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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상급을 지우는 성경 변개: 성도들의 소망을 땅으로 끌어내리다 — NIV는 왜 “하늘에”를 삭제했는가?   1. 하늘의 상급은 신약 성도의 참된 소망이다 신약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아…” (골로새서 1:5)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부활을 바랐느니라.” (히브리서 11:35) 신약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땅의 유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기업이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하였다(골 3:1–2). 2. 그러나 현대역본은 “하늘에”라는 구절을 삭제한다 예를 들어, 다음 구절에서 **“하늘에”**라는 명백한 표현이 제거되어 있다: 히브리서 10:34 KJV: “너희는 하늘에 더 나은 것, 곧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을 앎으로 기쁘게 당하였느니라.” NIV: “너희에게 더 좋은 것, 더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점: “하늘에”가 삭제됨 이 표현이 사라짐으로써, 성도들의 소유와 상급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신학적 왜곡이 발생한다. 3. 왜 이 차이가 문제인가? 이 세상은 썩고 사라질 것들로 가득하다. 성도들이 소망을 두어야 할 대상은 영원한 하늘의 기업이다: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상속 유업을 바라보라” (베드로전서 1:4) 그런데 NIV와 개역성경 등 현대역본들은 **“하늘에”**라는 표현을 고의적으로 삭제함으로써 성도들의 시선을 이 땅에 고정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나그네 인생관”**이 사라지고, **“이 땅에서의 번영과 성공”**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신앙으로 교회를 물들게 한다. 4. 바울의 삶이 보여 주는 하늘의 실체 사도 바울의 삶은 극심한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말한다: “굶주리고 헐벗고 매 맞고 떠돌았다.” (고후 11:23–27)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처럼 여김을 받는다.” (고전 4:13)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있는 영구한 처소”(고후 5:1)**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나니” (고후 4:18) 그는 알았다. 진짜 영구한 실체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5. 결론: 성도는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NIV 등 현대 역본들은 하늘의 개념을 흐림으로써 성도들의 시선을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고정시키려 한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세속적 번영을 추구하게 되고, 성도는 하늘에 쌓을 상급보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안락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것, 곧 영구한 실체를 바라본다.” (히 10:34, KJV)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온전히 전하는 정확한 본문, KJV를 붙들자. 이 땅은 지나가지만, 하늘에 있는 유업은 영원하다. “하늘에 있는 너희 상급이 크니라.” (마태복음 5:12) 이 진리를 지우는 자들은 복음을 땅에 가두려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자. 영원한 것을 위하여.
2025-05-20 08:47:06 | 관리자
왜 현대역본들은 지옥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가? — 마가복음 9장과 지옥 삭제 문제를 중심으로   1.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4, 46, 48) 이 말씀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실제성과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 번이나 같은 표현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만큼 지옥은 피해야 할, 절대로 가서는 안 될 무서운 실체입니다. 2. 그러나 현대역본은 이 구절을 두 번이나 삭제했다 KJV는 위 경고를 44절, 46절, 48절에서 세 번 모두 포함합니다. 반면 NIV, 개역성경 등 현대역본은 44절과 46절을 통째로 삭제하고, 오직 48절에서만 한 번 언급합니다. 절KJVNIV / 개역 9:44Where their worm dieth not,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삭제됨 9:46Where their worm dieth not, and the fire is not quenched.삭제됨 9:48Where their worm dieth not, and the fire is not quenched.유지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강조점이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3. 왜 삭제했는가? 소수 사본 편집자들의 “불편함” NIV 등 현대역본이 의존하는 알렉산드리아 계열 소수 사본들은 지옥(Hell)에 대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삭제하거나 모호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예: 헬(Hell) → 음부(Hades) 또는 스올(Sheol) 지옥의 불 → 불, 또는 생략 이는 지옥의 실제성과 형벌성을 추상화하거나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고 영원한 형벌의 장소라는 사실은 많은 현대 사본 편집자들에게 부담스러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이나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편집자들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영원한 형벌”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인본주의적 전제가 작용했습니다. 4. 구원받은 사람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지옥을 반복적으로 경고하신 이유는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경고라는 점입니다. 지옥은 존재하며, 그곳은 결코 가서는 안 될 곳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므로 KJV가 세 번 반복해서 지옥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경고가 되고, 믿는 자에게는 확신이 됩니다. 5. 결론: 성경은 지옥을 감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중요할 때 **“진실로 진실로”**라고 반복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옥에 대한 말씀도 세 번 반복하신 것은 절대적인 주의 요구이며, 현대역본의 삭제는 이 경고를 약화시키는 위험한 시도입니다.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을 두 번 삭제하는 것은 단순한 편집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형벌을 가리는 의도된 변개입니다. 지옥은 존재하며, 반드시 피해야 할 곳입니다. 그리고 KJV는 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세 번이나 전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본문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5-20 08:38:10 | 관리자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에게 임하는가? — 사본 문제로 본 에베소서 5장 6절   현대역본들(NIV, 개역성경 등)과 킹제임스 성경(KJV) 사이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가에 대한 중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1. 본문 비교 킹제임스 성경 (KJV) Let no man deceive you with vain words: for because of these things cometh the wrath of God upo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아무도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런 일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 위에 임하느니라. 현대역본 (NIV, 개역성경 등) Let no one deceive you with empty words, for because of such things God’s wrath comes on those who are disobedient. 이런 일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한 자들에게 임하느니라.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표현의 누락이 있습니다. 2. “불순종의 자녀들”(children of disobedience) vs. “불순종한 자들”(those who are disobedient) KJV의 “불순종의 자녀들”은 헬라어 υἱοὺς τῆς ἀπειθείας(휘우스 테스 아페이데이아스)로, “불순종이라는 본성 아래 있는 자들”,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엡 2:3)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현대역본의 “불순종한 자들”은 단순히 한 번 불순종한 사람들, 혹은 실수한 자들처럼 들릴 수 있어 죄에 대한 엄중한 정죄의 개념이 흐려집니다. 3. 사본 차이: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이 문제는 다시금 사본의 차이로 돌아갑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 사본(비잔틴 본문, 전통적 공인본문)에 따라 "불순종의 자녀들"로 번역합니다. 현대역본들은 소수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근거하여 단순히 "불순종한 자들"이라고 바꾸거나 축소합니다. 즉, KJV는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복종하는 존재들 전체를 진노의 대상으로 삼고 계심을 강조하는 반면, 현대역본은 이 진노의 범위를 단순히 행위의 수준으로 제한하려 합니다. 4. 교리적 함의: 누구에게 진노가 임하는가? 이것은 단순한 어휘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대상에게 임하는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복음의 메시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구분 - KJV / 현대역본 대상 - 불순종의 자녀들(본질적, 정체성) / 불순종한 사람들(행위 중심) 강조점 - 죄인의 상태와 본질 / 특정 행위 신학적 무게 - 타락한 인간 전체의 정죄 / 부분적 도덕 실패의 결과 즉, KJV는 인간의 본성과 구원의 필요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이유와 범위를 더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5.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 한 단어라도 빠짐없이 정확해야 합니다. **“불순종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인류가 본질적으로 죄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반드시 그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이 진리를 정확히 지키고 있는 번역은 단연 **킹제임스 성경(KJV)**이며, 현대역본들은 이 핵심 진리를 완화하고 축소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엄중함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무에게나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만 임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뿐이다.
