캬 대충 읽어 봤는데 좋은 느낌이 딱! 오네요
일단 스크랩 해놓고 나중에 다시 읽을게요
감사감사
2016-12-27 00:50:09 | 한이
안녕하세요?
저는 제임스 낙스 목사님의 책 중에서 아마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책은 라고 생각합니다. 도서출판 킹제임스에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책들을 PDF 파일로 무료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편집상의 이유로 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PDF 파일로 제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재판을 찍으면서 이 좋은 책을 누구나 사용해도 좋다고 하면서 PDF 파일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도서출판 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을 통해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2014년 2월 10일)
2014-02-10 08:44:54 | 관리자
댓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좋은 글이네요.
2012-03-07 13:09:55 | 관리자
베드로전서 2장21절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차쥐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아멘" " 주님! 오~ 나의 주님! 오직 주님만 바라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게 하소서!"
2012-03-07 12:57:09 | 윤범용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평화의 비둘기가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오더니,내가 평화의 비둘기를 바라보는 순간 평화의 비둘기는 멀리 사라져 버렸다"(스펄젼)
성화(행위)에 포인트를 두게 되면 오히려 평화가 사라진다내 행위에 눈을 두면 평화가 사라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평화가 임한다우리는 행위 의인이 아닌 신앙 의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아니기에 행위를 바라보지 않는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이기에더 이상 나에게 소망을 두거나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율법(행위)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산상수훈(하늘백성의 법)을 마음으로 사랑으로 지키는 사람이다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그러나 열매조차도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그 열매조차도 은혜의 결과일 뿐이다
또한 성화의 열매는 행위에 포인트를 둠으로 맺혀지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정상적으로 맺혀지기 시작한다이는 회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찌무라 간조는 1885년 매사추세츠의 애머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 비정규생으로 3학년에 편입한다.이 대학에서 간조는 비로소 신앙의 스승인 제5대 총장 줄리우스 호울리 실레(J.H. Seelye)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된다실레의 따뜻함에 감동된 간조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특히 죄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에게실레의 다음과 같은 권면이 회심을 일으킨다]
"우찌무라, 너는 네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되는 거야. 네 밖을 보아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너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 놓고 나무의 성장을 확인하려고 매일 그 놈을 뿌리채 뽑아 보는 것과같은 짓을 하고 있어. 왜 하나님과 햇볕에 맡기고 안심하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신앙 의인 -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 - 은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아니기에성화될수록 오히려 자신의 부패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커져만 간다성화될수록 더욱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이 되어간다 고도로 성화된 자일수록 오히려 자신을 보면 부패함과 무가치함만을 더욱 고백하게 될 뿐이다
많은 신자들이 혼돈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자꾸만 자신의 성화에서 안식을 얻으려고 한다.그러나 우리가 설령 성자 수준으로 성화되었다 할지라도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거나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절대로 신앙 의인의 안식은 자신의 성화에 있지 않다.그의 안식과 확신은 자신의 행위에 있지 않다.그의 안식과 확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그는 '행위 의인'이 아니라 '신앙 의인'이기 때문이다.
-귀하신 한 목사님의 글-
2009-07-31 13:07:12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개관- 사랑 1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은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주님께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맺으시는 열매로,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애쓰고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맺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예배와 기도회를 아무리 열심히 참석하고, 아무리 열심을 내도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는 한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계신지요. 아니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온전히 허락하셨나요? 여러분의 인생은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기쁨이 넘치십니까? 아니면 환경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마음에 평안을 지니고 계시나요?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허락하시든 상관없이 오래 참고 계십니까? ‘선함’에 대해선 어떠하신가요? 혹시 상황에 따라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까? 믿음에 대해서는 어떠하신가요? 주님을 항상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종교적 열심만 내고 계십니까? 온유에 대해서는 어떠하신가요? 주님께 공손히 복종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어떤 위치에 두시든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또한 항상 성령님의 통제하에 자신을 두고 계십니까? 다시 말해서 절제하고 계시나요?
아마 이 아홉 가지를 열거하는 동안 여러분과 저는 우리하고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성령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공부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 그것을 하시도록 삶에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위한 우리의 열심과 수고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요즘 수적으로 성장을 해 왔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단지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일이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증거는 새로 늘어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정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수적으로는 늘어났는데 영적으로 성장하지 아니한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끔찍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즉 죄인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영적 소경을 영적으로 눈 뜨게 할 수 없고, 교만한 자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성도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 3절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은 성도라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처럼 어리석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오해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놀라시겠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거짓말에 능한 자도 있는데 눈 깜짝도 안 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댑니다. 설마 하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내를 학대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여자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담배와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날까요? 이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그저 휴거만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구원과 휴거 사이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로지 구원과 휴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를 단지 하늘나라에 데려 가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며 성경이 주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구원받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구원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람들은 종종 이 말씀 중 일부만 뽑아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왜곡하여 인용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대상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그분의 아들처럼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그 시점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도록 만들어 간다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따르면 구원받은 것이 성령님의 역사요 작품이듯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는 것도 역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님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후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상황에 자족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잊고 있는 자요, 성령님의 역사에 저항하고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 만족하여 더 이상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사랑으로 권면하고 때론 책망할 때 그것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그 역시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들인데 이런 것들을 거절한 채 “나도 구원받았다구. 나도 성경을 읽고 교회도 다니고 주님을 섬긴다니까?” 이렇게 자신을 내세우기만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육신을 동원하여 성령의 열매는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시면 “그러나(But) 성령의 열매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여러분 간음이 무엇입니까? 간음은 결혼생활의 실패를 뜻합니다. 모든 간음 행위는 당사자의 결혼 실패의 증거가 됩니다. 육신의 행위의 첫 번째가 간음이라면(19절),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22절) 왜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같이 눕는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성령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육신 가운데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행위는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9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육신의 행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을 보면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이 등장합니다. 셋 모두 성적 부도덕에 관한 것들입니다. 창녀짓이든, 자위행위든, 동성애든, 음란물이든, 비디오 혹은 잡지든지 간에 다 성적으로 타락한 것들이요, 육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를 보면 이와 대조적으로 기쁨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성적인 쾌락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에 참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돈이나 고급 승용차라든지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육신적인 노력으로 끊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오직 성령께 우리 자신을 순종하여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제어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성령께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육신이 일할 기회를 차단하십니다. 우리는 얼마 동안은 담배를 끊을 수 있고, 욕지거리를 중단 할 수 있고, 성질을 참을 수 있으며,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육신의 행위들을 육신적 노력으로 이겨내려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육신적, 성적 부도덕은 오직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emulation)과…” 여기서 경쟁이란 말은 원래 이런 의미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형편없음을 보고 실망해서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처럼 옷을 입고 다른 사람처럼 따라서 행동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파당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허락하신 참 화평을 누린다면, 이런 것들과는 쉬이 결별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이 화평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다 육신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이 열매는 오직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시켜 우리 자신을 성령의 통제하에 내어 맡길 때만 맺힙니다.
문제는 이것을 오늘날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등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일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더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없이 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을 잘 해 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혹은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니까… 이러한 동기로 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힘으로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 힘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가 우리 삶에서 맺히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가지의 영광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영광도 없고 가지의 존재 의미도 없습니다. 열매는 가지가 맺긴 하나 자기를 위해 맺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인을 위해 맺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상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께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다고 한들 그 일들이 내적인 열매없이 이루어졌다면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목표만 달성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잃어버린 혼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복음을 전파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기는 하나 따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즐기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지는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가 가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열매 맺기를 원치 않는 줄 아십니까? 열매는 자기에게 전혀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은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아.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라고 한다면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가 봐야 뭐 별로 재미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데 뭐.”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전히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내가 거리설교 안 한다고 뭐 달라질게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육신 가운데서 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의 범위 정도를 스스로 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육신의 행위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으면 그 열매를 맺은 가지가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인이 그 열매를 따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기계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살아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열매란 조용히, 차분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으로 우리의 내적 생명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 맺으려고 애쓰거나, 수고하거나, 땀 흘리는 것 보셨나요?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도록 나무는 자신을 내어드려 자연스럽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원사는 나무에 거름도 주고, 가지도 치고, 온갖 정성을 다해 가꿀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 자체가 맺습니다. 정원사는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으나 열매는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절을 유의해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누구의 열매입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5장과 누가복음 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대해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2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3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끝부분에 주목하십시오. 환난도 기뻐한다, 정말입니까?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저는 환난을 통과해 본 적이 있어 그 결과로 적절한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앞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 이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휴거 때까지 여전히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5장 3절에서 5절을 보겠습니다.
3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여기 보면 “아직”이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즉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원수노릇을 하고 있던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반역하고 죄를 짓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이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넓게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shed : 뿌리다. 눈물, 피 흘리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동일한 사랑이 네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노라.” 즉 우리가 죄 짓고 반역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신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실과 언어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적으로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이런 고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졌으니 그 사랑이 성령님에 의해(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방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원치도 않으며 심지어는 그런 기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내 육신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을 보십시오.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천연적으로, 즉 본성에 따라 저절로 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것을 그대로 되받아친다면, 즉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욕했을 때 여러분의 첫 번째 반응이 욕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때릴 때 여러분도 동일하게 그 사람을 때린다면, 여러분은 육신 가운데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잘 대해 주면, 여러분도 잘 대해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육신적인 행동입니다.
반대로 누가 내게 어떤 식으로 대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대로, 혹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대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가 행동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형성되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나의 행동원칙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해 주셨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롭지 못하던 때에도 햇빛과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의롭게 된 지금도 여전히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십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일관성 있게, 변함없이 저를 선하게 대하고 계십니다. 이에 비추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꾸준히 선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영적이지 못한 상태, 즉 육신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 누가복음 6장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내게 잘 대해 주는 그 사람에게 잘 대해 준다면 이것은 내가 거듭나기 전 하나님을 모를 때에도 할 수 있었던 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에게 신사적으로 대하는 사람을 내가 신사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난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까요? 이는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친절하지 않고 호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호의를 베푸는 일이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 역시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거듭나기 전, 즉 주님을 알기 전 가지고 있던 본성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우리의 자아로 인해 이 육신을 처리하지 못하심으로 우리의 육신적인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니 이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33절과 34절을 보겠습니다.
33 너희가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34 너희가 어떤 자들에게 받기를 바라며 빌려주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준만큼 받으려고 죄인들에게 빌려주느니라.
누가복음 6장 32절, 33절, 34절 모두가 자아에 근거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아는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즉 “네가 나에게 잘해 줘. 좋아, 그렇다면 나도 잘해 주지.”, “네가 나를 사랑해? 좋아, 나도 사랑해 주지.”, “네가 나에게 밥을 산다고? 좋아, 나도 밥 한 끼 살게.” 이런 방식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적인 유치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3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나신 분이 되도록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 보니 우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는 때가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이 행한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 주신 그 방식대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에는 쉽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인 생명으로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35절 끝부분과 36절을 보십시오.
35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36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만약 죄를 범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당연히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벌 주시고 징계하시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진실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로 하여금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그 차원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온전한 통제하에 놓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교회는 설교도 뛰어나고 성경공부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배워 나갑니다. 주일 낮, 수요일 저녁, 토요일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놀라운 지식도 얻고 난해 구절들에 대한 해석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얼마 후 점점 지겨워지고 지루한 순간들이 닥쳐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모든 과정 동안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은 채 온갖 지식만 채웠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보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고 결국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회와 거리설교와 기타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봉사와 섬김에 있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했다면, 결코 지루함이나 지겨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허나 이 모든 일을 지루하게 느끼셨다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지겨우신가요? 못마땅한 면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여지없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실은 내 교회 형제, 자매도 그렇게 사랑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설교를 들어야 하고, 더 많은 성경공부,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오해와 더 많은 비방, 그리고 더 많은 박해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육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형제 자매들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는 우리는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다보면 받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더러 흘깃 쳐다보거나 비켜가거나 심지어 이런저런 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반응이야 어떻든 간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이 내 마음을 흥분시키고 기쁨과 감사가 마음 안에 있다면 당신은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위해서 전도하거나, 실적이나 의무감에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고 싶은 뜨거운 마음에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입니다.
그때에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일부를 보내라. 이 날은 우리 주께 거룩한 날이니라. 너희는 또한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끝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 너희의 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로마서 5장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Love of the God)이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Spirit)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인 노력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얻어낸 인위적인 기쁨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상황이 바뀌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즉 슬픈 일이 닥치거나 원수들이 조롱하더라도,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슬퍼하고, 대접 잘 받으면 기뻐하다가 누가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대하면 화를 내는 건 다 육신적인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나를 통해 표현되어지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괴롭고 힘들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사역이 힘들 때도 간구할 수 있으며, 병이 들었을 때도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기뻐하고 사랑으로 돌보심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육신이 결코 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다.
시편 18편 34절, 35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사실 다윗은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사자를 죽였고, 적장을 단숨에 물리쳤던 전쟁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 사건을 잘 알고 계시지요? 다윗은 나발이 자기 부하들의 요청을 거절하자 즉시 칼을 차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려고 떠납니다. 육신 가운데 있는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반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영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다윗은 육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의 다듬어지지 않은 육신적인 성질이 그대로 표출되어지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시편 18편 34절, 35절로 가겠습니다.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gentleness)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전쟁을 배우고 활도 부수며, 사자도 죽이고 곰도 찢어 죽이고, 골리앗도 죽이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용맹이 아니었습니다. 35절 끝부분에 주의 부드러움(thy gentleness)이 다윗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의 부드러움입니까? 다윗의 부드러움이 아니고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용맹을 보이며 힘을 과시한다고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셔서 역사하실 그때에 우리가 위대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사랑, 주의 기쁨, 주의 부드러움….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성품을 내 안에서 재생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내 보이실 때 여러분과 저는 그분과 같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 즉 예수님의 평안에 주목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화평 곧 평안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화평(peace)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평안(my peace) 즉 주님의 화평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의 죽음을 통보받는 순간, 아니면 건강검진 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 발생했을 때 두려움과 불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통제하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화평으로 인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주어질 때 우리가 노력한다고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실 때만 우리는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 26절을 보십시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지도 모르고, 우리는 어떻게 평안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며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착각을 합니다. 교회의 회원도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고, 구령도 잘 되고, 한마디로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계신다면 당신은 육신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분의 성품 즉 성령의 열매를 우리를 통해 재생산하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도 사랑하고 괴로운 상황에 쳐해도 기뻐하며 거칠게 구는 자들에게도 부드럽게 대해 주고 슬픈 일이 닥쳐도 화평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제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보겠다든지 죄를 끊어 보겠다든지 새롭게 변화를 시도해 보겠다는 이런 결심이나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단 한가지,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장악하시고 통제해 주시도록만 기도하십시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만 기도하십시다.
“주님 저를 장악하셔서 주의 통제하에 두시고 저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 그것을 이루소서.” 오직 이 한 가지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2009-05-01 18:28:56 | 관리자
책 소개: 성령의 열매(제임스 낙스 저, 김영균 역)
성도들의 삶에 유익을 줄 책을 소개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안다고 하는 이들 중에 삶의 변화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분이 많습니다. 이번에 낙스 목사님이 지은 성령의 열매를 소개하며 또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본 사이트에서 전문을 올리려 합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김영균 목사님과 진리침례교회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킹제임스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출판물을 인쇄하는 데는 재정이 많이 들어갑니다. 독자들께서 이런 책들을 구매해 주셔야 사역이 유지될 수 있으니 출판사로 연락해서 구입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도서명 : 성령의 열매 / 출판사 : 도서출판 킹제임스* 가 격 : 12,000원 / 판 형 : 신국판 변형(150x220)* 지은이 : 제임스 낙스(James W. Knox) / 번 역 : 김영균 형제* 교제구입 문의 : 02-856-1997 [주소는 아래 사이트 참조]
◈ 지은이 : 제임스 낙스(James W. Knox) ...............................................................
제임스 낙스 형제는 1958년 2월 26일 루이지애나의 배턴루지에서 태어나 줄곧 플로리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영어와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제임스 형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1976년 12월 17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이듬해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임스 형제는 1987년 미국 플로리다의 디랜드에 성경침례교회를 세운 목회자이다. 그는 109개 나라에 성경공부 자료와 설교테이프 자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세계의 형제 자매들에게 보급하고 있으며 1988년부터 지금까지 백 30만 개의 자료들을 보급해왔다.
제임스 형제는 테이프사역과 출판문서사역을 통해 세계 곳곳의 지체들에게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자료들을 보냄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가능하도록 올바른 지침을 마련하고 지금도 그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고 있다.
▣ 제임스 낙스 홈페이지 : http://www.jamesknox.com
역자의 말
진리침례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해서 제임스 낙스(James W. Knox) 형제님(현 미국 플로리다 딜랜드 소재 성경침례교회 목사이며 딜랜드 성경 신학원 원장)의 설교집 성령의 열매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번역하면서(아직은 책자로 출간되지 않고 다만 테이프로만 제작되어 있으므로 들으면서 청중에게 알아듣기 쉽게 통역해 주는 마음으로 구어체 그대로 쉽게 번역하였으며 필요시 약간의 의역과 보충설명이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과 깨달음과 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었는지 뭐라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간 메시지 하나하나를 소책자 형태로 배포해 왔는데 예외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큰 유익을 얻었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권의 책자 형태로 만들어 더 많은 형제, 자매들의 영적 생활을 부요하게 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아울러 읽는 독자 모두의 마음에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981년 거듭난 이래 지금껏 늘 마음속에 박혀 있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나니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구원받은 후 내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계4:1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요15:8)임을 알면서 매번 로마서 7장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경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워치만니), “진정한 영적 생활”(프란시스 쉐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L. E. 맥스웰)에 이어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답을 제시해 준 것이 바로 이번 책 “성령의 열매”였음을 고백합니다.
그간 성령의 열매에 관한 메세지를 여럿 접해 보았으나 이번만큼 명쾌하고 확실하게 깨달은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제 주변의 사랑하는 지체들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 책을 통해 주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많은 열매를 맺게하사 영광을 받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2007년 6월 3일
역자 김 영 균
2009-05-01 18:28:04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림/사랑 2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열매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재생산해 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 성품들과 속성들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달성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렌지 나무를 심은 후 물을 주고 비료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오렌지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의 열매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그 칭호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생산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님대신 육신에게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넘긴 사람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모습들입니다. 반면 22절 말씀을 보면 이것들과는 대조적인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4절, 25절을 잘 주목하십시오. 사실 대다수의 구원받은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질 않습니다. 이들은 구세주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실 것을 부탁하였으며, 지금 현재 구원의 보장 속에서 하늘의 소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주님을 부른 그 시점부터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인도될 그 사이 동안(즉 이 세상의 삶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절에서 21절까지에 열거된 죄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조차 여전히 발견된다는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음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는 음행에 연루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화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다툼과 이단 파당의 창시자도 아니십니다. 위에 언급된 모든 것들은 육신의 일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자들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이런 육신의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눈에 띈다는 것을 우리 각자도 때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성령님의 통제하에서 걷기보다는 육신의 명령에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드릴 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다름 아닌 죄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이 단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신자들의 매일의 삶에서 매순간 일어나야 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매일 매일의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육신의 죄들에 대해 인정하고 나로서는 그것들을 이겨낼 수 없음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고자 그분께 겸손하게 다가갔던 것과 똑같이 그분께서는 내가 육신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나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께 나아왔고 그분께서 구원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까? 나로서는 안 됩니다. 나는 구세주께 나아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님께 나아와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여 내 자신을 내어드릴 때 그분께서 내 안에 그분의 열매를 생산해 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놓치지 마십시오. 잠시 후 그 구절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9절을 보십시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약 여러분 가운데 지난번 이 구절을 표시해 두지 않으셨다면 지금 표시해 두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여러분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늘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언젠가 휴거되어 다가오는 진노만을 피하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얻게 될 유익 중 하나이기는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은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내 안에서 자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재생산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저와 상호반응을 보이기를 원하시며, 그분께서는 저로 하여금 그 상호반응 시 올바로 반응해서 사랑이 생산되기를 원하십니다. 잠깐 주목하십시오. 만약 사랑이 성령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사랑은 육신에 의해 생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쁨은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런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화평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고통을 수반하는 그런 인내를 말하고 있으며, 또한 성질을 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유지되는 절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선을 이루게 됩니다.
잘 보십시오. 우리는 일이 잘 되어 가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일이 잘 안 되면 그것은 마귀의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나를 대해 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람들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마귀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잘 되든 못 되든 비록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발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게 됩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언급되어 있고, 요한복음 14장에는 하나님의 화평이, 느헤미야 8장에는 주님의 기쁨이, 시편 18편에는 하나님의 부드러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우리, 즉 우리 육신은 무엇을 원합니까? 육신은 자기가 다룰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도록 그렇게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 육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닫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구원을 받게 되며 또한 우리의 인생을 성령님께서 통제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친절할 때, 내 육신은 즉시로 맞받아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한지 아니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통제하에서 친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에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이 말씀에 따르면 내가 구원받았을 때, 나는 단지 영생만 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생명에 속한 것 뿐 아니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디도서 역시 동일한 취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2장 11절, 12절 말씀입니다.
11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12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과 함께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침, 즉 지침도 주셨다고 합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따르면 그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우리를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단지 하늘나라에 이른다고 하지 않은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생을 주시고, 하늘에 저택도 주시고, 영광스러운 몸과 황금으로 된 거리가 있는 새 예루살렘도 주시고,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축복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받았고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분의 덕(virtue)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런 성품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담의 죄악된 성품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신성한 성품을 우리에게 매일 나누어 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만을 구원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성품과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성품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4절에서 이 세상은 부패한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패한 세상에서 부패되지 않고 승리할 방도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 안에 있는 부패는 육신의 욕망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자신을 부인함으로 육신을 동결시키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시게 되면 정욕(욕심)으로 인해 세상에 있는 썩을 것(부패)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승리의 길을 가는 대신 세상에 대해 불평하면서 이 세상을 깨끗케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깨끗케 하시면 이 세상이 아무리 더럽다손 치더라도 결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이것과 더불어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것과 더불어”라는 말은 3절과 4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외에”라는 뜻입니다. 8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하면 그것들이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여기서 주목할 말은 MAKE(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열매 맺게 “할 수(MAKE) 없고” 5절, 6절, 7절에 나와 있는 것들이(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우리를 열매 맺게 “한다”(MAKE)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모든 예언을 꿰뚫고 세대주의에 정통하여 환난, 휴거, 그리스도의 심판석, 천년왕국 등에 대한 온갖 지식을 다 습득하였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내어드려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지식은 당신의 삶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각 성경의 개요를 다 알고 주제를 다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한들 그것이 당신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있음을 입증해 줄 수는 없습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당신 안에 절제(temperance)가 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그 지식이 주님에 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지식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구령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 나오는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영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육신적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신학교를 나왔다 할지라도 자아를 부인하고 육신의 욕심을 성령의 통제하에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도 받았고 성경에도 능통한 사람이 자기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식이 아무리 풍성할지라도 지식이 열매를 맺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났지만 남편에게 전혀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자매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도 하고 성경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진 마십시오. 우리의 영적 성장은 점진적인 과정이지 단 한 순간에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보시면 “열심을 다하여”가 첫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가 거듭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아는 것부터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원함(열심)을 보시면 첫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열심(Diligence)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은 육신의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거짓말도 하고 속임수도 썼습니다. 이 모두 다 육신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자”라고 합니다. 비록 온갖 육신적 죄를 지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언젠가는 나도 거룩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보십시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따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 우두머리를 사용하심은 그가 첫 출발로부터 부지런히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당신은 성경공부가 만족스럽고 즐거우신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덕을 갖춘 남자, 혹은 덕스러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덕스러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성경을 펴서 인용할 줄 아는 아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덕을 갖춘 아내를 원합니다. 내 아이들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을 성경에서 모두 인용할 수 있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방법대로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지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형제보다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형제들이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덕(virtue)입니다. 즉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이 우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보니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지식이 필요합니까? 여호와의 증인을 이기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은사주의가 틀린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물론 성경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거리설교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대부분이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다음 6절에 보시면 “지식에 절제(temperance)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성서들은 이 단어를 “자기통제”(self-control)라고 고쳤습니다만,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면 즉시로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제란 우리가 아닌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절제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인내가, 그 다음에는 경건이 나와 있고, 17절에는 형제우애(brotherly kindness)가 나와 있습니다. 순서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기 전, 즉 우리가 경건(godly)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우리는 형제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사랑(charity)입니다. 이 단어는 형제를 향한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을 보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먼저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기록된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 구절들이 점진적 성장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은 완성품이 아닐지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즉 구원받은 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 단계를 하나둘 씩 밟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첫 단계부터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열심(diligence)을 품는 것입니다. 원하는 마음(willing mind)입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인도가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서 지식에 관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결혼하기 전 아내도 아이도 없었던 젊은 청년 시절, 목사도 되기 전에 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시절,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영적인 어린 아이로 여겼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세대를 올바르게 구분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실로 갓난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정말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
“육신에 속한”(carnal)이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 단어의 의미는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육신적이란 것은 성경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신적이란 당신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받기 전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육신 안에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의 내 모습은 육신 안에서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제대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면 휴거 시 변화받을 것은 단지 우리 몸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4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육신적일 경우, 우리는 톰(Tom)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빌(Bill)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톰은 나와 의견이 같지만 빌은 나와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David)은 나와 동일한 취미를 갖고 있으므로 친하지만 요한(John)은 취미도 틀리고 이웃도 아니어서 친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제 문제의 핵심을 아시겠습니까? 즉 자기 육신이 어울리기에 알맞은 사람들과만 교제할 때 바로 그 사람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그 단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로 가겠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세대주의에 입각해서 이 시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하지 않으려 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입니다.
