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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금 성경은 전체 문맥을 넓게 보며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힘써야 함과 더불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시공간만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함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바쁘신 가운데에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중요한 논점에 관한 귀한 깨달음을 나누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4-14 19:48:38 | 김대용
오늘은 성경 기록대로 입다의 딸에 관련된 사사기 11장을 읽어 볼까 합니다.   이미 킵바이블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깨달음을 허락하신 대로 부족하지만 소박한 제 의견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려 합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801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94    (삿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 11: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삿 11: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삿 11: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삿 11: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삿 11: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   위의 성경 기록을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입다는 무엇이든지 자신을 맞이하는 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2) 그런데, 그를 맞이한 것은 그의 무남독녀입니다.   (3) 딸은 아버지에게 서원한 것을 자신에게 행하라고 합니다.   (4) 그런데 이때 뜬금없이 입다의 딸은 ‘virginity’로 인하여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금 자신의 배를 가르고 각을 떠서 태워 죽이겠다고, 즉 번제 헌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본인은 시집가지 못하는 것이 슬퍼서 애곡합니다. 대단히 이상하죠? 저 같으면, 그동안 못 먹어 본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는다든가, 여행을 실컷 한다든가, 아니면 정말로 죽기 전에 가서 남자를 안다든가 등등을 하겠습니다.   자~! 성경 기록대로 virginity로 인하여 애곡한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virginity에 즉 ‘처녀로 지내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5) 그녀는 두 달 뒤에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를 알지 아니 하였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삿 11:38) And he said, Go.              And he sent her away for two months:              and she went with her companions,              and bewailed her virginity upon the mountains. (삿 11:39)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wo months, that she returned unto her father, who did with her according to his vow which he had vowed:             and she knew no man.             And it was a custom in Israel, (삿 11:40) That the daughters of Israel went yearly to lament the daughter of Jephthah the Gileadite four days in a year.   누군가는(?) And는 시간 순서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이 And에 맞추어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실제로 38절, 39절에 보면 모든 것이 일의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입다가 딸에게 자신의 서원을 실행했고, 그 결과 그 딸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뒤에 입다의 딸이 애곡한 것처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이스라엘 딸들이 매년 나흘씩 애곡합니다.   일의 순서를 다시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1절 첫째로 입다는 자신을 맞이하는 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34절 그의 딸이 입다를 맞이했습니다. 38절 그의 딸이 산에 올라가 자신의 virginity로 인하여 애곡했습니다. 39절 입다가 딸에게 자신의 서원을 실행했습니다. 39절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39절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풍습이 되었습니다.   분명 입다는 자신의 서원(번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그의 딸이 재가 된 것도 아니고, 죽었다는 기록도 성경에 나오지 않고, 단지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입다의 딸이 처녀였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처녀인 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의 상태를 나타내지만,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행위의 주체가 적극적으로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즉, 이 말은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음, 즉 남자와 동침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죽은 사람은 처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knew’를(즉 동침을) 할 수는 없습니다. ‘Knew’는 동사입니다. 상태의 ‘was’가 아닙니다.   만약에 입다의 딸이 처녀로서 죽었음을 표시하려면, “그녀는 처녀였다(she was virgin)” 또는 “그녀는 처녀였었다(she had been virgin.)”라고 표현하는 것이 전체 문맥상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형보다 한 단계 앞선 과거완료형을 써서 죽기 전의 입다의 딸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맞습니다. 이러면, 논란의 소지도 없이 입다가 자기 딸을 짐승처럼 불태워 죽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she knew no man)”고 말합니다.   바로 이 기록이 입다의 딸이 결코 죽지 않았음을 명백히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는 위의 성경 기록이 우리의 상식과 모순됨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번제 헌물로 드리면, 당연히 죽여서 태우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경 기록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며 죽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였음을 우리에게 더없이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성경 기록을 바꾸든가, 우리의 생각을 바꾸든가 말입니다. 사람을 번제 헌물로(조금 더 정확하게는 ‘번제 헌물을 대신하여’, for burnt offering, ‘as burnt offering’이 아님), 바친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을 죽여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태워 오직 주님께 바치는 번제 헌물처럼 (2) 사람의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것이며 (3) 여자인 경우는 남자를 알지 않고 처녀로 주님이 정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사사기 11장을 성경 기록대로 읽는 방법입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성경이 읽히나요? 앞 문장인 ‘번제 헌물로’에 너무 집착하시지 말고, 39절 뒤 문장도 같이 읽어 주세요. 37절에서 39절까지 전체문맥이 계속해서 viginity를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난해 구절로 분류하는 성경 기록일수록 앞뒤 문맥을 넓게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지식과 지능이 없어도 편견 없이 차분하게 성경을 읽으면 누구라도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능히 깨달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의 소박한 나눔이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22:50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14 18:28:34 | 홍승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 킵바이블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익히는 모든 형제/자매님 평안하신지요.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세상은 재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분들의 글과 강의를 접하며 그동안 생각했던 몇 가지를 소박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재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이 아니고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을 두고는 너무나도 단호히 이것들이 ‘멸망 당한 이전 세상’과 ‘재창조된 현 세상’을 가리킨다고 하며, 그 주장의 토대 위에서 계속해서 다른 성경 기록들까지도 자신들의 믿음에 짜 맞추다가 크게 실족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히브리서 11장 3절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11장 1절과 2절에 나와 있으며, 3절을 포함하여 뒤따르는 11장의 나머지 구절들 전체가 이 두 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히11:1-2)     이제 이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3. 믿음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위의 내용 중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와 연관된 구절입니다.   3절을 읽어 보면, 두 개의 문장이 나란히 세 가지 내용을 대비하면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비된 부분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아래에 도표화해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에 의해 지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 깨닫는” 것임을 먼저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기억해야 할 원리, 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온 우주의 모든 것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ings which are seen’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말하기 전에 쓴 바로 앞의 문장에서 등장한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세상들이’에 ‘현 세상’ 외에 (재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옛 세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멸망 당해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의 의도와는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여기 나오는 ‘세상들’은 지금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결국 재창조를 믿는 분들이 주장하는 허구의 공간인 ‘옛 세상’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3절에서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뜻은 이미 히브리서 1장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아들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world’는 1차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 외에도 동물, 식물, 물고기, 곤충, 별들이 거하는 세상들도 다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려면 세상(world)을 세계(world)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수많은 세계들이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즉, 크게는 은하계, 태양계, 자연계, 해저 세계 등으로부터, 인간 세계, 동물 세계, 식물 세계, 광물계 등등 얼마든지 총칭적 용어인 ‘세계’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구분해 표현하고 있지요.   그럼 왜 간단히 ‘세상’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을 ‘세상들’이라고 했을까요? 