2025-05-20 08:30:39 | 관리자
마태복음 25장 13절 – 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구절이 중요할까?   성경은 마지막 때에 대비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고 우리를 경고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은 바로 그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에서는 이 중요한 구절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1. 원문 비교 킹제임스 성경 (KJV) "Watch therefore, for ye know neither the day nor the hour wherein the Son of man cometh."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 현대역본 (NIV, 개역성경 등) "Therefore keep watch, because you do not know the day or the hour."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가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함이니라.” 무엇이 빠졌습니까? 바로 핵심인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이유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2. 중요한 핵심: 무엇이 오고 있는가? 이 구절은 단순히 시간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핵심은 “누가 오시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과 시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NIV는 그 문장을 삭제함으로써,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경고라는 점을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3. 해석의 혼란 KJV는 독자에게 이렇게 명확히 말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과 시각을 모르니 깨어 있으라." 하지만 NIV는 이렇게만 말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을 모르니 깨어 있으라." 그럼 무슨 날이고 무슨 시각입니까? 설명이 없습니다. 문맥상 무엇이 오는지를 독자가 추측해야 합니다. 이것은 “쉽게 읽히는 번역”이 아니라, 핵심 진리를 생략하여 혼동을 유발하는 번역입니다. 4. 왜 이것이 중요한가? 마태복음 25장은 ‘열 처녀 비유’의 결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절에서 예수님은 그 주제를 다시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대 역본은 이 결정적 결론을 지워버렸습니다. 5. 결론: 왜 KJV가 필요한가? 현대 역본들은 때때로 불필요한 단어를 줄여서 더 “현대적”이고 “간결한” 성경을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우리가 임의로 줄이거나 바꿀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한 단어, 한 문장 속에 교리 전체가 걸려 있을 수 있습니다. 마25:13의 경우, 예수님의 재림을 분명히 언급하지 않으면, 깨어 있으라는 명령도 힘을 잃고 맙니다. “Watch therefore, for ye know neither the day nor the hour wherein the Son of man cometh.” (Matthew 25:13, KJV)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이 생략된 성경은 진짜 성경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고의 말씀은, 정확하고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에만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2025-05-20 08:26:07 | 관리자
삭제된 예언 성취 구절 – 마가복음 15장 28절의 왜곡   성경은 단지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이 예언되고 그대로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는 이사야서 53장 12절에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으며…” (이사야 53:12) 그런데 놀랍게도, 개역성경과 NIV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중요한 예언 성취 구절이 아예 삭제되어 있습니다. 1. 원문 비교 – 마가복음 15:28 킹제임스 성경 (KJV): “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which saith,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이로써, 그는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도다, 하고 말하는 성경기록이 성취되었더라.” 현대 역본 (NIV, 개역성경 등): 본문 자체가 없음 각주에서 "어떤 사본에는 28절이 있음"이라는 언급만 있을 뿐, 본문에서는 삭제됨. 2.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 이 한 구절은 단순한 설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증언하는 직접적인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이사야서 53장 12절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8절은 그 성취를 공식적으로 성경 안에서 확인해 주는 구절입니다. 즉, 이 구절이 없다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예언된 대로 성취된 사건이라는 성경 내 확증을 놓치게 됩니다. 3. 왜 현대 역본은 이 구절을 삭제했는가? 현대 역본들은 대부분 알렉산드리아계열의 소수 사본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 사본에서는 마가복음 15장 28절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이 따르는 비잔틴 다수 사본들에는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12와 정확히 일치하는 신약 성취 구절로서,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구절이 없으면 성경의 유기적 연관성과 권위가 약화됩니다. 4. 삭제의 신학적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언 성취”임을 모호하게 만든다. 성경이 “예언 → 성취” 구조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흐리게 만든다. 결국,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를 공격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5. 결론 – 성경을 바꾸지 말라 신실한 성경 독자와 교사라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과 그 성취를 존중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5장 28절은 단지 “예수님이 강도들 사이에 있었구나”를 보여주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증의 말씀입니다.  “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which saith,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Mark 15:28, KJV) 이 구절을 지워버리는 것은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의 신뢰성과 예언의 정밀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올바른 사본을 따르고 정확한 번역을 보존하는 것, 그것이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의 책임입니다.