그들이 말한 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사람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내게 해준 대로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만을 위해 나는 기도하겠다, 그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그를 사랑하겠다, 그야말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합니다. 계속해서 39절에서 42절을 보겠습니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40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고 41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이 구절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뺨을 맞고 고소를 당하고 옷을 빼앗겼을 경우, 과연 나는 예수님께서 뺨을 맞으시고, 예수님께서 고소당하시고, 예수님께서 옷을 빼앗긴 것으로 간주하고...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나를 통해 그렇게 행하시도록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일만을 보지만 영적인 사람은 비록 이들이 내게 한 짓은 잘못됐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 내 생애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한 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들었으나
끝부분에 “들었으나”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 “배웠다고” 안 하시고 “들었다고” 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많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배우지는 못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제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말씀들을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그 중 제 행실을 바꾼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듣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아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응수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오, 노(No)! 불가능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니… 오, 노(No)!”,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니, 말도 안 돼! 불가능하다니까!” 아마 누구나 다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사랑하고 저를 좋아하며 좋은 교제를 갖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 설교하는 데는 아무런 힘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도움도 필요 없고 매주 늘 하던 대로 그냥 즐기면서 즐겁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이 끝난 후 은혜로운 설교였어, 참 좋았다고 하면서 응수하실 것입니다. 서로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나의 원수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 나를 괴롭히기로 마음먹은 사람, 내게 못된 짓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또한 환경을 이용해서 나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하라고 하시지만 저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잘 해 주라고 하시지만 저는 못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를 잘못 대하는 자들에 대해 점점 더 큰 앙심을 품게 되고 미움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배우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44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44절 전체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위하여”(for)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에 대해(at), 그들에 대하여(about)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존(John)이 나에게 못되게 굴었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못마땅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가서 “반갑습니다. 존”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안 보고 있는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존 형제를 축복하시고 그에게 좋은 날을 주시며 그의 가족과 가정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진정으로 기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우리에게 내달라.”고 외치는 군중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신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 하여금 이번에는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못되게 행동하는 그들을 용서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 제가 용서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그들을 용서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다시 꿈틀거립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그들이 내게 저지른 그대로 그들도 당하기를 바라는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가 안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우리를 대했든지 간에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 말씀은 로마서 8장 29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아들이라면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당신은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답변하겠지요. 그때 상대방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많이 닮았으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 훌륭한 성경교사를 여럿 보았습니다. 훌륭한 전도자, 사역자들도 많이 보았습니다만 하나님 아버지 같은 아들은 사실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경건한(godly)사람은 보기가 드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 같은(like) 아들이 드문 것입니까?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자나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 여기서 “자신의 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악한 자에게도 비추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잘해 주는 사람, 우리에게 호감가는 사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을 보이며 선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선하게 대해 주십니다. 이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 안에서 살기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억누르고 슬프게 합니다. 성령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려면 “내버려두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하면서 묵살해 버립니다. 오늘 집에 가서 마리화나 봉지를 꺼내 쓰레기통에 내던져 보십시오. 그렇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시면 다음 날 또 찾게 됩니다. 육신은 그대로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가서 술병을 내던져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시면 다음 날 또 술을 찾습니다. 수백 번을 회개하고 자백기도를 할지라도 개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듯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꾸셔서 우리로 더 이상 이 세상의 행로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은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리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선대하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47절, 48절 말씀입니다.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여기서 완전이라는 말은 “죄 없다”(sinless)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그런 뜻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완전(perfect)이란 말은 성경에서 '완성된', '끝이 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영접할 때, 그분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어 깨끗게 된다는 진리는 이 세상에서나 또 영원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완성품이 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어째서 신약성경은 내가 구원받은 후 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일이 더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서 무언가를 하시고자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숨을 쉬는 그 순간부터 그리고 첫 번째 죄를 지은 그 순간부터 구원하실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저에겐 이 진리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이미 먼 길까지 나가 있었습니다. 탕자를 안아 주려고 말입니다.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하셨을 때가 아니고 당신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구원하시라고 허락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준비되신 때가 아니고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의 육신의 죄들을 내버리고 돌이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허락하는 그 순간이란 말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성경 지식만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은 모습에서 열매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더 이상 변명을 하거나 둘러대는 짓을 그만두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어드리는 것 말입니다.
구원을 받았을 때도 우리가 주님께 구원하시도록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셨듯이 성령의 열매 맺는 일 역시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주시도록 요청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돈의 부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육신 안에 사는 것을 몹시 만족해 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이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수백 번 노력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회개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진정 담배를 끊고 싶은 그 순간 담배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정말 원하는 순간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의 연약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수준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계십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오늘 말씀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오늘 목사님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지식으로는 열매를 못 맺는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간단 말씀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으실 때 어떻게 기도해야 구원받는 줄 알고 계셨습니까? 그저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저 그분께로 가서 “하나님의 성령이시여 저를 붙드소서.”라고 하면 됩니다. 26절 말씀에 여러분과 저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실된 마음으로 “주여, 저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래 참고 싶습니다. 저는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시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진짜라고 판단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보시고 그제서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성령님께서는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로마서 8장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
여러분과 제가 이 말씀을 듣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성장할 때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이 없다고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서부터 가인을 비롯해 그 누구도 사랑을 지닌 채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방식 그대로 사람들을 사랑하게 도와주십시오.” 이 기도가 진정이라면 성령께서 아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 기도가 진정인 것 같습니다. 내일 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할 사람을 세 명 보내주시지요.” 이건 정말입니다. 다음 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육신 안에서 “하나님, 어제 제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기도할 것이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너에게 잘해 주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나에게 기도한 건 아닐 테지. 그거야 기도 안 해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기도응답으로 네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냈다. 자! 내가 도울 테니 사랑하거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저는 우리가 마음먹는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시도록 우리가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 그대로 남게 됩니다. 한 가지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간에 육신 안에 살고 있기에 우리를 언젠가는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그날, 모두가 우리를 잘 대해 주는 그날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바꾸시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서 사셨듯이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지식은 육신만을 강화시킵니다. 최악의 경우가 있다면 육신적인 사람이 성경구절을 척척 들이대면서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해 가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셔서 단지 설교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설교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아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26:43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열매에 대한 정의/두 성품의 내면적 갈등
우리는 현재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님은 신격의 제 3위이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하늘 왕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아들 하나님(그런데 이 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목적은 여러 가지이나 우리는 이번 성경공부를 통해 오직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시기 위한 그 목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신 아들 하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성도 안에 살기 위해 들어오신 바 그 목적은, 그분을 십자가로 가게 하여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게 했던 그 뜨거운 사랑이 여러분과 제 안에서 넘쳐나도록 역사하셔서 우리로 다른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큼 되도록 하시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성경은 성령의 열매들(fruits)이 아닌 단수(singular) 즉 열매(fruit)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한 열매의 아홉 가지 특성인 셈입니다. 성령께서는 한 가지 열매만 생산하시는데 그 특징이 아홉 가지인 셈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첫째 사랑, 둘째 기쁨, 셋째 화평 등등 이런 식으로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한 인격을 내 안에서 만드시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달성하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갖추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 전체가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까지 보겠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象)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우선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 안에, 그리고 할아버지, 또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렇게 이어 올라간다면 결국 노아, 그리고 아담, 즉 최초의 남자인 아담 안에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해 주는, 즉 생식이 가능한 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 아담으로부터 육체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는 동일한 성경이 필요하고, 동일한 구원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동일한 죄가 모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남녀노소에게 필요한 것은 동일한 죄로부터 해방 받아 동일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한 사람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이 말씀에 따르면 과일은 자체로 번식능력이 있는 씨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2절 말씀입니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과일은 그 안에 씨를 갖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성령의 열매(fruit)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을 재생산 즉 번식시킬 수 있도록 우리 몸 안에 씨를 가지고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A)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누가복음 8장 5절을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로 가겠습니다. 1장 23절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born again)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저는 과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받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인하여 저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다시 태어남)이라는 두 번째 출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첫 번째 출생했을 때는 단지 인간의 형상을 따라 인간으로서 태어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출생, 두 번째 출생, 영적 출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지금 읽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과 저는 인간의 씨로부터 얻은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썩을 씨이기에 부패될 그날을 향해 하루하루 전진해 가고 있으며 결국 육신은 완전히 썩어질 날을 맞게 됩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의학기술을 동원하거나 잘 관리하여 썩음을 미루어 볼 수는 있겠으나 완전히 멈추게 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태어난 또 다른 나가 들어 있고, 이는 새사람이라 불리며 썩지 않을 씨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겉사람(육신)은 날마다 쇠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매 순간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나’를 내 안에 지니고 있는 반면 내 겉사람은 이 새사람과 하루도 같이 지내기 힘든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전혀 공통점이 없으니까요. 요한일서 3장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는 여러분이 쳐다보고 있는 나의 겉사람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나의 겉사람은 하나님께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겉사람인 동시에 속사람 그러니까 둘인 셈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두 사람입니다. 이 둘은 서로 논쟁을 벌이고 다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3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5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에서 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과 저의 겉사람 즉 볼 수 있는 육신에 대한 것이고, 또 성령에게서 난다고 한 것은 속사람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면 두 번의 출생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에 “육신에서 난 것은 육이요”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보고 계신 저는 제가 거듭난 20년 전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입니다. 이 육신은 제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육신이며 여전히 죄로 가득하고, 여전히 천하고 반역적이며 처음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모양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육신은 여전히 육신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것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그것이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하여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때부터 하늘나라 가기까지 그 사이에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느냐입니다. 이 둘 사이에 우리에게는 가족, 직업, 교회, 이웃, 사회 등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기간을 살아가는 동안 구원받은 우리는 육신과 영 사이에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둘 사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육신대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아담의 씨가 들어 있기에 따라서 아담의 생식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씨가 내 안에 거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는 생식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하나님이라든가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보여주시는 속성을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생산하시고자 하는 열매를 생산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다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나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오렌지는 오렌지 씨앗에서 나오고 멜론은 멜론 씨앗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아담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재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다 들어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든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1절을 보면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11절 말씀은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에서 구원으로 넘어오는 단계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13절을 보십시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늘로 가게 될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구원도 못 받았던 내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13절에서는 이제 구원받은 내가 주님께서 나를 하늘로 데려가실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2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이 구절에 따르면 여러분과 저는 이 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육신이 아닌 영 안에서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들에 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것들을 부인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즉시 비판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 건가? 저렇게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며 속될 수가... 상종하기가 힘들겠구만.”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런 식의 비판 역시 육신적일 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 안에서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우리가 살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 우리는 몇점이나 나오는지 스스로를 평가해 봅시다. 7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신의 일들”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영적인 체 해 보아도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육신적인 일들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말씀에 따르면 씨앗을 심을 때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 몰라도 나중에 가지가 나오고 열매를 맺게 될 때 결국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는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서 바르게 살도록 해 주시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열매는 나쁜 열매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열매 역시 좋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고보서 3장 6절에서 10절입니다.
6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 7 모든 종류의 짐승과 새와 뱀과 바다에 있는 것들은 길들일 수 있고 또 사람이 길들여 왔으나 8 혀는 아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나니 그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니라. 9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곧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 10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니, 내 형제들아, 이런 것들이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미스터 아담과 미시즈 아담 즉 아담의 후손은 그 누구도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혀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혀는 또 사람을 저주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동일한 혀가 때로는 아담의 본성을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들에게 “나는 정말 네가 미워!”라고 쏘아대기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를 보고서 “반갑습니다! 형제님, 잘 지내시죠?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때론 “형제가 내게 그런 식으로 하면, 두고보라고 나도 똑같이 해 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혀로 어쩌면 이렇게 달리 사용할까요? 금방 상냥하게 말하다가 순식간에 독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혀란 말씀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두 명의 ‘나’가 존재하고 있으며 둘이 동일한 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내 안에서 이 혀를 사용하려고 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도 이 혀를 사용하시려 하니 내가 누구에게 혀를 내어주느냐에 따라 즉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 저는 목소리를 높여 단상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주께로 나와 그분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화를 내며 내게로 와서 침을 뱉으면 내 혀는 당장 “당신 같은 자는 지옥에나 가야 돼! 그렇구 말고!” 이렇게 쏘아댑니다. 통제가 안 되는 것이 혀라는 하나님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이미 이런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계속해서 야고보서 3장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11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느냐? 12 내 형제들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혹은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겠느냐? 그와 같이 어떤 샘도 짠물과 민물 둘을 낼 수 없느니라.
인간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단물이 내 입에서 나오는가 하면 쓴물도 내 입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재능을 발휘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동시에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육신과 영, 아담과 하나님, 옛사람과 새사람이 하는 갈등의 모습을 방금 읽은 야고보서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 16절로 가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15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2절 “못하게 하라”, 13절 “내주지 말라”, 14절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능(power)을 주셨고, 능력(ability)을 주셨으며, 결정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우리 안의 “아담”은 우리를 강요해서 죄를 짓게 하지 못하며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올바르게 살도록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담을 좇아 죄를 택할 것인지 성령을 좇아 주님을 택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서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중간 지점에서 육신의 길이 아닌 성령의 길을 택하고 우리 자신을 성령님의 통제에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의의 병기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 방향을 택하여 육신 쪽으로 기울면 성령께서 슬퍼하시게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능력을 행사하여 우리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육신 쪽을 택할 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므로 슬퍼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나의 아담의 성품에 통제권을 넘기시는데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무슨 짓이든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려 주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여 올바르게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통제권을 육신에게 내어주어 육신의 일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초점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랑, 화평, 믿음… 이 모든 성령의 열매를 내가 맺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내가 맺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가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드릴 것이고 그리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관건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3절을 읽겠습니다.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19절에 보니 간음, 음행, 부정함과 색욕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성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로마서 6장) 이러한 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게 강요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즉 내가 원하지 않으면 간음은 저지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인터넷 포르노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야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의(義)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것이요, 그리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런 죄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시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20절에 보면 우상숭배와 마술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영적인 죄들입니다. 이런 죄들은 우리를 강요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상숭배나 마술 등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보지만 제가 원하지만 않으면 그들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 역시 원하는 사람에게만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증오, 불화, 경쟁, 진노, 다툼, 폭동, 이단파당, 시기, 살인, 술 취함 등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개인적인 죄들로 이 모든 것들 역시 자신이 그 죄를 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증오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행한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이 그를 미워하기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스로 증오를 택한 셈입니다.
이단파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거짓교리와 연관시키지만 실은 이단파당(Heresy)이란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주님의 몸의 분열을 획책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 누구도 당신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죄들은 인간관계와 관련된 죄들로 만약 우리가 우리를 성령께 내어만 드리면 누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대했든 전혀 상관없이 이 모든 죄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담은 결코 이것들을 사용해 나로 하여금 죄 가운데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죄는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술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약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약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이 마약을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술을 권하거나 마약을 권할 때 당신이 “안 돼!”라고 말하고 당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하나님의 영께서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술과 마약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마음을 빼앗겨 당신의 몸을 그쪽으로 내어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반대쪽을 살펴보겠습니다. 22절에 보면 “사랑과 기쁨”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살펴본 간음과 음행의 반대가 곧 사랑이라고 하나님께서 대비해 놓으신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셔서 영원토록 당신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루나 한 주 혹은 한 달이나 일 년 정도 지속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육신은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을 추구하나 성령께서는 사랑과 기쁨을 추구하십니다. 세상은 온통 더러운 것들과 색욕에 대해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영원한 기쁨과 사랑과 화평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은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를 가져다주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좋은 화평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인들이 섬기는 신은 종교인들을 죽음으로 협박하고 위협하여 강제로 자기를 경배하고 섬기게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지시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아닌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육신의 일들 중 불화, 경쟁, 진노, 다툼 등과 대비됩니다. 아담은 자기가 잘못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께 잘못 행하는 자들에게도 선하시고 부드러우신 분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께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 보응하셨다면 저는 이미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의 열매는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것들은 어떤 것들과 대비될까요? 여러분 알코올을 반대하는 단체에서 사용하는 표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temperance)입니다. 왜냐하면 술과 마약은 사람들을 제정신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정신을 허락하셔서 “절제”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시점부터 하늘나라에 가는 시점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통제하에서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성령님의 통제하에서 아무리 이 세상이 부패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23절도 보면 “이 같은 것을 반대할(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성적인 죄들을 금하는 수많은 명령들이 있고, 성적인 죄들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많은 실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내 삶을 통제하셔서 내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어떤 명령도 경고도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당신의 아내를 취하거나 당신의 딸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이런 명령(계명)이 필요없음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그것은 제가 할 짓이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아담의 성품은 너무 부패해서 제약을 가하고, 재갈을 물려 봉쇄를 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아담들”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오셨습니다. 만약 오래 참음이 늘 나와 함께하고 온유함이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그 어떤 규범이나 명령도 필요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잘 대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5절로 가겠습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터인데 그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여기 보면 그 일이 얼마나 많으냐가 포상의 기준이 아니고 그 일이 어떤 종류이냐, 즉 양이 아닌 질이 포상의 기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므로 하늘로 가게 될 터이나 그곳에 가게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출두하여 이 세상에서 내가 행한 일들이 어떤 종류의 일인가를 판정받게 될 것입니다. 아담 즉 옛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다 타버릴 것이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것들은 그대로 남게 되어 그에 대해 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하늘나라에서는 오직 주님만 찬양을 받으시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 것들만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 그분께서 하신 것이기에 당연히 그분께만 찬양이 돌아갑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도 나누어주고 그 밖의 많은 봉사들을 다 하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그것들 중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일만이 보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신이 직접 일하심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화평을 만들어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취하셔서 자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우리를 죄로 사로잡아 가는 그 무언가가 들어 있어서 우리가 그 죄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얼마 안 있어 즉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결국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 아니었습니까?
내 지체 안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결국 이런 상태에서는 절망감이 엄습하고 바울의 절규가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악순환이야말로 아담이 빠져든 함정이요 평생의 올무인 것입니다.
단지 아담이 한 것이라곤 죄에 기댄 것뿐인데 그 놈의 죄가 아담을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담이 승리의 방향으로 기울여 기대는 순간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성령의 통제하에 두시고 우리가 원하기는 하나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능하게(enabling)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기대실 건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과 저는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아담처럼 죄의 법 아래에서 살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의존하려고 마음 먹으신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뜻이니까요. 그것이 그분께서 갈망하시는 바입니다.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25:52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율법을 주신 목적/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 말씀입니다. 성령의 열매는(fruit) 단수 즉 한 가지 열매일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구절에는 이 열매의 아홉 가지 특성이 잘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사랑, 기쁨, 화평 이 세 가지 특성은 내적인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맺고자 하시는 열매라 할 수 있지요.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이 세 가지는 사람을 향한 것으로 인간관계에 있어 드러나는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온유, 절제는 하나님을 향한 것들로 성령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우리는 이제껏 네 번에 걸친 메시지를 통해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셔서 황금길을 걸으며 보석으로 된 대저택에서 살게 해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이 죄인을 휴거시켜 죄도 눈물도 질병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 죄인으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아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여 아들의 형상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이 숭고한 여정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잘 빚어져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시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도 계명도 규례도 필요없게 되며 더 이상 설교나 성경공부나 권면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 몸으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이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시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며,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것을 나도 보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듣고자 하시는 것을 나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율법이나 계명도 필요 없게 됩니다. 그 누구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통제와 성령의 열매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난 후 마음을 성령께 내맡기게 될 때 우리의 육신은 육신적 생각을 동원하여 즉시 전략을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어서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기로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우리 옛아담의 성품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그냥 평범하게 그럭저럭 살려고 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합당한 열매를 맺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보겠다고 마음먹는 바로 그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 말입니다. 육신은 즉시 전략을 바꾸어 성령의 열매를 그럴싸하게 위조해 내기 시작합니다. 육신은 마치 자기가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 혹은 그 누구로부터도 지시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자기가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도 계명도 규율도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너무도 영적이기 때문에 교회에 갈 필요도 없고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고 다른 형제들과 교제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너무 영적이므로 그런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이들은 “…이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는 말씀이나 혹은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와 같은 구절들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킵니다. 만약 이들의 행동이 이 두 구절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라고 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실은 그것이 아니라서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 인도받는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이나 규례가 필요없는데 이는 그가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어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러한 것들 없이도 그 사람을 완전히 통제하셔서 의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성령의 통제하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자유란 죄를 짓는 자유(liberty to sin)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 sin)입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통치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통치가 없는 상황에서도 통치를 받고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말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분과 제가 온전히 성령님의 통제를 받아 율법, 계명, 규례, 다스림, 지시 없이도 성령의 열매를 잘 맺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육신을 동원해 그런 수준에 다다른 것처럼 착각해서 모든 규례, 율법, 다스림과 통제를 다 무시해 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제멋대로 구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없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감정과 나의 모든 행동이 완전히 성령님의 통제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도 규례도 율법도 다스림도 필요 없다. 나는 자유롭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우리로 그러한 완전한 자유에 이르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단 한번의 헌신 기도나 결단으로 단번에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를 도우사 이 놀라운 사실들을 올바로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로 주의 뜻을 바로 깨닫게 하셔서 그 뜻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혹시 오늘 이 시간에 이 메시지를 듣고 계신 분들 중 아직 거듭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차분한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들으시면서 받으실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초신자들이 계신다면 마찬가지 자세로 좀 어렵더라도 이해되는 부분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단 몇 %만이라도 이해한다면 큰 유익이 되실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성경에서 율법이나 명령이나 규례의 목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세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디모데전서 1장 5절부터입니다. “이제 명령의 목적(end)은...” 이 목적지 즉 종착점에 다다르면 명령(계명)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 말씀에 따르면 제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들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제게 그러한 명령이 필요한 것은 제게 그러한 명령이 없으면 그런 못된 짓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하지 말라”, “~하지 말라”와 같은 율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수준에까지 도달할 때까지는, 그 목적(end)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나에겐 명령들과 율법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에서 벗어나 헛된 말다툼에 빠져” 말씀에 보니 어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빗나간다고 했군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내던졌다든가, 하나님을 버렸다든가 뭐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슬쩍 사랑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벌써 문제가 발생하는군요. 7절에서 10절을 보십시오.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줄 우리가 아노라. 9 이것을 알라. 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무시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10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에 역행하는 것 때문이니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여기 나와 있는 죄들의 목록 중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심한 죄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9절을 보니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신데 그렇다면 그분과 나를 비교해 볼 때 저는 결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이 예수님처럼 100% 다 옳지 못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어느 정도의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9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지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율법대학을 졸업 못하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율법 또는 규례라는 제약이 필요한 것입니다. 9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죄인과 거룩치 아니한 자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속된 자라는 말은 어떠세요? 당신은 항상 거룩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삶만을 살아가고 계신가요? 항상 그렇지 못하다면 어떠한 제한이 필요합니다. 8절에 보니 율법은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처럼 항상 거룩하고,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즉, 혼자 힘으로는 그런 삶을 항상 지속할 힘(능력)이 없는 자들을 그러한 삶 안에 거하도록 울타리를 치는 역할, 그것이 바로 율법의 역할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 아마 “나는 아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어머니를 죽이는 자” 이것도 아니라 하시겠지요. “사람을 죽이는 자” 이것도... “음행을 일삼는 자” 이것도... 글쎄 거의 아닌데....... “남자와 더럽히는 자” 이것도 아니고, “사람을 납치하는 자” 이것도 아닌데... “거짓말하는 자” 그런데, 이것은 100% 자신 없으시겠죠?
“위증하는 자” 이것은 100%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나 여러분에게 다 해당되겠군요. 더 나아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를 거스르는 것” 이 말을 듣고 나면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치 못하니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율법의 제한 혹은 제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교리는 내게 맡기신 복음 곧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에 따른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시켜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디도서 2장 11절, 12절에 나와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딛2:11)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복음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한마디로 이 말씀대로 아직 못살고 있다면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율법이 그 목적지(end)를 향해 가는데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가 보십시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든가 율법하에 놓여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바른 용도를 정확히 알고 이를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 다음 12절과 13절을 보세요.
12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13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죄가 명령을 통해 넘치도록 죄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내 죄로 인해 내가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으로 가야 할 터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심판 받아 지옥에 가셨습니다. 죄값을 다 치르신 주님, 부활하신 그 주님을 믿을 때 그분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은 직후의 모습은 구원받기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육신적이고, 여전히 죄성이 있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데 다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셨다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죽으면 지옥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 그래야 되는지는 깊이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점점 깨달아 갑니다. 제가 행했던 많은 것들 가운데 제 생각에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죄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죄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니… 점점 놀라운 이야기들이 등장하는군요.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도 율법은 선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쁜 인간으로 선한 율법을 읽게 하사 자신이 얼마나 나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구원을 받아 칭의를 얻었으나 아직 실제로 의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영적 어린 아이들) 의로움에 대해 읽고 듣게 되면, 이 사람은 과거 구원받기 전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우리가 얼마나 “깊숙한” 죄인인가를 정확하게 직시하여 다시는 우리를 쳐다보거나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도록 하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실 때 그 어떤 인간도 그것을 지켜 내리라고 기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으로 회개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의 선생이랍시며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혹은 “칭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7절은 이들을 두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겁니다. 안식교인들 같은 사람 말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면서 실은 율법에 나와 있는 것들을 다 지키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1장과 로마서 7장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신시키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 즉 구원받은 성도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제 나는 헌신하겠다. 나는 성령님의 통제를 받아 하나님을 위해서 살리라.” 이렇게 결단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동일한 일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교회에 착실하게 출석하고, 하나님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해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서기는커녕 더 부족한 모습만을 보게 되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도대체 왜 주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두실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우리는 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의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될 수도 없는 본질적으로 죄인이란 사실과 우리의 노력으로는 이 진리를 결코 뒤집어 엎을 수 없음을 처절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존재 목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을 통해 율법의 목적을 확인해 보십시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구원받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깨끗한 삶을 살 거야. 담배도 끊고, 여자들 쫓아다니는 일도 그만두고, 욕설도 중단하고 정말 깨끗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이 오래 갈 리가 없지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셀 수도 없이 많이 반복하고 나서야 자기는 정말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소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서야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이 경우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찌 보면 율법이 이 사람을 학교에 보낸 셈입니다. “둘 더하기 둘은 얼마지요?” “셋입니다.” “틀렸습니다. 다시 둘 더하기 둘은요?” “다섯입니다.” “또 틀렸군요.” 수없이 반복해도 계산을 못하게 되면 이렇게 묻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마찬가지로 율법은 지키려고 수없이 노력해 본 끝에 결국 “다른 길은 없나요?”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성령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확신시키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문으로 알 수 있듯이 율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확신시켜 주었으므로 그는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와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 디모데전서 1장, 마태복음 22장, 그리고 로마서 13장과 요한복음 14장을 살펴보면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율법이 여전히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의 의를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결심이 실천에 잘 옮겨지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두려워서 때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때로는 다른 바쁜 일로 인해서... 결국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맙니다. 물론 2, 3일 혹은 3, 4일은 순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곧 중단하고 말지요. 우리 모두의 경험이 그렇지 않습니까? 또는 육신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 즉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과 일치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고 결단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텔레비전 코드까지 뽑아버릴 정도로 단호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못 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의 메시지(성령의 열매 1·2·3·4·5)를 듣고(읽고) 나서, “아, 이거구나!” 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육신적인 것을 내려놓고, 단지 하늘나라에 가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온전히 헌신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나를 완전히 통제하시도록 내맡기겠다.”라고 이같이 결단하고 성령께서 통제하시는 그런 삶을 살기로 노력하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반드시 실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선행과 노력을 통해 구원받아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을 때 느끼는 비참한 느낌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율법(명령, 계명)의 목적은 명령에 복종할 힘을 주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 와서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그것을 주님께 완전히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께로 나왔듯이, 주님의 통제하심을 얻기 위해서도 스스로의 무기력과 완전한 실패를 주께로 가지고 나아와 그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침례교 정통교리가 아닌 것 같군요…”라고 말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성경적 교리면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이것이 우리의 구원에 관한 언급입니다)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고 “풍성히”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죄인으로서 예수님께 나아와 죄에서 벗어나 은혜를 얻어 구원받는 것을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게 되는 비결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해 산고를 겪노라.”(갈 4:19) 이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명령들로부터 자유롭게 될까요? 그것은 율법과 명령이 그 임무를 다하여 목적이 성취되었을 때, 즉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다 주님께 완전히 의뢰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통제하실 때 바로 그때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십시오. 이때가 언제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당신이 저를 당신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면 당신에게는 그때가 이미 다다른 것입니다. 당신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당신의 주변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든 그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해 주신 그대로 대해 준다면 당신은 이미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율법이나 명령이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는 여전히 율법과 명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에서 40절을 보십시오.