재창조를 믿고 싶은 분들은 “단수를 썼더라면 재창조에 관한 추측이 없었을 텐데 복수를 쓴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또 다른 근거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그 다음 문장에서 쓸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과 연계(대비)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총체적이고 개념적인데 반해 ‘세상들’은 구분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므로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더 시각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은하계’ 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세상들’이라고 복수형 단어를 사용한 것이 그 문장이 의도한 의미에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들’이란 단어를 하나 보았다고 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 세상’ 외에도 ‘옛 세상’이 있었는데 멸망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 말씀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자기 확신 가운데 주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석가들이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이런 곳에 나오는 ‘세상들’을 재창조와 연관시켜 ’옛 세상’, ‘현 세상’ 등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주 공간의 모든 것들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고 그 일을 예수님이 직접 하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안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성경기록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성경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은 요한복음 1장: 2-3절에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우리 예수님은 재창조를 알지 못하십니다.   사람을 지은 일 자체가 창조가 시작될 때, 우주 공간과 땅이 만들어진 그때, 즉 창세기 1장 1절에서 6일째 되는 날에 이루어진 것이지 재창조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막10:6)   여기도 시작(beginning)을 창세기처럼 처음으로 바꾸어서 이해하시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처음부터 즉 창조를 시작하시는 그 처음에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재창조 같은 것은 우리 주님의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87       (*) 다음은, 재창조가 킹제임스 성경의 진리이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어 거기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기록된 대로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한 반박입니다. <관리자>   --------------------------  어떤 재창조론자의 주장 --------------------------   *현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아는 이들에게 주는 보너스   지금 있는 현 세상을 셋으로 나누면 노아의 홍수를 기준으로 옛 세상, 천년 왕국으로 기준으로 오는 세상(마12:32)이 된다. 천년 왕국을 기준으로 이 세상(천년 왕국 전)과 저 세상(천년 왕국)으로 구분한다(눅20:34,35). 옛 세상, 이 세상, 저 세상 이 셋이 현 세상이며 천년 왕국이 끝날 때 "현 세상"은 불로 멸망한다(벧후3:10-12).   -------------------  이에 대한 반박 -------------------   문맥이 이상해서 정확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지만, 불의 멸망 이후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므로 땅은 영원하다. 노아의 홍수 이전 세상도 물로 멸하셨지만 일정 기간을 거쳐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세상을 여러 개로 나눈다 해서 완전 멸망과 재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재창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속임수다.   홍수 이전과 이후, 천년왕국 이전과 이후는 거주민이 다르고 환경이 다를 뿐 같은 세상이다. 노아에게 “모든 것이 죽으리라.” 하신 말씀도 정말 '모든 것'인가? ‘방주 속 생명들과 코로 숨 쉬지 않는 모든 것’을 제외한 심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세상을 멸하신 것이며(창6:13, 17), 노아가 맞은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을 다시 주신다(창9:1, 7). 그러므로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 = 노아의 홍수>의 공식이 성립된다. 천년왕국에 갈 때도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재창조 수준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1. 홍수 이전 세상 2. 지금 세상 3. 다가올 세상   굳이 세상을 나눌 필요도 없지만 재창조를 주장하는 모든 구절을 이렇게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근거 없이 지금의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고 그때의 세상은 재창조 이전의 세상이라고 우길 아무 근거가 없다.   ━━━━━━━     부디 우리 모두가 편견과 왜곡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읽고 해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성화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23:2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10 16:56:14 | 최상만
안녕하세요?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저는 계시록을 강해하며 계3:5의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는’ 것의 의미를 성실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 강해한 내용을 되돌아보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뒤 다시 글을 썼지만 역시 전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조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999   이런 가운데 요즘 저희 교회에서 성경 Q & A를 오후에 진행하는데 성도들 중 이것을 궁금해하는 분이 다시 질문을 올려 주셨습니다. 이분의 질문의 핵심은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고 구원이 취소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기저기를 찾아보며 이 말씀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팀 라헤이(Tim LaHaye) 목사님이 설명해 놓은 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며 조화를 이루는 바른 해석인 것 같아 소개합니다. 라헤이 목사님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며 환난 전 휴거를 설명하는 분입니다. 환난 전 휴거에 대한 그분의 소설 <Left Behind>는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http://www.gnfi.org/articles/teachings-pdf-downloads/103-the-book-of-life (다음 글은 라헤이 목사님이 지은 <Prophecy Study Bible>에 있는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런 글을 통해 성경을 통합적으로 보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   먼저 생명책(book of life)을 살펴봅시다. 구약에는 생명책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사악한 자들)을 산 자들의 책에서 지우사 의로운 자들과 함께 기록하지 마소서(시69:28).   이 책은 하나님의 책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32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 33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32:32-33).   이 책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책이며 여기에는 우리의 몸이 모태에서 형성되는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눈이 아직 불완전한 나의 실체를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된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되 그것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기록되었나이다(시139:16).   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짓고 용서받지 못한 자(출32:33), 즉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지 못한 자 2. 이기지 못한 자(계3:5), 여기서 ‘이기는 자’는 행위를 많이 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 즉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3. 성경 말씀을 고의로 변개한 자(계22:19)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대개 우리는 사람이 구원받을 때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것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가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 있는 한 신자든 불신자든 그의 이름은 여전히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 즉 불신자와 성경 변개자 같은 죄인들의 이름은 거기서 지워집니다.   한편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책이 등장합니다. 이 책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그 이름이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책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여기의 어린양은 물론 세상 죄를 제거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요1:29).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일단 이름이 오르면, 즉 구원받으면 어린양께서 끝까지 그를 구원하실 수 있으므로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히7:25).   그러므로 ‘생명책’과 ‘어린양의 생명책’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책으로 생각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또 무엇이든지 가증한 것을 이루게 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 그 이름은 처음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동안 기록되어 있던 ‘생명책’에서 제거됩니다.     --------- 결론 ---------     비록 구약 시대 이야기지만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를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 땅에서 이름이 있었지만 죽은 뒤에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모르십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도 비슷한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 속박 당하려 하느냐?   여기의 ‘너희’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을 때 하나님에게 알려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원받기 전에도 그를 아시지만(생명책으로), 구원받아야 비로소 그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으로 아십니다. 갈4:9는 구원받지 않으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말합니다. 즉 ‘어린양의 생명책’의 이름으로는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럭크맨의 영향을 받아 재창조를 굳게 지지하는 리건(David Reagan) 목사도 이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learnthebible.org/blotting-out-of-names-the-book-of-life.html   그의 마지막 권고가 인상적입니다. 영어로 그대로 적습니다.   If all men are in the book of life, then there is hope for them as long as they live. We need to strive to make sure that more of them continue to live--even when they have left the land of the living. We need to take to them "all the words of this life" (Acts 5:20) about how to trust in "the Prince of life" (Acts 3:15) so that their names will not be blotted from the book of life.     참, 질문을 주신 분에게 답을 드립니다.   어린양의 피로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삭제되지 않습니다.한편,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동안 기록되어 있던  ‘생명책’에서 지워집니다.   제가 처음부터 조금 더 잘 연구해서 알려드렸으면 혼동이 조금 덜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세심하고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 럭크맨이든 리건이든 라헤이든 그 누구든 극단적 세대주의 해석을 하지 않고 누가 봐도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온전한 의견을 제시하면 언제라도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가진 우리는 다만 그들의 몇몇 극단적인 주장만 피하면 됩니다.  