2025-05-20 08:21:56 | 관리자
요한계시록 2장 15절예수님께서 미워하신 계급주의 – 니골라당의 교리와 현대 역본의 삭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직자 중심의 위계질서, 즉 목회자 또는 성직자가 일반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구조를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의 본질은 “왕 같은 제사장”인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지위를 가진 공동체입니다(벧전 2:9).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와 반대되는 계급주의 교리를 명백히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계시록 2장 15절에서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말씀을 삭제하거나 축소하여, 성도들이 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 원문 비교 –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가 삭제되었다 킹제임스 성경 (KJV): “So hast thou also them that hold the doctrine of the Nicolaitans, which thing I hate.”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는데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현대 역본 (NIV, 개역성경 등): “Likewise you also have those who hold to the teaching of the Nicolaitans.”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말이 없음) 2. 니골라당이란 누구인가? **‘니골라’**는 헬라어로 **‘정복하다(nikao)’ + ‘백성(laos)’**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백성을 지배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며, 교회 안에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영적 권력 계급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회중에게 성경을 스스로 읽고 이해할 권리를 주지 않고, 제사장처럼 군림하며, 권위의 중개자 역할을 맡고자 합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의 **성직자 제도(신부, 주교, 추기경, 교황)**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3. 신약 교회에는 계급 구조가 없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는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가 평등함을 선언한 말씀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구조는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4. 왜 현대 역본은 이 표현을 삭제했는가? 현대 역본들은 **천주교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사본들은 **“which thing I hate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라는 문장을 아예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삭제는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께서 계급주의 교리를 미워하신다는 강한 책망이 사라진다. 교권주의, 위계주의가 교회 제도에 정당성을 얻게 된다. 천주교의 성직자 중심 제도에 대한 비판이 약화된다. 5. 결론 – 우리는 어떤 교회를 추구할 것인가? 신약 교회의 본질은 성도 모두가 성령 안에서 평등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구조를 왜곡하려는 시도, 곧 니골라당의 교리를 **“미워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성경역본은 이 구절을 고의적으로 삭제하여 그분의 말씀을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미워하실 것을 함께 미워해야 하며, 정확한 본문을 가진 **킹제임스 성경(KJV)**을 통해 그 진리를 올바로 지켜야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계 2:15, KJV)
2025-05-20 08:16:41 | 관리자
그리스도의 심판석인가? 하나님의 심판석인가?   – 로마서 14장 10–12절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신성 로마서 14장 10절에서 12절은 모든 성도가 장차 누구 앞에 서게 될지를 보여 주는 심판의 장면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누구 앞에 서는가에 따라 우리의 신학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개역성경과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바꿈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 본문 비교: “그리스도의 심판석” vs “하나님의 심판석” 킹제임스 성경 (KJV): “…for we shall all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So then every one of us shall give account of himself to God.” (Romans 14:10–12) NIV 및 현대 역본: “…for we will all stand before God's judgment seat… each of us will give an account of himself to God.” KJV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 하여 예수님께서 최종 심판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현대 역본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석”**으로 바꾸어 그리스도의 권위를 희석시킵니다. 2. 사본 차이의 본질: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다수의 전통적 헬라어 사본(비잔틴 계열, Textus Receptus)은 **“τοῦ Χριστοῦ (그리스도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소수의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만이 “τοῦ θεοῦ (하나님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KJV는 전통적 공인본문을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 하나가 바뀜으로써 심판자 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신성을 본문에서 완전히 삭제한 셈이 됩니다. 3. 신학적 함의: 그리스도의 신성이 보이지 않게 된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종 심판자이심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판단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사도행전 17:31 “하나님께서… 자기가 정하신 한 사람으로 그날에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으며…”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게 되어…” 따라서 로마서 14장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주권, 그리고 심판의 권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4. 결론: 왜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올바른가? 신학적 일관성: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신약 성경 전체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사본의 무게: 공인본문(TR)과 비잔틴 사본들은 “그리스도”를 명확히 증거합니다. 현대 역본의 축소: “하나님의 심판석”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격을 가립니다. 하나님이 곧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감추는 결과가 됩니다. 마무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도 바꿔선 안 된다.”는 기본 전제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최종 심판자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을 흐리게 만드는 NIV나 개역성경 등의 현대 역본은 성도들에게 왜곡된 하나님 인식과 약화된 신학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자 한다면, 바른 사본에 근거한 바른 번역인 킹제임스 성경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KJV)
2025-05-20 08:15:31 | 관리자
요한복음 1장 18절은 성경 번역본에 따라 중요한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번역이 논란의 중심입니다. 핵심적인 차이: '독생자' 또는 '독생하신 하나님' • 킹제임스 성경(KJV) 및 다수 초기 사본: "독생자" (the only begotten Son)로 번역합니다. 이는 아버지가 '낳으신 아들'을 의미합니다. • NASB, ESV 등 현대 역본 및 소수 알렉산드리아 사본: "독생하신 하나님" (the only begotten God 또는 the only God)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번역 차이의 근거와 논쟁 1. 사본 증거: ◦ 로마 제국 전역에서 발견된 **대다수의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은 "독생자"**라고 읽습니다. ◦ 소수의 초기 **알렉산드리아 사본들만이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읽습니다. ◦ 현대 번역본들은 이 소수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더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이유로 이 번역을 선호하지만, 이는 다수의 다른 사본들을 무시한 선택입니다. 2. 성경 내 다른 용례: ◦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성경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 대조적으로, **"독생자"**라는 표현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3장 16절, 3장 18절,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세 번 더 사용합니다. 3.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인용: ◦ 2세기와 3세기의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이레니우스,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은 요한복음 1장 18절을 인용할 때 "독생자"라고 인용했습니다. ◦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활동한 인물들입니다. ◦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양태론자들에 대항하여 논쟁했는데, 만약 그의 성경에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있었다면 논쟁에 유리하게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그는 항상 "독생자"를 인용했습니다. (터툴리안은 후대 정통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예수님을 열등한 신으로 보았습니다). 4. 번역의 신학적 함의: ◦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될 경우, 예수님이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 되며,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창조하신 열등한 신으로 이해될 여지를 줍니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단체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 반면, "독생자"는 아버지가 낳으신 특별한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 일부 현대 번역본들은 "하나님, 유일하신 아들" 또는 "아버지의 곁에 계신"과 같은 표현을 추가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리스어 원문("아버지의 품, 즉 가슴이나 심장 안에 계신")에 근거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30번 이상 사용하지만, "하나님 아들"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관점을 지지합니다. 결론 • 초기 그리스어 사본의 대다수와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증거에 따르면, 요한복음 1장 18절의 올바른 번역은 **"독생자"**입니다. • "독생하신 하나님"은 나중에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삽입된 변형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자료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이고 사본적인 증거는 요한복음 1장 18절이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독생자"로 읽혀야 함을 입증한다는 내용입니다.