35 그때에 그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은즉 38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39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40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
여러분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내용들을 다 아시나요? 613가지 명령과 규례들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온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해 사랑한다면 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로마서에서부터 유다서까지의 내용을 읽어 보셨지요.(이중 어쩌면 빌레몬서 하나는 주님의 다루심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형제 자매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그 말씀 속의 모든 명령들을 다 지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아내와 간통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돈이라도 훔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결코 안 할 겁니다. 나는 내게 해가 되는 일을 내 자신에게 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사랑”이 그 대답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저를 포함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마음을 굴복시키지 않은 채로 그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마음을 굴복시킨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큰 명령은 자연스럽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명령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노력을 배가해도 기도를 두 배로 늘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해답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해 쓴 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 것 같으니 그렇다면 로마서로 가 보십시다. 저 자신도 세대주의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눈다는 명분하에 자신들이 싫어하는 말씀들로부터 “피신”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저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생애에 있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신 그 방식대로 우리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아기”에 불과합니다(고전 3장).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어떤 것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9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10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8절 끝부분을 보면 사랑하는 자는 그 사실을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이미 율법을 성취했다고 말씀합니다. 9절부터 계속 검토해 보세요. 모든 계명들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간단하게 이해가 된다고 말씀합니다.A) 사랑이란 말 한 마디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하는지를 간단히 표현할 수 있지요. “저는 ‘사랑’이 뭔지를 잘 모릅니다. 자라 온 가정 환경 때문에… 제 가정에는 사랑이란 없었어요.” 이런 식으로 변명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육신적인 사람이 틀림 없습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며 자신의 사랑 없음을 인정 안 하려는 사람, 그 사람의 모습은 육신적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 주는 것이 좋은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남편이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방식으로 아내를 대하고, 모든 아내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편을 대한다면 이 세상에는 오로지 행복한 부부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구성원(지체들) 모두가 자신이 대접받기를 바라는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교회 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으로 가 보십시다. 2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이 구절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그것이 나와 있군요. 말씀을 지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반역적인 육신을 강제로 복종시켜 예수님의 말씀과 명령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식은 우리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셔서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다스리시어 그분의 말씀을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지키도록 만드십니다. 자신을 단련시켜 계명들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지를 자랑하고 다니는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주님은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을 사랑하기에 당연히 말씀을 지키면서도 전혀 자랑치 않고, 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비판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주님과의 다른 점입니다.
만약 당신이 육신의 일로써 계명들을 지킨다면 그 결과는 육신적으로 당신은 교만해져 고개를 쳐들고 당신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합니다. 육신이 계명에 순종하면 그 결과는 육신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큰 일들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그렇지 못한 교회들보다 쉽게 분열되고 쪼개지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육신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반면 당신이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면 당연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일하게 되며 그 결과로 의와 화평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14장을 잠시 놔두고 우선 데살로니가전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만약 이 메시지를 읽는(듣는) 이 순간, 당신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100%의 모습이 아니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더 배워야 하고, 책망도 받아야 하고, 고침도 받아야 하고, 교회 생활의 여러 규범들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육신은 제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껏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계명, 명령, 규범, 규례 등)의 목적은 당신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영으로 인도해서 더 이상 이런 율법들이나 제한들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성숙하게 되도록 하여 모든 율법이 저절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에서 13절입니다.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에게 행하는 것같이 너희가 서로에게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고 넘치도록 베풀게 하사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너희 마음을 거룩함에 흠잡을 것이 없게 굳건히 세우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되 넘치도록 베풀라는 말씀 말입니다. 제 주위에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정말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들은 위 말씀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 속에 포함이 안 될까요? 당연히 됩니다. 이점에 있어 저는 여전히 육신적인 셈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까다로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통제하에 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지금 읽은 말씀(살전 3:12,13)처럼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라.”
13절을 계속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굳건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기도 내용입니다. 잘 보십시오. 저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곧 주님께서는 저를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시점(구원, 휴거) 사이에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마음을 흠 없이 만들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 같은 자의 마음이 흠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신약성경도 충분히 읽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도 완전히 모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내 이웃을 제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저는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생애에서 정하신 목적입니다.
요한일서 2장으로 가서 더 많은 계시를 받아 보겠습니다. 여기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 그룹의 사람들은 서로 영적 성숙에 있어 그 차이가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
여기 보면 어린 자녀가 등장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어립니다. 문제는 35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아직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았음을 알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가 어떻다는 둥,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는 둥, 형제들이 육신적이라는 둥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도무지 자라고 있지를 않습니다. 이번엔 1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음이요,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음이요,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라.
중간 부분을 보니 젊은이들이 등장하는데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사악한 자를 이겼다는 말씀이지요. 놀랍습니다. 이어 14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며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여기에도 젊은이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상당히 잘 자라났습니다.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놀랍지요. 이들 청년들은 그야말로 원기왕성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암송하고, 마귀를 대적하고, 거리 설교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술과 담배, 마약, 간음, 음행을 정죄하며 진리를 위해 투쟁합니다. 정말 뜨거운 열정은 본받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만 있는 교회보다 이런 교회가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아버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다고 합니다. 14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성숙”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 즉 영원하신 아버지와 교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자녀들처럼 단순히 아버지를 아는 정도(13절 끝부분)가 아니라 그분께서 어떤 분이심을 아는 분들이지요.A)
여기 계신 어머님들과 아버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훈육과 책망과 훈련과 바로잡음을 통해 어릴 때는 하도록 “시키던” 일을 30세가 되서는 시키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영적 어린 자녀들에게 성경과 설교와 율법과 교제와 계명들과 규범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행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모든 것을 평생 동안 “시켜서” 하도록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점점 성장해서 더 이상 “시킬” 필요가 없이, 즉 성경구절이나 설교나, 책망 없이도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5살, 7살 혹은 14살, 20살짜리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50세가 되고 60세가 된다면 이들에게는 그 어떤 제한을 가할 필요가 없지요. 알아서 모든 일을 해낼 테니까요.
물론 우리는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도 필요 없고, 교회에 갈 필요도 없고, 설교도 필요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할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언젠가 우리도 성숙해서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주님의 일을 하되 두려워서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게 될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간절히 호소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우리를 성령에 의해 통제받고 있는 성숙한 사람으로 간주하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숙은 헌신을 하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한두 번 했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순간부터 이 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더 이상 율법과 계명이나 명령들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한다면 그때가 바로 영적 성숙의 시점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행동할지도 모릅니다. 즉 “오, 나는 성령의 열매 메시지를 들었다. 나는 이제 이 메시지를 붙들고 매일 30분씩 기도하고, 성경도 두 장씩 더 읽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즉시 실패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고 이 모든 것들을 기뻐하며 즐기십시오. 그저 주님께 마음을 드리시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제자의 표식”은 복음 전파나 설교가 아니고, 세상적인 일들을 내버리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더 잘 출석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나와 있는 “사랑”입니다. 33절부터 보면 “어린 자녀들아”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이 어린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이요 사역을 돕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어린 자녀들아” 하셨습니다. 이들이 어째서 어린 자녀일까요? 그 대답은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누가 더 오래 살게 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기(baby) 취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요, 주님? 저보다 더 오래 살아남게 되나요?” 이런 식의 대화, 어린 아이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그러면 34절을 보십시오.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 그대로 제자들의 표식은 사랑입니다. 제가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면 오, 할렐루야!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시기에 “명령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잡음”이 필요할 때가 언제인 줄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해 모든 규범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의 마지막 목적지(the end)는 다름 아닌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서 명령하지 아니하시더라도 주님께 순종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두 살짜리에게는 “시켜야만” 할 그런 행실들을 30세가 되어서는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듯이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을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율법(계명, 명령, 규례, 규범, 규칙)이란 도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오는 그때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계속 역사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우리를 향하신바 하나님의 그 숭고하고 고귀한 목적을 잊지 말고 그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신실하게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25:01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사랑과 기쁨
우리는 지난 세 번에 걸쳐 성령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의 차이를 알아보았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시점부터 하늘나라로 가는 그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행히도 구원 받아서 하늘나라로 가게 될 사람 중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 별 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거듭난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시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인간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이므로 우리 인간이 결코 만들어 내거나 생산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5절을 읽어 보십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이와 같은 원칙을 이해하는 열쇠들 중 하나가 바로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설교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막거나 금지시킬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이 법을 내가 어겼다고 나를 체포하거나 고문할 수는 있어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법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내가 사람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전도지를 나누어 줄 때 나를 체포해서 재판하여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겠지만 그 감옥 안에서 내가 누리는 평안을 법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은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 시행하거나 규제하거나 방해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의 열매는 인간적인 수단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에 의해 평안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온유하지 못한 자에게 온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명령을 하시는 대신 우리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겨 명령이나 규범이나 규칙이나 규례가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빚어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계명이나 율법에 있어 가장 엄격한 사람들이야말로 함께 지내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는 계명을 엄격히 준수한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우리 모두가 제멋대로 행동해도 좋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약 서신서에 나와 있는 모든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통제에 온전히 내어맡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친구 하나 없는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시편 7편 11절과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좀 더 보완 설명을 하겠습니다. 시편 7편 1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판단하시며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향하여 날마다 분노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날마다 화를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 17절을 보십시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대부분이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유행가를 듣고, 세상의 잡지들을 보면서 이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사랑은 느낌도 감정도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다름 아닌 분노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적 반응은 다름아닌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제하시는 분이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간직하고 계시지만 그 분노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을 가지고 분노를 가라앉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라고 하는 느낌 혹은 감정을 그대로 발산하시거나 나타내시는 대신 그 감정을 다스리실 줄 아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따스한 감정을 느끼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악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결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늘 낭만적 느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아내의 행복을 위해 남편의 이익을 내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매우 좋게 느꼈으므로” 혹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고 행복하셨으므로” 성경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기쁨(joy)은 느낌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기쁨은 펄쩍펄쩍 뛰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peace)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묵상하거나 기도문을 암송할 때 찾아오는 차분한 느낌이 아닙니다. 기쁨은 가장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내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보시면 사랑하는 형제가 혹은 가족이 죽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슬퍼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머니나 딸이 혹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절대로 슬퍼하지 말라는 것은 불합리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주 안에서 잠든 이 사람도 다시 살아날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데리고 오실 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내 슬픈 감정보다 더 큰 것, 즉 평안으로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화평(평화, 평강, 평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면 내 마음이 평강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내 인생의 모든 시련에 대한 나의 감정적 반응을 뛰어넘는 마음의 평안을 주셔서 시련과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고쳐 쓰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니 하나님께서 모래 위에 지어진 어리석은 자의 집에 폭풍을 보내셨으나 바위 위에 지어진 지혜로운 자의 집에는 폭풍을 보내지 않으셨더라.”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기대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번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유지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평안을 잃었어요. 어떻게든 이 일이 해결되서 다시 평안을 되찾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성령께서 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어려운 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평안을 주시고자 하시니까요. 폭풍이 당신의 집을 내리치면 아무리 당신의 집이 바위 위에 지어졌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셔야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성령의 열매로 기록된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보다 더 강력하고 위대한 그 무엇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나의 느낌보다 훨씬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오늘 좀 어떠세요?”라고 질문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즉시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답변합니다. 몸이 안 좋으면 그날은 안 좋은 날이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도 별로 좋은 날은 못 됩니다. 기도한 것이 아직 응답받지 못한 채 있다면 별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을 하거나 짜증이 나거나 실망을 하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느끼는 그대로 답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환란을 기뻐하라(환란 중에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연약한 것을 자랑하라(연약한 가운데서도 자랑스럽게 느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늘 있는 대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누군가가 “오늘 어떠세요?”라고 물을 때 “그저 그래요.”라고 대답합니다. 시원찮은 대답에 대화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왜요? 구원을 잃어 버리셨나요?”
“아니요, 저는 구원 받았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혹시 성령께서 떠나셨나요?”
“아니요, 성령께서는 떠나시지 않아요.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버리시기라도 했나요?”
“그럴 리가요. 절대로 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맥이 없어 보여요?”
“글쎄요. 그냥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이것저것 어려워서요.”
“그래도,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있으시잖아요?”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도대체 어째서 이런 대화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축복들과 성령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고결한 성품을 모두 억눌러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원하시며 -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시도록 순종할 때 -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느낌들”과 “감정들”을 뛰어넘어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의 길에서 때론 기뻐하다가도 때론 우울하고 풀이 죽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영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느낌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23절까지 보겠습니다.
16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17 그것들은 다가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報償)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이 머리로부터 온 몸이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 20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 21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23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자신의 육신을 강제적으로 통제해서 영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들이 이를 달성코자 온갖 기준, 규례, 규칙, 규범 등을 만들어 지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숭배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안 먹고 언제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하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정해 놓고 “의지”를 사용해서 지키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시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들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규범이나 규례는 종교 조직들이 당신의 육체를 통제하여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을 보십시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3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느니라. 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있습니다. 나의 느낌(feeling)이나 감정(emotion)이 아닌 나의 애착(affection)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에 완전히 놓여지게 됩니다. 나는 죽었고 내게 있는 유일한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therefore'(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러니까 1절부터 4절에 근거해서 5절대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therefore)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숭배니라.”
9절을 보면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거짓말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 우리는 육신을 길들여서 하나님께 경배토록 애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절제하여 바른 행동을 하면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고, 만약 자기 통제에 실패하여 율법의 어떤 조항을 어기면 그때는 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며 뒤로 발뺌을 합니다. 이런 위선을 두고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옳은 행동을 하든 잘못된 행동을 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육신의 활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애착(affection)과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되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새 “음행”에 전혀 생각을 하지 않게 되며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런 생각이 틈탈 여지가 없다 이 말씀입니다.
분노와 진노와 악한 마음이 왜 느닷없이 튀어 나오느냐구요? 그것은 내가 내 육체를 자꾸 억눌러 꼭꼭 누르다 보니 그 압력이 가중되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스며드는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활동을 죽음에 넘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번 성령의 열매 시리즈의 메시지를 듣고 나서 여러분들이 조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육신을 통제하여 그리스도인처럼 살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내맡겨 그분께서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하지 않는다면 메시지를 듣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육은 육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육신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어(회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거룩한 산 희생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보아야 한 손밖에 못합니다. 한 손은 여전히 더러운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야고보서 1장 23절, 24절입니다.
23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으니라. 24 그는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길로 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 말씀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만약 미국 사람들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옷을 더 입고 다니려고 할 텐데(육체를 가리기 위해),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성경 말씀대로 곧바로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거울을 통해 보는 우리 모습은 우리의 자아, 즉 육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예배당에서 자신을 드높이는 짓을 하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육신,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육신이 아닌 영적 영역을 다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거울을 통해 우리는 육신에 불과하고 모든 육체는 풀과 같아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며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것, 즉 성령의 열매이며 이 열매만이 우리를 참으로 만족하게 만들고 더 풍성한 삶으로 이끌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빌립보서 1장과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사랑은 함께 증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를 공부할 때 “열매 맺지 못하는 지식”에 대해 말씀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사랑이 함께 증가하지 않은 채 지식만 증가할 경우, 모든 성경공부와 지식의 획득은 당신의 영적 생활을 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당신은 더 비판적이고 더 교만해져서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자기 의에 가득 찬 고집쟁이 바리새인이 되어 버릴 것이며 결국 죄를 짓는 능력만 키우는 셈이 됩니다. 당신은 성경에서 용서, 은혜, 구원들에 관한 성경구절을 척척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동시에 당신이 구원받기 전보다 10배나 더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구절들도 잘 찾아낼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사랑의 증가가 동반되지 않는 지식의 증가는 당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곧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더욱더 풍성하여” 이 기도 내용은 지식이 증가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에 상응하는 사랑이 증가해서 그 지식을 성령님의 통제하에 둘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도 같은 말씀을 보게 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영적 성장을 위한 열매는 단순히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단순히 진리를 믿고 진리를 전파하는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저에게 해로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믿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보다는 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저나 여러분이나 그러니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성장이 필요한데 이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 사랑으로 증거되는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만약 듣는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이 없다면 육신적 책망에 대한 육신적 반응만이 나올 뿐입니다. 진리를 전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에게 진리를 말해 주려고 애를 썼는데 그는 화를 냈습니다. 그 사람 육신적이더라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말하던 순간 그 사람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었으며 그래서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이 그에게 말하려 했던 유일한 순간이 그를 책망한 경우인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함께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난생 처음으로 말을 걸어본 그 순간이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었을 때여서 당신이 그것을 지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이 당신의 말을 잘 받아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지적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 성령께서 담당하셔야 할 몫이지요.
이에 대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는 오늘 어떤 분하고 전화 통화를 했었는데 그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우리 교회가 거리설교, 심방, 전도지 나누어주기 뿐 아니라 그 대상자들에게 정말 관심을 갖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가 모여서 성경공부나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것 외에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보이기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일하시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이지요. 우리는 수년 동안 이를 위해 애써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식이 늘어가는 만큼 사랑도 늘어나기를 요구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정직합니다. 마땅히 정직해야지요. 그는 거짓말하는 것이 잘못인 줄 압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마귀가 떠나가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거짓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끼리는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고 책망도 주고받고 함께 일도 할 수 있습니다.(물론 육신적일 땐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합니다. 어떤 분은 “그거야 나는 남잔데 그게 어디 남자들이 할 말인가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나는 너희를 사랑했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남자가 아니셨단 말입니까? 성경은 분명 남자이신 예수님(the man Jesus)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만일 당신과 함께 복음도 전할 수 있고 함께 기도도 하고 교제도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당신 얼굴을 마주 보고 눈동자를 마주치며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령님보다 제 자아가 저 자신을 더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육신적 상태에서는 제가 당신을 쳐다보며 “형제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무 어색하고 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이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째서 예수님께서 하신 그것을 하는 것이 편치 못하단 말입니까?
제가 구원받은 지 얼마 후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함께 교회에 왔었는데 그때 우리 청년들은 예배당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 성경공부 팀에 와서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소책자라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제목의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추궁하며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는 그가 소위 사랑 타령만 하는 은사주의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결국 그 사람은 그곳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음날 그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 사람뿐 아니라 젊은 혈기에(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판단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사과해야 할 사람의 명단이 꽤 되는 것 같군요. 저는 그 후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그 소책자에 실려 있는 내용, 즉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지요. 제가 어떻게 배웠는지 아십니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친구 두 사람이 저를 배반했습니다. 제 사역은 망가져 버렸으며 가르칠 주일학교 학생도 없고 설교할 교회도 없이 2년간 예배당에 우두커니 서 있기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의 두뇌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을 제가 젊었을 때 배울 수도 있었는데 제가 겸손치 못하고 지식만 배우고 싶어 하는 바람에 큰 대가를 치루고 나서야 뒤늦게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성경을 배우고 싶지 사랑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고 하는데 잘 보십시오. 사랑은 성경 안에 있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더욱더 풍성하여”(빌 1:9) 지식과 사랑,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균형을 잃게 됩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실례를 하나 들어 들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에서 20절까지 보십시다.
1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더라. 1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자기들의 그물들을 버려 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여기 보면 베드로는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들 중 이런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四更)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가시니” 28절입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거든 물 위로 주께 오라고 내게 명령하소서, 하니” 여기에 보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가다가 물에 빠졌잖아요.”라고 하지만 어떻든 물 위를 걸어간 건 사실 아닙니까? 여러분과 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고 엄두도 못낸 일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16장 16절로 가 보십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이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은 다름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계시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런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시로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8절도 보십시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하매
여기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따른 지 3년 반이 지난 후 여전히 믿음이 충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신실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전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완전히 헌신된 모습이 역역(役役)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7절에서 29절까지 보십시오.
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일어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하시니 29 베드로가 그분께 이르되, 모두가 실족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아니하리이다, 하매
말씀을 보니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다 알고 계신 내용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주님 저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저는 놀라운 신앙 고백도 했지요. 그러니 저는 이번에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육신의 갈망과 의지와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얼마 후 베드로는 비통하게 울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주님을 따르는 3년 반 동안 자신이 뭔가 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늘 두각을 나타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보니 정작 제일 중요한 순간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이 판명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왜 울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베드로 생각에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 예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기가 형편없는 인간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절망한 그는 결국 옛날 살던 대로 고기잡이를 하러 가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으로 가 보십시다. 이곳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있는 터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한 그곳에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들이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제자들에게 이를 말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이 말씀 속에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칼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꾸중을 듣고 난 후 주님이 잡혀간 곳으로 가서 불을 쬐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고뇌만이 베드로를 사로잡고 있었지요. 그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감정(두려움)과 죽더라도 주님을 따라야겠다는 자기 의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불을 피워 놓고 베드로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를 전 세계로 보내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내 교회를 너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겠다고도 했다. 너는 교회시대 내내 유명한 인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네 인생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 사랑을 고백했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을 했을 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도 주님은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노라고 간증했을 때도 주님은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가 주님의 눈을 쳐다보며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이제 네가 나누어 줄 무엇인가를 지녔구나. 내가 이제야 너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두 번째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 어린양뿐 아니라 양들도 맡기신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주일학교 교사뿐 아니라 설교자로도 쓰임받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17절을 보니 주님께서 세 번째로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근심하며 답변합니다. 근심(grieved)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서 말했던 바로 감정이요 느낌 아닙니까? 베드로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의심 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웠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시다니... 근심이 될 수밖에요.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부정적 느낌과 감정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마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의심하시든, 저의 순전함을 못 믿으시든,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부정적 느낌과 감정을 뛰어 넘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은 갈라디아서 2장에도 나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정면에 두고 책망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 책망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후일 바울을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베드로후서 3:15)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베드로는 당시 제일 유명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할례자들의 사도였습니다. 공개적으로 책망 받을 때 베드로라고 마음이 안 상했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형제들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비통하게 울던 그날 밤부터 무엇인가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와 자신감으로 가득 찬 베드로, 뜨겁게 헌신하는 베드로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통제하고 있는 베드로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생산해 내시면 그 사랑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훨씬 뛰어넘어 우리의 육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신의 행위를 죽음에 넘기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곳에 우리의 애착(affection)을 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무엇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한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서야 여러분은 그분의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아멘.
2009-05-01 18:23:56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성경적인 자녀 양육/하나님의 징계
성령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드리는 여섯 번째 메시지는 잠언 29장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 어린 자녀라고 불리는 어린 시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젖을 먹는 갓난아이 시절로도(고전 3:1) 묘사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계로 청년 시절(young man)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강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용사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에 있어 요한일서에 나오는 세 번째 단계는 아버지(father)로서 이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을 단지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창조주 즉 처음부터 계신 그분으로 알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이후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 바로 이 세 단계인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어린 자녀(little children), 청년(young man), 그리고 아버지(father)라는 3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치기 전에 아기일 때가(baby) 있는데 이는 거듭난 직후부터 일주일, 혹은 1개월 혹은 1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죄의 성품을 발휘하기 전까지의 기간이 있듯이 영적 출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직후 갓난아기일 때가 있는데 이 시기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때는 주님께서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하면 아마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몸을 던지려고도 할 겁니다. 이 시기는 구원받은 직후의 감격이 너무도 크고 강렬해서 설교 하나하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속을 파고들어 즉시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시절입니다.
그러다가 이 첫사랑이 점차 식기 시작하더니 빛은 사라져 가고 하나님께 반항을 일삼기까지 하는 모습이 됩니다. 이것이 영적 어린 자녀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계속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청년의 단계로 이끄시며 또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아버지의 단계에 이르도록 하시고 결국 “영적 성장”을 완성하시는 것이지요. 이 최종 목적지(end)에 도달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갓난아이에 불과하거나 어린 자녀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을 명령, 율법, 설교, 바로잡음, 징계, 훈계 등을 통해 다루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의”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어떤 명령이나 요구나 책망 없이 “옳은 일”이 옳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를 행하게 되는 그 수준입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 최종 목적이 두세 살 때에는 억지로, “엄마나 아빠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했던 그것을 30세가 되면 알아서 잘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양육하셔서 그 단계에 도달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이가 마땅히 갈 길로 아이를 훈련시켜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러분 중에는 한 번도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늙게 될” 날이 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인간이 일곱에서 열일곱, 그리고 스물일곱이 되어 가듯이 우리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성장과정을 우리의 영적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듯이 주님께서도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같은 것들을 요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요구를 고마워하거나 즐거워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그러한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저는 오늘 이 메시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를 양육시켜 아버지가 되도록 만드는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어린 자녀, 즉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아버지,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워내시는 것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를 신약성경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원칙하에 이루어집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양육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약점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 때문에 혹은 가족 때문에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식의 변명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는 어머니가 운전을 안 배우셨기 때문에 나는 운전할 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운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제 조상들 가운데 한 사람도 선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선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변명은 내려놓읍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가 원한다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당신 스스로는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자, 기도하십시다. “하늘 아버지시여, 오늘 우리를 도우시사 이 진리를 밝히시고 이것을 잘 깨닫게 해 주셔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유익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잠언 29장입니다. 세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9장 15절은 “회초리와 꾸짖음은 지혜를 주거니와 제멋대로 버려둔 자식은 자기 어머니에게 수치를 가져오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아이는 지혜없이 태어나는 것은 물론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성장해서 지혜를 갖춘 어른이 되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면 부모 측에서부터 먼저 무엇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꾸짖음이 지혜를 준다고 말씀하지도 않으며 회초리가 지혜를 준다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회초리와 꾸짖음이 합력해서 원하는 결과인 지혜를 가져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린 아이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어린 아이는 죄의 성품을 지니고 있고 반항심이 가득하며 계속해서 반항적으로 행동하여 결국 지혜가 그 반항심을 몰아내기까지는 그런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심리학자보다도 어린 아이의 심리상태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책망”만으로는 어린 “반항아”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얘야. 우리 앉아서 이야기 좀 할까?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빠가 말해 줄게. 자, 이제 알아듣겠니?” 이것으로만 그치면 이 아이는 곧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맙니다. 반면 반항아를 회초리로만 다스리게 되면 아이는 거칠고 증오심으로 가득 차 마음이 완악해져 반항심만 꽉 채운 아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회초리와 책망”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 아이에게 주어질 때는 바른 길을 제시받지만 잘못된 길을 택할 경우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반항아가 가족의 명예에 먹칠을 하거나 수치를 안겨주는 존재 그 이상의 “누군가”가 될 만큼 성장하려면 이 두 가지가 균형이 잘 이루어야만 합니다.
17절을 보기 전에 잠시 미국 역사를 한번 훑어보십시다. 1960년 미국은 히피시대였습니다. 가난하고, 더럽고, 부도덕하고, 냄새나는 젊은이들이 이 시대를 풍미했지요. 1970년대는 디스코, 프리섹스와 마약으로 얼룩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60년대의 히피와 70년대의 마약중독자들을 정죄하기 전에 우리는 1950년대의 상황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1950년대 소위 교육학 박사님들이 등장해서 당시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채벌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었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러니까 1960년대의 히피와 70년대의 마약중독자들은 50년대에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어들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뿐입니까? 지금도 우리는 그때 뿌려놓은 것을 거두고 있습니다. 신학 혹은 기독교 분야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1960년 NASV(New American Standard Version)가 나오고 1962년 Good News for Modern Man, 그러더니 1970년 Living Bible, 그리고 드디어 1971년 NIV(New International Version)가 나왔는데 이들 엉터리 “성서”들이 당시의 사회 풍토(히피, 마약)와 무관치 않다는 것입니다. 히피, 마약, 엉터리 “성서들”은 결코 악을 멈추게 하거나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식” 킹제임스성경과 “구식” 교육이 필요합니다.
