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부실하고 히브리 전통본문과 상이한 점이 많아 신뢰하기 어려운 그리스어 구약성경.
이것은 보통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누군가가 상상 속에서 꾸며 낸 책이다. 이것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고문서에 드러나 있다고 주장한다. 그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역본이 유대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발되었으며 그들은 주전 250년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일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편지가 ‘칠십인역’이라는 불가사의한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이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대라는 요구를 받은 학자들은 주후 200년경 오리겐이 지은 헥사플라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칠십인역’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되었으며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 이상 지나서 기록되었다.
‘칠십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육난성경인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에다 스스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넣지 않고 ‘칠십인역’을 필사해 넣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명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기록되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교는 단 한 번도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외경, 정경 참조.
만일 유다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오리겐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이러한 위조된 글들을 제멋대로 첨가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오리겐의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유세비우스와 필로가 그리스어 모세오경을 예로 들면서 이처럼 전설 같은 책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들마저도 그것을 구약성경 전체나 혹은 공식적으로 수용된 어떤 역본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오리겐의 헥사플라,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필로의 주장 등은 변명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모순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 편지의 저자가 필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말은 그 편지의 저작 연대가 ‘기원 전’이 아니라 사실은 ‘기원 후’라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편지를 쓰게 된 속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을 ‘칠십인역’의 복사본으로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신약에 나오는 구약 인용 구절 가운데 많은 부분이 ‘칠십인역’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칠십인역’이란 바로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을 가리킬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약성경의 인용 구절들은 절대로 가상의 ‘칠십인역’ 혹은 오리겐의 헥사플라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구약성경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이다.
끝으로 학자들이 ‘칠십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저버리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히브리어를 배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 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한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성경의 공식 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번에 성경 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전통 마소라 사본과 충돌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오리겐 같은 성경 비평학자들을 높이 세우는 ‘칠십인역’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보존, 알렉산드리아, 마소라 참조.
2009-04-27 01:10:01 | 관리자
성경의 가장 놀라운 예언 중 하나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대언자 다니엘에게 주신 ‘70이레’ 혹은 ‘70주’(seventy weeks)라 불리는 예언이다.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법을 그치고 죄들을 끝내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단9:24).
다니엘은 유다 왕국의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은 자기가 말한 것이 70년이 아니라 70년이 7개 있는 490년이며 또 하나님께서 이 기간에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최종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세고 계신다고 말했다. 칠십 이레 선도 참조(78).
이 490년의 처음 69이레 즉 483년은(69x7=483) 주전 454년경에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때(느2:1-8)와 통치자 메시아가 와서 죽은 때 즉 주후 30년까지의 기간을 나타낸다.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예는 민14:34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창29:27을 통해 이레가 7년을 뜻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면서 늘 490년이라는 주기를 이용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부터 가나안 정착까지, 여호수아부터 왕국까지, 그리고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포로까지의 기간이 모두 490년이다.
이 사실과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전 4년에 태어나셨고 주전 1년 다음이 곧바로 주후 1년이 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약속된 메시아가 오는 해는 주후 30년이 된다. 그때 예수님의 나이는 서른세 살 반이었고 바로 그 해에 그분께서는 유다의 약속된 통치자 즉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셨는데 그렇게 된 것은 기록된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단9:26).
이 주목할 만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됨으로써 다니엘이 예언한 490년의 기간 중 처음 483년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으로부터 명백하게 알 수 있듯이 그 483년 후에 남은 마지막 7년은 즉시 연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다.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6-27).
이 예언은 메시아가 끊어진 뒤 수세기가 흘러간 후인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 마지막 때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 중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해’ -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 아님 - 예비된 마지막 한 이레 즉 7년을 가리키며 이때를 보통 ‘7년 환난기’라 부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회복을 보여 주기 위한 이정표인 다니엘의 칠십 이레 중 앞부분은 이미 성취되었고 나머지 한 이레 즉 7년은 앞으로 적그리스도의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환난기 참조.
2009-04-27 01:09:14 | 관리자
처음부터 이 수는 한 주의 날 수를 나타내었으므로 성경에서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특별히 완전한 수라는 의미가 여기 담겨 있다. 정결한 짐승은 일곱 마리씩 방주에 들어갔고(창7:1-24) 요셉 당시 이집트의 풍년과 흉년은 각각 7년씩이었다(창41:1-57). 유대인들에게는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며 일곱째 해가 안식년이고 7년이 일곱 번 지나면 희년이 되었다. 무교절과 장막절 즉 그들이 가장 크게 여기는 명절의 기간은 각각 이레씩이었고 그들이 바치는 희생 예물의 수도 많은 경우 일곱 마리로 제한되었다. 금 등잔대의 가지도 일곱이고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제사장이 여리고의 성벽을 7일 동안 돌았다.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 일곱 등잔대, 일곱 별,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재앙, 일곱 천사가 나온다. 이같이 7은 십진법에서 10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수라 할 수 있다(마12:45; 삼상2:5; 욥5:19; 잠26:16, 25; 사4:1; 렘15:9). 또한 일곱 번이 일곱 개 있는 것은 완전한 것, 충만한 것 등을 뜻하였다(창4:15, 24; 레26:24; 시12:6; 79:12; 마18:21).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뜻한다(마18:22).
2009-04-27 01:08:32 | 관리자
남자 친척. 구약에서 친족은 종종 ‘무를 권리를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스라엘은 궁핍할 때에 자기나 가족 혹은 땅을 팔 수 있었으므로(레25:39-43) 다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친족으로서 그들을 무를 사람 즉 친족 구속자가 필요했다(레25:25).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룻4). 예수님은 바로 인류의 친족 구속자로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히2:11-12, 17).