2025-05-20 08:08:37 | 관리자
“사탄아, 물러가라!” – 예수님의 권세가 사라진 누가복음 4장 8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단호하고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신 사건은 성경의 가장 강력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NIV, 개역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권세 있는 명령의 일부를 삭제하여, 예수님의 신성과 권위를 흐리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의 본문: 예수님의 권세가 분명히 드러난다 누가복음 4:8 (KJV)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him, Get thee behind me, Satan: for it is written, Thou shalt worship the Lord thy God, and him only shalt thou serve.”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기록된 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교사나 예언자가 아니라, 사탄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권세 있는 주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은 주께서 직접 대적을 책망하시고 물리치시는 권능을 보여 줍니다. 2. 현대 역본(NIV, 개역성경)의 삭제: 예수님의 권세를 흐리게 한다 누가복음 4:8 (NIV)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하였느니라.” (※ “사탄아, 물러가라”는 문장 전체 삭제) **예수님의 책망, 즉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은 완전히 사라져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구 삭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축소하려는 심각한 사본 문제입니다. 3.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i. 예수님의 주권적 명령이 강조되어야 한다 사탄을 명령으로 내쫓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이 권세의 표현을 삭제하면, 독자는 예수님을 단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스승쯤으로 여기게 됩니다. ii. 예수님의 신성과 인격을 희석시키는 경향 현대 역본들은 요한복음 9:35, 디모데전서 3:16, 누가복음 2:33 등에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하는 구절을 자주 생략하거나 흐리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를 넘어 전체적인 교리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iii. 천주교 소수 사본에 의존한 결과 이러한 삭제는 웨스트코트-호르트 본문 계열의 천주교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을 따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Scrivener의 공인 본문(TR)**에는 분명히 이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4. 결론: 예수님의 권세를 축소하는 번역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은 단지 꾸짖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사탄을 명령으로 제압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나타내는 성경적 진술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절을 삭제한 NIV, 개역성경 등의 번역은 명백한 신학적, 사본적 손상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본문을 보존한 킹제임스 성경을 따라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신성을 끝까지 수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순수하며, 그 안에 하나님의 권위가 담겨 있다. 한 단어의 삭제도 치명적이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빼앗는 번역이 아닌, 그분을 높이는 말씀에 굳게 서자.
2025-05-20 07:58:49 | 관리자
– 갈라디아서 3장 17절과 사본 변개의 심각성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언약을 지워버리는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핵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NIV, 개역성경 등)은 이러한 중심 축인 ‘그리스도’를 사본에서 제거하거나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7절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7 (KJV) “And this I say, that the covenant, that was confirmed before of God in Christ, the law, which was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fter, cannot disannul, that it should make the promise of none effect.”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폐기할 수 없나니…” KJV는 구약의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립되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부터 존재하시며,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표들이 그분 안에서 성취될 것을 예견한 언약임을 보여 줍니다. 2. 그러나 현대 역본(NIV, 개역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7 (NIV) “What I mean is this: The law, introduced 430 years later, does not set aside the covenant previously established by God…”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무효화하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핵심 표현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졌다는 진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3. 왜 이것이 중요한가? i. 성경 전체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창세 이후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으로 소개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모든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ii. 구약의 언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효력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의 문제를 논하며, 구약의 언약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제거하면 은혜 언약의 실체도 무너집니다. iii. 현대역본은 무의식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 신성, 구속 중심성을 흐리게 한다 이는 단순한 문장의 차이가 아니라 신학의 변질, 구속사의 재편, 복음의 중심 이탈을 초래합니다. 4. 사본 문제의 본질: 그리스도를 지우는 일 이러한 삭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천주교 소수 사본(Aleph, B 등)을 근거로 한 웨스트코트-호르트 계열의 그리스어 본문이 근본 원인입니다. NIV, 개역개정, NASB, ESV 등 현대역본은 이 소수 본문을 따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성경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중심성이 사라지거나 약화됩니다. 결론: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만이 온전한 구속사를 보존한다 KJV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졌다”고 선언한다. 현대역본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생략함으로써 성경의 핵심을 손상시키고 있다. 이는 사본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의 차이이며,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왜곡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다. 그분이 빠진 성경은 아무리 유려해도 진리가 아니다.” 정확한 성경, 정확한 말씀, 정확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2025-05-20 07:55:58 | 관리자
마태복음 6장 7절 –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헛된 반복’ – 반복 기도는 경건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일부 종교는 말의 반복으로 기도의 효과를 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교회는 묵주 기도를 통해 **수십 번 “마리아여”, “영광이 있기를”**을 되뇌이며 이것이 경건한 신심의 표현이라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정확히 정반대의 것을 말합니다. 1.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마태복음 6:7 (KJV) “But when ye pray, use not vain repetitions, as the heathen do: for they think that they shall be heard for their much speaking.”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처럼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말이 많아야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KJV는 ‘vain repetitions’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해 기계적인 반복 기도에 대한 명백한 경고를 줍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경건, 형식적 종교의 위험성을 직격합니다. 2. 그러나 NIV는 이 경고를 희석시킨다 마태복음 6:7 (NIV) “And when you pray,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for they think they will be heard because of their many words.”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계속 중얼거리지 마라.” NIV는 핵심 표현인 **‘vain repetitions’(헛된 반복)**을 **‘keep on babbling’(계속 중얼거림)**이라는 모호한 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적 의식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기도문을 외우는 행위에 대한 성경적 책망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3.