잠언 29장 17절을 보시면 “네 아들을 바로잡으라. 그리하면 그가 네게 안식을 주고 참으로 네 혼에게 기쁨을 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수치대신 안식과 기쁨을 얻기 원한다면 막대기와 책망만으로는 부족하며 세 번째 요소 즉 바로잡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이 세상에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입니다. 자식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여러분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선택해서 이 땅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정과 행동에 의해 당신의 아이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이라면, 당연히 이 아이에게 올바른 인생길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자라다 보면 올바른 길을 알게 되겠지. 뭐, 아마 그럴 거야.” 이런 식의 무책임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성장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당신은 저절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나요? 아니면 부모님께서 가르쳐 주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부모들에게 “최선을 다해 자식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구!” 이런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은 당신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 말입니다.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 첫 번째로 막대기가 필요한데 이것은 “과거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책망은 “미래적” 측면입니다. 이미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다시는 그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꾸짖고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를 얻게 될 것인지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러한 책망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올바른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를 바로잡아 주는 일(Correct), 바로 그것이 부모된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앞으로 벌을 받지 않으려면 이렇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알아듣겠니? 이렇게만 하면 앞으로 야단을 맞을 일이 없을 거다.” 이것이 바로잡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말해 주고,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회초리, 책망, 바로잡음에 이어 네 번째 요소를 살펴보십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29장 21절을 봅시다.
자기 종을 아이 때부터 자상하게 키우는 자는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같이 되게 하리라.
말씀을 보면 “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제가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아닌 주님의 종들이지요. 문제는 주님을 섬기는 종이기는 하나 아직 “아기”(baby)에 불과한 이들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들 영적 아기들을 우리 주님 즉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되도록 성숙시키는 일입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회초리(막대기)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사용하시며 이 모든 과정을 자상하게(delicately) 이끌어 나가십니다. 자상하게란 말씀과 회초리가 어떻게 서로 양립할 수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실 수도 있습니다.
“자상하다”(delicately)는 말은 상처나 해를 입히지 않고 조심스럽게 사람을 대하거나 다루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화가 나도 회초리를 들어서는 안 되며, 성질을 못 참아 분풀이를 하려고 회초리를 들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상한 관심을 갖고 회초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상하게 아이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충분히 고려하여 세심한 관심을 갖고 사람을 다룰 때 우리는 바로 “자상하다”(delicately)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빗나간 행동을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아이를 회초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통해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상하게”라는 이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를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종아리를 걷어 올리게 하는 짓은 안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자상하게(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그 상황을 처리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속히 어린 아이의 단계에서 성숙한 어른의 단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번의 “바로잡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저는 이 일이 공개적으로보다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제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시거나 경고하시기보다는 하나님과 저 사이에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바로잡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내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부탁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하셔야 할 일을 하십니다. 사실 “제 잘못을 바로잡아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께 요청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얘야, 너는 참으로 못됐구나. 내가 너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이런 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 우리가 아이에게 그 의견을 물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회초리, 책망, 바로잡음… 물론 “자상하게”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잠언 29장 21절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자기 종을 아이 때부터 자상하게 키우는 자는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같이 되게 하리라.
주목할 말씀은 “마침내”와 “되게(become)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장기적인 과정이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13세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다가 30세가 되면서부터는 아예 의절하고마는 경우와 15세 아이에게는 “나쁜” 아빠처럼 보일지라도 25세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훌륭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장은 아이들과의 관계가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마침내”는 좋은 관계가 될 터이니 후자를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18절입니다.
소망이 있을 동안에 네 아들을 징계하되 그가 운다고 네 혼이 아끼지 말지니라.
징계란 상처를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잘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 바로 이 구절대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이 바로잡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결코 자식을 징계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기까지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징계를 멈춘다면 당신은 자신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아이에게 가망이 없다고 증언하는 셈입니다.
“그가 운다고 네 혼이 용서하지 말지니라.” 혹시 옛말에 “내가 너를 때릴 때 네가 상처받는 것보다 내가 더 상처를 받는단다.”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저는 그 말뜻을 모른 채 자랐습니다만 제 자식을 키우면서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자식에게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가 상처를 더 받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잘 가르쳐서 반항이 가져온 결과로부터 속히 벗어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식이 있으십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막대기로 징계하시려고 한다고 합시다. 이는 나를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징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두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운다고 해서 그분이 그만두실 분이 아닙니다. “오, 하나님! 그만 하세요. 저는 못 견딥니다. 싫어요. 제발 그만 때리세요.” 이렇게 울부짖더라도 그분은 멈추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분께 목표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그만두시면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아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육신은 그것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그 징계마저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울지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과정은 필수과목이야.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거다.”
잠언 13장 24절엔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의견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성경을 읽어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 들지 않고 대신 “아들아,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그대로가 괜찮은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과 같이 살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 아들에게 “가서 네 맘대로 네 인생을 망치거라. 성숙함에 이르는 것도 그만두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복된 사람이 되는 것도 그만두거라. 아빠 엄마는 상관없단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회초리를 내려놓고 자식들을 방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식을 망치는 부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청소년 범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자식들을 망쳐서 범죄로 내 몬 사람들이 자신들인 줄 모르는 모양입니다.
잠언 13장 24절에는 “그를 사랑하는 자는 어릴 때(betimes)에 그를 징계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때(betimes)라는 말에 유념하십시오. 영어의 “be”란 말은 '빈 곳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자식들을 징계하되 하루에 8번 혹은 80번씩 징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또는 12살까지만 징계하라든가, 당신보다 키가 커지면 중단하라든가, 요리할 줄 알 때까지만 징계하라든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징계는 자식의 행동이 징계가 필요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느 때든지 징계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녀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이 잠언 말씀에 따르면 당신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의 삶은 일시 중단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잠깐 기다리게 하고, 먼저 당신이 이 세상에 “데려온” 아들이나 딸의 미래부터 챙겨야 한단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당신의 인생에 있어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바로 그 일입니다. 잠언 23장 13절입니다.
아이를 바로잡는 것을 금하지 말라.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는 약간의 상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막대기로 머리를 때린다든가, 갈비뼈를 내리친다든가 하면 죽을 수 있으니까요. 이 말씀은 사람의 몸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적절하게 징계나 회초리를 “흡수”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회초리의 목적은 징계와 경고이지 상처를 내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
어떤 분은 어떻게 회초리가 아이를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냐고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원받은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았으니 회개하고, 구원받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하셔서 당신은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 안 듣고 잘못하면 벌 받을 것이라고 배웠고, 실제로 여러 번 벌을 받거나 회초리로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잘못을 했는데도 회초리로 때리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룬 적이 없으니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이 실감이 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에서 벌 받기 싫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잘 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심판과 형벌을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다 자식 손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말 안 들으면 때리지요. 왜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라는 것을 안 믿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부모들이 하나님께서 자식들을 때리라고 말하신 것을 지키지 않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신약성경으로 가 보십시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입니다.
또 어린 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어린 아이(child)가 성경 말씀을 알고 있고 그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시켜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구원받은 사람이 가야 할 목적지가 나와 있습니다.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는 것, 이것이 완성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갓 구원받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람, 즉 완성품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15절에서 17절까지 가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16절을 통과해야 하겠군요. 15절의 어린 아이는 17절에 가서 어른으로 성숙합니다. 문제는 16절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말씀은 15절과 17절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교리”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교리가 확립되어 있는데 만약 당신이 사탕을 훔쳤다면 당신은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때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책망”입니다. 성경이 “훔치지 말라”고 말씀했는데 당신은 이 말씀을 어겼으니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잡음”입니다. 책망에 이어 올바른 길이 제시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당신이 사탕을 먹고 싶으면 직장에 가서 일을 해 돈을 벌어 그것으로 사먹든가 아니면 친구에게 잘 보여 그 친구로부터 얻어먹든가, 어쨌든 사탕을 먹으려면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먹어야 합니다. 이 단계는 단지 잘못된 행실을 꾸짖고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단계입니다. 자, 그 다음 단계 즉 네 번째 단계는 “의로 훈육”하는 것입니다. 물론 직장일을 해서 돈을 벌어 사탕을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자, 이리와 봐라, 얘야. 아빠는 널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아빠가 야단을 치고 벌을 준 것이란다. 그렇지만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 봐. 맛있는 사탕을 먹을 수 있으니까. 부엌에 가면 쓰레기통이 있는데 그 통에 있는 쓰레기 봉지를 잘 묶어서 밖에 쓰레기 버리는 곳에 갖다 버리고 새 봉지 하나를 꺼내다 쓰레기통에 잘 펴서 넣어 두면 되는 거야. 그러면 아빠가 50센트 줄 테니까 그 돈으로 내일 학교 가다가 사탕 사 먹거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훈육했다면 아주 지혜롭게 “의로” 훈육을 한 셈입니다. 잘못을 단지 처벌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기회를 얻은 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어린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아이에서 청년으로 영적인 성장이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교리공부입니다. “세대적 진리” 책을 구해 읽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출발입니다. 일단 교리에 관심을 갖게 돼서 성경공부에도 나오고 주일 오후 집회에도 나오고 주중에도 나오게 되면서 어떤 현상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책망받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모든 집회에서 휴거, 환란, 천년왕국, 아마겟돈전쟁 등과 같은 것을 기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집회에서는 우리의 죄를 다루기도 하고 우리의 “성질”을 다루기도 합니다. 당신은 이를 통해 서서히 어린 아이 티를 벗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어서 바로잡음이 시작됩니다. 기도생활이 시작되고 겸손도 배우고 인간관계도 바로잡힐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시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돼서야 비로소 당신은 아직도 어리고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목하십시오. 훈육(instruction)은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의”(righteousness)로 하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엉망일까요? 그것은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외쳐대고 있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절정(peak)은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 성도로서(Bible Believer) 교리를 알고 책망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모든 사람을 바로잡을 만큼 성경을 알고 있어도 의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모든 과정의 최종목적지는 의로운 삶입니다. 이 의로운 삶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우리는 청년에서 어른의 단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른과 청년 사이에는 성경 지식에 관한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청년과 달리 그 지식을 삶에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2장으로 가 보십시다. 이 장을 읽어가면서 그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당신이 육신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전진하고자 하나님께 당신을 복종시키려 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나와 있으니까요. 12장 3절에서 5절을 보십시오.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처럼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또한 자녀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여기서 자녀라 함은 신앙생활의 첫 단계 즉 어린 아이(children) 단계를 말합니다. 계속 성경을 보십시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여기서 징계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앞서 잠언을 통해 배운 바 있습니다. 그것은 회초리 즉 막대기를 말합니다. 성경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여기서 책망이라 함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분들로부터 말로 듣게 될 지적 사항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6절부터 보십시다.
6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8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8절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만약 여러분 부모들께서 자식을 징계하거나 책망치 아니하면 그들은 부모 없는 사생아라고 합니다. 부모가 없어도 정부가 잠자리도 제공하고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주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바르게 살라는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서 8절까지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결코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채찍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이 생기면 낙심하거나 멸시하거나 도망치거나 하지 말라.”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집 안에서 징계 당하는 것이 징계 없이 광야에서 지내는 것보다 낫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써 살아야 하지 아니 하겠느냐?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부모님은 항상 옳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0절에 보니 이 분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고자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려고 혹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징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하늘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징계는 그 목적이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과 저로 말하자면 아마도 자식들을 징계하거나 때릴 때 화를 못 참는 그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때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그 어느 하나도 나의 유익을 위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의 모든 징계 하나하나는 결국은 나로 거룩함에 이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참으로 합리적인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징계를 즐겁다고 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어떤 징계도 그 당시에는 기쁘게 보이지 아니하고 슬프게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와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 보니 화평의 열매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갈라디아서 5장의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보면 단련(exercised)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운동 즉 뛰고 비틀고 뻗고, 이런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복동작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를 여러 번 단련시켜서 결국은 영적인 열매들을 맺도록 할 텐데 그렇게 되기까진 고난을 많이 당할 것이다.”
왜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줄 아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암과 투병 중이거나 자식을 잃었거나 가정이 파괴되었거나 관계가 깨어진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를 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징계”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잘 단련될 때까지 견디어 내라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는 늘 영적으로 아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채찍질을 잘 받아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12 그러므로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해 곧은 행로를 만들지니 이것은 저는 것이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고침을 받게 하려 함이라.
어린 자녀의 상태로 머물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말고 손과 무릎과 발을 곧게 세워야 합니다. 이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이 메시지를 여러 번 설교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엇이 하나님의 채찍질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징계요 막대기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해 온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메시지를 전할 때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죄인들의 거역(contradiction : '모순'이라 번역되기도 함)이란 말이 나오고 14절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14절의 “모든 사람”에는 우리를 거슬러 거역하는 죄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막대기는 다름 아닌 당신의 바로 옆자리에 지금 앉아 있는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일하고 있는 가까이 있는 죄인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도록 허락하시고 결국 우리로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도록 만드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우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이나 세상이나 마귀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는 상처를 입지 않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이어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뒤에서 남의 얘기 하지 말라”는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실제로 우리 뒤에서 “수군대는” 것으로 인해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들어도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 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설교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반당하고, 버림받고, 속임 당하고, 억울함을 겪는 그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런 사람들과 화평함을(peace) 유지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부드럽게(gentleness) 대해 주고, 선하게(goodness) 대해 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상처를 가져다 줄 사람이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남편이 옳지 않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떠나거나, 부인이 잘못됐다고 해서 부인을 버리거나, 아빠 엄마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집을 나가거나, 교회 사람들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교회를 떠나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손에 들고서 당신을 채찍질하셔서 당신으로 울부짖도록 만드시며 울부짖는다고 채찍을 거두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늘어진 손을 들고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서서 입술을 깨물고 견뎌내라. 그래야 네가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징계가 싫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제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싫고, 제 자식들에게 상처 주는 것도 싫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뜻이 징계 안에 들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징계의 막대기만 보고 있지 그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마음을 정하시고 목표를 갖고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징계의 폭풍이 몰아칠 때 징계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툼이나 논쟁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셔서 단지 느낌(feeling)의 영역에서 살고 싶어 하는 육신적 사람 그 이상의 “누군가”로 나를 만드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등을 채찍으로 내리친 사람들을 위해 그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자신의 수염을 뽑아버린 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친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까! 그분은 이런 자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십자가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는 못 해요.”라고 말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어릴 때와 달리 영적인 청년이 되면 강력한 설교도 하고, 마귀도 물리치고, 영적 싸움도 해 낼 것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저는 완전하게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못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구비되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딤후 3:17).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 중 한두 사람을 사용해서 제 마음을 계속해서 상하게 만드실 것이며 저를 결국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하소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그들에게 화가 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을 용서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그들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하시면서 저에게 회초리를 대실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 따르면 징계는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다고 했지요. 12절을 보세요. 늘어진 손,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고 하시지요. 13절도 보면 발을 위하여 곧은 행로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계와 관련된 요소들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자, 내게 상처를 주는 자, 이런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란 말씀입니다. 내가 이런 수준에 도달하면 마음 상할 일은 무엇이며, 그 누구와 관계를 끊을 일은 무엇이며, 그 누구에게 등 돌릴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수준에 도달했을 때 나는 디모데후서 3장 17절 말씀대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구비된 셈입니다. 잠언 16장 7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길들이 주를 기쁘시게 하면 그분께서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참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평안하지요.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 모두가 나를 잘 대해 주도록 하셔서 나로 하여금 삶을 향유토록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길 만큼 나를 변화시키셔서 나로 하여금 그 삶을 향유토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셔서 우리가 행복하게 되도록 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변화시키겠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변화되든 안 되든 너는 모두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입니다. 자, 어머니, 아버지 되신 분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대로 아이들에게 합당한 관심을 갖고 합당한 징계를 하십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바로 동일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며 약간의 고통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상처를 받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하여간 좀 혼돈스럽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일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전보다는 그래도 약간 더 거룩해지고 주님을 조금은 더 닮아 가실 것입니다. 회초리에 초점을 맞추시지 말고 그 회초리를 사랑이 가득한 손에 들고 계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아멘.
2009-05-01 18:23:06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마음이라는 영적 전쟁터
오늘은 고린도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여섯 번에 걸쳐 성령의 열매에 관한 말씀들을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간직 되어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2장 1절 말씀대로 “흘려보내” 버린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성령을 거슬러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실은 바로 이 “영적 전쟁”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갈 5:17).
일요일에 성령 안에서 걷고 육신을 따라 걷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지만 화요일만 되면 벌써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들어야 할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성품이 끈질기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사실 이번 이 메시지들을 증거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 또는 가증스럽고 추악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힘”을 얻게 됩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을 인정할 때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좇아 살다가 속히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할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의식 못하고 있다면 해결책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러분과 저는 이번 메시지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품”이 되도록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완성품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영적 성장을 시작도 아니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일수록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A) 우리의 부족함, 실패, 죄악된 모습을 정확히 인식해야 이것을 해결하여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지요. 영적으로 성장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은 성장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0장 1절을 보십시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여기에 보니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등장하는군요. 지난번 첫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살펴본 적이 있었지요. 여기 보니 바울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형제들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여기 보니 바울을 포함한 우리 모두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신 안에서 걷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우리, 영생을 얻은 우리,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육신 안에서 걷고 육신 안에서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싸우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싸우기는 싸우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 “끝으로 내 형제들아, 주안에서와 그분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강건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 중 그분의 강력한 권능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강력한 권능이 아니고 주님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강건하라고 합니다. 11절, 12절을 보십시오.
11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여기 보면 우리의 싸움의 대상들은 한결같이 육신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사도 육신이 아니고 권능도 육신이 아니며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도 역시 육신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싸움은 영적싸움이요, 우리의 원수는 영적 원수입니다. 우리가 싸움을 하지 않거나 또는 싸워도 지는 이유는 우리가 육신의 에너지를 동원하여 싸우려 하나 우리의 적은 육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은 우리를 속이고 미혹시키는 마귀의 술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서 싸움을 해 이겨내야 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가 승리하려면 영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오늘 이 진리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여섯 번에 걸친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영 안에서 행해야지 육신 안에서 행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합니다만 사실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다루어 온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주님께서 행하시게 될 그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섯 번의 메시지 후에 드디어 우리가 해야 할 그 무엇에 도달했습니다만 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굴복시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 주님께 내어 드리면 주님께서 마귀를 굴복시키는 그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과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3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 하노니 4 (우리의 전쟁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 보면 강력한 힘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육신에 속한 그 어떤 것도 강력하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한 무기를 가지고는 대적을 충분히 이겨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육신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뒷부분을 보니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과 제 안에 그 어떤 요새들도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즉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하나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시면 그 어떤 요새도 다 무너뜨려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아주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신의 간증을 올바르게 지키고 싶어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마음 먹은 그리스도인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달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과 아울러 자신의 무능력까지 다 하나님께 내어 맡겨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요새(니코틴 중독)를 부숴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그 어떤 요새가 되었든지, 예를 들어 그것이 안목의 정욕이든 육신의 정욕이든 아니면 못된 성질이든 어떤 요새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육신적 노력으로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육신의 적이 아니고 육신은 육신과 동맹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육신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어 그 무기로는 어떤 요새든 다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는 즉시로 끊어 버릴 수 있는 “망령된 행실”이 있고 어떤 것들은 점차적으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구축해 놓은 요새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가 아는 그것이 있다 그 말입니다. 육신의 죄들이 왜 그렇게 강력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육신의 죄들을 열거할 때마다 제일 먼저 성적인 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간음, 음행, 부정함, 색욕 같은 것들이 먼저 언급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지으시고 즉시 여자를 만드신 후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결합하여 아이를 갖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의 일부로 사람의 내부 안에 놓아두신 욕구입니다. 이 욕구를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이 욕구를 겨냥하고 있는 온갖 것들을 인간의 육신으로 이겨낸단 말입니까? 포르노 영화, 음욕, 색욕, 성인 영화, 만화, 잡지 등 이 온갖 것들을 육신의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이것을 어떻게 이겨 낸단 말입니까?
인간의 육신이 인간의 육신과 싸우면 육신이 분리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왕국마다 황폐하게 될 것이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노략하겠느냐?” 그러나 육신보다 더 강력한 무기, 우리의 정욕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고린도후서 10장 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이 “나는 담배를 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이 “나는 욕을 안 할 수가 없다.”라고 하면 그는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자매가 “나는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께서는 나의 못된 습관보다 나의 육신보다 더 약한 분이시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보다도 성령님이 더 약하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술을 끊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고백입니다. “나는 거듭난, 구원받은 사람인데 술을 끊을 수 없다.” 이런 말은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솔직해지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용서하기 원치 않으니까.” 이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반대로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닌 강력한 무기를 주셔서 요새들을 무너뜨릴 수 있게 한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 있는 그 어떤 요새도 무너뜨리실 수 있는 무기를 갖고 계신 그분께 “우리의 무능”과 함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왜 우리는 육신에 안주합니까? 그야말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를 반복합니다. 죄 짓고 나서 “주여, 용서하소서.” 하는 것이 “주여,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소서.”보다 훨씬 쉽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여섯 번에 걸친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죄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직선적이고 분명한 방법으로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안락하고 느슨한 삶에 익숙해 그저 그러려니 하며 쉽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늘 그랬어요.”, “이제껏 늘 그랬거든요.” 이런 식의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마귀가 구축해 놓은 그 요새를 무너뜨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요새보다 강한 영적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이제 두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두 단어가 승리와 패배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든 생각”(every thought)입니다. 모든 생각, 즉 우리가 “생각” 속에서 승리를 쟁취 못하면 우리의 영적 전쟁은 패배로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담배를 예로 들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처리하지 못하면 결국 담배에게 지게 됩니다. 그래서 담배 생각이 나는 그 순간, 바로 그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로 가져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10분 후에 다시 담배 생각이 나면 또 그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로 가져가고 5분 후에, 10분 후에 아니 담배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 모든 생각(every thought)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떠오를 텐데, 그때마다 그 생각과 상상을 사로잡아 주께 가져가 “주여, 저는 이 생각을 내 것으로 품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을 정결케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그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영 안에서 행치 않고 육신 안에서 행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너무도 느슨합니다. 목사에게 여러 시간에 걸쳐 담배 끊지 못하는 이유를 대지만 하나님께는 단 1분도 “주여, 저는 담배 끊기 원합니다.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설교가 너무도 강하다며 불평을 30분 이상 늘어놓으면서도 하나님께는 단 10초도 기도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생각을 체포하여, 사로잡아서 묶어 가지고 주님께 가져와서 “주님, 당신의 포로입니다. 가두소서.” 이렇게 하면 주님의 강력한 무기로 요새는 무너진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검을 빼어 들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으세요. 그리고 주님께로 넘기세요. 그런데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 머리 속을 지나가거나, 마음속에 떠오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로잡지도 않고 주님께로 가져가지도 않습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패배하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왜 우리는 육신의 죄들을 짓게 됩니까? 그거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기 때문이지요. 술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그렇다면 즉시로 그 생각을 없애십시오. 그 생각을 처리하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결혼하셨습니까? 그런데 어떤 여자가 당신을 유혹합니까? 그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이 여자에게 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라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순간에 그 문제를 척결하십시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는 순간 다윗처럼 무너집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여자가 속아 범죄하였다고 합니다. 속았다는 말은 마귀가 던진 미끼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갔고 마귀의 유혹과 제안을 숙고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를 보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넘어진 것입니다.
왜 젊은 사람들이 온갖 유혹에 넘어갑니까? 온통 머리 속에,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 술, 담배, 여자, 이런 것을 채워 놓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눈앞에 등장하면 즉시로 걸려듭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생각 속에 욕심이 잉태되어 있는 셈이지요. 따라서 모든 생각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부들은 어떠하십니까?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면서 괜히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즉시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우리의 생각을 장악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우리는 그야말로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과 다투었다고 합시다. 아침 출근 시간 당신은 운전을 하면서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합니다. “그 자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지.”,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이렇게 나가야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아니야, 그 자가 먼저 사과를 해야 돼.” 이런 식으로 한 시간 내내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단 일분만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면 해결책을 찾을 텐데… 그저 생각하느라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생각은 주님과 말씀에서부터 벗어나 있으니…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 머리 속에서 쓸데없는 상상(imagination)만 하는 것이 육신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상상(imagin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약 50구절을 보면 다 나쁜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단 한 구절도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도 모르면서 괜히 누구누구가 자기에게 화가 나 있다고 상상하거나 누구누구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상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무익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누구는 엄청나게 육신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누구누구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쓸데없는 상상일 뿐입니다. 마귀는 이처럼 우리가 쓸데없는 상상이나 생각을 하도록 해서 우리로 육신적인 삶을 살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상상과 생각이야말로 우리와 마귀와의 전쟁터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어제 그 사람이 나한테 기분 나빴던 것이 분명해. 이를 어쩌지, 내가 실수했나?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들로 인해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 채 두세 장을 지나쳐 갑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기분 나빠한 것도 아닌데 그냥 상상 속에서 그렇게 생각이 들어 그 생각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대신 즉시 기도로 바꾸십시오. 상상대신 즉시 주님께 맡기십시오.
제 얘기를 하나 할 테니 여러분은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차를 운전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가고 있는데 차 안에는 성경이 있고 카세트에서는 설교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리 속에서 “지금 이 시대에 교육받은 사람치고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지?”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목사가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지만 아마 마귀가 여러분들에게도 온갖 생각들을 집어넣어 줄 것입니다. 이때 제가 즉시 이 생각을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생각이 떠나도록 하려면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하신 사실을 성경 말씀 그대로 믿습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오니 이 생각을 처리해 주십시오.”