2015-04-10 15:43:28 | 관리자
안녕하세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메일 드립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seventy times seven’이라고 나와 있고 흠정역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개역성경에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는데 개역성경과 함께 배열된 NIV에는 ‘seventy-seven times’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일흔일곱 번을 뜻하는데 작년에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77번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또 같은 ‘seventy times seven’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주신 말씀이 이렇듯 달리 표현되기에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신자로써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 이 문제에 대해서 킵바이블 사이트에 정확하게 정리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렇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대로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70 x 7)까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7이 완전수이므로 이 말은 보통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영어로 된 다른 역본들을 살펴보았는데 유독 NIV만 77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NIV는 '곱하기'(times)를 '더하기'(plus)로 바꾼 셈이 됩니다. 이러고는 조금 미안했던지 각주에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성경 그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보시면 됩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어, 영어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5-04-10 12:26:33 | 관리자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요?   다음은 어느 분이 질문한 내용입니다.   -------------- 개역성경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기록자는 이 구절을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실상 이것은 스가랴서 11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필시 마태의 실수나 킹제임스 성경의 모태가 된 공인 본문 즉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요? --------------   아닙니다. 이 구절은 흠정역이나 개역이나 다 같습니다.   흠정역: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니라. 일렀으되, 그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 곧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자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인 은 서른 개를 취하여 [주]께서 내게 정하신 바와 같이 그것들을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도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성경 기록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기록 해석의 문제입니다. 차대식, 김대용 형제님께서 잘 답변해 주셔서 그대로 올립니다.   ----- 차대식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마태복음 강해설교 74과 43:30 정도에서 설교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195 아래 내용은 강해설교 노트에서 발췌했습니다. 9-10절: 대언자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이 아니다. 슥11:13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과 그가 외친 말씀이 있다. 여기는 후자이다(슥7:7).     ----- 김대용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차대식 형제님께서 너무나 명쾌하게 잘 설명해 주셨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첨언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레미야서에 가서 해당하는 말씀을 찾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스가랴서 7장 7절을 읽어보십시오.   예루살렘과 그것의 사방의 도시들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형통하게 지낼 때에 또 남쪽과 평야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때에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을 너희가 들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이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약 시대 활동했던 대언자들의 모든 대언 중에는 외침으로만 끝난 것이 있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경 기록으로 남겨주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일들도 낱낱이 모두 성경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확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요21:25).   그러므로 마태복음 27장 9~10절의 기록은 예레미야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레미야가 대언자로 활동하던 당시 외쳤던 말씀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스가랴 이전에 예레미야의 대언으로 마태에게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문제가 없는 것을 의심과 불신의 눈으로 보기에 성경이 오류가 있는 책으로 여겨지고 걸림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8장: 본문 문제 2, 마가복음 1장 2절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30   윗글 중간에 보시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9절은 마가복음처럼 “기록된바”(As it is written)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다.’고 진술한다. 성경 기록의 저자인 하나님은 누가 무엇을 기록하고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고 계신다. 간단히 말해 스가랴가 그 구절을 기록했다는 것은 결코 예레미야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스가랴는 이전의 대언자들이 말한 것에 주목하라고 이스라엘에 경고했다(슥7:7). 고대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영이 스가랴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스가랴가 받았던 많은 것은 실제로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또 스가랴 이전의 대언자인 예레미야로부터 받은 것이다.”   도움이 되시기 바라며 봄볕으로 인해 화사하게 피어 미소 짓는 벚꽃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기쁨과 평안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4-07 13:52:0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느 분이 “창25장의 팥죽은 콩 스프인가요?”라고 질문해 주셨습니다.   답: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는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사는 기록이 있습니다.여기서 팥죽은 영어로 ‘pottage of lentiles’입니다.   지금은 lentil이라 하지만 과거에는 lentile이라 하였습니다.네이버에 가서 렌틸이라고 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옵니다.    렌틸 콩은 그 색상에 따라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갈색, 회색, 검은색 등으로 구분되며, 종종 반점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렌틸은 콩 종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콩과(삼하17:28) wheat, and barley, and flour, and parched corn, and beans, and lentiles, and parched pulse,   역시 네이버에서 팥을 쳐 보면 팥은 빨간 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흠정역에서는 콩과 구분하기 위해 렌틸은 다 ‘붉은색 렌틸 콩’의 의미로 팥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역시 네이버 사전에서 죽을 치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국어사전, 죽: 곡식을 오래 끓여 알갱이가 흠씬 무르게 만든 음식.영어사전, 죽 1. porridge, gruel, pap   그래서 우리는 ‘pottage of lentiles’을 팥죽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을 고치지는 말고 원하시면 ‘렌즈 콩 스프’라고 보셔도 됩니다.   참고로 또 다른 콩 종류는 삼하17:18에 있는 것처럼 pulse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먹은 것이 바로 pulse입니다(단1:12).  사전에 가서 보면 펄스는 콩 종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샬롬
2015-04-04 11:16:01 | 관리자
성경 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같은 창조를 두고 마19:4, 막10:6의 창조는 ‘사람의 창조’만 가리킨다고 하면 과연 어느 누가 이에 동의하겠습니까? 이것이 전형적인 극단적 세대주의입니다. 나누면 안 되는 것을 무리하게 나누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그 두 구절의 창조는 세상의 창조지요. 물론 거기의 ‘시작’(beginning) 혹은 ‘처음’ 역시 창1:1의 ‘처음’이지요. 성경대로 믿겠다고 하고 또 성경의 내장 사전대로 해석하겠다고 공언했으면 그리해야 합니다. 라킨, 럭크맨, 낙스의 생각을 집요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이렇게 성경을 비틀면 그런 분을 추종하는 사람들만 결국 골탕 먹습니다. 명백한 것을 명백하게 받아들이며 내 생각이 성경과 대조해 틀리면 과감하게 내다버리는 사람이 성경 신자입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한 이런 사람이 되자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샬롬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87
2015-03-31 17:41:21 | 관리자
현재 흠정역 성경으로 사역하고 계시다는 어떤 분께서 마태복음 19장 4절과 마가복음 10장 6절의 두 구절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해당 구절들의 문맥상 본래 의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는 뜻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분의 주장에 따르면 얼핏 위 구절들은 재창조론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감히 귀한 분께 이렇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위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 글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정독해 주십시오. 제가 윗글에 논란이 된 부분만 아래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막10:6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이 [재창조의 시작이 아니라] 창조의 시작부터 즉 창조가 시작되며 여섯째 날에 지어졌다고 하십니다. 마19:4도 동일합니다.” 자 보십시오.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 글이 말하고자 하는 본 취지는 예수님께서 친히 마 19: 4와 막 10:6에 사람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왜 '재창조'가 아닌 '창조'라고 명시하여 말씀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의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는 물론 맨 첫 사람인 아담과 이브가 창조된 바로 그 시점(시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두 번째 창조(재창조)가 아닌 ‘(단 한 번 있는 첫 번째) 창조의 시작부터’ 5일이 지나고 그 후 여섯 번째 날을 의미합니다(창1;27).