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로마 카톨릭의 묵주 기도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주기도문(Our Father)” 15번 “영광송(Glory be to the Father)” 15번 “성모송(Hail Mary)” 150번 이 기도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간구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보다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가 10배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헛된 반복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말로 인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마음과 진실한 믿음이 동반될 때 들으십니다.” (참조: 요 4:24) 4. 바른 성경만이 바른 기도를 지켜 준다 KJV는 “반복 기도”를 분명히 죄로 규정하며 이교도의 관습과 연결지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NIV와 개역성경은 이 중요한 표현을 삭제하거나 축소시킴으로써, 로마 카톨릭의 미신적 기도 행위를 침묵 속에 방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확한 본문이 정확한 교리를 낳고, 정확한 교리가 정확한 기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결론 KJV: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지켜내며, 헛된 종교 행위를 책망한다. NIV 및 개역성경: 책망의 날을 무디게 하여, 형식적 종교 의식을 조용히 정당화한다. 성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결코 무의미한 반복 속에 신앙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 (요 4:24) 믿음의 사람은 진실한 말씀과 올바른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정확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025-05-19 21:50:41 | 관리자
로마서 15장 16절에 사제 직무가 있었는가? – 성경을 변개한 천주교 사본의 그림자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도 바울이 ‘사제(제사장) 직무’를 수행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과 NIV 같은 현대역본들은 로마서 15장 16절에 어떤 그리스어 사본의 지지도 없이 ‘제사장의 직무’라는 표현을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천주교 사제 제도를 정당화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왜곡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은 바르게 번역한다 KJV – Romans 15:16 "That I should be the minister of Jesus Christ to the Gentiles, ministering the gospel of God..." 내가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제공함으로써... 여기서 ‘ministering’(Strong’s #2418, hierourgeo)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섬기다, 복음을 제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제사장의 제의적 기능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사역을 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 현대 역본들은 어떻게 바꾸었는가? NIV – Romans 15:16 "...with the priestly duty of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개역성경 – 롬15:16 "…하나님의 복음을 제사장 직무로 하게 하사…" 이 표현은 명백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NIV는 **‘priestly duty(제사장 직무)’**라는 말을 삽입하여, 신약의 복음 전파 사역을 구약의 제사장 직무와 동일시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오해가 생깁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했다는 착각 복음 전파를 제사의식처럼 신학화하는 오류 로마 카톨릭의 사제 직무를 정당화하는 듯한 인상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니라.” (딤전 2:5, KJV 흠정역) 3. 왜 NIV는 '사제' 용어를 넣었는가? 이 구절의 원어 그리스어에는 ‘제사장 직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제공하는’(offer) 사역자일 뿐, 구약 제사장처럼 희생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은 이를 명확히 못박습니다: “그분께서는 죄들로 인해 한 번 영원한 희생을 드리신 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0:12) “더 이상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없느니라.” (히10:26) 그런데도 NIV가 사제직적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 제도를 성경에서 근거 있는 제도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4. 복음을 드리는 것과 사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제공하다(Strong’s #2418)”는 말은 복음을 통해 이방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섬김의 개념이지, 성만찬을 집전하거나 제사를 반복하는 의식 행위가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역자(minister)였지, 결코 중보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두고, 우리 모두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특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결론: 왜 이 번역이 위험한가? “제사장의 직무”라는 오역은 복음의 순수성과 신약 교회의 원칙을 훼손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며, 로마 카톨릭 신부 제도를 뒷받침하는 데 악용될 수 있습니다. KJV는 정확한 단어 사용을 통해 이런 왜곡을 허용하지 않으며, 바울의 진정한 정체성을 “복음을 드리는 사역자”로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잡하지 않습니다. 오직 순전한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2025-05-19 21:49:14 | 관리자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 왜 현대역본은 마태복음 23:14을 지웠는가?   성경은 단지 종교적 문서가 아닙니다. 죄와 의,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거짓 종교에 대한 책망을 담은 진리의 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널리 쓰이는 현대역본들, 특히 **NIV(새국제역)**와 개역성경은 이 진리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태복음 23장 14절의 삭제 문제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KJV 마23:1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위장하려고 길게 기도하니 그러므로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 이 구절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들을 착취하고, 거짓 경건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감추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책망입니다. “과부의 집을 삼킨다”는 표현은 단지 도덕적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적 사기 행위를 가리킵니다. 2. 그런데 개역성경과 NIV에는 이 구절이 아예 없다 NIV 마23:14 – (삭제됨) 개역성경 – 이 구절 전체 없음, 혹은 각주에만 일부 설명 심지어 NIV는 각주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Some manuscripts include verse 14.” (어떤 사본들은 14절을 포함하고 있음) 하지만 실제로는 적어도 50개 이상의 사본이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으며, **삭제된 것은 소수 사본(약 19개)**에 불과합니다. 3. 왜 이 구절이 현대역본에서 사라졌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답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도와 부패를 은폐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수세기 동안 연옥 교리를 내세워 과부나 유족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그는 연옥에 있다”고 말하고 돈을 내면 신부가 “미사와 기도로 연옥에서 구출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돈이 없으면 “집을 팔아라”고 합니다 과부는 성당에 헌납하고 신부는 과부의 집을 삼키게 됩니다 이게 바로 KJV가 말한 ‘과부들의 집을 삼키는’ 실제 사례입니다. 4. 마태복음 23:14은 누구를 정죄하고 있는가? 이 구절은 단순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종교 위선자들, 특히 자기 이익을 위해 거룩한 척하며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위장된 긴 기도”는 현대의 “미사, 고해성사, 면죄부” 등과 동일합니다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은 신부, 신학자, 주교, 교황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음을 보여 줍니다 5. 왜 ‘성경 삭제’가 큰 문제인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지우거나 바꾼다면, 사탄은 어떤 말씀도 우리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를 신원하시는 분”(신명기 10:18) “너희는 그의 말을 너희 마음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신명기 4:2) “이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생명나무에서 제함을 당하리라”(계시록 22:19) 현대역본들은 이런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합니다. 그 결과, 과거의 종교 범죄자들에 대한 신랄한 책망이 지워지고, 사람들은 진리를 모른 채 종교 체제에 속박당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결론: 우리는 어떤 성경을 붙들고 있는가? NIV와 개역성경은 종교 제도에 이로운 방향으로 성경을 조작했습니다. KJV는 죄와 위선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일점일획이라도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부들의 집을 삼키는 자들”을 위한 말씀까지도 그대로 남겨야 하며, 그것을 통해 복음의 순수성과 하나님의 공의를 지켜야 합니다.