직장에서, 식당에서, 길 가다가 자극적인 옷차림의 여자들이 눈에 띄면 우리의 육신은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때 “저 여자 한 번 더 쳐다봐야지.”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이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즉시로 그 생각을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대로 머리속에 머물게 놔두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상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을 결정짓는 핵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즉시 기도하여 처리하는 대신 그대로 머리속에 담아둔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남이 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미리 대비하는 생각을 하는 대신 기도해야 하고, 육신을 자극하는 생각들은 머리속에 둥지를 틀기 전에 기도해서 처리해야 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는 대신 즉시 기도하고… 즉 어떤 생각이든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보면 상상을 무너뜨리고 생각을 사로잡으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 순종한 적이 언제이십니까? 하나님의 지식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사야 26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성령의 열매 중에 화평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보십시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여기 보시면 지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완전한 평강(perfect peace)이란 말씀이 실로 놀랍지 않으십니까? 누구를 지키십니까? 그의 생각(whose mind)이 주님께 머물러(is stayed)있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를 생각 속에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발적으로 생각을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고정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평강(화평, 평화)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극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암과 투병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평안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신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늘 생각이 주님께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평안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생각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 참 평안을 맛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사 26:3)에 따르면 완전한 평안은 우리가 처한 환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에 따라 주어질 수도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자매가 병원에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둘 다 조건은 똑같습니다. 둘 다 암 투병 중이고, 최고의 의사들과 의료보험과 최고의 시설, 이 모든 조건이 동일합니다. 더군다나 두 자매 모두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가족들도 그녀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한 자매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미소를 지으며 안식하고 있는데 반해 다른 자매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 자매 사이에 서서 그녀들을 쳐다보았습니다. 한 자매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간증하고 있고 다른 한 자매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웅크리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한 자매는 구세주와 주님이신 그분을 생각하고 있고 다른 자매는 암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는 죽는 것을 생각하고 있고, 한 자매는 영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환경과 여건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걱정, 근심,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이 모든 생각들 즉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생각들을 사로잡아 주님께 굴복시키면 주님으로부터 평강이라는 열매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을 스스로 선택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질병이 왔을 때도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머물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번영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칠 때도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올바른 선택이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환경과 여건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thought)이 문제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3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식으로 가르치고 온전한 말씀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교리에 동의하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논쟁과 말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 이로써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이 생기며 5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여기 보니 “악한 추측”(evil surmisings)이란 말과 “부패한 마음”(생각)(corrupt minds)이란 말들이 등장합니다. 두 표현이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악한 추측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형제는 나를 싫어하나 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이유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 꼭 증거가 있는 건 아니구요.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이런 답변을 하지요. 바로 이런 것이 악한 추측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추측은 곧 부패한 생각(corrupt minds)에서 나옵니다. 언젠가 한번 지나가면서 나를 흘겨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부터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그대로 머물러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계속해서 육신적인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육신을 따라 걷지 말고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악한 추측이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보았듯이 상상과 생각 속에서 “어쩌면…(maybe) 그럴 거야.” 라고 추측하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한 사실이 아닌데 자기가 스스로 상상과 생각 속에서 그렇다고 여긴다면 진리와 사실(truth, fact)에 입각한 것이 아닌 억측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영적인 패배를 맛보며 살아갈게 자명합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자기 머리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창안(invent)해 내는 것은(참조-전도서 7:29, 특히 inventions를 주목할 것) 곧 억측에 불과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식으로 억측을 하기 시작하면 온 교회가 육신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교제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사실과 진리에 입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상상, 생각, 느낌 즉 악한 추측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스스로를 잘 점검해 보십시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런가봐.”, “그게 틀림없어…” 이런 것들은 다 악한 추측들입니다.(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엡 4:15 참조)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난무하면 교회는 쪼개지고 맙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이건 저 형제 두고 하신 말씀 같은데…”, “우리 편에 손을 들어 주셨다구.”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검을 들고 악한 추측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주님께로 가져다가 주님께서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셔야 사라지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마디, 몸짓, 어투, 기분 상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상상과 생각 속에서 악한 추측을 일삼기 시작하면 그 가정은 깨지고 맙니다.
상상과 생각대신 기도하십시오. 상상과 생각을 사로잡아 주께 드리고 당신은 무릎 꿇고 제발 기도하세요. 빌립보서 4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이 상상과 생각이라는 악한 추측과 부패한 생각을 그대로 둔다면, 밤새 이 생각 저 생각했던 것들을 그대로 둔다면, 아마 우리의 영적 생활과 교회 생활은 끝장날 것입니다. “오늘 그 형제가 날 무뚝뚝하게 대한 걸 보니 나를 이제는 안 좋아 하는 가봐.”, “그렇다면 나도 다음 주부터는 인사를 먼저 하나 봐라.”, “아니야, 아예 얼굴을 마주칠 때 피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야, 나도 한마디 해줘야지. 말만 걸어봐라. 나도 쌀쌀맞게 대해 줄 테니까…”, “그 집 아이가 시끄럽게 굴면 이번에는 가만 안 놔둬야지.”, “오늘 설교가 혹시 나를 두고 지적한 것 아닐까?” 이런 식의 공상은 다 억측에 불과합니다. 모두 다 사로잡아서 주님께 가져가고 그런 공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주님께 그 형제와 그 집 아이들을 위해 축복을 하는 기도를 하세요. 있지도 않은 일을 갖고 몇 시간씩 상상의 날개를 펴지 말고, 즉시 주님께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 주시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영영 육신적인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입니다. 6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6절에서 염려(care)와 기도(prayer)는 서로 반대되는 요소입니다. 염려대신 기도하십시오. 7절을 보면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평강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강 말입니다. 그런데 이 평강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생각”이 빗나가지 않도록, 상상으로 번지지 않도록, 억측으로 번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염려대신 기도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이 말씀은 믿을만합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평강이 임하면 된 것 아닙니까? 인간의 이해와 하나님의 평강 중 어떤 것이 큽니까? 하나님의 평강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상상과 생각 속에서 염려를 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주님께 기도로 가져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minds and hearts)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왜 내가 그 형제와는 잘 교제가 안 되고, 친절하지 못하고, 맘에 안 들고, 괜히 싫고 사랑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내 마음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때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을 주님께 가져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올바른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진실한 것부터 쭉 열거되다가 끝 부분에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think on these things). 생각이 무엇에 놓여지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적 생활의 승패가 갈리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의 악한 추측과 상상과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것, 정직한 것, 올바른 것, 순수한 것…”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살아갈 때 영적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심, 두려움, 염려, 분노, 쓴 뿌리, 이 모든 것들 대신 위에 열거된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운다면 곧 그것이 승리입니다.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자주 실족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무너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놓이든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그것들을 생각하는 대신에 기도를 한다면, 곧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당신은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과 추측을 하는 대신에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에 대한 저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과 상상과 억측보다는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 대해 생각과 추측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위해 생각과 상상대신 기도를 한다면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적 노력과 헌신으로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 보려고 애쓰고 티격태격하는 교회대신 하나님께서 각자 안에서 일하셔서 놀라운 열매가 맺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로 가득찬 교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저는 영적 부흥에 관해 여러 책을 읽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앤드류 머레이에 의해 일어난 부흥, 웨일즈, 미국 등에서 일어난 부흥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휠씬 더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그렇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사역을 비롯해 주님께서는 여기저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수고에 축복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생각대신 기도를 하십시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들려주신 진리의 말씀을 우리 각자의 삶에 진지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드시고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22:07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우리의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3장과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곱 번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열매란 믿는 성도가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맺어 보려고 하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 안에서 생산해 내시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 삶에서 표현해 보려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함을 그간의 우리의 체험이 입증해 줍니다. 이는 우리의 지체 안에 성령님의 뜻과 목적을 대적하는 또 다른 본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성경에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아담, 죄, 죄의 활동, 혹은 단순히 육신이라고도 합니다. 이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지니게 된 것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죄성은 우리가 거듭나서 갖게 되는 신성한 본성을 대적합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의 삶에서 그 성도를 통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이끄실 때 안에서 영적인 전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성령님과는 반대로 거듭난 성도로 하여금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아직도 이 전쟁에 대해 모르고 있다든가 여러분 안에 그런 전쟁을 겪어보지 못 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구원받지 못했으며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아무런 영적 갈등을 느끼지 못하거나 이 세상의 죄에 참여코자 할 때 아무런 저항도 못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성도는 당연히 육신과 성령 간의 갈등을 알고 있고, 성령께서는 육신적 활동에 대해 안에서 항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짓는데 있어 아무런 갈등도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최종 목적지는 불행하게도 지옥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 안에는 거듭난 영적인 사람, 즉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새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구세주를 따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비록 자주 실패를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주님을 따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 안에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 보니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다음은 “목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목적이 무엇인지는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9절을 보면 예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정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정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네 구절을 잘 읽어 보면 예정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와 관계있는 것이지 구원받지 않은 죄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죄인이 하늘나라로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이란 구원받은 사람의 최종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는 전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 사상은 그렇게 주장할지 모르나 성경은 그런 예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정이란 내가 구원받은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모습으로 변화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 3장을 통해 나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짐이 될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의 인생이 기쁨이 될 것인지 슬픔이 될 것인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세워놓으신 목적에 내가 동의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려고 일하고 계신다면, 이 목적에 따라 내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기 위한 나의 모든 행동, 생각과 결정은 인생을 훨씬 더 단순하고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나는 성령님과 동의하에 올바른 교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생각, 행동, 결정 등이 육신이나 자아나 세상을 향하게 되면 나는 즉시로 갈등과 고통, 그리고 문제에 둘러싸이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데 있어 부모들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성령의 열매 6번] 올바른 부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모님께서 시키신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즐겁게 수행할 수도 있고 때론 억지로 괴로운 마음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숙제가 되었든 심부름이 되었든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협력하면서 기쁨으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여 협력도 안하면서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결국은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이루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이든 목적지에는 도달할 것이고 목표는 달성될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이 시간에는 어쩌면 여러분과 상당히 비슷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회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러분 대부분은 술주정뱅이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지금 보니 여러분들 중 상당수가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방종교나 죄악으로 얼룩진 과거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주님께 와서 구원받고 나서도 “없애버려야 할” 옛 생활이 별로 없겠지요.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해 왔을 테니까요. 마약중독에 빠진 적도, 알콜중독에 빠진 적도, 간음이나 음행을 저지른 적도, 우상 숭배를 해 본 적도 없이 비교적 깨끗한 과거를 등에 업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3장을 보니 여러분처럼 종교적 분위기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살았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좋은 과거마저도 육신에 속한 것이라면 육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믿기 전에 좋은 종교적 배경을 가졌다거나 그런 연유로 우상을 섬긴 적도 없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적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배경을 지녔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거나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나쁜” 육신이든 “좋은” 육신이든 육신은 육신에 불과합니다. 불교적 육신, 도교적 육신, 이슬람적 육신이나 장로교적 육신, 침례교적 육신이나 똑같은 육신일 뿐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저희를 가르치사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빌립보서 3장 3절을 보겠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세 가지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첫째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참으로 선한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0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13살 때 이미 주정뱅이가 되어 18세까지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요양시설에서 22세에 구원받은 사람이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게 되면 그는 당연히 그 말씀에 수긍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찾아주셔서 구원받기 전에는 실로 형편 없었습니다. 저는 제 육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회복의 절실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 평생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지내온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술 마시고 죄 짓는 육신이 나쁘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교회 다니고 종교생활을 하는 육신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짓는 나쁜 육신이든 “선행”을 하는 좋은 육신이든 모두 다 육신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 전 못된 삶을 살았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은 착한 삶을 살다가 구원받았으므로 오만합니다. 술주정뱅이가 구원받으면 그는 더 이상 술주정뱅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자라난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교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둘째는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셋째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육신이 선한 것이나 좋은 것을 하더라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성전에 가서 기도하던 두 사람이 기억나십니까? 한 사람은 고개도 못 든 채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했지만 또 한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나는 저 사람처럼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보시고 저 사람은 겸손하니 내가 사용할 수 있으나 두 번째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하니 잘못된 사람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 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것은 “선한” 혹은 “좋은” 육신입니다.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여기 보니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 어려서부터 엄마가 들려주는 성경을 듣고 자라난 사람들, 학교도 가기 전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줄줄 외던 사람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늘 교회에 다녔고 술집에는 한 번도 안 갔던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결혼 전에 순결을 지켰고, 댄스홀에는 얼씬도 안 해 본 것, 이 모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중에는 다소 출신 사울보다 더 종교적이거나 더 헌신했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께서는 이 사울이라는 사람보다 더 자기 자신의 육신을 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신 분의 의견입니다. 즉 육신을 신뢰하고자 한다면 바울만큼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육신은 훌륭한 육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에 보니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유대 민족 간의 특별한 언약의 징표입니다. 그는 그 징표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며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축복을 지닌 사람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이 배교했을 때 진리를 고수하던 지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함은 모든 히브리인들 중 최고의 히브리인이란 뜻입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인가? 회당에 가서 한번 물어보십시오. 바울입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성경 지식을 갖춘 사람인가? 랍비에게 물어보십시오. 대답은 바울입니다. 마치 미국 역사상 누가 가장 뛰어난 웨스트 포인트맨인가 물으면 누구나 주저 없이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이라고 하듯이 이스라엘의 모든 회당에 가서, 누가 가장 뛰어난 성경학도인가 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다소 출신의 사울”이라고 대답합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니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전부 사실입니다. 율법에 관해 전혀 흠이 없는 사람,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포함해 그 누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자라났다고 할지라도, 신약성경에 관한 한 흠이 없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보다 더 엄격합니다. 그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사항을 다 지킨 사람이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울의 가족, 친구, 지인, 선생님, 이웃, 동료 그 누구에게 물어볼지라도 한결같은 답변을 얻게 됩니다. 흠 없는 사람이란 답변 말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육신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육신일 뿐입니다. 7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곧 그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이 말씀에 따르면 바울의 인생에 있어 사울에서 바울로 되었던 그날, 즉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그날 이래로 그의 모든 것, 그중에서도 굉장했던 과거도 다 내려놓아야 했던 시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평가해 주었고 율법 앞에서도 훌륭한 것들이었으나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님과 비교해 보니 항상 최고로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가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죄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이요, 흠 없는 사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그러하다면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좋은 종교적 배경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우리 역시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성경구절을 척척 갖다대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십계명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8절에서 12절까지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 네 가지는 나의 소유도 아니요, 당신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8절입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는 다릅니다.(전치사 of 와 about의 차이) 우리의 지식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는 사실, 즉 그분에 관한 것들을 알고 있을 뿐 주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견디시면서도 마음속에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셔서 당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들을 당신의 삶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그분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그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수준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빌립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에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 보니 바울이 잃어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실은 바울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입니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여기서도 중요한 부분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We have faith in Christ). 물론 우리의 믿음도 소중하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Christ)에 이르도록 이끄십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시련과 문제가 닥칠 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고뇌와 염려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우상이나 다른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기도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그분께서는 그 기도 가운데 절망, 고뇌, 염려, 두려움 등을 없애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견디게 하셔서 결국은 올바른 결말이 나올 것임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이 확신은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고자 할 때 지니고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Christ)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그분의 믿음(faith of Christ)입니다. 이 믿음은 주님께서 물 위를 거니셨을 때, 폭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 지옥에 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소유하고 계셨던 그 믿음입니다. 즉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완전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바랐지만 여전히 내면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했어도 나의 믿음 가지고는 여전히 걱정하고, 여전히 두려워하고, 여전히 불안해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한 그런 믿음으로는 최종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성령의 열매인 믿음, 즉 나의 믿음보다 훨씬 더 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내 안에서 열매로 맺어주십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부활, 권능, 죽음 그 다음에 보니 고난의 교제(고난에 참여하는 것)란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으로 잠깐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질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막대기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며 이는 우리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함임을 공부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때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로 단련되고 성숙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진리를 알고 있고 이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나를 모욕하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 모욕을 감당코자 합니다. 다음에 또 그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에게 미소짓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잘 대해 주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요, 그것은 올바른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화를 내거나 쓴뿌리를 내는 것보다는 뛰어납니다. 그와 교제를 단절하고 끝내는 것보다도 훨씬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나서서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해 보고자 하는 “육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이 좋은 “육신”은 얼마 후 용량 부족이 될 것이고 시험의 때가 실제로 닥치면 견뎌내지 못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와 주님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나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할 때,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만약 내가 진정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모든 고통을 수용하고 견뎌내고자 할 것입니다. 약간의 불만과 분노와 절망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래도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을 잘 대해 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하라고 명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과의 고난의 교제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 원하며 당신과 내가 서로 교제하려면 내가 당신의 손에 고통을 당해야만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고통을 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다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자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그런 사람들을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잘 대해 주기를 “원하는” 자로, 그리고 그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자로 만드시려고 하십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고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관련 성경구절을 찾아서 고난과 고통에 대한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고통당하신 그 방식을 나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결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딜지는 모르지만 그 고통을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12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여기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여기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 가노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원받은 그날부터 목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은 곧바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 이후의 나의 모습을 이미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를 알고 계십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 목표를 붙잡기 위해,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도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심은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저 세상에서 갖추게 될 그 모습을 이 세상에서 갖추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만들어 내신 덕분에 자연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을 현재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 안에서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보니 바로 네 가지가 주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선 8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지식”이 첫째이고, 둘째는 9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셋째는 10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교제”이며 넷째는 12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붙잡으심”입니다. 계속해서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을 잡으려고 나아가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치며 나아가노라.
바울은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각, 그의 비전, 그의 친구들, 그가 했던 모든 일들을 제껴두고 좁은 길을 따라 딱 한 곳에 이르도록 밀고 나아갔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처럼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전진해 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죄들에 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 죄들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들을 추구하느라 빗나가는 법도 없을 테니 육신의 유혹에 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 의해 시험을 당하고 미혹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그 한 가지를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그것이 되기를 결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댄스홀과 바에 대해, 혹은 매춘과 마약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들을 얼마나 알아야만 할까요?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구절에 대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푯대를 향해 가고 있다면 나쁜 친구들에 관한 성경구절은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이 달리기에 관해 한 구절 더 살펴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마에 출전시킬 명마를 얻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들여 60여 년간 교배 끝에 드디어 명마를 얻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그 말을 출전시켜 우승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시합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들고 나온 안장은 다른 안장보다 5배나 큽니다. 그 안장에는 물병과 도시락과 비디오카메라와 CD 플레이어와 휴대전화가 얹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즉시 아무리 명마라도 그러한 것을 지고 달리면 우승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안장을 얹어 오직 기수만이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큰 안장도 잘못이 아니고 덩치가 큰 기수도 잘못이 아니며 멋진 아내와 함께 시합에 나오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시합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들과 벌이는 논쟁, 남편과 벌이는 논쟁, 아내와 벌이는 논쟁마저도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소의 사울이 행했던 것들도 다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경주자가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무엇에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버는 일일까요? 그 일에 올인(all-in)하고 계신지요. 물론 그것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에는 방해가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만약 사람이나 장소, 어떤 일이나 혹은 물건이든지 당신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당신의 관심을 푯대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은 그것들로 인해 성령님과 대적하게 될 것이고 기쁨도 빼앗기며 행복도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과 성령 간의 갈등을 가져올 것이고 이 갈등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는(enjoy)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인생을 즐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것들을 즐기고 누리며 향유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낚시, 여행, 원예, 야구, 테니스, 집 가꾸기, 그 외 그 어떤 것들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A)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해 주신 그 코스를 벗어나게 하도록 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일해야 먹고 삽니다. 잘못된 것 없습니다. 그러나 직장이든 사업이든 재정적인 것이든 그 어떤 결정도 여러분을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것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지는 마십시오. 그 어떤 것도 믿음의 경주에 방해가 된다면 내려놓으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내려놓고 달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일, 인생, 즐길 것 등 모든 것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과 저를 푯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떼는 순간 우리 안에서는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 갈등은 동료와의 갈등이 아니고 교회와의 갈등도 아니며 설교자와의 갈등도 아닙니다. 그 갈등은 여러분과 저를 푯대를 향해 한 방향으로 이끄시려는 성령님과 반대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는 육신 간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아침에 직장에 나가시겠지요?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학교에 공부하러 가십니까?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가족과 휴가를 가십니까?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돈을 벌기 위해 가십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푯대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지 마십시오. 아멘.
2009-05-01 18:21:15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사랑/신약시대 성령의 사역
우리는 지난 여덟 번의 메시지를 통해서 기초를 놓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지니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5절입니다.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오늘 이 모임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기도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빚으셔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들이 되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먼저 20세기 초에 모로코에서 무슬림(이슬람교인, 회교도)들에게 마을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한 선교사의 간증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을을 방문해 이슬람 신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주님께로 회심시키고자 했던 이 선교사의 간증을 한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복음을 전했을 때는 끼어들거나 방해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항의와 적대감과 그들 종교에 대한 광신적 옹호였지요. 저는 그들에게 로마서 8장을 읽어주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경적 기독교와 도덕성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도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설교가 진행되자 휘파람을 불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저의 설교에 대해 할 말이 있거나 질문이 있으면 하시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한 필 사려고 말의 이빨부터 점검하기 시작했소. 잘 살펴보니 이빨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웠지요. 그러나 이빨이 건강하다고 다리까지 건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그 말이 다리가 신통치 않다면 그 말은 쓸모없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말의 가치는 줄어들 수밖에 없소. 그럼 제 얘기를 들어보시오. 나는 이슬람교도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금식을 비롯한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이 와서 나의 도덕이 잘못됐다고 해서 내 종교 전체가 쓸모없다고 하니 그것은 마치 말이 다리가 좀 나쁘다고 그 말 자체가 쓸모없다고 하는 것과 같단 말이오. 아시겠소? 나는 한 인간으로 본능에 따라 살아갈 자유가 있소. 그러니까 내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요. 이것과 나의 종교와는 무관하단 말이요. 나는 여전히 알라신께 경배를 드리니까요. 알라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기도, 금식, 계명 및 몇 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나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일과는 상관없지요. 그 일은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 부인이 몇 명 있습니까?”
“다섯이었지만 네 명은 이혼시켜 지금은 하나입니다.”
“왜 이혼하셨지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저는 올해 나귀 두 마리를 내다 팔았지요. 그것은 늙은 나귀를 젊은 나귀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늙은 여자 대신 젊은 아내를 맞이하려고 이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당한 네 여자는 어떻게 되나요?”
“그거야,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그 여자들을 싸게 샀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젊은 아내가 당신이 늙었으니 새 남편으로 갈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내가 새로 산 나귀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때를 쓰면서 말을 안 듣고 멍에를 쓰기 싫다고 버티면 채찍으로 때려잡아야지요.”
저는 이 사람의 논리에 대한 적당한 답변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복음 증거가 끝났을 때 저는 이 이슬람교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사람은 발끝에서부터 위장이 있는 곳까지 회개했고 입술에서부터 목젖이 있는 곳까지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주여, 이 자의 회개는 마음(심장)이 있는 곳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짧은 간증이 여러분께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기독교 신앙과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 주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끔찍한 종교가 다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기도, 금식, 예배 같은 형식적인 종교의식은 의무적으로 다 하면서도 마음과 삶은 전혀 변화되지 못 했다면 도대체 그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불교가 되었든 이슬람이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지 간에 마음이 변화되지 못한 종교는 쓸모가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마음과 삶의 변화없이 그저 종교로서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지 않고 겉치레로 종교생활만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독교 역시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우리들이 일요일에 교회당에 가서 몇 가지 종교 의식을 치루고 몇 가지 활동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별로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만약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가 올바르게 바뀌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그저 종교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그저 ‘종교인’으로 살아가다가 죽어서야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줄 뿐입니다.
요한일서 4장과 5장을 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비록 우리가 무슬림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방법으로 기도하고, 다른 날을 지키더라도 내 직장 동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인 나와 무슬림인 다른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도 그 자도 아내를 무시하고 막 대하는 건 똑같다면 말입니다. 서로 자기 종교가 옳다고 주장해 봐야 제 삼자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삶에서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본인은 하늘나라로 가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언행을 보고 다른 죄인들도 믿고 하늘나라에 같이 오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조심하십시오. ‘사랑은 하나님이시라.’가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입니다. 하나님은 계명(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리가 아닙니다. 규례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보니 사랑은 전혀 느낌(feeling)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emotion)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하나님은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우리 죄인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이 하나님이 곧 사랑이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만약 당신이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계시지 않다면 이 구절은 없을 겁니다.A)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들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실히 배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난 우리들 안에 내주하시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저는 그렇게 사랑이 많은 편이 못 됩니다.”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변명하지 마시고(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니) 회개하시는 것이 더 나으실 겁니다. “저는 사실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십시오. “저는 원래 무뚝뚝하거든요.” 이렇게 변명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그 성격을 뛰어넘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면(성경은 그러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렇다면 ‘성령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있음도 분명합니다. 이제 내 안에는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거룩한 사랑이 내주하고 있고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랑이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신도 동일한 사랑과 그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뜻 깊은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저기, 낙스(Knox) 목사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이프를 통해 좋은 설교를 듣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젊을 때 구원받았는데요, 지난 9년 동안 저는 하나님과 멀리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를 가지 않느냐고 하면 저는 늘 ‘저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냥 놔두세요. 알아서 할게요.’ 이런 식으로 응수하곤 했었습니다.(우리가 자주 언급하던 그런 그리스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 데리러 오시는 휴거 때까지 자기 맘대로 사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어느 날 일터에서 상사 한 분이 당신의 설교 테이프 몇 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중 세 번째 테이프를 듣는 순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타이타닉 영화에 대해 그것은 죄인의 반역과 음행과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 그 영화 속의 두 젊은이는 마귀에게 혼을 팔아버린 자들이라고 했지요. 사실 저는 그 영화가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저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세상적이었나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내리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제가 포르노에 가까운 영화를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요. 저는 그 순간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화를 건 이 형제가 사랑은 섹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음행도 아니고 육체적 쾌락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하나님의 책망을 수용하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다시 주님을 향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 형제는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돌이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슬림들처럼 사는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신이 원하는 쾌락을 좇아 사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드릴 때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아내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남편이 신사답지 못하고 존경스럽지 못한 때에도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무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려 할 때에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당신으로 하여금 저의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저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을 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때론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육신적인 태도를 자주 취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성령께서 나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단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유익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나의 위로자이십니다. 나의 고난 가운데 도우셨지요.”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가 아닌 ‘너’에게, ‘다른 사람(남)’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신 성령님 이야기는 왜 없는 것일까요? “성령께서는 나의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나를 인치셔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훌륭한 신앙고백이고 역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마저 ‘우리 자신’의 유익에 관해서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를 통해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유익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여기 보니 사랑의 영을 주께서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spirit)은 대문자가 아닙니다. 즉 성령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순절날(사도행전 2장) 두려움 많고 나약한 자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을 능력있는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건전한 생각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건전치 못한 생각과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던 우리들이 거듭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제하시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생각이 건전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제하시면 그처럼 무뚝뚝하고 무심하던 자도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여기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넓게 부으셨나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사랑을 넓게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남들’을 사랑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과 역대기하 24장, 그리고 사도행전 7장을 보십시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해 오면서 우리 자신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에 관해 배웠습니다. 이제부터 그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과 28절, 그리고 3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듣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눅 6:27, 28)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눅 6:35)
여기 보니 하나님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가끔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글쎄,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어떤 경우에는 정말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할인마트나 주유소에 갔을 때,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 제가 손을 내밀고 있는데도 제 손 위에 얹어주지 않고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할 때, 이럴 때면 저는 정말 참지 못합니다. 몹시 화가 납니다. 손 위에 얹어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저의 육신은 그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처럼 자그마한 일에도 “참질” 못합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만드는 일들도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되면 결국 우리도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칠게” 대해 버린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무슬림이나 불교 신자나 다른 그 어떤 종교를 가진 자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시다가 그런 일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만 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런 자들에게도 인자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종교인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거듭나도 “육신적”이면 종교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역대기하 24장 20절에서 22절을 보겠습니다.
20 하나님의 영께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에게 임하시매 그가 백성 위에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주의 명령을 범함으로 형통하지 못하느냐? 하시나니 너희가 주를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니 21 그들이 그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왕의 명령을 따라 주의 집 뜰 안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였더라.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베푼 친절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것으로 인하여 벌을 주시옵소서, 하니라.
이 말씀의 끝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보시고 이 일로 벌을 주시옵소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이 저주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누가 이를 두고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그러므로 “나를 죽이는 자를 죽여 주시옵소서”라는 저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응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응수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반면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죽여 주소서, 주여.” 이런 식으로 응수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반응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53절입니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 52 대언자들 중에서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자가 누구였느냐? 그들은 의로우신 분의 오심을 미리 보여 준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 53 너희가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하신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내용을 보니 앞서 본 역대하 24장과 같습니다. 즉 살인죄를 저지른 자를 다루고 있지요. 계속해서 54절에서 60절입니다.