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서도 간극 이론과 재창조론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사람의 창조를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사이든 혹은 창조의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 사이의 어디에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과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세상이 창조되고 맨 처음 칠일 동안의 여섯 번째 날은 같은 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윗글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나 문제를 제기하는 그분이나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글을 찬찬히 읽으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동문서답식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답답하기 이를 때가 없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어를 잘 안다는 그분의 주장대로 마 19: 4와 막 10:6 등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부터’만을 의미하고 그래서 재창조가 맞다고 가정해도 왜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다시 창조된 사람, 즉 재창조된 사람을 재창조의 시작부터가 아닌 창조의 시작부터라고 명시하셨나 하는 겁니다. 물론 해당 구절에서는 사람의 창조의 시작만을 의미하기에 굳이 재창조를 거론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한다면 일단은 정말 그런가 생각해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자! 그런데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타당성을 가지려면 복음서 어디에서든 예수님께서 재창조에 대해 직접 언급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 기록이 있어야 말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세상이 다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와 관점을 다시 조정해야 할 만큼 대단히 큰 사안임이 분명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가장 역점을 두어 중요하게 행하신 일이 바로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마4:23,마5:2,마7:29,막6:2,막10:1, 눅5:3,눅13:10.......).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감추어진 모든 신비와 바른 교리에 대해 누구보다 정통하신 말씀 자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과연 럭크맨이나 낙스 목사님보다 지혜가 부족하고 아는 것이 적어 많은 시간과 엄청난 열정을 가르치시는 일에 쏟으셨음에도 재창조에 대해 단 한 번도 거론하고 가르치시지 못한 것일까요? 단순하고 명쾌하게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성경 기록을 살피면 너무도 분명히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재창조에 대해 일절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지금의 사람이 재창조되었다는 것을 명시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실 수 있는 기회인 마 19: 4와 막 10:6 등에서조차 재창조를 전혀 거론하시지 않으시고 지나치셨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과연 이것이 재창조론을 지지하는 정황입니까? 이러한 성경 기록들을 보았을 때 단순한 진리를 믿는 맑은 정신의 성경 신자들은 간극과 재창조론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장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억지로 꿰어 맞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간극과 재창조를 주장하거나 두둔하고 싶은 분들은 제발 지금 즉시 두 손을 지금 바로 가슴에 얻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한국 사람이라면 우선 기본적인 국어 독해능력이 갖추어져야 좋은 성경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원리를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5-03-31 13:59:38 | 김대용
재창조 간극 이론 사실인가, 허구인가?   세미트라와 보우(H. B. Cemitara and G. D. Bouw),이정원 번역, 정동수 편집   (*) 이 글은 세미트라와 보우가 지은 ‘간극 이론’(Gap theories of creation)의 주요 골자를 번역하고 편집한 것입니다. 제대로 편집된 글(각주 포함)을 보시려면 같이 올리는 PDF 파일을 다운받기 바랍니다.  성경을 사용한 간단한 반박은 다음을 참조하기 보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도입   우리는 모두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간의 논쟁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며 그들 간에 불꽃 튀는 법적 전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와 진화의 두 모델을 가르치는 것을 합법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진화론자들은 진화만이 유일한 모델로 제시되고 배우며 믿도록 허용하는 법의 제정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창조론자들의 시도는 출발부터 불리했는데 이는 그들의 주장에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처음부터 창조론 모델만이 법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모델이 되도록 노력했다면 이 시도에서 더 큰 성공을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치열한 논쟁 끝에 중도에서 타협할 수 있는 여지 즉 두 모델 접근법으로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크리스천들과 무신론자들 양쪽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극 이론 즉 ‘파괴-재창조’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자기 입맛대로 성경의 권위와 과학을 혼합하기 원하는 집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몇 가지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 대부분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을 문자 그대로 취하며 많은 수가 여호수아기 10장 13절도 문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되었다’(created)와 같은 단어들에 관한 한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 망설이며 창조 대신에 ‘재창조되었다’(recreated)와 같은 애매모호한 말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성경과 과학이 무리하게 혼합된 일종의 돌연변이라 할 수 있는 간극 이론은 지난 세월 결과적으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성경을 오해하며 진리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성경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확실한 돌연변이 이론 즉 20세기 초반부터 70-80년 동안 크리스천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이론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소수만이 선호하며 믿고 따르는 간극 이론을 다루려고 합니다.    간극 이론이란 무엇인가?   간극 이론 신봉자들은 물론 격렬하게 부인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의 한 형태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창조의 6일은 ‘6개의 임의의 긴 시’간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생물들의 진화를 위한 긴 시간을 임의대로 성경에 삽입합니다. 반면에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진화에 필요한 모든 시간을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다시 시작되기 전인 ‘아담 이전 세상’(pre-Adamic world)으로 역시 자기들의 입맛에 맞추어 임의대로 밀어 넣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어떤 직접적이고 명확한 증거도 없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긴 시간을 성경 기사에 삽입합니다. 이런 점에서 간극 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의 교묘한 변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간극 이론에는 대략 몇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극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간극 이론을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의 간극을 인정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은 문자 그대로 취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도 할 것입니다. 후자 가운데는 20세기 초반 간극 이론을 널리 알린 스코필드(C. I. Scofield)가 있습니다. 스코필드는 창세기 1장, 예레미야 4장, 이사야 14, 24, 45장, 에스겔 28장, 35장에서 스스로 뽑은 단어나 구절들을 조합해서 그것에 근거해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현대 간극 지지자들은 스코필드 모델을 기본 바탕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창세기 6장, 베드로후서 2, 3장, 고린도후서 4장, 마태복음 13장에서 나온 구절들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간극 이론이든 대개는 동일하게 무한대로 긴 시간의 간극이 창세기 1장의 첫 두 절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무한대의 긴 기간이 어디 위치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개의 주요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견해는 그 기간을 성경이 시작되기 전인 창세기 1장 1절 앞에 놓습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교묘하게 표면적으로는 간극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간극이 있습니다. 둘째 견해는 그 기간을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삽입합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창세기 1장 1절이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기간 전에 존재했던 ‘원래 지구’(혹은 원시 지구)에 대해 말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2절은 원래 지구의 멸망을 묘사하며 1장 3절부터는 재창조를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긴 기간의 간극이 있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간극 이론’(Gap theory)이라 불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1절과 2절 사이 가상의 기간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현대 지질학이나 생물학 이론과 맞추기 위해 사람들이 고안한 것입니다. 이러한 ‘간극 이론 출생의 비밀’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수월하고 정확하게 이 돌연변이 이론의 정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의 간극을 어느 지점에 놓든지 간에 간극 이론은 그때 존재했던 세상(지구)이 하나님의 천사들과 사탄의 천사들 간에 있었던 전쟁으로 끝났다고 가정합니다. 