2025-05-19 21:42:42 | 관리자
계시록 17장 6절 – ‘순교자들의 피’는 어디로 갔는가?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요, 역사의 해석서이며, 미래의 예언서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심판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한 박해의 진실을 폭로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런 핵심적 의미가 현대역본들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1. 킹제임스 성경은 순교자들의 피를 증언한다 요한계시록 17장 6절(KJV): “And I saw the woman drunken with the blood of the saints, and with the blood of the martyrs of Jesus: and when I saw her, I wondered with great admiration.” “내가 보매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으므로 내가 그녀를 보고 크게 놀랍게 여기며 이상히 여겼노라.” 이 구절은 분명하게 순교자들(martyrs), 즉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 흘린 자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본 그 여자는 단순한 정치 세력이 아니라, 피에 취한 자입니다. 누구의 피입니까? 성도들과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입니다. 2. 현대역본(NIV)은 '순교자'라는 단어를 뺐다 NIV 번역: “I saw that the woman was drunk with the blood of God’s holy people, the blood of those who bore testimony to Jesus.” 영어 표현만 보면 멀쩡해 보입니다. 그러나 핵심이 되는 단어, 즉 **“martyrs” (순교자들)**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testimony”라는 단어는 증언하다는 의미로, 반드시 목숨을 걸고 순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NIV 번역은 순교의 의미를 흐려 놓았습니다. 3. 왜 ‘순교자’라는 단어가 중요할까? 역사적으로 로마 카톨릭교회는 수많은 성도들을 화형시키고, 교수형에 처하며, 종교 재판으로 고문했습니다. 특히 중세 시대 1,200여 년 동안만 해도 약 6,800만 명의 성도들이 복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의 여왕 메리는 단 7년 동안 약 300명을 말뚝에 묶어 화형시켰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을 고문하고 처형했습니다. 왈덴시안, 재침례파, 위클리프파, 후스파, 그리고 침례교 신자들은 모두 이 여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라는 단어가 빠짐으로써,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교회사 속 핏값이 무력화되는 것입니다. 4. 무엇을 감추려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천주교 소수 사본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NIV, 개역성경 등 현대역본은 바티칸 사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사본들은 역사 속에서 교회의 죄악과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정교하게 편집되었다는 강한 의혹을 받습니다. “Martyrs of Jesus”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순교 행위에 대한 정죄가 사라집니다. 그 결과, “바벨론의 큰 음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경적 고발도 희석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 교회 성도들, 종교개혁가들, 킹제임스 성경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의 피는 잊혀지게 됩니다. 결론: 잊지 말아야 할 성도의 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죽인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 위에 임하리라.” (마태복음 23:35) 성도의 피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KJV 성경에서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를 보는 순간, 단순한 신학적 표현이 아니라, 역사 속 살아 있는 증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누가 교회를 죽였는가, 그리고 누가 그 역사를 지우려 하는가에 대한 영적 싸움입니다. KJV는 순교자의 피를 지우지 않습니다. 현대역본은 그 피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개된 성경이 아닌, 진리를 지켜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9 21:38:53 | 관리자
고린도전서 9장 27절과 천주교 고행 교리 – 성경이 그렇게 말했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개역성경과 NIV 등 현대역본은 때때로 단어 하나로도 중요한 교리를 뒤틀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이 구절은 자기 절제와 성결한 삶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인데, 현대역본은 이를 ‘자기 몸을 때리는 고행’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표현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1. 원래의 말씀: 자기를 억제하여 복종시키는 삶 킹제임스 성경(KJV): “But I keep under my body, and bring it into subjection: lest that by any means, when I have preached to others, I myself should be a castaway.”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한 뒤에 나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keep under”는 원어로 hypōpiazō (ὑπωπιάζω)이며, 이는 자기를 억제하다, 절제하다, 통제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훈련과 경건한 자기 부인의 의미이지, 결코 물리적인 자학을 뜻하지 않습니다. 2. 현대역본의 표현: ‘자기 몸을 때린다?’ NIV: “I beat my body and make it my slave…” 개역성경: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이 표현은 매우 위험합니다. 단어 선택이 자기 자학, 고행, 육체적 징벌로 흐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하며 채찍질, 금식, 몸에 상처를 내는 자발적 고통을 경건한 행위로 정당화해 왔습니다. 3. 천주교 고행 교리와의 연결 중세 천주교회는 수도사들에게 **자기 채찍질(자학)**을 장려했습니다. 이는 죄를 속죄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더 거룩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가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히브리서 10:10, 요한일서 1:7). 바울은 결코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몸이 복음 사역에 방해되지 않도록 철저히 절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4. 왜곡된 해석이 낳는 심각한 결과 현대역본의 이와 같은 번역은 결국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러옵니다: 경건이란 자기 몸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이라 착각하게 한다. 금욕적 고행과 채찍질이 죄 사함이나 경건의 표로 오해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약화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은혜에 의한 구원”을 거부하고, “행위나 고행에 의한 의”로 미끄러지게 하는 신학적 위험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천주교 소수사본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결론: 복음은 고행이 아닌 은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과 절제는 자신의 욕망과 육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영적 훈련이지, 육체를 실제로 때리거나 괴롭히는 종교적 고행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위해 채찍질 당하시고 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또다시 육체를 때리는 것으로 그분의 희생을 보완하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모독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의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KJV)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왜곡되지 않은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현대역본이 만들어내는 고행신학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의 복음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2025-05-19 21:34:52 | 관리자
누가복음 9장 55-56절: 왜 현대 역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삭제했는가?   누가복음 9:51–56의 변개는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을 제거하고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종교적 범죄를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1. 본문의 배경: 야고보와 요한의 제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격분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들을 태워 버리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KJV, 눅 9:54) 즉, 구약의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 사람들을 심판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반응: 강한 책망과 복음의 원리 선언 예수님은 이 제안에 대하여 분명히 거절하고 책망하십니다.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KJV, 눅 9:55–56) 이 구절은 복음 사역의 본질, 즉 구원은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출하는 것임을 밝히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3.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의 삭제 그러나 NIV와 개역성경에서는 이 중요한 진술이 대폭 삭제되어 있습니다. NIV는 눅 9:54~56에서 약 26개의 단어를 본문에서 제거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꾸짖음은 간략해지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를 향한 극률과 구원의 성품은 사라져 버립니다. 예: NIV: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 And they went to another village.” KJV: “But he turned, and rebuked them, and said, Ye know not what manner of spirit ye are of. For the Son of man is not come to destroy men’s lives, but to save them. And they went to another village.” 