제사장 계열의 수장들.       b. 서기관이나 율법사.       c. 일반사람을 대표하는 장로들.       d. 공회에는 70명이나 72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고, 이들의 임기는 종신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됨.
2009-05-08 17:25:1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