그 전쟁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사탄의 천사들을 천국에서 추방하시고 지옥에서 그들을 사슬로 묶은 다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지구의 표면을 멸망시킨 홍수를 보내셔서 그 당시 이상적이고 죄가 없던 세상에 거주하던 모든 짐승들과 사람들 - 혹은 지금의 사람과는 다른 어떤 인류들 - 을 죽이심으로써 끝이 났습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화석의 기록들이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그때의 원래 세상을 멸망시켰던 홍수를 보여 준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진화론자들의 균일론 원리(Uniformitarian principle) 즉 ‘세상과 우주의 모든 것이 균일하게 변하다’는 원리를 적용하면서 화석 기록의 일부나 혹은 전부가 아담 이전의 이상적이던 세상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한대의 시간을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히 어떻게 죽음이 그 세상으로 들어왔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이론에 대해 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스코필드, 라킨(Clararene Larkin), 럭크맨(Peter Ruckman), 낙스(James Knox) 등의 유명한 분들이 이런 이론을 지지하며 국내에도 이들의 영향으로 ‘파괴-재창조’를 성경 해석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역자가 먼저 한 가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재창조 이론과 몇몇 극단적 주장을 제외하고는 스코필드, 라킨, 럭크맨, 낙스 등이 모두 훌륭한 성경 신자들이며 참으로 많은 좋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는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재창조 이론이 인간이 만들어 낸 구시대의 유물로서 성경과 맞지 않음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간극 이론의 역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극 이론이 18세기 초반에 찰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에서 유래되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이 이론은 라이엘(Charles Lyell)의 정치학 논문인 「지질학 원리」(The Principles of Geology)라는 책으로 인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책은 영국의 왕권을 전복시키려고 계획된 책략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팔리(William Paley 1743-1805)의 논쟁에 대항하려고 쓴 책으로 왕권신수설을 찬성하는 자연 철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허턴의 생각을 발전시켜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뒤 지구에서는 과거에도 현재와 같은 자연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동일과정설(균일론)에 입각하여 그때까지의 6,000년 창조설을 대적하며 그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의 부제(副題)는 ‘지구 표면의 과거의 변화를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여러 원인에 의해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책은 다윈이 비글호의 항해 중에 지참했을 만큼 다윈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었습니다. 결국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은 현대 지질학 연구(사실은 현대 진화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신학자들은 라이엘의 진화론적 사고의 교묘한 속임수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분명하게 어떤 과학적 논쟁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간극 이론이 라이엘에 대한 대답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즉 균일론 원리가 기독교를 대적하며 성난 파도같이 몰아닥치자 그 당시 이를 두고 고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과학과의 화해를 위해 간극 이론으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우주의 나이가 약 6,000년 정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의 긴 연대와 타협하려면 성경 기록을 억지로 비틀어 수십만 년 혹은 수십억 년의 기간을 성경 어딘가에 끼어 넣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가장 적게 훼손시키는 방법은 성경이 본래 침묵하고 있는 곳에 그것을 삽입하는 것이었습니다.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생물 진화론을 출판한 뒤 신학자들은 이제 생물학적 진화와도 투쟁해야 했습니다. 대개 그들은 무시하는 방법을 더 좋아했지만, 심하게 압박을 받을 경우에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따란 긴 기간을  창세기 1장의 간극이라는 ‘어떤 특정하지 않은 시간’으로 끼워 맞추곤 하였습니다. 특히 간극 이론은 1909년에 나와 1917년에 개정된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의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약 70년 동안 전 세계 거의 모든 근본주의 성도들의 독점적인 진화론 퇴치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오는 개정판 스코필드 성경은 더 이상 간극 이론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론을 배격하는 특별 창조를 먼저 말한 뒤 간극 이론을 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6   사실 간극 이론은 특히 과학을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기원에 대한 성경 기록이 권위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학을 수용해야 한다고 느낀 사람들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간극 이론과 지질주상도 원래 간극 이론의 임무는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증거로 제시하는 지질주상도((geologic column)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질주상도는 진화론자들이 추정해서 만든 가설의 암석층 즉 수십억 년 이상 쌓였던 암석층에 대한 가설적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질주상도: 어떤 지역의 지층에 대하여 퇴적암과 화산암, 관입암 등이 겹쳐진 차례, 즉 층서를 여러 가지 기호와 색으로 표시한 그래프를 말한다. 지역 전체의 층서를 나타내는 것을 종합 주상도라고 하는데, 보통은 수직의 직사각형에 오래된 지층부터 새로운 지층의 순서대로 지층을 겹쳐 그려서, 각 지층의 시대나 암질의 특징, 화석의 생성위치, 지형의 접촉면의 위치 등을 나타낸다. 지질조사를 할 때 인접지역의 지층과 비교하여, 같은 지층을 발견하거나 같은 시대의 지층의 두께나 암질의 변화를 조사하는 데 유용하다. 사실 진화론자들의 지질주상도 가설이 주장하는 순서대로 암석이 존재하는 곳은 지구상에서 오직 두 지역뿐이며 그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암석층의 순서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완성한 이 엉터리 지질주상도 하나로 이후에 발견되는 모든 화석은 그것에 대입시켜 연대를 자동 결정해 버립니다. 어떤 화석이 언제 것이냐 하면 지질주상도에 맞춰 보라고 하고, 지질 주상도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면 거기서 그 화석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순환논리의 맹점을 지녔지만 진화론자들에게는 아주 편리한 도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지질주상도가 간극 이론과 합치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간극 이론에서는 ‘화석의 증거’ 즉 ‘화석의 기록’을 아담 이전 지구에서 진행된 과정들이나 하나님의 천사들과 사탄의 반역하는 천사들 간에 일어났던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주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첫째 문제는, 화석들이 지금의 세상 이전에 존재하던 세상을 파괴시킨 대홍수에 다 묻히게 되었다면 왜 도대체 화석들이 지금도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석들이 아담 이전의 세상이 존재하던 기간에 지층에 쌓였다면 그 세상을 파멸시킨 홍수가 그렇게 큰 손상을 입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창1:2의 ‘형태가 없다’(formless)는 단어를 지금 세상 이전의 홍수를 통한 결과로 땅(지구)이 형태가 없게 되었다는 데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지구의 형태가 없어질 정도의 홍수를 통한 대격변이 실제 있었다면 그때 존재했던 동식물들이 죽어 화석이 되어 지층에 쌓이고 오늘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화석들이 그 전쟁을 끝나게 한 홍수가 진행되는 동안 형성되었고 그 전쟁이 창세기 1장 2절이 말하는 것 같이 지구를 ‘형태가 없게’ 만들었다면 암석들에 있는 화석들도 다 그 형태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존재하는 화석들은 다 형태가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화석들이 현재 땅의 바로 표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수백 미터, 수천 미터 밑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간극 이론이 역사의 진실이라면 지구는 얼마나 깊은 밑 부분까지 형태가 없고 비어 있게 되었을까요? 만일 지구 표면이 밑으로 수천 미터까지 형태가 없이 비게 되었다면, 지구가 다시 굳어지면서 화석들이 암석에 묻힐 때까지 그 화석들이 허공에 둥둥 떠 있거나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이론의 문제는 지구가 셋째 날이 되기까지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점 때문에 발생합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암석들을 텅 빈 허공에 매달려 있게 했을까요? 그러한 무엇이 없었다면 - 당연히 성경은 그런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 당연히 암석들은 가라앉고 화석들의 모체인 동식물의 시체는 위로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화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 문제는 노아 홍수에 대한 증거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지구 표면에서 두 개의 퇴적층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첫째 것은 아담 창조 이전 세상의 대파괴와 첫째 홍수에서 나온 것으로 당연히 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둘째 것은 그것보다는 덜 격렬했던 둘째 홍수 즉 노아 홍수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화석 기록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화석 기록도 두 개의 홍수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성경에서 명료하게 언급된 유일한 홍수이기 때문에 오늘날 발견되는 화석의 증거는 당연히 두 개의 홍수가 아니라 하나의 홍수를 지지합니다.  마지막으로 간극 이론이 화석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음을 인식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화론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친히 화석들을 암석 속에 만드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과학과 성경 기록 둘 다에 어긋납니다. 그 이유는 창조 세상이 합리적인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사1:18) 창조 세상은 합리적이라고 성경 기록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스코필드는 화석 기록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로 간극 이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석들을 원시 창조(지금 세상 이전의 창조)로 밀어버리십시오. 그러면 과학과 창세기 우주 창조와의 어떤 갈등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분자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 이론과 간극 이론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여전히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화석의 여러 층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지질주상도에 있는 한 층은 그 충에서 발견된 화석 종류에 의해 결정되는 그것 자체의 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어떤 화석이 더 단순하거나 더 원시적인 것으로 판정되면 그것은 ‘더 오래된 화석’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것은 덜 진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뼈가 없는 무척추동물들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다음으로 어류가 나오고 진화가 되면서 양서류, 파충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진화된 포유류 화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의 이런 연대 추정은 곧장 스코필드의 주장과 부합됩니다. 따라서 간극 이론은 스스로 진화를 비난하면서도 지질주상도와 그것이 지지하는 시대들을 받아들이므로 사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초자연적인 파괴와 대격변을 수반하는 간극이 성경과 진화론자들의 지질주상도를 화해시킨다고 해도 현재 지질학자들은 그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전 세계적인 재난이 지질 주상도를 만드는 암석과 화석들을 형성했다는 견해에 반대를 표명합니다. 