54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똑바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56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57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도시 밖으로 그를 내던지며 돌로 치니라. 또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 하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앞서 살펴본 스가랴나 지금 살펴본 스데반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두 사람 다 진리를 선포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성령께서 내주하지 않은 채로 죽으면서 그의 원수를 저주한 반면에 스데반은 내주하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며 기도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이 두 부분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기질의 차이도, 성격의 차이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단호하게,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 한 사람의 영은 성령님에 의해 통제를 받아 자신에게 이를 갈며 저주하고 죽이려는 자들에게 저주가 아닌 용서로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히브리서 12장 2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오직 결승점(Finish line)에 서 계신 주님을 푯대로 해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에 그를 통제하고 계셨던 성령께서는 스데반을 통해 스데반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던 자들에게 선하게 대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스데반보다 더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제시했습니다.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담대하고 용감한 행동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어져 있었고 성령께서는 그의 영을 온전히 통제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스테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스데반이 높은 부르심의 푯대를 붙잡은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장과 누가복음 9장입니다. 한번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다. 당신은 스가랴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스데반의 모습입니까? 아마 저나 여러분이나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당연히 스가랴의 방식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육신 안에는 당연히 그런 기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대로 맞대응 해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1장에도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실 저는 이 사건 기록을 너무도 “흐뭇해” 하면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아마 지나치게 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열왕기하 1장 1절에서 12절을 보십시오.
1 그때에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니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던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使者)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라, 하니라. 3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이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엘리야가 떠나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매 왕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지금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가서 너희를 보낸 왕에게 돌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사람을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를 만나려고 올라와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냐? 하니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하매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하니라. 9 그때에 왕이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오십인대장이 엘리야에게로 올라가더니, 보라,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았으므로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0 엘리야가 오십인대장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 왕이 또 다시 다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 엘리야가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원수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리치는 모습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 명의 군인과 장교를 불살라 버리는 장면… 오! 너무나도 너무나도 통쾌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래보았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그럴 대상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요.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는 우상들을 보면서 다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몬타나에 있는 마리아 동상을 무너뜨리면 얼마 동안이나 감옥에 가야할지까지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온갖 이단 종파들도 하나님께서 통쾌하게 심판해 주셨으면 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여러 번 들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 씩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으니 102명을 화장시킨 셈이지요.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에 얼마나 통쾌해 했을까요? 13절과 14절을 보면 드디어 세 번째로 찾아온 자들이 벌벌 떨면서 무릎 꿇고 간청을 합니다.
13 왕이 다시 세번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므로 세번째 오십인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내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14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난번의 오십인대장 두 명과 그들의 부하 오십 명씩을 태웠사오니 그런즉 이제 내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하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얼마나 흐뭇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54절을 보겠습니다.
51 그분께서 위로 올려져서 영접 받으실 때가 이르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얼굴을 고정하시고 52 자기 얼굴 앞에 사자(使者)들을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니라. 53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듯한 얼굴이므로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매 54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같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여기 보니 야고보와 요한은 구약성경의 엘리야 사건을 상기시키며 주님께 자신들도 그렇게 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55절과 56절입니다.
55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56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니라.
답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멸하려는 것은 주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은 오히려 자신을 희생시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들어오셔서 하고자 하시는 그것입니다. 희생을 동반한 사랑, 이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야고보와 요한처럼 우리를 방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엘리야의 불”로 심판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는 더 이상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불살라 버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구원시키고자 원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자들은 불살라 멸하려 했으나 주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 그들로 영생의 축복을 받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시편 55편과 누가복음 2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들고 계신 “사랑의 막대기”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람들임을 깨달은 바 있습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의 인물 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편 55편을 보니 다윗 역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시편 55편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것에서 떠나 숨지 마소서. 2 내게 주목하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원망하는 중에 애곡하며 소리를 지르오니 3 이는 원수의 목소리와 사악한 자의 학대로 인함이니이다. 그들이 불법을 내 위로 던지며 진노하여 나를 미워하나이다. 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프며 사망의 두려움들이 나를 엄습하였나이다. 5 무서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눌렀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가 멀리 날아가 안식하리로다. 7 보라, 그때에 내가 저 멀리 다니다가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 내가 빨리 도망하여 거센 폭풍과 태풍에서 벗어나리로다, 하였나이다. 9 내가 도시 안에서 폭력과 분쟁을 보았사오니, 오 주여, 그들의 혀를 멸하시고 찢으소서. 10 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서 도시를 두루 다니니 도시 한가운데 해악과 슬픔이 있으며 11 사악함이 그것의 한가운데 있고 속임과 간교함이 그것의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나이다. 12 나를 모욕한 자가 원수가 아니었으니 원수였더라면 내가 참을 수 있었으리로다. 나를 향하여 자기를 높인 자가 나를 미워한 자가 아니니 나를 미워한 자였더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로다. 13 오직 그것은 곧 너니 나와 동등한 자요, 나의 안내자요, 내가 아는 자로다. 14 우리가 서로 다정히 의논하고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집으로 걸어갔도다. 15 사망이 그들을 붙들어서 그들이 산 채로 지옥에 내려가게 할지니 사악함이 그들의 거처들에 있으며 그들 가운데 있도다. 16 나로 말하건대 나는 하나님을 부르리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9절과 15절, 그리고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주님을 부르고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갈 것이나 악인들, 원수들은 다 지옥으로 보내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인간의 이 마음을 우리 중 그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3장입니다. 가롯 유다를 기억하시지요. 친구이셨던 예수님을 배반한 자입니다. 베드로도 친구이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는 맹세하여 저주까지 했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다 버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부인당하고 배반당하신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33절부터 읽겠습니다.
33 그들이 갈보리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범죄자들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여기 보니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와는 사뭇 다른 기도를 원수들을 위해서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여러분과 저는 거듭나 구원받았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우리는 스가랴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엘리야, 다윗처럼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구약성경에 입증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과 제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해 계시고 이로써 우리는 스가랴, 엘리야,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넓게 부어지지 못했으나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성령님에 의해 그 사랑이 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저와 여러분의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며 그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거하고 계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만큼 큰 사랑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 사랑을 보이심으로 여러분과 저를 스가랴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다윗보다도 더 나은 자들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배운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을 기억해 보십시오. 실로 “높은” 부르심이지요. 여러분 중에는 “저는 그런 수준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안 되겠는데요.”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그 용서의 기도가 다름 아닌 스데반의 입술에서 어떻게 흘러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성품과 사랑이 스데반을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도 표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쓴 뿌리와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과 분노, 이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오직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내어드리면 우리 마음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흘러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음을 내어드리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2009-05-01 18:20:22 | 관리자
성령의 열매: 기쁨/주님의 기쁨 · 즐거이 소리치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과 시편 그리고 기타 성경구절들을 통해 기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아홉 번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생산해 내기를 원하시는 것, 즉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주님께서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열매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을 다시 보십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지난 주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특성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 시간에는 두 번째 특성인 기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길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 시간 진심으로 기도하오니 주께서 저희 안에서 행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을 주셔서 저희를 통해 뜻을 이루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편 88편을 보십시다. 우선 성경 말씀으로 무엇이 기쁨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구절들을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기쁨이란 단지 행복한 상태, 기분이 좋은 느낌, 혹은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느낌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쁨은 행복의 표현이며, 감사의 표현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감격의 표현입니다.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땅이여, 너희는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66:1)
오 오라, 우리가 주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자. 우리가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고 시를 지어 그분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자.(시95:1~2)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께 큰 소리로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작은북을 여기로 가져오고 흥겨운 하프를 비파와 함께 가져올지어다.(시 81:1~3)
모든 땅들아, 너희는 주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100:1)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 즐거이 소리치라(make a joyful noise) “즐거운 소리(joyful noise)”로 번역된 이 표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소리(시끄러움)와 연관시키고 계십니다. 기쁨은 크게 소리 지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치 미식축구에서 터치다운을 할 때, 또는 야구에서 홈런을 칠 때 광적인 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경마, 아니면 음악이 되었건 간에 그것에 몰입해 있던 사람들이 그 상황에 압도되어 외쳐대는 것, 그것이 희락(기쁨)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면 “저는 사랑스럽게 사람을 대할 줄 몰라요. 좀 무뚝뚝한 성격이라서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성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을 행하실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장악하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운동이나 오락에 그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과 한패가 되어 운동이든 오락이든 함께 빠져드는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은 생각을 품은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은사주의자”라고 불릴까봐 두려워서 기쁨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쁨에 관해 말씀하는 곳에는 소리(시끄러움)가 동반됩니다.
시편 35편 27절 “나의 의로운 사정을 지지하는 자들이 기뻐 외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참으로 그들이 계속해서 이르기를, 자기 종의 형통함을 기뻐하시는 주를 크게 높일지어다, 하게 하소서.” 외치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시편 132편 9절 “주의 제사장들은 의로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기뻐 외칠지어다.”를 보십시오.(이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시 132편 9절을 보니 주의 제사장이 나오는데 여러분과 제가 제사장들이 되었다고 베드로전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이란 표현 역시 저와 여러분에게 당연히 해당되지요.
정리해 보면, 성경 말씀에 기쁨이란 반드시 소리, 외침, 시끄러움 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이애미 돌핀즈 팀의 팬들은 모자도 티셔츠도 자켓도 모조리 돌핀즈 마크가 달린 것만 입고, 자동차 번호판에도 범퍼에도 온통 돌핀즈 스티커 투성이입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게임이 있는 날이면 운동장에 가서 실컷 소리를 질러댑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더 큰 기쁨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보혈로 씻음 받고 거듭나서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사람들, 같은 영생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 마크나 이름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습니까? 그러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광신자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혹은 아직 영적으로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육신적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쑥스러워서 사람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렇지만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흥분하여도 큰 소리로 찬양도 못하고, 구원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할렐루야를 외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통제하신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찬양을 할 것이고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주님 안에서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건전한 교리에 맞게 질서 있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들에 마음이 압도되어 흥분하고 소리치며 기뻐할 때 역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팬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열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이 다른 모든 일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온전히 자기 팀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진정한 “흥분”이 없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몰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시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기쁨은 “소리”로 표현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쁨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이 되어 있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 전체에 걸쳐 기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여겨 둘 점이 있다면 그 기쁨은 항상 슬픔과 눈물과 더불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슬픔, 눈물 그리고 이어 기쁨이 등장합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사무엘상 18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란 단어가 사무엘상 18장 이전에는 성경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상 18장 5절에서 7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기쁨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5 사울이 다윗을 보내는 곳마다 그가 가서 지혜롭게 행동하매 사울이 그를 세워 군사들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온 백성의 눈앞에서와 사울의 신하들의 눈앞에서 그가 인정을 받으니라. 6 그들이 돌아올 때 곧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살육하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에서 나아와 노래하고 춤추며 작은북과 악기를 가지고 기뻐하며 사울 왕을 맞이하는데 7 여인들이 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
이곳에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적들로부터 구출해 주심을 기뻐하며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에스라서 3장 10절에서 13절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 건축자들이 주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옷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의 아들들 레위 사람들은 심벌즈를 들고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주를 찬양하되 11 그들이 돌아가면서 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함께 노래하였으니 이는 그분께서 선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기 때문이더라. 주의 집의 기초가 놓였으므로 온 백성이 주를 찬송하며 매우 큰 소리로 소리를 내었더라. 12 그러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곧 첫 번째 집을 보았던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 이 집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크게 통곡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뻐서 크게 소리를 내니 13 이에 기뻐서 내는 소리와 백성의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구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더라.
여기를 보아도 기쁨이 넘쳐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저기서 시끌벅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마을(플로리다, 딜랜드 시)에서는 언제 그런 시끄러운 소리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홈팀이 터치다운을 할 때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에스라 3장의 굉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완성하고 기뻐 외치는 소리입니다. 느헤미야 12장 4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그날에 그들이 큰 희생물을 드리고 기뻐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더라. 아내들과 아이들도 기뻐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더라.
여기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결코 육신적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넘치게 주신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육신적인 시끄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너무도 크게 감동시키셨기에 마음속의 기쁨이 입으로 터져 나온 것뿐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성경 말씀처럼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흘러 넘쳐 우리의 입으로 그 기쁨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43절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멀리 멀리까지 들리도록 시끌벅적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응원하는 마이애미 돌핀스 팀이 상대팀 진영에 터치다운시키는 모습을 보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대며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모임을 갖고 있을 때, 마귀의 팀에 속한 사람들은 그 기쁜 모습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14절부터 23절까지입니다.
14 하늘의 왕국은 마치 먼 나라로 여행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어떤 사람과 같으니 15 그가 하나에게는 오 달란트를, 다른 하나에게는 이 달란트를, 다른 하나에게는 일 달란트를 주되 각 사람에게 그의 개별적인 능력에 따라 주고 곧 여행길을 떠나니라. 16 이에 오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오 달란트를 더 만들고 17 이 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하여 이 달란트를 더 벌되 18 일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감추었더라. 19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계산하니 20 이에 오 달란트 받았던 자는 오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주께서 내게 오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소서, 내가 그것들 외에 오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하매 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 22 이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주께서 내게 이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소서, 내가 그것들 외에 이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하매 23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들을 상기해 보십시다. 성경에서 최초로 기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원수인 거인(골리앗)과 그의 졸개들을 대항하여 단 한 사람을 통해 승리를 안겨 주셨을 때였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원수들을 물리친 것이었지요. 두 번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 등장하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안전하게 되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했을 때로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란 용어가 느헤미야서에서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은 마태복음 25장에는 이스라엘의 왕께서 재림하실 때A) 다시 “주의 기쁨”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니 기쁨이란(성경적 의미에서)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이 땅에 평강의 왕국을 재건하시게 될 때 왕과 백성이 마음으로 느끼게 될 감정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주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돌아오셔서 자기 왕국을 세우실 때 주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동일한 그 기쁨을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주시기 원하십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이미 하나님의 왕국 안에 놓으셨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하늘의 처소에 그분과 함께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인 영역에서 실제로 누렸던 모든 것들을 여러분과 저는 영적인 영역에서 오늘 이 순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하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기만 하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유대 백성이 왜 크게 소리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모든 원수들이 패배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수들도 이미 패배 당했습니다. 왜 유대 백성이 소리치고 있습니까? 이는 곧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 이미 평강이 임해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그들에게 모든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 소리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신 약속들을 성취하지 않으셔났요?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 실현되었기에 소리를 지르며 기뻐합니다. 우리 역시 소망을 성취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있는 영적인 복들로 이미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주님과 그분의 백성이 느끼는 뜨거운 감격, 그것이 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마음 안에 매 순간마다 열매로 생산해 내시고자 일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니 주님께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외치는 소리”(shout)와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쁘시면 그리하시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극히 일부)은 휴거를 생각하면 흥분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그분의 흥분은 어떠하실까요? 보통 결혼식 때 보면 신부는 조금 긴장해 있는 게 보통인 반면 신랑은 기쁨에 들떠 흥분되어 있습니다.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그리 흥분된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만 신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큰 기쁨에 몹시 흥분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그 기쁨을 보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기쁨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분이 돌아오셔서 그분과 그분의 백성이 새로 세워지는 왕국을 보고 흥분하게 될 그날처럼 여러분과 제가 매일 아침 그렇게 흥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의 한 가지 특성인 기쁨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하루하루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년왕국을 상속받을 그때의 기쁨과 흥분을 맛보는 날들이 되기를 주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특성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에 대해 살펴보니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번 우리 모두 솔직해 보십시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으로 인해 너무도 감격스러워 하며 흥분했던 마지막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저는 사실 구원으로 인해 매일 기쁜데요...”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얼마만큼 기쁜지 솔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온몸이 전율될 만큼 기쁘신가요?
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푹 빠져 지내다보면 하나님만 빼고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입니다. 물론 최후의 보루는 여전히 남아있지요. “나는 구원받았다.” 맞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하늘나라로 갑니다. 문제는 그 구원이 현재의 삶에 무슨 유익을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도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왕이신 주님이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될 때 기뻐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구원으로 인해 흥분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요한복음으로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십시다. 16장 13절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여기 보면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영께서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보니 그분께서는 “다가올 일들”에 대해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들이 아니고 미래의 일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6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서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라. 15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게서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읽고 우리는 이것이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반을 같이 동거동락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앞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앞으로 있게 될 것들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슬피 울며 애통할 터이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또 너희는 근심할 터이나 너희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리라.
여기 보니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는 기쁨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산고를 겪으면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거니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으로 인해 다시는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보니 “산고”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성경 그 어디를 봐도 여인의 산고가 언급된 곳은 전부 “유대인의 환란(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니 드디어 아이가 태어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희에게 근심이 있으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환란 기간 중 극도로 고통을 겪고 슬픔을 당하다가 드디어 구출되어 영광 중에 오시는 왕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때에는 모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일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런데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순간 여러분과 제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데리러 오실 때 저도 그런 기쁨을 맛볼 것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말하실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갖게 해 주시고자 한단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형제님, 형제님은 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사는지 모르시죠? 아시면 기뻐하란 말씀은 못하실 겁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겪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2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이 기쁨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기쁨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기뻐할 그런 큰 기쁨을 성령께서 제 안에 열매로 맺어주시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기쁨은 결코 빼앗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기쁨”이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보니 “나의 기쁨”(즉 주님의 기쁨) 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의 기쁨(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기쁨입니까? 주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누구 안에 머무르게 됩니까? “너희” 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소위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신나는 음악과 더불어 일어나 멋진 상상들을 하면서 “오늘은 놀라운 날이 될 거야. 오늘은 하루 종일 행복할 거야. 하하하... 아멘, 할렐루야!” 그래 놓고는 출근하려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는 순간, 밧데리가 다 나가버린 걸 알자 기쁨이고 행복이고 모두가 다 같이 날아가 버리는…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쁨은 조금만 상황이 나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기쁨”을 누리다가 순식간에 기쁨이 사라진 경험을 여러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이 머물러 있다면 어떻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노라. 그 누구도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노라. 네가 비록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으나 그때까지의 모든 것은 내가 책임을 지겠노라. 내가 네게 나의 기쁨을 주노니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노라…” 그렇습니다. 이 기쁨을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13절엔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것들을 말하옵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자기들 안에서 성취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기쁨을 제자들 안에서 성취(fulfilled)하게 함이라고 되어 있군요. 성취란 단어는 “가득(fully) 채워 주신다”(filled)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땅으로 재림하실 때 갖게 될 기쁨만큼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 정도의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와 같은 중보를 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다(충만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통제하에 놓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께서 해 주신 것들에 대해 흥분하고 감격하여 소리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육신적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A)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실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은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는 영적 환경이 너무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성경 한 구절을 더 찾아보십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5 이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고 권능과 성령님과 큰 확신(確信)으로 이르렀기 때문이니 우리가 너희를 위해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고난 속에서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에게 본이 되었느니라.
여기 보니 많은 고난 속에 놓여 있는 성도들이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고(6절) 되어 있습니다. 많은 고난 속에 놓여 있었으나 이 고난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님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에 의해 점령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껏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스포츠축제(월드시리즈, 월드컵 등)나 록 콘서트(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에서 “광분”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하거나 조롱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과 영웅들로 인해 흥분하고 광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다음에 보게 될 때는 비판이나 조롱대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내가 구원받은 그것으로 인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복으로 복 받은 그것으로 인해 나도 그들처럼 “미친 듯”이 감격하고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이 시간 그런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게도 기뻐할 수 있건만(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생과 축복과 소망으로 인해 더욱더 기뻐 날뛰고 소리쳐 기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꼭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늘 아버지시여! 제 삶에는 행복한 순간도, 기분이 괜찮은 때도, 그리고 좋은 느낌으로 가득 찬 순간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주님, 그런 것들은 육신적인 것들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아버지시여,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넘쳐 흘러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흥분과 외침이 가득한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것들과 행하고 계신 것들과 행하실 것들로 인해 기뻐하게 하소서. 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19:33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구원과 성숙을 위한 기다림
오늘 설교는 상당히 꺼림칙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4시간 전에 오늘 설교 제목인 “오래 참음”에 있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실패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허나 이미 앞서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저도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 계속 역사(work)하셔서 결국은 이 열매도 맺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라고 합니다. 오늘은 “오래 참음”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마 오늘 말씀은 듣고 놀라실 분이 많으실 겁니다. 솔직히 저도 매우 놀랐으니까요. 사실 오늘 이 메시지를 전할 때까지도 저는 이 내용을 인식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성경구절들과 그 앞뒤 문맥을 다 찾아 읽어 가다보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반역을 한 이 세상의 죄인들에 대해 취하시고 계신 태도가 다름 아닌 오래 참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성경의 어떤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하다가 성경구절들을 비교하며 문맥을 살피다 그 정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경우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과 저의 그 어떤 죄악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철회하시도록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축복과 용서를 취소하시도록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오래 참음”이 부족합니다. 물론, 저는 최선을 다해 주님의 증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정말이지 “더 이상은 못 하겠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죄인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오후 제가 전화를 한 통화 받았는데 누군가가 저한테 전화하면 성경에 관해 답변해 줄 수 있다고 해서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는 대로 도와드릴 수 있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믿을 만한 근거 구절이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럼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우선 당신께서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계신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좀 힘들지요. 상당한 구절들이 다르거든요.” 그랬더니 “좋습니다.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5장 7절을 보세요.”라고 했더니 “그 구절은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에는 없는 구절인데요.”라고 즉각적인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사람은 진리를 알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했더니 ‘하나의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했더니,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invisible)이신데 어떻게 보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으니 보일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즉시 엉터리 성경을 인용하면서 육신을 입고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그분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20분이 넘게 인내심을 갖고 공손하게, 그리고 친절한 어조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그는 킹제임스의 오류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알고 보니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좀 “날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처음부터 “저는 여호와의 증인인데 당신과 성경에 대해 논쟁을 좀 하려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저도 기꺼이 그 논쟁에 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저를 속이고서는 마치 성경에 대해 문의를 하는 것처럼 했지요. 결국 저는 성질을 못 참고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메시지를 실패 가운데 전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우선은 그 사람이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고 제가 인용하는 성경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랬고, 또한 제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으니 마음이 상했지요. 그러나 정말 제 마음이 상한 것은 제가 그 사람에게 끌려가 결국은 육신적으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였고 저는 구원받은 사람이었는데도 누군가가 그 사건을 주시하고 결말을 지켜보았다면 제가 오히려 더 나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이 더욱 속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하거늘 결과는 그렇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 사람 하나를 그저 30분 정도 대하면서도 못 참고 말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수백만이 넘는 자들을 매순간마다 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래 참음”이라는 주제를 대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전혀 근접하고 있지 못한 저를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거리설교를 좋아합니다. 한 30분 정도 “열”을 내서 외쳐대고 나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제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왜 저들을 땅을 갈라 산채로 집어던지지 않으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제가 76년에 구원받았으니 만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75년에 끝나버렸다면 저는 지금 지옥에 가 있겠지요. 이중에는 “91년에 하나님의 인내가 끝났다면 나는 지옥행이었을 텐데.”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아버지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 아버지의 성품은 어떠하신지 보여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며 이를 통해 우리가 아버지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후서 3장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오래 참음(longsuffering)이란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 즉 악한 자들에 대해 취하시는 자세, 혹은 태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배우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4절부터 15절까지 보십시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나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는 말씀 말입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구원인데 어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그러나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인데요.”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함을 감안한다면(‘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 생각나시지요!) 아마 13세 이전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 13세 이전에 구원받으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예외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3세가 넘어 20세, 30세가 되어서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들의 소행을 참아 오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처벌 받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태도, 나의 언어, 나의 교만, 나의 불순종뿐만 아니라 온갖 소행 등을 다 참아내시고 결국 제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받을 때까지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선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까지 보겠습니다.
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으로 인해 슬퍼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입니다.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
창세기 5장을 보면 에녹이 휴거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또 하나의 휴거가 나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소행을 오랫동안 참고 계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를 다 완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사악한 자들에게 의인 노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오랜 기간을 오래 참고 계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토록 오래 참으심... 이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여러분과 저의 인격이나 수양이나 본성이나 기질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오래 참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죄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동성연애자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곳에 가서 전도지를 나누어줄 때,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성질내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것들이 노아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이르기를 사람의 사악함이 커지고 모든 생각과 상상이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근심하셨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들 악한 자들 모두에게 언제든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오래 동안 참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돌이켰더라면 언제든지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즘 낙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이란 사람들이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들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오래 참음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여기 보니 비웃는 자들이 등장하는군요. 저는 사실 이런 자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들은 일부러 알려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정말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들려주는데 왜, 왜, 왜 거부 하는거냐? 이 못된 자들아! 속히 회개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거라!”며 목이 터지도록 외쳐대고 싶은 심정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지옥에는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분은 그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도 아무 말을 안 할 겁니다. “이봐요,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거의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속히 영적으로 성숙해서 올바른 태도로 전도하는 것이 최상입니다만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은 아닙니다. 지금은 좀 육신적인 모습이지만 그 언젠가 성령께서 온전히 통제하실 때 올바른 자세로 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7절부터 보십시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말씀을 보니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결국은 불로 심판받게 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주목하십시오. 저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복음을 거부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래, 나는 내 할 일을 했으니 주님을 거부한 자여! 그대 갈 길로 영원한 지옥불로 가거라!”는 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모양이야 어떻든 제가 해야 할 의무 중 증언(witnessing)은 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서를 보니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우리의 조급함을 비교해 보세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발로 먼지를 털며, “오, 그래? 우리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거야.” 하고 끝내 버리기가 일쑤 아닙니까?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의 통제하에 놓여 있지 않고 육신 안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르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어째서 지난주에 하늘과 땅이 불타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번 주에도 몇 사람이 구원받도록 주님께서 오래 참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왜 지구가 불살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오늘 오후에 그 누군가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사악함을 말끔히 정결케 하시고자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4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당연히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타락사건 때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으나 실은 아담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담대신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해 오래 참으셨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기록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가인이 첫 번째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인의 생명을 빼앗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아 시대에도 앞서 본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출애굽기 34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옵니다. 두 개의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10계명입니다. 32장에 모세가 내려오는데 멀리서 보니 아론이 이상한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보니 사람들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며 벌거벗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흉측한 모습을 본 모세는 크게 분노하여 두 돌판을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강물에 풀어 모두가 마시도록 했습니다. 3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산으로 부르십니다. 34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으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내가 이 판들 위에 쓰리니
여기 보니 금송아지 만들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모세가 10계명이 들어있는 돌판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주님, 금송아지 만든 자들이 계명을 깨뜨린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항변했을지도 모르지요. “모세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다시 쓰겠으니 꼭 같은 판을 두 개 만들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시고 계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2 아침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거기서 산꼭대기에서 네 자신을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게 하며 온 산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게 하고 양 떼나 소 떼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돌 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내 산에 올라가니 5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6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8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며
6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중에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셔서 시내산까지 인도하셨으나 이들은 그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모세는 참을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참으셨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다시 십계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들이 그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집트에서 보이신 열 번의 재앙, 유월절 사건, 홍해를 건넌 기적,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를 보고도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 싶지만 사실입니다. 표적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참아내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할 때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고 계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분과 제가 보았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와 심판, 정의, 지옥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쭉 열거하면서 정죄를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거부하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소. 당신은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히 불타오르며 고통을 당할 것이지요. 꼴좋게 됐군요.” 혹시 이것이 여러분과 제 입에서 나올 법한 말들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행동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서너 번이 지나고 계속해서 고집불통으로 복음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경우, 어쩌면 여러분과 저는 그런 식으로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옥과 심판에 대해서는 정확히 선포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죄인들이 지옥가기를 바란다는 식의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14장 17절입니다.