이처럼 구절의 핵심 내용, 즉 예수님의 복음적 선언이 삭제되었고, 결과적으로 독자는 예수님께서 왜 책망하셨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KJV 54 And when his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said, Lord, wilt thou that we command fire to come down from heaven, and consume them, even as Elias did? 54 그분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들을 태워 버리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니 55 But he turned, and rebuked them, and said, Ye know not what manner of spirit ye are of. 55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56 For the Son of man is not come to destroy men’s lives, but to save them. And they went to another village. 56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더라.  NIV, 개역 등 54 When the disciples James & John saw this, they asked, “Lord, do you want us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m? OMIT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삭제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한글개역) 55 But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후반절) 삭제 (한글개역)   56 OMIT and they went to another village. 56 삭제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한글개역) (역주: 모두 사본 차이) 4. 왜 이 구절이 삭제되었는가? 이 삭제는 단순한 문장 압축이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의 역사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잔혹한 물리적 처벌을 가했습니다. 종교 재판, 화형, 고문을 통해 약 6,800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특히 **영국의 메리 여왕(‘피의 메리’)**은 300여 명의 신실한 개신교인들을 화형시켰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멸하지 않고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성품”을 말하는 이 구절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잔혹함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그래서 NIV 같은 천주교 성향의 소수사본에 의존한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설명입니다. 5. 사본 증거 이 구절들은 48개의 그리스어 사본에 포함되어 있으며, 삭제된 사본은 29개에 불과합니다. 비율로 따지면 약 2:1로, 다수 사본은 이 구절이 정확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결론: 복음의 본질을 지운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조차 하늘에서 불을 내리라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NIV와 현대역본들은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삭제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편집상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영적 전쟁의 일환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단어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며, 그 어떤 종교적 체제나 전통도 성경의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곡된 사본이 아닌,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KJV)을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안에만,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2025-05-19 21:30:31 | 관리자
요한복음 1장 42절: 베드로는 “반석”이 아니라 “작은 돌멩이”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를 교황의 기초, 즉 **"반석(the Rock)"**이라 주장하며 모든 교황직의 정당성을 그에게서 끌어오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를 반석이 아닌 **“작은 돌, 하나의 돌멩이(a stone)”**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 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장 42절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Thou shalt be called Cephas, which is by interpretation, A stone.” “네가 게바라 불리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이름은 **헬라어로 ‘Πέτρος (Petros)’**이며, 이는 “하나의 돌멩이”(a small stone) 라는 뜻입니다. 즉, 시몬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많은 돌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2. NIV와 개역성경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You will be called Cephas” (which, when translated, is Peter). 여기서 “a stone”이라는 번역의 본뜻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단지 **이름(Peter)**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도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라고만 번역하여 그 이름의 의미를 생략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천주교의 교황 수위권 교리를 정당화하려는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단지 “돌멩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변개입니다. 3. 성경이 말하는 반석은 누구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4)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의 터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20) 따라서 **“작은 돌”(Petros)인 베드로)**는 교회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초(반석, Petra)가 아닙니다. 4. 사본 문제: 왜 이런 변개가 생겼는가? 이처럼 이름의 뜻이 분명히 기록된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니라(a stone)” 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이 따르는 **소수사본(Nestle-Aland/UBS)**은 이 의미를 감추고 단순히 “베드로”라고만 번역하여 베드로의 지위가 높아 보이도록 의도된 누락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천주교 사본의 영향 아래에서 교황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는 작은 돌멩이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를 반석으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반석이며, 교회의 머리요 기초이십니다. 베드로는 한 사람의 사도, 교회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어야 하며, 소수 부패 사본에 따라 조작된 현대역본들의 흐림과 왜곡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게바라 불리리라.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니라.” (요한복음 1:42, KJV) “다른 터는 아무도 놓을 수 없나니 오직 놓인 그것 외에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전 3:11, KJV) 이 말씀 그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람 위에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2025-05-19 21:24:44 | 관리자
누가복음 1장 28절: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를 삭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복음 1장 28절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을 기록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리아가 특별한 은혜를 입었지만, 여자들 중 하나일 뿐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과 NIV 등 현대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을 아예 삭제해 버렸습니다. 1. KJV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KJV (킹제임스 성경) "Blessed art thou among women." “네가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마리아가 특별한 사명을 맡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인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신성한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즉, 그녀는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는 한 사람"일 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선택된 여인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NIV와 개역성경은 무엇을 삭제했는가? NIV: “Greetings, you who are highly favored! The Lord is with you.” 여기서 “Blessed art thou among women”(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개역성경도 동일하게 이 표현을 누락하고 있습니다. 3. 왜 이 구절이 중요한가? 이 표현은 마리아의 인성을 강조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은혜를 입은 자"로 소개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단지 여자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삭제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톨릭의 마리아 무염 시태설(Mary’s Immaculate Conception), 즉 마리아가 원죄 없이 수태되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본문이 흐려집니다. 마리아가 일반 여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처럼 보이도록 유도합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마리아에 대한 성경적 균형이 무너지고,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 교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4. 