그런 대격변은 오늘날까지도 지질학에서 신성불가침의 원리로 알려진 균일론 원리(홍수 격변론에 반대하는 균일 변화 원리)에 직접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반역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 때문에 화석들이 형성되었다면 현대 지질학의 견해와는 반대로 지질주상도는 급속도로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파멸-재창조’의 간극 이론은 우리가 오늘날 바위나 화석들에서 보는 것에 대해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고 입증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듯이 지구가 창세기 1장 2절에서 형태가 없게 되었다면 암석층들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암석들에는 그 어떤 (온전한) 화석들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형태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소필드(Jack Sofield)는 간극 이론을 ‘자살 개념’이라고 부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질학적 시대 이전이나 이후에 루시퍼를 벌하기 위해 사용된 징벌/재앙에 관해 간극 이론이 무어라고 논리를 펴든지 간에 간극은 자기 부정적입니다. 즉 그 이론을 만들어낸 바로 그 개념 자체가 그것에 의해 소멸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살 개념’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논리 면에서의 이러한 어려움과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딜레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극 이론이 성경 말씀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이성적인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간극 이론과 넷째 날의 창조 스코필드는 세 가지 창조 행위를 허용합니다. (1) 하늘들과 땅의 창조, (2) 동물 생명의 창조, (3) 인간의 창조. 즉 그는 첫째 창조는 연대가 없는 무한대의 시간 속 과거로 넘겨버렸고, 나머지 두 개는 자기가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된다고 추정한 지구(땅)의 창조로 넘겼습니다. 그는 출애굽기 20장 11절이 하나님께서 창조의 6일 동안 하늘들과 땅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빛, 궁창, 해, 달, 별들과 식물들이 이전 세상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그는 그때의 파괴가 완벽해서 어떤 빛도 지구의 표면에 다다를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수증기층이 지구를 덮어 태양이나 달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으며, 넷째 날이 될 때까지 그 빛들이 지구를 관통하지 못하게 했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실 넷째 날에 아무것도 창조하시거나 만들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제기되는 질문들 성경 기록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임의대로 화석들이 간극이나 무한대의 긴 기간 동안 형성되었다고 자동으로 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식물, 동물, 사람은 셋째 날, 다섯째 날, 그리고 여섯째 날이 되어서야 창조되었으며 그전에는 창조되지 않았음을 창세기 1장이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시대 퇴적암들 내의 화석들이 가상의 ‘첫째 창조’ 즉 아담 이전의 창조 세상에서 살던 모든 생명 형태들의 화석들이 맞는다면 이것은 과거 무한대의 시간에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비극이 지속하였음을 증언해 줍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 과연 그 세상에 사망이 들어오게 한 원인 제공자 즉 첫째 창조 세상에서 과연 처음 죄를 지은 존재는 누구일까요? 루시퍼의 반역이 심판의 징벌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왜 수억 년의 시간이 지나갔을까요? 그렇다면 그 징벌도 루시퍼의 반역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름도 알지 못하고 성경에 기록도 없는 그 첫째 죄인 때문인가요? 그러면 성경의 첫 사람 아담은 죽음이 불러온 화석 무덤 위를 걸어 다녔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 아담에 의해 죄가 임하고 그 결과 사람과 창조 세상에 사망이 임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또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롬8:22)그러므로 아담 이전에 심판으로 인해 사망이 임하고 화석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간극 이론과 성경 기록들 이제부터 우리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애용하는 몇 구절들을 설명하려고 합니다.이런 구절들을 설명하기 전에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보통 잘못 사용하고 있는 두 개의 영어 단어에 대해 잠시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세상’(world)이란 단어는 지난 200년 동안 의미 면에서 크게 변했습니다. 1933년 이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대한 첫째 정의는 ‘인간의 존재: 이것의 기간’(human existence; a period of this)입니다. 둘째 정의는 ‘지구 또는 그것의 영역: 우주 또는 그것의 일부분’입니다. 셋째 정의 즉 마지막 정의는 ‘지구의 거주민들 또는 그들의 한 부분’입니다. 1933년 판을 보면 첫째 정의는 네 단을 차지하고, 둘째 정의는 세 단과 삼분의 이를 차지하며, 셋째 정의는 여덟 단을 차지합니다. 그것은 1933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첫째 정의가 ‘지구’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 사전들이 더 이상 한 단어가 의미하는 여러 가지의 뜻 전부를 말하지 않고 가장 보편적인 용례만을 기술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첫째 정의는 지표면에 살던 사람들 혹은 사람들의 시대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이제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성경 기록에서 ‘세상’의 첫 용례는 사무엘상 2장 8절에 나옵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에서 일으키시며 거지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통치자들 가운데 앉게 하시고 또 그들이 영광의 왕좌를 상속받게 하시나니 이는 땅의 기둥들이 주의 것이요, 또 그분께서 그것들 위에 세상을 세우셨기 때문이라. 분명히 ‘세상’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땅의 표면 즉 땅의 기둥들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 기록이 세상에 대한 정의를 땅의 사람과 창조 세계로 그 뜻을 확대시키지만 세상은 결코 땅과 하늘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의 정의에 의하면 ‘아담 이전 세상’을 주장하는 것은 곧 아담 이전에 땅에 사람이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땅 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아담 이전의 ‘세상’이 아니라 ‘땅’(지구)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간극 이론은 성경적 세상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replenish’라는 동사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신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의 원래 의미는 ‘완전히 혹은 충만하게 사물, 동물 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입니다. 덧붙이자면 replenish에 대한 이 정의는 1533-1660년 즉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의 언어생활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의미였습니다. 아담 이전 세상 옹호자들이 1700년대 후반에 이 말을 ‘다시 채우다’(refill)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replenish라는 단어는 ‘다시 채우다’라는 단어의 동의어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Cmn2/View/4CX?page=2 창세기 1장 28절의 경우 그 배경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해, 사람 전에 창조하셨던 환경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9장 1절에서 그 단어의 같은 용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그곳에서도 식물들은, 창세기 8장 11절에서 비둘기가 되돌아 올 때 가지고 온 올리브 나무 잎사귀가 입증해 주는 것처럼, 방주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 준비가 되어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땅을 충만히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창1:28과 9:1을 보면 replenish가 거주자들을 위해 준비된 환경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간극 지지자들은 결코 그 단어를 아담 이전 지구의 창조를 위한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어와 히브리어 자체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간극 이론에 사용된 증거 본문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의 편향된 애완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묘하게 왜곡해서 해석합니다. 그리하는 이유는 그의 애완 이론을 지지해 주는 명백한 성경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애완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심지어 성경 본문이 잘못되었다거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이론을 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 역시 자기들의 애완 이론을 위해 창세기 1장 전체의 번역 혹은 특별히 창세기 1장 1-2절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1절을 봅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언어학자, 인류학자, 그리고 간극 이론 지지자인 커스탄스(Arthur Custance)는 이 절에 대해 “이 절은 당연히 지금처럼 ‘처음에’로 번역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커스탄스는 히브리어 모음 표시가 ‘원어’에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커스탄스는 적절한 번역은 ‘최초로’(In first) 또는 ‘우선은’(To begin with)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초기 번역이나 권위도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현재 본문 즉 ‘처음에’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권위는 없다. 여기서 핵심은 창세기 1장 1-2절에 대한 비평이 하나의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could be’와 ‘may be’를 주로 사용하며 26페이지까지 자기 의견을 개진한 뒤 커스탄스는 조심스럽게 창세기 1장 1-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전 상태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완벽하게 하셨다. 그러나 땅은 폐허가 되었고 황량해 졌으며 심판의 어둠이 그 표면 위에 있었다. 자신의 논문을 통해 커스탄스는 성경 사본과 과거 문헌에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2절에서 번역 오류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경 기록의 보존 교리(시12:7)가 내포하고 있는 연속성을 만족하게 할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기에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 봐브(vau)성경 기록에 아담 이전 세상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세기 1장 2절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접속사 ‘봐브’(vau)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을 합니다. 일단 여기서 봐브는 접속사이거나 이접 접속사이며 따라서 ‘그리고’ 혹은 ‘그러나’를 의미합니다. 봐브는 히브리 알파벳에서 여섯째 글자이며 구약성경에서 약 28,000번 나오는데 그중에서 25,000번은 접속사인 ‘그리고’로, 3,000번은 이접 접속사인 ‘그러나’로 번역됩니다. 성경의 이런 용례를 보면 봐브는 이접 접속사보다는 접속사로 8배나 넘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논문을 쓰면서 우리가 자문을 구한 대다수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봐브는 ‘그러나’가 아니라 ‘그리고’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오리겐의 부패한 ‘70인역’(Septuagint)을 제외한 모든 고대 번역도 이와 같습니다. 2절 시작 부분을 ‘그러나’라고 번역한 70인역(LXX)은 오리겐이 좋아했던 ‘이전 세상 모델’(pre-world model)을 따라 그렇게 번역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 기록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그리스 신화를 반영하여 이 단어를 ‘그러나’로 번역하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 Was or Became?