17 이제 간청 하옵나니 이미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주의 권능을 크게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결코 죄 있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치우지 아니하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
여기 보니 모세가 앞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말씀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세는 주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18절)을 제일 먼저 기억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해 볼 때 모세의 마음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자주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가 아차하면 과거에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또 참고 기다리셨는지를 상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오, 놀랍도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여! 과연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래 참아 주셨기에 드디어 여러분과 저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벌써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이 오래 참으심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로마서 2장으로 가기 전에 로마서 1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29 그들은 곧 모든 불의와 음행과 사악함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논쟁과 속임수와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뒤에서 헐뜯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업신여기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요, 31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32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1 그러므로 오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 변명할 수 없나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들을 행하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서 네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라. 2 그러나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3 오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판단하고도 같은 일들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 보니 온갖 죄를 지은 자들의 목록이 나오고 결국 32절에서 이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2장 1절에서 3절에서는 그런 짓을 행하는 자들을 판단해 놓고도 같은 일을 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4절을 보십시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29절에 불의한 자가 나오는데 32절에 따르면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2장 4절을 보니 그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29절에 음행하는 자가 나오고 32절에 죽어 마땅함이 나오는데 2장 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도 오래 참으십니다. 여기 나와 있는 죄의 목록 중 여러분과 제가 저질렀던 죄들도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해 우리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이 점은 여러분도 스스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부터 31절까지 나오는 모든 죄들 하나하나가 다 죽어 마땅하다는 판결이 났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죄들을 지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2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하심, 관대하심, 그리고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이 없었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회개할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복음을 믿으셨나요? 아니면 그전에 여러 번 거절하거나 무시하고 조롱하지 아니하셨나요? 아마 우리 대다수는 회개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지옥불에 던져졌을 겁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이처럼 소중한 것인 줄 알고 계셨습니까? 로마서 9장으로 가 보십시다. 22절입니다.
22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고 자신의 권능을 알리기 위해 파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 23 이로써 영광에 이르도록 미리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려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긍휼의 그릇들은 우리니 곧 그분께서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니라.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심히 학대했던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살려두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통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자에게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합은 사악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가 열다섯 살 때에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를 매일 아침, 그 어느 때고 죽이실 생각만 있으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숭배, 이세벨 사건, 나발 사건, 선지자들을 학대함 등등 셀 수 없는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이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야를 보내셔서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자에게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경은 실로 놀라운 책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이방제국의 독재자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강요한 자요, 거부하는 자들을 풀무 불에 내던진 자입니다.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져다가 파티용 그릇으로 사용했던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중 일부를 내시로 삼고 노예로 삼는 등 실로 엄청난 짓을 저지른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어느 때고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살려두셨다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제게 만일 전능한 권능이 있었다면 저는 아마도 파라오, 아합, 느부갓네살도 결코 오래 살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셔서 이들이 참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느브갓네살이 다니엘서 4장에서 다니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말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저런 못된 사람을, 못된 우상숭배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심으로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연장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나쁜 자들마저도 지옥에 내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제 서재에는 엄청난 양의 선교사의 전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책들을 읽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고문당하는 이야기를 읽어 보시기 권합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코 들으려하지 않는 고위 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못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즉시 죽이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구원받도록 기회를 주시려고 오래 참으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에게는 이러한 오래 참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원받은 자녀이고 성령께서 제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처럼 오래 참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교사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같은 선교사들 말입니다. 어떻게 이들 선교사들은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우리는 히틀러 같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택동 같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카스트로도 호치민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좀더 살펴보십시다. 예레미야 15장과 디모데후서 3장을 통해 이 주제와 관련해 조금만 더 보십시다. 예레미야 15장 15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나를 기억하고 돌아 보사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시는 중에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를 위하여 내가 책망 당하는 줄 아시옵소서.
내용인즉 예레미야는 주를 섬기는 자기를 너무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을 당장 “박살”내 달라고 하는군요.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든 오래 참으셔도 상관없으나(예를 들면 아담, 가인 등)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당장 복수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오래 참으시는 중에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위해 당하는 박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당장 갚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10절에서 14절입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자녀 디모데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명합니다. 내용인즉 그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성품대로(godly) 살다가 얼마나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당했는지를 잘 기억하고, 혹시 그런 일들을 당할지라도 본 그대로 참아내고 이겨내라고 합니다. “디모데, 너는 나와 함께 다니며 우리가 받은 핍박과 그 핍박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잘 알고 있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는 늘 그런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네가 배운 대로 계속해서 그리하라.” 이것이 바울이 그의 유언 같은 디모데후서에서 남긴 말입니다. “배운 대로 계속하라(continue)!”, “배운 대로 계속하라(continue)!”
바울은 그가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도, 비방과 핍박을 받았을 때도, 능욕을 당했을 때도,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 어느 때든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오래 참음으로 세상의 악한 행실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들에게로 돌아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교훈을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네가 보고 배운 그대로 계속하라. 왜냐하면 그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저라면 어떠했을까요? 제가 복음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힌다면 복음 증거를 중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제게 없다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오래 참음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누어 주셔서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 봅시다. 4장 1절도 같은 문맥입니다.
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여기 보니 2절에 말씀을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3장 17절에 그 말씀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다시 4장 2절에 보니 때가 맞든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만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대로 교리를 가르칠 수 있고, 책망할 수도 있고, 바로잡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17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throughly) 갖추어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철저히”란 단어를 보십시오.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하여 철저히 준비된다는 뜻입니다. 3장 17절이 없다면 4장 2절의 나의 책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침에 저는 전화 걸어온 사람에게 교리, 책망, 바로잡음, 의로 교육하는 일에는 능숙했는지 모르지만 제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오래 참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멋지게 수행하여 내가 옳고 그가 틀리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지만, 3장 17절을 지키지 못해 결국 제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그 사람에게 올바르게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선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말하고 책망도 하고 권면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다면 그분의 오래 참음이 함께 했을 테지요. 즉 주님의 일을 하더라도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오래 참음으로 저를 통제하고 돕지 아니하신다면 주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으로 교리도 전하고, 책망도 전하고, 바로잡아 주고 의로 교육하고 권면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도로서 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이 우리를 통제하지 아니하시면 결국 우리는 성령님대신 우리 육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 결과는 몹시 추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두 구절을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십시다. 12절부터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13 내가 전에는 신성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얻게 됨은 내가 믿지 아니하는 중에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기 때문이라.
여기 보니 바울은 전에 신성모독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복음 전하러 가면 이런 자들을 종종 만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런 자들 중에서 바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고문을 받으며 때론 화형에 처해지면서까지 그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분들은 이런 자들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4절부터 이어 읽겠습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16 그러나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
16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바울 같은 신성모독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가 긍휼을 얻어 구원받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주님께서 바울의 모든 소행을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은 이렇게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나는 너의 온갖 소행을 오랫동안 참아왔다. 그러나 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알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리라. 나는 너를 구원하리라. 이제 됐으니 돌아서서 내게 오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6절 끝부분을 보니 바울이 본(pattern)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떠한 본을 말합니까? 비록 우리가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어도, 쓰러져 장님이 되진 않았어도, 우리 모두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행을 모든 오래 참으심으로 견디어 내신 후” 그분의 긍휼을 힘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우리 모두의 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오래 참으심이 여러분과 제 안에서 발휘되기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받아들여 점점 더 인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인해 죄인들이 정죄대신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절부터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 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3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며 4 오직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 많은 인내와 고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갖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 6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
4절을 보니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되는 것이 나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모두가 그리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입증되려면 인내, 고난, 궁핍, 곤경(5절),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중간에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이 오래 참음으로 고난, 궁핍, 곤경, 매 맞음, 옥에 갖힘, 소동, 수고, 깨어 있음, 금식 등을 다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ungodly)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우리 경건한 자들(godly)이 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못되게 굴거나 잘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오래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거나 다투어 죄를 짓고, 간증을 잃어버리는 수가 얼마나 많은지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되어서는 안 되겠죠.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오래 참음으로 인해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자주 곤경에 처하거나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으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오히려 우리로 죄를 짓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철저히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에도 당시의 경건치 않은 자들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인류 역사 내내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혹시 회개할까 오래오래 참아오셨습니다. 그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도 오래 참기 원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인해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희 안에 주께서 살아 계심을 보게 하사 저희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18:37 | 관리자
성령의 열매: 화평 /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열매 11번을 공부하기 전에 로마서 5장과 이사야 57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거나, 누군가에게 쓴뿌리가 남아 있거나, 아직도 근심 걱정에 눌려 있거나, 혹은 그 어떤 죄가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다면 우리가 배웠던 지난 열 번의 성령의 열매를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시기(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패배감에 젖어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승리로 점철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삼손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삼손은 승리와 패배, 승리와 패배를 계속 반복하는 오르락내리락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7절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원수들을 공개적으로 패퇴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승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승리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수고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승리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승리는 우리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통제하에 순복시킬 때 가능합니다. 이때 우리가 성령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령의 열매가 우리를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번 “사랑”에 대해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 넓게 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로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 있는 대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라고 합니다. 이번 공부에서는 화평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화평(평안)을 얻고자 애쓰는 인간의 육신적 노력이 너무도 나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는 실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평안이든 국가적인 평화이든 간에 평화처럼 얻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화평(평안, 평강, 평화)에 대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합니다. 60~70년대를 거쳐 오신 분들은 온 세상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쳐대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반전운동, 세계평화대회, 평화행진, 데모, 각종 시위나 평화회담 등 아무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이 땅에서 평화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 많은 폭력, 살인, 충돌, 전쟁, 다툼 이런 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넘쳐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진 에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그 화평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왔지만 여전히 “평화”는 갈망의 대상일 뿐 현실은 되지 못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창설된 유엔이 활동을 개시한 이래로 100여 개의 전쟁이 이 세상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으니 평화의 성취야말로 전도요원(前途遙遠)한 것 같습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평화의 통치자(Prince of peace)가 없다면 이 땅에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카톨릭 등 온갖 종교들이 평화를 수호한다며 외쳐대고 떠들어 봐야 평화의 통치자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줄 온갖 수단들(신경안정제, 뉴에이지 음악, 온갖 마약, 요가, 마인트 콘트롤 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주님께 나아와 구원받고 그 결과로 평강을 누리게 될 때까지 아마 애들 많이 쓰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가라앉히고, 죄책감을 없애고, 죄짐을 내려놓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저와 여러분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5장 1절로 가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시고 이사야서 57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19 내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노라.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20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안식하지 못할 때의 요동하는 바다 같아서 그들의 물은 진흙과 오물을 내느니라. 21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
말씀을 보니 사악한 자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결코 평강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 로마서 5장 1절에는 여러분과 저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화평(peace)을 누린다고(have) 되어 있습니다. 이 화평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peace with God) 누리는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에베소서 2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3절부터 14절 상반절까지입니다.
13 이제는 한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앞서 우리는 이사야서 57장에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화평, 평강, 평안)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장이나 가정이 반드시 평화로운 장소일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발견합니다. 장소와 환경과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으로 둘러싸여진 세상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강은 전쟁의 종식도 아니고 우리의 원수들이 도말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이 다 사라진 상태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는 우리의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없다면 화평도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아무리 좋은 처방을 내려주더라도 그것이 화평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집회에 자주 참석하든, 아무리 좋은 건강식품을 먹든지 간에 그 어떤 것들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결코 당신에게 화평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저희를 도우셔서 이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는 종종 사람들이 “예수님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No Jesus, No peace)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스티커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평강을 알게 된다.”(Know Jesus, Know peace) 실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살펴본 로마서 5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로마서 5장에 보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겠지요. 그러나 의롭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 신앙생활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고 휴거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아니하면 비록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이 땅에선 어쩌면 구원받기 전과 별반 차이 없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1절에 이어 2절을 읽겠습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말씀을 보니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with)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이 끝이 아니고, 이에 더하여 무엇이 더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가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만 붙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하늘나라에 가게 될 그때까지의 중간 기간에는 주님께서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거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세의 삶은 엉망진창이거나 삶이 비참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확신과 기쁨과 축복을 누렸고 죽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중간의 삶은 왜 확신과 기쁨과 평강대신 “그저 그런” 삶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작과 끝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 중간 동안에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련과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못한 것인지 저는 실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부활시켜 하늘로 데려 가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바로 로마서 5장 2절이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다(have access)고 말씀하십니다. 은혜가 우리의 소유는 아니지만 접근(access)이 늘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어떤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까? 2절을 보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 기쁨이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입니다. 3절에 환란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1절에 나온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모두 다 환란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접근)을 얻은 자들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환란을 겪으면서 기뻐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우리 과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0절 끝부분은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now) 속죄를 받았으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또한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이제(now)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에 대한 언급입니다. 우리는 속죄하면 늘 과거 생각을 하고 미래에 하늘나라 갈 생각만 하지만 이 속죄는 현재 내가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요, 따라서 현재(이 땅에 사는 동안)의 삶에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간다는 사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환란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내가 지니게 된 평강은 환란이 닥쳐오면 한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환란을 겪는 동안(즉 현재적 삶)에 우리는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평강으로는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파도가 치고 폭풍이 몰려올 때 우리 모두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저는 요즘 자주 비행기를 타고 설교하러 다니는 편입니다. 이륙에서 착륙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날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늘 평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평강 가지고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 평강에 관한 성경구절을 암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인생의 시련들이 닥쳐올 때면 나의 평강은 여지없이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평강이 부족하고 평강을 생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십시오. 36절부터입니다.
36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하더니 37 큰 폭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서 이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그분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A)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39 그분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즉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 40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이르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하는가? 하더라.
36절, 37절에 보니 큰 폭풍에 배가 침몰될 지경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평강이 폭풍과 파도가 일으키는 불안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폭풍과 파도가 일으킨 두려움과 불안보다 주님께서는 훨씬 더 큰 평강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의 평강을 “돌아보지 아니하심”으로 착각했습니다.(38절) 여기서 잠깐 빌립보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은 우리 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Be careful for nothing)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셨고(6절) 오히려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 하셨습니다(7절). 폭풍 속에서 제자들은 외쳐댑니다. “주여, 염려가 되지 않으십니까? 주여, 염려가 안 되시냐구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나의 염려를 내 아버지께 모두 맡겼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내 염려를 다 받으셨고 내게는 아버지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나는 이 폭풍이 두렵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내가 바다 건너편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평안을 지니고 계셨기에 폭풍우 가운데서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는 가지셔야 할 염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염려는 다 아버지에게 맡긴 후였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폭풍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평강으로 평안을 유지하고 계셨으나 제자들은 동일한 폭풍우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환경도 여건도 상황도 동일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고 제자들은 그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 차이일 뿐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바람도 바다도 다 그분께 순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peace)을 받아서 바람과 파도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peace, be still.) 여기 보니 영어로 “peace”라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평강을 공급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 평강을 바람과 바다는 받아들여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동일한 평강을 우리에게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바람과 파도와는 달리 도무지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피조세계(creation)는 주님께 순종하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평안(peace)이 너희에게 있으라, 하면 즉시로 “주님, 그렇지만 제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어떡하고요?”, “주님, 제 처지를 이해 못하시는 것 아닙니까?”, “주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평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대꾸하면서 불순종을 일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7장 20절에 보니 사악한 자들은 안식하지 못할 때의 요동하는 바다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흙과 오물을 낸다고 했지요. 정확히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국 21절에서처럼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사악하다”고 하니까 즉시 “아닙니다. 저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저는 구원 받았는데요.”라고 대답하시더군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만큼 사악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악한 자들”이란 결혼해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악한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평안이 한계에 다다를 때 왜 우리는 더 이상은 평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강을 받아들일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염려를 가져온 이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충분히 담당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기실 수 있고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로 데려 가실 수도 있다고 믿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 “근심” 혹은 “염려” 같은 문제를 하나님께서 담당치 못하실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불신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 문제만은 하나님께 못 맡기겠어.”, “이 문제만은 아버지께 의탁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제 감정은 절대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모습들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사악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처럼 작은 분이시기에 당신의 그 큰 문제와 그 큰 염려는 도저히 어찌하실 수 없다는 것인가요?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삶에서 종종 부딪히는 현상입니다. 힘든 문제에 부딪치면 스스로 무진 애를 쓰다가 정작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한 순간에는 “불신”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을 생산해 낼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평안은 성령께서만이 맺으실 수 있는 열매라는 사실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을 보겠습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 보니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안을 늘려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나의 평안(my peace)” 즉 주님의 평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평안이 항상 가능하다는 것 아시지요?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어떤 것을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이 성립될까요? 주님께서 해결치 못한 문제가 지난 24시간 동안 있었을까요? 주께서 두려워하실 일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7절 말씀대로 주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14장 1절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모든 두려움, 불안, 의심, 불확실, 좌절, 초조감 등은 인간에게 신뢰를 둘 때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과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되었건 남이 되었건 간에 인간은 “그것”을 해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평안이란 인간의 행동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사라져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안은 인간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므로 제한이 없습니다. 이 평안은 우리 안에 항상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의 책임하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우리 안에서 살아내시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 내일 GM 자동차 회사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회사가 어떻게 되는가는 내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염려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늘 근심과 염려 속에 살면서 평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중에는 얼마나 힘든 일들이 생기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엔 우리 인생의 일들로 가득 차 있으니 근심 걱정이 떠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니 그분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맡길 수 있고 그렇게 될 때에만 평안한 마음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사야서 2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도 함께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평안했다가 갑자기 닥친 위기 상황 때문에 내 마음이 불안해졌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대신 그 위기에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거나, 가족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거나, 회사의 부도 소식을 듣게 되면 자연히 두렵고 불안해지며 긴장이 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디에다 고정시키느냐입니다. 만약 내게 닥친 그 위기만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마음의 평강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나의 생각이 하나님께 머무르게 된다면 그분의 평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도중 계속해서 어려움들이 닥치는 것은 우리로 그 어려움대신 주님께 생각을 고정시키도록 훈련시키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3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생각이 주께 고정된 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도 그러기가 힘든데 모든 일이 엉망으로 되어버렸다면 그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6절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한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앞서 우리는 파도와 폭풍우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사실(peace를 받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37절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만물이 주님께 순복하고 평안을 되찾는 반면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놀랐다니, 어째서 그랬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사악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절에 보시면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supposed)라고 씌여 있습니다. 제자들 모두 하나같이 추측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디모데전서에서는 악한 추측(evil surmising : 딤전 6:4)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진리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상상이나 잘못된 추측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강대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했더라면 주님의 말씀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을 텐데 자신들의 생각에 매달리다 보니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 셈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왜 우리가 때로 그처럼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지 아십니까?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쉽게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 일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평강은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추측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우리를 포함해서)이 동일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38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여기 보니 “마음속으로 염려한다”A)고 되어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이사야서 26장 3절대로 우리의 생각(mind)이 예수님께 고정되지 않고(stayed), 마음 안에서 일어나 엉뚱한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 악한 추측이 일어 두려움과 불안을 야기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처한 상황(situation)이 너무도 엄청나서 우리가 평강을 잃고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고정되어 있지 못해 떠다니며 그 상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같이 추측과 상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머물러 있고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가운데 얼마나 자주 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 의심, 초조, 쓴 뿌리, 미움, 절망, 고뇌 이런 것들이 떠오르게 되면 우리는 즉시 마음의 평정이 무너집니다. 이럴 때 이런 생각들을 즉시 처리하고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지 않으면 평강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 추측들, 상상들이 마음 속에 떠오를 때마다 매순간마다 즉시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교제할 생각이 없노라.”
“나는 예수님과 교제할 시간밖에 없노라.”
“나는 너희들과 시간 낭비할 수 없노라. 예수님과 교제하느라 너무도 바쁘도다.”
얼마 전 한 목사가 젊은 목사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제게 상담을 좀 해줄 수 있느냐고 해서 만났습니다. 전도가 양양한 젊은 목사는 크게 낙망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사역하던 교회가 쪼개졌고 그는 내쫓겨난 상태였으니까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회 안에서 다툼이 벌어져서 결국 일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저더러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간에 있었던 온갖 희한한 일들을 다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런 것은 다 아는 얘기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소. 그랬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실은 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교인들 간의 분쟁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목사로서 그 정도는 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개입했는데 결국은 엉망이 되어 버려 이 꼴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과거 경험을 다 들려주면서 저도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책도 쓰고, 테이프 사역도 크게 하고, 여기저기서 설교 초청도 받는 저 같은 목사가 자기와 똑같은 일을 했고 똑같은 일을 당했다니 믿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제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른 교회에서 새롭게 사역을 해 보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지금 형제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역이 아닙니다. 형제님이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새로 사역을 시작한다면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형제님이 말한 대로 그 교만이 남아 있다면 주변 목사들이 쫓겨난 목사라고 수군댈 때 당신은 또 평정을 잃고 또 망가지고 맙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은 일이라니까요. 한때 저는 4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도 못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시간 동안 계속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역해서 믿음을 세워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계속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 찬 그는 주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고, 헌신되어 있었으며, 뜨겁게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그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형제 자매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 해결에 있어 무기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헌신되고, 열정으로 가득 차고, 아무리 거룩하게 살고 모범적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시련과 고난들을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닥치면 우리는 그 시련을 다루기는커녕 우리의 생각(mind)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일마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육신은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리 우리의 영이 원한다 할지라도 육신은 너무도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어려움을 다룰까?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그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님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휴거가 일어나면 이 몸은 주님을 만나러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휴거 사이 즉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화평(평강, 평화, 평안, 안녕)이 자신의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 늘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15절에 보면 “~하라”(Let)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우리가 허락(let)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화평이 항상 우리를 다스리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근심하지 않도록 하고(let),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스리도록 허락(let)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평안을 우리 안에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거나 방도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그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Let it happen).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허락)하라.”(Let the peace of God rule in your hearts.) 아멘.
2009-05-01 18:17:43 | 관리자
성령의 열매: 부드러움/모든 것을 수용하는 친절한 태도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메시지를 읽지(듣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들은 다음 사실을 꼭 명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께서 거듭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속성들이요 성품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품은 그 누구에게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만약 당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저는 사랑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이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거듭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다면 핑계일 뿐이며 그것도 아주 나쁜 핑계에 불과합니다.
만약 당신이 “저는 그리 기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당신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면야 우리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겠지만 당신이 새로운 출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 역시 나쁜 핑계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열매(단수)란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 생산해 내시는 “산물”입니다. 우리는 독립침례교회에 소속된 근본주의자요, 성경을 믿는 자로서 그동안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실상은 우리의 육신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애쓰느라 우리 생의 대부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들도 해낼 수 있는 종교적 의무이거나 “하나님의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성령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차례의 공부를 통해 우리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여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육신적 종교 활동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아담의 육신적 성품으로 애를 써서 하나님을 섬겨보려는 것이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섬김에는 성령께서 개입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태도와 행동을 통제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우리를 통해 살아내심으로 우리는 복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 5:22, 25).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하시고자 하는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당신의 말씀을 대할 때 저희를 점검해 주소서.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 주소서.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부드러움(gentleness)에 대해 살펴보면서 동시에 선하심(goodness)과 믿음(faith)을 건너뛰어 온유함(meekness)도 함께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이 두 가지(부드러움과 온유함)는 성경에서 늘 함께 거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헌신되고 주님을 뜨겁게 섬기는 귀한 주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남자답게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는 용감함보다는 경건함(하나님다움, godliness)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섬기기는 하나 육신적 성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대할 때, 그들이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증오, 악의, 세속적 행동, 폭력, 분노 및 형제들을 거칠게 대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정당화시켜 주고 눈감아 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를 섬기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제가 살아온 동안 만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레스터 롤로프(Lester Roloff)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그분의 발끝만치도 못됩니다. 저보다는 백배나 훌륭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그분은 음식에 관한한 비성경적 입장을 취하셨는데 그것은 사탄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분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틴 루터같은 위대한 주의 종도 맥주를 마셨다는 핑계로 맥주 마시는 것을 그렇게 합리화해 버리면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성령의 열매의 특성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 안에서 이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것들은 여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사람이 되기보다 사내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더 이상 오늘 메시지를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을 내어 맡기기보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오늘 메시지는 안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만약 성령님께서 제가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리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계집아이 같다고 놀리거나 유약하다고 조롱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 메시지는 “남성답고”, “용감하고”, “담대한” 주의 종들에게 특별한 메시지가 될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gentle)이란 단어의 뜻은 “친절하다”(kind)입니다. 남자라고 해서 친절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의바른 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친절과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은 입장이나 방식에 있어 친구처럼(friendly) 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아무도 당신과 어울릴 수 없고 당신도 아무와 어울릴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너무도 영적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고로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 못한다거나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당신이 육신적이어서 당신의 자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당신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회개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또한 온유하고(meek), 온화하며(moderate), 엄하지 않고(not severe), 과격하지 않으며(not violent) 오히려 예의바르다(courteous)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gentle-man, 젠틀맨)인지 아시지요? 훌륭하게 태어나 훌륭한 가문에 속한 사람이 젠틀맨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듭났다면 당신은 젠틀맨(부드러운 사람)이 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거듭남이 훌륭한 출생이라면 당신은 당연히 좋은 가문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출생과 훌륭한 가문을 갖춘 우리는 당연히 부드러운 사람(gentle man)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거듭나기 전에 어떤 기질과 어떤 성정을 지녔던지 간에 일단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면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다정한(friendly)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거듭난 사람이라면 온화한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엄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오히려 예의바른(courteous)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몇 가지 구절들을 보여드린 후 온유(meekness)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고린도후서 10장과 디도서 3장, 그리고 디모데후서 2장을 보십시다. 사실 저는 구원받지 못한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끝까지 대해 준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제하셔서 저로 세상의 형상에 일치하지 않도록 지켜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는 자들과 꾸준히 착실하게 교제를 갖는다면(하나님께서는 그리하기를 원하시지요) 아마 얼마 안 가서 여러분과 교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해 준다는 것이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러분에게 지속적으로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다는 것을 느낄 테니까요.
육신과 육신끼리 마주하게 되고 육신적 성품과 육신적 성품끼리 부데끼다 보면 때로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할 수도 있고 거칠게 대하거나 서로 반목이 생기기도 합니다. 교제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동이나 말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예로써 어떤 사람이 당신의 주차장소에 주차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의 좌석을 차지해 버리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당신의 성경을 한쪽으로 치워 버리기도 합니다. 때론 지나친 농담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친구처럼 대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그 교제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여기를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부드러움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가 온유함과 부드러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영적 아기들에게 편지를 쓸 때 다름 아닌 바로 이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서 대했습니다. 고린도의 어린 아이들이 하는 그 어떤 유치한 행동도 바울로 하여금 그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직선적으로 할 말은 했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정확하게 지적했지만 그들을 잘못 대하거나 악한 감정을 품고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바울을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이곳에서도 동시에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자, 이번에는 디도서를 보십시오. 3장 1절과 2절입니다.