본문 비평과 사본 문제 그리스어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이 표현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εὐλογημένη σὺ ἐν γυναιξίν”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estle-Aland (UBS) 비평 본문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된 형태로 편집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현대역본들이 본문에서 이 구절을 누락시킨 이유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본문(사본)에 근거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며, 그 기저에는 **로마 카톨릭이 중심이 된 "소수사본의 부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론: 마리아는 여인들 중 하나일 뿐,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존중하되, 결코 숭배하거나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사용된 순종하는 한 사람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명을 감당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과 구별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현대역본들은 결국 마리아 숭배를 부추기는 카톨릭 교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흐려놓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적 변개에 속지 않고,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KJV)**을 신뢰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9 21:20:30 | 관리자
고린도전서 10장 28절: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를 지운 현대 성경 – 누구를 위한 삭제인가?   고린도전서 10장 28절은 그리스도인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NIV, 개역성경 등)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 바로 “우상들(unto idols)”이라는 구절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였습니다. 이 삭제는 단순한 축약이나 의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히 경고하신 "우상 숭배의 죄"를 흐리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의 분리된 삶의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중대한 왜곡입니다. 1. KJV의 정확한 번역: 우상에게 바친 희생물 킹제임스 성경(KJV): “But if any man say unto you, This is offered in sacrifice unto idols, eat not…” 그리스어 원문(TR): Toῦτο εἰδωλόθυτόν ἐστι –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다” ➡️ 여기서 사용된 단어 **εἰδωλόθυτόν (eidolothuton)**은 **'eidolon'(우상) + 'thuo'(희생하다)**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10번만 사용되며, 모두 우상 숭배와 관련된 경고의 맥락 안에서 등장합니다. 2. NIV와 개역성경은 어떻게 바꾸었나? NIV: “If someone says to you, ‘This has been offered in sacrifice,’ then do not eat it…” 개역성경: “누가 이것이 제물이라고 말하거든… 먹지 말라” 이 구절들에서는 “우상”이라는 핵심 단어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는 문맥상 ‘희생물’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인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성도는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기준과 신앙적 선을 잃게 되는 셈입니다. 3. 왜 이 삭제가 심각한가? (1) 로마 카톨릭 교리와의 충돌 회피 로마 카톨릭은 성당 안에 수많은 성상과 형상, 그리고 미사에서 드리는 희생제사 등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이교도적 형상 숭배와 제의적 구조가 신약성경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NIV를 포함한 현대 역본은 이런 불편한 진리를 “순화된 표현”으로 감추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성도들의 경계심을 무디게 함 “우상들에게 바친 것”이란 표현은 명확히 영적 분리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사라짐으로써 세속 문화, 이교 의식, 또는 종교 혼합주의와의 선이 희미해지고, 오늘날 종교 간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게 됩니다. 4. 사본 증거는 무엇을 말하는가?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비평 본문인 네슬레-알란트(UBS)조차도 고대 사본 29개가 “우상에게 바친 것”이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시내 사본조차 해당 표현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번역자들은 이 내용을 고의적으로 삭제한 것입니다. 결론: “우상”을 지운 성경은 경건한 경계심을 제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정보 전달이 아니라, 성도를 죄로부터 분리시키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숭배로부터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령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상들과 아무 상관도 말라.” (고전 10:14) 성경에서 ‘우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성도들은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올바른 본문에 근거한 올바른 성경 번역, 즉 **킹제임스 성경(KJV)**과 같은 정확하고 보존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분하고, 참된 거룩함 안에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025-05-19 21:15:43 | 관리자
마태복음 25장 31절:  “거룩한”을 삭제한 현대 역본들 –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 성령님, 대언자들, 성도들도 그분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로서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NIV, 개역성경 등)은 이 거룩함의 표현을 곳곳에서 삭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과 존재들의 영적 위상을 낮추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 전체에 대한 경외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1. 거룩한 천사들이 그냥 ‘천사들’이 되다 (마태복음 25:31) KJV: “사람의 아들이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NIV/개역: “모든 천사들” 천사들조차 ‘거룩함’을 빼앗김으로써,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과의 구별이 모호해집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오실 하늘의 순결한 군대에 대한 묘사를 약화시킵니다. 2. 성령님이 ‘영’으로 격하되다 (요7:39, 행8:18, 고전2:13) KJV: “Holy Ghost(거룩한 영)” NIV/개역: 단순히 “영” 성령님을 단순한 비인격적 개념처럼 만들며, 삼위일체 중 제3위 하나님이심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번역입니다. NIV는 총 3군데에서 “Holy”를 생략하여 성령님의 신성과 구별성을 훼손합니다. 3. 집사들에서 성령 충만이 삭제되다 (사도행전 6:3) KJV: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이 충만한 일곱 사람” NIV/개역: “영이 충만한 일곱 사람” KJV는 성령님의 거룩함과 신성을 드러내지만, 현대 역본은 애매한 ‘영적 태도’ 정도로 축소하여 성령의 인격성과 구별성을 흐립니다. 4. 과부들이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 무시됨 (고전 7:34) KJV: “그녀는 거룩하게 주를 위해 자신을 구별하려 하며” NIV/개역: “주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려 하며” (거룩 누락) 여기서도 ‘거룩함’이라는 성도 개인의 삶의 방향성이 사라지고, 단순한 ‘헌신’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대체되어 성화의 핵심 개념이 약화됩니다. 5. 형제들이 거룩하지 않게 되다 (살전 5:27) KJV: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이 편지를 읽게 하라” NIV/개역: “모든 형제들에게” 이는 교회 공동체 안의 구별된 성도들이라는 인식 자체를 지워버리고, 단순히 ‘같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수준으로 격하시킵니다. 6. 성경 저자들의 신적 사명을 희석시킴 (벧후 1:21) KJV: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말함” NIV/개역: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말함” (거룩 삭제) 이로써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사용하신 영감 받은 사람들에 대한 표현이 사라지며, 결과적으로 성경 무오성과 신적 기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7. 거룩한 대언자들이 그냥 ‘대언자들’이 됨 (계22:6) KJV: “그분께서 거룩한 대언자들의 영들에게 보내셨느니라” NIV/개역: “대언자들”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에 부름 받은 자들의 거룩함과 위임받은 권위가 희석됩니다. 8. 왜 “거룩함”을 싫어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즉, 거룩한 성도들, 거룩한 대언자들, 거룩한 천사들—이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며, 사탄은 그 속성을 지운 성경을 좋아합니다. 결론: 거룩함이 없는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반영하지 못한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벧전 1:16) “너희는 진리로 너희 자신을 거룩히 하라.” (요 17:17) “거룩함”을 반복적으로 지운 성경은 성도들에게 ‘거룩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조차 흐리게 합니다. 이는 단지 단어 몇 개의 삭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부르신 자들에 대한 전체적 관점을 뒤흔드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KJV)처럼 거룩함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 없는 신앙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2025-05-19 21:11:4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