창세기 1장 2절의 첫 글자가 ‘그리고’냐 ‘그러나’냐 하는 논쟁은 그 절의 넷째 단어인 ‘was’와 비교하면 그리 영향이 크지 않습니다.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대부분의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이것을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로 읽으려 하지 않고 여기의 ‘was’를 ‘became’으로 바꾸고는 “그러나 땅은 형태가 없게 되고 비게 되었다”로 읽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태를 나타내는 was를 사용하면서 결코 땅의 상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믿으려면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로 믿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 ‘창조하였다’(Created)와 ‘만들었다’(Made)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여러 논문을 써서 히브리 단어 바라(bara)는 무에서부터 유를 창조한다는 의미이고, 히브리어 아사(asah)는 ‘만들다’ 또는 ‘형성하다’는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두 개의 다른 단어들이며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창세기 1장 26절에서 말씀하시고 다음 절에서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한 행위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어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들을 지적해서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꼭 지적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지구를 만들기 위해 이미 파괴된 이전 땅의 물질을 사용하셨다면 하늘과 땅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가 아니고 기존에 있던 물질로부터 나온 개혁이어야 하고 그래서 창세기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모두가 ‘창조하다’ 대신 ‘만들다’로 기술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 앞에 간극을 두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1절에 ‘창조하셨다’(created)를 사용하는 것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부합하려면 1절은 ‘만드셨다’(made)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또 1절과 2절 사이에 간극을 두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창세기 1장 3절 이후에 나오는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모두 ‘만들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 전체가 이전에 창조된 것에 대한 재창조나 회복을 설명한다면 왜 성경은 ‘create’와 ‘make’를 다 사용할까요? 계시록 10장 6절은 ‘창조하셨다’라는 단어로 창세기 1장 전체의 창조를 총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 곧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을 두고 맹세하기를 더 이상 시간이 있지 아니하려니와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탁월한 정신은 ‘원본’은 말할 것도 없고 킹제임스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개혁 성경 번역에서 create와 make의 ‘오류들’을 수정하려는 열정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정이 커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장 - 해와 달과 별들그다음으로 해와 달과 별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처럼 이러한 천체들이 아담 이전 지구의 멸망 이전에 이미 창조되어 존재했다고 가정한다면 당연히 그것들은 넷째 날에 창조되지도, 만들어지지도, 형성되지도 않았어야 합니다(창1:14-19). 그런데 창세기 본문은 이런 천체들이 넷째 날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용되지는 않았는데 이 말은 25절의 짐승과 26절의 사람에게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짐승과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을까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물로 된 덮개나 구름이 땅의 표면으로부터 이러한 천체들을 숨겼으며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그 장애물을 제거하셨다는 황당한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둘째 날의 궁창은 대기권의 재창조를 말하며, 흐릿하게 보이도록 만든 그 장애물은 궁창 위에 있는 물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창조부터 홍수까지 수증기나 얼음 덮개가 계속해서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그 덮개가 넷째 날에 투명하게 되거나 반투명하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간단명료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천체들을 하늘의 궁창 위가 아니라 궁창 속에 두셨다”(17절)는 점입니다. 또한 간극 이론을 주장하려면 ‘드러내셨다’를 포함하도록 ‘만드셨다’(Made)는 말의 의미를 수정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Without Form, and Void) 창세기 1장 2절에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라는 말은(히브리어 ‘토후(tohuw)와 ’보우‘(bohuw)) 성경 기록의 다른 두 곳에서도 나옵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이사야 24장 1절에 이 말이 섞여 나오지만 히브리어 토후와 보우는 이곳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보라, 주께서 땅을 텅 비게 하시며 피폐하게 하시고 뒤집어엎으시며 땅의 거주민들을 널리 흩으시리니 대신에 ‘바카크’(baqaq)와 ‘바라크’(balaq)라는 히브리어가 이사야 24장 1절에서는 각각 ‘텅 비다’와 ‘피폐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사야 24장 1절은 미래 사건이지 아담 이전 땅에 대한 회상 장면이 아닙니다. 또한 창세기 1장 2절의 ‘토후’와 ‘바후’는 예레미야 4장 23절과 이사야 34장 11절에 함께 나옵니다. 내가 땅을 보니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하늘들을 보니 그것들에는 빛이 없었고(렘4:23)다만 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그것을 차지하며 또 올빼미와 까마귀가 그것 안에 거하리니 그분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돌들을 팽팽히 드리우실 터인즉(사34:11) 이 둘 중에서 예레미야 4장 23절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로 번역되었고 이사야서의 구절은 ‘혼란’과 ‘공허’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만 제외하고 다른 두 구절이 심판과 파멸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창세기 1장 2절도 심판의 결과를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맥락에서 볼 때 다른 두 절들이 미래 일들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 4장 23절이 창세기 1장 2절과 가장 비슷하게 번역되었지만 예레미야서에서 표현된 파괴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파괴가 아닙니다. 간극 이론이 말하는 창세기의 파괴는 예레미야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홍수(큰 물)를 포함하며 이 물은 아담 이전의 사람들이 거주했던 땅과 모든 도시들을 완전히 소멸시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4장 23절은 이사야 24장의 사건들처럼 미래에 있을 심판을 말합니다. 즉 거기의 상황은 오래전 과거에 발생했던 창세기 이전의 어떤 기록이라기보다는 계시록에서 묘사된 미래의 사건들입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서의 심판의 대상들은 이스라엘과 에돔이며, 온 세상이나 특히 아담 이전의 종족은 더욱 아닙니다. 그 책들에서 언급된 심판들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장소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그 땅(the land) 즉 이스라엘 땅의 생존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27절에서 “내가 완전히 끝을 내지는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이러한 절들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창세기 1장 2절과 이런 구절들을 연관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또한 이사야 45장 18절로부터 또 하나의 불필요한 논쟁을 끄집어냅니다. 하늘들을 창조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며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주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간극 지지자들은 여기서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이 이전 세상을 가리키며 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 1장 2절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처럼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18절의 ‘조성하였다’(formed)는 단어를 무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조성하였다’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절을 가리키지 않고 창세기 1장 9-13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그 단어는 첫째 날에 지구(땅)가 형성된 것을 가리키지 않고 셋째 날에 마른 육지와 식물들이 형성된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그 성경 구절 자체가 바로 그것을 의도한다는 점입니다. 즉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즉 헛되이 땅을 창조하지 않으셨고 완성된 그 땅(지구)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거주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앞뒤 문맥상 그 거주자는 아담 이전의 어떤 종족이 아니라 사람 더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생성 세대들(generations)국내의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창세기 2장 4-5절을 가지고 논리를 폅니다.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영어로는 이 부분의 4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이들의 요지는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그것들의 생성 세대들의 ‘세대들’이 복수로 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이 창1:1과 창2:1에 의거하여 두 번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가서 ‘generations’를 검색해 보면 성경에 총 118회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118회는 다 두 번 생성된 것을 뜻할까요? 창2:4 다음에는 5:1이 나옵니다.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시되 여기도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세대들’이라는 복수가 나오므로 아담도 두 번 창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말로 세대라고 번역된 단어는 ‘생성되다’(generate)에서 나온 ‘생성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세대들은 그에게서 생성된 후대 자손을 말하며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은 하늘들과 땅의 생성된 것들(products)을 뜻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세대’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성 세대’라고 하여 뜻이 덜 명확하게 되어 있어 조금 유감입니다. 