1 그들이 명심하여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복종하며 행정관들에게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
여기에도 두 성품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온유를 보이고 부드럽게 대하라고 했지요? “모든 사람”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다(gentle)는 말은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하며 항상 받아주는 자세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거칠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사람들로 우리 말을 듣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무관심한지 모르세요?”라고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친절해야 합니다. “콧방귀도 안 뀌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이니까요. 우리는 지금 육신적인 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나오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기 원하시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온유와 부드러움이 연관되어 있는 다음 구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4절과 25절입니다.
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여기 보니 우리가 온유하게 대해야 할 대상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형편없는 자들입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아주 잘못된 자에게 우리는 예의를 갖추어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고, 품위 있게 대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마저 잘못 행동하면 둘 다 마귀를 섬기게 되는 꼴이 됩니다. 당연히 올바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만약 올바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잘못된 방식으로 행동해 버리면, 그야말로 둘 다 엉망이 되어버리는 셈이지요. 누가 부드럽지 못한 사람일까요? 자기 의에 가득 찬, 자기 중심적이고 자만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온유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 밑에 꿇어 엎드려 우리가 누구인지, 누가 어떻게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지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조금은 더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서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온유란 그저 겁먹은 토끼처럼 조심조심,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모세였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실상 모세는 백오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금송아지 가루를 뿌린 주스를 마시게 한 사람입니다. 상당히 터프한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온유하였습니다.
사실 온유(meek)란 단어는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스위스어로는 MIUK이고 덴마크어로는 MYG, 그리고 스페인어로는 MEGO, 포르투갈어로는 MEIGO인데 이 단어들의 첫 번째 의미는 한결같이 “흐르는 액체”라는 뜻입니다. 잠시 후에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지요. 온유하다는 것은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안 내고, 짜증을 안 내는 것을 말합니다. 상처를 받을 때도 잘 참아내는 것이요,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경륜(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제가 만약 돌을 집어 벽에다 내던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 벽에 돌 자국이 남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벽은 온유(meek)하지 못하니까요. 제가 또 다시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유리 창문에다 던져보면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할 겁니다. 왜냐하면 유리 창문 역시 온유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제가 돌을 집어 연못이나 흐르는 시냇물에다 던져 보면 잠시 후 물은 전혀 변함없는 그대로의 상태가 될 겁니다. 상처를 입히려 하나 손상이 남지 않는 상태, 가격을 해도 변하지 않고 원상복구 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온유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께 온유하다면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어떤 일을 허락하시더라도 잠시 동안은 상처가 될지 모르나 곧 바로 원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깊은 상흔이 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온유하다면, 당신이 제게 상처를 입히거나, 화를 내게 만들거나, 낙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에 그 어떤 자국도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원상복구가 될 겁니다.
왜 우리는 불평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까요? 왜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일까요? 왜 깨어진 인간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모두가 다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은 상처를 삼켜버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함으로 복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형제들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은 다름 아닌 온유함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기에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으면 열매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유란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쉽게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고, 상처를 입었으나 잘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온유에 대해 다음번 설교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도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형제로부터 상처를 입고 나의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우편함을 매일 열어보는데 그때마다 그 편지들을 개봉하기 전 꼭 기도합니다. 아니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두 종류의 편지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저를 추켜세우는 내용들이 들어 있는 것들로 때론 이것들이 제 마음에 흔적을 남겨 저를 해치고 저로 하나님께 대한 순복과 의지를 내려놓고 무엇인가 된 것처럼 우쭐하게 만듭니다.
또 한 종류는 제가 일곱 배나 더 뜨거운 지옥에서 불타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지를 뜯어 보기 전에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너도 마찬가지야. 아니 더 뜨거운 지옥에 갈 거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누군가가 육신 가운데서 저를 육신적으로 만들려고 할 때, 기도 없이는 곧바로 말려들고 맙니다. 어떤 자들은 자기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그런 편지를 보냅니다. 제게는 도대체 어느 녀석이 그 따위 짓을 했는지 알아내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 우편인이 찍혔는지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가 누구인지 다 아시고 그 자가 무슨 문제를 갖고 있는지도 다 아시는데 제가 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편지는 저의 아담의 성품만 들추어 내고 말 겁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령 안에서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도 내 마음에 가득 찼던 기쁨과 평안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리니 실로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나 이런 편지 몇 통으로 마치 구원받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렇게 쉽게 그렇게 빨리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다니… 우리 모두 매 순간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저는 창피하고 또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일들이 저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더 이상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감사할 일입니다. 간음과 마약과 술로부터 해방된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더 이상 성질을 안 부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저의 부드러움을 간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의 온유가 지속되게 해 주셔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찬양을 드리고 계신지요. 실은 성령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마약과 술을 끊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된 여인들도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을 잃지 않고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야고보서 3장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지식을 갖추고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일지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가 돌아다니며 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온유함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으로 관능(官能)적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여길 보니 땅에 속한 지혜, 관능적 지혜가 나오지요. 이것들은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성정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갖게 되는 특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성품과 인격 안에서 죄가 부지런히 오랫동안 일해 온 결과 인간의 모습은 실로 마귀적이 되고 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시기와 다툼과 쓴뿌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직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드러우(gentle)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온유하셨습니다. 비록 얼마간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 같은 모습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지요.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러우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여기 끝부분을 보니 부드러움 다음에 “간청을 잘 들어주며”(easy to be intreated)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이 우리의 인격 문제와 인간 관계를 배제한 채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거짓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바르게 행동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죄와 의와 생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다 알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선하게 대해 주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나오며 시편 2편 12절에도 아들의 진노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성령의 진노란 말은 없습니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기를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안에서 걸으라든가 아들 안에서 걸으란 명령은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진노하십니다. 우리의 맏형 되시는 아들께서도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께는 진노가 없습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제게 큰 축복이 되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공산국가에 한 여자가 살았는데 그녀는 지하교회의 비밀예배에 참석하려고 가다가 공안당국의 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총부리를 겨누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경찰에게 그녀는 순간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가는 중입니다. 큰 오빠께서 돌아가셔서 그분의 유언을 들으러 가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경찰은 그녀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큰형님(elder brother, 큰오빠)의 유언(New Testament, 신약),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는 중이니 말 그대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과 저도 그분의 유언(Testament)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그분의 유언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부드럽고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7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여기를 보니 바울이 자신을 유모에다 비유했군요. 저런,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용맹스런 주의 군사인데 ‘유모’라니…”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남자답게 영적 싸움을 싸웠던 남자 중의 남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돌로 맞기를 수차례, 수많은 박해에도 아랑곳없이 담대했었습니다. 이와 다르게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 8절 말씀을 보니 그는 너무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어린 아들, 딸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해치거나 부서뜨리기 윈치 않았으며 바울은 그들이 불쾌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사랑스러운 관계를 굳게 세워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부드러움과 온유가 부족한 것 때문에 복음이 막혀버린 여러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자기 부인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애쓰던 중 어느 찬양집회에 데려가게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회 중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라고 소리치며 설교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 부부는 그 이후로 교회에 발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올바르게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여러분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 책망도 하시고 권면도 하십시오.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여러분의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바울의 성공 비결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직접 우리에 관하여 보여 주되 우리가 어떤 식으로 너희에게 들어갔는지 또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한 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보여준 삶의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2장 7절과 8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7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바울은 부드러웠고 유모처럼 사랑스럽게 그의 영적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종종 성경강연회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2, 3일 또는 3, 4일 정도 말씀을 들은 후 그 다음 주에도 다시 교회에 찾아오는 것은 성경강연회에서 들은 말씀보다는 이곳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이슈, 성경적 기준, 도덕적 원칙 등도 물론 다루어져야 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가슴에 새기는 것은 그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사랑과 관심입니다. 오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는 태도로 대접을 받았는데 그 교회를 다시 오겠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까? 그것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분께서는 그 어떤 말씀이라도(때론 어려운 것까지도)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지적할 수도 있고, 꾸중할 수도 있고,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하는 동기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근본주의 또는 성경만을 신뢰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렸다.”, “당신은 육신적이다.” 등등 비판과 지적을 잘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혼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없이 성경구절을 들이대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두 구절만 더 찾고 말씀을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16장입니다. 우선 시편 18편 33절에서 35절을 보겠습니다.
33 그분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나를 높은 곳들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대단한 사람이지요. 사자를 손으로 찢고 골리앗을 눕힌 사람으로 터프하고 사내 중의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니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윗의 용맹함이나 담대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부드러움(thy gentleness)이었다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거칠고 터프하고 사나운 성정대신,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유하며 예의바른 마음을 주셔서 그것으로 자신이 위대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도 곰도 거인도 다 때려잡을 수 있었던 용사인 다윗은 자신 앞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울을 동굴 안에서 능히 내려칠 수 있었으나 그는 사울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잔인하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앞에 두고 그는 하나님의 부드러움 가운데 더욱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과 부하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를 거절했던 나발이라는 사람을 쳐 죽이려 했었습니다. 자신을 무시한 자에게 격분하여 즉시 죽이려고 했었는데 다행히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의 지혜로운 대처로 잔인한 살인은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이처럼 바뀌어 있으니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보라, 거기서 사울의 집에 속한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그는 게라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시므이더라. 그가 앞으로 나오면서 올 때에 계속해서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 그때에 온 백성과 모든 용사들은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약 돌을 맞는 당사자가 온유(앞에서 말씀드린 액체 상태의 물을 기억하십시오)하지 않다면 당연히 자국이 남고 상처가 남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 보니 다윗은 강력한 힘을 지닌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7에서 10절을 보십시오.
7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빠졌느니라, 하니라. 9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10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말씀을 보니 시므이의 비방과 조롱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아비새라는 장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부드러움과 온유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삶에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아비새처럼 행동합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행동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아비새의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부드럽고 온유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번 일도 그 중 하나이니 주께 모든 것을 맡기었다.” 이것이 그의 온유한 태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11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네 속 중심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가 갈 때에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13 왕과 그와 함께 있던 온 백성이 피곤하였으므로 거기서 기운을 차리니라.
다윗은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운을 차렸다(refreshed)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 비방을 받고, 아들이 배신하고, 그때까지 성취해 온 모든 명성과 명예가 하루 아침에 무너졌으며 게다가 시므이라는 자가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있던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유지한 채 목적지에 도달했고 기운을 차렸으니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에 놓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시므이처럼 똑같이 상대방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을까요? 아마도 두 사람 다 육신적인 모습을 한 채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내 마음을 통제하셔서 내 삶을 이끄신다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의 뜻이니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여, 주 안에서 다시 기운을 내도록 도우소서.” 상황이 어떻게 되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든, 혹은 억울한 비방을 당하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을 지켜내고 기운을 차릴(refreshed) 수 있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이곳에 와서 주의 자녀들을 만나고 함께 찬송하고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복된 교제와 시간을 갖게 되면 돌아갈 때쯤에는 우리가 당한 모욕이나 배신감이나 상처를 되새기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회복해서 기운을 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great)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자를 죽이고 곰을 죽인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운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드러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부드러움, 바로 그것이 다윗의 본노와 격정과 복수심과 성질을 통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절함이 우리의 육신을 극복하는 그 순간은 실로 위대한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다윗도 다 남자답고, 담대한 분들이었습니다. 남자답고 담대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이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예의를 갖추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오래 참는 것이 “남자다움”의 결핍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길이 바로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이 걷도록 원하시는 그 길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혼란스럽습니다. 그저 성경을 손에 들고 외쳐대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교만하고 오만한 모습까지 용납되고 있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를 통제하사 담대함 가운데서도 부드럽고 온유한 자들로 빚으소서.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16:42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근래에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를 올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리가 가장 좋았지만 지금은 크리스천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특히 주의 종에게는 온유함과 부드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낙스의 설교가 가슴을 찌릅니다. 사이트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치면 낙스의 글이 모두 올라올 것입니다. 하나 하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게 적용하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글을 저희 사이트에 올리도록 허락해 주신 김영균 목사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찬송가 507장 가사를 깊이 음미하고 설교를 읽기 바랍니다.
1.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후렴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2. 주 모습 내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4.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나니(갈 5:22-6:3)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온유함에 대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희를 도우사 저희 안에서 주님의 온유함이 표현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발견하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선 지난번 메시지에서 인용했던 내용을 조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성경 말씀들(words, 단어들)을 나중에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드러움(gentleness)과 온유함(meekness)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구절들을 찾아 읽으면서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온유함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메시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온유(meek)란 단어는 스위스어로 MIUK, 덴마크어로 MYG, 스페인어로 MEGO, 그리고 포르투갈어로 MEIGO라고 하는데, 이 모든 단어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의미 즉, 흐르는 액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강가로 야유회라도 가면 소년들은 신나서 강물로 뛰어들거나, 아니면 돌을 강물에 던져 봅니다. 돌을 강물에 던질 때 발생하는 현상,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온유를 공부하는 이 상황에서 너무도 유익한 그 무엇을 시사해 줍니다.
돌을 들어 벽에다 집어 던지면 벽은 딱딱하기(hard) 때문에 돌자국이 남습니다. 돌을 들어 유리창에 던져도 깨지거나 자국이 남습니다. 그러나 돌을 들어 강물에 던져 보십시오. 고개를 돌리고 다시 강물을 쳐다보는 순간, 그 강물 어느 곳으로 돌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강물이 그 돌을 집어삼켜서 그 돌이 준 타격의 흔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성경 말씀에 등장하는 온유의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내리치실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 저를 치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으며, 때론 마귀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저를 칠 수 있습니다만, 만약 제가 온유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자국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당신이 내 안에 어떤 상처 자국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려고 해도 상처의 흔적도, 고통의 여파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슬픔을 평생 동안 가슴에 지닌 채 살다가 그 누군가가 복음전도지라도 하나 건네면, “싫소, 나는 그 까짓것 필요 없다구요!” 하고 대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자국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징계를 받았든지 상처를 입었든지 간에 마음에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에 관련된 자료를 주면 “필요 없어요. 그따윈 필요 없다니까!” 하면서 화를 냅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누구로부터 상처를 입었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교회일로 불만이 쌓였는데 그 모든 흔적을 성령의 도움으로 지워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흔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과 말씀의 설교를 통해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나 모욕이나 불만을 붙들어 두지 않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다 덮어버리시도록 합니다. 마치 강물이 자기에게 던져진 그 돌을 포용함으로써 아무런 흔적이 없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징계를 받되 그 징계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성정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온유함이 없으면 결코 양들을 돌볼 수 없고 집사나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에서 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온유함이 없다면 좋은 가장이 될 수도 없고 자녀를 키우기도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온유한 부모님에 대해서 “나는 정말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고 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온유함은 상처를 받을 때만 발휘됩니다.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참아냅니다. 상처 받는 일이 없다면 온유함은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온유함이 표출되려면 그곳에는 반드시 “상처 입힘”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란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오만하지 아니하고 자족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칭찬받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높임받기 원하는데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바라면 여러분은 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저에게 인사하지 않거나,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 저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헛된 영광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데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연히 제 마음 안에는 상처가 생기고, 쓴 뿌리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반면 제가 여러분의 종이 되어 도와주고자 하고 축복이 되고자 하며, 즉 높은 마음을 내려놓고 낮은 마음으로 다가선다면 그 어떤 식으로 여러분이 저를 대하든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2장 16절 참조).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 된 듯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마음만 버린다면, 모욕을 당해도 불쾌한 일을 당해도 순간 흔적을 없앨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여기 보니 헛된 영광이 없으면 서로 화를 내게 만들 일도 없습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자라고 여긴다면 상처받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 주고 자신은 낮추게 될 것입니다. 교만할수록, 자아 중심적일수록 상처는 심해지고 자국은 오래 갑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만약 어떤 형제가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첫 반응이 경멸과 오만과 비판이라면 이 모든 것은 다 육신의 표출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 죄 지은 자보다 더 낫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형제 자매와 함께 있는 것조차 꺼리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그 형제 자매를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결코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된 간증을 보인 그런 형제 자매를 보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형제님, 사실 저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있고 언제든지 그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형제님이 제게 잘못한 것 때문에 저는 상처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어쩌면 제가 그것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사역을 하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사역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죄를 짓거나 잘못을 했을 때, 그들 때문에 당신과 교회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지 말고 오히려 그들 스스로 상처받은 것을 온유함으로 치유해 주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회복”(restore)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비록 잘못된 행동과 간증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씻겨주고, 바로잡아 주고, 싸매 주고, 지탱해 주고, 그럼으로써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회복”이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유가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의 짐을 지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물에 던져진 그 돌들을 당신 위에 고의로(일부러)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인생의 짐도 버거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다른 사람들 즉 상처를 입었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울고 있거나,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짐을 우리로 짊어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우리같이 영적인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줘서 회복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니 사람이 자기가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할 때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nothing)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당신의 가족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당신 교회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즉 제로(zero)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zero) 더하기 영(zero)은 영(zero)입니다. 아무리 더해봐야 결국은 영, 즉 제로(zero)일 뿐입니다.
여러분, 언제 제가 마음이 상하는 줄 아십니까? 저는 제가 뭔가(Something) 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을 때입니다. 당신 역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평가해 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지요. “아니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 거야?”, “아니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어쩜 그럴 수가,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등등. 이 모든 반응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목사가 아무 것도 아닌 형제 자매에게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은 우리보다 뛰어나거나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여겨야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같은 사람을 도우시려고 모든 높은 것들을 다 버리시고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며 왕좌에 계실 때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는 찬송을 들으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을 낮추사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고 온갖 죄인들 즉 창녀들, 도둑들, 살인자들, 사기꾼들, 거짓말쟁이들 아래로 자신을 굽히사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죄인들을 섬길 수 있으려면 네 자신에 대해 더 낮은 마음을 갖고 더 낮은 자세를 취하라. 그래야 더 많은 죄인을, 더 많은 형제 자매를 도울 수 있고 교회에 덕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되리라.”
골로새서 3장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술집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도 좋고 교회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통 자기 사랑, 자기 높임, 자아실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당신이 최고다, 당신은 위대하다, 긍지를 가져라.” 등 이 같은 철학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철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할수록, 자기 생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사람들 특히 잘못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기에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이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감당해야 할 상황이나 서로를 대적하는 다툼이 생길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의견 차이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끝부분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던 그 순간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다. 여러분과 제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죄를 열거해 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고 냉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저 던져진 돌을 삼켜버리는 강물처럼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받아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버리시고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수치와 모욕, 모든 죄악, 모든 불법을 다 자신의 몸 위에 얹으시고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망각”의 바다에 던져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다투고 계십니까?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모든 상황에서 그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해 주신 그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따지지도 않았고, 책망할 기회를 엿보지도 않았고, 혼쭐을 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더 비참해져 납작 엎드리기까지 기다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셨을 뿐입니다. 14절에 보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charity)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이번에는 베드로전서 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며
여기 보니 당신은 올바르게 행했는데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불공평한 상황입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므로 여러분은 얼른 익숙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경 그 어디에도 인생이 공평(fair)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도둑질은커녕 속임수도 안 쓰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주당 200달러 받는데 어떤 자는 마약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오, 하나님. 이건 너무도 불공평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무슨 조치라도 취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런데도 기다릴 줄 모르는 우리는 이 땅에서 당장 이 불의가 시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중에 행동을 취하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인생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베드로전서 3장에 나와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며 15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라고 하는 말씀은 쉽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 받는 순간 거룩히 구별하셨고, 또한 내가 매일의 삶 가운데서 말씀으로 거룩히 구별되어지는 법인데 여기는 내가 하나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별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거룩치 못한 부패한 것들을 다 몰아내고 내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저런 사람들 때문에 제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저런 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고 오직 나와만 접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자가 저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이렇게 푸념하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몹쓸 짓은 한 쪽으로 치워 버리고 오직 네 마음속에 나만을 간직하라.”
15절 끝부분에 온유함을 지니라 했는데 어떤 자들에게 그리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이런 것입니다. 즉,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돌을 삼킨 물처럼 이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리고 평소의 차분하고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모든 “나쁜” 것들이 내게로 다가올 때 그것을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받아가지고 던져버리면 나는 그런 자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선하게” 대해 줄 수 있는 동시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16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껏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를 옹호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웠단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해 이런저런 거짓말과 비난을 늘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내서 항변하거나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를 일일이 다 해명하고 다닐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모든 일들이 닥치거든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꾸준히 유지하여 마음에 상처나 쓴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쥐새끼 같다고 욕하거나 비방하더라도,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만나 보니 실은 젠틀맨이라는 사실을 보고 당황하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내가 들은 바와는 전혀 딴 판이군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거짓말이나 비난이나 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우리가 이 모든 경우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 온유함을 유지하여 상한 마음과 쓴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면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그런 자들로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 13절입니다.
12 또 수고하여 우리 손으로 일하며 욕을 먹으나 축복하고 핍박을 받으나 그것을 참으며 13 비방을 당하나 간절히 권면하니 우리가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汚物)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
여기 나오는 찌꺼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음식을 만들다가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찌꺼기”, 그래서 그냥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려야 하는 음식 찌꺼기를 말합니다. 음식 찌꺼기만 따로 모아 버리는 통이 있는지 아시지요? 글쎄요, 포로수용소에서 굶어죽기 싫어 먹을까 말까한 바로 그런 것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깨끗한 생활을 하며, 건전한 생각을 지니고, 정직하고 품위 있게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찌꺼기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없이 제 말을 그대로 믿으셔도 됩니다. 미국 텔레비전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멍청이나 도둑이나 못된 자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소위 “예수쟁이”들에 대해 내리는 평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오물이요 모든 것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자기 권리가 있어 아무리 소수 그룹(minority)일지라도 나름대로의 특권이 부여되며 그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은 예외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미국의 상황입니다. 포르노 중독자이건, 동성연애자이건, 성도착자이건, 아동학대자이건 이 모든 자들이 이 사회에서 다 용납되어집니다. 이들을 경계인, 또는 주변인이라 부르면서 나름대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들고 죄와 지옥에 대해 경고하는 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이 세상의 오물이며, 만물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미국 공립학교에선 피임약 소지가 가능하나 성경은 학교에 가져갈 수 없습니다. 복음전도지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12절과 13절에서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취급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상처 입거나, 신경 쓰인다거나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바울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황당해 할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에게 인간대접을 해 주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낮게 평가하고 있는 자에게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스스로를 세상의 오물이요 만물의 찌꺼기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욕을 해봐야 전혀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없고 기분 나쁘게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는 그대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만물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모욕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되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진리를 확고히 붙들고 있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하든, 무슨 비방을 하든, 무슨 소문을 퍼뜨리든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미 자신이 그런 비방에 딱 해당되는 자라고 인정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발끈하거나, 좌절하거나, 스트레스 받을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쁜 놈”, “더러운 놈”,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말들을 해 보아야 이미 자신을 그러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상처를 더 입힐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4장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나아가랴?
여기 보니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죄들이 드러났으므로 이에 바울은 매를 들고 가서 징계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들에게 가서 겸손히 그들의 짐을 함께 지고 그들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서 26절입니다.
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보면 교리가 잘못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젊은 그리스도인을 훈련시키거나 빗나간 그리스도인들을 바로잡아 줄 때 온유함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때로 너무도 어리석고, 거칠고, 빗나간 상태이나(때론 말대꾸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육신적 상태에 있다면 “저런 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면서 상대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실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시간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26절에 보니 이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충고하거나 권면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가지 말라는 곳엔 가고, 성경구절을 암송하라는 권면도 무시하며 필요한 도움도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우는 일, 즉 그들의 모든 잘못을 그대로 받아주고 계속 권면하고 계속 도와주며 지속적으로 사역해 나가는 일, 이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마저 손을 놓으면 그들은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육신적으로 행동해 버리면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런 자들은 상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시간 낭비 같아 보이는 그것이 그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누가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자로 평가받은 사람을 세 사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12장을 보십시오. 한 번은 회중들이 회합을 갖고 모세를 대적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회중들 중 한 그룹이 교회를 장악했습니다. 그 전에 아론은 이미 이들에게 굴복해서 우상을 숭배토록 했었던 금송아지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나 되는 회중들을 인도하는 중에 수십만 명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는 성경에서 광야생활에 대해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온갖 비난, 불만, 비방... 이런 것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2장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여기에 모세의 누이와 형이 등장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의 지도력을 문제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을 보니 심지어 모세의 아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2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 3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말씀에 모세는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모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비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4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4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주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 내려오사 성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므로 그 두 사람이 나아가니라. 6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내 말들을 들으라. 너희 가운데 대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려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리하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니라. 8 그와는 내가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또 그는 주의 모습을 보려니와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주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르며 그분께서 떠나시매 10 구름이 성막에서 떠나갔고, 보라,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같이 희게 되었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보라, 그녀가 나병에 걸렸더라. 11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나이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게 행하여 죄를 지었으나 간청하건대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부디 그녀가 자기 모태에서 나올 때에 살이 반이나 썩어 죽은 자같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 13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하니라.
놀라운 것은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해 모세가 나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8절 끝에 그들이 행한 짓은 비방이라고 말씀하시고 분노하셔서 미리암에게 나병이라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가 짐작이 되십니까?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모세가 나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중보기도 말입니다. 자기를 비방해서 벌 받고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간청 드립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로써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 이런 일들이 가능하겠는지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아주 특별히 영적으로 상태가 좋은 날 하루 정도는 어쩌면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364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이런 일을 우리 안에서 해 내심으로 우리로 그분이 원하는 그 모습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비천하고”(bas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와 연관이 있는 단어가 다름 아닌 “지하실”(basement)입니다. 지하실이란 건물의 맨 밑바닥을 말합니다. 지하실보다 낮은 곳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온유함을 주셨기에 그는 그처럼 부패한 고린도교회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분열, 다툼, 이단들, 음행, 법정 다툼, 이혼, 우상숭배, 영적 은사를 남용함, 남녀노소의 무질서 등 이런 “엄청난”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바울은 주님의 온유함을 지닌 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 모두보다 나은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를 도우려 왔을 뿐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런 교회에 들어갈 때 눈에 띄는 것이 죄뿐이라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교회에 들어가 여러분을 통해 그들을 도우시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들을 눈여겨 본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1장과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주님께서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이제껏 내게 행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죄들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범법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할 일은 내게로 오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짐을 짊어지리니 이는 내가 온유함이라.”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핵심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 9절을 보겠습니다.
8 매우 큰 무리가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길에 흩어 깔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던 무리들이 외쳐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놀랍습니다. 왕께서 왕의 도시에 들어오시는 장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
나귀 위에 앉으신 주님에 대해 “온유하사”(meek)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교만한 분이셨다면 호산나 소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군중들 속에 파묻혀버렸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십자가는 제쳐놓고 바로 왕좌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도 이 환영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온유하다면 여러분은 비방을 받고도 계속 섬길 수 있고 또한 칭찬을 받아도 우쭐대지 않고 계속 섬기는 자리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비방에 대해 쓴 뿌리를 내지 않으며 칭찬해도 우쭐대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종의 마음과 섬기는 자세를 유지합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지난 메시지에서 말씀드린 부드러움도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오늘 다룬 온유함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가능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지는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willing) 그저 주님께 고백드리십시다. 주여,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15:4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