2009-04-27 01:08:06 | 관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 불리는 명예를 얻었다(사41:8; 약2:23). 하나님은 사람이 친구에게 하듯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출33:11).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친구 관계일 것이다(삼상18: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명예와 복을 주셨다(요15:15). 그분께서는 유다를 가리켜서도 친구라고 하셨지만(마26:50)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동반한 무리를 뜻하며 그것은 우정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와는 다르다(마20:13; 22:12 참조).
2009-04-27 01:07:37 | 관리자
왕이 내리는 명령.
2009-04-27 01:07:07 | 관리자
병 고침.
2009-04-27 01:06:44 | 관리자
조롱, 책망, 수치를 당하는 것(딤전3:7).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들로 인한 수치를 당하였으므로 그분을 따르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치욕을 지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후12:10; 벧전4:14). 모세는 이집트의 보화보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했다(히11:26).
2009-04-27 01:06:22 | 관리자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됨.
2009-04-27 01:05:53 | 관리자
왕(삼상25:30; 삼하6:21), 요셉 같은 백성의 통치자(창41:43), 다니엘(단2:48; 5:7), 마을의 지도자(삿9:30; 대하29:20; 느3:9), 고위 상담자(삼하8:18; 20:26), 큰 집의 청지기(마24:45, 47; 눅12:42), 일꾼의 감독(창47:6), 왕의 재산 관리자(대상27:31), 잔치를 주관하는 자(요2:8-9), 회당을 다스리는 자(막5:36) 등이 치리자라 불렸다.
2009-04-27 01:05:19 | 관리자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병 고침을 받은 후 기뻐하는 대목에(행3:8) 나오는 ‘기뻐서 뛰놀다’(눅6:23)라는 히브리 표현은 현대식 춤이라기보다 히브리 사람들의 춤추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윗의 경우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춤추는 것이 대개 종교적인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었다(삼상18:6-7). 그가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투사를 죽이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도시에서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춤추는 일은 또한 가정에 경사가 있을 때에도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어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춤을 출 때에는 대개 작은북이 의식을 인도했고 인도하는 사람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이 스텝을 맞추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홍해의 기적 이후에 미리암이 이스라엘 여인들을 인도하여 노래하고 춤을 춘 것과 다윗이 사람들을 인도한 것을 보기 바란다(출15:20-21; 삼하6:14; 시150:4).
성경에 있는 이런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춤추는 일은 대개 종교적 성격을 띠었으며 즐거운 날에 이루어졌고 남녀 중 한 그룹이 행했으며 야외에서 낮에 이루어졌다. 남녀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춘 일은 없었으며 오락으로 춤을 춘 일도 없었다. 오락과 관련해서는 미갈이 말한 ‘헛된 자들이 춤추는 것’(삼하6:20)과 욥이 언급하는 ‘불경건한 가족들이 춤추는 것’(욥21:11)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이 춤춘 것(막14:6)을 예외로 들 수 있다. 그 당시 로마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연회에서 춤추는 것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들은 남녀가 어울려 술을 먹으며 춤을 추었다. 또한 로마와 동방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고용되기도 했는데 물론 그들은 대개 좋지 못한 성격을 가진 여자들이었으며 이교도들의 신전에서 벌어진 춤판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춤 역시 외설스러웠다(사23:16).
2009-04-27 01:04:54 | 관리자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모임에서 내쫓고 영적인 권리 등을 박탈하는 일.
유대인들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았다(요9:22; 12:42; 16:2). 출회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잠정적으로 모임과 사회에서 내쫓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모임에서 내쫓고 그들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필요한 경우에 출회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인정되었다(마18:15-18; 고전5:1-13; 16:22; 갈5:12; 딤전1:20; 딛3:10). 유죄로 판명난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했고 신자들의 모임에서 끊어졌다. 아나테마 참조.
이러한 출회 조치는 결코 당사자가 하나님의 법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았고 또한 사람으로서 또는 시민으로서 상대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의 이런 결정은 결코 과거 천주교회에서 했듯이 적개심에 근거해서 저주나 박해를 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을 단지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부터 물러나고 그와 교제하지 말고 먹지도 말라고 권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회개하면 다시 그들을 받아들일 것도 언급했다(살후3:6, 15; 요이10-11; 고전5:1-5; 고후2:5-11).
2009-04-27 01:04:23 | 관리자
이집트 탈출 참조.
2009-04-27 01:03:52 | 관리자
행복을 빎.
2009-04-27 01:03:26 | 관리자
뒤쫓아 구함.
2009-04-27 01:03:03 | 관리자
서로 잇는 재목의 한쪽을 홈에 끼어 넣을 수 있도록 뾰족하게 만든 부분(출26:17, 19).
2009-04-27 01:02:40 | 관리자
첫 열매 명절. 첫 열매 참조.
2009-04-27 01:02:16 | 관리자
기독교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자(딤전3:6). 바울은 초신자가 목사가 되는 것을 금하였다.
2009-04-27 01:01:51 | 관리자
풀과 나무.
2009-04-27 01:01:26 | 관리자
오두막. 이것은 주로 기둥을 세우고 초록색 나뭇가지로 지붕을 만드는 형태로 만들어졌다(창33:17; 욥27:18).
장막절 혹은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이 이 명절의 이레 동안 초막에 거하는 데서 유래되었다(레23:40-42; 느8:14).
장막절 참조.
2009-04-27 01:00:5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