나머지 117회도 살펴보면 다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를 가지고 재창조를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구차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5절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비유로 내 입을 열어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의 주제는 세상의 창건(기초를 놓음)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을 여기의 그리스어 ‘카타볼레’(katabole)의 정확한 번역은 ‘세상의 창건’ 즉 ‘세상의 기초를 놓는 것’(foundation of the world)이 아니라 ‘세상을 아래로 내던지는 것’(casting down of the world)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카타볼레는 명사로 단 한 번도 ‘아래로 내던지는 것’이란 뜻으로 번역된 적이 없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1번 나오는데 그중 열 번은 ‘창건’ 즉 ‘기초를 놓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세상의 창건 즉 기초들을 놓은 것이 아담 이전 세상의 파괴를 말한다면 누가복음 11장 50-51절의 의미를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1장 50-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세상의 창건 이후로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이 세대’는 특별히 그분의 이적과 표적들을 보고 그분을 거절한 세대, 즉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만약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주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의 죄를 포함한 아담 이전 세상의 죄들 역시 그 세대에게 요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 문맥상 황당하고도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이것은 다소 미묘한 논쟁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이 구절이 해, 달, 별들의 빛이 넷째 날에 드러난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또한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하나님의 빛으로서 영원하며 따라서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빛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를 해결해 줍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죄를 지은 아담 이전의 세상이 어둠 속에 삼켜졌고 새로운 세상이 빛에 노출되었듯이 본성에 속한 자연인의 아담에게 물려받은 부패한 속성은 복음의 빛이 들어오기까지 어둠에 갇혀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첫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그분의 빛과 같은 빛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빛은 너무 밝아서 순식간에 우리를 소멸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대신에 그런 문제를 피할 정도의 약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오직 영적인 몸만이 하나님 자신의 순수한 빛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발하고 있는 빛은 영적으로 인식되며 7절이 보여 주듯이 사람의 몸이라는 질그릇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입니다.’ 이 주제는 창세기 1장 2절의 어둠이 악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상황을 묘사한다는 일부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둠을 만드셨고(시104:20) 이 어둠 역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1:31). 주께서 어둠을 만드사 밤이 되게 하시오니 숲의 모든 짐승이 밤에 기어 나오나이다(시104:20).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창1:31). 여기에서 전체 논쟁의 핵심은 앞뒤 문맥을 살펴보았을 때 창세기의 첫 절들과 상관이 전혀 없는 구절들을 창세기의 첫 절들과 억지로 연결하여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과 거인들우리가 지금까지 검증한 모든 것들은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평을 포함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변개시키고는 순수한 말씀이 아닌 자신의 견해를 본문이라고 읽는 실수를 범합니다. 성경 기록의 무오성과 하나님의 섭리에 말씀 보존을 믿는 사람들 즉 시편 12장 7절에서처럼 그분의 말씀들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비평적 논평들은 오리의 등에 있는 물처럼 붙어있지 못하고 곧바로 떨어져 나갑니다. 하나님 말씀의 보존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비평적 주제들이 그들의 믿음을 둔하게 하고 영을 화나게 할 뿐입니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7). 이제 우리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애용하는 창세기 6장과 베드로후서 2장과 3장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4-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 맑은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5절에서 언급된 ‘옛 세상’이 ‘노아의 홍수 이전 세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세상’은 인간의 영역을 말하며 이것은 ‘세상’이라는 단어에 관한 성경의 첫째 용례로부터 나온 정의입니다. 또한 죄를 지은 천사들은 그 홍수 즉 노아의 홍수 전까지는 아직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유다서 6절에서 말하고 있는 천사들과 같은 천사들입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욥기 38장 7절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의 모퉁이 돌을 놓을 때 즉 창조의 셋째 날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경건한 셋의 후예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셋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130살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창5:3). 따라서 이 존재들은 어떤 영적인 창조물 즉 천사들입니다. 유다서 6절의 유일한 짝은 창세기 6장 2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을 섬기도록 창조된 천사들이며 그들이 긴밀하게 연합하여 탐욕으로 유혹을 받아 자신들의 처음 처소 즉 근무지를 떠났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성경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2절과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그들이 저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과거에 명성 있는 강력한 자들 즉 거인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 거인들이 4절의 아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우리는 이스라엘이 골리앗 같은 거인들로 인해 직면한 문제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역사 역시 그 땅에 살던 거인들의 땅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참고 구절은 베드로후서 3장 5-7절입니다. 5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6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여 간직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지구의 파괴와 그것에 따른 재창조 전 지구(땅)의 상태를 언급하기 위해 6절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드로후서 3장 5절은 창세기 1장 9절절에 나오는 지구의 상태를 설명하지 결코 창세기 1장 2절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 아래 물들은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육지는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9). 창세기 1장 9절 이후의 상황은 노아의 홍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 ‘옛 세상’이라고 불린 그때는 노아의 홍수 이전 즉 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이 살던 때의 세상을 말하며 그들은 노아의 때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5절에서 언급된 ‘하늘들’이 6절에서 멸망한 것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6절에서는 세상 즉 사람들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래서 5절에 기록된 하늘들은 7절에서 언급된 대로 재창조됨 없이 이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그 하늘들 역시 멸망되었다고 가정하고는 노아의 홍수 때에 하늘들의 멸망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6절의 물의 넘침은 노아의 홍수를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옛 하늘들 역시 파괴되었다는 간극 이론의 가정에서 출발한 이런 추정은 분명히 성경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여기서 하늘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은 대기권의 첫째 하늘과 우주 공간의 둘째 하늘을 말합니다. 따라서 간극 이론에 따르자면 그때의 창1:1과 1:2의 홍수는 둘째 하늘인 우주 공간도 파괴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지구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주장들의 신빙성을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것들은 성경은 물론이요, 인간의 과학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허무한 이론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이 나오던 1850년경에 결국 과학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무능함과 창조 과학에 대한 소양 부족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이 진화론의 시간들을 맞추기 위해 간극 이론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전혀 뜻밖에도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수렁에 빠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보통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간극 이론의 근거로 내세우는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이 앞뒤 문맥 보았을 때 미래의 심판을 언급하는 구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들을 결정적으로 변개했다고 봅니다. 또한 간극 이론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들을 성경의 문맥 밖에서 임의대로 해석하고 제시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아담 이전 세상의 파멸과 그 이후의 재건 이론은 성경과 심지어 인간의 과학, 그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역사의 진실을 가리는 인간의 허망한 산물일 뿐입니다.마지막으로 우리는 재창조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코필드, 라킨, 럭크맨,낙스 등의 훌륭한 성경 신자들의 재창조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재창조등의 특이 사항을 제외한 이분들의 글의 대부분은 나무랄 데 없이 좋습니다. 또한우리는 이 주제가 성경 신자들 간의 교제를 막는 심각한 이단 교리는 아니라고 믿습니다.따라서 성경 신자들이 이 문제로 심각하게 분열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 참고 링크(재창조 반박 글 모음) -------------- 럭크맨의 극단적 세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a
2015-03-31 12:07:41 | 관리자
참고로 게인스 존슨의 다소 과한 주장은 재창조론을 믿는 분들도 다 받아들이지 않는데, 특히 지질학적인 부분에서 대개의 성경 신자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재창조론 자체도 유신론적 진화론과 일치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과학적 주장보다는 성경의 단 한 구절이라도 놓치고 무시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취지임을 한 회원님이 피력하셨으며, 저 역시 글에서 여러 번 썼듯이 그런 오해와 선입견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2015-03-27 15:59:11 | 김재욱